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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10-01)

 


잘 사는 삶에 대한 지혜

잠언 10장 1-17절


 

서점에 가보면 삶의 기술을 가르쳐주는 다양한 실용서적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웰빙’이 우리 사대의 화도가 된 지도 꽤 오래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잘사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는 듯합니다. 그저 잘 먹고 편히 사는 것이 ‘웰빙’입니까? 잠언은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줍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의인과 악인 혹은 지혜자와 우매자를 구분 짓는 기준 중 하나입니다. 입으로 지혜와 지식의 말을 전하는 사람은 안전함과 축복의 삶을 살며, 다른 사람을 치유하고 살리는 생명의 샘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입에 미련함과 폭력을 가득 채운 자는 채찍과 가난의 고통을 겪으며 결국 패망에 이릅니다.

 

지혜자의 입술(1-17)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돌보시고 악인을 벌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과 악인, 불의와 공의를 눈여겨보시며, 공의를 지켜가십니다. 혹 불의의 재물로 자신의 미래와 안전을 보장받으려 하지는 않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필요를 채우시고 책임져주시는 사실을 믿고 힘써 이를 행해야 합니다.

 

1솔로몬의 잠언이라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 2불의의 재물은 무익하여도 공의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 3여호와께서 의인의 영혼은 주리지 않게 하시나 악인의 소욕은 물리치시느니라 4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5여름에 거두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나 추수 때에 자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이니라 6의인의 머리에는 복이 임하나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 7의인을 기념할 때에는 칭찬하거니와 악인의 이름은 썩게 되느니라 8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계명을 받거니와 입이 미련한 자는 멸망하리라 9바른 길로 행하는 자는 걸음이 평안하려니와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드러나리라 10눈짓하는 자는 근심을 끼치고 입이 미련한 자는 멸망하느니라 11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라도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 12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13명철한 자의 입술에는 지혜가 있어도 지혜 없는 자의 등을 위하여는 채찍이 있느니라 14지혜로운 자는 지식을 간직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입은 멸망에 가까우니라 15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요 가난한 자의 궁핍은 그의 멸망이니라 16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르고 악인의 소득은 죄에 이르느니라 17훈계를 지키는 자는 생명 길로 행하여도 징계를 버리는 자는 그릇 가느니라(1-17)

 

지혜로운 자는 마음에 훈계를 간직하며 말과 행동으로 선과 사랑을 베푸는 자입니다. 그러나 미련한 자는 말과 행동으로 미련함과 폭력을 나타내며 자신과 다른 이에게 고통을 줍니다.

 

(1) 표제 및 서론(1)

잠언 1-9장에는 주로 내 아들아로 시작되는 10절 내외의 권면을 담은 강연이 모여 있습니다. 반면, 10-30장에는 대부분 두 문장의 짧은 금언(=경구)이 나타납니다. 문맥과 내용 및 주제를 살펴보면, 1-9장의 강연들은 특정한 문맥 안에서 주제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주제는 대부분 여호와 경외와 관련이 있으며, 내용으로는 아버지의 훈계를 비롯하여 지혜의 초청, 지혜의 여인과 음녀의 비교가 자주 언급됩니다. 이에 반해, 10-30장의 금언들은 대부분 특정한 문맥이 없고 독립적이며 반의적이거나 비교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금언은 지혜자와 우매자(또는 의인과 악인)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배열에 있어서는 전체적으로 공통된 규칙이 있지는 않지만 어떤 한 단어나 주제 등의 의미 또는 공통된 형식을 토대로 소수의 금언들이 모여있는 형태가 여기저기 나타납니다.

한편, 잠언 10-30장 중 10:1-22:16은 ‘솔로몬의 잠언’이라는 표제(10:1) 아래 한 단락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내용상 10-15장, 16-22장의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먼저 10-15장에서는 지혜자와 우매자에 대한 대조적인 내용의 금언들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말(언어)에 대한 경고가 빈번하게 나옵니다. 16-22장에서는 궁이나 사회생활에 있어서 지혜자와 우매자를 비교하는 금언들이 대부분이며, 계획과 실현, 정의, 사회성 등의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제들은 가정과 사회와 국가라는 배경 안에서 지식적, 경기 사회적, 도덕적, 영적 교훈을 제공합니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서, 10장 또는 10-22장 단락의 첫 금언은 지혜로운 아들이 되어 부모에게 기쁨이 되라는 내용입니다. 자녀가 지혜롭고 의로운 삶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고 그런 삶을 실천하면 부모에게 기쁨을 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권고는 잠언 10-31장의 다양한 구절에서 나타납니다(15:20: 17:21,25; 19:13; 23:24–25; 27:11).

 

(2) 부와 가난(2-5)

‘솔로몬의 잠언’이란 표제 하에 가장 먼저 소개하는 주제는 부와 가난의 주제입니다. 이 주제는 재물과 의리, 의인과 악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처사, 게으름과 부지런함과 관련하여 설명되었습니다. 즉, 이 주제는 경제적, 사회적, 신앙적, 도덕적인 면에서 다루어졌습니다. 이 단락이 주는 교훈은 먼저, 악한 수단을 써서 얻은 재물은 죽음 앞에서 무익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재물은 사라지는 안개와 같고(21:6),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 마땅합니다(1:19; 19:16). 오직 의로움(‘의리’로 번역됨)만이 온갖 고난 속에서도 우리를 구해줍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종국에 의인과 악인에게 마땅한 상과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의인이 굶주리지 않고 죽음에서도 건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공급과 보살핌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인의 탐욕은 들어주지 않고 좌절시키십니다. 셋째, 근면하고 성실하고 장래를 대비해야 부하게 되며, 이런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잠언에서 종종 게으름과 부지런함을 가난과 부로 직결시키는데 그 이유는 근면성을 함양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부나 가난이 그 사람의 근면과 성실함 또는 그가 지혜자인지 우매자인지를 측정하는 절대 기준은 아닙니다. 이와 같은 세 가지 교훈을 깨닫고 행하는 자는 지혜로우며, 1절에 언급되었듯이 이런 자식이 부모에게 기쁨이 될 것입니다.

 

(3) 의인의 언어와 악인의 언어(6-14)

위에서 언급했듯이 10-15장에서 빈번히 논의되는 주제는 ‘언어’입니다. 10장에서도 6-14절과 18-21절에 입, 입술. 혀 등의 단어가 등장하여 언어와 관련된 금언을 제시합니다. 언어생활을 통해 지혜자와 우매자, 악인과 의인이 구별됩니다. 먼저, 6절과 7절은 ‘의인’과 ‘악인’이란 단어뿐만 아니라 축복(각각 ‘복’과 ‘칭찬’으로 번역됨)이 공통으로 나와 서로 연결됩니다. 이 두 구절을 종합하면 의인은 사람들로부터 축복의 말을 듣지만, 악인은 입에 폭력과 저주의 말을 담고 있으므로 사람들로부터 저주의 말을 듣는다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8,10,13,14절은 공통적으로, 입에 지혜와 지식을 간직한 자와 입이 미련한 자들을 대조합니다. 먼저, 이 구절들은 입이 미련한 자가 그의 미련한 말 때문에 채찍과 멸망을 자초한다고 공통으로 말합니다. 특히, 10절은 입과 더불어 눈을 추가하며 악인의 행악이 개인뿐 아니라 사회에 미치는 영향까지도 설명합니다. 공모자에게 눈짓을 보내어 은밀하게 악한 계획을 주고받거나(6:13; 16:30) 입으로 미련한 말을 전달하는 미련한 자의 행동은 다른 이에게 근심을 끼치고 본인에게 멸망을 초래할 뿐입니다. 반면, 이들과 대조를 이루는 지혜로운 자는 8, 13, 14절에서 공통적으로 ‘명령’, ‘지혜’, ‘지식’을 마음과 입술에 가까이 두는 자로 묘사됩니다.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다른 이의 명령을 받아들여 더 지혜로워지고, 지식을 소중히 간직하고 지혜로운 말을 하므로 멸망에서 멉니다. 특히, 이 지혜자가 간직하는 ‘지식’은 1-9장에서 여호와 경외나 여호와를 아는 지식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설명되었습니다(1:7,22,29,2:5;8:12-13 등), 이러한 설명이 1-9장에 충분하고 확실하게 제시되었으므로, 형식 면에서 전환을 이루는 오늘 본문 10장과 이후로는 지식을 직접적으로 여호와 경외나 여호와를 아는 지식과 연결하여 설명하기보다는 이 지식이 바로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를 구별하는 척도임을 나타내는데 언급됩니다(12:1, 23: 14:6, 7, 18: 15:2, 714: 17:27: 18:15: 19:2, 25, 27: 21:11: 22:12: 29:7 등). 한편, 9절은 완전함으로(‘바른 길’로 번역됨) 걷는 자와 자기길을 굽게 만드는 자를 대조합니다. 여기서 길은 삶의 여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앞의 8절과 연결하여 읽을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마음이 지혜로워 명령을 받은 자가 이제 그 명령을 실행함으로써 완전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격과 신앙의 완전함을 목표로 사는 자는 그 삶이 안전하지만, 왜곡되고 사악한 행위를 선택하며 사는 자는 그 불의한 행위가 다 드러나게 됩니다.

11,12절은 의인과 악인의 언어가 다른 이에게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설명합니다. 의인의 말은 목마른 자의 갈증을 완전히 해소하며 생명을 소생시키는 샘처럼 듣는 이에게 삶의 활력과 기쁨을 줍니다. 또한, 허물을 가려주어 아픈 자리를 치유합니다. 그러므로 6-7절에서 언급하듯이 의인에게 축복이 임하며 의인은 축복의 말(칭찬)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악인은 6절에서 언급되었듯 그 입에 폭력이 가득하므로 그의 폭언으로 인해 남에게 상처와 고통을 안겨줍니다. 폭언과 함께 그 내면에 자리 잡은 미움으로 인해 다툼을 불러일으킵니다.

 

(4) 부와 가난(15-16)

악인과 의인의 언어생활 뒤에 다시 부와 가난의 주제가 언급됩니다. 그러므로 15-16절에서는 지혜와 지식의 언어생활을 하는 자가 일을 통해 얻은 대가와 재물은 근심과 고통을 막아주는 견고한 성이 되며 생명을 줍니다. 그러나 미련하고 폭력적인 말을 하는 자는 불의의 소득을 얻으므로 심판을 받아 가난해지고 결국 패망에 이르게 됩니다.

 

(5) 훈계를 지키는 자와 버리는 자(17)

훈계나 징계를 지키는 자는 생명의 길로 가지만 그것들을 무시하고 버리는 자는 길을 잃어 방황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부와 가난, 언어생활을 중심으로 훈계를 들었으므로 이제 이를 삶에 실천하여 지식, 도덕, 신앙 면에서 생명을 지속하고 성장하며 나가야 합니다.

 


잘 살기 원하십니까? 성공적으로 사는 인생이고 싶습니까? 잠언에서 삶의 기술을 배우십시오. 잠언의 권면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잘 사는 기술이란 의롭게 사는 것이고, 의롭게 사는 것이 성공과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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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9-02)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얻는 다윗

사무엘하 19장 16-39절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과 만나는 일은 괴롭습니다. 말의 숨은 의도를 파악해야 하는 관계는 피곤하기 그지없습니다.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맹세하지 않아도 그 말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말의 진실성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윗은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에 슬픔에 잠겨 압살롬의 이름을 부르면 큰 소리로 웁니다. 이런 다윗에 대한 이야기가 알려지게 되면서 다윗의 군대는 조용히 성으로 돌아옵니다. 이에 요압은 다윗에게 화를 내며 당장 일어나 나가서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지 않으면 다윗을 버리겠다고 협박합니다. 이런 요압의 말에 다윗은 왕의 임무를 감당하였고, 백성들은 다윗을 다시 왕으로 모실 계획을 세웁니다.

 

다윗에게 용서를 비는 시므이(16-23)

용서는 다른 사람의 죄를 기억하지 않고 덮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용서했다고 하면서도 똑같은 상황이 생기면 과거의 실수와 죄까지 들취냅니다. 말로는 용서했다고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 사람의 잘못과 실수를 차곡차곡 쌓아 두는 것입니다. 또 용서했다고 하면서도 그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용서와 화해가 이뤄지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죄를 모두 용서해 주셨고, 그것을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16바후림에 있는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급히 유다 사람과 함께 다윗 왕을 맞으러 내려올 때에 17베냐민 사람 천 명이 그와 함께 하고 사울 집안의 종 시바도 그의 아들 열다섯과 종 스무 명과 더불어 그와 함께 하여 요단 강을 밟고 건너 왕 앞으로 나아오니라 18왕의 가족을 건너가게 하며 왕이 좋게 여기는 대로 쓰게 하려 하여 나룻배로 건너가니 왕이 요단을 건너가게 할 때에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왕 앞에 엎드려 19왕께 아뢰되 내 주여 원하건대 내게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종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마시오며 왕의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 20왕의 종 내가 범죄한 줄 아옵기에 오늘 요셉의 온 족속 중 내가 먼저 내려와서 내 주 왕을 영접하나이다 하니 21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대답하여 이르되 시므이가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를 저주하였으니 그로 말미암아 죽어야 마땅하지 아니하니이까 하니라 22다윗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너희가 오늘 나의 원수가 되느냐 오늘 어찌하여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사람을 죽이겠느냐 내가 오늘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을 내가 알지 못하리요 하고 23왕이 시므이에게 이르되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고 그에게 맹세하니라(16-23)

 

시므이에 대한 다윗의 용서는 귀했으나 온전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왕 되심이 아니라 자신의 왕 됨으로 인한 용서였고, ‘오늘’이라는 단서가 붙은 용서였습니다. 시므이가 죽지 않으리라는 다윗의 맹세는 그가 사는 날까지만 유효했습니다. 결국 그 맹세는 시켜지지 않습니다.

 

(1) 요단으로 온 시므이(16-17)

다윗이 요단강으로 오자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급하게 다윗을 맞으러 나옵니다. 그는 이전에 다윗이 바후림을 지날 때 나와서 계속 저주하여 다윗 일행이 바후림에서 쉬지 못하게 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제 다윗이 왕으로 되돌아오고 있기에 다윗에게 보복당할 것이 두려워 다윗을 영접하러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베냐민 사람 1,000명도 시므이와 동행하였습니다. 아마도 시므이뿐만 아니라 바후림과 그 부근에 거하던 베냐민 지파 사람들도 다윗을 지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성경은 베냐민 지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시므이의 행동만을 기록했지만, 베냐민 사람들도 시므이와 함께 행동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음식을 제공하며 므비보셋을 모함했던 시바는 이번에도 재빠르게 움직여 자신의 아들들과 종들을 대거 이끌고 나와 다윗을 환영합니다. 본문에서는 시바가 ‘다윗 앞에서 요단강으로 돌진하였다’고 표현하여 열광적으로 다윗을 환영하고 있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온몸으로 다윗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다윗을 위해 많은 식량을 준비한 것처럼 이번에는 배를 준비하여 다윗을 맞이하러 직접 요단을 건너가 다윗이 무사히 요단을 건널 수 있게 세심한 배려를 해줍니다. 이런 시바의 행동은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충성스럽고 믿을 만해 보이지만, 므비보셋의 신하로서는 전혀 신뢰할 수 없습니다. 그의 행동은 철저히 계산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면 므비보셋과 만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이 므비보셋을 모합한 말이 거짓이었다는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이것을 대비하여 다윗이 므비보셋의 말과 자신의 말 중에서 자신의 말을 믿게 하거나 혹시 믿지 않더라도 최소한 자신에게 주는 벌을 줄여보기 위해 다윗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노력은 보답을 받게 됩니다.

 

(2) 왕을 만난 시므이(18-20)

다윗이 요단을 건너오자 시므이는 다윗 앞에 엎드려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면서 자신에게 벌을 내리지 말아 달라고 간청합니다.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 ‘기억하지 마옵소서’,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라는 반복적인 말을 통해 매우 간절하게 다윗의 용서를 구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합니다. 하지만 시므이는 말로는 간절하게 용서를 빌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지파인 베냐민 사람 1,000명을 대동하고 와서 다윗이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수 없게 압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1,000명의 베냐민 사람은 단순한 사람들이 아니라 언제든지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로 겉으로 보기에는 다윗을 환영하는 인파 같지만 실제로는 여차하면 시므이의 보호막이 되어줄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런 시므이의 말과 행동의 괴리는 시므이의 사죄가 진심이 아님을 나타냅니다. 정말로 용서를 구하고자 한다면 혼자 와서 용서를 구하고 살리든 죽이든 처분에 맡기겠다고 하는 것이 진정한 사죄일 것입니다.

 

(3) 시므이를 용서한 다윗(21-23)

이런 상황에서 다윗의 충직한 신하인 아비새는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한 것을 언급하며 그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다윗을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표현함으로써 다윗을 저주한 것이 다윗뿐만 아니라 다윗을 선택하신 여호와께 대한 불경죄임을 밝힘으로써 시므이를 죽일 정당한 죄목을 찾은 것입니다. 사람을 저주하거나 비방한 것은 죽을 죄가 아니지만, 여호와를 비방하거나 저주했다면 죽을죄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다윗은 아비새에게 이것은 개인적인 일이니 상관하지 말라고 말리면서, 오히려 아비새를 자신의 대적자(사탄)라고 말합니다. 다시 이스라엘의 왕이 된 이 좋은 날 사람을 죽이는 일을 행하지 않을 것이며 시므이를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시므이의 사죄와 다윗의 용서는 진심 어린 사죄와 용서가 아니라 일종의 정치적인 행동들입니다. 시므이는 1,000명의 사람들을 끌고 와 세를 과시하며 자신을 용서하라고 말하고 있고, 힘에서 열세이며 더 이상 피 흘리는 싸움을 할 수 없는 다윗은 선택의 여지가 없기에 시므이를 용서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렇게 힘으로 사죄와 화해를 하는 것은 진정한 사죄와 화해가 아니며 또 하나의 폭력입니다. 다윗은 이때 당한 모욕을 잊지 못하고 후에 솔로몬에게 시므이를 편히 죽게 하지 말라고 유언합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은 시므이에게 당한 모욕을 용서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다윗의 행동에 대해 옳다 그르다 쉽게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자신의 화해의 손짓에 응해주는 사람에게는 용서와 자비를 보여주지만, 자신을 힘으로 누르며 화해를 강요하는 사람에게는 모욕감을 느끼는 다윗의 모습에서 우리 모습을 발견할 수 있고, 진정한 화해와 용서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합니다.

 

다윗을 마중 나온 므비보셋(24-30)

요즘 감사의 조건이 무엇입니까? 좋은 직장에 입사하고, 원하는 배우자를 만나고, 준비하던 일들이 잘 진행되는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하박국의 말씀처럼(합 3:17) 감사해야 합니다. 사업이 망하고, 직장에서 쫓겨나고, 병들어 다시 회복될 가망이 없다 해도 죄인인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할 수 있습니다. 구원이 가장 큰 감사의 제목입니다.

 

24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이 내려와 왕을 맞으니 그는 왕이 떠난 날부터 평안히 돌아오는 날까지 그의 발을 맵시 내지 아니하며 그의 수염을 깎지 아니하며 옷을 빨지 아니하였더라 25예루살렘에서 와서 왕을 맞을 때에 왕이 그에게 물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더냐 하니 26대답하되 내 주 왕이여 왕의 종인 나는 다리를 절므로 내 나귀에 안장을 지워 그 위에 타고 왕과 함께 가려 하였더니 내 종이 나를 속이고 27종인 나를 내 주 왕께 모함하였나이다 내 주 왕께서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으시니 왕의 처분대로 하옵소서 28내 아버지의 온 집이 내 주 왕 앞에서는 다만 죽을 사람이 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나 종을 왕의 상에서 음식 먹는 자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내게 아직 무슨 공의가 있어서 다시 왕께 부르짖을 수 있사오리이까 하니라 29왕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또 네 일을 말하느냐 내가 이르노니 너는 시바와 밭을 나누라 하니 30므비보셋이 왕께 아뢰되 내 주 왕께서 평안히 왕궁에 돌아오시게 되었으니 그로 그 전부를 차지하게 하옵소서 하니라(24-30)

 

므비보셋은 돌아오는 다윗을 맞이하면서 초라한 행색을 유지합니다. 시바의 배반에 절뚝발이 므비보셋이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은 이렇게 해서라도 도주 중인 왕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뿐이었을 것입니다. 이로써 다윗과 오해를 풀고 화해하였다. 다윗은 왕좌만이 아니라 사람도 얻었습니다.

 

(1) 다윗을 만나러 온 므비보셋(24-25)

므비보셋과 다윗이 만난 장소가 어디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24절에서는 므비보셋이 요단으로 내려갔다고 하고, 25절에서는 예루살렘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사무엘하 20:2에서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요단에서 만난 것으로 보입니다. 므비보셋도 다윗을 영접하기 위해 요단으로 나옵니다. 본문은 므비보셋이 다윗이 성을 떠난 날부터 평안히 돌아오는 날까지 발을 피거나 발톱을 깎지 않았으며 수염도 깎지 않고 옷도 빨지 않은 상태로 지냈다고 설명합니다. 우리말에서 ‘발을 맵시 내지 않았다’라고 번역하였는데, 이것은 발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발을 씻거나 발톱을 깎거나 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행동은 애도의 표시로 므비보셋이 다윗이 성을 떠난 것에 대해 매우 슬퍼하며 애도를 표하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므비보셋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뒤에 나오는 므비보셋의 말이 진실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2) 므비보셋의 거짓말(26-28)

다윗은 므비보셋을 보자, 제일 먼저 왜 자신과 함께 가지 않았느냐고 묻습니다. 이미 시바에게서 므비보셋이 다윗이 폐위된 것을 기뻐하며 반역을 일으킬 마음을 품고 있다는 말을 들어서 므비보셋을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분명히 므비보셋의 행색을 보고 시바의 말과 달리 므비보셋이 자신이 없는 동안 자신에 대한 애도의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의심을 거둘 수 없는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이유를 물은 것입니다.

이에 대해 므비보셋은 자신은 분명히 나귀를 타고 왕과 함께 떠나려고 하였지만, 자신의 종이 속이는 바람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고 말하고, 또한 자신의 종이 자신을 모함한 사실도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므비보셋이 말하는 좋은 ‘시바’를 가리킵니다. 이 부분에서 시바의 말과 므비보셋의 말이 달라집니다. 하지만 므비보셋은 더는 변명하지 않고 다윗의 처분에 맡기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미 사울의 왕권이 무너지고 다윗이 왕위에 오르면서 자신과 자신의 집은 죽어 마땅하지만, 왕의 호의를 받아 왕의 상에서 밥을 먹는 은혜까지 누리게 되었는데 어떻게 불공평하다고 말하며 억울하다고 말하겠냐고 합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의 판단에 맡기면서 다윗이 ‘하나님의 사자’ 즉 천사와 같은 신적 지혜가 있는 사람이니 누가 옳은지 그른지 잘 판단할 것이라고 합니다.

 

(3) 다윗의 결정(29-30)

이런 므비보셋의 말에 다윗은 ‘왜 그렇게 말하느냐?’고 하면서 일단 누그러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일단 므비보셋의 말을 믿어준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다윗이 므비보셋의 원래 재산을 다 돌려주지 않고 시바와 나누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므비보셋의 말을 완전히 믿은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만일 므비보셋의 말이 다 옳다고 생각했다면 다윗은 자신의 주인을 모함한 시바에게 벌을 주거나 시바에게 준 모든 것을 빼앗아 므비보셋에게 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을 보면 므비보셋의 말을 전적으로 믿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에게 계속해서 지원을 아끼지 않은 시바의 편을 들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말에 므비보셋은 다윗이 평안히 왕궁으로 돌아왔으니 재산은 모두 시바에게 주라고 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자신보다 시바를 더 신뢰한다는 것을 눈치 챈 므비보셋이 자신의 진정성을 보이기 위해 한 말입니다. 이 말에 대한 다윗의 반응이나 결국 재산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렇게 다윗과 요나단의 언약으로 베푼 므비보셋에 대한 은혜도 반역이라는 사건을 겪으며 흔들리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르실래와 만난 다윗(31-39)

대가를 기대하면서 인정을 받으려는 헌신은 진정한 헌신이 아닙니다. 이 정도 했으니 그 대가로 어느 정도 대우해 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헌신한다면 어느 순간 교만해져 자신을 높이려 하고 당연하다는 듯이 하나님께 보상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무익한 종이라는 생각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31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왕이 요단을 건너가게 하려고 로글림에서 내려와 함께 요단에 이르니 32바르실래는 매우 늙어 나이가 팔십 세라 그는 큰 부자이므로 왕이 마하나임에 머물 때에 그가 왕을 공궤하였더라 33왕이 바르실래에게 이르되 너는 나와 함께 건너가자 예루살렘에서 내가 너를 공궤하리라 34바르실래가 왕께 아뢰되 내 생명의 날이 얼마나 있사옵겠기에 어찌 왕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리이까 35내 나이가 이제 팔십 세라 어떻게 좋고 흉한 것을 분간할 수 있사오며 음식의 맛을 알 수 있사오리이까 이 종이 어떻게 다시 노래하는 남자나 여인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사오리이까 어찌하여 종이 내 주 왕께 아직도 누를 끼치리이까 36당신의 종은 왕을 모시고 요단을 건너려는 것뿐이거늘 왕께서 어찌하여 이같은 상으로 내게 갚으려 하시나이까 37청하건대 당신의 종을 돌려보내옵소서 내가 내 고향 부모의 묘 곁에서 죽으려 하나이다 그러나 왕의 종 김함이 여기 있사오니 청하건대 그가 내 주 왕과 함께 건너가게 하시옵고 왕의 처분대로 그에게 베푸소서 하니라 38왕이 대답하되 김함이 나와 함께 건너가리니 나는 네가 좋아하는 대로 그에게 베풀겠고 또 네가 내게 구하는 것은 다 너를 위하여 시행하리라 하니라 39백성이 다 요단을 건너매 왕도 건너가서 왕이 바르실래에게 입을 맞추고 그에게 복을 비니 그가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31-39)

 

길르앗의 바르실래는 음모와 모함과 배반으로 점철된 팍팍한 다윗의 일생에서 맘 놓고 편한 숨 내쉴 수 있는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습니다. 변함없는 신뢰와 지원과 충성, 대가를 바라지 않는 헌신에서 다윗은 언약하신 것을 기필코 이뤄주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1) 다윗을 배웅하려 온 바르실래(31-32)

이 단락은 바르실래에 관한 단락으로 시점은 요단을 건너가기 전입니다. 바르실래는 요단 동편에서 매우 부유하고 힘 있는 사람으로 다윗이 마하나임에 거하는 동안 다윗에게 필요한 물품을 제공해준 인물입니다.

 

(2) 다윗의 제안(33)

다윗은 요단으로 마중 나온 바르실래에게 예루살렘으로 같이 가자고 제안합니다. 자신이 그동안 받은 은혜를 예루살렘에서 갚겠다는 것입니다.

 

(3) 바르실래의 부탁(34-37)

하지만 바르실래는 자신의 나이가 80세로 너무 늙어서 왕이 제공하는 맛있는 음식의 맛도 모르고 흥겨운 노래도 잘 들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또한 자신은 자신의 묘실이 있는 이곳에서 죽기를 원한다면서 다윗의 제안을 사양합니다. 자신의 부모가 있는 묘실에 묻히는 것은 평안한 죽음을 의미하며 매우 명예로운 일입니다. 바르실래는 이런 평안함과 명예로움을 택한 것입니다. 대신에 바르실래는 김함을 데리고 가 달라고 부탁합니다. 본문에는 언급되지 않지만 김함은 바르실래의 아들로 추측됩니다.

 

(4) 왕의 허락(38-39)

이런 바르실래의 요청을 받아들여 다윗은 김함을 데리고 가겠다고 하며 또한 바르실래가 나중에라도 요청하는 것이 있으면 들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이 약속은 죽으면서 솔로몬에게 바르실래의 자손들을 후대하라는 유언을 남김으로 대를 이어 지켰습니다.

바르실래에 대한 이야기까지 해서 19:9부터 시작된 압살롬 반란 사건에 대한 논공행상이 어느 정도 마무리됩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투항하는 적에게 대해서는 화친 정책을 사용하였고 자신을 도운 사람에게는 상을 주었습니다. 신뢰하기가 애매한 므비보셋은 애매한 상태로 두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말은 우리 마음에 심긴 말씀에 대한 반영입니다. 우리의 말은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인이 말의 진실성을 잃을 때, 우리 안에 있는 말씀도 힘을 잃습니다. 믿음에 있어 온전한 사람은 곧 말에 있어 온전한 사람입니다(약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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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02-03)


유대인의 불신앙

로마서 2장 17-29절

 


 

‘전문가적 변형’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 분야를 잘 알고 있는 전문가이기에 더 타락하기 쉬운 경향을 말합니다. 가령 의사이기에 환자의 고통에 더 둔감하고, 법조인이기에 위법이나 탈법, 편법에 능숙하고, 목사이기에 말씀을 더 소홀히 하는 경향을 말합니다. 율법을 맡은 유대인들도 그랬습니다.

 

바울은 율법과 할례를 언약 백성의 표지로 삼고 그것이 하나님 백성의 지위를 보장해준다고 여기는 유대인들의 통념을 비판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신실하게 반응하지 않았고 결국 그들의 소명을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이제 육신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받은 새로운 언약 백성이 출현하였음을 암시합니다.

 

백성의 지위를 보장하지 않는 율법(17-24)

신앙생활은 하다 보면 다양한 성도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는 성경 지식이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데 삶은 세속적인 상태로, 많은 영적 지식으로도 말씀대로 살지 않을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죽은 지식은 생명을 살릴 수 없습니다. 율법의 소유가 그들을 저절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주지 못합니다.

 

17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19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21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22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23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17-24)

 

이제 바울은 본격적으로 유대인의 문제를 다룹니다. 그 논증의 초점은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도 전혀 핑계할 수 없이 하나님의 진노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로마서에서 언약 백성인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을 가장 잘 묘사한 소단락입니다.

 

⑴ 유대인의 자부심(17-20)

바울이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1)라고 지칭한 사람들 가운데는 도덕적인 이방인뿐 아니라 유대인도 포함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17)라고 하면서, 이제 이야기 주제를 이방인에서 유대인으로 전환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정죄하고 비난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하늘로부터 계시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고 지적합니다.

이곳에 등장한 세 가지 다른 표현들은 유대인들에게 사실상 동일한 의미입니다. 즉, ‘스스로를 유대인이라 부르는 것’, ‘율법에 의지하는 삶’, ‘그들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을 자랑할 수 있는 특권’은 옛 언약 속에서 살아가는 유대인들의 삶을 서로 다른 측면에서 묘사한 것들입니다.

본 단락의 핵심 단어는 ‘율법’입니다. 2:12에서 처음 등장한 단어 ‘노모스’를 통해, 바울이 정확하게 무엇을 가리키는지와 그가 그리스도를 통해 율법을 어떻게 재해석하게 되었는지는 오랜 논쟁의 대상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바울이 말하는 ‘노모스’가 유대인들의 토라, 즉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구체적인 규례들을 말한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율법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문서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언약과 마찬가지로 율법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합니다(갈라디아서 2:21을 보라. 바울은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변명합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이 오히려 하나님 은혜를 폐하려 한다고 공격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율법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최고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대인 됨과 율법에 대한 의지는 하나님에 대한 자랑과 같은 말입니다.

18절에서 말하는 대로, 율법은 하나님의 뜻과 가치를 분간케 합니다. 바울은 17-20절 단락에서 율법에 대한 유대인들의 자세와 자기 정체성을 설명하다가 의도적으로 두 개의 분사구문을 사용합니다. 그것은 ‘율법의 교훈을 받아’(17)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지고서’(20)인데, 두 구절 모두 유대인들을 위한 절대적 삶의 기준으로서의 율법을 말합니다. 구속사 전체 속에서 볼 때, 율법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계시하시되, 그 뜻을 유대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시대적, 문화적, 지리적, 인종적인 옷에 입혀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토라는 자연히 구속사 속에서 시대적인, 문화적인, 인종적인 한계를 지닌 계시의 도구였습니다. 그것이 모든 민족에게 보편적인 윤리로 주어지기 위해서는 유대적인 외피(外皮)를 벗겨내는 해석의 작업이 요청되었습니다.

19-20절은 이러한 율법을 소유한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을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19절에서 사용된 비유, ‘맹인의 인도자와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은 율법을 소유한 유대인들이 자기 정체성과 소명을 설명하기 위해 흔하게 사용하던 표현들입니다. 20절에서는 이를 더 직접적으로 ‘어리석은 자의 교사’와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풀어놓았습니다.

 

⑵ 유대인들을 통해 하나님의 모독 받으심(21-24)

21-24절은 율법과 이스라엘의 상태에 대해 달라진 바울의 이해를 보여줍니다. 한마디로 바울은 유대인이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다는 점을 말합니다. 21-22절은 율법으로 이방인을 가르치고 선도해야 할 유대인이 이방인과 동일한 도둑질, 간음, 이방 신전에 대한 도둑질 등의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범함으로 인해, 이방인들 가운데서,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다고 평가합니다(23-24). 유대인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율법과 이스라엘의 현재 상태에 대한 바울의 평가는 분명 다메섹 이전의 그것과는 달라졌습니다. 다음 단락에서 바울은 율법을 범한다면 할례도 무익하며(25),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고 할례는 마음에 해야 할 것(28,29)이라고 과감하게 선포합니다. 사실상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으로부터 율법과 할례를 분리합니다.

자신들을 통해 이방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유대인들의 소명이 성취되지 않았다고 해서, 유대인들이 율법을 중심으로 하는 삶의 체계에 대한 확신을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럴수록 율법에 대한 열심을 더욱 강조했습니다. 언약 안에 머무르기 위해서 유대인은 율법을 준수해야 하고, 율법은 그것을 지키는 자에게 생명을 약속합니다(레위기 18:5). 다메섹 이전의 바울도 자신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빌립보서 3:6)라고 생각하고 동족들이 모두 자신과 같다면 하나님 나라가 곧 올 것이라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2:21 이하에서 바울이 율법과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 받으실 가능성을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결론적으로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능력과 의로움을 이미 나타내 보이셨다는 확신 때문입니다. 나아가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고 완성된 하나님의 이야기 전체 속에서 이스라엘과 율법이 가지는 구속사적 기능을 비로소 완전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는 율법과 할례와 상관없이, 심지어 유대 민족 전체가 아니라 유대인 중 예수라는 한 사람만을 통해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 다메섹 경험 이후, 구속사의 놀라운 성취를 깨닫게 된 바울은 유대인과 율법에 대해서 이전에 알지 못했던 문제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인간의 문제(죄, 사망)를 해결하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종말적 계획을 이루기에는 율법이 턱없이 ‘연약한’ 도구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바울이 발견한 ‘율법의 연약함’(8:3)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다메섹 이전에는 알 수 없었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 성령의 오심을 통해서 주신 답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율법과 이스라엘이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의 실체를 깨닫습니다.

 

백성의 지위를 보장하지 않는 할례(25-29)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내면의 변화입니다.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이 율법의 정신을 따르면 참할례 받은 자처럼 됩니다. 육체가 아니라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손으로 하지 않고 성령을 따라 말씀에 순종할 때 영적인 유대인, 하나님의 새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25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26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27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28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25-29)

 

어떤 이유에서건 유대인들이 여전히 이해하지 못할까 봐 바울은 유대인의 종교적 유산 중에서 가장 개인적이고 친숙한 면인 할례를 거론합니다. 할례는 유대인들의 시조 때부터 유대인 남자들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 참여한다는 상징이었습니다.

 

⑴ 진정한 할례(25-27)

25-26절에서 바울은 할례를 받은 유대인은 율법을 범하지만, 정작 무할례자인 이방인이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온전히 지키는 상황을 설정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상상도 할 수 없는 이 상황은 이후의 단락들에서 주어지는 바울의 설명 때문에 하나씩 풀려나갑니다. 로마서 5:12-21에서 바울은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이 죄와 사망의 종이 되었음을 밝히는데, 로마서 7장이 말하는 대로 그 노예 됨의 딜레마는 역설적이게도 율법을 소유하는 유대인에게 가장 극명하게 표출되었습니다. 결국,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서 율법의 요구를 모두 이루셨고,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차별이 없음을 밝혀나갑니다.

 

⑵ 내면적 유대인(28-29)

25-29절 단락도 다메섹 이후 바울의 선이해가 반영된 진술들입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들이 ‘율법의 요구’를 이룹니다(8:4).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그러한 자들이야말로 이면적 유대인이며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들입니다(28-29). 29절에서 바울은 마음의 할례가 ‘프뉴마’, 곧 성령의 사역에 달려 있다고 말하면서, 8장에서 다룰 성령의 사역을 미리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할례를 받았는지의 여부 자체는 무의미합니다. 실제로 성령을 좇아 ‘율법의 요구’, 곧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온전히 이루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율법과 할례를 소유하고 있지만 정작 그리스도와 성령을 소유하고 있지 않은 유대인들은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들에 의해서 ‘판단’받게 될 것입니다(27). ‘판단’(27)과 함께 ‘칭찬’(29)은 종말적 심판대의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지 결정적으로 판가름할 마지막 심판을 이기게 하는 것은 육체의 할례가 아니라 성령의 인 지심에 있습니다.

2장 전체를 통해 바울은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도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선포하는 동시에, 율법과 할례를 소유하고 있지 않은 이방인들이 오히려 ‘율법의 요구’를 이루고 하나님 백성의 자격을 갖추는 것이 성령을 통해 가능하다는 복음의 핵심을 제시하였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으로 장담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유대인에게 율법이 그러하였다면, 오늘 우리에게도 성경이, 교회가 아무 의미가 없을 수도 있겠습니다. 심지어는 ‘복음’마저도, 우리가 마음을 바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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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02-02)

 


유대인의 불신앙을 지적하는 바울

로마서 2장 9-16절


 

오래전 제주 모 지검장이 길거리에서 음란행위를 하다가 발각이 되어 사회적인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처럼 성숙해보인 사람들이 상식 이하의 범죄로 인해 충격을 주는 경우를 봅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존경 받을만한 분들이 신뢰와 존경을 잃은 행동을 봅니다. 일반인들은 사회지도층들의 이탈 행위에 대해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로마서 3:9-18)고 단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십니다.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사람은 율법을 듣는 자가 아니라 율법을 행하는 자입니다. 유대인이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졌다고 자랑하며 선생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스스로 율법을 범하는 것은 이방인 가운데 하나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행한 대로 받는 보응(9-11)

유대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다른 민족에게 하나님을 드러내는 사명이 주어진 것이지, 배타적 지위를 얻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도라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납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외모를 보지 않으시는 주님 앞에서 거룩한 길을 따르지 않으면서 불신자들과 다른 대우를 받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9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10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11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9-11)

 

9-10절은 7-8절의 내용을 다른 언어로 되풀이하면서, 특별히 이러한 원리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9절과 10절 모두에 등장하는 ‘먼저는 유대인에게요’라는 표현은 유대인들이 이 언약의 약속을 먼저 받은 자들이었음과, 유대인들이라고 해서 그들의 악행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음을 동시에 말해줍니다. 7절과 10절에서, 바울은 ‘선을 행하는 삶’이 ‘영광과 존귀, 썩지 않음과 평화’에 이르게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영광과 존귀’라는 표현은 시편 8편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한 종말의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즉, 시편 8편의 약속이 ‘선을 행하는’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차별 없이 실현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신다’(11). 문제는 '선을 행하는 각 사람'이라는 조건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선한 행위'란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성령을 받은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삶의 열매입니다. 그런 점에서 ‘선한 행위’는 로마서 1:5의 ‘믿음의 순종’과 같은 개념입니다.

 

하나님 심판의 보편성(12-16)

 

말씀을 잘 가르치는 사람을 보면, 거룩하고 위대해 보입니다. 자칫 사람들에게 현혹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신령한 사람은 말씀의 유무가 아닙니다. 그 훌륭한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도할 때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는, 말씀을 들은 적이 없이 죽은 사람들의 구원에 관한 문제입니다.

 

12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13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14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16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12-16)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고 율법을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제외될 것이라 생각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대화는 계속됩니다. 바울은 할례와 율법은 그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해 주는 배지 역할을 할 뿐, 그것이 구원의 조건은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1) 율법을 행하는 자(12-13)

바울은 로마서에서 2:12에 이르러서야 ‘노모스’(율법)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합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율법을 지닌 선민, 유대인’과 ‘율법이 없는 죄인, 이방인’이라는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구분을 벗어납니다. 2:1-11 단락, 나아가 1:18-32 단락에서도 중요하게 사용된 ‘범죄하다’와 ‘심판받다’라는 단어는 12절에서도 사용되면서 12-16절 단락을 앞 단락들과 연결시켜줍니다. 율법의 소유 여부와 상관없이, ‘범죄’한 자들은 모두 ‘망하고,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12절에서 사용된 동사 ‘하마르타노’(범죄하다)는 단순히 도덕적 기준을 어기는 행위를 넘어서서, 신의 뜻을 거역함으로써 그와의 관계를 깨뜨린다는 의미로 유대인들과 그리스-로마인들 모두에게 널리 사용된 단어입니다.

13절에서 바울은 율법 아래 사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말합니다. 의인, 곧 정상적인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단순히 율법을 듣는 자가 아니라 율법을 행하는 자입니다. 이것은 구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명기 28-30장이 말하는 대로,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해서, 율법을 지킴으로써 스스로 생명과 복을 선택해야 할 책임마저 면제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 율법이 중심이 되는 언약 체계 속에서 신실하게 머물러 있어야 할 책임이 유대인들에게도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13절에서 사용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동사는 미래시제로 표현되어 있다. 그 의로움은 16절의 ‘최후의 심판’에 최종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2) 양심의 법(14-15)

14-15절에서 바울은 율법 없는 이방인이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행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이 이방인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복음을 듣지 못한 이방인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가? 만약 전자라면, 10절과 함께, 율법 없는 이방인 가운데에서도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행하여 구원에 이르는 사람이 있다는 의미로 들리는데, 신학적으로 그 설명이 쉽지는 않습니다. 10절뿐만 아니라 14-15절을 이방인 그리스도인에 대한 설명으로 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14절의 '본성으로'를 선행 구절과 연결해서 읽으면, ‘날 때부터 (본성으로) 율법 없는 이방인이 율법의 요구하는 바를 행할 때에는’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이것은 2:27에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이라는 구절과 평행을 이룹니다. 또한 로마서 전체에서 볼 때도, 바울은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율법 없이)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이루게 되었다는 점을 주장합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는데’(14), 이를 15절에서 추가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5절의 헬라어 원문은 이방인들이 ‘마음에 새겨진 율법의 행위를 나타낸다’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마음에 새겨진 율법의 행위’는 예레미야 31장의 새언약 백성에게 임할 성령의 역사를 상기시킨다. 이것은 14-15절에서 언급된 이방인이 새언약 백성임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이기도 합니다.

 

(3) 다가온 심판의 날(16)

15절의 내용은 16절의 최후 심판의 문맥에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스도를 재판관으로 세워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들이 율법의 요구를 이룬 것을 증거 합니다. 이 모든 논의를 통해 바울은 율법 없는 이방인들도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는 점과, 율법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유대인들에게 더 이상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전달하려 합니다. 16절은 바울의 복음이 심판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율법과 양심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모든 사람이 불의로 진리를 막는 죄인들이 라는 사실을 고발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고 아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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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02-01)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

로마서 2장 1-8절


 

다른 사람에 대한 범죄 사실이나 처벌을 논의할 때, 매우 흥분해서 열변을 토하면서 사람을 정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이 정죄된 사람보다 더 많은 죄를 범하면서도, 쉽게 정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은 거룩하다고 자부할지 모르겠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죄가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치부가 있는 그대로 드러난다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죄를 논할 때, 그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합니다.

 

앞에서 이방인의 죄를 지적했던 바울은, 이제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유대인에게 돌아섭니다. 유대인들은 종교적인 우월감에 빠져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판단하십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 없이 심판할 것입니다. 유대인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셨던 율법으로,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양심으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남을 정죄하는 사람들(1-5)

 

교만한 사람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기준 또한 스스로 자기 기준에 맞추었을 뿐이지 그렇게 우수한 편은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모두 그만그만한 ‘도토리 키 재기’일 뿐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자신들이 다른 이방인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영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유대들에게 경고합니다.

 

1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4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1-4)

 

지금까지 로마서 1:18-32까지 ‘이방인들에 대한 죄’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보다 높은 윤리적 기준과 도덕적 삶을 유지하면서 당시 만연한 도덕적 부패를 비난했을 것입니다. 로마서 2장은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바울이 바라보는 초점이 이방인으로부터 유대인에게로 집중합니다. 먼저, 남을 정죄하는 도덕주의자들도 죄 아래 있으며(1-16), 다음으로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 역시 죄의 능력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17-29).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보다 훨씬 더 낫다고 손을 들어주신 것이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을 같은 조건으로 취급하신 것입니다.

 

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심판(1-2)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기준은 변함없는 진리로 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약속의 백성이므로 구원을 받지만,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 멸망에 이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앞에서 이방인의 죄와 심판을 논할 때, 유대인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제 눈을 돌려 유대인들에게로 향합니다. 바울이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1)라고 선언합니다. 이방인의 죄악을 지적할 때, 도덕적인 사람들과 유대인들은 죄악으로 범람한 로마 사람들을 보면서 동의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죄 또한,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선민(選民)’이라고 자처했기 때문입니다. 종교적인 유대인에게는 일반적으로 비판적인 성향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의 우상숭배와 도덕적인 탈선을 혐오하며 정죄하였습니다. 자신들은 이방인보다 도덕적으로 훨씬 우월하다고 확신합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특권을 내세우며, 자기들은 정죄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태도 속에 빠진 자들을 향해 자기기만을 드러냅니다. ‘모든 사람’은 특히 도덕적인 이교도나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정죄합니다. 사람들은 빈도와 한계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모두 한결같이 하나님에게서 돌이켜 죄를 지었습니다. 자신들은 거룩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의 죄악, 또한 이방인의 죄악만큼 중합니다. 특히 이방인들을 향해 정죄했던 유대인들은 더한 것입니다. 도덕주의자들과 유대인들은 적극적으로 비판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의 비판은 자신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것은 자신의 죄와 잘못이 발각되는 것을 모면해보려는 흔한 술책이기 때문입니다.

 

(2) 진리로 판단하신 하나님(3-4)

바울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신적인 세 가지 기준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진리(2:2-4), 공정함(5-11),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이 기준으로 모든 사람을 심판하는 절대적이고 무한한 기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진리’라고 하셨습니다(요한복음 14:6). 또한,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자신을 ‘영’이시며(요한복음 4:24), ‘빛’이시고(요한일서 1:5), ‘사랑’(요한일서 4:8,16)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진리의 하나님’(시편 31:5; 이사야 65:15)이라는 소개합니다. 절대적이고 무한한 진리는 분명히 하나님의 고유한 속성 중 하나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심판은 진리대로 이루어집니다. 모든 사람에게 임할 이 심판은 어떤 사람도 피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핑계할’ 수 없고(로마서 2:1)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도덕적일 수 있고 자기 시대를 타락한 시대라고 정죄할 수도 있겠지만, 그도 역시 같은 일을 행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에서 제외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까지도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 아래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율법을 통해서 선악을 분별하고 있었고, 율법에 어긋나지 않도록 의로운 척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삶 속에서는 이방인들과 다를 바 없는 동일한 죄를 범하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셨을 때, 유대인들의 행동은 가증한 것들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을 정죄할 수 있는 판단력을 가지고 범죄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죄를 핑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을 정죄하였던 정죄로 스스로 정죄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와 비슷한 교훈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이중적인 모습을 보면서 경고합니다.

 

45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46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7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 20:45-47)

 

바리새인들은 도덕적인 수준이 상당히 높았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암송하고, 금식과 길거리 기도도 하였고 작은 것 하나까지도 십일조도 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상숭배나 음란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겉으론 정말 깨끗하게 경건한 성도의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강도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율법을 잘 지키고 있기 때문에 구원의 반열에 설 것이지만,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잘못된 생각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자기 허물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남의 허물에 대해서는 바늘처럼 예민하고 냉혹했던 것입니다.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족집게로 빼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 ‘판단(判斷)’이란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판단은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판단력,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갈 판단력,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구별된 삶을 살 수 있는 판단력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혹독하게 평하고 있는 ‘판단’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치로 올라서서 상대방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모습을 죄악이라고 평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주저하지 않고 혹평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겉으로 나타내지 않는 판단이 무서울 때가 있습니다. 그의 이면에는 상대방을 시기하거나 증오하는 마음이 있거나 무정함과 무자비함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할 기준이 있다면, 그 기준으로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자(尺)로 사용하기 전에, 가장 먼저 자신의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준으로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을 먼저 평가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정한 하나님의 심판(5-8)

하나님께서도 혹시 잘못된 실수하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이는 것으로만 가지고 평가하신다면 당연히 실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외모로만 판단한다면 공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의문점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본문에는 자세하게 하나님의 심판이 왜 의로운지에 대한 언급하고(5), 다음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어떤 점에서 의로운 심판인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5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6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6-8)

 

우리가 당시에 유대인이라고 한다면, 사도 바울과 반박하고 논쟁할 것은 틀림없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변명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신앙과 행동에 대해 정당화시키려 시도할 것입니다. 그러한 시도를 감지한 바울은 단호하게 설명을 이어갑니다.

 

(1) 심판이 미루어진 이유(5)

바울이 주장한 심판에 관한 내용을 듣는 사람들이 의문점이 생깁니다. 그들은 바울에게 ‘하나님께서는 이 죄악상들을 다 보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왜 심판하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모르신 사실이 있는 것이 아니냐!’라는 비아냥거리는 반론일 것입니다. 그런 질문할 사람들에게 바울은 반박합니다. 사실상 ‘하나님께서 길게 참고 계신 것을 비웃고 있느냐? 그 고집과 회개하지 않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그냥 넘어가실 것 같은가? 진노의 날 모든 것이 다 드러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향해 회개를 기다리시며 오래 참으로 용납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날은 계속될 것은 아닙니다. 결국 ‘그 날’에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 원인을 바울은 ‘네 고집(문자적으로 ‘완고함’)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 때문이라고 아주 혹독하게 평가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그분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까지 거대한 저수지와 같이 쌓아가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멈춘 것은 잠시일 뿐이지, 결국에 진노의 뚝이 쌓아진 높이만큼 심판의 뚝이 터지면 강력하게 임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6-8)

바울은 시편과 잠언의 말씀을 인용하게 그날에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실 것’(6)입니다(시편 62:12; 잠언 24:12). 하나님의 심판은 진리에 기준을 두고 공정하게 실행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냉철했습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서 사랑도 용서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죄를 범해도 이방인들과 같이 심판을 받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성도 중에는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람인데 설마 심판하시겠어!’ 또는 ‘하나님의 자녀니깐 죄를 지어도 봐주겠지!’라고 생각하면서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사는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심판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심함으로 조건에 따라 봐주기나 용서할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사람의 기준으로 외적인 혈통이나 많은 봉사 그리고 헌신으로 죄과를 덮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구제역 때문에 돼지를 살처분합니다. 살아있는 짐승들을 땅에 묻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그 짐승을 묻은 근처에서 지하수에 핏물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죄악은 절대로 어떤 것으로 덮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죄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돌아가야 함을 알면서도 죄안에 머물러서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죄로부터 떠나지 않고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죄는 즐거움을 줄 수 있겠지만, 절대로 만족을 줄 순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항상 죄를 쫓아가면서 죄의 노예로 살게 됩니다. 당신은 죄의 노예로 살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누리고 살기를 바랍니다. 죄를 즐기는 삶에서 떠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충만한 삶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오래 참고 기다리십니다. 온갖 불의하고 추악한 일들을 당장 심판하지 않으시는 것은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길 바라시기 때문입니다(베드로후서 3:15). 절대로 하나님의 심판은 없거나 더딘 것이 아닙니다. 세속적인 일과 무리에 동조하지 않고 거룩함을 유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항상 예수님처럼 그의 선한 모습을 닮아가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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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01-04)


이방인에 대한 심판 이유

로마서 1장 18-23절


 

한 환자에게 ‘당신은 암이지만 수술하면 나을 수 있습니다.’라고 진단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내 병은 내가 압니다. 그냥 소화제 몇 약을 먹으면 금방 건강할 것입니다.’라고 고집부렸습니다. 주변인들은 얼마나 걱정이 되겠습니까! 오늘날 사람들의 모습이 이와 비슷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사람들은 죄악이 점점 성장하였습니다. 이제는 썩어서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정도입니다. 사람들은 조금만 손질하면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두를 사랑하지만, 거부하는 사람에게까지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로마 성도들을 무한한 애정으로 믿음의 진보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제 복음에 관해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진노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제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왜 필요한지를 소개합니다. 사람들을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분명히 치료할 수 없는 병이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래서 죄에 대해 체계적으로 ①죄의 정의 ②죄의 발단 과정 ③죄의 결과 등으로 서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당한 이유 없이는 절대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이 이교 세계를 심판하시는 세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막음(18)

오늘날 현대인을 보면 사람들이 죄짓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누가 누가 더 죄를 짓는가?’고 경주하는 느낌입니다. 아마도 텔레비전에서 죄를 자랑하는 프로그램이 있다면, 대박 프로그램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불순종이나 죄는 절대 자랑거리가 아니라 회개할 대상입니다. 우리는 가능한 한 빨리 하나님께로 돌아서야 합니다.

 

18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18)

 

본문에서 바울은 이방인의 죄에 대해 지적하며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소개합니다. 18절은 18-23절의 핵심적인 문장입니다. 이것은 또한 17절과 대조되는 평행 구절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남’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의의 표출이며, 인간의 죄악에 대해 대적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사람은 죄를 거론하면 싫어합니다. 특히 자신의 죄를 드러내는 것은 더욱 싫어합니다. 성도들 역시 하나님의 축복에 관한 이야기는 좋아하지만, 자신이 어떤 죄인인지, 또 죄의 결과 심판을 받으리라는 것에 대해서는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우리가 듣고 싶은 내용뿐만 아니라 반드시 들어야 할 회개와 심판에 관한 내용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에 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심판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17) 끊임없이 나타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나타납니다(2:5). 구체적으로 그의 불의(不義)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하나님 진노의 대상은 불의로 하나님의 진리를 막는 사람들에게 임할 심판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 좇아 나타남”으로, 누구도 진노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시고 심판하지만, 죄인을 사랑하고 구원하기 원하십니다. 인간이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드리지 못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사람을 올바르게 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진노의 대상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모든 자에게 임합니다. 그것은 그분의 개인적인 의의 표현이며, 인간의 죄에 대한 대결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는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며.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기독교에 대해서도 수많은 종교가 많이 있는데, 기독교만 완고하게 유일한 진리라고 주장하느냐고 비아냥거립니다. 그러나 비방하는 사람들은 ‘경건치 않고 불의’합니다. ‘경건’의 의미는 ‘신성한 존재 앞에서 절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불경건’이란 ‘마음에 경배의 대상이 없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이 죄를 사람 대 사람의 실수로만 이해하려고 합니다. 즉, 도덕적 차원에서 죄를 이해하기 때문에 성경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죄’를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실수라고 정의합니다. 즉, 죄를 영적 차원에서 설명됩니다. 죄가 무엇인지 깨닫게 자마자 복음이 필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바울이 의미하는 바는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불의’란 ‘인간에 대한 도덕적인 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불경건’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는 것을 말하지만, ‘불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경건치 않습니다. 우리는 더욱 자신의 기준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불의인 줄 모르고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시고 심판하시지만, 죄인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내용을 반드시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시고 죄를 자세하게 다루십니다. 죄가 무엇이며, 그 죄를 해결할 방법은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를 알 수 없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 그리고 구원에 관한 이야기가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질병의 원인을 알면 치료법을 알 수 있듯이, 죄의 근원을 알아야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충만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라고 소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인간에게 하나님께 나가는 방법을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셨지만, 제시해주신 방법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한 것은 죄악입니다.

참된 경건에 대해 바르게 정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정의는 야고보 사도에 의해 제대로 정의가 되었습니다.

 

26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27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야고보서 1:26-27)

 

바른 신앙을 가지려면 날마다 예배는 드리고 있는데, 사람이나 물질에 대한 관계가 바른 사람입니다. 물질이나 사람들과 관계가 바르게 세워지지 않으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긴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정작 내면에는 불의로 가득 차 있지는 않습니까? 불의를 행하지는 않지만 불의를 묵인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당신의 언행이 하나님의 진리를 막는 일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경이하지 않는 죄악(19-23)

봄철에 만발한 꽃을 보면 성도들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누가 시키지도 안했지만,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하면서 콧노래를 부릅니다. 이것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만든 만물 속에 하나님의 그림자를 집어넣어 놓으셨습니다.

 

19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21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19-23)

 

여기에서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모든 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 지식은 피조 세계에 나타나 있고, 누구나 접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을 다루는 구원론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계시’라고 불립니다.

 

⑴ 능력과 신성을 인간에게 밝히 드러내심(19-20)

바울은 인간이 우상숭배자로 전략하게 된 과정이 잘 지적합니다. 먼저 사람들에게 있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보편적인 지식에 대해 언급합니다. 이것은 두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는 ‘생득적 지식’과 자연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일반 계시’로 구분됩니다.

① 생득적 지식

먼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생득적 지식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내면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을 태어날 때부터 주셨습니다. 이것은 본능적으로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무의식적으로 깊은 세계에서 절대자를 찾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불신자라도 위기에 봉착하면 ‘아이쿠 하나님!’하며 하나님을 부릅니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사람이 사는 곳에는 세상 어디를 가 봐도 반드시 신에게 제사를 드리던 흔적들이 있습니다. 인간과 종교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짐승들은 영혼이 없기 때문에 배만 부르면 만족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먹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미개한 종족이라도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혼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고 예배합니다. 사람들은 순간적인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11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도서 3:11)

 

이처럼 모든 사람들은 사후 세계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영생을 누리고자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할 때만 진정으로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② 일반 계시

다음으로, 인간은 자연 만물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자연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좋은 장소입니다. 사시사철을 하나님 능력의 비밀을 가지고 있습니다. 봄이면 싹이 오르고, 여름이면 꽃이 피고, 가을이면 열매를 거두는 자연의 이치를 보면서 하나님의 오묘하신 능력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양식을 공급해 왔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밤하늘의 별을 살펴보면 수많은 별들이 있지만 한 번도 충돌하지 않고 운행하여 우주의 질서와 조화를 드러냅니다. 시편 기자는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다음과 같이 찬양하고 있습니다.

 

1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5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6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시편 19:1-6)

 

이처럼 만물은 소리 없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과 신성을 증거 합니다. 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과 놀라운 지혜, 그의 광대하심과 아름다움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천지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도 정말 대단한 믿음입니다.

 

⑵ 하나님을 거부하는 인간(21-22)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 살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자신보다 못하고 천한 미물(微物)들을 신으로 경배한다면 얼마나 어이없는 일입니다. 종종 대학교 컴퍼스 안에서 건물이나 기계를 구입해 온 후에, 교수란 사람들이 기계나 건물이 잘 사용되도록 제사를 지내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오늘날 현대인들이 얼마나 많은 학식과 문명이 있는데, 지금까지 신(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야만 하느냐?'고 고상한 척 말합니다. 그리고 ‘죄를 범한 일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나 종교가 필요 없다.’고 하면서도, 신(하나님)이 될 수 없는 미물들에게 경배하고 있을 보면 한심스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들을 사람의 양심과 자연 만물 속에 남겨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 속에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알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웅장한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경배하는 종교로 변화되었습니다. 자연을 경배하는 신앙을 ‘샤머니즘(shamanism)’이나 ‘범신론(汎神論)’라고 부릅니다. 자연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신성(神性)이 들어 있지만, 그 자체가 신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 위에 초월해 계십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만물을 통해서 얼마든지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경배한 것이 아니라 창조물을 가지고 경배하니깐 얼마나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범죄한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거부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하였습니다. 그들은 허망한 생각과 미련한 마음으로 어두워졌습니다.

 

⑶ 영광을 우상으로 바꾼 인간(23)

절대적인 기준이 없는 사람들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을 보면 세상의 가치관을 좇아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점점 우상숭배자가 되어갑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우상으로 만들어 그것들을 경배합니다. 우상의 대상이 사람이 될 수 있으며, 짐승이 될 수 있으며 심지어는 벌레들까지도 경배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볼 때,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한심스럽겠습니까!

천지 만물 속에 충만하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해야 합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보다는 자기중심의 삶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것으로 대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인간에게 복음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의 불의가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구원을 받을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복음은 아무에게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주셔서 받았을 분 그것은 과분하고 형언할 수 없는 혜택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감당할 것이 인간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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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9-01)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려는 다윗

사무엘하 19장 1-15절


어떤 상황이 좋아도 마냥 좋아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반대로 슬퍼도 한없이 슬퍼만 할 수 없는 상황이 있습니다. 인생은 남아 있고, 우리가 맺는 관계는 숱하게 연결되어 있고, 우리가 할 역할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얼마나 큰 괴로움 속에 있었고 어떤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
 
전쟁 이후 다윗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왕위를 회복하는 과정의 첫 단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먼저 자기 병사들의 마음을 위로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압살롬의 죽음을 슬퍼하느라, 자기를 따르는 군사들의 마음을 괴롭게 하였습니다. 요압의 충고를 받아들인 다윗이 마음을 추스르고 군사들의 마음을 얻었습니다.
 

압살롬의 죽음을 슬퍼하는 다윗(1-8a)

 

자식을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처럼, 자녀의 죽음은 부모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슬픔입니다. 아무리 자식이 원수이고 파렴치한 행동을 해도 부모의 사랑을 끊을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죄인을 대신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어찌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랑의 크기와 넓이를 생각한다면 용서 못할 사람이 없고 용납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1어떤 사람이 요압에게 아뢰되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울며 슬퍼하시나이다 하니 2왕이 그 아들을 위하여 슬퍼한다 함이 그 날에 백성들에게 들리매 그 날의 승리가 모든 백성에게 슬픔이 된지라 3그 날에 백성들이 싸움에 쫓겨 부끄러워 도망함 같이 가만히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4왕이 그의 얼굴을 가리고 큰 소리로 부르되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니 5요압이 집에 들어가서 왕께 말씀 드리되 왕께서 오늘 왕의 생명과 왕의 자녀의 생명과 처첩과 비빈들의 생명을 구원한 모든 부하들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시니 6이는 왕께서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시며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시고 오늘 지휘관들과 부하들을 멸시하심을 나타내심이라 오늘 내가 깨달으니 만일 압살롬이 살고 오늘 우리가 다 죽었더면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하였나이다 7이제 곧 일어나 나가 왕의 부하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옵나니 왕이 만일 나가지 아니하시면 오늘 밤에 한 사람도 왕과 함께 머물지 아니할지라 그리하면 그 화가 왕이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하신 모든 화보다 더욱 심하리이다 하니 8왕이 일어나 성문에 앉으매 어떤 사람이 모든 백성에게 말하되 왕이 문에 앉아 계신다 하니 모든 백성이 왕 앞으로 나아오니라(1-8a)
다윗은 아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아들 압살롬을 잃은 슬픔에서 일어나지 못합니다. 당연히 사람으로서 인지상정입니다. 하지만 과한 슬픔은 정당화되지 못합니다. 아들의 죽음은 현실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와 다윗 왕조에게 주신 언약도 현실입니다. 감정은 억압의 대상은 아니지만 통제하지 않으면 모든 논리와 명분을 삼키는 괴물이 됩니다.
(1) 다윗에 대해 실망한 백성(1-3)
다윗이 압살롬의 죽음을 애곡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요압의 귀에 들어갑니다. 현재 요압은 아직 왕궁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전쟁터에서 부대를 정비하고 있었습니다. 그 소식이 요압뿐만 아니라 전장에 있던 모든 군사들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압살롬을 죽이고 반란군을 격퇴시켰다는 승리의 기쁨을 미처 맛보기도 전에 모두 슬퍼하고 애도하는 분위기가 되어버립니다. 군인들은 개선하지 못하고 전쟁에 져서 간신히 도망쳐 나온 부끄러운 병사들처럼 그렇게 조용히 성읍으로 돌아왔습니다.
(2) 압살롬을 잃은 다윗의 슬픔(4)
병사들이 성읍으로 돌아왔을 때에도 다윗은 여전히 큰 소리로 울며 계속해서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죽은 아들을 위해 애곡하고 있기 때문에 전쟁에 승리하고 왔는데도 아무도 환영하거나 승리의 기쁨을 나눌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모두 죄인처럼 쥐 죽은 듯 조용하게 성읍으로 귀환하였습니다.
(3) 요압의 충고(5-7)
이런 상황을 가장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은 바로 압살롬을 죽인 요압입니다. 요압은 다윗에게 가서 그의 행동이 전쟁을 마치고 온 군사들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 군사들이 압살롬의 손에서 왕과 왕의 아이들과 처와 비빈들의 생명을 구원하였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이것은 만일 압살롬이 살아서 승리하였다면, 다윗과 그의 자녀들과 아내들을 살려두지 않았을 것임을 의미합니다. 요압의 말은 한편으로는 과장되었지만, 한편으로는 가능성이 높은 이야기입니다. 요압은 다윗이 왕을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시고 왕을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신다고 하는데, 여기서 왕을 사랑하는 자는 요압과 다윗의 군사들이고 미워하는 자는 압살롬입니다. 왕에게 반역한 압살롬의 죽음을 애도하느라 왕을 위해 싸운 군사들을 외면하고 모욕하는 것은 왕을 사랑하는 자를 미워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요압은 사랑과 미움이라는 매우 자극적인 단어를 사용하여 다윗의 행동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현재 다윗의 태도가 다윗의 군사들에게는 매우 불합리하다고 말한 후에 요압은 극단적인 말로 다윗에게 화를 냅니다. 만일 압살롬이 살고 우리가 모두 죽었으면 왕이 좋게 여겼겠다고 말하며 왕을 몰아붙입니다. 그러고는 다윗에게 당장 나가서 왕의 부하들의 마음을 위로하라고 명령합니다. 만일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면서 오늘 밤에 왕 곁에 아무도 없을 것이며, 이제까지 겪었던 것보다 더 끔찍한 재앙을 겪게 될 것이라고 협박합니다. 이 협박은 다윗이 자신의 명령대로 하지 않으면 자신의 손으로 다윗을 왕위에서 끌어내리겠다는 것입니다. 요압은 다윗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습니다. 사실 압살롬은 반드시 살리라는 다윗의 명령을 어기고 압살롬을 죽인 것이 바로 요압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다윗과 이스라엘 군대의 이런 우울한 상황을 만든 장본인이 요압인 것입니다. 그런데 요압은 자신이 압살롬을 죽인 사실은 다윗에게 숨기고 압살롬의 죽음을 슬퍼하는 다윗의 태도에 대해서만 화를 내고 있습니다. 요압의 입장에서 압살롬의 죽음에 다윗이 슬퍼하고 이를 보는 군사들이 죄책감을 느끼게 되면 압살롬을 죽여서 이런 상황을 만든 자신에게 모든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입장이 난처해져 다윗 왕국에서의 입지도 좁아지게 됩니다. 요압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압살롬을 죽였는데, 그로 인해 자신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압은 비난의 화살을 다윗에게 돌리고 다윗이 잘못했다고 다그치며 만일 자신의 말을 안 들으면 가만히 안 있겠다고 협박한 것입니다. 현재 요압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군사들과 막 돌아온 상황이라 군인들의 신뢰를 깊이 받고 있기에, 다윗의 행동을 비난하며 군사들을 선동하여 다윗을 떠나게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반면에 다윗은 아들의 반란으로 체면을 잃었고 전쟁터에 나가지도 않았기 때문에 군사들의 신뢰도 요압보다는 약했습니다. 요압의 협박은 단순한 으름장이 아니라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 있었습니다. 명령을 어긴 요압의 기세등등한 모습과 그런 요압에게 왜 압살롬을 죽였느냐고 항의 한마디 못하고 요압의 기세에 눌려 그의 말을 순순히 따르는 다윗의 모습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4) 백성들의 승리를 축하함(8a)
8절에서 다윗은 요압이 시키는 대로 일어나 성문에 앉아 모든 백성들이 자신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왕의 위치로 돌아와 자신을 위해 싸워준 백성들을 위로하고 승리를 축하하였다는 의미로 다윗은 아버지로서의 슬픔을 가슴에 묻고 다시 이스라엘의 왕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완전히 요압에게 눌려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전과 같은 권위 있고 위엄 있는 왕권을 회복한 것은 아닙니다. 압살롬의 반란으로 다윗 왕국에서 요압의 권력이 더욱 강해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후에 다윗이 죽으면서 솔로몬에게 요압이 죗값을 치르게 하라고 유언하는 것을 보면 이후로 요압은 다윗이 손대기 힘든 권력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반란 세력의 지지를 호소함(8b-15)

 

전도와 선교를 하다보면 복음을 가부하고 외면하는 사람들로 인해 낙심하고 좌절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가족들을 위해 기도할 때도 속히 응답되지 않으면 실망감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택한 자를 구원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실 것입니다. 다윗을 반역했던 유다 지파 사람들이 다윗을 맞으려 나온 모습을 통해 인간관계는 인내가 필요함을 볼 수 있습니다.
8… 이스라엘은 이미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더라 9이스라엘 모든 지파 백성들이 변론하여 이르되 왕이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셨고 또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나 이제 압살롬을 피하여 그 땅에서 나가셨고 10우리가 기름을 부어 우리를 다스리게 한 압살롬은 싸움에서 죽었거늘 이제 너희가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 올 일에 잠잠하고 있느냐 하니라 11○다윗 왕이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되 너희는 유다 장로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왕의 말씀이 온 이스라엘이 왕을 왕궁으로 도로 모셔오자 하는 말이 왕께 들렸거늘 너희는 어찌하여 왕을 궁으로 모시는 일에 나중이 되느냐 12너희는 내 형제요 내 골육이거늘 너희는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오는 일에 나중이 되리요 하셨다 하고 13너희는 또 아마사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골육이 아니냐 네가 요압을 이어서 항상 내 앞에서 지휘관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바라노라 하셨다 하라 하여 14모든 유다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 같이 기울게 하매 그들이 왕께 전갈을 보내어 이르되 당신께서는 모든 부하들과 더불어 돌아오소서 한지라 15왕이 돌아와 요단에 이르매 유다 족속이 왕을 맞아 요단을 건너가게 하려고 길갈로 오니라(8b-15)
다윗은 자신의 혈육인 유다 지파를 도전하되 겸손하게 부탁하여 환궁 계획을 추진합니다. 요압을 대신하여 유다지파 출신의 장수 아마사를 군대장관으로 임명하여 유다 백성들에게 더 믿음을 줍니다. 새 시대를 위해서 과감히 자신을 낮추기도 하고 단호하게 끊어내기도 한 것입니다.
(1)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여론(8b-10)
전쟁이 끝난 후 압살롬에게 모였던 이스라엘 군대들은 모두 흩어져서 각기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압살롬의 군대가 완전히 해체된 것으로, 이것은 18:17의 말을 반복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이 문장을 반복하여 기록한 것은 이제 압살롬의 반란이 완전히 정리된 상황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다윗을 왕으로 모실 의논을 하게 됩니다. 10절의 ‘우리가 기름을 부어 우리를 다스리게 한 압살롬’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압살롬도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라는 것이다. 다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왕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이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기에는 압살롬이 자신들의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압살롬은 하나님께서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기름 부음’이란 왕이 되었다는 상징적인 행동이지만, 기름 부음을 받았다고 전부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름부음의 진정한 의미는 여호와께서 그를 왕으로 선택하셨다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이 없는 기름부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사실을 망각하고 자신들의 손으로 기름을 부었기 때문에 압살롬을 왕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압살롬이 죽자 다윗이 자신들을 원수들과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다시 다윗을 왕으로 섬기자고 합니다. 여기서 ‘변론하다’는 사람들이 격렬하게 토의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을 다시 왕으로 모시는 데, 이런 저런 의견들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이 살았던 실제 이스라엘 사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좀 더 복잡한 정치적 사회적 상황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업적을 다시 기억하여 다윗을 다시 왕으로 모시기로 결정합니다. 사실 이들이 언급한 다윗의 업적은 다윗이 혼자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다윗의 손을 통해 이루어 주신 업적들입니다. 결국 다윗이라는 위대한 왕도 하나님께서 안 계시면 참으로 연약하고 힘없는 존재라는 것을 다윗과 우리 모두에게 깨닫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다양한 도구로 쓰임 받고 있는 우리는 우리를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2) 유다 장로들에게 호소함(11-12)
요압의 협박에 압살롬의 죽음은 마음에 묻고 다시 이스라엘 왕의 모습으로 돌아온 다윗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웁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을 다시 왕으로 세우려는 것을 알고 자신도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연락하여 유다 장로들에게 왜 너희들은 왕을 왕궁으로 모시는 데 이스라엘보다 늦장을 부리느냐며 자신을 왕으로 다시 모시는 일에 유다 지파가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촉구합니다. 유다는 다윗이 속한 지파이고 처음으로 다윗을 왕으로 섬긴 지파입니다. 하지만 다윗 권력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다윗을 배반하고 압살롬을 왕으로 섬김으로 반란의 진원지이며 핵심 세력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이런 유다 지파를 처벌할 것인지 아니면 용서할 것인지 결정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유다의 장로들에게 유다와 자신은 골육 친척인 것을 강조하며 자신을 다시 왕으로 섬길 것을 촉구합니다. 여기서 다윗이 유다에게 골육 친척이라는 말을 쓴 것은 같은 지파라는 의미도 있지만 한 형제이고 한 핏줄이니 이전 일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며, 앞으로 같이 잘 지내보자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반역을 일으킨 유다를 다시 자신의 편으로 삼기 위해 유화정책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다윗이 유다에게 압살롬을 지지한 책임을 묻고 피의 복수를 선언하면 유다가 반감을 갖고 다른 왕을 선택할 수도 있고, 그러면 또다시 유다의 굴복을 받아 내기 위해 전쟁을 해야 했습니다.
(3) 아마사의 지지를 호소(13)
다윗은 압살롬의 군대장관이던 아마사를 불러 우리가 친척이 아니냐면서 요압을 대신하여 군대장관이 되어달라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말이 진실하다는 것을 보여주기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 맹세합니다. 아마사는 윗의 또 다른 누이 아비갈의 아들로서 요압과는 사촌지간입니다. 아마사는 현재 유다 지파와 예루살렘의 군권을 쥐고 있는 인물로 보입니다. 유다를 전쟁이 아닌 유화 정책을 통해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는 다윗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군권을 쥐고 있는 아마사를 용서하고 자신의 군대 통수권을 넘겨준다는 유화 정책을 폄으로써 무력 충돌 없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려는 것입니다.
(4) 유다 지파가 다윗의 귀환을 요청(14)
이렇게 다윗이 먼저 손을 내밀고 지지를 호소하며 반란에 가담한 죄를 묻지 않는 관용 정책을 폄으로써 유다 사람들은 다시 다윗을 지지하게 되었고 왕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와도 좋다는 소식을 보냅니다. 다윗은 큰 어려움 없이 다시 유다 사람들의 영접을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됩니다.
(5) 요단에 도착한 다윗(15)
15절에서 다윗이 귀환하기 위해 요단을 건널 때 유다 사람들이 길갈에 모여서 다윗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환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윗은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을 용서하고 화해함으로써 이스라엘 내에서 또 다른 피의 숙청을 일으키지 않고 평화롭게 다시 왕으로 복귀하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이런 결정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요압입니다. 요압은 반란군의 대장이었던 아마사를 자신을 대신해서 군대장관으로 삼은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후에 아마사를 죽입니다.
 


슬픔에 빠지면 모든 것이 그 문제에 전부인 듯 다가옵니다. 아직 우리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많다는 것을 놓치고 그 문제에만 집착한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감정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감정에 삼키어서는 안 된다는 독한 조언이 약이 되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 상황에 지지 않으실 하나님의 역사가 있으니 다 끝난 듯이 여기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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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1-02)


새 시대의 도래를 선포한 세례 요한

마태복음 11장 11-19절


천국이 이 땅에 임하였지만, 모두 그 나라의 백성이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눈앞에 천국을 두고도 놓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참된 생명의 길이 있음에도 굳이 사망의 길을 선택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을 얻게 될 것입니다. 천국 백성은 어떤 사람들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요한의 정체를 말씀하십니다. 세례 요한이 누구인지, 그가 온 것이 구약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직설적으로 묘사하십니다. 그의 시대적 위치와 역할이 도드라집니다. 세례 요한은 ‘그 엘리야’이고 예수님께서는 ‘오실 그 메시아’입니다. 이렇게 요한과 예수님께서는 동일한 역사적 무대에서 운명적으로 묶여 있습니다. 이 세대는 그들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세례 요한의 정체(11-15)

천국 백성은 비판보다 반응하는 사람입니다. 바리새인은 비판하고 흠잡기에 골몰하느라, 구원의 주를 눈앞에 두고도 놓쳤습니다. 세례 요한의 금식을 귀신 들림으로, 교제하는 예수님을 먹기를 탐하고 죄인들의 친구라고 비난합니다. 구원은 진리에 반응하는 자에게 임합니다.

 

11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12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13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14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15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11-15)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권위를 강조하는 표현인 ‘아멘(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로 시작합니다. 세례 요한은 여자들이 낳은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인물입니다. 이 말은 요한의 인물됨이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드러내는 역할에 있어서 크다는 뜻입니다.

구원 역사의 관점에서 요한의 정체를 언급하십니다. 요한은 말라기 3:1을 성취하는 역할을 맡아 백성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그들을 앞서 갑니다. 이 사역은 요한을 옛 시대에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로 만듭니다(눅 7:28).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가 요한보다 위대합니다. 옛 시대와 새 시대 사이의 차이는 매우 커서 새 시대에서 가장 작은 자가 요한보다 큽니다. 요한은 약속 혹은 기대의 시대와 성취의 새 시대를 잇는 교량 역할을 합니다. 그는 옛 시대의 마지막 인물이면서 새 시대를 시작하는 메시아의 선구자입니다.  구원사의 관점에서 이제 하늘나라가 11:5의 설명처럼 강력하게 도래했고 5:3-10의 가르침처럼 하늘나라에 들어간 사람의 복을 누리는 시대가 왔기 때문에 이 나라에 들어와서 구원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은 요한보다 더 큽니다.

12절은 다음과 같이 번역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고통을 겪고 있으며 폭력을 가하는 자들이 그것을 강제로 뺏고 있다.’ 첫째, 하늘나라는 요한 이래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고난은 하늘나라가 온 표시입니다. 요한의 때에 하늘나라는 임해 있으나 폭력적인 저항을 만납니다. 폭력은 헤롯 안티파스와 유대인들이 요한을 반대해서 보인 모습입니다요한이 폭력에 목숨을 잃은 것은 요한의 시대에 이미 하늘나라가 임해 있음을 보여줍니다. 요한과 예수님께서는 이 폭력을 경험할 뿐 아니라 죽음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폭력적인 자들이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늘나라를 공격하는 일은 요한의 때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오늘날 교회 시대에도 일어납니다. 둘째, 하늘나라의 도래를 선언한 요한이 고난을 받은 사건은 하늘나라의 도래를 선언하고, 그 나라를 가져온 메시아의 고난을 예고합니다. 셋째, 본 단락이 요한의 정체에 대한 내용임을 고려할 때, 요한의 고난선지자의 신분을 증명합니다. 마지막 선지자이면서 엘리야의 역할을 수행한 요한은 역시 선배들의 고난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신분입니다.

요한은 모든 선지자들과 율법, 곧 구약이 예언한 선지자입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이 13절에서 언급한 선지자들이 전한 예언을 받아들이기를 원한다면, 마지막 선지자인 요한은 바로 다시 올 엘리야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34). 요한의 등장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확인해주는 표시입니다. 요한의 정체를 선지자와 엘리야로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은 요한이 가리키는 대상인 예수님의 정체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난 받는 요한의 정체를 알지 못합니다. 돌아온 엘리야인 요한은 새 시대의 도래를 선언했지만, 옛 시대의 선지자들에게 주어진 고난을 겪습니다. 고난’, ‘선지자’, ‘엘리야’, ‘하늘나라의 선포는 서로 연결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늘나라를 선포한 것과 고난을 겪는 것을 통해서 그의 정체를 파악해야 합니다. 한편, 요한이 돌아온 엘리야라면 이스라엘이 보여야 하는 반은 회개인데, 그들은 요한의 정체를 모르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므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만일 사람들이 요한을 돌아올 것이라고 예언된 엘리야로 알았다면, 이 엘리야가 올 때 보여야 할 회개로 반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이 폭력으로 갇히자 실망한 사람들의 시야가 흐려져서 요한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는 결국 예수님에 대한 오해로 이어집니다. 마태의 독자들 역시 ‘고난’ 때문에 하늘나라를 이해하는 시야가 흐려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독자들은 고난이 하늘나라의 핵심적인 요소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은 선지자이기 때문에 폭력에 의한 고난을 경험합니다. 요한의 고통은 그가 선지자임을 증명합니다. 무엇보다도 12절은 하늘나라의 특징이 고난임을 알립니다.

 

예수님과 요한의 정체(16-19)

천국 백성은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럽고 존귀하며 행복한 사람입니다. 세상의 영광으로는 천국 백성의 영광을 묘사할 것이 없습니다. 세상의 행복으로는 천국 백성의 행복을 표현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국 백성은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16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18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19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16-19)

 

이 시대는 요한과 예수님을 모두 거절했습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심술을 부르면서 결혼식 놀이와 장례식 놀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아이들과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를 시장에 앉아서 다른 아이들을 부르는 아이들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16). 마태복음에서는 부정적인 의미에서 이 세대는 예수님과 요한을 반대한 자들입니다(12:39-42; 16:4; 17:17; 23:36; 24:34). 요한이 하늘나라를 선포했으므로 이들이 요한을 거부한 것은 하늘나라를 거부했다는 뜻입니다. 이 세대는 시장에서 놀이하는 아이들에 비유됩니다. 시장은 공공장소를 가리킵니다. 한쪽 아이들은 다른 쪽 친구들이 춤을 추도록 피리를 연주하고, 울도록 애곡했습니다(17). 전자는 결혼 놀이를, 후자는 장례식 놀이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친구들에게 춤과 애통을 요구하는 쪽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17-19절에서 요한과 예수님께서는 어느 쪽 아이들에 해당합니까? 첫째, 견해는 요한과 예수님을 놀이를 요청하는 쪽, 이 세대를 놀이에 반응하지 않는 아이들로 보는 것입니다. 피리를 불고 애곡한 아이들은 예수님과 요한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피리를 연주해도(구원의 즐거움을 상징함) 반응하지 않고, 요한이 애곡을 해도(요한의 수도적인 삶을 상징함) 이 세대는 전혀 반응하지 않습니다. 둘째 견해는 피리를 연주하고 애곡하는 아이들을 이 세대로 반응하지 않는 아이들을 요한과 예수님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둘째 견해가 적절합니다. 첫째, ‘이 세대’는 ‘부르는 아이들’로서 자신들의 놀이에 참여하지 않는 것에 불평합니다. 당시의 세대는 자신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는 요한과 예수님에 대해 불평했습니다. 둘째, 아이들 요구한 순서는 ‘피리-춤’과 ‘애곡-울음’이었는데 만일 아이들이 요한과 예수님을 가리킨다면 순서가 요한과 예수님께서 활동한 순서와 정반대합니다. 춤과 울음을 요구한 이 세대는 춤을 추기보다 금욕적인 삶을 산 요한에 대해 불평했습니다. 울기보다 구원의 잔치와 같은 분위기로 반응하는 예수님(9:14-17)에 대해 불평했습니다. 이와 같이 악한 세대는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반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요한과 예수님의 활동에 대해 불평했습니다.

사람들의 불만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의 행위로 옳은 것으로 평가 받습니다(19). 문자적으로 지혜가 ‘그녀의 행위들에 의해’ 의롭게 된다고 했을 때(눅 7:35에는 ‘행위’ 대신 자녀들로 나옴), 이 지혜의 행위는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 계획에 따른 행위 혹은 요한과 예수님의 가르침의 결과를 의미할 수 있고, 성육신의 지혜(잠 8:32-33)인 예수님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만일 둘째 견해를 따라 그리스도의 행위를 지혜의 행위로 본다면, 예수님께서는 구약에 나온 지혜입니다. 마태는 19절에서 지혜를 언급하고 나서 자연스럽게 25-30절에서 지하에 반응하지 못한 사람들의 운명을 설명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왔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반응하지 않았지만, 지혜인 예수님의 행위는 그를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입증합니다. 예수님께 반응한다는 것,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사람들이 원하는 희망에 예수님을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반응하는 것이 우선돼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초청에 응답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했고,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이 땅에 임하게 하려고 수고하셨습니다. 문제는 전혀 반응하지 않는 이 세대였습니다. 이 세대는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말씀을 전하며 세례를 베풀 때는 미친 사람 취급을 했고,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할 때는 타락한 세속주의자 취급을 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도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마치 장터에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 치지 않는 모습과 같습니다. 결혼식 때 기뻐해 주지 않고, 장례식 때 슬퍼해 주지 않는 사람들처럼, 이 세대도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러나 응답하지 않는 세대를 향하여 주님께서는 여전히 피리를 불고 계십니다. 믿음 있는 자를 찾기 위해 지금도 애절하게 피리를 불고 계십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천국을 소개하고 그것에 들어오도록 초청하십니다. 기쁨으로 천국을 받아들릴 것인지 아니면 거부할 것인지 태도를 분명히 하라고 응답을 촉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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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1-01)


메시아를 향해 질문하는 세례 요한

마태복음 11장 1-10절


신뢰하던 사람을 신뢰할 수 없을 때나 믿었던 사람을 의심하게 될 때, 우리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의심에서 믿음으로 돌이키는 첫째 단계는 자신의 곤경을 주 예수께 직접 가져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자세가 옳은 것인지 질문하는 것은 전혀 죄가 아닙니다.

 

이제 11-12장에서는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다양한 반응들을 소개합니다. 예수님을 증거 했던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사역에 대해 직접적으로 보질 못했습니다. 보내 예수님께 오실 메시아가 맞는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듣고 본 그대로 전하라고 하신 후에 세례 요한 사역의 중요성을 말씀하십니다.

 

사역에 대한 요약(1)

제자는 스승을 따르고 그의 가르침을 배우는 자이며,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그렇게 스승께서 가신 길을 따라가면서 그 스승을 닮아가는 이들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을 훈련하여 추수를 위해 보내시면서 천국 복음을 어떻게 증거하고 전할 것인지, 그리고 수반되는 어려움과 핍박 그리고 사람들의 반응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준비합니다.

 

1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기를 마치시고 이에 그들의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1)

 

본 절은 예수님께서 10장의 제자 파송 강화를 마무리하는 구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불러 권능을 주시며, 천국 사역에서 마주할 다양한 현실들을 생생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을 위한 가르침을 마치고 또다시 가르치고 전도하기 위해 여러 동네로 떠나가십니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제자 파송과 사역 내용이 소개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마가복음(6:12-13)와 누가복음(9:6)는 짧게나마 그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치는 사역을 보고합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분리되어 홀로 갈릴리 마을들에 가서 사역하신 것으로 두 번째 강화를 매듭짓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파하시고 연약한 자들을 치유하셨습니다. 또한 그 제자들도 예수님과 사역을 동일하게 진행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사역이 마무리 되어 갈 때, 새로운 이야기의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이제 새로운 무대(11-12장)를 준비하는 것에 초점을 둡니다.

 

세례 요한의 두 가지 질문(2-6)

전쟁터에 나가서 죽었다고 통지가 왔던 아들이 살아서 돌아왔다면, 대부분 믿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아들 ○○이 맞냐?’라고 여러 차례 묻고 확인하고 또 확인할 것입니다. 본문에도 세례 요한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사역을 듣고서, 다시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메시아에 대해 질문하고 있습니다.

 

2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6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2-6)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첫 만남은 요단강이었습니다. 그 후 요한의 투옥 사실이 갑자기 소개됩니다(4:12). 투옥 사유는 요한이 헤롯 왕가의 스캔들을 꼬집어 헤롯의 눈엣가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요한은 서사 무대에서 점점 사라지고 예수님의 사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얼마 후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 나와 금식에 대한 문제를 질문합니다(9:14).

본문에서는 감옥에 투옥되어 있던 세례 요한의 공식적인 반응을 소개합니다. 그는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께서 펼친 그간의 사역을 들었습니다. 마태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들었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에는 예수님이 구약의 예언들을 성취하는 그 메시아임이 사역을 통해 확증되었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 일은 가르침, 복음 전파, 그리고 병고침을 통해 천국을 가져오는 일입니다. 요한이 직접 확인하지 못한 것들이었습니다.

 

(1) 요한의 질문들(2-3)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분이 당신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요한이 생각하고 기대한 메시아 사역은 그가 했던 ‘주의 길을 예배하는 회개와 세례 사역’에 나타나 있습니다. 즉 그는 메시아가 와서 손에 키를 들고 타작해 알곡은 들이고 쭉정이는 영원한 불에 태우는 구원과 심판의 사역을 하실 것으로 기대했습니다(3:12). 하지만 감옥에서 들은 예수님의 사역은 그 기대와 사뭇 달랐습니다. 요한은 임박한 종말과 메시아의 심판의 사역에 무게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두 번째 질문으로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덧붙입니다. 요한은 자기가 확신한 메시아 사역을 간절히 기대하는 심정에서 이 질문을 던졌을 것입니다. 마태는 지금 요한의 질문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는 사실을 다시 확고히 하고 있습니다.

 

(2) 예수님의 대답(4-6)

예수님께서는 직답 대신 현답(賢答)을 주십니다. 우선 요한의 제자들에게 그들이 지금까지 ‘듣고 보는 것’을 그대로 전하라고 하십니다. 순서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산상수훈의 가르침(듣고)과 곧이어 등장했던 예수님의 사역(보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앞서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금식에 대한 질문을 한 것을 볼 때, 그들은 예수님과 오랫동안 동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지금까지 본 것을 여섯 가지 일들로 말씀해주십니다. 전부 이사야의 예언을 반영합니다(순서대로 사 29:18; 35:6; 25:4; 29:18; 26:19; 61:1). 세례 요한도 등장할 때, 마태복음 3:3에서 이사야 40:3의 예언을 인용한 바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련의 일들이 전부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하는 메시아의 사역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세례 요한의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더욱 확신을 심어주시려고 자신으로 인해 실족하지 않는 자가 복되다는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세례 요한의 실족을 염려해서가 아닙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현장의 제자들에게 둘려주시는 말씀이고, 궁극적으로 마태복음을 읽는 모든 성도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기적을 보면서 실족하는 사람들은 드물 것입니다. 하지만 장차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앞에서는 이 말씀이 더욱 실감나게 들릴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제자들로부터 예수님의 대답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 참수로 순교를 당했을 것입니다(14:1-12).

 

세례 요한에 대해 말씀하신 예수님(7-10)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를 보려고 광야로 나갔으면서도 그가 선포한 메시아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세상적인 관심사에 사로잡혀 말씀 앞에 나아갈 때 그 말씀이 가리키는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7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9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10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7-10)

 

요한의 의심과 솔직한 질문은 주변 사람들에게서 그의 신앙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뒤에 모인 사람들에게 세례 요한이 어떤 사람인지 말씀하십니다.

 

(1) 광야의 세례 요한(7-9)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자리를 떠난 후,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향해 요한과 관련해 말씀을 좀 더 이어가십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향해 ‘너희는 무엇을 보기 위해 광야에 나갔더냐?’라는 질문을 던지십니다. 이 질문은 세 번 반복되는 수사적 질문입니다(7,8,9). 질문을 받은 무리 중에는 요한이 광야의 소리로 사역할 당시 회개의 세례와 죄 사함을 받기 위해 갔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과 온 유대 사람들이 광야로 몰려들었습니다(3:5). 그때 그 감정을 다시 들춰내듯 질문하십니다. 도대체 그들은 왜 광야로 몰려갔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질문에 또 다른 질문으로 답변하는 수사적 형식으로 무리의 마음을 꿰뚫으십니다. 질문의 답은 모두 ‘아니다’로 유도됩니다. 먼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러 나갔느냐고 물으십니다. 여기서 ‘갈대’가 누구 또는 무엇을 지칭하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대개 ‘요한’으로 해석합니다. 예수님께서 소개하시는 이미지의 정반대가 요한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는 우유부단함을 상징합니다. 요한은 왕실 권력의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죄를 지적했습니다. 그의 삶은 세속에 물들지 않은 정결한 삶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무리가 광야로 나가 바로 그 요한을 본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과 답변에 나오는 은유는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은 왕궁에 있다고 하시며 대상을 구체화해주십니다. 향락과 권력에 심취한 채 화려한 삶을 영위하는 자들은 광야가 아닌 왕실에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헤롯 안티파스가 있습니다. 광야의 요한은 그와 정반대로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3:4)이었던 금욕적 삶을 살았습니다. 무리가 광야에서 마주했던 인물은 광야의 걸인과 같은 초췌한 몰골의 요한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째 질문과 함께 말씀하시는 비유는 ‘선지자’입니다. 무리에게 선지자를 보러 간 것이냐고 물으십니다. 이번에는 긍정적인 대답 ‘맞습니다’를 기대합니다. 모두가 요한을 선지자로 생각했습니다. 로마의 압제와 부패한 성전 유대교로부터 당하는 착취는 서민 유대인 정서에 해방을 가져올 메시아를 향한 열망을 부풀게 했습니다. 개중에 ‘혹 세례 요한이 메시아는 아닐까’라고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뒤섞인 기대와 열망이 그들을 광야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요한을 가리켜 ‘너희가 기대한 선지자보다 훨씬 나은 선지자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떤 선지자보다 낫다는 말입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의미를 분명히 하려고 말라기 3:1을 인용하십니다. 말라기 본문은 하나님의 1인칭 시점으로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 할’ 것으로 소개하는 반면, 예수님의 인용은 같은 1인칭 시점이지만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고 소개됩니다. 메시아인 자신을 강조하시고 또 요한이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겠다고 약속하신 ‘그’ 선지자임을 강조하십니다. 그의 사명은 유일하며 특별합니다. 그래서 다른 선지자보다 훨씬 빼어납니다. 오랜 역사적 침묵을 깨고 등장한 선지자, 오랜 역사적 어둠을 뚫고 들어오는 한 줄기 빛, 오랜 역사적 부패를 씻기 위해 하늘에서 온 정결한 소리로서 메시아의 길을 준비한 그 선지자입니다. 요한은 천국의 도래를 가장 먼저 알았던, 세상 권력과 화려함에 오염되지 않은 순결한 메시지의 발화자였습니다. 그가 바로 빈들에서 외치는 광야의 소리입니다. 비록 불의한 권력에 의해 옥에 갇혀 있지만, 그의 사명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그 증거가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입니다. 요한은 역사적 대변곡점에 우뚝 서 있었던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일에 모든 생애를 불태운 선지자입니다.

 

(2) 선지자 중 최고 선지자(10)

요한이 예수님께서 ‘오실 그 메시아’(3)인지 묻고,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메시아 앞에 올 바로 ‘그 선지자’라고 답을 주신 셈입니다. 즉, 요한이 ‘그 선지자’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실 그’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절망을 소망으로 변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하러 오신 구약 성경의 약속된 메시아이십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께서 구약에서 약속하신 메시아가 맞는지 의심하였습니다. 당시 대부분 사람들은 메시아를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줄 이로 생각했고, 세례 요한 역시 마태복음 3장 11-12절에 그리스도를 불과 성령으로 알곡과 쭉정이를 나누는 심판의 세례를 베푸는 자로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회를 변혁하거나 심판하기보다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거나 병자를 고치는 이를 주로 하셨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 대한 이런 의문은 당연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질문을 한 요한에게 예수님께서는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이사야 35장 5-6절을 인용해서 성실하게 대답하여 주십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게 누구든지 자신으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실족하지 않는다라는 것은 말씀에 대한 불신을 가지고 그 권위에 도전하다가 심판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심판을 받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찬 안식을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을 믿는 모든 자가 하나님 나라에 평안에 참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체적 정서적 사회적 경제적 영적인 모든 절망을 치유하시고 소망으로 바꾸신 분입니다. 오늘 우리를 절망하게 하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그런 사항 속에서도 주님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붙들고 말씀대로 오신 예수님을 발견하고 예수님 안에서 하늘나라의 소망을 발견하시는 주의 백성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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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8-02)


압살롬의 죽음을 슬퍼하는 다윗

사무엘하 18장 19-33절


미국 서부 개척 시대에는 수많은 사람을 살인한 유명한 악당 총잡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포악하기 때문에 그의 목에는 많은 포상금이 걸려 있었습니다. 어느 날인가 그 악당이 잡혔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그 지역 사람들은 모두 기뻐하지만, 한 소녀만은 슬퍼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울고 있었던 이유는 그 악당이 바로 아버지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때로는 좋은 소식이 개인에 따라 슬픈 소식이 되기도 합니다.

 

마하나임에서 모은 군대를 이끌고 압살롬의 군대와 싸우기 위해서 출정하려던 다윗은 신하들의 만류로 전쟁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다윗의 군대는 에브라임 숲의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압살롬의 군대를 이기고 압살롬은 숲속을 헤매다 머리카락이 나무에 걸려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고 맙니다. 이를 안 입은 다윗의 명령을 어기고 압살롬을 죽입니다. 그의 죽음으로 반란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전령의 선발(19-23)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승리의 소식을 듣지 못한 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들이 지금도 우리 주위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어떻습니까? 갖가지 이유를 대며 요압처럼 복음 전파를 막고 있진 않습니까? 복음을 맛본 우리는 아히마아스처럼 지금 당장 복음을 전하려 해야 합니다.

 

19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빨리 왕에게 가서 여호와께서 왕의 원수 갚아 주신 소식을 전하게 하소서 20요압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오늘 소식을 전하는 자가 되지 말고 다른 날에 전할 것이니라 왕의 아들이 죽었나니 네가 오늘 소식을 전하지 못하리라 하고 21요압이 구스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본 것을 왕께 아뢰라 하매 구스 사람이 요압에게 절하고 달음질하여 가니 22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다시 요압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아무쪼록 내가 또한 구스 사람의 뒤를 따라 달려가게 하소서 하니 요압이 이르되 내 아들아 너는 왜 달려가려 하느냐 이 소식으로 말미암아서는 너는 상을 받지 못하리라 하되 23그가 한사코 달려가겠노라 하는지라 요압이 이르되 그리하라 하니 아히마아스가 들길로 달음질하여 구스 사람보다 앞질러가니라(19-23)

 

전쟁에는 승자가 없습니다. 아들과 아비의 전쟁에서 승리가 어디 있으며, 왕의 아들의 부고(訃告)를 전해야 하는 승리가 왕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아들을 죽여야 이기는 전쟁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짓은 역사 내내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긴 자가 독식하는 세상은 정상이 아닙니다.

 

(1) 아하마아스의 자원(19-20)

압살롬이 죽음으로써 반란이 진압되자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이 소식을 왕에게 빨리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원래 예루살렘에서 일어나는 정보를 다윗에게 전달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으로 후새가 알려준 정보를 다윗에게 전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하자 바로 다윗에게 알리겠다며 요압에게 허락을 구합니다. 기쁜 소식을 하루라도 빨리 왕에게 알리고 싶어 하였습니다. 하지만 요압은 오늘 소식을 전하지 말고 좀 기다렸다가 다른 날 전하라고 권합니다. 왜냐하면 현재 상황이 다윗에게는 그다지 반갑고 기쁜 소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록 압살롬을 이겨 전쟁이 끝나고 왕좌는 지켜냈지만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요압은 다윗이 압살롬을 사랑하고 그가 살아오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아는 요압은 자신과 한편인 아히마아스가 혹시라도 왕의 아들의 죽음을 알려 왕의 미움을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염려하여 아히마아스를 만류합니다. 요압은 다윗의 이런 간절한 마음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될 압살롬을 가차 없이 죽여버린 것입니다.

 

(2) 구스 사람 전령(21)

대신에 요압은 구스 사람을 하나 뽑아서 다윗에게 소식을 전하라고 보냅니다. 이집트 남쪽 지역에 있는 구스는 현재의 수단으로 구스 사람은 외국인 용병이었습니다. 요압은 다윗이 사울과 이스보셋의 죽음을 알린 사람들을 처벌한 일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부하들이 압살롬을 죽였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다윗이 그 소식을 전한 사람에게 어떤 해를 가하거나 원한을 품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혹시 처벌을 해도 무관한 외국인 용병 구스 인을 보낸 것입니다.

 

(3) 아히마아스의 두 번째 자원(22-23)

하지만 아하마아스는 이런 요압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해서 자신도 보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에 요압은 아히마아스에게 도대체 왜 그렇게 가고 싶어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하고, 이 소식을 전해도 다윗은 상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설득합니다. 하지만 아히마아스는 이런 요압의 설득에도 계속해서 보내달라고 요청하였고 요압은 할 수 없이 허락합니다. 아히마아스는 허락을 받고 바로 달려가는데, 구스 사람이 가는 길과 다른 길로 빠르게 달려가서 구스 사람을 앞지릅니다. 대부분 학자들은 구스 사람은 지름길이지만 달리기 어려운 숲길을 택한 반면, 아히마아스는 좀 돌아가는 길이지만 달리기 쉬운 들길을 선택한 것으로 봅니다. 아히마아스가 이렇게 다윗에게 먼저 소식을 전하려고 애쓴 것은 좋은 소식을 전하여 상을 받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후에 그가 자신에게 불리한 정보는 알리지 않는 것을 보면 이런 그의 생각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요압은 이런 아히마아스의 생각을 모르고 말린 것입니다.

 

다윗이 전쟁의 소식을 기다림(24-27)

우리가 교회에서 설교를 듣고 매일 성경을 읽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더 분명히 할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영적 곤고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 배고픔과 목마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만 해결됩니다. 한 주간의 삶이 아무리 고단해도 말씀을 통해, 기도를 통해 주님을 만나기만 하면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24때에 다윗이 두 문 사이에 앉아 있더라 파수꾼이 성 문 위층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보니 어떤 사람이 홀로 달려오는지라 25파수꾼이 외쳐 왕께 아뢰매 왕이 이르되 그가 만일 혼자면 그의 입에 소식이 있으리라 할 때에 그가 점점 가까이 오니라 26파수꾼이 본즉 한 사람이 또 달려오는지라 파수꾼이 문지기에게 외쳐 이르되 보라 한 사람이 또 혼자 달려온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도 소식을 가져오느니라 27파수꾼이 이르되 내가 보기에는 앞선 사람의 달음질이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의 달음질과 같으니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는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을 가져오느니라 하니라(24-27)

 

아히마아스는 요압이 만류하는데도 승전보를 속히 전하고 상을 얻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압살롬의 신변에 대한 다윗의 질문은 회피합니다. 좋은 소식은 자기가 전하고 궂은 소식은 떠넘기는 비겁한 태도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이긴 소식이나 생존한 소식이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이유입니다.

 

(1) 먼저 달려오는 사람(24-25)

그때 다윗은 성의 두 문 사이에 앉아 전쟁과 압살롬에 대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아히마아스가 마하나임 성 근처에 나타났고, 성문을 지키는 파수꾼이 그를 발견하게 됩니다. 누군가 혼자 열심히 달려오는 모습을 본 파수꾼은 다윗에게 소식을 전달하기 위해 사람이 오고 있다고 보고합니다. 고대 전쟁에서는 사람이 소식을 전달했기 때문에 먼저 사람을 보내어 승리와 패배의 소식을 알리고, 그 후에 본진이 왕궁으로 귀환하였습니다.

 

(2) 두 번째 달려오는 사람(26)

이렇게 한 사람이 열심히 달려 가까이 왔을 때, 파수꾼은 저 멀리서 또 한 사람이 달려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실도 왕에게 보고하자 다윗은 그 사람도 전령이라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3) 아히마아스(27)

처음 사람이 성에 가까이 왔을 때 파수꾼은 그가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라는 것을 알았고 이 사실을 다윗에게 알리자 다윗은 아히마아스가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좋은 사람이란 다윗에게 충성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충성스러운 사람이 열심히 달려오는 것은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다윗은 아히마아스를 희망적인 마음으로 맞이하게 됩니다.

 

전령의 보고(28-33)

당신은 정말로 항상 기뻐합니까? 이 땅에는 희로애락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기쁘고 즐거울 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속상하고 슬플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속상하고 슬플 때에도 기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복음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생각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를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아는 자는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에게도 그 복음을 알려 줘야합니다.

 

28아히마아스가 외쳐 왕께 아뢰되 평강하옵소서 하고 왕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이르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리로소이다 그의 손을 들어 내 주 왕을 대적하는 자들을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 29왕이 이르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하니라 아히마아스가 대답하되 요압이 왕의 종 나를 보낼 때에 크게 소동하는 것을 보았사오나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나이다 하니 30왕이 이르되 물러나 거기 서 있으라 하매 물러나서 서 있더라 31구스 사람이 이르러 말하되 내 주 왕께 아뢸 소식이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왕을 대적하던 모든 원수를 갚으셨나이다 하니 32왕이 구스 사람에게 묻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구스 사람이 대답하되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청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33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28-33)

 

다윗이 정말 궁금한 것은 승리 소식이 아니라 아들이 무사하다는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압살롬의 전사 소식을 듣지만, 그 소식을 전한 사자를 해할 수 없었습니다. 암논에 이어 사랑한 아들 압살롬까지 잃었습니다. 권력을 남용하고 하나님의 왕 되심을 인정하지 않은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1) 아히마아스의 보고(28-30)

아히마아스는 왕에게 오자 샬롬을 외치고 땅에 엎드려 절합니다. ‘평강 하옵소서!’는 히브리어로 샬롬입니다. 평강을 외친다는 것은 매우 긍정적인 표시로 그는 다윗이 물어보기도 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면서 여호와께서 왕의 원수를 왕의 손에 넘겨주셨다고 말합니다. 압살롬의 부대를 이겼다고 보고하는데, 아히마아스는 제사장으로서 전쟁 승리의 공을 여호와께 돌리며 감사의 찬양을 돌린 것입니다. 이런 승리의 소식에 다윗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대신 압살롬의 안부를 묻습니다. 이것은 다윗에게는 승리 소식보다는 아들 압살몸의 생사여부가 더 중요한 문제였음을 알려줍니다. 이에 대해 아히마아스는 답변을 회피합니다. 자신이 요압의 명령으로 소식을 전하러 떠날 때 어떤 소동과 웅성거림은 있었지만, 그것이 무슨 일인지 확인하지 못하고 요압의 명령을 따라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바로 뛰어왔다는 것입니다. 이런 아히마아스의 대답은 곤란한 답변은 피하려는 술수입니다. 아히마아스는 왕이 아들의 죽음 소식을 좋게 여기지 않을 것이라고 한 요압의 말에 안 좋은 소식은 구스 인이 전하게 하고 자신은 숭리의 좋은 소식만 전하여 왕의 환심을 사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구스인을 앞질러 다윗에게 도착하여 마치 자신은 압살롬의 죽음을 미처 알지 못하고 다음에 도착하는 사람보다 먼저 출발한 것처럼 거짓말한 것입니다. 이런 아히마아스의 모습은 매우 영악하게 보이며 권력과 상에 대한 강한 탐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압살롬의 소식을 모른다는 아히마아스의 말에 다윗은 더 이상 질문하거나 아히마아스를 칭찬하지 않고 바로 구스 사람을 부릅니다. 현재 다윗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압살롬의 생사여부이기 때문입니다.

 

(2) 구스 사람의 보고(31-32)

부름을 받은 구스 인도 동일하게 승리를 전달합니다. 이어서 다윗은 그에게 압살롬의 안부를 물었고 구스인은 압살롬의 죽음을 간접적으로 알립니다. 앞을 대적하이 일어나는 모든 왕의 원수들은 그 청년처럼 되기 위한다는 말은 압살롬이 벌을 받아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스인은 다윗의 심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용감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슬퍼하는 다윗(33)

압살롬의 죽음 소식을 들은 다윗은 몹시 괴로워하며 성문 위층으로 올라가 압살롬의 죽음을 애곡합니다. 그는 ‘내 아들 압살롬아’를 네 번이나 반복하여 외치고 자신이 대신 죽는 것이 나았을 것이라며 깊은 슬픔에 잠깁니다. 다윗은 압살롬에 대해서는 사울과 요나단처럼 애가를 불러 죽음을 기념할 수도 없었고, 아브넬처럼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줄 수도 없었습니다. 비록 아들이지만 반역죄를 지은 죄인이기 때문에 왕으로서 그의 죽음에 대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다만 아버지로서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슬퍼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이런 다윗의 모습은 이전에 아들을 잃고도 씩씩하게 목욕하고 식사하며 일상으로 바로 돌아온 중년의 자신만만하던 다윗의 모습과 대조됩니다. 현재 다윗의 모습은 가장 유능하고 아름다우며 장성하여 자신의 뒤를 이을 기둥 같은 아들을 잃고 실의에 빠져 슬퍼하는 노년의 다윗의 모습입니다. 그는 비록 하나님의 은혜로 왕좌는 지키게 되었지만,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을 잃음으로 상처뿐인 영광이 된 것입니다. 아마 다윗은 압살롬의 죽음을 애곡하면서 자신의 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가슴을 치고 통곡하였을 것입니다. 만일 내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가정에 이런 피비린내 나는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하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다윗에 대한 사랑이 깊었던 만큼 그에 대한 벌도 무거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소식마저 더할 나위 없는 소식은 아닙니다. 누군가는 패하고 있는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늘 나에게만 좋은 소식에 대해서 겸손해야 합니다. 미안해해야 합니다. 때로는 부끄러워하기도 해야 합니다. 참 복음은 자기를 버려 우리를 살리신 그리스도의 소식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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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09-01)

 


지혜자와 어리석은 자의 삶

잠언 9장 1-18절


 

지혜자의 삶과 어리석은 자의 삶은 시작이 비슷하게 출발합니다. 처음 삶의 여정을 시작할 때는 아주 사소한 삶의 태도에 따라 지혜자의 삶으로 나가느냐, 어리석은 자의 삶으로 나가느냐가 결정됩니다. 이렇게 그 시작은 지극히 작은 차이지만, 어느 삶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 끝은 생명을 얻는 길(잠 9:6)과 죽은 자들이 떨어지는 길(잠 19:18)로 나뉘게 됩니다.

 

  • 지혜와 우매가 각각 자신들의 연회에 오라는 초대장을 내밀 때 나는 어떤 초대에 응할 것입니까? 두 여인의 초청이 겉으로 보기에는 흡사하지만 연회의 준비, 음식, 초대의 결과는 극과 극의 대조를 이룹니다.

 

부록(05) : 지혜로운 여인의 초대(1-6)

오늘날 우리는 지식과 정보가 넘쳐나고 엄청난 속도로 기술이 발전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우리가 이전 시대 사람들보다 더 지혜롭고 명철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혜로 우리를 견고하게 세워줍니다. 그러니 생명의 지혜를 붙들어 견고히 서야 합니다.

 

1지혜가 그의 집을 짓고 일곱 기둥을 다듬고 2짐승을 잡으며 포도주를 혼합하여 상을 갖추고 3자기의 여종을 보내어 성중 높은 곳에서 불러 이르기를 4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5너는 와서 내 식물을 먹으며 내 혼합한 포도주를 마시고 6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 명철의 길을 행하라 하느니라(1-6)

 

1-6절까지는 지혜의 여인이 마련한 초대를 묘사합니다. 지혜는 일곱 기둥으로 받쳐진 완벽한 집을 짓고 큰 연회를 베풀어 사람을 초청하려 합니다. 또 손님을 위해 푸짐하고 아낌없는 음식과 마실 것을 준비합니다. 향신료를 섞어 풍미를 높인 포도주와 고기는 잔치에서 최상의 음식을 상징합니다. 이러한 지혜의 손님맞이는 7장의 음녀가 자기 침대를 고가의 침대보와 이불로 장식하고 향수를 뿌려 자신의 먹잇감을 꾀려고 준비한 모습과 대조적입니다(7:16-17). 최상의 잔치를 준비한 지혜는 여종들을 보내어 성중 높은 곳에서 초대의 말을 외치게 하여 성안의 모든 사람이 지혜를 얻을 기회를 줍니다. 이처럼 지혜가 성의 높은 곳에서 모든 이에게 전파되는 사건은 하나님의 말씀이 높은 곳에 있는 성전에서 선포되어 만국의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사건을 상기시킵니다. 특히 지혜가 초청하는 손님은 어리석고 분별력이 결여된 자들입니다. 지혜는 그들에게 두 가지를 권고합니다. 첫째 명령은 “지혜가 베푼 연회에 와서 음식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라”는 것입니다. 연회와 연회에서 제공되는 음식은 지혜가 사람에게 주는 유익과 선물의 상징적 표현입니다. 지혜가 마련한 최상의 음식을 먹고 마신 자는 그 결과로 한순간의 배부름과 만족이 아닌 생명과 명철의 삶을 얻을 수 있습니다. 둘째 명령은 “어리석음을 버리며 살고 명철의 길을 걸으라”는 것입니다(4:4; 7:2). 아버지가 전하는 지혜의 말을 지키고 생명을 얻으라는 권면과 같습니다. 이 구절들이 말해주듯 어리석음을 버리려면 지혜의 말을 붙잡고 지켜야 합니다. 지혜의 잔치에 응하여 지혜가 주는 분별력을 얻고 그에 따라 살 때 지혜의 삶, 영적으로 살아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여호와 경외가 지혜의 근본(7-12)

지혜란 단지 돈이 되는 정보나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한 지혜는 많은 유익을 누리게 해주지만, 가장 큰 유익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지혜롭지 못한 자가 받는 가장 큰 해는 하나님을 경시하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7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책망하는 자는 도리어 흠이 잡히느니라 8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 9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그가 더욱 지혜로워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라 그의 학식이 더하리라 10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11나 지혜로 말미암아 네 날이 많아질 것이요 네 생명의 해가 네게 더하리라 12네가 만일 지혜로우면 그 지혜가 네게 유익할 것이나 네가 만일 거만하면 너 홀로 해를 당하리라(7-12)

 

7-12절은 앞뒤로 나오는 두 여인의 초대에 응하는 사람을 두 종류(거만한 자와 지혜로운 자)로 나누어 대조하고(7-9), 지혜와 우매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여호와 경외의 유무에 있음을 부각합니다(10-12). 먼저 훈계의 대상으로서 거만한 자와 지혜로운 자에 대해 언급합니다. 7절은 거만한 훈계하지 말고 지혜로운 자를 훈계하고 가르치라고 명합니다. 거만한 자는 빈정대고 조롱하는 미련하고 악한 자를 가리키며 의인은 겸손하고 지혜로운 자를 가리킵니다. 미련하고 악한 자는 자기를 책망하는 사람을 미워하여 도리어 그를 모욕하고 흠을 잡는 등 더 많은 악과 우매한 행동을 저지릅니다. 그러나 지혜롭고 의로운 자는 자기를 훈계하는 목적이 자신에게 유익을 주기 위함임을 알고 있으므로 그 사람을 사랑하고, 그의 교훈을 받아 더 나은 판단력과 더 많은 배움을 얻습니다. 그렇다면 지혜로운 자가 책망을 받아들이는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의 삶에 여호와 경외가 뿌리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9:10의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라는 말은 여호와 경외가 지혜의 출발점이라는 의미이며, 이는 잠언 1-9장 전체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1:7에도 요약된 이 메시지는 9:10에 반복 요약됨으로써 여호와 경외의 주제를 다시금 강조합니다. 어떤 사람의 태도나 지식이나 언행이 사람의 눈에 보기에 지혜롭고 현명하다 하더라도 여호와 경외가 결여된 지식이나 분별력은 하나님이 인정하고 성경이 말하는 지혜와 거리가 멉니다. 한편, 여기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여호와를 아는 것이라고 설명되었습니다. 히브리어로 ‘알다(야다)’라는 동사는 일반적이거나 전문적인 지식을 소유했다는 의미뿐 아니라 어떤 대상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알기 이전에 이미 우리를 알고 계십니다. 시편 139편에서 묘사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개개인의 마음과 생각, 말과 행동을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과 개인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지속함으로써 그가 어떤 분이며, 무슨 일을 행하시는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게 됩니다. 특히 성경이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떤 일을 행하시는지 알려줍니다. 또한,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은 하나님의 성품과 말과 행동이 일치함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그의 명령은 우리가 삶에서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지 인도해줍니다.

여호와 경외를 근본으로 하여 지혜를 얻을 때 그 유익으로 장수의 축복이 약속되었습니다. 잠언과 성경의 다른 책에 나오는 장수의 축복은 건강하고 평안한 삶을 사는 축복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지혜로 인한 유익과 축복을 받는 일차적인 대상은 나 자신입니다. 마찬가지로 미련함으로 인한 해를 받는 대상도 나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현명한 선택이 필수입니다.

 

우매한 여인의 초대(13-18)

혹시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몰래 마시며 즐기는 죄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왜곡하며 쾌락과 이익만을 쫓는다면 그 끝은 틀림없이 파멸과 죽음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소리가 아니라 주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리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13미련한 여인이 떠들며 어리석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14자기 집 문에 앉으며 성읍 높은 곳에 있는 자리에 앉아서 15자기 길을 바로 가는 행인들을 불러 이르되 16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17도둑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하는도다 18오직 그 어리석은 자는 죽은 자들이 거기 있는 것과 그의 객들이 스올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13-18)

 

13-18절은 위 1-6절의 지혜의 여인과 대조되는 우매의 여인을 소개합니다. 이 우매한 여인은 잠언 1-9장의 여러 곳에서 ‘음녀’나 ‘이방 여인’으로 소개된 여인과 같은 유형의 여인입니다. ‘음녀’는 아첨하는 입과 화려한 외모로 거리에서든 광장 모퉁이에서든 유혹할 사람을 기다렸다가 적당한 사람이 오면 적극적으로 그 사람을 꾀는 여자입니다(7:12-13). 9장에서 소개되는 우매한 여인도 음녀처럼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혹하는 여인입니다. 이 여인은 지혜의 여인을 따라 연회를 준비하고 사람들을 초청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제 길을 똑바로 가고 있는 자들 즉, 이미 분별력을 갖고 자기 할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 사람들까지 붙들어 자기 연회에 초청합니다. 더군다나 지혜의 여인과 똑같이 그들에게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고 권고합니다(4,16). 여기서 잘 보여주듯이, 내가 현재 판단력을 갖고 지혜롭게 살고 있다 하더라도 어리석음은 나를 호시탐탐 노리며, 지혜와 똑같은 말을 들려주어 혼동을 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만만해하지 말고 한순간의 미련한 생각과 언행에 빠지지 않도록 겸손하게 또 적극적이면서도 지속적으로 지혜의 초청에 응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매한 여인이 준비한 잔칫상은 어떠합니까? 지혜로운 여인은 최고의 음식을 아낌없이 손수 준비하여 손님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우매한 여인은 남이 수고하여 만든 떡과 음료를 도둑질하여 식탁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여기서 우매의 인색함, 게으름, 남의 수고를 가로채는 뻔뻔함, 불의 등의 악한 성품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도둑질한 물이나 몰래 먹는 떡 즉, 남몰래 저지르는 악의 맛이 꿀맛이라고 평가합니다. 우매의 여인은 이와 같이 손님들의 주의를 돌려 떡과 음료의 맛에 집중하도록 함으로써 그 음식이 도둑질과 불의의 열매라는 사실을 소홀히 여기도록 만듭니다. 우매의 여인의 이러한 거짓말과 유혹에 빠진 예는 몰래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의 돈과 목숨을 빼앗기를 일삼는 강도(2:16-17)나 신앙과 도덕을 저버리고 남의 눈을 피해 음행을 자행하면서 자기들의 만족을 좇는 음녀와 음녀를 찾는 자(7:10-20)에게서 이미 잘 나타났습니다. 와 같이, 악을 행하는 것이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고 설레게 한다는 생각이나 이런 악행의 결과로 원하는 것을 쉽게 손에 쥐고 쾌락을 맛볼 수 있다는 생각은 자신을 어리석음의 수렁으로 밀어 넣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매한 여인의 이 같은 초대에 응한 사람들의 마지막은 무덤과 사망입니다. 이 여인의 연회에 죽은 영혼이 있고 손님들이 이미 음부 깊은 곳에 있다(18)는 말은 그들이 이미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이와 같은 죽음의 결과는 음녀의 꾐에 넘어가거나 음녀를 찾아가는 자에게도 마찬가지라고 잠언의 여러 곳에 기록되었습니다(2:18-19; 5:5-6; 6:33; 7:26~27). 이처럼 우매나 음녀의 초청을 받아들여 불의와 미련함을 버리지 못한다면 결국은 심판과 사망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책망을 싫어합니다. 반면에 지혜로운 자는 책망하는 자를 사랑합니다(잠 9:3b), 마음에 찔림이 있다는 것은 여러분이 지혜로운 자라는 증거입니다. 마음에 뉘우침이 있다는 것은 감사하게도 우리가 어리석은 자의 완고함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반증입니다. 말씀 속에 깨우침을 받아, 어리석은 자의 삶에서 지혜자의 삶으로 변화되는 참 지혜가 임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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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02-04)


능력 있는 아름다운 초대교회

사도행전 2장 37-47절


과테말라에는 인구 2만명의 알모롱가(Almolonga)라는 작은 도시가 있습니다. 이 도시는 범죄율이 매우 높았고 길거리에는 마약과 알코올 중독자가 넘쳤고, 그리고 우상숭배도 심했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터가 범죄율이 급격히 감소했고 중독자들도 거의 사라져 가고, 많은 가정이 회복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언제부터인가 토양까지도 비옥해졌습니다. 그와 같은 변화에는 1974년부터 목숨을 걸고 기도하며 복음 사역을 시작한 마리아노 목사(알모롱가 갈보리교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협박과 생명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치열한 영적 전쟁을 벌였습니다. 이처럼 목숨을 건 치열한 영적 전쟁을 통해, 그 도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를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알모롱가는 말 그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으로 변했습니다. 영적인 개인의 변화는 교회 공동체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교회의 변화는 그 교회가 속한 지역 사회를 변화시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이후 베드로의 설교는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켰습니다. 그 메시지로 변화된 사람들은 3,000명이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이 일로 초대교회는 불같이 부흥했습니다. 그리고 사역에 큰 힘을 얻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들을 중심으로 능력 있는 아름다운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 갔습니다.

 

사람들의 반응(37-41)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듣는 사람들에게 반응을 일으킵니다. 말씀은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켜갑니다. 오순절 이후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예루살렘 사람들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37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37-41)

 

오순절에 예루살렘 다락방에 모인 성도들에게 성령이 임재 하였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성령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또한 충만해져 오순절을 위해 예루살렘에 모인 유대인들에게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 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가이사의 복음이 아니라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습니다. 유대인만의 복음이 아니라 만민을 위한 복음이 선포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사람들을 향해 앞 강에서 보았던 것처럼 이렇게 외쳤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하는 약속을 성취하길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를 죽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나라와 왕이 아니라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나라와 왕을 거절했습니다. 그 순간 오직 하나님만 믿는다고 했던 사람들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고 가장 큰 대적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열심히 경배하고 찬미한 하나님은, 그들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구속하실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들이 고안해낸 우상에 불과 했다는 사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모두 들어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깊이나 열정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에 대한 방향의 문제였습니다.

 

⑴ 예루살렘 사람들의 반응(37)

사도 베드로가 설교를 통해 예루살렘에 모든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에게 회개와 죄 사함을 호소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베드로의 메시지를 진리로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분수령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은 성경이 말하는 회심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마음이 찔렸습니다. 이처럼 말씀은 마음을 찌르고 쪼갭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히브리서 4:12). 메시지를 통해 마음이 찔림을 받을 때, 할 일은 회개할 일입니다. 말씀을 통해 마음이 찔림을 받을 때 망설이지 말고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는 죄인’은 심판대 앞에서 주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회개는 죄인을 의인되게 만드는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예루살렘에 오순절 이후 3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되는 것의 중요한 원동력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듣는 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너희가 예수를 죽였다.’는 말에, 대부분 예루살렘에 없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변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잘 죽었다.’고 생각했고, 아무 저항 없이 허망하게 죽은 것을 보니, 율법에 저주를 받은 자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베드로의 메시지를 들으면서 자신들이 예수를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신들도 그 예수님의 처형 자리에 있었다면, ‘예수를 못 박으라!’고 소리쳤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찔렸습니다.

성령께서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임하셨습니다. 그들은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물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큰 죄를 어떻게 씻을 수 있을까?’라고 묻습니다. 가룟 유다도 마음에 찔렸지만, 그는 결국 자살을 선택했습니다. 가책을 받은 사람들은 베드로에게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물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메시지에는 반드시 반응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반응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의 선포에 반응하던 사람들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를 외쳤습니다.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9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누가복음 3:7-10)

세례 요한의 메시지를 들었던 사람들도 찔림의 반응이 일어났었습니다. 무리들이 세례 요한에게 묻습니다.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눅 3:10)

 

세례 요한은 회개하려는 요단강에 나온 그들에게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삶을 아름답게 살라고 권고했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세례에 참여한 사람들은 삶에 변화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2) 사도 베드로의 권고(38-40)

사도 베드로도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들에게 영적인 권고합니다. 베드로는 진정한 회심이 무엇인지를 잘 설명해 줍니다. 회심은 ‘회개(悔改)’는 어디로부터 돌아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른 삶으로 어딘가를 향해 가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회개는 성도의 과거를 다룬다면, 삶은 성도의 미래를 다룹니다. 진정한 회개는 두 가지가 떨 수 없습니다. 회개에 대한 구체적인 적용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답고 있습니다. 평생 동안 성경 연구에만 힘썼던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은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습니다.

이 병들고 무감각한 문화에서 빠져나오십시오! 여러분이 할 수 있을 때에 어서 나오십시오!(Get out while you can; get out of this sick and stupid culture!)(40/Eugene 譯)

① 회개하는 것(38a)

‘회개’는 잘못된 방법으로 살아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신앙의 깊이와 열정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방향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잘못된 방향에서 바른 방향을 전환한 것입니다. 그 동안 하나님께 대한 모든 죄를 돌이키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촉구했습니다.

② 성령으로 사는 삶(38b)

‘회개’는 세상으로부터 돌아섰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가는 삶이 필요합니다. 잘못된 방향을 고쳐서 바른 방향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 동안 잘못된 방향이 바른 것처럼 살아왔던 것을, 더 이상 나아가지 말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③ 회개하는 영역(39-40)

사도 베드로는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혈통적인 선민주의가 얼마나 하나님 나라의 장애물이었으며, 폭격이었음을 회개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감히 인간이 훼손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모신 것이 진정한 회심이고 예배입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에 기록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설교로 그들을 권고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회심에 대해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권고합니다. 이것은 바로 회심을 하나님의 입장에서 다시 표현한 것입니다. 회개하고 성령을 받으라고 권고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당대 유대인들 만에 축복도 아닙니다.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사람, 모든 세대 그리고 모든 지역에 필요한 사역이었습니다. 죄된 종의 삶으로부터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는 삶으로 돌아서는 것이 곧 구원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천국 피켓을 얻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패역한 세대가 모든 영역에서 자신의 세계관을 주입하고 있습니다.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과거의 하나님을 떠난 모든 세계관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이고, 새로운 하나님의 세계관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⑶ 예루살렘의 회개(41)

사도 베드로는 거절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결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회개하기 위해서는 쉽고 간단한 싸구려 신앙고백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믿는다고 대충 입술의 고백이나 허술한 영접 기도 같은 것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전한 회개의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앙 방법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메시지를 받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그 증표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겠다는 사람들이 쇄도했습니다. 폭발적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일어났습니다. 다음 영적으로 무감각한 문화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그들의 삶은 놀랍게 변화되었습니다. 생활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늘날도 메신저의 설교를 들으면서 반응이 나타납니다. 대체적으로 두 가지 반응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긍정적으로 흡족함을 느끼는 것과 다음으로 부정적으로 마음에 찔림을 받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삶이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지 않음으로 말씀을 통해 찔림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는 초대교회처럼 말씀대로 살길 원해 ‘내가 어찌할꼬?’하는 회개하고 돌아서야 할 것입니다.

 

균형 잡힌 교회(41-42)

폭팔적인 부흥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는 사람들이 변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세상에게 수치를 당할 만큼 어려워졌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탐욕을 위해 기독교가 동원되고, 교회가 이익 단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개인들이 말씀을 통해 회개하면, 다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부흥입니다. 베드로의 메시지를 통한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의 회개는 예루살렘 교회에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41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42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41-42)

 

사도 베드로의 메시지를 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은, 말씀이 마음을 찔렀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의 메시지를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본 41-42절은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온 삶에 대해 요약한 구절입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들의 변화된 삶이 네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 회심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먼저 사도들에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가르친 내용은 예수님의 교훈, 행적,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에 대해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메시아이시고 그리스도이심을 들었습니다(사도행전 4:18, 5:28-31, 9:20-22). 둘째는 받은 말씀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 서로 사랑하며 교제하게 됩니다. 여기서 교제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성도들의 영적 연합을 의미합니다. 더 나가서 다른 모든 사람들을 긍휼이 여기는 삶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소유를 팔아 궁핍한 자를 구제하는 일을 포함한 실천적인 교제까지 나누었습니다(사도행전 2:44-45, 4:32-37). 셋째로, 회심한 사람들은 서로 떡을 떼었습니다. 그래서 식탁의 친교를 나누었습니다. 오늘날도 이스라엘 유대인들은 자신과 동일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떡이란 단어에 ‘그 떡(τη κλασει)’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보아서 ‘주의 만찬’으로 의미한다고 보아야 합니다(사도행전 10:41, 누가복음 24:35). 마지막으로 그러한 변화된 삶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들은 오로지 기도에 힘썼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직전에 예수님의 사도들과 제자들 그리고 여성들이 기도에 힘을 썼습니다(사도행전 1:14).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생겨난 새로운 공동체도 마찬가지로 기도에 힘을 썼습니다. 이러한 전반적인 변화의 삶은 아름다운 교회 생활로 나타납니다.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모이기에 힘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배와 기도와 말씀 생활 그리고 친교와 봉사에 균형을 이뤘습니다. 개인이나 교회 모두 신앙의 균형 감각이 필요합니다. 기도만 하고 말씀을 멀리하거나 그 반대로 말씀만 보고 기도하지 않는다면 안 됩니다. 그들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지지 않았습니다. 모여서 열심히 예배하면서 봉사하지 않는 것도 잘못입니다. 봉사는 하면서도 예배가 소홀하면 안 됩니다. 사람들도 영양소가 풍부한 음식을 골고루 먹어야 건강을 잃지 않습니다. 한쪽만 집중적으로 먹으면 ‘편식(偏食)’이라고 합니다. 편식하는 사람들은 영양결핍을 느낍니다. 항상 균형이 중요합니다. 영적인 부분에서도 같습니다.

영적으로 우리 교회들도 균형 잡힌 신앙 공동체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필요한 것은 균형 잡힌 조화로운 아름다운 신앙입니다.

 

칭찬 받고 부흥하는 교회(43-47)

참된 변화는 놀라운 부흥을 가져옵니다. 초대교회의 이런 영적인 균형은 결과적으로 교회의 부흥을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변화된 사람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43-47)

 

변화된 예루살렘 성도들은 모든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변화가 개인적인 변화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의 변화는 초대교회의 신앙공동체의 변화를 이루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회심은 새로운 가족과 하나님의 공동체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변화는 새로운 교회를 출산하게 된 것입니다. 사도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의 사역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변화는 이 하나님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일어났고, 그 교회를 통해 일어났습니다. 이 공동체의 나타난 현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각자의 소유를 공유하고 또 팔아서 궁핍한 사람들을 구제했습니다. 이런 일이 초대교회만 있었던 일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성령이 임재 하는 곳이나 성령 임재가 강력하게 임했던 시대에는 비슷하게 일어났습니다. 다음으로, 그들은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아마 그 장소는 솔로몬 행각일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 장소는 예수님이 공생애 말기에 자주 가셔서 가르치시며 논쟁했던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 또한 사도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이곳에 모였을 것입니다(5:20,25,42). 이러한 변화된 모습은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구원 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해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초대교회의 성장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한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세상의 비난과 공격 앞에 직면해 있습니다. 물론 그 비판과 공격이 지나치거나 사실과 다른 것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우리는 우리의 잘못에 대한 자책이 필요합니다. 한국 교회와 성도들이 사회로부터 칭송을 받고 그로 인해 복음이 널리 확산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패악한 세대에서 돌아섰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아들에게로 이동한 사람입니다. 이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변화를 이루어가야 합니다.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좋은 성도가 될 때, 그 좋은 성도들을 통해 좋은 교회를 세워갈 수 있습니다. 좋은 교회를 찾아다니십니까? 당신은 좋은 교회의 일원인비다. 당신을 통해 좋은 교회가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가정과 교회 그리고 지역 사회가 당신 때문에 변화가 일어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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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8-01)


아버지 다윗을 반역했던 압살롬의 죽음

사무엘하 18장 1-18절


인간, 즉 우리는 사이의 존재입니다. 그 사이가 관계를 만들어주고 우리를 형성합니다. 그런데 때로 그 둘을 모두 취할 수 없는 사이도 있습니다. 그럴 때 사이는 기회의 다른 표현입니다. 우리의 자리, 우리의 신앙, 우리의 충성의 대상들을 그 사이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걸쳐 있을 곳은 없습니다.

 

압살롬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다윗이 자기 군대를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의 손에 맡겨 내보내면서,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하라고 부탁했습니다. 전쟁이 시작되고, 이스라엘 군대가 패배했습니다. 그리고 압살롬은 노새를 타고 가다가 머리카락이 상수리나무에 걸려 공중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압살롬의 군대와 전쟁하는 다윗(1-5)

수많은 이단적 가르침과 거짓 교사들이 성도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향한 그들의 계략은 날이 갈수록 교묘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세우는 모든 계략을 무너뜨리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편에서 있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 편에 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안에 확고히 거하는 것입니다. 복음 안에 서서 복음으로 충만해지면 자연스럽게 이단적 가르침과 거짓 교사들을 분별하고 그들을 대적할 수 있습니다.

 

1이에 다윗이 그와 함께 한 백성을 찾아가서 천부장과 백부장을 그들 위에 세우고 2다윗이 그의 백성을 내보낼새 삼분의 일은 요압의 휘하에, 삼분의 일은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동생 아비새의 휘하에 넘기고 삼분의 일은 가드 사람 잇대의 휘하에 넘기고 왕이 백성에게 이르되 나도 반드시 너희와 함께 나가리라 하니 3백성들이 이르되 왕은 나가지 마소서 우리가 도망할지라도 그들은 우리에게 마음을 쓰지 아니할 터이요 우리가 절반이나 죽을지라도 우리에게 마음을 쓰지 아니할 터이라 왕은 우리 만 명보다 중하시오니 왕은 성읍에 계시다가 우리를 도우심이 좋으니이다 하니라 4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는 대로 내가 행하리라 하고 문 곁에 왕이 서매 모든 백성이 백 명씩 천 명씩 대를 지어 나가는지라 5왕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 하니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모든 군지휘관에게 명령할 때에 백성들이 다 들으니라(1-5)

 

다윗을 버리고 변절하는 자들이 득세하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다윗과 다윗의 하나님을 선택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윗이 전쟁에 나서지 말도록 만류하였고, 심지어 이방인 암몬은 전쟁 물자를 공급하여 다윗 군대의 사기를 높여주었습니다. 변절과 충성은 동시에 선택할 수 없습니다.

 

(1) 다윗 군대의 편성(1-2a)

다윗은 마라나임에 모인 군사들을 모두 모아 군대를 조직하고 그들 위에 천부장과 백부장을 세웁니다. 그리고 군대를 세 개의 부대로 나누고 한 부대는 요압에게 한 부대는 아비새에게 한 부대는 가드 사람 잇대에게 맡깁니다. 아비새와 요압은 가장 믿을 만한 사촌들이기 때문에 군대장관으로 삼았고, 잇대는 비록 암몬 사람이지만 다윗에게 온전히 충성을 맹세한 믿을 만한 사람이기에 부대를 맡긴 것입니다. 이렇게 부대를 편성한 후에 다윗은 자신도 같이 출전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이런 다윗의 모습은 밧세바와 간통할 때 전쟁에 출정하지 않고 왕궁에서 낮잠 자던 모습과 대조를 이룹니다. 그는 이제 자신의 왕권을 되찾기 위해 예전과 같이 전쟁에 나서려고 한 것입니다.

 

(2) 다윗의 출전을 마는 백성들(2b-4)

하지만 백성들은 다윗의 출정을 막습니다. 그들은 다윗이 출정하게 되면 자신들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다윗만 죽이려 할 것이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말합니다.

 

(3) 압살롬을 위한 부탁(5)

또한 다윗이 자신들 만 명보다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에 남아있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대신 성에 남아 자신들을 지원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결국 다윗은 의견을 받아들여 성에 남았고 대신 출정하는 그들을 배웅해줍니다. 그러면서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한 가지 명령을 내리는데, 그것은 자신을 위해 압살롬을 살려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압살롬을 살려야 할 이유를 몇 가지 이야기하는데 첫째는 자신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압살롬이 자신의 아들이니 좀 봐달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다윗은 압살롬을 아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압살롬이 아직 천지 분간 못하는 아이라서 이런 일을 벌인 것이니 좀 이해해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군대 장관들이 이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해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군대 장관들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결국 모든 백성들에게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비록 압살롬이 자신의 자릴 탐내는 반역자이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차마 죽일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압살롬이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때 박대하던 모습과 대조를 이룹니다. 이전에 아들에게 이런 애틋한 마음을 가졌더라면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키진 않았을 것인데, 너무 늦은 것입니다.

 

압살롬 군대를 이기는 다윗 군대(6-8)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무너뜨리려 하는 악한 세력을 친히 심판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압살롬의 군대를 심판하듯이 하나니 나라를 대적하는 자들을 친히 심판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 이 땅에서 교회를 위협하던 모든 자들은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6이에 백성이 이스라엘을 치러 들로 나가서 에브라임 수풀에서 싸우더니 7거기서 이스라엘 백성이 다윗의 부하들에게 패하매 그 날 그 곳에서 전사자가 많아 이만 명에 이르렀고 8그 땅에서 사면으로 퍼져 싸웠으므로 그 날에 수풀에서 죽은 자가 칼에 죽은 자보다 많았더라(6-8)

 

다윗은 백성들에게는 왕으로서 변절자 압살롬의 세력을 진압해야 했지만, 동시에 압살롬의 아버지로서 그를 보호해야 하기도 했습니다. 다윗은 부하들에게 간청하듯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해달라고 부탁합니다. 나라와 자식 중 아무도 잃고 싶지 않은 다윗의 한계를 드러내는 명령입니다.

 

(1) 에브라임 수풀(6)

다윗 군대는 압살롬 군대와 에브라임 수풀에서 싸우는데, 이 지역은 나무들이 많고 지형이 복잡한 숲으로 전쟁 경험이 많고 계속 요단 동편에 주둔하고 있던 다윗 군대와 요단 동편 지역에서 모인 군대는 이 지형에 익숙하였습니다.

 

(2) 다윗 군대의 승리(7)

반면 압살롬의 군대는 주로 요단 서편 지파들에서 모인 부대로 요단 동편 지형에 익숙하지 않았고, 아마사도 요압만큼 전쟁에 능숙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압살롬의 군대는 다윗의 군대에 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압살롬의 군대에서 이만 명정도가 전사하였는데, 패인은 군대가 사방으로 퍼져서 싸웠기 때문이다. 지형이 복잡하기 때문에 압살롬이 원하는 것처럼 대군을 이끌고 멋지게 정면 승부를 할 수 없었고, 복잡한 숲속에서 결국 군대는 이리저리 흩어졌으며, 이렇게 흩어진 군대를 요압의 군대는 지형지물을 이용한 매복이나 유인 작전 혹은 게릴라전으로 격퇴합니다.

 

(3) 숲에서 죽은 자(8)

8절에서 칼에 죽은 자보다 숲이 죽인 자가 더 많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압살롬은 많은 군사를 데리고 수적 열세에 있는 다윗 군대와 정면으로 붙어 압도적인 힘의 차이로 이기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에 능통한 다윗과 요압은 수적으로 많은 압살롬 군대와 정면으로 붙지 않고 숲으로 유인하여 이겼습니다. 이렇게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계략을 듣지 않음으로 결국 전쟁에서 패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고, 다윗에게 반역한 죄를 심판하시고 다윗을 구원하시기 위해 압살롬의 귀를 막으시고 전쟁에서 패하게 하셨습니다.

 

 

압살롬의 죽음(9-18)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학력이나 재력, 심지어는 외모나 몸매를 자랑하기 위해 부단히 애씁니다. 하지만 성도는 세상 기준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도가 자랑할 것은 오직 예수 십자가 복음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죽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그 은혜를 아는 자는 결코 다른 사람을 우습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남보다 높아지려고 애쓰지 않는다.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자, 교회는 그런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9압살롬이 다윗의 부하들과 마주치니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의 머리가 그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그가 공중과 그 땅 사이에 달리고 그가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나간지라 10한 사람이 보고 요압에게 알려 이르되 내가 보니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에 달렸더이다 하니 11요압이 그 알린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보고 어찌하여 당장에 쳐서 땅에 떨어뜨리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네게 은 열 개와 띠 하나를 주었으리라 하는지라 12그 사람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내 손에 은 천 개를 받는다 할지라도 나는 왕의 아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우리가 들었거니와 왕이 당신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삼가 누구든지 젊은 압살롬을 해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13아무 일도 왕 앞에는 숨길 수 없나니 내가 만일 거역하여 그의 생명을 해하였더라면 당신도 나를 대적하였으리이다 하니 14요압이 이르되 나는 너와 같이 지체할 수 없다 하고 손에 작은 창 셋을 가지고 가서 상수리나무 가운데서 아직 살아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찌르니 15요압의 무기를 든 청년 열 명이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죽이니라 16요압이 나팔을 불어 백성들에게 그치게 하니 그들이 이스라엘을 추격하지 아니하고 돌아오니라 17그들이 압살롬을 옮겨다가 수풀 가운데 큰 구멍에 그를 던지고 그 위에 매우 큰 돌무더기를 쌓으니라 온 이스라엘 무리가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니라 18압살롬이 살았을 때에 자기를 위하여 한 비석을 마련하여 세웠으니 이는 그가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내게 없다고 말하였음이더라 그러므로 자기 이름을 기념하여 그 비석에 이름을 붙였으며 그 비석이 왕의 골짜기에 있고 이제까지 그것을 압살롬의 기념비라 일컫더라(9-18)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큰 승리를 주십니다. 이로써 용서와 긍휼의 약속을 지키셨으며 견고한 왕국을 세우시겠다는 언약을 성취하셨습니다. 반면에 압살롬은 ‘우연히’ 만난 상수리나무 하나 피하지 못하고 ‘하늘과 땅 사이에’ 걸리고 맙니다. 그의 자랑이 그에게 수치를 안겨주었습니다.

 

(1) 나무에 매달린 압살롬(9)

압살롬은 깊은 숲속에서 홀로 떨어져 가다가 큰 상수리나무의 우거진 가지에 머리카락이 걸리고 그 사이에 압살롬이 타고 가던 노새는 그 아래로 그냥 빠져 나가는 바람에 압살롬만 공중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압살롬의 머리카락은 사무엘하 14:26에 따르면 매우 길고 풍성하다고 말하고 있어 머리카락이 나뭇가지에 걸리면 충분히 몸이 공중에 매달릴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결국 그의 가장 큰 자랑거리가 그의 생명을 빼앗아가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2) 보고와 책망(10-11)

이렇게 압살롬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모습을 그곳을 지나던 다윗의 부하들이 발견하였고, 한 사람이 요압에게로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려줍니다. 이들은 아마도 요압에게 속한 부대원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압살롬이 하필이면 다른 부대가 아닌 요압의 부대에 걸린 것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합니다.

보고를 들은 요압은 보고한 병사에게 왜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압살롬을 쳐서 땅에 떨어뜨리지 않았느냐고 묻는데, 이것은 왜 그 자리에서 압살롬을 죽이지 않았느냐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치다’라는 단어 ‘나카’는 단순히 치는 것이 아니라 ‘죽이다’라는 의미로 종종 사용되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3) 발견한 자의 자기변호(12-13)

요압은 그 병사에게 만일 압살롬을 죽였다면 은 열 개와 띠 하나를 주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요압의 말에 병사는 은 천 개를 준다 해도 자신은 왕의 아들에게 손을 대지 않을 것인데, 왕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와 모든 사람들에게 요나단의 목숨을 살려주라고 말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병사는 다윗의 명령에 온전히 충성하며 요압에게 다윗이 압살롬을 살려주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줍니다. 그에게는 은 열 개가 아니라 은 천 개보다도 다윗의 명령이 우선인 것입니다. 그리고 설사 돈이 탐나서 압살롬을 죽인다고 하더라도 다윗이 결국은 모든 사실을 알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은 반역자가 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는 절대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요압에게 보고한 다윗의 신하는 정말로 다윗의 명령을 충실하게 지키는 인물이었습니다.

 

(4) 요압이 압살롬을 죽임(14-15)

하지만 요압은 부하의 말에 반대하며 빨리 압살롬을 죽이기 위해 자신의 부하를 데리고 압살롬이 있는 곳으로 갑니다. 손에 세 개의 막대기를 들고 매달려 있는 압살롬의 가슴 부근을 강하게 쳐서 땅에 떨어뜨렸고, 땅에 떨어진 압살롬을 요압의 무기를 든 청년들, 즉 요압의 호위대 열 명이 쳐 죽입니다. 이것은 철저히 요압의 독단적인 결정에 의해서 벌어진 일입니다. 다윗의 입장에서 압살롬은 비록 반역을 저질렀지만 자신의 아들입니다. 다윗은 이미 밧세바에게서 얻은 아들과 암을 잃었기 때문에 압살롬까지 잃는 아픔을 겪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요압의 입장에서 압살롬은 다윗의 왕권과 자신의 군대장관 지위를 위태롭게 하는 인물입니다. 압살롬의 부대에서는 요압 대신에 요압의 사촌인 아마사가 군대장관이었습니다. 이것은 압살롬이 왕이 되면 요압은 압살롬의 왕국에서 실각하거나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압은 자신이 다윗과 화해시키기 위해서 다윗의 미움을 받을 각오를 하면서 데리고 온 압살롬이 자신을 배신하고 자신의 지위를 위태롭게 하는 것에 대해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만일 살려두면 압살롬이 언제 또다시 반역을 일으킬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한번 시도하여 거의 성공할 뻔하였고 시간이 지나 다윗이 점점 늙게 되면 아무래도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 왕이 될 확률이 높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설혹 반역을 일으키지 않더라도 압살롬은 첫째 아들이고 수완이 좋기 때문에 다윗이 죽은 뒤에 왕이 될 확률이 높습니다. 압살롬이 왕이 되면 압살롬의 왕궁에서 요압의 입지는 거의 없게 됩니다. 요압이 압살롬을 다윗에게로 데리고 왔을 때만 해도 자신이 압살롬의 후원자가 되어 다윗이 죽은 후에 압살롬을 자신의 손에 두고 뒤에서 조종하며 이스라엘의 최고 권력을 누리려 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의심이 신빙성 있는 것은 후에 다윗이 죽기도 전에 아도니야를 왕으로 추대하여 권력을 쥐려고 시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재 상황을 보면 이런 애초의 계획은 전혀 실현 가능성이 없고 오히려 압살롬이 자신에게 매우 위협이 되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요압은 기회가 생겼을 때 압살롬을 죽여버린 것입니다. 그는 왕명보다는 자신의 이익이 우선이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선인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도 다윗의 명령을 어기고 개인적으로 원수를 갚기 위해 아브넬을 죽인 적이 있습니다. 요압은 현재 다윗의 군대 장관이기 때문에 다윗도 자신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이렇게 대놓고 다윗의 명령을 어긴 것입니다. 이런 요압의 모습은 다윗의 명령에 순종하던 다윗의 부하와 대조를 이룹니다. 요압은 자신의 이익에 영향을 주지 않는 경우에는 다윗에게 충성을 하지만 자신의 이익과 다윗의 명령이 배치될 때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압은 다윗에게 가장 든든한 신하이자 가장 믿을 수 없는 신하이기도 하였습니다.

 

(5) 압살롬을 숲에 묻음(16-17)

압살롬을 죽인 요압은 숲속에 큰 구덩이를 파고 그곳에 던져 넣은 후 그곳에 거대한 돌무더기를 쌓아 무덤을 만듭니다. 돌무더기는 저주받은 자의 무덤을 의미하는 것으로 요압은 압살롬을 예루살렘에 있는 가족묘에 묻어주지 않고 돌무더기 무덤에 묻음으로 왕자가 아닌 반역자로 취급하였습니다. 여기서 매우 큰 돌무더기 무덤을 만든 이유는 백성들에게 경고를 주기 위한 것으로 누구든지 반역을 일으키면 이렇게 저주받은 자로 죽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대한 돌무더기는 반역자의 최후를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이렇게 반란군의 왕이 죽자 요압은 반란군 쫓는 것을 멈춥니다.

그들의 왕이 사라졌기 때문에 더 이상 서로 전쟁하는 것이 무의미해졌기 때문입니다. 왕을 잃은 반란군은 모두 흩어져 각기 자신의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반란군은 압살롬의 죽음으로 완전히 해체되었고 전쟁은 끝났습니다.

 

(6) 압살롬의 비석(18)

18절은 압살롬의 기념비에 대한 설명으로 압살롬은 아들이 없이 자신의 이름이 땅에서 잊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이름을 기념하는 기념비를 왕의 골짜기에 세워놓았습니다. 이것은 14:27에서 언급된 압살롬의 세 아들이 어린 나이에 죽었음을 의미하며, 압살롬이 자신의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죽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벌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후손이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심판의 일종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이 자신의 형 암논을 죽이고 아버지 다윗에게 반역한 죄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벌을 내리신 것입니다. 이렇게 암논이 다말을 강간한 사건으로 시작된 압살롬의 반란은 지독한 내전을 겪고 결국 압살롬이 죽음으로 끝나게 됩니다. 그리고 다윗은 아들의 반란과 죽음으로 자신의 간음과 살인에 대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고 다윗과 언약하셨기 때문에 결코 다윗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잘못에도 눈감고 무조건 덮어주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반면 하나님의 공의를 두려워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누구와 누구 사이, 무엇과 무엇, 어떤 욕망과 욕망 사이에 서 있습니까? 양쪽 모두를 다 아우를 수 있는 사이도 있지만, 절대 양립하거나 타협할 수 없는 사이도 있습니다. 쓰디쓴 마음을 안고서라도 선택해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충성이 되기도 하고 변절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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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01-03)


복음 전하기를 원하는 이유

로마서 1장 16-17절


종교개혁자 루터는 로마서에서 ‘오직 믿음으로만 살리라’라는 ‘이신칭의’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구원을 얻기 위한 노력은 다양했습니다. 문학 석사학위를 받기하고, 법률학 수료했고, 엄격한 수도원에서 수도사가 되어보기도 했습니다. 헌신적으로 신학 공부해서 신학박사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의 영혼을 만족시킬 순 없었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성경에서 찾았습니다. 로마서 1장 17절에서 ‘오직 믿음만으로’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으로’인 ‘이신칭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로마서의 전체 주제는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입니다. 본문은 2절이지만 로마서의 전체 주제를 담습니다. 복음은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 얻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의로, 오직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긴장과 흥분으로 선포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의 의에 가득 찬 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는 복음 안에 있는 의, 믿음, 삶을 다룹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가 선물로 옵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함으로써 하나님과 소통하며 영광스럽고 의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소극적인 측면: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음(16)

기독교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 즉 복음입니다. 믿음으로 그 나라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립니다. 불의하고 거짓된 죄인이었지만, 아무런 조건 없이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모든 특권을 누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16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16)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복음에 대한 평가에서 기인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기독교인들을 잡아 가두고 많은 핍박하는데 앞장섰던 장본인입니다. 당시 유대인의 지식이나 상식으로 볼 때 그들의 유대교의 신앙을 기준으로서는 나사렛 예수가 메시아라든가 죽은 예수가 부활했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허무맹랑하게 생각되었기 때문에 핍박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라는 말에 대한 배경이 있습니다. 시대적으로 로마 시대이며 유대 나라는 로마의 식민지에 속하였던 것입니다. 즉 유대 나라나 유대인들은 속국으로서 천대를 받았었습니다. 로마는 모든 정치, 경제, 지식과 철학 등 모든 면에서 앞서가는 나라였습니다. 그런 피지배국인 유대의 조그마한 시골 마을 나사렛에서 태어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고, 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버린 예수가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메시아라고 전하는 것은 비상식적이었습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부끄러운 일이었으며 기독교는 무시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에 로마에서 활동한 학자들이나 지배계층 사람들은 기독교인을 향해 ‘기독교는 무식한 종교다!’라고 조롱했습니다. 당시 헬라-로마를 중심으로 지식적으로 활동하던 사람들은 증거가 있는 지식을 간구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잘 설명해 줍니다.

 

22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린도전서 1:22-23)

 

그 당시 사람들은 헬라의 화려한 학문과 로마 강력한 무력 앞에 위축되었습니다. 헬라 사람은 지식을 바탕으로 세계를 지배했고, 로마 사람은 군사력으로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종교적인 우월성을 자랑했습니다. 따라서 로마는 전 세계를 지배하는 막강한 군사력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강한 힘만이 진리라는 ‘힘의 철학’을 주장했습니다. 약한 자들은 강한 자들에게 철저하게 순종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 ‘힘의 논리’ 앞에서 복음(福音)은 매우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기독교의 발생지는 로마가 점령한 작은 유대에서 왔으며, 대부분 기독교인은 엘리트가 아닌 약한 사람이나 노예들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죄인으로 십자가에 사형당한 예수님은 자랑거리가 아닌 수치스러운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 되었고, 로마인들은 미련한 것으로 취급받았습니다(고전 1:23).

그러나 바울은 그런 조롱을 마음 두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복음에 대해 전연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임재인 복음에 대한 확신했습니다. 그는 확실하게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을 부활하시고 살아계신 분을 직접 만났기 때문입니다(행 9장).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담대하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는 복음에 대해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16b)고 주장합니다. 당당하게 세상의 지혜를 자랑하는 헬라인 앞에서나 권력을 자랑하는 로마인들 앞에서 조금도 기죽지 않았습니다. 이방 사람들이 기독교를 무시하는데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더 나가서 당당하게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복음을 자랑했습니다.

로마는 그 강력한 힘으로 전 세계를 정복했지만, 정복할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강력한 힘이라도 인류의 죄와 죽음의 세력은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해결하지 못했던 인류의 죄악이 발흥(發興)하였고, 강력한 로마는 점점 타락해져 결국에는 로마까지 멸망시켰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방법이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생들을 구원하는 능력이 됩니다. 새로운 소망을 줍니다. 바울은 몸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의 능력을 체험했기 때문에 복음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진정한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복음은 이론이 아니라 능력입니다(살전 1:5).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어떠한 사악한 죄인, 더럽고 추악한 삶이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가면 완전히 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복음이 들어가서, 영국은 해적의 나라에서 신사의 나라가 되었고, 해적 바이킹의 나라 노르웨이가 변화하여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온갖 가난과 어둠 속에서 헤매면서 살았지만, 복음이 들어온 지 120년 만에 세계에서 10대 강국으로 변했습니다. 복음이 생활의 질을 변화시켰습니다. 이제는 영혼을 변화시켜야 할 시기가 왔습니다.

 

복음이 나타나는 영역(16b)

복음을 전할 때, 많이 있어 보이는 사람들 앞에서 복음을 숨기고 싶지는 않습니까? 한 가지 알 것은 이것들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직 복음만이 사람을 온전하게 변화시킵니다.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 거룩한 복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16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16)

 

복음은 단순하게 유대인이나 몇몇 사람에게만 전파될 폐쇄적인 메시지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구우너이 필요하기 때문에 미칠 좋은 소식입니다(눅 2:10).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온 천하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라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그 명령을 따라 전 세계에 흩어져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의심 많은 제자인 도마는 인도로, 시몬는 북아프리카로, 요한은 복음 전하다가 밧모섬로, 마태는 에티오피아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다른 제자들 역시 온 천하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다가 모두 순교 당했습니다.

복음 전파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바울은 순서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16c)라고 합니다. 복음이 우연히 유대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진행된 것입니다. 먼저 유대인들에게 전해졌고, 하나님께서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선택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왔습니다. 복음의 시작은 유대인으로부터 되었기 때문에 복음을 먼저 받아야 할 특혜를 누려야 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방인, 모든 인류에게 전파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복음 전파의 순서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고 하였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진행됐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 좋은 소식은 유대로부터 시작하여 헬라로, 헬라에서 로마로, 로마에서 유럽으로, 유럽에서 미국으로, 미국에서 한국에 도착하였습니다. 한국에 도착한 복음이 당신에게까지 임했습니다. 이 복음의 능력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살려 왔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당신에게 임함으로 말미암아 변화를 받아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당신이 복음을 전달해야 할 차례입니다. 바울 사도와 같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복음에는 당신이 모르는 강력한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도착한 복음은 우리를 통해 복음이 없는 곳을 향해 흘러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당신에게 복음의 주자로 배턴을 넘겨주셨습니다. 복음이 당신에게 멈추면 안 됩니다. 사도 바울처럼 복음에 빚진 자의 자세로 기회만 있으면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해야만 합니다. 영적으로 어두운 곳을 향하여 어디에나 복음의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그곳이 당신이 사는 근처일 수 있습니다. 또 더 나가서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그리고 남미와 같은 이방 민족들에게 선교일 수 있습니다. 복음의 영역을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적극적인 측면:복음은 구원의 능력(17)

이러한 복음에 어떠한 능력이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복음 속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성도들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17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7)

 

사도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에게서 온 의’라고 번역해야 옳습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마땅히 사형선고 받아서 죽을 수밖에 없던 죄인에게 무죄 석방을 선언함으로 살려주신 의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을 죄 없는 의인으로 인정하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선물은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를 심판하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셨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믿는 죄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셨습니다.

모든 인류는 죄인 상태로 태어납니다. 죄인 상태로 있는데 하나님께서 의를 선물로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 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은 영접하는 바울은 로마서 5장 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8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구원은 인간의 공로로 얻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오로지 믿음뿐입니다. 이 진리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구약 성경에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습니다.

 

4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 2:4)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에 관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면, 그는 구원의 진리를 깨닫게 된 것에 대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구원의 확신을 얻기 위해 로마 교황청에 있는 빌라도 계단을 무릎을 꿇고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홀연히 정오에 태양 빛처럼, 로마서 1장 17절 말씀인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하신 말씀이 그의 심령에 비추었습니다. 그리고 성도의 구원은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내린 판정’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의롭게 하신 것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가는 사람들에게만이 구원이 성취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는 새롭게 탄생함을 느꼈고, 열린 문을 통해 홀연히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사도 요한은 대답해 줍니다.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복음에는 하나님의 성품이 반영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기 백성과 맺은 언약에 신실한지를 보여줍니다. 이렇게 하실 의무가 없을 때조차도 얼마나 큰 자비와 사랑을 베푸셨는지를 보여줍니다. 심지어 단순하게 용서만 하신 것이 아니라 큰 희생을 감수하시면서까지 죄인을 받아주신 것입니다.

 


죄인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심판과 정죄만이 아닙니다. 세상을 향한 죄인의 사랑을 압도할 만큼의 큰 사랑입니다. 감당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큰 영서와 자비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 소식입니다. 죄인을 변화시키고 살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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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7-02)


목숨을 다해 헌신한 다윗의 사람들

사무엘하 17장 15-23절


 

사람들은 자신이 경배하는 대상을 닮아갑니다. 그 대상의 성품과 가치관과 삶의 목표가 자신의 것이 됩니다. 대상의 실패는 자신의 실패가 되고, 대상의 성공은 자신의 성공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그분의 뜻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 다윗을 죽일 매우 효과적이고 지혜로운 방법을 제시하였습니다. 하지만 압살롬은 그의 계획을 바로 받아들이지 않고 후새를 불러 그의 생각도 물어봅니다. 다윗을 구할 기회를 얻은 후새는 아히도벨의 계획이 좋지 못하다고 평가하고 더 좋은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많은 군사를 모은 다음에 압살롬이 앞장서서 다윗을 죽이는 것이다.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좋은 계획 대신에 후새의 어리석은 계획을 선택하는 잘못을 범합니다.

 

추격을 피하는 다윗(15-20)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하게 사용하십니다. 우리에게 큰 지식, 능력, 재산이 없더라도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의 결과는 우리의 조건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도구일 뿐입니다. 우리를 사용하신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일상에서 지극히 평범한 일을 하더라도 성실하게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게 살아가면 됩니다.

 

15이에 후새가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이르되 아히도벨이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이러이러하게 계략을 세웠고 나도 이러이러하게 계략을 세웠으니 16이제 너희는 빨리 사람을 보내 다윗에게 전하기를 오늘밤에 광야 나루터에서 자지 말고 아무쪼록 건너가소서 하라 혹시 왕과 그를 따르는 모든 백성이 몰사할까 하노라 하니라 17그 때에 요나단과 아히마아스가 사람이 볼까 두려워하여 감히 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에느로겔 가에 머물고 어떤 여종은 그들에게 나와서 말하고 그들은 가서 다윗 왕에게 알리더니 18한 청년이 그들을 보고 압살롬에게 알린지라 그 두 사람이 빨리 달려서 바후림 어떤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서 그의 뜰에 있는 우물 속으로 내려가니 19그 집 여인이 덮을 것을 가져다가 우물 아귀를 덮고 찧은 곡식을 그 위에 널매 전혀 알지 못하더라 20압살롬의 종들이 그 집에 와서 여인에게 묻되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이 어디 있느냐 하니 여인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들이 시내를 건너가더라 하니 그들이 찾아도 만나지 못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니라(15-20)

 

다윗과 다윗의 나라와 다윗의 하나님께 자기 목숨 아끼지 않고 충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옳다고 믿는 가치를 위해 용감하게 주저 없이 행동합니다. 예루살렘 기득권이 주는 편안함과 그들이 보장하는 안전에 길들어지지 않고 광야의 다윗이 추구하는 대의를 위해 험한 삶을 감수합니다.

 

(1) 후새의 전언(15-16)

아히도벨의 계획을 알게 된 후새는 자신과 같이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아히도벨과 압살롬과 그의 장로들이 논의한 모든 내용을 알려주고 아히도벨의 계획까지 전달합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에 만들어놓은 정보망이 제대로 발휘된 것입니다. 후새는 다윗에게 단순한 정보뿐만 아니라 대처 방안까지 알려줍니다. 그는 사람을 빨리 보내서 다윗에게 광야 나루터에 머물지 말고 오늘 밤 안으로 반드시 건너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몰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후새의 조언은 아히도벨이 계획한 것이 실행될 경우를 대비한 것으로 만일 아히도벨의 계획이 실행되면 현재 다윗과 그와 함께한 사람들은 매우 위험해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좀 과장된 면도 있습니다. 아히도벨은 다윗만을 죽이겠다고 했는데, 후새는 위험성을 강조하기 위해 다윗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한 모든 사람이 몰살될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2) 우물 속 요나단과 아히마아스(17-19)

17절은 당시 예루살렘과 그 근방에 있던 다윗의 정보원들이 어떤 상황에 있었고, 어떤 방식으로 정보를 전달하였는지를 설명합니다. 이때 다윗의 정보 전달원 역할을 한 사람은 사독과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과 아히마아스이며, 이들은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성 밖에 있는 로겔 생가에 머물렀습니다. 이들은 공식적으로는 다윗을 지지하여 예루살렘을 떠난 것으로 되어 있어야 다윗과 예루살렘 사이를 편히 오갈 수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물이 귀한 고대 근동 사회에서 샘가는 여행객들과 지나가는 사람들이 쉬면서 정보를 나누는 장소이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숨기가 예루살렘 성보다는 쉬웠습니다. 이렇게 요나단과 아히마아스가 예루살렘 성 바로 옆에 있는 로겔 샘 곁에 숨어 있으면 성에서 사독과 아비아달이 보낸 여종이 나와서 이들에게 정보를 전달하였고, 이들은 그 정보를 다윗에게 전달하는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여종이 중간 정보전달자의 역할을 한 것은 사람들 눈에 가장 띄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후새와 다윗을 지지하던 제사장들은 다윗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도왔습니다. 정보원들이 한 청년에게 발각되었습니다. 청년은 로겔 샘 곁에 거하고 있던 요나단과 아히마아스를 알아보았고, 이들에 대해 압살롬에게 알립니다. 이 청년의 신분은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압살롬의 부하로 생각됩니다. 이 일로 다윗에게 정보를 전달하기가 곤란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압살롬에게 들켰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들은 재빨리 로겔 샘을 떠나서 바후림의 한 집으로 들어갑니다. 바후림은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거하는 지역으로 사울의 친척인 시므이가 사는 곳입니다. 시므이는 다윗이 바후림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다윗의 정보원들은 바후림에서 은신처를 찾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이들이 들어간 집 뜰에는 우물이 있었고, 이들은 우물로 내려갑니다. 아마도 물이 적어서 잘 사용하지 않는 우물이었던 같습니다. 이들이 우물에 내려가자 그 집 여주인이 우물 덮개를 가져다 우물 입구를 덮고 그 위에 곡식들을 널어놓았습니다.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여주인이 기지를 발휘한 것입니다.

 

(3) 압살롬의 추격자들(20)

압살롬의 군사들이 이 여인의 집까지 찾아와서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이 어디 있는지 아느냐고 묻자, 여인은 그들이 시내를 건너갔다면서 이미 이곳을 지나갔다고 거짓말하였습니다. 이 말을 믿은 압살롬의 군사들은 그들을 뒤쫓았지만 찾지 못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을 도운 이 여인의 모습은 여호수아 2장에서 여리고 성에 들어온 두 이스라엘 정탐꾼을 도운 라합과 유사합니다. 둘 다 자신의 집에 숨겨주었고 좀 더 완벽하게 숨기기 위해 숨을 곳을 곡식으로 덮었습니다. 또 자신이 숨긴 사람을 찾는 사람들에게 거짓으로 도망간 방향을 알려주어 자신과 자신이 숨긴 사람들이 좀 더 안전해지게 만들었습니다. 이 여인은 정탐꾼을 도운 이유를 분명히 밝힌 라합과는 달리 베냐민 사람인 자신이 왜 다윗의 편을 들었는지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주목할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돕기 위해 은밀하게 사람들을 준비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름 없는 여인들의 손을 통해 도움을 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 하나님께서 다시 다윗에게 은혜를 베풀고 돌보기 시작하셨다는 징표입니다. 반대로 압살롬의 입장에서는 이번에도 그의 계획이 실패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하나님께서 그를 그냥 두셨을 때는 승승장구하는 것 같았는데, 하나님께서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압살롬의 계획들이 자꾸 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요단을 건너는 다윗(21-23)

세상 사람들은 부와 권력을 가지면 평안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평안함이 임하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세상의 방식을 따르지 않아서 해를 당하게 되더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도는 세상 사람들이 행하는 방식, 유행, 상식에 동조하지 않고 의연하게 하나님의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21그들이 간 후에 두 사람이 우물에서 올라와서 다윗 왕에게 가서 다윗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들은 일어나 빨리 물을 건너가소서 아히도벨이 당신들을 해하려고 이러이러하게 계략을 세웠나이다 22다윗이 일어나 모든 백성과 함께 요단을 건널새 새벽까지 한 사람도 요단을 건너지 못한 자가 없었더라 23아히도벨이 자기 계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일어나 고향으로 돌아가 자기 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매 그의 조상의 묘에 장사되니라(21-23)

 

여리고의 기생 라합처럼 아비아달의 두 아들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을 숨겨준 여인의 활약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사람이고, 시대의 대세를 따르지 않는 의식 있는 여인이며, 목숨을 걸고 위험을 감수할 줄 아는 여인입니다. 우리는 그 이름을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기억하실 것입니다.

 

(1) 요나단과 아하마아스의 보고(21)

압살롬의 군사들이 지나간 후에 두 사람은 우물에서 올라와서 다윗에게로 갑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무사히 다윗에게 정보를 전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다윗에게 서둘러 요단강 물을 건너라고 말하며 아히도벨의 계략을 알려줍니다. 이미 17:1-3에서 아히도벨의 계획을 언급하였기 때문에, 여기서는 반복하지 않고 단지 ‘이같이’라는 말로 생략하고 있습니다.

 

(2) 요단을 건너는 다윗(22)

예루살렘에서 온 정보를 들은 다윗은 후새의 말을 따라 요단 물을 건넜습니다. 여기서 ‘새벽까지 한 사람도 요단을 건너지 못한 자가 없다’라는 표현을 집어넣은 것은 아히도벨의 계획이 완전히 실패하였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아히도벨의 계획은 요단을 건너기 전에 다윗의 군대를 덮쳐서 군대를 해산시키고 다윗을 죽이는 것이었는데, 다윗의 군대가 모두 안전하게 요단을 건넜으니 더는 이 계획을 실행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3) 아히도벨의 죽음(23)

아히도벨은 자신의 계획이 실행되지 못하고 다윗과 그의 군사들이 무사히 요단강을 건너간 것을 알고는 압살롬의 반역이 실패할 것을 예감하였습니다. 아히도벨이 보기에 압살롬의 반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요압이 없는 틈을 이용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다윗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을 요압의 군대가 오기 전에 단시간 내에 끝내야 하는 작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후새의 화려한 말솜씨에 이가 다윗을 죽일 기회를 놓친 것을 보고 압살롬의 반역이 실패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실제로 요단을 건너 마하나임으로 간 다윗은 그곳에서 요압을 만나 압살롬을 칠 부대를 구성하고 전쟁을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아히도벨의 예측은 사무엘하 16:23에서 언급한 것처럼 정확하고 틀림없었습니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의 실패를 예측하고 나귀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을 매 죽습니다. 아히도벨이 자살을 선택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압살롬이 지면 다윗이나 요압이 자신을 살려두지 않을 것이고, 매우 모욕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니 그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장사되어 치욕적인 죽음을 피하려고 한 것입니다. 둘째, 머리 좋은 아히도벨에게 가장 비참한 심판은 머리 좋은 자신이 선택한 왕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음으로 자기 계획이 실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계획이 실패한 것이 하나님의 개입에 의한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왕을 배반한 자신에게 내려진 심판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자살한 것입니다.

아무리 머리가 좋고 탁월한 전술을 가졌다 할지라도, 인간이 하나님을 능가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인간의 지혜를 이룰 수 있어도, 하나님께서 막기로 작정하시면 인간의 어떤 지략도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히도벨의 천재적 지략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다윗의 투박하고 진솔한 기도에 무너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세상의 모든 지혜를 합친 것보다 더 큰 지혜를 가지고 계신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우리가 기도할 때 악한 자들의 권모술수가 모두 무너질 것임을 신뢰해야 합니다.

 

마하나임(24-29)

우리 힘의 원천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따라서 결과주의, 성공주의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결과보다 동기를 중요하게 여겨야 하고, 성공을 위해 불의한 방법을 쓰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불의는 결코 용납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힘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공의와 사랑으로부터 나옵니다. 정직, 약속 준수, 순전, 긍휼을 행해야 합니다. 비록 손해를 보더라도 거룩한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불의한 자가 힘을 얻지만, 하나님께서는 불의 한 자를 심판하심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24이에 다윗은 마하나임에 이르고 압살롬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과 함께 요단을 건너니라 25압살롬이 아마사로 요압을 대신하여 군지휘관으로 삼으니라 아마사는 이스라엘 사람 이드라라 하는 자의 아들이라 이드라가 나하스의 딸 아비갈과 동침하여 그를 낳았으며 아비갈은 요압의 어머니 스루야의 동생이더라 26이에 이스라엘 무리와 압살롬이 길르앗 땅에 진 치니라 27다윗이 마하나임에 이르렀을 때에 암몬 족속에게 속한 랍바 사람 나하스의 아들 소비와 로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28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29꿀과 버터와 양과 치즈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에게 먹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 생각에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함이더라(24-29)

 

아히도벨은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자신의 전략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다윗이 요단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압살롬의 패배를 직감했고, 자신의 자리가 없을 것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는 자기 전부를 다해 압살롬에게 충성했고, 그의 실패와 죽음이 자기 몫이란 것도 알았습니다.

 

(1) 다윗을 뒤따르는 압살롬(24)

다윗이 마하나임에 도착하였습니다. 마하나임에서 이스보셋이 사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통치했었습니다(2:8-9). 그러므로 왕도(王都)로 가능했던 마하나임은 다윗이 이런 상황에서 사용하기에 적절한 규모와 성채를 갖추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 다윗이 마하나임에 도착한 때와 압살롬이 요단을 건넌 때 사이에는 어느 정도 시간이 소요되었을 수 있습니다. 다윗이나 압살롬이 자기들의 군대를 조직하고 정비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2) 압살롬의 군대(25-26)

압살롬이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한 사람은 ‘아마사’입니다. 아마사는 이스라엘 사람 이드라의 아들인데, 그의 어머니는 나하스의 딸이며, 스루야의 동생인 아비갈입니다. 역대기는 아비갈(=아비가일)을 스루야와 함께 이새의 딸로 언급합니다(대상 2:16-17). 나하스의 아내가 스루야와 아비같을 낳은 뒤 그 딸들을 데리고 이새와 재혼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나하스는 암몬 왕 나하스와 동일 인물일 수 있으나 확인할 수 없습니다.

아비갈의 남편인 이스라엘 사람 ‘이드라’는 역대기에서 이스마엘 사람 예델이라 불립니다(대상 2:17). 본문의 이스라엘은 이스마엘로 고쳐 읽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마사와 요압은 이종사촌이었습니다. 이스라엘과 압살롬이 길르앗에 진영을 설치했습니다. 압살의 이름이 이스라엘 뒤에 기록님은 압살롬이 군대를 이끄는 사람이 아니었음을 암시합니다. 주둔지가 길르앗의 어느 지역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마하나임이 길르앗의 남부 지역이므로, 압살롬의 군대가 마하나임의 북쪽에 진영을 설치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압살롬은 다윗과 싸우러 가는 동안 전체 이스라엘에서 군대를 소집할 수 있도록 군대의 행군 방향을 세겜을 경유하는 방향으로 잡고 북진하다가, 야베스 근처에서 요단을 건넜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3) 다윗을 돕는 사람들(27-29)

마하나임에 있는 다윗을 돕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나하스의 아들 ‘소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나하스 역시 람바에서 왕이었던 나하스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있으나, 왕이라고 언급되지 않은 것을 볼 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만일 암몬 왕 나하스를 가리킨다면, 이 소비는 다윗과 싸운 하늘의 형제이고 하늘이 죽은 뒤 암몬의 왕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소비 역시 왕이라고 불리지 않습니다. 나하스가 많은 사람들이 흔히 쓰는 이름일 수도 있습니다. 어편 경우든 소비는 큰 부자이며, 그 지역의 지도자였을 것입니다.

둘째는 로테발 사람 알미엘의 아들 ‘마길’입니다. 암미엘(-엘리암)은 밧세바의 부친 이름이 기도합니다(대상 3:5; 삼하 11:3). 하지만 이 둘이 동일 인물일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본문의 마길은 므비보셋을 돌봐주었던 사람입니다(9:4). 로데발은 야베스 길르앗과 갈릴리 호수 중간에 있는 성읍으로 여겨지나 확실하지 않습니다.

셋째는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입니다. 로글임은 야베스 길르앗으로부터 북동쪽으로 20킬로미터 떨어진 곳의 성읍입니다. 이들은 생활필수품인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 그리고 음식을 만들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팔과 볶은 녹두와 꿀과 버터와 양과 소의 치즈를 가져왔습니다.

 


다윗 주변의 사람들은 자기 전부를 건 사람들입니다. 명분을 위해 충성을 위해 자신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압살롬의 사람 아히도벨도 끝까지 충성했습니다. 그 충성을 자진으로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충성이 다 인정받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구를 향한 충성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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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0-04)

마태복음(10-0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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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제자로서 진실한 자세

마태복음 10장 34-42절


당신은 복음의 가치를 어느 정도 알고 계십니까?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소중한 분입니까? 소중한 것의 가치를 모르고,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소중한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 있는 자는 소중한 것의 가치를 알고, 마음을 다해 소중히 여길 줄 압니다. 이 시간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가 임하고 그 나라의 왕이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온 목적을 알려주시면서 이에 합당하게 행동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 어떤 것도 예수님을 따르고 사랑하는 것보다 앞서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에게 새로운 가족 관계로 정체를 규정하시면서 그 밖의 모든 관계를 상대화하라고 요구하십니다. 마지막으로 합당하게 행동한 것에 대한 종말론적 결과가 언급됩니다.

 

평화보다 소중한 복음(34-39)

평화만큼 소중한 게 없고, 화목한 가정만큼 중요한 것도 없습니다. 평화는 소중하지만, 진정한 평화를 얻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 안에 진정한 평화가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참된 행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주시길 원하십니다.

 

34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9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34-39)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결과를 알려주시면서, 제자들에게 정확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을 언급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에 대해 ‘나는 ~하려고 왔다’라는 문장을 세 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1) 검을 주시려 온 예수님(35-36)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는 땅의 평화가 아니라 검을 주려고 왔다고 말씀하십니다(34). 이 구절은 앞의 가르침과 배치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전하는 사명을 맡기셨고, 평화의 사람들이 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의 도래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 시대가 온 것이므로 평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가 완성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러나 아직’에 기간에는 여전히 하늘나라와 땅의 나라 사이에 충돌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나라의 복음은 이 땅의 가치관과 충돌을 일으키고 제자들은 고난을 받겠지만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 제자들은 승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35절은 34절의 내용을 구체화하며 검의 이미지를 가정해 적용합니다. 검의 이미지는 38-39절에 있는 핍박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오심으로 인해 가족 내 분리가 일어날 것을 지적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방식은 당연히 가족과 사회가 생각한 평화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주는 고통을 가슴아프게 느낄 수밖에 없음을 각오하고 예수님의 사명을 수행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가족만큼은 사명을 수행하는 자신을 이해하고 축복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족의 반대는 하늘나라와 땅의 나라 사이에서 충돌에서 오는 당연한 결과일 뿐입니다. 반면에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제자들은 가족의 원수가 되지만, 예수님의 가족이 된 사람들입니다.

 

(2) 제자들의 우선권(37-39)

예수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사랑하는 자, 예수님보다 아들이나 딸을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께 합당하지 않습니다. 이기서도 예수님께서는 우선권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합당한’을 반복하여 강조하시면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합당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십자가의 길은 고통과 수치를 상징했으므로 제자로 사는 길은 위험하고 자신을 돌볼 수 없는 상태에 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찾는 자는 멸망할 것이며 자기의 목숨을 멸하는 자는 목숨을 찾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 때문에’ 또는 ‘나를 위하여’를 사용해서 제자가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잃을 가능성을 언급하십니다. 마태복음은 다른 본문에서도 고난의 이유가 예수님 때문임을 강조하기 위해 이 표현을 사용합니다. 하늘나라의 시민은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셨다는 것입니다. 제자는 이 신비를 하는 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덕에 명성을 얻으려 하거나 공동체에서 유익을 얻으려는 태도는 제자의 길이 아닙니다. 사람의 운명은 땅에서의 삶을 끝나지 않습니다. 새로운 세계에서의 종말론적 삶이 있습니다. 땅에서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람은 최후 심판 이후의 목숨을 얻고 예수님을 첫째 목적에 두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찾는 사람은 비판받을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가 얻을 상(40-42)

제자들의 말과 삶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말과 삶이고,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의 현현이기 때문에, 제자들을 영접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영접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선지자나 의인이나 소자의 모습으로 복음을 전할 때 그 말씀을 믿고 제자들을 환대하면, 하나님께서는 냉수 한 그릇의 호의라도 잊지 않고 가차주실 것입니다.

 

40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41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42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40-42)

 

지금까지의 말씀을 통해 세상의 차가운 거절과 그것에 직면할 제자들이 치러야 할 제자도에 초점이 있었다면, 마지막 부분은 제자들이 경험할 긍정적인 반응으로 마무리 됩니다.

 

(1)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들(40)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4절과 같이 40절도 예수님과 파송을 받은 제자들 또는 선지자들의 일체성 내지 동질성을 보여줍니다.

40절에서는 ‘임마누엘’ 즉 ‘하나님의 현존과 임재’라는 개념이 나타납니다. 제자들을 환영함으로써 그들이 선포하고 보여주는 하늘나라의 도래를 경험하는 사람들은 ‘임마누엘’을 맛보게 됩니다. 파송 받은 자들이 머물러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임재로 인한 평화가 주어집니다.

 

(2) 영접한 자에게 줄 상급(41-42)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얻을 것입니다.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얻을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선지자와 의인을 짝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선지자와 의인은 비슷한 기능을 갖고 있는 직분입니다. 의인은 완벽을 추구하는 제자들을 일컫는 표현이며 그들의 의는 마지막 날에 들어날 것입니다. 선지자는 선포하는 사람이며 10장에서 선포되는 반복되는 소재입니다. 제자들은 과거 선지자들과 같은 사명을 맡은 위치에 있으며 선지자와 의인의 역할을 수행하는 자들입니다. 제자들을 선지자의 이름으로 영접하는 것은 그들을 선지자의 지위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지자의 상은 선지자적 사명을 수행하는 결과로 하나님께 받게 될 보상을 가리킵니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을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제자들을 보내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권위로 그렇게 하신 것이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보내시고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권위를 가진 신분이었지만, 실제 현실은 소자로서 냉수 한잔이 절실한 신세가 됩니다. 유대교에서 소자들은 사회적으로 연약한 상태의 사람들 그리고 미성숙한 사람들, 경건한 사람들을 일컫는 표현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어린아이나 소자는 사회적 개념으로 낮은 지위에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당시에 사회적 관점에서 작은 자들, 낮은 자들이었습니다. 42절의 ‘소자들’은 예수님의 파송을 받아 순회하며 전도하는 제자들 또는 선교자들을 포함합니다.

40-42절은 제자들의 신분과 관련해서 몇 가지 의미를 전달합니다. 첫째, 보냄받은 자에게 보낸 자의 권위가 주어집니다. 보냄받은 자를 영접하면 보낸 자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보냄 받은 자들을 위해 작은 호의를 베푸는 사람은 하나님의 포상을 받게 됩니다. 둘째, 그만큼 그리스도의 존재 혹은 삶 자체가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10장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는 강화에는 제자들이 사명을 수행한 내용이 없습니다. 즉 어떻게 전도했는지 보고 내용이 없습니다. 마태복음은 제자들의 존재 자체가 전도 혹은 선교의 핵심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땅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 되므로 성도의 일거수일투족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마음, 특히 긍휼을 보여줍니다. 복음은 예수님을 모범으로 삼아서 따라 행하는 제자들을 통해서 전파됩니다.

셋째, 권위를 부여받은 제자들의 모습은 소자와 같습니다. 선지자, 의인과 같은 직위를 가졌으나 사람들의 눈에는 소자로 보입니다. 예수님 당시 초기 교회에서 예수님의 보냄을 받은 제자들은 냉수 한잔이 절실할 정도로 낮은 삶을 살았습니다. 역설적으로 작아진 제자는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통로입니다. 본문을 확대한 마태복음 25장 31-46절에 양과 염소의 비유를 보면, 소자를 영접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더 높이 올라가고 더 많이 가져서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그런 모습이 예수님을 증언하는 길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제자들을 소자가 아니라 큰 자로 세우셨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있는 것이 많든 적든 상관없이 낮아진 모습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드러납니다.

넷째, 제자는 환대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줄 뿐 아니라 만나는 사람들 배후에 또는 그 사람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냉수 한잔을 받은 제자는 냉수 한잔을 줄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제자는 긍휼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스쳐 지나가는 소자를 향해 긍휼을 베푸는 사람입니다. 제자를 영접한 사람은 자제의 보상을 받게 되며, 제자 역시 소자를 환대라는 마음으로 대할 때 예수님을 만나는 경험하게 됩니다. 긍휼이 순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자신을 부인할 때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자기 사랑은 욕망과 죄의 본질로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자기 사랑을 못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진 희생과 섬김의 길을 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데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더욱 잘 따르기 위해서 버리고 내려놓아야 될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도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걷기 위해 자신의 삶 가운데 자기 부인이 필요한 부분은 무엇인지 살펴보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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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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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이 세상을 살아갈 자세

마태복음 10장 24-33절


세상에는 많은 법칙과 규칙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전쟁터에서 장군을 사병들이 자기 몸보다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장군은 그 군대를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법칙과는 반대로 실천하셨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보호 받기보다 제자들을 위해서 먼저 어려움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희생의 법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핍박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가르치고 있습니다. 24-25절은 본 단락의 서론으로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설정하고, 26-31절은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32-33절은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한 종말의 결산을 묘사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24-25)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이 걸어가신 길을 제자들도 걷는다는 의미입니다. 영광의 길이든 고난의 길이든 상관하지 않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스승보다 더 잘 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항상 스승을 닮고자 하는 마음은 품어야 합니다. 매 순간 제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24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25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24-25)

 

예수님께서는 22-23절에서 파송을 받은 제자들은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고 도망 다니는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예고하셨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왜 제자들이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는지, 미움을 받는 이유와 근거를 설명하십니다. 그리고 어떻게 핍박을 대해야 할 것인지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와 스승’ 그리고 ‘종과 상전’을 대조하는 격언이 이어집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제자가 스승보다 높지 않고, 제자가 스승만 하다면 금상첨화라는 취지로 말씀하십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익숙한 스승 랍비와 제자 문하생의 관계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종과 상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랍비와 제자와의 관계를 주종관계로 이해하기도 했으니 이 두 비유는 같은 의미를 갖습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대부분 촌부인 열두 명을 제자로 부르셨고, 일꾼으로 파송하십니다. 제자가 스승보다, 또 종이 주인보다 높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자와 종은 스승과 주인을 적극적으로 따르며 그 뜻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 목적은 스승처럼 되기 위해서입니다.

특별히 제자는 스승의 모든 것을 닮기를 애써야 합니다. 가르침은 물론이거니와 성품과 삶의 방식까지 닮는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스승은 그 목적을 가지고 제자를 선택합니다.  열두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스승이자 주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운명을 따르는 제자이며, 예수님께서 이루시려는 하늘나라의 일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그들이 자신을 닮아 하늘나라 사역을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자신처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태복음에서 나타난 제자도의 핵심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에게 자신의 권능을 주심도 그런 차원에서입니다그 다음에 등장하는 집 주인과 그 집 사람들의 비유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특별히 집주인을 ‘바알세불’로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스스로 바알세불로 비유하신 것이 아니라, 앞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대적하여 언급했던 표현입니다(9:34). 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바알세불)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하고 폄훼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바알세불’이라 배척당하며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스승이자 주인인 예수님께서 그렇게 당하셨다면, 그를 따르는 제자와 종 역시 당연히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현재 문맥이 제자들을 향한 세상의 박해를 다루고 있기 떄문에 예수님께서는 지금 박해자들이 받는 고난을 제자들 역시 받을 것을 강조하십니다(요 12:20). ‘집주인’인 예수님꼐서 박해당하니 그 ‘집에 속한 사람들’이야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집주인’과 ‘집사람들’의 설명을 덧붙인 것은 언어유희를 의도하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바알세불’이 히브리어로 ‘제불(집)’과 베엘(주인)의 합성어로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사탄을 가리키는 바알세불로 불렀기 때문에, 제자들도 더 낫게 불릴 것이라고 기대할 여지는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반복해서 강조하시는 점은 예수(보내시는 분)와 제자들(보냄 받는 자들)의 관계와 권위입니다. 특히 마태는 ‘-처럼 되다’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제자들의 소망이 예수님처럼 되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제자는 스승과 존재론적으로는 구분되지만, 스승처럼 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그분을 닮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사는 길에는 당연히 예수님께서는 겪으신 어려움이 올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닮아가는 삶, 이런 과정에서 예수님과 깊은 사귐을 갖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복됩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가진 예수님이 바알세불(귀신의 왕)이라는 조롱을 받았다면, 그 권능을 거저 받은 제자들 역시 그런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복음 때문에 당한 비난이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실패로 여기지도 말아야 합니다. 도리어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했으니 기쁘게 여겨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26-31)

예수님께서는 제한적으로 은밀하게 복음을 증거 하셨지만,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는 드러나고 알려질 것입니다. 자기 목숨보다 순종을 더 귀하게 여기고, 자기 명예보다 그리스도의 명예를 더 존중하며 땅보다 하늘에 재물을 쌓고 소망을 두는 사람을 예수님도 심판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사랑한 자’로 인정해주실 것입니다.

 

26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27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28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29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31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26-31)

 

파송 받은 제자들이 가혹하고 적대 적인 대접과 핍박을 받게 될 것이라는 예고를 하신 예수님께서는, 26-31절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보살핌을 언급하심으로써 위험에 빠질 제자들을 위로하십니다. 본 단락에는 세 번에 걸쳐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령이 나옵니다(10:26,28,31). 각각의 명령에 이어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제시됩니ㅂ.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드러내실 것이기 때문에(10:26-27), 미래에 육체와 영혼을 모두 심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28), 하나님께서는 현재 주권적으로 보살피시기 때문에(20:29-31) 제자들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컨대, 제자들은 세 가지로 논증되는 하나님의 능력 때문에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1) 드러내시는 능력, 2) 심판하시는 능력, 3) 돌보시는 능력입니다.

첫째, 하나님은 숨겨진 것을 드러내시므로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합니다(26-27). 제자들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그들’은 핍박하는 자들입니다ㅂ. 사람들은 진리를 억압하고 하나님이 보내신 메신저들을 핍박할 것이지만, 마지막 날에 하나님은 그들의 모든 행위를 드러내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들이 비밀리에 들은 내용을 모두에게 선포하라고 명령하십니다(27). 27절은 숨겨진 것이 드러난다는 맥락에서 앞절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하늘나라의 비밀은 하늘에 숨겨진 비밀이었고, 이제 예수님을 통해 계시 됐습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에서 은밀하게 시작됐으므로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가야 합니다. 제자들은 하늘에 감춰졌으나 하나님의 목적을 드러내기 위해 드러난 예수님의 오심과 하늘나라 복음을 공개적으로 전파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1:21-23; 4:17; 10:7-8). 제자들의 존재 목적은 하늘나라의 비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시작하신 하늘나라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은밀히 말씀하신 것을 제자들은 전파해야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은밀하게 오고간 대화, 그 속에 감춰진 예수의 말씀은 복음서 기복과 전파를 통해서 알려지게 됐습니다. 공적인 선포는 공에다 대고 비밀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 비밀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며 28:20의 명령처럼 모든 민족을 향해 전파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과 인간의 능력 차이가 있으므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28). 제자들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몸을 죽이지만 영혼을 죽일 능력이 없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과 몸을 지옥에서 멸하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해야 합니다(참조, 눅 12:45), 오직 하나님만이 몸과 영혼 모두를 멸하실 수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이 돌보시므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29-31).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세상에서 활동하고 제자들을 특별하게 돌봐주는 아버지라는 사실을 설명하실 때,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전개하는 방식을 따라서 참새를 예로 들어 설명하십니다. 참새 한마리는 1/32데나리온(하루 품삯이 1데나리온)의 값이 칩니다. 매우 싼 참새 한 마리도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새의 이야기를 사용해서 하나님께서 땅에서 벌어지는 일에 현재적으로 개입하시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너희 아버지’(5:16,45-46)는 제자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특징을 강조하는 표현으로서 가족 언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을 친밀하게 돌보는 아버지이십니다. 제자들의 운명은 하나님의 뜻에 따르고 있으며, 하나님의 손과 돌보심, 곧 섭리 가운데 있습니다ㅂ. 또한 제자들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은 제자들의 머리카락 수를 다 알고 계십니다(30). 머리카락의 수를 세는 일은 어떤 사람의 머리에 집중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참새 한 마리가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것에 비해서 머리카락 한 가닥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은 당사자 자신도 감지하지 못하게 일어나므로, 하나님은 제자들이 느낄 수 없는 부분까지도 알고 계시며, 그만큼 친밀하게 돌보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30절의 핵심은 제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앎, 하나님의 지식입니다. 제자들이 핍박을 받고 죽음에 이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을 잘 알고 계시고 불쌍히 여기며 보호하십니다. 그러므로 제자는 인생의 불행처럼 느껴지는 일들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버지의 뜻 가운데 일어난 일이므로, 그 순간도 하나님이 보살피고 계신다는 사실을 신뢰해야 합니다.

 

제자들의 행위에 대한 종말의 결과(32-33)

세상 두려움을 이기려면 하나님을 향한 참된 두려움을 품어야 합니다.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분은 하나님이요,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입니다. 진짜 두려움이 들어올 때, 거짓 두려움은 힘을 잃습니다. 모든 두려움이 자기 자리로 돌아갑니다.

 

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33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32-33)

 

본문은 하늘 법정의 장면과 땅의 장면을 대조합니다. 하늘 의회 또는 하늘궁정이 종말에는 최후 심판을 집행하는 법정의 기능을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 하늘 법정을 암시하는 표현은 법정 용어와 전치사 ‘앞’입니다. 이 전치사는 하늘 법정에서 재판관과 하늘의회 구성원들 사이의 위치를 알려 주는 표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참조, 25:32, 다니엘 7:13). 다시 말해서, ‘앞’은 ‘하나님 앞에서’를 뜻하는 코람데오 정신을 떠올립니다. ‘지인하다’와 ‘부인하다’는 법정 용어들이며, 전치사 ‘앞’과 함께 결합돼 하늘(법정)과 지상(법정)을 대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두를 향한 내용으로 확대하기 위해서, ‘누구든지를 사용하십니다. 32-33절에는 경고의 분위기가 담겨 있습니다. 32-33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땅에서의 행위와 하늘 법정에서의 반응을 대조하며 종말론적인 시각으로, 현재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도록 가르치십니다. 모든 인간은 이 땅에서 행한 것에 대해서 하늘 법정에서 결산을 받게 됩니다. 이 사실을 얼마나 인식하고 있느냐에 따라 이 땅에서의 경외심이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아시고 귀히 여기십니다. 그분은 크고 두려운 분이지만, 동시에 세밀하고 부드러운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크고 중요한 문제들 뿐 아니라 자꾸 사소한 일에도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혹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자가 되기로 결단하기는 쉬워도, 끝까지 제자의 삶을 살기란 쉽지 않습니다. 매 순간 자신이 주님의 제자임을 기억하고, 참 두려움으로 거짓 두려움을 이기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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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08-02)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의 능력

잠언 8장 22-36절


잠언은 성공과 부를 얻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책이 아닙니다. 잠언을 읽으면 머리가 좋아지고, 똑똑해져서 이 세상에서 성공하도록 도와주는 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잠언은 악한 세상에서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지혜는 창조와 인간 삶에 있어 질서와 원동력을 제공합니다. 지혜는 창조 이전부터 존재하여 하나님의 우주 창조 사역에 있어 명장 역할로 동참하였습니다. 이제 지혜는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에도 침투하여 영향력을 미치고 우리와 긴밀한 상호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지혜의 강연(02) : 창조 전에 태어난 지혜(22-26)

하나님의 지혜는 절대적이고 완전하고 영원합니다. 지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구원의 근거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지혜이신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살 때 우리는 하나님 지혜의 능력을 매일의 삶 가운데 구체적으로 경험하며 살 수 있습니다.

 

22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23만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 24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25산이 세워지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26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22-26)

 

본문 잠언 8:22-36은 지혜의 두 번째 강연에 해당하는 8:1-36의 후반부에 속합니다. 1-21절까지는 지혜의 초청과 유익, 지혜의 현재 속성과 통치 등을 기술하였습니다. 이제 22-31절은 내용상 두 부분으로 나뉘어, 창조 때의 지혜의 역할(22-31)과 지혜의 초청(32-26)을 묘사합니다.

이 단락에서 지혜는 하나님의 우주 창조에 관여한 하나님의 속성으로 소개됩니다. 지혜의 특별한 점은 지혜가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기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는 데서 나타납니다. 이 점은 22-26절까지 무려 다섯 절에 걸쳐 나타날 정도로 강조되었습니다. 마치 어머니가 아이를 낳듯 지혜가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창세기 1:2에 따르면 창조 이전에 깊음(깊은 바다)이 이미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데, 지혜는 이 원시의 물보다 자기가 더 먼저 존재했음을 밝힙니다. 지혜는 시간상 영원 전부터 모습이 갖추어졌고, 산과 땅과 물 같은 피조물과 비교했을 때에도 그보다 먼저 태어났으며, 하나님께서 우주 창조를 시작하시기 전에 이미 존재했다고 설명하며 자신의 존재가 그 어느 피조물보다 앞섰음을 확실히 합니다. 지혜가 창조 전에 이미 존재했고 창조 때에 거기에 동참했다는 내용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묘사에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생기기 전에 자기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음을 언급했습니다(요 17:5).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으로서 태초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창조 때에 동참하셨음을 서술하였습니다(요 1:1). 바울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에게서 나신 하나님의 능력이며 지혜라고 설명하였습니다(고전 1:24,30; 골 2:3).

 

창조 때의 지혜(27-29)

지혜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원리이자 동역하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이제 지혜로 말미암아 만물이 질서와 조화 가운데 보존되고 견고하게 됩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과 지혜를 높이고 찬양하며 살아야 합니다.

 

27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을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28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29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이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27-29)

 

하나님의 어느 피조물보다 자신이 먼저 존재했음을 명백하게 밝힌 지혜는 이제,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살 수 있는 터전을 비롯하여 우주 전체를 창조하실 때 자기가 하나님과 함께하며 창조 사역에 동참했음을 주장합니다.

27-29절은 하나님의 천지 창조의 둘째 날과 셋째 날에 집중하여 하늘의 창조부터 시작하여 바다를 나누어 위의 구름 가득한 하늘과 아래의 강과 바다로 정하신 것 그리고 땅을 창조하셨음을 기술합니다. 특히 하나님이 세상을 형성하는 데 있어 하늘을 세우고, 깊은 바다에 테를 두르고, 하늘의 구름들을 견고하게 하고, 깊은 바다의 샘들을 확정하고, 바다의 경계를 정하고,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 지혜가 일일이 동참하였음을 두드러지게 묘사하였습니다. 욥기 28:24-26; 38:10-11이나 시편 104:1-9에서도 하나님께서 창조물이 각각 자기 위치를 지킬 수 있도록 일일이 경계를 정하시고 또 그것이 제대로 유지되도록 하셨음을 찬양합니다. 이와 같은 묘사는 하나님의 전능하신능력과 지혜를 드높입니다. 또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그 정한 위치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움직이는 것을 통해 하나님이 세상에 질서를 형성하시고 통치하시는 모습을 확실히 나타냅니다. 지혜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모든 영역에서 동참자였으며 증인이었습니다(28:27).

 

창조주와 지혜의 기쁨(30-31)

성도는 하나님의 지혜를 소유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와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혜가 능력이며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지혜는 ‘숙련된 기술자’처럼 맡겨진 창조 사역을 완벽하게 수행했습니다. 지혜는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실현합니다. 우리가 그 지혜를 갖게 될 때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됩니다.

 

30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31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30-31)

 

27-29절에서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하나님 곁에서 그 사역을 거들며 일하는 지혜의 모습에 초점이 맞추어졌고, 30-31절에서는 지혜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참조 때 일하시는 하나님 곁에서 뛰놀며 즐거워하는 지혜, 사람을 기뻐하는 지혜의 모습에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먼저, 30절은 하나님과 지혜가 서로 즐거워하는 모습을 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때 옆에서 명장의 역할을 한 지혜를 기뻐하려고, 지혜도 자기 자신이 하나님 곁에 있음에 즐거워 웃고 뛰놀았습니다. 지혜는 하나님 곁에서 숙련공 창조주로 번역됨)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성막 축조 때의 숙련공이었던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하나님으로부터 기술과 능력과 지식을 받아 지혜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았듯이(출 31:1-6), 숙련공은 지혜로운 자로 알려졌습니다. 여기서 지혜가 숙련공으로 지칭됨으로써 창조 사역에 있어 지혜의 기술과 역할이 부각되었습니다. 31절은 지혜가 피조물 중 특히 사람이 창조된 것을 보고 즐거워하고 기뻐하였음을 묘사합니다. 지혜가 하나님께 기쁨의 대상이었듯이, 이제 사람들이 지혜에게 있어 기쁨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지혜가 사람을 자기의 기쁨이라고 표현한 데에는 사람에 대한 지혜의 큰 관심과 애정뿐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 정점임을 은근히 드러냅니다(창 1:26-28). 또한, 인간도 지혜를 각자의 기쁨으로 삼도록 넌지시 권유합니다.

 

지혜로의 초대(32-34)

하나님의 지혜를 추구하며 사는 것이 인간의 삶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입니다. 지혜의 초청에 반응해 지혜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을 것이고, 지혜를 미워하고 거부하는 자는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성도는 지속적으로 지혜의 인도와 안내를 따라 그 교훈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32아들들아 이제 내게 들으라 내 도를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33훈계를 들어서 지혜를 얻으라 그것을 버리지 말라 34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32-34)

 

32-36절은 8장의 서두 부분인 1-11절과 마찬가지로 지혜의 초청을 재차 언급하면서 독자들이 지혜를 얻도록 촉구합니다. 이때, 1-11절은 지혜가 성문이나 마을의 사거리 등 사람이 많이 있는 곳에서 그들을 기다리며 외치고 있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이에 반려 32-36절은 지혜를 얻을 자들이 지혜의 문과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고 지혜의 말을 귀담아 듣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결과적으로, 8장의 마지막 부분(32-36)인 ‘지혜의 초대에 대한 사람의 반응’은 첫 부분(1-11)의 ‘지혜의 초청’에 대한 화답이 됩니다. 중간 부분에 기록된 지혜의 현재와 과거의 역할과 유익(12-31)은 지혜의 초청을 들은 자들이 그 초청을 속히 수락하도록 촉구하는 구실을 합니다. 32-36절은 내용상 지혜의 초청(32-34)과 초청의 결과(35-36)로 구성되었습니다. 먼저, 32-34절은 ‘들어라’라는 명령이 세 번 반복되고, 시작과 끝에 “얼마나 행복한가!”(‘복이 있다’로 번역됨)라는 감탄 형식의 문장이 나와 한 단락을 형성합니다.

본문에서는 첫째, 지혜의 도를 듣고 지키는 자가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지혜는 아버지처럼 아들들을 흐리게 자신의 말을 들으라고 권합니다(시 119:1-2:128:1). 훈계와 지혜의 관련성은 이미 잠언의 목적과 요약에도 기술되었고(1:2.7), 여러 곳에서 반복되어, 지혜를 원한다면 훈계에 꼭 귀를 기울여야 함을 강조합니다.

 

둘째, 지혜의 말을 듣고 지혜가 거하는 곳 가까이에서 지혜를 기다리는 자는 행복합니다. 아버지의 말을 듣는 것은 곧 지혜의 말을 듣는 것과 같습니다. 기다리며 간절히 사모하고 적극적으로 찾을 때 지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지혜를 문 옆에서 기다리라’(34)는 명령은 ‘음녀의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5:8)는 명령을 상기시킵니다. 음녀를 찾아 거리와 골목을 헤매다 그녀의 집에 들어간 우매한 젊은이에게는 형벌과 사망이 기다리고 있지만(5:22-23), 지혜 옆에서 기다리고 기다리는 자는 행복한 자입니다.

 

지혜를 찾은 자와 놓친 자(35-36)

지혜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생명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삶 가운데 우선적으로 실천해야 본질적인 가치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그 뜻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이 바로 진정한 지혜입니다. 지혜는 근본적으로 사람의 노력과 경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35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36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35-36)

 

지혜를 찾은 자와 놓친 자의 최후는 극과 극입니다. 지혜의 초청에 귀 기울여 지혜를 찾는 자는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은총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지혜를 잡지 못하여 놓치거나 지혜를 미워하는 모든 자는 생명이나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기회를 잃고, 그 대신 사망의 위협을 받습니다. 이와 같이, 누구나 지혜를 얻느냐 못 얻느냐에 따라 생명과 사망이라는 극단의 결과를 맞으며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이게 됩니다. 여기서 생명과 사망은 육체적 죽음에 앞서 영적, 도덕적, 사회적 죽음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선언의 목적은 듣는 이로 하여금 지혜의 초대에 응하고 지혜의 집 문 가까이에 머물도록 촉구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호흡으로 창조된 존재입니다. 처음 창조에서 하나님의 호흡이 인간을 창조했다면,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창조되었습니다(고후 5:17).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분께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복 받은 사람이요, 복을 나누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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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7-01)

 


다윗을 위한 계략을 선택한 압살롬

사무엘하 17장 1-14절


오래전부터 인생이 자신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더 좋은 계획이 항상 더 좋은 결과를 만들 줄 알고 착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의사결정 하나로 승패를 좌우하도록 만드십니다. 후새의 계략보다 아히도벨의 계략이 분명 좋았음에도 좌절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계획을 무위로 돌리는 변수는 무엇입니까?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도망한 뒤에 압살롬이 자신을 지지하는 백성들과 군사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옵니다. 이때 다윗의 친구 후새는 압살롬을 지지하여 압살롬의 신하로 예루살렘에 머물 수 있게 됩니다.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조언을 따라 왕궁에 남아있던 다윗의 첩들을 공개적으로 강간하여 자신이 다윗을 폐위하고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알립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내린 심판을 하나씩 이루어가고 계셨습니다.

 

아히도벨이 다윗을 추적하자고 제안함(1-4)

하나님의 교회가 악인의 간교한 계략으로 공격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계략을 막으시고 교회를 보호해주십니다. 간교한 계략을 세워 교회를 공격하는 것은 악인의 전형적인 방식입니다. 안익의 계략은 교회를 무너뜨릴 만큼 강력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보호 가운데 보존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붙잡고 계시기 때문에 안전합니다. 악인의 지혜는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에 견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1아히도벨이 또 압살롬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사람 만 이천 명을 택하게 하소서 오늘 밤에 내가 일어나서 다윗의 뒤를 추적하여 2그가 곤하고 힘이 빠졌을 때에 기습하여 그를 무섭게 하면 그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이 도망하리니 내가 다윗 왕만 쳐죽이고 3모든 백성이 당신께 돌아오게 하리니 모든 사람이 돌아오기는 왕이 찾는 이 사람에게 달렸음이라 그리하면 모든 백성이 평안하리이다 하니 4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이 다 그 말을 옳게 여기더라(1-4)

 

아이도벨은 피신한 다윗에게 재정비할 틈을 주지 않고 추적해 기습 공격하려는 계략을 세웁니다.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도 이를 다 옳게 여겼습니다. 아히도벨은 이런 계략을 통해 백성을 빼앗아 다윗의 나라를 무너뜨리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계략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하나님께서 택하신 왕 다윗을 해하려는 악한 계략일 뿐입니다.

 

(1) 군사 소집(1)

다윗의 첩들을 강간하라고 제안했던 아히도벨은, 이번에는 압살롬에게 다윗을 죽이자고 제안합니다. 자신이 군사 12,000명을 소집하여 당장 오늘 밤에 다윗의 뒤를 추적하여 그가 피곤하여 대항할 힘이 없을 때 기습하면 다윗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도망갈 것이고, 다윗만 죽이면 모든 백성이 압살롬에게 돌아올 것이며, 왕국도 평안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아히도벨은 현재 다윗 무리의 상태를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2) 야간 기습(2)

오늘 밤에 추적하면 그가 피곤하고 힘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16:14에서 다윗이 매우 피곤하고 지쳤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때는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기 얼마 전이거나 얼마 후일 것이며, 아히도벨이 예측한 그대로였습니다. 아히도벨은 많은 군대를 이끌고 가서 다윗 군대를 위협하면 다윗 옆에 있던 사람들이 무서워 도망갈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현재 다윗의 군대는 압살롬에 대항할 만한 전력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압살롬과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하는 중입니다. 그러므로 12,000명이라는 대군을 끌고 가서 위협하면 수적으로 너무 열세이기 때문에 굳이 싸우지 않고도 다윗만 죽일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다윗의 부대 상태와 규모를 정확하게 예측하고 세운 매우 좋은 전략입니다.

 

(3) 모든 백성의 단합(3-4)

추종하던 지도자가 없어지면 백성들은 자연스럽게 다른 지도자를 찾게 되어 있습니다. 아히도벨의 계획은 많은 희생을 치르지 않고도 효과적으로 정권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이 방법에 대해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도 모두 옳다고 여겼습니다.

 

아히도벨의 계획에 반대하는 후새(5-10)

교회를 보존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변경되거나 취소되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악인에게 공격당할 때 하나님께서는 충성된 일꾼을 세우셔서 악인의 계략을 물리치게 하시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하나님의 교회를 보호하십니다. 교회는 자신의 지혜를 좇는 자들에 의해 세워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기에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자를 통해 세워집니다.

 

5압살롬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도 부르라 우리가 이제 그의 말도 듣자 하니라 6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매 압살롬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아히도벨이 이러이러하게 말하니 우리가 그 말대로 행하랴 그렇지 아니하거든 너는 말하라 하니 7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되 이번에는 아히도벨이 베푼 계략이 좋지 아니하니이다 하고 8또 후새가 말하되 왕도 아시거니와 왕의 아버지와 그의 추종자들은 용사라 그들은 들에 있는 곰이 새끼를 빼앗긴 것 같이 격분하였고 왕의 부친은 전쟁에 익숙한 사람인즉 백성과 함께 자지 아니하고 9지금 그가 어느 굴에나 어느 곳에 숨어 있으리니 혹 무리 중에 몇이 먼저 엎드러지면 그 소문을 듣는 자가 말하기를 압살롬을 따르는 자 가운데에서 패함을 당하였다 할지라 10비록 그가 사자 같은 마음을 가진 용사의 아들일지라도 낙심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무리가 왕의 아버지는 영웅이요 그의 추종자들도 용사인 줄 앎이니이다(5-10)

 

후세는 다윗 왕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아히도벨의 계략이 좋지 않다고 말하고 다른 계략을 제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후새를 사용하시며(15:31) 그를 통해 아히도벨의 계략을 무너뜨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보로하시며 그의 왕위가 지속되도록 하십니다.

 

(1) 압살롬의 질문(5-6)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계획을 이루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겼습니다.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계획을 즉시 실행하는 대신에 후새의 의견도 들어보겠다고 그를 불러들인 것입니다.

이런 암살롬의 결정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16:23에서 언급했듯이 아히도벨의 말은 여호와께 신탁을 받은 것처럼 절대적으로 옳은 견해인데, 자신의 편인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은 후새의 견해를 듣겠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부터 일이 엇나가기 시작합니다. 후에 이렇게 된 이유를 하나님께서 압살롬을 심판하기 위해서 하신 일이라고 설명합니다.

 

(2) 아히도벨 작전에 대한 평가(7)

압살롬은 후새를 불러 아히도벨의 계획을 이야기해주고 그의 생각은 어떤지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후새는 이 계획은 좋지 않다고 반대합니다. 후새는 현재 다윗 편에 서서 아히도벨의 훌륭한 계획을 반대해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아히도벨의 계획이 좋을수록 그 계획이 실행되지 못하게 필사적으로 막았습니다.

 

(3) 다윗과 그 군대의 상태 예측(8)

후새는 아히도벨의 계획을 일단 반대한 후에 그 이유를 설명하는데, 다윗과 다윗의 용사들의 상태에 초점을 맞춥니다. 아히도벨의 계획은 압살롬이 가지고 있는 월등한 군사력에 초점을 둔 것이기 때문에, 후새는 시선을 다윗 쪽의 군사력으로 돌립니다. 그는 다윗과 다윗의 군사력이 만만치 않음을 강조합니다. 이들은 모두 전쟁에 능한 용사이며, 현재 새끼를 빼앗긴 암곰처럼 매우 흥분하고 화가 난 상태이기 때문에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4) 소규모 부대의 위험성(9-10)

현재 수적으로는 다윗의 부대가 훨씬 열세지만 매우 흥분한 상태이기 때문에 무척 위험하며, 따라서 압살롬의 군대가 도리어 당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아히도벨은 다윗의 군대를 피곤하고 힘이 없는 상태로 본 것과는 달리 후새는 왕위를 빼앗긴 것에 대해 매우 분노하여 위험천만한 상태라고 설득한 것입니다. 새끼를 빼앗긴 암곰의 비유를 한 것은 자신의 의견을 좀 더 강하게 주장하기 위한 수사적 기술입니다. 다음으로 다윗이 백성들과 같이 있을 것이라는 아히도벨의 주장에 대해, 후새는 다윗은 전쟁에 익숙한 사람이기 때문에 백성들과 같이 머물지 않고 아마도 굴이나 산속에 숨었을 것이며, 숨어 있다가 혹시 다윗이 몇 명이라도 먼저 죽이게 되면 압살롬의 군사들이 패했다는 소문이 돌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압살롬의 군사들은 반드시 낙심하게 될 것인데, 다윗은 영웅이고 그의 군사들도 용사들인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억해낸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는 사람들이 다시 다윗에게로 돌아설 수 있음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후세는 아히도벨의 전쟁 계획에 대해 급하게 전쟁하여 혹시라도 지게 되면 득보다 실이 많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후새는 새끼를 빼앗긴 암곰이라든지 사자의 심장과 같은 비유를 능숙하게 사용하여 효과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능력 있는 인물입니다.

 

후새의 계획을 채택한 압살롬(11-14)

성도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지혜로 살아가야 합니다. 인간의 지혜는 아무리 뛰어나도 하나님의 지혜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은 계획은 우리를 좌절시킬 것입니다. 탁월한 지혜보다 지혜를 탁월하게 사용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아히도벨이 계산에 넣지 않은 가장 치명적인 실수는 다수라는 허수고, 욕망이라는 무리 수도 아닌 하나님이라는 최대 변수였습니다.

 

11나는 이렇게 계략을 세웠나이다 온 이스라엘을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바닷가의 많은 모래 같이 당신께로 모으고 친히 전장에 나가시고 12우리가 그 만날 만한 곳에서 그를 기습하기를 이슬이 땅에 내림 같이 우리가 그의 위에 덮여 그와 그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을 하나도 남겨 두지 아니할 것이요 13또 만일 그가 어느 성에 들었으면 온 이스라엘이 밧줄을 가져다가 그 성을 강으로 끌어들여서 그 곳에 작은 돌 하나도 보이지 아니하게 할 것이니이다 하매 14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계략은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셨음이더라(11-14)

 

다윗을 전면 공격해야 한다는 후새의 계략은 당시 정황으로는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의 사람들은 후새의 계략을 낫게 여깁니다. 압살롬은 반역을 일으키는 과정에서는 대단히 교활한 자였으나, 여기서는 어리석은 자에 불과합니다.

 

(1) 대규모 군대 소집(11)

아히도벨의 계획을 비판한 후새는 자신의 계획을 압살롬에게 이야기합니다.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모든 이스라엘에서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군사들을 모아 이들을 데리고 전쟁터에 나가자고 말합니다.

 

(2) 적군의 진멸(12-13)

이렇게 많은 수로 다윗을 기습하면 그와 함께한 사람을 한 명도 남기지 않을 수 있고, 만일 성으로 도망하면 성을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파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기습을 이슬이 땅에 내리는 것으로 비유하는데, 이는 절대적으로 많은 수를 이용해 다윗의 군대를 제압하지는 것이고, 성을 밧줄로 끌어 강에 집어넣자는 것은 과장법으로 이것도 군사가 많기 때문에 성을 파괴하는 것이 쉽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후새의 계획의 핵심은 많은 수의 군사를 모아 압살롬이 이들을 끌고 위풍당당하게 전쟁터에 나가서 다윗의 군사들을 손쉽게 이기자는 것으로 과장되고 화려하지만, 구체적인 방법은 결여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합리적이고 효율적이지만 멋있거나 화려하지 않은 아히도벨의 계획과 대조됩니다. 또 하나 대조되는 것은 아히도벨의 계획에서는 압살롬이 참여할 부분이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후새의 계획은 압살롬이 직접 수많은 군사를 데리고 나가 다윗을 제압한다면 압살롬의 위상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후새가 수많은 사람을 모으자고 말한 것은 당장 쫓아가려는 아히도벨의 계획을 막아 다윗이 도망가거나 전력을 보충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것입니다.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온 이스라엘에서 군사들을 모으려면 여러 날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후새는 화려한 언변으로 압살롬을 주인공으로 세우는 멋진 계획을 말하고 있습니다.

 

(3) 압살롬의 평가(14)

이런 후새의 계획에 대해 압살롬은 물론이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후세의 계략이 더 낫다고 평가하였습니다. 효율적이고 소박한 계획보다는 과장되고 화려한 계획이 이들의 눈에는 더 좋아 보인 것입니다. 이런 화려함에 눈이 멀어 아히도벨의 계획은 항상 옳다는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결국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계획 대신 후새의 계획을 따르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압살롬은 자신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를 잃게 되며 그의 반역은 실패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좋은 계획을 물리친 이유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재앙을 내리기 위해 아히도벨의 계획을 부수라고 하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압살롬의 행동에 대해 침묵을 깨셨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압살롬의 행동에 개입하지 않으시고 그가 하는 행동을 지켜만 보고 계셨습니다. 압살롬의 행동을 통해 암몬과 다윗의 악함을 벌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압살롬에게 악한 행동을 하라고 일부러 지시하신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의 악한 행동을 막지 않으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기도에 응답하여 압살롬의 악한 행동에 대한 심판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악한 행동하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막지 않으시면 우리 인간은 악한 본성을 따라 살면서 죄 지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악한 본성을 따라 살지 않기 위해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인생에는 변수가 있다는 사실을 두렵지만 가슴 뛰는 일입니다. 더구나 그 변수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라면, 조금 돌아가는 길로 인도하실지도 실망스럽지 않습니다. 인생에 다채로운 변수를 두어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더 큰 신비의 그릇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시길 바랍니다(잠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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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6-02)


악한 계략을 따르는 압살롬

사무엘하 16장 15-23절


 

타락한 지도자들도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몇 번의 소심한 타협과 자기 합리화가 시작이었을 것입니다. 교회를 무너뜨리는 사단의 전략은 노골적인 핍박이나 명백한 거짓으로 찾아오지 않습니다. 사이비보다 유사 복음이 해롭고, 세속적 교훈보다 거짓 영성이 위험합니다. 목숨을 다하기까지 충성한다고 해서 그것을 참된 충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참된 충성은 항상 선한 목적이 전개되어야 합니다.

 

예루살렘을 떠나 본격적으로 도망가는 다윗은 후새와 사독과 아비아달을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면서 정보를 알려달라고 부탁합니다. 길에서 므비보셋의 종 시바를 만나 양식을 얻지만, 므비보셋을 의심하여 그의 재산은 몰수합니다. 바후림을 지날 때는 베냐민 사람 시므이의 저주를 받으면서 쉬지도 못하고 어렵게 도주합니다. 그동안 압살롬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였고 다윗의 친구 후새를 만나게 됩니다.

 

후새와 압살롬의 만남(15-19)

자신의 삶을 돌아볼 때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 중 어디에 속해 살고 있다고 생각되었습니까? 주님의 뜻에 굴복하는 하나님의 백성이길 원하십니까? 아니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하나님을 기대합니까? 후자의 마음이 강하다면 하나님을 자기 삶의 주인으로 섬기는 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세상 사람들이 그러하듯 자신을 위한 종교가 필요했고 그 가운데 기독교를 택한 것일 뿐입니다.

 

15압살롬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이르고 아히도벨도 그와 함께 이른지라 16다윗의 친구 아렉 사람 후새가 압살롬에게 나갈 때에 그에게 말하기를 왕이여 만세, 왕이여 만세 하니 17압살롬이 후새에게 이르되 이것이 네가 친구를 후대하는 것이냐 네가 어찌하여 네 친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18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여호와와 이 백성 모든 이스라엘의 택한 자에게 속하여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이다 19또 내가 이제 누구를 섬기리이까 그의 아들이 아니니이까 내가 전에 왕의 아버지를 섬긴 것 같이 왕을 섬기리이다 하니라(15-19)

 

아비새는 시므이를 죽이자고 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를 하나님의 저주로 받아들입니다. 다윗은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인지 아닌지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이 순간에 그가 바란 것은 시므이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이 수치를 다 받아들이고 있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였습니다.

 

(1) 후새의 등장(15-16)

다윗이 비참한 모습으로 도망가는 것과 대조적으로 압살롬은 자신을 지지하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당당하게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합니다. 여기서 아히도벨이 압살롬과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부러 언급하는데, 이것은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매우 중요한 인물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때 후새가 압살롬을 크게 환영합니다. 학자가 후새에 대해 다윗의 친구라고 설명한 것은 후새가 압살롬에게 충성을 맹세하지만 여전히 내면적으르는 다윗의 편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그는 압살롬을 마중하고 왕이여 만세 왕이여 만세'를 외치며 환영합니다.

 

(2) 후새의 충성 서약(17-19)

이런 후새의 모습에 후새가 다윗의 친구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압살롬은 이것이 당신의 친구 다윗에 대한 충성심이냐고 비아냥거리면서 왜 친구를 따라가지 않았느냐고 묻습니다. 여기서 압살롬은 의도적으로 ‘당신의 친구’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후새의 배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압살롬의 질문에 자신은 여호와와 이스라엘 백성이 선택한 자에게 속하였으며 그와 함께 있겠다고 하면서. 왕의 아버지를 섬긴 것처럼 왕 압살롬을 섬기겠다고 충성을 맹세합니다. 자신이 여호와께서 선택하신 자에게 속하였다고 한 것은 자신은 여전히 다윗의 사람이라는 것을 암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은 압살롬이 아니라 다윗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재는 다윗의 부탁을 받았기 때문에 압살롬을 섬기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아버지를 섬긴 것처럼 자신을 섬긴다는 말을 들은 압살롬은 후새가 자신을 여호와께서 선택하신 사람으로 인정하였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후새는 다윗이 부탁한 대로 무사히 예루살렘에서 압살롬의 신하로 있을 수 있었습니다. 압살롬이 배신한 후새를 쉽게 받아들인 것은 자신이 아버지를 배신하였기 때문에 사람을 배신하는 일이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반란을 한 압살롬은 예루살렘에서 한 명이라도 더 지지자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학적으로 볼 때 이것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압살롬이 지혜로운 선택을 하지 못하게 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은 것으로 만들어달라고 기도했고, 마치 그 기도의 응답처럼 나타난 사람이 후새였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진행되고 있는 상황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기도를 이루어 가시는 과정이며, 압살롬이 의심 없이 후새를 받아들인 것은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히도벨의 모략을 따르는 압살롬(20-23)

세상의 방식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때때로 그 유혹에 넘어갈 때가 있습니까?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혹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지금 당장 불편해지거나 손해를 당하기 때문은 아닙니까? 정직하게 사는 자보다 남을 속이는 자가 흥왕하는 것을 보면서 잠시 일지라도 부러워한 적이 있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분명 근시안적인 삶이요, 영생을 바라보지 못하는 삶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0압살롬이 아히도벨에게 이르되 너는 어떻게 행할 계략을 우리에게 가르치라 하니 21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이르되 왕의 아버지가 남겨 두어 왕궁을 지키게 한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소서 그리하면 왕께서 왕의 아버지가 미워하는 바 됨을 온 이스라엘이 들으리니 왕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의 힘이 더욱 강하여지리이다 하니라 22이에 사람들이 압살롬을 위하여 옥상에 장막을 치니 압살롬이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앞에서 그 아버지의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니라 23그 때에 아히도벨이 베푸는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이라 아히도벨의 모든 계략은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그와 같이 여겨졌더라(20-23)

 

후새는 다윗의 조언을 따라 압살롬에게 굴복한 척합니다. 압살롬의 승리를 여호와의 승리로 해석하고, 자신의 충성은 대를 이은 충성으로 포장합니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 다윗의 후궁을 공개적으로 겁탈하게 함으로써 다윗 왕권의 종언과 새로운 왕의 등장을 상징적으로 알리라고 압살롬에게 조언합니다.

 

(1) 아히도벨의 첫 번째 계략(20-21)

후새를 신하로 받아들인 압살롬은 아히도벨에게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계획을 말해보라고 합니다. 이 문장에서 히브리어 본문은 ‘너희’란 남성 복수형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비록 압살롬이 아히도벨에게 말하고 있지만, 그 옆에서 후새나 다른 신하들도 듣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압살롬의 물음에 아히도벨은 다윗이 남겨둔 후궁들과 동침하라고 제안합니다. 그러면 압살롬이 다윗의 미움을 받는다는 것을 다들 알게 될 것이고, 그러면 압살롬과 함께 있는 사람들이 더욱 힘을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전왕의 후궁들과 동침하는 것은 고대 근동에서 전왕을 폐위하고 자신이 새로운 왕으로 등극하여 전왕의 권력과 모든 재산을 차지했다는 상징적인 행동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서 아버지의 첩을 취하는 것은 근친상간으로 간주하여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히도벨은 하나님의 율법보다는 고대 근동의 관행을 따라서 압살롬이 백성들에게 자신이 새로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을 조언하였습니다. 아히도벨은 또한 이런 행동을 다윗이 듣게 되면 압살롬을 미워하게 될 것이고, 압살롬과 다윗의 관계는 회복할 수 없는 지경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압살롬을 따르는 사람들은 더욱 긴장하고 힘낼 수밖에 없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 결과 압살롬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제 다시 다윗에게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고, 이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더욱 다윗과 강력하게 싸울 것이라고 계산한 것입니다. 아히도벨은 다윗의 첩을 취하는 행동을 통해 외부적으로는 압살롬이 다윗을 승계했다는 것을 알리고, 내부적으로는 결속을 다지는 기회로 삼으려고 한 것입니다. 아히도벨의 조언을 들은 압살롬은 그대로 시행합니다. 옥상에 천막을 치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의 후궁들과 동침합니다. 후궁들을 ‘그의 아버지의 후궁들’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압살롬이 근친상간의 죄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압살롬이 천막을 친 옥상은 예전에 다윗이 목욕하고 있던 밧세바를 보고 음욕을 품었던 장소로 이 모든 일의 발단이 된 곳입니다. 옥상이란 장소를 통해 화자는 왜 다윗에게 이런 치욕스러운 일들이 벌어지게 되었는지 독자들로 하여금 떠올리게 합니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다윗의 첩들이 강간을 당하는 사건은 일차적으로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예언한 것이 성취된 것입니다. 나단은 다윗에게 ‘네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기고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라고 말씀을 전한 것이 문자적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온 이스라엘 앞에서’라는 단어가 두 부분에 공통적으로 사용되어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지금 하나님께 받는 벌을 통해 한걸음 한 걸음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죄에 대해 계속 선고대로 시행하고 계시며 사해주지 않고 계신 것입니다.

본문은 언급하지 않지만, 압살롬이 다윗의 첩들을 강간한 것은 암논이 다말을 강간한 것에 대해 다윗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에 대한 보복의 의미도 있습니다. 사실 다말이 암에게 강간당했을 때 다윗이 적절하게 조치를 취했다면, 압살롬이 반역을 하는 일도, 다윗의 첨을 강간하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다윗의 무책임함 때문에 다윗의 딸이 강간당한 일에서 시작된 비극이 다윗의 첩 열 명이 강간당하는 비극으로 확대된 것입니다. 여기서 힘없는 여성들이 강간당하는 모습은 현재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으며, 지도자들이 공의와 지혜로 이스라엘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여성들이 강간당하는 상황은 항상 그 사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불의를 일삼을 때 일어납니다. 사사기 19장의 레위 첩, 다말, 다윗 첩들의 강간이 그렇습니다. 창세기 34장에서 디나의 강간 사건도 야곱 집의 영적 타락과 세겜의 불의함이 결합된 사건이었습니다. 이렇게 사회가 불의할수록 그 사회에서 가장 힘없는 사람들이 이용당하고 폭력의 희생자가 되며 이런 희생자들을 또한 무정하게 대합니다. 사회가 정의로울수록 그리고 정의롭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가장 힘없는 사람도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성들과 힘없는 자들의 희생을 강요하며 희생을 정당화하는 곳은 불의한 곳입니다.

 

(2) 암살롬의 실행(22-23)

23절에서 아히도벨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사실 이것은 사무엘하 15:31에서 아히도벨의 이름이 처음 나올 때 나왔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곳에 나온 이유는 17장에서 나올 아히도벨과 후새의 대결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아히도벨의 계략이 마치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우림이나 둠밈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탁을 받은 것처럼 정확하게 들어맞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아히도벨의 지략은 뛰어났으며, 이런 아히도벨의 능력은 다윗도 압살롬도 전적으로 신뢰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아히도벨이 압살롬 편에 섰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심각한 위기감을 느끼고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이런 아히도벨 같은 뛰어난 지략을 가진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다윗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거짓은 그것이 진리처럼 보이기에 강력합니다. 그 작은 간극을 무시하고 타협하면서 타락이 시작됩니다. 현대 교회를 향한 가장 큰 도전은 명백한 이단 사상이나 노골적인 핍박이 아닙니다. 진리처럼 보이는 거짓에 대한 분별 없는 타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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