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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16-02)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주신 사명

마가복음 16장 9-20절


 

사람들은 모여서 사회라는 공동체를 구성하며 살아갑니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 영향력을 주며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좋은 영향력을 받지만, 나쁜 사람들을 만나면 나쁜 영향력을 받기 쉽습니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서로 많은 영향을 받아 점점 서로 닮아갑니다. 그래서 결혼이 오래된 부부는 서로 닮았고 합니다.

 

  • 본문은 마가복음의 훌륭한 결론이 이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전했던 복음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해 주는 마침표와 같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이시고, 시골로 가는 두 사람에게도 나타나셨지만, 제자들은 그분의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이후 열 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 그들의 믿음 없음을 꾸짖으시고, 만인에게 복음을 전하라 하십니다. 예수님 승천 후, 제자들은 말씀을 전파합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9-14)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삶이 변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할 때는 피동적이고 소극적인 부정적인 삶을 삽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는 제자들이 적극적으로 변화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복음전파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사명은 오늘 우리를 통해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9[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10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11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12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13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14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9-14)

 

예수님께서는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부활하셨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두 사람에게도 친히 부활하신 몸을 나타내셨습니다. 마리아와 다른 두 사람이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했지만 남은 열한 제자들이 믿지 않았습니다.

 

(1)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예수님(9-11)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은 지 삼일 째 되는 날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세 차례나 예고하셨습니다(8:31; 9:31; 10:34).

그런데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에는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라고, 장사를 기준으로 사흘째 되는 날 부활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장사’의 일반적인 개념은 죽은 사람의 시신을 땅에 묻거나 화장하는 일을 말합니다. 물론 아리마대 요셉이 안식일 전에 예수님을 장사 지냈기 때문에 장사를 기준으로 해도 마찬가지로 사흘째 되는 날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말 사도신경은 적어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 지낸 사이의 2~3시간은 고려하지 않은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표현하면 ‘돌아가신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으며’라고 수정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가장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다. ‘막달라’는 갈릴리 북서쪽 디베랴에서 북쪽으로 대략 5킬로미터 떨어진 성읍입니다. 예수님께서 전에 그녀에게서 일곱 귀신을 내쫓아 주셨습니다(누가복음 8:2). 바로 그녀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처음 목격한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과 함께하던 사람들, 즉 예수님의 제자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을 때, 그들에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2) 엠마오로 가는 제자에게 나타나신 예수님(12-14)

 

제자들은 예수님의 처절한 십자가의 죽으심을 목격했기 때문에 좌절과 실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믿지 못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공생애 기간에 예수님께서 부활에 대해 가르치셨고, 성경에서도 부활에 대해 예언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부활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사실은 지금까지 한 번도 일어난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많은 것을 말씀하셨음에도 믿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자들은 자신이 처한 환경과 현실만을 바라보며 나무나 자기중심적인 생각에 매여서 부활에 대한 가르침을 기억할 수조차 없습니다. 불신앙으로 마음이 완악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 실망하여 옛 직업으로 돌아가기 위해 두 제자가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두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두 제자에게 말씀을 풀어 가르쳐 주셨습니다. 역시 예수님을 만나고 돌아와 이 사실을 다른 제자들에게 알려 주었지만 여전히 믿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에게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무덤에 찾아오는 여인들에게도, 엠마오로 향하던 제자들에게도, 마가 다락방에 120명에게도 그리고 500여 형제들에게 여러 장소에서 나타나셨습니다.

 

사역을 명령하신 예수님(15-20)

부활의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는데도 제자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슬퍼하며 울었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은 것처럼, 부활이 없는 것처럼 걱정하며 믿음 없이 살아가야 합니다.

 

15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17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15-18)

 

다시 다소 매끄럽지 않은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직전에 부활을 믿지 않은 것에 대해서 꾸짖으신 예수님께서는 감작스런게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십니다. 15-16절의 예수님의 명령은 마태복음 28:18-20과 요한복음 3:18을 적절히 반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마가복음의 문맥에서 이 믿음은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증인들의 선포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복음의 말씀을 믿는 자들에게 몇 가지 표적들이 따를 것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마가의 본문은 믿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표적들을 네 가지로 서술해주고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사도행전 16:18), 둘째, 새 방언들을 말하는 것(사도행전 2:2-4; 10:46), 셋째,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는 것(누가복음 10:19; 사도행전 28:3-6), 넷째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낫는 것(행 9:12, 17) 등입니다. 믿는 자들에게 나타날 이와 같은 능력과 표적들은 신약의 여러 곳으로부터 추출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19-20)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셔서 하늘 보좌에 앉으시고 통치하심으로 주님이 되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이 승천하셨다고 해서 물리적 또는 공간적으로 우리와 떨어져 계신 것이 아니며, 온 천하를 통하시는 주님으로서 보좌에서 주권과 능력을 행사하십니다.

 

19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20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19-20)

 

신약성경 다른 부분의 이야기를 가져다가 복음서를 마무리하려는 듯한 경향이 이어집니다. 승천에 대한 보도는 누가복음 24장과 사도행전 1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다는 사실은 성경 여러 곳에서 증거하고 있는 내용이며, 시편 110:1을 반영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역과 사명을 완수하셨다는 사실과 함께 하나님의 권위와 영광을 가지고 교회와 온 세상을 다스리심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이 말씀을 확실히 증언했다는 언급은 다른 복음서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을 반영한 요약으로 보입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반드시 능력과 역사가 나타납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을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구주가 되셔서 큰 능력으로 통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필연적으로 항상 초자연적인 기적이나 역사가 따라야 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을 통해 나타나는 가장 큰 역사는 죄와 사망 아래서 고통당하던 자들이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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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16-01)


예수님의 무덤을 찾는 여인들

마가복음 16장 1-8절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때 고민스러운 때가 많이 있습니다. 누구나 그렇습니다. 고민스러운 구조는 신앙인으로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기도하면서 기도의 제목에 따라 기대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대대로 응답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기대한 것과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현상이 다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고민합니다. 그런데 안심하시길 바랍니다. 인생의 삶이 기대했는데 현실은 다른 것입니다.

 

  • 안식 후 첫날, 여인들이 예수님께 향품을 바르기 위해 무덤에 가니 이미 무덤 문에서 돌이 굴려져 있습니다. 흰옷을 입고 무덤 안에 앉은 한 청년이 여인들에게 예수님은 살아나셨고, 이전에 말씀하신 대로 갈릴리로 가실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전하라 합니다. 여인들이 몹시 놀라 도망합니다.

 

여인들의 사랑과 염려(1-4)

예수님의 부활은 감히 상상도 못했던 충격적인 일입니다.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도 불가능한 일이요 전대미문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을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여인들의 힘으로 옮길 수 없는 큰 돌이 주님의 권능으로 굴려졌듯이 우리도 그렇게 구원받았습니다.

 

1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2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3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4눈을 들어 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1-4)

 

세 여인이 예수님의 무덤가에 등장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갈릴리에서부터 따랐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현장에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안식 후 첫날 가장 먼저 예수님 무덤을 찾아갑니다. 이는 깊은 사랑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안식일을 준비하는 예비일이었고, 율법(신 21:22-23)에 따라 그날 해 지기 전에 무덤에 안장되었습니다. 해가 졌을 때 유대인들의 안식일이 시작되었고, 그 안식일은 토요일 저녁 해가 질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세 여인은 15:41에서 언급된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을 따르고 섬기던 여인들의 목록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 예수님 시신에 바를 향품을 준비했던 그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신이 안장된 그 무덤으로 갔습니다. 여인들은 안식일이 끝나자 토요일 저녁에 향품을 준비했고, 하루를 자고 난 후 바로 일어나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향해 간 것입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처형 장면에서 같이 있던 자들이 여인들이었고 예수님께서 처형된 이후에도 줄곧 함께하려는 자들이 여인들이었음을 드러냅니다. 이뿐만 아니라 마가는 앞으로 제시할 부활의 첫 목격적가 될 사람들도 여인들이라는 점을 부각시킵니다. 1세기 팔레스틴의 문맥에서 이것은 매우 파격적입니다.

세 여인들이 무덤에 도착하기 전에, 무덤을 막고 있을 돌 때문에 걱정하였습니다. 그 돌이 심히 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무덤에 와보니, 염려와 달리 무덤의 돌은 이미 굴려져 있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죽음에 가둬 둘 그 어떤 장애물도 없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예비해 두고 계십니다.

 

갈릴리에서 뵐 부활의 주님(5-8)

예수님의 빈 무덤은 부활의 증거이자 소망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시신이 발견되었더라면 기독교는 거기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은 비었고 시신은 없었으며 이를 목격한 다수의 증인이 있습니다. 부활을 목격한 자들이 희생을 감수하고 부활을 전한 것 역시 부활의 증거입니다.

 

5무덤에 들어가서 흰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6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7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8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4-8)

 

세 여인들은 열려 있는 무덤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 무덤 안에는 예수님 시신이 없었습니다. 여인들이 발견한 것은 흼 옷을 입은 한 청년을 보고 놀랍니다. 이 놀람은 두 가지와 연관된 것으로 보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6). 또한 놀람은 그 청년의 존재와 연관된 것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 청년이 누구였는지에 대해서 마가는 역시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지 않지만, 흰 옷을 입었다는 사실과 문맥은 이 청년이 누구였는지에 대해서 마가는 역시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지 않지만, 흰 옷을 입었다는 사실과 문맥은 이 청년이 천사임을 암시합니다. 실제로 누가의 기록은 여인들이 그 사람을 천사로 인제했음을 보여줍니다(눅 24:23).

이 청년의 입을 통해서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이 선포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지니는데 유대인들은 종말에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 가장 드라마틱한 일로 의인의 신원/의인의 부활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요 11:24).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구약이 예견했던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종말의 때가 이미 도래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청년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확증하기 위해서 그를 두었던 곳을 보라고 말합니다. 여인들이 청년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의 빈 무덤을 확인했습니다. 청년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을 예고합니다.

그리고 이 소식을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알려주라고 지시합니다. 이 묘사에서 눈에 띄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먼저 여성들이 부활의 첫 번째 증인이 된 것입니다. 십자가 현장에서 다 도망간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소식을 여인들을 통해서 듣게 됩니다. 둘째로, 비록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는 데 실패하기는 했지만,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듣게 된다는 것입니다. 갈릴리는 제자들이 처음에 부름 받은 곳이었고, 그들은 이제 그곳에서 다시 부활하신 주를 만나고 회복되어 예수님의 제자로서 사람 낚는 어부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빈 무덤에 있던 청년의 말을 통해서 암시되고 있습니다. 여인들은 심히 놀라 떨었고 무덤에서 나와서 도망치듯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만일 마가복음이 이러한 방식으로 8절에서 끝났다면, 고대 문헌에서는 유례를 찾기 힘든 열린 결말이 됩니다. 이러한 열린 결말은 독자들 스스로 마가복음의 스토리를 읽고 결론을 내리도록 유도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서둘러 새벽에 찾아간 여인들처럼, 저도 간절하고 깊은 사랑으로 말씀 앞에 앉아 부활의 주님을 만나길 갈망합니다. 죽음과 같은 어두운 시간 끝에 찬란한 부활의 아침이 이어짐을 기대하며, 믿음의 눈으로 고난을 바라보고 인내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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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15-03)


죽음의 자리에서도 충성하는 제자

마가복음 15장 33-47절


 

사람들이 일하면서 요란하게 일하지만 실속없는 사람도 있고, 전혀 드러나지 않게 조용히 일하지만 정작 중요한 일을 잘 처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입으로만 일하는 사람도 있고, 말없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큰소리는 혼자 치면서 결정적인 순간에는 도망가버리지만, 보통 때는 있는 둥 없는 둥 하는 사람이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서 중요한 일을 잘 처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일꾼입니까?

 

  • 예수님께서 제육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고 제구시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 외치신 후 숨을 거두었습니다. 성소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찢어집니다. 이를 본 백부장은 그분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셨다고 고백합니다. 안식일 전날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예수님 시신을 요구해 무덤에 둡니다.

 

운명하신 예수님(33-38)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신 분이지만 십자가 위에서 인류의 죄악을 대신 지신 대속제물로서 절규하면서 돌아가셨습니다. 그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크게 외칠 수 있습니다. 어둠은 죄악 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33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34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35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36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고 이르되 가만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37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38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33-38)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6시부터 9시까지 세 시간 동안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해가 가장 강렬한 시간에 온 땅에 어둠이 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계신 세 시간 동안 임한 캄캄한 어두움은 구약 아모서 8:9-10의 예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실 종말론적인 심판을 상징합니다. 즉 하나님 아들의 죽음을 애통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오후 3시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즉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소리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고통 속에서의 부르짖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부르실 때 늘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34절에서 그는 ‘나의 아버지’라고 하지 않으시고 ‘나의 하나님’이라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지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들을 대신해서 대속물로 죽으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택한 백성들을 구속하기 위해 그들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형벌을 받고 버림을 당하는 대속물이 되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외침은 시편 22:1을 반향하고 있습니다. 이는 시편 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를 외치시고 돌아가십니다. 본문에서 시편 22:1를 기록한 것은 예수님께서 시편 22편 전체를 다 말씀하셨다고 보아야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성경 인용 관습이었고, 마가가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시편 22편의 예언들이 완수된 것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시편 22편을 마지막으로 말씀하시고 돌아가신 것은, 그가 자신의 죽음을 종말에 하나님의 구권 계획에 성취로 이해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35절에서는 사람들의 반응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엘리야를 부르신 것으로 잘못 이해하였습니다. 말라기 4:5에 의하면,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라는 말씀에 의하면, 엘리야 선지자가 주님의 날이 오기 전에 돌아온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종말론적 기대 속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지금 엘리야를 부르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엘리야가 위험에 처한 사람들에게 다시 와서 도와준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엘리야를 부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신포도주를 제공했습니다. 이 신포도주는 그레코로만 사회에서 노동자들이 갈증 해소를 위해서 마시던 음료였습니다. 이 사람의 행위는 그다지 선한 의도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이 음료를 제공하고 나서 엘리야가 예수님을 내려주는지 지켜보자고 제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때에 예루살렘 성전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둘로 찢어졌습니다(38). 휘장이 둘로 찢어진 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아마도 이때 찢어진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하늘이 갈라진 것처럼 성전 취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갈라진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래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의 기구를 나르지 말라고 하셨고(11:16),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을 통해서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을 암시하셨습니다(11:12-14, 20-23). 또한 13장에 등장하는 종말론적 담화를 통해서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을 분명하게 예고하셨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운명하실 때 성전의 휘장이 갈라졌다는 것은 성전 기능이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되었음을 신학적으로 상징적으로 말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믿음의 사람들(39-41)

교회는 십자가의 의미를 확실히 아는 자들로 이뤄집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눈으로 밝히 보는 자들입니다. 또한 하나님과 우리 자신을, 세상과 모든 일을 십자가라는 렌즈를 통해 바라보고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보는 자 진리를 깨닫는 것은 하나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39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40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그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41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따르며 섬기던 자들이요 또 이 외에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들도 많이 있었더라(39-41)

 

마가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직후에 처형장 주변의 모습을 스케치해줍니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사람은 백부장입니다. 예수님을 처형하는 현장에서 모든 일을 집행하며 예수님을 자세히 주목할 기회를 얻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에 처해진 경위를 들었고, 십자가상에서 대략 6시간 달려 있던 예수님의 모습을 목격하면서 다른 죄수들과 다른 그의 언어와 행위를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처형 장면을 지켜본 백부장은 그가 운명하시는 것을 보고는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합니다. 사실 때우 놀라운 고백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사람은 마가복음을 통틀어 오직 그가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규정하고 시작합니다(1:1). 그의 수세 시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1:11). 변화산에서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9:7).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사람은 그의 제자들도 아니고 유대인들도 아니고 백부장이었습니다. 이것은 마가가 보여주는 아이러니입니다. 백부장의 놀라운 고백을 들려준 마가는 또 하나의 놀라운 이야기를 보도합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현장에 있는 뜻밖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여자들이었습니다. 본문에 이름이 언급된 세 명의 여자들 외에도 많은 여자들이 멀리서 예수님의 처형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쳐버렸습니다(14:50). 마가가 보도하는 십자가 현장에는 제자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갈릴리로부터 출발해서 십자가의 길을 따라왔던 제자들은 마지막 장면에서 예수님과 함께하는데 실패하고 있는데, 이 여자들은 예수님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이제 그 길의 시작부터 주목받지 못했지만 그 길을 줄곧 함께해왔고 가장 위험한 십자가의 처형장에도 서 있는 여자들에 관한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마가는 직접적으로 묻고 있지는 않지만, 독자들에게 이렇게 암시적으로 묻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누가 진짜 예수의 제자들입니까?’

 

매장되시는 예수님(42-47)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이나 부활, 승천과 재림에 대해 도무지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만이 그분의 모든 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나라, 그 나라의 안식을 고대하고 기다리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감사하며 그분의 죽음을 본받으려 합니다. 자기의 명예와 신분과 부에 상관없이 말입니다.

 

42이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43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44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 지가 오래냐 묻고 45백부장에게 알아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주는지라 46요셉이 세마포를 사서 예수를 내려다가 그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47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42-47)

 

십자가형은 공개 처형의 방식으로 백성들을 향한 교육적/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되었습니다. 십자가형으로 죽은 사형수의 시체는 통상 나무에 달아놓거나 버려져 들짐승의 먹이가 되게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신명기 21:22-23의 밤새도록 시체를 나무에 달아두지 말라는 말씀에 따라서 십자가 사형수들도 매장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경우 안식일 전날 처형되었기 때문에 그의 시체를 매장하기 위해서 시간이 촉박했습니다. 그런데 아리마대 출신의 요셉이 등장하여 ‘당돌히’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내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에 대한 마가의 묘사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던 사람이라는 언급입니다. 그는 아마도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나라(통치)의 일면을 본 것 같습니다. 기득권에 속한 사람들이 대부분 예수님을 적대시하고 그를 죽이는 데 동조하던 상황에서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재자로서 선택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예수께서 신명기 21:23의 율법이 정한 저주받은 자의 죽음을 당했는데도 산헤드린 공회원으로서 그의 시체를 요구하는 행위는 놀라움을 줍니다. 십자가에 달린 죄수들은 통상 하루를 넘겨서 생존하는 것이 대다수였습니다. 그래서 너무 오랫동안 죄수가 생존하는 것을 막고 빨리 처형을 끝내기 위해서 종종 죄수들의 다리를 꺾곤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경우 대략 여섯 시간 정도를 십자가 위에 있었는데, 다른 죄수들에 비해서 상당히 일찍 운명하셨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자신의 이전 경험에 비추어 예수께서 벌써 운명하셨을 리 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처형을 감독했던 백부장에게 예수께서 죽었는지를 알아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었다는 것을 확인한 빌라도는 아리마대 출신의 요셉에게 시체를 내줍니다. 마가는 이제 예수님께서 매장되는 과정을 서술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날이 안식일 전날 예비일이었고, 숨을 거둔 시점이 대략 오후 3시 정도 되었기 때문에, 요셉이 처형 현장에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준비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았습니다.

빌라도로부터 시신의 수습 허가를 받은 요셉은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 형틀에서 내려서 잘 수습한 후에 세마포로 짰습니다. 그러고는 바위 속에 판 자기의 새 무덤에 장사합니다. 로마 시대에 개발된 채석장들은 후에 종종 무덤으로 전용되었습니다. 돌을 캐기 위해서 바위를 파곤 했는데, 그 관 곳들이 후에 무덤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은 돌 침상 위에 눕혀진 것으로 보이고, 무덤의 입구는 돌을 굴려서 밀봉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의 시체가 눕혀진 곳을 확인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막달라 마리아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그들이 무덤을 확인한 것은 예수님의 시신이 적절하게 수습되기에 시간이 너무 촉박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내고 안식일 다음날 예수님의 시신을 찾아와서 몸에 향품을 바르려고 하였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장면과 그의 시체를 수습하는 장면에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죄로 막혔던 하나님과 저의 관계를 온전히 회복시키고자 친히 몸을 찢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언제든 복음으로 사탄의 정죄와 참소를 물리치고, 주님이 열어 주신 길을 따라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 예배하며 헌신하는 제자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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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15-02)

 

 

조롱과 고난 속에 십자가 지신 예수님

마가복음 15장 16-32절

 

 

2000년 기독교 역사에서 기독교 신앙을 삶 속에서 훈련하는 방법이 다양할 것입니다. 그런데 시각적으로 훈련으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오래된 방법이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범그리스도교 종파 중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주 구체적으로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 선교를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까지 올라가신 장면들마다 성경을 통해 묵상하는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십자가형에 처해지고 군인들은 그를 조롱합니다. 골고다로 예수님을 이끌고 가던 로마 군인들은 구레네 시몬을 붙들어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합니다. 골고다에 이르러 군인들은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님께서는 거부하십니다. 처형장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가 걸립니다. 조롱하려고 건 죄패가 역설적으로 예수님의 진정한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조롱당하신 예수님(16-20)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께 그 책임을 돌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나님을 상대하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 반응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따라서 완전하게 그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모욕과 굴욕 당하셨습니다.

 

16군인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17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18경례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19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20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16-20)

 

유대인으로 구성된 성전 군대와 달리, 이 군사들을 아마도 팔레스타인 근방에서 모집된 이방인 군사들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군사들에게 끌려간 것은 ‘브라이도리온’이라는 총독 뜰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그곳에 군사들이 다 모아 있었습니다.

그 군사들은 예수님께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웠습니다. 이 자색 옷은 군인들이 입던 낡은 겉옷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시관은 로마의 문화에서 전쟁에서 승리한 영웅이나 운동경기에서 우승한 선수의 머리에 씌웠던 관을 가시가 있는 나뭇가지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했던 것은 왕의 복장을 흉내 내서 예수님을 조롱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자색 옷은 아무나 입을 수 있는 색깔의 옷이 아니라 왕이 입는 옷이었고, 가시 면류관은 왕의 금관을 흉내 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조롱하고 희롱한 것은 빌라도의 심문 자리에서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군사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는 문구를 통해서 지지를 받습니다. 군사들은 예수님께 ‘유대인의 왕께 충성’이라고 조롱하듯 경례하였습니다(18). 이것은 그들이 라틴어로 로마 황제에게 하던 경례를 흉낸 것입니다. 이 장면은 전체적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의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을 흉내 내어 모욕을 주는 장면입니다. 이들이 왕을 대하듯 행한 행위들은 조롱의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로마 군사들은 반복적으로 계속 갈대로 예수님의 머리를 치고 침을 뱉으며 꿇어 절했습니다(19). 이것은 마가복음 10:33-34에서 예수님의 세 번째 고난 예언을 상기시키며 이사야의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군사들의 놀림은 그들이 예수님에게 꿇어 절하는 모습을 계속됩니다. 20절에 군사들이 자색 옷을 벗기고 다시 예수님의 옷을 입힙니다. 고대 문헌에서는 원래 십자가형을 받는 죄수들은 완전히 벗긴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에는 옷을 십자가형이 집행되기 바로 직전에 벗기게 됩니다.

 

이러한 군인들의 모욕과 희롱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아무 항거나 저항을 하지 않으셨는데, 이것은 이사야 50:6의 예언(‘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에 대한 성취일 것입니다. 군인들은 희롱을 다한 후 그에게서 왕을 상징하는 자색 못을 벗기고, 도로 그가 입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한 준비를 시작합니다.

 

 골고다로 가시는 예수님(21-28)

예수님께서는 온전한 정신으로 자신의 몫을 담당하시는 철저한 순종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바로 우리의 죄악을 위해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철저한 순종을 통해 우리는 면죄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온전한 모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두를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신 주님의 헌신적인 사랑을 깊이 되새겨야 합니다.

 

21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22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23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24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가질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25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26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27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28(없음)(21-28)

 

본문은 예수님께서 골고다로 올라가시는 장면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내용입니다.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향하시던 예수님의 행렬에 의외의 인물이 동참합니다. 그 자리에 자제는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십자가의 길에는 또 다른 일꾼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1) 골고다로 올라가신 예수님(21-23)

 

당시 십자가형에 처해진 죄수들은 처형장까지 자신이 처형당할 나무를 직접 지고 가야 했습니다. 그것은 보통 평행으로 못 박힐 나무였으며, 형장에서 수직으로 세워질 나무에 맞추어져서 십자가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9:17에서는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상황은 십자가를 지고 가던 예수님께서 약해진 몸 때문에 잘 지고가지 못하자, 군사들이 구레네 시몬에게 억지로 지웠습니다. 구레네는 북아프리카 연안 도시로 상당히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음으로, 시몬은 유대인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아들들인 알렉산더와 루포가 언급된 것으로 보아서(21), 그들은 마가복음에 처음 들었던 청중들에 잘 알려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심한 채찍질을 당한 예수님께서는 이 십자가를 지고 가기에 역부족이었습니다. 실제로 채찍에는 동물의 뼈나 쇠붙이가 붙어 있어서 한 번의 채찍질만으로도 살점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십자가를 대신 짊어질 사람을 찾았습니다. 당시 로마 군인들은 피지배국의 사람들에게 강제로 짐을 지울 수 있는 ‘강제노역’의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마태복음 5:41).

이때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 시몬이 이 일을 위해서 지명됩니다. 아마 구레네인 시몬은 유월절 명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순례하러 올라왔을 것입니다. 그는 지나가다가 붙들렸고 어쩔 수 없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처형장까지 같이 가게 됩니다. 여기서 마가는 시몬을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로 소개하는데, 만일 시 는 것은 몬의 두 아들들이 초대교회에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다면 구태여 그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로마서 16:13에는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라는 언급이 있습니다. 만일 로마서의 그 루포가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이 루포라면, 시몬은 우연하게 십자가 길에 동참하였지만, 그와 그를 비롯한 두 아들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로마 군사들은 예수님을 끌고 ‘골고다’에 도착합니다. 골고다는 예루살렘 바로 바깥에 위치하였는데, 넓은 공간과 예루살렘으로부터 멀지 않은 거리는 공개 처형 방식인 십자가형을 집행하기에 적절한 장소가 되게 하였을 것입니다. 로마 위정자들은 사형수를 사람들이 잘 보이는 큰 길가에서 집행하길 원했습니다. 십자가형은 로마에 대해 반란을 꾀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와 처벌의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와는 다르게 십자가형 자체는 간단히 서술하고 있습니다. 십자가형은 당시에 공포의 사형 방법이었습니다. 로마 철학자 키케로는 ‘십자가형이 가장 잔인하고 악독한 형벌이다.’라고 협오했고, 유세프스는 ‘그 죽음을 가장 비참한 죽음’이라고 평했습니다.

 

군사들은 예수님께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습니다. 마태는 ‘쓸개 탄 포도주’라고 기록합니다(마태복음 27:34). 그것은 십자가형에 처해지는 죄수들에게 그 고통을 감소시키기 위해 준 일종의 마취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통을 피하지 않고 온전한 정신으로 십자가를 지시려고 포도주를 받지 않으십니다. 또한 예수님의 거절은 유월절 만찬에서 본인이 하신 말씀과도 연관되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포도주를 제자들과 함께 나누시면서 하나님 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실 때까지 다시 마시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24-28)

 

예수님께서는 죽임을 당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에 군사들은 예수님의 옷을 나누기 위해서 제비를 뽑아 나누었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19:23-24을 보면, 그들은 예수님의 겉옷과 속옷을 다 취하였습니다. 요한은 겉옷과 속옷을 빼앗기신 것이 구약성경에 이미 예언된 것의 성취임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마가의 본문에는 요한과 같은 분명한 성취에 대한 언급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이야기 직후에 옷을 제비뽑았다고 언급하는 것은 분명 시편 22:16, 18에 대한 성취를 말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라는 성취입니다. 로마인들은 죄수를 완전히 발가벗겨 십자가에 못 박았으며, 예수님께서는 같은 방법으로 못 박힌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공관복음서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시간을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마가복음 저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시각을 제시합니다. ‘제삼시’는 아침 9시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의 법정으로 끌려간 것이 이른 아침이었습니다(마태복음 27:1; 마가복음 15:1; 요한복음 18:28). 요한복음 19:14은 예수님께서 빌라도 법정에 서신 시각이 ‘제육시’라고 기록함으로써 공관복음서와 일치하지 않습니다. 마가는 오전 9시에 예수님께서 이미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보도하는데, 요한은 정오에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요한복음이 로마 시간을 따르는 것으로 이해하면 조화롭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제육시는 오전 6시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야간에 유대인들의 공회에서 불법 심문을 받으셨고, 새벽에 로마 총독의 법정에서 빌라도에 의해 재판을 받으셨으며, 즉각 예루살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골고다로 끌려가 아침 9시경에 십자가에 처형되셨습니다.

 

그 십자가 위에 있는 죄패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십자가형에 처해진 죄수들은 자신의 죄목을 자신의 목에 메고 가서 처형당했는데, 예수님의 경우 그 죄패가 십자가 위에 전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좌우편에는 강도 사람이 함께 처형되었습니다. 하나는 그의 오른편에, 글 하나는 그의 왼편에 못 박혔다는 마가의 서술은 10:37에서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청탁이 생각나게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영광 받으실 때에 자신들이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세배대의 아들들은 자신들이 예수님과 함께 잔을 마실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자신들이 실제로 무엇을 구하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하겠다고 한 그들은 온데 간데 없고, 예수님의 곁에는 두 강도만 있을 뿐입니다.

 

조롱하는 사람들(29-32)

예수님의 모든 마지막 시간은 인간이 철저하게 하나님을 배반하고 무시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세상과 제국의 권력 앞에서 신앙이 허무하게 지워지는 순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모든 뜻이 이뤄지고 하나님의 약속이 낱낱이 성취되고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메시아를 상대했지만, 하나님께서도 남김없이 자기 뜻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가 가장 수치를 당하는 순간에 가장 영광스런 하나님으로 입증되셨습니다.

 

29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30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31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32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29-32)

 

대제사장과 공회원들, 빌라도와 로마 군사들뿐만 아니라, 이제 지나가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욕을 퍼붓습니다. ‘아하’라는 감탄사는 조롱하는 의미로 시편 15:21, 40:15, 70:3에도 등장합니다. 머리를 흔드는 행위도 경멸하는 몸짓으로 구약에서 열왕기하 19:21, 욥기 16:4; 시편 22:7, 109:25, 이사야 37:22, 예레미야 18:16 등에서 여러 번 등장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그가 완전히 패배하여 그가 선포했던 하나님 나라에 실현이 실패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욕하며 퍼붓는 말 속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에 대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사실 유대신학에서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메시아는 하나님의 신적인 대리인으로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심판을 대행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21:23에 따르면 나무에 달려 죽는 십자가형은 하나님께 저주를 당한 자의 죽음이 됩니다. 하나님께 저주받은 메시아라는 것은 유대신학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주장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이유도 이 유대신학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예수님을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하고 나서는 새로운 해석이 더해지고 있습니다(갈라디아서 3:13).

 

마가복음에서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욕했을 때, 모욕이라는 이 단어를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향해 했던 말들은 그냥 모욕이 아닌신성모독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모욕하고 조롱합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다시 짓겠다고 하신 말씀은 파언(破言)이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성전 제사 제도가 폐지되고, 부활하심으로 새로운 성전이 되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이 조롱하며 언급하는 ‘구원’이 예수님의 약함과 고난 속에 이루어진 것도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들이 ‘남은 구원하였으나’라고 조롱할 때, 예수님께서는 여러 사람들을 취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곳에서 의미는 단순한 개인적인 구원을 넘어서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조롱하는 말 속에서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31b-32a)라고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의 장본인들인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조롱에 합류합니다.

 

32절에서 같이 십자가에 못 박힌 두 강도도 예수님을 욕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의 지도자들, 로마의 권력자들, 군사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에 이어서, 지금 상황에서 같이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두 강도로부터 무시를 당하고 모욕을 당하는 처지에 있는 것입니다. 가장 높은 자리에 있어야할 하나님의 아들이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간 것입니다.


 십자가로 향하는 길은 그 자체만으로도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는 물론이고 한 인간으로서 감당하기에도 조롱과 멸시, 버림당함은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모든 질고를 겪으셔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묵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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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5-01)


총독 빌라도 앞에 선 예수님

마가복음 15장 1-15절


 

우유부단한 사람은 어떤 결정에서 우왕좌왕합니다. 이런 사람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이랬다 저랬다 하면 성공하지 못합니다. 또 자기 입장이 명백하지 못하면 꼭 일을 그르치게 만듭니다. 사물에 대한 가치 판단력이 역량이 되지 않고 부족합니다. 가치관이 분명하고 판단력이 건강하고 그리고 자기의 올바른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 어려움이 있어도 해쳐나가면서 계속해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우유부단하고 우왕좌와하는 빌라도를 볼 수 있습니다.

 

  • 이른 새벽, 심의를 마친 대제사장들과 공의회 의원들은 공식적인 공의회를 열고 산헤드린의 지도자들은 사형 판결을 얻어내기 위하여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줍니다. 예수님의 신병을 인도받자 빌라도는 간단한 심문을 합니다. 예수님에게서 사형에 처할 만한 신빙성 있는 증거를 발견하지 못한 빌라도는 유월절 특별 사면이라는 관례를 이용해 놓아주려 하지만 실패합니다.

 

빌라도에게 넘겨지신 예수님(1-5)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이면 하는 일이 고작 죄짓는 일밖에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마음이나 모임에든지 그 안에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으면 사람의 말에 솔깃하여 악하고 음란한 세상을 따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말이 아닌 주님의 말씀이 들리는 환경, 참된 예배를 드리는 구조 속에 거해야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배부르고 등 따신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이 될 뿐입니다.

 

1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니 2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 3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발하는지라 4빌라도가 또 물어 이르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발하는가 보라 하되 5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으로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놀랍게 여기더라(1-5)

 

이른 새벽에 대제사장들은 다른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들과 함께 심의를 마치고 공식적인 공의회를 엽니다. 이 같은 사실은 지난밤에 모였던 모임이 불법적인 성격이었음을 다시 한 번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증거를 확보하기 전에 이미 예수님을 죽이려는 의도로 모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형식적으로나마 공식적인 절차를 밟기 위해 이른 새벽에 정식 공의회를 소집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산헤드린 공의회는 죄인을 사형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공식적인 판결을 이끌어내는 데는 로마의 결정이 필요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예수님을 로마 법정으로 끌고 갔습니다. 산헤드린에서 종교적 판결을 받은 죄수는 로마 정부에 넘겨져 사형 선고를 받고 형이 집행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산헤드린의 지도자들은 사형 판결을 얻어내기 위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빌라도는 주후 26년에서 36년까지 유대를 통치하였던 총독입니다. 예수께서 전한 고난에 대한 예언,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라는 예언이 성취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신병을 인도받은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한 심문을 시도합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이 질문은 산헤드린의 심문 자리에서 대제사장이 던진 질문과 연결선상에 있습니다.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다만 대제사장에게서는 종교적 성향을 띠고 있었던 칭호가 빌라도의 심문에서는 정치적 성향의 질문으로 변경됩니다. 사실 종교적인 차원의 문제는 빌라도에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로마는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차원의 문제는 유대인들의 자치권 아래 두었기 때문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처벌하기 위해 종교 문제를 정치 문제로 교묘하게 변경합니다. 예수님 당시 빈번한 메시아의 출현은 로마 정부와 이스라엘을 곤란하게 만들었습니다. 총독은 지금 그 같은 메시아로 자처하고 있느냐고 질문합니다. 실제로 1세기에 메시아를 자처한 사람들이 수십 병에 달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정치적으로 민감할 수 있는 질문에 교묘하게 대답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틀림없이 유대인들의 왕이 맞습니다. 그러나 빌라도가 의도한 정치적인 왕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애매한 답변으로 상황이 자신들의 의도대로 돌아가고 있지 않다고 판단한 대제사장들이 다양한 주장으로 예수님을 고발하기 시작합니다. 빌라도는 대제사장들이 제기하는 혐의점들을 옆에서 듣고 있다가 왜 예수님께 즉시 자신을 변호하지 않는지 의아해합니다. 그는 종교지도자들이 얼마나 많은 죄목으로 고발하고 있는지 예수님의 주의를 환기시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고발에 대해 전혀 대답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에 빌라도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부당한 고발에 변호하는 것이 상식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에서 빌라도는 어느 정도의 연민을 느꼈던 듯하며, 예수님을 구하려는 소극적인 시도를 하게 됩니다(마가복음 15:9-14; 마가복음 27:23-24; 누가복음 23:4).

 

십자가형을 요구하는 무리들(6-15)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택에 있어서 합리적으로 행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장 현명한 선택은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러면 말해야 할 때와 침묵해야 할 때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자신이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따르느냐에 들어납니다.

 

6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더니 7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 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8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 주기를 요구한대 9빌라도가 대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10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 11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12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13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14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15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6-15)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아무 잘못도 없이 무고함으로 끌려온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님을 넘겨준 줄 안 것입니다. 그래서 유월절 명절에 죄수 하나를 풀오 주는 전례를 이용해서 예수님을 풀어주려 합니다. 그러나 빌라도가 원했던 뜻대로 진행하지 않습니다.

 

(1) 명절에 이루어진 특별 사면(6-7)

 

유월절 명절에 로마제국은 피지배국인 유대인들의 환심을 얻기 위해 일종의 특별 사면을 시행하였습니다. 특별 사면은 고대든지 현재든지 정치 목적으로 이용될 수 있는 제도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특별 사면이 행해지는 방식에 있습니다. 총독이 아니라 백성들이 선택하는 죄수를 석방시켜주는 제도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사형에 처할 만한 증거를 찾지 못한 빌라도는 유월절 사면이라는 관례를 이용해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시도합니다. 사실 빌라도의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신념들과 연관되었을 뿐 로마제국에 직접적인 위해가 되는 인물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말고도 석방 대상자로 바라바가 소개됩니다. 그는 민중 선동가였고 민란 중에 사람을 죽인 죄로 체포되었는데, 로마에 대항하여 혁명을 일으킨 민족주의자, 열심당의 일원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체포되어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명절에 행해지던 관례에 예기치 않은 복병이 등장합니다. 무리의 등장입니다. 많은 무리가 재판정에 몰려듭니다. 그들은 관례대로 죄수 한 명을 석방시켜 달라고 요청합니다. 바라바가 민족주의적 선동가였기에 그는 적지 않은 유대인들로부터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을 것입니다.

11절에 등장하는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선동한 것으로 볼 때, 이 시점까지도 무리는 어느 쪽을 선택할지 분명하게 확정하고 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예루살렘에 명절 기간 동안 올라와 있던 많은 유대인들이 있었고, 그중에 적지 않은 수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열광적으로 호응한 것을 생각하면, 예수님에 대해 호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도 이곳에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특별한 혐의점을 찾지 못한 빌라도는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자신에게 넘겨준 이유가 시기 때문임을 알아차렸습니다. 이러한 느낌을 심문 자리에서 느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놓아주기를 원하느냐고 무리에게 질문합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해서 소극적 호의를 느꼈고, 이 같은 애매한 상황을 무리의 판결로 해결하려고 시도합니다. 이러한 미묘한 순간에 대제사장들은 무리를 충동하여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청원하게 합니다.

 

(2) 넘겨지신 예수님(8-15)

 

빌라도는 이러한 상황을 기대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미묘한 상황에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 부르면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다시 묻습니다.

그러나 군중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칩니다. 마가복음에서 처음으로 십자가형이 언급되고 있고, 예수님의 구체적인 처형 방법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청중 가운데는 예수님에 대해서 호의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기에 이런 반응은 상당히 놀랍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무기력한 모습으로 산헤드린과 빌라도 앞에서 심문당하는 모습에 실망한 듯합니다. 갈릴리를 비롯한 유대 지역에서 보여주었던 예수님의 능력 있는 모습과 지금 예수님의 모습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대제사장들에 의해서 선동되는 군중 심리도 한몫했을 것입니다.

 

여하간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칩니다. 이에 빌라도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만한 어떤 심각한 악한 죄를 범했느냐고 다시 묻습니다. 이러한 마가의 기술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로마법에 따라 죄를 합법적으로 규정하지 못한 채 행해진 것임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군중심리에 선동된 무리는 더 소리 높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고함칩니다. 빌라도의 소극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무리의 목소리가 힘을 얻습니다. 그는 무리의 요구에 이끌려 정의보다는 정치적 판단을 내립니다. 무고하게 넘겨진 유대인 청년 한 명을 살리기보다는 유대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을 만족시키는 편이 낫다고 정치적으로 판단합니다. 마가는 이 단락에서 예수님께서는 혐의점 없이 무고하게 처형이 결정되었다는 사실과 이것이 종교지도자들의 모의에 의한 것임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15장은 온통 불의한 소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주의 음성들을 수 없고, 불법 재판은 우리의 마음마저 옥죌 정도로 조소와 시기, 거짓 고소와 모함으로 일사천리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재림하실 때 예수님을 모략한 이들이 심판대에 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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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14-06)

 


심문에서 자신을 드러내신 예수님

마가복음 14장 53-52절


 

세상은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떠나서 적대적인 생각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식에 대해 대비하고 살아야 합니다. 세상은 예수님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리스도와 교회를 싫어하고 부인하고 공격해 왔습니다. 이런 현실을 인식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전해야 합니다.

  

  • 예수님께서는 체포되신 뒤 산헤드린 공회에 잡혀가십니다. 이 모임은 재판이 아니라 증거를 얻기 위한 심문의 성격을 띠었습니다. 공회는 예수님을 로마에 기소할 죄목을 찾았습니다. 마가는 공회와 빌라도에게 심문을 당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사이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에 걸쳐서 부인하는 이야기를 보도합니다.

 

공회 앞에 서신 예수님(53-59)

어떤 문제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넓은 식견을 가지고 있고, 그 상황을 판단하는 높은 사람을 고수(高手)라고 합니다. 고수의 반대말은 하수(下手)입니다. 고수와 하수는 역량의 실력이 상당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도 고수와 하수에 명백하게 차이가 납니다. 대게 하수들은 성급하고 고수는 신중합니다. 본문에서 성급한 대제사장과 차분한 예수님의 대화를 볼 수 있습니다.

 

53그들이 예수를 끌고 대제사장에게로 가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모이더라 54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 55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 56이는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 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언이 서로 일치하지 못함이라 57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 하여 이르되 58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 59그 증언도 서로 일치하지 않더라(53-59)

 

예수님을 체포한 무리들은 예수님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갑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체포할 방법을 찾아 궁리하고 죽일 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공회로 모였다는 것은 산헤드린을 언급하는 것인데, 종종 야간에도 심의가 진행되기는 했지만, 로마의 통치 하에서 산헤드린은 사형을 언도할 권한이 없었습니다(요한복음 18:31).

 

54절에서는 이 때 베드로가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란 것이 밝혀질까 두려워하면서 제자 중에서는 유일하게 멀찍이 따라가서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갑니다.

마가는 이 장면에서 베드로와 예수님을 의도적으로 대조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마가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왔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예수님 사이에 거리가 있기는 했지만,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한 상황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것은 체포 전에 그가 했던 말이 진정성 있는 고백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이후에 등장하는 베드로 이야기는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나약한지를 여지없이 드러냅니다.

특별히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했다는 55절의 기록은 이 모임이 가진 불법적인 성격을 여과 없이 드러냅니다. 재판이란 심문을 열어서 증거를 확보하고 그 증거에 적합한 형벌을 내리는 것이 상례인데, 이 모임은 심문을 열어서 증거를 확보하기도 전에 죽이려는 의도를 가지고 증거를 짜 맞추려는 불법적인 성격의 모임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체포한 목적을 달성한 세력들은 이제 예수님을 죽일 증거를 찾기 시작합니다. 유대 땅을 통치하고 있던 로마 빌라도를 설득할 수 있는 증거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증거를 찾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에 대한 거짓 증언들이 난무했지만 증언들이 서로 엇갈려서 증거로 삼을 수 없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온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을 죽일 만한 증거를 찾았지만 얻지 못합니다. 이것을 보면 이 모임은 재판이 아니라 증거를 얻기 위한 심문의 성격을 띠었던 것 같습니다.

 

엇갈리는 증언들 속에서 고소자들은 예수님께서 성전과 관련해서 언급한 내용들을 근거로 그를 기소할 죄목을 찾았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성전과 관련된 예수님의 언급은 매우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언약적 교제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였기 때문에, 이것을 헐어버리라고 말하는 것은 유대인의 종교 시스템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었습니다.

본문은 그 증언들 중에 하나를 증언합니다.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 하더라’(58) 이 증언이 예수님의 주장한 것을 정확하게 보고했다고 볼 수 없지만, 그 비슷한 내용이 요한복음에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 자신이 성전을 헐겠다 라는 내용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 안에 담긴 신학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기에, 예루살렘 성전과 이스라엘의 종교 시스템에 대한 도전으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57절이 성전에 관련된 사람들의 기소가 거짓 증거라고 설명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요한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신 것으로 되어 있고, 마태복음 26:60-61도 이 증언이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의 증언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 가지 해석 가능성은 59절에 나타나는데, 성전과 관련된 예수님의 혐의에 대해서 고발자들의 증언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증언이 거짓이라고 두 번이나 강조해서 말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거짓 증언으로 예수님을 모함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마가가 거짓 증언이라고 한 것은 성전과 관련된 발언 자체를 예수님께서 하지 않았다기보다는 그 증언에 대한 고발자들의 증거들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겠다고 말한 적은 없으나 성전을 향한 그의 태도는 대부분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들의 증언이 정확하지는 않았고 일치하지도 않았지만,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증언이 거짓이었다는 결정적인 이유는 예수님께서 한 번도 성전을 땅 위에 다시 짓겠다고 말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성전이 파괴되어 속죄의 기능이 끝났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은 이제 건물이나 장소와는 상관없다는 것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심문(60-65)

사람이 살아가면서 객관성을 갖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객관성은 공정함도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인 기호, 취향, 이해관계로 판단한다면 그것은 주관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건 앞에서 공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객관적인 사실에 따라 판단한다면 공정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공정성을 잃고 예수님을 심문하는 대제사장을 볼 수 있습니다.

 

60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이르되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61침묵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이르되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62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63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64그 신성 모독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니 그들이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65어떤 사람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이르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인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60-65)

 

세상에서 가장 공평해야할 사람들은 법을 다루는 사람들과 종교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이 공평치 않을 때, 정말 과다하게 왜곡되기 쉽니다. 본문에서 대제사장은 예수님께서 부인할 수 없는 질문을 던져 사지에 몰아넣으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를 모르실 리 없으나, 당당하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요, 영광중에 강림할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1) ‘네가 그리스도냐?’(60-62)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거짓으로 증언하는 사람들에 대해 침묵하십니다. 그의 침묵은 거짓 증거에 대한 항거의 한 방법이며, 성경적인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노래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대답해 주시길 원했던 것입니다.

이제 급기야 대제사장이 나서서 예수님의 죄를 찾기 위해 심문합니다. 성전과 관련된 혐의에 대해서 예수님은 침묵으로 일관하십니다. 엇갈리는 증언과 예수님의 침묵으로 심의 과정이 녹록치 않았을 것인데, 이 시점에서 대제사장이 질문합니다.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대제사장의 질문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언어 속에 등장합니다. 마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이 1:11, 9:7에 하늘에서 난 소리를 통해서 기록되었고, 마가복음 3:11, 5:7에는 귀신들의 입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이 등장했습니다.

 

성전에 관한 기소로부터 그리스도라는 칭호로의 연결은 얼핏 보면 매우 임의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나라를 완성하시는 종말의 때에 종말론적인 성전이 회복될 것을 기대했습니다(이사야 2:2-4; 에스겔 37:26-28; 미가 4:2). 물론 이러한 일들은 다윗 왕가의 아들(메시아)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에스겔 37:24). 따라서 대제사장은 이러한 연결 고리에 근거해서 예수님께서는 만일 성전에 대한 주장을 했다면, 이것이 필연적으로 메시아적 주장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고 초정한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처음으로 예수님께서 명확하게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고백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그니라’라고 대답합니다. 처음으로 자기가 메시아임을 공적으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질문에 등장한 ‘그리스도’라는 용어를 심판주로 오실 ‘인자’라는 칭호로 바꾸어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시편 110:1과 다니엘 7:13 이하를 반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그리스도이며 인자로서 하나님께 세상을 통치할 권위를 부여받은 자임을 분명하게 밟히십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신분을 철저하게 감추어 왔는데, 이제 자신의 신분을 분명하게 드러내십니다.

 

(2) 정죄 당하심(63-65)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의 발언이 신성모독이라 외쳤습니다. 신성모독에 대한 말을 들었을 때 유대인들의 자연스런 반응은 옷을 찢는 행위입니다. 대제사장은 신성모독이라고 외치면서 자신의 옷을 찢습니다. 옷을 찢는 행위는 극한 비통과 회개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대제사장의 행동은 산헤드린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의견을 따르도록 하려는 과장된 행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에서 예수님의 발언은 죽임을 당할 만한 신성모독이며, 이제 더는 증거를 찾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산헤드린은, 그것에 동의해 예수님의 죄가 사형에 해당한다고 정죄하였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로 인정하는 것을 넘어서 종말의 심판주로 다시 오실 ‘인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편 2:7, 사무엘하 7:14에 예언하고 있는 다윗의 혈통을 이어받은 이스라엘의 왕을 넘어서 하나님 우편에 만민을 심판하려 구름 타고 다시 오실 심판주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오는 것을 보리라고 확언하십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의 이 예언은 그의 죽음을 확실케 하는 신성모독으로 정죄 받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산헤드린 회원 중 몇 명은 자신들의 분노를 표현하기 위해 예수님을 모욕하고 침을 뱉기까지 했습니다. 얼굴을 가리고 가격한 후에 ‘선지자 노릇을 하라’고 모욕했습니다. ‘선지자 노릇하라’는 말은 가격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맞히어 보라는 뜻입니다.

 

세 번 부인하는 베드로(66-72)

성경에서 통곡하며 울었다는 내용은 많습니다. 그런데 서럽게 처절하게 통곡한 장면도 많습니다. 대부분 큰 실수를 통해 깨닫는 후회로 통곡하게 됩니다. 평상시는 자신이 가장 잘한 줄 알았는데, 돌아놓고 보니 큰 실수를 한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한 뒤, 그의 통고하고 있는 것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66베드로는 아랫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와서 67베드로가 불 쬐고 있는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68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69여종이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 하되 70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 71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72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66-72)

 

다시 장면이 전환되어 이제 베드로가 등장합니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하는 일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 잠든 것과 병행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의 여종 중 하나가 등장해서 베드로를 주목하며 알아보고 ‘당신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다.’라고 말했습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말은 당시 나사렛에 대한 인식으로 생각해볼 때 경멸적인 언어입니다. 베드로가 나사렛 예수님의 무리 가운데 눈에 띄는 역할을 감당했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급해진 베드로는 필요 이상의 말을 내뱉습니다. 그녀에게 무슨 말인지 알지도 깨닫지도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표현 속에는 제자의 실체가 들어 있습니다. 그들은 정말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또 왜 오셨는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나사렛 예수님의 무리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대제사장의 여종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임을 부인합니다. 여종은 분명히 베드로의 신분을 파악하였으나 베드로는 부인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부인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정치범으로 몰릴 경우 그와 함께했던 사람들도 정치범의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첫 번째로 여종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한 후 앞뜰로 나갔습니다. 사람들이 불 주변에 있었을 것이기에, 사람들의 이목을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은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곳이 도주해야 하는 상황이 닥치면 도주로를 더 쉽게 확보할 수 있는 곳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동일한 여종이 불을 쬐며 서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재차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폭로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반복해서 부인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동사의 시제는 미완료형인데, 베드로가 지속적으로 부인했음을 나타냅니다.

베드로가 두 번째로 예수님을 부인했지만, 그의 부인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세 번째로 부인하게 된 것은, 조금 시간이 흐른 후에 곁에 서 있던 사람들이 베드로를 고소하며, 그가 예수님과 함께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사용하는 아람 말이 갈릴리 사람들의 방언이었음을 시사합니다. 사람들이 베드로가 나사렛 예수님의 당이라고 확신하는 정도가 세어지는 만큼,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부인의 성도도 세어집니다. 사태가 급박해졌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드디어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저주하기에 이릅니다. 베드로의 부인과 저주에서 베드로의 주도면밀함이 드러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저주하며 맹세하면서 결코 그를 알지 못한다고 말했을 때 닭이 두 번째 울었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자신에게 말씀하셨던 그 상황과 말씀이 생각난 것입니다. 자신은 결단코 주님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그 장담은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서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닭의 울음소리는 절망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닭 울음소리는 베드로에게 자신의 잘못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고, 베드로는 그 자리에서 회개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조그만 숯불은커녕 온통 사방에서 뿜어내는 냉대와 냉기로 혹독한 겨울을 맞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걷는 그 걸음에서도 한 치 흐트러짐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 무엇이 우리를 두럽게 하고 정신을 혼미하게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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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14-05)

 


가룟 유다의 배신과 체포되신 예수님

마가복음 14장 43-52절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삶에서 자기 자신을 성찰하지 않으면 여러 가지 실수를 저지르게 되고, 결국 아주 쓰라린 실패를 맞보게 됩니다. 간단한 예로, 장기에서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공격해서 상대방의 말을 잡아먹을 수 있을까?’라고 상대방 쪽에 집중하다보면 자신의 말들이 허술하다는 것을 놓칠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지피지기백전백승(知彼知己百戰百勝)’라고 자신을 알고 적을 알면 백전백승한다고 했습니다.

 

  •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실 때 유다가 미리 세워둔 계획대로 예수님께 입맞춤을 했고, 이것은 예수님을 확인하기 위한 일종의 암호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자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려두고 도망쳐 버립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43-47)

사람들 중에는 살아남기에 급급한 인생이 있고, 살리는 일에 힘쓰는 인생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으로 인류를 살릴 준비를 하시는 동안, 유다는 예수님을 죽여서 자신만 살 준비를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새겨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자기 살겠다고 예수님을 판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43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곧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4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 가라 하였는지라 45이에 와서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니 46그들이 예수께 손을 대어 잡거늘 47곁에 서 있는 자 중의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43-47)

 

당신이 계획하고 실천하고 싶은 일들은 자신은 죽고 남은 살리는 일입니까! 아니면 남을 넘어뜨리고 자기만 살려는 계획입니까!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기도를 다 마치자 가룟 유다와 무리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찾아왔습니다.

 

(1) 가룟 유다의 배신 행동(43-44)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일행에서 어떤 떠나는지 마가에서는 기록하지 않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마지막 만찬 장면에서 유다가 떠났다고 보도합니다(요한복음 13:21-30).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실 때 유다가 칼과 몽둥이를 가진 사람들과 더불어 나타났다는 이야기는 마가복음 독자들을 놀라게 합니다.

마가는 가룟 유다를 지속적으로 열둘 중의 하나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마가의 묘사는 예수님께서 가장 가까이 두려고 부르신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인하게 된다고 한 것을 떠올리게 하는 마가의 의도적 서술로 보입니다.

실제로 마가는 8-10장 사이에서 제자들의 무지와 잘못된 동기를 적나라하게 드러냈습니다. 유다와 함께 온 ‘무리들’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 의해 보내졌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 사람들은 성전을 경비하고 있던 유대인 군사들이었을 것입니다(요한복음 18:3). 누가복음은 이들을 성전의 경비대장들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누가복음 22:52).

로마가 통치하던 시대에 예루살렘에서 제한적으로나마 무장을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성전 경비병들이었습니다. 열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성전 경비병들을 이끌고 나타납니다. 유다는 예수님께서 자주 가시던 겟세마네의 장소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기에 예수님에게로 그들을 인도하기 위한 길잡이로 온 것입니다.

 

(2) 가룟 유다의 배신의 입맞춤(46-47)

 

이제 가룟 유다의 계획된 배신행위가 뒤따릅니다. 유다는 겟세마네에 들어가자 즉시 예수님께 나아가 ‘랍비여’라고 부르고 인사하면서 입을 맞추었습니다(45). 이러한 행동은 종교 지도자들과 미리 짜놓은 계획이었습니다. 이 행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서 사람들의 주목을 할 만한 행위를 많이 하셨기에, 성전 경비병들도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각이 밤이었던 것과 달빛이 올리브 나무 아래서 밝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불필요한 소동을 최소화 한 채 예수님을 잡기 원했을 것이기에, 무리는 예수님을 즉시 알아차리는 데 가룟 유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자신이 입 맞추는 사람이 예수님이니, 그를 잡아서 단단히 끌고 가라고 미리 작전을 세워놓은 것입니다. 선생님을 향한 존경과 친밀함의 표시인 입맞춤이 차디찬 배신의 암호가 되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잡아 단단히 끌어 가라고 요청합니다(44).

 

작전대로 가룟 유다가 예수님께 입맞춤을 했을 때, 무리들이 예수님을 체포했습니다. 유다는 입맞춤만 약속했지만, 그는 예수님을 향해 ‘랍비여!’라고 한 가지 신호를 더해 확실하게 한 것입니다. 독자들은 유다의 이중성을 보게 됩니다. 유다의 위선적인 행동은 잠언 27:6에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이나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라는 말씀을 떠오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잡으려온 무리들과 물리적인 충돌을 일으키지 않으시고, 순순히 그들에게 잡혀져 주십니다. 마가는 곁에 섰던 사람이 칼을 빼서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의 귀를 잘랐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사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지만, 마가는 이들의 정체와 행위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을 자세히 기술해주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8:10에 따르면 이 사람은 베드로였고 대제사장의 종의 이름은 ‘말고’라고 밝힙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까?’라고 물어 봅니다.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그 귀가 오른쪽 귀인 것을 소개합니다. 마가의 기록은 베드로의 행위보다는 유다의 배신에 더 많은 강조점을 두어 기록한 것을 시사 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더 자세하게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26:52-53)고 소개합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단순히 무리에게 한 말씀만 기록하였습니다.

 

강도 취급을 당한 예수님(48-49)

무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먼저 칼을 들어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을 바꾸려고 들었던 칼로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칼과 몽둥이를 가지고 예수님을 잡으려는 무리나, 베드로처럼 칼을 사용해서 한 제사장의 종 귀를 떨어뜨렸습니다. 주님을 칼을 들어 세상을 바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바꾸었던 것입니다.

 

48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49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48-49)

 

예수님께서는 은밀하게 행동하는 혁명가나 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잡으러 나온 사람들은 마치 강도를 붙들러 온 사람들처럼 나아왔습니다.

사실 그 마지막 주간 내내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 뜰에 모습을 드러내어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을 잡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낮에 사람들이 많은 성전에서 예수님을 붙잡지 않은 것은 예수님께서 사람들로부터 대중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주 대낮에 그를 붙잡으려는 시도를 유월절 기간에 많은 군중들이 운집한 성전에서 해야 했기에 매우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잡으려는 무리들은 마치 강도를 몰래 체포하기라도 하는 듯이 한적한 밤에 인적이 드문 곳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체포하려 온 것은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4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건은 성경을 이루기 위함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같은 말씀은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이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계획하고 성취를 신실하게 따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가 범죄자 중 하나로 취급받았다’고 말하는 이사야 53:12을 염두에 두신 것 같습니다. 물론 구약성경을 읽는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기 전에 이 말씀을 메시아에게 직접적으로 적용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비롯한 구약의 말씀들이 메시아에 대한 것이라는 이해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그분이 메시아였다는 것을 이해하고 난 이후에야 생겨났습니다. 소위 문법적 역사적 읽기를 통해서 이사야 53장이 메시아에 대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었던 유대인들은 실제로 없어 을 것입니다.

  

예수님 체포 후 도망친 제자들(50-52)

예수님께서는 경고하시고 기회도 주시면서 깨어 준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기회를 지나쳐 버리고 깨어 준비하지 않는 자는 넘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결정적인 순간에 실패합니다. 우리의 부족을 인정하고 주님의 능력을 구할 때, 오늘도 참 제자로서 삼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깨어 기도하라고 부탁했지만 밤새 잠만 자던 제자들의 비참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50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51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52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50-52)

 

마가는 제자들이 이 시점에서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쳐버렸다고 기록합니다. 그 후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사건을 제외하고, 더 이상 제자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가복음 16:7에 부활 사건을 전하는 청년에 언급되어서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1) 도망친 제자들(50)

 

예수님께서 예언한대로 그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체포되자 모두 버리고 도망했습니다. 마가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길을 갈릴리부터 줄곧 같이 걸어왔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들은 이 길을 따라오기 위해서 자신들에게 소중한 것들을 버려두고(1:18,20) 좇았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나선 첫 장면을 보면 그들은 이 길을 걷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나선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가가 보여준 것처럼 예수님의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이 진행되어 갈수록 제자들이 야심이 드러나게 됩니다. 8-10장 사이에 기록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관한 세 차례 예고 후에 제자들은 자신들의 의도와 다른 예수님의 말씀에 분개했고(베드로), 자신들끼리 누가 큰지 다투었으며, 마침내 세베대의 아들들(야고보와 요한)이 영광의 좌우편을 요구하는 청탁을 한 사실을 알고는 나머지 열 제자는 분개하게 됩니다.

그런 기대를 걸었던 예수님께서 유다의 배신으로 성전 경비병에게 속절없이 붙들리는 상황이 벌어지자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려두고 도망쳐버립니다. 사실 이러한 제자들의 행위는 마가복음의 스토리를 읽어온 독자들에게는 이미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체포와 심문, 처형 과정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로마의 정치 체계에 도전한 정치범의 성격을 띠게 되는데, 정치범은 본인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위험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상황을 알아차린 제자들은 예수님 근처에 있다가는 화를 당할 것을 알았기에 이를 모면하려고 도망한 것입니다.

이후에 등장하는 베드로의 부인 사건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시점에 예수님 주변에 남아있는 제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제자들 이야기의 끝이 아닌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시 예수께로 돌아오며, 하나님의 은혜로 기둥과 같은 사도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2) 한 청년(51-52)

 

마가복음에만 있는 이 독특한 구절은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 가버렸다는 50절 이후에 등장합니다. 이 기록은 두 가지 측면에서 혼란스럽고 이상하기까지 합니다. 

먼저 이 청년의 정체가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마가가 이 내용을 왜 기록하고 있는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석가들은 이 ‘청년’의 정체가 마가 자신일 것이라고 종종 주장합니다. 물론 가장 인기 있는 해석이기는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는 되지 못합니다.

이 청년이 마가라면,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기록함으로써 자신도 다른 제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음을 겸손하게 고백하는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이 청년이 왜 맨몸에 천을 두르고 예수님께로 왔는지는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 청년은 잠을 자다가 예수님을 체포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옷 입을 틈도 없이 황급히 이 소식을 예수님께 전하려고 겟세마네까지 뛰어 올라갔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예수님께서는 체포되신 상태였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이 청년은 천을 팽개친 채 알몸으로 도주합니다. 마가는 이 보도를 통해서 예수님의 체포 상황이 얼마나 긴박했는지를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체포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심각한 의미를 가졌는데, 알몸으로라도 도망해야 할 만큼 긴박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적용된 혐의는 정치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치범 주변에 있는 자들까지 위험에 빠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기도 이후 맞게 예수님의 시간은 폭력적이었고 믿음도 사랑도 갈기갈기 찢겨 나갔습니다. 예상은 했지만 실상은 더 참혹했습니다. 그럼에도 이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우리는 어디쯤 서서, 어떤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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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14-04)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14장 32-42절


 

살아오시면서 많은 일들을 만났겠지만, 지금 생생하게 옛날 생각이 나는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몇 년 전, 심지어는 10년, 20년, 아니 어렸을 때 일이지만, 마치 지금도 생생하게 그 때 심정이나 상황을 기억이 나는 그런 일이 있습니다. 대부분 좋은 일이든지 나쁜 일이든지 충격적인 일들을 기억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지막 상징적인 장면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네로 가시는데 기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능하면 이 죽음을 당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특징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아버지의 뜻을 바꿔달라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의 뜻을 바꿔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 제자들은 ‘깨어 있으라’는 권면에도 불구하고 잠들어 있었습니다.

 

아버지 뜻을 구하시는 예수님(32-34)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사용되어야 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순종할 수 있도록 힘도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시험을 감당할 지혜와 힘은 기도를 통해 얻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예수님께서는 습관을 따라 기도하십니다.(누가복음 22:39).

 

32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3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34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32-34)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모습은 마가복음 1:35과 6:46에서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두 번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을 행하고 나서 드린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고난과 죽음을 앞두고 준비하는 기도였습니다. 이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사역에 앞과 뒤를 기도로 채우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감람산(올리브산)에 가신 예수님과 제자들인, 특별히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이제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십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중요한 사건마다 예수님과 함께 한 핵심 제자 그룹입니다(33). 그들이 여기에서 맡은 역할은 예수님의 기도를 증거 하는 일입니다.

 

‘겟세마네’는 아람어로는 ‘기름 짜는 곳’이라는 의미이며, 감람산의 서편에 위치한 곳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곳에서 종종 모임을 갖곤 했던 듯합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도 이 장소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요한복음 18:2). 나중에 가룟 유다는 겟세마네에서 기도하고 계신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예수님께서 이곳에 가신 목적은 기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기도는 예수님의 여느 기도와는 달랐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셨다’고 소개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심리적 고통을 표현입니다. 이에 더해서 예수님께서는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34)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즉, 이 기도가 자신 앞에 드리워져 있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기 위한 기도임을 예수님께서는 아셨고, 인간으로서 그가 느낀 심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편 42:5,11에 43:5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라는 말씀을 떠오르게 합니다. 예수님의 표현은 시편의 애가(哀歌)와 비슷합니다. 그 고통은 예수님께서 땅에 엎드리어 기도하는 모습 속에 나타납니다. 보통 유대인들은 손을 들고서 기도한 것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성경에서는 극심한 기도의 모습이 다윗을 통해 나타납니다. 사무엘하 12:16에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다윗이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라는 장면에서도 극심한 고통 가운데 했던 기도로 나타난 것입니다. 매우 극심한 것이라 그의 목숨까지 위협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돌리려는 불순종의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믿음의 표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도의 자리에 자신의 세 제자, 즉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데려가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기도함으로 위로와 격려를 얻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이들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는 자리에도 예수님과 동행했고(5:37-43), 변화산에도 동행했는데(9:2), 이 기도의 자리에 그들을 데려가셨다는 것은 여러 가지를 시사합니다. 먼저 이들은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가장 지근거리에서 예수님과 함께한 자들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죽음의 잔을 자신들도 마시겠다고 공언한 사람들입니다(10:38-39; 14:29, 31).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죽음의 길을 가기 위해 기도하러 간 자리에 초청받았습니다.

물론 3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시적으로 기도하라고 하지는 않고 다만 ‘깨어 있으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러나 37-38절의 근접 문맥의 빛에서 ‘깨어 있으라’는 예수님의 분부는 ‘깨어 기도하라’는 명령과 같습니다. 이들은 제자의 길을 걷기 위해서 그들의 스승처럼 기도하기 위해서 초청받았지만(37-38) 그들은 기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지만 함께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맙니다. 그러나 이 기도의 자리로의 초청은 그들이 실패한 후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후 그들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었을 것입니다.

  

기도로 순종하신 예수님(35-42)

고난 앞에서 담대함과 능력을 얻기 위해 얼마나 자주 기도합니까? 시험에 들지 않는 최선의 방법은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아도 마음이 담대해집니다. 오직 기도로만 고난을 끝까지 이겨 낼 영적 의지력을 얻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앞으로 닥쳐올 십자가를 바라보지 못하고 육신의 피곤함에 지쳐 자고 있습니다.

 

35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36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37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38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39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40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그들이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41세 번째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2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35-42)

 

예수님께서 극심하게 기도하고 제자들에게 돌아왔을 때, 발견한 모습은 제자의 자는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극심한 십자가 고난 앞에서 매우 힘든 고민을 기도로 이겨 내고 계십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자고 졸고 있었습니다. 마음으로는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다면, 영적 의지력이 연약한 육신을 움직이도록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1) 첫 번째 기도(35-36)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느끼셨던 고통은 그가 기도하시는 모습 속에 고스란히 표현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남겨두고 나아가서 땅에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어떠한 모습으로 기도하셨는지 이렇게 자세하게 기록해준 적이 없습니다.

이러한 자세한 기술은 예수님의 심리 상태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누가복음 22:41은 돌 던질 만큼의 거리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기도 내용을 들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이런 간절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기도는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그 기도의 구체적인 내용은 36절에서 직설화법으로 표현됩니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아버지께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언급은 하나님께서 그럴 능력이 있느냐 여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그럴 의지가 있으시냐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에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로 기도하는 것을 ‘아빠 아버지’(36)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이 표현이 아이들이 아비를 부르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지만, 본문이 아람어를 그대로 전달했던 이유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가졌던 친밀한 관계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표현이 최대교회의 신학에 영향을 준 것은 바울이 그의 편지 로마서 8:15과 갈라디아서 4:6에서 두 번이나 이 아람어 표현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잔을 옮겨 달라’고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10:38-39 세베대의 아들들과의 대화에서 이미 ‘이 잔’이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구약에서 잔이 가진 하나님의 진노와 그의 따르는 심판의 이미지를 고려해 보면, 예수님께서 다가오는 죽음을 얼마나 괴롭게 생각하셨는지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 겪을 극한 고난으로 인해 심히 고민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셨을 때, 자신을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아버지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십니다(히브리서 5:7).

 

예수님의 기도의 특징은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36)라고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아버지의 뜻을 바꿔달라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의 뜻을 바꿔달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대로가 아닌 아버지의 뜻에 기꺼이 순종할 것을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원하는 것과 필요를 하나님께 구하지만, 결론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복종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 앞에 정렬시키는데 집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 뜻을 이루는 데 사용되어야 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 뜻에 온전히 순종할 힘도 주십니다.

이 처럼 ‘기도’란 내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아버지의 뜻을 바꿔달라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선하시고 완벽한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자신의 뜻을 바꿀 수 있는 힘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고난과 죽음이라는 엄혹한 현실 앞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시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첫 번째로 돌아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고통스러운 시간에 제자들에게 기도가 무엇인지 몸소 보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돌아오셨을 때, 그의 제자들은 ‘깨어 있으라’는 권면에도 불구하고 잠들어 있었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이 잠들어 있었다는 마가의 보도는 두 가지 측면을 생각하게 합니다. 먼저 그들이 육신적으로 피곤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상징들을 주의 깊게 사용했던 마가는 ‘잠들어 있음’을 통해서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묘사하고 있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무지와 부족한 깨달음은 지금까지 마가의 글 속에서 꾸준히 부각되어왔습니다. 그들은 ‘깨어 있으라’고 예수님께서 당부하셨음에도 이 고뇌의 순간에 잠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깨어서 기도해야 하는 이유를 접속사 ‘히나’절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여러 능력 가운데 하나가 우리가 시험받을 때에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데 있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이 기막힌 시험의 순간에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는데, 제자들은 이 기막힌 시험의 순간에 기도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맙니다.

 

(2) 두 번째 기도(37-40)

 

마가는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후에 두 번째로 나아가서 엎드리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 똑같은 내용으로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이러한 순간에 다른 기도 제목이 있는 것이 오히려 이상합니다. 아다 더 했다면 연약한 제자들을 위한 기도했을 것입니다.

 

기도 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돌아와 보니 여전히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 번이나 깨어서 기도하라고 당부하셨는데도 여전히 잠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이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40)고 설명합니다. 제자들이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여 먹고 겟세마네 동산까지 올라온 것을 고려하면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들이 예수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라고 기술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한데, 제자들이 매우 피곤하고 잠이 덜 깬 상태임을 묘사하는 것일 수 있고, 두 번이나 깨어 기도하라고 당부하셨는데도 여전히 자고 있었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지 제자들이 유구무언이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심하게 고통당하고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곤을 견디지 못해 자든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3) 세 번째 기도(41-42)

 

세 번째 기도의 내용과 모습은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습니다. 다만 문맥이 예수님의 세 번째 기도를 암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다시 제자들에게 왔을 때도 발견한 것은 제자들의 자는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제는 자고 쉬라’고 번역된 이 문장을 ‘아직도 자면서 쉬고 있느냐?’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에게 임할 때가 왔음을 알립니다. 그 때를 묘사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그 때’란 다름 아닌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지는 때’라는 것을 밝히십니다. 그러나 누구에 의해서 넘겨지는지 밝혀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내용을 볼 때, 바로 가룟 유다에 의해서 넘겨진다는 사실입니다.

동사 ‘넘겨지다’는 마가복음 1:14에서 요한이 잡혔다고 할 때 사용된 단어와 같습니다. 요한이 넘겨진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죄인들의 손에 넘겨집니다. 넘겨진 후에 요한이 죽임을 당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마가는 이미 독자들에게 이것이 예수님의 이야기의 마지막이 아님을 줄곧 강조해 왔습니다. 그는 넘겨지지만(파라디도타이)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이때는 분명 신랑을 빼앗기는 슬픔의 때이지만, 실패와 패배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메시아의 죽음과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승리의 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 모든 것이 사람들에 의해서 잡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의해서 이루어진 사실입니다. 마가복음 14장의 전개는 하나님의 주권과 통제에 의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주제를 강하게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를 던지는 기도만큼 힘들고 아름다운 기도가 또 있겠습니까? 잠에 익숙한 우리로 인해 주님의 기도 시간만 늘리고 있진 않습니까? 고난주간을 순례하면서 기도하러 올라간 때나 내려올 때 그 차이를 경험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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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14-04)

 


  십자가 보혈로 이룬 영원한 새 언약

마가복음 14장 22-31절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너무 쉽게 맹세나 약속 그리고 다짐을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처럼 맹세하는 것은 굉장히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어떤 약속했다면 그 약속을 꼭 지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지킬 수 없는 약속은 하지 않는 것이 좋고, 또 말로 한 약속은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이 신실한 모습으로 언행에[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아가야겠습니다.

 

  • 유월절 식사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이 갖는 신학적 의미를 설명하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구약에서 예견된 새로운 언약 갱신을 위한 희생적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 이후에 제자들의 흩어짐을 예고하십니다. 베드로의 지나친 확신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베드로가 자신을 세 번에 걸쳐 부인할 것을 예고하십니다.

 

성찬을 통한 신학적 교훈(22-26)

교회는 세상에서 행하지 않은 특별한 예식을 거행합니다. 그것은 성례식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세례, 견신례, 성찬, 참회, 안수, 혼인, 종유 같은 7가지 성례를 거행하지만, 개신교에서는 세례와 성찬 두 가지의 성례를 거행합니다. ‘성례(聖禮)’란 뜻은 거룩한 예식이란 뜻인데, 예수님께서 직접 행하시고 또 제자들에게 계속 행하라고 하신 예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만찬을 통해 제자들에게 신학적인 교훈을 전합니다.

 

22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3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24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5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26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가니라(22-26)

 

예수님의 유월절 만찬의 절정은 성만찬입니다. 주님께서는 유월절 만찬을 통해서 두 가지의 의식을 가르쳐 주시고 몸소 행하셨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세족식이었고, 또 유월절에 나누는 빵과 포도주를 통한 성만찬의 의식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참석한 유월절 식사는 니산월 15일에 거행되는 식사보다 하루 먼저 진행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우러절 양이 없는 상태로, 먼저 떡을 가지고 축복하시고, 잔을 가지고 감사기도 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셨습니다. 원래 유월절 식사는 유대인 가장들이 포도주 잔을 들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림으로 시작되곤 했습니다. 가족 구성원은 유월절 밤이 다른 밤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질문하고 가장은 이에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행하신 일을 설명했습니다. 자신들을 애굽의 종살이로부터 구원해내신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설교한 것입니다(m.Pes. 10.4-5).

마치 유대인들의 유월절 식사와 설교를 연상시키는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가장으로서 여느 유대인 가장처럼 유월절 설교를 시작하십니다. 유대인 가장은 옛 언약 속에서 누룩 없는 빵, 양, 쓴 나물 등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며, 하나님의 간섭과 보호 속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새 언약 속에서 새 언약 백성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마치 유대인들의 가장처럼 새 언약(참조. 누가복음 22:20) 속에서 떡과 포도주가 가지는 의미를 설명하십니다.

 

물론 마가는 ‘새 언약’이라는 말 자체를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언약의 피’라는 말을 사용하여서 같은 개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짐승을 잡아 피를 뿌림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을 체결하곤 했습니다(참조, 창세기 15:1-11).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피를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새로운 언약을 위한 피 뿌림으로 이해하고 설명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이 유월절 만찬에서 예수님께서 설명하시는 떡과 포도주의 구체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과거 이스라엘은 이러한 언약적 배경 속에서 하나님의 토라를 지킴으로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을 보여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토라를 지킴으로 자신들과 언약의 신인 여호와와 언약적 관계에 충실히 머물게 될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신 원래의 뜻, 열방을 향하여 빛이 되라는 그 원뜻은 충실히 성취됩니다. 그러나 주전 587년 이스라엘은 언약의 신인 여호와의 계명을 지속적으로 불순종했고, 그 결과 이스라엘 성전은 무너졌고,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고, 이스라엘의 약속의 땅은 황폐해졌습니다. 이로써 열방을 향하여 빛이 되라 하셨던 언약의 하나님의 소명은 이방인들 앞에서 철저히 짓밟혔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이 언약의 하나님의 계명인 토라에 불순종해서 토라를 깨트렸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구약성경의 예언서가 모세오경을 비롯한 역사서와 맞닿아 있습니다. 이 절망의 시기에 구약의 예언자들은 언약적 소망의 회복을 외치고 있습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이 선포하였던 메시지는 이러한 언약적 이야기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새 시대의 도래, 성전의 회복, 자기 땅으로의 회복, 토라의 회복 등을 전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종말론적인 기대, 즉 하나님 나라의 도래이며,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이스라엘의 회복이었습니다. 예레미야 31:31-40에 등장하는 하나님이 말세에 세우실 새 언약에 대한 언급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떡을 주며 하시는 말씀이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유대인의 관점에 볼 때, 가히 충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무교병을 근본적으로 재해석해 그것을 자신의 몸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의 피가 그의 희생적인 죽음을 의미한다면, 그의 몸은 예수님 자신이며 그가 제자들과 항상 함께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23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잔을 들어 감사하는 기도를 하십니다. 이러한 언약 갱신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언약의 피’라고 설명합니다. 미쉬나에 의하면 유월절에 잔을 들어 감사하는 기도에는 하나님을 송축하고 하나님께서 전 우주의 왕인 것과, 포도나무에서 난 열매의 창조주인 것을 감사드린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이를 다 마시매’라고 했을 때, 그들은 잔 하나로 마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포도주를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불렀습니다. 이 문장은 출애굽기 24:8에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는 말씀을 떠오르게 합니다. 옛 언약이 피로 인해 봉인되었다면, 그리스도의 피는 새로운 언약을 채결한 것입니다. ‘흘리는’(24)이라 번역된 단어는 ‘부어지는’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사를 통한 속죄 언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은 내 몸이다.’ 또 ‘이것은 피다’라고 간단히 말했기 때문에 제자들은 얼마나 그 의미를 알았는지 불분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같이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 떡’이 문자적으로 그의 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구약에서 피를 마시는 것은 철저히 금했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 잔’이 예수님의 피라는 것을 문자적으로 받아 들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가 상징적으로 가리키는 그의 죽음은 하나님께 속죄를 위해 바치는 새로운 제사입니다. 더 이상 구약 율법에 따라 짐승의 피가 뿌려지는 일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임이 가까이 와있음을 알게 되었고, 이것이 제자들과 나누는 마지막 식사라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25절에서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이라는 표현은 구약에서 말한 종말에 있을 메시아 잔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그의 거룩한 산에 베풀 이 잔치에서는 최고의 음식과 포도주가 제공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새 것’이란 표현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새 포도주’, ‘새 몸’, ‘새로운 세계’ 등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가장 가까운 의미는 ‘다시 마신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마시거나 먹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누가복음 22:16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유월절을 다시 지키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이 끝나고 감람산으로 가십니다. 제자들은 찬송을 부르면서 감람산으로 이동했을 것입니다. 유월절 식사를 마무리하는 찬송은 아마도 시편 113-118편까지 기록되어 있는 찬송일 것입니다. 감람산으로 자리를 옮긴 시간은 자정 정도 되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유월절 절기는 예루살렘 영역 안에서 지내는 것이 통례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베다니로 돌아가지 않고 그 중간 지점은 감람산으로 가신 것입니다.

 

제자들의 배반을 예언하심(27-31)

종종 성도들 중에 호언장담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겸손히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모든 진행한 것이 아니라 교만해져서 함부로 말할 때는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은 끝까지 예수님을 따를 것이라고 호언장담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27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28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29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30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1베드로가 힘 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27-31)

 

예수님과 제자 일행은 예루살렘 동쪽으로 이동해 감람산 서쪽 비탈길로 올라갔고, 그곳에 겟세마네 동산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자신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질 것과 예수님께서는 살아나신 후에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과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1) 흩어짐과 인도하심(27-28)

 

감람산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모두 자신을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버릴 것이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에 걸려 넘어짐’을 일컫는 말입니다. 문맥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본래 의도가 더 잘 살아난다. 이 ‘넘어짐’은 스가랴 13:7을 반향하고 있는데, 즉 목자가 쓰러질 때 양들도 흩어진다는 개념을 담고 있습니다. 즉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할 때 제자들도 양들처럼 흩어지게 되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넘어짐’은 문맥 속에서 ‘흩어짐’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28절을 통해서도 지원받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제자들은 양들처럼 흩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28절의 ‘그러나’라는 어구를 통해서 반전을 말씀하신다.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라고 예고하십니다. 물론 예수께서는 제자들 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게 되실 것입니다. 이것은 마가복음 16:7에서도 천사에 의해 다시 한 번 확인됩니다. 그런데 목자와 양의 은유 속에서 이 단어는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목자를 잃고 흩어진 양 무리 같은 제자들을 부활하신 후에 다시 갈릴리로 이끄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께서는 좋으셨음을 입증할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 소망과도 같은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목자를 빼앗김으로 그들은 흩어지게(걸려 넘어지게 되지만, 목자가 다시 부활했을 때 그 목자는 다시금 자신의 양 무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이 가진 의미를 설명하신 후에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서 제자 무리의 일시적인 흩어짐을 예고하시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 후에 즉각적으로 회복할 것입니다. 양들은 잠시 근심하고 슬퍼하게 되겠지만, 그들은 목자의 세밀한 인도를 다시금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목자와 양의 은유 속에서 이 단어는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목자를 잃고 흩어진 양 무리 같은 제자들을 부활하신 후에 다시 갈릴리로 이끄실 것입니다.

 

(2) 오만과 경고(29-31)

 

이어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는 말씀에 베드로의 항변과 예수님의 꾸짖음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흡사 8:31-33을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 이후에 제자들이 목자 잃은 양처럼 흩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하자, 제자들의 대변자 역할 했던 베드로는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확신에 차서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며 장담합니다. 원문은 ‘나는’이라는 인칭대명사를 강조해서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좀 의역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다 넘어져서 흩어질지라도 베드로 자신은 절대로 그러지 않겠다’는 의지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물론 베드로가 이 시점에서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어떠한 정황도 포착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베드로의 진심이었을지 모릅니다. 그것이 진심이었다 할지라도 베드로에게는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수행해낼 만한 실력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지나친 확신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좀 더 구체적인 예언으로 응답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 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아주 구체적으로 그가 언제 부인하게 될 것인지 명시하여 강조하셨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베드로가 부인하는 장면을 전할 때, 닭이 두 번 우는 것을 모두 기록하지 않았지만, 마가복음 14:72에는 닭이 두 번 울 때 베드로가 부인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거듭되는 예고에도 베드로는 무모하리만치 지나친 확신을 버리지 못합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마가복음 10:39에서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서 마시는 잔을 기꺼이 마시겠다고 한 것처럼,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하겠다는 뜻을 밝힙니다. 이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을 제자들도 베드로의 무모한 확신에 동조하며 동일하게 예수님께 충성을 다짐합니다. 여기 ‘말하다’에 사용된 시제는 미완료로 그들의 확신이 지속적인 확신이었음을 드러냅니다.

제자들의 반복적인 말은 흩어짐과 부인에 대한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어리석고 연약한 자기 확신이 얼마나 무모한지를 증명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할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무모한 확신과는 달리 예수님을 부인하며 저주하게 됩니다.


마지막은 어떤 의미에서 또 다른 출발이듯, 헤어짐도 다른 의미에서 마주침이라 하겠습니다. 주님과의 마지막 만찬은 새 만찬을 예고하고, 주님과의 헤어짐은 부활하신 에수님과 실패한 나와의 마주침을 예고합니다. 과거의 나의 결별하고 새롭게 주를 만날 준비를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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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14-02) 


유월절 만찬 준비와 수난 예고

마가복음 14장 12-21절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수많은 사망 플래그쯤은 플래그 분쇄기 캐릭터라도 심어 두어 피해갈 수 있지 않냐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으로 이끈 건 사망 플래그라기보다 성경에 기록된 예언 플래그일 것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을 상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승리의 플래그, 승리의 깃발이기도 합니다.

  

  • 유월절이 다가오자 예수님과 제자들은 유월절 식사를 위한 장소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이곳에 등장하는 상세한 묘사는 유월절 식사를 위해서 집주인과 에수님 사이에 일종의 약속이 되어 있는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두 제자의 유월절 음식 준비가 되고 날이 ‘저물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데리고 식사 자리에 참석하십니다.

 

유월절 식사를 위한 준비(12-16)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실 때, 사람들을 관계 속에서 사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 관계는 세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 다음으로 ‘타인과의 관계’, 마지막으로 ‘주변 환경과의 관계’입니다. 하지만 이들 관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12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13예수께서 제자 중의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14어디든지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15그리하면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라 하시니 16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께서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니라(12-16)

 

이제 예수님께서는 점점 십자가로 가까이 나가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뜻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례를 따라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식사할 장소를 준비하길 원했습니다. 그 과정은 나귀 새끼를 준비하게 하신 때처럼(11:1-6), 예수님의 전지전능한 신성을 잘 보여 줍니다.

 

(1) 유월절 준비(12-15)

 

이스라엘 백성들의 절기인 ‘유월절’은 니산월 14일 3시경에 성전에서 유월절 양을 잡으면서, 그 잡은 양들을 집으로 가지고 와서 다음날 니산월 15일 저녁, 즉 무교절 첫째 날에 먹었습니다. ‘유월절’은 15일 저녁 식사로 끝이 납니다. 이 유월절이 종료됨과 함께 니산월 15일부터 21일까지 7일 동안 무교절 축제가 진행됩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과 무교절을 하나의 연결된 축제로 생각하게 되었는데, 실제로 무교절은 8일간 진행되는 것처럼 간주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이러한 유대인들의 인식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무교절의 첫 날’이라고 이 날은 유월절 양을 잡는 날입니다. 엄밀히 유월절은 니산월 14일인데, 무교절 첫날에 양을 잡는다고 말함으로써 유월절과 무교절을 하나로 연결하여 한 절기로 인식합니다. 무교절이라고 하면 8일 동안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원래 어린 양을 잡는 날은 니산월 14일, 즉 유월절 날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무교절의 첫 날’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날은 유대인의 시간으로 13일 낮이 끝나고 해가 막 진 14일이 시작한 시간입니다.

 

유월절이 다가오자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묻습니다. 니산월 15일 저녁이 되면, 유월절 식사를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하루 전날 예수님께 질문한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주민들은 명절에 올라오는 유대인들의 유월절 식사를 위해서 장소를 빌려주는 데 관대했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숙박 산업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에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여행자를 위한 환대는 매우 중요한 사회적 관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유월절 때는 대단히 많은 인파가 예루살렘으로 몰리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유월절 식사하는 방은 쉽지가 않았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함께 식사할 만한 넓은 집을 구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미리 유월절을 위해 준비하려고 제자들은 예수님께 질문한 것입니다. 여기에 언급된 제자들은 마가복음에서는 무명의 제자로 언급되지만, 누가복음 22:8에 따르면 베드로와 요한이라고 소개됩니다.

 

놀랍게도 유월절 식사를 원래대로 내일(15일) 저녁에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14일) 저녁에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준비하게 하십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그 날 밤 식사를 유월절 양 없이 미리하신 것은, 그날 오후 원래 유월절 어린 양을 잡는 날에 예수님께서 친히 몸소 유월절 양으로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예견한 것입니다.

 

(2) 예비된 유월절(16)

 

예수님께서는 제자 중 둘을 보내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지시 사항은 매우 구체적인데,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13)라고 소개합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입성할 때, 나귀를 준비한 장면과 비슷합니다.

두 제자가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어떤 남자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남자는 물동이를 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로서 남자(남자 종)가 물동이를 지고 있는 것이 상당히 예외적이기에, 제자들은 그 사람의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모르는 사람을 만나기 쉽게 하는 일종의 암호 역할을 했습니다. 이것은 우연한 만남이 아니라 미리 약속된 만남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을 영접한 제자일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를 만나면 따라가서 집주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려주십니다.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이 말에 그 사람은 잘 준비된 큰 다락방으로 안내해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곳에서 제자들은 유월절 음식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러한 상세 묘사는 유월절 식사를 위해서 집주인과 예수님 사이에 일종의 약속이 되어 있었다는 암시를 줍니다.

물동이를 들고 있는 남자 종이 일종의 은밀한 신호가 되어 먼저 와서 제자 둘을 기다리고 있고, 제자들을 미리 약속된 집으로 인도해서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게 한다는 약속이 미리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집주인은 넓은 다락방을 소유한 부유한 사람이었을 것이고, 예수님과는 전부터 잘 알고 있는 사이였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계획대로 사람을 만났으며 준비된 집으로 들어가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였습니다.

 

큰 다락방을 준비해준 제자의 이름은, 앞에서 나귀를 준비해준 사람처럼 이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오르시기 까지 그분 곁에서 그 길을 협력했던 사람들은 12 제자만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여인들도 있었고, 예수님의 무덤을 준비해준 아리마데 요셉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처럼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동거 동락한 것은 아니었지만, 예수님께서 꼭 필요할 때, 각 자 자신의 자리에서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면 아낌없이 내어주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항상 깨어있는 사람들이었고, 주님을 맞을 준비가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의미의 유월절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애굽에서 탈출한 유대인들이 기념하고 먹었던 유월절이 이제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운 의미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자기 땅에서 아직도 노예 생활을 하고 있었던 유대인들이 다시 한 번 해방을 경험할 수 있는 새로운 유월절이 될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제자 중 하나 배신을 예언(17-21)

예수님께서는 죽음조차도 하나님의 세심한 시간표는 십자가의 날을 기준으로 정해졌습니다. 3년 반 동안 주님과 함께 있었지만 예수님과 상관없이 산 비참한 인생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음도차도 하나님의 세심한 예비하심 속에 묵묵히 순종하며 나아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7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가서 18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19그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니 20그들에게 이르시되 열둘 중의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21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17-21)

 

온전한 순종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유월절 식사 먹을 장소를 준비합니다. 하지만 식사 도중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자신을 팔 것이라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1) 다락방에 입실(17)

 

두 제자의 유월절 장소와 음식의 준비가 끝나고 날이 ‘저물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데리고 다락방으로 향해 식사 자리에 참석하십니다. 여기서 ‘저물매’라는 표현은 정확한 시점을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유월절 식사가 보통 밤에 진행되었기 때문에(출애굽기 12:8) 니산월 14일이 끝나고 공식적으로는 니산월 15일이 된 것을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시간 계산법으로는 여전히 같은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지상에서 함께할 이 마지막 유월절 식사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신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이후에 등장하는 식사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관련된 매우 깊은 이야기를 전달하십니다. 이러한 목적을 염두에 두고 세심히 준비된 유월절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와 식사 자리에 참석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유월절 어린 양이 되어 돌아가실 것을 알고 그에 맞추어 철저하게 준비시키십니다.

 

(2) 배신 예고(18-19)

 

두 제자의 유월절 음식 준비가 끝나고 날이 ‘저물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데리고 식사 자리에 참석하십니다. 여기서 ‘저물매’라는 표현은 정확한 시점을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유월절 식사가 보통 밤에 진행되었기 때문에(출애굽기 12:8) 니산월 14일이 끝나고 공식적으로는 니산월 15일이 된 것을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시간 계산법으로는 여전히 같은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지상에서 함께할 이 마지막 유월절 식사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신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이후에 등장하는 식사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관련된 매우 깊은 이야기를 전달하십니다. 이러한 목적을 염두에 두고 세심히 준비된 유월절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와 식사 자리에 참석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유월절 어린 양이 되어 돌아가실 것을 알고 그에 맞추어 철저하게 준비시키십니다.

 

본문에 ‘다 앉아 먹을 때에’라는 표현은 팔레스틴의 식습관을 알 때,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넓은 방에 사람들이 비스듬히 누워 팔을 걸고 앉아서 다른 한 손으로 식사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손수 치밀하게 계획하신 유월절 식사 자리에서 자신이 이미 예견한 대로 유대 지도자들에게 넘기질 사건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제자가 범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18)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장 친숙한 교제 관계를 나타내는 식사 자리에 함께한 사람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팔 자가 있다는 말은 들은 제자들에게는 큰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마가복음 독자들이라면 예견된 일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미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과 모의를 하는 장면이 바로 직전에 언급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라는 표현은 시편 41:9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라는 표현을 반향한 것입니다. 구약의 원래 문맥에서 이 말씀은 다윗이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던 아히도벨이 자신을 배반하고 자신의 아들 압살롬에게 협조한 것을 기억하며 고통스러운 심정을 묘사한 것입니다. 실제로 쿰란공동체도 비슷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내 빵을 먹던 모든 사람이 내게 등을 돌렸다’(1Qs 5:23-24). 이런 용례로 생각해봤을 때 유대인들은 시편 41편의 표현을 가까운 사람에게 배반당하여 겪는 심적 고통을 표현할 때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관례대로 이 구약성경을 통해서 자신의 아픔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충격을 받은 제자들의 반응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충격적인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한 명씩 ‘나는 아니지요?’라고 묻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아니다’라는 부정적인 대답을 예상할 때 사용하며, 제자들이 예수님의 폭로에 적잖이 당황하였음을 시사 합니다. 어느 문화권에서든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경험은 충격적입니다. 더욱이 제자가 선생님을 배신다는 것은 팔레스틴 문화권에서도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3) 열둘 중 하나(20-21)

 

18절에서 배신자가 제자들의 무리 가운데서 나올 것이라는 예고가 있었는데, 20절에서는 그 사람의 정체가 열둘 중의 하나라고 하여 그 정보가 좀 더 분명하게 주어집니다. 이미 독자들은 14:10-11에서 유다의 배신에 관한 정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사람이 누구를 의미하는지 문맥 속에서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둘 중의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20)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군지는 적시하지 않지만, 함께 식사하고 있는 제자 중 한 명이 분명히 그렇게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며 사역을 감당해야 할 열두 제자 중에서 배신자가 나오리라는 말씀은 충격적입니다. 이 대목에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모략과 이에 동조한 제자에 의해 힘없이 처량하게 넘겨지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지만, 본문은 이러한 조망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21)라고 이 일들은 성경에 예언된 일이라고 하십니다.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성경은 이 일의 주도권이 종교지도자들과 배신하는 제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0:15-18도 같은 전망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합니다.

‘이를(목숨을)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그렇다 하더라도 배신하는 자에게 아무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사실이 다음 구절을 통해서 확증되고 있습니다.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하였다’(21)라고 하십니다. 배반한 제자가 입게 될 화를 생각하면, 차라리 안 태어났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사실상 유다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유다를 향한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이것은 마치 동생 아벨에게 살의를 품고 있던 가인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6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세기 4:6)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의 경고를 받고 난 다음에 가룟 유다는 사라집니다. 예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제자들의 그룹에서 이탈한 것입니다. 다 들통 났으니 이제는 노골적으로 주님을 죽이는 일에 가담한 하겠다고 떠난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시며 유지하시고 보호하시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누구든지 안 태어났으면 좋았을 인생이 될 것입니다. 왜냐면 그들은 살았지만 사실은 죽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몸은 주안에 있지만, 마음은 밖에 있고 세상에 빠져 있는 유다처럼 되지 않길 원합니다. 속히 죄악의 길에서 벗어나서 주님의 사죄의 은총과 회복의 영광이 있는 하나님의 품으로 나가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이미 구약에서 예언된 것이며,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의 배신을 아시면서도 그와 식탁을 함께 하신 것은, 십자가의 길을 가시면서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신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참기 어려운 배신과 견디기 힘든 고난을 이기는 비결은, 그 속에서 하나님 뜻을 발견하고 따르는 영적 의지입니다.


 

십자가 죽음을 앞에 놓고 흔들릴 만한데도 예수님께서는 가장 단단한 모습으로 그 길을 가십니다. 오히려 제자들에게서 배신과 의문, 혼란의 게이지가 상승합니다. 고난 주간 동안 어떤 모습으로 예수님의 곁을 지키며 동참하고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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