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마가복음(14-05)

 


가룟 유다의 배신과 체포되신 예수님

마가복음 14장 43-52절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삶에서 자기 자신을 성찰하지 않으면 여러 가지 실수를 저지르게 되고, 결국 아주 쓰라린 실패를 맞보게 됩니다. 간단한 예로, 장기에서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공격해서 상대방의 말을 잡아먹을 수 있을까?’라고 상대방 쪽에 집중하다보면 자신의 말들이 허술하다는 것을 놓칠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지피지기백전백승(知彼知己百戰百勝)’라고 자신을 알고 적을 알면 백전백승한다고 했습니다.

 

  •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실 때 유다가 미리 세워둔 계획대로 예수님께 입맞춤을 했고, 이것은 예수님을 확인하기 위한 일종의 암호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자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려두고 도망쳐 버립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43-47)

사람들 중에는 살아남기에 급급한 인생이 있고, 살리는 일에 힘쓰는 인생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으로 인류를 살릴 준비를 하시는 동안, 유다는 예수님을 죽여서 자신만 살 준비를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새겨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자기 살겠다고 예수님을 판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43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곧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4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 가라 하였는지라 45이에 와서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니 46그들이 예수께 손을 대어 잡거늘 47곁에 서 있는 자 중의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43-47)

 

당신이 계획하고 실천하고 싶은 일들은 자신은 죽고 남은 살리는 일입니까! 아니면 남을 넘어뜨리고 자기만 살려는 계획입니까!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기도를 다 마치자 가룟 유다와 무리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찾아왔습니다.

 

(1) 가룟 유다의 배신 행동(43-44)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일행에서 어떤 떠나는지 마가에서는 기록하지 않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마지막 만찬 장면에서 유다가 떠났다고 보도합니다(요한복음 13:21-30).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실 때 유다가 칼과 몽둥이를 가진 사람들과 더불어 나타났다는 이야기는 마가복음 독자들을 놀라게 합니다.

마가는 가룟 유다를 지속적으로 열둘 중의 하나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마가의 묘사는 예수님께서 가장 가까이 두려고 부르신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인하게 된다고 한 것을 떠올리게 하는 마가의 의도적 서술로 보입니다.

실제로 마가는 8-10장 사이에서 제자들의 무지와 잘못된 동기를 적나라하게 드러냈습니다. 유다와 함께 온 ‘무리들’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 의해 보내졌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 사람들은 성전을 경비하고 있던 유대인 군사들이었을 것입니다(요한복음 18:3). 누가복음은 이들을 성전의 경비대장들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누가복음 22:52).

로마가 통치하던 시대에 예루살렘에서 제한적으로나마 무장을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성전 경비병들이었습니다. 열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성전 경비병들을 이끌고 나타납니다. 유다는 예수님께서 자주 가시던 겟세마네의 장소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기에 예수님에게로 그들을 인도하기 위한 길잡이로 온 것입니다.

 

(2) 가룟 유다의 배신의 입맞춤(46-47)

 

이제 가룟 유다의 계획된 배신행위가 뒤따릅니다. 유다는 겟세마네에 들어가자 즉시 예수님께 나아가 ‘랍비여’라고 부르고 인사하면서 입을 맞추었습니다(45). 이러한 행동은 종교 지도자들과 미리 짜놓은 계획이었습니다. 이 행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서 사람들의 주목을 할 만한 행위를 많이 하셨기에, 성전 경비병들도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각이 밤이었던 것과 달빛이 올리브 나무 아래서 밝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불필요한 소동을 최소화 한 채 예수님을 잡기 원했을 것이기에, 무리는 예수님을 즉시 알아차리는 데 가룟 유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자신이 입 맞추는 사람이 예수님이니, 그를 잡아서 단단히 끌고 가라고 미리 작전을 세워놓은 것입니다. 선생님을 향한 존경과 친밀함의 표시인 입맞춤이 차디찬 배신의 암호가 되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잡아 단단히 끌어 가라고 요청합니다(44).

 

작전대로 가룟 유다가 예수님께 입맞춤을 했을 때, 무리들이 예수님을 체포했습니다. 유다는 입맞춤만 약속했지만, 그는 예수님을 향해 ‘랍비여!’라고 한 가지 신호를 더해 확실하게 한 것입니다. 독자들은 유다의 이중성을 보게 됩니다. 유다의 위선적인 행동은 잠언 27:6에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이나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라는 말씀을 떠오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잡으려온 무리들과 물리적인 충돌을 일으키지 않으시고, 순순히 그들에게 잡혀져 주십니다. 마가는 곁에 섰던 사람이 칼을 빼서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의 귀를 잘랐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사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지만, 마가는 이들의 정체와 행위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을 자세히 기술해주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8:10에 따르면 이 사람은 베드로였고 대제사장의 종의 이름은 ‘말고’라고 밝힙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까?’라고 물어 봅니다.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그 귀가 오른쪽 귀인 것을 소개합니다. 마가의 기록은 베드로의 행위보다는 유다의 배신에 더 많은 강조점을 두어 기록한 것을 시사 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더 자세하게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26:52-53)고 소개합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단순히 무리에게 한 말씀만 기록하였습니다.

 

강도 취급을 당한 예수님(48-49)

무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먼저 칼을 들어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을 바꾸려고 들었던 칼로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칼과 몽둥이를 가지고 예수님을 잡으려는 무리나, 베드로처럼 칼을 사용해서 한 제사장의 종 귀를 떨어뜨렸습니다. 주님을 칼을 들어 세상을 바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바꾸었던 것입니다.

 

48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49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48-49)

 

예수님께서는 은밀하게 행동하는 혁명가나 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잡으러 나온 사람들은 마치 강도를 붙들러 온 사람들처럼 나아왔습니다.

사실 그 마지막 주간 내내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 뜰에 모습을 드러내어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을 잡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낮에 사람들이 많은 성전에서 예수님을 붙잡지 않은 것은 예수님께서 사람들로부터 대중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주 대낮에 그를 붙잡으려는 시도를 유월절 기간에 많은 군중들이 운집한 성전에서 해야 했기에 매우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잡으려는 무리들은 마치 강도를 몰래 체포하기라도 하는 듯이 한적한 밤에 인적이 드문 곳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체포하려 온 것은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4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건은 성경을 이루기 위함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같은 말씀은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이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계획하고 성취를 신실하게 따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가 범죄자 중 하나로 취급받았다’고 말하는 이사야 53:12을 염두에 두신 것 같습니다. 물론 구약성경을 읽는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기 전에 이 말씀을 메시아에게 직접적으로 적용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비롯한 구약의 말씀들이 메시아에 대한 것이라는 이해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그분이 메시아였다는 것을 이해하고 난 이후에야 생겨났습니다. 소위 문법적 역사적 읽기를 통해서 이사야 53장이 메시아에 대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었던 유대인들은 실제로 없어 을 것입니다.

  

예수님 체포 후 도망친 제자들(50-52)

예수님께서는 경고하시고 기회도 주시면서 깨어 준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기회를 지나쳐 버리고 깨어 준비하지 않는 자는 넘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결정적인 순간에 실패합니다. 우리의 부족을 인정하고 주님의 능력을 구할 때, 오늘도 참 제자로서 삼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깨어 기도하라고 부탁했지만 밤새 잠만 자던 제자들의 비참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50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51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52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50-52)

 

마가는 제자들이 이 시점에서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쳐버렸다고 기록합니다. 그 후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사건을 제외하고, 더 이상 제자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가복음 16:7에 부활 사건을 전하는 청년에 언급되어서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1) 도망친 제자들(50)

 

예수님께서 예언한대로 그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체포되자 모두 버리고 도망했습니다. 마가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길을 갈릴리부터 줄곧 같이 걸어왔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들은 이 길을 따라오기 위해서 자신들에게 소중한 것들을 버려두고(1:18,20) 좇았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나선 첫 장면을 보면 그들은 이 길을 걷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나선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가가 보여준 것처럼 예수님의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이 진행되어 갈수록 제자들이 야심이 드러나게 됩니다. 8-10장 사이에 기록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관한 세 차례 예고 후에 제자들은 자신들의 의도와 다른 예수님의 말씀에 분개했고(베드로), 자신들끼리 누가 큰지 다투었으며, 마침내 세베대의 아들들(야고보와 요한)이 영광의 좌우편을 요구하는 청탁을 한 사실을 알고는 나머지 열 제자는 분개하게 됩니다.

그런 기대를 걸었던 예수님께서 유다의 배신으로 성전 경비병에게 속절없이 붙들리는 상황이 벌어지자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려두고 도망쳐버립니다. 사실 이러한 제자들의 행위는 마가복음의 스토리를 읽어온 독자들에게는 이미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체포와 심문, 처형 과정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로마의 정치 체계에 도전한 정치범의 성격을 띠게 되는데, 정치범은 본인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위험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상황을 알아차린 제자들은 예수님 근처에 있다가는 화를 당할 것을 알았기에 이를 모면하려고 도망한 것입니다.

이후에 등장하는 베드로의 부인 사건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시점에 예수님 주변에 남아있는 제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제자들 이야기의 끝이 아닌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시 예수께로 돌아오며, 하나님의 은혜로 기둥과 같은 사도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2) 한 청년(51-52)

 

마가복음에만 있는 이 독특한 구절은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 가버렸다는 50절 이후에 등장합니다. 이 기록은 두 가지 측면에서 혼란스럽고 이상하기까지 합니다. 

먼저 이 청년의 정체가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마가가 이 내용을 왜 기록하고 있는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석가들은 이 ‘청년’의 정체가 마가 자신일 것이라고 종종 주장합니다. 물론 가장 인기 있는 해석이기는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는 되지 못합니다.

이 청년이 마가라면,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기록함으로써 자신도 다른 제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음을 겸손하게 고백하는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이 청년이 왜 맨몸에 천을 두르고 예수님께로 왔는지는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 청년은 잠을 자다가 예수님을 체포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옷 입을 틈도 없이 황급히 이 소식을 예수님께 전하려고 겟세마네까지 뛰어 올라갔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예수님께서는 체포되신 상태였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이 청년은 천을 팽개친 채 알몸으로 도주합니다. 마가는 이 보도를 통해서 예수님의 체포 상황이 얼마나 긴박했는지를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체포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심각한 의미를 가졌는데, 알몸으로라도 도망해야 할 만큼 긴박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적용된 혐의는 정치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치범 주변에 있는 자들까지 위험에 빠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기도 이후 맞게 예수님의 시간은 폭력적이었고 믿음도 사랑도 갈기갈기 찢겨 나갔습니다. 예상은 했지만 실상은 더 참혹했습니다. 그럼에도 이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우리는 어디쯤 서서, 어떤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구독]과 아래 [광고 배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