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룻기(04-02)


사랑의 손길을 내민 보아스

룻기 4장 7-22절


그리스도인은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은혜는 아무런 대가 없이 거저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은혜를 베풀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은혜를 베푸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보아스는 룻에게서 청혼을 받고 자신이 결혼과 기업 무르는 일을 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보아스는 성문으로 가서 때마침 지나가는 기업 무를 자를 불러 그에게 나오미의 밭을 살 것인지 묻자 그가 사겠다고 말합니다. 룻과 보아스의 결혼이 어려워진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보아스가 기업을 무를 경우 룻과 결혼도 해야 한다고 요구하자, 기업 무를 지가 거절합니다. 이로써 다시 보아스와 룻의 결혼이 성사될 길이 열립니다.

 

보아스가 기업 무를 것을 맹세(7-12)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자기 생각이나 유익을 삶의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행여나 자신에게 손해가 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주저하지 않고 그 길을 걸어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7옛적 이스라엘 중에는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의 신을 벗어 그의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 중에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 8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의 신을 벗는지라 9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고 10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맞이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 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함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11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나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네가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하시기를 원하며 12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7-12)

7절은 화자의 설명으로 전에는 권리를 무르거나 교환을 확정하기 위해 신을 벗어 그의 이웃에게 주어 증명하는 관습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신 벗는 관습은 여기를 제외하고는 신명기 25:9에서 유일하게 나오는데, 거기서는 계대 결혼을 거절한 사람의 신을 벗기고 침을 뱉고 형제의 집 세우길 즐겨하지 않는 자라고 하면서 이스라엘 내에서 ‘신 벗기움을 받은 자의 집’이라고 부르라고 하였습니다. 수치스러움의 상징이 현재의 룻기 문맥에서는 단지 자신의 의무를 보아스에게 양도하는 징표로 사용됩니다. 여기에는 어떤 수치스러움이나 불명예의 요소도 없으며 단순히 거래의 징표로만 사용됩니다.

보아스는 기업 무를 권리를 받자 곧바로 장로들과 백성들에게 이 일에 증인이 되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 일은 두 가지인데 첫째는 엘리멜렉의 기업을 무르는 일이고, 둘째는 말론의 아내 룻과 결혼하여 죽은 자의 이름을 잇는 것입니다. 여기서 드디어 룻의 법적 지위가 등장합니다. 성문 앞은 공적인 장소이기 때문에 룻이 법적인 호칭으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이제야 우리는 룻의 남편이 말론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무명의 기업 무를 자와 보아스는 명백한 대조를 이룹니다. 보아스가 룻과 결혼하는 것은 보아스에게 큰 물질적 손해를 끼치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보아스는 이런 손해를 기꺼이 감당하는 헤세드를 룻과 나오미에게 약속하고 실행한 것입니다.

본문의 기업 무를 자의 무명성은 기업 무를 자를 비난하거나 부정적으로 보는 장치가 아니라 평범함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즉, 무명의 기업 무를 자는 특별히 악하거나 욕심 많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친척에게 선뜻 주기 어려워하는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화자는 그가 가난한 친척에게 매우 인색한 나쁜 사람이라고 낙인찍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그는 1장에 등장하는 오르바와 같습니다. 룻과 오르바를 비교했을 때 오르바는 상식적이고 순종적인 반면, 룻은 상식을 뛰어넘는 헤세드와 고집스러운 면이 강조됩니다. 마찬가지로 평범한 무명의 기업 무를 자는 일반 사람을 뛰어넘는 보아스의 헤세드를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보아스의 요청에 장로들과 백성들이 증인이 되고, 계약은 완성됩니다. 덧붙여 증인들은 여호와께서 보아스와 룻을 축복해주시기를 기원합니다. 룻에게는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되는 라헬과 레아처럼 되기를 기원합니다(11). 라헬과 레아는 야곱의 두 아내로 열두 명이나 되는 많은 아들을 낳아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가 됩니다. 즉, 룻도 많은 아이를 낳고 한 민족의 시조가 되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어머니처럼 되기를 기원한 것입니다. 이들이 모압 사람인 룻을 이스라엘의 어머니처럼 되라고 축복한 것은 룻을 온전히 이스라엘 안으로 받아주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보아스에 대해서는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기를” 기원했는데 에브랏은 원래 베들레헴의 한 지역 혹은 작은 부족이지만 여기서는 평행법을 사용하여 베들레헴과 동의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유명하게 되다’는 직역하면 ‘이름을 부르다’로 여기서는 문맥상 ‘명성을 얻다’라는 의미입니다. 또 보아스에게 상속자 주시기를 기원했는데 아직 룻이 젊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그녀를 통해 다말이 유다에게 베레스를 낳아준 것처럼 상속자를 주시길 기원합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유다와 다말의 경우도 룻과 보아스처럼 변형된 시형제 결혼을 하였습니다. 아들을 다말과 시형제 결혼시키기 싫어했던 유다에게 다말이 시형제 결혼의 의무를 요구했습니다. 하나님이 다말에게서 태어난 베레스의 가문을 가장 번성케 하신 것처럼 백성들은 보아스에게도 이런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길 기원합니다. 백성들은 룻의 용감한 행동을 자신들의 선조가 되는 다말의 용감한 행위와 같은 수준으로 높이 평가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과 장로들은 보아스와 룻의 헤세드에 매우 감동하고 칭찬하였습니다. 모든 일은 처음 나오미가 계획하고 의도한 방향으로 해결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룻과 보아스의 넘치는 헤세드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완벽해지려면 아직 하나가 남아 있습니다.

 

보아스와 결혼하여 아들을 얻은 룻(13-17)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는 사람을 기억하십니다. 은혜는 베풀 때 더 커집니다. 은혜를 베푸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기보다 먼저 은혜를 베풀 줄 아는 그리스도인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새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13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14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15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16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17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13-17)

보아스가 룻과 결혼하고, 여호와께서 룻을 임신하게 하시고, 룻은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들의 탄생은 모든 일의 완성으로, 여호와가 모든 일의 완성자임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처음으로 여호와의 개입을 명시적으로 드러냅니다. 그동안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언급하지 않고 우연이라는 말로 하나님의 개입을 표현했습니다.

룻과 보아스의 헤세드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아들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룻과 나오미와 보아스의 고통과 헌신에 대한 하나님의 헤세드인 것입니다. 여기서도 1장처럼 여성들이 화자로 등장합니다. 베들레헴의 여성들이 나오미에게 축복의 노래를 불러줍니다. 그들은 나오미에게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기업 무를 자’는 룻이 낳은 아들입니다. 이 아이를 ‘기업 무를 자’ 혹은 ‘구속자’로 묘사한 것은 그가 가족의 연약한 지체를 돌보는 사람이라는 일반적인 의미입니다.

그리고 베들레헴 여성들이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라고 부른 것은 아기의 정체성을 엘리멜렉 가문의 상속자가 아니라 나오미의 노년에 그녀를 봉양할 생명의 회복자로 보았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표현은 공적 회의에서 룻과 보아스의 결혼을 죽은 자의 기업을 보존하고 이름을 세우는 것으로 규정한 것과 차이가 있습니다. 여성들의 말은 법률적이거나 공식적인 의미라기보다는 나오미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어 나오미의 충만함, 즉, 룻을 통해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런 축하는 나오미를 봉양하기 위해 룻이 보아스와 결혼하기를 원했던 이야기의 본래 흐름으로 돌아오게 합니다. 베들레헴 여성들은 룻을 단순히 엘리멜렉 가문을 이어준 수단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들은 룻을 나오미와의 관계 속에서 평가하며 나오미에게 일곱 아들보다 더 귀한 며느리라고 칭송합니다. “일곱 아들”이란 표현에서 일곱은 ‘완전’, ‘모든’을 의미하는 상징 숫자로 그 어떤 아들보다 귀한 최고의 며느리라는 의미입니다.

모압 여성 룻에게서 시작된 헤세드는 보아스의 헤세드를 끌어내고, 이에 하나님께서 헤세드로 응답하심으로 나오미를 풍족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는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의 암흑 같던 사사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가문을 세운 것입니다. 한 여성의 헤세드가 세상을 바꾸게 될 것입니다.

 

보아스 가문의 족보(18-22)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풀 줄 아는 사람에게뿐 아니라 그 가문에 복을 주십니다. 보아스가 은혜를 베풀어 룻을 아내로 맞이했을 때 사람들은 이런 축복의 말도 했습니다. 상속자의 축복은 가문의 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 베푸는 사람의 가정을 보살피시고 복을 주십니다.

18베레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19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20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21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22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18-22)

본문은 베레스의 족보입니다(베레스-헤스론-람-암미나답-나손-살몬-보아스-오벳-이새-다윗). 족보는 베레스에서 시작되어 다윗까지 이어집니다. 다윗까지 이어지는 족보는 다양한 역할을 하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헤세드가 온 이스라엘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즉, 룻에서 시작된 헤세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굳건하게 세울 다윗 왕을 준비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 족보는 룻기가 사사기와 사무엘서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게 만듭니다. 셋째, 다윗 가문의 모압 기원을 설명하는 역할을 합니다. 넷째, 보아스의 어머니가 라합이란 사실을 통해 보아스의 이방 여성에 대한 포용적인 태도를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이렇게 다윗 가문의 족보는 다말, 라합, 룻처럼 놀라운 신앙고백과 결단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방 여성들에 의해 이루어진 가문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는 성별과 혈통과 지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을 믿고 결단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이방인이고 과부이고 어린 여자였던 룻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여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일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의 사명은 은혜를 베푸는 겁니다. 은혜는 베풀수록 더욱 커집니다. 자기만 아는 인색함, 자기만 높아지려는 교만함이 가득한 이 시대에 우리는 은혜를 받은 자로서 은혜를 더 많이 베풀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룻기(04-01)


룻을 향한 보아스의 배려

룻기 3장 14절–4장 6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은 사람이 성도입니다. 하지만 성도가 되었다고 구원의 완성에 다다른 것은 아닙니다. 성도로서 합당한 삶의 과정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로 합당하게 살려면 성도의 사명을 알아야 합니다.

 

룻의 헤세드는 나오미의 마음을 풍성하게 하였고, 이제 나오미는 룻을 위해 움직이기로 결심합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보아스와 결혼하면 좋겠다고 제안하며 방법을 알려주었고 룻은 나오미의 계획을 그대로 실행합니다. 룻은 보아스에게 기업 무를 자이니 자신과 결혼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보아스는 룻이 시어머니를 위해 자신과 결혼하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그는 룻의 넘치는 헤세드에 감동하며 자신도 룻과 나오미를 위해 헤세드 베풀기를 계속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집으로 돌아온 룻(14-18)

사회가 아무리 이기적이라 해도 그리스도인다움 변하지 않습니다. 환경이 바뀐다고 본질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나누고 베푸는 인생을 살기 원하십니다. 초대 교회 부흥의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소유를 팔아 나누고 베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초대 교회에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임했습니다. 교회가 성숙해지기 시작했습니다.

14룻이 새벽까지 그의 발치에 누웠다가 사람이 서로 알아보기 어려울 때에 일어났으니 보아스가 말하기를 여인이 타작 마당에 들어온 것을 사람이 알지 못하여야 할 것이라 하였음이라 15보아스가 이르되 네 겉옷을 가져다가 그것을 펴서 잡으라 하매 그것을 펴서 잡으니 보리를 여섯 번 되어 룻에게 지워 주고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16룻이 시어머니에게 가니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어떻게 되었느냐 하니 룻이 그 사람이 자기에게 행한 것을 다 알리고 17이르되 그가 내게 이 보리를 여섯 번 되어 주며 이르기를 빈 손으로 네 시어머니에게 가지 말라 하더이다 하니라 18이에 시어머니가 이르되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지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하니라(14-18)

배려는 그리스도인 다음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보아스를 찾아갔던 룻이 약속받고 나오미에게 돌아왔습니다. 보아스는 룻이 곤란한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배려애서 새벽에 룻을 돌려보냈습니다.

(1) 조용히 룻을 보내는 보아스(14-15)

룻은 보아스의 발치에 누웠다가 새벽, 즉 사람들이 서로 알아보기 어려운 미명에 일어났고, 보아스는 사람들이 그가 타작마당에 들어온 것을 모르게 하라고 당부합니다(14). 룻의 명예를 지켜주려는 조처입니다.

그리고 보아스가 겉옷에 보리를 여섯 번 되어 룻에게 지워주고, 성읍으로 들어갑니다(15). 보리 양이 어느 정도인지 알기 어렵지만 젊은 여자가 어깨에 짊어지고 갈 정도면 적지 않은 양으로 보입니다. 보아스는 끝까지 룻을 자상하게 보살펴줍니다. 그리고 보아스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성읍으로 들어갔습니다.

(2) 집으로 돌아온 룻(16)

나오미는 룻에게 어떻게 되었는지, 현재 어떤 상황인지 묻습니다(16). 우리말 해석은 “어떻게 되었느냐?”이지만, 원문은 ‘너는 누구냐?’입니다. 이것은 나오미가 룻임을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바로 뒤에 ‘내 딸아’라는 호격이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룻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묻는 질문입니다. 즉, 계획이 성공하여 룻이 보아스의 아내가 되었냐고 물은 것입니다. 밤새도록 긴장하며 룻을 기다렸을 나오미의 초조함이 잘 드러나는 질문들입니다.

이에 대해 룻은 보아스가 자신에게 한 일을 나오미에게 다 알려주는데 청중이 알고 있는 이야기뿐만 아니라 알지 못했던 부분까지 말해줍니다. 룻은 보아스가 자신에게 한 일을 다 말하고, 시어머니에게 빈손으로 가지 말라며 보리를 준 사실도 전합니다. 보아스가 보리를 준 이유는 나오미에게 자신이 룻과 결혼할 의사가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나타낸 징표인 것입니다. 여기서 ‘빈손’(레캄)은 직역하면 ‘텅 빈’이란 뜻으로 1:21에서 나오미가 자신이 ‘비어서’ 돌아왔다는 것을 고백할 때 사용한 단어입니다. 룻이 짊어지고 온 보리 자루는 보아스가 룻을 통해 나오미의 텅 빈 형편을 채워주고 앞으로도 더 크게 채워줄 것이라 고 징표고, 또 나오미의 의도대로 룻을 아내로 맞이할 마음이 있음을 전달하는 매개입니다. 모든 사건의 전말과 보아스의 말과 그가 보낸 보리를 본 나오미는 보이스의 생각을 분명히 일게 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룻에게 일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지 앉아 있으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보아스가 일이 성취되기 전까지 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앉다’와 ‘쉬지 않다’가 대조를 이루는데 이제 룻이 할 일은 다 했으며 가만히 결과를 기다리는 일만 남았습니다. 이후의 일은 모두 보아스의 손에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는 여기서 보아스에 대한 나오미의 절대적 신뢰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런 나오미의 모습은 궁극적으로는 보아스 뒤에 계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생을 쓰게 만드셨다고 고백했던 나오미는 보아스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며 그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그의 손길을 신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게 나오미가 계획하고 이 실행에 옮긴 룻의 결혼 작전은 이제 공이 보이스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결과만을 기다리는 상황으로 3장이 마무리됩니다.

 

성문 장로 회의를 소집하는 보아스(4:1-2)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순결한 삶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행위를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이웃들에게 오해를 사는 행동도 자제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 악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경각심을 가지고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악한 세상에서 거룩함과 순결함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을 더 간절히 찾고 구해야 합니다.

1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 2보아스가 그 성읍 장로 열 명을 청하여 이르되 당신들은 여기 앉으라 하니 그들이 앉으매(1-2)

룻과 헤어진 보아스가 바로 성문으로 갑니다. 그는 룻과의 약속을 이행하는 데 지체하지 않습니다. 성문은 중요한 재판과 결정이 이루어지는 공적인 장소로 남성의 영역입니다. 보아스는 나오미의 대리인으로서 회의를 소집하기 위해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집 그곳을 지나는 기업 무를 자를 불러 앉힙니다. 여기서도 우연의 요소를 통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 기입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한편,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의 이름을 올랐을 리 없음에도 화자는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아무개여“라고 부릅니다. 기업 무를 자의 익명성은 보아스와 대조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입니다. 기업 무를 자를 부른 후에 보아스가 성읍의 열 장로를 초청합니다. 이렇게 보아스의 주도하에 법정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보아스가 유력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공식적인 법정을 여는 것이 수월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장로들의 역할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보아스가 연 법정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기업 무를 자에게 제안하는 보아스(4:3-6)

목적에 지나치게 집중하면 내 생각과 뜻만을 주장하면서 공동체를 어렵게 만들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이든 내가 뜻하는 대로 밀어붙이기보다 최선을 다하되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순종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나의 의지를 지나치게 앞세우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를 믿지 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되,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3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이르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 하므로 4내가 여기 앉은 이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말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만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만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무르리라 하는지라 5보아스가 이르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 하니 6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3-6)

보아스는 모인 장로들 앞에서 기업 무를 자에게 부른 이유를 설명합니다. 먼저 보아스는 나오미를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여자로 소개합니다. 나오미를 이렇게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은 모든 베들레헴 사람들이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남편과 아들을 잃고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나오미가 남편의 땅을 팔려고 내놓았다고 말합니다. 보아스가 ‘팔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나오미가 남편 소유의 땅에 대한 모종의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히브리어 ‘마카르’는 완전히 파는 상행위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땅의 경우 일정 기간 땅의 사용권만 이전되는 상호 협정을 의미합니다. 신명기 법에서 땅의 경계표를 옮기지 말라고 명하기 때문에(신 19:14; 27:17) 이스라엘에서 땅은 매매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나오미의 경우는 기업 무를 자가 사용권을 되찾아오더라도 땅의 소유권이 나오미에게 가지 않고 기업 무를 자에게 가게 됩니다. 당시 여성은 남편의 땅을 상속받을 수 없었고 나오미에게는 상속받을 아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비록 나오미가 소유권을 가질 수는 없지만 엘리멜렉의 땅에 대한 권리를 어느 정도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나오미가 땅을 판다는 것은 땅에 대한 소유권과 그녀가 가지고 있는 땅에 대한 권한을 넘긴다는 의미입니다.

의제를 알린 보아스는 증인들과 장로들 앞에서 아무개에게 기업 무를 자의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 후, 그에게 그 권리를 행사할 의사가 있는지, 그리고 그가 거절하면 다음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기업 무를 자가 거절하면 자신이 기업 무를 자의 의무를 행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가까운 친척은 자신이 무르겠다고 답합니다.

이런 대답에 보아스는 한 가지 조건을 첨가합니다. 즉, 나오미에게 땅을 사는 것은 곧 죽은 자의 아내 룻에게서 사는 것이고, 그러면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룻에 대한 호칭이 달라집니다. 이전까지 룻은 모압 여인 혹은 나오미의 며느리로 불렸지만 여기서는 죽은 자의 아내로 불립니다. 이것은 나오미가 가진 땅에 대한 권리를 나오미의 며느리인 룻이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것과 룻은 아직 젊기에 시형제 결혼을 통해 남편의 이름을 세울 수 있는 능력과 권리와 의무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땅을 사는 기업 무를 자는 룻과 결혼해서 아들을 낳아 형제 가문의 이름을 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기업 무를 자의 역할을 넘어간 것이며 그에게는 큰 손해가 나는 일입니다. 기업 무를 자는 처음 보아스의 말을 들었을 때 나오미와 룻에게 자손이 없으니 땅을 되사오면 그 땅은 자신의 소유가 될 것으로 생각하여 수락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땅을 되찾아 나오미와 룻에게 주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자신에게 손해가 되기 때문에 무르지 못하겠다고 거절합니다. 여기서 자신이 무르지 못하겠다는 것을 두 번이나 말하여 강조하는 것은 자신이 손해보는 기업 무를 자의 권리를 진심으로 거절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아무개는 기업 무를 자의 권리를 보아스에게 넘깁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의 사명은 은혜를 베푸는 겁니다. 은혜는 배풀수록 더욱 커집니다. 자기만 아는 인색함, 자기만 높아지려는 교만함이 가득한 이 시대에 우리는 은혜를 받은 자로서 은혜를 더 많이 베풀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구독과 광고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룻기(03-01)


룻을 위한 나오미의 제안

룻기 3장 1-13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은 사람이 성도입니다. 하지만 성도가 되었다고 구원의 완성에 다다른 것은 아닙니다. 성도로서 합당한 삶의 과정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로 합당하게 살려면 성도의 사명을 알아야 합니다.

 

우연히 룻은 가까운 친척인 보아스의 밭으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보아스를 만나게 됩니다. 보아스는 룻이 나오미에게 베푼 헤세드를 들었고, 그것이 보아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베푸는 은혜보다 넘치는 은혜를 베풀며 룻과 나오미가 넉넉히 먹을 수 있는 양식을 제공합니다. 하지만 밀 추수가 끝나면 보아스가 베푼 은혜도 끝날 것이고, 룻과 나오미는 다시 생계를 걱정하는 처지가 될 것입니다.

 

보아스와 결혼시키려는 계획(1-5)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절대 순종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 자신의 생각을 앞세우거나 고집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대부분은 각자 자신의 생각을 앞세우고 절대로 꺾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먼저 구하고, 어떤 일에든 순종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갈등의 대부분은 해소되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1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2네가 함께 하던 하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보라 그가 오늘 밤에 타작 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라 3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 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 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4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가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네 할 일을 네게 알게 하리라 하니 5룻이 시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1-5)

3장은 다시 나오미로 시작됩니다. 나오미는 룻의 시어머니로 소개됩니다. 이야기가 룻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나오미는 룻의 시어머니로서 행동합니다. 1-4절은 나오미의 말로 나오미가 사건을 주도합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좋은 혼처를 찾아 결혼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합니다.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안식처’는 1:9과 연결해서 볼 때 ‘남편의 집’, 즉 결혼을 의미합니다.

2절에서 나오미는 룻에게 재혼 대상으로 보아스를 소개합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네가 함께 하던 하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준 친척인 보아스가 어떠냐?’라는 의미로 룻의 의향을 묻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오미가 ‘우리’라고 말하는 것은 둘이 공동운명체라는 것을 표현합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은혜를 베풀어준 보아스를 룻의 남편 상대로 선택한 것입니다. 나오미는 보아스가 지금까지 룻에게 호의를 베풀고 그 집의 여종들처럼 일하게 해준 것을 상기시킵니다. 이것은 보아스가 룻을 받아줄 만한 관대함과 훌륭한 성품을 가진 좋은 신랑감이라는 것을 어필하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그날 밤 타작마당에서 보아스가 보리를 털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룻에게 준비를 하고 보아스에게 가라고 말합니다. 나오미가 보아스가 룻과 결혼하기에 적합한지, 결혼할 가능성은 있는지, 그리고 결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오래 생각하고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오미는 그동안의 무기력하고 소극적인 모습을 버리고, 룻을 결혼시키기 위해 매우 적극적으로 움직입니다.

3절에는 나오미가 룻이 해야 할 행동을 자세히 지시하며 아홉 개의 동사를 나열합니다.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옷을 입는 행동은 신부가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는 모습입니다(참조, 겔 16:8-12), 나오미는 롯에게 타작마당으로 가서 사람들이 다 먹고 마실 때까지 절대로 보아스에게 들키지 않게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합니다. 만일 일찍 발각되면 보아스와 함께 밤을 보내지 못할 뿐 아니라 음탕한 여자로 소문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룻이 하려는 일은 그의 인생을 건 모험입니다.

4절에서 나오미는 릇에게 보아스가 잠들면 그의 발을 들추고 그곳에 누워 있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보아스가 알아서 행동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말 번역에는 ‘이불’이라는 말을 삽입했지만, 히브리 본문에서는 ‘발을 벗기고’로 되어 있습니다. 이런 행동이 충분히 성적 의미를 갖기에 룻이 그 이상 행동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다음은 보아스가 적절하게 판단하고 행동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나오미의 계획을 들은 룻이 나오미의 말대로 하겠다고 대답합니다. 그 일이 심히 위험한 줄 알았지만, 기꺼이 나오미의 계획을 따르겠다고 합니다.

나오미가 이런 정상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결혼을 계획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룻과 보아스의 결혼이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부유하고 유력하고 나이 많은 보아스와 이방인 과부 소녀는 여러 면에서 극과 극의 대조를 이룹니다. 이런 신분 차이로 정식으로 혼담을 넣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나오미는 보아스에게 룻과 결혼할 동기를 마련해주기 위해 이런 방법을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나오미는 이 계획의 실패를 크게 염려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그동안 보아스가 룻과 자신에게 보여준 헤세드에 기반한 것입니다. 그는 보아스가 선하게 응답해줄 것을 믿었습니다.

 

룻의 청혼(6-9)

세상의 정욕과 욕심을 따르는 태도는 우리에게 유익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적인 이익과 안일함을 좇는 삶에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나타날 수 없습니다. 눈앞의 이익을 좇느라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길을 선택해서는 안 됩니다. 룻과 같이 나의 욕심과 정욕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헌신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6그가 타작 마당으로 내려가서 시어머니의 명령대로 다 하니라 7보아스가 먹고 마시고 마음이 즐거워 가서 곡식 단 더미의 끝에 눕는지라 룻이 가만히 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웠더라 8밤중에 그가 놀라 몸을 돌이켜 본즉 한 여인이 자기 발치에 누워 있는지라 9이르되 네가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하니(6-9)

룻은 시어머니의 명령대로 모두 행합니다. 화자는 룻이 나오미의 말을 듣고 정말로 타작마당으로 내려가서 시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하였다고 룻의 행동을 다 요약해줍니다. 보아스가 먹고 마시고 즐거운 혹은 흥겨운 마음이 되어 곡식단 더미의 끝에 눕기 위해 갔고, 룻도 조용히 비밀스럽게 가서 그의 발치를 벗기고 누웠습니다. 룻의 행동은 조심스러우면서도 매우 대담합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룻이 자신 곁에 누워 있는 것을 늦게야 발견합니다. 나오미의 예상과 달리 보아스는 깊은 잠이 들어 룻이 온 것을 알아채지 못한 것입니다. 그는 한밤중에 자다 깨어 누군가 옆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서 누구냐고 묻습니다. 이에 룻이 ‘당신의 여종 룻’이라고 답합니다. 여기서 룻이 말한 호칭은 보아스와 릇의 개인적인 관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신의 여자입니다’라는 의미로 말한 것입니다. 룻이 자신을 ‘당신의 여종’이라 말한 것은 그가 보아스와 결혼할 의사가 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는 ‘당신의 날개를 당신의 여종 위에 펼치소서’로 직역하는 것이 훨씬 은유적 의미를 살려줍니다. 여기서 ‘날개’(카나프)는 2:12에서 ‘하나님의 날개 아래에서 안식처를 얻기를’이라고 말한 보아스의 기원과 연결됩니다. 보아스는 룻이 하나님의 날개 아래서 안식처 찾기를 기원해주었는데, 지금 룻이 ‘보아스의 날개’로 자신을 덮어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룻이 겉옷이 아니라 ‘날개’라고 말한 것은 보아스가 자신의 기원을 기억하게 하기 위한 룻의 재치입니다.

‘날개로 덮다’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성서에서 자주 결혼을 의미합니다(겔 16:8,27; 신 22:30; 27:20). 그러므로 룻의 요청은 보아스를 향한 청혼입니다. 룻은 이런 행동을 통해 결혼을 요청하는 것은 그가 기업 무를 자이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이는 절대 나오미를 떠나지 않겠다던 룻이 보아스와 결혼하라는 말을 순순히 따른 이유입니다.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이기 때문에 그와 결혼하면 그가 나오미에게 땅을 찾아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나오미는 을 위해 그리고 릇은 나오미를 위해 보아스와의 결혼을 바랍니다.

 

보아스의 응답(10-13)

공동체의 질서를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권리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감정에 치우쳐 섣불리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양심에 따라 적극적으로 행동하되,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인정하는 성숙한 태도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갈등과 분쟁이 아니라 화평을 이루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10그가 이르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11그리고 이제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12참으로 나는 기업을 무를 자이나 기업 무를 자로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으니 13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워 있을지니라 하는지라(10-13)

룻의 말을 들은 보아스는 감격합니다. 그는 “내 딸아”라고 다정하게 부르며 축복의 말로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보아스는 룻이 자신에게 청혼한 동기가 자신의 시어머니에 대한 헤세드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네가 베푼 헤세드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다고 말합니다. 룻의 처음 헤세드는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에 와서 이삭을 주워 나오미를 돌보는 등, 이제까지 계속된 룻의 헤세드 전체를 말합니다. 그리고 나중 헤세드는 시어머니를 위해 젊은이와의 결혼을 포기하고 자신의 아버지뻘 되는 보아스와 결혼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보아스는 인간의 본성을 거스른 룻의 헤세드를 보고 감격합니다.

보아스는 룻의 심정을 헤아리며 “두려워하지 말라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라고 약속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은 거절당할 것을 두려워하는 룻의 마음을 안심시킵니다. 그는 룻을 유능한 여자로 부르며 자신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격려합니다. 보아스는 룻의 외적 조건이 아닌 그의 성실함과 용기와 시어머니에 대한 헤세드를 보고 그가 자신과 같은 유력한 사람이라고 인정해줍니다. 보아스는 다만 자신보다 앞서 기업 무를 사람이 있으니 그가 만일 거절하면 자신이 반드시 기업 무를 자의 의무를 행하겠다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보아스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원칙을 지킵니다. 이로 인해 순조롭게 진행되던 일이 뜻밖의 장애를 얻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긴장된 상황이 발생하였습니다.


지금 시대는 성도가 성도 됨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성도의 사명을 잊어버린 시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도로서 합당한 삶을 회복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순종과 성결, 그리고 정직이라는 성도의 사명을 기억하고 사는 참된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구독과 광고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룻기(02-02)


보아스의 은혜를 입은 룻

룻기 2장 14-23절


우리가 가족나 회사를 위해서 열심히 수고합니다. 그렇게 수고하는데도, 때로는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 가정이나 회사를 어떻게 하면 더 좋게 만들까 하는 마음으로 노심초사를 하면서도 길을 발견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로운 방법을 따라가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룻과 나오미는 아무런 생계 수단이 없기에 룻이 추수하는 밭에 가서 곡식을 주워 와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룻은 엘리멜렉의 친척이자 유력한 사람인 보아스의 밭으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보아스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보아스는 처음 보는 소녀가 나오미의 며느리라는 것을 알자 룻을 자신의 식구처럼 챙겨줍니다.

 

룻을 점심 식사에 초대하는 보아스(14-16)

누군가를 도울 때 안타까운 마음만 갖고 끝내거나 말로만 동정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도움은 상대방에게 구체적이고 실제적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그 사랑은 입술로만 하는 사랑이 되지 않습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약 2:17)이라고 했습니다. 당신은 얼마나 나누고 있습니까?

14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하므로 룻이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주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 15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그에게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16또 그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14-16)

보아스가 룻에게 베푸는 은혜는 14절 이후에도 계속됩니다. 보아스는 식사 시간이 되자, 룻에게 와서 같이 식사하자고 초청합니다. 룻을 자기 식솔들의 식탁으로 초대하여 빵과 볶은 곡식 등 음식을 제공합니다. 그는 룻에게 빵조각을 줄 뿐 아니라 식초에도 찍어 먹을 수 있게 해줍니다. 이 식초는 포도 식초로 빵을 찍어 먹는 일종의 소스입니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다’는 것(14)은 보아스가 음식을 넉넉히 주었다는 말입니다. 식사 초대는 환대의 가장 보편적이고 상징적인 행위로 보아스가 룻을 이스라엘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아마도 베들레헴에 온 후 룻은 이런 따뜻한 환대를 처음 받아보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과 나란히 앉아 음식을 받고 초를 찍어 먹으라는 배려의 말을 들으며 룻의 마음이 위로를 얻었을 것입니다.

식사가 끝나고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 보아스는 일꾼을 불러 룻이 혹시 곡식 단 사이에서 주울지라도 절대 면박을 주거나 창피하게 만들지 말라고 합니다. 또, 룻이 더 많이 주워 갈 수 있도록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일부러 빼주라고 하면서 룻이 넉넉하게 주워 가는 것을 비난하지 말라고 합니다. 룻이 곡식을 주우러 다니는 처지라고 창피를 주거나 인격적으로 모욕하거나 일에 방해가 된다고 화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물질적인 배려를 할 뿐 아니라 그녀가 인격적으로 무시당하지 않도록 배려합니다. 룻이 비록 가난해서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처지였지만, 이런 상황은 룻이 게으르거나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여성이 땅을 상속받지 못하는 사회적 구조와 이스라엘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이방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발생한 상황입니다.

그리고 이삭줍기는 이렇게 생계가 어려운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생존의 권리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이삭을 줍는다고 해서 멸시를 받거나 비난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보아스의 당부는 이런 하나님의 뜻을 잘 반영한 것입니다. 어려운 사람을 도울 때, 자신의 우월감을 드러내며 도움 받는 상대방을 멸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약자를 돕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의 문제이며, 하나님 사랑을 전달하는 하나님 백성의 의무입니다. 보아스가 이렇게 룻에게 은혜를 넘치게 베푸는 이유는 그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아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보아스를 통해 자신의 백성으로 들어온 룻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많은 곡식을 주워 집으로 돌아감(17-19)

섬김은 마음에서 시작합니다. 서로를 생각해 주는 마음의 여유가 없으면 섬김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가족 간에도 그렇습니다. 섬김은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을 섬기려는 마음입니다. 섬김의 마음이 넉넉한 사람에게는 언제나 나눌 것이 있습니다.

17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 18그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어머니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가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어머니에게 드리매 19시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하니 룻이 누구에게서 일했는지를 시어머니에게 알게 하여 이르되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니이다 하는지라(17-19)

룻은 나오미에게 기쁜 소식을 알립니다. 자신이 누구의 밭에 나아가 은혜를 입었는지 설명합니다. 룻이 보아스의 밭에서 저녁까지 주워 모은 보리의 양은 1에바(14-23kg)정도 되었습니다. 구 바벨론의 마리 문서에 의하면 성인 남성의 하루 평균 양식이 0.54kg 정도 되는 것을 감안하면, 둘이서 대략 20일 정도 먹을 수 있는 상당히 많은 양을 얻은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이 양이 일반적으로 얻을 수 있는 양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암시합니다(19, 나오미의 반응).

많은 양식을 얻은 룻은 그것을 들고 성읍에 있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아마도 그녀의 발걸음은 아침의 근심 어린 무거운 발걸음과 반대로 매우 기쁘고 가벼운 발걸음이었을 것입니다. 시어머니와 한동안 먹을 것 걱정 없이 살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룻은 집에 돌아가자마자 자랑스럽게 자신이 주운 것을 보여드리고, 자신이 점심 때 먹고 남긴 것을 모두 시어머니께 드립니다. 아마도 룻은 점심에 먹고 남은 것을 시어머니를 생각해서 모두 싸 가지고 온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도 시어머니에 대한 룻의 지극한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나오미는 ‘어디에서 주웠느냐?’, ‘어디에서 일했느냐?’하고 놀라서 룻에게 묻습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호의를 베푼 이에게 복을 빌며 감사를 표현합니다. 룻은 그가 ‘보아스’라고 알립니다. 보아스란 이름을 맨 마지막에 이야기함으로 나오미의 놀라움을 극대화합니다.

18절부터는 나오미의 호칭이 바뀌는데 화자는 나오미를 ‘그의 시어머니’로 부릅니다. 이는 이야기의 중심인물이 나오미에서 룻으로 전환됨을 보여줍니다. 지금까지 룻은 나오미를 따라온 보조적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룻과 보아스의 대화와 보아스 밭에서 일한 사건을 통해 룻이 사건을 이끌어가는 독립적인 인물로 이야기의 중심에 등장합니다.

 

보아스의 정체를 알게 된 룻(20-23)

섬김의 삶은 하늘의 복을 받는 축복의 길입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잘 깨닫지 못합니다. 항상 부족한 것만 보고 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원망하기도 하고 나눔에 인색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가진 것이 많으니 나누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나눌 때 풍성해지는 법입니다. 교회가 바른 섬김과 나눔의 공동체가 될 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20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하고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니라 하니라 21모압 여인 룻이 이르되 그가 내게 또 이르기를 내 추수를 다 마치기까지 너는 내 소년들에게 가까이 있으라 하더이다 하니 22나오미가 며느리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너는 그의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 하는지라 23이에 룻이 보아스의 소녀들에게 가까이 있어서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그의 시어머니와 함께 거주하니라(20-23)

룻이 보아스란 이름을 언급했을 때, 나오미는 많이 놀랐을 것입니다. 그는 엘리멜렉의 가까운 친척으로 기업무를 사람 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는 보아스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헤세드) 베풀기를 그치지 않은 사람으로 평가하며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 주시길 기원합니다. 이 표현은 나오미가 룻과 오르바에게 축복한 말과 거의 같습니다. 산 자와 죽은 자에 대한 은혜는 죽은 자를 생각하여 산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준 것이고 산 자, 즉 과부들을 잘 돌보는 것이 이들을 남겨놓고 떠난 죽은 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여기서 산 자와 죽은 자는 서로 완전히 단절된 것이 아니라 가족이란 끈으로 계속해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오미는 보아스가 친척으로서 룻에게 넘치게 은혜를 베풀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친척이라고 해서 이렇게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는 의무가 없지만 보아스는 기꺼이 은혜를 베풀었고, 나오미는 그의 자비로운 행동에 감사하며 여호와께 복을 빈 것입니다.

룻은 이 말을 듣고 보아스가 추수를 마칠 때까지 자신의 일꾼들과 있으라는 호의까지 베풀었다고 밝힙니다. 나오미도 보아스의 말을 따르라고 합니다. 22절에서 ‘만나지 않기 위해’로 번역된 ‘만나다’(파가)라는 단어는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만남을 내포합니다. 즉, 이 말은 다른 밭에서 다른 남자 일꾼들이 룻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을 막기 위한 충고입니다. 보아스와 나오미는 룻을 “내 딸아”라고 부르며 이심전심으로 룻을 걱정하는 보호자들입니다. 그리고 이 호칭을 보면 나오미와 보아스가 비슷한 연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룻은 나오미와의 대화를 통해 왜 보아스가 자신에게 큰 은혜를 베풀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룻은 한편으로 감사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보아스의 호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젊은 과부의 입장에서 부유한 남자의 호의를 그냥 순수하게만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나오미의 설명을 듣고 비로소 보아스가 자신에게 넘치는 은혜를 베푼 이유를 이해하게 되고 불편했던 마음도 사라졌을 것입니다. 이렇게 여성이 서로 삶을 나누고 정보를 주고받는 모습은 구약 성경에서는 참 낯선 광경입니다. 여기서 나오미는 비록 직접적인 행동은 하지 않지만, 연장자로서의 지혜와 지식과 지도력을 보여줍니다.

23절은 요약으로 전체 추수 시기 동안의 룻의 행동을 한 절로 요약합니다. 전체 추수 기간은 보리와 밀을 추수하는 시기로 4월에서 6월 정도까지의 기간을 말합니다. 룻은 나오미와 보아스의 권유대로 보아스의 소녀들 가까이에서 곡식을 주워 나오미와 자신의 양식을 삼으며 그 시기를 보냈습니다. 나오미도 룻의 헤세드와 보아스의 헤세드로 베들레헴에 돌아와 평화와 안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추수 시기가 끝나면 다시 둘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룻과 나오미에게 주어진 은혜는 임시적이고 불안정합니다. 다만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란 사실은 나오미와 룻에게 희망을 갖게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야 할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을 보시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의 삶을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삶을 살 때, 지친 영혼을 위로하시고, 새 힘을 주시며, 기쁨을 주십니다. 주님의 참된 위로를 통해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구독과 광고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룻기(02-01)

 


우연히 보아스를 만난 룻

룻기 2장 1-13절


인생의 겨울을 지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섣부른 희망이나 손 빈 위로가 아닙니다. 작은 몸짓이라도 그들과 함께 슬픔의 연대를 함께할 때 서로의 체온을 나눠 가질 수 있습니다. 혼자만의 겨울을 우리 모두의 봄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나오미의 시련을 헤아린 룻처럼, 룻의 시련 마음을 헤아린 보아스처럼 누군가의 시린 마음을 보듬어야겠습니다.

 

모압 땅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나오미는 하나님께서 베들레헴에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자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나오미가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나오미는 구 며느리와 함께 출발하였지만 중간에 그들에게 고향으로 새로운 남편과 결혼하라고 설득합니다. 이것이 그가 며느리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의 선의였습니다. 이에 오르바는 돌아가고 룻은 나오미 곁에 남아 있겠다고 매달립니다.

 

보아스에 대한 소개(1)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자기 백성의 선대를 통해 이 세상에 은총을 나타내십니다. 성도들은 은혜 아래 있음을 보여주는 사랑의 열매가 삶에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 도움이 필요하기에 곁에 있어 주어야 할 삶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헤세드)을 나누어 주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1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더라(1)

룻기 2장을 시작하며 새로운 인물이 소개됩니다.

1절은 ‘나오미에게는’(부레노오미)으로 시작되는데 ‘나는 텅 비었다’고 말한 것(1:21)에 대한 화자의 반응으로, 나오미에게는 남편의 친척인 보아스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유력자’(이쉬 김보르 하일)인데, 유력자는 돈 많은 재력가만 아니라 재판을 주재하는 권력을 지닌 사람을 가리킵니다. 부와 권력의 두 요소는 ‘고엘’, 즉 ‘기업을 물러줄 자’가 가져야 할 중요한 요소입니다. 화자는 이야기를 전개하기 전에 먼저 보아스를 고엘로서 행동할 충분한 외적 자격을 갖춘 인물로 소개합니다.

한편 보아스의 아버지 이름이나 가문이 소개되지 않는데, 이는 화자가 나오미와 룻을 중심인물로 삼고, 보아스는 고엘로서 그들을 돕는 인물로 한정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양식을 구하러 나간 룻(2-3)

지금까지 우리 인생의 여정에도 우연을 가장한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가 가득합니다. 그 수 많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우리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모든 우연을 장중에 붙드시고 예측할 수 없는 만남과 일상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의 나라를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있습니다. 그 손길을 발견해야 합니다.

2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하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 3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2-3)

2절에서 ‘룻이 모압 여인’으로 언급됩니다. 이로써 룻이 이방인이라는 것을 드러내며, 이방인 신분을 가진 룻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렵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룻은 나오미에게 이삭을 주우러 밭에 나가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조심스럽게 요청합니다. 그는 비록 이방인이지만 지금 자신과 나오미의 삶에 대한 주도권을 가지고 행동합니다. 룻이 모압에서 어떤 신분과 어떤 경제적 여건 속에 살았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지금처럼 남의 땅에서 이삭을 주워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극빈층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적어도 모압 땅에서는 모압 사람으로서의 권리를 누릴 수 있었고, 그 신분으로 일거리를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 이방인 룻의 처지는 달랐고, 남의 밭을 전전하며 이삭을 꼽는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고향을 떠난 룻의 비참한 현실입니다. 이런 힘겨운 상황을 예측했지만 룻은 기꺼이 나오미를 따라서 이스라엘에 왔습니다.

룻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가서 이삭을 줍겠다’고 말합니다. 신명기 법에 가난한 자를 위해 이삭을 줍도록 허락하라고 명시되어 있지만, 처벌 조항이 없었기 때문에 밭 주인의 호의나 허락 없이는 그 일이 어려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3절은 이 일을 다닌 며칠 동안의 이야기를 요약한 것입니다. 그는 이리저리 다니며 이삭을 주웠고, 그러던 어느 날 보아스의 밭까지 오게 됩니다. 여기에 우연의 요소가 있기 때문이 ‘우연히’를 넣은 번역도 좋은 번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우연을 통해 유력자 보아스와 룻이 만날 기회가 생겼습니다.

 

룻을 발견한 보아스(4-7)

자기연민이나 낙심에 빠지지 않고,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엄청난 믿음, 특별한 기적이 일어나야 우리가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과 지금 하는 있는 일을 소중히 여기고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의 길을 예비하고 섭리하십니다. 일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역사를 펼쳐 가시길 바랍니다.

4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5보아스가 베는 자들을 거느린 사환에게 이르되 이는 누구의 소녀냐 하니 6베는 자를 거느린 사환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인데 7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4-7)

3절에 이어 4절에서 또 다른 우연이 일어납니다. 룻이 보아스의 밭에 간 날 마침 보아스가 온 것입니다. 본문에서 ‘보라 보아스가 왔다’고 말한 것은 그 시간 보아스가 나타난 것에 대한 우연성과 드디어 중요 인물인 보아스의 등장, 두 가지를 강조한 표현입니다. 우연히 룻이 보이스의 밭에 간 날, 때마침 보아스가 그 자리에 나타난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런 우연은 종종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암시합니다. 우리에게는 우연이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하나님께 우연은 없습니다.

일꾼들과 인사를 마친 보아스는 바로 룻에게 관심을 두고 어느 집 소녀인지 묻습니다. 일꾼은 나오미와 함지온 모압 소녀라고 소개합니다. 나오미의 며느리라고 소개하지 않고 모압 소녀라고 말한 것은 당시 베들레헴 사람들이 이방인 룻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사환은 룻이 아침부터 지금까지 서 있었다고 알려줍니다. 우리말은 계속 일하고 있었다는 뉘앙스로 번역했지만, 동사 ‘아마드’는 ‘서 있다’라는 뜻으로 주인에게 이삭을 주울 수 있는 허락을 받기 위해 끈질기게 서 있는 모습을 표현합니다. 이런 룻의 모습은 일차적으로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이나 불쌍하게 여기는 시선에도 불구하고 언제 올지 모르는 밭 주인을 꿋꿋하게 기다리는 룻의 끈기와 당찬 성격을 보여줍니다. 또한 하루하루 생계를 걱정할 정도로 궁핍한데도 다른 사람의 은혜를 얻지 못하고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방인의 불쌍한 처지도 보여줍니다. 이렇게 룻은 이방인으로서 자신을 받아 들여주지 않는 공동체를 향해 끈질기게 버티고서 있었습니다.

 

롯과 보아스의 만남(8-13)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넓습니다. 인생의 겨울을 맞아 누군가의 밭에서 서성이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밭에서도 하나님의 선대의 손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처한 형편에서 남아 있는 힘을 다하여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호받으러 나가시길 바랍니다.

8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9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하는지라 10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하니 11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12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13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하니라(8-13)

롯에 대한 설명을 들은 보아스는 룻에게 ‘내 딸아’라고 부르며 직접 말을 건넵니다. 룻을 이방인으로 여기지 않고 친척 아이로, 돌봐야 할 가족으로 자신의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다른 밭으로 가기 위해 여기를 떠나지 말고 자신의 여자 일꾼들과 꼭 붙어 있으라고 명령합니다. ‘여기를 떠나지 말라’는 강한 금지 명령입니다. 또 ‘함께 있다’로 번역된 단어는 룻이 시어머니를 ‘붙다’(다바크)라는 단어와 동일하며 ‘꼭 붙어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이어서 자신의 일꾼들에게 룻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말라고 명령하였음을 알려주며 룻을 안심시킵니다. 이것을 보면 밭의 일꾼들이 이삭 줍는 사람들을 거칠게 밀어내거나 폭력을 행사하거나 성희롱하는 경우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삭 줍는 것이 법에는 기록되어 있었지만, 이삭 줍는 사람을 그다지 호의적으로 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일꾼들만 먹을 수 있는 물도 먹을 수 있게 허락합니다. 보아스는 룻을 자신의 보호 아래 있는 식구처럼 챙깁니다.

이런 보아스의 모습에 룻은 감사하지만, 한편으로는 왜 이런 은혜를 베푸는지 질문하며 당황스러운 마음을 표현합니다. 이런 룻의 질문 배경에는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알게 모르게 배제당하고 차별당한 경험이 있습니다. 룻은 보아스가 베푼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왜 이렇게 과한 은혜를 베푸는지 의아한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룻의 경계심은 그가 아직 보아스가 자신의 친척이라는 것을 보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룻이 적극적인 성격이 드러납니다. 그는 자신의 상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질문을 통해 자신의 상황을 적극적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룻의 질문에 보아스는 룻이 시어머니에게 베푼 행동과 고국과 부모를 떠나 이스라엘에 온 것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고 답합니다. 룻이 나오미를 위해 베푼 헤세드가 보아스의 마음을 움직였고, 이제는 그가 룻에게 헤세드를 베풉니다.

보아스는 하나님께서 롯에게 상 주시기를 원한다고 기원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날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의미하는 것으로 시편 기자들은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은혜를 날개 비유로 묘사합니다(시 17:8; 36:7; 57:1; 61:4; 63:7; 91:4). 보아스가 이런 표현을 쓴 것은 룻을 이방인이 아닌 하나님 백성으로 여긴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보아스는 룻이 자신의 고국과 부모를 떠나 이스라엘로 온 행동을 하나님 백성이 된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 은혜를 기원할 뿐만 아니라 자신도 넘치게 은혜를 베풉니다. 이런 보아스의 말에 룻은 감격하고 자신을 위로해주고 기쁘게 하셨다며 감사합니다. 룻의 말에는 그동안 받았던 차별과 멸시에 대한 설움, 하루하루 양식을 구하기 위해 분투했던 생존의 고단함 등이 녹아 있습니다. 이렇게 힘든 삶을 살아가던 룻에게 보아스의 말은 진정한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나 징계를 받았을지라도 회개하고 들이키면 회복의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나오미의 가정을 회복시켜 주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습니다. 이 회복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며,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 안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회복의 섭리에 대해 순종과 성실로 화답하는 성도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구독과 광고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룻기(01-01)



인생을 바꾼 선택한 룻

룻기 1장 15-22절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열심과 노력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면 참 좋겠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해결되지 않는 부분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하나님께 ‘내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라고 하나님 앞에 다가가고, 또 하나님께 오랜만에 돌아갈 때 과연 하나님께 나를 반겨 주실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언제 돌아가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받아 주시는 분입니다.



모압 땅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나오미는 하나님께서 베들레헴에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자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나오미가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나오미는 구 며느리와 함께 출발하였지만 중간에 그들에게 고향으로 새로운 남편과 결혼하라고 설득합니다. 이것이 그가 며느리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의 선의였습니다. 이에 오르바는 돌아가고 룻은 나오미 곁에 남아 있겠다고 매달립니다.



룻의 신앙고백(15-18)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괴롭히는 분이 아니라 위로하시는 분입니다. 인생을 빼앗는 분이 아니라 빼앗긴 인생을 되찾아주시는 분이십니다.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선한 것으로 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사랑은 상식을 넘어선 헌신이고 희생입니다. 우리가 받은 십자가의 사랑은 상식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15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16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18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15-18)


이 단락은 나오미의 권면과 룻의 고백과 나오미의 반응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며느리 룻이 아주 진지하게 결단을 내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오미는 더 이상 남편을 만들어줄 수 없다고 말하면서 간곡하게 설득하지만, 자신 곁에 남은 룻을 향해 나오미는 마지막 설득합니다. 동서인 오르바가 자신의 백성과 신들에게 돌아갔으니 너도 돌아가라는 것입니다(15). 여기서 백성과 신이 같이 언급되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는 각 민족마다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이 각각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이 자신의 고향을 떠나 다른 지역에서 그 민족의 일원으로 살아가게 되면 원래의 신을 버리고 새로운 지역의 신을 섬기는 것이 보편적인 일입니다. 당시 민족의 정체성과 신앙은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오미는 룻에게 모압인으로서 본인의 신앙을 지키며 그곳에서 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 자신을 따라 나서는 것은 그녀의 민족과 그녀가 섬기던 신을 떠나야 하는 것이라고 암시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나오미의 설득에 드디어 룻이 입을 열고 자신의 단호한 결심을 말합니다. 룻의 말이 담긴 16-17절은 다음과 같은 교차 대구를 이룹니다.


A. 이별할 수 없다(돌아가라고 강요하지 말라)
  B. 살아서도 함께(어머니가 가시는 곳에 나도가고)
    X. 신앙고백(당신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B′. 죽어서도 함께(당신이 죽는 곳에서 나도 죽어)
A′. 이별할 수 없다(죽음만이 나와 당신 사이를 갈라놓을 것이다)


이 형식을 보면 룻은 결코 이별할 수 없으며(A) 살아서도 나오미와 살고(B) 죽어서도 나오미와 함께하겠으며(B′) 그렇지 않으면 죽겠다고 맹세한 것(A′)입니다. 이런 룻의 맹세는 어떤 서약보다 강한 사랑과 헌신을 보여줍니다. 룻은 나오미와 살기 위해 동족과 종교도 버리고 나오미의 민족과 신을 따르겠다고 서약합니다(X).


민족과 종교를 바꾸는 것은 자신의 가치관과 정체성을 바꾸는 것과 같기에 가장 어려운 일 하나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법은 이방인과 결혼하지 말라고 명합니다. 이방인과 결혼하게 되면 이방 문화와 종교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룻은 모압인으로서의 정체성과 모압 민족의 신들을 모두 버리고 나오미의 민족인 이스라엘 민족이 되고 나오미의 신인 여호와를 자신의 신으로 섬기겠다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룻의 고백은 매우 특별하고 놀랍습니다. 이 나오미에게 베푼 헤세드는 이런 룻의 고백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 고백의 순간부터 룻은 더는 이방인이 아닌 이스라엘 사람이고 여호와의 백성이 됩니다. 시내산 언약의 핵심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는 것이었습니다(출 19:5-6). 롯은 나오미의 백성을 내 백성이라 고백하고, 나오미의 하나님을 내 하나님이라 고백함으로 이 언약에 동참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룻이 이스라엘 백성으로 인정받고 유다 땅에서 안식을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세의 율법에서 모압 사람은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으며(신 23:3-6), 역사적으로도 모압과 이스라엘이 좋은 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화자도 빈번하게 룻을 모압 여인이라고 언급하며 그녀가 이스라엘 공동체에 들어가는 일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한편 필리스 트리블(Phyllis Trible)은 이런 룻의 선택을 아브라함과 비교합니다. 아브라함은 동행하는 아내도 있고 소유물도 있고 하나님의 부르심과 약속도 있었지만, 룻은 부르심도 약속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필리스는 룻이 여성의 삶을 남성에게 의존하는 세상에서 남자가 아닌 다른 여자를 선택했다고 지적하며, 이스라엘의 모든 기억 속에 이 이상의 과격한 결정은 없다고 평가합니다. 그런데 나오미에 대한 룻의 헌신과 사랑을 시어머니에 대한 며느리의 태도를 보여주는 귀감으로만 편협하게 적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룻의 태도는 한정된 관계가 아니라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 적용되어야 합니다. 룻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지만 나오미를 위해 자발적으로 사랑하고 헌신했습니다. 관습, 문화 혹은 종교적 명령을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 룻이 이렇게까지 나오미에게 매달리고 헌신했습니까? 그 이유는 9-13절의 나오미 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나오미는 자신이 과부로 살았기에 과부가 된 며느리의 사정에 공감하고 더 아파하며 그들이 더 나은 삶 살기를 진심으로 바랐습니다. 시집살이를 호되게 당한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더 심한 시집살이를 시킨다는 말이 있지만, 나오미는 며느리의 고통을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며 걱정하는 드물게 자비로운 인물입니다. 이런 나오미의 사랑이 룻이 나오미 옆에 있겠다고 결심하게 된 근원적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한편, 나오미와의 동행을 고집하는 룻의 모습은 고난 당한 욥을 찾아온 친구들의 모습과 대조를 이룹니다. 욥의 친구들은 처음에는 욥의 처지를 보고 함께 울어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욥의 잘못을 지적하며 욥을 책망하고 괴롭힙니다. 이에 욥은 친구들에게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부탁합니다. 하지만 룻은 나오미가 왜 고난을 당했는지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는지 묻지 않습니다. 그냥 옆에 있을 뿐입니다. 아마도 욥이 그토록 바라던 친구의 모습이 바로 룻이 나오미에게 보여준 모습일 것입니다. 큰 재난을 만난 이웃에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룻이 나오미에게 한 것처럼 함께해주는 일이 고작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헤세드가 아닙니까!


룻과 함께 베들레헴에 도착(19-22)

현실이 어둡다고 해서 너무 빨리 마침표를 찍지 마시길 바랍니다. 누구나 생각하고 싶지 않는 과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과거가 내게 복이 됩니다. 상처가 구원으로 인도합니다. 떵 빈 마음에 솔직히 인정하고 그런 중에도 전능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마음은 놓지 않습니다.

19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20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22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19-22)

드디어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에 도착했고 성읍은 그들로 인해 소란스러웠습니다. 베들레헴 여자들이 그가 정말 나오미냐고 물을 만큼 나오미의 행색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이에 나오미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A. 나오미라 부르지 말라
  B.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섰다.
    X. 내가 풍족하게 나갔으나 비어 돌아왔다.
  B'.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다.
A'.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나오미는 기쁨이란 뜻을 가진 자기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호소합니다. 그가 텅 비어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베들레헴을 떠날 때 아들과 남편을 모두 가진 풍족한 상태였지만 지금은 이들을 모두 잃고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상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룻과 함께 왔지만 룻은 자신을 채워주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그가 돌보고 채워주어야 할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나오미는 자신이 이렇게 텅 비어 괴로운 상태가 된 원인을 여호와께 돌립니다. 그는 반복적으로 전능자가 자신을 괴롭게 하셨다고 말합니다(B, B'). 그는 자신의 텅 빔을 자신의 잘못에 대한 여호와의 징계로 해석합니다(21). 이는 13절의 고백과 같은 맥락입니다. 이는 고난의 이유를 줄기차게 질문하며 고난을 없애달라고 요청하던 욥과 대조됩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불행을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인정합니다. 일말의 희망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나오미의 체념한 모습이 그의 텅 빈 상태를 잘 드러냅니다. 그런데 22절은 나오미가 모압 여인 룻과 왔다고 하고 그때가 추수 때라고 전하며 나오미의 텅 빈 삶을 채워줄 두 가지 희망을 암시하며 귀향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성도들의 출발은 중심되신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데 있습니다. 진정한 신앙인이나 그렇지 않느냐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도,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까? 슬픔과 탄식의 인생이 기쁨의 감사의 인생으로 바뀌었습니다. 삶의 주인이 하나님에게로 옮겨지기를 바랍니다.


구독과 광고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룻기(01-01)


모든 것을 잃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룻

룻기 1장 1-14절


세상 곳곳에서 전쟁의 소식이 들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피해 살아남기 위해 난민으로 고향을 등집니다. 또한, 우리도 살기 위해 날마다 일터라는 전쟁터로 떠납니다. 하지만 몸부림칠수록 몸이 남아나질 않습니다. 평범한 삶을 얻는 것도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에서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까?

 

룻기는 사사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앞에 나온 사사기는 혼란스럽고 잔인하여 하나님의 자비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시대로 막을 내립니다. 룻기는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잃은 한 여인의 비극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룻기의 도입부(1-5)

어려움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결단코 비껴가지 않습니다. 어려운 사정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끝까지 돌보실 언약적 책임을 다하시는 분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지 않고 철저하게 맡기는 믿음의 결단으로 나타납니다. 자기 의지로 행동할 때 실패의 지름길로 달려갈 수 있습니다.

1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2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3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4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5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1-5)

본문은 룻기 전체의 도입부로 장소적 배경, 시간적 배경, 인물들과 초기의 상황이 소개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나오미와 엘리멕렉의 집안이 모압으로 가는 장면입니다.

(1) 시대적 배경(1)

룻기의 시대적 배경은 이스라엘의 역사 중에 사사시대입니다. 그 래서 사사기 다음으로 룻기가 등장한 것입니다. 사사시대와 왕정시대를 연결하는 중간에 아주 짧은 내용이지만, 다리 역할을 하고 있는 책이 룻기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여호수아와 광야 2세대가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복기’가 있습니다. 이 정복 시기가 가장 치열하고 가장 힘들고 고생을 많이 했던 시기입니다. 외적으로 보자면 그렇지만, 그런데 여호수아 시대가 가장 충만한 시대였습니다.

(2) 영적인 배경(1)

사사시대는 타락과 구원이 반복되면서 점점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타락하게 되었고, 사사 시대 마지막에는 사람들이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영적 파산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영적, 도덕적으로 문란한 시대에 떡집이라 불리는 베들레헴에 기근이 들었고, 그곳에 살던 엘리멜렉의 가정이 양식을 구하기 위해 이방 지역으로 떠납니다.

(3) 장소적 배경(2-4)

장소적 배경은 유다 베들레헴인데, 베들레헴은 나지막한 산등성이에 있는 지역으로 곡식과 올리브, 포도들을 재배합니다. 이곳은 옆에 길로하르라는 산이 막고 있기 때문에 강수량은 적은 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가뭄으로 인한 기근에 취약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해 모압 지역은 물이 풍부하고 강수량이 많은 지역이기 때문에 엘리멜렉은 모압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기근을 피해 기업으로 받은 땅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이방 땅에서 품삯이라도 받으며 살기 위해 고향을 떠난 것입니다. 이런 배경은 그들의 이주를 긍정적으로 볼 수 없게 합니다. 사회의 영적 도덕적 혼란은 가난한 자들을 더 가혹한 삶으로 몰아넣습니다. 엘리멜렉은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과 함께 모압 지역에 잠시 거류하러 갔지만,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얼마 후 그곳에서 죽게 됩니다. 그리고 나오미는 두 아들과 이방 땅에 남겨지게 되었습니다.

4절을 보면 나오미는 남편이 죽은 후에도 여전히 모압에서 살았습니다. 장성한 두 아들은 모압 여자와 결혼하는데, 이들이 모압 여자들과 결혼한 것도 이들의 이주를 부정적으로 보게 되는 요소가 됩니다(참조, 삿 3:6-8). 가장도 죽고 기업도 없는 모압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압 여자와 결혼한 것은 현실적 선택이라 볼 수 있습니다. 현지인과의 결혼을 통해 삶의 기반을 만들려는 자구책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선택은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10년쯤 되던 해, 두 아들은 자식도 남기지 못하고 죽고 맙니다. 여기서 10년이 나오미가 모압에서 산 전체 시간인지 아니면 말론과 기론의 결혼 기간인지는 본문에서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아이가 없다는 것이 룻기에서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결혼 기간으로 보는 것이 더 적당할 것입니다. 나오미는 남편도 아들도 잃고 홀로 남겨졌습니다.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 가장과 두 아들이 나름대로 선택을 했지만,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생명을 얻으려고 건너온 땅에서 오히려 생명을 잃었습니다. 이제 나오미만 홀로 남겨겼습니다. 이것이 이들 가정이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온 결과입니다. 이 짧은 도입부는 과연 이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인 이스라엘을 떠난 것이 잘한 선택이었는지 묻습니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나오미와 룻(6-14)

인생이 실패하여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순간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끝나는 법이 없습니다. 절망의 바닥에서 치고 올라올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실패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발견할 눈을 열어주시길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6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7있던 곳에서 나오고 두 며느리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가 8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9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10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하는지라 11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12내 딸들아 되돌아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13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하매 14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6-14)

룻기 전체로 볼 때, 1:6-22은 사건이 시작되는 발단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지금까지 그림자처럼 있던 나오미가 능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1) 나오미가 두 며리와 함께 출발(6-7)

모압 지방에서 살던 나오미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셔서 양식을 주셨다는 고향 소식을 듣습니다. 여호와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보고, 혹시 자신도 그 은혜 한 자락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 같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동안 수동적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던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일어납니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을 떠나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떠납니다. 모압에서 모두 잃고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나오미는 하나님의 은혜의 부스러기라도 얻을 생각으로 고향을 향해 길을 나섰습니다.

7절은 1절과 대조되는 상황으로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떠나왔던 길을 이제 두 과부 며느리와 함께 되돌아갑니다.

(2)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제안(8-9)

그런데 나오미가 함께한 두 며느리에게 각자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제안합니다. ‘어머니의 집’이란 표현은 구약에서 매우 드문 표현으로 대부분은 ‘아버지의 집’이란 표현이 사용됩니다. ‘어머니의 집’은 창세기 24:28과 아가 3:4; 8:2 등에서도 발견되는데, 이 표현이 등장하는 맥락은 성(sexuality), 결혼, 그리고 자신과 타인의 운명을 결정짓는 여성과 관련되는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재혼을 염두에 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집으로 돌아가 새롭게 결혼하라는 의미입니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가 자신과 그들 남편에게 은혜를 베풀었다고 감사하며, 하나님께서 갚아주시길 기원합니다. 당시 문화에서는 젊은 과부에게 가장 좋은 것은 재혼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오미는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그런 선대(헤세드)를 베풀어 주시길 기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방 여자와 헤세드라는 낯선 조합을 만납니다. 이방 여자는 이스라엘 통념상 이방 신을 섬기도록 유혹하는 부정적인 인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이방 여자인 두 며느리가 먼저 헤세드를 베풀었고, 나오미가 그 헤세드를 바탕으로 여호와의 헤세드를 구합니다. 우리 드라마에는 종종 아들을 먼저 보낸 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원망을 퍼붓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지만 나오미는 자신에게 닥친 비극에 함몰되지 않고, 며느리들과 지낸 시간에 대한 감사와 그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런 모습은 그가 인간에 대한 사랑과 너그러움을 가진 성숙한 인물이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3) 고향으로 돌아간 오르바(10-14)

두 며느리는 반드시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 돌아가겠다며 시어머니 나오미의 제안을 강경하게 거절합니다. 여기서 ‘돌아가겠다’는 말은 모압이 고향인 룻과 오르바에게는 적절한 표현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들이 나오미와 깊은 유대감을 갖고 있었기에 나오미의 고향을 자신의 고향처럼 생각하고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이런 유대감은 갑자기 생기거나 의무감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일상이 희로애락을 함께했던 이들의 친밀한 관계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며느리들의 단호한 기질에 나오미가 다시 설득합니다. 온갖 수사법을 사용하여 며느리들이 돌아가게 하려고 노력합니다(11-13).

나오미는 ‘돌아가라’는 명령으로 말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접속사 ‘키’와 ‘감’과 수사의문문을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불가능성을 점점 강화합니다. 나오미는 이런 단계적 설득으로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현실을 확실히 인식시키려고 했습니다.

마지막 단락에서 나오미는 이런 무능함은 여호와의 손이 자신을 치신 것이며, 이런 무능함 때문에 자신이 더 많이 괴롭다고 말합니다(14). 그는 자신의 비극에 며느리들이 같이 휩쓸리는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나오미의 말은 구약의 시형제 결혼 풍습을 전제합니다. 더는 며느리들에게 돌봄과 안식처를 제공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력한 형편 때문에, 나오미는 깊은 고통과 고뇌에 찬 말로 설득합니다.

한편, 여호와의 손이 자신을 치셨다는 나오미의 말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적대시하셨기에 이런 비극이 일어났다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본문은 엘리멜렉 가정의 모압 이주에 대해 명시적으로 부정적 평가하지 않지만, 나오미는 자신에게 닥친 비극이 여호와가 내리신 벌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나오미의 설득에 오르바가 나오미의 말을 따르고 작별 인사를 한 후에 떠납니다. 하지만 룻은 나오미에게 더 강하게 매달립니다(14). 오르바는 나오미의 마음을 충분히 공감하고 나오미의 말에 순종했지만, 룻은 나오미의 말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더욱 나오미와 함께하겠다고 결심합니다. 이것을 보면 오르바는 당시 일반적인 여성의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반면, 룻은 강한 성격의 소유자로 관습에 매이지 않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인물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께 ‘내 인생이 절망입니다’라고 고백할 하나님의 희망을 경험할 것입니다. 자기 상황인식에 정직하면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 승리의 능력을 더 하신 것입니다. 너무 절망하고 근심하면서 그것을 외면하려고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 두려운 마음을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 쏟아놓으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구독과 광고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룻기(01) 


룻기 개론


 

룻기의 명칭

룻기는 남편이 죽은 후, 과부인 시어머니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이주한 모압 여인 룻의 이름을 따서 붙인 명칭입니다. 룻은 다윗 왕(4:18-22) 과 예수님(마 1:5)의 조상이었으므로 이스라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룻기의 저자

룻기의 저자에 대해서 탈무드와 유대 전승에 의하면, 사무엘이 사무엘 상·하, 사사기, 룻기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자에 대해서는 구약 본문이나 구역 외적인 부분에서 자료가 없으므로 룻기의 저자가 누구인지 알기는 어렵습니다.

 

룻기의 저작 연도

저작 연대도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룻기 자체에서 저작 연대에 대한 단서를 찾아내기도 합니다. 모든 주장 중에서 에드워드 J. 영의 견해가 가장 설득력이 있습니다. 곧, 그는 족보에 솔로몬의 이름이 없는 것을 지적하면서, 저작연대가 다윗 시대보다 더 후기였다면 솔로몬의 이름이 빠질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룻기는 다윗 시대에 기록되었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룻기의 기록 목적

룻기의 배경은 사사시대입니다. 베들레헴에 살았던 한 경건한 가정의 슬픔과 기쁨을 통해 그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일단을 조감하고 있습니다.

 

룻기의 특징

첫째, 본서는 사사기의 부록이라 하나(1:1) 사사기와는 오히려 대조적입니다. 사사기가 국가적 또는 사회적 소란상과 패역상을 폭로시킨 데 대해, 본서는 한 가정의 사정을 조용히 전하면서 그 속에 신앙과 윤리의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둘째, 본서는 에스더서와 더불어 여자의 이름으로 된 성경은 단 두 권입니다. 더구나 에스더가 고귀한 신분으로 국민을 구한 데 대해 룻은 천한 서민으로 가정을 구하고, 에스더가 유대인으로 이방인의 왕비가 된 데 대해 룻은 이방인으로 유대인의 아내가 되고, 전유대인이 숭앙하는 다윗왕의 증조모가 됩니다.

세째, 이방인이며 더구나 유대인이 경멸하는 모압 여인 룻이 정절과 효성과 사랑에서 이상적 여인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룻기의 사상

(1) 하나님의 이름

룻기의 주요 등장 인물들은 각자 여호아 하나님에 대한 깊은 믿음을 고백합니다(‘여호와’라는 이름은 룻기에서 18회 나온다).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셔서, 그들을 시내 산으로 이끄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실 때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또 다른 하나님의 이름은 ‘엘 샤다이’입니다(1:20, 21). 창세기에 나오는 ‘엘 샤다이’라는 이름은 인간의 무력함함을 강조하고, 인간의 무기력한 상태를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해 말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2) 구속

‘기업을 무르다·구속하다’라는 히브리어 동사 ‘가알’이 짧은 이 책에서 20회 나옵니다. 이 말은 가족법과 관련되는 용어입니다. 곧 한 가족(친적)의 구성원은 다른 구성원을 보호할 의무를 지고 있었습니다 (1) 가족(친족)의 재산을 다시 무르거나(레 25:25), (2) 종으로 팔린 형제를 자유롭게 해 주거나(레 25:47-55), (3) 또는 자기 친족을 죽인 살인자에게 복수하는(민 35; 신 19:6) 보호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이런 보호자가 된 가까운 친족을 ‘고엘’이라고 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고엘’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3) 헤세드(자비)

‘헤세드’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1:8과 2:20과 3:10에 나오는데, 그 의미를 한 단어로 나타내긴 매우 어렵습니다. 룻기에서 선택,은혜,인애 등의 뜻을 가진 ‘헤세드’는 ‘하나님의 신실한 보호’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나누는 교제의 따스함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헤세드’를 체험한 사람은 그것에 의해서 변화되어야만 합니다. 나오미와 보아스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헤세드’를 베풀었다는 말을 들은 사람은 모압 여인 룻이었습니다(3:10,‘너의 베푼 인애가’).

 

룻기의 구조

1. 서론: 룻기의 배경(1:1-5)

2.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나오미(1:6-22)

3. 추수 밭에서 만난 룻과 보아스(2:1-23)

4. 타작 마당의 보아스에게 간 룻(3:1-18)

5. 룻과의 결혼 문제를 해결한 보아스(4:1-12)

6. 결론: 가득 채워진 나오미(4:13-17)

7. 후기 : 다윗의 족보(4:18-22)


구독과 광고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