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짙게 깔린 밤, 유대인의 지도자 니고데모가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사회적 체면과 신학적 고민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던 그가 던진 질문들에 대해, 예수는 기독교 신앙의 정수이자 인류 역사를 관통하는 가장 위대한 선언으로 답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21절에 이르는 이 짧은 텍스트는 단순한 교리의 나열이 아니라, 길을 잃은 현대인들에게 던지는 강렬한 '사랑의 초대장'이자 '존재의 보고서'입니다.
사랑, 그 불가해한 시작점
그 초대장의 첫 문장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여기서 ‘세상(Cosmos)’은 단순히 아름다운 자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이기심으로 얼룩진, 스스로를 구원할 힘을 상실한 ‘망가진 현장’을 의미합니다. 그 결핍의 세계를 향해 하나님께서 던진 승부수는 정죄가 아닌, 자신의 가장 소중한 독생자를 내어주는 투신이었습니다. 이는 계산기를 두드리는 이성적 사랑이 아니라, 대가 없이 쏟아붓는 불가해한 낭비이며 전적인 헌신입니다.
정죄가 아닌 구원을 향한 목적
많은 이들이 기독교를 ‘심판과 정죄의 종교’로 오해하곤 합니다. 하지만 17절은 그 오해를 단번에 불식시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복음의 본질은 파멸이 아닌 ‘회복’에 있습니다. 마치 치명적인 질병에 걸린 환자에게 의사가 찾아온 목적이 사망 선고를 내리기 위함이 아니라 치료하기 위함이듯, 예수의 오심은 우리를 고발하기 위한 서류가 아니라 우리를 살리기 위한 생명줄입니다. 우리가 삶의 무게에 눌려 스스로를 자책하고 세상의 잣대로 자신을 심판할 때, 성경은 오히려 우리를 향한 구원의 손길이 이미 뻗쳐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빛과 어둠, 그리고 인간의 선택
이어지는 구절은 인간 내면의 날카로운 모순을 조명합니다.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는 지적입니다. 우리는 왜 빛보다 어둠을 편안해할까요? 어둠 속에서는 나의 부끄러움과 위선, 추한 욕망이 감추어지기 때문입니다. 빛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나의 민낯을 온전히 드러내야 한다는 두려움을 동반합니다.
결국, 성경이 말하는 심판은 신이 내리는 가혹한 형벌이라기보다, 빛을 거부하고 어둠 속에 머물기로 결정한 인간의 '자발적 선택'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나아옵니다.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가 결국 예수님의 장례식에 향품을 가지고 나타나 ‘빛의 아들’로 변화되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빛은 우리의 허물을 태워 없애는 소멸의 불이 아니라, 상처를 어루만지고 새살이 돋게 하는 치유의 광선입니다.
결론: 당신은 지금 어디에 서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현대판 니고데모들이 많습니다. 종교적 배경도 있고 성경 지식도 해박하지만, 정작 ‘생명의 생동감’을 잃어버린 채 밤거리를 헤매는 영혼들입니다.
구원의 문은 지식의 열쇠로 열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들려진 십자가를 바라보는 믿음의 눈으로 열립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단 한 걸음의 용기입니다. 나를 가리고 있던 어둠의 외투를 벗어 던지고, 나를 향해 쏟아지는 그 생명의 빛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입니다. 어둠의 밤을 지나 찬란한 하나님 나라의 아침을 맞이하십시오. 그 사랑을 신뢰하며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가 회복해야 할 신앙의 본질이자 삶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어둠이 짙게 깔린 예루살렘의 밤, 한 남자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의 이름은 니고데모. 당대 유대 사회의 최고 엘리트 조직인 산헤드린 공회의원이며, 존경받는 바리새인이자 율법의 스승입니다. 모든 것을 가진 듯 보이는 그가 왜 남들의 눈을 피해 이 밤에 젊은 랍비 예수를 찾아왔겠습니까? 요한복음 3장은 이 비밀스러운 만남을 통해 인류가 직면한 가장 본질적인 질문과 그에 대한 하늘의 해답을 제시합니다.
지식의 한계를 넘어선 갈급함
니고데모는 예수를 향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 부르며 예우를 갖춥니다. 그는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들을 보며 지성적인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그의 지성적 접근을 단번에 뛰어넘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절)
여기서 ‘거듭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노덴’은 ‘다시’라는 뜻과 동시에 ‘위로부터’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이를 생물학적인 재탄생으로 오해하여 “어머니 모태에 다시 들어갔다 날 수 있느냐”며 반문합니다. 이는 땅의 문법으로 하늘의 언어를 해석하려 할 때 발생하는 전형적인 한계입니다. 우리 역시 신앙을 도덕적 수양이나 지적 동의로만 여긴다면, 니고데모가 느꼈던 그 막막함 속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물과 성령의 변화 역사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절) 물은 씻음과 회개를, 성령은 새로운 생명의 창조를 의미합니다. 거듭남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으로 성취하는 ‘개선’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일어나는 ‘근본적인 재창조’입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되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듯, 성령의 역사는 인간의 통제 밖에 있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흔적이 남듯, 성령으로 난 사람은 삶의 방향과 목적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종교적 의무감에 시달리던 삶에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귐이 있는 삶으로의 전이, 이것이 바로 거듭남의 신비입니다.
들린 놋 뱀과 십자가
니고데모가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구약의 민수기 사건을 인용하십니다.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자들이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보았을 때 살았던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는 구원의 예표입니다.
이 대목에서 성경 전체의 요절인 요한복음 3장 16절이 선포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구원은 정죄하기 위함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 비극의 본질입니다. 하지만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나아옵니다.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가 결국 예수님의 장례식에 향품을 가지고 나타나 빛의 아들로 변화되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의 고백
본문의 마지막 부분(22-25절)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유대인 사이의 정결 예식 논쟁을 다룹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께로 몰려가는 것을 시기하는 제자들에게 요한은 위대한 고백을 남깁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30절)
이는 거듭난 자가 가져야 할 마땅한 태도입니다. 거듭남의 증거는 내가 주인공이 되는 삶이 아니라, 내 삶의 보좌를 그리스도께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신앙의 성숙은 나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이 더욱 선명해지는 과정입니다.
결론: 당신은 지금 어디에 서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현대판 니고데모들이 많습니다. 종교적 배경도 있고, 사회적 지위도 있으며, 성경 지식도 해박하지만 정작 ‘생명의 생동감’을 잃어버린 채 밤거리를 헤매는 영혼들입니다.
거듭남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하늘의 문은 지식의 열쇠로 열리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보는 믿음의 눈으로 열립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성도들이 낡은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성령의 바람을 따라 새 생명의 항해를 시작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어둠의 밤을 지나 찬란한 하나님 나라의 아침을 맞이하십시오.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전’이라는 단어는 각별합니다. 구약의 성막에서부터 솔로몬의 성전,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모이는 예배당에 이르기까지, 성전은 늘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통로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2장 13-25절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가 가진 성전 중심적 신앙에 거룩한 충격을 던집니다.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 성전을 찾으신 예수께서 보여주신 ‘성전 정화’ 사건은 단순히 종교적 부패를 꾸짖는 도덕적 훈계를 넘어, 신앙의 본질적 패러다임을 바꾸는 선언이었습니다.
‘집’을 잃어버린 성전의 비극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큰 명절입니다. 전국 각지에서, 심지어 이방 땅에서 수많은 유대인이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마주하신 성전의 풍경은 경건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 돈 바꾸는 사람들이 성전 뜰을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제사를 돕는다는 명목하에 이루어진 이 경제 활동은 어느덧 ‘편의’라는 이름으로 본질을 가려버렸습니다. 성전의 뜰은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사꾼들의 외침과 짐승의 배설물 냄새로 가득 차 정작 기도의 자리는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채찍을 휘둘러 짐승들을 쫓아내시고 돈 바꾸는 상들을 엎으셨습니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뼈아픈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세운 교회의 시스템, 봉사의 분주함, 신앙적 전통이 혹시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를 밀어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본질을 잃어버린 성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집이 아닌, 인간의 편익과 이익을 대변하는 ‘장터’에 불과함을 예수님은 경고하고 계십니다.
육체라는 참된 성전의 시작
예수님의 파격적인 행동에 유대인들은 당황하며 묻습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그들은 예수님이 가진 권위의 출처를 눈에 보이는 기적으로 증명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더욱 충격적이었습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당시 헤롯 성전은 46년 동안이나 지어지고 있던 장엄한 건축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이 성전은 민족의 자부심이자 신앙의 요새였습니다. 그들에게 “성전을 헐라”는 말은 신성모독과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기록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21절)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돌 건물로서의 성전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만나는 중보의 자리는 예루살렘의 화려한 건물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죄를 씻기 위해 십자가에서 허물어지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영원한 생명의 성전으로 일어서실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중심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
본문은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 신앙의 가장 깊은 곳을 터치합니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의 이름을 믿었지만, 예수님은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기적을 보고 환호했습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해 줄 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은 겉으로 드러나는 열광 뒤에 숨겨진 인간의 가변성과 자기중심적 욕망을 간파하셨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화려한 종교적 퍼포먼스나 일시적인 감정적 동요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성전을 짓고 있습니까? 웅장한 건축물, 세련된 찬양, 체계적인 교육 프로그램도 귀하지만, 주님이 진정으로 찾으시는 성전은 주님의 부활 생명을 담고 있는 우리의 깨끗한 심령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했듯, 우리가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고전 3:16)임을 기억할 때, 우리의 일상은 비로소 참된 예배의 현장이 됩니다.
나가며: 헐어야 할 것과 세워야 할 것
요한복음 2장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요구했습니다. 첫째, 내 안에 자리 잡은 ‘장사하는 집’의 모습, 즉 하나님을 이용해 내 욕망을 채우려 했던 가짜 성전을 허무는 일입니다. 둘째, 죽음을 이기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의 참된 성전으로 모시고, 매 순간 그분과 동행하는 예배자로 서는 것입니다.
건물이 아닌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두는 신앙, 겉모습이 아닌 중심을 보시는 주님 앞에 정직하게 서는 신앙. 이 사순절의 여정 가운데 우리가 회복해야 할 신앙의 본질입니다. 무너뜨려야 할 장터는 무너뜨리고, 사흘 만에 다시 사신 주님의 생명으로 우리 마음의 성전을 다시 세우는 결단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인생은 흔히 잔치에 비유되곤 합니다. 기쁨과 환희, 축복이 가득한 순간을 꿈꾸며 우리는 각자의 삶이라는 잔칫상을 정성껏 차려냅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잔치의 절정에서 우리는 예상치 못한 ‘결핍’을 마주하곤 합니다. 요한복음 2장에 등장하는 가나의 혼인 잔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의 실존을 관통하는 묵직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잔치의 끝에서 마주한 결핍
유대인의 혼인 잔치는 보통 일주일간 지속됩니다. 그 기쁨의 핵심은 ‘포도주’였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단순히 음료가 부족해진 사건을 넘어, 잔치의 흥이 깨지고 혼주에게는 지울 수 없는 수치와 낭패가 닥쳤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네 삶도 이와 닮아 있습니다. 건강, 재정, 관계, 혹은 열정이라는 포도주가 넉넉할 때는 모두가 친구이고 모든 것이 낙관적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예고 없이 ‘포도주가 떨어지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가장 화려해야 할 때 찾아온 결핍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들고, 인간적인 계산과 노력으로는 더 이상 상황을 되돌릴 수 없음을 깨닫게 합니다.
문제의 발견과 신뢰의 의탁
잔치의 위기를 가장 먼저 감지한 것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였습니다. 그녀는 포도주가 떨어진 상황을 보고 즉시 예수께 나아가 사실을 고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마리아의 태도입니다. 그녀는 예수께 “이 문제를 이렇게 해결해 달라”고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들에게 포도주가 없다”는 결핍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주님 앞에 내어놓았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 우리가 설계한 해결책을 승인이나 결제해 달라고 조르곤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믿음은 내 삶의 결핍을 주님 앞에 정직하게 노출하고, 그분께서 일하실 여백을 남겨두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아들 예수가 단순한 인간을 넘어, 이 결핍을 채우실 능력이 있음을 신뢰했습니다.
상식을 뛰어넘는 ‘비움과 채움’
예수께서는 하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그곳에는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위한 돌항아리 여섯이 있었습니다. 하인들은 그 명령이 얼마나 비논리적인지 따지지 않았습니다. 포도주가 필요한 상황에서 물을 채우라는 명령에 그들은 ‘아귀까지’ 물을 가득 채웠습니다.
순종은 ‘이해’가 될 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권위’를 믿을 때 일어납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의 정점은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는 말씀에 순종했을 때입니다. 항아리 속의 물이 언제 변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발걸음을 뗐을 때, 비로소 기적이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나중 포도주가 더 좋은 이유
연회장은 나중에 나온 포도주를 맛보고 감탄하며 신랑에게 말합니다.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세상의 원리는 ‘점점 쇠해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화려하고 달콤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빛이 바래고 가치가 떨어집니다. 그러나 주님이 개입하시는 인생은 다릅니다. 주님은 우리의 결핍을 재료 삼아 이전보다 ‘더 좋은 것’을 만들어내십니다. 기독교 신앙은 결코 과거의 영광을 추억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나중 포도주가 더 좋다”는 고백처럼,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주님 안에서 더욱 풍성해질 것을 기대하는 소망의 종교입니다.
글을 맺으며
가나의 혼인 잔치는 예수께서 행하신 ‘첫 번째 표적’입니다. 요한은 이를 통해 예수께서 만물의 주인이시며, 우리 삶의 결핍을 창조적인 풍요로 바꾸시는 분임을 선포합니다.
지금 당신의 인생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져 낙심하고 계십니까? 주님은 바로 그 결핍의 자리에 초대받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의 빈 항아리에 말씀의 물을 채우십시오. 상식을 내려놓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나아가십시오. 세상이 줄 수 없는, ‘가장 좋은 포도주’가 당신의 삶에서 빚어질 것입니다.
가나의 기적은 2천 년 전의 사건으로 박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도 주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순종의 걸음을 내딛는 모든 이들에게,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반전의 은총’은 현재진행형으로 역사할 것입니다.
인생은 길을 찾는 과정이라기보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갈구하는 갈증의 연속에 가깝습니다. 요한복음 1장 35-51절까지 이어지는 제자들의 부름 이야기는 바로 그 ‘갈증’에서 시작됩니다. 세례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의 뒤를 밟기 시작했을 때, 예수님은 뒤를 돌아보며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십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이 질문은 2천 년 전 유대 광야를 걷던 이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복잡한 도심 속에서, 혹은 고요한 침묵 속에서 각자의 삶을 꾸려가는 우리 모두에게 던져지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성공을 구합니까, 위로를 구합니까, 아니면 내 존재의 근원을 확인받고 싶어 합니까? 제자들은 그 질문에 "선생님, 어디 계십니까?"라고 답합니다. 그들은 예수의 지식이 아니라 그의 삶이 머무는 자리를 궁금해했습니다. 이에 주님은 복잡한 설명 대신 짧은 초대를 건네십니다. “와서 보라(Come and See).”
마주침, 그 전염되는 신비
신앙은 논리적 설득으로 완성되는 체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마주침’의 신비입니다. 안드레는 예수와 함께 머물렀던 단 하루의 경험만으로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꿀 확신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확신은 곧장 곁에 있는 사람에게 흘러갑니다. 그는 형제 시몬을 찾아가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외칩니다.
흥미로운 것은 시몬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시선입니다. 예수님은 시몬을 보자마자 그의 본질과 미래를 꿰뚫어 보십니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베드로)라 하리라.” 주님은 우리의 흔들리는 현재 너머에 있는 ‘반석’ 같은 가능성을 먼저 보시는 분입니다. 누군가를 주님께 인도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향한 주님의 이 따뜻하고도 예리한 시선 속으로 그를 밀어 넣어주는 일입니다.
편견의 담장을 넘는 "와서 보라"
하지만 모든 만남이 순탄한 것만은 아닙니다. 빌립의 인도를 받은 나다나엘은 냉소적으로 반응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그의 냉소는 합리적이었습니다. 나사렛은 작고 보잘것없는 동네였고, 메시아가 그런 곳에서 나올 리 없다는 지식은 당시의 상식이었습니다.
이때 빌립은 나다나엘과 신학적 논쟁을 벌이지 않습니다. 그저 예수님이 하셨던 그 말을 되풀이할 뿐입니다. "와서 보라."진리는 말의 성벽 안에 갇혀 있지 않고, 직접 마주하는 현장에 있다는 것을 빌립은 직관적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결국 나다나엘은 예수를 만납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깨닫습니다. 자신이 예수를 발견하기 훨씬 전부터, 예수께서 이미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던 자신을 보고 계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무화과나무 아래는 율법을 묵상하고 하나님을 찾던 고독한 기도의 장소였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가장 깊은 고독과 진심 어린 몸부림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찾기 전에, 그분이 먼저 우리를 주목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열린 하늘, 일상이 기적이 되는 지점
이 만남의 대서사시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는 장엄한 약속으로 갈무리됩니다. 이는 구약의 야곱이 꿈꾸었던 하늘 사닥다리가 이제 예수라는 인격을 통해 이 땅에 실재하게 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저 괜찮은 스승을 만나러 갔을 뿐이지만, 그들이 도착한 곳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지점'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고민, 관계의 어려움,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안고 주님의 초대인 "와서 보라"에 응답할 때, 우리는 닫혔던 우리 삶의 하늘이 열리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신앙은 거창한 구호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늘 나에게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으시는 주님의 음성에 정직하게 반응하는 것이며, "와서 보라"는 초대에 기꺼이 내 시간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당신의 '무화과나무 아래'는 어디입니까? 주님은 지금도 그곳에서 당신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통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와서 보라"는 소망의 메시지가 전달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찬란한 마주침의 신비가 오늘 당신의 삶에 가득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이름이 남겨지길 원하는 시대를 삽니다. 내가 무엇을 이루었는지, 내가 얼마나 가치 있는 사람인지를 증명하기 위해 날마다 보이지 않는 무대 위에서 안간힘을 씁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의 한 인물이 그 무대의 화려한 조명과 시끄러운 세상을 스스로 끄고 어두움의 광야 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나를 부정함으로 시작되는 진실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이 광야의 요한에게 찾아온 사람들은 묻습니다. "네가 누구냐?" 이 질문은 우리 삶에 끊임없이 던져지는 유혹의 목소리와 닮아 있습니다. "너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냐? 네가 메시아처럼 세상을 바꿀 수 있지 않느냐? 네가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느냐?"
하지만 요한은 망설임 없이 답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요 1:20)
그는 자신이 '무엇인가'를 증명하기보다 '무엇이 아닌가'를 고백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누구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수많은 수식어를 붙입니다. 직함, 재산, 경력... 그러나 요한은 그 모든 껍데기를 벗겨내고 오직 진리 앞에 선 단독자로서의 자신을 마주합니다. 나를 향한 과장된 기대를 내려놓는 순간, 비로소 참된 평안이 시작됩니다. 내가 하나님이 아님을 인정할 때, 비로소 내 삶에 하나님의 자리가 마련되기 때문입니다.
‘소리’라는 숭고한 운명
정체가 무엇이냐고 다그치는 이들에게 요한은 자신을 "소리"라고 정의합니다(23절).
소리는 참 묘한 존재입니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즉시 공기 중으로 흩어져 사라져야만 제 역할을 다한 것이 됩니다. 만약 소리가 공중에 머물러 자기를 고집한다면, 다음에 올 진짜 '말씀'은 들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의 등장을 알리는 짧은 예고편임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을 수 있을까요? 내 이름이 기억되기를 바라는 욕망을 넘어, 나라는 존재를 통과한 '예수의 사랑'만이 타인의 가슴에 남기를 바라는 마음. 내가 사라진 자리에 그분의 온기만 머물기를 바라는 그 '소리의 영성'이 그리워지는 계절입니다.
"보라", 시선의 혁명
요한은 예수를 향해 손가락을 치켜들며 외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29절)
이 고백은 시선의 혁명입니다. 요한은 사람들의 시선을 자기에게서 예수께로 옮겨놓습니다. 그는 예수를 위대한 왕이 아닌, '어린 양'으로 소개합니다. 우리의 죄와 고독, 말 못 할 상처를 묵묵히 어깨에 메고 골고다로 걸어가실 그 연약하고도 강인한 사랑의 실체를 본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보며 살고 있습니까? 내 결핍과 상처, 혹은 남들의 화려한 겉모습만 바라보느라 우리 곁을 지나시는 '어린 양'을 놓치고 있지는 않나요? 요한의 외침은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너 자신을 보지 말고, 너의 연약함을 대신 지고 가는 그분을 보라."
하늘이 머무는 자리
요한은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 위에 '머무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합니다(32절). 성령은 잠시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라, 그분 위에 깊이 뿌리내린 임재였습니다.
우리의 삶이 소란스러운 이유는 무언가에 깊이 머물지 못하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요한이 광야의 고독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이유는, 자신의 사명이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이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 오셨음을 확신하며 자신의 사역을 기쁘게 마감합니다.
글을 맺으며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다 사라졌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비극적인 조연의 삶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신랑의 음성을 듣는 신랑 친구의 기쁨이 그에게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세상은 우리에게 "네가 누구냐"고 묻습니다. 그 질문 앞에 "나는 그저 소리일 뿐입니다. 내 곁을 지나는 어린 양을 보십시오"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우리의 광야는 더 이상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작아질수록 그분이 커지며, 내가 사라질수록 사랑은 선명해집니다. 그 거룩한 비움의 신비가 당신의 오늘 하루에 잔잔한 평화로 깃들기를 소망합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말이 떠돕니다. 어떤 말은 사람을 살리고, 어떤 말은 비수가 되어 가슴을 후빕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를 통틀어 단 하나의 ‘말씀’을 꼽으라면, 우리는 주저 없이 요한복음 1장의 서두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곳에는 시간이 시작되기 전부터 계셨던 한 존재가, 차가운 육신의 옷을 입고 우리 곁으로 걸어 들어온 경이로운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침묵을 뚫고 나온 첫 마디, “생명”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이 말씀은 고요한 철학적 사유가 아니었습니다. 만물을 존재하게 한 역동적인 에너지였으며, 어둠을 가르고 솟구친 빛이었습니다. 요한은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일상은 때로 생명력을 잃은 무채색과 같습니다. 반복되는 실패, 관계의 단절, 그리고 죽음이라는 실존적 공포 앞에서 인간의 언어는 무력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선포합니다. 그 어떤 어둠도 이 빛을 이길 수 없다고 말입니다. 우리 안에 꺼지지 않는 생명의 불씨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참 빛’이신 그분이 우리 영혼의 문을 두드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낯선 방문객, 그리고 영접의 용기
가장 슬픈 구절은 11절입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창조주가 피조물의 세상에 손님처럼 찾아왔지만,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기득권의 성벽을 쌓느라, 혹은 먹고사는 일의 분주함에 매몰되어 정작 생명의 주인을 문밖에 세워둔 셈입니다.
하지만 신앙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그 낯선 방문객을 나의 삶으로 모셔 들이는 ‘영접’의 용기입니다. 요한은 이를 ‘권세’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혈통으로 쟁취하는 자격증이 아닙니다. 그저 그분의 이름을 믿고 마음의 빗장을 푸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이 권세는 세상의 권력과는 다릅니다. 이는 무너진 자를 다시 일으키고, 증오를 사랑으로 바꾸며, 죽음 너머의 영원을 바라보게 하는 하늘의 능력입니다.
우리 사이에 텐트를 치신 하나님
14절은 이 에세이의 절정이자 기독교 신앙의 심장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여기서 ‘거하다’는 말은 ‘장막을 치다’라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이 죄로 얼룩진 인간의 동네에 당신의 텐트를 나란히 치셨다는 사실은 얼마나 파격적인가요? 그분은 고결한 상아탑에 앉아 훈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겪는 배고픔, 외로움, 배신감, 그리고 육체의 고통을 고스란히 겪으시며 우리 곁에서 숨 쉬십니다. “나도 안다, 나도 겪었다”라고 말씀하시는 그분의 임재야말로 우리가 고난 속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은혜라는 이름의 파도
율법은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묻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그분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를 보게 합니다. 요한은 이를 “은혜 위에 은혜”라고 묘사했습니다. 이는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한 번의 은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겹겹이 쌓이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분을 나타내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 그분의 눈물을 통해, 그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을 봅니다. 그 얼굴은 심판자의 얼굴이 아니라, 돌아온 탕자를 안아주시는 자애로운 아버지의 얼굴입니다.
글을 맺으며
요한복음 1장 1-18절은 단순한 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도 계속되는 초청장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그분은 오늘도 우리 삶의 좁은 골목길에 텐트를 치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독자 여러분, 오늘 하루 당신의 마음 한 켠을 그분께 내어드리면 어떨까요? 세상의 소란을 잠재우고 내 안에 찾아오신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비로소 ‘충만한 은혜와 진리’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빛은 이미 와 있고, 어둠은 결코 그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오래전 역사를 다룬 영화들을 보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장군을 ‘개선장군(凱旋將軍)’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부러움 속에 당당히 말 위에 앉아 환호를 받으며 성에 들어갑니다. 참으로 장엄하고 아름다운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많은 이들의 환호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습은 개선장군과 같지 않았습니다. 화려하지 않고, 오히려 겸손하고 초라해 보이는 입성이었습니다.
본문은 나사로가 사는 곳에서 최후의 만찬을 마친 다음 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시는 장면을 소개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리와 제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은 흰 군마가 아니라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가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눈으로는 만왕의 왕이 나귀를 타고 입성한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환영 속에 입성하신 예수님(12-13)
어떤 특별한 존재감을 지닌 인물이 나타나거나, 시대의 흐름을 바꿀 만한 중대한 사건이 눈앞에 펼쳐질 때면,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 깊이 간직했던 간절한 희망과 미래에 대한 부푼 기대를 오롯이 그 대상에게 투영하며,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폭발적인 열광과 압도적인 지지를 쏟아붓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집단적인 열정은 사회 전체에 엄청난 활력과 추진력을 불어넣으며 긍정적인 변화의 불씨를 지필 수 있는 강력한 에너지원이 될 수 있습니다.
12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13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12-13)
지난 본문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것이 예수님의 장례를, 곧 예수님의 고난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는 그 고난의 현장이자 마지막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장면입니다.
(1) 예루살렘 입성(12)
마리아가 향유를 부은 이튿날,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저자가 이 사건을 마리아의 행위와 연결한 이유는, 마리아가 향유를 부어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했듯이 이제 예수님께서 실제로 그 죽음의 현장인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심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을 맞이한 무리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이미 예수님께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11:55-56), 특히 나사로의 부활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더욱 열렬히 영접했습니다(17-18). 그들은 예수님께서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나아가 환영했습니다.
(2) 입성을 환영한 무리(13)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모였던 무리는 예수님께서 입성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나가 “호산나”를 외치며 맞이했습니다. 초막절에는 시편 118편을 낭송할 때마다 ‘호산나’라는 말이 나오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전통이 있었는데, 이 무리 역시 같은 방식으로 예수님을 환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시편 118:25-26을 따라 히브리어로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뜻의 환호성을 외치며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본래 시편에서 순례자들을 가리키던 “주의 이름으로 오는 이”라는 표현을, 이들은 예수님께 적용하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오시는 분’(1:27; 6:14; 11:27)으로 소개하며, 이는 특별히 하나님의 이름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는 칭호가 덧붙었습니다. 저자는 이 고백을 제자들이 뒤에 가서야 깨달았다고 기록합니다(16). 그러나 빌라도의 심문에서 드러나듯이(18:36), 예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속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런 오해를 막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때로 무리를 피하셨습니다(6:15).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도, 무리가 그분을 단순히 정치적 왕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하시려는 뜻이었습니다.
나귀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14-15)
때로는 세상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화려함이나 강력한 권위와는 전혀 다른, 소박하고 겸손한 모습 속에 진정한 의미와 중요한 가치가 숨겨져 있을 때가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외형적인 것에만 집중하다 보면, 그 안에 담긴 깊은 본질과 진정한 리더십의 가치를 놓치기 쉽습니다. 중요한 변화나 통찰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때로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소박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14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15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14-15)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세상의 왕들이 흔히 보여주던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과는 달리 지극히 겸손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비록 당시 수많은 군중이 그분을 향해 환호성을 지르며 열광했지만, 그 환호 속에는 그분께서 오신 참된 의미와 깊은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면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 속에 있음을 분명하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1) 나귀를 선택하신 예수님(14)
당시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나 세상의 왕들이 화려하게 장식된 백마를 타고 성대한 환영 속에서 위풍당당하게 입성했던 것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사람들이 초라하게 여길 만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셨습니다. 이는 세상적인 권위와 명예를 내려놓고 자신을 지극히 낮추신 겸손한 왕의 모습이었으며, 세상의 통치자들이 군림하려 했던 것과 달리 오직 자기 백성을 섬기기 위해 오셨음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역사적인 입성이었습니다.
(2) 예언대로 오신 예수님(15)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가장 가까운 제자들조차 그 모습의 참된 의미를 즉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비로소 그들은 나귀를 타고 오신 것이 이미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예언된 말씀의 성취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스가랴 9장 9절에 기록된 것처럼,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예수님께서는 이 예언대로 겸손한 왕의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왕권은 단순히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것으로만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비록 마리아가 발에 향유를 붓는 의식이 이미 왕으로서의 등극을 암시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십자가에 죽으심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비로소 완벽하게 왕권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너무나도 평범했습니다. 베들레헴 마구간의 가장 낮은 곳에서 어린아이로 오셨고, 당시 천하게 여겨지던 갈릴리 지역에서 목수의 아들로 성장하셨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메시아의 조건이 될 수 없는 이러한 낮은 모습들은, 사실 세상의 낮고 천한 사람들을 친히 찾아오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그분의 지극한 사랑과 헌신이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영광 후에 비로소 열리는 영안(16-19)
우리는 삶의 중요한 순간이나 새로운 변화의 본질적인 가치를 그 순간에는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모든 결과가 드러난 후에야 비로소 그 사건이나 가르침의 깊은 의미와 중요한 의도를 깨닫게 되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이는 즉각적인 판단보다는 성찰과 인내의 시간이 중요하며, 멀리 내다보는 지혜로운 시각이 필요함을 시사합니다.
16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17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거한지라 18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19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찌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하니라(16-19)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나타내 보이신 행동과 그 안에 담긴 깊은 의미를 처음에는 온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비로소 그들은 비로소 모든 퍼즐이 맞춰지듯 그 모든 상황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제서야 스가랴 9장 9절의 말씀이 바로 예수님을 가리켜 기록된 예언이었음을 명확히 인식하였고, 당시 사람들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라 외치며 예수님을 환영했던 그 외침이 얼마나 큰 의미를 지녔는지도 깨닫게 된 것입니다.
(1) 요한의 해설(16-18)
요한복음 저자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지니는 참된 의미를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비로소 깨달았다고 강조합니다(16). 이러한 깨달음은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것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7장 39절에서 이미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는 기록은 예수님의 영광 이후에 성령이 임하심을 예고하며,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요한복음 20:22).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기억나게 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며(요한복음 14:26), 궁극적으로 그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중요한 역할을 하셨습니다(요한복음 16:13). 그러므로 제자들은 성령의 조명하심 아래에서야 구약 스가랴 9장 9절의 말씀이 바로 예수님께 적용되는 예언이며, 예수님께서 평화와 겸손의 왕으로 이스라엘에 오셨음을 명확하게 깨달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셨다는 사실은 성령께서 확증해주신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함께 요한은 당시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그토록 열렬히 환영했던 이유도 설명해 줍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실 때 그 자리에 함께했던 사람들이 나사로의 부활을 직접 증언하였고, 또한 유월절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온 사람들이 그 놀라운 표적에 대해 이미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예수님께 자신들을 구원해 달라고 간청하며 ‘이스라엘의 왕’으로 불렀던 배경에는, 죽은 나사로에게 생명을 다시 주신 이 엄청난 표적이 지니는 의미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은 마르다의 고백(요한복음 11:27)처럼, 예수님께서 바로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따라서 무리는 예수님을 죽은 자까지도 살릴 수 있는 전능하신 분으로, 자신들을 억압과 고난에서 구원해 주실 그리스도로 이해했던 것이며, 그렇기에 그분을 ‘이스라엘의 왕’이라 부르며 구원을 간청했던 것입니다(13).
(2) 바리새인들의 반응(19)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사건으로 인해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모의하며 깊은 불안에 휩싸였습니다(요한복음 11:47-48). 그들의 두려움은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라는 말 속에 그대로 드러납니다(19). 이 불안은 이미 드러났던 모습으로, 그들은 예수님을 수배하였고(요한복음 11:57), 심지어 나사로까지 죽이려 했습니다(10-11). 결국 11:47에서 자책하던 불안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으로 자신들의 예상이 현실이 되자 절망으로 바뀌었습니다. 19절은 예수님을 박해하려 했던 그들의 수고가 헛된 일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일은 그 누구도, 어떤 수단으로도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행 4:27-28). 비록 바리새인들의 입술에서 나온 말은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모이는 것을 본 한탄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예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실 사명을 이루실 것임을 증언하는 고백이 되었습니다(요한복음 3:16-17). 그러나 당시에는 누구도 그 뜻을 깨닫지 못했고, 예수님 홀로 철저한 무지와 반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이사야 53:3, 요한복음 12:23-24).
예수님께 대한 열렬한 환호 속에서도 제자들과 군중은 그분의 진정한 왕권을 즉시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성령을 보내주신 후에야 모든 것이 분명해졌으며, 구약의 예언처럼 겸손과 희생으로 백성을 섬기러 오신 진정한 왕이셨음이 드러났습니다. 심지어 반대하던 이들조차 온 세상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 안에서 이 영광스러운 왕을 온전히 이해하고 따라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은 모든 것을 평가할 때 효율성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능률적이면 가치 있어 보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금세 평가절하되곤 합니다. 그러나 효율성으로는 결코 평가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때로는 낭비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계산하지 않고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기에, 세상의 눈에는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교회에서 수고하고 헌신하는 것도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가치 없는 일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 우리의 모든 것을 드려도 결코 아깝지 않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유월절 엿새 전에 나사로의 집을 방문하신 사건을 기록합니다. 그 자리에서 마르다는 봉사로 섬기고, 마리아는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닦으며 헌신적인 사랑을 드렸습니다. 가룟 유다는 그것을 낭비라며 불평했지만, 예수님은 그녀의 행위를 장례를 준비하는 의미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이 일로 많은 유대인들이 나사로의 부활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대제사장들은 예수님과 함께 나사로까지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향유를 붓는 마리아(1-3)
참된 사랑은 계산하지 않고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헌신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때로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 낭비처럼 보일 수 있지만, 진심에서 나온 사랑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또한 사랑과 섬김은 말이 아니라 실제 행동을 통해 드러나며, 그 모습은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변화시킵니다. 결국 진정한 가치는 효율성이나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과 태도에 있으며, 사랑으로 드려진 헌신은 시간이 지나도 향기처럼 오래 남게 됩니다.
1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2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쌔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1-3)
예수님께서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에 오셨습니다. 나사로와 그의 자매들은 감사의 마음으로 예수님을 환영하며 잔치를 베풀었고, 마리아는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닦으며 자신의 헌신과 사랑을 드렸습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잔치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난 참된 사랑과 헌신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본보기입니다.
(1) 베다니에 도착하신 예수님(1-2)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을 피하시며 에브라임(11:54)에 숨어 계셨습니다. 그리고 “유월절 엿새 전”이라는 시점에 조용히 베다니에 도착하셨습니다(1). 이 시간적 배경은 토요일 안식일 즈음에 예수님께서 기름 부음을 받으신 사건이 일어났음을 암시합니다(마태복음 26:6-13, 마가복음 14:3-9).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이 사건이 유월절 이틀 전에 일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후 예수님은 다시 나사로의 집으로 들어가십니다(2).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나사로의 가족은 곧바로 잔치를 준비했습니다(2).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예수님이 자주 방문하시던 곳이었고, 무엇보다 예수님을 극진히 사랑하는 세 남매인 마르다,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11:1-2). 예수님은 이곳에서 쉬시며 그들과 삶을 나누셨고, 제자들 역시 큰 안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2).
마리아의 가족이 준비한 잔치는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가 살아난 사건 이후, 예수님께 감사를 표하기 위해 베풀어진 것이었습니다(요한복음 11:38-44, 12:2). 그들은 예수님이 베푸신 은혜를 잊지 않고, 나사로를 살려주신 일에 깊이 감사하며 예수님을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덕분에 온 집안은 순식간에 잔칫집과 같은 활기찬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2).
(2) 향유를 붓는 마리아(3)
예수님을 위해 베풀어진 잔치 자리에서 뜻밖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부은 것입니다(3). 이 양은 로마 시대의 도량으로 약 320g에 해당하며, 그 값은 무려 300데나리온, 즉 노동자 1년치 품삯과 같은 엄청난 가치였습니다(마태복음 26:7, 마가복음 14:3). 단순히 향유를 부은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는데,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털을 풀어 발을 닦았습니다(3).
이 행동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기록과는 차이가 있습니다(마태복음 26:7-13, 마가복음 14:3-9).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은 메시아로서의 기름 부음이나, 집주인의 환대를 상징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발에 향유를 붓는 것은 장례를 준비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3). 누가복음에서는 한 여인이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닦았다는 장면이 나오는데(누가복음 7:38), 여기서 마리아의 행위 역시 요한복음 13장의 세족식과 연결해 볼 때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요한복음 13:4-5). 발을 닦는 행위는 지극한 사랑과 헌신의 표현이었으며, 당시 여인의 머리는 가장 영광스러운 부분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것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다는 것은 예수님을 향한 최고의 사랑을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관심사가 달라집니다. 마리아는 온 마음이 자기 가정에 베풀어진 예수님의 사랑에 있었기에, 장례를 준비하는 그 깊은 헌신의 행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3). 우리의 예배와 삶 역시 우리가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그분의 은혜를 얼마나 감사히 여기고 있는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요한복음 12:3, 마태복음 26:13).
마리아를 비난하는 가룟 유다(4-8)
진정한 헌신은 외부의 평가나 세상의 시선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동과 태도이며, 물질적 가치나 형식적인 기준보다 진심에서 우러나는 사랑과 헌신이 더 큰 의미를 갖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불평이나 비판에 흔들리지 않고 올바른 선택을 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때로 사랑과 헌신은 편안함을 포기하고 희생을 감수해야 할 수도 있지만, 그 행동 하나가 주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과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4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8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4-8)
사람들은 예수님을 온전히 섬긴 마리아를 향한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진심으로 하나님께 드려진 헌신과 사랑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세상의 평가보다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이 참된 섬김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1) 가룟 유다의 반응(4-6)
가룟 유다는 마리아가 드린 향유를 두고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비난했습니다(5). 유다는 무엇이든 돈으로 환산하는 능력이 있었고, 수치 계산이 빠르기 때문에 예수님의 공동체에서 회계를 맡았습니다(6).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는 제자들이 불평했지만(마가복음 14:4-5, 마태복음 26:8-9), 요한복음에서는 유다가 제자들을 대표해 말했으며, 다른 제자들도 그의 의견에 동조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6).
마리아가 드린 향유는 300데나리온으로, 한 데나리온은 일반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합니다(마태복음 26:7). 이렇게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는 행동은 제자들에게 이해되지 않았고, 낭비처럼 보였기에 마리아를 책망한 것입니다(5). 제자들은 차라리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5).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가룟 유다의 진심을 꿰뚫어 보셨습니다(6). 그의 관심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아니라, 오직 돈이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팔았던 사람으로, 공동체의 재정을 조금씩 횡령하며 자신의 탐욕을 채워 왔습니다. 마리아를 비판한 것도 자신의 수입이 줄어들 것을 염려했기 때문으로, 겉으로는 정의와 자선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욕심과 도둑질을 감추기 위한 위선적인 비판이었습니다.
유다는 계산이 빠르고 총명해 보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속 거짓과 탐욕을 보셨습니다. 진실하지 않은 모습을 더 진실한 것처럼 꾸미며, 예민하게 반응하고 거짓을 계속 덧붙였던 것입니다.
(2) 두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7-8)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행동을 제재하지 않으셨습니다(7). 오히려 그녀의 행동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셨고, 다른 사람들이 막지 않도록 하셨습니다(마태복음 26:10-11).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행동에 두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7).
첫 번째 의미는, 마리아의 행동이 단순히 향유를 붓는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께 드리는 최고의 예배였다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2:3, 마태복음 26:12). 사람의 눈에는 일 년 연봉과 같은 향유를 붓는 것이 낭비처럼 보였지만,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담긴 사랑과 헌신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드리는 물질의 양이 아니라, 마음과 정성이 담겨 있는지를 보십니다(마태복음 26:13). 마음이 담긴 사랑이 드려질 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최고의 예배로 평가하십니다.
두 번째 의미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7, 마태복음 26:12-13)라는 예언적 의미입니다. 제자들은 마리아의 행동이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행위임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눈앞의 풍성한 잔치만을 보신 것이 아니라, 이미 십자가에서 이루어질 순종과 죽음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마태복음 26:12, 요한복음 12:7). 금요일 안식일 직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시체를 향유로 바를 시간이 없으셨습니다. 따라서 마리아의 행동은 장례를 준비하는 예언적 헌신이 되었던 것입니다(마태복음 26:12-13).
예수님께서는 이 행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씀하시며,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마태복음 26:13, 마가복음 14:9). 마리아의 헌신은 기념비적인 신앙의 행동이었고, 2000년 전의 헌신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감동과 교훈으로 전해집니다.
가룟 유다와 비교하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유다는 배신과 탐욕의 악한 동기를 가지고 행동했지만(6), 마리아는 순수하고 최고의 예배를 드렸습니다(3). 우리도 마리아처럼 마음과 정성이 담긴 순수한 예배를 드리며, 예수님께 최고의 사랑과 헌신을 표현해야 할 것입니다(마태복음 26:12-13, 요한복음 12:3).
나사로까지 죽이려는 공회(9-11)
권력과 지위를 가진 사람들은 때로 자기 이해와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방해하거나 제거하려는 생각을 합니다. 겉으로는 정의와 공정을 외치지만, 실제로는 숨은 욕심과 이기심이 동기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다른 사람의 선한 행동을 시기하거나 방해하려는 유혹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외형적인 주장보다 그 사람의 진심과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위협과 위험 앞에서도 올바른 길과 선한 행동을 포기하지 않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9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10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1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9-11)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일은 정말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요 11:43-44). 당연히 당시에 큰 논쟁거리가 되었고, 예수님께서 병자만 고치신 것이 아니라 죽은 자도 살리신 부활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증명하기에 충분했습니다(요한복음 11:25-26). 이 사건은 구약 에스겔 선지자가 본 마른 뼈가 살아나는 사건과도 연결되며(에스겔 37:1-4), 죽음 위에 승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좋은 소식이 모든 사람에게 달가운 것은 아니었습니다(요한복음 11:53).
유월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을 방문한 큰 무리가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모여들었습니다(9). 그들은 예수님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난 나사로를 보려 했습니다(9). 이처럼 영생을 소유한 자들은 세상 가운데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요한복음 11:25-26).
그러나 위선적인 종교인들은 자신들의 거짓이 드러날까 두려워, 예수님뿐만 아니라 나사로까지 죽이려 계획했습니다(요한복음 11:53, 12:10-11). 나사로의 부활은 그들의 악한 마음을 더욱 부추겼고, 부활의 기적과 경건한 섬김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었고, 참 신앙인들은 이러한 거짓 종교인들로부터 박해를 받게 됨을 보여줍니다(요한복음 15:18-20).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예수님께 나아와 믿게 되었습니다(11). ‘가서’라는 헬라어는 ‘떨어져 나가다’라는 의미를 가지며,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사람들이 자기들에게서 떠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11). 부활한 나사로를 보고 예수님께 나아가는 무리들을 보며, 그들은 예수님과 나사로를 제거하려고 했습니다(10-11). 이는 무리가 자기들에게서 떠나더라도 사람들을 향한 사랑과 진리의 길을 포기하지 않으신 예수님과 완전히 상반되는 모습입니다(요한복음 6:67).
위선적인 삶은 세상적인 것에 집중합니다. 그들에게 모든 것은 자신과 권력, 지위를 지키는 일이었고, 종교 지도자인 대제사장들은 거짓된 종교 생활이 들통나거나 자신들이 누려온 것을 빼앗길까 두려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방해하려 했습니다(요한복음 11:53, 12:10-11).
사랑은 효율로 따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구원받은 사람들은 무엇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요? 가장 귀한 향유 옥합을 드리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에게는 낭비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든 하나님께 최고의 사랑과 정성으로 드리는 예배가 향기롭게 여겨집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집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조직이나 개인이 기존의 안정된 질서나 위치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할 때, 심각한 토론과 깊은 성찰보다는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강한 반발이나 제거를 시도할 수 있습니다. 이는 변화를 두려워하고 현상 유지를 통해 안정을 찾으려는 인간 본연의 심리를 보여줍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새로운 기술, 사상, 혹은 인물이 등장할 때 기존 체제에서 유사한 저항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나사로 부활 사건 이후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두려워하며 모의하는 장면을 기록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자, 그들은 로마의 제재로 나라와 성전을 잃을 것을 염려했습니다. 이에 대제사장 가야바는 한 사람이 죽어 온 민족이 보존되는 것이 낫다고 말하며 예수님의 죽음을 정당화했습니다. 결국 이 날부터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했고, 예수님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에브라임 근처로 물러나셨습니다. 유월절이 다가오면서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았고, 지도자들은 그분을 잡을 기회를 노렸습니다.
기적 이후 종교 지도자들(47-53)
사람들은 위기를 만났을 때 종종 이성보다 두려움에 따라 결정을 내리곤 합니다. 자신들의 지위와 권력을 지키고자 하는 기득권층은 때때로 명백한 사실이나 선한 영향력조차도 자신들의 이익에 방해된다면 외면하거나 적대시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조직이나 사회에서 자신의 기득권이나 안정을 잃을까 두려워 새로운 변화나 진실을 거부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47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48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49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50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51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52또 그 민족만 위할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53이 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47-53)
사람들은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에 따라 투자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한때 귀하게 여기던 것도 시간이 지나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면 쉽게 버려 버립니다. 대제사장과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참된 가치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단지 자신의 성공과 출세에 방해가 되는 걸림돌, 혹은 제거해야 할 암 덩어리로만 여겼습니다. 진정한 예수님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의 계산 속에는 결코 그분이 합당하게 자리 잡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1) 유대 지도자들의 대책(47-48)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리신 사건이 있던 날, 그 현장에 있던 한 사람이 이 소식을 바리새인들에게 전했습니다(47절). 나사로가 살아났다는 놀라운 소식은 곧 베다니 전역에 퍼져 나갔고, 베다니가 예루살렘에서 약 2.9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 소식은 순식간에 예루살렘에까지 전해졌습니다. 사람들의 관심과 반응이 빠르게 확산되자, 종교 지도자들은 즉시 움직였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하여 이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계속해서 표적을 행하게 두면,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믿고 따르게 될 것이며, 결국 로마 제국이 개입하여 성전과 민족을 파괴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49절). 산헤드린은 유대 사회에서 행정과 사법을 아우르는 최고 의결 기관으로, 당시 사회와 종교 전반에 걸친 권위를 가진 기관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 특히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을 단순히 백성을 미혹하는 위험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은 기적의 참된 의미나 하나님의 뜻보다는, 그것이 초래할 정치적 결과와 자신의 지위에 대한 두려움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로마 제국과 긴밀하게 협력하면서 자신들의 종교적·정치적 기득권을 유지해 왔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활동이 정치적 색채를 띠게 된다면 로마의 눈치를 보아야 했고, 그 책임이 자신들에게 돌아올 것을 염려했습니다. 그리하여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땅과 민족을 빼앗을 것”이라는 두려움 속에서, 그들은 예수님의 존재와 활동을 위협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만 기록된 이 부분은, 로마 당국과 유대 지도자들 사이의 긴장 관계와 당시 정치·사회적 배경을 보여 주며, 단순한 개인적 반감이 아닌 복합적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던 시각을 이해하게 합니다.
결국 이 사건은,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의 권력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했는지를 보여주며, 인간의 계산과 두려움이 하나님의 뜻과 대비될 때 얼마나 왜곡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뜻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오직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위기 의식에 따라 판단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세상의 계산과 두려움 속에서 진리를 외면하거나 오해할 수 있음을 경계하게 됩니다.
(2) 한 사람의 죽음을 예언한 가야바(49-53)
그때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가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일어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다른 이들의 무지를 지적하며,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50)라고 선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처형되던 그 해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는 철저한 기회주의자였습니다. 그의 의도는 분명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유대 사회에 생길지도 모르는 반(反)로마 항쟁의 불씨를 미리 꺼버리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요한복음은 가야바의 이 주장을 단순한 정치적 계산이 아닌, 예수님의 죽음이 지니는 구속적 의미로 해석합니다. 하나님은 땅에 속한 인간의 악한 의도까지도 당신의 거룩한 목적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실제로 1세기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마카베오 형제들처럼, 민족 전체를 위해 한 사람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이상적인 희생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단순히 민족을 위한 희생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기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포함하며, 결국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모든 민족이 복을 얻게 되리라는 말씀—이 예수님을 통해 성취됨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52절)는 유대인이나 이방인, 특정 집단만이 아니라 장차 교회로 모일 모든 신자들을 의미합니다.
비록 가야바는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악한 의도를 가지고 말했지만, 그 말 속에서 하나님은 인류 구원의 계획을 드러내셨습니다. 결국 산헤드린 공회의 결론은 하나였습니다. 예수님을 내버려 두면 사람들이 따르게 될 것이고, 그분이 점점 더 인기를 얻어 왕으로 추대된다면 자신들은 지도자의 자리에서 쫓겨날 것이라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들의 불안은 예수님의 기적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지위와 권세가 흔들릴까 하는 위기의식 때문이었습니다.
에브라임으로의 피신하신 예수님(54-57)
모든 상황에서 정면으로 맞서는 무모함만이 용기가 아닙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목표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때때로 위협을 피하고, 힘을 아끼며,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는 개인이나 조직이 장기적인 성공을 위해 전략적으로 물러나거나 잠시 숨을 고르는 것의 중요성을 가르쳐 줍니다. 모든 싸움에 임할 필요는 없으며, 언제 싸우고 언제 피할지를 아는 것이 진정한 리더십입니다.
54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여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유하시니라 55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케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56저희가 예수를 찾으며 성전에 서서 서로 말하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저가 명절에 오지 아니하겠느냐 하니 57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54-57)
지금까지와는 달리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고 그 방법을 모색합니다. 반면,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간다 해도, 모두가 진정한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 헌신하며 마음을 다하는 마리아와 같은 사람들이 바로 참된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1) 빈들에 머무는 예수님(54)
나사로의 부활 사건 이후, 예수님을 죽이려는 유대 지도자들의 결의가 내려진 상황을 보여줍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은 더 이상 사람들 속에서 공개적으로 다니지 않으시고, 한적한 산속 가까운 마을로 물러나 제자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도피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이루기 위한 전략적 이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시기는 제자들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 그들을 가르치고 준비시키는 중요한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인간의 위협과 계획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은 좌절되지 않으며, 때로는 물러남과 숨는 시간이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귀한 기회가 됨을 보여줍니다.
(2) 예수님을 잡으려 한 유대지도자들(55-57)
본문에서 “유월절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55)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이 다가오는 시점에 에브라임으로 물러가셨습니다. 요한복음에는 11장 이전에도 이미 두 번의 유월절이 언급되었지만, 이번에는 유월절에 대한 기록이 훨씬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언급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을 계산하는 데 도움이 되며, “유월절이 가까움에”라는 표현은 단순한 시간적 흐름을 넘어, 예수님의 운명적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증언을 통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즉 유월절을 성취할 분으로 소개됩니다. 따라서 유월절이 가까워진다는 사실은 곧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날이 임박했음을 의미합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사람들은 예수님께 깊은 관심을 보였지만, 그 관심은 모두가 긍정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57절에서 보듯,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마치 함정을 파 놓고 기다리는 맹수처럼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기 위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과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메시아적 이미지로 비쳤기 때문에, 종교 당국자들에게도 예수님은 요주의 인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했지만, 대제사장과 바리새파 지도자들은 이를 두려워하며 체포 명령을 내려 놓았습니다. 예수님이 등장하지 않는 가운데 그들 사이의 대화는 마치 폭풍 전의 고요함과 같으며, 이미 사건의 대세는 예수님의 체포와 죽음으로 기울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특히 본문에서 유월절의 언급은 과거 출애굽 사건의 구원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한 분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 이루어질 새로운 구속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나사로의 부활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이 드러났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갈래로 갈렸습니다. 일부는 믿음을 갖게 되었지만, 종교 지도자들은 두려움과 권력 유지를 위해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모의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계획과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속 계획은 좌절되지 않고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한 길은 이미 정해져 있으며, 그분의 죽음은 단순히 한 민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로 모으는 구속의 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세상의 계산과 두려움에 흔들리지 않고, 예수님 안에서 참된 가치와 길을 붙들라는 초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