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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27-02)


서원을 지키는 헌신의 마음

레위기 27장 16-34절


 

주어진 시간을 잘 마무리하고 매듭지을 때, 우리의 삶은 열매를 맺을 것이며 더욱 강건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심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최종적인 근거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한 약속의 근거해서 자기 백성을 끝까지 책임지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레위기 마지막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과 자신의 집은 물론, 자신이 소유한 기업도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릴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소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소유인데 자신이 넘겨 받은 기업도 해당됩니다. 물론 자신의 소유는 희년과 상관없이 영원히 성소에 귀속되지만, 자신이 임시로 넘겨받은 것은 희년법에 따라 처리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초태생을 하나님께 바치는 규정과 헤렘 법에 따르는 규정도 있습니다.

 

밭의 봉헌(16-24)

신명기의 주된 메시지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노력에 의한 행위들이라고 한다면 종교에 불과할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제사 제물을 통해, 긍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물과 제사장 그리고 성전이 되시므로 이루어진 일이니, 신앙이 된 것입니다.

 

16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기업된 밭 얼마를 성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하면 마지기 수대로 네가 값을 정하되 보리 한 호멜지기에는 은 오십 세겔로 계산할지며 17만일 그가 그 밭을 희년부터 성별하여 드렸으면 그 값을 네가 정한 대로 할 것이요 18만일 그 밭을 희년 후에 성별하여 드렸으면 제사장이 다음 희년까지 남은 연수를 따라 그 값을 계산하고 정한 값에서 그 값에 상당하게 감할 것이며 19만일 밭을 성별하여 드린 자가 그것을 무르려면 네가 값을 정한 돈에 그 오분의 일을 더할지니 그리하면 그것이 자기 소유가 될 것이요 20만일 그가 그 밭을 무르지 아니하려거나 타인에게 팔았으면 다시는 무르지 못하고 21희년이 되어서 그 밭이 돌아오게 될 때에는 여호와께 바친 성물이 되어 영영히 드린 땅과 같이 제사장의 기업이 될 것이며 22만일 사람에게 샀고 자기 기업이 아닌 밭을 여호와께 성별하여 드렸으면 23너는 값을 정하고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희년까지 계산하고 그는 네가 값을 정한 돈을 그 날에 여호와께 드려 성물로 삼을지며 24그가 판 밭은 희년에 그 판 사람 곧 그 땅의 원주인에게로 되돌아갈지니라 25또 네가 정한 모든 값은 성소의 세겔로 하되 이십 게라를 한 세겔로 할지니라(16-25)

 

기업으로 소유하고 있는 발을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릴 때 밭의 값을 정하는 방법과 땅을 다시 무르는 방법에 대해 규정합니다.

 

(1) 자신의 밭(16-21)

 

자신이 소유한 밭을 하나님께 성별하여 드리려면 마지기 수대로 값을 정하여 드릴 수 있습니다. 그 값의 기준은 보리 한 호멜을 은 오십 세겔로 계산하는 것입니다. 한 호멜 일반 노동자의 5년치 수입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한 호멜은 10에바이며 약 220리터 정도 되는 양입니다. 이것이 기준인 이유는 당시 보리 한 호멜을 1세겔에 거래했고, 50년 희년의 기간에 대입하면 50세겔로 환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희년을 기준으로 하는 것은 밭의 값을 정하는 또 다른 기준입니다. 밭의 주인이 세상에서 그 발을 성행하여 드리려면 반드시 제사장이 1년까지 남은 연수를 따라 그 값을 계산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다시 그 밭을 무르려고 하면 정한 값에서 20%를 더해서 드려야 합니다. 일반 백성들끼리 거래라면 1년이 되면 다시 원주인에게 받을 돌리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희년이 되어도 그 밭을 원주인에게 되돌리지 않는 상황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성전에 바친 이후 1년이 올 때까지 무르지 않은 경우입니다. 성전에 바친 경우 만일 원주인이 그 밭을 무르려고 하면 반드시 회년이 오기 전에 물러야 합니다. 1년이 오면 그 밭은 영원히 성전 소유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21). 둘째는 그 밭을 타인에게 팔아버린 경우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경우인지 이해하기 어려운데, 아마도 제사장이 원주인에게서 밭을 산 이후 그 밭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버린 경우가 아닐까 추측합니다. 제사장이 이렇게 한다는 것은 아마도 원주인이 무르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경우에 여호와께 성별해서 드린 밥은 영원히 원주인에게 돌아가지 않습니다.

 

(2) 타인의 밭(22-24)

 

만일 어떤 사람이 밭을 드릴 때, 그 밭이 다른 사람에게서 구입한 것이라면, 성전에 드리되 영원히 드릴 수는 없습니다. 타인의 발을 사는 것은 소유권이 아니라 1년까지의 사용권을 사는 것이기 때문에, 사용권이 만료되는 희년이 오면 그 밭은 원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타인에게서 구입한 밭을 여호와께 드리기 위해서는 밭의 생산량과 함께 희년까지 남은 기간을 기준해서 밭의 값을 정합니다. 매우 중요한 원리가 여기 포함되어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그 누구도 타인의 소유를 영원히 소유할 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고대 근동 사회는 힘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은 땅을 차지하고 더 많은 소출을 가져가는 것이 당연한 사회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기에, 심지어 왕이라 할지라도 타인의 땅을 강제로 소유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아합 왕은 이 규례를 공개적으로 어기고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았는데,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습니다.

 

(3) 기준(25)

 

밭을 거래하고, 그것을 성전에 바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소의 세겔’을 사용해야 합니다. 성소의 세겔은 성소에서 사용하는 표준 무게 중량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성소의 세겔을 따라 반 세겔을 내성막을 건축했습니다(출 30:13). 성소의 세겔은 1세에 20게라라고 언급하는데, 1게라는 약 0.567g입니다. 그러니 20게라는 11.34g 정도 됩니다. 결국 1세겔은 약 3돈 정도 무게인 셈입니다.

 

서원 규정들(26-33)

사람끼리 관계 속에서 약속이 중요한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약속한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서원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됩니다. 서원을 쉽게 여기는 것은 약속의 대상인 하나님을 가벼이 여기는 처사입니다. 서원 이행은 서원하는 것만큼이나 믿음을 유고합니다. 우리 전부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마음이 서원의 출발입니다.

 

26오직 가축 중의 처음 난 것은 여호와께 드릴 첫 것이라 소나 양은 여호와의 것이니 누구든지 그것으로는 성별하여 드리지 못할 것이며 27만일 부정한 짐승이면 네가 정한 값에 그 오분의 일을 더하여 무를 것이요 만일 무르지 아니하려면 네가 정한 값대로 팔지니라 28어떤 사람이 자기 소유 중에서 오직 여호와께 온전히 바친 모든 것은 사람이든지 가축이든지 기업의 밭이든지 팔지도 못하고 무르지도 못하나니 바친 것은 다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함이며 29온전히 바쳐진 그 사람은 다시 무르지 못하나니 반드시 죽일지니라 30그리고 그 땅의 십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는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 31또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십일조를 무르려면 그것에 오분의 일을 더할 것이요 32모든 소나 양의 십일조는 목자의 지팡이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 번째의 것마다 여호와의 성물이 되리라 33그 우열을 가리거나 바꾸거나 하지 말라 바꾸면 둘 다 거룩하리니 무르지 못하리라 34이것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이니라(26-34)

 

하나님께 서원하면서 성별하여 드릴 수 없는 것들도 있습니다. 가축 가운데 처음 난 것이나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사람이나 물건, 하나님께 드려진 십일조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1) 초태생(26-27)

 

출애굽할 때,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모든 초태생을 죽이셨고, 그때로부터 이스라엘의 모든 초태생은 하나님께 구별되었습니다(출 13:11-13). 처음 태어나면서 이들은 모두 하나님께 구별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따로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바쳐 드려야 할 처음 난 것이 부정하게 되면 그것을 더 이상 바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이를 물러야 합니다. 무르기 위해서는 정한 가격의 20%를 더해서 드리면 됩니다. 만일 무르지 않고 바치려고 한다면, 그 정한 값에 부정한 짐승을 팔고 그 돈을 성소에 바치면 됩니다. 처음부터 하나님 앞에서 부정한 짐승의 초태생의 경우는 양을 대신하여 바치면 됩니다(출 34:20).

 

(2) 헤렘(28-29)

 

여호와께 온전히 바친 것을 ‘헤렘’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바쳐진 것을 일컫는데, 이런 것들은 사람이 바친 것의 일부조차 취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헤렘 규정에 따라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것은 바친 사람도 다시 무를 수 없습니다.

29절에서 사람이 온전히 바쳐진 경우 무르지 못하고 반드시 죽이라고 명령하는데, 아마도 이 경우는 헤렘이 선포된 전쟁 상황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리고 성 전투가 좋은 예입니다. 그게 아닌 경우에 사람을 헤렘으로 온전히 바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을 성전 사역을 위해 일평생 구별하여 살도록 바치는 것으로 보입니다. 입다의 딸이 이에 해당하는 예입니다.

 

(3) 십일조(30-33)

 

십일조 규정은 레위기의 마지막 단락에서 처음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에서는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바친 경우와 야곱이 십일조를 하나님께 약속하는 대목에서 그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땅의 소산으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단순합니다. 수확의 십분의 일을 구별하여 드리면 됩니다. 하지만 가축의 경우는 좀 더 복잡합니다. 가축의 십일조를 드릴 때, 모든 가축을 지팡이 아래로 지나가게 해서 열 번째 짐승을 십일조로 드리도록 정합니다. 들어가는 순서대로 무작위로 선택하는 것으로, 더 좋은 것으로 드리거나 더 나쁜 것으로 드리려는 시도는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선택되고 나면 좋은 의도든 나쁜 의도든 그렇게 구별된 가축을 바꿀 수 없습니다.

 

레위기의 마지막 규례는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신약 시대에 이르러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것은 특정한 물건이나 밭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구별되어 온전히 드려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전인적 삶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야 한다. 구별된 나실인의 삶입니다.

 

(4) 결론(34)

 

레위기 전체를 결론짓는 마지막 문장입니다. 레위기 규례들이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계명이라고 밝힙니다. 레위기에서 거대 규범 단락을 마무리하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7:38; 26:46).


 

광야 여정과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서원 이행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얼마나 주께 신실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광야의 가나안에서 상황에 따라 마음과 말과 행동이 변하지 않고 한결같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속물이 아니라 성물이 되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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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27-01)


소원을 소중히 여긴 삶

레위기 27장 1-15절


 

‘서원’이란 약속입니다. 26장이 축복과 저주에 대한 ‘하나님의 서원’을 다뤘다면, 27장은 ‘인간의 서원’을 다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이 관계라면, 다짐에 다짐으로 응답하는 것은 그 신앙에 어울리는 태도입니다. 다짐이 다짐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레위기의 모든 율법이 선포되었고, 27장에서는 하나님께 서원하여 바치는 것과 관련한 추가적인 규례를 소개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람, 짐승, 그리고 집을 봉헌할 때 어떤 규례를 따라야 하는지 말합니다. 전체적인 구조는 ‘만일 어떤 사람이 ∼하면’ 등의 패턴을 주목하면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봉헌(1-8)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는 것은 서원하는 사람 자체이지, 그 사람의 출신이나 능력이 아닙니다. 기도하면서 올린 서원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누구나 서원할 수 있고, 자식을 대신하여 서원할 수 있습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봉사하는 일은 레위인에게만 허용되었기 때문에, 서원한 사람은 성소에 그 값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만일 어떤 사람이 사람의 값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분명히 서원하였으면 너는 그 값을 정할지니 3네가 정한 값은 스무 살로부터 예순 살까지는 남자면 성소의 세겔로 은 오십 세겔로 하고 4여자면 그 값을 삼십 세겔로 하며 5다섯 살로부터 스무 살까지는 남자면 그 값을 이십 세겔로 하고 여자면 열 세겔로 하며 6일 개월로부터 다섯 살까지는 남자면 그 값을 은 다섯 세겔로 하고 여자면 그 값을 은 삼 세겔로 하며 7예순 살 이상은 남자면 그 값을 십오 세겔로 하고 여자는 열 세겔로 하라 8그러나 서원자가 가난하여 네가 정한 값을 감당하지 못하겠으면 그를 제사장 앞으로 데리고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값을 정하되 그 서원자의 형편대로 값을 정할지니라(1-8)

 

서원은 자원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서원하지 않아도 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서원한다면 서원한 사람은 서원한 것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서원을 지키지 않거나 미루는 것은 죄입니다. 서원함으로 하나님께 구별하여 거룩하게 드린 것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에서 원한 것을 규례에 따라 드리지 않거나, 무분별하게 변경하거나, 무르는 일은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구별된 것을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서원하여 드리는 것에 대한 규례가 필요합니다.

 

(1) 사람의 봉헌(1-8)

 

하나님의 백성 중에 어떤 사람이 자신의 생명 값을 바치기로 서원한 경우의 규례입니다. 생명의 값을 바치기로 한 것은 단순히 제사장처럼 온전히 헌신하는 것은 아니고, 일정한 기간을 정해 나실인의 서원을 하는 형태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명의 값을 바치기로 서원한 경우 일정한 기준을 정해서 값을 쳐서 몸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값은 항상 성소의 세겔로 드려야 하고, 성별과 연령에 따라 몸값은 차이가 납니다.

나이 남자 여자
1개월-5세 5세겔 3세겔
5-20세 20세겔 10세겔
20-60세 50세겔 30세겔
60세 이상 15세겔 10세겔

위 표에서 볼 수 있듯이 노동 생산성이 높고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나이에 해당하는 사람의 몸값은 매우 높았으며, 그 전후는 생명의 값도 낮아집니다. 실제 전쟁에 참여할 수 있거나 노동 생산성이 있는 남자는 50세겔에 해당하지만, 60세가 넘어 그 기능적 능력이 떨어지면 그 값이 현저하게 낮아집니다. 모든 세대에 걸쳐 여자는 남자에 비해 값이 절반 가까이 낮습니다. 당시 젊은 청년의 1년 치 연봉이 약 10세 정도 되었기에, 50세겔은 남자 성인의 5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아주 큰 금액입니다. 하지만 고대 사회 화폐 단위의 정확한 가치를 현대인들이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실제 사람의 몸값은 시대마다 매우 달랐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은 20에 애굽으로 팔려갔고(창 37:28) 미가의 제사장으로 고용되었던 요나단은 연봉으로 10세겔과 기타 부속품을 받았습니다(삿 17:10). 본문과 시대적으로 서로 연결된 것은 모세 당시 노예의 값이 은 30이었다는 점입니다(출 21:32). 그러므로 서원자의 생명 값으로 정해진 은 50세겔은 당시 노예의 값보다 훨씬 높게 책정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값을 정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서원에 한 가지 예외가 주어집니다. 어떤 사람이 서원을 했지만, 너무 가난해서 서원한 것의 값을 적절하게 지불하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사실상 위의 도표에 따른 생명의 값을 온전히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기에 그는 제사장 앞에 서야 했고, 제사장은 서원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여 그가 지불할 수 있는 만큼의 값을 정해야 합니다. 엄격하게 주어진 율법이었지만, 현실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형편을 고려하고, 그들을 배려하는 유연성을 보여줌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율법의 정신을 엿볼 수 있습니다.

 

짐승의 봉헌(9-13)

하나님께서는 누구나 서원할 수 있고, 무엇으로나 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내세울 것이 별로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헌신의 마음을 기쁘게 받으시며, 그 헌신의 마음을 한결같기를 원하십니다. 제사장은 합리적인 가격 결정으로 누구든지 서원했으면 그것을 꼭 지키도록 도왔습니다.

 

9사람이 서원하는 예물로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 가축이면 여호와께 드릴 때는 다 거룩하니 10그것을 변경하여 우열간 바꾸지 못할 것이요 혹 가축으로 가축을 바꾸면 둘 다 거룩할 것이며 11부정하여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지 못할 가축이면 그 가축을 제사장 앞으로 끌어갈 것이요 12제사장은 우열간에 값을 정할지니 그 값이 제사장의 정한 대로 될 것이며 13만일 그가 그것을 무르려면 네가 정한 값에 그 오분의 일을 더할지니라(9-13)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짐승을 예물로 드리기로 서원했을 경우 정결한 짐승의 경우는 결코 바꿀 수 없습니다. 다만 부정한 짐승은 대체해서 드려야 합니다. 짐승이나 재산을 하나님께 드리겠노라 결단할 때와 실제 드릴 때 마음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사람의 본성상 당연한 일입니다. 시간이 지나 하나님께 서원할 때의 마음이 사라지고, 아까운 마음이 들어도 처음 서원한 것을 잘 지킬 것을 요구합니다.

 

(1) 정결한 짐승(9-10)

 

정결한 짐승은 어떤 경우에도 변경하지 못합니다. 예물로 하나님께 드리기로 결단한 순간 그 짐승은 자체로 거룩하게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바꿀 수 없는 예는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 짐승의 질이 비교적 나쁜 것을 서원했다 할지라도 바칠 때 더 좋은 것으로 바꿀 수 없습니다. 이 경우 드리는 자가 하나님께 바칠 때 더 좋은 것을 드리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인데, 이런 경우도 금지됩니다. 둘째, 반대로 짐승의 질이 좋은 것을 서원한 이후 바칠 때 더 좋지 못한 것으로 바꿔서도 안 됩니다. 이런 경우는 드리는 자가 아까운 마음이 들어 악한 의도로 아끼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실제 제물을 바꾸어 드린다고 하면, 바치려고 했던 원래 짐승과 바꾼 짐승 모두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2) 부정한 짐승(11-13)

 

예물로 드리는 짐승이 부정하게 된 경우는 제물로 드리지 못하기에 대체할 필요가 생깁니다. 부정하게 된 경우, 제사장이 가서 그 짐승을 살펴 값을 정하고 그 값을 결정하는 대로 서원자는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때 부정하게 된 짐승을 무르기 위해 제사장이 정한 값에 5분의 1을 더해서 드리도록 규정합니다. 이는 짐승이 비록 부정하게 되었지만, 이미 서원한 것이기에 거룩하게 구별되었음을 전제합니다. 거룩한 성물과 관련한 속건제 규정을 따르는 것 같습니다(레 6:1-7).

 

집의 봉헌(14-15)

작은 욕심 때문에 크신 하나님을 향한 첫 사랑과 첫 다짐을 잊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서원할 때의 절박한 마음과 서원이 이루어졌을 때의 느슨한 마음 간의 간극을 좁히려면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마음이 허락한 만큼 진실한 것이 아닙니다. 약속을 지키는 것이 우리를 진실하게 만듭니다.

 

14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집을 성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하면 제사장이 그 우열간에 값을 정할지니 그 값은 제사장이 정한 대로 될 것이며 15만일 그 사람이 자기 집을 무르려면 네가 값을 정한 돈에 그 오분의 일을 더할지니 그리하면 자기 소유가 되리라(14-15)

 

어떤 사람이 자신의 집을 여호와께 성물로 구별하여 드릴 경우 그 집의 가격을 책정해야 할 것과 무르는 방법에 대해 말합니다. 집을 성물로 바칠 경우 제사장이 그 집을 방문해서 집의 상태를 파악하고 값을 정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드려진 집은 영원히 성전에 속하게 됩니다. 희년이 되어도 다시 원주인에게 돌아가지 못합니다. 희년법 규정에서 예외가 되기 때문에, 이 경우 드려진 집은 성벽이 둘린 성읍에 있는 가옥으로 보입니다(25:29-30). 하지만 만약 집의 원주인이 바친 그 집을 다시 돌려받고 싶으면 제사장이 정한 가격에 5분의 1을 더해 바치고, 그 집을 다시 소유할 수 있습니다. 원래 집값의 20%나 더해서 값을 지불해야 하기에, 아마도 그 값을 지불하고 집을 되돌려 받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렇게 성소에 귀속된 가옥은 성소의 필요에 따라 소유하거나 다른 이에게 되팔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백성들은 그 말과 행위에 있어서 신실해야 합니다. 사람이나 동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원하는 경우는 더욱 그러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약속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백성은 서원하는 일 자체를 아주 무겁게 여기고 그 약속은 충성되게 지켜야 합니다. 서원하고도 지키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필요에 따라 섣불리 서원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서원하지 말고 오히려 예는 예로, 아니오는 아니오로 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33-37). 물론 서원했으나 그 서원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경우들도 율법이 보장하고 있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의 서원은 서원 이후에도 아버지의 허락이 필요했고, 결혼한 여자는 서원한 이후에 남편이 그 서원을 확인해주어야 유효합니다(민 30:1-16).


각박하고 이기적인 시대에 신앙생활도 취향에 맞게 소비주의적인 태도로 합니다. 자신을 드리지 않은 채 받으려고 만하고 불편하지 않을 만큼만 섬기려 합니다. 하나님의 다짐에 우리도 다짐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부가 아닌 전부를 원하십니다. 고난의 때 품은 마음은 여전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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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26-04)


깨닫고 회개할 때 언약으로 회복

레위기 26장 40-46절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은 자녀인 우리들의 생각보다 크고 깊고 넓습니다. 사랑과 자비도 그렇습니다. 죄가 깊어서 가망이 없어서 포기하실만한 상황에서도 참고 인내하셔서 기어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가십니다. 우리가 먼저 우리 자신과 이웃을 포기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니 우리도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대하고 계시니깐, 우리들이 먼저 기대를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 언약적 저주를 받아 포로로 끌려간 땅에서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부터 당신이 조상들과 맺으셨던 언약을 기억하시고 약속의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신 징계는 심판과 멸망이 아니라 교훈과 훈육이었음이 드러납니다. 언약적 징벌은 종말론적 회복의 소망으로 바뀌게 됩니다.

 

회개와 언약을 기억함(40-42)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언약은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과 맺으신 구원과 생명의 약속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싫어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면, 이로 인해 하나님은 그들을 원수들의 손에 넘기시고 형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포로가 되어 고통의 세월을 보내는 그분의 백성을 아주 멸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들과 맺은 언약 때문입니다.

 

40그들이 나를 거스른 잘못으로 자기의 죄악과 그들의 조상의 죄악을 자복하고 또 그들이 내게 대항하므로 41나도 그들에게 대항하여 내가 그들을 그들의 원수들의 땅으로 끌어 갔음을 깨닫고 그 할례 받지 아니한 그들의 마음이 낮아져서 그들의 죄악의 형벌을 기쁘게 받으면 42내가 야곱과 맺은 내 언약과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며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고 그 땅을 기억하리라(40-42)

 

26장에 길게 소개된 언약적 저주의 결론입니다. 포로가 되어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이 끌려간 그 땅에서 회개하고 자복하면, 회복의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신실하지 못했습니다. 언약을 맺고 언약으로 서로 묶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했습니다. 여러 번에 걸친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에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기에 결국 땅에서 쫓겨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상황을 극적으로 되돌릴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철저한 회개와 자복입니다.

심지어 그들이 하나님을 대항했던 죄악뿐 아니라 ‘그들의 조상의 죄악’까지 자복합니다. 예를 들면, 느헤미아는 멸망 당한 예루살렘 성의 상황을 듣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 현재 자신들과 조상들의 죄악을 고백합니다(느 1:6). 다니엘 역시 예루살렘이 수치를 당하는 것은 자신들의 죄와 조상들의 죄악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단 9:16).

 

그들이 처해 있는 현재 상황이 자신들의 죄악 때문임을 분명히 깨닫고 마음을 겸손하게 해야 합니다. 그들의 마음은 할례받지 않은 마음입니다. 할례받지 않은 자라는 말은 이방인과 다름없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이방인과 같이 패역하게 되었음을 이제 마음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마음이 완악하여 하나님을 거역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은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굳어져 있었기에 그 포피를 베어내고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 완악했던 마음을 돌이킬 때, 하나님과 맺은 언약은 새롭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여 마음의 할례를 행하고 나면 백성들은 이제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불평하기보다 하나님의 심판마저 기쁨으로 받아들이려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맹목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형벌은 힘겨운 일이지만, 그것을 기쁨으로 받음으로 구원과 회복을 얻게 될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악을 인정하고, 마음을 겸비하게 하고, 힘겨운 형벌을 기쁨으로 감당하면 결국 하나님께서 조상들과 맺으셨던 그 언약을 다시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조상들과 맺으신 언약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으셨던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으며, 그에게 셀 수 없을 만큼 큰 민족을 주시고 열방의 복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언약을 다시 기억하신다는 말은 쫓겨 간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다시 약속의 땅으로 그들을 돌이키시고, 열방의 복이 되게 하겠다는 당신의 약속을 이루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42절 마지막에 “(내가) 그 땅을 기억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셨던 그 부르심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재앙을 받고 있다 할지라도 회복의 길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회개하며 자복할 때 회복은 가능합니다.

 

영원한 언약(43-45)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죄인을 징벌하시지만, 회개하고 돌이키는 자에게는 한없는 용서와 사랑을 베푸십니다. 징계를 받는 중에라도 진심으로 회개하고 돌이킨다면,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은 깨어진 언약 관계를 회복시키십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지속하는 비결은 날마다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깨달으며, 겸손히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43그들이 내 법도를 싫어하며 내 규례를 멸시하였으므로 그 땅을 떠나서 사람이 없을 때에 그 땅은 황폐하여 안식을 누릴 것이요 그들은 자기 죄악의 형벌을 기쁘게 받으리라 44그런즉 그들이 그들의 원수들의 땅에 있을 때에 내가 그들을 내버리지 아니하며 미워하지 아니하며 아주 멸하지 아니하고 그들과 맺은 내 언약을 폐하지 아니하리니 나는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됨이니라 45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기 위하여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애굽 땅으로부터 그들을 인도하여 낸 그들의 조상과의 언약을 그들을 위하여 기억하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43-45)

 

이스라엘 백성의 타락은 결과적으로 그 땅의 안식을 가져왔습니다. 가나안 땅의 거민들이 죄악 가운데 머물 때 그들로 말미암아 더러워진 땅이 참지 못하고 그들을 내뱉어버린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여 그 땅이 다시 더러워지고 결국 그 땅이 토해내듯 그들을 뱉어버린 것입니다(레 18:24-30). 그렇게 함으로 그 땅은 오히려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이 범한 죄악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그들이 하나님의 법도를 싫어하고 멸시한 것이라고 규정합니다. 그 죄의 결과는 땅에서 쫓겨나는 것이었는데,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땅이 안식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땅은 황폐해졌는데, 오히려 기쁘게 안식하게 된다. 본문은 ‘라차’(지불하다)가 두 번 반복해서 나옵니다(안식을 누리다'와 '형벌을 기쁘게 받다). 여기서 땅이 기쁘게 안식하는 것과 백성들이 죄악의 형벌을 달게 받는 것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싫어하고 거역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결코 깨뜨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은 범죄한 그들에게 분노하사 그들을 쫓아내셨지만, 그 진노는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조상들과 맺으신 언약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맺으신 언약에 신실하십니다. 44절은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비록 한글 성경에는 뚜렷하게 반영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 관계를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14절을 보면 한 구절 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칭하는 ‘그들’과 조상들을 지칭하는 ‘그들’ 그리고 1인칭 하나님을 지칭하는 ‘나의’가 무려 일곱 번이나 등장합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에 맺어진 관계는 영원히 끊어지지 않을 관계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을 반드시 기억하십니다(45). 하나님께서 기억하실 언약은 시내산에서 조상들과 맺으신 언약입니다. 비록 본문에서 구체적으로 시내산 언약이라고 언급하지 않지만, ‘애굽 땅으로부터 그들을 인도하여 낸 그들의 조상’이라고 언급하기 때문에 시내산 언약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으셨던 언약을 기억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던 것처럼, 시내산에서 맺으신 그 언약을 기억하자 쫓겨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약속의 땅으로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다시 언약 백성의 지위를 누리게 할 것이며, 전화 열방이 그 언약 백성을 통해 복을 얻게 하실 것입니다. 이를 강조하기 위해 본문은 “나는 여호와이니라" 라는 말씀 선포로 마무리된다. 이로써 하나님의 심판의 이유가 그들의 멸망을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들이 깨우침을 받아 다시 돌아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삶을 회복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힘입어 지성소에까지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특히 26장은 25장과 땅의 주제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여호와의 규례와 계명을 준수하면 땅은 그들에게 풍성한 복을 줄 것이며(4-5), 그들은 그 땅에서 대적들을 걱정할 필요 없이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6-12). 계속해서 축복과 저주는 땅과 관련되어 선포됩니다. 만일 여호와의 규례와 법도, 계명을 지키지 않고 언약을 배신한다면 재앙과 질병이 찾아오고 ‘파종한 것이 헛되어 대적들이 먹을 것이며’(16), 아무리 땀 흘려 수고를 해도 ‘땅은 그 산물을 내지 아니하고 땅의 나무는 그 열매를 맺지 아니할 것이다’(20) 땅에는 사나운 들짐승들이 넘쳐나 자녀를 해칠 것이고 길들이 황폐해질 것이며(22), 양식이 끊기고(26) 모든 성읍과 성소들이 폐허가 되면서 그 땅은 황무하게 될 것입니다(31-32). 마침내 그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추방되어 원수들의 땅으로 끌려가고(38-39), 그들은 황폐해질 것이나 역설적으로 아무도 없는 가운데 안식을 누릴 것입니다(4).

 

요약과 결론(4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 주변 여러 민족이 보는 가운데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셨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은 구원의 은혜를 망각하고 죄를 범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반드시 그 언약을 이루실 것입니다. 성도는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고, 언약에 신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46이것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모세를 통하여 세우신 규례와 법도와 율법이니라(46)

 

위기 전체를 통해 하나님의 규례를 선포한 이후, 26장에서 축복과 저주를 서술한 것은 언약 형식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형식입니다. 레위기에서는 전체 서술을 마무리하는 요약 진술이 세 차례 정도 나옵니다. 첫째는 제사법을 마무리하는 7:38이고, 둘째는 본문인 26:46이며, 마지막 셋째는 레위기 전체 마무리하는 27:34입니다. 모든 내용은 여호와께서 시내산(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하신 계명라고 요약합니다. 결국 이 표현으로 시내산에서 주어진 만약의 말씀은 출애굽기와 함께 레위기 전체 내용도 포함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긴 저주 목록의 끝은 희망의 약속입니다. 징계의 목적이 형벌에 있지 않고 희복에 있기 때문입니다. 경고도 죄에서 돌이키라는 하나님의 호통이고, 돌이키면 산다는 호소입니다. 하나님의 본심에 진심 어린 회개로 응답해야 합니다. 그것이 희망의 길이고, 레위기를 주신 진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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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26-03)


땅의 안식과 남은 자의 두려움

레위기 26장 27-39절


 

말씀을 무시하는 자에게 경고하는 무서운 재앙이 될 것이며, 그건 잠시 머물다 사라질 미풍도 아니고, 살짝 아프다가 아물 상처도 아닙니다. 영혼만 생채기 나는 것도 아닙니다. 삶의 모든 영역을 황폐화해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 그분이 받으시는 예배까지 침해받습니다.

 

  •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적 저주의 마지막 부분이며 심판의 심각성이 더해가고 있기 때문에 모든 저주의 절정에 해당합니다. 최악의 심판은 전쟁이고, 전쟁으로 말미암아 온 땅이 황폐하게 되고, 심각한 기근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도 황폐하게 될 뿐 아니라 성소들조차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전쟁으로 황폐한 성읍(27-33)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청종하지 않는 백성의 제사를 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여러 민족 가운데 흩어질 것입니다.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와 징계를 경험하고도 지속적으로 고집을 피우는 것은 결국 멸망의 길로 달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성도는 죄에 대해 민감해야 하며, 죄를 깨달은 즉시 십자가 앞에 나아가 회개해야 합니다.

 

27너희가 이같이 될지라도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고 내게 대항할진대 28내가 진노로 너희에게 대항하되 너희의 죄로 말미암아 칠 배나 더 징벌하리니 29너희가 아들의 살을 먹을 것이요 딸의 살을 먹을 것이며 30내가 너희의 산당들을 헐며 너희의 분향단들을 부수고 너희의 시체들을 부숴진 우상들 위에 던지고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할 것이며 31내가 너희의 성읍을 황폐하게 하고 너희의 성소들을 황량하게 할 것이요 너희의 향기로운 냄새를 내가 흠향하지 아니하고 32그 땅을 황무하게 하리니 거기 거주하는 너희의 원수들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놀랄 것이며 33내가 너희를 여러 민족 중에 흩을 것이요 내가 칼을 빼어 너희를 따르게 하리니 너희의 땅이 황무하며 너희의 성읍이 황폐하리라(27-33)

 

수고해도 열매를 거두지 못하고 먹어도 배부르지 못하는 것이 삶입니다. 들짐승만이 아니라 부모가 자식을 잡아먹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삶이 기다립니다. 그 황폐함이 성소와 성읍을 가리지 않습니다. 지속적이고 완강한 거역 때문입니다. 가장 큰 재앙은 돌이키지 않는 완고한 마음입니다.

 

(1) 극심한 기근(27-31)

 

이미 세 차례 강조된 일곱 배로 가중되는 저주의 형벌이 한 번 더 반복됩니다. 언제나 그들이 돌이키지 않고 역주행을 계속하는 경우에 그런 끔찍한 재난을 당한다는 조건이 붙습니다. 그들의 범죄가 심화될수록 하나님의 격렬한 진노 또한 더욱 강해집니다. 이제 그 재앙과 참화의 정도는 극에 달합니다. 뒤로 갈수록 비극의 정도가 심해지면서, 결국 자녀를 잡아먹고 성소가 파괴되며, 하나님이 떠나시는 가장 극단적인 비극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8절의 ‘내가 너희에게 대항한다’는 말에서 원문상으로는 “내가” 앞에 ‘아프’가 위치하여 하나님의 결연한 의지를 강조합니다. 그들은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밭에 뿌린 씨앗이 결실을 맺지 못하는 고통을 당했지만(16), 이제 극한 가뭄으로 하늘이 철판처럼 땅이 놋판처럼 되어 파종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19). 식량 부족으로 열 명의 여인이 하나의 화덕에서 구운 떡을 저울로 달아 나눠 먹어야 했지만(26),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 자녀를 잡아먹는 일까지 발생합니다(29). 불순종으로 인한 기근과 배고픔이 있었는데, 적국의 침입으로 기근이 극대화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실제 이런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람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이 일을 겪기도 했고(왕하 6:28-29), 예루살렘이 포위되고 멸망당할 때도 일어났습니다(애 2:20).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슬픔, 나아가 가장 큰 비극은 아마 하나님의 떠나심 자체일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거짓된 예배를 거부하고 사악한 제단들을 부수며, 심지어 자신이 합법적으로 용인하신 성소들에서의 예배조차 거부하실 것입니다(30-31).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표현 자체도 훨씬 강한 단어들이 사용됩니다. 이스라엘의 “대항”(케리)에 단순히 하나님께서 균형을 맞춰 “대항”하는 것이 아닌 ‘맹렬한 대항으로’(바하마트 케리 “진노로”) 그들을 치십니다. 고대 근동 문헌에 의하면, 식인은 고대 근동 지역에서 자주 나타나는, 적대 국가에 대한 맹렬한 저주의 하나였습니다. 의식주의 궁핍으로 적들은 서로 잡아먹을 뿐 아니라 상대편의 피부로 옷을 지어 입는다는 저주가 등장하고, 심지어 자녀를 잡아먹을 것이라는 저주가 퍼부어집니다(신 28:54-57).

 

이스라엘의 근본적 죄는 여호와에 대한 배신입니다. 그들의 이탈은 예배의 타락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들은 산당들에서 이방신들을 섬겼고 불법 분향단에서 향을 피워 우상들을 기쁘게 했습니다(30). 그 사악한 신전과 제단들은 모두 훼파될 것이고 징벌로 죽음을 당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체가 그 위에 던져질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바쳤던 제단들도 심판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해 여호와께 대한 제사는 증단될 것입니다(31).

여기서 왜 하나님의 성소가 하나가 아닌 여럿인지 의문입니다. 광야에서 합법적 성소는 성막 하나뿐이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 성전을 지어 제사를 바쳐야 했습니다(신 12:5, 11; 16:2,6). 레위기 26장의 땅과 관련된 축복과 저주는 그 땅에 들어가서 작동될 언약 조항이므로 신명기를 따른다면 합법적 성소는 중앙 성소(솔로몬 성전)뿐입니다.

 

(2) 황폐한 성읍(32-33)

 

하나님의 심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운 산당들을 향해서도 임합니다. 본문 31절에 언급된 “너희의 성소들”은 복수형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성소, 즉 성전/성막을 뜻한다기보다는 30절에서 말한 산당들을 다르게 지칭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세운 산당들과 분향단들을 부수고, 그 부서진 잔해들(시체들 위에 불순종한 백성들의 시체를 던질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산당들과 분향단들을 만든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향기로운 냄새를 올려드리려고 했으나, 그것들은 모두 우상숭배의 좌소가 되었고, 심판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읍까지 황폐하게 하실 것입니다. 도시로 건설했던 곳은 더 이상 사람들이 거주하기 어려운 땅이 될 것입니다. 마른 광야가 되어 풀이 자랄 수 없는 황무지가 된다는 뜻입니다.

32-33절은 적국이 쳐들어와서 그 땅을 황폐하게 만들고 난 이후의 모습을 더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가나안 땅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싫어하시고, 그 땅을 버리십니다.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너희의 땅이 황무하며 너희의 성읍이 황폐하리라”라는 표현을 반복합니다(33). 가나안 땅의 황폐함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황폐하게 됨이 얼마나 철저했는지, 그것을 지켜보던 원수들마저 놀랄 것입니다. 원수들의 놀람은 그 마음이 황폐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땅은 더 이상 백성들이 거주하기 어려운 곳이 되었고, 그 땅에 있던 이스라엘 민족들은 이제 여러 민족 중에 흩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흩어진 그곳에도 하나님은 칼을 함께 보내 그들의 뒤를 따르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그들은 어디에 있든 평안과 안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땅의 안식과 포로(34-39)

열방 중에 빛이 되고 제사장 나라가 되어야 할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 민족 가운데 멸망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순복하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때, 성도는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 말씀보다 세상 가르침을 따르다가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매 순간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며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34너희가 원수의 땅에 살 동안에 너희의 본토가 황무할 것이므로 땅이 안식을 누릴 것이라 그 때에 땅이 안식을 누리리니 35너희가 그 땅에 거주하는 동안 너희가 안식할 때에 땅은 쉬지 못하였으나 그 땅이 황무할 동안에는 쉬게 되리라 36너희 남은 자에게는 그 원수들의 땅에서 내가 그들의 마음을 약하게 하리니 그들은 바람에 불린 잎사귀 소리에도 놀라 도망하기를 칼을 피하여 도망하듯 할 것이요 쫓는 자가 없어도 엎드러질 것이라 37그들은 쫓는 자가 없어도 칼 앞에 있음 같이 서로 짓밟혀 넘어지리니 너희가 원수들을 맞설 힘이 없을 것이요 38너희가 여러 민족 중에서 망하리니 너희의 원수들의 땅이 너희를 삼킬 것이라 39너희 남은 자가 너희의 원수들의 땅에서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쇠잔하며 그 조상의 죄로 말미암아 그 조상 같이 쇠잔하리라(34-39)

 

가나안은 안전한 땅이 아닙니다. 안전은 그 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장해 주십니다. 그러니 국력이 아니라 믿음이 커져야 안전합니다. 잡혀갈 땅에서도 재앙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공포와 불안은 계속될 것이고, 돌아오지 않는 한 세상 어디에도 참 안식은 없습니다. 순종이 안전한 길입니다.

 

(1) 땅의 황폐함과 안식(34-35)

 

땅이 황폐하게 될 것인데, 땅의 황폐화는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방으로 쫓겨 흩어지고 나면, 땅은 황무지가 되어 그냥 버려진 땅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과 심판이 땅의 황폐화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은 땅이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땅도 오염되고, 그렇기에 땅의 모든 피조물도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으며, 그들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는 날을 바라고 바랍니다(롬 8:19-25). 하지만 본문은 땅의 황무함이 오히려 그 땅이 안식하게 되는 기회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그 땅은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병으로 흩어지게 되면서 땅은 충분한 안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설입니다. 25:27에서이미 주어졌던 안식에 대한 명령이 강제로 실행되는 셈입니다. 아마도 이스라엘이 불순종한 것에는 안식년이나 희년을 지키는 일에 소홀했던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역대하 36:21은 유다의 포로 생활 70년이 사실은 “땅이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였다고 말합니다. 백성들이 안식년과 희년을 지키지 않아 땅이 안식하지 못한 것을 하나님께서 되돌리시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포로 된 땅에서도 극심한 공포와 불안으로 겨우 목숨을 연명하는 지경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희망은 없습니다.

 

(2) 포로됨(36-39)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적 저주를 받아 열방 가운데 포로로 끌려가서 흩어지는 삶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다룹니다. 그들의 마음은 나약하고 두려움으로 가득해서 심지어 바람에 잎사귀만 날려도 두려움에 떨게 된 것이며, 아무도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두려움에 엎드러질 것입니다. 대적자들이 두렵게 하고 핍박해도 목소리를 내 대적할 힘조차 없을 것입니다. 이 예언은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실현되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 당하고 포로가 되어 흩어졌으며, 남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본문은 이런 심판의 이유를 언급하면서 마무리하는데, 그것은 조상들의 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의 멸망은 외부 대적자들의 공격으로 인한 것이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비록 앗수르나 바벨에 의해 멸망 당한 것이지만, 성경은 근본적인 원인을 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항상 두려워하고 경계해야 하는 것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개인의 내면과 백성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죄입니다.


불순종의 대가는 가볍지 않습니다. 죄를 멈추지 않으면 고통스러워집니다. 그러니 더 미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삶에는 저주가 따라옵니다. 성경은 반복적으로 이 단순한 사실을 가르칩니다. 죄를 끊어야 저주가 끊깁니다. 회개만이 사는 길입니다. 순종만이 생명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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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26-02)


불순종하는 삶에 임하는 형벌(2)

레위기 26장 14-26절


 

이스라엘 앞에는 가나안 땅이 있지만 동시에 복과 저주도 있습니다. 축복과 저주를 동시에 선택할 수 없고, 선택의 결과는 고스란히 그 사람의 몫입니다. 불순종의 결과를 보면 당혹스럽습니다. 흑과 백처럼 순종의 결과와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죄가 가져온 결과는 이처럼 비참하고 끔찍합니다.

 

  • 언약에 불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내리실 심판에 대해 서술하기 시작합니다. 성경에서 언약적 저주 선포는 축복 선포보다 훨씬 더 길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폐병과 열병, 생명의 쇠약, 파종한 것을 추수하지 못함, 가뭄과 흉년,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않음, 들짐승, 염병과 전쟁 등의 주제가 차례대로 나열됩니다.

 

질병, 추수하지 못함, 전쟁(14-17)

부모가 자녀들에게 상과 벌을 주는 것은 그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부모가 기대하는 것은 부모과 자녀의 관계가 서로 신뢰하는 관계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부모가 지시하는 것을 자녀가 무한한 신뢰와 사랑의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 자체가 가장 큰 목적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상과 벌을 말씀하신 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14그러나 너희가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여 이 모든 명령을 준행하지 아니하며 15내 규례를 멸시하며 마음에 내 법도를 싫어하여 내 모든 계명을 준행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배반할진대 16내가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곧 내가 너희에게 놀라운 재앙을 내려 폐병과 열병으로 눈이 어둡고 생명이 쇠약하게 할 것이요 너희가 파종한 것은 헛되리니 너희의 대적이 그것을 먹을 것임이며 17내가 너희를 치리니 너희가 너희의 대적에게 패할 것이요 너희를 미워하는 자가 너희를 다스릴 것이며 너희는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리라(14-17)

 

언약적 저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고 명령을 싫어하여 배반하기 때문에 초래됩니다. 1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마음으로 싫어하지 않아서 그들 가운데 거하신다고 하셨지만, 백성들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싫어하여 언약을 깨뜨립니다. 하나님을 싫어하고 배반한 결과는 가장 먼저 하나님께서 ‘놀라운 재앙’을 내리시는 데 있습니다. 이 표현은 갑작스러운 공포가 임한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임재(방문)하시는데, 그 결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 말씀을 잘 준행하면 하나님의 임재는 축복이요 평안이 되겠지만, 본문에서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고 그 계명을 싫어하면 하나님의 방문은 심판과 공포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 공포심으로부터 시작해서 폐병과 열병으로 눈이 어두워질 것이며, 생명이 쇠약하게 될 것입니다. 폐병과 열병은 심판으로 임하게 되는 모든 종류의 질병을 대표합니다. 여러 질병으로 인하여 백성들은 생명의 기력이 약해지게 될 것입니다. 곧이어 그들이 열심히 농사를 짓는다 할지라도 파종한 것들은 자신들이 아니라 대적들이 와서 빼앗아 가버릴 것입니다. 열심히 수고하며 땀을 흘렸지만 그 결과물을 보지 못합니다. 다섯 명이 백명을 대적하고, 백 명이 만 명을 대적할 수 있으리라 약속하셨으나 언약적 불순종 때문에 대적에게 패하여 그들의 압제와 다스림을 받아야 할 지경에 이릅니다. 심지어 아무도 쫓아오는 이가 없어도 스스로 도망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가뭄과 땅의 황폐화(18-20)

하나님께서 저주하신 조건들을 보면, 백성들이 청종도, 준행도 하지 않고, 멸시하고, 싫어하고, 배반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은 죽어도 싫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태도입니다. 축복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되고, 저주는 무시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18또 만일 너희가 그렇게까지 되어도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일곱 배나 더 징벌하리라 19내가 너희의 세력으로 말미암은 교만을 꺾고 너희의 하늘을 철과 같게 하며 너희 땅을 놋과 같게 하리니 20너희의 수고가 헛될지라 땅은 그 산물을 내지 아니하고 땅의 나무는 그 열매를 맺지 아니하리라(18-20)

 

첫 번째 재앙의 결과로 파종하지만 수확하지 못하고 대적들이 취할 것이라고 한 말씀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18절은 “너희가 그렇게까지 되어도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면”이라는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면’이라는 전형적인 시작 문구에 덧붙여서 그들이 심판으로 인한 재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청종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첫 번째 재앙이 주어졌으나 여전히 마음을 돌이키지 않고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강조하고 그들의 완악함을 다시 드러내는 대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내리는 심판 역시 ‘일곱 배’나 더 심각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이들의 교만을 꺾어 산산조각 내실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언약적 저주로 하늘을 철과 같게, 놋과 같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철과 늦은 그 성질상 물을 통과시키지 못합니다. 하늘을 막아 비가 오지 않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언약의 말씀에서 멀어진 아합 왕에 대하여 엘리야가 자신의 말이 있기 전에는 하늘로부터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않을 것이라 예언했고, 실제로 이스라엘 땅에는 무려 3년 6개월 동안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않는 극심한 가뭄을 겪었습니다. 이렇게 극심한 가뭄은 필연적으로 과일이나 곡식의 어떤 열매도 맺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들짐승(21-22)

저주 목록은 축복의 약속을 정확히 뒤집습니다. 축복보다 저주가 훨씬 길게 나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나안은 약속의 땅이지만 광야보다 더 하나님과 멀어질 수 있습니다. 더 유혹이 많은 땅이기 때문입니다. 어려울 때 하나님을 찾기보다 풍요로울 때, 하나님을 인정하기가 얼마나 어렸습니까!

 

21너희가 나를 거슬러 내게 청종하지 아니할진대 내가 너희의 죄대로 너희에게 일곱 배나 더 재앙을 내릴 것이라 22내가 들짐승을 너희 중에 보내리니 그것들이 너희의 자녀를 움키고 너희 가축을 멸하며 너희의 수효를 줄이리니 너희의 길들이 황폐하리라(21-22)

 

그럼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역행하여 청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다시 벌을 일곱 배나 내리실 것입니다. 백성들은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길에서 떠나 반대의 길에 섭니다.

본문에서 ‘내게 청종하지 않으면’이라고 번역한 표현은 백성들의 의도가 더 표현되어야 합니다(내게 청종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는 것도 하나님을 버리고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을 뜻합니다. 즉,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마음으로부터 거절하고, 드러난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삶을 삽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들짐승을 보내어 자녀를 움키고, 가축을 멸하여 그 수효를 줄이실 것입니다. 백성들이 다니는 길은 두려움으로 황폐하게 될 것입니다. 강력한 들짐승들의 증가는 곧 가축의 죽음은 물론 어린 자녀들까지도 큰 위험에 빠트릴 것입니다. 자녀를 출산하지 못하는 것과 함께 낳은 자녀조차 포악한 들짐승과 적군에게서 지켜내지 못하게 되면 결국 이스라엘 백성의 숫자와 가축들의 숫자는 급격히 감소할 것이고, 그들의 삶도 황폐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전염병과 전쟁(23-26)

성도는 말씀에 대한 경외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고, 축복이며, 삶의 기준입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준행하는 삶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입니다. 하나님이 상황과 환경을 통해 가르치실 때 영적으로 바르게 분별하고 순종합니까? 성경을 지식의 도구가 아닌 순종할 말씀으로 여깁니까?

 

23이런 일을 당하여도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내게 대항할진대 24나 곧 나도 너희에게 대항하여 너희 죄로 말미암아 너희를 칠 배나 더 치리라 25내가 칼을 너희에게로 가져다가 언약을 어긴 원수를 갚을 것이며 너희가 성읍에 모일지라도 너희 중에 염병을 보내고 너희를 대적의 손에 넘길 것이며 26내가 너희가 의뢰하는 양식을 끊을 때에 열 여인이 한 화덕에서 너희 떡을 구워 저울에 달아 주리니 너희가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리라(23-26)

 

본문은 지금까지의 유사한 패턴에서 약간 벗어난 채 시작합니다. ‘너희가 내게로 돌이키지 아니하면’으로 시작하는데, 앞선 표현들처럼 일곱 배의 징벌에 대한 말씀은 여전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돌이킴’은 ‘야사르’의 니팔 형태입니다. 동사의 수동형 혹은 재귀형 어근입니다. 이럴 경우 그 뜻은 ‘교훈하다’ 혹은 ‘훈계하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여전히 그 징계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당신의 언약 백성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징계는 심판과 멸망이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손길은 오히려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의 표현입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반대의 삶을 살게 되면 하나님 자신도 이스라엘에 대항하여 칠 배나 치실 것입니다. 순종하지 않는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거듭될수록 더 심각해집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행은 이스라엘 백성의 역행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징게 의지는 본문에서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나 곧 나도 너희에게”라는 표현은 강조를 위한 히브리어 표현을 반영하여 번역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실 재앙은 언약적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먼저 언약을 깨뜨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언약을 깨뜨린 자들을 ‘언약을 어긴 원수’로 여기시고 그들을 대적하고 보복하실 것입니다. 보복의 칼과 염병으로 언약의 원수를 치실 것인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칼과 염병으로 심판하시는 경우는 오경에서는 출애굽기 5:3에서 언급된 것이 유일합니다. 애굽을 향해 내리신 하나님의 심판과도 같이 심각한 재앙을 언약을 어긴 원수 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실 것입니다. 칼과 염병의 심판을 받은 이들은 이제 대적의 손에 넘어가고 말 것입니다.

 

마지막 절은 다시 농업 환경을 염두에 둔 재앙을 언급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의뢰하는 양식을 부술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직역하면 백성들이 “의뢰하는 양식”은 ‘음식 막대기’를 뜻합니다. 막대기로 만들어진 빵이라는 것이 실제로 어떤 형태인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문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의지하고 기대하던 식량을 빼앗길 것이기에 아무런 소망이 없을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이런 모습을 이미지로 전달하기 위해 본문은 ‘열 여인이 한 화덕에서 빵을 굽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그만큼 빵을 만들 밀이 적어서 사람들의 배를 채울 수 없음을 뜻합니다.


청종 여부가 축복과 저주를 결정합니다. 저주를 자초하고 화의 근원을 자처할 성도가 있습니까? 처음부터 말씀을 무시하는 성도가 있겠습니까? 다 무심(無心)에서 시작하여 변심(變心)에 이르고 결국 화에 이르는 것입니다. 축복에 연연하지 않고 마음 지키고 말씀 지키는 것이 우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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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26-01)


불순종하는 삶에 임하는 형벌

레위기 26장 1-13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은 약속의 땅이지만 그 땅이 축복을 보장해주지 못하며 그 축복이 자동적으로 이스라엘의 것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순종하려고 마음을 낮추는 백성만이 그 축복을 알아볼 수 있고 누릴 수 있습니다. 순종하는 자에게 약속된 복이 무엇인지 알아보아야 합니다.

 

  • 레위기 26장은 언약적 축복과 저주를 선포합니다. 먼저 1-13절에서 지금까지 레위기에서 선포했던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에게 내일 축복을 구체적으로 약속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하시며 당신의 언약을 실행하실 것입니다.

 

언약 규정 서론(1-2)

‘누가 내 삶의 주인인가?’라는 질문은 신앙생활에서 가장 근본적이며 중요한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 중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자기를 위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조각한 것, 주상, 석상을 비롯해 우상을 세우고 경배하는 것을 철저히 금하십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분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1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조각한 것이나 주상을 세우지 말며 너희 땅에 조각한 석상을 세우고 그에게 경배하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 2너희는 내 안식일을 지키며 내 성소를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1-2)

 

26장 전체는 레위기 율법을 마무리하면서 언약에 순종하는 자에게 약속된 축복과 언약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에게 주어질 저주를 선언합니다. 언약에 근거한 계명은 반드시 축복과 저주를 동반하게 되는데, 이는 고대 근동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양식입니다(신 28장; 수 24:19-20).

본격적으로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기 전에 먼저 율법 규례를 요약합니다(1-2). 요약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만을 준수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이 율법이 모든 율법을 대표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하게 언급하는 것은 첫째, 우상승배 금지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우상은 헛된 것, 쓸모없는 것인데, 나무 등으로 조각하여 만든 것이든, 신성한 기념비처럼 세우는 것이든 모든 형태의 우상이 금지됩니다. 둘째, 안식일을 지켜야 합니다. 원문은 ‘나의 안식일들’로 복수형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하게 안식일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23장에서부터 제시해왔던 안식일, 안식년, 희년, 월삭과 절기 모두를 포함한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마지막으로 여호와의 성소를 경의해야 합니다. 성소를 더럽히지 않고 정결을 유지하는 것이 성소 경외를 위한 실천적 방법입니다.

 

순종에 따른 언약적 축복(3-13)

말씀 안에서 걷는 자들과 함께 하나님께서도 동행하실 것입니다. 에덴동산을 ‘거니시고’(창 3:8), 에녹이나 노아와 ‘동행하신’ 것처럼, 오늘 순종하는 거룩한 성도들을 백성 삼고 성전 삼아 거하실 것입니다. 그 걸음이 생명입니다.

 

3너희가 내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 4내가 너희에게 철따라 비를 주리니 땅은 그 산물을 내고 밭의 나무는 열매를 맺으리라 5너희의 타작은 포도 딸 때까지 미치며 너희의 포도 따는 것은 파종할 때까지 미치리니 너희가 음식을 배불리 먹고 너희의 땅에 안전하게 거주하리라 6내가 그 땅에 평화를 줄 것인즉 너희가 누울 때 너희를 두렵게 할 자가 없을 것이며 내가 사나운 짐승을 그 땅에서 제할 것이요 칼이 너희의 땅에 두루 행하지 아니할 것이며 7너희의 원수들을 쫓으리니 그들이 너희 앞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라 8또 너희 다섯이 백을 쫓고 너희 백이 만을 쫓으리니 너희 대적들이 너희 앞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며 9내가 너희를 돌보아 너희를 번성하게 하고 너희를 창대하게 할 것이며 내가 너희와 함께 한 내 언약을 이행하리라 10너희는 오래 두었던 묵은 곡식을 먹다가 새 곡식으로 말미암아 묵은 곡식을 치우게 될 것이며 11내가 내 성막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하지 아니할 것이며 12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 13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그들에게 종된 것을 면하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내가 너희의 멍에의 빗장을 부수고 너희를 바로 서서 걷게 하였느니라(3-13)

먼저 언약적 축복을 선언하기에 앞서 조건절로 시작합니다(3).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 약속된 복이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준행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걷다’ 혹은 ‘살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듣고 지속적으로 순종하며 산다는 의미입니다. 히브리어 표현은 3절에서 매우 반복적으로 강조합니다. 직역하면 ‘만일 너희가 나의 계명들을 따라 살고, 나의 명령을 지키고, 그것들을 너희가 행하면’입니다. 이렇게 언약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는 네 가지 언약적 축복이 주어집니다. 본문은 크게 네 가지 주제를 소개하는데, 문법적으로 ‘내가 주리라’라는 표현의 반복으로 소단락이 시작됩니다(4, 6, 11). 9절은 ‘내가 향하리라’(한글개역개정에서는 ‘내가 돌보리라’)라는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1) 풍요(3-5)

 

첫 번째로 소개된 순종에 대한 축복은 물질적 번영과 관련됩니다. 만일 하나님의 규례와 계명을 따라 살면, 땅이 그들에게 풍성한 복을 줄 것입니다. 이 풍성함은 때를 따라 내리는 비로 나타납니다. 이 비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지만,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은총입니다. 제때 내리는 비는 소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뜻합니다. 가나안 땅은 우기와 건기로 나뉘는데, 10월경부터 4월경까지만 비가 내리는 우기고, 나머지 기간은 비가 오지 않는 건기입니다. 그중 소위 10-11월에 내리는 이른 비와 4월경에 내리는 늦은 비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이 비가 적절한 때에 내리지 않으면 그해 농사를 망칩니다. 비의 양도 문제입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내리는 시점에는 비의 양이 많지 않고, 대신 12월부터 3월까지는 비가 많이 옵니다. 만일 수확기에 비가 많이 오면 과실수나 곡식이 훼손되어 최상의 생산량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적절한 때에 적절한 양의 비가 내리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2) 평화(6-8)

 

가나안 땅에서의 순종이 가져오는 두 번째 축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입니다. 세 가지가 언급되는데, 첫째는 그 백성들이 누울 때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둘째는 사나운 짐승을 그 땅에서 제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칼이 그들의 땅에 두루 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모두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가 있을 것임을 강조합니다. 대적들은 그 땅에 다시 발붙이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런 경계도 없이 누워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참된 평화를 나타냅니다. 대적을 쫓아내는 것도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암시합니다. 대적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쫓기며 그들 앞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입니다. 본문은 누구의 칼에 엎드러지는지 언급하지 않는데, 하나님의 행하심을 염두에 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8절은 다섯이 백을 쫓고 백이 만을 쫓을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3) 자손의 번성(9-10)

 

본문은 ‘내가 너희를 보리라’로 시작합니다. 한글성경은 “내가 너희를 돌보아”라고 표현하는데, 여기 사용된 표현은 마치 민수기 6:24-27에 있는 제사장의 축복을 기억나게 합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라고 표현하는데, 같은 형태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돌보다’라는 표현은 ‘내가 너희를 향하여 얼굴을 들어’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근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얼굴을 드사 복을 주시는데, 셋째 축복은 이스라엘을 번성케 하여 자녀를 많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너희를 번성하게 하고 너희를 창대하게 할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창세기 1:28의 명령과 유사합니다. 또한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언약을 이행하는 것입니다. 비록 한글 번역에는 뚜렷하게 표현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의지적 축복을 강조하기 위해 9절은 네 번에 걸쳐 ‘내가’한다는 표현을 반복합니다. 하나님의 풍요케 하심은 다시 10절에서 곡식의 풍성함으로 돌아갑니다. 지난 해 수확하여 저장하고 먹고 있는 곡식이 여전히 남아 있는데도 다시 새 곡식을 수확할 것입니다. 자손이 많아지지만 여전히 곡식은 풍성하게 공급될 것임을 말합니다.

 

(4) 하나님의 임재(11-13)

 

최고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임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 한가운데 거하실 것이며, 마음으로 그 백성을 싫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 가운데 거니시며 동행하실 것입니다(12). 마치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함께 거하시며 서늘할 때 그 동산을 거니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 백성과 함께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맺으셨던 언약을 다시 말씀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될 것이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전형적인 언약 문구인 이 표현은 시내산 언약으로 맺어졌던 언약 관계가 앞으로도 계속이어질 것임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약속은 에덴의 회복이라는 주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 가운데 행하신다는 표현 자체도 창세기 3:8의 표현을 상기시킵니다. 행한다는 표현은 히트파엘 형으로 재귀적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은 습관적, 지속적이며, 스스로 기쁨으로 하신다는 뜻입니다.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순종하며 사는 삶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에덴동산의 삶을 희복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언약 말씀을 지키도록 명하시고, 순종하는 자에게 축복을 선언하시는데 그 근거는 한마디로 출애굽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의 종된 삶에 자유를 주셨기에 이제 하나님의 규례에 순종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이 약속하신 언약적 축복을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 복을 원하고 복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중요한 것은 복이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의 근원이시고 최고의 복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의 근원이시고 최고의 복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복을 독점하지 않고 복의 통로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있는 곳마다 축복의 장소가 되길 바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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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25-03)

 


엄하게 부리지 말라

레위기 25장 39-55절


 

사람의 중심은 가장 약한 곳, 가장 아픈 곳입니다. 그곳을 중심으로 온몸이 움직이고 에너지가 사용됩니다. ‘사람’ 무르기입니다. 가난한 채무자, 생존의 어려움을 겪는 동족에 대한 규례가 이어집니다. 이들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공동체가 움직여야 한다고, 책임져야 한다고 합니다.

 

  • 희년 제도의 마지막 단락은 가난해져서 종으로 팔리게 된 형제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언급하고, 희년이 왔을 때 그들을 속량하여 자신들의 가족과 기업으로 들어가게 하는 규례를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안에 있는 동족은 노예로 사지 말아야 하며, 이방인에게 종으로 팔리는 형제가 있을 경우 가까운 친족이 속량해주어야 합니다.

 

종에 대한 규례(39-46)

가난의 영향을 최소화해야 사회가 안전합니다. 제사에서도, 이삭줍기와 같은 일상에서도 가난한 이들의 사정이 배려되었습니다. 가난한 형제에게 곁을 내주고 종이 된 동족을 품꾼처럼 대우하는 규례도 배려의 일환입니다. 착취와 지배가 아닌 은혜와 책임, 자선이 통하는 관계였습니다.

 

39너와 함께 있는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네게 몸이 팔리거든 너는 그를 종으로 부리지 말고 40품꾼이나 동거인과 같이 함께 있게 하여 희년까지 너를 섬기게 하라 41그 때에는 그와 그의 자녀가 함께 네게서 떠나 그의 가족과 그의 조상의 기업으로 돌아가게 하라 42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내 종들이니 종으로 팔지 말 것이라 43너는 그를 엄하게 부리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44네 종은 남녀를 막론하고 네 사방 이방인 중에서 취할지니 남녀 종은 이런 자 중에서 사올 것이며 45또 너희 중에 거류하는 동거인들의 자녀 중에서도 너희가 사올 수 있고 또 그들이 너희와 함께 있어서 너희 땅에서 가정을 이룬 자들 중에서도 그리 할 수 있은즉 그들이 너희의 소유가 될지니라 46너희는 그들을 너희 후손에게 기업으로 주어 소유가 되게 할 것이라 이방인 중에서는 너희가 영원한 종을 삼으려니와 너희 동족 이스라엘 자손은 너희가 피차 엄하게 부리지 말지니라(39-46)

 

회년 제도와 희년에 회복할 토지와 가옥에 대한 규례를 주었고, 이제 마지막으로 가난한 자와 종의 회복에 대한 규례를 제공함으로 회년 제도를 마무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난 때문에 종이 되는 것을 막고, 그들의 회복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가 해야 할 일을 소개합니다. 첫째 단락에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어떤 사람이든 종으로 사게 되었을 때 해야 할 일을 규정합니다.

 

(1) 희년과 종의 속량(39-43)

 

가난하여 집이나 토지를 팔아넘기고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빚을 갚아야 하는 상황이 계속되면 결국 가족의 일원을 종으로 보내거나, 자기 자신을 팔아넘길 수도 있었습니다. 앞서 가난한 이웃에 대한 돌봄과 배려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부득불 사람까지 종으로 팔아넘겨야 하는 상황이 되었을 경우 공동체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려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을 종으로 사게 되면, 그를 종이 아닌 품꾼이나 동거인으로 대우해야 합니다. 엄하게 부려먹거나, 착취해서는 안 된다. 급여를 주고 고용한 일꾼처럼 존중하며 대우해야 합니다. 형제의 어려움을 자기의 기회로 삼아 자신의 배를 불리고, 형제의 어려움을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음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좋으로 있을 때 구원하여 가나안 땅에 거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38). 좋은 희년까지 주인을 섬기다가 희년이 되면 무조건 자유를 얻게 됩니다. 희년까지 섬긴다고 하면 안식년에 노예를 해방해주어야 하는 규정과 상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신 15:1-18; 출 21:1-8). 보통 노예는 안식년이 되면 자유를 주어야 했기에 일반적인 경우 안식년 규례에 따라 자유롭게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아마도 안식년과 상관없이 종이 된 지 만 6년이 지나고, 7년째가 되면 자유롭게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식년에도 자유를 얻지 못한 사람의 경우는 희년이 되면 무조건 종의 신분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그 종이 주인을 사랑하여 계속 그 집에 있겠다고 했을 경우나 홀로 종으로 왔다가 아내와 자녀를 얻은 경우에는 안식년이 되어도 종의 신분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예가 많았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무런 조건 없이 희년이 되면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2) 언약 백성의 종의 규례(44-46)

 

이방인을 남종이나 여종으로 샀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을 종신토록 자신의 재산으로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45). 그들이 사들인 종신 노예들은 외국에서 온 이방인이거나 이스라엘 땅에 거주하는 이방인(거류민)과 그들의 자녀들일 수 있습니다(44). 이들 이방인 노예들은 또한 자녀에게 넘겨줄 수 있는 일종의 상속재산이었습니다(46). 그러나 동족 이스라엘 사람을 그런 종신 노예로 부려 먹는 일은 금지되었습니다. 42절은 그것에 대한 신학적 이유를 제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노예의 속박으로부터 그들을 구출하시어 자유민으로서 약속의 땅에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로 자유민이 된 그들이 자유민인 동료 이스라엘 사람을 노예로 삼는 일을 해선 안 됩니다.

 

이방인에게 팔린 종의 속량 규례(47-55)

속량받은 자라면 모진 종살이에서 자유인이 된 출애굽을 경험하는 이들이 다시 누군가의 종이 된다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한시적 종살이여도 자유인이 된 주인 역시 애굽인들처럼 동족을 엄하게 다뤄서는 안 됩니다. 그때 겪었던 설움과 차별, 착취를 기억한다면, 속량 받은 자라면 그럴 수 없습니다.

 

47만일 너와 함께 있는 거류민이나 동거인은 부유하게 되고 그와 함께 있는 네 형제는 가난하게 되므로 그가 너와 함께 있는 거류민이나 동거인 또는 거류민의 가족의 후손에게 팔리면 48그가 팔린 후에 그에게는 속량 받을 권리가 있나니 그의 형제 중 하나가 그를 속량하거나 49또는 그의 삼촌이나 그의 삼촌의 아들이 그를 속량하거나 그의 가족 중 그의 살붙이 중에서 그를 속량할 것이요 그가 부유하게 되면 스스로 속량하되 50자기 몸이 팔린 해로부터 희년까지를 그 산 자와 계산하여 그 연수를 따라서 그 몸의 값을 정할 때에 그 사람을 섬긴 날을 그 사람에게 고용된 날로 여길 것이라 51만일 남은 해가 많으면 그 연수대로 팔린 값에서 속량하는 값을 그 사람에게 도로 주고 52만일 희년까지 남은 해가 적으면 그 사람과 계산하여 그 연수대로 속량하는 그 값을 그에게 도로 줄지며 53주인은 그를 매년의 삯꾼과 같이 여기고 네 목전에서 엄하게 부리지 말지니라 54그가 이같이 속량되지 못하면 희년에 이르러는 그와 그의 자녀가 자유하리니 55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종들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내 종이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47-55)

 

본문의 경우는 훨씬 더 심각한 경우인데, 가나안 땅에 거주하는 이방인이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종을 사게 되었을 때에 대해 다룹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동족도 아닌 이방인에게 팔려가는 것은 대단히 불행한 일입니다. 이방인에게 자신을 종으로 팔았다는 뜻은 우선 이스라엘 공동체가 올바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그가 자신을 동족이 아닌 이방인에게 팔았다면 비난과 조롱을 받을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속량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자신의 몸을 속량할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다시 부유하게 되어 스스로를 속량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이방인의 종이 된 이스라엘 사람을 속량하는 기본적인 책무는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있습니다. 사실은 그가 이방인의 종이 되지 않도록 돌볼 책임이 공동체에게 있었는데, 본문의 지침은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난 경우, 공동체가 그것을 되돌리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속량하는 사람을 고엘, 즉 구속자라고 부릅니다. 사람이 형제를 위해 고엘 제도를 실행하는 데는 상당한 희생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룻기에 나오는 나오미의 근족은 자신의 재산에 손해가 날 것을 우려하여 기업 무릎의 의무를 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고엘 제도의 의무를 지는 사람에도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가장 먼저 형제가 그 의무를 지고, 형제가 불가능하면 삼촌, 그 다음엔 조카, 그 다음엔 다음으로 가까운 친척에게 확대됩니다. 이 규례에 나타난 친족의 순서는 룻기에서 나타납니다. 보아스는 룻의 기업 무를 자로 자신보다 더 근족이 있음을 언급합니다. 종이 된 형제를 다시 속량하기 위해 내야 하는 속량 값은 희년을 기준으로 계산합니다. 토지를 무를 때 했던 방식대로, 처음 팔린 값에서 희년까지 남은 연수를 계산해서 돌려주어야 합니다. 27장에서 언급하는 바와 같이 사람마다 나이와 노동력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 값이 다를 수 있는데, 본문에서 그 부분을 강조하지는 않았습니다. 가장 먼저 스스로 속량하거나, 친족 중에서 속량해주지 못할 경우 그 좋은 희년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희년이 되면 종된 자신의 신분은 물론 잃어버렸던 토지도 원래대로 돌려받게 될 것입니다. 율법의 정신은 이들이 자유하게 되어 집으로 돌아갈 때도 풍성하게 쥐여 보내는 것입니다. 이들이 다시 가난 때문에 종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하라는 취지입니다. 심지어 이방인 중에 동거하는 사람들도 후대하여 기업을 주라고 명령합니다(46).

신약성경에서도 가난한 이웃을 향한 올바른 영성을 제시합니다. 야고보서 2:14-17은 믿음은 행함을 통해 나타나는데, 이웃이 헐벗고 있는데 도움을 주지 않는 것은 곧 죽은 믿음이라고 단정합니다. 참된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서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약 1:27). 이런 회년의 정신이 절정에 이른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입니다. 누가복음 4:18-19 에서 예수님께서 설교하실 때 이사야 61:1-3을 인용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시고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십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오심은 갇힌 사람들에게 참된 자유의 길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명확히 이해했던 사도들도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에 자신들이 메시아로 말미암은 종말 공동체라는 사실을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역사상 처음 나타났던 예루살렘 교회는 모두 자신의 소유를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는 이가 없었고, 자신의 것들을 팔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주는 유무상통의 공동체를 이뤘던 것입니다(행 2:42-47). 이런 점에서 교회 공동체로서 우리가 선포하는 복음은 희년의 복음인 것입니다. 사로잡힌 자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는 종말론적 희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루셨고, 예수님이 다시 이 땅으로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실 때, 참되고 온전한 희년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눅 4:21; 벧후 3:13). 이 종말론적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교회 공동체는 희년 공동체로서 우리 곁에 있는 가난한 이웃을 돌보고 섬기는 공동체적 책무를 온전히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난한 동족을 배려하라는 것은 명령이나 권고나 아닙니다. 속량받은 자의 마땅한 반응입니다. 사람을 사물 가치로 치환하고 부속품처럼 다루고, 성과 중심으로 사람을 해고하고, 타인의 몫을 빼앗고 타인을 억누르는 이 세상에서 구원을 받고 구별된 사람답게 대안적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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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25-02)


정직과 순종의 복을 경험하는 희년

레위기 25장 23-38절


 

대선에서 부동산은 큰 이슈였습니다. 어떤 정부든 쉽게 풀기는 어려운 고차방정식입니다. 부동산이 주거의 문제가 아니라 욕망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레위기의 ‘토지 무름’이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우리와 무관해 보이지만, 사실 이 시대 난제의 해법이 거기에 있지 않습니까?

 

  • 희년 제도의 가장 중요한 규정은 토지를 원래 소유주에게 돌려주는 것과 관련됩니다. 토지의 주인은 여호와이시기 때문에 모든 백성은 토지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할 뿐입니다. 어떤 이유든 토지를 매입한 사람은 희년이 되면 다시 원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이와 함께 구매했던 가옥에 대해서도 무르는 절차를 소개합니다.

 

희년의 토지 무릎(23-24)

땅에 대한 영구 매각 금지는 반환 여지를 둔 조치입니다. 그들에게 매각할 권한도 없습니다. 땅의 소유권이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이것은 소유권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가나안 문화에 물들지 말고 저항하라는 경보장치고, 땅의 독점과 지주의 횡포에서 불안한 약자를 보호하려는 안전장치입니다.

 

23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24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23-24)

 

이스라엘의 토지 제도에 대한 대원칙을 설명합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각 지파에게 그들의 인구수에 맞춰서 공평하게 분배해주신 땅입니다. 가나안 모든 땅은 하나님의 것이며, 각 지파는 하나님이 소유하고 계신 땅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순히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에 불과합니다. 심지어 이스라엘의 왕이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아합 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것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왕상 21장). 그런 이유 때문에, 혹 어떤 사람이 가난하게 되어 자신이 사용권을 가지고 있던 땅을 다른 사람에게 팔 경우, 땅에 대한 그들의 계약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몇 가지 방법으로 토지를 무르고 땅을 원주인에게 되돌리는 규칙이 있고, 그 규칙에 순종하여 땅을 돌려주어야 합니다.

 

토지 무릎의 원칙(25-28)

하늘 백성들은 토지 불로소득을 재산증식의 가장 손쉬운 수단으로 여기는 이 세상과 다르게 생각하고 살아야 거룩할 수 있습니다. 더 부해지지 않더라도, 그 부작용의 그늘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 참된 경건이고, 예수님의 영적 희년을 누리는 길이며, 진정한 이웃 사랑입니다.

 

25만일 네 형제가 가난하여 그의 기업 중에서 얼마를 팔았으면 그에게 가까운 기업 무를 자가 와서 그의 형제가 판 것을 무를 것이요 26만일 그것을 무를 사람이 없고 자기가 부유하게 되어 무를 힘이 있으면 27그 판 해를 계수하여 그 남은 값을 산 자에게 주고 자기의 소유지로 돌릴 것이니라 28그러나 자기가 무를 힘이 없으면 그 판 것이 희년에 이르기까지 산 자의 손에 있다가 희년에 이르러 돌아올지니 그것이 곧 그의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25-28)

 

이스라엘 자손 중에 토지를 판 경우, 토지를 무를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토지를 무르는 자는 ‘고엘’이라고 부르는데, ‘속량하는 자’(구속자) 혹은 ‘감아주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고엘은 크게 세 가지 경우에 사용됩니다.

첫째, 형제나 친족의 집과 토지를 대신 무르는 경우입니다. 형제의 집이나 토지가 다른 집안에 팔리거나, 그 형제의 가족이 종으로 팔릴 경우, 친족들이 대신 무를 의무가 있었습니다.

둘째, 자식 없이 죽은 형제의 대를 이어주는 사람입니다. 구약에서는 형사취수법에 대한 규례가 몇 차례 언급됩니다. 특별히 룻과 보아스의 관계에서 이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법률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행되었는지 알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합니다.

마지막 셋째는 억울하게 죽은 친족의 피를 갚아주는 피의 복수자입니다. 형제가 살해되면, 친족들은 형제를 죽인 자를 추격하여 피의 복수를 해야 합니다.

 

희년이 되면 모든 토지는 땅을 판 원주인에게 무조건 돌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그 전이라도 토지를 무르려고 하면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형제나 친족이 토지의 값을 치러주고 다시 무를 수 있습니다. 이 일을 감당할 친족은 근족으로부터 시작해서 순차적으로 의무를 집니다. 형제가 땅을 팔아버린 경우, 그 땅을 대신 사는 경우도 해당될 수 있고, 형제가 땅을 팔아야 할 상황이 되었을 때, 그 형제에게서 그 땅을 구입해서 관리하다가 희년이 되면 돌려주는 경우도 가능한 선택지입니다(렘 32:6-15).

둘째, 토지를 팔았던 사람이 다시 부요하게 되어 스스로 그 땅을 다시 구입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희년까지 남은 기간을 계산해서 그 값을 정합니다. 이 규례는 땅을 팔고 난 이후에 만약 땅을 되살 수 있는 능력이 생기면 기다리지 말고 즉시 그땅을 다시 되돌려야 함을 전제합니다.

셋째, 만일 땅을 대신 사줄 친족도 없고, 스스로 땅을 다시 구입할 능력도 없다면, 희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땅을 팔 때 희년까지 남은 기간에 근거해서 땅의 값을 정했기 때문에 희년이 되면 땅을 사용하던 사람은 땅을 판 사람에게 반드시 거저 주어야 합니다. 희년이 되어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을 되돌려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회복시켜주시는 은혜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개인의 재산권과 토지와 가옥의 사유화가 급격히 진행되었기 때문에 희년 제도 자체가 왕정 시대 이후부터는 거의 무력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가옥 무릎의 규칙(29-31)

부득이하게 판 토지를 되찾기 위해 희년까지 기다리지 말고 내 힘으로든 친족의 도움을 받든 되찾기를 힘써야 했습니다. 보상 가격은 다음 희년까지 남은 기간에 따라 결정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구매자에 대한 적절한 보상 문제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법은 최소한의 장치일 뿐입니다.

 

29성벽 있는 성 내의 가옥을 팔았으면 판 지 만 일 년 안에는 무를 수 있나니 곧 그 기한 안에 무르려니와 30일 년 안에 무르지 못하면 그 성 안의 가옥은 산 자의 소유로 확정되어 대대로 영구히 그에게 속하고 희년에라도 돌려보내지 아니할 것이니라 31그러나 성벽이 둘리지 아니한 촌락의 가옥은 나라의 전토와 같이 물러 주기도 할 것이요 희년에 돌려보내기도 할 것이니라(29-31)

 

가난한 사람이 판 것이 가옥일 경우에 대한 규례를 기록합니다. 본문은 가옥을 두 가지 범주로 나눕니다. 첫째는 성벽이 있는 성안에 있는 집이고 둘째는 성벽이 없는 마을에 있는 집입니다. 우선 성벽이 있는 성안에 있는 집을 관 경우는 만 1년 안에 다시 무를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만일 1년 안에 가옥을 다시 무르지 않으면 가옥은 산 사람의 소유로 확정됩니다. 땅과 달리 가옥은 희년이 되어도 다시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성벽이 없는 성 밖의 마을에 있는 가옥의 경우는 토지에 대한 규례에 준하여 적용합니다. 성 밖 마을에 있는 가옥의 경우 생업으로 토지를 경작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토지와 동일한 법을 적용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성벽 안에 있는 집은 가난하여 팔아야만 하는 경우로 보지 않고, 거주지 이전이나 이익을 위한 거래로 판단하는 것 같습니다.

 

레위인의 토지와 가옥(32-34)

예수께서는 우리가 죄 때문에 사탄에게 팔린 영적 기업을 되찾아주시는 ‘고엘’(구속자)이 되시려고 오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영적 희년에 참여했으며 또 영원한 안식의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적으로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구속자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교회가 젊은이들의 구속자가 되고, 사회 약자들의 구속자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32레위 족속의 성읍 곧 그들의 소유의 성읍의 가옥은 레위 사람이 언제든지 무를 수 있으나 33만일 레위 사람이 무르지 아니하면 그의 소유 성읍의 판 가옥은 희년에 돌려 보낼지니 이는 레위 사람의 성읍의 가옥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받은 그들의 기업이 됨이니라 34그러나 그들의 성읍 주위에 있는 들판은 그들의 영원한 소유지이니 팔지 못할지니라(32-34)

 

레위인이 가옥과 들판의 토지 등에 대한 규정도 나옵니다. 먼저 레위인의 성읍은 그들의 소유라고 말씀합니다. 레위 사람은 가옥이 성벽 안에 있든, 성벽 없는 마을에 있든 상관없이 언제든지 무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레위인이 부르지 않으면 희년이 될 때 반드시 돌려주어야 합니다.

34절은 레위인들이 거주하는 성읍 주위에 있는 들 같은 영원한 소유이기 때문에 매매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레위인들의 공동 소유는 가나안 땅에서 레위인들에게 주어진 48개 성읍과 그 주변 토지입니다. 레위인이 이를 갈 수 없는 이유는 그 땅은 하나님께서 레위 지파에게 주신 땅이고, 그곳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바친 가축을 돌보는 토지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동족을 위한 규례(35-38)

사랑은 준 만큼 돌려받거나 받을 것을 계산하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께 받은 과분한 사랑을 기억하여 상식과 기대를 뛰어넘는 호의를 베푸는 것입니다. 줄 수 있는 만큼 주면 되지 이자 놀이를 해서는 안 됩니다.

 

35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빈 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너는 그를 도와 거류민이나 동거인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되 36너는 그에게 이자를 받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 네 형제로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할 것인즉 37너는 그에게 이자를 위하여 돈을 꾸어 주지 말고 이익을 위하여 네 양식을 꾸어 주지 말라 38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며 또 가나안 땅을 너희에게 주려고 애굽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35-38)

 

마지막으로 희년 제도는 사람, 땅, 재물 등을 되돌려줌으로 부의 집중을 막고 빈부격차를 해소합니다. 가난에 빠진 자라 할지라도 그 가난에서 회복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희년을 제도로 주신 하나님의 의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구라도 가난 때문에 남의 종이 되지 않도록 하고, 가난하게 된 자라 할지라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데 있습니다. 가난한 동족이 있다면, 그들이 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들은 단순히 가난하게 된 사람이 아닙니다. 본문은 그들을 의도적으로 ‘형제’라고 부릅니다. 그들의 먹을 것을 공급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의 약해진 손을 다시 힘 있게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35절에서 빈손으로 있는 형제를 언급하는데, 여기서 빈손이란 그의 손이 흔들리는 상태, 즉 손에 힘이 없어서 가족을 부양할 수 없을 만큼 약해진 형제를 말합니다. 그런 형제의 손을 강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에게 돈을 꾸어주되 이자를 받고 주지 말고, 이익을 위해 양식을 꾸어주지 말라고 합니다. 36-37절에서 무려 세 번에 걸쳐 이 사실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고대 근동의 거의 모든 법률은 돈이나 음식을 꾸어주는 경우 받을 이자를 규정해두고 있습니다. 결국 가난한 사람은 높은 이자 때문에 오히려 더 가난하게 되고, 한 번 빌리기 시작하면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처음엔 돈을 꾸는 것이지만, 이자를 갖지 못하면 곧이어 가족을 종으로 보내게 됩니다.

하지만 본문은 가난한 동족에게서 결코 이자를 받지 할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굴 왕에서 종으로 살 때, 그들을 이끌어 내서 가나만 땅으로 인도하시고 그들에게 땅을 기업으로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불안의 시대입니다. 주거, 건강, 직장, 생계 등 각종 불안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불안은 욕망의 시녀라고 했던가. 불안이 욕망을 더 키우고 있습니다. 토지 무름과 이자 금지는 주거와 생계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이자, 사회적 배려였습니다. 이것이 그들만의 문제이고 해법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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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25-01)

순종에 따른 복

레위기 25장 1-22절


 

4월 22일 저녁 8시부터 10분간 소통했습니다. 지구 환경보호를 위한 ‘지구의 날’ 행사 중 하나입니다. 10분 소등이지만 이산화탄소 52톤의 감축 효과가 있었습니다. 인간과 자연, 모두의 공존을 위한 노력입니다. 안식년과 희년 역시 인간과 땅, 나와 너의 공존을 위한 날입니다.

 

  • 대부분의 이스라엘 절기는 7이라는 숫자와 관련됩니다. 안식일이 7일로 순환하는데, 7년으로 순환하는 것이 안식년이고, 7년 순환이 다시 7번 지난 이듬해는 희년이 됩니다. 안식일에는 사람이 안식해야 하지만, 안식년에는 사람뿐 아니라 땅도 안식해야 합니다. 희년이 되면 크게 나팔을 불어 자유를 선포하는데, 일곱 안식년이 지난 해의 대속죄일에 나팔을 불어 희년을 선포합니다.

 

안식년(1-7)

지금 교회는 생태계를 향한 우리의 태도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태도가 된다는 것을 충분히 강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안식뿐 아니라 구속의 때를 고대하며 탄식하는(롬 8:19-22) 자연계의 안식도 바라시기에, ‘거룩한’ 백성은 땅을 탐욕을 채우는 수단으로 삼는 이 세상과는 구별되도록 원주인의 뜻에 따라서 주인이 허락하는 방법으로 땅을 대해야 합니다.

 

1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3너는 육 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 년 동안 그 포도원을 가꾸어 그 소출을 거둘 것이나 4일곱째 해에는 그 땅이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가꾸지 말며 5네가 거둔 후에 자라난 것을 거두지 말고 가꾸지 아니한 포도나무가 맺은 열매를 거두지 말라 이는 땅의 안식년임이니라 6안식년의 소출은 너희가 먹을 것이니 너와 네 남종과 네 여종과 네 품꾼과 너와 함께 거류하는 자들과 7네 가축과 네 땅에 있는 들짐승들이 다 그 소출로 먹을 것을 삼을지니라(1-7)

 

안식년과 희년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법으로 시내산 아래에서 미리 선포됩니다. 안식년은 6년간 농사를 지은 발과 포도원의 농사를 쉬는 해입니다. 다시 말해 안식년의 가장 큰 목적은 땅의 휴경입니다. 땅은 7년마다 온전히 한 해의 안식을 누리는데, 결과적으로 땅은 1/7의 날을 안식일로 지키는 인간의 안식과 동일한 만큼의 기간을 안식한다는 산술적 계산이 나옵니다.

 

“여호와께 대한 안식”에서 전치사 ‘레’가 소유격으로 이해되면 ‘여호와의 안식’, 곧 그 안식이 여호와께서 주시는 안식이라는 의미가 가능합니다. 만일 그 전치사를 ‘~을 위해’로 이해하면 안식년과 희년의 안식은 여호와를 공경하고 높여드리기 위한 안식입니다(4). 둘 다 신학적으로 문제가 없으므로 우리는 후자를 취합니다. 또한 고대 근동의 국가들은 땅을 왕의 소유 아래 두었으나 희년법에서 확인되듯이 이스라엘에서는 땅의 소유자가 여호와 하나님으로 선언되고 있습니다(25:23). 이런 점에서 고대 이스라엘의 안식년과 희년 제도는 당시 이웃 나라의 비슷한 제도들과 근본적으로 신학적 의미와 취지가 달랐습니다. 23장에서 가장 먼저 언급했던 안식일 규례를 확장한 것으로 안식년과 희년은 안식과 자유의 선포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절기 규례의 절정에 해당합니다.

안식년은 7년이 되는 해를 일컫고, 희년은 7년이 되는 안식년을 다시 일곱 번 지난 다음 해, 즉 50년이 되는 해를 일컫습니다. 이 법률들은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규례입니다.

 

(1) 땅의 안식(1-5)

 

사람은 7일마다 하루씩 안식을 누려야 하듯, 땅도 7년마다 한 해씩 안식을 얻어야 합니다. 6년 동안 파종하고 농사를 지었다면 7년이 되는 해에 파종하지 말아야 하며, 과실수를 가꾸는 것도 금지됩니다. 가장 기본이 되는 개념은 사람이 1년을 쉬는 것이 아니라 땅이 1년 동안 안식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엿새 동안 힘써 모든 일을 행하고, 제7일에는 쉬라고 하신 안식일 규정과 동일하게, 6년 동안 파종하고, 제7년에는 쉬게 하는 것입니다. 쉬게 하는 것과 관련해서 본문은 특별히 포도원을 가꾸는 것에 대해 언급합니다. 포도원은 가지치기를 해주지 않은 채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둘 경우 최소한의 과실수를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누구나 자유로이 따서 먹을 수 있습니다. 대신 땅은 최소한의 양분만을 사용함으로써 실질적으로 땅이 힘을 다시 얻고 안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안식하는 것은 ‘여호와께 안식’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앞에서 안식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여호와를 위하여 혹은 여호와의 안식(여호와께 속한 안식)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2) 안식년의 소출(6-7)

 

안식년에 파종하거나 가꾸지 않고 묵혀두면, 땅이나 과수원은 자연적으로 소산을 낼 것입니다. 이렇게 나온 소출은 거두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거둔다는 말은 도구를 가지고 수확한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땅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못하고 필요한 대로 손으로 자유로이 먹을 수 있습니다. 가난한 이웃이나 나그네, 심지어 땅에 있는 들짐승들까지 그것으로 양식을 삼을 수 있습니다. 한 해 파종을 하지 않으면 거의 2년간의 식량이 제한된다는 뜻이지만, 믿음으로 순종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땅의 풍성함을 경험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을 것입니다. 이때 가난하여 품꾼이 된 형제들에게 자유를 허락했습니다.

 

희년(8-22)

성도가 진정으로 안식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참다운 안식은 생명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그분을 신뢰할 때 이뤄집니다. 희년 규례에 온전히 순종하려면 하나님의 돌보심을 신뢰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8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9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는 뿔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뿔나팔을 크게 불지며 10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11그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가꾸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12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너희는 밭의 소출을 먹으리라 13이 희년에는 너희가 각기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갈지라 14네 이웃에게 팔든지 네 이웃의 손에서 사거든 너희 각 사람은 그의 형제를 속이지 말라 15그 희년 후의 연수를 따라서 너는 이웃에게서 살 것이요 그도 소출을 얻을 연수를 따라서 네게 팔 것인즉 16연수가 많으면 너는 그것의 값을 많이 매기고 연수가 적으면 너는 그것의 값을 적게 매길지니 곧 그가 소출의 다소를 따라서 네게 팔 것이라 17너희 각 사람은 자기 이웃을 속이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18너희는 내 규례를 행하며 내 법도를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그 땅에 안전하게 거주할 것이라 19땅은 그것의 열매를 내리니 너희가 배불리 먹고 거기 안전하게 거주하리라 20만일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가 만일 일곱째 해에 심지도 못하고 소출을 거두지도 못하면 우리가 무엇을 먹으리요 하겠으나 21내가 명령하여 여섯째 해에 내 복을 너희에게 주어 그 소출이 삼 년 동안 쓰기에 족하게 하리라 22너희가 여덟째 해에는 파종하려니와 묵은 소출을 먹을 것이며 아홉째 해에 그 땅에 소출이 들어오기까지 너희는 묵은 것을 먹으리라(8-22)

 

50년째 해는 희년입니다. 희년은 해방과 자유의 해입니다. 희년은 인간을 죄에서 해방시켜 준 속죄일에 시작하였으며, 이 해에는 모든 땅을 원주인에게로 돌려주고 노예들도 해방해야 했습니다. 땅과 노예의 안식이 모두 이루어집니다.

 

(1) 희년의 선포(8-12)

 

희년은 일곱 안식년이 지난 이듬해입니다. 실질적으로 49년째인지 50년째인지에 대한 논의가 있는데 이는 2년을 쉬어야 하는 것과 파종하는 시기를 포함하면 무려 3년간이나 아무런 수확 없이 살아야 하기 때문에, 실질적인 생존이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희년은 7번째 안식년이 지난 다음 해 7월 10일 대속죄일에 희년의 나팔을 불어서 선포합니다. 희년의 의미가 자유와 해방에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의 죄를 사하는 대속죄일에 희년을 선포한 것입니다.

희년의 나팔을 ‘요벨’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이 희년을 뜻하는 고유명사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자유와 해방을 뜻합니다. 희년은 단순히 일하지 않는 날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리며 자유를 선포하는 날로 이해해야 합니다(10).

 

(2) 땅의 거래(13-17)

 

토지 소유권은 희년을 기준으로 원래 소유주에게 돌아갑니다. 50년을 지내다 보면 여러 이유들로 땅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야 하는 경우들이 있을 텐데, 이 경우 소유권이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용권이 넘어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땅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희년이 되면 땅의 사용권을 가지고 있던 사람에게서 원 소유주에게로 땅이 자동적으로 반환되기 때문에, 토지의 가치를 결정할 때도 희년이 기준이 됩니다. 그 땅의 평균 생산량과 함께 1년까지 남은 햇수를 기준으로 땅의 값을 정합니다. 이로 볼 때 사회, 경제시스템이 희년을 중심으로 정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본문 17절은 땅을 매매함에 있어서 중요한 원리를 강조하는데, 그것은 이웃을 속이지 말고 정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3) 희년 명령과 약속(18-22)

 

희년은 무려 3년이나 파종한 것을 먹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신앙 고백적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희년을 잘 지키면 하나님께서 그 삶을 돌보시고 그 땅에서 안전하게 거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실제로 희년을 지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안식년 때 파종하지 않고 그 이듬해 희년이 오면 또 파종하지 않는 것이고, 51년째가 되어 비로소 파종하면, 결과적으로는 52년째가 되어야 수확하기 때문에 만 3년 정도를 수확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희년이 제대로 시행된 적이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희년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먹여주시고 돌보신다는 사실을 신뢰하고 공동체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가는 장치, 신앙고백입니다. 파종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용감하게 안식을 선택하면, 하나님께서 오히려 더 안전하게 하시고 더 많은 열매를 얻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농사를 잘 지어 먹고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광야 시대 하늘의 만나와 메추라기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먹여주심을 경험하며 살았던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희년이 제대로 실행되었다면 이스라엘에 사회정의가 실현되었을 것이요, 너무 가난한 자도, 너무 부자도 없고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이루어갔을 것입니다. 역대하 36:21은 이스라엘이 안식년을 제대로 지키지 않음으로 인해 70년의 포로 기간을 통해 땅이 안식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왕정 시대를 약 500여 년 정도로 계산하고 그에 따라 열 번의 희년이 지났고, 총 70번의 안식년이 지났음을 대략적으로 산정한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셔서 통치하는 종말의 때가 되면 희년을 선포하고, 모든 이에게 자유를 선포하게 될 것입니다(사 61:1-3). 그리고 그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전히 성취되었습니다(눅 4:17-21).


삶의 터전이자 재화인 땅을 쉬게 하거나 돌려주는 것은 이해타산으로 따질 수 없는 명령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공존’을 말씀하십니다. 교회의 공유가 공명되어 세상의 칭송을 이끌어 낸 것처럼, 오늘 우리가 성경이 말하는 회년 정신을 구현한다면 세상의 변혁을 가져오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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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24-01)


꺼지지 않는 등잔불과 하나님의 떡

레위기 24장 1-9절


 

대부분 사람들이 관계를 굉장히 힘들어하고, 또 관계 가운데서 오는 문제 때문에 많은 어려움들을 호소합니다. 가장 중요한 관계는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면 우리에게 기쁨을 찾아 볼 수 없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정상적인 그런 기쁨의 관계를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회복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진정하게 사랑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때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될 수 있습니다.

 

  • 등잔대와 진설상의 제작법, 향료 제조법, 그리고 이것들의 기본적인 사용법과 관리법은 1차로 출애굽기에서 설명되었습니다. 여기서 더 상세한 지침들이 내려집니다. 율법들을 공부할 때 오경 전체의 흩어진 관련 법규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 재차 확인됩니다. 이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저주하고 모독한 사건에서 비롯된 동해동형법이 선포됩니다.

 

등잔대와 진설병 상의 관리(1-9)

예배의 현장은 예배당만이 아닙니다. 일상도 일터도 예배의 자리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예배의 영성입니다. 예배의 영성은 교회 안에서만 아니라 밖에서도, 성직자만 아니라 성도에게도, 의식만 아니라 언어에서도, 대신(對神) 관계만 아니라 대인(對人) 관계에서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불을 켜기 위하여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네게로 가져오게 하여 계속해서 등잔불을 켜 둘지며 3아론은 회막안 증거궤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불을 정리할지니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 4그는 여호와 앞에서 순결한 등잔대 위의 등잔들을 항상 정리할지니라 5너는 고운 가루를 가져다가 떡 열두 개를 굽되 각 덩이를 십분의 이 에바로 하여 6여호와 앞 순결한 상 위에 두 줄로 한 줄에 여섯씩 진설하고 7너는 또 정결한 유향을 그 각 줄 위에 두어 기념물로 여호와께 화제를 삼을 것이며 8안식일마다 이 떡을 여호와 앞에 항상 진설할지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이요 영원한 언약이니라 9이 떡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리고 그들은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먹을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 그에게 돌리는 것으로서 지극히 거룩함이니라 이는 영원한 규례니라(1-9)

 

하나님께서는 절기에 대한 규레를 다 말씀하시고 난 후에, 성막에 등잔과 진설병에 원하는 규례를 말씀하십니다. 성막에서 특별히 등잔과 진설병에 관한 말씀을 하시는 것은 이것이 성도들의 생활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 등잔불(1-4)

 

등잔대의 제작법과 관리법은 성막 건설 기사인 출애굽기 25:31-40, 37:17-24에서 상세하게 주어집니다. 현재의 본문은 거기서 빠진 그 기물들의 자세한 관리법과 사용법을 보충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스라엘의 국장에 그려진 등잔대가 역사적으로 유대인들과 국가 이스라엘에게 주는 의미는 중대합니다. 등잔대에서 밝게 빛나는 불빛은 영원히 빛이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상징했을 것입니다. 성소 안에는 세 가지 기구가 있습니다. 가장 안쪽에 분향단, 북쪽에는 등잔대(메노라)가 있고, 남쪽에는 진설병 상이 있습니다. 제사장은 성소 안에 들어가면 이 세 가지 기구들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이런 관리 규례를 소개합니다. 등잔대(4)는 무려 1달란트짜리 순금으로 만든 것입니다(약 34kg). 제사장은 항상 등잔대 불을 켜 놓아야 했기 때문에 제사장은 매일 성소로 들어가서 등잔대에서 나오는 재와 그을음 등을 청소해야 했을 것입니다. 등잔대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메노라’는 몇몇 자그마한 부속 비품과 더불어 순금 1달란트(34kg)로 만들어진(출 25:39; 37:24) 비품입니다. 금 등대의 일곱 분지 위에는 일곱 개의 등잔이 놓여 있습니다. 여기에는 감람나무 열매에서 짜내 불순물과 찌꺼기를 철저히 제거한 가장 깨끗한 기름을 채워 불을 밝힙니다(2). 아론은 내성소의 비품을 관리하는 총책임자로금 등대의 불을 언제나 밝힐 책무가 있습니다. 제사장들은 아침마다 등잔대 위에 타고 남은 재를 청소하고 심지를 갈아주어야 합니다(3). 2절은 “계속해서” 불을 켜두라 명령합니다. 이때 등잔대의 불을 하루 종일 지폈는지, 저녁부터 아침까지만 지폈는지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다수 학자들은 3절에 근거하여 낮에는 등불을 켜지 않고 저녁부터 아침 동이 틀 무렵까지 불을 밝혔을 것으로 봅니다. 희박 내부는 삼중 내지 사중의 덮개로 덮여 있어 자연 채광이 전혀 되지 않은 캄캄한 공간이므로 24시간 불을 켜놓아야 했을 것입니다.

 

(2) 진설병(5-9)

 

진설병(5-9)은 진설, 즉 펼쳐둔 떡이라는 뜻이지만, 정식 명칭은 ‘얼굴의 떡’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뜻하는 말로 하나님의 임재와 언약의 떡임을 말합니다. 8-9절에 따르면 제사장은 떡을 규칙적으로 진설해야 했고, 이 떡은 거룩한 것으로 제사장에게만 허락되었습니다. 실제 열두 개의 떡을 두 줄로 쌓아야 했기 때문에 6개의 떡을 쌓아 올렸을 것입니다. 각 줄 위에 정결한 유향이 첨가되었습니다. 떡은 부풀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설하고 나면 금방 딱딱하게 굳었을 것입니다. 일주일 만에 제사장이 새로운 떡으로 진설한 다음 가지고 나온 떡을 새롭게 조리해서 먹어야 했을 것입니다. 떡의 크기는 2/10에바 즉 4.4리터 정도의 크기였기 때문에 실제로는 상당히 무겁고 컸을 것입니다. 진설병상과 등잔대는 솔로몬 성전에 이르렀을 때 그 크기는 유지되었으나 숫자가 각각 열 개로 늘어났습니다(대하 4:8; 왕상 7:49). 다윗이 사울의 칼을 피해 도망치다가 놉 땅에서 진설병을 먹는 상황이 일어나는데, 이로 볼 때 상황에 따라 율법의 정신에 따라 유연하게 적용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혼혈인의 신성모독과 처벌(10-14)

사건의 엄중함은 피의자가 혼혈이기 때문도 아니고 다툼의 정황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저주하려고 멋대로 썼기 때문입니다. 신적 모독은 신적 살인에 해당하기에 그의 징벌은 정당했습니다. 의식(儀式)의 정결은 물론이고 일상의 언어도 정제되고 절제되어야 합니다.

 

10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의 어머니가 이스라엘 여인이요 그의 아버지는 애굽 사람인 어떤 사람이 나가서 한 이스라엘 사람과 진영 중에서 싸우다가 11그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며 저주하므로 무리가 끌고 모세에게로 가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슬로밋이요 단 지파 디브리의 딸이었더라 12그들이 그를 가두고 여호와의 명령을 기다리더니 13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4그 저주한 사람을 진영 밖으로 끌어내어 그것을 들은 모든 사람이 그들의 손을 그의 머리에 얹게 하고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지니라(10-14)

 

진중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할 경우 돌로 쳐서 죽이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게 부르지 말라는 기본적인 의도가 있습니다(출 20:7).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일로 법정 등에서 사형을 당하는 경우가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열왕기상 21:10,13은 포도원 주인나봇을 이세벨이 죽이는 과정에서도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였다는 증인을 세워서 죽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마태복음 26:65-66에서는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게 만든 죄도 신성모독이고, 스데반이 죽음을 당하게 한 것 역시 신성모독입니다(행 6:11-14). 저주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를 진영 밖으로 끌어내고, 손을 그 머리에 앉은 이후 온 회중이 돌로 쳐서 죽여야 했습니다. 본문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 사건 당사자를 진영 밖으로 끌어내서 현장에서 저주의 소리를 들었던 사람들로 하여금 돌을 던져 사형을 집행하도록 명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저주하는 자도, 그 저주하는 말을 들은 자도 모두 죄의 책임을 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소리를 듣고도 가만히 있으면 그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데는 거류민이든 본인이든 상관없이 동일한 형벌에 처해집니다. 한편 돌로 쳐서 돌무더기를 쌓는 방식은 고대 사회에서는 이정표나 일종의 기억장치로서 역할 했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자신도 그 죄에 참여했음을 고백하고, 돌을 들어 공적인 심판 행위를 함으로 죄를 제거해야 합니다. 실제 어떻게 돌무더기를 쌓는지에 대한 자세한 언급을 찾아보기는 어렵지만, R. K. 헤리슨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죄인을] 눕힌 다음 머리를 큰 돌로 누르고 다른 부위는 더 작은 돌들로 덮어서 케른(cairn: 기념이나 이정표로서의 원추형 들무덤 -역주)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이 절차는 의식적 더럽힘이란 사고를 누구도 초래하는 것을 막으며 회중으로 하여금 돌 무더기를 통하여 범했던 죄악을 기억하도록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은 여전히 중대한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5:34-37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말라고 하고, 야고보서 3:9은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 즉 하나님을 찬송함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들을 저주하는 일들이 동시에 일어난다고 경고합니다.

 

백성의 정결을 위한 제의(15-21)

하나님 모독만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상해도 엄히 다루십니다. 가해자에게는 피해를 축소하거나 은폐하지 못하도록 하고 피해자에게는 과다한 자의적 보복을 억제하여 보복의 악순환을 끊게 하십니다. 강자의 전황을 막고 모든 생명이 존중받게 하십니다. 생명보다 더 한 가치는 없습니다.

 

15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그의 하나님을 저주하면 죄를 담당할 것이요 16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니라 거류민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죽일지니라 17사람을 쳐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요 18짐승을 쳐죽인 자는 짐승으로 짐승을 갚을 것이며 19사람이 만일 그의 이웃에게 상해를 입혔으면 그가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할 것이니 20상처에는 상처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상해를 입힌 그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 21짐승을 죽인 자는 그것을 물어 줄 것이요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일지니(15-21)

 

본문은 소위 동해복수법의 패턴을 가집니다. 동해복수법은 재판 상황에서 백성들을 지도할 규범으로 주어졌습니다(출 21:23-25 신 19:21). 전체는 대칭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저주한 자에 대한 사형 명령이 16절과 23절에 나오고, 사람을 죽인 자에 대한 판결이 17절과 21절에 나옵니다. 그리고 짐승을 죽인 자가 18절과 21절에서 반복되고, 전체 이야기의 중심에는 19절과 20절에서 반복적으로 말하는 내용으로, ‘그가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하라’는 동해복수법의 규정 말씀이 있습니다. 동해복수법은 잔인한 복수를 허락한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정신을 따라 범한 죄에 알맞은 형벌을 받도록 법의 형평성을 고려하면서도 죄 지은 사람을 보호하는 법령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실제 실행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습니다. 신명기 25:11, 12은 두 사람이 싸울 때 한 남편의 아내가 상대방의 음낭을 잡으면손을 찍어버리라고 말씀합니다(참조. 민 16:14). 동해복수법은 고대나 현대의 사회적 상황으로 볼 때 실질적 불평 등이 일상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잘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권력, 신분, 재물 등의 이유로 인해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사건에 맞는 징벌을 하기보다는 그 이상의 징벌을 내리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오늘날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동해복수법은 징벌의 한계를 정해줌으로 형평성과 함께 복수/심판을 행함에 있어서 자비의 원리가 더 중요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한 법률입니다. 그러나 동해복수법의 원칙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개인의 윤리와 재판의 윤리를 나눠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개인 윤리에 따르면 동해복수법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5:38-39에서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구하는 자에게 주고 꾸고자 하는 자를 거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재판의 경우는 다릅니다.

 

공평한 처벌 규정(22-23)

우리는 정당한 처벌은 시행하되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의 진노에 맡기고 인내할 때 주의 온전하심을 본받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정의가 실현되도록 기도하고 참여하되 지나치게 팽창한 인간의 욕망과 진영논리에 의해 굽어진 잣대는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22거류민에게든지 본토인에게든지 그 법을 동일하게 할 것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 23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니 그들이 그 저주한 자를 진영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쳤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였더라(22-23)

 

저주한 자는 거류민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상관없이그 법을 동일하게 적용해야 합니다. 이 본문은 신성모독죄를 지은 자에 대해 모세가 돌을 던져 심판하도록 하는 이야기로 다시 돌아갑니다.


예배당만 부지런히 드나든다고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막 안에 갇히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함께 드리는 공(共) 예배는 물론 세상 속 공(公) 예배도 중요합니다. 예배의 영성은 일상의 성실로, 언어의 성화로, 공정의 적용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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