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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25-02)


남 유다 멸망과 회복의 서광

열왕기하 25장 8-30절


김기석 목사는 그의 책 『아슬아슬한 희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희망은 그렇게 늘 위태롭다.’, ‘희망은 낙관적 전망이 아니라, 기어코 살아내기 위한 안간힘이다.’ 너무 쉬운 희망은 희망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아슬아슬하기에 희망하는 것입니다.

 

  • 시드기야 왕이 바벨론에게 반역하자 느부갓네살 왕은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와 2년간 포위합니다. 오랜 포위로 인한 심한 기근과 성벽의 파괴로 예루살렘 성은 함락됩니다. 시드기야는 도망가다가 바벨론 왕에게 잡혀 아들들이 죽임을 당합니다. 다윗 왕조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가 실각하면서 다윗 왕조는 막을 내리고 이스라엘은 망하게 됩니다. 열왕기 저자는 특별히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에 대해 관심을 자기고 리고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의 파괴(8-12)

 

젖과 꿀이 흐르는 영광의 땅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떠나시면 황량한 폐허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없는 부요보다 하나님을 모신 가난이 더 큰 축복입니다. 바벨론은 예루살렘을 침공한 후에 다시 일어설 수 없도록 성전과 왕궁 그리고 귀인 집에 불을 질러버립니다.

 

8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열아홉째 해 오월 칠일에 바벨론 왕의 신복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9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10시위대장에게 속한 갈대아 온 군대가 예루살렘 주위의 성벽을 헐었으며 11성 중에 남아 있는 백성과 바벨론 왕에게 항복한 자들과 무리 중 남은 자는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모두 사로잡아 가고 12시위대장이 그 땅의 비천한 자를 남겨 두어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와 농부가 되게 하였더라(8-12)

 

시드기야 왕을 잡은 바벨론 왕은 5월 7일에 그의 부하인 느부사라단을 예루살렘으로 보냅니다. 이때는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나서 한 달 정도 지난 후로 주전 586년 7월 어간입니다. 그는 예루살렘 함락 후 정리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오자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민가들과 귀족들의 집까지 모조리 태워버렸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벽을 모두 헐어버렸습니다. 성벽이 없으면 전혀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느부사라단은 예루살렘을 더 이상 사람들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런 예루살렘에 대한 철저한 파괴는 이미 예언서에 예고되어 있었습니다(예, 이사야 3:16-26; 에스겔 7장). 예루살렘에 있는 백성들과 항복한 자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이전처럼 가난한 백성들만 그 땅에 남겨두어 포도원 관리인과 농부가 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 땅에서 경작하는 것은 허락하고, 완전히 사람이 살지 못하는 폐허로 두자는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13-17)

건물이든, 장식이든, 책이든, 관습이든 그 안에 복임이 없고 하나님께서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것만 영원한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전쟁의 승자가 패자국의 신상을 훔쳐가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유다에는 신상이 없었기 때문에 대신 성전 기명들을 탈취해 갔습니다.

 

13갈대아 사람이 또 여호와의 성전의 두 놋 기둥과 받침들과 여호와의 성전의 놋 바다를 깨뜨려 그 놋을 바벨론으로 가져가고 14또 가마들과 부삽들과 부집게들과 숟가락들과 섬길 때에 쓰는 모든 놋그릇을 다 가져갔으며 15시위대장이 또 불 옮기는 그릇들과 주발들 곧 금으로 만든 것이나 은으로 만든 것이나 모두 가져갔으며 16또 솔로몬이 여호와의 성전을 위하여 만든 두 기둥과 한 바다와 받침들을 가져갔는데 이 모든 기구의 놋 무게를 헤아릴 수 없었으니 17그 한 기둥은 높이가 열여덟 규빗이요 그 꼭대기에 놋 머리가 있어 높이가 세 규빗이요 그 머리에 둘린 그물과 석류가 다 놋이라 다른 기둥의 장식과 그물도 이와 같았더라(13-17)

 

느부사라단은 여호와의 성전을 부수고 야간과 보아스로 불리던 성전의 두 놋 기둥과 받침들과 성전의 놋 바다를 부수어서 바벨론으로 가져갑니다. 갖고 가기에는 너무 크기 때문에 조각내어 들고 간 것입니다. 14절에서는 가마들, 부삽들, 붑집게들 등 성전에서 제사드릴 때 쓰던 모든 놋그릇을 가져갔다고 기록합니다. 불 옮기는 그릇들과 금과 은으로 만든 모든 그릇을 가져갑니다. 여호야긴 때 가져가고 남은 것을 이번엔 놋그릇과 함께 모두 가져가버렸습니다. 16-17절은 여호와 성전의 두 기둥인 야긴과 보아스와 놋 바다에 대한 부연 설명으로, 화자는 그것들의 놋 무게가 셀 수 없다는 것과 그 크기와 모양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합니다. 이것은 솔로몬 시대의 영화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이제 그 영화가 사라지고 철저히 파괴되고 있다는 것을 대조함으로써 이스라엘이 왜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는지 반성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장엄하던 성전 기둥이 무너지고 조각조각 잘려나가는 것을 보면서, 그 시대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영광이 사라진 것과 여호와께서 더 이상 그들을 돌보시지 않는다는 아픔에 통곡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두 기둥의 파괴는 이스라엘에 있던 영광이 사라졌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자는 두 번이나 반복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이런 여호와 성전의 파괴는 이미 예레미야 선지자나 에스겔 선지자에 의해 예언된 것이 성취된 것입니다. 에스겔 8장에서 에스겔은 환상을 통해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해지는 온갖 우상숭배를 보았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부정하게 된 예루살렘 성전을 헐어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십니다. 고대 사회에서 전쟁에서 지고 신전이 헐리는 것은 그 땅의 신이 패배하고 수치를 당한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 범죄하고 부정해진 유다와 예루살렘과 성전을 버리고 심판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인간의 손에 파괴되고 모욕당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의 죽음(18-21)

짧은 영화와 권력을 누리다가 영원한 멸망을 자초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에 힘 있는 사람들의 눈치나 보고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원수의 손에 붙잡히고 처형하도록 버려둡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을 의지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18시위대장이 대제사장 스라야와 부제사장 스바냐와 성전 문지기 세 사람을 사로잡고 19또 성 중에서 사람을 사로잡았으니 곧 군사를 거느린 내시 한 사람과 또 성 중에서 만난 바 왕의 시종 다섯 사람과 백성을 징집하는 장관의 서기관 한 사람과 성 중에서 만난 바 백성 육십 명이라 20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그들을 사로잡아 가지고 리블라 바벨론 왕에게 나아가매 21바벨론 왕이 하맛 땅 리블라에서 다 쳐죽였더라 이와 같이 유다가 사로잡혀 본토에서 떠났더라(18-21)

 

예루살렘과 여호와 성전을 파괴한 시위대장은 대제사장과 부제사장과 성전 문지 지 등 종교 지도자들을 체포합니다. 예루살렘 성중에 남아있는 위협이 될 만한 인물들은 모두 잡아들입니다. 군사를 가진 내시나 왕의 시종들과 군대 장관의 서기관과 군사 60명 등 끝까지 저항하고 반란을 꾀하며 남아있는 자들을 모두 잡아들이고, 이들을 데리고 립나에 주둔하고 있는 바벨론 왕에게 갑니다. 바벨론 왕은 이들을 모두 죽여 버립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은 반란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느부사르단과 바벨론 왕은 마지막 반란의 불씨까지도 완전히 제거합니다. 21절 하반절은 유다 멸망의 결론으로 이렇게 유다가 그들의 땅에서 떠났습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민족을 쫓아내고 주신 그들의 땅에서 쫓겨나고 제거된 것입니다. 이것은 신명기 28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앞에 놓아주신 축복의 길과 멸망의 길 중에서 멸망의 길을 택한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신명기 28:30-37;47-57;63-67에서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 땅에서 쫓겨날 것이 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경고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자기 눈에 좋은 대로, 주변 나라들이 하는 대로 우상을 따르며 불의를 행하고, 약자를 억압하고 수탈하며 지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서 날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여호와께 제사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지만, 삶은 여호와와 무관하게 살았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땅도 하나님의 백성이란 이름도 빼앗기게 된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에 대한 결론입니다.

 

그달리야의 반란(22-26)

세상이 다 끝나버린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베어죽은 그루터기와 같은 곳에서도 다시 희망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벌하셨지만 그 중에서도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신 것은 다윗에게 하신 영원한 나라에 관한 약속을 잊지 않으셨다는 징표입니다.

 

22유다 땅에 머물러 있는 백성은 곧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남긴 자라 왕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달리야가 관할하게 하였더라 23모든 군대 지휘관과 그를 따르는 자가 바벨론 왕이 그달리야를 지도자로 삼았다 함을 듣고 이에 느다니야의 아들 이스마엘과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느도바 사람 단후멧의 아들 스라야와 마아가 사람의 아들 야아사니야와 그를 따르는 사람이 모두 미스바로 가서 그달리야에게 나아가매 24그달리야가 그들과 그를 따르는 군사들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너희는 갈대아 인을 섬기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이 땅에 살며 바벨론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가 평안하리라 하니라 25칠월에 왕족 엘리사마의 손자 느다니야의 아들 이스마엘이 부하 열 명을 거느리고 와서 그달리야를 쳐서 죽이고 또 그와 함께 미스바에 있는 유다 사람과 갈대아 사람을 죽인지라 26노소를 막론하고 백성과 군대 장관들이 다 일어나서 애굽으로 갔으니 이는 갈대아 사람을 두려워함이었더라(22-26)

 

22-30절은 열왕기의 부록으로 그달리아의 반란과 여호야긴의 석방이라는 두 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22절에서 바벨론 왕이 유다 땅에서 살게 한 사람들을 위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달리야를 총독으로 세웁니다. 바벨론이 유다의 통치권을 갖고 그 지역의 관리자를 임명한 것입니다. 그달리야는 예레미야 26:24에 예레미야를 여호야김의 손에서 지켜낸 인물이며, 그 뒤에 예루살렘에서 친바벨론 그룹을 대표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총독으로 적합하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달리야가 총독으로 입명되자 그 땅에 남아 있던 군대 장관들과 군인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이것은 그달리야를 중심으로 유다를 다시 일으키고 안정시키려는 시도입니다. 그달리야는 이들에게 바벨론 왕을 섬기며 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을 섬기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합니다. 즉, 반란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 말고 현 상태에 순응하여 살면 안전하게 살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레미야 40장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포도주와 과일과 기름을 모아 저장하며 얻은 성읍에서 살 수 있다고 보장해줍니다. 그런데 왕족, 즉 남아있던 다윗의 후손인 이스마엘이 그달리야의 친바벨론 정책에 반감을 품고 부하 열 명을 데리고 와서 그달리야를 죽이고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바벨론 사람들을 죽입니다. 이스마엘이 달랑 열 명으로 바벨론에게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유다와 예루살렘에 남아 살면서 후일을 기약하고 있던 유다 사람들, 즉 군인들과 군대 장관들은 바벨론의 보복과 응징을 두려워하여 모두 애굽으로 도망가 버립니다. 소위 다윗의 후손인 이스마엘의 어리석은 반란 사건으로 그나마 유다 땅에 남아있던 희망마저 산산이 부서지고 이들은 애굽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유다 역사의 마지막이 이렇게 역출애굽으로 끝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들의 땅에서 쫓겨나 다시 애굽에서 거류민으로 이방인으로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살게 된 것입니다.

 

여호야긴이 37년 뒤에 풀려남(27-30)

다 죽어가는 썩은 고목에서도 꽃이 피는 것은 새로운 희망에 대한 단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징계하시면서도 자비를 베푸십니다. 여호야긴의 복권은 형벌의 때가 저물고 회복의 여명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의로운 해가 떠오를 것입니다(말라기 4:2).

 

27유다의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 지 삼십칠 년 곧 바벨론의 왕 에윌므로닥이 즉위한 원년 십이월 그 달 이십칠일에 유다의 왕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놓아 그 머리를 들게 하고 28그에게 좋게 말하고 그의 지위를 바벨론에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왕의 지위보다 높이고 29그 죄수의 의복을 벗게 하고 그의 일평생에 항상 왕의 앞에서 양식을 먹게 하였고 30그가 쓸 것은 날마다 왕에게서 받는 양이 있어서 종신토록 끊이지 아니하였더라(27-30)

 

이 단락은 37년 뒤의 이야기로 열왕기 저자는 갑자기 시간을 건너뛰어 여호야긴 왕이 감옥에서 풀려나온 이야기를 합니다. 여호와긴은 감옥에서 풀려나 왕의 호의를 받으며 왕의 식탁에서 식사를 하며 좋은 대접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여호야긴의 신세가 좋은 쪽으로 바뀌는 것을 통해 열왕기 저자는 하나님께서 유다의 포로 생활도 끝내시고, 곧 그들의 땅에 돌아가게 하실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열왕기 저자는 비록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 멸망했지만,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끝나지 않았다는 희망의 메시지로 열왕기를 끝내고 있는 것입니다.


열왕기 사가(史家)는 열왕기서를 마감하면서 어설픈 희망의 결론을 내리지 않습니다. 너무 크게 희망을 말하지도 많습니다. 열린 결말, 열린 희망입니다. 참된 희망은 모든 가짜 희망과 긍정의 힘 따위를 버릴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철저한 절망 속에서 피어난 가느다란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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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25-01)

 


바벨론 포로가 된 여호아하스 왕

열왕기하 24장 8절-25장 7절


역사가는 시인이나 수필가가 아닙니다. 감정을 드러내어 글을 쓸 수 없습니다. 나라의 몰락을 기록하는 열왕기 사가의 진술이 냉정하리만큼 사실적입니다. 그래서 더욱 슬픕니다. 어머니와 함께 끌려가는 아들, 눈앞에서 아들들의 죽음을 본 아비의 마음이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아파하는 한 분이 더 계십니다.

 

  • 요시야 왕 이후 하나님께서 유다에게 하신 심판의 말씀들이 실행되기 시작합니다. 요시야의 아들인 여호아하스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3개월만 왕위에 있다가 애굽에 의해 폐위됩니다. 여호야김 왕도 바벨론의 속국으로 지내다 바벨론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고, 그로 인해 폐위 되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갑니다. 그리고 여호야김의 아들인 여호야긴이 왕위에 오릅니다. 이렇게 요시야 이후 유다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급격하게 망하고 있었습니다.

 

여호야긴의 등극(8-9)

앞선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역사의 과오를 답습할 수밖에 없습니다. 똑같은 아픔의 역사가 되풀이 됩니다. 이것을 명심하고 역사를 바르게 세워나가야 합니다. 유다는 과거의 잘못에 대해 교훈을 얻지 못하고 점점 헤어날 수 없는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듭니다.

 

8여호야긴이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십팔 세라 예루살렘에서 석 달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느후스다요 예루살렘 엘라단의 딸이더라 9여호야긴이 그의 아버지의 모든 행위를 따라서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8-9)

 

여호야긴은 여호야김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사이에 왕위에 올라서 3개월 밖에 통치를 못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느후스이고 예루살렘 엘라단의 딸로 소개됩니다.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게 통치하다가, 재위 3개월 만에 예루살렘을 치러 온 느부갓네살 왕에게 항복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갑니다. 그만큼 유다는 나라의 정세가 불안했다는 것입니다. 그도 자신의 아버지의 모든 행위를 따라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하던 정책에서 돌아서지 않고 여전히 우상숭배와 불의한 행위를 했다는 의미입니다. 열왕기서는 역사서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닮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단순한 역사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뜻을 필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열왕기서를 통해 하나님의 깊은 뜻을 깨닫도록 해야 합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왕과 백성들(10-17)

하나님께서는 식언(食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언약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약속의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하나님뿐만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말을 함부로 하거나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에 비추어 항상 자신을 경성합시다.

 

10그 때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신복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그 성을 에워싸니라 11그의 신복들이 에워쌀 때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도 그 성에 이르니 12유다의 왕 여호야긴이 그의 어머니와 신복과 지도자들과 내시들과 함께 바벨론 왕에게 나아가매 왕이 잡으니 때는 바벨론의 왕 여덟째 해이라 13그가 여호와의 성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 보물을 집어내고 또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이 만든 것 곧 여호와의 성전의 금 그릇을 다 파괴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14그가 또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과 모든 지도자와 모든 용사 만 명과 모든 장인과 대장장이를 사로잡아 가매 비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었더라 15그가 여호야긴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왕의 어머니와 왕의 아내들과 내시들과 나라에 권세 있는 자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16또 용사 칠천 명과 장인과 대장장이 천 명 곧 용감하여 싸움을 할 만한 모든 자들을 바벨론 왕이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17바벨론 왕이 또 여호야긴의 숙부 맛다니야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고 그의 이름을 고쳐 시드기야라 하였더라(10-17)

 

여호야긴이 왕위에 올랐을 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군대가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였습니다. 본문에서 ‘올라오다’란 의미는 ‘전쟁하기 위해 오다’라는 의미입니다. 그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을 때, 느부갓네살 왕도 이곳에 도착합니다. 바벨론 연대기에 따르면 예루살렘 공격은 주전 598년 마지막 달에 시작하여 주전 597년 둘째 달에 끝납니다. 즉, 여호야긴이 왕위에 있던 기간이 바벨론에게 포위되어 있던 기간입니다. 3개월 동안 포위당하자 여호야긴은 자신의 어머니와 신복들과 지도자들과 내시들과 함께 바벨론 왕 앞에 나가서 자발적으로 항복합니다. 그 결과로 왕과 왕의 어머니와 신하들과 지도자들과 내시들은 죽임을 당하지 않고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는 관대한 처벌을 받습니다. 예루살렘을 함락한 바벨론 군대는 여호와의 성전에 침입하여 성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 보물을 약탈하였고, 솔로몬이 만든 여호와 성전의 금 그릇을 잘라버리기도 하였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이 여호와 성전의 금 그릇을 조각조각 자른 것은 전쟁에 패한 신을 모욕하기 위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열왕기 저자는 성전 보물들을 약탈당하는 것이 여호와께서 전쟁에 저서 모욕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유다에 대해 심판하실 때 예루살렘 성전이 약탈당하고 파괴될 것이라는 예언을 하셨는데, 지금 그대로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즉,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일어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의 백성들과 지도자와 용사 만 명과 장인과 대장장이를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모든’(14)이란 단어를 반복하여 예루살렘 백성들이 상당히 많이 끌려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끌려간 사람들을 좀 더 자세하게 기록한 것으로, 바벨론 왕은 왕과 태후와 왕비들과 내시들과 지도자들을 모두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15-16). 전쟁할 만한 모든 자도 데리고 갔습니다. 이들을 데리고 간 것은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군사들은 바벨론 병사로 사용하기 위해서 데리고 갔습니다. 장인과 대장장이는 일을 시키기 위해 데리고 갔습니다. 이렇게 왕, 지도자, 군인과 기술자까지 모두 바벨론으로 데려감으로써 예루살렘에는 가난하고 힘없고 무능력한 자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여호야긴을 대신해서 바벨론 왕은 여호야긴의 숙부인 맛다니야를 왕으로 세우고, 그의 이름을 시드기야로 바꾸었습니다. 족보상으로 보면 시드기아는 여호아 김의 형제이며 요시야의 아들이 됩니다. 요시아의 아들이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이 되었습니다.

 

시드기야의 등극(18-20)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길만이 개인과 공동체가 살길입니다. 순종은 빠를수록 좋지만, 설령 불순종의 벌을 받을 때에라도 순종하면 하나님의 자비를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리석기는 시드기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도 여호야김의 길을 따라 악을 행했고, 여호야김처럼 바벨론을 배반했습니다.

 

18시드기야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일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일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하무달이요 립나인 예레미야의 딸이더라 19그가 여호야김의 모든 행위를 따라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지라 20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를 진노하심이 그들을 그 앞에서 쫓아내실 때까지 이르렀더라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을 배반하니라(18-20)

 

시드기야가 왕이 될 때 나이는 21세로 예루살렘을 11년간 다스렸고, 그의 어머니 이름은 하무달로 예레미야의 딸입니다. 그녀는 3개월 동안 왕위에 있었던 여호아하스의 어머니이 기도하기에, 시드기야와 여호아하스는 동복형제로 형이 폐위되어 애굽의 포로로 끌려갔을 때의 나이가 10세 전후였습니다. 시드기야도 여호야김의 행위를 따라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습니다. 여호야김의 죄는 우상숭배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린 불의와 불법이었는데, 시드기야도 여호야김과 동일한 기간 동안 왕으로 있으면서 여호야김의 행위를 본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진노하심이 유다와 예루살렘을 그의 앞에서 모두 던져버릴 때까지 계속 있었습니다. 즉, 시드기야 왕은 제위 기간 내내의 종으로서 바벨론의 간섭과 위협을 받았습니다. 열왕기 저자는 유다의 현재 어려운 상황이 여호와의 분노 때문이라고 해설해주고 있습니다. 시드기야는 바벨론이 애굽과의 전쟁으로 약해진 틈을 타서 바벨론에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시드기야의 통치 기간 동안 예레미야는 계속해서 바벨론에 항복할 것을 조언했습니다(렘 21:1-10; 34:1-3;37:6-10;38:17-23).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을 멸망시키실 뜻이 확고하다는 것을 알았고,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자들이 70년의 징벌 기간이 끝나면 돌아올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드기야는 이런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예언을 하는 예레미야를 감옥에 가둬버립니다. 시드기야가 바벨론에 반역을 일으킨 것은 바벨론이 당시 팔레스틴에 대해 관여를 덜하게 되고, 애굽은 어느 정도 힘을 가지고 있던 때로 애굽의 힘을 믿고 반역을 시도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하신 예언처럼 철저한 파괴였습니다.

 

예루살렘 함락과 시드기야의 폐위(25:1-7)

군인에게 군사 훈련이 필요하듯이 하나님의 백성들도 군사로서 영적 훈련이 필요합니다.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아름다움을 유지하기 위해 훈련장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때로 사회적, 정치적 압박 아래 두어 순종을 훈련시키십니다. 시드기야는 바벨론을 섬기라는 예레미야의 경고(예레미야 27:12-22)를 듣지 않고 반기를 들었고, 결국 예루살렘은 포위되어 극심한 고통을 겪다가 함락됩니다.

 

1시드기야 제구년 열째 달 십일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그의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와서 그 성에 대하여 진을 치고 주위에 토성을 쌓으매 2그 성이 시드기야 왕 제십일년까지 포위되었더라 3그 해 넷째 달 구일에 성 중에 기근이 심하여 그 땅 백성의 양식이 떨어졌더라 4그 성벽이 파괴되매 모든 군사가 밤중에 두 성벽 사이 왕의 동산 곁문 길로 도망하여 갈대아인들이 그 성읍을 에워쌌으므로 그가 아라바 길로 가더니 5갈대아 군대가 그 왕을 뒤쫓아가서 여리고 평지에서 그를 따라 잡으매 왕의 모든 군대가 그를 떠나 흩어진지라 6그들이 왕을 사로잡아 그를 리블라에 있는 바벨론 왕에게로 끌고 가매 그들이 그를 심문하니라 7그들이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그의 눈앞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놋 사슬로 그를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갔더라(1-7)

 

시드기야 제구년 열째 달 십일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함락하기 위해 올라왔습니다. 그들은 성 주변에 토성을 쌓고 2년간 포위를 합니다. 성 주위에 토성을 쌓는 것은 공성전의 전형적인 방법으로 성 벽보다 높은 단을 만들어서 성 위에서 방어하는 자들에게 화살이나 돌 등을 던지며 공격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은 2년 동안 포위되면서 심한 기근이 들어 먹을 양식이 떨어졌습니다. 성안에 기혼 샘이 있어 마실 물은 충분했을지 모르지 만 양식이 바닥나버렸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벽이 파괴되자 모든 군사들은 밤에 도망하여 아라바 길로 갑니다. 여기서 모든 군사들에는 왕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길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이어지는 길로 요단강 건너 모압이나 암몬으로 가려한 것 같습니다. 당시 암몬과 모압은 유다와 같이 반바벨론 동맹을 맺고 있었기에, 이곳에서 피난처를 얻으려 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왕희 탈출 시도는 바벨론 군대의 신속하고 효과적인 대처로 실패합니다. 여리고 평지는 여리고 동편으로 마른 땅이 펼쳐져 있는 곳으로, 이곳에서 잡혔다는 것은 도망친 다음날 잡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왕을 모시고 같이 도망하던 군대는 바벨론 군대를 보자 모두 떠나 뿔뿔이 흩어집니다. 이것은 왕의 호위 부대가 바벨론 군대를 보고 무서워하여 왕을 버리고 도망간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시스기야 왕은 사로잡혔고 바벨론 왕이 있는 립나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판결을 받습니다. ‘그를 심문하다’는 재판을 하고 판 쉽을 내린다는 뜻의 전형적 표현입니다. 여기서 시드기야가 재판을 받은 것은 바벨론과의 종주 언약을 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시드기야의 눈앞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놋 사슬로 묶어서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포로의 눈을 뽑는 것은 사람을 무능하게 만드는 처벌입니다. 삼손도 블레셋 사람들에게 잡혔을 때 두 눈이 뽑히고 포로들이 하는 노역을 했습니다. 이렇게 유다 다윗 왕조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의 아들들이 죽고, 시드기야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면서 다윗 왕조는 문을 닫습니다. 다윗 왕조를 세우신 하나님께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긴 다윗 왕조를 벌하시고 문을 닫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에게서 받은 벌은 하나님이 주신 벌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세우신 언약 파기를 의미했습니다. 스스로 택한 백성을 멸하시고 세운 나라를 찢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행간에 숨어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마음에 접촉하여 행간을 읽고, 하나님의 슬픔에 사로잡혀 울고, 그 눈물로 세상을 보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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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24-01)


예언대로 바벨론의 침공

열왕기하 23장 31절-24장 7절


요시야는 꺼지기 직전의 촛불이 발한 마지막 빛이었습니다. 심판의 신호탄이 울리는 순간, 예루살렘 멸망은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됩니다. 애굽과 바벨론 사이에서 유다 왕들은 누구 편에 설지를 고심하며 줄다리기 외교를 이어갔습니다. 역사의 주인을 모르는 이들의 어리석음이었습니다.

 

  • 요시야는 여호와의 섬진과 예루살렘과 유다와 이스라엘에 있던 모든 우상들과 제단들과 산당들을 부정하게 만들거나 부수고 그 제단에서 봉사하던 제사장을 모두 축출합니다. 요시야가 우상을 제거한 명단을 보면 팔레스틴 땅에 우상숭배가 매우 길고 넓게 오랫동안 이루어져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우상을 제거한 뒤 요시야는 세 번째 개혁으로 유다 땅에서 성대한 유월절을 시행합니다.

 

여호아하스의 등극과 죽음(31-34)

죄의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지 제대로 알기만 한다면, 죄에 대해서 나약한 태도를 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도 그를 떠나십니다. 남 유다의 죄의 결과는 민족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끔찍한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31여호아하스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삼 세라 예루살렘에서 석 달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하무달이라 립나 예레미야의 딸이더라 32여호아하스가 그의 조상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니 33바로 느고가 그를 하맛 땅 립나에 가두어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지 못하게 하고 또 그 나라로 은 백 달란트와 금 한 달란트를 벌금으로 내게 하고 34바로 느고가 요시야의 아들 엘리아김을 그의 아버지 요시야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고 그의 이름을 고쳐 여호야김이라 하고 여호아하스는 애굽으로 잡아갔더니 그가 거기서 죽으니라(31-34)

 

요시야가 죽고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위에 오릅니다. 그의 나이는 23세이고 그의 어머니는 하무달로 립나 예레미야의 딸이라고 소개됩니다. 일반적인 왕위 계승의 패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재위 기간이 3개월로 매우 짧았습니다. 정치적으로 보면 그는 애굽 왕에게 반기를 든 세력에 의해 왕으로 세워졌고, 이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바로 느고는 여호아하스를 강제로 폐위시키고 그 대신 여호야김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요시야가 느고의 군대에 죽었으며, 당시 에는 유다가 애굽의 속국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열왕기 저자는 여호아하스의 실각 원인을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라 신학적인 이유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기 때문이다. 3개월간의 통치를 악하다고 평가하신 이유는 그가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고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아하스가 왕위를 잃고 애굽으로 끌려가는 모든 일을 겪는 동안 여호와께 부르짖었다는 말이 없는 것은, 그가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고, 철저히 당시의 정치 상황에 따라 움직였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신앙적인 부분만을 중심으로 평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는 바로 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쫓겨나 하맛 땅 리블라에 갇히게 됩니다. 리블라는 어머니 하무달의 고향이기도 한데, 수리아 오론테스 강의 가데스 부근인 아람의 중심지 하맛에서 남쪽으로 32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행정적, 군사적으로 중요한 성읍이었습니다. 앗수르는 8세기부터 이곳에 요새를 세웠습니다. 애굽 왕 느고가 여호아하스가 왕이 된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예루살렘으로 군사를 보냈고, 여호아하스는 이를 피해 어머니의 고향이자 군사적 요새가 있는 북쪽의 리블라로 도망한 것입니다. 애굽 군대는 리블라로 도망한 여호아하스가 그곳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가둬버리고, 이렇게 바로의 뜻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유다의 귀족들과 백성들에게 벌금으로 은 백 달란트와 금 한 달란트를 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렇게 여호아하스를 쫓아낸 느고는 요시야의 아들이자 여호아하스의 형인 엘리야김을 왕으로 삼습니다. 여기서 그의 아버지 요시야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았다는 말은 엘리야김을 요시야의 정식 후계자로 인정했다는 말로 바로 느고가 여호아하스를 정식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열왕기 저자는 여호아하스가 비록 단 석 달간 왕위에 있었는데도 유다의 왕으로 인정하고 왕의 명단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느고는 엘리야김의 이름을 여호야김으로 바꾸었는데, 의미상으로는 ‘하나님께서 세우다’에서 ‘여호와께서 세우다’라는 뜻으로 바뀐 것으로, 큰 변화를 준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이름을 새롭게 선사한 지배자에 대한 충성의 맹세를 의미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앗수르 왕들도 이렇게 했는데, 느고의 아버지 프사메티쿠스 1세는 통치자로 취임할 때 앗수르 왕 아슈르바니팔에 의해 나부세지반니로 개명되었습니다. 또한 다니엘과 세 친구도 바벨론에 잡혀갔을 때 이름을 바꾼 예가 성경에 나옵니다. 이것을 보면 여호야김은 애굽의 봉신으로 바로 느고에게 충성하기로 서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왕이 세워진 뒤에 바로 느고는 여호아하스를 사로잡아서 애굽으로 데리고 갑니다. 여호아하스는 그곳에서 죽습니다. 여호아하스가 애굽으로 사로잡혀 간 것은 정치적으로 더 이상 애굽에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신학적으로 더 큰 의미를 가지는데,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종 되었던 생활에서 풀려나면서 민족이 형성되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나안을 정복하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여호아하스가 애굽의 포로로 끌려가 그곳에서 죽은 것은 역출애굽 사건으로서, 이는 머지않아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이라는 이스라엘 멸망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후에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예레미야가 애굽으로 가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유다는 요시야가 죽자마자 바로 주권을 잃고 애굽의 봉신으로 전락하게 되면서 급작스럽게 멸망의 길로 들어섭니다. 애굽에 반기를 들었던 여호아하스와는 다르게 여호야김은 애굽 왕 느고의 모든 요구를 다 들어줍니다. 35절은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김의 대조적 행보를 강조하기 위해 쓴 부분인데, 여호야김은 느고가 요구한 조공을 바치기 위해 백성들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이를 강제로 걷었습니다. 조공을 바치기 위해 유다의 백성들을 혹독하게 몰아붙인 것입니다(참조. 출애굽기 5:6). 출애굽기 5:6에서 ‘감독들’로 번역된 단어는 여기서 ‘징수하다’로 번역된 단어와 동일한데, ‘압제하다’, ‘강요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언어적 유사성은 이스라엘의 상황이 출애굽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갔음을 암시합니다.

 

여호야김의 등극(35-37)

하나님은 ‘말씀대로’ 이루시기 위해 역사를 주관하시고 섭리하십니다. 다음 세대가 ‘하나님 보시기에’ 정의와 공의를 행하도록 우리 세대가 믿음으로 그들을 양육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요시야의 아들들인 여호아하스와 엘리아김(여호야김)이 모두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고 평가합니다.

 

35여호야김이 은과 금을 바로에게 주니라 그가 바로 느고의 명령대로 그에게 그 돈을 주기 위하여 나라에 부과하되 백성들 각 사람의 힘대로 액수를 정하고 은금을 징수하였더라 36여호야김이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일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스비다라 루마 브다야의 딸이더라 37여호야김이 그의 조상들이 행한 모든 일을 따라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35-37)

 

여호야김의 등극 공식은 다른 왕의 등극과 같습니다. 그가 25세에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11년간 다스렸습니다. 그의 어머니 이름은 스비다이고 루마 브다야의 딸입니다.

여호야김이 왕이 된 나이가 25세인 것을 보면 여호아하스보다 2살 위인 형입니다. 여호야김은 애굽의 힘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제위 기간 내내 바벨론의 봉신으로 있다가 바벨론에게 반역하는 바람에 바벨론으로 끌려가면서 왕위에서 내려오게 됩니다. 하지만 열왕기 저자는 이런 정치적인 문제보다는 신학적 입장에서 여호야김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고 평가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엔 주변의 어느 나라를 지지하느냐보다는 하나님을 신뢰하느냐 아니냐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유다와 바벨론의 전쟁(24:1-4)

성도들은 어떠한 능력이 나타난다고 할지라도 교만하거나 자고해서는 안 됩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시는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자칫 교만할 때 그 교만이 파멸로 이끄는 직접적인 원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1여호야김 시대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올라오매 여호야김이 삼 년간 섬기다가 돌아서 그를 배반하였더니 2여호와께서 그의 종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갈대아의 부대와 아람의 부대와 모압의 부대와 암몬 자손의 부대를 여호야김에게로 보내 유다를 쳐 멸하려 하시니 3이 일이 유다에 임함은 곧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들을 자기 앞에서 물리치고자 하심이니 이는 므낫세의 지은 모든 죄 때문이며 4또 그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 그의 피가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사하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시니라(1-4)

 

여호야김은 비록 바로 느고의 손에 왕이 되었지만, 얼마 안 가서 애굽이 힘을 잃게 되고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의 침입으로 유다는 바벨론의 속국이 됩니다. 그렇게 3년을 속국으로 보내다가 여호야김은 바벨론에 반란을 일으킵니다. 본문에서는 언급되지 않지만 바벨론이 애굽과의 전쟁으로 전력이 약화되자 그 사이에 여호야김은 애굽과 동맹을 맺고 바벨론에게 대항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바벨론이 연합군을 형성하여 유다로 침공한 것입니다.

2절에서 열왕기 저자는 이 침략은 여호와께서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유다를 멸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침략으로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말입니다. 3-4절은 하나님께서 유다를 내지 신 이유를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는데, 이것은 므낫세가 지은 악한 죄들인 우상숭배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린 불의와 불법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열왕기 저자는 여호야김이 종교적인 죄뿐 아니라, 윤리적 사회적으로도 불의를 행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무죄 한자의 피가 가득했다는 말은 여호야김 통치 시대에 정치적 사회적 윤리적 불법과 불의가 매우 심하게 일어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이유로 열왕기 저자는 다시 여호와께서 왜 요시야의 회개에도 불구하고 유다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하지 않으셨는지 설명합니다. 즉, 유다의 구원을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야김의 죽음(24:5-7)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한계에 도달하더라도 결코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습니다. 스스로 한계를 무너트린 것은 극단으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극단의 끝은 멸망의 낭떠러지 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죽음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5여호야김의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6여호야김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7애굽 왕이 다시는 그 나라에서 나오지 못하였으니 이는 바벨론 왕이 애굽 강에서부터 유브라데 강까지 애굽 왕에게 속한 땅을 다 점령하였음이더라(5-7)

 

여호야김의 죽음 공식에서 다른 왕들과 다른 것은 그의 무덤에 묻혔다는 표현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역대하 36:5-8에 따르면 여호야김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고 나옵니다. 그가 그의 무덤이나 조상들의 무덤에 묻혔다는 표현이 없기에 바벨론에서 죽은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렇게 요시야의 두 아들 중 한 명은 애굽에서,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바벨론에서 포로로 생을 마감합니다.

여호야김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위에 오릅니다. 열왕기 저자는 애굽의 멸망과 바벨론의 번성을 보고하며, 여호야김 왕의 이야기를 마칩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열강의 힘이 어디로 흐르는지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역사의 주인이 누구신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흥하고 망함이 오직 주께 달려 있습니다. 주목할 것은 권력의 흐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이 닿는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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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23-02)


요시야의 왕정 평가와 죽음

열왕기하 23장 21-30절


부지런히 한 일을 인정받지 못하면 서운한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옳으냐’보다 ‘이익이 되냐’를 먼저 따지는 세상입니다. 그래서인지 내게 돌아올 이익을 계산하기보다 옳음을 유일한 이유로 삼아 행하는 사람을 만나는 기쁨은 무엇보다 큽니다. 요시야 왕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 요시야는 여호와의 섬진과 예루살렘과 유다와 이스라엘에 있던 모든 우상들과 제단들과 산당들을 부정하게 만들거나 부수고 그 제단에서 봉사하던 제사장을 모두 축출합니다. 요시야가 우상을 제거한 명단을 보면 팔레스틴 땅에 우상숭배가 매우 길고 넓게 오랫동안 이루어져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우상을 제거한 뒤 요시야는 세 번째 개혁으로 유다 땅에서 성대한 유월절을 시행합니다.

 

유월절을 지킴(21-23)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몸은 풍요로운 땅에 살았지만, 하지만 그들에게 영적으로 그곳은 더 고통스러운 땅이었습니다. 그 동안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는 영적으로 출애굽의 감격을 온전히 기억하지 못한 ‘광야’였던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 유월절을 지키려고 합니다.

 

21왕이 뭇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이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매 22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여러 왕의 시대와 유다 여러 왕의 시대에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 23요시야 왕 열여덟째 해에 예루살렘에서 여호와 앞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21-23)

 

요시야의 세 번째 개혁은 유월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요시야는 백성들에게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령합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할 때 여호와께서 애굽의 장자들을 죽이고 이스라엘의 장자들은 보호하심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는 것을 기념 절기입니다. 유월절, 칠칠절, 초막질이 가장 중요한 3대 절기인데, 유월절이 여호와의 구원을 가장 잘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22절에서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왕정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적이 없다고 언급합니다. 이것은 이 시기에 유월절을 지키지 않았다는 고발이라기보다는, 요시야 18년에 지킨 유월절이 가장 여호와의 말씀대로 지켜진 유월절이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역대하 30장에서 히스기야도 유월절을 지켰다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와 다른 부분도 있는데, 출애굽기의 유월절은 가족 단위로 이루어진 가족 축제라면, 요시야 시대의 유월절은 왕이 주최하는 축제로 지켰고 예루살렘에서만 행해졌습니다. 요시야가 이렇듯 철저하게 유월절을 지킨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됩니다. 첫째는 유월절 기념을 통해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에 감사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구원에 감사하고, 이제라도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이키시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갖고 지켰을 것입니다.

 

요시야 개혁에 대한 평가(24-25)

참된 믿음은 이해타산을 초월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자신에게 올 대가를 계산하지 않고 순종합니다. 그러한 순전한 믿음을 함께 사모해야 합니다. 요시야의 개혁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도 유다가 소생할 길이 전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마지막 순가까지 할 도리를 다했습니다.

 

24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점쟁이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거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25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24-25)

 

이 단락은 요시야 개혁에 대한 열왕기 저자의 평가입니다. 요시야는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서 신접한 자, 점쟁이, 드라빔, 우상과 모든 혐오스러운 것은 눈에 보이는 모든 우상을 제거하였습니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선지자가 아닌 이방신의 뜻을 전달하는 사람들과 도구들로 이스라엘에서 흔히 이루어지던 종교적 관행이었습니다.

요시야는 신명기 18:9-12을 따라 이 우상들을 모두 제거한 것입니다. 여기서 요시야가 이런 일을 한 것은 대제사장 힐기야가 성전에서 발견한 율법책의 말씀을 세우기 위해서라고 평가합니다. 요시야는 일상생활 속에 뿌리 내린 종교적 관행들도 모두 제거함으로써 하나님만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아가도록 했습니다. 25절은 열왕기 저자의 요시야 왕에 대한 평가로 이스라엘 역사상 요시야처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자가 없다고 평가합니다. 이전에 열왕기하 18:5에서는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그의 전과 후의 유다 왕들 중에 그런 자가 없었다고 평가되었습니다. 이제는 요시야처럼 온 맘과 온 영혼을 다해 여호와께로 돌아온 자가 없다고 평가합니다. 여호와께 돌아온다는 것은 회개를 의미하는 것으로 요시야가 우상과 산당과 제단을 파괴하고 이방 제사장들을 제거하여 일상의 모든 이방 관행을 없앤 것이 바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회개의 길이었습니다. 회개란 말로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라고 열왕기 저자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요시야는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회개하였습니다.

 

유다의 심판을 확고히 선언함(26-27)

하나님의 사랑은 맹목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그분의 은혜는 죄를 묵인하는 불의한 은혜도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은 망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계시는 성전은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남 유다를 북 이스라엘처럼 심판하신다고 선언합니다.

 

26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 27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 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며 내가 택한 이 성 예루살렘과 내 이름을 거기에 두리라 한 이 성전을 버리리라 하셨더라(26-27)

 

요시야의 철저한 회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유다를 용서하실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합니다. 그 동안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들의 기도를 외면한 적이 없으십니다. 히스기야가 죽을병에 걸렸을 때도 히스기야의 간절한 기도와 통곡에 귀를 기울이시고 15년 더 살게 해주셨습니다. 심지어 가장 악한 왕이라고 평가받은 아합 왕도 회개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합에게 내리기로 한 벌을 아들 세대로 미뤄주셨습니다(열왕기상 21:29), 요나서에서는 앗수르의 니느웨 왕이 회개하며 금식하고 베옷을 입었을 때 니느웨에 대한 심판 선언을 철회하십니다.

출애굽기의 황금 송아지 사건에서도 모세와 백성들의 회개에 마음을 돌이키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은혜롭고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요시야의 온전한 회개를 보면 하나님께서 므낫세 왕 때 유다에게 내린 하나님의 심판 선언(열왕기하 21:12-15)을 돌이키실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26절은 그런 우리의 기대를 저버립니다.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해서 내린 진노를 돌이키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요시야는 완전하게 돌이켰지만 하나님께서는 돌이키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므낫세는 하나님께서 가장 악하다고 평가하시며, 그로 인해 예루살렘과 유다를 그릇을 씻어 엎어놓는 것 같이 모두 제거하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선언을 돌이키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27절에서 유다도 내 앞에서 제거할 것이고, 선택한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여호와의 성전도 버리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동시대에 활동하던 예레미야 선지자가 전한 말씀에도 유다의 심판이 정해졌기 때문에 모세와 사무엘이 하나님 앞에 간구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므낫세의 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예레미야 15:14). 모세와 사무엘도 막을 수 없을 만큼 이미 유다에 대한 심판의 추는 너무 기울어졌기에, 요시야의 개혁으로 유다 전체를 구할 수는 없었고, 다만 요시야 자신만 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시야의 죽음(28-30)

하나님께서는 귀하고 선한 사람들 일수록 빨리 데려 가시는 경향이 있습니다. 의로운 요시야 왕은 39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하지만 당시 유다의 모습은 왕의 죽음마저 축복이 될 정도로 유다에게 참혹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28요시야의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9요시야 당시에 애굽의 왕 바로 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고자 하여 유브라데 강으로 올라가므로 요시야 왕이 맞서 나갔더니 애굽 왕이 요시야를 므깃도에서 만났을 때에 죽인지라 30신복들이 그의 시체를 병거에 싣고 므깃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그의 무덤에 장사하니 백성들이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데려다가 그에게 기름을 붓고 그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았더라(28-30)

 

애굽의 바로 느고는 앗수르 왕을 지기 위해 출정하였고, 이것이 여의치 않자 유다 지역을 점령하려고 방향을 바꿉니다. 요시야는 이를 막기 위해 므깃도로 출정하였다가 애굽과 전쟁하였고, 그 와중에 요시야가 죽습니다. 요시야가 종교개혁을 단행한 지 13년 만에, 그는 39세의 나이로 전쟁터에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그의 시신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장사됩니다. 전쟁터에서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평안한 죽음인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합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보지 않았고, 굴욕을 당하지도 포로 끌려가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뒤를 이은 왕들에 비하면 그는 평안히 죽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사히 예루살렘에 있는 그의 조상들의 무덤에 안장될 수 있었습니다. 본문은 므깃도에서 예루살렘으로 시신을 가져와서 그의 무덤에 장사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언급함으로써 그가 평안히 무덤에 묻혔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요시아의 죽음 이후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위를 계승합니다. 여호아하스는 후에 애굽에서 죽습니다. 요시아를 실패한 개혁자로 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가 존재했기 때문에 유다의 멸망을 31년 동안 유예할 수 있었습니다. 히스기야의 종교개혁과 그의 존재로 유다의 멸망을 29년간 미룰 수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요시야를 실패했다고 평가하기보다는,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의 역할을 다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심판의 추가 이미 기울었고, 그것을 역전시킬 만한 상황이 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자신의 시대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고 하나님만을 올바로 섬겼으며, 그로 인해 그의 치세 동안은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을 늦출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요시야의 역할이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에게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하나님의 말씀에 잘 순종하고 회개한 왕이라는 명예를 주셨습니다.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못 참는 사람들’ 속에서 가끔 요시야 같은 사람을 만납니다.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이들입니다. 어떤 이익으로 보상받지 못해도 그 길이 옳기에 걷는 사람이 되어보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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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23-01)


요시야의 철저한 종교개혁

열왕기하 23장 1-20절


자신은 재앙에서 예외라는 말씀을 받았으니 적당히 해도 될 일이었습니다. 나만 구원받으면 그만이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요시야는 그런 왕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확보한 구원이라고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미 예정된 멸망이라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요시야의 개혁은 오히려 더 철저했고 치밀했습니다.

 

  • 아몬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요시야는 예루살렘 성전을 수리하는 일을 지시하였고 그런 가운데 여호와의 율법을 발견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은 요시야는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며 여호와의 말씀을 확실히 알기 위해 선지자 홀다를 찾습니다. 훌다는 요시야에게 유다의 멸망은 정해졌다는 것과 요시아는 평안히 죽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 말을 들은 요시야는 세 가지 개혁을 하는데 언약갱신과 종교개혁과 유월절 준수를 하게 됩니다.

 

백성들과 언약 갱신(1-3)

종종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사람을 만나면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신의 생각과 행동은 모두 옳고 다른 사람들은 틀렸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을 봅니다. 나만 옳고 다 틀렸다는 마음으로는 개혁할 수 없습니다. 참된 가치는 서로 존중하며 같이 지켜내야 변화가 일어납니다.

 

1왕이 보내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를 자기에게로 모으고 2이에 왕이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매 유다 모든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노소를 막론하고 다 왕과 함께 한지라 왕이 여호와의 성전 안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리고 3왕이 단 위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께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이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리라 하매 백성이 다 그 언약을 따르기로 하니라(1-3)

 

유다의 왕 요시야의 개혁은 중요했습니다. 그의 모습은 개혁의 상징이었습니다. 그의 개혁이 위대한 것은 그 개혁을 요시야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주도하게 했고, 단 하나도 예외가 없이 철저하게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개혁은 일관된 개혁이었습니다.

당시 지도자인 제사장과 서기관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성전에 처박혀있던 율법책의 발견한 사실을 아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보고했습니다. 하지만 요시야에게는 율법책을 발견하고 그 율법을 직접 들은 사건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나라로 만들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8살에 왕이 된 요시야는 국정을 장악한 힘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하나님께서 어떤 나라를 원하신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미지가 불신앙의 원인이었습니다.

유다는 너무 타락되어서 무엇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운명을 바꿀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요시야는 멸망을 바라보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유다는 멸망해도 유다 안에 남아 있는 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라도 하나님의 원하신 것을 알았으니,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이라도 말씀대로 살아간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장로들과 백성들을 모아서 그 언약책을 읽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언약을 다시 세웁니다. 백성들과 함께 자신이 먼저 마음과 뜻을 다하여 말씀에 순종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이것을 본 백성들도 모두 그 언약을 따르겠다고 약속합니다. 마치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을 체결하는 모습과 같았습니다. 요시야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생각으로 이러한 의식을 거행한 것입니다. 이전까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었다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유다 안에 있는 우상들을 제거하기로 다짐합니다. 그에게 종교 개혁은 언약에 대한 순종의 표현이었습니다. 전국적으로 철저하게 우상을 척결할 수 있었던 것은 개혁에 앞서 온 백성이 율법을 중심으로 언약을 체결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개혁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개혁을 주도할 때, 하나님의 의가 세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성전에 있던 모든 우상을 제거함(4-7)

믿음은 그 자체로 미덕이 아닙니다. 무엇을 어떻게 믿고 그리고 왜 믿어야 하는지를 모르면, 신앙생활이 자기최면이나 자기도취 혹은 자기기만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바른 믿음을 세우기 위하여 성경을 주시고, 시대마다 성경을 가르칠 수 있는 지도자들을 보내주십니다. 믿음은 믿는 자들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4왕이 대제사장 힐기야와 모든 부제사장들과 문을 지킨 자들에게 명령하여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의 일월 성신을 위하여 만든 모든 그릇들을 여호와의 성전에서 내다가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밭에서 불사르고 그것들의 재를 벧엘로 가져가게 하고 5옛적에 유다 왕들이 세워서 유다 모든 성읍과 예루살렘 주위의 산당들에서 분향하며 우상을 섬기게 한 제사장들을 폐하며 또 바알과 해와 달과 별 떼와 하늘의 모든 별에게 분향하는 자들을 폐하고 6또 여호와의 성전에서 아세라 상을 내다가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시내로 가져다 거기에서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어 그 가루를 평민의 묘지에 뿌리고 7또 여호와의 성전 가운데 남창의 집을 헐었으니 그 곳은 여인이 아세라를 위하여 휘장을 짜는 처소였더라(4-7)

 

요시야의 개혁은 철저하고도 포괄적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예루살렘 성전 외에는 예외 없이 척결과 청산의 대상이었습니다. 다시 재건될 수 없도록 철두철미하게 파괴하였고, 자신의 통치가 미치는 곳이면 어디든 가만 두지 않았습니다.

특히 성전을 장악하고 있던 우상들을 제거하는 것부터 시작했으며, 선대 왕들이 건드리지 못했던 산당들도 요시야의 단호한 개혁에는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더 이상 주저하지 말고, 용납하지도 말고, 봐주지도 말고, 나의 우상들을 깨뜨리고 불사르고 빻아서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합시다.

 

유다 땅에 있던 모든 우상을 제거함(8-14)

개혁의 방식은 다양합니다. 즉시 제거해야할 악습이 있고, 단계적으로 마련해야할 제도가 있고, 그리고 장기적으로 변화시켜야 할 사람과 제도와 문화가 있습니다. 제도만 중요시해서도 안 되고, 사람의 변화만 강조해서도 안 됩니다.

 

8또 유다 각 성읍에서 모든 제사장을 불러오고 또 제사장이 분향하던 산당을 게바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더럽게 하고 또 성문의 산당들을 헐어 버렸으니 이 산당들은 그 성읍의 지도자 여호수아의 대문 어귀 곧 성문 왼쪽에 있었더라 9산당들의 제사장들은 예루살렘 여호와의 제단에 올라가지 못하고 다만 그의 형제 중에서 무교병을 먹을 뿐이었더라 10왕이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의 도벳을 더럽게 하여 어떤 사람도 몰록에게 드리기 위하여 자기의 자녀를 불로 지나가지 못하게 하고 11또 유다 여러 왕이 태양을 위하여 드린 말들을 제하여 버렸으니 이 말들은 여호와의 성전으로 들어가는 곳의 근처 내시 나단멜렉의 집 곁에 있던 것이며 또 태양 수레를 불사르고 12유다 여러 왕이 아하스의 다락 지붕에 세운 제단들과 므낫세가 여호와의 성전 두 마당에 세운 제단들을 왕이 다 헐고 거기서 빻아내려서 그것들의 가루를 기드론 시내에 쏟아 버리고 13또 예루살렘 앞 멸망의 산 오른쪽에 세운 산당들을 왕이 더럽게 하였으니 이는 옛적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시돈 사람의 가증한 아스다롯과 모압 사람의 가증한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가증한 밀곰을 위하여 세웠던 것이며 14왕이 또 석상들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들을 찍고 사람의 해골로 그 곳에 채웠더라(8-14)

 

유다 왕들이 용납한 우상들을 제거하였습니다. 그 오랜 동안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악취 나는 우상과 그 제단과 악한 관습들이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묵히고 쌓여서 이젠 그들에게 친숙한 문화가 되고 영적으로 무감각해져버린 죄악들이 깨어있는 한 지도자에 의해 폭로되고 파괴되고 전복된 것입니다. 율법이 허용하지 않는 것이었기에, 위대한 왕 솔로몬이 한 일이고 많은 왕들이 묵인해온 일이라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있는 모든 우상을 제거함(15-20)

오늘날 교회 안으로 세상의 문화가 너무 깊숙이 철저하게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하는 안일함으로는 몰아낼 수 없습니다. 요시야는 우상을 철저하게 하나도 용납하지 안했습니다. 자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척결하고 청산해 나갔습니다.

 

15또한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벧엘에 세운 제단과 산당을 왕이 헐고 또 그 산당을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며 또 아세라 목상을 불살랐더라 16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산에 있는 무덤들을 보고 보내어 그 무덤에서 해골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살라 그 제단을 더럽게 하니라 이 일을 하나님의 사람이 전하였더니 그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되었더라 17요시야가 이르되 내게 보이는 저것은 무슨 비석이냐 하니 성읍 사람들이 그에게 말하되 왕께서 벧엘의 제단에 대하여 행하신 이 일을 전하러 유다에서 왔던 하나님의 사람의 묘실이니이다 하니라 18이르되 그대로 두고 그의 뼈를 옮기지 말라 하매 무리가 그의 뼈와 사마리아에서 온 선지자의 뼈는 그대로 두었더라 19전에 이스라엘 여러 왕이 사마리아 각 성읍에 지어서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산당을 요시야가 다 제거하되 벧엘에서 행한 모든 일대로 행하고 20또 거기 있는 산당의 제사장들을 다 제단 위에서 죽이고 사람의 해골을 제단 위에서 불사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더라(15-20)

 

요시야는 철저하게 우상을 제거해 나갔습니다. 다시 재건될 수 없도록 철두철미하게 파괴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선왕들로부터 물러받은 악취 나는 우상숭배의 유산들을 과감하게 거부합니다. 묵히고 쌓여서 그들의 친숙한 문화가 되고 영적으로 무감각해졌던 죄악들이, 깨어 있는 지도자에 의해서 폭로되고 파괴되고 전복되었습니다.

요시야는 여로보암을 비롯하여 이스라엘 왕들이 심어놓은 우상숭배의 흔적들도 일소하였습니다. 그는 유다를 넘어서 이스라엘에까지 개혁이 확장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무려 300여 년 전 여로보암 시대에 하나님의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이 성취되기도 하였습니다(열왕기상 13:1-3). 산당의 제사장을 죽이고 그 해골을 제단 위에 불사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하게 순종하는 이들을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그 사람이 한 나라의 왕이 아니더라도 깨어 있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가정을 세우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성취해 나갈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요시야의 개혁은 요시야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개인의 구원에 만족하지 않은 왕이 있었고, 온 백성의 순종이 있었으며, 이름 없이 죽어간 믿음의 선조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을 말씀으로 하나 되게 하신 하나님께서 계셨습니다. 개혁은 모두의 공동 작품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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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22-01)


요시야의 개혁과 회개

열왕기하 22장 1-20절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에 맞서 싸워온 데스몬드 투투 주교는 ‘성경을 금서목록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이 독재자들의 최대 실수’라고 말했습니다. 율법이 므낫세 왕 시절이 아닌 요시야 왕 때 발견된 것은 얼마나 다행스런 일입니다. 악을 폭로하고 굽은 것을 바로잡는 데 성경 말씀보다 더 강력한 것은 없습니다.

 

  • 21장이 뮤다 최악의 왕인 므낫세에 관한 이야기라면 22장은 이외 대조적으로 유다 역사상 최고로 신실한 왕인 요시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므낫세 왕에 대해서 열왕기 저자는 신명기 율법을 근거로 가증한 우상숭배를 한 인물로 비난하며 그로 인해 유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평가합니다. 이렇게 심판의 길로 빠르게 가는 도중에 요시야라는 신실한 왕을 맞이하게 되면서 유다의 운명이 바뀔 수 있을지에 대한 기대감이 생기게 됩니다.

 

요시야의 등극과 평가(1-2)

종종 우리는 남들이 변하지 않는다고 체념하며 푸념을 늘어놓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변하기 전에 자신부터 변해야 합니다. 남의 허물만 들추기 전에 자신부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도록 노력합시다. 때가 되면 거룩성은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유다를 깨끗하게 할 요시야를 세워주셨습니다.

 

1요시야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팔 세라 예루살렘에서 삼십일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디다요 보스갓 아다야의 딸이더라 2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1-2)

 

므낫세와 아몬이 다스리는 동안 유다는 이방 나라보다 더 악했습니다. 하지만 좌우로 치우치지 않은 왕 요시야의 등장으로 모든 것이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요시야는 왕이 되었을 때 여덟 살이었고 31년간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디다요 보스갓 아다야의 딸입니다. 요시야에 대한 평가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했고 다윗의 길로 행했으며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평가를 받은 왕은 역사상 히스기야와 요시야 둘 뿐입니다.

 

성전 수리를 명령한 요시야(3-7)

위선의 냄새는 불신보다 고약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나라의 타락은 아예 안 믿는 나라보다 더 악독하고 그래서 더 하나님의 분노를 자아냅니다. 므낫세와 아몬이 다스리는 동안 유다는 이방나라보다 더 악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요시야의 등장으로 모든 것이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3요시야 왕 열여덟째 해에 왕이 므술람의 손자 아살리야의 아들 서기관 사반을 여호와의 성전에 보내며 이르되 4너는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올라가서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에 드린 은 곧 문 지킨 자가 수납한 은을 계산하여 5여호와의 성전을 맡은 감독자의 손에 넘겨 그들이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작업자에게 주어 성전에 부숴진 것을 수리하게 하되 6곧 목수와 건축자와 미장이에게 주게 하고 또 재목과 다듬은 돌을 사서 그 성전을 수리하게 하라 7그러나 그들의 손에 맡긴 은을 회계하지 말지니 이는 그들이 진실하게 행함이니라 (3-7)

 

요시야가 국정을 책임질 나이(26살)가 되자 성전을 수리하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예배의 회복을 개혁의 출발로 삼은 것입니다. 새로운 제도를 만들기보다는 성전 수리비용을 조달하는 기존 제도가 잘 운용되도록 챙겼습니다. 이 땅의 교회도 하나님과의 교제, 예배, 섬김, 말씀 순종의 갱신을 통해 나와 우리 공동체가 성전의 기능을 회복하도록 애쓰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았습니까?

요시야는 왕이 된 지 18년이 되던 해에 사반에게 성전 수리를 명령합니다. 성전 수리는 고대 사회에서 왕의 일상적인 일이지만 열왕기에서는 요아스와 요시야만 성전 수리를 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성전 수리의 책임을 맡은 사반은 왕의 서기관으로 그의 아들 아히감은 예레미야 26:24에서 예레미야를 도운 인물이고 또 다른 아들인 그마랴는 여호야김 시대에 예루살렘의 귀족이었습니다(렘 36:12,25). 그리고 사반의 손자 그달랴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에게 함락당한 뒤에 유다의 총독으로 임명된 중요한 의미를 가진 사람입니다. 이것을 보면 사반은 예루살렘에서 상당한 권력을 가진 귀족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시야는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성전 문에서 걷은 은의 합계를 내서 감독관에게 건네주는 역할만 하고 성전 수리에 대한 전체적인 감독은 성전 수리를 맡은 감독관에게 넘기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작업자들에게 돈을 주어 성전을 수리하게 했습니다. 이런 방식은 요아스 시대(열왕기하 12:12-13)에 만들어 진 것으로 아마도 요아스 이후에 이런 방식이 관례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7절에서 그들 손에 맡긴 은을 회계하지 말라고 하며 그들은 늘 믿을 만하게 일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이것도 열왕기하 12:15과 동일합니다. 이는 성전 수리가 매우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요시야가 여호와의 성전 수리에 힘썼다는 것은 여호와께 대한 신앙이 돈독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 시기에 앗수르가 혼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이전 왕들처럼 조공을 바쳐야 하는 부담도 줄어들어 성전을 수리하는 데 쓸 은도 마련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8-13)

말씀이 말씀 그대로 선포되고, 말씀의 영광이 회복되고, 말씀의 능력이 역사하여 가슴을 찢고 회개할 때, 우리 가운데 참다운 개혁과 회복이 일어날 것입니다. 사반이 읽어주는 율법을 듣고 요시야는 말씀을 듣고 옷을 찢었습니다.

 

8대제사장 힐기야가 서기관 사반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힐기야가 그 책을 사반에게 주니 사반이 읽으니라 9서기관 사반이 왕에게 돌아가서 보고하여 이르되 왕의 신복들이 성전에서 찾아낸 돈을 쏟아 여호와의 성전을 맡은 감독자의 손에 맡겼나이다 하고 10또 서기관 사반이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제사장 힐기야가 내게 책을 주더이다 하고 사반이 왕의 앞에서 읽으매 11왕이 율법책의 말을 듣자 곧 그의 옷을 찢으니라 12왕이 제사장 힐기야와 사반의 아들 아히감과 미가야의 아들 악볼과 서기관 사반과 왕의 시종 아사야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13너희는 가서 나와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하여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우리 조상들이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진노가 크도다(8-13)

 

성전을 청소하던 중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했다며 사반에게 줍니다. 당시 책은 양피지에 쓰인 두루마리 형태입니다. 제사장들은 토라를 가르칠 의무가 있었기에 토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발견되는 것은 당연한데 이것이 이슈가 된 것은 므낫세 통치 기간 동안 토라를 성전 구석에 처박아두고 읽거나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보고를 받은 사반은 왕에게 돌아와 왕의 명령대로 돈을 감독자의 손에 나누어 준 것을 말하고, 대제사장 힐기야가 책을 주었다면서 그 책을 왕 앞에서 읽었습니다. 사반은 이 책을 받고 바로 읽었으므로 내용을 알고 있었고 왕에게 읽어드려야 할 만큼 중요한 책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왕은 율법책의 말들을 듣고는 자신의 옷을 찢습니다. 옷을 찢는 행동은 재앙이 닥쳤을 때나 회개할 때 하는 행동으로 요시야는 율법책을 들으면서 이 책의 말이 사실이라면 유다의 현재 상황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있는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지난 70년 동안 율법을 무시하고 듣지 않았기에 유다가 이방보다 더 악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요시야 왕은 힐기야와 아히감과 악볼과 사반과 아사야에게 자신과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해 이 책의 내용에 대해 여호와께 물으라고 명령합니다. 왜냐하면 요시야는 율법책의 말씀을 들으며 현재 유다의 종교 윤리적 상황과 종교 전통이 여호와의 진노를 불러일으킬 만큼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신명기를 통해 백성에게 계속해서 요구하신 것으로 요시야는 들음에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요시야는 종교개혁을 단행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한지 확인합니다. 말씀이 말씀 그대로 선포되고, 말씀의 영광이 회복되고, 말씀의 능력이 역사하여 가슴을 찢고 회개할 때, 참다운 갱신과 회복이 일어날 것입니다.

요시야는 성전 수리를 명령할 만큼 이미 경건한 사람이었으면서도 율법을 듣자 당장에라도 심판을 받을 것처럼 큰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래도 아직 희망이 남아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여호와께 묻습니다. 자신의 상태를 스스로 평가하고 안일하게 살지는 않습니까? 말씀 앞에 벌거벗은 듯 드러나지 않으면 자신을 알 수 없습니다.

 

홀다 선지자가 율법책을 확증해줌(14-20)

개혁은 마음의 회개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선포하신 처음의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였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회개는 곧 개혁의 출발점입니다. 회개 없는 개혁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을 의지한 진정한 회개는 새로운 개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14이에 제사장 힐기야와 또 아히감과 악볼과 사반과 아사야가 여선지 훌다에게로 나아가니 그는 할하스의 손자 디과의 아들로서 예복을 주관하는 살룸의 아내라 예루살렘 둘째 구역에 거주하였더라 그들이 그와 더불어 말하매 15훌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는 너희를 내게 보낸 사람에게 말하기를 16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곳과 그 주민에게 재앙을 내리되 곧 유다 왕이 읽은 책의 모든 말대로 하리니 17이는 이 백성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분향하며 그들의 손의 모든 행위로 나를 격노하게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이 곳을 향하여 내린 진노가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라 하셨느니라 18너희를 보내 여호와께 묻게 한 유다 왕에게는 너희가 이렇게 말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가 들은 말들에 대하여는 19내가 이 곳과 그 주민에게 대하여 빈 터가 되고 저주가 되리라 한 말을 네가 듣고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여호와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20그러므로 보라 내가 너로 너의 조상들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 곳에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 눈이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사자들이 왕에게 보고하니라(14-20)

 

요시야 왕의 명령에 따라 그들이 찾아간 곳이 바로 여선지자 홀다입니다. 홀다는 여선지자이며 살룸의 아내로 살룸은 할하스의 손자 디과의 아들이며 예복을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홀다가 성전 하급 관리의 아내라고 말해주는 것은 결혼한 여자를 소개하는 관습적 구문입니다.

그녀는 예루살렘 성의 신도시인 둘째 구역에 살고 있었는데 이 장소적 배경은 그녀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선지자였음을 나타냅니다. 이들이 왜 여선지자인 홀다에게 갔는지에 대한 많은 논란들이 있습니다. 당시 예레미야나 스바냐 선지자가 이미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사장이 포함된 왕의 대규모 사절단이 주저하지 않고 그녀에게 찾아가 하나님의 뜻을 물었다는 것을 보면 당시 홀다는 무척 잘 알려져 있고 국가의 신임을 받는 예언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왕의 말을 홀다에게 알렸고 홀다는 그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전해줍니다. 홀다의 예언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유다 왕이 읽은 책의 모든 말대로 유다에 재앙이 내린다는 것으로 유다의 멸망에 대한 예고입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분향하며 그들의 손의 모든 행위로 여호와를 격노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신에게 분향했다는 것은 히스기야를 제외한 유다 모든 왕들이 산당을 없애지 않아 백성들이 그곳에서 분향하게 한 우상숭배의 죄를 말합니다. 또한 손의 모든 행위는 율법의 정신인 공의롭고 정의롭고 자비로운 삶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사회적 정치적 도덕적인 죄도 지적하십니다. 종교적인 삶과 윤리적인 삶 모두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며 하나님의 율법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요시야 왕 개인에 대한 예언으로 요시야 왕이 유다가 빈 땅이 되고 저주거리가 된다는 소리를 듣고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겸비하며 웃을 찢는 모습을 보였기에 하나님께서 요시아의 말을 들으셨다고 합니다. 요시야의 행동은 마음으로부터 철저히 회개하는 모습입니다. 먼저 마음의 상태를 언급한 후에 웃을 찢은 것을 마지막에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 상태와 진정성을 보신다는 의미다. 11절에서 요시야가 옷을 찢는 겉모습만 서술했다면 19절에서는 요시야의 옷 찢는 행위 이면의 속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런 요시야의 회개는 이전에 심판 선언을 듣고 회개한 히스기야와 같은 모습이다. 그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요시야 왕의 기도도 들으시고 요시야는 임박한 심판을 보지 않고 평안히 선조들의 묘실로 들어갈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평안히’란 말은 논란거리입니다. 요시야는 애굽과의 전쟁 중에 갑작스럽게 전사하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천수를 다 누리고 죽은 사람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평안히’라는 말을 적용하는 것이 적절하나는 것입니다. 이런 기준으로 보면 요시야는 평안히 죽었다고 보기 힘듭니다. 하지만 임박한 심판 속에서 요시아는 심판을 다 보지 않고 바벨론에게 포로가 되는 치욕을 겪지 않았다는 면에서는 ‘평안히’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끝나고 심판은 이제 미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시야가 아무리 경건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회개 기도를 한다고 할지라도 그동안 유다가 쌓아온 죄가 너무 커서 요시야 한 사람의 회개로는 심판의 수레바퀴를 멈출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는 분이 지만 영원히 참는 분은 아니며 그러나 심판 중에도 여호와를 찾는 자들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말씀에 기초하지 않은 개혁은 공허하며 심지어 해로울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개혁이어야 합니다. 개혁가가 아닌 개혁의 말씀이 드러나야 합니다. 말씀의 창조를 허용하는 일, 그것이 개혁의 출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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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21-02)


므낫세의 죽음과 아몬의 등극

열왕기하 21장 10-26절


자녀 교육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하지만 자녀 교육에는 부모가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녀는 부모의 바람대로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 가정에 독특한 문화가 형성되지 않으면, 처음 키워보는 자녀를 잘 키운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교회 안에서도 믿음으로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어떻게 키우는 것이 신앙적으로 키우는 것인지 잘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오늘도 기독교적 가정에 무엇인지 몰라 방황하는 가정들이 많습니다.

 

  • 므낫세는 유다와 이스라엘을 통틀어 50년 가장 오랫동안 통치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스라엘의 아합 만큼이나 우상숭배에 몰두했했고, 당시 강대국인 앗수르의 봉신으로 지냈습니다. 그러다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받고 죽습니다. 뒤를 이은 아몬 역시 아비에 뒤지지 않을 만큼 악행을 하다가 반역으로 죽음을 당합니다.

 

선지자를 통한 심판 선언(10-15)

 

때로는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한 일을 계속하면서 멸망 아닌 다른 길이 기다릴 것이라는 헛된 망상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매우 엄격합니다. 더 이상 자비가 없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마지막 남은 기업인 유다까지도 원수들의 땅에 버려지게 하십니다.

 

10여호와께서 그의 종 모든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여 이르시되 11유다 왕 므낫세가 이 가증한 일과 악을 행함이 그 전에 있던 아모리 사람들의 행위보다 더욱 심하였고 또 그들의 우상으로 유다를 범죄하게 하였도다 12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제 예루살렘과 유다에 재앙을 내리리니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13내가 사마리아를 잰 줄과 아합의 집을 다림 보던 추를 예루살렘에 베풀고 또 사람이 그릇을 씻어 엎음 같이 예루살렘을 씻어 버릴지라 14내가 나의 기업에서 남은 자들을 버려 그들의 원수의 손에 넘긴즉 그들이 모든 원수에게 노략거리와 겁탈거리가 되리니 15이는 애굽에서 나온 그의 조상 때부터 오늘까지 내가 보기에 악을 행하여 나의 진노를 일으켰음이니라 하셨더라(10-15)

 

이런 상황에 대해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이 예언들은 특정한 선지자의 말이 아니라 이 상황에 대한 선지자들의 말씀을 정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 므낫세의 악함이 이전의 아모리 사람보다 더 악하다고 평하십니다. 그리고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해 재앙을 내리겠다고 선언하시며 그것을 듣는 모든 자의 두 귀가 울릴 것이라고 하십니다(12). ‘귀가 울린다’는 것은 두려움으로 떤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한 이스라엘을 평가하던 것과 동일한 기준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평가할 것이고 그 결과 예루살렘을 완전히 씻어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13). ‘그릇을 씻어서 엎어 놓은 것처럼’은 예루살렘을 완전히 파괴하고 그 거민을 모두 없애겠다는 것으로 진멸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나의 기업에서 남은 자들’(14)은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남겨두었던 유다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앗수르의 손에 멸망시키면서도 유다는 남겨두셨습니다(열왕기하 17:18). 하지만 이제 그 남은 자마저 적들의 손에 넘겨버리시고 그들이 노략거리와 겁탈거리가 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이제 하나님은 더 이상 이들을 보호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 때부터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악을 참으셨는데 이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시간이 끝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는 분이지만 영원히 참으시는 분은 아닙니다.

 

므낫세의 죽음(16-18)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 가는 길은 다르나 마지막은 다 똑같이 죽음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한두 줄로 짧게 정리된다면, 우리 인생이 어떻게 요약되겠습니까? 흘러가는 감정을 따라 허비했던 어제의 시간이 후회스럽고, 이 하루의 시간에 대해 새삼스레 옷깃을 여미게 됩니다. 악한 므낫세도 마지막 죽음을 맞이합니다.

 

16므낫세가 유다에게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한 것 외에도 또 무죄한 자의 피를 심히 많이 흘려 예루살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가득하게 하였더라 17므낫세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과 범한 죄는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18므낫세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궁궐 동산 곧 웃사의 동산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아몬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16-18)

 

이 단락은 므낫세의 죽음 공식으로 여기서 특별한 사항은 므낫세의 죄가 우상숭배뿐만 아니라 사회적 윤리적인 폭력을 많이 행했다는 것입니다. 무죄한 피를 많이 흘렸다는 것은 므낫세의 치세 동안 공의와 정의가 실행되지 않는, 힘 있는 자들의 폭력의 시대였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여호와 신앙의 타락은 항상 윤리적 다락을 동반합니다. 특이한 것은 므낫세의 죄가 언급된 것으로 므낫세가 유다 멸망의 원인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17).

또한 므낫세는 조상의 묘실에 장사되지 않고 웃사의 정원에 장사되는데 정확한 장소는 알 수 없고 다윗 성 동쪽의 실로암 마을에 있는 공동묘지로 추측합니다(18).

 

아몬의 등극과 죽음(19-26)

‘반면교사(反面敎師)’란 ‘본이 되지 않는 남의 말이나 행동이 도리어 자신의 인격을 수양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경우를 이르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를 보고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몬은 그의 아버지 므낫세의 실수를 보고도 답습하고 있습니다. 절대 관습은 죄의 핑계가 될 수 없습니다.

 

19아몬이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므술레멧이요 욧바 하루스의 딸이더라 20아몬이 그의 아버지 므낫세의 행함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21그의 아버지가 행한 모든 길로 행하여 그의 아버지가 섬기던 우상을 섬겨 그것들에게 경배하고 22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그 길로 행하지 아니하더니 23그의 신복들이 그에게 반역하여 왕을 궁중에서 죽이매 24그 국민이 아몬 왕을 반역한 사람들을 다 죽이고 그의 아들 요시야를 대신하게 하여 왕을 삼았더라 25아몬이 행한 바 남은 사적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6아몬이 웃사의 동산 자기 묘실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요시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19-26)

 

므낫세 이후 그의 아들 아몬이 등극하여 2년 동안 다스립니다. 아몬에 대한 평가는 므낫세와 동일합니다. 그는 므낫세가 간 모든 길을 따라 행하였고 여호와의 길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아몬에게 강조되는 것은 므낫세의 행위를 그대로 따랐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반란이 일어나 신하들에게 죽임을 당함으로 최후를 맞았다고 열왕기 저자는 말합니다. 반란 세력은 백성들에게 진압당하면서 그의 아들 요시아가 왕위에 오릅니다. 아몬도 자신의 아버지와 같이 웃사의 동산에 묻힙니다.

이방 민족보다 더 악한 짓을 자행한 므낫세와 그 시대 백성들을 향하여 재앙을 선고하십니다. 사마리아와 아합의 집에 내린 혹독한 심판을 예루살렘에도 임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린 그들을 원수의 손에 버리실 것이고, 무죄한 자의 피를 많이 흘린 예루살렘이 노략의 대상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분별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욕심이 분별력을 망가뜨려 놓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므낫세 왕만이 아니라 맹목적으로 그를 유다 백성들에게도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날에 지도자들에게만 책임을 묻지 않을 것입니다. 반드시 우리에게도 분별력에 대한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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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21-01)


므낫세의 등극과 악행

열왕기하 21장 1-9절


우리 속담에 ‘다 된 밥에 재 뿌리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완성이 되어가는 일을 실수로 망쳤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데 우리는 이상한 것을 추구하고 헛되게 망쳐놓은 일들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려면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고, 그 뜻을 따라서 살아가도록 부지런히 노력해야 합니다.

 

  • 므낫세 왕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왕들에 대한 이야기보다 열왕기 저자의 신학적 견해에 의해 선택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세워 놓은 남 유다를 그의 아들인 므낫세는 망치고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통틀어 가장 오래 통치했지만, 이스라엘의 아합 만큼이나 우상숭배에 몰두했습니다.

 

므낫세 왕의 등극(1-3)

선대(先代)의 신앙이 후손의 신앙을 보장해주지 못하고, 책임져주지 못합니다. 신앙은 꾸준히 진행되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나 조직적으로 항상 개혁이 지속되지 않으면 처음보다 더 악해질 수 있습니다. 멈춘다는 것은 멈춘 것이 아니라 고인물은 썩은 것처럼 신앙도 썩어져 가는 되어 갑니다.

 

1므낫세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오십오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헵시바더라 2므낫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따라서 3그의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어 버린 산당들을 다시 세우며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행위를 따라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아세라 목상을 만들며 하늘의 일월 성신을 경배하여 섬기며(1-3)

 

히스기야를 이어 므낫세가 12세에 왕으로 등극합니다. 그는 남 유다를 55년 동안 오랜 시간을 통치하게 되는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므낫세의 긴 제위 기간은 아버지 히스기야와 공동으로 통치한 기간을 포함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의 어머니 이름은 헵시바인데, 어머니의 출신지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므낫세는 히스기야 왕이 간절히 기도해서 15년 동안에 생명을 연장 받았습니다. 그 연장된 기간 동안, 히스기야가 병에서 나은 지 3년 후에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이때 히스기야는 아들을 얻은 이후에 안일하고 교만한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역대하 32:25-26). 그는 12살 때 왕이 되지만, 아버지 히스기야의 개혁적인 신앙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주셨던 부와 영광만 누리며 자랐습니다(역대하 32:27). 므낫세에게는 모든 것이 아무런 대가없이 주어진 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통치의 날 동안 하나님을 멀리하였습니다. 주변 나라들의 모습을 본받았던 것입니다.

므낫세가 왕을 등극하면서 놀라우리만큼 부정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통치 기간 동안 아합으로 비유될 정도로 악을 행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므낫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2)라고 평가합니다. 그 이유는 유다의 모습이 하나님을 향하는 모습에서 다시 우상으로 돌아가는 변화를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쫓아내신 가나안 민족들의 가증한 것을 따라한 것입니다. 신명기 18:9에서는 그 땅 민족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가증한 일 때문에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쫓겨났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12).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쫓아내신 민족들의 가증한 것을 따라 행했다는 것은 유다도 이 땅에서 쫓겨날 죄를 범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므낫세의 가증한 일은 아버지 히스기야의 신앙을 본받지 않고, 도리어 힘들여 이뤄놓은 개혁의 성과들을 물거품으로 만들었습니다. 가장 오래 왕위에 있으면서 가장 악한 왕으로 악명을 떨쳤습니다. 그가 행한 가증한 일은 첫째, 히스기야가 헐었던 산당들이 다시 세웠습니다. 유다의 죄의 근원이 되었던 산당을 히스기야가 간신히 없앴는데 므낫세는 이것을 가시 세웠습니다. 둘째는 이스라엘의 멸망의 원이 된 아합의 행위를 따라 바알 제단과 아세라 상을 만들고 일월성신 숭배가 재개되었습니다. 통탄할 일입니다. 일월성신을 섬긴 것은 스바냐 1:6과 예레미야 8:2에도 나오는데, 이 관행은 예루살렘에서 요시야 시대 이전에 널리 유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신명기 17:3에서 일월성신을 섬기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즉, 열왕기 저자는 므낫세가 유다 왕들과 이스라엘 왕들의 가장 악한 죄를 모두 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남 유다는 이후 ‘므낫세의 지은 모든 죄로’(24:3) 인해 멸망합니다. 그의 아비 히스기야는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다’(18:5)고 할 정도로 하나님을 의지했고, 모세의 계명을 지켜 이스라엘의 신앙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어떻게 이렇듯 정반대로 악한 왕이 될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자녀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말이 아니라 삶입니다. 자녀가 부모의 어떤 모습을 보고 자라는가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자녀나 주변의 지체들에게 영적 성숙의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우상이 중심된 예루살렘(4-7)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단독으로 섬긴다는, 헛된 것을 함께 섬기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입니다. 하지만 므낫세는 우상을 섬김으로 점점 악을 행하는 것이 심해져 갔습니다.

 

4여호와께서 전에 이르시기를 내가 내 이름을 예루살렘에 두리라 하신 여호와의 성전에 제단들을 쌓고 5또 여호와의 성전 두 마당에 하늘의 일월 성신을 위하여 제단들을 쌓고 6또 자기의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 점치며 사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하여 그 진노를 일으켰으며 7또 자기가 만든 아로새긴 아세라 목상을 성전에 세웠더라 옛적에 여호와께서 이 성전에 대하여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한 이 성전과 예루살렘에 내 이름을 영원히 둘지라(4-7)

 

약속의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만 섬겨야할 이스라엘은 점점 가나안 사람들을 담아가서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더 나가서 하나님만 섬겨야할 성전까지 악한 우상이 성전까지 장악해버렸습니다. 성전의 중요성은 이스라엘 여호와 신앙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우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6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라 7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 8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밑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9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10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신명기 5:6-10)

 

하나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지만, 므낫세는 말씀을 붙들고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동떨어진 삶을 살았습니다. 므낫세의 행동은 열왕기서를 기록하고 있을 당시 바벨론 포로 생활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한 일을 행한 왕이라고 알립니다.

이 단락에서 므낫세의 우상숭배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므낫세는 여호와의 성전을 건드립니다. 여호와의 성전은 여호와의 이름을 두기 위해 건설된 곳으로 여호와만 섬긴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것인 성전에 이방신을 위한 재단을 만들고, 우상의 제단들을 하나둘씩 성전 안에 들어섰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신 거룩한 곳에 아세라 목상이 세워졌습니다. 자식들을 제물로 바치고, 점치고 사술하고, 신접한 자와 박수를 가까이하였습니다. 이젠 드러내놓고 하나님과 우상을 함께 섬긴 것입니다. 이들은 여호와의 성전에서 여호와만 섬기라는 명령을 정면으로 어겼습니다(신명기 12:2-7). 에스겔 8장에서 보면 에스겔 선지자는 환상으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벌어지는 각종 우상숭배의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10장에서 하나님께서 그 가증한 곳을 떠나는 환상을 봅니다. 그러므로 므낫세가 성전에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시는 우상들을 들여놓고 부정하게 만든 것은 하나님께서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과 유다 땅에 계실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그 외의 우상숭배 관습을 열거하는데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는 것과 점치며 사술을 행하는 것, 신접한 자와 박수를 세우는 것입니다(6). 이 모든 행위는 신명기 18:9-14에서 분명히 금지하신 일들입니다. 그리고 이 일들을 여호와께서 가증한 것으로 여기시고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7절은 3절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설명으로 므낫세는 아세라 조각상을 성전 안에 세웠습니다. 일반적으로 아세라 상은 기둥으로, 보통 새긴 우상으로 표현하지 않는데 여기서는 특별히 아세라 조각상을 세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아세라를 섬기는 데 특별한 열심을 보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화자는 아세라를 세운 장소에 대해서 심각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아세라를 세운 곳은 옛날에 다윗과 솔로몬에게 여호와의 이름을 두라고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온 지파 중에서 특별히 선택한 성전과 예루살렘이기 때문입니다. 즉, 성전과 예루살렘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둔 곳으로 여호와 하나님만 독점하여 섬김을 받고 예배 받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런 거룩한 곳에 우상을 둔다는 것은 하나님을 완전히 무시한 행위입니다. 또한 여기에 언급된 죄들은 열왕기하 17:16-17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신 죄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왕기 저자는 이 행위가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이 땅을 떠나 유리하지 않게 하겠다는 약속을 다시 생각하실 정도로 심각한 범죄라고 말합니다.

한 가지 악을 행하면 그 다음 악은 어렵지 않게 행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는 결국 하나님까지 저버리게 됩니다. 무심코 용납하는 작은 죄는 없습니까? 작은 것을 용납하면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삶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과 하나 되어야 합니다. 세상과 교회를 분리하는 것이 어제의 문제였다면, 세상과 교회가 구분되지 않는 것이 오늘의 문제입니다. 우리 교회와 성도의 삶에 들어선 우상은 없는지 뼈아프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므낫세의 꼬임(8-9)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할 것과 그의 율법을 지켜야만 이 땅에서 쫓겨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이러한 경고를 듣고도 므낫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꾀여 넘어뜨립니다. 자기 욕망을 부채질하는 지도자를 거절하지 않고 따른 것입니다.

 

8만일 이스라엘이 나의 모든 명령과 나의 종 모세가 명령한 모든 율법을 지켜 행하면 내가 그들의 발로 다시는 그의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떠나 유리하지 아니하게 하리라 하셨으나 9이 백성이 듣지 아니하였고 므낫세의 꾐을 받고 악을 행한 것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하신 여러 민족보다 더 심하였더라(8-9)

 

므낫세가 왕이 된 후 앗수르의 왕위에 변화가 있었습니다. 자기 나라로 돌아간 산헤립은 살해당했고, 그의 아들 에살핫돈이 왕이 되었다가 이후 앗수르바니팔이 왕이 되었습니다. 이 두 왕의 시대는 앗수르의 전성기였습니다. 어린 시절 앗수르의 위협을 겪은 므낫세는 국제 정세의 변화를 맞아 힘겹게 저항하는 길을 택하지 않습니다.

그는 히스기야와 같이 여호와 신앙을 고수하는 대신 할아버지 아하스의 전례를 따라 온갖 신에게 보호를 요청했습니다. 직접 아세라 목상을 아로새겨 여호와의 전에 세우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버리고 앗수르 왕을 섬기는 것에 아무런 갈등이 없었습니다. 백성도 므낫세의 꼬임을 받아 열방보다 더 심하게 악을 행합니다. 우리의 영향력은 선하건 악하건 주변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모세의 율법을 지키면 그 땅에서 떠나지 않게 하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안했습니다. 그리고 므낫세는 백성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였기에 현재의 상황은 이전에 하나님께서 멸망시키신 그 민족들보다 더 악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은 유다도 결국 심판 받고 그 땅에서 쫓겨날 상황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세상 속에 있어야 할 교회 안으로 세상이 침투해올 때, 교회는 얼마든지 세상보다 못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성도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기준은 더욱 엄격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태복음 7: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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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20-02)


다시 교만해진 히스기야

열왕기하 20장 12-21절


 

소셜 미디어(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하는 이들에게 자기 과시의 욕망은 피할 수 없는 유혹입니다. 지나친 자기 과시는 정체성 왜곡의 부작용까지 낳습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로 사는 것입니다. 끝없는 가면의 전시장입니다.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을 이길 험은 어디서 오는가?

 

  •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눈물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병을 고쳐주시고 15년 더 생명을 연장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 다윗의 가문을 지키겠다고 약속하신 그 언약을 따라 히스기야와 그 성읍 예루살렘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히스기야는 병이 나은 것을 축하하러 온 사절단과의 만남에 하나님의 약속을 잊고 잘못된 선택을 합니다.

 

바벨론 사신에게 모든 것을 보여줌(12-15)

하나님의 능력보다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려는 방심은 금물입니다. 받은 은혜를 소개하기보다 자신의 소유를 소개하는 모습은 교만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일어났던 히스기야가 다시 넘어집니다. 하나님의 능력보다 자신의 국력과 군사력을 자랑합니다.

 

12그 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의 왕 브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 들었다 함을 듣고 편지와 예물을 그에게 보낸지라 13히스기야가 사자들의 말을 듣고 자기 보물고의 금은과 향품과 보배로운 기름과 그의 군기고와 창고의 모든 것을 다 사자들에게 보였는데 왕궁과 그의 나라 안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히스기야가 그에게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더라 14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 왕에게 나아와 그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어디서부터 왕에게 왔나이까 히스기야가 이르되 먼 지방 바벨론에서 왔나이다 하니 15이사야가 이르되 그들이 왕궁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하니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내 궁에 있는 것을 그들이 다 보았나니 나의 창고에서 하나도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나이다 하더라(12-15)

 

이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는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의 왕 브로닥발라단입니다(12). 당시 바벨론은 앗수르의 속국으로 브로닥발라단은 앗수르 왕의 압박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남 유다의 히스기야와 동맹을 맺고 같이 앗수르 왕에게 대항하기를 원했습니다. 나중에 그는 앗수르 제국을 무너뜨리고 제국의 왕이 됩니다. 이러한 모습을 볼 때 그는 용의주도한 사람이었습니다. 반면에 히스기야 왕은 매우 순진한 왕이었습니다. 바벨론 왕 브로닥발라단은 히스기야가 병이 들었다는 소리를 듣자 편지와 예물을 보낸 것입니다. 이처럼 왕이 병들었다는 사실은 엄청난 기밀인데, 아주 멀리 있는 나라인 바벨론에서도 알고 있다면 그는 뛰어난 정보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게 사신을 보내는 것은 단순한 위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다 의도가 있는 호의입니다.

용의주도한 바벨론 왕과는 대조적으로 히스기야는 경솔했습니다. 선물과 편지를 받은 히스기야는 브로닥발라단이 보낸 사자들에게 매우 호의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앗수르의 강력한 압박에 같이 연합할 동지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보물을 쌓아둔 창고의 금은과 향품과 무기 그리고 창고에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열왕기 저자는 히스기야가 그의 왕궁과 그가 다스리는 지역에서 보여주지 않은 것이 없다고 강조하였는데, 이것은 히스기야의 경솔한 행동을 비난하는 말입니다. 히스기야가 자신의 모든 물품과 무기를 보여준 것은 바벨론 사자에게 유다의 전력이 얼마나 되는지를 완전히 노출한 행동입니다. 히스기야 입장에서는 바벨론과 동맹을 맺는 입장에서 자신이 얼마나 많은 부와 무기를 가지고 있는지 자랑하여 좀 더 유리한 위치를 점유하려는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부와 군사력이 남 유다를 지켜주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가장 의지하는 것은 이것들이 아니라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을 보여주지 못한 것입니다. 당시는 아직 앗수르의 산헤립이 쳐들어와 조공으로 왕실과 성전의 모든 은금을 가져가기 전입니다. 그래서 왕궁의 창고에는 물건들이 많았던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히스기야의 행동에 선지자 이사야는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찾아와 사자들에게 무슨 말을 하였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묻습니다. ‘어디서 왔는지’묻는 것은 그들이 누군지를 묻는 말입니다. 그러자 히스기야는 그들이 멀리서 왔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바벨론에서 왔다고 대답합니다. 먼 지방 사람들은 진멸의 대상은 아니지만 경계의 대상입니다. 그들은 종종 심판의 도구로서 쓰임받기도 하기 때문입니다(신명기 29:21), 히스기야가 멀리서 왔다는 말을 강조하는 것은 진멸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동맹을 맺을 수도 있지 않느냐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사야는 히스기야에게 ‘그들이 왕궁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이것은 히스기야 왕이 무엇을 의지하고 무엇을 자랑으로 삼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자 히스기야는 ‘내 궁에 있는 것을 그들이 다 보았나니 나의 창고에서 하나도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나이다’고 대답합니다. 이것은 히스기야가 바벨론과 동맹을 맺기 위해서 바벨론 사자들에게 매우 적극적으로 행동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입장에서는 앗수르의 심각한 군사적 위협 속에서 바벨론이 동맹을 맺자고 손을 뻗어온 것이 매우 반갑고 든든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벨론 왕이 동맹국으로서 유다를 유익한 나라로 여겨주길 바라면서, 있는 것을 다 보여주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바벨론과 손잡으면 자신의 나라 유다는 더 안전하게 이끌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살다보면 자신들이 사랑 받을 만하다고 증명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될 때가 분명이 있습니다. 자식들에게 교육을 많이 시키거나 우리들이 일하는 것들도 모두 인정받으려 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게 선택을 받으면 이것을 성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그것이 모든 것이 아니라 생각해야 합니다. 다 보여주었지만, 자기 안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히스기야의 실수를 우리도 되풀이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고, 그리스도께서 전능하신 주라는 사실을 동시에 인상을 주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는 자신과 자신의 나라의 위엄만 증명하려고 했을 뿐, 여호와 하나님의 증인이 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여호와의 심판 선언(16-18)

자기 과시는 자기 파괴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자신을 들러내고자 하는 욕망은 자신을 포장하려는 유혹으로 이어지고 결국 ‘자신’은 남김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과시는 교만으로, 교만은 심판을 불러오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로 시련을 이겨냈지만 자만하다가 시험에 넘어졌습니다. 교만보다 더 큰 인생의 위기는 없습니다.

 

16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17여호와의 말씀이 날이 이르리니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두었던 것이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요 18또 왕의 몸에서 날 아들 중에서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16-18)

 

이사야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은 매우 부정적이었습니다. 이사야는 히스기야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라는 명령으로 매우 심각하고 준엄하게 여호와의 심판 선언을 전달합니다. 심판의 날이 올 것이며, 그날에는 왕궁의 모든 것과 조상들이 창고에 쌓아두었던 모든 것이 바벨론으로 옮겨질 것이고, 물건이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 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로 말을 맺는데,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16)와 짝을 이루어 자신이 한 말이 여호와의 말씀이란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한 말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란 의미입니다.

계속해서 히스기야의 직계 후손, 즉 아들이나 손자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갈 뿐만 아니라, 그들 중에는 왕궁의 환관이 되는 자도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환관’은 거세되어 궁에서 일하는 사람들로 이것은 왕이나 왕자들이 바벨론 궁의 종이 되는 굴욕을 겪을 것이라는 의미 이상입니다. 신명기 23:1에 따르면 ‘고환이 상한 자나 음경이 잘린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의미로 왕의 직계 후손들이 거세가 되는 것은 다윗 가문의 후손이 끊긴다는 생물학적 문제와 함께 다윗 가문의 후손이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된다는 신학적 문제를 같이 야기합니다. 이것은 물건을 모두 빼앗기는 것보다 더욱 수치스럽고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 예언은 이스라엘이 결국 바벨론에게 멸망하고 포로로 끌려갈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히스기야가 19장에서 보여준 것처럼 다른 주변의 강대국을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적을 물리쳐주셨습니다. 그런데 20장에서 히스기야는 여호와가 아닌 바벨론을 의지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런 히스기야에게 그가 의지하려는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치욕을 당할 것이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아마 히스기야는 이런 경험을 토대로 앗수르가 쳐들어왔을 때는 오로지 여호와만을 의지하고 기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유다는 앗수르의 공격은 막을 수 있었지만, 바벨론의 침략은 막을 수 없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겸하여 섬기고 의지하는 모든 것이 바로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현재 한국교회는 하나님보다 권력과 돈과 숫자와 규모에 의지하여 교세를 확장하려는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교회는 약해지고 기독교의 영향력이 줄어들게 됩니다. 그런데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하고 있는지를 점검하고 회개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려 하기보다는 외부적인 원인에 그 책임을 돌리려고만 합니다. 그러면서 정치와 사회 등 곳곳에서 기독교의 힘을 이용해 소위 기독교의 가치라고 생각되는 것을 강요하고 밀어붙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은 사람의 생명을 주관하시고 천지를 주관하시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믿지 않고 다른 것을 의지하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망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교회는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그 어떤 힘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의 반응(19)

회개는 죄에 대한 자백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며 하나님의 처분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기를 과신하고 세상을 의지하는 어리석음을 자책하며 하나님께 온전히 신실하지 못했음을 자인합니다. 자신의 허물을 변명하거나 징벌이 가혹하다고 항변하지 않았습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심판 선고를 겸허히 수용합니다.

 

19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이 전한 바 여호와의 말씀이 선하니이다 하고 또 이르되 만일 내가 사는 날에 태평과 진실이 있을진대 어찌 선하지 아니하리요 하니라(19)

 

이런 하나님의 유다에 대한 심판 선언에 대해 히스기야의 반응은 매우 미지근합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하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어떤 이의도 제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히스기야는 자신의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평안과 진실함을 주시면 그걸로 만족하겠다는 말을 합니다. 여기서 ‘평안’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보호하심을 말하는 것이며, 진실은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히스기야와 언약관계 속에 계시며 성실함을 보여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자신이 사는 날 동안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지켜주시는 것으로 만족하겠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히스기야의 한계를 볼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믿음의 인물로 여호와와 동행하며 신실하게 살았다는 평가를 받은 인물이지만, 이것은 자신에게 한정된 삶이었습니다. 그는 자식들과 가족들에게 여호와 신앙에 대한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후손들도 대대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도록 관심을 갖고 인도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그의 관심이 그 자신의 인생에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모 시대는 부흥의 시대 마지막을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직도 조국교회가 얼마나 힘든지 피부에 와 닫도록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교회 안에 젊은 세대가 사라진 현실에 대해 걱정은 하지만, 심각한 위기로 여기진 않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빚을 내서 큰 건물을 짓겠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위기의 시기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교회가 살아나지 않습니다. 교회들이 일군을 키워야 합니다. 자녀들이 세상이 좋아할만한 존재로 자라길 기대하기보다도 하나님의 증인이 되도록 키워야 합니다.

 

히스기야의 죽음(20-21)

사람은 떠나도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 남아 있습니다. 어제 이룬 성취나 오늘 내 손에 쥔 자원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오만하고 무례한 사람이 되지 않도록 늘 경계합시다. 은혜로 살아야 사람답게 살아갑니다. 히스기야의 마지막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20히스기야의 남은 사적과 그의 모든 업적과 저수지와 수도를 만들어 물을 성 안으로 끌어들인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1히스기야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고 그의 아들 므낫세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20-21)

 

이 단락은 히스기야의 죽음 공식으로 특별히 저수지와 연못을 만든 것을 그의 업적으로 말하는데, 저수지와 연못은 앗수르의 침략을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역대하 32:2-8에서는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히스기야의 여러 가지 준비가 등장하는데, 물 공급이 중요한 것은 고대 공격이 주로 오랜 기간의 철통 포위를 통해 고사시키는 전략을 썼기 때문입니다. 15년 수명을 연장 받았지만, 결국 히스기야도 죽고 그의 아들 므낫세가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남김없이 보여야 할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자기 자랑과 자기 과시의 유혹은 내 삶에 남은 것이 오직 은혜뿐임을 망각할 때 찾아옵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성도에게 성도로서 살아가야할 기본 자세를 갈라디아서에서 소개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라디아서 6:14).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고 신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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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20-01)

 


히스기야 기도를 응답하신 하나님

열왕기하 20장 1-11절


아무 희망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왜 기도하겠습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변하지 않는 분이 시다 동시에 뜻을 돌이키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이 두 가지 성품은 기도하는 우리 안에서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까?

 

  • 20장에서 히스기야가 병 고침을 받은 사건은 18-19장에서 일어난 산헤립의 침공 이전에 일어난 사건으로 시간 순서로 보면 회상에 해당합니다. 이전의 이야기가 후에 언급된 것은 이전부터 계속된 앗수르의 공격에 대해 히스기야가 어떻게 신앙으로 잘 넘겼는가에 집중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20장은 히스기야가 어떻게 여호와께 대한 확고한 신앙을 가질 수 있게 되었는지를 알려 줍니다.

 

죽을 병에 걸린 히스기야(1)

 

가끔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의 잘못된 태도를 고치시기 위해 육신적인 고통을 보내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고통을 보내실 때는, 항상 그들이 무슨 태도를 고치시기 원하시는지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치유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곧 알게 될 것입니다.

 

1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그에게 나아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1)

 

20장의 이야기는 ‘그때에’로 시작하는데 여기서 ‘그때’는 앗수르의 산헤립이 쳐들오기 건어지만 정확히 언제인지 알기는 어렵습니다. 본문에서 ‘날들’이라는 복수형을 사용한 것은 일부러 시간의 모호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이야기를 보면 대략 히스기야가 죽기 15년 전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히스기야는 나이가 39세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병에 걸렸는데 죽을 정도로 심각한 병이었습니다.

본문은 히스기야가 어떤 병에 걸렸는지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병명에 대한 많은 추측들이 있지만, 무화과 반죽을 상처에 놓으니 나았다는 계의 보고를 통해 추측해보건대 일종의 피부 질환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선지자 어사야가 히스기야를 찾아옵니다. 여기서 19장에서 한 이사야에 대한 소개를 반복하는 것은 이사야의 선지자적 역할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19장에서는 히스기야가 이사야를 불렸지만 여기서는 이사야가 먼저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하기 위해 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히스기야에게 죽음을 선언하며 집을 정리하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합니다. ‘집을 정리하라’는 말은 다음 왕을 지명하여 알리라는 의미로 이사야는 히스기아에게 반드시 죽을 것이니 후계자를 지명하여 왕권에 혼란이 없게 하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한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기도(2-3)

진실한 기도는 날것 그대로를 하나님께 드러내며 자비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 여부에 상관없이 정해진 대로 행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변함없는 하나님 사랑이 변화의 근거입니다. 삶을 정리하라는 진단이 떨어졌으나 히스기야는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다른 모든 가능성으로부터 얼굴을 돌린 채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봅니다.

 

2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3.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2-3)

 

하나님께 죽음 선언을 들은 히스기야는 얼굴을 벽으로 돌리고 여호와께 기도합니다. 얼굴을 벽으로 돌렸다는 것은 임박한 죽음 선언에 매우 상심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낙심하고 체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비록 하나님의 말씀에 거짓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실현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혹시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리실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을 갖고 기도합니다.

 

3절은 히스기야의 기도 내용으로 제발 지금 여호와께서 기억해달라고 간구합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구원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는 자신이 그동안 하나님 앞에서 진실함과 온전한 마음으로 행했던 것과 하나님의 눈에 선하게 행동한 것은 ‘진실함’이란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했던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온전한 마음’은 다른 신은 섬기지 않고 오직 여호와만을 온전하게 섬겼다는 의미입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선하게 행했다는 것은 열왕기하 18:3에서 열왕기 저자가 평가한 것과 거의 같습니다. 이렇게 히스기야가 자신이 하나님만을 성실하게 섬겼다는 것을 기억해 달라는 것은 공로로 거래를 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본인이 하나님 앞에서 선하게 살려고 애쓴 것을 기억하시고 불쌍히 여기신다면 좀 더 살 수 있는 시간을 주실 수는 없겠는지 하고 매우 겸손하게 요청하는 모습입니다. 여기서 히스기야가 큰 소리로 울면서도 살려달라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살고 죽는 문제를 여호와의 손에 맡겼기 때문입니다. 기도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과정이며, 나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가며 순종하는 과정이지 나의 뜻을 하나님께 강요하여 무엇인가를 얻어내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응답(4-7)

공동체가 직면한 절망적인 상황이 우리 미래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히스기야의 15년 생명 연장은 개인적 치유 이상의 경험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앗수르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 예시입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준 사건입니다.

 

4이사야가 성읍 가운데까지도 이르기 전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5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겠고 6내가 네 날에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셨더라 7이사야가 이르되 무화과 반죽을 가져오라 하매 무리가 가져다가 그 상처에 놓으니 나으니라(4-7)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기도에 즉각 응답하십니다. 4절에서 이사야가 성읍 가운데 이르지 못했을 때 말씀이 임했다는 것은 이사야가 말씀을 전하고 성읍을 빠져나가기 전에 매우 신속하게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돌아가서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라고 명하십니다. ‘주권자’라는 표현은 사사 시대 말기와 초기 왕정 시대의 전통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지도자의 칭호입니다. ‘너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호칭도 초기 왕정 시대의 다윗 언약을 기억하게 합니다. 사무엘하 7:8에서 여호와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 왕조 언약을 내리실 때 다윗을 부르신 용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입니다. 즉, 5절은 다윗 언약을 근간으로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와 자신의 관계를 설정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기도를 듣고 눈물을 보았다고 하시는데, 이 말은 19:16에서 히스기야가 기도할 때 ‘들으시고 보소서’라고 한 것의 근거가 됩니다. 히스기야는 이 말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과 행동을 듣고 보신다는 것을 더 확실하게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병을 낫게 해주고, 3일 만에 성전에 올라갈수 있게 하며 15년을 더 살게 해주겠고,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며 예루살렘 성을 보호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과 다윗을 위해 예루살렘 성을 보호하시겠다는 말은 19:34에서도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 전달한 이사야는 염증 부위에 무화과 으깬 것을 얹어놓았습니다. 무화과가 상처를 치료하는 데 어떤 효능이 있다기보다는, 상처를 낫게 하는 상징적인 행동으로 예수님께서 눈에 침을 뱉고 안수하신 행동(마가복음 8:23), 진흙을 눈에 바르는 행위(요한복음 9:6) 등과 유사합니다.

 

징표를 구하는 히스기야(8)

하나님의 징표는 회복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의심할 여지없이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응답해주시는 분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시기 전에, 자신이 얼마나 믿을 만한 분임을 말씀으로 사건으로 친밀한 관계로 증명해 주십니다.

 

8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낫게 하시고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게 하실 무슨 징표가 있나이까 하니(8)

 

그러나 히스기야는 이런 이사야의 말을 믿지 못하고 징표를 구합니다. 히스기야는 아직 여호와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전쟁에 나가면 이길 것이라는 약속을 주신 하나님께 징표를 구한 기드온과 유사합니다. 이것을 보면 히스기야가 처음부터 여호와에 대한 온전한 믿음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 앗수르의 대군 앞에서도 오직 여호와만을 의지하는 담대한 믿음으로 성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9-11)

하나님께서 시간과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 너머에게 계시는 동시에 시간 속으로 들어오십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시간과 역사 속에 들어오시길 요청하는 행위입니다. 시간 속으로 들어오신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9이사야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실 일에 대하여 여호와께로부터 왕에게 한 징표가 임하리이다 해 그림자가 십도를 나아갈 것이니이까 혹 십도를 물러갈 것이니이까 하니 10히스기야가 대답하되 그림자가 십도를 나아가기는 쉬우니 그리할 것이 아니라 십도가 뒤로 물러갈 것이니이다 하니라 11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아하스의 해시계 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십도 뒤로 물러가게 하셨더라(9-11)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요청을 들어주십니다.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이루어질 때 징표가 임할 것인데, 해 그림자를 십도 나아가게 할 것인지 아니면 해 그림자를 십도 뒤로 가게 할 것인지 선택하라고 합니다. 즉, 해 그림자로 징표를 삼겠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히스기야는 해 그림자가 십도 앞으로 가는 것은 쉬우니 뒤로 가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즉, 시간이 뒤로 돌아가는 초자연 적인 일을 해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해의 방향을 바꾸는 것은 천지를 주관한다는 의미이고, 결국 천지를 창조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임을 눈으로 보게 해달라는 말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정말 해 그림자가 십도 물러나게 하셨습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고 히스기야의 병이 나았다는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해그림자를 십도 뒤로 가게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생명을 연장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므로 당연히 히스기야의 병은 나았습니다. 과연 우리는 해도 뒤로 가게 하실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아니면 구조와 현실 속에서 아무것도 못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히스기야의 구원 기사는 모든 기도가 불치병을 낫게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기도의 능력을 말하기보다 기도할 이유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이자 근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기도를 듣고 뜻을 돌이키실 만큼 변함없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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