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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03-02)

 


심판으로 새롭게 창조된 세계

요엘 3장 9-21절


심판을 생각하면 무자비한 파괴와 살상에 따른 파멸과 소멸로 인식하기 쉽습니다. 이 세상이 불에 타 종적을 감추는 이미지를 그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심판은 소멸이 아닌 정화의 개념에 가깝습니다. 옛 세계를 물로 새롭게 하신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 불로 세상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심판으로 새롭게 된 세상을 의인들이 상속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은 심판과 구원이 함께 일어나는 날입니다. 그날은 이방인에게는 심판의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대적한 이방 민족들을 다 모아 심판하시고 그들의 땅을 황폐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그날은 구원의 날입니다. 그들은 포로에서 벗어나 본국으로 돌아와 평안을 얻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심판과 구원(9-16)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악이 세상에 가득 차면 만군의 왕께서 천사를 보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내실 것입니다. 가라지를 거두어 풀무 불에 넣으실 것입니다(마 13:41-43). 그러니 담대함을 잃지 말고, 의연하게 끝까지 세상과 맞서 싸워 나가시길 바랍니다.

9너희는 모든 민족에게 이렇게 널리 선포할지어다 너희는 전쟁을 준비하고 용사를 격려하고 병사로 다 가까이 나아와서 올라오게 할지어다 10너희는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지어다 낫을 쳐서 창을 만들지어다 약한 자도 이르기를 나는 강하다 할지어다 11사면의 민족들아 너희는 속히 와서 모일지어다 여호와여 주의 용사들로 그리로 내려오게 하옵소서 12민족들은 일어나서 여호사밧 골짜기로 올라올지어다 내가 거기에 앉아서 사면의 민족들을 다 심판하리로다 13너희는 낫을 쓰라 곡식이 익었도다 와서 밟을지어다 포도주 틀이 가득히 차고 포도주 독이 넘치니 그들의 악이 큼이로다 14사람이 많음이여, 심판의 골짜기에 사람이 많음이여, 심판의 골짜기에 여호와의 날이 가까움이로다 15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그 빛을 거두도다 16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부르짖고 예루살렘에서 목소리를 내시리니 하늘과 땅이 진동하리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의 피난처, 이스라엘 자손의 산성이 되시리로다(9-16)

본문 말씀에서 요엘은 장차 만나게 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심판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받게 될 심판을 넘어서서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오시게 될 때 이루어질 심판까지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1) 전쟁 준비 선포(9-10)

만국을 여호사밧 골짜기에 모아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욜 3:1-3)은 그들에게 전쟁을 준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무척 적극적이며 구체적입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전쟁을 준비하고 용사들을 격려하여 집결하고 전쟁터로 올라오라고 명하십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현재 갖고 있는 무기 외에 농사에 사용하는 기구인 보습과 낫까지도 녹이고 다듬어서 무기로 만들고 전쟁을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보습과 낫의 비유는 이사야서에서는 대조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사야는 종말 때에 만민이 세계에서 하나님이 계시는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기를 작정할 것이며, 그때에 하나님께서 열방의 사람들을 심판하시지만, 그들이 칼과 창을 다듬어 보습과 낫을 만들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전쟁이 사라지고 평화로운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을 것임을 선포하였습니다(사 2:1-4). 그러나 요엘서에서는 무기가 아주 많이 필요하고 농부들까지 싸움터에 나와야 할 정도로 이 전쟁이 심각함을 설명하였습니다. 셋째, 열방에게 전쟁을 명하는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들까지도 전쟁에 임하라고 충동질하십니다. 이런 명령은 과거에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을 정복하러 갈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자나 전쟁이 아닌 다른 일에 정신 팔린 자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하셨던 명령(신 20:5-8)과 이룹니다. 약자까지 전쟁으로 소환하는 것은 모든 자가 전쟁에 임해야 함을 뜻하며, 이는 모든 자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임을 암시합니다.

(2) 무르익은 심판의 때(11-13)

모든 민족에게 전쟁 준비를 하라고 명하신 이유는 앞서 3:1-3의 내용과 마찬가지로 그들을 여호사밧 골짜기로 모아 심판하시기 위함입니다. 11-13절의 내용이 이것을 다시금 확증해줍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의 대적인 만국에 대항할 용사들을 심판의 골짜기로 집결시켜 전쟁을 준비하십니다. 계속적으로 민족들을 그곳으로 모으는 것은 하나님께서 동서남북 모든 민족들을 빠짐없이 심판하시겠다는 단호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용사들에게 낫을 사용하라고 명하고 포도주를 밟으라고 명령하십니다. 곡식에 낫을 대고 포도주 틀을 밟는 것은 추수를 의미하므로, 여기서는 민족들의 악이 크고 넘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때가 무르익었음을 나타냅니다.

(3) 여호와의 심판과 구원(14-16)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께서 만국을 심판하는 날입니다. 심판의 골짜기에 무수한 사람들이 있으나 하나님께서 그들 모두를 심판하실 것이므로 어느 누구도 심판을 피할 자가 없습니다. 그날에 하늘에 있는 해와 달과 별들이 빛을 내지 못할 것입니다(욜 2:10, 31). 이사야도 여호와의 날에 이 같은 현상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이런 현상을 사람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으로 설명하였습니다(사 13:10), 여기서 일월성신은 문자적으로 하늘의 광명체를 의미하면서 동시에 사람들이 신으로 섬기는 대상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고대인들은 해와 달과 별들을 신으로 여겼습니다. 특히 이집트에서는 태양신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달신을 섬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도 일월성신을 숭배하는 자들이 있었으므로 선지자들의 날선 비판을 받았습니다(렘 8:2; 겔 8:16; 습 1:5). 이와 같이 신격화한 광명체들이 여호와의 날에 빛을 잃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 그것들이 아무 힘도 없는 피조물임을 자명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처소 시온에서 사자처럼 포효하시니 하늘과 땅이 흔들리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에게 피난처와 산성이 되십니다. 문맥상 하늘과 땅의 흔들림은 하나님의 임재와 심판을 이중적으로 상징하는 현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자연 세계의 무질서 속에 심판의 날이 임하여 수많은 무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만, 하나님을 부르는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보호와 구원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받게 되는 보호와 구원은 순전히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때문입니다(욜 2:18).

 

시온에 거하시는 여호와(17-21)

여호와의 날은 불의한 자에게는 재앙과 심판의 날이지만, 의인에게는 회복과 구원의 날입니다. 그 날에는 자기 백성의 하나님이 되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며 사망과 애통이 없는 새로운 세계를 선물하는 날입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들이 고난 중에도 인내해야 할 이유이고, 끝까지 소망의 약속을 붙들며 의의 길을 가야 할 이유입니다.

17그런즉 너희가 나는 내 성산 시온에 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알 것이라 예루살렘이 거룩하리니 다시는 이방 사람이 그 가운데로 통행하지 못하리로다 18그 날에 산들이 단 포도주를 떨어뜨릴 것이며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릴 것이며 유다 모든 시내가 물을 흘릴 것이며 여호와의 성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 대리라 19그러나 애굽은 황무지가 되겠고 에돔은 황무한 들이 되리니 이는 그들이 유다 자손에게 포악을 행하여 무죄한 피를 그 땅에서 흘렸음이니라 20유다는 영원히 있겠고 예루살렘은 대대로 있으리라 21내가 전에는 그들의 피흘림 당한 것을 갚아 주지 아니하였거니와 이제는 갚아 주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에 거하심이니라(17-21)

심판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열방을 다 응징하여 승리의 왕으로서 친히 선택한 그의 도성 시온에 거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이 하나님이 바로 자신들을 그의 소유로 삼고 언약을 맺은 하나님이심(출 19:5-6)과 하나님 외에 다른 이가 없는 것(욜 2:27)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될 것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이 계시므로 예루살렘과 그 안에 거하는 백성들도 거룩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대적하는 세력들은 하나님이 계신 거룩한 곳에 참예하는 복을 누릴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그의 백성으로 회복시키시고 대적을 몰아내셨으므로 하나님의 도성에는 평화와 안정과 기쁨이 보장됩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므로 자연도 회복되며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게 됩니다. 이전에 메뚜기 재앙으로 황량했던 산에서(욜 1:10) 사람들이 풍성한 새 포도를 수확하므로 포도주 틀이 넘치고 양과 염소들로부터 젖을 얻어 풍요와 감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말랐던 유다 전역의 내(욜 1:20)에 물이 흐르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샘이 홀러 아카시아가 무성하고 마르고 척박한 광야 같은 싯딤 골짜기를 적실 것입니다. 이와 같이 물과 관련된 비유는 물이 부족한 이스라엘 땅에 풍족하고 풍요로운 축복이 넘쳐흐를 것을 의미합니다. 덧붙여 하나님의 성전의 물을 언급함으로써 생명과 축복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풍부한 물과 축복의 이미지는 에덴 동산(창 2:10-14)이나 종말 때의 새 예루살렘(계 21:2-3, 22:1-5)의 이미지에서 유사하게 나타나 상호연관성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에게 포악을 행한 원수들인 애굽과 에돔의 땅을 황무지로 만들어 그들의 죗값을 치르게 하실 것입니다. 여기서 애굽과 에돔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대적한 이방 민족의 대표로 소개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의 선지자들은 애굽의 우상숭배와 교만과 이스라엘에게 행한 패악과 핍박을 이유로 들며 바벨론이 애굽을 침공할 것이고, 애굽이 불에 타 사막과 황무지가 되고 거민이 사라지는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사 19장; 렘 46:13-26; 겔 29-32장), 한편, 에돔에 대해서도 이사야, 예레미야, 오바댜, 말라기 등의 선지자들은 에돔의 교만함과 유다를 배신하고 바벨론과 함께 유다를 침략한 점을 이유로 설명하며 에돔이 멸망하여 황무지가 될 것을 선언했습니다(사 34:5-17; 63:1-6; 렘 49:7-22; 옵 1-21; 말 1:2-4 등), 그렇다고 해서 여호와의 날에 이방인 모두가 멸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 미가, 아모스 등 선지자들은 이방인에게도 임할 여호와의 구원에 대해 언급하였습니다(사 2:2-4; 미 4:1-4; 암 9:12; 습 2:11; 3:9), 요엘서에서 이방인의 구원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모든 민족의 심판 날에도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는 구원을 얻는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애굽이나 에돔과 대조적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는 영원토록 사람들이 거주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누릴 것입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이 정한 심판의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의 무죄한 피를 쏟게 한 대적들을 징벌하지 않으셨지만, 이제는 그들에게 마땅한 심판과 징벌을 내릴 것이라는 하나님의 단호한 결단이 선포되었습니다.


모든 우주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요동칠 때, 십자가를 외면한 이들은 닥칠 운명으로 인해 슬피 울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피난처 삼은 이들은 하나님의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벅찬 감격 속에 맞게 될 것입니다. 이 소망으로 서로 격려하며 어두운 현실을 믿음으로 이겨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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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03-01)


만국의 죄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요엘 3장 1-8절


세상의 죄악이 관영할수록 우리의 고민은 깊어갑니다. 비통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구원과 개입을 구했던 선지자들처럼, 우리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신정론에 대한 의문에 시달리게 되고, 주님을 향한 호소와 탄식 가운데 속앓이를 합니다. 하지만 행한 대로 보응하겠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우리는 비통과 기쁨의 역설적 상황을 믿음으로 감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정의와 은혜로 심판과 구원을 베푸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불순종하였기에 그들을 정의로 심판하여 이방 나라에 포로로 끌려가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다시 본국으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만국을 심판하시는 여호와(1-3)

억장이 무너지는 불의가 횡행하고 악이 온 세상을 장악한 듯 보여도, 하나님의 정의는 반드시 실현됩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심판으로 기만과 불의, 폭력을 종식시키고, 징의와 진리와 평화의 세상을 창조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날에 세상 모든 나라들을 심판대 위에 세우십니다.

1보라 그 날 곧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 가운데에서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할 그 때에 2내가 만국을 모아 데리고 여호사밧 골짜기에 내려가서 내 백성 곧 내 기업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거기에서 그들을 심문하리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을 나라들 가운데에 흩어 버리고 나의 땅을 나누었음이며 3또 제비 뽑아 내 백성을 끌어 가서 소년을 기생과 바꾸며 소녀를 술과 바꾸어 마셨음이니라(1-3)

요엘서 2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엄중히 심판하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3장에서는 분위기가 바뀌어져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혔던 이방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이 다시 고국 유다와 예루살렘 도성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타국으로 잡혀간 원인은 우상을 섬기고 불의를 행한 데 있었습니다(대상 9:1).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포로로 잡혀가 열방에 흩어지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출애굽 후 광야를 지날 때 모세로부터 이미 들었으며(레 26:33: 신 4:27), 그 이후로도 계속 주의를 받았습니다(느 1:8; 렘 9:13-16; 겔 20:21-23). 그럼에도 불순종의 길에서 돌아서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결국 포로로 잡혀가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포로에서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그 땅을 ‘내 백성’, ‘내 기업’, ‘내 땅’으로 칭하시는데,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과 상호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림과 동시에 그들이 다른 열방과 현저히 다른 민족임을 강조하는 구실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을 열방 중에서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셨고, 출애굽 이후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어 공식적으로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공표하셨습니다(출 16:5-6).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끊어낼 수 없는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었습니다(레 20:26; 26:12), 같은 맥락에서 선지자 요엘도 하나님을 향하여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지칭하였습니다(욜 2:17).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는 기업을 통한 관계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레위 지파를 제외한 모든 지파에게 가나안 땅을 분배해주어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시고, 그 땅을 후손에게 물려주어 세대가 지나더라도 지속적으로 기업을 이어가도록 기업의 제도를 제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과 그 후손이 땅을 유업으로 물려받지만, 땅의 원래 소유자는 하나님께서입니다(레 25:23).

한편, 성경에서는 물리적인 땅만을 기업으로 지칭하지 않고,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기업(렘 10:16; 애 3:24)으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기업(신 32:9; 왕상 8:41; 렘 12:7-9)으로 언급합니다. 이로써 기업이라는 개념 안에 소유와 관계의 의미가 함축되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내 기업’이라 부르시며, 또 선지자 요엘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당신의 기업’(욜 2:17)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소유이며, 한 세대 동안만 유효한 백성이 아니라 세세토록 그의 백성임을 알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이며 기업인 이스라엘을 본국으로 회복시키는 날 하나님께서는 열방도 함께 불러 모으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는 달리 이방인에게 있어서 이날은 심판과 징벌의 날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자로서 또한 전쟁의 용사로서 그의 백성의 대적인 열방을 여호사밧 골짜기로 모아 심판하고 응징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여호사밧의 의미가 ‘여호와가 심판하신다’라는 뜻이므로, 이 골짜기는 심판이 벌어지는 장소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고소장을 전달받은 피고인인 열방은 골짜기에 모여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심판하는 죄목으로 세 가지를 지적하십니다. 첫째, 대적들이 이스라엘을 포로로 잡아가 열방에 흩어지게 하였습니다. 둘째, 그들은 하나님의 땅을 자기들 맘대로 분배하여 다른 이들에게 주었습니다. 셋째, 이스라엘의 대적들은 제비를 뽑아 이스라엘인 소년과 소녀를 기생과 술로 바꾸는 등 자기의 향락을 위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을 학대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열방의 악행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열방에 대해 분노하며 질투하셨고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긍휼한 마음을 가지셨습니다(욜 2:18).

 

이방 국가들의 죄(4-6)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을 능욕하고,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악행을 저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행위대로 갚으실 것이며,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온 세상에 알게 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요 5:29).

4두로와 시돈과 블레셋 사방아 너희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희가 내게 보복하겠느냐 만일 내게 보복하면 너희가 보복하는 것을 내가 신속히 너희 머리에 돌리리니 5곧 너희가 내 은과 금을 빼앗고 나의 진기한 보물을 너희 신전으로 가져갔으며 6또 유다 자손과 예루살렘 자손들을 헬라 족속에게 팔아서 그들의 영토에서 멀리 떠나게 하였음이니라(4-6)

하나님께서는 만국 중에서 특히 두로와 시돈과 블레셋을 중심으로 한 지중해 동쪽 연안 국가를 피고로 지목하여, 그들을 심문하고 그들의 죄를 밝히십니다. 이 세 나라는 이스라엘에게 악행을 저지른 나라들의 대표로 소환되었으며, 이 세 나라를 포함하여 애굽, 앗수르, 바벨론, 암몬 등의 다른 열방에 대한 경고와 심판의 메시지가 이사야, 에스겔, 예레미야에 단락을 이루어 집중적으로 선포되었습니다(사 13-23장; 렘 46-51장; 겔 25-32장).

특히 이 단락 중에서 요엘서에 지적된 세 나라에 대해 언급한 내용을 살펴보면, 이 나라들의 구체적인 악행이 기록된 것도 있고 생략된 것도 있지만, 그들의 악이 크다는 점과 하나님께서 이들을 심판하고 벌하겠다는 강한 의지의 메시지가 공통적으로 담겨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두로의 교만을 지적하고 불의의 광포로 무역의 풍성함을 누리는 것을 비웃으시며(겔 28:1-19), 바벨론을 이용하여 두로를 공격하고 황무한 성을 만들겠다고 선포하셨습니다(사 23:1-3; 겔 26장), 시돈에 대해서는 그들이 이스라엘 족속을 멸시하고 아프게 하였음을 언급하며 그들에게 염병과 군대를 보낼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겔 28:20-26; 사 23:4-5). 블레셋 사람에게는 그들이 옛날부터 유다를 미워하고 멸시하고 진멸하려 했음을 드러내며, 이들을 진멸하여 원수를 크게 갚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렘 47장; 겔 25:15-17).

하나님께서는 이 나라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음을 밝히시며, 그들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 보복하려 한다면 당장 그들을 응징하겠다고 엄포를 놓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원로로서 피고인 이방 나라들이 하나님께 대항하여 지은 죄에 대해서 2-3절에 덧붙여 두 가지를 더 선포하십니다. 첫째, 열방이 하나님의 성전을 탈취하여 은과 금과 진기한 보물을 자신들이 섬기는 우상에게 바치려고 자신들의 신전으로 가져갔습니다. 이때도 하나님께서는 ‘내 은’, ‘내 금’, ‘내 진기한 보물’이라고 언급하시며, 이스라엘 백성과 땅뿐 아니라 이스라엘에 있는 모든 보배들도 다 하나님의 소유라는 점을 드러내십니다. 둘째, 열방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다른 민족에게 노예로 팔아넘기며 본국에서 멀리 떠나게 하였습니다. 열방의 대표로 지목된 두로, 시돈, 블레셋 지역 국가는 지중해 연안을 따라 항구가 있어 해상 무역이 가능한 점을 이용하여 전쟁에서 포로로 잡아 온 하나님의 백성들을 헬라(그리스)인들에게 팔아 수익을 얻었습니다. 특히, 블레셋 지역은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출 13:17)이라고 불리는 국제 해안대로가 놓여 있는 지역으로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오가는 통로였으므로 노예를 팔고 수익을 얻는 일이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열방은 하나님께서 값 주고 산 이스라엘 백성을 멸시하고 핍박하였습니다. 열방이 이스라엘에게 저지른 핍박과 악행은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심판(7-8)

하나님의 심판의 날은 의인과 악인의 운명이 뒤바뀌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수치를 영광으로, 추함을 아름다움으로, 버림받은 외로움과 쓸쓸함을 기쁨과 영광으로 바꾸어주실 것입니다. 그날을 바라며 의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억울함은 신원하고, 수치와 모욕은 칭찬과 존귀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7보라 내가 그들을 너희가 팔아 이르게 한 곳에서 일으켜 나오게 하고 너희가 행한 것을 너희 머리에 돌려서 8너희 자녀를 유다 자손의 손에 팔리니 그들은 다시 먼 나라 스바 사람에게 팔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7-8)

심판자 하나님께서는 이제 열방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고 그들에게 마땅한 징계를 선포하십니다. 그들이 행한 그대로 그들에게 되갚아 응징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을 팔았듯이,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자녀들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파실 것이며,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을 헬라와 같은 먼 땅으로 흩어 보냈듯이,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통해 열방의 자녀들을 먼 나라 스바 사람에게 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악행을 저지르고 포로로 잡아간 이방 민족을 그냥 두지 않고 그들을 소집하여 심판하고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대로 갚아주시는 정의의 하나님께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이스라엘이 행한 악행에 따라 갚지 않고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이스라엘을 흩어진 열방에서 모아 그들을 향기로 받으시며, 이로써 하나님의 거룩함을 만방에 알리는 은혜의 하나님께서입니다(겔 20:41-44).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셨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구원뿐만 아니라 재능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거저 주셨고, 우리는 그것을 발굴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많이 받은 자는 많이 베푸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것을 기억할 때 약자들에 대한 배려가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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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02-02)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질투

요엘 2장 18-32절


하나님의 자비로운 응답을 경험하며 산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하지만, 대체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응답에 둔갑하며, 세심히 헤아리고 살피려는 자세 또한 부족합니다. 기도에 응답하여 인자를 보이셨음에도 감사의 조건을 찾지 못한다면 안타깝고 불행할 겁니다. 하나님 은혜에 부응한 삶이란 어떤 것입니까?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은 끝이 없다. 그의 백성이 회개하고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내린 재앙을 거두며 놀라운 구원과 축복을 베푸신다.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온 세상에 이르겠지만, 그의 이름을 부르고 의지하는 모든 자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구원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응답(18-20)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통회하는 심령을 멸시치 않으시고 회복시키십니다. 사유하시는 은총으로 상한 심령을 치료하시며,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로 우리의 잘못된 과오를 고치십니다. 은혜는 늘 죄를 이기고 승리하여 그분의 신실한 사랑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거저 주시는 은혜로 사유하심을 받아 주의 백성으로 회복된 이들입니다. 이 신실한 사랑에 응답하여 살고자 한다며 우리도 거저 주는 사랑으로 남을 용서해야 합니다.

18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의 땅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그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실 것이라 19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주리니 너희가 이로 말미암아 흡족하리라 내가 다시는 너희가 나라들 가운데에서 욕을 당하지 않게 할 것이며 20내가 북쪽 군대를 너희에게서 멀리 떠나게 하여 메마르고 적막한 땅으로 쫓아내리니 그 앞의 부대는 동해로, 그 뒤의 부대는 서해로 들어갈 것이라 상한 냄새가 일어나고 악취가 오르리니 이는 큰 일을 행하였음이니라 하시리라(18-20)

요엘서 처음부터 시작되었던 여호와의 날의 심판 메시지는 2:18에 와서 구원과 회복의 메시지로 전환되어 요엘서의 마지막까지 전개됩니다.

여호와의 날의 두렵고 끔찍한 재앙이 예고된 상황이지만, 이때라도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구원을 간절히 구하면(욜 2:12-17), 하나님께서 유다 땅과 백성을 향해 질투(‘극진히 사랑’으로 번역됨)와 긍휼을 품어 그들을 용서하고 구원으로 응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다 땅을 향해 질투하신다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그 땅의 황폐함을 볼 때 속상하고 애절한 마음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호 11:8). 하나님의 긍휼은 하나님의 성품임과 동시에 2:17(“주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소서”)의 기도 응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향해 품으신 사랑과 긍휼이 이렇게 크기 때문에, 이제 그의 정의롭고 두려운 심판을 능가할 놀랍고 큰 일이 일어납니다.

첫째, 메뚜기 재앙으로 유다 백성에게 먹을 것이 없고 하나님께 소제와 전제를 드릴 수 없었지만(욜 1:10),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흡족하게 주실 것입니다. 이로써 2:14의 기도가 응답 되었으며, 이제 이스라엘은 육적 음식을 풍족히 먹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 제사를 다시 드림으로써 영적 교제와 양식을 공급받게 될 것입니다. 또한, 만족과 기쁨을 함께 맛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 내에서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이방 나라가 이스라엘을 보는 시각에도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의 재앙을 보고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며 그들을 조롱하지만,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열방 가운데서 조롱거리가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 또한 2:17의 제사장들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둘째, 이전에는 메뚜기나 이방인의 습격으로 온 유다 백성과 땅이 고통을 받았으나(욜 1:4,6; 2:2-9),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공격한 군대를 이스라엘로부터 멀리 쫓아내심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과 긍휼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21-27)

하나님께서는 메마른 우리의 심령에 성령을 부으셔서 죽어가던 내 영혼을 살리셨습니다. 목말라 허덕이던 영혼의 갈급함을 채우셨습니다. 말씀의 기근으로부터 놓여나게 하시고, 사막 같던 내 삶을 푸르게 변화시키셨습니다. 이 은혜에 응답하여 살고자 한다면 감사의 제사를 드리면서 세상이 생명의 공간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주님과 함께 일해야 합니다.

21땅이여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여호와께서 큰 일을 행하셨음이로다 22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도다 23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 24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로다 25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중이가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 26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27그런즉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있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너희가 알 것이라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21-27)

하나님께서는 재앙으로 황폐해진 들과 산을 회복시키시고 백성들에게 비와 곡식을 충분히 주어 기쁨과 즐거움을 회복시키십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의 증거가 계속됩니다. 이전에는 풀이 시들고 나무가 껍질까지 다 벗겨져 유다의 땅과 짐승들이 기근과 굶주림으로 두려워 떨었습니다(욜 1:7,16,18). 그러나 이제는 들판에 싹이 나고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시 소생하니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평안과 안전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시온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도 하나님으로 인해 영육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근으로 목말랐던 유다 땅(욜 1:20)에 비를 적당하게 내리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싹을 틔우고 자라도록 해주는 이른 비(가을 비)나 추수 전에 내려 곡식을 잘 영글도록 해주는 늦은 비(봄 비)를 하나님의 큰 은혜와 축복으로 여겼습니다(신 11:14-17). 이전에는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이 다 떨어졌으나(욜 1:10), 이제는 이 소산물들이 풍족히 쌓였으니, 다시 성전에 나아가 하나님께 소제와 전제 등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재개할 수 있습니다.

기능이 마비되었던 성전은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죄를 용서받고 거룩한 백성으로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장소가 될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굵은 베옷을 벗고 울음을 그치고(욜 1:13), 다시 하나님과 제단에서 수종을 들며 맡은 임무를 행할 것입니다. 장로들과 백성들도 금식(욜 1:14; 2:15)을 중단하고, 이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가 공급해주신 양식을 풍족히 먹으며 만족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또한, 재앙으로 인한 피해를 다 회복시키시고 풍성한 축복으로 응답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기리며,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고 예배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찬송과 예배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사 43:21).

그의 택한 백성과 함께하시며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던 하나님께서는, 앞으로도 줄곧 자기 백성과 함께하실 것이며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자기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열방 가운데서 조롱거리가 되지 않게 하신다는 이 약속은 19, 26, 27절에 세 번이나 반복되어 나와 강조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열방 가운데 조롱거리가 되는 것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수치가 아니라 하나님께도 수치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조롱하는 열방들에게 2:18-27 등에 기록된 놀라운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하심을 분명히 밝히실 것입니다. 애굽에서 수많은 기적을 체험하고 나온 이스라엘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음을 깨달았듯이, 이제 유다 백성도 하나님의 긍휼과 보호와 공급과 구원을 목격하고 하나님 외에 진정한 신이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될 것입니다(사 45:5,14,18,21).

 

성령 강림의 축복(28-32)

여호와의 날이 주께서 임재하시는 백성들에게는 크고 두려운 심판의 날이 아니라, 도리어 갈망하고 기대할 구원의 날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날에 하나님께서 남녀노소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자기 영을 부어주어 영적인 갈망을 해갈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자기 죄를 회개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28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30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31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32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28-32)

이방 군대를 몰아내고 땅에 풍족한 양식과 비를 내려 육체적, 물질적 축복을 약속하신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한 영적 축복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나의 영이라 지칭하시며’(욜 2:28,29) 성령께서 하나님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고,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이 함께 있을 것임을 확인시키십니다. 성령의 임재는 물론 새로운 소식은 아닙니다. 요엘의 시대가 언제인지 확실히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성경에 기록된 성령의 임재와 역할은 이미 하나님의 창조 사역부터 나타났으며(창 1:2; 욥 33:4), 출애굽 때나 사사시대, 왕정시대에 걸쳐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도록 이스라엘의 지도자나 왕이나 선지자 등에게 소명과 지혜를 주고 말씀을 전하는 역할로 나타났습니다(출 28:3; 민 11:17; 삿 6:34; 삼상 16:13; 대하 24:20; 사 61:1 등). 이와같이 성령의 강림과 임재는 지도자 자격에 있는 자들에게 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요엘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축복의 약속 즉, 장래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나이나 성별이나 사회적 지위나 특정한 민족에 국한하지 않고 온 육체에 성령을 부어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선언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예언하고 꿈을 꾸고 이상을 보게 하는 등 표적을 주실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성령이 그들을 통해 일하심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실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성령의 약속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지만, 문자 그대로 모든 이에게 성령이 내리지는 않습니다.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만 합니다. 그 조건은 바로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는 사실을 세상에 선언하는 것입니다. 요엘서에 약속된 성령의 강림은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실 것이므로 기도하며 기다리라는 예수님의 당부를 통해 더 확실해졌고(행 1:4-5),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다락방에 모여 성령의 강림을 간구했던 사도와 무리에게 성령이 임함으로써 성취되었습니다(행 2장).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의 약속은 재앙과 위기 속에서도 나타납니다. 요엘은 말일에 하나님의 심판의 징조가 땅과 하늘에서 나타날 것이라고 언급하여 긴장감을 불러일으킵니다.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은 땅에서 일어나는 전쟁터를 표현한 것으로 백성이 거주하는 도성이 피바다가 되고 집과 초목들이 불타며 연기가 올라오는 모습입니다. 하늘에서는 개기일식과 개기월식 같이 해가 빛을 잃어 세상을 암흑으로 만들거나 달이 핏빛을 띄는 징조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두려움과 위기의 상황에서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성령의 임재와 보호와 구원의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고난에 대한 신학적 해답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구난 중에도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잊지 않으시고,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분명코 지금의 고난은 지나가고 새로운 구원의 여명이 밝아올 것입니다. 그러니 고난 중에서도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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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02-01)

 


경고의 나팔을 불어야 여호와의 날

요엘 2장 1-17절


성경은 거듭 크고 크고 두려운 심판의 날을 경고하지만, 안일에 빠진 우리의 신앙은 깨어날 줄을 모릅니다. 심판을 안중에 두지 않기에, 패역한 일들을 두려움 없이 행하기도 합니다. 여호와께 돌아오는 길만이 살길이라고 호소해도 귀를 닫고 자기 길로 행합니다. 탐욕에 젖고, 나태로 잠든 한국 교회가 가야 할 길은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날이 임박했습니다. 그날은 흑암의 날이며 여호와를 선두로 메뚜기 떼와 같은 강력한 군대가 온 유다를 쑥대밭으로 만들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 심판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이런 끔찍한 예고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이제라도 내게로 돌아오라”라고 명하시며 구원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임박한 여호와의 날(1-2)

가끔 운전하다 보면, 뒤에서 사이렌이 울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구급차가 급하게 환자를 운송하면서 사이렌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매우 급한 상황이기에 길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이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급한 순간에 경고의 나팔이 울리는 것을 듣는다면, 듣는 즉시 피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살 수 있습니다.

1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 이 땅 주민들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2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새벽 빛이 산 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와 같은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에 없으리로다(1-2)

여호와의 날이 임박했습니다. 그러므로 시온을 지키는 파수꾼들이 전쟁이 났음을 알리듯(호 5:8) 나팔을 불어서 여호와의 날이 임했음을 백성에게 경고하여 위험을 알려야 합니다(습 1:16). 시온을 나의 거룩한 산으로 지칭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시온성이 하나님의 소유이며 그의 관심의 대상임을 알아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긴박한 상황, 즉, 전쟁이 일어났을 때, 모든 백성들에게 나팔을 불어서 알렸습니다. 본문에 나팔 소리의 알림은 전쟁을 알리기에 나팔을 불어라는 의미이지만, 한 편으로는 기도하며 회개하라는 의미의 나팔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와 평화로운 다스림은 나라의 위기를 알리는 나팔 소리로 깨지고, 기쁨의 예배와 찬양의 소리를 내야 할 백성은 공포에 질려 소리를 낼 수 없게 됩니다.

요엘이 예고한 여호와의 날의 실체는 1장에 기술된 메뚜기 재앙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공포가 가득한 날입니다. 2:2의 많고 강한 백성은 1:6의 한 민족과 마찬가지로 일차적으로 이방 군대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고, 비유적으로 메뚜기 떼로 묘사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1장에서는 메뚜기 떼의 공격으로 인한 황폐의 결과가 집중적으로 묘사되었다면, 2장에서는 그 무리의 강력함과 피할 수 없고 거칠 것 없는 공격이 집중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날은 햇빛 없이 먹구름이 낀 캄캄한 날이거나, 강력하고 무수한 메뚜기 떼가 공중을 휩쓸고 나타나 마치 먹구름이 끼고 동이 트지 못한 날과 같을 것입니다(출 10:15). 이와 같은 현상은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성을 침공한 메뚜기 군대(3-9)

우리는 하나님 나라 역사의 마지막 무대에서 펼쳐질 두려운 날을 경고 받고 있는 이들입니다. 진노의 날 발을 구르며 슬피 울지 않도록 매사에 경성하고 깨어 지내야 하겠습니다. 임박한 것으로 예고되었던 여호와의 날은 예수 그리스도이 오심에서 실체로 임하였습니다. 과거 세대의 마지막 날이자 새 세대가 시작하는 날인 심판과 구원의 날이 하나님 나라 왕의 선포로 시작되었습니다.

3불이 그들의 앞을 사르며 불꽃이 그들의 뒤를 태우니 그들의 예전의 땅은 에덴 동산 같았으나 그들의 나중의 땅은 황폐한 들 같으니 그것을 피한 자가 없도다 4그의 모양은 말 같고 그 달리는 것은 기병 같으며 5그들이 산 꼭대기에서 뛰는 소리는 병거 소리와도 같고 불꽃이 검불을 사르는 소리와도 같으며 강한 군사가 줄을 벌이고 싸우는 것 같으니 6그 앞에서 백성들이 질리고, 무리의 낯빛이 하얘졌도다 7그들이 용사 같이 달리며 무사 같이 성을 기어 오르며 각기 자기의 길로 나아가되 그 줄을 이탈하지 아니하며 8피차에 부딪치지 아니하고 각기 자기의 길로 나아가며 무기를 돌파하고 나아가나 상하지 아니하며 9성중에 뛰어 들어가며 성 위에 달리며 집에 기어 오르며 도둑 같이 창으로 들어가니(3-9)

위협적인 군대는 하늘에 어둠을 몰고 오는 것만이 아니라 땅에 불을 몰고 와 들판을 모두 사릅니다. 여기서 불은 이미 앞서 1:19-20에 나오듯 가뭄과 함께 들판의 풀을 다 태운 불을 연상케 합니다. 땅을 삼키며 타오르는 불은 전쟁에서 실제 일어난 불이거나 유다 땅을 앞뒤에서 공격하는 메뚜기 군대의 기세와 파괴력, 그리고 이로 인한 영향력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표현은 스바냐 선지자가 묘사한 것처럼, 여호와의 날에 임한 하나님의 진노와 질투의 불을 함축합니다(습 1:16, 2:8). 메뚜기 떼가 침공하기 전까지 땅은 에덴동산과 같이 온전했지만, 그 떼가 휩쓸고 지나간 후에는 들판의 모든 것을 먹어치우므로 황량한 광야가 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은 이와 같이 치명적이고 극적인 변화를 가져옵니다.

메뚜기 무리는 말과 기병처럼 신속히 달리고, 그들이 산꼭대기에서 뛸 때는 마차 소리나 타들어 가는 검불 소리를 내며, 마치 대열을 갖추어 싸우는 군대와 같습니다. 메뚜기 군대가 떼를 지어 온 성과 집을 쑤시고 다니며 각자 맡은 임무를 수행할 때 그 세력이 강력한 용사와 같고 도둑과 같아 놓지 못하는 곳이 없고 질서 정연한 대열이 흩어지지도 않습니다. 이런 군대를 목격한 백성은 공포로 얼굴이 파랗게 질립니다.

 

선두에 선 전사 여호와(10-11)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볼 수만 있다면, 우리에게 닥친 환난도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끝나진 않을 것입니다. 세상은 재림이 없고 심판도 없으니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살라는 말을 거절하지 않는다면, 죄인들을 향한 심판의 역사가 현실이 되고 말 것입니다.

10그 앞에서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며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도다 11여호와께서 그의 군대 앞에서 소리를 지르시고 그의 진영은 심히 크고 그의 명령을 행하는 자는 강하니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이랴(10-11)

위협적인 이 군대의 우두머리에 선 전사는 바로 여호와이십니다. 하나님의 나타나심에 천지가 진동하며 해와 달과 별이 그 빛을 비추지 못합니다. 이와 같은 천지만물의 반응 현상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표현하며, 때로는 하나님의 포효나 진노와 심판도 포함합니다(3:15,16; 시 18:7; 사 13:10; 겔 32:7). 하나님께서는 군대를 호령하고 그들의 사기를 북돋우며 진격 명령을 내리는 장수입니다. 그를 따르는 용사들은 무수히 많고 강력합니다. 여호와의 날이 이렇게 크고 두려우므로 이날을 견뎌낼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제라도 여호와께 돌아오라(12-14)

하나님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 인애가 크셔서 언제든 재앙 내릴 뜻을 철회할 준비가 된 하나님 말고는 생각도 못할 일입니다. 그런데도 버티겠습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에 늦지 않았으니 이제라도 돌아가야 합니다. 백성들에게 이제라도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12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13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14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12-14)

이제라도 나에게 돌아오라! 앞서 1:13-14처럼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예고 속에 떨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살 길이 있다고 선포하십니다. 그 살 길이 회개라는 점은 심판의 원인이 죄에 있었다는 점을 확실히 알려줍니다.

요엘서 처음부터 메뚜기의 재앙을 비유로 시작하여 무섭고 참담한 여호와의 날의 실체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한 근본적인 목적은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이 이스라엘의 죄로 기인한 것을 깨닫고 그들이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촉구하는 데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작정하셨지만 이스라엘이 자신의 마음을 돌이킬 기회가 있다고 밝히셨으므로, 그들은 자포자기하거나 속수무책으로 세월을 보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더 늦기 전에 조속히 그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또한, 요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일깨우며 회개를 촉구합니다. 하나님을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로 호칭함으로써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여 그들과 언약을 맺은 왕이심을 상기시킵니다. 또한, 이 하나님이 은혜롭고 자비로워 재앙도 거두는 분임을 언급하여, 하나님이 언약의 백성을 용서하여 심판을 취소하고 복을 내리실 수 있다고 격려합니다. 이때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에 대한 언급은 요엘의 생각이 아나라 하나님이 직접 자기 자신에 대해 설명하신 표현이며(출 34:6), 하나님이 뜻을 돌이킬 수 있다는 언급 또한 요엘의 추측이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 특히 출애굽 때의 금송아지 사건(출 32-34장)을 근거로 제시한 말입니다. 과거에 조상들의 죄를 용서하고 재앙을 거두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이라도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심판을 거두시고 그들이 다시금 곡식과 새 포도주와 올리브기름을 얻어 성전에 나아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그에게 매일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실 수 있습니다.

 

성회를 소집하고 여호와께 간구(15-17)

하나님께서 분노하신 이유는 사랑하신 만큼 자녀들을 향한 화를 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에게 회개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회개를 원하신 것은 용서와 새로운 회복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만큼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가야합니다.

15너희는 시온에서 나팔을 불어 거룩한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라 16백성을 모아 그 모임을 거룩하게 하고 장로들을 모으며 어린이와 젖 먹는 자를 모으며 신랑을 그 방에서 나오게 하며 신부도 그 신방에서 나오게 하고 17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들은 낭실과 제단 사이에서 울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소서 주의 기업을 욕되게 하여 나라들로 그들을 관할하지 못하게 하옵소서 어찌하여 이방인으로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겠나이까 할지어다(15-17)

하나님께서 먼저 살 길을 제시해주시자, 선지자 요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제대로 행하도록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회개를 설명하였고, 이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회개의 초청에 즉각 반응할 수 있도록 시온에 나팔을 불어 금식일을 정하고 사람들을 모아 회개하며 하나님의 긍휼과 구원을 간구하라고 제사장들에게 명합니다.

1:14에서와 마찬가지로 선지자 요엘은 위기의 때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로서 사명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런 선지자의 시의적절한 명령에 따라 제사장들은 이제 1절에서의 전쟁을 알리는 경고 나팔이 아닌 예배로의 초대 나팔을 불어야 합니다. 시온에 있는 자들은 그 소리를 듣고 아기나 노인이나 이제 갓 결혼한 자나 예외 없이 이 예배의 자리에 나와야 합니다. 심판이 유다의 모든 이에게 내려 피할 자가 없을 것이므로(3) 모두가 나와 회개의 초청에 반응해야 합니다.

이 성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은 이스라엘의 영적 대표로서 공동체를 위하여 중보하고 하나님의 긍휼과 구원을 간구할 책무가 있습니다(레 4:20,31, 삼상 12:23; 스 9:5-15). 이때 이스라엘을 당신의 기업으로 칭하면서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지 않게 해달라고 간청함으로써 이스라엘이 세계 민족들 중에서 선택한 하나님의 백성이며 한 세대만이 아니라 자자손손에 이르러 기업으로 삼은 백성이라는 점, 그리고 그러한 백성이 이방인의 조롱거리가 되면 하나님께도 욕된 일이 된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용서와 구원을 재촉합니다.


크고 두려운 날에 대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안이함과 나태, 영적 방종과 무감각으로 지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일입니다. 깨어 분별하면서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해 진력해 살아감이 종말을 사는 성도의 합당한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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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01-02)

 


심판 전에 회개를 촉구하는 요엘

요엘 1장 13-20절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모든 것에 때가 있다’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절실하게 느끼는 것 같습니다. 하루 중에도 때가 있습니다. 밥 먹어야할 때가 있고, 일할 때가 있습니다. 부모님들은 자녀들에게 ‘지금은 공부할 때이다’라고 훈육하기도 합니다. 인생에는 적절한 때가 있는 것입니다. 때를 놓치면 두 배 세 배의 노력이 더 필요합니다. 그래서 인생의 지혜는 때를 놓지지 않는 것입니다.

 

심판하실 ‘여호와의 날’이 점점 가까웠습니다.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심판이 임하므로 육신의 양식이 끊어지고 영적 양식인 예배가 끊어져 그들의 기쁨과 즐거움이 애통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날이 오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금식하고 함께 모여 회개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고 간청해야 합니다.

 

회개와 기도를 촉구(13-14)

제사장은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과 연결고리가 되어 바른 길로 인도해야 책임이 있습니다. 자기 일이 아니라고 나 몰라라 할 수 없습니다. 무관심하면 할수록 이스라엘은 다른 길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점점 제사가 사라지고 제사장들의 삶도 피폐해졌습니다.

13제사장들아 너희는 굵은 베로 동이고 슬피 울지어다 제단에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울지어다 내 하나님께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와서 굵은 베 옷을 입고 밤이 새도록 누울지어다 이는 소제와 전제를 너희 하나님의 성전에 드리지 못함이로다 14너희는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여 장로들과 이 땅의 모든 주민들을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으로 모으고 여호와께 부르짖을지어다(13-14)

요엘은 닥칠 메뚜기 재앙이 앞으로 유다 땅에 다가올 큰 심판의 예고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심판을 당하기 전에 금식하고 회개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9절에서 제사장들 사이에 일어날 애통을 언급한 요엘은 13절에서는 제사장들을 향하여 애곡을 명령하고 그들이 취할 행동을 조언합니다.

먼저, 요엘은 제사장들에게 굵은 베 옷을 입고 금식하고 애통하며 회개의 밤을 보내라고 명합니다(13). 요엘은 제사장들을 ‘제단에 수종드는 자들’과 ‘내 하나님께 수종드는 자들’로 지칭하고 있는데, 이는 그들의 주된 임무가 성전을 돌보며 자기들을 포함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룩함을 유지하도록 제사와 중보 역할을 하는 등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섬기는 것임을 상기시킵니다. 또한,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 그리고 ‘너희의 하나님’으로 부르며, 하나님께서 요엘 자신과 제사장들을 포함한 유다 백성과 전혀 무관하지 않은 분, 바로 언약의 하나님임을 기억하도록 유도합니다.

한편, 굵은 베옷은 평상시 입던 옷을 벗거나 찢고 대신 입는 장례 의복이지만(삼하 3:31), 장례 때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며 회개하고 간구할 때 입는 옷이며(왕하 19:1; 사 37:1-2), 이런 옷을 입는 행동은 하나님 앞에서 겸비함과 순복함과 애통함을 상징합니다. 요엘의 ‘베옷을 입으라’는 명령에 있어서 특이한 점은 그 옷을 입고 밤을 보내라는 데 있습니다(아합 왕, 왕상 21:21-29). 이처럼 밤까지 베옷을 입는다는 것은 어떤 상황의 심각함을 암시하며, 기도하는 자들의 진심과 진지함을 드러냅니다.

요엘이 제사장들에게 굵은 베옷을 입고 애통하라고 명하는 이유는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메뚜기 재앙으로 작물이 다 소멸되어 소제와 전제를 드릴 때 필요한 고운 가루와 포도주와 올리브 기름을 얻을 수 없어 제사가 중단되기 때문입니다. 기본 곡물을 준비하지 못할 만큼 그 땅에 폐허가 심각하다는 의미입니다. 제사의 중단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중단되었음과 백성들이 죄에서 분리되어 거룩함을 유지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의 제물을 원하신 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원하는 신 것은 호세아 선지자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라고 하셨고, 신약에서는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막 12:33)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보다 더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 그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영적 지도자들인 제사장들이 이것을 가르치지 못한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베옷을 입고 회개하며 밤낮으로 하나님께 부르짖는 적극적인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둘째, 요엘은 제사장들에게 금식일을 정해서 유다의 장로들과 모든 주민들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모아 하나님께 부르짖으라고 조언합니다(14). 영적 지도자들이 그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보통 금식일은 대속죄일과 같은 절기나 국가에 위중한 문제가 일어났을 때 지정하여 지켰습니다. ‘금식일을 정한다’라고 하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께 절박하게 매달려야 된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금식과 기도는 굵은 베옷을 입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굴복하고 그의 도움을 간청하는 행위로서 하나님께서 내리실 재앙을 거두고 그의 보호와 축복을 기대할 수 있는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요엘이 공동체의 지도자들과 더불어 모든 이들의 금식을 요청하는 것은 하나님께 회개하고 부르짖어 하나님이 내리실 재앙을 피하라는 요구이며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할 수 있다는 선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나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금식하며 기도했을 때 하나님의 구원과 보호를 받은 예는 성경에 여러 차례 기록되었습니다(대하 20장), 유다의 여호야김 왕 5년(기원전 605년)에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명령에 따라 예루살렘 모든 백성에게 금식이 선포되고 유다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가 크므로 회개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하실 것이라는 말씀이 낭독되었습니다(렘 36:6, 9), 그러나 이때 여호야김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기록된 말씀을 모두 불에 태워버렸고, 그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재앙과 벌을 예고 받았습니다(렘 36:30-31; 22:19). 또한 이스라엘의 포로기가 끝난 후 에스라가 무리를 이끌고 바벨론에서 유다 땅으로 돌아올 때(기원전 458년), 에스라는 함께한 무리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라고 종용하며 하나님께서 예루살렘까지 그들을 대적으로부터 건져 무사히 도착하도록 기도하라고 명하였고, 그 결과 하나님의 보호 속에 무사히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습니다(스 8:21, 31). 심지어 이방인인 니느웨 왕과 백성도 요나를 통한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듣고 금식을 선언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악한 행위에서 떠났고, 그 결과 하나님의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3:5-10).

 

임박한 여호와의 날(15)

하나님의 심판의 날은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파국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날에는 어느 누구도 어느 장소도 안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에는 산 자와 죽은 자를 막론하고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불신자들에게 형벌의 심판이 임하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상급의 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함께 찬양하며 영광을 돌릴 날입니다.

15슬프다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부터 이르리로다(15)

요엘이 2-3절에서 언급한 ‘이것’이란 바로 ‘여호와의 날’입니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날’은 자주 언급되는 표현으로 심판과 구원이라는 이중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날’이 임박하므로 선지자는 애통해야 합니다. 그날은 구원의 날이 아니라 멸망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날이 전능자로부터 이른다고 예고하는 요엘의 말로 이날에 심판을 내리는 주체는 하나님이라는 점이 명백해졌습니다.

‘여호와의 날’의 예고와 그날의 임박성 또는 여호와의 날이 전능자로부터 멸망의 날로 임한다는 소식은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 전달되었습니다. 15절과 흡사한 내용은 에스겔서와 이사야서에도 나타납니다(겔 30:2; 사 13:6), 특히 스바냐 선지자의 경우 구약에서 여호와의 날에 대해 가장 집중적으로 다루었는데, 그는 무엇보다 먼저 여호와의 날이 희생의 날이며 온갖 피조물이 멸절되는 날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습 1:2-8).

 

음식과 즐거움의 핍절(16-18)

하나님의 공동체는 합심 공동체입니다. 마치 몸과 같습니다. 몸 가운데 한 부분이 아프면, 전체가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픈 부분을 빨리 치료해야 합니다. 아픈 곳을 치료하지 않고 다른 곳을 아무리 치료한다고 할지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도 죄가 우리를 아프게 만들었다면, 다른 것을 치료한다고 해서 기쁘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합니다. 죄를 해결해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16먹을 것이 우리 눈 앞에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 하나님의 성전에서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 17씨가 흙덩이 아래에서 썩어졌고 창고가 비었고 곳간이 무너졌으니 이는 곡식이 시들었음이로다 18가축이 울부짖고 소 떼가 소란하니 이는 꼴이 없음이라 양 떼도 피곤하도다(16-18)

이제 요엘은 죄의 영향력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의 피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육적으로 영적으로 굶주림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메뚜기 재앙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눈앞에서 먹을 양식이 다 끊어질 것이므로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배고픔을 느끼게 됩니다. 또한, 제사에 필요한 곡식과 기름을 얻을 수 없으므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고 죄를 용서받고 거룩한 삶을 사는 데 지장을 받게 됩니다. 들판에서 곡식을 거두고 곡식을 창고에 거두는 기쁨도 끊어질 것이며, 성전에서 울려 퍼져야 할 찬양 소리와 기쁨의 함성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있던 곡식은 시들고 썩고 새로운 소산물은 얻을 수 없으므로 창고와 곳간이 황폐해지고 무너집니다.

인간의 죄로 인한 재앙은 땅과 들판만이 아니라 소나 양 등의 가축에게도 해를 입힙니다. 꼴을 먹을 수 없어 기진맥진한 가축의 울부짖음도 사람들의 애통 소리와 함께 커져갑니다.

사람이 지은 죄가 그 사람뿐만 아니라 피조물의 세계에도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모든 소망을 없애버립니다. 그리고 자기뿐만 아니라 주변까지 모든 부분에 나쁜 영향을 미칩니다. 함께 고통 가운데 빠지게 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깨달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회복하는 운동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선구자의 간구(19-20)

지도자의 중요한 역할은 선견지명입니다. 오늘날 근시안과 사리사욕, 감투싸움과 무사안일에만 빠져있는 지도자들이 문제입니다. 마지막 때, 재앙을 극복해낼 수 있는 준비된 역량을 갖춘 지도자가 요구됩니다. 극심한 춘궁기를 맞이한 한국교회의 유일한 희망은 거룩하고 신실한 지도자의 출현에 달려 있습니다. 영적인 지도자들이여! 함께 이 지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낙타 무릎을 만들어갑시다.

19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불이 목장의 풀을 살랐고 불꽃이 들의 모든 나무를 살랐음이니이다 20들짐승도 주를 향하여 헐떡거리오니 시내가 다 말랐고 들의 풀이 불에 탔음이니이다(19-20)

위 13절에서 제사장을 포함한 유다 모든 자들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라고 명령한 선지자 요엘은 이제 자기 자신도 하나님을 향해 울부짖으며 구원을 간청합니다. 유다 백성에게 담대히 멸망의 소식을 전하고 그들에게 임박한 재앙에 앞서 회개를 명하며 스스로도 하나님께 간구하는 요엘의 태도는 선지자의 본분을 잊지 않는 헌신과 신실함을 보여줍니다.

한편, 요엘은 부르짖음의 원인으로 불과 기근을 들며, 불이 들판의 풀과 나무를 모두 사르고 시내가 다 말라 들짐승들조차 목말라 하나님을 향해 도움을 청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때 불과 기근은 재앙을 뜻하며, 실제로 일어난 불과 기근이나 메뚜기 재앙의 황폐함(욜 2:3), 또는 하나님의 진노를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진노와 관련하여, 스바냐 선지자는 여호와의 날에 하나님의 진노와 질투의 불이 임한다고 언급하였습니다(습 1:16; 2:8). 예레미야는 인간의 행악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의 불이 일어나 끌 자가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였고(렘 4:4), 말라기 선지자는 그날에 용광로 같은 불이 교만한 자와 악한 자에게 임하여 그들을 사를 것이라고 예고하며(말 4:1), 인간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분노가 심판으로 이를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재앙은 절망이나 완전한 파멸이 아닙니다. 재앙은 새 출발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재앙은 정화와 회복과 부흥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지금 당면하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직시하고 공동체가 마음을 모아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응답하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며 자신이 참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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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01-01)


심판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는 요엘

요엘 1장 1-12절


최종적인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날’이지만, 이미 회개하고 돌이킨 사람에게는 반대로 ‘구원의 날’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루하루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상황과 형편만 따지고 있다면,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결단하고 나간다면, 하루하루가 감사와 기쁨의 날이 될 것입니다.

 

선지자 요엘은 전례가 없던 독특한 메뚜기 재앙에 대해 세 가지 부류의 대상들(늙은 자들, 술 취한 자들, 농부들)에게 애곡하라고 촉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선지자 요엘은 메뚜기의 습격으로 상징되는 재앙에 직면한 모든 사람들을 향해 금식하고 애통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을 촉구합니다.

 

요엘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1)

세상에는 많은 소리와 소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들리는 소리와 소식을 다 들을 수 없습니다. 그들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 많은 소리 중에 우리의 생명을 살리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 소리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에 자리가 어디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눈과 귀 그리고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이것이 생명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1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1)

원문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시작하는 이 표제는 앞으로 요엘이 전할 말이 선지자 개인의 말이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온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과 요엘이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선지자라는 점을 분명히 밝힙니다.

요엘의 활동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시온’(2:1), ‘유다’와 ‘예루살렘’(3:1, 16-17, 20)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부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사역 대상은 유다일 것입니다.

요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삶 가운데도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을 향한 메시지가 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외침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세상을 향해 메신저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애곡하라는 부름(2-12)

장차 고난의 날이 찾아올 것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항상 마음을 겸손히 하고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혹 죄가 발견되거든 눈물로 참회해야 합니다. 그리고 개인을 넘어 교회와 다음 세대의 미래를 내다보며, 오늘 해야 할 일을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걱정스럽거든 기도하고, 염려스럽거든 내일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2늙은 자들아 너희는 이것을 들을지어다 땅의 모든 주민들아 너희는 귀를 기울일지어다 너희의 날에나 너희 조상들의 날에 이런 일이 있었느냐 3너희는 이 일을 너희 자녀에게 말하고 너희 자녀는 자기 자녀에게 말하고 그 자녀는 후세에 말할 것이니라 4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5취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울지어다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아 너희는 울지어다 이는 단 포도주가 너희 입에서 끊어졌음이니 6다른 한 민족이 내 땅에 올라왔음이로다 그들은 강하고 수가 많으며 그 이빨은 사자의 이빨 같고 그 어금니는 암사자의 어금니 같도다 7그들이 내 포도나무를 멸하며 내 무화과나무를 긁어 말갛게 벗겨서 버리니 그 모든 가지가 하얗게 되었도다 8너희는 처녀가 어렸을 때에 약혼한 남자로 말미암아 굵은 베로 동이고 애곡함 같이 할지어다 9소제와 전제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끊어졌고 여호와께 수종드는 제사장은 슬퍼하도다 10밭이 황무하고 토지가 마르니 곡식이 떨어지며 새 포도주가 말랐고 기름이 다하였도다 11농부들아 너희는 부끄러워할지어다 포도원을 가꾸는 자들아 곡할지어다 이는 밀과 보리 때문이라 밭의 소산이 다 없어졌음이로다 12포도나무가 시들었고 무화과나무가 말랐으며 석류나무와 대추나무와 사과나무와 밭의 모든 나무가 다 시들었으니 이러므로 사람의 즐거움이 말랐도다(2-12)

요엘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은 “이것을 들으라”라는 명령으로 시작되며, 이는 유다에 사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선포됩니다. 요엘은 유다 땅에 메뚜기 떼로 인해 피해가 단순히 자연재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을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재앙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오길 원하셨습니다.

(1) 늙은 자들에게(2-4)

여기서 ‘늙은 자들’은 단순히 나이가 연로한 자들이 아니라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젊은 사람들보다 삶의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땅의 모든 주민들의 대표 격이므로, 그들을 먼저 부름으로써 이스라엘 모든 사람의 주목을 끌려는 목적입니다.

이스라엘이 귀 기울여 들어야 할 소식은 궁극적으로 여호와의 날이 임박했다는 소식(1:15)입니다. 여호와의 날은 마치 방금 전에 일어난 사건처럼 설명되지만 앞으로 일어날 일입니다. 그날에는 요엘의 세대나 그 전 세대가 목격하지 못했던 큰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요엘은 큰 재해를 가져다줄 메뚜기로 인한 재앙을 시작으로 여호와의 날을 예고하며, 그날은 우선적으로 심판의 날임을 알립니다. 1:4의 ‘팥중이’, ‘메뚜기’, ‘느치’, ‘황충이’는 모두 메뚜기를 뜻합니다.

메뚜기의 침범에 대한 해석은 첫째, 메뚜기의 공격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작물의 피해와 사람들의 식량이 끊어졌음을 언급하는 여러 구절이 이를 뒷받침해줍니다(1:7,10-12,16,17). 메뚜기로 인한 피해는 출애급 때의 재앙(출 10:13-15)이나 아모스 시대(암 7:1)에도 나오며, 둘 다 요엘서에서처럼 하나님의 심판으로 나타납니다. 둘째, 메뚜기의 공격은 이방 군대의 침략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방 민족이나 군대와 관련하여 언급한 구절들이 있고(1.6; 2:2-10, 25), 적군을 메뚜기 떼로 표현한 기록이 고대 근동 문헌에 적지 않게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학자에 따라서는 네 가지의 다른 이름으로 기록된 메뚜기를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네 왕국으로 보기도 합니다.

(2) 술 취한 자들에게(5-7)

유다, 모든 이들에게 위기가 닥쳤음을 알리는 요엘은 5-14절에서는 ‘술 취한 자’, ‘제사장’, ‘농부’ 등, 유다 사회의 다양한 그룹에게 “애통하라”고 명합니다. 앞으로 벌어질 일의 혹독함과 피폐함에 대해 설명합니다. 이 다양한 그룹은 이스라엘의 개인, 가정, 사회, 경제, 종교 등 모든 사람과 그들의 생활을 대변합니다. 구체적으로 각 그룹을 향하여 경고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이 모두에게 임하며 거기서 벗어날 자가 없음을 암시합니다.

요엘을 통한 하나님의 경고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키지만, 하나님의 궁극적인 의도는 이 경고를 듣고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와 그의 심판을 지체하거나 면하기를 바람에 있습니다(2:12-14).

요엘은 먼저 ‘술 취한 자들’을 향해 경고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포도주를 마시며 술에 취한 자들은 자신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민감하게 대응하기를 꺼리고 술에 자신을 맡기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술에서 깨어 통곡하라’는 명령은 경각심을 불러일으킵니다. 메뚜기 떼가 사단을 공격하여 포도나무까지 다 벗겨낼 것이므로 그들은 더 이상 포도주를 마실 수 없게 될 것입니다.

6절의 이방인의 침략은 실제로 이방인의 군대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현재 1장의 문맥이나 2:21, 25을 참고해 볼 때 4절의 메뚜기 때 공격을 군대로 비유하는 표현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메뚜기 떼의 수는 셀 수 없이 많고 사자의 이빨과 암사자의 어금니 같은 힘을 가져서 유다 전역의 모든 식물뿐 아니라 나무껍질까지 하얗게 벗기 먹을 것입니다. 포도나무과 무화과나무의 껍질까지 벗겨졌다는 것은 메뚜기가 좋아하는 나무들을 이미 다 먹어치워 좋아하지 않는 나무들까지도 다 먹어서 없앴으므로 더 이상 음식이 없음을 뜻합니다. 또한, 상징적으로는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가 이스라엘 자체를 가리키거나(호 9:10) 평안과 형통함을 의미하므로 심판이 이스라엘 모두에게 이르러 백성에게서 평안함이 다 사라졌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내 땅’,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내 포도나무’, ‘내 무화과나무’라고 언급하시는데,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께서 유다와 그 땅에 있는 모든 백성과 모든 것을 자신의 소유이며 사랑과 관심의 대상으로 여기신다는 점을 드러냅니다. 동시에 자신의 사랑하는 대상에게 극심한 피해가 닥친 것을 보시며 애통해하심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3) 시온과 제사장들의 애통(8-10)

유다에 임한 심판으로 인해 사람들의 애통의 소리가 가정과 사회에서, 성전에서, 자연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요엘은 외치기를 어렸을 때 약혼한 처녀들이 이제 그들의 약혼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애곡하듯 애통하라고 말합니다. 결혼을 기다리며 결혼 예복을 입고 기뻐해야 할 처녀가 약혼자의 죽음 소식을 듣고 장례에 참여하며 베옷을 입고 통곡해야 한다니 얼마나 큰 슬픔입니까!

이 명령을 받는 대상인 ‘너’는 히브리어 원문에서 여성 단수로 나와 있는데, 이는 유다의 수도인 ‘시온’이나 ‘예루살렘’을 의인화한 것으로 보입니다(2:1; 애 2:8,13,18). 유다에게 임할 재앙은 평생 의지할 남편을 잃은 것처럼 장래의 소망을 끊어버리며 고통과 두려움과 눈물을 가져올 것입니다.

애통은 가정과 사회에서만이 아니라 성전에서도 일어납니다.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들에게 일어나는 애통은 영적 애통을 의미합니다. 심판이 이르며 백성은 땅의 소출의 소강상태로 육체적 양식을 공급받지 못할 뿐 아니라, 예배의 부재로 영적 양식도 공급받기 못하게 됩니다. 성전에서는 하나님께 매일 아침저녁으로 어린 양을 화제로 드릴 때 소제나 건제를 함께 드려야 하지만, 소제와 거제에 필요한 고운 가루와 포도주와 올리브 기름(민 28:3-8)이 없으므로 더 이상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며 예배하는 기쁨의 소리가 성전에서 끊어지고 망연자실한 제사장들의 한숨과 탄식과 애통의 소리가 시작되면서 성전의 기능은 마비됩니다.

여기서,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소출이 끊어진 점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멈췄다는 뜻 외에 두 가지를 더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 이 세 가지는 하나님께서 토지에 내리는 복의 상징으로도 사용되었으므로(호 12:3-9, 22), 이것들이 사라졌다는 것은 땅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 끊어졌음을 암시합니다. 둘째, 이 축복은 신명기 7:13에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받을 수 있는 결과로 약속되었으므로 이스라엘이 더 이상 이 소출을 먹을 수 없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했음을 암시합니다.

(4) 농부들의 애통(11-12)

이제 요엘은 논밭을 일구는 농부들에게 애통하라고 외칩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밀과 보리 등의 소산과 이스라엘 지역에서 자라나는 과실나무들이 다 시들고 없어질 터이므로 땅과 자연이 주는 풍성함과 소산을 통한 기쁨이 사라질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심판의 날이 이르면 시온에서, 성전에서, 그리고 논밭에서 들려야 할 즐거움과 기쁨의 소리는 마르고 통곡과 애통의 소리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살다보면 생각지 않았던 어려움을 만나기도 합니다. 개인의 삶의 범주에서 겪는 어려움일 수도 있고, 한 지역이나 국가적으로, 그리고 세계적으로 만나는 곤경일 수도 있습니다. 질병과 사고도 있고,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재난도 있습니다. 그리고 원치 않는 전쟁의 참화를 겪을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이러한 혹독한 시련을 주신 하나님의 참 뜻이 무엇인지 묻고 그 뜻을 따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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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 서론


 

요엘서는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또한 해석에 대한 논란도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이 책의 주요 주제가 유다를 휩쓴 메뚜기 재앙이라고 주장합니다. 다른 이들은 메뚜기 재앙이 이 책의 주요 배경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엘이 메뚜기 재앙을 인간 군대에 의한 정복의 전조로 인식하고 나아가 종말론적 사건으로까지 인식했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이 책 전체에 종말론적 틀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책의 저작 연대도 불확실합니다.

요엘은 짧은 3장(히브리어 성경 4장)에서 하나님의 심판, 종말론적 사건 그리고 하나님 백성들의 미래를 제시하는 상세한 그림을 그립니다. 이런 점에서 요엘은 성경의 그 어떤 책보다 중요한 책입니다. 특별히 “여호와의 날”의 책입니다.

 

1.저자

‘요엘’은 아주 경건하게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구약에는 ‘요엘’이라는 이름이 비록 12번 나오지만, 이 이름들은 요엘서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요엘서와 사도행전(행 2:16)을 제외하고는 어느 곳에서도 저자 요엘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그에 대한 성경 외의 증거들은 믿을 수 없습니다. 그의 아버지 브두엘(1:1)도 역시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그의 관심으로 미루어 볼 때(2:32;3:1,6,8,16-20), 그는 유대 지역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2. 기록 연대

이 책은 연대를 확정할 수 있는 역사적 사건들을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학자에 따라 주전 9세기-2세기까지 기록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해석가들은 이 책의 연대를 학개서와 스가랴의 연대보다 후대인 포로 후 시대(6세기경)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든지 간에 요엘서의 메시지는 그 기록 연대에 의해서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습니다.

요엘서는 아모스, 미가, 스바냐, 예레미야, 그리고 에스겔과 놀라우리 만큼 언어학적 평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책들과의 문체적 관계는 요엘서의 기록연대를 결정합니다. 만일 요엘서가 일찍 기록되었다면 다른 선지서들이 요엘서로부터 그 표현들을 빌려왔을 것이고 만일 후에 기록된 것이라면 그 반대일 것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모든 선지서들은 선지자들과 그 당시의 독자들이 공동으로 소유했던 어떤 종교적인 문헌 전승으로부터 어느 정도 인용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3. 메시지

요엘 선지자는 거대한 메뚜기 재앙을 바라봅니다. 그 메뚜기 재앙은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2:31)의 전조(前兆)로서 유다를 황폐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1:4; 2:25에서 언급되고 있는 메뚜기들을 실체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어떤 해석자들은 그 메뚜기들은 바벨론, 메대, 바사, 헬라, 그리고 로마를 우화적으로 표현한 것들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이 위기에 직면하여 늙은이와 젊은이(1:2,3), 술주정꾼들(1:5), 농부들(1:11)과 제사장(1:13) 등 모든 백성들이 회개할 것을 촉구합니다. 그는 메뚜기들을 여호와의 군대로 묘사하고, 여호와의 날이 가까이 왔음을 상기시켜 주는 도구로 보고 있습니다. 그는 그 날이 열방들에게 심판의 날이고, 이스라엘에게 구속과 축복의 날이 된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사야(2:10-21), 예레미야(4:6), 아모스(5:18-20), 그리고 스바냐(1:7-18)와 더불어 그 날을 불성실한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의 날로 묘사합니다. 회복과 축복은 심판과 회개 후에 도래할 것입니다.

 

4. 주요 특징 - 참고/ 김윤희, 성경에센스 요엘편, 유튜브

(1) 여호와의 날을 강조

첫째는 여호와의 날에 대한 강조입니다(1:15). 이것은 종말에 심판의 날을 의미하는 것으로, 책 전체를 하나로 묶어주는 중요한 주제가 됩니다. 2장에서 여호와의 날에 공격이 있을 것이라고 표현합니다(2:1-2). 군대가 메뚜기 떼로 표현된 것인지, 메뚜기 떼가 군대로 표현된 것인지 묘하게 얽혀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메뚜기이든 실제 군대이든, 이 모든 것을 진두지휘하시는 분이 여호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이것을 무찌를 자는 없습니다.

(2) 여호와의 날 묘사

1장에서 ‘메뚜기 재앙’을 사용하여 선명하고 설득력 있게 ‘여호와의 날’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 한 종류의 메뚜기 떼만 덮쳐도 남아는 것이 없는데,네 종류의 메뚜기 떼가 계속해서 덮쳐 그나마 남아있는 것을 먹어 치운다면 그야말로 초토화되고 말 것입니다. 고대 근동 사회뿐 아니라 작가 펄벅의 [대지]라는 작품에도 나타나듯중국와 아프리카 등 세계 각지에서 일어난 메뚜기 떼의 습격은 농작물에 치명적 이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심판의 날을 메뚜기 재앙으로 표현하는 것은 매우 효과적입니다. 특히 고대 근동에서는 이러한 재앙을 신의 노여움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백성들은 어떻게든 여호와의 진노를 풀어드리기 위해서라도 요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였을 것입니다.

(3) 사도들에게 중요한 예언서

요엘서는 사도 베드로와 바울에게 중요한 예언서입니다. 신약의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날 교회가 태동하던 때에 베드로 사도가 전한 메시지에서 인용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요엘서입니다. 다락방에 모여있던 무리들에게 성령이 강림해서 그들이 각기 여러 나라의 방언을 말하매, 당시 오순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여있던 무리들이 놀라서 어찌 된 일인지를 묻기 시작합니다. 이때 베드로가 설교를 시작하며 요엘서의 말씀을 인용하여 오순절 사건이 요엘 예언의 성취임을 다음의 유명한 말씀으로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16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17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19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1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행 2:16-21) 당시 베드로의 메시지를 통해 구원을 받고 세례를 받은 자가 3,000명이나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운을 얻으리라”는 요엘서의 말씀을 인용하며 구원의 보편성을 선포합니다.

(4)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

요엘 선지자는 “백성들, 장로들, 어린이와 젖 먹는 자와 신랑된 자와 신부된 자를 모으고 그들과 함께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울고 회개하며, 그때에 여호와께서 자기의 땅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그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실 것리라”(2:18)는 메시지로 호소하는데 이 말씀이 요엘서의 터닝포인트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하면 메뚜기 떼의 피해를 보상해주시겠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회복과 구원의 약속을 해주십니다. 회개의 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주시는 이유는 그분이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기 때문’(2:13)이라고 요엘 선지자는 알려줍니다.

 

5. 요엘 개요

Ⅰ. 메뚜기 재앙(1:1-12)

     1. 요엘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1)

     2. 애곡하라는 부름(2-12)

            (1) 늙은 자들에게(2-4)

            (2) 술 취한 자들에게(5-7)

            (3) 일반적 청중에게(8-10)

            (4) 농부들에게(11-12)

 

Ⅱ. 임박한 여호와의 날(1:13-20)

      1. 제사장들에게 애곡하고 회개하라는 부름(13-14)

      2. 애곡의 기도(15-20)

 

Ⅲ. 여호와께 돌아오라(2:1-17)

      1. 여호와의 날이 오고 있다는 경고(2:1-11)

      2. 회개하라는 촉구(2:12-17)

 

Ⅳ. 이스라엘의 회개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2:18-32)

      1. 여호와의 위로와 회복(2:18-27)

      2. 성령을 부어주심(2:28-32)

 

Ⅴ. 다가올 열방에 대한 심판(3:1-8)

 

Ⅵ. 하나님의 백성이 받게 되는 복:하나님의 임재(3:9-21)

      1. 열방을 향해 모이라는 명령과 하나님의 심판(3:9-13)

      2. 여호와의 날의 징조(3:14-17)

      3. 최종 상태(3: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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