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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바냐(03-02)


여호와의 회복의 날

스바냐 3장 9-20절


경기에서 승패의 결과를 집중하면 긴장하면서 지켜봅니다. 그러나 승패의 결과를 알고서 게임을 볼 때, 경기 중에 어떤 일이 생겨도 크게 당황하거나 걱정하지 않습니다. 이미 결과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순간적으로 아무리 많은 점수 차이가 나더라고 승리한 게임은 결국에는 언젠가는 반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도 역시 이미 승리가 보장된 영적 전쟁을 합니다. 그래서 살아가는 동안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구원이 확실히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는 마지막으로 여호와의 회복하실 것을 표현합니다. 이 날은 회개의 기회를 상실한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날이지만, 동시에 주를 인정하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날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여호와를 인정하는 이방인들도 주께 나오며,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기쁨으로 그들 가운데 거하실 것입니다.

 

열방의 회복(9-10)

사람들에게 가장 안식을 주는 곳은 바로 ‘집’입니다. 주의 백성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는 최종 목적지는 영원한 본향 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상의 방황은 지나가고 본향으로 입성할 것입니다. 사람은 본질상 죄인이므로 자연인의 상태에서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죄 사람의 역사로만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거저 주시는 은혜를 입어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9그 때에 내가 여러 백성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여 그들이 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한 가지로 나를 섬기게 하리니 10내게 구하는 백성들 곧 내가 흩은 자의 딸이 구스 강 건너편에서부터 예물을 가지고 와서 내게 바칠지라(9-10)

본문은 종말에 열방과 유다가 맞이할 영광스러운 구원과 복을 다룹니다. 9,19-20절에 반복된 ‘그때’와 11,16절에 나오는 ‘그날’은 여호와의 큰 날, 즉 종말론적 회복과 구원의 때를 일컫습니다.

선지자 스바냐는 열방을 향한 심판을 선언한 후, 그들의 회복을 예견합니다. 종말에 성취될 열방의 회복과 구원은 이사야 19:22-25에도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열방의 주권자로서 당시 초강대국이었던 애굽과 앗수르를 심판하신 후, 그들을 이스라엘과 함께 참된 예배자로 세우십니다(사 19:21). 그리고 그들이 열방의 복이 되게 하십니다. 여호와께서는 “내가 여러 백성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여 그들이 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한 가지로 나를 섬기게 하리니”라고 선언하십니다. 열방은 헛된 신들의 이름으로 맹세했고, 정화되지 못하고 더러운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그때에 여호와께서는 여러 백성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셔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신을 섬기게 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11-18)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소망이 없을 것 같이 심판을 선고하셨지만, 여전히 모든 사람들과 함께하십니다. 사람들이 범죄하고 타락함으로 도저히 함께 하실 수 없어 진노하신 것이지, 절대로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주셔서 이방인이 우리들을 구원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끝까지 보호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날이 점점 가까워집니다. 이제는 주의 말씀을 가지고 땅 끝이 이르러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11그 날에 네가 내게 범죄한 모든 행위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것은 그 때에 내가 네 가운데서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들을 제거하여 네가 나의 성산에서 다시는 교만하지 않게 할 것임이라 12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네 가운데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 13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거짓된 혀가 없으며 먹고 누울지라도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 14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15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네 원수를 쫓아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16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17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18내가 절기로 말미암아 근심하는 자들을 모으리니 그들은 네게 속한 자라 그들에게 지워진 짐이 치욕이 되었느니라(11-18)

하나님께서는 열방의 구원 받을 사람들을 회복시키신 후,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눈을 돌립니다. 선택받은 백성들이 돌아올 것이며, 백성들을 죄악과 교만에서 회복시켜 정결하게 하십니다. 예루살렘과 그곳의 거민들에게 다시 더 특별하게 말씀하시며, 그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소망을 주십니다. 그것은 백성에게서 불순한 요인들을 제거됨으로 의로운 사람으로 보존할 것입니다.

(1)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11-13)

선지자 스바냐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누릴 회복을 극적으로 다룹니다. 11절 이후의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정결케 되고, 종말론적인 구원을 경험자들, 즉 남은 자들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남은 자들’의 대표적인 예는 온 세상이 물로 심판받는 가운데서 구원받은 노아와 그의 가족입니다(창 6-10장). 아합왕 시대에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천 명 또한 남은 자들입니다(왕상 19:18; 롬 11:25). 사도 바울은 각 시대마다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고 말했습니다(롬 11:5). 성경에서 남은 자는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남은 자들을 가리킵니다. 놀라운 점은 이들이 의미 있는 신앙의 자질과 모습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바냐는 남은 자의 영적 특성을 세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 악을 행하지 않음. 둘째, 거짓을 말하지 않음. 셋째, 입에 거짓된 혀가 없음. 이사야 30:15,18은 남은 자들의 영성을 두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 잠잠히 여호와를 신뢰함. 둘째, 여호와를 기다림, 즉 남은 자들은 언약의 말씀에 순종하며 악을 행하지 않고, 입술에 거짓이 없으며, 잠잠히 여호와를 신뢰하고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우상에게 무릎 꿇지 않고, 순결한 신부와 같이 주님을 기다리며 섬기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종말의 때에 여호와의 구원과 영광을 경험할 것입니다.

(2)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14-15)

시온의 딸과 예루살렘의 딸은 하나님의 백성을 의인화한 표현입니다(참조, 사 1:8: 애 1:1-6). 그때에 시온의 딸은 기쁘게 노래 부르고 즐거워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형벌을 제거하셨고, 그들을 괴롭혔던 원수를 쫓아내셨기 때문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 가운데 왕으로 좌정하셔서 그들을 회복시키신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당신의 백성 가운데 임하시는 것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됩니다. 여호와의 나아오심과 임재는 구원, 생명, 회복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사 35:35:40:1-11). 반면, 여호와의 떠남은 저주, 심판, 사망을 의미합니다(겔 10장). 여호와께서 우상숭배가 성행하던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시자, 유다는 바벨론에게 멸망 당했습니다(겔 11:1-13). 여호와께서 시온에 왕으로 임재하신 것은 회복과 구원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므로 그들은 크게 기뻐하며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3)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16-18)

본문은 여호와께서 당신의 백성을 향해 품으신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그들을 위해 성취하실 구원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구절 중 하나입니다. 그 회복의 때에 유다 백성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절망으로 인해 손을 늘어뜨리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즐거움 가운데 기뻐하며 17절은 15절과 함께, 당신의 백성 가운데 임재하신 여호와와 그분의 구원을 강조합니다. 여호와의 임재는 ‘모든 축복의 근원’이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좌정하실 때, 그들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까? 그들은 여호와의 놀라운 구원과 회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여호와께서는 더 이상 진노와 분노가 아니라, 사랑, 기쁨, 즐거움을 품고 그들 가운데 거하십니다.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전능자하나님으로, 구원자로 임재하십니다. 그들 가운데 좌정하신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반드시 구원하시고 새롭게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이는 놀라운 확신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자유, 치유, 소망, 부유함을 누릴 것입니다. 이 놀라운 구원의 약속은 두려움과 고통 가운데 있는 유다 백성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진정한 안식과 평안과 기쁨은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여호와께 달려 있습니다. 과거에 그들은 유배 상황 속에서 절기를 지키지 못해 근심했지만, 이제는 마음껏 절기를 지키게 될 것입니다.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19-20)

여호와의 회복될 마지막 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기에는, 구원 받지 못할 것 같았던 이방인들을 먼저 영적 회복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러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열방 나라에서 이방인 중에서 여호와를 인정하는 사람들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변화되어 이방의 우상을 섬기던 죄악된 입술들이 하나님을 찬양의 입술이 변화될 것입니다.

19그 때에 내가 너를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벌하고 저는 자를 구원하며 쫓겨난 자를 모으며 온 세상에서 수욕 받는 자에게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 20내가 그 때에 너희를 이끌고 그 때에 너희를 모을지라 내가 너희 목전에서 너희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너희에게 천하 만민 가운데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19-20)

여호와의 구원에 대한 묘사가 이어집니다. 유다를 괴롭게 하던 자들은 벌을 받고 유다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반면 저는 자들과 세상에서 수욕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은 다시 유다로 모일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온 세상 가운데 칭찬과 명성을 얻게 됩니다. 이는 놀라운 구원을 통해 유다 백성의 운명이 반전된 것을 의미합니다. 유다 백성은 더 이상 여호와께 버림받은 과부가 아니라, 여호와와 언약을 새롭게 체결하고, 영광, 명성, 복을 열방에 과시하는 찬란한 왕비가 됩니다(사 62:1-5), 하나님의 백성과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로 인해 세상 가운데 영광, 명성, 복을 과시하는 빛과 같은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있을 때, 간절히 돌아오길 기다리셨습니다. 돌아오기 쉽도록 방법을 준비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돌아오는 백성들을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을 향해서도 동일한 모습으로 기다리십니다. 신랑이신 예수님을 다시 만날 그 날까지 기다리며 준비된 신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니 낙심하지 말고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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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바냐(03-01)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경고

스바냐 3장 1-8절


그리스의 사라쿠사 거리에 앞머리는 무성하고 뒷머리는 대머리인 ‘카이로스(kairos)’라는 우수광스러운 동상이 있습니다. 이 동상을 본 관광객들마다 웃기도 합니다. 하지만 동상 밑에는 “몸이 벌거벗은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쉽게 발견되기 위함이고, 앞머리는 무성한 것은 사람들이 나를 보았을 때 쉽게 붙잡게 하기 위함이고, 뒷머리가 대머리인 것은 내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다시는 붙잡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고 발에 날개가 달린 것은 나를 다시 붙잡지 못하도록 빨리 달아나기 위함이다. My name is ... CHANCE(나의 이름은 ...‘기회’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회는 언제나 오는 것이 아니라 준비된 사람들에게만 주어집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주변 이방 민족에 대해 심판을 선고하시고, 이제는 점점 유다와 예루살렘 쪽으로 다가오고 계십니다. 유다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하지, 백성부터 시작하여 정치지도자 그리고 종교지도자들까지 범죄를 고발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회개의 기회를 주셨지만, 거절한 유다의 완악함을 지적하신 하신 후 남은 것은 심판뿐임을 강조하십니다.

 

이스라엘 성읍의 패역(1-2)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빛으신 예수님께 돌아오도록 빛을 비추시고, 간절히 외치십니다. 애타게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까? 말씀으로 비추어진 당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청산해야 할 죄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지금 기회가 있을 때 회개하시길 바랍니다.

1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이 화 있을진저 2그가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1-2)

하나님께서는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 다시 한 번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말씀합니다. 그들에게 히스기야의 개혁 그리고 요시야의 개혁으로 하나님께 돌아올 기회가 있었습니다. 수많은 경고가 있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과 교훈을 저버렸습니다.

선지자 스바냐는 3장에서 범위를 좁혀 예루살렘과 정치적, 영적 지도자들을 향해 여호와의 심판을 선포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예루살렘은 시온과 동의어로 사용합니다. 시온은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독특한 위치와 중요성을 내포합니다. 먼저, 시온은 온 세상의 중심입니다. 이 땅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임재가 머물러 있는 거룩한 처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곳에 임하셔서 이스라엘을 만나시고, 영적인 교제와 은혜를 허락하셨습니다(사 2:1-4). 둘째, 시온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유일한 곳입니다. 시온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므로 하늘과 땅이 만나는 신성한 곳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성전에 나아와 하나님의 임재와 도움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셋째, 시온은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온에서 하나님의 법과 명령을 선포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은 순종함으로 언약 백성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시온, 즉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임재가 머물고, 그의 통치가 구현되는 영광스러운 처소이자 여호와의 궁정입니다. 이곳은 여호와의 거룩함으로 인해, 인간의 부정함과 죄악이 공존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스바냐는 그 성읍이 매우 패역하고, 더럽고, 포학하다고 선언합니다. 그곳 백성, 특히 정치적, 영적 지도자들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고 패역했습니다. 그리고, 외적인 의식에 치우쳤지만 삶은 범죄로 가득했고,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를 착취했기 때문에 더러웠습니다. 선지자 이사야 당시 유다의 관원과 백성은 소돔의 관원들과 고모라의 백성과 비슷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선행과 정의를 행하기보다, 고아와 과부를 신원하지도, 변호하지도 않았습니다(사 1:10-17). 스바냐 선지자 시대에도 비슷했습니다. 이에 예루살렘의 패역함에 대해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선언됩니다.

 

범죄를 일삼은 지도자들(3-5)

성도들은 사회에서나 교회에서나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기 위해 자신의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특히 정지, 종교 지도자들을 통해 공의로은 사회가 구연이 됩니다. 먼저 그들이 말씀을 통해 영적 지도자의 바른 삶을 배우고 구원의 진리를 아는 영적 지도자의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가 되어냐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세상을 바른 길로 이끌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3그 가운데 방백들은 부르짖는 사자요 그의 재판장들은 이튿날까지 남겨 두는 것이 없는 저녁 이리요 4그의 선지자들은 경솔하고 간사한 사람들이요 그의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였도다 5그 가운데에 계시는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빠짐없이 자기의 공의를 비추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3-5)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당신의 뜻을 알려 주시고, 진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나 귀를 기울이지 않고 외면한다면 예루살렘 백성처럼 어리석은 자들의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소리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세상의 소리보다 하나님의 음성에 더 귀를 기울이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더 가까이하고, 더 의지하고, 말씀에 더 열심히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1) 범죄를 일삼은 지도자들(3-4)

선지자 스바냐는 당시 영적, 정치적 지도자들의 타락과 범죄를 더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3절은 정치 관료들, 4절은 영적 지도자들의 패역함과 흉악함을 포악한 짐승에 비유합니다(참조, 겔 22:25-31). 약자들을 돌보아야 할 공직자들은 먹이를 찾아 부르짖는 사자와 같이 약자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무자비하게 착취했습니다. 재판장들은 탐욕과 배고픔에 찌든 이리와 같이 가난한 백성을 폭력으로 착취했습니다. 영적 지도자들은 어떠했습니까? 선지자는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백성에게 선포함으로써 구원의 길과 방편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스바냐 당시 선지자들은 경솔하고 간사했습니다. ‘경솔하다’로 번역된 ‘포하짐’은 ‘교만하다’, ‘거만하다’, ‘훈련되지 않다’, ‘경솔하다’라는 뜻입니다. ‘간사하다’로 번역된 포이짐은 ‘배반한’, ‘사악한’, ‘믿음이 없는’이라는 뜻입니다. 당대 많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가르치기보다, 거만함과 사악함을 따라 백성을 기만하면서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쳤습니다. 제사장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옳고 그름을 분별함으로써, 이스라엘이 거룩한 백성이자 제사장 나라가 되도록 이끌어야 하는 영적 어른입니다(레 10:10). 하지만 당시 제사장들은 율법을 먼저 범했고, 스스로 성소를 더럽혔습니다. 영적 기준이 무너진 공동체는 한순간에 망합니다.

(2) 공의를 비추시는 하나님(5)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공동체에 친히 임하셔서 아침마다 당신의 공의를 비추십니다. 그때에 불의한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자를 누리지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과 종말론적 멸망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 심판의 경고(6-8)

지도자가 잘못되면 모든 백성들도 잘못되기 때문입니다. 지도자들의 타락은 결과적으로 공동체를 죽이는 일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일보다 더 지도자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백성들보다 지도자들을 향해 죄를 먼저 물으실 것입니다. 이제 공의로운 하나님께서는 압제 받은 자들을 높이시고 패역한 자들을 멸하실 것입니다.

6내가 여러 나라를 끊어 버렸으므로 그들의 망대가 파괴되었고 내가 그들의 거리를 비게 하여 지나는 자가 없게 하였으므로 그들의 모든 성읍이 황폐하며 사람이 없으며 거주할 자가 없게 되었느니라 7내가 이르기를 너는 오직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 그리하면 내가 형벌을 내리기로 정하기는 하였지만 너의 거처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그들이 부지런히 그들의 모든 행위를 더럽게 하였느니라 8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일어나 벌할 날까지 너희는 나를 기다리라 내가 뜻을 정하고 나의 분노와 모든 진노를 쏟으려고 여러 나라를 소집하며 왕국들을 모으리라 온 땅이 나의 질투의 불에 소멸되리라(6-8)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열국을 심판하신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열국을 의지하며 안전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아가 예배하며 교제하지 못할 만큼 영적으로 죽어 있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그들에게 남은 것은 패역과 포악과 더러움뿐이었습니다. 부지런히 하나님을 찾아도 부족할 때 자기 행위를 더럽히는 유다에게 심판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 여호와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6-7)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원하시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먼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써 섬기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은 경건의 토대이자 완성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은 여호와와 그분의 말씀을 존중함으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분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의 영적 가치와 유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여호와를 경외할 때, 지혜롭고, 의롭고, 공평하고, 정직한 삶을 살게 됩니다(잠 1:1-7). 여호와를 경외할 때, 영혼은 평안하고, 그 자손들은 땅을 상속받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여호와의 친밀함을 누리며, 세상이 알지 못하는 신비한 생명과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시편 25:12-14). 그때 그들은 참된 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잠 2:5-6).

다음으로, 백성이 교훈을 받는 것입니다. ‘교훈’으로 번역된 ‘무싸르’는 말씀을 실천하는 ‘영적 훈련’ 내지는 ‘제자도’(discipline)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교훈을 받는다는 것은 신앙의 여정에서 영적 성숙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구현해 가는 영적 훈련과 제자도의 삶을 의미합니다.

이 두 가지 요소는 여호와께서 당시 유다 백성뿐 아니라, 오늘날 성도에게도 동일하게 원하시는 신앙의 근본 토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여호와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며 살아갈 때, 여호와의 심판과 형벌을 피하고, 참된 생명과 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유다 백성, 특히 영적, 정치적 지도자들은 여호와의 초청을 단호히 거절했고, 모든 행위를 더럽게 했습니다.

(2) 불에 소멸되리라(8)

유다 백성이 여호와의 초청을 거절할 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그분의 분노와 진노에 의한 심판의 불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기다린다’(하카)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경건한 백성이 여호와를 기다리는 모습과 그 이후에 누릴 구원과 축복을 내포합니다(사 8:17:30:18; 64:4). 하지만 여기서는 정반대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악을 행한 영적, 정치적 지도자들은 분노와 진노의 하나님을 기다려야 하며, 그 끝은 여호와의 불에 의해 온 땅과 함께 소멸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하고 돌아올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거절하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점점 돌아올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가까워져 갔습니다. 이러한 모습으로 살지 않기 위해서는 날마다 공의의 빛을 비추어 주시고 교훈을 들려주실 때 거룩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진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곳에 고통이 아닌 하나님이 놀라운 축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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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바냐(02-01)


주변 이방 나라들에 대한 심판

스바냐 2장 4-15절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은 남들보다 못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 하고, 남들로부터 존경만 받으려 합니다. 항상 일들은 완벽해야 합니다. 이런 모습은 겉으로 볼 때는 아름다워 보이지만, 주변 사람들을 많은 부담을 줍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교만으로 인해 아픔을 주고 서로의 관계를 깨뜨립니다. 자신이 이룬 것으로 교만스럽게 행동하며,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정죄합니다. 그래서 서양 속담에 ‘교만은 천사를 마귀가 되게 하지만, 겸손은 사람으로 천사가 되게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심판하기 전에 유다를 둘러싸고 괴롭혔던 주변국들을 먼저 심판하십니다. 그 대적들은 차례로 서쪽 블레셋에서 시작하여, 동쪽의 모압과 암몬, 남쪽의 구스와 북쪽의 앗수르를 향한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주변국을 먼저 심판하심으로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하신 것입니다. 훗날 이 땅들은 모두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서쪽 블레셋 심판(4-7)

종종 하나님을 믿지 않고 악한 방법으로 성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부러워하지는 않습니까? 믿지 않는 자들이 잘못된 일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잠언 24장 1-2절에서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그들의 마음은 강포를 품고 그들의 입술은 재앙을 말함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날에 그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 상상해보시길 바랍니다.

4가사는 버림을 당하며 아스글론은 폐허가 되며 아스돗은 대낮에 쫓겨나며 에그론은 뽑히리라 5해변 주민 그렛 족속에게 화 있을진저 블레셋 사람의 땅 가나안아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를 치나니 내가 너를 멸하여 주민이 없게 하리라 6해변은 풀밭이 되어 목자의 움막과 양 떼의 우리가 거기에 있을 것이며 7그 지경은 유다 족속의 남은 자에게로 돌아갈지라 그들이 거기에서 양 떼를 먹이고 저녁에는 아스글론 집들에 누우리니 이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가 그들을 보살피사 그들이 사로잡힘을 돌이킬 것임이라(4-7)

‘이방인’ 또는 ‘이주민’이라는 뜻을 가진 ‘블레셋’은 그 의미대로 가나안 토착민이 아닙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인접 국가로, 영토 분쟁뿐 아니라 다양한 문제로 반복해서 전쟁을 치렀습니다. 구약시대에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가장 괴롭혔던 민족입니다. 사사시대 후기, 그리고 이스라엘 왕정 초기에 블레셋은 가나안 땅에서 최강자의 위치에 군림했습니다.

스바냐는 먼저 유다 서편의 블레셋을 향해 심판을 선언합니다. 블레셋의 다섯 성읍 가운데 웃시야와 히스기야 왕에게 정복된 갓을 제외한(왕하 18:8; 대하26:6) 가사, 아스글론, 아스돗, 에그론을 향한 심판이 선언됩니다. 가사는 버림받고, 아스글론은 폐허가 되고, 에그론은 뿌리째 뽑힐 것입니다. 아스돗은 예상치 못하게 대낮에 침략을 받아 무너질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지역들을 멸하시고 주민이 없게 하실 것입니다. 그곳들은 머지않아 양 떼를 먹이기에 적합한 목초지로 바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목초지를 유다 족속의 남은 자들에게 허락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남은 자들을 돌보시고 결박과 고난에서 해방시킬 때, 그들은 블레셋의 목초지에서 양 떼를 돌보고, 새로운 삶을 영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돌아온 당신의 백성을 다시금 긍휼히 여기셔서 자유와 회복을 허락하시고, 집과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입니다.

 

동쪽 모압과 암몬 심판(8-11)

누구든지 스스로 교만한 사람은 그 교만함으로 자신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허는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주변 사람들도 그동안 당한 것처럼 교만한 사람을 괴롭게 할 것입니다. 특히 곤경에 처한 자를 조롱하고 이용하려는 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분명합니다. 주변에 연약한 자들을 어떻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대해야 합니다.

8내가 모압의 비방과 암몬 자손이 조롱하는 말을 들었나니 그들이 내 백성을 비방하고 자기들의 경계에 대하여 교만하였느니라 9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장차 모압은 소돔 같으며 암몬 자손은 고모라 같을 것이라 찔레가 나며 소금 구덩이가 되어 영원히 황폐하리니 내 백성의 남은 자들이 그들을 노략하며 나의 남은 백성이 그것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 10그들이 이런 일을 당할 것은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백성을 훼방하고 교만하여졌음이라 11여호와가 그들에게 두렵게 되어서 세상의 모든 신을 쇠약하게 하리니 이방의 모든 해변 사람들이 각각 자기 처소에서 여호와께 경배하리라(8-11)

모압과 암몬은 부녀지간의 근친상간을 통해 생성된 민족들입니다(창 19:30-38). 이스라엘 동쪽에 위치한 이들은 지속적으로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날 때 모압 왕 발락은 인정을 베풀지 않았고, 발람을 시켜 그들을 저주하려 했습니다(민 22:1-41: 23:1-30: 24:1-25: 신 2:8-9).

암몬 족속은 예루살렘 성전이 더럽혀지고 이스라엘 땅이 황폐하게 될 때,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백성을 훼방하고 방자하게 행했습니다(10). 예레미야와 에스겔 선지자는 이렇게 교만하고 악한 민족들은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피하지 못하리라고 외쳤습니다(렘 49:1-6; 겔 25:2-10). 그들은 그 조상 롯 시대의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영원히 황폐해져, 소금 구덩이로 남게 될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소금’은 메마름과 멸망의 상징입니다(욥 39:6). 하나님의 백성을 비방하고 조롱하며 괴롭힌 모압과 암몬은 영원한 멸망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반면 유다의 남은 자들은 그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고, 이방의 모든 해변 사람과 함께 자기 처소에서 여호와를 경배할 것입니다.

 

남쪽 구스와 북쪽 앗수르 심판(12-15)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오늘날 성도들을 대적한 자들의 공통적인 특징 중 하나는 한결같이 교만하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힘만 믿고 주변 사람들을 무시하는 교만한 행동 합니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힘으로 자랑하기 좋아하고 교만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실하고 겸손해야겠습니다.

12구스 사람들아 너희도 내 칼에 죽임을 당하리라 13여호와가 북쪽을 향하여 손을 펴서 앗수르를 멸하며 니느웨를 황폐하게 하여 사막 같이 메마르게 하리니 14각종 짐승이 그 가운데에 떼로 누울 것이며 당아와 고슴도치가 그 기둥 꼭대기에 깃들이고 그것들이 창에서 울 것이며 문턱이 적막하리니 백향목으로 지은 것이 벗겨졌음이라 15이는 기쁜 성이라 염려 없이 거주하며 마음속에 이르기를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하더니 어찌 이와 같이 황폐하여 들짐승이 엎드릴 곳이 되었는고 지나가는 자마다 비웃으며 손을 흔들리로다(12-15)

유다 남쪽의 구스는 나일강의 제1폭포 남쪽에 위치한 나라로, BC 720~654년에 애굽을 다스렸습니다(사 11:11; 18:1). 구스는 주변 나라들에 상당한 힘을 행사하던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심판의 때 구스 사람들도 칼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이 예언은 느부갓네살이 애굽을 정복할 때 성취되었습니다.

마지막 심판 메시지는 당시 초강대국 앗수르에게 향합니다. 앗수르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흥망성쇠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나라입니다. BC 1350년경 앗수르 발리트 1세에 의해 건설된 앗수르는 헷 족속의 나라인 히타이트 제국과 오랫동안 격전을 벌였습니다. BC 884-859년에 앗수르 바니팔 2세의 광범위한 정복 전쟁과 함께 대제국이 된 앗수르는 지중해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앗수르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그들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디글랏빌레셀 3세(재위 기간: BC 745-727년) 때입니다. 그는 성경에서 ‘앗수르 왕 불’로 불리는데(왕하 15:19), 남유다의 12대 왕 아하스 때 유다를 돕기 위해 아람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의 연합군을 공격하고, 아람 왕 르신을 죽이기도 했습니다(BC 733-732년; 왕하 15:29;16:9). 몇 년이 지나지 않은 BC 722년에 사르곤 2세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습니다(왕하 17:24). 이외에도 열왕기하 19:35 이사야 36~37장은 앗수르의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침공해 멸망시키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고국으로 돌아간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바냐 선지자가 활동하던 당시 앗수르는 상당한 힘과 위용을 과시하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스바냐는 머지않아 여호와의 심판으로 앗수르가 파멸될 것을 예언합니다. 또한 수도 니느웨는 사막같이 메마르게 되리라고 선포합니다. 당시 앗수르가 훌륭한 관개시설을 자랑하고 있었음을 감안할 때, 수도가 장차 사막같이 메마르게 된다는 예언은 매우 놀라운 것입니다. 한때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그 성은 각종 동물의 서식지가 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앗수르를 하나님이 시온을 심판하고 가르치시기 위한 ‘몽둥이’로 묘사했습니다(사 10:24). 앗수르의 침략은 하나님 백성의 죄를 깨우쳐 그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적 방편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앗수르가 방종한 데 있었습니다. 앗수르는 오만하고 자만하여 이스라엘과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보다, 오히려 대제국 건설이라는 야망을 성취하기에 급급해(사 37:21-29) 열방을 무참히 짓밟고 파괴했습니다. 북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남쪽 유다는 앗수르에 많은 조공을 지속적으로 바쳤고, 백성은 착취와 고통을 당했습니다. 이것이 앗수르가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 근본 원인입니다. 한때 기쁜 성이라, 염려 없는 성이라 자만하던 그 성읍은 지나가는 자들의 비웃음을 사는 황폐한 무더기로 남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번성하는 것을 부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잘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반드시 멸망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있는 힘을 가지고 교만하게 될 때, 이스라엘 주변국처럼, 모두 멸망당할 것입니다. 성도들은 허락해 주신 능력으로 오직 여호와만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복된 삶입니다. 불신자들처럼 교만하지 않도록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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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바냐(01-02)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함

스바냐 1장 14절-2장 3절


예부터 우리나라는 이름에 대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름에는 반드시 뜻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름의 뜻을 따라서 가치 있는 사는 사람들을 ‘이름 값하는 사람’라고 말합니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에서 이름은 뜻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본 책의 ‘스바냐’라는 뜻은 ‘하나님이 숨겨 놓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 뜻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서 숨기시고 보호하시길 원하십니다.

 

본문은 계속해서 여호와의 날에 임박한 심판을 선포합니다. 그 날에 범죄한 유다에게 임할 심판을 가르칩니다. 하지만 그 날이 이르기 전에 회개하고 여호와께 공의와 겸손을 구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절대로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은 없기 때문에, 회개의 자리로 모이라고 하십니다.

 

행하실 큰 날의 심판의 묘사(14-16)

하나님께서 심판하는 날은 악인에게는 두려운 날이지만, 회개하고 돌아온 의인에게는 기쁨의 구원의 날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심판을 없는 것처럼 죄악은 만연해져 갑니다. 마치 죄에 대해서 무감각한 하나님처럼 무시하며 말하지만, 심판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노아의 홍수의 심판처럼 있을 것입니다.

14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도다 15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16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들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14-16)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출구가 없습니다. 괴로움을 받으며 소경처럼 헤매지만 피할 곳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어디에도 안전한 곳을 찾지 못합니다. 그런 고난은 하나님께서 비인격적이고 잔인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항해서 범죄한 것에 대한 보응입니다.

(1) 여호와의 큰 날(14)

본문 14-18절은 여호와의 날을 더욱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여기에서는 ‘여호와의 큰 날’로 말하는데, 그날 유다 백성에게 나타날 크고 무서운 결과들 때문입니다. 학자들은 여호와의 큰 날이 BC 586년 바벨론 군대의 예루살렘 침공으로 성취되었다고 봅니다. 그날은 빠른 시일 내에 임할 것이고, 누구고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용사의 슬피 우는 소리’는 유다를 침공한 바벨론 군사들의 고함소리를 가리킵니다. 바벨론 군대의 준마들이 우는 소리에 유다 온 땅이 진도하고, 유다의 성읍과 주민은 삼킴을 당할 것입니다(렘 8:16-17).

(2) 환난과 고통의 날(15-16)

‘여호와의 큰 날’은 분노, 환난, 고통, 황폐, 패망의 날, 어둠, 구름, 흑암의 날이 될 것입니다. 요엘 2장 2절은 그날을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로 묘사합니다(암 5:18,20). 이는 그날이 기쁨, 소망, 생명의 빛이 전혀 없는 절망의 날임을 암시합니다. 그날에 여호와의 분노를 머금은 적국은 나팔을 불며 유다의 견고한 성읍을 치고, 높은 망대를 허물어뜨립니다. 유다 성읍과 예루살렘 거리에 기뻐하는 소리, 신랑과 신부의 소리가 끊어지고, 땅은 황폐하게 될 것입니다(렘 7:34).

스바냐 선지자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경고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에 대한 심판에 대한 경고를 무시했지만, 심판의 날은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14a)라고 신속히 이루어질 것을 말합니다. 심판의 날을 묘사하면서 군인, 나팔, 성읍, 망대, 피, 시체, 불 등으로 묘사해서 전쟁터의 모습을 떠오르게 합니다. 이는 심판의 날이 마치 전쟁터와 같이 비참하고 무섭게 임할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에도 불구하고 “그 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무와 패괴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15)라고 기쁨의 날이 아닌 절망과 고통, 흑암과 완전한 멸망의 말이 될 것입니다. 노아시대 때 물로 심판하셨다면 이제는 불로 세상과 사람들을 완전히 멸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도 도적같이 임한다고 하셨습니다(살전 5:2). 준비되어 있지 않는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과 같이 부끄러운 만남이 아니라 주님을 맞을 준비되어 있는 지혜로운 신부가 되길 바랍니다. 그 심판의 날을 스스로 피할 장사는 아무도 없습니다.

 

심판의 날에 대한 결과(17-18)

세상의 은과 금은 여호와의 심판의 날에 우리를 지켜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재산도, 업적도, 명예도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 자신입니다. 우리의 전체를 드리지 않으면 결코 만족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재물에 빼앗긴 마음을 질투하신다고 하시는데, 당신은 계속 고집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여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는 어리석고 수치스러운 길에서 떠나시길 바랍니다.

17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맹인 같이 행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또 그들의 피는 쏟아져서 티끌 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 같이 될지라 18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라(17-18)

여호와께서는 그 심판의 날에 유다 백성에게 고난을 내려 맹인같이 어둠 속을 헤매게 하실 것입니다. 맹인같이 행한다는 표현은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심판받아야 하는 무기력함과 암담함을 내포합니다. 이처럼 참담한 심판이 임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여호와께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들의 범죄를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자신들의 악한 마음의 꾀와 완악한 대로 행하여 그 등을 내게로 돌리고 그 얼굴을 향하지 아니하였으며”(렘 7:24).

유다 백성은 열방 가운데 하나님의 소유,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출 19:5-6). 그러나 악한 꾀와 완악한 마음을 따라 범죄하고 여호와께 등을 돌리자, 여호와께서 그들의 구원자가 아니라 심판자이자 파괴자가 되셨습니다. 그때 그들의 피는 먼저와 같이, 그들의 살은 분토와 같이 사방에 흩날릴 것입니다. 백성이 믿고 의지하던 황금과 재력뿐 아니라 추구하던 명성과 권력도 그들을 구원하는 데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 어떤 경쟁자도 용납하지 않으시고 질토하시는 여호와께서, 우상을 섬기고 범죄를 자행한 백성을 놀랍게 멸절하실 것입니다. 유다 백성의 파멸은 종말에 임할 우주적 심판을 아울러 예견합니다.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2:1-3)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겸손히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이라도 회개하길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의지하여 날마다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1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2명령이 시행되어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 3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1-3)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목적은 백성들로 절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두려움을 통해 회개하고 순종에 이르길 원하신 것입니다. 모든 우상과 무관심을 버리고 여호와를 찾으라고 하십니다. 겸손과 공의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 길만이 하나님의 분노의 심판에서 숨김을 받을 수 있습니다.

(1) 수치를 모르는 백성(1-2)

스바냐는 이제 내용을 바꾸어 유다가 재앙에서 벗어나리라는 회복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 메시지는 “회개하라”는 간절한 권고로 시작합니다. 선지자는 유다 백성에게 ‘모일 것’을 요구합니다. 당시 유다 백성은 수치를 모르는 백성이었습니다. ‘수치를 모르는’이라 뜻은 ‘훈련받지 않은’ 또는 ‘버림받은’이란 뜻입니다. 3:5에서 ‘수치를 모른다’는 표현은 ‘불의하다’와 동의어로 사용되는데, 그들은 언약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악을 자행함으로써 영적 수치심을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여호와 앞에 모일 것을 요구하십니다. 함께 모여 하나님께서 심판의 뜻을 돌이키도록 은혜를 간구하라는 것입니다(욜 2:16). 여호와의 진노가 임하기 전, 분노의 날이 이르기 전에 진심으로 악에서 돌아서서 회개할 것을 촉구한 것입니다.

(2)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3)

여호와이 말씀을 따르고, 참된 회개를 이루는 자는 세 가지 본질적 요소, 즉 여호와를 찾음, 겸손, 공의를 이룹니다. 참된 회개란 ‘마음의 돌이킴’ 또는 ‘마음의 본질적 변화’를 의미함을 보여 줍니다.

먼저, 여호와를 찾는 것은 언약의 말씀을 통해 여호와의 뜻을 구현하는 삶을 내포합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구현하는 제자도의 삶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마음의 전환은 영적 겸손에 달려 있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언약 백성이 추구해야 할 영적 가치의 근본을 겸손에서 찾았습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겸손을 구현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겸손하게 의지하는’ 영적 자세뿐 아니라 ‘죄를 겸손하게 인정하는’ 돌이킴을 포함합니다. 끝으로, 성도는 공의를 구현해야 합니다. ‘공의’는 ‘흠 없는 행동과 정직’, ‘의’, ‘(재판관의) 정의’, ‘(하나님의) 공의’, ‘의와 경건’, ‘(하나님이 인간에게 기대하시는) 의’, ‘하나님의 구원과 승리’, ‘신뢰할만한 진리’, ‘법률적 요청’, ‘사회정의’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닙니다.

구약성경에서 많은 경우 정의와 공의는 함께 등장하여, 어떤 존재의 행동 양식이나 관계에서 드러나는 올바름, 공평함, 정직함, 신실함, 죄 없는 상태를 내포하는데, 일반적으로 아래와 같은 세 가지 용례로 사용됩니다. (1)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통치 원리와 방식(시 97:2; 98:9; 사 32:16~17), (2) 세상 왕과 지도자들의 통치 원리(삼하 8:15; 왕상 10:9; 시 72:1~4), (3) 하나님 백성의 의로운 삶의 양식(사 5:7; 겔 18:5~9;암 5:24). 그러므로 구약성경에서 공의는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성품)과 통치 방식일 뿐 아니라 언약 백성이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서 구현해야 할 경건한 삶의 핵심가치 중 하나입니다. 이 구절에서 ‘공의’는 우상과 죄악을 벗어 버리고, 여호와와 맺은 언약 관계를 견지하는, 거룩하고 의로운 삶의 양식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영의 임재와 지혜를 구할 때, 삶을 통해 구현됩니다(사 61:1-3). 그렇게 될 때 그들은 여호와의 진노의 날에 숨김을 얻고(스바냐의 이름의 의미), 구원, 인자, 복을 누릴 것입니다.


스바냐 선지자 이름의 뜻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에서 안전하게 덮어주길 원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끝내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죄악으로 만연한 땅에서 죄를 낱낱이 고백하고 겸손히 여호와께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 민족도 여호와께 돌아가는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이 땅에 다시 부흥의 기회를 달라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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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바냐(01-01)


남유다를 향한 여호와의 심판

스바냐 1장 1-13절


국제 운동 경기는 국가적인 관심사입니다. 요즘은 축구경기가 국제적인 관심이 깊다 못해, ‘축구전쟁’이라고 표현할 만큼, 각 나라들은 경기에 매우 민감합니다. 운동 경기에서 심판의 오심으로 문제가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선수들이 파울을 했어도 심판들이 호루라기를 불지 않을 실수의 경우가 있습니다. 심판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심이나 편파 판정으로 승패가 뒤바꾸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완전하신 분이기 때문에 모든 것들을 완벽하게 심판하십니다.

 

선지자 스바냐가 살던 시대는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한 약 100년 후에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갈라져 있던 시대였습니다. 그는 요시야 왕이 통치하고 있던 남쪽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요시야를 소개하면서 히스기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것은 히스기야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개혁을 원했던 것입니다.

 

표제(1)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하는 유다를 철저히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도 범죄한 유다와 예루살렘은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심판의 날에 점점 가까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을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심판의 대상에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생물들도 포함되었습니다. 이는 노아시대의 홍수 심판이 생각날 정도로 강력한 심판을 의미합니다.

1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1)

선지자인 스바냐에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메시지가 임합니다. 스바냐는 경건한 왕 히스기야의 현손으로 유다의 개혁을 주도했던 요시야 왕 때 선지자 사명을 감당한 인물입니다. ‘스바냐’는 ‘하나님이 숨기셨다’ 또는 ‘하나님이 숨기신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성장기에 유다는 악한 왕 므낫세의 범죄와 타락으로 우상숭배와 배교의 거센 물결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스바냐는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 아래 경건한 영성의 소유자로 성장해 기록한 선지자의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 왕족 혈통으로, 왕실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왕궁과 연결된 사람들, 즉 왕족(8-9), 제사장(4;3:4), 재판장과 지도자들(3:8), 상인과 권세자들의 부패, 배교, 타락을 상세히 다룰 수 있었습니다. 이런 지식과 경험 위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요시야 왕(BC 640-609)의 영적 개혁을 지지하며 선지자 사명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스바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악한 자들에 대한 여호와의 준엄한 심판과 남은 자들의 구원을 선포했습니다.

본문에 스바냐는 요시야 시대의 유다에게 여호와의 날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합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왕국으로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에게 나누어졌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 에브라임을 중심으로 10지파를 합하여 세운 나라입니다. 그러나 우상숭배로 시작하였고, 도덕적인 타락이 심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먼저 심판하셔서 앗수르 제국에게 BC 722년에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남유다는 명맥을 유지해 가고 있었지만, 남유다도 역시 도덕적으로 붕괴가 되었고 타락하였고 우상숭배를 하게 됩니다.

스바냐의 배경은 남유다 역사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남유다 왕국의 16대 왕 요시야 시대입니다. 그런데 요시야는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사람입니다. 종교개혁의 시대에 선지자로 활동했던 스바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 시도에도 불구하고 남유다 사람들은 영적으로 무관심한 나라였습니다. 유다 사회는 영적으로는 우상숭배와 혼합주의가 만연하고 죄악이 홍수를 이룬 유다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을 선언합니다.

 

우상숭배자들을 향한 선언(2-6)

하나님께서는 우상들과 숭배하는 자들을 가장 먼저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상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을 말합니다. 오늘날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한 채 영적 회색지대에 거하며 습관적으로 우상에게 경배하는 현대의 우상숭배자들에게도 분명히 심판하실 것입니다. 아직도 내게 남아 있는 우상들은 무엇입니까? 빨리 하나님 앞에서 하나씩 제거합시다.

2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땅 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3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내가 사람을 땅 위에서 멸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4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들 위에 손을 펴서 남아 있는 바알을 그 곳에서 멸절하며 그마림이란 이름과 및 그 제사장들을 아울러 멸절하며 5또 지붕에서 하늘의 뭇 별에게 경배하는 자들과 경배하며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들과 6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과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을 멸절하리라(2-6)

유다와 예루살렘에 그 범위를 집중시킵니다. 여호와께서 심판과 진노로 그의 손을 펴서 남 유다와 그 수도인 예루살렘을 멸절시킬 것을 선언합니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찾지 않고 눈에 보이는 우상을 섬긴 죄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 창조 질서 전체를 뒤흔들 만한 하나님의 우주적인 심판을 선포합니다.

(1) 만물에 임할 심판(2-3)

하나님께서는 남유다를 향해 만물에 임할 보편적인 심판이 선언합니다. “내가 땅 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2) 여호와께서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시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물론 악인들도 멸절하실 것입니다(3). 이는 마치 노아 홍수 심판을 연상시킵니다(창 6:7). 스바냐 당시 유다의 범죄와 패역함이 마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고, 사람의 모든 계획이 악하여 여호와의 심판을 피하지 못했던 노아의 때와 비슷한 상황임을 의미합니다.

(2) 유다의 예루살렘에 임할 심판(4-6)

하나님께서는 스바냐를 통해 심판의 범위를 좁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박한 심판을 예언하십니다. 심판의 주된 이유는 그들 가운데 만연한 바알 숭배입니다. 그 심판의 대상을 구체적으로 5가지를 지목합니다. (1) “바알을 그곳에서 멸절하며”(4). 스바냐의 성장기에 므낫세 왕은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 왕이 확립해 놓은 경건한 전통과 제의를 근본부터 허물었습니다. 이교 관행으로 성전을 더럽혔고, 바알 숭배와 유아 인신 제사를 권장했습니다. 게다가 여호와를 섬기는 선지자와 신실한 남은 자들을 박해했습니다(왕하 21장: 대하 33:3, 7). 요시야 왕이 우상들을 파괴하고 종교 개혁을 단행했지만, 여전히 바알 숭배가 남아 있었고, 영적 배교와 타락이 지속되었습니다(대하 34:4). (2) 심판할 대상으로 ‘그마림’은 바알의 제사장들을 가리키는데(호 10:5), 어원은 ‘검은’(그들의 검은 옷에서 유래) 혹은 ‘열정적인’(열광적인 우상숭배에서 유래)입니다. (3) 당시 제사장들은 열광적으로 바알을 숭배했고, 많은 백성이 지붕 위에서 하늘의 일월성신을 숭배했기에 거의 모든 집이 우상의 성소가 되었을 정도입니다(왕하 21:3,5; 23:5-6;렘 7:17~18; 8:2; 19:13; 44:17~19). (4) 그들은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암몬의 우상)을 동시에 예배했습니다. (5) 당시 유다 백성은 요시야왕의 종교개혁에도 불구하고, 완악하고 사악한 마음을 따라 여호와를 배반하고, 범죄와 우상숭배의 배교를 서슴지 않았습니다(6). 여호와께서는 거룩하고 공의로우시기에, 이스라엘을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준엄한 심판으로 당신의 통치와 정의를 확립하셔야 했습니다.

 

임박한 여호와의 날(7-13)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우상보다 못한 분으로 여긴 자들을 끝까지 찾습니다. 어두움 속에서 등불을 들고 두루 찾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벌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때는 정말 늦습니다. 당신도 혹시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속으로 하나님을 무시하지 않습니까? 신앙의 이중성을 가진 사람들을 싫어하십니다.

7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니라 8여호와의 희생의 날에 내가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인의 옷을 입은 자들을 벌할 것이며 9그 날에 문턱을 뛰어넘어서 포악과 거짓을 자기 주인의 집에 채운 자들을 내가 벌하리라 10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어문에서는 부르짖는 소리가, 제 이 구역에서는 울음 소리가, 작은 산들에서는 무너지는 소리가 일어나리라 11막데스 주민들아 너희는 슬피 울라 가나안 백성이 다 패망하고 은을 거래하는 자들이 끊어졌음이라 12그 때에 내가 예루살렘에서 찌꺼기 같이 가라앉아서 마음속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등불로 두루 찾아 벌하리니 13그들의 재물이 노략되며 그들의 집이 황폐할 것이라 그들이 집을 건축하나 거기에 살지 못하며 포도원을 가꾸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7-13)

선지자 스바냐는 ‘여호와의 날’을 희생제물 드리는 날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은 선지서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 중 하나입니다. 선지자들은 이날에 여호와께서 종말론적 심판과 구원을 시행하신다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선포합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날에 왕이자 용사로 임하셔서, 근원적인 악과 악인들을 진멸하실 것입니다(15,18; 2:2-3; 사 63:1-6; 렘 4:8; 애 2:1; 겔 7:3,7), 경건한 남은 자들에게 놀라운 구원을 베푸셔서 영광과 새 창조에 들어가게 하실 것입니다(2:3,7,9; 욜2:18-32; 암 5:14-15).

선지자 스바냐도 1-2장에서 임박한 여호와의 날, 즉 심판의 날을 선포합니다. 그날을 대비하기 위해 백성은 여호와 앞에서 잠잠해야 합니다(7). ‘잠잠할지어다’라는 표현은 예배를 드릴 때와 같이, 겸손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여호와 앞에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그 심판이 마치 희생제사와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언약을 어긴 자들은 마치 희생제사의 짐승과 같이 죽음과 형벌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7-13절은 크게 세 부류의 사람들을 향한 여호와의 준엄한 심판을 다룹니다: (1) 이교도의 관습을 좇는 방백, 왕자, 종들(8-9), (2) 정직하지 못한 상인들(10-11), (3) 심판에 무관심한 자들(12-13). 먼저, 당시 권력을 향유하며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겼던 완악한 정치인과 왕자, 그리고 이교도들이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포악과 거짓으로 문턱을 뛰어넘어 자기 주인의 집을 풍요롭게 한 종들도 심판을 피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어문(魚門)’은 예루살렘 성읍 북편에 위치한 문으로, 물고기가 팔리는 어시장 가까이에 있는 문입니다. 제2구역은 여선지자 훌다가 살았던 곳으로, 아그라 언덕에 있는 지역입니다(왕하 22:14). 막데스 지역은 두로 골짜기의 북쪽을 따라 위치한 상업의 중심지입니다. 이 지역들은 부정직한 상행위가 성행하던 곳들입니다. 장차 바벨론 군대가 침략할 때, 사악하고 부정한 방법으로 부유해진 상인들은 마치 희생제사의 제물처럼 부르짖으며, 그들의 거래는 중단될 것입니다. 끝으로, 여호와께서는 마치 숨어 있던 물건을 등불을 밝혀 찾아내듯이, 심판에 무관심한 자들의 죄악을 밝혀 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때 그들의 재물은 노략되고, 집은 황폐해질 것입니다. 더 이상 풍요와 즐거움의 상징인 포도주도 마시지 못할 것입니다(사 62:8-9; 미 4:4; 슥 3:10).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살아계신 하나님보다 물질에 대해 더 충성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시대를 사는 성도들은 물질이 우상이 되지 않도록 거룩함에 깨어있어야 합니다. ‘이교행위’, ‘혼합주의’, ‘종교적 무관심’ 등처럼 다양한 방법으로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외에 우상을 사랑하는 것으로 멸망으로 치닫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주권을 내놓고 인도하심을 따라갈 때, 풍성함으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의 날이 다가온다고 할지라도 두려움의 날이 아니라 기쁨의 날이 되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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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바냐 서론


 

저자와 제목

(1) 제목

이 말씀의 창시자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여호와’)이었지만, 이 말씀을 유다에 전한 예언적 중재자는 스바냐입니다. 이 책의 제목은 스바냐의 이름을 따서 ‘스바냐’라고 명명되었습니다.

(2) 저자

‘스바냐’라는 이름은 ‘여호와가 숨기셨다/보호하셨다’를 뜻입니다. 그의 부모의 경건함을 암시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1:1의 계보는 스바냐가 두 악한 왕이 왕좌에 오르기 전에 경건한 유다의 통치자였던 히스기야의 후손임을 암시할 수도 있습니다.

 

저작 연대

이 예언은 중요한 남유다의 왕인 요시야(BC 640~609)가 다스리던 시대에 등장합니다.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주전 722년에 이미 멸망 당하였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북왕국 이스라엘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더 정확히 말해 이런 언급들은 이스라엘 나라의 남은 부분, 즉 남유다와 그 수도 예루살렘을 의미합니다.

남유다 16대 왕 요시야는 자신의 증조할아버지 히스기야 시대 이래로 폐지되어 버린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 의식을 재확립하려 노력한 종교개혁 군주였습니다.

 

주제

다른 어떤 선지자보다도 스바냐가 더 일관되게 선포했던 주제는 “여호와의 날”입니다(1:7 등). 이 다가오는 날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이들에 대한 심판의 국면과 하나님을 따르는 이들에 대한 복의 국면이라는 두 가지 국면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형벌에 있어서나 자신의 공평하심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배경, 특징

(1) 배경

당시는 악한 왕 아몬의 시대가 끝나고 종교개혁을 이룬 요시야 왕의 통치 초기였다. 그러나 국외적으로 앗수르가 근동 최강국의 위치를 굳혀 유다에 큰 위협이 되고 있었다.

(2) 특징 

⓵ ‘여호와의 날’ 사상 – 여호와의 알의 심판과 구원의 양면적 성격을 자세히 부각시키고 있다.

⓶ 건조하고 사실적인 문체 – 수식어를 거의 사용치 않고 운율성을 강조하지 않은 간결하고 사실적인 문제를 채택하고 있다.

(3) 내용

        ① 하나님은 온 땅과 유다와 유다의 이웃 이방 나라들을 똑같이 심판하실 것이다.

        ②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는 분으로서 자기 백성이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로 되돌아오면 그들에게 복을 주실 것이다.

        ③ 하나님은 복과 은혜를 모든 민족과 나라에 베풀기를 원하신다.

        ④ 심판과 복은 가까운 미래에 선지자와 선지자의 청중에게 발생하며 또한 먼 미래에도 발생한다.

       ⑤ 2세대 하나님의 자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세대는 앞 세대의 믿음에 의존하지 말고 하나님의 언약을 인정해야 한다.

 

문예적 특징

스바냐서는 이른바 ‘소선지서’ 가운데 거의 유일무이하게 축소판 ‘대선지서’처럼 보인다. 스바냐서에는 심판 신탁(1:1~18), 이방에 대한 신탁(2:4~15), 소망의 신탁(3:8~20) (암 2:4 이후의 아모스서와 매우 비슷하게 관심사가 나라 밖에서 나라 안으로 바뀌는) 2:1~3과 3:1~7은 예루살렘에 예리하게 적용되는 ‘전환적’ 신탁의 역할을 한다.

스바냐서의 문예적 의도는 다음과 같다. 즉, 다가오는 여호와의 날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하는 것, 다가올 심판을 그림처럼 생생하게 묘사하는데 시라는 방편을 사용하는 것, 회개를 불러일으킬 목적으로 다가올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것, 하나님의 복의 가능성을 하나님의 은총의 회복에 대한 마지막 신탁의 형태로 표현하는 것, 지위와 재물이 있는 이들을 고발하는 동시에 백성들과 동질감을 느끼고 가난한 이들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것이다(특히 습 2:3. 이 둘은 3:11~13에 압축되어 있다).

 

스바냐 개요

1. 심판의 예언(1:1-3:8)

    (1) 유다의 심판(1장)

    (2) 열방의 심판(2장)

        ① 서론(1-3)

        ② 블레셋의 심판(4-7)

        ③ 모압과 암몬의 심판(8-11)

        ④ 구스의 심판(12)

        ⑤ 앗수르의 심판(13-15)

(3) 예루살렘의 심판(3:1-8)

 

2. 구원의 예언(3:9-20)

        (1) 이방인의 구원(9-10)

        (2) 이스라엘의 구원(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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