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나훔서(03-01)


구경거리로 전락한 니느웨

나훔 3장 1-13절


승승장구하던 사람이 몰락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앗수르도 그랬습니다. 잘 나가던 나라, 가장 강한 나라가 앗수르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교만하게 행한 결과, 멸망이 홀연히 앗수르에 임했습니다. 앗수르의 죄는 무엇이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2장에서 멸망을 예언한 후에, 3장에서는 이 니느웨가 분명히 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여러 방식으로 강화합니다. 재앙 신탁의 형식으로 이미 니느웨에 재앙이 임한 것처럼 전달하기도 하고(1-7), 그들이 멸망시킨 노아몬과 마찬가지의 운명을 맞이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8-13). 조롱의 어투로 전쟁을 대비하라고 명령하기도 하고(14-17). 장송곡의 형상으로 니느웨의 멸망을 분명히 합니다(18-19).

 

니느웨에 대한 재앙 신탁(1-7)

스스로 자신만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속이는 길입니다. 그 길은 필경 멸망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높으시는 분이 하나님임을 믿고 겸손하게 하나님만 섬기는 현숙한 여인과 같은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앗수르는 처음에는 화려하고 창대해 보였지만, 마지막은 비참하게 몰락하고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어 조롱을 받을 것입니다.

1화 있을진저 피의 성이여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2휙휙 하는 채찍 소리, 윙윙 하는 병거 바퀴 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 3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 당한 자의 떼, 주검의 큰 무더기,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4이는 마술에 능숙한 미모의 음녀가 많은 음행을 함이라 그가 그의 음행으로 여러 나라를 미혹하고 그의 마술로 여러 족속을 미혹하느니라 5보라 내가 네게 말하노니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 치마를 걷어 올려 네 얼굴에 이르게 하고 네 벌거벗은 것을 나라들에게 보이며 네 부끄러운 곳을 뭇 민족에게 보일 것이요 6내가 또 가증하고 더러운 것들을 네 위에 던져 능욕하여 너를 구경 거리가 되게 하리니 7그 때에 너를 보는 자가 다 네게서 도망하며 이르기를 니느웨가 황폐하였도다 누가 그것을 위하여 애곡하며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할 자를 구하리요 하리라(1-7)

일반적인 재앙 신탁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특징을 여기서도 보여주는데, 보통 재앙 신탁은 죄에 대한 고발과 그 죄로 말미암은 심판을 선포하는 것으로 구성됩니다. 1-4절은 니느웨의 죄악을 고발하고, 5-7절은 이와 같은 니느웨의 죄악에 근거하여 니느웨가 당할 징벌을 선언합니다.

(1) 니느웨의 죄악 고발(1-4)

1절의 “화 있을진저”는 이 단락이 재앙 신탁임을 알려줍니다. “피의 성이여”라는 표현은 단적으로 니느웨의 정체성을 규정짓습니다. 피를 흘린 성읍(겔 24:9), 피로 건설한 성읍(합 2:12)과 비슷한 표현입니다.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며”는 직역하면 ‘모든 성읍은 충만한 거짓과 전리품이다’가 되는데, 성읍 자체가 거짓이며 전리품이라는 의미입니다. 거짓 자체라는 의미는 랍사게의 사건에서 잘 드러납니다. 앗수르에게 항복하면 풍요로운 땅으로 옮겨주겠다고 약속하지만, 거짓에 불과합니다(왕하 18:31-32), 정복하는 나라에 온갖 거짓으로 약속하지만 감언이설일 뿐입니다. 또한 성읍 자체가 전리품일 정도로 전쟁을 일삼았습니다. “탈취가 떠나지 아니하는도다”라는 표현 역시 전쟁으로 생긴 탈취물, 전리품이 끊이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2-3절은 1절에서의 잔혹함으로 가득한 성읍의 모습을 다시 묘사하여, 앗수르가 이웃 나라들을 정복하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2-3절의 묘사는 역설적이게도 2:3-4에서 ‘파괴하는 자’에게 공격당하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앗수르가 공격하며 잔혹한 행위를 일삼은 모습을 떠올리게 하면서, 그들이 행한 그대로 당할 것이라는 것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4절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는 ‘음행’과 ‘마술’에 대한 묘사는 실제로 니느웨에서 행해졌던 우상숭배 행위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음녀’는 성전 창녀를 가리킬 것입니다.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면서, 성전에 거주하는 창녀와의 성행위로 신들을 흥분시켜 비가 오게 하거나 풍요를 기원하는 풍습을 시사합니다.

자신들의 풍습을 지킬 뿐만 아니라 ‘미혹’했다는 것은 정복한 나라들에게도 그 풍습을 전파했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해석은 비유적 표현으로 보는 것인데, 창녀가 결국에는 사람을 파멸에 이르게 하고 마술이 사람을 현혹하는 것처럼, 니느웨가 이웃 나라들에게 한 행위가 자신들을 파멸에 이르게 하고 현혹하는 행위였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를 모두 의도했을 수도 있습니다.

(2) 니느웨가 당할 징벌(5-7)

5-7절은 여호와의 대적자가 당할 징벌을 묘사합니다. 5절은 앗수르가 정복한 나라에 행한 그대로 자신들이 수치를 당할 것을 예언합니다. 6절의 가증하고 더러운 것들은 우상을 가리키며, 니느웨가 섬긴 신들을 의미합니다. 랍사게 사건에서도 드러나듯이(왕하 18:33-35; 19:4), 앗수르가 이웃 나라들을 정복한 것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이 더 강력하기 때문이라는 사상이 고대 근동에 만연했습니다. 따라서 7절의 표현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이 여호와 하나님보다 우월하다고 하는 자부심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7절은 애곡하는 2:10-12을 떠올리게 하는데, 니느웨의 멸망을 장례에 비유한 것이며, 곡할 자조차 없을 정도로 비참한 멸망을 의미합니다.

 

경고: 노아몬과 같은 운명(8-13)

사람들은 철저한 대비를 통해 위기를 극복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노력만으로 소용없습니다. 자기를 지키는 가장 좋은 길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어리석은 자들은 이웃을 약탈하며 자기의 안전을 도모합니다. 결국 그들은 멸망의 때에야 자기들이 행한 일들이 무가치했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8네가 어찌 노아몬보다 낫겠느냐 그는 강들 사이에 있으므로 물이 둘렸으니 바다가 성루가 되었고 바다가 방어벽이 되었으며 9구스와 애굽은 그의 힘이 강하여 끝이 없었고 붓과 루빔이 그를 돕는 자가 되었으나 10그가 포로가 되어 사로잡혀 갔고 그의 어린 아이들은 길 모퉁이 모퉁이에 메어침을 당하여 부서졌으며 그의 존귀한 자들은 제비 뽑혀 나뉘었고 그의 모든 권세자들은 사슬에 결박되었나니 11너도 술에 취하여 숨으리라 너도 원수들 때문에 피난처를 찾으리라 12네 모든 산성은 무화과나무의 처음 익은 열매가 흔들기만 하면 먹는 자의 입에 떨어짐과 같으리라 13네 가운데 장정들은 여인 같고 네 땅의 성문들은 네 원수 앞에 넓게 열리고 빗장들은 불에 타도다(8-13)

노아몬과 비교하며 시작합니다. 이후로 노아몬에 대한 묘사는 니느웨에 대한 묘사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8b-9절에서는 노아몬이 얼마나 강력한 성읍이었는지를 묘사합니다. 10절에서는 그렇게 강력한 성읍도 멸망당하고 패배한 결과를 처참하게 맛볼 것을 묘사합니다. 노아몬은 니느웨만큼 강했고 더 오랜 역사를 갖고 있었음에도 멸망당했듯이, 니느웨 역시 멸망당할 것이라는 역사적 교훈을 상기시킵니다.

(1) 노아몬의 운명(8-10)

8절의 노아몬(테베)에 대한 묘사에서 ‘바다’는 테베가 지리적으로 바다에서 650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으므로 사실적이라고 보기 힘들지만, 난공불락의 성읍임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8절에서 위치상 정복하기 힘든 점을 묘사할 뿐만 아니라, 9절에서는 구스와 붓과 루빔이라는 이집트 주변 나라들과의 연합군이 지키기 때문에 전략적으로도 쉽지 않다고 강조합니다.

8-9절에서처럼 노아몬이 점령하기 힘들었음에도, 10절에서는 점령당했을 뿐만 아니라, 그 성읍에 거주하는 모든 주민들이 포로로 끌려갔다고 묘사합니다. 존귀한 자들은 고위직 관료들을 가리키며, 모든 권세자들은 그보다 높은 지위의 귀족들이나 관료들을 가리킵니다.

(2) 노아몬과 같은 멸망(11-13)

8-10절에서 노아몬의 운명을 묘사한 후에, 11-13절의 소단락은 니느웨도 같은 운명을 맞이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11절에서는 술 취한 자에 비유하여 무기력하게 정복당할 것을 예언합니다(1:10), 12절에서는 마치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흔들어 따듯이 산성이 쉽게 정복당할 것을 말합니다. 13절의 “장정들은 여인 같고”는 군대의 나약함을 가리킵니다(사 19:16).

12-13절에서는 니느웨의 정복을 산성에서 시작하여 산성을 지키는 군대의 무력함과 빗장이 쉽게 열리는 것으로 점진적으로 묘사하여, 철저하게 멸망할 것임을 강조합니다.

노아몬에 대한 언급 자체가 앗수르에게는 충격적인 메시지가 될 것입니다. 남유다 역시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통해 자신들도 동일한 운명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웃 민족들에 대한 심판과 징벌의 예언은 동일한 죄악에 빠진 이스라엘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메시지가 될 것입니다. 유다는 잘못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자신들은 괜찮을 것이라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도 앗수르를 통해 멸망시켰습니다. 남유다 역시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하지 못하고 언약을 파기한다면 동일한 운명을 맞이할 것입니다.

 

니느웨에 대한 조롱(14-17)

권세만 믿고 아랫사람들과 이웃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어리석은 자들은 결국 멸망할 운명에 처합니다. 의인이 고통을 당하면 사람들이 떠나고, 오히려 그가 고통 당함을 즐거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14너는 물을 길어 에워싸일 것을 대비하며 너의 산성들을 견고하게 하며 진흙에 들어가서 흙을 밟아 벽돌 가마를 수리하라 15거기서 불이 너를 삼키며 칼이 너를 베기를 느치가 먹는 것 같이 하리라 네가 느치 같이 스스로 많게 할지어다 네가 메뚜기 같이 스스로 많게 할지어다 16네가 네 상인을 하늘의 별보다 많게 하였으나 느치가 날개를 펴서 날아감과 같고 17네 방백은 메뚜기 같고 너의 장수들은 큰 메뚜기 떼가 추운 날에는 울타리에 깃들였다가 해가 뜨면 날아감과 같으니 그 있는 곳을 알 수 없도다(14-17)

마지막 단락들을 조롱과 장송곡으로 마무리하면서 니느웨의 멸망을 기정 사실화하며 강조합니다. 특히 이 단락에서는 전쟁을 대비하라는 조롱 조의 명령과 멸망에 대한 선포를 번갈아 가며 언급함으로써, 전쟁을 대비하는 것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14절은 장기간 포위됐을 경우의 식수를 대비하라는 것이며, 산성을 수리하여 견고하게 하라는 명령입니다. “진흙에 들어가”는 벽돌을 만드는 과정에서 진흙에 들어가 작업하는 것을 묘사합니다. 15b절은 군사를 정비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러나 이런 대비들이 소용없게 될 것입니다.

15절과 16-17절에서는 전쟁에 패배할 것을 예언합니다. 15절의 ‘불’(사 43:2)과 ‘칼’(신 28:22)은 전쟁으로 인한 멸망을 묘사하는 데 자주 사용됩니다. 16절에서는 부를 많이 쌓았으나 느치가 날아감 같이 흔적도 없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17절에서도 역시 군대 장교들이 많을지라도 흔적조차 없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철저하게 멸망할 것을 강조합니다.

 

니느웨에 대한 장송곡(18-19)

어떤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사람들이 전혀 애도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히려 손뼉 치면서 반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을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앗수르의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앗수르가 멸망할 때, 사람들은 아쉬워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앗수르와 같은 인생을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18앗수르 왕이여 네 목자가 자고 네 귀족은 누워 쉬며 네 백성은 산들에 흩어지나 그들을 모을 사람이 없도다 19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부상은 중하도다 네 소식을 듣는 자가 다 너를 보고 손뼉을 치나니 이는 그들이 항상 네게 행패를 당하였음이 아니더냐 하시니라(18-19)

이미 7절에서도 장례의 비유로 니느웨의 멸망을 예언하였듯이, 여기서도 나훔서의 마지막을 장송곡으로 마무리하면서 니느웨의 멸망을 강화합니다. 18절에서 목자와 귀족과 백성은 니느웨의 각계각층을 가리키며, 온 성읍이 흩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19절은 니느웨의 패망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절망적이며, 그 패망에 대해 이웃 나라들이 조롱하는 것을 묘사합니다. 니느웨는 자신들이 이웃 나라에 행한 그대로 당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줍니다.


나훔은 악인이 멸망함으로써 의인이 구원을 얻고 기쁨을 누리리라고 선포합니다. 우리가 악한 세상 가운데서 의의 길 걷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최후의 승리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이 잠시 번성하는 것을 보고 그 길에 편승한다면, 결국 하나님께 징계를 당하고 우리가 망하는 것을 이웃들이 즐거워하는 일을 겪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의인의 길을 꿋꿋이 걸으며 악인의 번성을 부러워하지 않는다면 주님의 백성으로 견고히 설 수 있을 것입니다.


구독과 광고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나훔서(02-01)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

나훔 2장 1-13절


사람들이 머릿속에 그리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용서하시고 참아 주시는 분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만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의의 하나님이요,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유다에게 권고하는 성격이 짙은 첫 신탁(1:9-15)에 이어, 본격적으로 니느웨에 대한 예언을 선포합니다. 1-9절에서는 니느웨를 공격하는 자들을 묘사하고, 그 공격에 완전히 몰락하는 상황을 묘사하며, 10-12절에서는 니느웨의 멸망에 대한 조롱 섞인 애도의 노래가 이어집니다. 13절에서는 니느웨의 멸망이 하나님의 역사임을 분명히 합니다.

 

니느웨의 멸망(1-9)

세상의 부와 권력을 의지하며 의를 실천하지 않는 자들, 의인을 압제하는 자들은 결국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권세 앞에서 떨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사람이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지 않도록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삶, 하나님만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지어다 2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 같게 하시나니 이는 약탈자들이 약탈하였고 또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를 없이 하였음이라 3그의 용사들의 방패는 붉고 그의 무사들의 옷도 붉으며 그 항오를 벌이는 날에 병거의 쇠가 번쩍이고 노송나무 창이 요동하는도다 4그 병거는 미친 듯이 거리를 달리며 대로에서 이리저리 빨리 달리니 그 모양이 횃불 같고 빠르기가 번개 같도다 5그가 그의 존귀한 자들을 생각해 내니 그들이 엎드러질 듯이 달려서 급히 성에 이르러 막을 것을 준비하도다 6강들의 수문이 열리고 왕궁이 소멸되며 7정한 대로 왕후가 벌거벗은 몸으로 끌려가니 그 모든 시녀들이 가슴을 치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우는도다 8니느웨는 예로부터 물이 모인 못 같더니 이제 모두 도망하니 서라 서라 하나 돌아보는 자가 없도다 9은을 노략하라 금을 노략하라 그 저축한 것이 무한하고 아름다운 기구가 풍부함이니라(1-9)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의 악행을 더 이상은 참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니느웨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킬 뿐 아니라 남유다까지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나훔 선지자는 니느웨에 대한 심판을 서언한 후 하나님의 권능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1) 파괴하는 자(1-4)

1절의 ‘파괴하는 자’는 메대와 바벨론의 연합군을 가리킵니다. 1절의 “너는 산성을 지키며…굳게 할지어다”라는 조롱의 표현입니다. 지금까지 ‘산성’을 의지하여 교만했으나 이렇게 굳건하게 지켜도 소용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2절은 2:1-4에서 니느웨의 멸망을 다루며 ‘파괴하는 자’가 공격하는 상황을 묘사하는 맥락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갑작스럽게 야곱과 이스라엘의 영광에 대한 회복을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법은 선지자 나훔이 이미 사용한 방법입니다. 이미 1:12-15에서 유다에 대한 구원 신탁을 다루는 단락에서도, 1:14에서 니느웨의 멸망을 언급함으로써 유다의 구원이 니느웨의 멸망과 대조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듯이, 여기서도 역시 니느웨의 멸망을 다루는 맥락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대조하여 둘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부각하고 있습니다. 즉 나훔서는 주로 니느웨의 멸망에 대한 예언이지만(1:1), 이 니느웨의 멸망이 유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a절의 야곱과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한다는 표현은 궁극적으로 니느웨의 멸망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것임을 밝히는 표현입니다. ‘이는’이라고 이유를 밝히는 표현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곧 니느웨의 멸망이 이스라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유다가 디글랏빌레셀 3세(주전 745-727년) 이후 오랫동안 앗수르의 영향 아래 있으면서 괴로움을 당하였던 것은 하나님께서 힘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노하기를 더디 하셔서 진노하기를 늦추신 것뿐입니다. 그러나 이제 니느웨의 멸망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권자 되심을 보여줄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가 승승장구함으로 마치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부재하신 것 같은 상황 가운데, 유다는 니느웨의 멸망을 통해 역사하실 하나님 앞에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무언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 것입니다. 한편 ‘야곱’과 ‘이스라엘’이 각각 무엇을 지칭하는 지에 대해 의견이 나뉘지만, 같은 대상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사 44:1을 참조하라).

2b절의 ‘이는’으로 시작하는 표현은 니느웨의 기구한 운명을 드러냅니다. 약탈하며 땅을 넓혔던 앗수르가 이제 약탈당하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포도나무’는 유익을 주는 나무로 풍요를 대변하는데, “포도나무 가지를 없이 하였음이라”라는 말은 니느웨의 풍요가 제거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4절은 다시 ‘파괴하는 자’가 니느웨를 약탈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공격하는 용사와 병거에 대한 묘사는 그들이 얼마나 훈련이 잘 되어 있고 정비가 잘 되어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어떤 학자는 방패가 붉은 것은 피로 물들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는데, 전쟁에 임하면서 상대방의 방패를 볼 때 공포감이 몰려오는 상황과 잘 어울립니다. 또한 성경의 다른 곳에서 바벨론의 군사들이 붉은 옷을 입었다고 묘사하기도 하는데(겔 23:14-15), 나훔이 앗수르를 공격하는 군대가 바벨론의 군사임을 염두에 두었다고 유추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주도면밀하면서도 위엄 있게 공격하는 군대 앞에서 니느웨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니느웨는 주전 612년에 메대와 바벨론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는데, 멸망하는 시기가 가까워 왔을 때에는 이미 국력이 쇠한 때이기 때문에, 이런 멸망의 선포가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니느웨는 강대국으로서 여전히 건재하고, 유다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니느웨를 보며 여전히 하나님의 역사를 의심하는 상황에서 이런 메시지가 전해졌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치 눈앞에서 니느웨가 약탈당하는 것 같은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지자를 통해 이 내용이 전달될 때 유다는 어떻게 반응해야 했습니까? 당연히 현실을 본다면 의구심이 들겠지만,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니느웨가 약탈당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이유입니다.

(2) 니느웨의 패망(5-9)

1-4절의 ‘파괴하는 자’가 침략해 올 때에, 5~9절은 그 앞에서 니느웨가 어떻게 공격당하는지를 묘사합니다. “그가 그의 존귀한 자들을”은 누구를 지칭하는지 모호합니다. 앞의 문장에 속할 수도 있고, 니느웨가 공격당하는 상황을 묘사하는 것에 속할 수도 있습니다. 후자로 본다면, ‘그’는 앗수르 왕을 가리키고 존귀한 자들은 군대의 장교나 고위직을 가리킬 것입니다.

5절은 특히 ‘파괴하는 자’의 공격이 너무나 갑작스러워 미처 전쟁 준비도 못하고 있던 상황에서 군대가 몰려오는 것을 보고서 급히 성에 이르러 대비하려는 허둥대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6절의 ‘강들의 수문’은 니느웨 성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으나, 이런 것도 소용없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안을 쳐들어 왔을 뿐만 아니라, “왕궁이 소멸”되기까지 합니다.

7절의 “정한 대로”라는 표현은 니느웨의 멸망이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계획에 포함됐고 결정된 일이며, 따라서 니느웨의 멸망에 대한 예언은 확고하여 변개할 수 없는 예언이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7절은 전쟁에 패배하여 포로로 끌려가는 장면과 패전을 애도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8-9절은 니느웨의 역전된 상황을 풍자적으로 묘사한다. “물이 모인 못” 같다는 것은 니느웨가 강성하여 부가 넘쳤던 것을 가리킵니다. 니느웨에게서 무언가 얻을 것을 기대하고 모였으나 이제 망하게 되자 서로 돌아보지도 않고 도망하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9절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나오는데, 저축한 것이 많으나 이제 망하여 약탈당하는 상황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강대국이라고 교만하여 우쭐대지만, 자신들이 약탈한 상황 그대로를 당하면서 니느웨의 신세가 역전될 것입니다. 이는 현재의 상황이 정당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지금 풍요롭게 복을 누리는 것 같더라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하며 순종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며, 이것은 니느웨뿐만 아니라 유다에게도 중요한 메시지가 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에게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중요한 의미를 던져줄 것입니다.

 

심판의 결과(10-13)

하나님의 백성이 바로 서면, 세상의 악인들은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 버려질 것이비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섬기기만 하면 악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제거되고, 세상에는 아름다운 소식, 화평이 전해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이유이며 사명입니다.

10니느웨가 공허하였고 황폐하였도다 주민이 낙담하여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히며 모든 허리가 아프게 되며 모든 낯이 빛을 잃도다 11이제 사자의 굴이 어디냐 젊은 사자가 먹을 곳이 어디냐 전에는 수사자 암사자가 그 새끼 사자와 함께 거기서 다니되 그것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었으며 12수사자가 그 새끼를 위하여 먹이를 충분히 찢고 그의 암사자들을 위하여 움켜 사냥한 것으로 그 굴을 채웠고 찢은 것으로 그 구멍을 채웠었도다 13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어 네 병거들을 불살라 연기가 되게 하고 네 젊은 사자들을 칼로 멸할 것이며 내가 또 네 노략한 것을 땅에서 끊으리니 네 파견자의 목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10-13)

하나님께서는 왜 세상에서 악인들이 활개 치도록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성경을 묵상해 보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섭리하시는 이유를 부분적으로나마 알 수 있습니다.

(1) 애도의 노래(10-12)

이 단락은 여호와의 심판으로 말미암은 결과를 보여주는데, 애가의 형식으로 니느웨가 당할 멸망의 모습에 깊이를 더하고 있습니다. ‘파괴하는 자’가 침략해 올 때만 해도 5-9절에서 묘사된 대로 처참하게 당할지는 모르고 전쟁에 대비했을 것입니다(1). 그러나 여호와의 심판의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10절의 “공허하였고 황폐하였도다”는 니느웨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11-12절에서는 11절과 11-12절의 대조를 통해 니느웨가 멸망당한 비참한 상황을 부각합니다. 11b-12절은 니느웨가 멸망 당하기 전의 영광을 묘사합니다. 마치 숫사자가 사냥하듯 주변 나라를 침략하고 그 전리품을 챙겨 자신의 성을 풍요롭게 했었고,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나라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자굴과 사자가 흔적조차 없을 정도가 됐습니다.

(2) 여호와의 선언(13)

13절은 니느웨의 멸망에 대한 결론적 선언입니다. ‘파괴하는 자’를 통해 니느웨를 멸망에 이르게 한 것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이며,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내가 네 대적이 되어”는 니느웨를 멸망시킨 주체가 여호와이심을 분명히 합니다.


살다보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아가려다 보면 억울한 일을 참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 가운데 있으며, 어쩌면 징계하셔서 더욱 정결하게 만드시기 위한 도구일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으로 오늘도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며 사시길 바랍니다.


구독과 광고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나훔서(01-01)


질투하시고 심판하신 하나님

나훔 1장 1-15절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좋으신 하나님’, ‘복을 주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만, ‘심판하신 하나님’, ‘진노하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증거하면 싫어합니다. 현대인들이 과거의 성도들보다 더 거룩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더 강퍅해졌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좋으신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심판의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나서처럼 니느웨가 대표하는 앗수르 제국의 운명이 핵심 주제이지만, 그 전망이 매우 대조적입니다. 요나의 앗수르는 여호와의 은혜와 인애를, 나훔의 앗수르는 여호와의 진노와 보복을 경험합니다. 고대 근동을 두려움과 혼돈에 몰아 넣었던 앗수르가 자신의 속국에 불과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에 의해 멸망의 떨어집니다.

 

니느웨에 대한 경고(1)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면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오히려 기쁜 소식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입장에서 보복의 하나님께서는 곧 구원의 하나님이며, 진노의 주는 곧 은혜의 주이시기 때문입니다.

1니느웨에 대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1)

이중의 표제어는 나훔서에 기록된 말씀의 신적 기원을 강조합니다. ‘경고’는 신탁을 가리키는 용어로, 주로 민족들의 신탁 표제어에 등장합니다. 앗수르 제국을 대표하는 니느웨가 신탁의 대상이 됩니다. 니느웨는 주전 701년 예루살렘을 침공했던(참조. 왕하 18:12-19:37; 사 36:1-37:38) 산헤립(주전 704-681)에 의해 앗수르 제국의 수도가 됐습니다.

문자적으로 ‘묵시의 책’을 의미하는 ‘묵시의 글’은 예언서들에서는 여기에만 나오는 표현으로, 예언자가 이상 중에 본 또는 받은 말씀임을 보여줍니다. 이 말에 근거해서 나훔이 처음부터 문서로 말씀을 전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른 예언자들처럼 나훔도 처음에는 공개적 장소에서 말로 신탁을 선포했을 것입니다.

나훔의 출생지만 언급하고 활동 시대와 집안에 관해서는 달리 말하지 않습니다. 예언자의 고향 엘고스는 다른 곳에는 나오지 않는 지명입니다. 후대의 전승은 그 위치를 갈릴리나 니느웨 근처에서 찾기도 했습니다. 이름 ‘나훔’은 ‘위로하다’의 동사 ‘나함’에서 파생한 단어로 ‘위로가 많은’을 의미합니다.

 

보복하러 오시는 여호와(2-8)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바라볼 때, 우리는 항상 두려움과 떨림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향해 얼굴을 붉히셨다면, 우리가 죄를 지을 때도 우리를 향해 얼굴을 붉히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셔서 죄를 간과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3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오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의 발의 티끌이로다 4그는 바다를 꾸짖어 그것을 말리시며 모든 강을 말리시나니 바산과 갈멜이 쇠하며 레바논의 꽃이 시드는도다 5그로 말미암아 산들이 진동하며 작은 산들이 녹고 그 앞에서는 땅 곧 세계와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들이 솟아오르는도다 6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그의 진노가 불처럼 쏟아지니 그로 말미암아 바위들이 깨지는도다 7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8그가 범람하는 물로 그 곳을 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2-8)

전통적 언어로 신현(新峴)을 묘사하는 이 단락은 여호와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비유적 언어로 보여줍니다. 그분은 땅에서 벌어지는 일에 눈감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당신께로 피하는 자는 지켜주시고 악인은 진멸하시는 무한한 권능의 하나님이십니다. 한마디로, 땅과 역사는 그분의 활동 무대로, 그분의 역사 의지가 구현되어 가는 시공간입니다.

나훔을 문학적으로 보자면, 각 행의 첫 자음이 ‘알랜’부터 ‘카프’까지 열한 개의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시작하는 시(詩)입니다. ‘알랜’으로 시작하는 첫 행(2a)은 예외적으로 출애굽기 34:6-7을 인용하는 2b-3a절에 의해 확장됩니다. 특히 보복과 진노의 표현이 반복적으로 사용되면서 심판의 이미지가 처음부터 전면에 드러납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출 20:5; 34:14; 신 4:24; 5:9; 6:15; 29:19; 32:16,21; 수 24:19)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셨다’라는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언약(결혼) 관계에 뿌리를 둔 표현입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과의 독점적 관계가 무시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등을 돌리고 다른 신들을 향해 갈 때 그분의 질투는 징벌의 심판으로 나타나고, 대적이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침략할 때는 이들에게는 파괴적 능력으로,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의 동인으로 작용합니다.

‘보복하시는 하나님’과 ‘진노하시는 하나님’은 오늘의 감정적-사적 이해와 달리 고대 이스라엘의 사고에서는 사법적 공적 영역에 속한 표현입니다. 정의의 근원이시자 마지막 보루이신 여호와는 폭력과 불의를 행하는 자들의 징계를 통해 이들에 의해 훼손된 당신 정의를 다시 바로 세우십니다. 질투와 보복과 진노는 불법과 불의의 승리를 용납하지 않으시는 선하신 하나님의 심판 의지의 극적 표현으로 의미상 동일한 범주에 속합니다. 여호와를 거스르고 대적하는 자의 정체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2-3장에 가서야 니느웨가 대표하는 앗수르로 드러납니다. 여호와의 보복과 진노는 인간의 행위에 즉각적이고 자동적으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분노에 더디시지만, 벌하지 않으시고 마냥 내버려 두지는 않으십니다. 그분은 권능이 크시기에 세상의 어떤 세력도 그분의 진노에 맞설 수 없습니다.

3b-5절은 여호와의 권능이 얼마나 큰지를 그분의 현현에 수반하는 특별한 자연현상을 통해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 창조 이후 흔들림이 없었던 피조세계의 질서가 뒤틀립니다. 이스라엘의 신학적 전통에 따르면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여호와를 직접 볼 수 없기에 그분의 출현은 동반하는 자연현상의 묘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언급됩니다. 신현 묘사에 사용된 언어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전통적인 것들입니다.

먼저 3b절은 여호와를 폭풍의 신으로 기술합니다. 폭풍과 회오리바람이 불고 구름이 자욱한 가운데 나타나십니다. 폭풍과 회오리바람을 막아설 자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구름은 임재 뿐만 아니라 여호와를 보이지 않게 감춰주는 역할도 담당합니다. 그분은 바다와 강을 꾸짖어 물이 말라버리게 하십니다(4a).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의 조상이 홍해(출 14:21-25)와 요단(수 3:14-17)을 건널 때 이미 경험했던 이적입니다. 또 그분의 꾸짖는 소리에 바산과 갈델과 레바논의 초득이 시듭니다(4b). 레바논은 최상급의 목재로 인정받는 백향목이 자라는 울창한 산림지대로 유명했습니다. 진노하신 여호와의 출현에 자연이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화산이 폭발하고 지진이 일어나 땅과 그 가운데 거하는 모든 것이 파괴되고 산의 바위도 깨집니다(5b). 견고함과 영원함을 자랑하는 자연도 속절없이 굴복하는데 누가 그분의 진노의 불을 견뎌낼 수 있겠습니까? 여호와의 진노는 대적들에게 국한됩니다. 그분은 선하시기에 당신을 의뢰하는 자들은 안전하게 보호하시고, 대적하는 자들은 넘쳐흐르는 홍수로 끝장내고 지하세계로 쫓아내십니다(7-8). 다음 단락에서는 여기에 관한 구체적 언급입니다.

 

유다와 니느웨에 관한 예언(9-15)

하나님의 진노는 사람이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지 않도록 겸손하게 하나님의 동행하며 말씀에 순종으로 삶, 하나님만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죄와 가까이하면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9너희는 여호와께 대하여 무엇을 꾀하느냐 그가 온전히 멸하시리니 재난이 다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10가시덤불 같이 엉크러졌고 술을 마신 것 같이 취한 그들은 마른 지푸라기 같이 모두 탈 것이거늘 11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이 너희 중에서 나와서 사악한 것을 권하는도다 12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비록 강하고 많을지라도 반드시 멸절을 당하리니 그가 없어지리라 내가 전에는 너를 괴롭혔으나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 아니할 것이라 13이제 네게 지운 그의 멍에를 내가 깨뜨리고 네 결박을 끊으리라 14나 여호와가 네게 대하여 명령하였나니 네 이름이 다시는 전파되지 않을 것이라 내가 네 신들의 집에서 새긴 우상과 부은 우상을 멸절하며 네 무덤을 준비하리니 이는 네가 쓸모 없게 되었음이라 15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지어다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 하시니라(9-15)

니느웨(앗수르)의 멸망과 유다의 구원에 관한 예언들이 모아져 있는데 청자의 신분이 달리 언급되지 않아 다양하게 해석됩니다. 9-10절은 여호와께 음모를 꾸미는 자들에게 주는 위협의 말씀입니다. 다시는 재난이 일어나지 않게 여호와께서 대적들을 모조리 끝장내실 것입니다. 한번 불이 붙으면 곧장 다 타버리는 마른 지푸라기처럼, 술에 취해 서로 뒤엉켜 곯아떨어진 주정꾼들처럼 이들은 모두 여호와의 심판에 떨어쳐 멸망합니다.

심판의 대상인 청자 “너희(남성)”가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여호와의 구원 승리을 불신하고 계속 앗수르의 봉신으로 남기를 주장은 예루살렘 왕궁의 친 앗수르 세력 또는 앗수르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둘 다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는 세리이라는 점에서 함께 고려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11절에서는 청자가 여성 단수의 ‘너’로 바뀝니다. ‘여호와께 거슬러 악을 꾀하며 사악한 것을 도모하는 자가 너에게서 나왔다/떠났다.’ 청자 ‘너’로 예루살렘이나 니느웨가 다 가능합니다. 전자라면 앗수르의 이익을 위해 예루살렘에 주둔한 앗수르 세력의 철수를, 후자라면 니느웨 성을 나서는 앗수르 군대의 원정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방 세력으로부터 해방을 약속하는 12-13절의 청자 ‘너’(여성)는 예루살렘 또는 유다가 분명합니다. 앗수르 또는 그 군대가 아무리 막강할지라도 그분께서 반드시 멸망시키시고, 앗수르가 유다에 지운 멍에를 부러뜨리고 결박을 끊어주실 것입니다(참조. 사 9:4). 전에 유다를 앗수르의 손에 붙여 심판하셨던 여호와께서 이제 앗수르로부터 유다를 해방하십니다. 유다를 심판하신 분께서 유다를 구원하십니다. 14절의 ‘너’는 남성으로, 청자가 다시 바뀝니다. “네무덤을 준비하리니 이는 네가 쓸모없게 되었음이라”는 앗수르의 역할과 관련한 언급 같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를 심판하는 여호와의 도구였던 앗수르(참조, 사 10:5-6)의 역할이 다 끝났습니다. 한계를 넘은 앗수르가 심판받는 일만 남았습니다. 심판의 범위가 앗수르의 통치자를 넘어 그의 후손과 우상들로 확대됩니다. 15절에서는 청자 ‘너’가 다시 여성으로 바뀝니다. 앗수르의 멸망과 유다의 해방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전령이 이미 산 위에 이르렀습니다(참조. 사 52:7). 여호와의 구원 약속은 먼 미래에 속하지 않습니다. 유다의 구원은 이미 시작되고 있는 사건입니다. 악인(앗수르)이 다시는 유다로 통행하지 못합니다. 유다는 다시 축제를 즐기고 서원을 지킬 수 있게 됩니다. 유다는 정치적 주권을 되찾고, 여호와의 종교도 온전히 회복됩니다.


많은 성도가 죄에 대해 안일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인자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으로만 그립니다. 하지만 이것은 착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만이 사랑의 하나님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리 떠나있고, 마음대로 방탕하게 살고 있다면 오히려 진노의 하나님에 더욱 가깝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구독과 광고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나훔(01)


나훔 서론


선지자 나훔은 니느웨 백성을 회개로 이끈 이전 선지자 요나와는 대조적으로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에 멸망을 선포합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자신들의 영적 각성을 잊어버렸고, 이전의 부력과 우상 숭배와 교만의 습관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 결과 바벨론이 니느웨를 파괴해서 니느웨는 흔적조차 남지 않을 것이라는 예언이 아주 구체적으로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저자

나훔이라는 이름은 ‘평안’ 혹은 ‘위로’라는 뜻이다. 니느웨가 멸망한다는 나훔의 메시지는 잔혹한 앗수르 사람에게 고통 받던 유다인들에게 분명히 평안을 주었다. 1장 1절에 의하면 선지자는 에고스 사람이라고 불린다. 엘고스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많은 학자들은 엘고스가 예루살렘과 가사 사이에 있는 유다 남부의 한 마을로 나중에 엘케시라고 불린 곳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의견은 나훔이 남왕국의 선지자임을 암시하며, 그가 유다의 승리에 관심을 쏟은 이유를 설명한다(1:15, 22).

 

기록 연대

나훔서의 메시지가 니느웨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기 때문에, 틀림없이 니느웨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한 BC 612년 전의 어느 시기에 이 묵시의 글을 전했을 것이다. 또 이 책은 분명히 애굽의 수도 테버(3장 8절에서 ‘노아몬’이라고 불렸다)가 앗수르에게 멸망당한 BC 663년 이후에 기록되었다. 테베는 BC 654년에 독립을 얻었으나, 나훔은 이 사건을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아마도 BC 663년과 654년 사이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주제와 문학적 구조

나훔은 일관되게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의 멸망을 선포한다. 니느웨가 멸망한 이유 중에는 앗수르 군대의 비인간적 행위(2:12)와 도시에 만연한 악행(3:4)이 있다. 하나님의 성품, 특별히 하나님의 분노, 거룩함 정의 능력 때문에 그의 대적들은 멸망을 피할수 없다1:2-10).

 

단락 구분

1. 니느웨의 멸망을 선포함(11-15)

     (1)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일반적인 원칙(1:1-8)

     (2) 니느웨의 멸망과 유다의 구원(1:9-15)

2. 니느웨의 멸망을 묘사함(21-13)

     (1) 선전 포고(2:1-2)

     (2) 니느웨의 멸망(23-13)

3. 니느웨 멸망의 정당성(3:1-19)

     (1) 니느웨가 멸망한 이유(31-11)

     (2) 니느웨 멸망의 필연성(3:12 19)

 

오늘날 교회에 주는 메시지

나훔서는 하나의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열정 적인 소책자다. 즉, 여호와는 니느웨 사람들의 엄청난 죄로 인해서 앗수르를 처벌하신다는 것이다. 물론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1:2)의 개념이 일반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으나, 하나님의 '진노는 의롭고 순수하다는 것을 잊어 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인류를 내려다보시고 그들의 악을 살피신다는 사실을 교회는 기여해야 한다. 그래야 교회는 세상 가운데서 순결함을 간직하며 악한 세상의 득세함에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견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넬슨 성경개관(개정판)-죠이선교회출판부

IVP 성경주석-IVP

구약성경개론-도서출판 엠마오


구독과 광고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