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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훔서(02-01)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

나훔 2장 1-13절


사람들이 머릿속에 그리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용서하시고 참아 주시는 분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만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의의 하나님이요,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유다에게 권고하는 성격이 짙은 첫 신탁(1:9-15)에 이어, 본격적으로 니느웨에 대한 예언을 선포합니다. 1-9절에서는 니느웨를 공격하는 자들을 묘사하고, 그 공격에 완전히 몰락하는 상황을 묘사하며, 10-12절에서는 니느웨의 멸망에 대한 조롱 섞인 애도의 노래가 이어집니다. 13절에서는 니느웨의 멸망이 하나님의 역사임을 분명히 합니다.

 

니느웨의 멸망(1-9)

세상의 부와 권력을 의지하며 의를 실천하지 않는 자들, 의인을 압제하는 자들은 결국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권세 앞에서 떨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사람이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지 않도록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삶, 하나님만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지어다 2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 같게 하시나니 이는 약탈자들이 약탈하였고 또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를 없이 하였음이라 3그의 용사들의 방패는 붉고 그의 무사들의 옷도 붉으며 그 항오를 벌이는 날에 병거의 쇠가 번쩍이고 노송나무 창이 요동하는도다 4그 병거는 미친 듯이 거리를 달리며 대로에서 이리저리 빨리 달리니 그 모양이 횃불 같고 빠르기가 번개 같도다 5그가 그의 존귀한 자들을 생각해 내니 그들이 엎드러질 듯이 달려서 급히 성에 이르러 막을 것을 준비하도다 6강들의 수문이 열리고 왕궁이 소멸되며 7정한 대로 왕후가 벌거벗은 몸으로 끌려가니 그 모든 시녀들이 가슴을 치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우는도다 8니느웨는 예로부터 물이 모인 못 같더니 이제 모두 도망하니 서라 서라 하나 돌아보는 자가 없도다 9은을 노략하라 금을 노략하라 그 저축한 것이 무한하고 아름다운 기구가 풍부함이니라(1-9)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의 악행을 더 이상은 참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니느웨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킬 뿐 아니라 남유다까지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나훔 선지자는 니느웨에 대한 심판을 서언한 후 하나님의 권능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1) 파괴하는 자(1-4)

1절의 ‘파괴하는 자’는 메대와 바벨론의 연합군을 가리킵니다. 1절의 “너는 산성을 지키며…굳게 할지어다”라는 조롱의 표현입니다. 지금까지 ‘산성’을 의지하여 교만했으나 이렇게 굳건하게 지켜도 소용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2절은 2:1-4에서 니느웨의 멸망을 다루며 ‘파괴하는 자’가 공격하는 상황을 묘사하는 맥락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갑작스럽게 야곱과 이스라엘의 영광에 대한 회복을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법은 선지자 나훔이 이미 사용한 방법입니다. 이미 1:12-15에서 유다에 대한 구원 신탁을 다루는 단락에서도, 1:14에서 니느웨의 멸망을 언급함으로써 유다의 구원이 니느웨의 멸망과 대조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듯이, 여기서도 역시 니느웨의 멸망을 다루는 맥락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대조하여 둘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부각하고 있습니다. 즉 나훔서는 주로 니느웨의 멸망에 대한 예언이지만(1:1), 이 니느웨의 멸망이 유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a절의 야곱과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한다는 표현은 궁극적으로 니느웨의 멸망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것임을 밝히는 표현입니다. ‘이는’이라고 이유를 밝히는 표현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곧 니느웨의 멸망이 이스라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유다가 디글랏빌레셀 3세(주전 745-727년) 이후 오랫동안 앗수르의 영향 아래 있으면서 괴로움을 당하였던 것은 하나님께서 힘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노하기를 더디 하셔서 진노하기를 늦추신 것뿐입니다. 그러나 이제 니느웨의 멸망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권자 되심을 보여줄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가 승승장구함으로 마치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부재하신 것 같은 상황 가운데, 유다는 니느웨의 멸망을 통해 역사하실 하나님 앞에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무언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 것입니다. 한편 ‘야곱’과 ‘이스라엘’이 각각 무엇을 지칭하는 지에 대해 의견이 나뉘지만, 같은 대상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사 44:1을 참조하라).

2b절의 ‘이는’으로 시작하는 표현은 니느웨의 기구한 운명을 드러냅니다. 약탈하며 땅을 넓혔던 앗수르가 이제 약탈당하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포도나무’는 유익을 주는 나무로 풍요를 대변하는데, “포도나무 가지를 없이 하였음이라”라는 말은 니느웨의 풍요가 제거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4절은 다시 ‘파괴하는 자’가 니느웨를 약탈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공격하는 용사와 병거에 대한 묘사는 그들이 얼마나 훈련이 잘 되어 있고 정비가 잘 되어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어떤 학자는 방패가 붉은 것은 피로 물들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는데, 전쟁에 임하면서 상대방의 방패를 볼 때 공포감이 몰려오는 상황과 잘 어울립니다. 또한 성경의 다른 곳에서 바벨론의 군사들이 붉은 옷을 입었다고 묘사하기도 하는데(겔 23:14-15), 나훔이 앗수르를 공격하는 군대가 바벨론의 군사임을 염두에 두었다고 유추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주도면밀하면서도 위엄 있게 공격하는 군대 앞에서 니느웨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니느웨는 주전 612년에 메대와 바벨론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는데, 멸망하는 시기가 가까워 왔을 때에는 이미 국력이 쇠한 때이기 때문에, 이런 멸망의 선포가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니느웨는 강대국으로서 여전히 건재하고, 유다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니느웨를 보며 여전히 하나님의 역사를 의심하는 상황에서 이런 메시지가 전해졌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치 눈앞에서 니느웨가 약탈당하는 것 같은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지자를 통해 이 내용이 전달될 때 유다는 어떻게 반응해야 했습니까? 당연히 현실을 본다면 의구심이 들겠지만,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니느웨가 약탈당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이유입니다.

(2) 니느웨의 패망(5-9)

1-4절의 ‘파괴하는 자’가 침략해 올 때에, 5~9절은 그 앞에서 니느웨가 어떻게 공격당하는지를 묘사합니다. “그가 그의 존귀한 자들을”은 누구를 지칭하는지 모호합니다. 앞의 문장에 속할 수도 있고, 니느웨가 공격당하는 상황을 묘사하는 것에 속할 수도 있습니다. 후자로 본다면, ‘그’는 앗수르 왕을 가리키고 존귀한 자들은 군대의 장교나 고위직을 가리킬 것입니다.

5절은 특히 ‘파괴하는 자’의 공격이 너무나 갑작스러워 미처 전쟁 준비도 못하고 있던 상황에서 군대가 몰려오는 것을 보고서 급히 성에 이르러 대비하려는 허둥대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6절의 ‘강들의 수문’은 니느웨 성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으나, 이런 것도 소용없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안을 쳐들어 왔을 뿐만 아니라, “왕궁이 소멸”되기까지 합니다.

7절의 “정한 대로”라는 표현은 니느웨의 멸망이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계획에 포함됐고 결정된 일이며, 따라서 니느웨의 멸망에 대한 예언은 확고하여 변개할 수 없는 예언이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7절은 전쟁에 패배하여 포로로 끌려가는 장면과 패전을 애도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8-9절은 니느웨의 역전된 상황을 풍자적으로 묘사한다. “물이 모인 못” 같다는 것은 니느웨가 강성하여 부가 넘쳤던 것을 가리킵니다. 니느웨에게서 무언가 얻을 것을 기대하고 모였으나 이제 망하게 되자 서로 돌아보지도 않고 도망하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9절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나오는데, 저축한 것이 많으나 이제 망하여 약탈당하는 상황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강대국이라고 교만하여 우쭐대지만, 자신들이 약탈한 상황 그대로를 당하면서 니느웨의 신세가 역전될 것입니다. 이는 현재의 상황이 정당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지금 풍요롭게 복을 누리는 것 같더라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하며 순종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며, 이것은 니느웨뿐만 아니라 유다에게도 중요한 메시지가 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에게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중요한 의미를 던져줄 것입니다.

 

심판의 결과(10-13)

하나님의 백성이 바로 서면, 세상의 악인들은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 버려질 것이비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섬기기만 하면 악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제거되고, 세상에는 아름다운 소식, 화평이 전해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이유이며 사명입니다.

10니느웨가 공허하였고 황폐하였도다 주민이 낙담하여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히며 모든 허리가 아프게 되며 모든 낯이 빛을 잃도다 11이제 사자의 굴이 어디냐 젊은 사자가 먹을 곳이 어디냐 전에는 수사자 암사자가 그 새끼 사자와 함께 거기서 다니되 그것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었으며 12수사자가 그 새끼를 위하여 먹이를 충분히 찢고 그의 암사자들을 위하여 움켜 사냥한 것으로 그 굴을 채웠고 찢은 것으로 그 구멍을 채웠었도다 13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어 네 병거들을 불살라 연기가 되게 하고 네 젊은 사자들을 칼로 멸할 것이며 내가 또 네 노략한 것을 땅에서 끊으리니 네 파견자의 목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10-13)

하나님께서는 왜 세상에서 악인들이 활개 치도록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성경을 묵상해 보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섭리하시는 이유를 부분적으로나마 알 수 있습니다.

(1) 애도의 노래(10-12)

이 단락은 여호와의 심판으로 말미암은 결과를 보여주는데, 애가의 형식으로 니느웨가 당할 멸망의 모습에 깊이를 더하고 있습니다. ‘파괴하는 자’가 침략해 올 때만 해도 5-9절에서 묘사된 대로 처참하게 당할지는 모르고 전쟁에 대비했을 것입니다(1). 그러나 여호와의 심판의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10절의 “공허하였고 황폐하였도다”는 니느웨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11-12절에서는 11절과 11-12절의 대조를 통해 니느웨가 멸망당한 비참한 상황을 부각합니다. 11b-12절은 니느웨가 멸망 당하기 전의 영광을 묘사합니다. 마치 숫사자가 사냥하듯 주변 나라를 침략하고 그 전리품을 챙겨 자신의 성을 풍요롭게 했었고,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나라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자굴과 사자가 흔적조차 없을 정도가 됐습니다.

(2) 여호와의 선언(13)

13절은 니느웨의 멸망에 대한 결론적 선언입니다. ‘파괴하는 자’를 통해 니느웨를 멸망에 이르게 한 것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이며,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내가 네 대적이 되어”는 니느웨를 멸망시킨 주체가 여호와이심을 분명히 합니다.


살다보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아가려다 보면 억울한 일을 참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 가운데 있으며, 어쩌면 징계하셔서 더욱 정결하게 만드시기 위한 도구일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으로 오늘도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며 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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