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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01-03)

 


하나님 말씀을 듣고 실천함

야고보서 1장 19-27절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고 맵시를 가다듬기 위해 거울을 봅니다.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흠을 고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거울을 보고도 고치지 않는다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말씀을 읽고 듣고서 행동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일분입니다.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고쳐야할 부분은 그대로 두고 잊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접한 이유는 자신의 본 모습을 발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바르게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낳은 자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특히 가난하고 악한 자들을 돌보는 것이야말로 참된 경건의 증거입니다. 19절을 전제로 20-27절까지는 하나씩 세부적으로 설명합니다. 20-21절에서는 ‘성내는 것’에 대해서, 22-25절은 ‘듣는 것’에 대해서 26-27절은 ‘말하는 것’에 대해 설명합니다.

 

성도로서 감정 조절하는 지혜(19-21)

많은 성도들이 말씀을 접하면서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말씀이 가슴까지는 도착한데, 손과 발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참된 경건은 삶의 현장에서 변화의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말씀으로 변화된 사람에게 첫 번째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본문에서 언어(말)이라고 소개합니다.

 

19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20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21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19-21)

 

타락한 마음은 항상 자기중심적입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 그리고 행동하는 것은 자신이 표준입니다. 자기가 하는 것은 다 맞고, 다른 사람은 틀리다고 단정하고 단죄해 버립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성도들은 예수님을 닮은 이타적인 사람들입니다.

 

(1) 일반적인 삶이 법칙(19)

 

야고보는 말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일반적인 법칙부터 설명합니다. 당시에 세상에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대한 격언을 들어 말합니다. 그것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지혜로운 사람들은 ‘듣는 속히 함’과, ‘말하는 것’과 ‘성내기는 것’은 더디 하는 사람입니다.

 

(2) 성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20)

 

성내기를 ‘더디 하는 것’은 일반적인 관계의 법칙이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에 대한 반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들의 죄악을 보시면서 성내지 않고 길이 참으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즉흥적으로 심판하셨다면 우리는 몇 번이나 죽어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야고보는 성도들이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때문이라고 소개합니다(20). 말을 반대로 성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옳은 것’,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인간 행동 규범으로서의 하나님의 기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성내기를 더디 하는 방법(21)

 

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버리는 것(21a)

‘성내기를 더디 하는 법’은 첫 번째는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는 것’입니다(21). 반대로 말하면, 성내는 이유가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심령은 사탄의 형상을 닮았습니다. 마음이 죄악의 필터로 덮여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행동에서 급한 모습으로 죄악이 나타난 것입니다. ‘더러운 것’은 우리 영혼에 묻은 얼룩이 더러운 오물이 돼서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을 가리키고(에베소서 4:31), ‘넘치는 악’은 스스로를 통제(control)가 안 되서 솟구쳐 표출되는 악한 행동을 의미합니다. ‘우리 속에서 성령의 통제가 되면서 나오는 말과 행동’은 성내기를 더디 할 수 있습니다.

 

②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들이는 것(21b)

두 번째는 ‘마음에 심긴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온유함’이란 ‘성냄’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 팔복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기준이 됩니다(마태복음 5:5).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태복음 11:28-3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온유함’은 구원받아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에게 나타나는 특징이라고 말합니다(갈라디아 5:23). 바울은 고린도후서 10장 1절에서 ‘온유함’을 예수님의 것으로 언급하면서, 이것이 교회가 본 받아야 할 모습이라고 제시합니다.

 

결과적으로 ‘온유함’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속히 듣고, 더디 말하여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배움으로 가능해집니다. 배운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 속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그 사람을 지배해서 감정이나 행동을 잘 조절됩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성도들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칭찬이 자자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당신을 잘 조절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내놓으시기 바랍니다. 

 

성도로서 듣는 지혜(22-25)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할 때, 진정한 변화와 성장이 일어납니다. 말씀은 자신을 돌아보게 하여 삶을 고쳐 나가도록 합니다.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복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의 순종과 실천은 하나님의 축복과 연결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갑니다.

 

22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3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24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25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22-25)

 

야고보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울에 비유하며 말씀을 통해 자신을 살피고 고쳐 나가야 한다고 권면하며,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격려합니다. 참된 경건도 행동으로 증명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 구절에서 야고보는 단순히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실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거울을 보고 자신을 잊어버리는 사람과 같다고 비유하면서, 말씀을 실천할 때 진정한 변화와 성장이 일어난다고 강조합니다. 또한,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은 그의 행위에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이는 우리의 순종과 실천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과 연결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말하는 지혜(26-27)

옛날부터 언어(말)에 속담이나 교훈들은 수도 없이 많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속담 중에 ‘말 한마디로 천량 빚을 갚는다.’란 말이 있습니다. 과거에 ‘천량’은 사형수들을 형을 면할 수 있는 량의 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속담은 ‘격에 맞는 좋은 말은 사형수도 살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26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27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26-27)

 

성도들에게 실수하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만 잘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1) 말하기를 더디(26)

 

‘말하기를 더디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성급하게 말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더디 말하는 것은 속히 듣는 작업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 말은 말씀을 배우라는 뜻에 더 가깝습니다(잠 10:19).

26절은 말을 더디 하는 것(혀를 재갈 물리는 것)과 경건을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속으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 겉으로 말을 가려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경건은 ‘헛것(우상숭배)’입니다. 내적인 실상으로 경건을 가능하는 것은 ‘자기 마음을 속이는 것’입니다. 내적 경건은 반드시 외적 표현, 말로 드러나야 합니다.

  

(2) 경건의 외적 확장(27)

 

경건은 두 가지 측면으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첫째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으로 확장되어야 합니다(27). 이들은 사회적 소외 계층으로 생명과 권리를 대변해 줄 고아와 과부들입니다. ‘돌보다’라는 말은 ‘방문하다, 심방하다, 관여하다, 찾아내다’라는 뜻입니다. 고아와 과부들이 환란 중에 있을 때, 실제적으로 이들을 찾고 돌보는 것으로 우리의 경건을 확증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세속에 물들지 않게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세속’이란 이 세상 가치 기준을 말하고, ‘물들지 않다’는 말은 ‘흠도 없고 티도 없다’(베드로전서 1:19)는 뜻입니다. ‘지키다’는 말은 ‘경각심을 갖고 지속적으로 간직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세상 가치 기준을 따르지 않고 예수님처럼 살기 위해서 경각심을 갖고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경건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고, 세상의 악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6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야 58:6-7)

 이처럼 삶에서 더러움과 악을 버리고 하나님의 의를 실천할 때, 진정한 자유와 안식과 형통을 경험합니다. 매일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잘 받게 하시고, 그 말씀대로 행동하며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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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01-02)

 

 


시험이 유혹이 될 때

야고보서 1장 12-18절


산을 오를 때는 더욱 불조심해야 합니다. 산에는 불탈만한 것들이 많아서 한 번 불이 붙으면 쉽게 먼지기 때문입니다. 산불은 처음에는 작은 불씨로 시작하지만, 큰 불로 이어지면 끄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처럼 성도들도 어떤 실수를 범했을 때, 다른 사람이나 환경을 탓하곤 합니다. 물론 사람들은 외부의 환경을 받기 때문에 무시할 순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잘못을 범죄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더라면, 범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죄악에 대한 작은 불씨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주님을 사랑함으로 시련을 견디라는 권면에 이어 시련 중에 다가오는 유혹을 경계합니다. 유혹은 각 사람의 육신적 욕망에서 기인함을 밝히며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는 것을 방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선물을 주시며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신 분임을 일깨우고 변함없는 그분을 신뢰하도록 돕습니다. 야고보는 속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인가를 설명합니다.

 

 

시련을 찾는 자의 복(12)

일반적인 생활에서 진짜와 가짜 믿음을 바르게 구분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용광로 같은 시험과 시련의 과정을 통해 증명됩니다. 진실한 믿음은 어떤 어려움 시험 속에서 빛이 나지만, 거짓 믿음은 시험에서 불태워지고 말 것입니다.

 

12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12)

 

본문에서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하는데, 시험으로 번역된 ‘시험’은 ‘시련(trial)’ 또는 테스트(test)를 의미합니다. ‘시련을 참으라’, ‘인내하라’는 주제는 1:3-4에서 다루었던 주제인데, 야고보는 이 단락에서 시련을 인내하는 것의 가치를 새로운 관점에서 언급합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왜 복이 됩니까? 시련을 참는 성도를 바라보시며 응원하시는 주님이 계시며 주님은 시련을 참는 자에게 승리의 월계관을 주듯 약속된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의 아담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했습니다. 이럴 때 그들은 유혹에 넘어가고 시련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야고보는 시련을 견디는 것과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동일시하고 있음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면류관은 시련을 참는 자들이 받습니다. 시련의 시간은 주님에 대한 사랑을 테스트하는 시간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시련 중에 다가오는 유혹(13-15)

사탄은 항상 ‘이번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라고 속이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불이 나지 않도록 해야지, 불이 한 번 붙으면 나중에는 자신이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강하게 단련하시려고 시험하시되(test), 믿음을 파괴하고 넘어뜨리기 위해서 유혹(temptation)하시는 분은 결코 아닙니다.

 

13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13-15)

 

야고보는 13절에서 같은 단어를 사용하여 ‘시련’과 ‘유혹’을 동시에 표현합니다. 사람이 겪는 ‘시련’은 죄에 빠지도록 하는 ‘유혹’이 될 수 있습니다. ‘시련’을 벗어나고 싶은 강렬한 욕망은 부정한 방법이나 죄와도 타협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시련’을 만날 때, 성도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인내하며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것을 통과하여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1:5).

 

(1) 하나님 때문이 아님(13)

 

하나님께선 성도들이 성장하기 위해 시험(test)는 하시는 분이지만, 넘어지도록 함정을 만들어 놓고 유혹한 분은 아니십니다. 유혹을 받는 것은 외부에 유혹 거리들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유혹에 반응하는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쉬운 비유를 하자면, 아무리 기름이 많아도 불씨가 없으면 불날 염려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아주 작은 불씨라도 있다면 순식간에 불이 붙어서 매우 큰 불이 되고 말 것입니다. 작은 불씨가 큰 불이 되어 온 산을 태운 것처럼 작은 욕심이 큰 죄가 되어 인생을 망치게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시련을 당할 때 찾아오는 유혹에 대해 마치 하나님이 성도를 죄에 빠지도록 유혹하는 것인 양 생각하는 어리석음 또는 속임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시련을 겪을 때 내가 하나님의 유혹을 받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유혹과 관련하여 야고보는 하나님의 두 가지 모습을 제시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악에게 유혹을 받지 않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친히 아무도 유혹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아니기에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부정하는 것보다 안전합니다. 미리 자신을 알고 대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모두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유혹을 받지 않으십니다. 완전하신 선이시며 죄악된 욕망을 갖지 않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악에게 유혹을 받지 않는 하나님의 속성은 아무도 유혹하지 않는 선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짓게 만들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촉발자가 아닙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시련 중에 유혹을 받아 넘어지고 실패한 후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며 원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자주 사람들은 자신의 실패와 죄의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기보다 하나님 탓으로 돌리며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 정당화하려 합니까?

13절에서 시련과 유혹을 동시에 언급하는 것은 시사 하는 바가 있습니다. 시련을 참는다는 것은 결국 유혹을 끝까지 이겨내고 승리하는 것을 포함하는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2)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14-15)

 

유혹을 받는 책임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에게 있습니다. 14절에서 유혹을 받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유혹을 받는 것은 하나님 대문이 아니라 각 사람의 육신적 욕망, 악한 욕망 때문입니다. 한글 개역개정 성경에 욕심으로 번역된 ‘에피뛰미아’는 육신적이며 악한 욕망을 가리킵니다. 이런 육신적 욕망은 물고기를 잡는 낚시 줄의 미끼와 같이, 동물을 포획하는 그물 같이 사람을 유혹하다가 걸려들면 여지없이 끌고 갑니다.

 

야고보는 여성이 잉태하고 자녀를 낳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욕망이 죄를 낳는 과정을 묘사합니다. 욕망이 잉태하지 못하도록 해야 할 뿐 아니라 욕망이 죄를 낳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그 상태에 머물지 말고 속히 결단하고 돌이켜야 할 것을 암시합니다. 죄는 결국 사망을 낳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유혹에 빠진 것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리의 욕심을 더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욕심 충만’과 ‘성령 충만’은 반비례합니다. ‘욕망의 소리’와 ‘하나님의 말씀’은 반비례합니다. 우리 마음에 욕심으로 가득할수록 하나님의 말씀보다 욕망의 소리가 더 크게 들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욕망의 소리를 따르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 마음에 성령이 충만할수록 욕망의 소리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크게 들릴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지금 당신에게는 어떤 소리가 더 크게 들립니까?

 

속지 말라(16)

사탄은 우리의 욕심을 부추겨 죄를 짓도록 만들어 멸망으로 이끌지만,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고 생명을 누리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함이 조금도 없으시며, 어떤 상황과 조건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좋은 분이십니다. 또한 모든 선하고 좋은 것을 주신 분입니다. 결코 악과 죄는 하나님 탓이 아닙니다.

 

16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라는 야고보의 말에 애정이 담겨있습니다. 16절은 앞 구절들과 뒤 구절들 사이에서 양쪽을 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유혹하여 죄를 짓게 만든다는 잘못된 생각에 속지 말아 16절 ‘속지 말라야’하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좋은 선물의 근원이신 하나님(17-18)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죄를 만들지 않았으면 사람들이 죄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죄에 대한 책임이 결국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죄인들을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아끼지 안했습니다.

 

17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18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17-18)

 

하나님께서는 죄를 만들어서 부추기고 유혹에 빠지도록 조장하신 분이 아닙니다. 모든 악과 죄는 하나님 탓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고 양육하신 아버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함이 조금도 없으시며 모든 선하고 좋은 것들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1) 좋고 온전한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과 그분의 속성(17)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인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1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유혹하지 않으신다고 밝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죄를 짓게 만들거나 파멸을 야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16절에서 속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 오해를 불식하고 속임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야고보는17절에서 하나님이 좋은 것을 주시는 분임을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주십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은사’와 ‘선물’은 원어상 의미에 큰 차이가 없이 모두 선물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은 ‘위로부터’ 오는 선물입니다. 세상이 주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이 좋은 것, 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선물을 하나님은 주십니다. 세상은 좋은 선물과 온전한 선물이 다 세상에 있으며 세상이 줄 수 있다고 속입니다. 그러나 속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좋은 선물과 완전한 선물은 위로부터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빛들의 아버지이심을 밝힙니다. 빛들의 아버지라는 말은 하나님이 태양과, 달과 별들을 창조하신 분임을 의미합니다(참조, 창세기 1:14-18; 시편 136:7-9), 좋은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권능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 능력이 부족하여 주실 수 없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좋은 선물, 온전한 선물을 주실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부족함이 없습니다(참고, 시편 23편)

 

하나님께서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십니다. 천체는 변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변화에 따른 그림자도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불변성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변치 않기 때문에 그를 신뢰하는 사람은 안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좋은 선물을 주셨다가 변덕스럽게 어느 순간 다시 빼앗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겉은 화려하고 좋아 보이나 뒤집어 보면 어둡고 흉한 이중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반영합니다. 모든 좋은 것, 온전한 선물 중에는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지혜도 틀림없이 포함될 것입니다(1:5).

 

(2) 진리의 말씀을 통해 생명을 낳음(18)

 

15절과 18절에 ‘낳는다’는 말이 대조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혹은 죄에 빠지게 하여 사망을 낳습니다(15). 하지만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이신(17)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통해 우리를 낳으십니다(18).

얼마나 상반되는 대조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악으로 유혹하여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하는 분이 아닙니다. 사망의 출발점은 육적 욕망입니다(1:15). 그것은 사람에게서 기원합니다. 그러나 생명의 출발점은 진리의 말씀입니다(1:18).

그리고 진리의 말씀의 기원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통해 우리를 낳으십니다. 즉 생명을 얻게 하십니다. 구원은 위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가장 좋은 선물입니다.

 

야고보는 구원받은 성도를 첫 열매라고 말합니다. 즉 피조 세계의 회복을 예견하는 첫 열매이며 거룩히 구별된 값진 존재입니다. 야고보가 보여주는 하나님께서는 온갖 시련 중에서도 좋은 것을 주시며 궁극적으로 성도를 구원하사 첫 열매가 되게 하시는 신실하시며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입니다. 그를 의지하며 시련을 끝까지 견디는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습니다(1:12).


유혹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악한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미혹당하는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기보다는 그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여 정욕을 이기고 선한 열망을 품어 하나님 주시는 온갖 좋은 은사와 선물을 누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유혹을 이기는 길은 하나님께 주시는 선한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선한 마음과 인내심을 주셔서 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승리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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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01-01)

 

 

 


 시험을 극복할 수 있는 참된 지혜

야고보서 1장 1-11절 


살아가다보면 어려운 일을 많이 만납니다. 문제에 대한 태도에 따라 쉽게 풀리거나 더 꼬이는 수 있습니다. 문제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대하는 것을 ‘지혜(智慧)’라고 합니다. 시련은 인내를 요구합니다. 인내를 통해 믿음의 열매가 맺기 때문입니다. 온전히 이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사람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통해 능력 있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가 기록한 성경입니다. 기독교 핍박으로 팔레스틴에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이 편지의 특징은 교리적이거나 논쟁적이지 않고 실질적인 생활을 권면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를 신약의 잠언이라고 말합니다.

 

인사말(1)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사람들이 모두 변합니다. 부정적인 인생을 살던 사람들이 긍정적인 삶으로, 핍박하던 자들이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으로, 병들었던 사람들이 치유까지 받습니다. 이렇게 변화된 삶은 많은 사람들에게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며,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끼칩니다.

 

1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1)

 

야고보는 당시 편지의 형식을 따라 먼저 발신인과 수신인을 언급하고 그들에게 인사말을 전합니다. 발신인은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이며, 수신인은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 곧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곳에서 한 가지 중요한 영적인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쓴 야고보는 자신을 ‘예수님의 친 동생이었던 야고보’라고 소개하지 않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소개합니다. 예수님을 ‘주’로 부른다는 사실은 야고보가 거듭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사역하실 때,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고 불만을 가졌습니다(요한복음 7:3-5). 한 번은 예수님께서 사역을 하실 때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 때에 동생인 야고보는 고향으로 예수님을 데리고 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야고보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삶이 변했던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5:7). 그의 영적인 변화는 예수님을 부르는 용어에서 나타납니다. 자신을 ‘예수님의 친 동생’으로 부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합니다. 육신의 형인 예수님을 ‘주님’라고 부른 것입니다. 속된 이야기로 예수님의 친 동생임을 내세워 덕을 보려는 생각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고 있습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변화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들마다 변화를 가져옵니다.

 

 

온전히 기쁘게 여길 시험(2-4)

참을 인(忍)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살인도 면할 수 있는 것이 ‘인내(忍耐)’입니다. 인내는 예로부터 인륜지덕(人倫之德)으로 분류되어 많은 사람들이 칭찬하고 배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를 돌아보면 인내는 별로 중요한 덕목이 아닌 듯싶습니다. 그렇게 인내하는 사람도 잘 찾아보기 힘들다는 선입관을 갖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현대 사회는 인내하지 못하는 사회가 되었겠습니까? 인내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불공정 사회 속에서, 억울한 갑을의 관계 속에서 저마다 인내하며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인내하는 것을 힘들어 하며 사는 것 같습니다. 인내는 기독교인에게도 중요한 윤리적 덕목입니까? 성경은 이 인내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2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2-4)

 

초대교회 당시에 성도들은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 예루살렘 교회에는 일반적으로 큰 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사도행전 8:1). 이로 인해 성도들은 각지로 흩어졌습니다(사도행전 11:19). 당시 성도들은 예수님과 스데반 집사의 순교이후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고 순교를 당했습니다. 도망친 사람들은 은둔 생활하고 있었습니다(히브리서 11:37-38).

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종종 기독교를 표현할 때 ‘익두스(ΙΧΘΥΣ)’라는 고기 문양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라는 뜻입니다. 당시는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알면, 체포되었습니다. 때문에 성도들끼리만 은밀하게 ‘그리스도인’라는 암호로 사용하고 다녔던 표시입니다. 이처럼 참으로 여러 가지 시험을 통해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고난을 피해 사방으로 흩어진 성도들을 향해 ‘흩어져 있는 열두지파에게’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열두지파’라고 부른 이유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약속으로 구원 받은 백성을 의미합니다. 당시는 신약의 신학이 형성되어 있지 안했기 때문입니다. 고난 가운데 있지만, 구약적인 의미로 하나님의 구원 성도들이란 것입니다.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고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권면합니다. 슬퍼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교훈과 일치합니다. 

 

11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태복음 5:11-12)

 

성도들이 시험을 기뻐해야할 이유는 ‘믿음의 시련(testing of faith)’을 통해 두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입니다. 사단은 자기 자녀를 핍박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로, 궁극적으로 우리의 영육이 온전하게 되어 부족하지 않은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험 가운데 인내(忍耐)를 배우기 때문입니다. 인내하는 과정 속에 온전함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니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견디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있어도 인내가 없으면 열매를 거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결실을 맺으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누가복음 8:15).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훈련시키신 것은 세상의 축복과 번영을 주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완전한 자질과 인품을 만들어 가시길 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시험을 환영하고 기쁘게 받아들려야 합니다.

 

고난은 당장 힘들어도 반드시 선한 결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시련은 인내를, 인내는 부족함이 없는 온전한 성도들을 만듭니다. 시험의 과정을 통해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채워감으로 하나님의 성도로서 아름답게 만들어 가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인정하고, 상황과 조건을 초월해서 기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난관과 역경은 영적 거장으로 만들어 가시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시련을 통해 당신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 당하는 시험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나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기대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살펴야 합니다.

 

 

상황을 뛰어넘는 영적 지혜(5-8)

인생을 살아가다가 보면, 여러 가지 환경을 만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낙심하거나 영적으로 침체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낙심은 전적으로 어려운 상황과 조건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한 환경을 해쳐나갈 지혜가 부족함에서 오는 근심일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야고보 사도는

 

5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6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8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5-8)

 

‘지혜’는 단순히 지식이나 정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이 닥치는 환경에서 각각의 경우에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게 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문제와 환경에 대한 올바른 판단력과 분별력을 의미합니다.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판단해 주고 문제점을 발견하고, 더 나가서 해결책을 찾는 것입니다.

 

종종 사회에서 인정받는 엘리트가 이치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 그렇게 행동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많이 배운 지식과 정보가 사람을 지혜롭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식과 정보는 바른 판단력을 가지는 도구일 뿐입니다. 때론 학교에 가지보지 못한 분들이 배운 사람들보다 어려운 일을 순조롭게 처리하는 것을 봅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지혜롭게 행동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래서 ‘지혜’라는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배운 지식과 경험을 생활 속에 적절하게 적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야고보는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에서 대처 능력인 지혜가 부족할 때, 하나님께서 구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자녀들에게 지혜를 아끼지 않습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후히 주십니다.

세상에서는 무엇인가를 베풀어주면서 조건을 답니다. 그러한 선물은 받긴 받았지만 왠지 씁쓸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그냥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마가복음 11: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구할 때는 의심 없이 믿음으로 구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6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브리서 11:6)

 

하나님께서는 ‘새벽 이슬’같이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좋아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부르지만 두 마음을 품는다면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응답되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이 항상 불안해서 바닷물처럼 흔들리게 됩니다. 아니 마음속에서 해일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지혜로운 삶(9-11)

세상에서는 부자가 더 행복하고 가난한 사람은 더 불행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더 강한 것 같고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더 약해 보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과 힘을 가지려고 그것에 전력투구 합니다. 하지만 인생의 참된 가치와 진정한 행복은 보이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9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10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11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9-11)

 

이제 주제를 바꾸어서 ‘부’에 대해서, 즉 가난한 사람과 부자에 대해서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갑자기 주제를 바꾸는 것은 실천적인 사람의 특징입니다. 먼저 야고보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자랑할 것이 소유가 아니라 따로 있습니다.

 

야보고는 고난 받는 성도들에게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10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라고 권합니다. 육적인 의미로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여기서 ‘비천함’이란 하나님 앞에서 겸비한 태도, 곧 겸손한 태도입니다(베드로전서 5:6). 부자가 자신의 낮아짐을 자랑해야 하는 이유는 세상에 모든 것이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실수할 수 있습니다. 가진 사람은 자칫 가진 것을 가지고 교만할 수 있습니다. 가지지 못한 사람은 열등감으로 인해 무너질 수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는 모두 상대적일 뿐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모두 풀의 꽃처럼 사라집니다. 누구든지 세속적인 생각을 버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간구한다면, 위급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응답과 임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위치에 도달하지 못해서 힘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한 뜻에 초점을 맞추며 의심하지 말고 구함으로 참된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근거로 우리는 넉넉하게 이길 수 있습니다.

 

응답을 확신하며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시길 바랍니다. 순간적으로 변하는 상대적인 세상의 가치에 마음을 두지 않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지혜를 구시길 바랍니다.


성도들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여정에서 세속적으로 포기나 타협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시련을 바르게 통과하면 영육이 더욱 강해집니다. 그래서 시험을 만나거든 기쁘게 여기라고 하였습니다. 당신이 겪는 고난과 아픔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승리할 능력과 온전한 믿음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구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지혜를 따라 여러 가지 시험을 승리해 나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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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서론

 


하나님의 사랑으로 회복하라!

야고보서 서론


 

야고보는 오늘 말씀에서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가던 길에서 돌아올 것을 촉구합니다. 본문은 이 말을 “너희는 …… 들으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원래 돌아오라는 말입니다. 방향을 바꾸어 정반대 쪽으로 향하여 오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성도 개인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활동들에도 유일한 규범입니다. 오늘날처럼 다양한 풍조와 운동이 많은 영적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묵상하기를 원하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기를 원합니다.

   

 

1. 저자와 기록 연대

이 야고보서의 저자는 ‘야고보’입니다. 구약성경의 ‘야곱’의 이름을 따른 것으로 유대인에게는 흔한 이름입니다.

신약에 몇 명의 야고보가 등장하지만, 가장 가능성 있는 저자 후보는 예수의 형제이자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이던 야고보입니다. 그는 예수의 공생애 기간에는 믿지 않았지만(마 13:55; 막 3:31.32), 부활을 통해 신자가 되었고(고전 15:7) 예루살렘 교회의 구성원이 되었습니다.

 

정확한 연도는 불분명하지만, 아마도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박해로 베드로가 다른 지역으로 선교를 간 주후 44년부터 본격적으로 교회의 지도자가 된 듯하며, 이후 계속 교회를 섬기다가(갈 2:9, 12; 행 15:13), 주후 62년에 순교했습니다.

이 야고보를 저자로 보는 이유는 편지가 보여주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배경 정보(2:5-7, 3:12: 4:13-17; 5:1-7)와 율법과 관련한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주요 대상으로 한 것(1:1,25; 2:1-26; 4:11) 때문입니다. 팔레스타인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영향 아래 있을 가능성이 높기에 예수의 형제 야고보가 저자일 확률이 높습니다.

이와 함께, 초대 교회 전통도 예수의 형제 야고보를 편지의 저자로 소개합니다(유세비우스의 『교회사」, 3.25.3; 2.23.25).

 

한편, 기록 연대는 두 가지 요소와 관련 있습니다. 하나는 저자입니다. 예수의 동생 야고보가 저자라면 그가 순교하기 전 50년대나 40년대 중후반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 다른 요소는 바울과의 연관성입니다. 만일, 이 편지가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에 응답하는 것이라면 갈라디아서와 로마서가 저술된 이후, 즉 50년대 후반이나 60년대 초여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과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면, 오히려 바울의 편지가 본격적으로 집필되기 시작한 50년대 이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바울의 교리에 응답하는 것이 아니기에 편지의 기록 연대는 주후 40년대 중후반으로 볼 수 있습니다.

 

 

2. 수신자의 상황

야고보서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1:1)를 수신자로 부릅니다. 비록 유대인이 아닌 그리스도인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지만, 수신자 대부분은 팔레스틴 지역에 살고 있고 유대 그리스도인인 듯합니다.

그들은 교회와 회당의 분리가 완전하게 진행되지 않은 상황(참조. 2:2-4)에서 선생(3:1)이나 장로들(5:14)이 지도자로 있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입니다. 일부 부자들이 있었지만(참조. 2:2.3; 4:13), 대부분은 가난한 소작농이나 부유한 지주의 일꾼들이었습니다(2:2.3: 5:4).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처한 상황입니다. 핵심은 부와 가난과 관련한 세상의 영향력, 즉 소유로 인한 힘의 서열구조입니다. 세상은 소유를 통해 생긴 힘으로 계층과 서열을 만듭니다. 일반적으로 가진 자는 위에 있고 그렇지 않은 자는 밑에 있습니다. 가난한 독자들은 자연스레 아래 계층에 속해 있었고, 소유의 힘을 가진 자들에게 착취와 불의를 당하고 살았습니다(참조. 2:6,7; 5:1-6).

 

독자들은 그 상황을 뒤집을 힘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었음에도 그 상황 자체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로 인해 벌어지는 시험 상황이 서신의 첫 주제(1:2-18)이자, 마지막 권면의 배경(5:7-20)입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런 세상의 모습이 교회의 내적 문제 상황을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도 소유로 인한 차별(2:1-11)과 비교와 경쟁으로 인한 다툼(3:14-16; 41-12; 5:9)이 있었습니다. 세상이 제시하는 힘의 서열구조를 동경하고 그 모습을 따라 형제들을 대하면서 벌어진 현상입니다(참조. 5:19). 이런 면에서 야고보서의 독자들은 이 땅에 살면서 소유와 관련한 세상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오늘의 교회도 예외가 아니기에 그들은 ‘우리’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거울이기도 합니다.

 

 

3. 문체의 특징

야고보서는 몇 가지 인상적인 방법으로 주제를 전개해갑니다. 첫째, 활발한 문답식 대화법(diainlle)입니다. 독자나 가상의 인물을 대화 상대자로 세워 어떤 주제나 상황에 대해 묻고 답하는 형태입니다. 예를 들어,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차별과 믿음과 행함의 문제’(2장)와 ‘지도자와 관련한 혀 사용’(3장)과 ‘교회 안에 있는 다툼’(4:1-12)을 다룰 때는 독자를 대화 상대자로 세우고, ‘부한 상인들’(4:13-17)과 세상의 ‘부한 지주’(5:1-6) 문제에 대해서는 가상의 대화 상대자를 세워 설명합니다.

바울의 편지 중 로마서가 이런 방식을 자주 사용해 복음의 내용을 설명하지만, 야고보서는 훨씬 다양한 형태로 여러 상황에 대한 권면을 전달합니다.

 

둘째, 대화 진행과 관련한 다양한 서술 방식입니다. 그중 하나는 저자가 의도한 것을 독자 스스로 답하도록 유도하는 부정의문문 사용입니다. 긍정 대답과 부정 대답을 유도하는 두 가지 형태를 상당히 자주 사용합니다(긍정 대답 2:4-7,21,24; 4:1,4; 부정 대답 2:14; 3:11,12). 이는 독자를 가상의 대화 속에 참여시켜 주제에 집중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또 다른 서술 방식은 직접 화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2인칭, 혹은 3인칭 대화 속에 일인칭 지시어(1:13; 2:18; 4:13,15)나, 이인칭 명령(2:3,16)을 사용해 마치 상대방의 고백을 직접 듣는 듯한 효과를 줍니다. 생생함을 통해 독자의 참여를 이끄는 형태다.

 

셋째, 다양한 형태의 예시들입니다. 어렵지 않고 일상에서 흔히 보거나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을 사용합니다. 율법 행함과 관련해 ‘거울을 보는 예’(1:23-24)나, ‘혀 사용과 관련해 다양한 예들’(배와 말[馬]과 불과 길들이는 짐승들, 샘과 나무 등, 3:1-17)과 ‘부한 상인의 계획’(4:13-17)과 ‘지주들이 소유한 것들’(5:2-3)과 ‘욥’(5:11)과 ‘엘리야의 예’(5:17-18) 등이 그것입니다.

마치 독자와 대중에게 친근함을 주는 예수의 비유나 가르침을 연상케 합니다. 이 모든 방법은 독자를 효과적으로 설득하려는 저자의 배려이자 지혜입니다.

 

 

4. 주요 내용

 

(1) 하나님 나라와 새 언약 관계 안에서의 삶

 

신자의 삶은 하나님이 자기 뜻에 따라 세상 어둠 속에 있던 신자를 말씀으로 낳는 것에서 시작합니다(1:18). 즉 과거 사건입니다. ‘낳았다’는 표현은 하나님 나라에서의 새 창조를 의미함과 동시에 새 언약 관계에서 자녀의 신분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인간 편에서 믿음의 요소가 수반된 과정입니다. 이런 하나님 나라 속 언약 관계는 신자의 현재 삶을 통제합니다. 신자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 사랑’이라는 수직적 계명과 ‘형제 사랑’이라는 수평적 계명이며(1:27), 믿음과 함께 이 계명들을 지키고 행함으로 언약 관계에 충실한 자, 곧 의로운 자로 인정받는데, 이 상태를 복이라고 부릅니다(1:25). 하나님의 현재적 함께하심과 온전함을 향한 성숙 과정(1:4), 그리고 미래의 완전한 상태를 경험하는 것(2:5)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비록 신자는 아직 이 세상에 살고 있기에 여러 시험을 당하지만, 복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세상에 속한 것들에 흔들리지 말아야 하며(1:2-4,27), 장차 있을 주의 재림과 심판을 기억하고(5:9) 주께만 순종하고(4:7,8) 견뎌야 합니다(5:7). 이를 위해 신적 도움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듣고 이해하여 분별하는 것(5:19,20)과 기도를 통해 지혜를 포함한 주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1:5-8; 5:13-18).

 

(2) 의롭고 경건한 삶과 지혜

 

지혜의 소유 여부와 성격은 세 가지 과정을 통해 확인되고 평가될 수 있습니다.

첫째, 내적 상태를 만드는 과정입니다. 지혜를 통한 내면 상태의 모습은 자신과 타인에게 긍정적 기여를 할 수 있는 바탕이 되기도 하고(1:2-4) 불신앙(1:6-8)이나, 욕심(1:14,15)과 시기심(41,2)으로 얼룩진 파괴적 상태이기도 합니다.

둘째, 내면 상태를 밖으로 표현하는 과정입니다. 말이나 행동/태도로 사람들을 힘들게 하거나(2:2,3; 3:9,10; 5:4), 다투고 자랑하거나(3:14; 4:1,11,13), 세상을 추구하는 것(5:5,6)으로 표현될 수도 있고, 반대로 하나님과 사람을 향해 경건과 화평의 모습으로 표현될 수도 있습니다(1:26,27; 3:13,17,184:8,10; 5:8-10).

셋째, 내면 상태를 밖으로 표현한 결과다. 혀를 함부로 사용해 망하는 경우(3:5,6)나, 전쟁으로 표현되는 다툼의 부정적 결과가 있기도 하고(4:1), 하나님과의 관계에 충실한 의의 열매도 있습니다(3:17,18).

 

결국 지혜는 이 세 가지 과정과 결과의 모습으로 판단됩니다. 세상은 철저히 자신을 중심으로 한 이기적 욕망을 부추기고 그것만을 성취하도록 돕는 것을 지혜라 말합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그런 지혜를 하나님과 상관없는 세상 지혜요, 심지어 귀신의 지혜로 평합니다(3:15,16). 대신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의 정체성과 삶을 드러내는 과정과 결과를 만드는 것을 참 지혜라고 합니다. 선택은 독자의 몫이고, 이 또한 ‘지혜’가 필요한 영역입니다. 영원한 가치를 향한 믿음의 눈을 열어 잘 분별하고 잘 표현하며 살아가는 참 지혜를 선택하기를 바라는 것이 야고보 사도의 마음일 것입니다.

 

 

5. 바울 서신과의 관련성

야고보서는 바울 편지와의 관련성으로 오해를 받아왔습니다. 특히 루터는 구원 과정에서 믿음을 중시한 이신칭의 교리를 강조해 야고보를 바울에 도전한 사람으로 평하고, 1522년에는 독일어 신약성경 서문에서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언급했습니다. 급기야 1534년에 그의 독일어 성경 완역본 초판에서 야고보서를 외경의 위치에 배치했습니다. 비록 이후 성경에서는 야고보서의 위치가 교정되었지만, 루터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편지와 야고보서의 관계성에 혼동을 겪어왔습니다.

과연 이 둘은 정말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까? 쟁점은 율법의 행위와 믿음을 다루는 2:14-26입니다. 이신칭의와 반대 가르침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이 부분이 믿음으로 구원 받는, 곧 불신자가 신자가 되는 과정을 다루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몇 가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 이 부분은 신자를 대상으로 합니다. 저자는 이미 1:18에서 독자들을 하나님이 말씀으로 낳은 자들로 묘사하고, 그들을 믿음의 형제로 부릅니다(1:19; 2:1,14). 또한, 2:1에서도 독자들을 예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로 전제해 설명합니다.

둘째, 2:14-26은 믿음과 행함의 대조가 없습니다. 오히려 저자의 초점은 믿음의 고백과 행함의 삶을 일치시키는 것(2:14-17)과 행함 없는 믿음과 행함 있는 믿음 사이의 대조입니다(2:18-20),

셋째, ‘의’에 대한 이해입니다. 정체성과 관계성에 충실하다는 말로, 사람과 관련해 창조주께 반응하는 피조물다운 모습이며 언약 관계에 속한 자다운 모습입니다. 이런 면에서 의롭다 여김 받는다는 말은 단순히 죄 사함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로 인해 마치 하나님과의 관계에 신실한 자처럼 여김 받는, 끊어진 그분과의 관계 연결이 포함된 말입니다. 더 나아가 이 ‘의’는 하나님과의 관계 연결뿐 아니라, 이후 삶에서의 신실한 모습을 지칭할 때도 사용됩니다.

넷째, 아브라함의 모습입니다. 야고보서는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얻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다고 하고(2:22),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 받은 창세기 15:6 말씀의 성취를 이루었다고 말합니다(2:23). 믿음으로 언약 관계 속에 들어간 상태를 행함으로 드러내어 관계의 신실함, ‘의로움’을 인정받았다는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야고보서는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와 문맥과 초점이 다릅니다. 다른 것을 같이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 바울도 신자에게 율법 행함을 요구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로 들어가고(롬 3:22; 갈 2:16), 이후 삶에서는 율법을 통한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살라고 말합니다(롬 13:8; 갈 5:14). 이는 야고보서의 설명과 상충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야고보서를 바울과 대화하는 편지로 보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야고보서를 자체의 관점으로 읽는 것이 옳습니다.

 

 

6. 야고보서의 구조

1. 서론(1:1)

 

2. 부와 가난과 관련한 세상 영향력에 대해(1:2-18)

(1) 시험당하는 독자를 향한 권면(1:2-8)

(2) 부와 가난에 대해(1:9-11)

(3) 시험당하는 독자를 향한 권면(1:12-18)

 

3. 교회 내적 상황에 대한 권면 : 일반적 권면(1:19-27)

(1) 성마른 사람이 되지 말라(1:19-20)

(2)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되라(1:21-25)

(3) 참된 경건(1:26-27)

 

4. 교회 내적 상황에 대한 권면 : 말씀 순종과 의로움(2:1-26)

(1) 말씀 순종으로 인한 의로움: 형제 차별에 대해(2:1-13)

(2) 말씀 순종으로 인한 의로움: 믿음과 말씀 순종과의 관계성(2:14-26)

 

5. 교회 내적 상황에 대한 권면 : 지도자에 대해(3:1-18)

(1) 지도자와 혀 사용(3:1-12)

(2) 지도자와 참 지혜(3:13-18)

 

6. 교회 내적 상황에 대한 권면 : 교회 안 다툼에 대해(4:1-12)

(1) 세상 욕심으로 서로 다투지 말라(4:1-3)

(2)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4:4-10)

(3) 형제를 비방하지 말라(4:11-12)

 

7. 부와 가난과 관련한 세상 영향력에 대해(4:13-5:11)

(1) 세상의 부를 추구하는 신자의 자랑에 대해(4:13-17)

(2) 세상의 부한 지주에 대해(5:1-6)

(3) 시험 상황의 신자를 향한 권면(5:7-11)

 

8. 마지막 권면들과 마무리(5:12-20)

(1) 맹세에 대해(5:12)

(2) 여러 기도 상황에 대한 권면(5:13-18)

(3) 진리를 떠나 형제를 돌아오게 하라(5:19-20)

 

      

결론

자기 생각대로 인생을 살던 사람은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서 주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은 주님의 듯을 깨달은 자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깨달은 자는 이제 주님께 의지하는 삶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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