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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10-02)


상실된 믿음을 회복하는 에스라

에스라 10장 9-44절


 

부모님들은 자녀들이 조금만 공부하지 않으면 꾸짖곤 합니다. 그러다 고향집에서 30-40년 전 자신의 성적표를 발견하게 되면, 아이들 앞에서 떳떳할 수 있을까요? “보아라! 나는 이렇게 열심히 했다”라고 말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지도자는 본이 되어야 하며, 그로 인해 전체가 변화할 수 있습니다.

 

  • 유다와 베냐민 모든 사람들은 성전 앞 광장에 모여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고 에스라의 제안을 따를 것을 다짐합니다. 그렇지만 그때가 우리이고 관련된 사람의 숫자가 많음을 감안하여 시간을 두고 시행할 것을 에스라에게 제안합니다. 에스라는 회중의 제안에 따라 책임자를 선임하여 조사에 착수합니다.

 

에스라의 권고와 조치(9-17)

참된 부흥은 죄에 대한 각성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현신된 신앙은 공동체 전체로 확산됩니다. 회개의 영께서 새로운 마음을 주셨고 구체적인 죄악으로부터 돌아서기 시작합니다. 죄 고백은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고백된 죄악은 순종의 실제적인 결과로 나타나야 합니다.

 

9유다와 베냐민 모든 사람들이 삼 일 내에 예루살렘에 모이니 때는 아홉째 달 이십일이라 무리가 하나님의 성전 앞 광장에 앉아서 이 일과 큰 비 때문에 떨고 있더니 10제사장 에스라가 일어나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범죄하여 이방 여자를 아내로 삼아 이스라엘의 죄를 더하게 하였으니 11이제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의 뜻대로 행하여 그 지방 사람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 하니 12모든 회중이 큰 소리로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니이다 13그러나 백성이 많고 또 큰 비가 내리는 때니 능히 밖에 서지 못할 것이요 우리가 이 일로 크게 범죄하였은즉 하루 이틀에 할 일이 아니오니 14이제 온 회중을 위하여 우리의 방백들을 세우고 우리 모든 성읍에 이방 여자에게 장가든 자는 다 기한에 각 고을의 장로들과 재판장과 함께 오게 하여 이 일로 인한 우리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하나 15오직 아사헬의 아들 요나단과 디과의 아들 야스야가 일어나 그 일을 반대하고 므술람과 레위 사람 삽브대가 그들을 돕더라 16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이 그대로 한지라 제사장 에스라가 그 종족을 따라 각각 지명된 족장들 몇 사람을 선임하고 열째 달 초하루에 앉아 그 일을 조사하여 17첫째 달 초하루에 이르러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자의 일 조사하기를 마치니라(9-17)

 

마지막으로 에스라의 업적을 살펴봅시다. 돌아온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인들과 통혼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출애굽 이후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에 불순종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이 문제들이 매우 심각한 사건이었습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고 나면, 아무리 열심히 해도 다 잘못될 수 있습니다. 성전을 세워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려는 이스라엘에게는 이 범죄 사실을 매우 단호하게 조치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수고하였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때 잠시 회개할 뿐이었습니다. 그는 통혼을 공동체적인 죄악으로 규정하고 끊어버릴 것을 공적으로 선포했습니다.

 

⑴ 유다와 베냐민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모임(9)

 

모든 백성들이 에스라의 요청에 따라 3일 안에 예루살렘 광장에 모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중요한 모임이 이루어지는 장소였고, 성전 동편에 위치한 광장은 수천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에스라의 지시가 공포된 지 3일 후 주전 457년 11-12월 무렵)에 백성들이 성전 앞 광장에 앉았을 때, 큰 비가 내렸습니다. 우기였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생각할 수 있었지만(13, ‘큰 비가 내리는 때’), 그 자리에 모인 백성들은 하나님의 진노로 생각하여 두려워합니다(참조, 삼상 12:17-18).

 

⑵ 에스라의 권고와 조치(10-17)

 

에스라는 귀환민들이 이방 여인과의 통혼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조상들이 지은 죄에 또 하나의 죄를 더하였다고 말합니다(10). 이전에 조들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징계가 임하고 그로 인해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는데, 이제 유다 공동체가 또다시 그런 위기를 자초하였다는 것입니다. 에스라는 백성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속히 그 지방 사람들 및 이방 여인들과 단절할 것을 촉구합니다(11). 에스라가 의도한 바는 거룩한 백성으로서 구별된 모습과 율법에 충실한 공동체의 삶이었습니다. 백성들은 큰 소리로 에스라의 제안을 수락합니다(12). ‘큰 소리로 대답했다’는 것은 이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했음을 의미합니다.

 

에스라의 결정을 곧바로 이행하기에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①이방인과 결혼한 사람들의 숫자가 생각보다 많고, ②우기로 인한 거친 날씨 때문이었습니다(13). 이로 인해 회중은 에스라에게 새로운 제안을 합니다(14). 그것은 방백들을 중심으로 위원회를 구성하고, 당사자들로 하여금 자진해서 성읍 위원회에 출석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방백들이 성읍 장로들 및 재판장과 함께 예루살렘 법정에서 문제를 처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비록 시간이 지체되긴 했지만 각 지역의 장로들과 재판관들이 상황을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어 합리적인 제안처럼 보입니다.

그때 ‘이 일’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들이 있었는데(15), 그들의 이름은 요나단, 야스야, 므술람, 삽브대로 소개됩니다(므술람은 19절에 이방 여인과 통혼한 사람으로 나온다). 이들이 반대한 ‘이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방인 아내를 내보내는 일 자체로 보는 것이고, 둘째는 회중이 제안한 13-14절의 수정안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곧 어느 정도 시간을 두고 해결하자는 회중의 제안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신속하게 이 일을 처리하자는 주장입니다. 주류 학자들의 견해는 두 번째 해석을 지지합니다. ‘사로잡힌 자들의 자손’은 시간을 두고 하자는 회중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 구제적인 시행에 옮기기로 합니다(16a). 에스라는 이 일을 위해 족장들 몇 사람을 선임하여 책임을 맡깁니다(16b).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사람들에 대한 조사는 10월 1일에 시작되고 3개월 동안 진행되어 1월 1일에 마치게 됩니다(17). 1년 전 바로 이날은 에스라가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위해 아하와 강가에 있았던 날입니다(스7:9; 8:15).

 

이방인 아내와 자녀들을 끊으라는 명령에 백성들은 대답합니다. 하지만 신중히 처리하기 위해 이를 맡아 처리할 방백을 세우고 정당한 재판을 거쳐서 결정하게 해달라고 제안합니다. 애매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게 하면서도 철저하게 이행하려고 제안한 듯합니다.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불과 4명에 불과하지만, 공동체 전체가 회개하고 죄를 끊어도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온 반대였기에, 이것은 소신이 아니라 의와 거룩에 대한 완강한 저항입니다.

 

이방 여인과 결혼한 명단(18-43)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권자임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인으로 믿는 자는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이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를 드러내고 있는지를 지켜봐야 합니다. 공평과 정의를 구현하려면 리더십의 의지와 공동체의 합의가 필요합니다.

 

18제사장의 무리 중에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자는 예수아 자손 중 요사닥의 아들과 그의 형제 마아세야와 엘리에셀과 야립과 그달랴라 19그들이 다 손을 잡아 맹세하여 그들의 아내를 내보내기로 하고 또 그 죄로 말미암아 숫양 한 마리를 속건제로 드렸으며 20또 임멜 자손 중에서는 하나니와 스바댜요 21하림 자손 중에서는 마아세야와 엘리야와 스마야와 여히엘과 웃시야요 22바스훌 자손 중에서는 엘료에내와 마아세야와 이스마엘과 느다넬과 요사밧과 엘라사였더라 23레위 사람 중에서는 요사밧과 시므이와 글라야라 하는 글리다와 브다히야와 유다와 엘리에셀이었더라 24노래하는 자 중에서는 엘리아십이요 문지기 중에서는 살룸과 델렘과 우리였더라 25이스라엘 중에서는 바로스 자손 중에서는 라먀와 잇시야와 말기야와 미야민과 엘르아살과 말기야와 브나야요 26엘람 자손 중에서는 맛다냐와 스가랴와 여히엘과 압디와 여레못과 엘리야요 27삿두 자손 중에서는 엘료에내와 엘리아십과 맛다냐와 여레못과 사밧과 아시사요 28베배 자손 중에서는 여호하난과 하나냐와 삽배와 아들래요 29바니 자손 중에서는 므술람과 말룩과 아다야와 야숩과 스알과 여레못이요 30바핫모압 자손 중에서는 앗나와 글랄과 브나야와 마아세야와 맛다냐와 브살렐과 빈누이와 므낫세요 31하림 자손 중에서는 엘리에셀과 잇시야와 말기야와 스마야와 시므온과 32베냐민과 말룩과 스마랴요 33하숨 자손 중에서는 맛드내와 맛닷다와 사밧과 엘리벨렛과 여레매와 므낫세와 시므이요 34바니 자손 중에서는 마아대와 아므람과 우엘과 35브나야와 베드야와 글루히와 36와냐와 므레못과 에랴십과 37맛다냐와 맛드내와 야아수와 38바니와 빈누이와 시므이와 39셀레먀와 나단과 아다야와 40막나드배와 사새와 사래와 41아사렐과 셀레먀와 스마랴와 42살룸과 아마랴와 요셉이요 43느보 자손 중에서는 여이엘과 맛디디야와 사밧과 스비내와 잇도와 요엘과 브나야더라(18-43)

 

이방 여인과 결혼한 사람들의 명단은 가장 먼저 제사장의 무리(18-22), 다음으로 레위인과 노래하는 사람들(23-24), 이어서 일반 백성들(25-44) 순으로 제시됩니다.

 

⑴제사장의 무리(18-22)

 

제사장 가운데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사람으로는 예수아 자손 중 요사닥의 아들과 그의 형제 마아세야, 엘리에셀, 야립, 그달랴입니다(18). 예수아 가문은 스룹바벨과 함께 성전 건축을 주도하기도 했는데(스 3:8), 대제사장 가문으로서 본이 되는 모습을 보이지 못하였습니다(레 21:13-15). 그렇지만 그들은 죄를 뉘우치고, 모두 이방 아내들을 내보내기로 맹세한 후에 숫양 한 마리를 속건제로 드립니다(19). 속건제는‘마알의 범죄’(여호와께 신실하지 못한 행동)에 드리는 제사로, 제물은 숫양으로 한정되어 있습니다(레 5:15-6:7). 이방 여인과 결혼하는 것을‘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한 행동’, 즉 언약을 어기는 행동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이들이 드린 속건제는 백성 전체의 잘못을 위해 드릴 것으로 보입니다. 대제사장 예수아 자손 외에 제사장 가운데 임멜 자손, 하림 자손, 바스홀 자손들도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20-22).

 

⑵ 레위인과 노래하는 사람들(23-24)

 

레위인 가운데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사람들은 요사밧, 시므이, 글리다, 브다히야, 유다, 엘리에셀입니다(23). 그 외에 노래하는 자 중에는 엘리아십, 문지기 중에는 살룸, 델렘, 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23).

 

⑶ 일반 백성들(25-44)

 

일반 백성들 가운데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사람들의 명단은‘이스라엘’이라는 명칭 아래 열 개의 가문으로 나뉘어 소개됩니다(25절의‘이스라엘’은 제사장과 레위인을 제외한 포로 귀환민을 가리킨다). 본문 읽기에 따라서 바니 자손과 느본 자손 사이에 빈누이 자손(38-39)과 자카이 자손(40)을 포함하여 열두 가문으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전체 인원은 제사장 17명(혹은 18명), 레위인 6명, 노래하는 자와 문지기 4명, 백성들86명, 도합 113명(혹은 114)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의 이름이 열거되는 것은 이방인과의 통혼 문제가 귀환 공동체에 얼마나 깊숙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들이 이방 여인과 결혼한 것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으로 보이는데, 그 땅에 살고 있던 이방인들이 귀환민들보다 부요한 삶을 누리고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비록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지만, 에스라의 개혁 안에 동의하고 이방인 아내와 이혼에 합의한 사람들입니다. 이미 살고 있는 가족과 결별하도록 하는 것은 지나친 결정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타락한 이방 문화와 우상숭배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던 상황에서 공동체의 정체성과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입니다.

 

맺는말(44)

교회는 재건과 개혁은 항상 같이 갑니다. 교회가 재건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지난번에 겪었던 시행착오를 되풀이하게 됩니다. 재건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재건된 공동체는 상대화 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개혁이라고 부릅니다.

 

44이상은 모두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자라 그 중에는 자녀를 낳은 여인도 있었더라(44)

 

이방 여인과 결혼한 사람들의 목록은 맺는말로 종결됩니다. 본문은 그들 가운데 자녀를 낳은 사람들도 있었음을 밝힙니다. 가족들과 헤어진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이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잘못된 신앙을 바로잡고자 하는 결단의 행동입니다. 그들은 부끄러운 과거와 결별합니다. 에스라가 내보낸 이방 여인들과 아이들은 아마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로써 앞에서(3) 선포되었던 계약은 성공적으로 종결되고, 에스라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 즉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을 마칩니다. 그렇지만 공동체를 바로 세우기 위한 에스라의 개혁은 멈추지 않고 이후에도 지속됩니다(느헤미야서 8-9장).

 

구약 성경에는 이방인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거나 이방 연인과 결혼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본문들도 존재합니다(예컨대, 민 12:1;수 2장; 요나서; 룻기). 특히 룻기는 다윗의 모압 여인을 조상으로 두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룻기는 이방 여인에 대한 에스라서의 입장과 대조됩니다. 룻기와 에스라서는 둘 다 언약 백성의 정체성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 여호와께 대한 충성에서 그 해답을 찾습니다. 그렇지만 두 책이 이방인을 수용하는 이슈와 관련하여 표현하는 방식은 상반됩니다. 에스라의 결정은 포로 귀환 후 새롭게 시작된 공동체가 주위 민족들의 영향으로 정체성의 위기를 경험하던 당시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평가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성경 안에 이방인에 대해 수용적인 태도를 보이는 본문들과의 적절한 균현 속에서 평가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순종은 공적으로 나타납니다. 인간적인 견지에서 본다면 심히 가슴 아픈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서는 이방여인과의 결별이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고 신앙을 회복하고 순결한 신앙의 보존을 위해서 아픔을 겪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성도는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신앙적으로 모든 오염시킬 수 있는 원인에의 접근을 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인에게 남아 있는 죄가 공동체에 악한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도록,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도 깊이 돌아보아 남김없이 제거합시다. 임마누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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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10-01)


이스라엘의 죄의 결과와 회개의 필요성

에스라서 10장 1-8절


 

성도들은 대부분 기도하면서 자신의 잘못된 삶을 돌이키며 회개합니다. 얼마 지나지 못해 제자리로 돌아가 있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말로 중얼거리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기도의 열매는 첫 열매는 바로 회개의 열매입니다.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회개는 하나님 생각과 다르거나 대치된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 안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 에스라의 기도에 대해 이제 백성들이 반응합니다. 지금까지 일부 지도자들이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으면는 공동체 전체가 에스라와 마음을 같이하여 회개 운동에 동참합니다. 이 일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대표적인 인물은 스가냐입니다. 그가 에스라에게 나아와 율법에 따라 이 문제를 처리할 것을 제안합니다. 머스크는 금식하며 증한 후에 백성들을 예루살렘에 불러 모읍니다.

 

에스라의 기도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1-8)

본문은 에스라의 기도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을 소개합니다. 9장에서 에스라의 회고록(Memoir)이 1인칭으로 기록된 것과 달리 본문은 3인칭으로 서술됩니다. 9장에서는 일부 지도자들만이 이방인들과의 통혼에 대해 문제의식이 있었던 반면(참조. 스 9:1-2), 이제부터는 백성들이 에스라와 마음을 같이하여 회개 운동에 동참합니다. 특별히 이 일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대표적인 인물은 스가냐였습니다. 에스라서 본문은 스가냐의 역할을 특별히 강조하는데, 이것은 9-10장 전체 단락이 그의 제안을 중심으로 짜여 있는 구성에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A. 타민족과의 결혼 문제(9:1-2)

  B. 에스라의 공개적 탄식(9:3-4)

   C. 에스라의 기도(9:5-10:1)

     X. 스가냐의 고백과 결단(10:2-4)

   C'. 에스라의 권면(10:5)

  B'. 에스라의 공개적 탄식 (10:6)

A'. 타민족과의 결혼 문제 해결 (10:7-44)

 

스가냐는 그 어떤 일보다 ‘율법을 지키는 것’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우선순위를 둔 인물로, 백성들의 범죄로 애통하고 있는 에스라에게 율법에 따라 이 문제를 처리할 것을 제안합니다. 스가냐의 제안을 받아들여 에스라는 제사장 여호하난의 방에 들어가 밤새 금식하며 중보기도를 한 후에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불러 모읍니다.

 

에스라의 애통과 스가냐의 제안(1-4)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진정으로 회개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첫걸음입니다. 개인의 죄가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을 인식하고, 함께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신앙의 결단은 단순한 감정에 그치지 않고, 실제 행동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이 진정한 회복과 성장으로 이어집니다.

 

1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2엘람 자손 중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아직도 소망이 있나니 3곧 내 주의 교훈을 따르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가르침을 따라 이 모든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4이는 당신이 주장할 일이니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하니라(1-4)

 

본문에서는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면이 묘사됩니다. 그는 이방 아내와 결혼한 백성의 범죄를 슬퍼하고 통곡하며, 백성도 그의 말에 감동하여 회개합니다. 마지막으로, 백성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결단하고 모여서 행동하기로 약속합니다.

 

(1) 에스라의 애통과 백성들의 동조(1)

 

에스라는 공개된 장소인 예루살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면서 백성들의 죄를 자복합니다. 하나님의 성전 앞은 예루살렘 성전 바깥뜰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소문을 들은 백성들은 남녀와 어린아이까지 성전 앞 바깥뜰에 모입니다. 이들은 귀환 후 시간이 흐르면서(약 80여년 동안) 느슨해진 자신들의 신앙을 재정비하기를 열망하였습니다. 결국 에스라가 했던 ‘설교-기도’(sermon-prayer)가 효력을 발한 것입니다. 지도자 한 사람의 회개가 불씨가 되어 순식간에 공동체 전체의 회개 운동으로 퍼져 나가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것은 이 회개 운동이 결코 강요된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에스라의 경건과 헌신이 그 어떤 메시지보다 설득력 있는 설교로 백성들에게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에스라는 행동으로 본을 보이는 지도자였습니다.

 

(2) 스가냐의 제안(2-4)

 

백성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불러일으킨 인물은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입니다(2). 스가냐는 엘람 자손으로 소개되는데, 엘람 자손은 1차 귀환에 속했던 가문이었습니다(참조. 스 2:7). 그 후 2차 귀환 때에는 엘람 자손 70명이 에스라와 함께합니다(스 8:7). 엘람 가문 중 6명의 사람들은 이방 여인과 결혼한 사람들로 소개되는데(스 10:26), 그중 한 사람의 이름이 스가냐의 부친 여히엘입니다(두 인물이 동일인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만약 동일인이라면, 스가나는 부친의 잘못까지도 지적한 것이 됩니다. 스가나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사적인 관계를 떠나 공동체 전체의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스가나는 공동체의 죄와 자신이 속한 가문의 죄를 자기의 죄로 동일시하면서 (2: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하여’), 에스라에게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2절에서 ‘'하나님께 범죄하다’로 번역한 ‘마알’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지 못한 행동을 가리킵니다. 즉, 자신들이 이방 여인과 통혼함으로 언약 백성으로서의 본분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스가냐는 어쩌면 지금 이 상황을 아간 한 사람의 죄(‘마알’)로 백성 전체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던 과거의 사건과 연관시키고 있는지 모릅니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한 제안은 율법에 따라 이방인 아내들을 다 내보내기로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는 것입니다(3: ‘내 주의 교훈을 따르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가르침을 따라 이 모든 아내와 그들의 소행을 다 내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스가냐가 의미하는 ‘내 주의 교훈’과 ‘하나님의 명령’은 아마 가나안 백성과 통혼하는 것을 금지하는 규정(출 23:32: 신 7:15)뿐만 아니라, 이혼에 대한 규정(신 24:1-4). 그리고 언약 체결에 관한 규정(신 29:10-13)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스가냐는 이방 민족과 통혼하는 것을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기는 행동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그가 에스라에게 ‘언약을 세울 것’을 제안하는 것이나 후에 에스라가 ‘백성들에게 맹세하게 하는 것’(5)은 이런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스가냐와 에스라의 생각은 일치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스가나는 에스라가 공동체의 개혁을 추진할 수 있도록 도운 훌륭한 조력자입니다(4b: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본문은 에스라의 개혁 운동이 스가냐와 같은 훌륭한 조력자들이 함께 함으로 가능하게 되었음을 강조합니다.

 

백성들의 맹세와 에스라의 공적인 선포(5-8)

믿음은 행동으로 나타나야 하며, 실천을 통해 진정한 변화를 이끌어내야 합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 신속하게 결단하고 행동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지도자는 공동체의 문제를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방향을 제시해야 합니다. 공동체가 하나 되어 각자의 역할을 다하며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5○이에 에스라가 일어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에게 이 말대로 행하기를 맹세하게 하매 무리가 맹세하는지라 6이에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서 일어나 엘리아십의 아들 여호하난의 방으로 들어가니라 그가 들어가서 사로잡혔던 자들의 죄를 근심하여 음식도 먹지 아니하며 물도 마시지 아니하더니 7유다와 예루살렘에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들에게 공포하기를 너희는 예루살렘으로 모이라 8누구든지 방백들과 장로들의 훈시를 따라 삼일 내에 오지 아니하면 그의 재산을 적몰하고 사로잡혔던 자의 모임에서 쫓아내리라 하매(5-8)

 

본문에서는 에스라가 백성에게 이방 아내와의 결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이도록 지시합니다. 백성은 이 문제를 신속히 해결하기로 결의하고, 각 지역의 지도자들에게 이 결정을 알립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사람이 모여 이 결단을 실행하기 위한 절차를 정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1) 백성들의 맹세(5)

 

에스라는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생각한 바를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깁니다. 먼저 지도자들의 지원과 백성들의 동의를 얻어 언약을 새롭게 하도록 합니다(5). 5절의 ‘맹세’는 언약의 내용을 확고히 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스가냐와 동일하게 에스라도 이방인과의 통혼을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위협하는 심각한 죄로 간주한 것입니다. 스가냐와 에스라가 공히 백성들의 죄를 하나님께 신실치 못한 행동'을 가리키는 ‘마알’로 표현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2,6,10).

 

(2) 에스라의 금식(6)

 

이어서 에스라는 엘리아십의 아들 여호하난의 방으로 들어가서 홀로 금식하며 중보기도를 드립니다(6). 여호하난을 느헤미야 12:23의 요하난과 동일 인물로 본다면, 그는 대제사장의 아들 혹은 손자입니다(참조, 느 3:1:12:10-11).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는 여러 개의 방들이 있었고, 그중 일부는 제사장들의 공간이었습니다. 백성들의 죄를 대신해서 금식하며 중보하는 에스라의 모습은 위기에 빠진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기도했던 성경의 인물들을 연상케 합니다(출 32:9-14; 렘 14:7-9: 겔 22:30; 암 7:1-6; 롬 9:3).

 

(3) 에스라의 공적인 선포(7-8)

 

에스라는 모든 귀환자들(‘사로 잡혔던 자들의 자손들’)에게 3일 내에 예루살렘으로 모일 것을 명령하고, 이를 어길 경우 그 사람의 재산을 몰수하고 귀환 공동체에서 축출할 것을 경고합니다(8). 이로써 에스라를 중심으로 이스라엘 총회가 소집됩니다. ‘모임을 소집하고 재산을 몰수하고 공동체로부터 추방할 수 있는 권한’은 에스라가 페르시아 왕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입니다(참조, 스 7:26). 에스라는 왕의 위임을 받은 페르시아 관료로서 자신이 갖고 있던 법적 권위를 적절하게 활용하고 있습니다(참조. 스 7:26). 8b절에서 ‘적하다’로 번역된 ‘하람’은 신명기에서 자주 등장합니다(신 7장: 20:16). 동사 ‘하람’은 거룩한 전쟁 문맥에서 전리품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을 가리키는데, 명사 ‘헤렘’으로 사용될 때는 ‘지극히 거룩한 것’ 혹은 ‘진멸할 물건’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여호수아서의 아간 이야기에서 ‘훔친 물건’을 가리킵니다(참조, 수 7장) 아간은 ‘진멸할 물건’을 취함으로써 스스로 진멸의 대상이 됩니다. 에스라가 특히 ‘하람’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아간의 경우를 염두에 둔 것 같습니다. 8b절의 ‘사로잡혔던 자의 모임에서 쫓아내리라’는 직역하면 ‘그는 골라의 회중으로부터 분리될 것이다’의 뜻입니다. 즉, 공동체로부터의 추방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골라’는 회복된 이스라엘을 가리키며 ‘골라’ 공동체로부터의 분리는 언약 백성으로서의 자격 상실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에스라가 보여준 회개의 자세와 공동체의 결단에서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회복의 시작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 개인의 잘못이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을 인식하고, 함께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셋째, 신앙의 결단은 감정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행동으로 이어져야 진정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교훈을 마음에 새기고, 각자의 자리에서 믿음을 실천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이루어가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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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09-02)


이스라엘을 향한 회개기도

에스라 9장 9-15절


‘유구무언(有口無言)’은 변명할 말이 없을 정도로 염치가 없음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잊고 불순종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의 잘못을 변명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 본문은 6절부터 계속되는 에스라의 기도입니다. 에스라의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품, 즉 긍휼하심과 의로우심에 의지합니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성품에 근거하여 다시 한 번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실 것을 간구합니다. 기도 가운데 등장하는 출애굽 모티브는 포로지에서의 귀환을 모세 시대에 있었던 출애굽 사건의 재현으로 보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회고(9)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신뢰하라는 교훈을 줍니다. 또한, 공동체의 회복과 정체성을 찾는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 구절은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며 믿음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결국, 신앙 공동체의 유대와 회복이 필요함을 일깨워줍니다.

 

9우리가 비록 노예가 되었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그 종살이하는 중에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바사 왕들 앞에서 우리가 불쌍히 여김을 입고 소생하여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게 하시며 그 무너진 것을 수리하게 하시며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울타리를 주셨나이다(9)

 

본문은 에스라 회고록(Ezra's Memoir)의 종결 부분으로 에스라가 드린 기도입니다(에스라의 기도는 6절부터 계속). 에스라의 기도는 네 가지 내용으로 구성됩니다. 첫째, 공동체와의 연합(solidarity)입니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공동체와 자신의 죄를 동일시합니다(참조, 출 34장의 모세). 둘째, 죄에 대한 고백(confession)입니다. 에스라는 기도를 통해 과거 이스라엘의 죄뿐만 아니라 현재 귀환 공동체의 죄를 낱낱이 고백합니다. 셋째, 변화를 추구하는 결단(readiness to change)입니다. 에스라는 귀환 공동체에게 죄에 대한 회개와 더불어 미래를 향한 결단을 촉구합니다. 넷째,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확실한 믿음(faith in God'smercy)입니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의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하여 다시 한 번 주의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실 것을 간구합니다. 에스라의 기도는 공동체의 지도자가 따라야 할 하나의 모델입니다.

에스라는 지금까지 이스라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돌아봅니다(‘우리 하나님이…버려두지 아니하시고…소생하여…성전을 세우게 하시며…수리하게 하시며…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울타리를 주셨나이다’). 9b절에서 ‘울타리’로 번역한 ‘가데르’의 의미에 대해 주석가들은 세 가지로 해석합니다. 첫째, 예루살렘 성벽으로 보는 것입니다. 일부 주석가들은 이에 근거하여 에스라서의 활동 연대를 느헤미야보다 늦은 것으로 봅니다. 그렇지만 단순히 예루살렘의 울타리가 아닌 ‘유다와 예루살렘의 울타리’라고 하고 있어 예루살렘 성벽일 가능성은 낮습니다. 둘째, 구약성경의 용레어 근거해서 성벽의 울타리가 아니라 유다와 예루살렘 주위에 있는 포도원 울타리로 보는 것입니다(참조. 사 5:1-7; 시 80:12). 이것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셋째, 비유적인 의미로 페르시아 당국의 보호를 의미합니다.

 

문맥상 세 번째 해석이 가장 적절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페르시아 왕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귀환민들을 안전하게 보호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들’은 숱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포로에서 안전하게 귀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페르시아 왕들(고레스, 다리오. 아닥사스다)의 지원으로 그들은 기적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게 되었고, 대적들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인데, 백성들이 그만 이러한 은혜를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근본적인 문제는 항상 여기서부터 출발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백성들의 죄(10-14)

우리가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르며 살아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또한,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깊이 고민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는 것이 중요하며, 하나님은 항상 용서하실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알려줍니다. 마지막으로, 개인의 죄가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을 인식하고 함께 회복을 위해 노력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10우리 하나님이여 이렇게 하신 후에도 우리가 주의 계명을 저버렸사오니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11전에 주께서 주의 종 선지자들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얻으려 하는 땅은 더러운 땅이니 이는 이방 백성들이 더럽고 가증한 일을 행하여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그 더러움으로 채웠음이라 12그런즉 너희 여자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지 말고 그들의 딸들을 너희 아들들을 위하여 데려오지 말며 그들을 위하여 평화와 행복을 영원히 구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왕성하여 그 땅의 아름다운 것을 먹으며 그 땅을 자손에게 물려 주어 영원한 유산으로 물려 주게 되리라 하셨나이다 13우리의 악한 행실과 큰 죄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당하였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 죄악보다 형벌을 가볍게 하시고 이만큼 백성을 남겨 주셨사오니 14우리가 어찌 다시 주의 계명을 거역하고 이 가증한 백성들과 통혼하오리이까 그리하면 주께서 어찌 우리를 멸하시고 남아 피할 자가 없도록 진노하시지 아니하시리이까(10-14)

 

에스라는 현재 귀환 공동체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요약한 후에 곧바로 현 세대의 신실하지 못함을 언급합니다. 에스라는 이러한 대조를 통해 백성들의 배은 망덕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에스라는 먼저 이스라엘이 반복적인 범죄로 인해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자격이 없음을 고백합니다(10). 여기서 에스라는 이방 민족들과의 통혼을 울법 규정을 어긴 것으로 간주합니다. 이는 가나안 족속과의 통혼을 금지하는 신명기의 율법규정(7:1-4)을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에스라는 이어서 ‘하나님의 종 선지자들’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방 족속과의 통혼 문제를 구체적으로 지적합니다(11). ‘하나님의 종 선지자들’은 모세를 비롯하여 구약의 예언자들을 가리킵니다. 11절의 내용은 오경과 선지서 말씀의 광범위한 인용입니다(참조. 신 7:1; 레 20:21; 겔 7:19-20; 왕하 16:3; 21:2 등).

 

구약성경에 의하면, 이방 민족들이 거주하는 땅은 더러운(부정한) 땅이며, 그들의 행실은 가증한 행실입니다. ‘더러운’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니다’는 주로 제의적 불결과 그로 인한 오염을 가리키는데(레 20:21; 젤 7:19-20). 일반적인 용어 ‘타메’보다 강렬한 의미를 나타냅니다. ‘가증하다’로 번역한 ‘토예바’는 이방 백성의 우상숭배나 타락한 문화(특히 성적인 타락)와 관련하여 자주 사용됩니다(레 18:22-30; 20:23; 신 13:14;22:5). 에스라에 의하면, 가나안의 족속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에스라는 이러한 용어들을 사용하여 이방 민족과의 통혼 때문에 임하게 될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합니다. 요컨대, 거룩한 백성으로서 귀환민들은 철저하게 부정한 것과 행실을 멀리해야 합니다(참조, 2절).

 

에스라는 구체적인 죄에 대한 지적에 이어 미래를 위한 귀환민들의 결단을 촉구합니다(12a: ‘그런즉’), 진정한 회개는 행동의 변화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에스라가 촉구하는 결단은 두 가지입니다. 곧 이방 민족들과의 통혼을 금하는 것과 그들을 위해 평화와 좋복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12). ‘그들을 위해 평화의 행복을 구하지 말라’는 표현은 암몬과 모압 사람들을 향한 신명기의 저주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보입니다(신 23:6). 에스라는 이어서 율법 규정(통혼 금지)을 지킴으로써 주어지게 될 축복을 약속합니다(12b). 12절의 내용도 11절과 같이 구약성경 여기저기에서 광범위하게 인용한 것들입니다(참조. 레 18:24-26;20:22; 신 7:3; 11:8-9; 왕하 16:3; 21:2; 겔 37:25: 말 2:10-16). 에스라의 구약성경 인용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문성을 보여줍니다. 에스라는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받게 될 축복을 강조하면서, 문제 해결에 있어 귀환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려 합니다.

 

에스라의 기도에 나타난 설교적 어조는 13-14절에서 가장 강하게 나타납니다. 에스라는 먼저 귀환 공동체가 예루살렘에 정착하게 된 과정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합니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의 악한 행실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남겨주셨다고 고백합니다(13). 여기서 ‘남겨주셨다’는 표현은 8절의 ‘남은 자’(골라)를 염두에 둔 말입니다. 에스라는 회복된 이스라엘로서 남은 자들에게 이방 민족들로부터 유다 공동체를 거룩하게 구별할 책임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에스라는 그들이 만약 이 책임을 완수하지 못한다면, 또다시 하나님의 진노가 모두에게 임하게 될 것을 경고합니다(14). 그러면서 에스라는 ‘남은 자’인 귀환 공동체가 그 땅의 이방 민족들과 통혼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율법에 근거해서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그들은 가증한 민족(암메 하토에봇)으로 그들과 통혼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명령)을 거역하는 일입니다(참조, 신 7:1-5). 하나님의 은혜는 이스라엘에게 그에 따른 반응(책임)을 요구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맡김(15)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는 현대인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공정하고 의로운 심판을 하시는 분임을 인식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또한, 저지른 잘못을 인식하고 회개하는 것이 중요하며, 변화의 가능성을 믿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비록 우리의 죄가 크더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하나님의 정의를 기억하며 올바른 삶을 살도록 격려합니다.

 

15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니 우리가 남아 피한 것이 오늘날과 같사옵거늘 도리어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이로 말미암아 주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 하니라(15)

 

에스라는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공동체의 문제를 맡깁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에스라는 먼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니’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에스라의 찬양에서 정점을 이룹니다. 에스라의 고백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 변론적인 의미입니다. 설령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다시 멸망시킨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개입에 대한 기대를 나타낸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때로 그의 백성을 향한 구원의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누가 설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라는 지금까지 보여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하여 다시 한번 자비를 내리실 것을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15절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다시 용서해 주실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렇지만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 주님은 너그러우셔서 우리를 이렇게 살아남게 하셨습니다. 진정, 우리는 우리의 허물을 주께 자백합니다. 우리 가운데서, 어느 누구도 감히 주님 앞에 나설 수 없습니다’(새번역).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정의, 그리고 회개의 중요성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신뢰하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또한, 우리는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깊이 고민하며,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함을 상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시며, 우리의 죄가 크더라도 그 은혜가 더 크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신뢰와 회개를 통해 올바른 삶을 살아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회복시키실 것임을 믿고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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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09-01)


타락한 성도들을 위한 중보기도

에스라 9장 1-8절


 

‘배은망덕(背恩忘德)’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에게 받은 은덕을 저버리는 것이며 감사를 모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의미로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받은 것을 잊어버리고, 반대로 은혜를 끼친 사람에게 해를 미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죄악은 배신입니다. 의리를 저버리고,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은 인간의 도리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하나님께 은혜 대해 배은망덕할 때가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으로 귀환 후에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배은망덕한 행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 본문은 에스라의 회고록의 종결 부분으로 공동체 내의 범죄(이방인들과의 통혼)를 다룹니다. 에스라가 경험한 잡혼의 문제는 포로 후기 이스라엘 공동체가 경험한 정체성의 위기를 반영합니다. 새롭게 시작한 귀환 공동체는 구별된 백성으로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에스더 9-10장 개관

에스라서 9-10장은 다음과 같은 문장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그것을 살피고 본문 강해로 들어가야 하겠습니다. 에스라를 통한 공동체의 개혁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개혁의 내용은 정체성 확립과 율법 중심의 삶입니다. 전체 단락은 문제의 시작(9:1-2)으로 시작해서 문제의 해결(10:7-44)로 끝났습니다. 스가냐의 고백과 결단(10:2-4)을 중심으로 교차대칭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A.타 민족과의 결혼 문제(9:1-2)

  B.에스라의 공개적 탄식(9:3-4)

    C.에스라의 기도(9:5-10:1)

      X.스가냐의 고백과 결단(10:2-4)

    C′.에스라의 권면(10:5)

  B′.에스라의 공개적 탄식(10:6)

A′.타민족과의 결혼 문제 해결(10:7-44)

 

잡혼의 문제는 포로 후기 이스라엘 공동체가 경험한 정체성의 위기를 반영합니다. 에스라는 이들의 행동을‘마알(לעמ)’의 범죄로 규정하는데, ‘마알’이라는 용어는 9-10장 전체 단락에서 다섯 번이나 등장합니다(9:2, 4;10:2,6,10). ‘마알’은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한 행동 혹은 언약적인 범죄로, 이것은 에스라가 이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여겼는지를 보여줍니다.

 

잡혼 문제에 관한 방백들의 보고(1-2)

‘악어의 눈물’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겉으로는 눈물을 흘리면서 속으로는 자기 이익을 챙기는 사람, 즉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가리킬 때 자주 사용됩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으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지도자부터 삶에 있어 본이 될 수 없는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1이 일 후에 방백들이 내게 나아와 이르되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들과 헷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과 여부스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모압 가람들과 애굽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2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1-2)

 

공동체 내의 문제, 즉 이방인들과의 통혼의 주제를 다루는 9장은 ‘이 일 후에’라고 시작합니다. 이 표현은 에스라서 내에서 새로운 단락을 알리는 표지 기능도 합니다. 이것은 9장의 이야기가 앞 장의 사건과 얼마간 시간적 간격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전후 문맥을 고려해 볼 때(참조. 스 7:9; 10:9), 바벨론에서 예루살렘 귀환 후 약 4개월이 지난 시점으로 보입니다.

에스라는 방백들로부터 이스라엘 백성과‘그 땅의 백성들’사이의 이방 여인들과 통혼에 관한 놀라운 보고를 듣습니다(la). 그리고 에스라를 더욱 안타깝게 한 사실은 정결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도해야할 지도자들이 이 일에 오히려 앞장섰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1절과 2절의 ‘그 땅들의 백성들’은 가나안 땅뿐만 아니라 이방 지역의 백성들까지 포함합니다. 방백들이 보고하는 ‘그 땅의 백성들’은 가나안 사람들, 헷 사람들, 브리스 사람들, 여부스 사람들, 암몬 사람들, 모압 사람들, 애굽 사람들, 아모리 사람들 등입니다(1b).

그런데 문제는 이 족속들 가운데 상당수가 에스라 시대에 더 이상 그 땅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이 가나안 족속들을 언급하는 이유는 이 사건을 신명기 율법과 연관시키기 위함입니다. 이방 사람과의 혼인을 금하는 것은 특히 신명기 율법에 강하게 나타나 있습니다(신 7:1-5; 23:3-7). 신명기 율법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이방 사람(특히 가나안 족속)과의 통혼을 강하게 금지합니다.

에스라는 지금 귀환 공동체가 직면한 상황이 모세 시대 가나안 땅 정복을 앞둔 상황과 유사하다고 봅니다. 에스라가 공동체 내 이방인들과의 통혼에 이토록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과거 역사의 아픔, 즉 이방인들과의 결혼으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와 관계됩니다. 특히 1절에서 애굽 사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솔로몬의 잘못된 결혼 정책을 염두에 둔 것 같습니다(왕상 11:1). 이방인들과의 통혼을 금하는 결정적인 근거는 귀환민들의 정체성(‘거룩한 자손’)과 관련됩니다(2). 이것은 에스라와 방백들이 예루살렘 공동체를 회복된 이스라엘로 이해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출 19:6; 신 14:2,19). 거룩한 백성인 귀환 공동체가 부정한 이방 족속과의 통혼으로 정체성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진리의 말씀을 조금씩 양보하고 타협할 때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맛 잃은 소금이 되고 맙니다. 그러기에 깨어 근신하지 않으면 우는 사자처럼 교회를 삼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마귀의 궤계를 이길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항상 깨어서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에스라의 반응과 기도(3-5)

성도란 바로 다른 사람들의 잘못과 부끄러움을 비난하고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 잘못을 자신의 잘못과 아픔으로 여기고 하나님께 중보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타인의 잘못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먼저 자신들의 죄를 하나님 앞에 자복합니다. 하나님 앞에 할 말이 없음을 인정합니다.

 

3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 4이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가 사로잡혔던 이 사람들의 죄 때문에 다 내게로 모여오더라 내가 저녁 제사 드릴 때까지 기가 막혀 앉았더니 5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 을 찢은 채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3-5)

 

세상이 완악해지고, 이기적이고, 믿음보다 욕심이 가득해지는 세상 가운데 살아갑니다. 에스라의 안타까운 마음처럼 방백과 고관들처럼 자신의 편함과 안위, 탐욕만을 생각하며 나아가고 있는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⑴ 에스라의 반응(3-4)

 

이 보고를 들은 에스라는 옷을 찢고 머리카락을 뜯는 반응을 보입니다(3). ‘옷을 찢는 행동’은 애통함의 표시고, ‘머리카락과 수염을 뜯는 것’은 극도의 진노를 표현하는 행동입니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의 범죄로 말미암아 한동안 기가 막혀 앉아 있게 된다(3b). 에스라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과거 선조들이 이방 사람(특히 가나안 백성)과 통혼하여 배교의 자리에 나아가게 되었고, 결국 그로 인해 나라가 멸망하고 포로로 끌려 가셨던 역사적 사실 때문입니다(7). 어렵게 다시 돌아온 백성들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이전과 동일한 죄악을 저지르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앞으로 그들에게 임할 것은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에스라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떠는 사람들’입니다(4a).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떠는 사람들’은 포로기를 거치면서 율법을 엄격하게 준수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참조. 10:3;사66:2, 5).

 

⑵ 에스라의 기도(5)

 

에스라는 저녁 제사드릴 때(오후3시)까지 옷을 찢은 상태로 앉아 있다가 무릎을 꿇고 손을 들어 기도합니다(5). 무릎을 꿇는 것은 겸손과 간절함의 자세이고, ‘손을 드는 것’은 탄원과 중보의 자세입니다.

 

에스라의 기도 내용(6-7)

진리가 왜곡되고 믿음이 흔들리는 이 시대 가운데서도 세상에 더럽혀지지 않는 순결한 신부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더욱 무너져가는 공동체와 나라 그리고 민족을 위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사람이 될 때,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통해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6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7우리 조상들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의 죄가 심하매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우리 왕들과 우리 제사장들을 여러 나라 왕들의 손에 넘기사 칼에 죽으며 사로잡히며 노략을 당하며 얼굴을 부끄럽게 하심이 오늘날과 같으니이다(6-7)

 

6절부터는 에스라의 기도 내용입니다.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따라야 할 기도의 전형인 에스라의 기도는 죄의 고백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자비에 호소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성경의 다른 기도와 비교할 때, 에스라의 기도는 두 가지 면에서 독특한 면을 지닙니다. 첫째, 그의 기도는 내러티브(Narrative)양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둘째,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백성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즉, 백성들이 듣고 회개하도록 하는 설교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유형의 기도를‘설교-기도’(sermon-prayer)라고 부릅니다. 에스라는 이‘설교-기도’를 통해 듣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려 합니다. 에스라는 먼저 백성들의 죄를 고백합니다(6-7).

여기에서 에스라는 반복적으로 ‘우리’ 혹은 ‘우리의 죄’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백성들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우리’라는 표현에서 백성들의 죄에 대한 책임을 느끼는 지도자 에스라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에스라는 예루살렘에 온 지 4개월밖에 되지 않았고 실제로 이들의 잘못과 무관합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스스로를 공동체와 결속시키고 공동체의 잘못을 자신의 책임으로 인정합니다. 이 모습은 광야 시대 모세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참조, 출 34장). 에스라는 기도 가운데 백성들의 죄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던 역사적인 사건들을 나열합니다(7:‘왕들의 손에 넘기며’, ‘칼에 죽으며’, ‘사로잡히며’, ‘노략을 당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회고함(8)

일상에서 죄를 가볍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를 조금도 헤아리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베푸신 은혜를 깊이 묵상함으로 반복되는 일상적인 죄를 단호하게 끊어버립시다.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실 때에 그 은혜에 감사하며 과거의 죄악을 반복하지 않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8이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잠시 동안 은혜를 베푸사 얼마를 남겨 두어 피하게 하신 우리를 그 거룩한 처소에 박힌 못과 같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이 우리 눈을 밝히사 우리가 종노릇하는 중에서 조금 소생하게 하셨나이다(8)

 

죄의 고백에 이어 에스라는 지금까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돌아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이스라엘 가운데 ‘얼마’를 남겨두어 생존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 ‘얼마’는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귀환민들에게 성전의 회복을 허락하시고 안정된 공동체를 만들 수 있게 하셨습니다(‘거룩한 처소에 박힌 못과 같게 하시고’). 그리고 그들의 눈을 밝게 하시고, 생기를 회복해 주셨습니다. ‘눈을 밝게 하셨다’는 것은 암흑과 같은 포로 상태로부터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를 남겨두셔서 그들이 80년전 고레스 칙령으로 큰 꿈을 안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1차 귀환자들은 벅찬 감격과 새로운 다짐으로 초막절을 지키고 성전을 재건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마음이 점차 무뎌지고 주위 문화와 종교로부터 영향을 받게 되고, 이에 따라 정체성의 위기를 맞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제시된 문제는 단순히 결혼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관련된 문제인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에스라는 ‘거룩한 백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합니다. 그러나 이방인과의 통혼에 대한 에스라의 격한 반응은 당시 공동체가 처했던 특별한 상황 속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속한 신앙 공동체를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우리고 있습니까?특히 지도자는 세속적인 문화나 가르침을 교회 안으로 가지고 들어와서 교회의 수적 성장만 이루려는 해서는 안 됩니다. 에스라의 기도는 자신의 책임을 통감하고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합당하게 살고 싶어서 수고하는 모습을 봅니다. 오늘 성도들의 노력과, 특별히 간절한 기도와 은혜를 경험하는 말씀이 성도들을 지켜주는 능력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과 혼합된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구절은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줍니다. 또한, 과거의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희망을 잃지 말라는 교훈을 줍니다. 마지막으로, 진정한 회개는 개인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데서 시작됨을 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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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08-02)


예루살렘까지 안전한 도착과 감사의 제사

에스라 8장 21-36절


 

이 세상은 사건과 사고로 가득 차 있어 5분 후의 일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보호와 도우심만이 평탄한 길을 걸을 수 있게 합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하루나 한 해에 진정으로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에스라처럼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우연이나 시기의 일치로 돌리지 않고, 짧은 순간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주목합니다.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셨다는 신앙고백을 통해, 감사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에스라는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평탄한 길을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예루살렘까지의 길은 머나먼 여정일 뿐만 아니라 도적들이 도사리고 있는 위험한 길입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도우심만 의지합니다. 에스라와 일행은 약4개월 동안의 여정을 마친 후,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립니다.

 

출발하기 전에 준비 사역(21-30)

오늘 우리의 기도는 죽은 말의 잔치가 아닌지 성찰해봐야 합니다. 종교적인 형식이 되어버린 기도의 언어를 다시 살아있는 언어로 회복해야 합니다. 참된 기도야말로 생명의 실타래를 엮으려고 죽음과 허무에 대항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세상의 실상을 하나님 앞에 확실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21그 때에 내가 아하와 강 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22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음이라 23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우리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그의 응낙하심을 입었느니라 24그 때에 내가 제사장의 우두머리들 중 열두 명 곧 세레뱌와 하사뱌와 그의 형제 열 명을 따로 세우고 25그들에게 왕과 모사들과 방백들과 또 그 곳에 있는 이스라엘 무리가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드린 은과 금과 그릇들을 달아서 주었으니 26내가 달아서 그들 손에 준 것은 은이 육백오십 달란트요 은 그릇이 백 달란트요 금이 백 달란트며 27또 금잔이 스무 개라 그 무게는 천 다릭이요 또 아름답고 빛나 금 같이 보배로운 놋 그릇이 두 개라 28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호와께 거룩한 자요 이 그릇들도 거룩하고 그 은과 금은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즐거이 드린 예물이니 29너희는 예루살렘 여호와의 성전 골방에 이르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의 족장들 앞에서 이 그릇을 달기까지 삼가 지키라 30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은과 금과 그릇을 예루살렘 우리 하나님의 성전으로 가져가려 하여 그 무게대로 받으니라(21-30)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 계획에 자신이 참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없다면 두려움과 이기심에 빠지게 됩니다. 에스라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사역을 하나님 중심으로 이루어 나가길 원했습니다.

 

⑴ 예루살렘 여행을 위한 영적인 준비(21-23)

 

본문은 귀환자들의 소집을 마친 에스라가 예루살렘 여행을 준비하는 내용입니다. 에스라는 제2차 귀향자들과 함께 아하와 강가에서 모든 출발 준비를 마치고 이제 5-6개월의 기간이 소요되는 긴 여정의 대장정에 돌입하게 됩니다. 이 길고 긴 여정에서 가장 염려스러운 것은 두 가지 인데 하나는 일행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 성전에 바치려고 가져가는 은, 금, 각종 기명과 그릇들의 안전 운반입니다. 그래서 귀환민들의 소집을 완료한 후, 에스라는 여행을 시작하기에 전에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합니다(21a). 에스라와 그 일행은 하나님께 간구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예루살렘 여정을 위한 영적 준비를 합니다. 에스라와 그 일행은 출발에 앞서 금식하면서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인‘평탄한 길’을 간구합니다(21).

 

금식하는 일은 포로기 이후에 유대인 사이에서는 일상적인 풍습으로 자리 잡혀 있었습니다. 스가랴서를 보면, 4,5,7,10월에 정기적인 금식일이 있었습니다. 모세 5경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금식하는 날은 대속절 하루뿐이었습니다. 그 외에는 개인적이나 국가적인 위기적인 상황에서 금식을 했었습니다. 나라의 멸망을 경험하고 난 후에는 금식이 중요한 풍습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후에 유대교에서 금식은 빼내놓을 수 없는 경건의 한 축을 이루었습니다.

 

에스라는 예루살렘 여행을 준비하는데 가장 중요한 준비로 금식을 한비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까지는 먼 여정일 뿐만 아니라 도적들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안전한 여행을 위해 아닥사스다 왕에게 군대를 요청했다면 도움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만 의지하기로 결단합니다. 이는 느헤미야가 페르시아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경우와 비교됩니다(참조. 느 2:9).

 

에스라의 이러한 결단은 자신이 전에 아닥사스다 왕에게 했던 신앙고백인 ‘우리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는 모든 자들에게 선을 베푸실 것’(22a)을 입증하기 위함입니다. 본문은 ‘그의 응낙하심을 입었느니라’(23b)고 하나님께서는 에스라와 백성들의 금식기도에 응답하셨음을 밝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찾고 의지하는 사람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인생 여정을 잘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⑵ 예루살렘 여행을 위한 실제적인 준비(24-27)

 

여행을 위한 영적 준비에 이어 에스라는 실제적인 조취들을 취합니다. 에스라는 먼저 귀환하는 무리 가운데 24명의 지도자들을 세우고 성전의 기물들을 책임지게 합니다(24-30). 귀환 여정에서 중요한 것은 바벨론에서 가져온 은금과 성전 기물을 운반하는 책임을 맡깁니다. 에스라는 이 일을 위해 제사장의 우두머리들 12명, 그리고 세레뱌와 하사뱌와 그의 형제 10명을 세웁니다(24).

개역개정은 ‘제사장의 우두머리들 중 열두 명 곧 세레뱌와 하사뱌와 그의 형제 열 명’으로 번역하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세레뱌와 하사뱌는 앞에서 레위인들로 소개되었습니다(18-19). 따라서 본문은 제사장 지도자 그룹 12명과 더불어 레위인 12명(세레뱌와 하사뱌와 그의 형제10명)이 함께 세움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에스라는 성전의 기물을 운반하는 일에 제사장들 외에 레위인들이 참여하도록 세심한 주의를 하고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라가 이들에게 내린 조치는 오경의 율법에 근거한 것입니다. 성물 운반 규정에 의하면(민 4장),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함께 동역해야 합니다. 제사장은 성막의 기물을 관리하고, 레위인들은 그것을 운반하는 책임을 맡습니다. 이들이 운반하게 될 귀중품은 페르시아의 왕실과 바벨론에 남아 있는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에스라는 그것을 공식적으로 확인하고 넘겨줍니다. 그들이 운반하게 될 양은 은 650달란트(약 25Ton), 은그릇 100달란트(3,500kg), 금 100달란트(3,500kg), 금잔 20개(무게가1,000다릭), 놋그릇 2개입니다(25b-26). 이 모두를 값으로 환산하면 수백만 달러에 해당하는 액수입니다. 이는 이 일에 참여한 사람들의 특별한 헌신을 보여줍니다. 봉헌자들 가운데 이방인들(왕과 페르시아 관리들)도 포함되어 있는 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이방인들의 물품을 취한 것과 유사합니다(출애굽기11:2; 12:35-36),이러한 귀중품과 기명들은 앞으로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와 운영을 위해 사용될 것입니다.

 

⑶ 지도자들에게 한 에스라의 명령(28-30)

 

에스라는 기물들의 운반 책임자들에게 구체적인 지침을 하달하기 전에 그 일의 중요성을 알립니다(28). 거룩한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운반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성별된 사람들’로 그들이 맡은 은금과 기명들은 ‘조상들의 하나님께’드려진 예물입니다(28). ‘조상들의 하나님께 드린 예물’이라는 표현은 앞으로 드릴 제사와 포로 이전 예루살렘 제사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에스라가 기물들을 ‘하나님께 드려진 성물’이라고 강조한 배경에는 성전 기물에 대한 운반자들의 탐심을 경계하는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에스라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즉시 족장들이 보는 앞에서 기물들의 무게를 달도록 명령합니다(29). 이것은 그들이 맡은 일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로 에스라의 철저한 준비성을 잘 보여줍니다. 에스라의 명령에 지도자들은 순종으로 반응합니다(30).

 

예루살렘으로의 여정과 제사(31-36)

기도를 통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마쳤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능력과 주도권까지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이끄심을 전적으로 맡기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31첫째 달 십이 일에 우리가 아하와 강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갈새 우리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도우사 대적과 길에 매복한 자의 손에서 건지신지라 32이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거기서 삼 일 간 머물고 33제사일에 우리 하나님의 성전에서 은과 금과 그릇을 달아서 제사장 우리아의 아들 므레못의 손에 넘기니 비느하스의 아들 엘르아살과 레위 사람 예수아의 아들 요사밧과 빈누이의 아들 노아댜가 함께 있어 34모든 것을 다 세고 달아보고 그 무게의 총량을 그 때에 기록하였느니라 35사로잡혔던 자의 자손 곧 이방에서 돌아온 자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는데 이스라엘 전체를 위한 수송아지가 열두 마리요 또 숫양이 아흔여섯 마리요 어린 양이 일흔일곱 마리요 또 속죄제의 숫염소가 열두 마리니 모두 여호와께 드린 번제물이라 36무리가 또 왕의 조서를 왕의 총독들과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들에게 넘겨 주매 그들이 백성과 하나님의 성전을 도왔느니라(31-36)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도 응답을 받은 후의 신앙적인 자세도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인들 중에 기도 응답받은 후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잘 관리하지 못해서 오히려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⑴ 안전하게 보호해주신 하나님(31)

 

아하와 강을 출발하여 안전하게 예루살렘에 도착하는 장면은 하나님께서 에스라와 백성들의 금식기도에 어떻게 응답하셨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렇게 많은 금은과 성전 기물들을 호위병 없이 간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도적들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귀환하는 무리들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대적들과 도적들의 습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에스라와 그 일행은 첫째 달 12일에 아하와 강을 출발하여 예루살렘까지 40일간의 긴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31). 그들은 첫째 달1일에 바벨론에서 출발하여 5월1일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습니다(스 7:9). 아마도 이하와 강에서 금식하고 레위 사람들을 합류시키는 과정에서 12일이 소요된 것으로 보입니다(참조. 스 8:15-20), 예루살렘까지 긴 여행기간 동안 그들은 전혀 군사적인 지원을 받지 않았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저자는 예루살렘으로 여행한 과정에 대해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고 단지 ‘하나님의 손이 귀환하는 백성들을 도우셨다’고만 밝힙니다(31b). 하나님께서 여행기간 내내 ‘대적들과 길에 매복한 자들’의 위험으로부터 백성들을 지키신 것입니다.

에스라의 귀환민들은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그들은 무사히 안전하게 예루살렘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도적들의 손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안전하게 지켜 주셨습니다.

 

⑵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사역(32-34)

 

에스라는 드디어 40일의 여정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처음 3일간은 쉬는 시간을 갖습니다(32). 3일간의 휴식 이후 에스라는 산적한 일들을 처리하기 시작합니다(33-34). 그는 먼저 바벨론에서 가져온 기명들의 무게를 달아 운송을 맡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책임이 완수 되었는지를 확인한 후, 제사장 므레못에게 넘겨줍니다(33a). 제사장 엘르아살과 레위 사람 요사밧과 노아댜가 다시 한 번 확인한 후 목록들을 장부에 기록합니다(33b-34). 모든 일을 투명하게 처리하고자 하는 이들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⑶ 감사에 제사를 드린 귀환민들(35-36)

 

에스라와 함께 예루살렘에 돌아온 ‘사로 잡혔던 자의 자손’(에스라와 귀환민들)이 예루살렘에서 첫 번째 행한 일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35a). 그들은 여정에 함께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려했습니다. ‘사로잡혔던 자’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으로, 이들은 회복된 공동체의 중심입니다. 귀한민들이 하나님께 드린 예물은 이스라엘 전체를 위한 번제물로 수송아지 12마리, 숫양 96마리, 어린 양 77마리, 그리고 속죄제로 숫염소 12마리를 번제물과 속죄제물로 드렸습니다(35b). 제사 규례기에 의하면, 번제는 감사와 헌신의 의미, 속죄제는 정화와 속죄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들이 번제와 더불어 속죄제를 드린 이는 포로기에 범한 모든 죄와 부정을 깨끗케 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번제물 수송아지와 속죄제물 숫염소의 숫자 12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합니다. 귀환 공동체는 자신들을 회복된 이스라엘로 이해했습니다. 수송아지와 숫염소 외에 숫양 96(12×8마리, 어린 양 77마리가 제물로 사용되었습니다(35b). 77마리는 상징적으로 많은 수의 제물을 의미합니다(7은 완전수). 귀환 공동체는 예루살렘에서 제사를 드리며 지금까지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표하고 앞으로 있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구합니다. 에스라는 끝으로 왕에게서 받은 조서를 총독들에게 넘겨줍니다(36a). 칙령을 받은 페르시아 관리들은 곧바로 유다 백성과 하나님의 성전 일을 돕는다(36b). 지금까지 부정적이었던 페르시아 관리들이 유다 백성에게 우호적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21-36절에는 7장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제 2의 출애굽 모티브가 나옵니다. 에스라가 여행 전 하나님께 ‘평탄한 길’을 간구한 것은 이사야40:3의 예언을 상기시킵니다. 제2의 출애굽 모티브는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드리는 제물들의 양에도 나타납니다(수소 12마리,숫염소 12마리, 숫양 96[12×8]마리, 어린 양 72[12×6]마리), 반복되는 열둘이라는 숫자는 회복된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에스라서에 의하면, 회복된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사로잡혔던 자의 자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멀고 위험한 길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무사히 마치고,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새로운 성전에서 들리는 이 제사는 매우 특별했을 것이고 감사와 기쁨이 넘쳤을 것입니다. 에스라는 왕에게 호위부대를 요청하지 않고 기도로 예루살렘으로 왔지만3차 포로 귀환 때,느헤미야는 페르시야 군대의 호위를 받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처럼 꼭 위험을 자처하는 것만이 믿음은 아닙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지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에스라가 그랬던 것처럼 삶과 모습으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고 증명해야 합니다. 문제가 크고 어려울수록 더욱 힘써 기도함으로서 오히려 문제와 어려움을 통해 더 크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들어내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 의지하며 기도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합니다. 에스라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며 안전한 여정을 기원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 속에 헌신과 감사의 마음으로 나아갔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응답하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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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08-01)


재건에 참여한 2차 귀환자들

에스라 8장 1-20절


 

공동체 회복이 힘으로도 능으로도 되지 않고 오직 여호와의 영으로 됩니다.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는 일을 과연 이뤄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은 왜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 놀라운 역사입니다. 그걸 통해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역사를 준비하고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본문은 아닥사스다 왕 때 있었던 두 번째 귀한 행렬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을 소개합니다. 아하와 강가에서 에스라는 족장들을 보내 레위인과 성전의 일꾼들(레위인 40여 명, 느디님 사람 220명)을 불러 모아 무리에 합류시킵니다. 2차 귀환자들의 총수는 부녀자와 어린아이를 합쳐 약 5,000명 가량 입니다. 본문은 첫 번째와 동일하게 두 번째 귀환자들을 출애굽 행렬로 묘사합니다.

 

예루살렘에 귀환자의 명단(1-14)

하나님의 사역은 위험천만했고,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으리란 보장도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지고 불투명한 미래에 온 삶을 던지는 모험을 감행하면 하나님은 인도하십니다. 이방 땅에서의 안락한 삶보다 거룩한 공동체를 세우는 삶을 더 가치 있게 여겼기 살아가야 합니다. 이곳에 바벨론에서 귀환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순종하였습니다.

 

1아닥사스다 왕이 왕위에 있을 때에 나와 함께 바벨론에서 올라온 족장들과 그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2비느하스 자손 중에서는 게르솜이요 이다말 자손 중에서는 다니엘이요 다윗 자손 중에서는 핫두스요 3스가냐 자손 곧 바로스 자손 중에서는 스가랴니 그와 함께 족보에 기록된 남자가 백오십 명이요 4바핫모압 자손 중에서는 스라히야의 아들 엘여호에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이백 명이요 5스가냐 자손 중에서는 야하시엘의 아들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삼백 명이요 6아딘 자손 중에서는 요나단의 아들 에벳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오십 명이요 7엘람 자손 중에서는 아달리야의 아들 여사야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칠십 명이요 8스바댜 자손 중에서는 미가엘의 아들 스바댜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팔십 명이요 9요압 자손 중에서는 여히엘의 아들 오바댜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이백십팔 명이요 10슬로밋 자손 중에서는 요시뱌의 아들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백육십 명이요 11베배 자손 중에서는 베배의 아들 스가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이십팔 명이요 12아스갓 자손 중에서는 학가단의 아들 요하난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백십 명이요 13아도니감 자손 중에 나중된 자의 이름은 엘리벨렛과 여우엘과 스마야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육십 명이요 14비그왜 자손 중에서는 우대와 사붓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칠십 명이었느니라(1-14)

 

본문은 첫 번째와 동일하게 두 번째 귀환자들도 새출애굽을 한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출바벨론 사건은 제2의 출애굽 사건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첫 출애굽을 통해 첫 하나님 나라가 탄생했다면, 이제 두 번째 출애굽을 통해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가 탄생할 것입니다.

 

⑴ 계보의 서론(1)

 

아닥사스다 왕 때 있었던 두 번째 귀환 행렬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을 소개합니다. 두 번째 귀환이 이루어진 시점, 즉 아닥사스다 왕이 왕위에 있을 때는 구체적으로 주전 458년을 의미합니다. 이 때는 첫 번째 귀환이 이루어진 때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흐른 시점입니다. 에스라와 동행한 귀환민들은 바벨론에서 올라온 사람들로 표현됩니다(1b). ‘올라왔다’는 저자는 모세와 함께 애굽에서 올라온 출애굽 행렬의 모습을 환기하려 합니다(참조, 출 3:17). 돌아온 사람들은 크게 세 부류의 사람들로(1) 제사장(2a), (2) 왕족(2b) 그리고 (3) 일반 백성들(3-14)입니다.

 

⑵ 제사장과 다윗 왕조의 계보(2)

 

귀환자들의 계보는 제사장과 다윗의 후손(왕족)으로 시작합니다. 2장의 계보와 비교할 때, 왕족이나 일반 백성보다 제사장 계보를 앞세우고 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합니다. 이는 저자가 제사장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이 구절에 근거해 에스라가 직접 작성한 문서로 보기도 합니다. 제사장 가문은 비느하스 자손과 이다말 자손으로 구분되는데, 비느하스는 아론의 셋째 아들 엘르아살의 아들이고, 이다말은 아론의 넷째 아들입니다(출 6:25). 각각의 혈통에 속한 제사장으로는 게르솜과 다니엘이 등장합니다. 다윗 자손으로 소개되는 핫두스는 스룹바벨의 후손입니다(참조 대상 3:19-22).

 

⑶ 일반 백성들의 계보(3-14)

 

족장을 비롯한 일반 백성들의 계보가 제시됩니다. (1)바로스 자손(3), (2)바핫모압 자손(4), (3)스가냐 자손(5), (4) 아딘 자손(6), (5)엘람 자손(7), (6)스바댜 자손(8), (7)요압 자손(9), (8)슬로밋 자손(10), (9)베배 자손(11), (10)아스갓 자손(12), (11)아도니감 자손(13), (12)비그왜 자손 등입니다(14). 본문은 이들을 열두 지파로 이루어진 이상적인 이스라엘의 모습으로 제시합니다. 첫 번째로 소개되는 가문은 스가냐 자손 곧 바로스 자손입니다. 스가냐 자손의 총수는 족장 스가랴 외에 남자가 150명입니다(3). 스가냐 자손에 이어 바핫모압 자손은 엘여호에내 및 200명으로 소개됩니다(4).

5절의 스가냐는 3절의 스가냐와 동명이인입니다(칠십 인역은 자두 후손 스가냐), 스가냐 자손 중 야하시엘의 아들과 함께한 자들이 300명(5), 아딘 자손으로 에벳 및 50명(6), 엘람 자손으로 여사야 및 70명(7), 스바댜 자손으로 스바댜 및 80명(8), 요압 자손으로 오바댜 및 218명(9), 슬로밋 자손으로 요시뱌 및 160명(10), 베배 자손으로 스가랴 및 28명(11), 아스갓 자손으로 요하난 및 110명(12), 아도니감 자손으로 엘리벨렛, 여우엘, 스마야 및 60명(13), 비그왜 자손으로 우대, 사붓 및 70명(14)입니다. 이들은 회복된 이스라엘의 중심을 이룹니다. 이렇게 해서 제사장, 왕족, 일반 백성들 가운데 귀환한 사람들은 18명의 가족들의 우두머리를 포함하여 모두 1,514명이 됩니다.

1차 귀환민들의 명단을 보도하는 2장과 비교할 때, 요압을 제외한 모든 족장들의 이름이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2차 귀환민들의 대다수가 1차 귀환자들과 관계된 인물임을 의미합니다. 에스라에 등장하는 귀환 공동체의 명단들(스 2, 7, 8장)은 현재의 공동체를 과거 이스라엘과 연결하는 기능을 합니다(느헤미야 7장의 명단도 마찬가지). 즉 이러한 명단들은 포로기 이전의 공동체와 앞으로 회복될 공동체를 하나로 연결하면서 구속사의 연속성을 강조합니다.

에스라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사람들은 대략 5천명쯤 되었을 것입니다. 처음 귀환한 약 5만명에 비하면 매우 적은 수였습니다. 그러나 저자가 돌아온 사람들을 12족장들을 중심으로 기술한 것이나 이들이 대부분 1차 귀환자들 가문과 관련된다는 사실은, 비록 소수지만 아브라함처럼 안정된 갈대아 사람들의 땅을 떠나서 안정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온 헌신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야말로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의 결단이었습니다.

 

레위인과 성전 수종자들의 합류(15-20)

오늘날 하나님 나라와 교회는 자신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고,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길 원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복입니다.

 

15내가 무리를 아하와로 흐르는 강 가에 모으고 거기서 삼 일 동안 장막에 머물며 백성과 제사장들을 살핀즉 그 중에 레위 자손이 한 사람도 없는지라 16이에 모든 족장 곧 엘리에셀과 아리엘과 스마야와 엘라단과 야립과 엘라단과 나단과 스가랴와 므술람을 부르고 또 명철한 사람 요야립과 엘라단을 불러 17가시뱌 지방으로 보내어 그 곳 족장 잇도에게 나아가게 하고 잇도와 그의 형제 곧 가시뱌 지방에 사는 느디님 사람들에게 할 말을 일러 주고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섬길 자를 데리고 오라 하였더니 18우리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고 그들이 이스라엘의 손자 레위의 아들 말리의 자손 중에서 한 명철한 사람을 데려오고 또 세레뱌와 그의 아들들과 형제 십팔 명과 19하사뱌와 므라리 자손 중 여사야와 그의 형제와 그의 아들들 이십 명을 데려오고 20다윗과 방백들이 레위 사람들을 섬기라고 준 느디님 사람 중 성전 일꾼은 이백이십 명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지명 받은 이들이었더라(15-20)

 

하나님께서는 선한 일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을 항상 도우십니다. 레위인들을 데려가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에스라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게으른 눈은 불신과 불평을 만들지만, 순종하는 손발은 신뢰하는 마음을 만듭니다. 지금 하려는 일이 옳은 일이라면 먼저 실천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기다리시길 바랍니다.

 

⑴ 이하와 강가에 무리를 모음(15)

 

귀환자들의 명단을 소개한 후15절부터는 이후에 합류한 성전 종사자와 레위인들을 소개합니다. 에스라와 귀환 무리들이 바벨론을 출발하여 아하와로 흐르는 강가에 이르자 그곳에서 3일간 머물게 됩니다. 에스라는 이곳에서 일행을 점검하다가 행렬 가운데 레위인이 한 사람도 없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첫 번째 귀환 행렬에서도 레위인들의 숫자는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전체의1,5%정도;참조.스 2:40). 추측컨대 레위인들은 자신들에게 부과될 과중한 사역을 염려하여 귀환을 꺼렸던 것 같습니다. 오경의 규례에 의하면, 레위인들의 사역은 육체노동을 수반하는 힘든 일이었습니다(민 3:6-8; 4:49). 레위인들은 성막의 기물을 운반하며 성막을 지키는 일뿐 아니라 제사장을 도와 제사를 집례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참조, 민 18장). 게다가 그들은 성소의 일과 율법을 가르치는 일을 통해 공동체의 신앙을 유지하는 일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참조, 신 33:10). 귀환 공동체가 조상들의 신앙을 전수하고 지속적인 예배를 드리는 일에 레위인의 역할은 절대적이었습니다. 에스라는 예루살렘 공동체의 재건에 있어서 레위인들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들을 귀환 행렬에 합류시키려 한 것입니다.

 

⑵ 성전 봉사자와 레위인들을 합류시킴(16-20)

 

물론 귀환 자체도 의미가 있지만, 귀환의 목적이 완전한 예배와 율법을 따른 삶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레위인과 성전 일꾼들은 반드시 있어야 했습니다. 에스라는 이 사실을 조기에 발견하고 신속하게 조치함으로서 레위인들과 성전 일꾼들을 2차 귀환 명단에 포함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에스라는 학식이 있는 사람들을 불러 가시바 지방의 족장 잇도에게 보냅니다(17a). 잇도는 가시바 지방에 거주하는 레위인의 지도자였던 것 같습니다. 에스라는 잇도를 통해 예루살렘에서 봉사할 성전 종사자들을 불러 모으려 한 것입니다(17b). 에스라의 부탁을 받고 9명의 족장들을 포함한 11명의 사람들이 아하와 강가에서 가시뱌로 떠납니다. 가시뱌로 떠난 족장들은 엘리에셀, 아리엘, 스마야, 엘라단, 야립, 엘라단, 나단, 스가랴 므술람입니다(16). 특별히 에스라가 열한 명의 지도자를 보낸 것은 레위 지파가 없는 이스라엘의 열 한 지파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에스라는 귀환 행렬에 레위 지파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가시뱌 지방에 거주하는 레위인들에게도 이것을 알리려 한 것입니다. 가시뱌 지방은 바벨론 근교에 있는 유다인 집단 거주 지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지방은 포로민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렸던 곳이고, 레위 사람들도 이곳에 모여 살았던 것 같습니다.

에스라의 명령을 받은 11명의 지도자들은 가시뱌 지방으로 가서 세 가문의 레위인 39명, 즉 말리의 자손 중 ‘명철한 사람’ 1명(18a), 세레뱌 가문에 속한 레위인 18명(18b), 하사뱌 자손 중 여사야의 친지들 20명(19), 그리고 220명의 성전 수종자들(20)을 아하와 강가로 데려옵니다. 이들이 성전 종사자들을 모집한 일은 3일 만에 이루어졌는데(참조. 15;‘3일 동안…머물며’), 저자는 이 일의 배후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음을 밝힙니다(18a;‘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고’), 레위인을 포함한 성전 종사자들의 총수는 258명으로 여기에 앞서 계수된 제사장, 다윗 왕가 및 일반 백성들의 숫자 1,514명을 더하면 귀환자들의 총수는 1,772명입니다. 여자와 아이 들을 합하면 그 숫자는 약 5,000명쯤 될 것입니다. 이 숫자는 1차 귀환 때의 숫자인 49,897명에 비하면 1/10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비록 숫자적으로는 적지만, 이들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새롭게 재건하는 일에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할 인물들입니다. 이들은 안정적인 삶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입니다.

본문에 소개된 레위인을 포함한 귀환자들의 수는 적지만, 당시 유다와 예루살렘이 처한 어려운 형편을 고려할 때 이들 은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본문은 두 번째 귀환 행렬도 첫 번째와 동일하게 출애굽 행렬로 묘사합니다. 열두 지파를 연상케 하는 열두 자손의 이름과 별도로 레위인의 합류를 보도하는 내용도 민수기의 인구조사와 유사합니다(참조.민 3장). 특히 귀환 목적도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고자 한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본문은 에스라를 중심으로 한 남은 자들의 귀환을 1차 귀환과 마찬가지로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간주합니다(참조 사41:9;43:14-21;52:11-12).

교회도 성도들이 구경꾼에 머물거나 수동적으로만 참여하기보다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역할 수 있도록 설득해 주어야 합니다. 목회자 중심으로만 교회 활동이 진행되면 결코 건강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앞으로 영적 책임을 감당할 다음 세대들이 나올 수 있는 영적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에스라는 유다 백성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하나님께 의지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백성에게 하나님의 법을 가르치려는 결단을 합니다. 이 과정에서 에스라의 지도력과 신앙이 강조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의 중요성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에스라의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 의지하는 삶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습니다. 공동체가 하나님을 의지할 때 놀라운 일들이 이루어진다는 메시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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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07-02)


지상의 왕을 움직이신 하늘의 왕

에스라 7장 11-28절


 

1960년대 이스라엘과 아랍공화국과 6일 전쟁 당시 이스라엘군을 이끌던 모세 다얀 장군의 선언과 6일 전쟁에 관한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스라엘이 아랍 연합군에 맞서 승리한 배경에는 군사적 전략뿐만 아니라, 신앙과 정신적인 힘이 크게 작용했음을 보여줍니다. 시편 121편의 내용은 믿음과 희망을 강조하며,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건은 종교와 군사적 승리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더 궁금한 점이 있으신가요?

 

  • 아닥사스다 왕은 조서를 내려 에스라로 하여금 백성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것을 허락합니다. 그는 에스라에게 위임한 사명은 성전 담당자들에게 성전 운영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는 일과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에스라는 이 모든 일의 배후에 하나님의 손길이 작용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11)

세상적인 입장에서 ‘권위’를 느껴지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때로는 삶 속에서의 고통이라고 하는 연단이라고 하는 것을 건너도록 하십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는 하나님의 율례를 배우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 하나님을 찬송함에 이르게 됩니다.

 

11여호와의 계명의 말씀과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례 학자요 학자 겸 제사장인 에스라에게 아닥사스다 왕이 내린 조서의 초본은 아래와 같으니라(11)

 

본 절에서는 아닥사스다 왕이 내린 조서(12-26)의 서론입니다. 그 조서의 수신자와 발신자를 소개합니다.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는 왕의 신임장과 같은 것으로 에스라의 신분을 보증하고, 그 안에 그가 해야 할 구체적인 임무를 명시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에스라의 신분에 대해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례학자요 학자 겸 제사장으로 소개됩니다. 이 조서는 에스라 한 개인을 향한 것으로 예루살렘 귀환이라는 에스라의 청원이 받아들여졌음을 입증하는 공적 문서입니다. 에스라의 직무는 한편으로 페르시아 관리로서 유다의 질서와 행정을 유지할 책임이 있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 예루살렘 성전 예배를 복원할 임무를 맡은 인물(제사장)입니다. ‘학자 겸 제사장’이라는 에스라의 호칭은 이러한 이중적인 직무를 보여줍니다.

 

조서의 내용(12-26)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잘못된 가치관이나 권력자들을 통해서도 반대로 이용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십니다. 아닥사스다 왕은 자신이 점령했던 지역 신들로부터 재앙을 받지 않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는 신인 여호와를 위해 선정을 베풀고 있습니다.

 

12모든 왕의 왕 아닥사스다는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 학자 겸 제사장 에스라에게 13조서를 내리노니 우리 나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중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뜻이 있는 자는 누구든지 너와 함께 갈지어다 14너는 네 손에 있는 네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유다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살피기 위하여 왕과 일곱 자문관의 보냄을 받았으니 15왕과 자문관들이 예루살렘에 거하시는 이스라엘 하나님께 성심으로 드리는 은금을 가져가고 16또 네가 바벨론 온 도에서 얻을 모든 은금과 및 백성과 제사장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그들의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기쁘게 드릴 예물을 가져다가 17그들의 돈으로 수송아지와 숫양과 어린 양과 그 소제와 그 전제의 물품을 신속히 사서 예루살렘 네 하나님의 성전 제단 위에 드리고 18그 나머지 은금은 너와 너의 형제가 좋게 여기는 일에 너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쓸지며 19네 하나님의 성전에서 섬기는 일을 위하여 네게 준 그릇은 예루살렘 하나님 앞에 드리고 20그 외에도 네 하나님의 성전에 쓰일 것이 있어서 네가 드리고자 하거든 무엇이든지 궁중창고에서 내다가 드릴지니라 21나 곧 아닥사스다 왕이 유브라데 강 건너편 모든 창고지기에게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 학자 겸 제사장 에스라가 무릇 너희에게 구하는 것을 신속히 시행하되 22은은 백 달란트까지, 밀은 백 고르까지, 포도주는 백 밧까지, 기름도 백 밧까지 하고 소금은 정량 없이 하라 23무릇 하늘의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하늘의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은 삼가 행하라 어찌하여 진노가 왕과 왕자의 나라에 임하게 하랴 2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제사장들이나 레위 사람들이나 노래하는 자들이나 문지기들이나 느디님 사람들이나 혹 하나님의 성전에서 일하는 자들에게 조공과 관세와 통행세를 받는 것이 옳지 않으니라 하였노라 25에스라여 너는 네 손에 있는 네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네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자를 법관과 재판관을 삼아 강 건너편 모든 백성을 재판하게 하고 그 중 알지 못하는 자는 너희가 가르치라 26무릇 네 하나님의 명령과 왕의 명령을 준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속히 그 죄를 정하여 혹 죽이거나 귀양 보내거나 가산을 몰수하거나 옥에 가둘지니라 하였더라(12-26)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는 앞선 왕이 고레스가 그랬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 자기 고향으로 안전하게 돌아가도록 지원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12절부터 26절까지는 아람어 본문으로 조서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으로 보입니다.

 

⑴ 인사말(12)

 

아닥사스다 왕은 조서를 내리면서 자신과 수신자인 에스라의 호칭을 밝힙니다. 그는 자신을 ‘왕의 왕’이라고 소개하는데, 이것은 자신의 절대적인 권위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에스라에 대한 호칭은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 학자 겸 제사장’입니다.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 학자 겸 제사장’은 페르시아 정부 내에서 에스라가 갖고 있던 공식 직함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⑵ 아닥사스다 왕의 허락(13)

 

아닥사스다 왕은 선왕인 고레스 왕이 그랬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자원하는 사람은 고국으로 귀환할 수 있도록 하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백성들이 성전에 받칠 제물을 사는데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합니다.

 

⑶ 에스라의 임무(14-26)

 

아닥사스다 왕이 에스라에게 위임한 임무를 소개하는 단락(14-26)은 다음과 같은 교차 대칭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 구조에 의하면, 본문은 율법을 가르칠 것(a′와 a)과 성전 예배에 대한 지원(c)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a. 율법을 따라 조사할 것(14)

    b. 바벨론에서 성전에 바치는 예물(15-18)

         c. 성전 유지 비용과 헌납될 기물들(19-20)

    b′. 강 서쪽 지방에서 바치는 예물(21-24)

a′. 율법에 따라 가르칠 것(25-26)

 

에스라와 그 일행의 이스라엘 귀환은 ‘왕’과 ‘일곱 자문관’의 허락을 받아 이루어집니다(14b). ‘일곱 자문관’은 당시 왕의 측근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보좌관 그룹을 가리킵니다. 이들의 허락은 에스라와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에 대한 합법성을 확인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에스라에게 주어진 첫 번째 임무는 예루살렘과 유다의 형편을 살피는 것입니다(14a). 예루살렘과 유다에 정착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의 상황을 잘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닥사스다 왕은 에스라를 보내면서, 여러 가지 면에서 실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습니다(15-24). 이 조서에서 아닥사스다 왕은 에스라에 대한 존경과 신뢰가 돋보이며, 또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심도 있어 보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편의와 특혜를 부여하는 내용들로 인하여 그가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는 천사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① 자발적인 예물(15)

 

먼저 왕과 자문관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성심으로’ 예물을 바칩니다(15). ‘성심으로’이란 ‘자원하는 마음으로’, ‘아낌없이’라는 의미로 이들의 봉헌이 자발적임을 보여줍니다.

 

② 성전 제사에 필요한 예물(16-18)

 

아닥사스다 왕의 두 번째 지원은 에스라로 하여금 바벨론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서 받은 은금과 예물을 가져가도록 하는 것입니다(16). 봉헌자들 중 상당수는 귀환하지 않고 바벨론에 남아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었을 것입니다. 이 은금과 예물은 앞으로 예루살렘 성전 제사에 필요한 제물을 사는 용도로 사용될 것입니다(17). 아닥사스다 왕은 이 일에 있어 유다인들의 자율권을 보장합니다(18,‘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쓸지며’). 본문은 예루살렘 성전을 위한 이방인들의 헌신을 언급함으로써 예루살렘 성전이 갖는 우주적인 의미를 강조합니다.

 

③ 성전 유지와 관련된 예물(19-20)

 

아닥사스 왕의 세 번째 지원은 성전 유지와 관련됩니다(19-20). 왕은 에스라에게 하나님의 성전 예배에 사용될 그릇들을 내어줍니다(19). 이 그릇들은 아마 1차 귀환 때 일부 남겨두었던 기물들이거나(에스라 1:7-11) 왕의 개인적인 하사품이었을 것입니다(에스라 8:26-27). 왕은 추가적으로 성전 운영에 사용될 물품들을 ‘궁중 창고’, 즉 국고에서 지원할 것을 약속합니다(20).

 

④ 강 서편에서도 물품 공급(21-24)

 

아닥사스다 왕의 네 번째 지원은 유브라데 강 건너편 관리들로 하여금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도록 명령합니다(21-24). 그들이 공급할 물품들은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은 100달란트(약 34kg), 밀 100고르(13,600ℓ), 포도주 100밧(약 1,800ℓ), 기름 100밧(약 1,800ℓ), 그리고 많은 양의 소금입니다(22). 밀, 기름, 소금은 소제에(레위기 2장; 6:9), 포도주는 전제에 필요한 제물입니다(민수기 15:5-10). 당시 강 서편 지역의 1년 세금이 350달란트인 것을 감안한다면, 이 액수는 엄청난 지원입니다. 이것은 성전 예물과 더불어 성전 유지 비용까지 페르시아 국고에서 지원한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아닥사스다 왕은 예루살렘의 제사를 통해 하나님의 축복이 왕실과 제국에 임하기를 바란 것으로 보입니다(23b, ‘어찌하여 진노가 왕과 왕자의 나라에 임하게 하라’). 강 건너편 관리들을 통한 아닥사스다 왕의 지원은 예루살렘 성전의 제2의 종사자들(제사장, 레위인, 노래하는 자들, 문지기들, 느디님 사람들)의 세금을 면제해주는 것을 포함합니다(24). 성직자에게 면세 혜택을 주는 것은 페르시아 왕들이 종종 행한 정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⑤ 종교뿐 아니라 행정적인 지도자로 임명(26)

 

아닥사스다 왕은 에스라가 해야 할 핵심 임무를 언급하는데, 그것은 사법적인 기능과 교육적인 역할입니다(25 ‘재판하게 하고…가르치라’). 에스라에게 주어진 사법권은 법관과 재판관을 임명하는 것이고(25a), 교육적인 역할은 페르시아 관리로서 유다 지역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공의를 가르치는 것입니다(25b). 아닥사스다 왕은 이를 통해 제국에 속해 있는 백성들이 질서 있는 생활을 하며 평안하기를 원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은 끝으로 하나님의 명령과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 임할 엄한 처벌을 경고합니다(26). 여기서 ‘왕의 명령’은 페르시아 제국의 법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명령은 이스라엘의 율법을 가리킵니다. 예루살렘의 제사장은 하나님께 속한 일, 하나님의 명령을 처리하는 반면, 왕에게 속한 일(왕의 명령)은 사법권을 갖고 있는 자들의 권한입니다. 에스라는 제사장과 학자(페르시아 관리)로서 이 두 가지 기능을 행사하도록 위임받았습니다. 그는 종교 지도자 일뿐만 아니라 행정적인 지도자의 위치도 같이 감당했습니다.

 

에스라의 찬양(27-28)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할 때,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함께 있어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도록 도와주십니다.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더욱 힘 있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27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그가 왕의 마음에 예루살렘 여호와의 성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두시고 28또 나로 왕과 그의 보좌관들 앞과 왕의 권세 있는 모든 방백의 앞에서 은혜를 얻게 하셨도다 내 하나님 여호와의 손이 내 위에 있으므로 내가 힘을 얻어 이스라엘 중에 우두머리들을 모아 나와 함께 올라오게 하였노라(27-28)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가 끝나고 다시 히브리어 본문으로 돌아옵니다. 이제부터 에스라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이 부분은 ‘에스라 회고(Ezra Memoir)’라고 불립니다. 에스라의 회고는 9장까지 이어집니다.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의 호의와 관대함에 대해 하나님께 대한 찬양으로 응대합니다. 에스라의 찬양은 찬양시의 형태로서 송축하라는 선포 후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설명하면서 찬양합니다.

에스라가 선포하는 내용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움직이셨다는 것입니다(27). 둘째, 하나님께서 에스라로 하여금 왕과 대신들 앞에서 은혜를 받게 하셨습니다(28a), 아하수에로 왕 당시 하나님께서는 왕후 에스더에게 베푸신 은혜를 에스라에게도 베푸신 것입니다(에스더 5:2). 셋째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여건을 마련해주셨습니다(28b). 에스라는 이 모든 과정에 하나님이 함께하셨음을 고백합니다(‘여호와의 손이 내 위에 있으므로’ 에스라서 7:6,9; 8:18,22,31). 일련의 사건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돌보심을 증거 합니다. 전체 단락에 사용된 하나님에 대한 다양한 명칭, 곧 ‘하늘의 하나님’(12,21,23), ‘예루살렘 성에 거하시는 하나님’(16,19). ‘에스라의 하나님’(14,17,18,25,26,28), ‘이스라엘의 하나님’(15), ‘조상들의 하나님’(27)은 이 모든 이름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인격적으로 이스라엘의 역사에, 당신의 나라의 역사에 관여하셨는지를 보여줍니다. 추상적인 이름이 아니라 실제적인 이름입니다. 하나님을 인간 모두 다 해아일 수 없지만, 감히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두 어울리는 이름들입니다.

이렇게 여호와의 손이 자기 위에 있으므로 자신이 힘을 얻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모아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게 되었다는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손을 분명히 고백했는데,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손을 의식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우리는 우리의 손을 비울 때 하나님의 손에 의지하는 것임을 알아야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베드로전서 5:6)고 하였습니다.


학사 에스라라가 사명을 따라 움직였듯이 모든 성도들도 사명을 따라 살아가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어디 있길 바라시는 것인지, 무엇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 사역에 참여할 수 있는지를 물으면서 그 대답을 삶으로 살아내야 합니다. 학사 에스라는 세상이 준 직책과 역할이라고 해서 소홀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배후에 하나님께서 계심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빛이 들어나지 않는 일에도 묵묵히 자신의 일을 감당한 것입니다. 성도들도 어떤 일에 부르심을 받았던지 자신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내는 사랑하는 자녀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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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07-01)


에스라의 예루살렘 귀환과 사역

에스라 7장 1-10절


 

생명력을 상실한 사람들은 외형적인 것에 집중하며, 교회도 마찬가지로 건물과 성도의 수에 의존하게 됩니다. 큰 예배당이나 많은 성도가 교회의 위대함을 착각하게 하지만, 성령 충만이 없다면 그 공동체는 허망합니다. 예루살렘에 귀환한 이스라엘도 그러한 모습을 보였고, 하나님은 새로운 역사를 이루고자 하십니다.

 

 

  • 에스라서 후반부(7-10장)는 이스라엘 백성의 두 번째 귀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 7년(주전 458년)에 제사장, 레위인, 일반 백성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합니다. 두 번째 귀환 사건도 첫 번째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이루어집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율법에 익숙한 에스라를 통해 말씀 중심의 공동체를 세우길 원하십니다.

 

에스라에 대한 소개(1-5)

새롭게 시작한 공동체라도 시간이 흐르면 무기력해지기 쉽니다. 공동체가 무기력해지면 두 가지 양상으로 나갑니다. 먼저는 새로운 능력이 제공되지 않고 계속적으로 무기력이 지속되면 그 공동체는 자연히 소멸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공동체를 위한 새로운 지도자가 출현해서 새 공기를 주입시키면, 다시 예전에 능력 있는 공동체로 회복되어집니다.

 

1이 일 후에 바사 왕 아닥사스다가 왕위에 있을 때에 에스라라 하는 자가 있으니라 그는 스라야의 아들이요 아사랴의 손자요 힐기야의 증손이요 2살룸의 현손이요 사독의 오대 손이요 아히둡의 육대 손이요 3아마랴의 칠대 손이요 아사랴의 팔대 손이요 므라욧의 구대 손이요 4스라히야의 십대 손이요 웃시엘의 십일대 손이요 북기의 십이대 손이요 5아비수아의 십삼대 손이요 비느하스의 십사대 손이요 엘르아살의 십오대 손이요 대제사장 아론의 십육대 손이라(1-5)

 

7-10장은 에스라 회고(Ezra Memoir)로 알려진 단락으로 에스라서의 후반부를 구성합니다. 전반부(1-6장)가 성전 재건의 주제를 다룬다면, 7-10장은 공동체 재건의 주제를 다룹니다. 전반부의 중심인물이 스바벨이라면, 후반부는 학자 에스라입니다. 에스라서 후반부는 이스라엘 백성의 두 번째 귀환 사건으로 시작합니다(스 7:1-10). 성전 재건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상황으로 인해 신앙의 열정은 식어가고 그들은 패배의식과 좌절감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그들의 영적 침체는 신앙적인 측면을 넘어서 공동체의 분열 양상으로까지 나타나게 됩니다. 성전 재건 이후 공동체는 다시 한 번 큰 위기를 맞게 됩니다. 이것이 에스라의 등장 배경입니다.

 

(1) 시대적 배경(1a)

 

7장부터 시작되는 에스라서의 후반부는 에스라라는 한 인물의 계보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에스라의 등장을 알리면서 본문은 ‘이 일 후에’로 시작합니다. ‘이 일 후에’에서 ‘이 일’은 바로 앞의 사건, 즉 성전 재건이 완료되고 유월절을 지켰던 일을 가리킵니다. 스룹 바벨 성전은 다리오 왕 6년(주전 515년)에 완공되었고, 에스라가 등장할 때는 아닥사스다 왕(주전 465-424년) 때입니다(스 7:1,12,21; 8:1). 그렇다면 6장과 7장 사이에는 상당한 시간 간격(약 60년)이 존재합니다. 이때는 고레스 칙령으로 포로에서 돌아온 1차 귀환민들이 거의 다 죽고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시점입니다. 따라서 1세대 귀환민들의 신앙과 열정이 다음 세대로 전수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새로운 전기가 필요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에스라가 등장하였습니다. 에스라는 그의 이름처럼 귀환 공동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이 보내신 도움이었습니다.

 

(2) 에스라에 대한 소개(1b-5)

 

에스라는 스라야의 아들, 아사랴의 손자, 사독의 5대손, 대제사장 아론의 16대손으로 모세의 율법에 정통한 학자(서기관) 겸 제사장으로 소개됩니다. 에스라는 예루살렘 멸망 당시의 대제사장입니다(왕하 25:18-21). 그렇다면 스라야와 에스라 사이에 적어도 120년 정도의 차이(주전 587년과 458년)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3절에는 므라욧이 아사랴의 아들로 소개되지만, 역대기 족보(대상 6:7-10)는 그 사이에 여섯 명의 이름(아마랴, 아히둡, 사독, 아히마아스, 아사랴, 요하난)을 추가로 소개합니다. 이것은 에스라서의 계보가 모든 세대를 다 제시하지 않고 개괄적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에스라의 족보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아론(‘아론의 16대손’)에게까지 미칩니다(5). 이를 통해 저자는 에스라가 정통 제사장 가문으로 공동체의 개혁을 주도하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춘 인물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한 사람의 족보를 16대 조상까지 거슬러서 이렇게 자세히 보도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에스라라는 한 인물에 대해 저자가 갖고 있는 특별한 관심을 반영합니다. 동시에 당시 귀환 공동체에서 에스라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2차 귀환 행렬(6-7)

종종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시대가 암울하고 소망이 없어 보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도 새로운 소망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강력한 어려움 속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면 그 어두움을 뚫고 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는 합당한 일꾼을 찾으시며, 공동체를 인도하기에 합당한 지도자로 세우십니다.

 

6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이더니 7아닥사스다 왕 제칠년에 이스라엘 자손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과 느디님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때에(6-7)

 

본문에서는 에스라가 바사 왕의 명령을 받아 이스라엘에 돌아온 대제사장임을 소개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배우고 가르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을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의 귀환을 기뻐하며 함께 모입니다.

 

(1) 에스라의 귀환(6)

 

6절은 에스라의 귀환을 보도합니다(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본문은 이어서 에스라를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로 소개합니다(7장은 반복적으로 에스라를 학자라고 부름: 스 7:6,11,12,21). 여기에서 ‘모세의 율법’은 하나의 책으로 완성된 오경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학자로 번역된 히브리어 ‘소페르’는 구약성경에서 ‘기록자’, ‘서기관’, ‘비서’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됩니다. 서기관(학자)은 바벨론 포로기에 생긴 새로운 직업으로, ‘율법을 기록하고 연구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페르시아 시대 ‘소페르’는 제국에서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는 관리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에스라는 페르시아 제국에서 ‘유대인 업무를 전담하는 장관’과 같은 위치에 있는 인물입니다. 익숙하다는 용어 ‘마히르’는 ‘정통하다’, ‘뛰어나다’라는 의미로 에스라가 갖고 있는 율법에 대한 전문성을 나타냅니다. 이런 면에서 에스라는 포로기 이후 성전과 율법을 중심으로 형성될 새로운 공동체 건설에 적합한 인물입니다.

 

(2) 에스라와 함께한 백성들(7)

 

본문은 아닥사스다 왕이 에스라에 대해 갖고 있었던 신뢰를 강조합니다(6,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이더니’). 그리고 그 배경에 하나님의 손길이 작용하고 있음을 밝힙니다(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이전에 고레스와 다리오 왕의 마음을 움직이신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움직이신 것입니다.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 7년(주전 458년)에 제2세대 귀환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먼 거리를 여행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7). 본문은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었다’라고 밝힙니다. 이것은 두 번째 귀환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이루어진 것을 나타냅니다. 에스라와 함께 귀환 행렬에 동참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제사장들, 레위인들, 노래하는 자들, 문지기들, 느디님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7b). 이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어려움에 처한 유다 공동체를 새롭게 재건하는 일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안정된 생활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로서 2세대 귀환 공동체의 주인공들입니다.

 

예루살렘 여정과 에스라의 결심(8-10)

희망과 소망이 사라져 갈 때, 공동체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다른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원음 그대로 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가 회복되고, 그 말씀이 우리의 심령을 변화시키는 말씀 사건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에스라를 통한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8이 에스라가 올라왔으니 왕의 제칠년 다섯째 달이라 9첫째 달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 10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8-10)

 

본문에서는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고 준수하며 가르치는 데 힘쓰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혜를 주셔서 율법을 잘 배우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을 강조합니다. 에스라는 이 모든 일에 대해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준비합니다.

 

(1) 예루살렘 여정(8)

 

에스라와 그 일행들이 ‘아닥사스다 왕 7년’(주전 458년) 첫째 달 초하루에 바벨론을 출발하여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첫째 달(아빕월)은 옛적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난 달입니다(출 12:2). 첫째달(아빕월)에 바벨론을 떠난 것은 새로운 출애굽을 상징합니다. 일행은 바벨론을 떠난 지 4개월 만에 예루살렘에 도착한 셈입니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는 약 1,500킬로미터나 되는 먼 거리일 뿐만 아니라 매우 덥고 위험했습니다(참조. 스 8:21-22). 그렇지만 에스라 일행은 아무런 해를 받지 않고 무사히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본문은 구체적인 여정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단지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었다’고 밝힙니다(9).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었다’는 표현은 7-8장 단락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며(스 7:6,7, 28: 8:18, 22, 31), 전체를 하나의 통일된 단락으로 만듭니다. 본문은 이를 통해 에스라와 함께하셨던 하나님의 은혜가 귀환 행렬 전체에게 임했음을 보여줍니다.

 

(2) 에스라의 결심(10)

 

10절은 에스라가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움을 입은 이유를 밝힙니다. 그것은 에스라가 율법을 연구하고 준행하여, 율례와 규례를 가르치기로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에스라는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칠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르치는 대로 살고자 했습니다. 삶으로 본을 보이는 지도자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에스라라는 인물을 주목하신 이유입니다. 이제 에스라는 율법을 통해 유다 공동체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올바로 세우고자 마음을 확고히 정했습니다(‘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본문은 이를 통해 앞으로 공동체의 회복(재건)에서 율법이 차지하게 될 중요성을 암시합니다. 당시 예루살렘 공동체가 여러 가지 문제로 위기를 경험하고 있었지만, 그 핵심은 신학적 문제에 있었습니다. 해결책은 공동체와 개인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 위에 확고히 세우는 것입니다. 에스라의 사역으로 이스라엘은 종교적으로 큰 전환점을 이루게 됩니다. 예루살렘 공동체는 토라 중심의 공동체로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 제사에서 말씀으로 신앙의 중심축이 옮겨가게 됩니다. 이후 이스라엘의 종교가 토라 종교로 정착하는 데 에스라가 결정적 공헌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을 통해 His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에스라는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데 헌신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우리도 에스라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실천을 통해, 개인과 공동체의 영적 회복을 이루어 나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우리 각자를 부르시어 새로운 역사를 이루길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부르심에 응답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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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06-02)


성전 건축의 완성과 유월절 의식

에스라 6장 13-22절


 

성전 건축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언약을 상징하는 중요한 장소입니다. 이곳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는 임재의 공간으로, 예배와 제사의 중심지 역할을 합니다. 성전은 신앙 공동체가 하나로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장소이며, 그들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성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중요한 상징적 공간입니다.

 

  • 귀환 공동체는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완료하고 다리오 왕 제6년(주전 526년) 아달월 3일에 역사적인 봉헌식을 거행합니다. 그들은 성대한 성전 봉헌식을 마친 후 모세의 율법을 따라 유월절을 지킵니다. 성전 봉헌식과 유월절 의식의 거행은 이스라엘 역사에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조서의 이행과 성전 건축의 완공(13-18)

이스라엘 백성이 순종하는 모습은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들의 순종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믿음과 신뢰의 표현으로,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순종은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 역사하실 수 있는 통로가 되며, 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기초가 됩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의 순종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하며, 공동체의 회복과 성장을 이끄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13○다리오 왕의 조서가 내리매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관들이 신속히 준행하니라 14유다 사람의 장로들이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의 권면을 따랐으므로 성전 건축하는 일이 형통한지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명령과 바사 왕 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따라 성전을 건축하며 일을 끝내되 15다리오 왕 제육년 아달월 삼일에 성전 일을 끝내니라 16○이스라엘 자손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기타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즐거이 하나님의 성전 봉헌식을 행하니 17하나님의 성전 봉헌식을 행할 때에 수소 백 마리와 숫양 이백 마리와 어린 양 사백 마리를 드리고 또 이스라엘 지파의 수를 따라 숫염소 열두 마리로 이스라엘 전체를 위하여 속죄제를 드리고 18제사장을 그 분반대로, 레위 사람을 그 순차대로 세워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되 모세의 책에 기록된 대로 하게 하니라(13-18)

 

예루살렘 성전 재건의 주제를 다루는 에스라서 전반부(1-6장)의 종결 부분으로, 성전 건축의 완공과 봉헌식을 소개하는 단락(13-18절)과 유월절을 지키는 단락(19-22절)으로 구성됩니다. 1장에서는 고레스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성전 건축을 지시한 반면, 6장에서는 페르시아 왕 다리오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성전 재건을 완성합니다(스 6:22).

 

(1) 다리오 와의 조서를 이행함(13)

 

다리오 왕의 조서에 대한 강 건너편 총독과 관리들의 반응으로 시작합니다. 다리오 왕의 조서가 내려지자 강서편의 총독과 관리들은 지체하지 않고 ‘신속히’ 왕의 명령을 시행합니다. ‘신속히 시행하다’로 번역된 아람어는 ‘오스파르나 아바두’로 12b절의 ‘신속히 행할지어다’(오스파르나 이트아비두)와 직접 연결됩니다. 이를 통해 저자는 다리오 왕의 명령이 지체 없이 그리고 정확하게 시행되었음을 강조합니다.

 

(2) 성전 건축의 완공(14-15)

 

성전 건축의 일이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게 된 데는(14b, ‘성전 건축하는 일이 형통한지라) 유다 사람의 장로들이 하나님의 사람들(특히 학개와 스가랴)의 권면을 따랐기 때문입니다(14). 기록에 따르면, 학개는 주전 520년에 예언 활동을 했고(학 1:1; 2:10), 스가라는 주전 520년부터 518년까지 예언 활동을 했습니다(즉 1:1: 7:1). 성전 건축의 재개 연도와 두 예언자들의 활동 연대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이것은 건축의 재개에 두 예언자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음을 의미합니다. 성전 건축은 그로부터 약 3-5년 후인 515년(다리오 왕 6년) 12월(아달월) 3일에 완공됩니다(15).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솔로몬 성전이 파괴된 후거의 70년 만에 두 번째 성전이 완공된 것입니다(참조. 렘 25:12-14; 29:10; 1:12-17).

 

본문은 성전 건축의 일이 ’하나님의 명령과 바사 왕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따른 것‘이라고 밝힙니다(14). 성전 건축은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에 따른 것이고, 다음으로 페르시아의 왕들(고레스, 다리오, 아닥사스다)의 허락과 지원에 의한 것입니다. 이것은 성전 건축의 (신적, 정치적)정당성을 밝히는 의미를 지닙니다. 여기에서 열거한 페르시아의 세 왕 중에서 아닥사스다 왕은 성전 건축과 직접 관련이 있는 인물은 아닙니다. 아닥사스다는 느헤미야를 통해 성벽을 재건하도록 조서를 내리고, 성전제도의 개혁을 도운 사람입니다(느 2:1,8). 이것으로 볼 때 에스라서는 성전 건축과 성벽 재건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의 과업으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참조. 4장). 성전 건축은 성벽과 공동체 재건으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특히 성전과 성벽 건축을 도운 페르시아 왕들의 이름 앞에 ‘하나님의 명령’을 언급함으로써 성전 건축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강조합니다. 성전 건축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주도하시고 성취하신 역사였습니다.

 

(3) 성전 봉헌식(16-17)

 

성전이 완공되자 백성들은 성전 봉헌식을 거행합니다. 성전 봉헌식은 다리오 왕 제6년(주전 526년) 아달월 3일에 치러집니다(15). 봉헌식에 참여한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기타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입니다(16). 귀환 공동체의 구성원이 주로 유다와 베냐민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본문은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언급합니다. 이것은 귀환 공동체의 정체성을 역사적 이스라엘로 규명하고자 하는 의도와 관계됩니다. 이런 배경에서 회복된 성전은 포로기 이전과 이후의 이스라엘을 하나로 연결하는 기능을 합니다. 이것은 성전 봉헌식 때 귀환 공동체가 드렸던 예물 목록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속죄제물로 이스라엘 지파의 수를 따라 숫염소 12마리를 드립니다(17). 이스라엘 자손이 성전 봉헌식 때 드린 전체 제물은 속죄제 외에 수소 100마리, 숫양 200마리, 어린양 400마리, 도합 700마리입니다. 이는 솔로몬 성전 봉헌식 때 드린 제물의 양(소 2만 2천 마리, 양 12만 마리)과 비교하면 매우 적은 양으로(참조. 왕상 8:63; 대하 7:5), 포로기 이전에 비해 축소되어 있는 귀환 공동체의 위상을 반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회복된 성전을 구심점으로 귀환 공동체를 통해 이어지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4) 성전 봉사자의 조직(18)

 

귀환민들은 봉헌식에 이어 성전 예배에 필요한 조직을 편성합니다(18; 스 4:8부터 시작된 아람어 본문은 18절에서 끝남). 제의 종사자인 제사장과 레위인의 조직은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규례대로 이루어졌습니다(18b). 이것은 철저하게 율법에 충실하고자 하는 귀환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며,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 생활을 통해 토라의 백성으로 달라졌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면에서 바벨론 포로는 역사적으로 암울한 시기이지만, 신학적으로는 매우 창조적인 시기입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킴(19-22)

이스라엘의 절기는 공동체의 연합과 기쁨을 경험하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이러한 절기를 통해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절기는 그들 사이의 유대감을 강화하고, 함께 모여 예배하며 기뻐하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또한, 각 절기는 하나님의 역사와 구원의 사건을 기념하며,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하고, 서로를 격려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19○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첫째 달 십사일에 유월절을 지키되 20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일제히 몸을 정결하게 하여 다 정결하매 사로잡혔던 자들의 모든 자손과 자기 형제 제사장들과 자기를 위하여 유월절 양을 잡으니 21사로잡혔다가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과 자기 땅에 사는 이방 사람의 더러운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속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는 자들이 다 먹고 22즐거움으로 이레 동안 무교절을 지켰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즐겁게 하시고 또 앗수르 왕의 마음을 그들에게로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성전 건축하는 손을 힘 있게 하도록 하셨음이었더라(19-22)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 재건 후 첫 번째 유월절을 기념하는 장면이 묘사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제사를 드리고, 기쁨과 연합 속에서 절기를 지킵니다. 이로써 공동체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그들의 신앙을 더욱 확고히 하게 됩니다.

 

(1) 유월절 의식(19-21)

 

성전 봉헌식은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키는 것으로 끝맺습니다. 성전 봉헌식이 12월에 거행되었음을 감안할 때, 그로부터 약 한 달의 시간이 지난 후 백성들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다시 모인 것입니다(19).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해방을 기념하는 날로 이 시점에서 귀환공동체가 유월절을 지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과거의 유월절이 애굽에서의 구원을 기념한 것이라면, 지금의 유월절은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이라는 새로운 출애굽을 기념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유월절 양을 잡기 전의 규정에 따라 먼저 정결의식을 행합니다(20). 유월절 양을 잡는 것이 레위인의 직무는 아니었지만(출 1:6; 신 16:2), 후에 레위인들이 이 일을 전문적으로 하게 되었습니다(참조, 대하 30:17: 35:3-6).

 

유월절 의식에 참여한 사람들은 세 부류로 소개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을 중심으로 한 귀환민들(20). 그 땅에 남아 있던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율법에 충성하는 사람들(21), 이들과 함께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이방인들입니다(21b). 본문은 그 자리에 함께 참석한 사람들 가운데 ‘이방 사람의 더러운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한 이스라엘 사람들’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는 자들’도 있었음을 밝힙니다(21). ‘이방 사람의 더러운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사로잡혀가지 않고 남아 있던 백성들 가운데서 율법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단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이방 사람들의 문화와 종교에 동화되었던 ‘그 땅의 사람들’(‘암하아레츠’)과는 구별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는 자들’은 그곳에 살던 사람들 가운데 개종한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참조, 대하 30:18-19; 민 9:14). 구약의 율법은 이방인들도 정결의식을 거친 후 유월절 의식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규정합니다(참조, 민 9:13-14). 귀환민들은 율법에 근거하여 ‘더러운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한’ 이방인도 참여하도록 한 것입니다(21b).

 

(2) 무교절 의식(22)

 

유월절 행사 이후 곧바로 무교절을 지킵니다(22). 무교절은 유월절 이후 일주일 동안 지키는 절기로, 집안의 묵은 누룩을 제거하고 새로운 수확을 준비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무교절을 지키면서 그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새 삶을 시작할 준비를 합니다. 본문은 끝으로 이 행사가 기쁨의 잔치였음을 밝히면서(22b, ‘즐거움으로 이레 동안 무교절을 지켰으니’, ‘여호와께서 즐겁게 하시고’), 축제의 분위기로 에스라서 전반부를 마무리합니다. 귀환 후 이스라엘 백성이 지킨 첫 번째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구속사에 새로운 장이 열렸음을 의미합니다. 이제 굴욕적인 바벨론 포로 시대를 청산하고 성전과 율법을 중심으로 한 거룩한 백성의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본문은 이러한 과정에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이 있었음을 강조합니다(22).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과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한 우리의 순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일깨워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도 역사하실 것을 믿으며, 우리는 항상 감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 설교를 통해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순종과 감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하고, 공동체의 연합을 강화하는 데 기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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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06-01)


고레스 칙령과 발견과 다리오 왕의 회신

에스라 6장 1-12절


하나님께서는 역전의 명수이십니다. 사람들이 포기하고 절망할 때, 하나님은 신실한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 역사하십니다. 그들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이러한 믿음을 통해 하나님은 변화와 기적을 이루어 내십니다. 결국, 믿음은 역전의 열쇠가 됩니다.

 

  • 강 서편 총독 닷드내의 요청에 따라 다리오 왕은 왕궁의 서고에서 고레스 왕의 칙령을 찾아보게 합니다. 그리고 칙령은 마침내 악메다 궁에서 발견됩니다. 고레스 왕이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허락하고 왕실의 지원을 약속한 것을 확인한 다리오 왕은 성전 건축이 효과적으로 시행되도록 추가적인 조치들을 명령합니다.

 

고레스 칙령의 발견과 내용(1-5)

하나님께서는 역사 속에서 자신의 백성을 인도하시며 그들의 회복을 위해 일하십니다. 다리오 왕의 명령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는 하나님이 상황을 주관하시고, 그의 계획을 이루는 방법을 나타냅니다. 우리의 믿음과 헌신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그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1이에 다리오 왕이 조서를 내려 문서창고 곧 바벨론의 보물을 쌓아둔 보물전각에서 조사하게 하여 2메대도 악메다 궁성에서 한 두루마리를 찾았으니 거기에 기록하였으되 3고레스 왕 원년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대하여 이르노니 이 성전 곧 제사 드리는 처소를 건축하되 지대를 견고히 쌓고 그 성전의 높이는 육십 규빗으로, 너비도 육십 규빗으로 하고 4큰 돌 세 켜에 새 나무 한 켜를 놓으라 그 경비는 다 왕실에서 내리라 5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하여 바벨론으로 옮겼던 하나님의 성전 금, 은 그릇들을 돌려보내어 예루살렘 성전에 가져다가 하나님의 성전 안 각기 제자리에 둘지니라 하였더라(1-5)

 

아람어로 기록된 본문(1-12)은 크게 세 단락으로 구성됩니다. (1) 고레스의 칙령을 발견한 사건에 대한 보도(1-2), (2) 고레스 원년에 공포되었던 칙령(3-5), (3) 다리오 왕이 보낸 조서의 내용입니다(6-12). 다리오 왕은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의 요청에 따라 신하들을 시켜 바벨론의 왕궁 문서고에서 고레스 왕의 칙령을 찾아보게 합니다(1). 바벨론의 문서고가 아닌 메대도 악메다 궁에서 발견된 칙령에는 고레스 왕이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허락한 것과 왕실의 지원을 약속한 내용이 들어있습니다(3-5). 이 사실을 확인한 다리오 왕은 예루살렘 성전 건축이 효과적으로 시행되도록 추가적인 사항들을 명령하는데(6-12), 주위 민족들이 성전 건축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6-7), 강 건너편 사람들의 세금 중 일부를 성전 건축에 지원하는 것(8), 성전 제사에 필요한 제물을 조달하는 것(9-10) 등입니다. 다리오 왕의 조서는 명령을 어기는 자에 대한 경고로 끝을 맺습니다(11-12). 고레스와 다리오 왕의 조서는 예루살렘 성전 건축의 정당성과 합법성을 이중적으로 확인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1) 다리오 왕의 조서(1)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의 요청을 받은 다리오 왕은 조서를 내려 바벨론의 문서 창고를 조사하게 합니다(1).

 

(2) 고레스 칙령의 발견(2)

 

메대도(메대 메디나) 악메다 궁에서 하나의 두루마리가 발견됩니다(2). 악메다 궁은 바벨론에서 북동쪽으로 약 50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곳으로, 고레스 왕이 주전 550년에 정복한 메대의 수도였습니다. 악메다 궁은 바벨론에 비해 훨씬 높은 고도에 위치해 있어 날씨가 건조하고 기후가 좋았습니다. 그래서 페르시아 왕들은 바벨론의 더운 날씨를 피하고자 이곳에 궁전을 지어놓고 여름을 보내곤 했습니다. 고레스의 칙령이 악메다 궁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고레스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칙령을 선포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고레스 칙령(‘한 두루마리’)이 바벨론의 문서 창고가 아닌 악메다 궁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이것을 찾기 위한 많은 수고가 있었음을 암시하며, 다리오 왕이 이 사안을 중요하게 여겼음을 보여줍니다.

 

3-5절은 악메다 궁에서 발견된 고레스 왕의 조서 내용을 보도합니다. 조서는 고레스 왕 원년, 즉 주전 538년에 공포되었으며, 조서의 내용은 예루살렘 성전 건축에 대한 명령(3), 성전의 규모(3b), 예루살렘 성전의 기물들을 원래 자리로 귀환시킬 것(5)에 대한 명령으로 되어 있습니다. 고레스가 세우도록 한 성전의 규모는 높이와 너비가 각각 60규빗입니다(3b). 길이에 대한 수치가 빠진 것은 필사자의 실수인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언급된 수치는 실제 솔로몬 성전의 규모(길이 60규빗: 너비 20규빗, 높이 30규빗)와 상당한 차이를 보입니다(참조. 왕상 6:2). 본문을 문자대로 받아들인다면, 새롭게 건축될 성전의 규모는 솔로몬 성전의 규모를 능가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고레스는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새 성전을 원래보다 큰 규모로 제시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실제 예루살렘 성전 건축은 고레스가 의도한 규모보다 훨씬 작았다. 이것은 페르시아 왕실의 재정 상황이 악화된 것과 관계있는 것 같습니다. 고레스 왕의 조서는 성전 건축에 대한 경비를 국고에서 지원할 것을 명시합니다(4b). 국고에서 지원한다는 것은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거두어들인 세금에서 일부를 지원하거나 비용만큼 세금을 감면해주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고레스 왕의 정책은 피정복민들에게 종교적인 자유를 허용하고, 어느 정도 자치권을 허용함으로써 제국의 안정을 도모하려 한 것입니다.

 

다리오 왕의 조서(6-12)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황 속에서도 그의 계획을 이루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권위 있는 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지지할 때, 우리는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합니다. 공동체의 힘과 연합이 중요하며, 함께 일할 때 더 큰 성과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의 헌신이 하나님의 사역에 기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삶이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6이제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너희 동관 유브라데 강 건너편 아바삭 사람들은 그 곳을 멀리하여 7하나님의 성전 공사를 막지 말고 유다 총독과 장로들이 하나님의 이 성전을 제자리에 건축하게 하라 8내가 또 조서를 내려서 하나님의 이 성전을 건축함에 대하여 너희가 유다 사람의 장로들에게 행할 것을 알리노니 왕의 재산 곧 유브라데 강 건너편에서 거둔 세금 중에서 그 경비를 이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주어 그들로 멈추지 않게 하라 9또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 곧 하늘의 하나님께 드릴 번제의 수송아지와 숫양과 어린 양과 또 밀과 소금과 포도주와 기름을 예루살렘 제사장의 요구대로 어김없이 날마다 주어 10그들이 하늘의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을 드려 왕과 왕자들의 생명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라 11내가 또 명령을 내리노니 누구를 막론하고 이 명령을 변조하면 그의 집에서 들보를 빼내고 그를 그 위에 매어달게 하고 그의 집은 이로 말미암아 거름더미가 되게 하라 12만일 왕들이나 백성이 이 명령을 변조하고 손을 들어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을 헐진대 그 곳에 이름을 두신 하나님이 그들을 멸하시기를 원하노라 나 다리오가 조서를 내렸노니 신속히 행할지어다 하였더라(6-12)

 

본문에서는 다리오 왕이 유다의 성전 건축을 지지하며, 성전 건축에 필요한 자원을 제공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왕은 성전 건축을 방해하는 자들에게 경고하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을 강조합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백성을 향한 보호를 나타냅니다.

 

(1) 성전 건축에 대한 방해 금지 명령(6-7)

 

고레스 왕의 칙령을 확인한 다리오 왕은 너편 총독 닷드내에게 조서를 보냅니다. 그는 조서에서 자신도 고레스 왕의 정책을 그대로 따를 것을 밝히면서, 그것이 실제로 시행될 수 있도록 추가 지시 사항을 전달합니다. 다리오 왕이 고레스 왕의 칙령에 대해 이렇게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 이유는 고레스 왕에 대한 존경심 때문으로 추측됩니다. 다리오 왕은 여러 면에서 고레스의 정책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왕으로 평가됩니다. 다리오 왕의 조서는 세 가지의 명령과 경고의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먼저 다리오 왕은 강 건너편 총독들과 관리들에게 성전 건축을 방해하지 말 것을 명령합니다(6b-7). 그는 이어서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에게 유다 총독과 장로들을 도와 예루살렘 성전이 ‘제자리’에 세워지게 하라고 명령합니다(7).

 

(2) 경비를 국고에서 지원할 것이 대한 명령(8)

 

‘제자리’는 솔로몬 성전이 세워졌던 바로 그 장소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앞으로 세워질 성전이 솔로몬 성전의 회복임을 의미합니다. 다리오 왕의 두 번째 명령은 건축에 소요되는 경비를 국고에서 지원하도록 하는 것인데(8), 이것은 강 건너편 총독이 거둔 세금 중 일부(왕의 재산)를 성전 건축의 경비로 사용하게 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지금까지 반대했던 사람들이 이제 성전 건축의 후원자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3) 제물 조달에 대한 협조(9-10)

 

다리오 왕의 세번째 명령은 제사에 필요한 제물을 세금에서 조달하게 하는 것입니다(9-10). 이것은 성전 건축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성전의 운영 자금을 지원하라는 의미입니다. 다리오 왕이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제물 목록(9)은 그가 이스라엘 종교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다리오 왕은 이어서 예루살렘의 성전 건축을 지원하는 이유를 밝히는데(10), 예루살렘 제사장들로 하여금 왕실의 안녕을 위해 기도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비교. 렘 29:7). 이것으로 보아 다리오 왕의 일차적인 관심은 제국의 안정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니면 다리오 왕이 고레스 왕의 칙령을 읽으면서 유다인들의 신에 대해 두려움과 위엄을 느꼈는지도 모릅니다(참조. 스 1:2).

 

(4) 명령을 지킬 것에 대한 최종 권고(11-12)

 

다리오 왕의 조서는 내용을 변개하거나 건축을 방해하지 말 것에 대한 경고로 끝납니다(11-12). 조서에 기록된 명령을 어긴 자에게는 ‘그의 집에서 들보를 빼내고 그 위에 메어달고 그의 집은 거름더미가 되는’ 형벌이 주어질 것입니다(11). 범죄자를 ‘나무에 매다는’ 처형법은 주로 앗시리아나 페르시아 제국에서 행해지던 형벌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집이 거름더미가 되는 것’은 재산을 몰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NEB). 이런 형벌은 고대 근동에서 흉악한 범죄자를 처벌하는 방식이었습니다(참조. 에 6:31). 다리오 왕은 ‘예루살렘에 이름을 두신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해달라고 기도함으로써 이 조서를 어긴 사람을 신적 심판대 앞에 둡니다(12a). ‘예루살렘에 이름을 두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전형적인 이스라엘식 표현으로(신 12:11; 14:23: 16:2;삼하 7:13: 왕상 8:29) 다리오 왕이 이스라엘의 종교와 풍습에 대해 기본적인 이해를 갖고 있었음을 암시합니다(주위 유다인의 조언을 받아 이런 표현을 사용했을 수도 있다). 다리오 왕은 관리들에게 조서를 받는 즉시 기록된 내용대로 지체 없이 이행할 것을 촉구합니다(12b, ‘신속히 행할지어다’).

 

다리오 왕의 조서는 예루살렘 성전 건축에 대한 왕실의 전폭적인 지지를 확인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대적들의 방해로 성전 건축이 지체되었지만, 이 조서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국 다리오 왕의 조서는 성전 건축에 대한 유다인들의 주장을 확고하게 해주고 대적들의 방해를 차단하여 성전 건축에 박차를 가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에스라서의 문맥에서 볼 때, 유다인들이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결과였습니다(스 5:1-2).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귀환민들에게 베푸신 은혜였습니다(스 5:5). 하나님께서 페르시아 왕을 도구로 사용하시면서 뜻을 이루어가신 것입니다. 이 사건은 독자들에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며,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낙심치 말고 끝까지 인내하며 기도할 것을 교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세상의 권세를 사용하십니다. 다리오 왕의 명령을 통해 유다 백성이 성전을 재건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는 믿음과 헌신이 결실을 맺는 과정임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충실하며, 그의 인도하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는 함께 일해야 하며, 그의 계획에 참여하는 특권을 누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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