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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03-02)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는 성도들

베드로후서 3장 8-18절


어릴 적에 시냇가에서 죽마고우들과 송사리를 잡으며 놀았습니다. 들과 산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달리다가 푸른 잔디에 누어 하늘을 바라보면, 어른이 되어도 절대로 변하지 말자고 약속했습니다. 아무리 손가락을 걸고 곧게 약속해도 세월이 지나면서 변했고, 그 약속들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절대로 변하지 않은 약속이 있습니다.

 

본문은 주님의 날이 임하면 하늘이 사라지고 모든 것들이 타서 녹아버릴 것입니다. 베드로는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 속에서 그 날을 기다리라고 권고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재림이 지연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과 다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도리어 주님께서 재림하심이 늦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거짓 가르침과 관련한 베드로의 권면들(8-16)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하나님의 응답이 더디고 느린 것 같아도 하나님의 스케줄은 정확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 응답을 하지 않으신다고 불평하지 맙시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향한 스케줄이 있음을 기억합시다.

8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14○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15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8-16)

주님의 재림의 날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예수님과 영적인 결혼식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그 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린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거할 성도로서 경건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불의한 세상과 정욕을 피하고 의가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간절히 소망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열린 문으로 들어가는 감격적인 날이 있을 것입니다.

(1) 종말에 대한 바른 관점 소개(8-10)

3-7절에서 거짓 가르침의 내용을 반박한 저자는 이제 종말에 대한 참 진리로 초점을 전환합니다. 세 가지 요소를 통해 전달합니다. 첫째 요소는 때와 관련한 하나님의 주권입니다(8). 하나님께 하루는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참조. 시 90:4). 시간에 대한 그분의 관점은 인간과 다릅니다. 사람은 시공간 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그분은 그것에 구애받지 않는 창조주입니다.

저자는 두 가지 표현을 통해 이 요소를 강조합니다. (1) ‘이 한 가지’입니다. 원문은 '하나, 곧 이것’이란 강조 표현으로, 다른 것보다 우선하는 중요도를 전달합니다. (2) 외면하지(란타네토) 말라는 명령입니다. 선택적 증거로 진실을 외면하는 거짓 교사를 묘사할 때 사용한 단어입니다(5). 그들과 달리 참 진리의 요소를 외면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둘째 요소는 주의 재림이 지체되는 것에 대한 이유입니다(9). 거짓 교사들은 이 상황을 근거로 약속에 대한 주의 신실성을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놓친 것들이 있습니다. (1) 때는 하나님 주권에 속해 있습니다. 예수도 이에 대해 간섭하지 않습니다(마 26:36). (2) 주의 자비로움입니다. 재림과 심판이 진행되면 믿는 자 외에는 모두 부정적 판결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재림을 늦춘 것은 많은 이들이 그분과의 구원 관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참조, 15). 은혜입니다. (3) 재림의 약속이 지체되는 것은 사람의 죄 때문입니다.

9절 표현은 만일 모든 사람들이 회개한다면 주님이 재림할 것이라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분이 재림을 늦춰 자비로운 기회를 주는 것은 아직 죄인들이 세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는 거짓 교사들도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역설적이게도 주의 재림이 지체되는 것은 거짓 교사들 때문입니다. (4) 창조주의 의도입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멸망시키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 곧 언약 관계 안으로 인도해 그분의 가족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참조 엡 1:5). 아담과 하와를 지을 때나 지금 사람의 생명을 창조하실 때도 그분의 의도는 동일합니다. 그분의 선한 의도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창조주께 반역하는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셋째 요소는 주의 재림과 심판의 확실성입니다(10). 마치 도둑이 오듯 그때를 재단하거나 예측할 수는 없지만, 그 날은 분명히 옵니다. 그 때는 하늘이 급하게 달려가는 듯 큰 소리로 사라지고, 모든 물질은 뜨거운 불에 풀어질 것입니다. 기존 질서가 없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는 새 질서가 창조됩니다. 또한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 즉 모든 세상 역사와 사람들의 행함이 그대로 드러나 평가받게 될 것입니다.

(2) 바른 가르침에 근거한 권면들(11-13)

주의 재림에 대한 바른 가르침(8-10)에 근거해 독자를 권면합니다. 내용 이해를 위한 요소들은 구조에서 나타납니다. 이 구조에 의하면 저자의 권면은 모든 것이 불에 풀어져 땅과 그 안에 있는 것들이 다 드러날 미래 사건을 전제로 합니다. 앞부분 내용이며 독립 속격으로 제시됩니다. 권면의 초점은 독자가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입니다. 특별히 진리에 근거한 거룩한 삶의 모습과 경건에 대한 것입니다. 삶의 모습(아나스트로파이스)은 소돔과 고모라의 모습을 묘사할 때(2:7) 사용한 단어고, 경건은 멸망 받을 사람들의 태도(2:5, 6, 3:7)와 반대 모습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전제로 그분 안에서 세상과 다른 모습으로 살라는 말입니다(1:3,6,7), 멸망 대신 구원의 판결을 경험하기 위해서입니다(1:10-11). 더 나아가 이런 삶은 두 가지 모습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분사를 통한 첨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날을 기대하고 앞당기며 사는 것입니다. 그 날을 앞당긴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회개하고 돌아올 기회를 주기 위해 저렴을 늦추고 있기 때문에(9), 만일 독자들의 증거로 많은 사람들이 회개한다면 그 때가 당겨질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참조, 마24:14; 사 66:18-22).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 계획의 완성이 신자의 삶과 증거를 통해 앞당겨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입니다. 구원받은 신자를 아직 이 땅에 살게 하신 의도가 여기 있습니다. 여전히 때는 그분 주권에 속해 있지만, 그분의 시간표에 기여할 수 있는 여지를 주신 것은 은혜입니다. 이후 저자는 권면을 강조하기 위해 주의 재림과 심판날을 부연합니다(12b-13).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불로 녹아 새 질서가 만들어질 그 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창조주이자 새 언약 관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신실함과 사랑, 곧 그분의 ‘의’를 영원히 경험할 그날, 신자인 ‘우리’는 그 약속의 성취를 기대하며 삽니다.

(3) 거짓 가르침과 관련한 결론적 권면들(14-16)

거짓 가르침과 관련해 결론적 권면을 합니다. 12b-13절에서 언급한 주의 재림 상황을 근거로 두 개의 명령법을 사용해 전달합니다. 첫째, 그 때를 기다림으로 그분 앞에서 평안 가운데 점 없이 흠 없이 발전되기를 힘쓰라스푸다사테, 14). 최후 심판을 전제로 그분 앞에서 긍정의 판결을 받도록 하라는 말입니다. 행함의 차원이지만, 선행으로 구원받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단어를 통해 부르심과 택하심을 더욱 굳게 하라는 1:10 내용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로 옮겨와 그분과의 관계 안에 있기에, 그 관계의 온전함을 경험할 수 있도록 조심해서 살라는 말입니다. 둘째,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임을 생각하라(15). 9절 내용에 근거한 생각 차원의 명령입니다. 재림에 대한 진리와 하나님의 의도를 바르게 헤아리고 살라는 말입니다. 바른 관점이 중요함을 확인시킵니다. 이어 베드로는 바울의 편지 내용을 이 명령들의 근거로 언급합니다(156-16). 그 내용이 무엇인지 언급하진 않았지만, 주목해야 할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바울의 권위 인정입니다. 바울은 ‘그에게 주어진 지혜’, 곧 구약 예언(1:21)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썼다고 합니다. 또한 그의 편지를 다른 성경들과 같은 수준으로 묘사합니다(15). 편지에 신적 권위가 있다는 말입니다. 독자들이 따라야 할 사도의 가르침(2) 속에 바울의 편지가 포함되어 있음을 말해줍니다. 둘째, ‘너희’에게 썼다는 표현입니다. 비록 바울의 편지를 직접 받은 것은 아니지만, 독자들이 편지 내용을 알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셋째, 바울의 편지는 ‘이런 일들’에 대해 말한 것이라고 합니다. 현 문맥에 의하면 주의 재림과 심판(예. 살전 5:1-10; 살후 2:2-3:2)에 대한 것과 구원에 근거한 바른 삶에 대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넷째, 일단의 사람들이 바울의 편지 중 알기 어려운 어떤 부분을 잘못 해석하고 있습니다. 마치 구약 예언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듯(참조. 1:20), 사도의 진리를 왜곡해 멸망으로 가는 이들입니다. 특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 중에서 그렇습니다. 이들은 바른 진리를 배우지 못한 자이거나 거짓 교사들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분별력 없는 자들입니다(2:14). 저자가 이처럼 바울의 예를 든 것은 자기 가르침이 진리임을 확증하는 동시에 바울의 편지도 왜곡하는 거짓 교사들의 영향력을 조심하라는 말을 하기 위함입니다.

 

편지 마무리 명령과 송영(17-18)

예수님께서는 재림의 지연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오래 참으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멸망치 않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은 불평할 때가 아니라 감사해야할 때입니다. 게으르고 방종할 때가 아니라 깨어 근신할 때입니다. 그 날을 더욱 간절히 사모할 때입니다. 천국에서 영원토록 누릴 모습은 거룩함과 경건한 삶입니다.

17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18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17-18)

편지 전체를 마무리하며 마지막 명령을 합니다. 그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사도의 진리와 거짓 교사들의 특징과 가르침에 대한 것을 모두 알았기에 무법한 자들의 유혹에 이끌려 구원과 진리 안에 굳게 서 있는 상태에서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앞 1:10-11절 내용의 반복입니다. 줄째, 오직 주와 구원자인 예수 메시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할 뿐 아니라, 거짓을 분별해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게 하는 힘입니다. 역시 1:1-10 내용입니다.

결과적으로 베드로는 (1) 주의 재림과 그에 근거한 신자 삶에 대한 진리를 바탕으로 (2) 거짓 교사들의 영향력을 분별하고 (3) 하나님 안에서의 경건한 삶을 지속적으로 굳건하게 살아가라고 권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들이 회개할 때까지 참하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세상이 유혹하는 삶 속에 흔들리지 않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 살아가야 합니다. 사람들의 약속은 변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절대로 변질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오시겠다고 약속하는 것은 마지막 날에 도둑 같이 오실 것입니다. 성도들은 심판과 구원에 대한 약속을 기억하며 말씀대로 거룩하게 살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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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03-01)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

베드로후서 3장 1-7절


인간은 합리적인 동물입니다. 인간 이성의 능력은 매우 탁월해서 다른 피조물들이 누릴 수 없는 독보적인 지위를 확립시켰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이성은 초월적인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말씀에 의해서 자신을 들어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이해하는 데는 인간의 이성을 복종시켜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대부분 할애하고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을 조롱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사도 베드로는 그들의 주장이 왜 틀렸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다양한 이론보다 말씀으로 증명합니다. 말씀대로 세상이 창조되고 또 심판이 수행되었던 것을 역사가 증거한 것입니다.

 

저자가 편지를 쓰는 이유(1-2)

현대인들은 합리적인 이성을 앞세워 성경의 말씀을 취사선택하고 합니다. 하지만 이성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되어야 할 대상입니다. 이성은 결코 그것을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을 능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 앞에 겸손한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1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두 편지로 너희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여 2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1-2)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표현으로 거짓 교사들(‘그들’)에서 독자들(‘너희’)에게로 초점을 이동합니다. 이 부분의 역할은 두 가지 요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째, 지금까지 보여준 논리 진행입니다.

베드로는 교회에 악영향을 끼치는 자들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이 편지(‘둘째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두 가지입니다. (1) 진리와 관련해 주의 재림과 심판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2) 세상을 좇아 자기중심적으로 방탕한 삶을 살아갑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저자는 바른 삶에 대한 가르침을 먼저 제시합니다(1:3-11). 이후 또 다른 문제인 진리 차원에 대해 설명해야 할 것 같은데, 저자는 잠시 다른 내용을 언급합니다. 자기 가르침을 소개한 이유와 자기와 구약 예언의 권위를 확인시키는 것입니다(1:12-21). 그러고 난 후, 거짓 교사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상술합니다(2장). 주된 초점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그들의 존재와 삶입니다. 이제 드디어 진리 차원을 다룰 차례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자기가 편지 쓴 이유를 또 소개합니다(3:1-2). 이후 3:3부터 비로소 그들의 가르침을 반박합니다.

전체적으로 (A) 저자의 바른가르침 1(삶에 대해: 1:3-11) - (B) 가르침의 이유와 권위 확인(1:12-21) - (C) 거짓 교사들의 존재와 삶지적(2:1-22) – (B') 가르침의 이유와 권위 확인(3:12) - (A') 저자의 바른 가르침 2(진리에 대해: 3:3-18) 구조입니다. 이 속에서 3:1-2은 마치 한 박자 쉬고 다음 도약을 준비하는 느낌입니다. 둘째, 1:12-21과의 연관성입니다. 이 둘은 여러 공통점들이 있습니다. 독자를 일깨우기 위해 권면하고(1:13; 3:1), 독자를 기억하게 하며(1:12, 13, 15; 3:1-2), 사도의 가르침(1:16-18; 3:2)과 구약 예언의 권위 (1:19-21; 3:2)를 언급한 것 등입니다. 특별히 거짓 교사들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마다 이런 내용들을 언급한 점, 더 나아가 편지를 쓴 이유라고 소개한 것은 독자들로 하여금 이 부분 내용에 집중해 교회 문제를 대하라고 말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런 무게감을 가진 저자의 가르침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가르침의 출처를 분별해야 합니다. 누구에게 무엇을 배우는가가 중요하다. 저자는 사도와 구약 예언자의 가르침을 잘 따르기를 요청합니다. 둘째, 기억하는 믿음을 놓치지 말라. 신자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삶을 살아갑니다. 한 번의 믿음으로 끝나는 과정이 아니기에 지속적으로 진리를 기억해 그분과의 관계 안에 머무는 것이 필요합니다. 셋째, 신앙의 삶의 시작은 바른 생각입니다. 저자는 독자의 '순전한 생각'을 일깨우기 위해 편지를 쓴다고 합니다. 넷째, 진리를 삶으로 표현하며 사는 것입니다. 3:1-2에 언급되진 않았지만, 저자가 첫 번째 가르침으로 전한 내용입니다(1:3-11). 또한 자기가 죽기 전에 그 가르침을 상기시키고 싶다고 말한 것(1:12-15)도 이 요소의 중요성을 말해줍니다. 독자는 이 편지 전체를 읽고 거짓 교사를 조심해서 이런 요소들에 집중해 살아야 합니다.

 

주의 재림과 심판에 대한 거짓 교사들의 조롱(3-4)

성도들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으로 중심을 잡는 것입니다. 성도가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 대산 세상에 규칙과 방법을 비판 없이 따른다면 그것은 이미 거짓된 가르침에 현혹된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깊이 믿으며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3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4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3-4)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 내용에 대해 다루기 시작합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라는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1:20에서 예언을 사사로이 해석하면 안 된다고 말할 때 사용했던 것인데, 이 부분에서는 주의 재림과 심판을 거절하는 거짓 교사들을 지적하기 위해 사용합니다. 독자가 알아야 하는 내용은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조롱하며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 주목할 표현이 있습니다. 첫째, 말세입니다. 직역하면 ‘마지막 날들에’입니다. 구약은 최후 심판을 수반한 구원이 완성되는 때를 의미하지만, 신약은 예수의 사역으로 종말이 시작된 것으로 여깁니다. 역사의 마지막을 의미하는 부활(참조. 단 12:2)이 예수를 통해 실현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라는 말들과 주의 재림이 별개가 아니라는 것이며, 그들의 존재가 임박한 주의 재림의 증거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재림이 없다는 거짓 교사들의 이해와 반대입니다. 둘째, ‘조롱하는 자’란 표현입니다. 꼭 이렇게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거짓 교사들(2:2)이나 멸망의 종들(2:19)로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표현을 쓴 것은 진리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저자는 조롱하는 거짓 교사들을 두 가지로 묘사됩니다. 하나는 자기 정욕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정적 심판 대상을 묘사한 2:10과 같은 표현입니다. 앞서 설명한 것의 요약이며, 주의 심판 대상임을 재차 확증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주의 재림에 대한 약속을 폄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대상들이 도리어 그분을 우습게 여깁니다. 그들에게도 논리가 있습니다. 조상들이 죽은 후 긴 세월 동안 심판의 경고는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세상은 창조 이후 지금까지 변한 게 없습니다. 내일도 그럴 것이니 주의 심판은 없다는 논리입니다. 자연 현상을 보면 그럴듯합니다.

 

거짓 교사들의 주장에 대한 비판(5-7)

하나님계서는 시간을 초월하시고 영원히 현존하신 분입니다. 천년의 장구한 세월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 하루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시간 개념과 인간의 시간 개념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의 천년이 하나님께는 하루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시간 계산은 하나님께는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5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6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7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5-7)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으니 그 말씀대로 세상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세상을 만드시고 보존하신 그 말씀의 권능으로, 죄악 가득한 노아 시대의 땅을 물로 덮어 심판하셨던 그 말씀의 권능으로 마침내 말씀을 업신여기고 조롱하는 세상을 소돔과 고모라처럼 불살라 심판하실 것입니다. 역사의 끝에 구원과 심판을 통해 그 나라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1) 세상의 기원에 대한 설명(5)

‘왜냐하면’이란 접속사로 그들 생각의 이유를 설명하고 문제점을 지적합니다. 저자가 진단한 그들 주장의 1차적 문제는 방법론의 오류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헬라어 어순과 달라 번역 과정에서 순서가 바뀌었지만, 5절 원문은 ‘이것을 원하기 때문에 그것이 그들의 관심을 피한다’는 표현이 먼저 나옵니다. 대명사와 생략된 주어를 고려해 의역하면 ‘자신들의 주장(이것)을 원하기 때문에 저자가 제시한 내용(그것)이 거짓교사들의 관심을 피해간다’입니다. 자기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다른 증거는 눈감는다는 말입니다. 논리와 이성을 중심으로 사도들과 예언의 진리를 비판했지만, 정작 스스로에게는 자신들의 방법을 일관성 있게 적용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계속해서 그들이 외면하는 세상에 대한 또 다른 진실을 소개합니다. 거짓 교사들이 하늘과 땅의 항존성을 근거로 주장하기에, 저자 역시 하늘과 땅을 예로 들어 반박합니다. 거짓 교사들 논리에 세 가지 요소를 추가해 설명한다. 첫째, 성경과 예언의 권위 인정입니다. 저자의 반론 내용은 거짓 교사들이 무시한 성경 내용들입니다. 둘째, 하나님입니다. 세상은 그냥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말씀으로 사람이 살고 있는 땅을 물로부터 물을 통해 세우셨습니다(5). 물과 분리해 땅이 드러나게 한 둘 떠날 창조의 내용입니다(창 1:9). 창조주의 말씀은 세상을 향한 그분의 의도와 관계성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말씀으로 시작된 세상은 또한 말씀으로 유지됩니다. 거짓 교사들이 주장하는 세상의 일관성도 말씀으로 드러난 그분의 신실성, 곧 의로움의 결과입니다. 셋째, 심판, 곧 피조물에 대한 창조주의 평가입니다. 그들은 세상이 창조된 이후 늘 똑같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2) 과거 물 심판(6)

과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홍수로 멸망한 적이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평가자입니다. 창조 과정에서 말씀에 대한 피조물의 긍정 응답에 ‘선하다’고 평가하셨고, 이후 부정적으로 응답하는 아담과 하와(창 3장)와 세상(창 6-9장)에 대해 부정적 심판을 보이셨습니다.

(3) 장차 올 심판(7)

하나님께서 과거에 불경건한 자들을 평가하셨다면, 지금 존재하는 불의한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물론 세상에 대한 심판 방법이 물에서 불로 달라지지만, 그분은 반드시 평가하신다는 것을 추론해야 합니다. 그 심판이 현재 진행되지 않음은 장차 있을 마지막 심판 때까지 그분이 세상을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이 점을 놓쳤습니다. 이성적이고 나름의 근거를 주장하지만, 중요한 진실에 눈감고 합리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설득력 없습니다. 저자의 이런 설명은 ‘무조건적 믿음’을 강요하는 것과 결이 다릅니다. 오히려 합당한 추론과 이성을 사용해 거짓 교사들 주장의 맹점을 납득 시킵니다. 하나님의 신비를 이성으로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지금까지 그분이 계시한 것에 근거해 생각하고 기억하고 추론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지금도 말씀으로 세상을 이끌어 가십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무시하고 세상이 죄악 가운데 살아갈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실 것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 순간부터 붙들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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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02-02)


멸망할 짐승 같은 거짓교사들

베드로후서 2장 10-22절


‘그리스도인’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곳에는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풍성함을 맛보지 못하고 세상에 끌려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알면서도 세상에 끌려 다니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당신은 무엇에 이끌려 살고 있습니까? 명예, 권세, 물질, 이성 등에게 모든 관심이 쏠려 있다면 그것에 끌려 다니는 사람입니다.

 

1-9절에 이어 거짓 교사들에 대한 설명을 이어갑니다. 베드로는 거짓 선생들의 특성은 짐승과 같이 지각없는 행동을 합니다. 음란하고 탐욕스러운 성격을 가지고 거짓된 지식을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행동에 대한 상응한 대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결국에는 그들은 멸망당하게 될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의 불의함(10-16)

하나님께서 교만하여 다른 사람에게 무례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권위 까지 무시하여 자기 멋대로 사는 자들을 심판하십니다. 다른 삶을 무시하고 깔보고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며 자신의 멋대로 살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항상 겸손 합시다.

10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하거니와 11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도 주 앞에서 그들을 거슬러 비방하는 고발을 하지 아니하느니라 12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고 그들의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13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즐기고 노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그들의 속임수로 즐기고 놀며 14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15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16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10-16)

베드로는 거짓 교사들이 자유를 강조하면서 영적 지도자의 권위를 부정하고 성적 탐닉을 부추겼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많은 모습들이 있지만, 그들은 본질적으로 큰 죄악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의 잘못된 행동은 두 가지로 특징지어 집니다.

첫째는 자신들을 높이 평가하는 교만합니다. 그들을 거만함이 대단해서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합니다. 심지어 자신을 신처럼 여기며 하나님의 종인 천사를 함부로 말하기도 합니다. 또 잘 알지도 못하면서 목소리만 크고 다른 사람에게 욕까지 하는 무례한 태도를 보입니다.

둘째는 육체의 쾌락을 추구하며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사람들을 이용하고, 바람과 같이 돈을 인생의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다. 대낮에서 술을 즐기고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방탕한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무지의 결과는 무섭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이성 없는 짐승처럼 육체의 본능을 따라 살아가는 생각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발람 선지자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 못하는 나귀의 입을 열어 선지자의 잘못된 행동을 막으셨습니다. 발람은 불의의 삯에 미혹되어 나귀보다도 못한 하나님의 뜻을 더 알지도 못했습니다. 결국 나귀에게 미친 행동을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들도 더러운 육체의 정욕에 미혹을 당해 짐승만도 못한 영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국은 도살한 짐승같이 자신의 심판 날을 앞당기고 있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짐승과 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에 짐승처럼 멸망할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 역시 진리와 삶이 함께 망가져 있기에 진노의 대상이며, 그들을 따르는 자들 역시 동일한 운명에 처해질 것이다.

(1) 거짓 교사들 1(10b-12): 천사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비방함

하나님의 부정적으로 심판 받을 대상인 거짓 교사들 상황을 부연합니다. 첫 모습은 천사들에 대한 태도입니다(10b-11). 그들은 ‘영광들’로 표현한 선한 천사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비방합니다. 실제로 선한 천사들은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졌음에도 하나님 앞에서 거짓 교사들을 비방하는 판단을 하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얼핏 보면, 이런 설명은 문맥과 동떨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천사에 대한 태도는 하나님의 심판 기준이 아닙니다. 그들을 무시해도 심판 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베드로는 거짓 교사들의 이런 모습을 언급했습니까? 핵심은 그들의 태도 이면의 상태입니다. 그들은 당돌하고 교만해서 천사들의 권위를 업신여기는데, 그 이면에는 지적 교만과 어리석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성 없는 짐승들처럼 자기들이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비방합니다. 이성적 사고를 근거로 천사들의 존재를 믿지 않고 비방의 말을 쏟아놓은 듯합니다. 천사들에 대한 이런 태도도 문제지만, 그들의 태도가 천사를 넘어 하나님의 미래 심판 영역까지 이어지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성적 관점에서 보면 주의 재림과 심판도 납득되지 않는 것이기에, 그런 가르침을 사도들이 지어낸 헛된 신화로 치부하고 조롱한 듯합니다(1:16;3:3-4). 바로 여기서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의 부정적심판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천사와 관련한 거짓 교사들의 모습은 주님을 부인하는(1) 배교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무지에 근거한 교만으로 망할 것입니다. 이성 없는 짐승들이 살찌우다가 때가 되면 잡혀 죽을 운명을 경험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2) 거짓 교사들 2(13-16) ; 불경건하고 불의한 모습

거짓 교사들의 또 다른 모습은 삶의 타락입니다. 그들은 방탕한 연회와 성적 문란과 탐욕으로 묘사되는 자신들의 불의한 삶에 대해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13).

베드로는 그들의 삶을 생각-눈-마음-삶의 길로 연결되는 인상적인 방법으로 소개합니다. 첫째, 생각과 관련하여 그들은 낮에 행하는 무절제한 연회를 즐거움으로 여기는 자들(헤구메노이, 13)입니다. 심지어 교인들과 함께하는 연회, 예를 들어 주의 만찬이나 함께 즐기는 애찬을 거짓 즐거움이 가득한 그들만의 연회로 만들려 합니다. 절제와 경건의 모습은 없습니다. 오직 주님보다 자기를 더 중시하고 육체를 좇아 타락한 즐거움만을 추구합니다(10). 둘째, 눈과 관련해 그들 눈에는 음란과 쉬지 않는 범죄가 가득합니다(14a). 교회 안에 굳세지 않은 영혼들을 죄의 길로 유혹합니다. 셋째, 마음과 관련해 그들은 탐욕으로 길들여진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14b). 마음(카르디아)은 사람 인격의 중심을 의미합니다. 그 안에 누구를 두는가에 따라 관계성이 결정됩니다. 하나님을 모신 자는 그분과의 새 언약 관계 안에 있고, 자기를 중심에 둔 자는 그분과 관계가 없습니다. 특별히 탐욕은 대표적 자기만족 표현이기에 탐욕을 중심에 둔 자는 우상숭배자입니다(눅 16:13). 이런 면에서 거짓 교사들은 저주의 자식들입니다. 넷째, 삶의 길과 관련해 그들은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불의의 삶을 사랑한 발람의 길을 걷고 있는 자들입니다(15-16). 탐욕에 대한 부연입니다. 발람은 하나님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미디안 왕 발락의 돈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러 가다가 나귀에게 책망 받았습니다(민 22:21-35).

베드로는 이 이야기를 통해 거짓 교사들의 탐욕과 어리석음을 보여줍니다. 말 못하는 나귀도 탐욕 때문에 죽으러 가는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막았는데, 정작 그들 자신은 탐욕의 결과를 몰랐습니다. 거짓 교사들을 이성 없는 짐승으로 묘사한 바 있는데(12), 여기서는 짐승보다 어리석은 존재로 묘사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속에 있는 악함을 몸을 통해 삶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자입니다. 안과 밖이 다 타락한 죄인인 것입니다.

 

거짓 교사의 거짓된 가르침(17-22)

예수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릅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악하고 더럽게 사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지는 몰라도 믿는 사람들은 아닐 가능성이 많습니다.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아는 인격적인 지식을 통하여 세상의 더러운 것들에서 벗어났습니다. 다시 그 더러운 것들에 빠지지 않도록 믿음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17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 가는 안개니 그들을 위하여 캄캄한 어둠이 예비되어 있나니 18그들이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며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는도다 19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 20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21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22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17-22)

거짓 교사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거창하고 신선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물 없는 샘’처럼 알맹이 없고 껍데기뿐인 거짓 진리에 불과합니다. 거짓 이론과 허탄한 자랑과 속임수임으로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처럼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지속성이 없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또한 범죄한 천사들처럼(4) 깊은 어둠에 던져서 주님의 재림 때 영원한 멸망을 받을 것입니다. 그들은 말로 성도들을 유혹해 잘못된 길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거짓 교사들에게 대해 몇 가지 요소를 통해 그들의 미혹 과정을 묘사합니다. 첫째, 유혹 대상은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사람들입니다. 세상 어둠의 영역에서 갓 건짐을 받은(1:4) 새신자들이나 믿음의 기초가 역한 자들입니다. 둘째, 유혹 방법은 허무맹랑하고 교만한 말입니다. 이성과 논리에 호소해 영적 존재들이나 주의 재림과 심판 등의 진리의 요소를 왜곡한 말일 것입니다. 셋째, 유혹 내용은 참 자유에 대한 약속입니다. 삶의 변화와 해방에 대한 것으로 자기중심의 자유분방한 삶을 소개하는 것이 담겨 있는 듯합니다.

이런 요소들을 담은 그들의 가르침은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먼저, 가르치는 자들 자체가 죄의 종입니다(19).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되는데, 그들은 죄를 이길 수 없고 이기고 싶지 않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죄에 굴복해 자유가 없는데 타인에게 자유를 약속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또 다른 문제는 그들의 가르침이 추구하는 삶은 불의하고 불경건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사는 것이며, 구원받기 이전의 죄 있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구원과 관련된 문제이기에 심각합니다. 베드로는 예수 믿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얻은 후 다시 세상 더러움을 주인 삼고 옛 관계 가운데로 돌아가는 것을 엄하게 경고합니다(20-21). 차라리 구원의 과정을 아예 경험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고 돼지가 더러운 구덩이로 다시 가는 것과 같습니다(잠 25:11). 끔찍합니다. 이런 면에서 거짓 교사와 그들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단순히 윤리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진리를 왜곡해 하나님을 거절하고 그것을 자기중심의 삶으로 표현하는 배교입니다.


언제나 말솜씨가 좋은 사람들에게 넘어가기 쉽니다. 그것이 감언이설인줄 모르고 말입니다. 이러한 습성 때문에 지도자들을 위해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인이신 교회가 악한 영의 이단들의 잘못된 교훈에 미혹되는 일이 없도록, 하나님의 말씀에 깨어 자신의 사명에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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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02-01)


거짓 교사들의 특징과 결과

베드로후서 2장 1-9절


학교에서 선생님께서 제자들에게 잘못 가르쳐서 문제가 틀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특히 인생을 좌우하는 대학입학 시험이라는 아마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항의하고 대단한 문제로 번질 것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부분에서 가르치는 사람들이 잘못된 것을 가르치게 되면, 개인적으로는 영성은 파괴되고 구원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사회적으로는 대단한 파급되어 혼란을 좌초할 것입니다.

 

본문은 베드로는 거짓 교사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다루기 시작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가운데 거짓 선지자들이 나온 것처럼, 초대교회 당시에도 교회에 거짓 교사들이 출현할 것입니다. 그들은 옛적에 거짓 선지자들이 결국 심판을 받았듯이 거짓 교사들은 심판을 받고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거짓 교사에 대한 분별력이 있길 원합니다.

 

거짓 선지자와 교사들의 특징(1-3)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만 당신의 필요를 채우는 수단으로 해석하려 할 때 이단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죄의 은총을 망각하면서 열정이나 감사 그리고 영적 열매도 없다면 이단을 노려보고 있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언제나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집중할 때 흔들림이 없습니다. 바로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1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2여럿이 그들의 호색하는 것을 따르리니 이로 말미암아 진리의 도가 비방을 받을 것이요 3그들이 탐심으로써 지어낸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득을 삼으니 그들의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멸망은 잠들지 아니하느니라(1-3)

베드로는 생의 마지막을 예건하며 신앙의 후배들에게 바른 지식을 가짐으로써 신성한 성품으로 변화되는 삶을 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가장 큰 방해가 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단적 교리를 가르치는 거짓 선지자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거짓 선지자를 파악하는 기준을 제시합니다.

(1) 거짓 교사들의 영향에 대한 경고(1a)

베드로는 거짓 선지자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그런 자들이 필연적으로 있을 것이라고 확언합니다.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 중에도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상숭배하고 미혹해서 배교(背敎)시킴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하였습니다. 영적으로 타락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미혹한 영은 초대교회에도 거짓 교사들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몇 가지 독특한 점이 있습니다. 첫째, 구약시대 사람인 거짓 선지자들을 언급한 점입니다. 이들은 당시 교회와는 상관없는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먼저 소개합니다. 둘째, 거짓 교사와 관련해 거짓 선지자들을 주절이고 거짓 교사들이 더 부각되는 구조로 설명합니다. 셋째, 독자 문제와 관련한 사람들을 거짓 교사로 부른 점입니다. 신약에서 여기에만 나타납니다. 넷째, 거짓 교사의 존재를 미래형으로 기술한 점입니다. 이런 독특함에도 저자의 표현은 교회 문제에 대한 탁월한 인식을 보여줍니다. 먼저 구약의 거짓 선지자를 언급한 것은 구약 예언에 대한 1:19-21 내용 때문인 듯합니다. 참 예언이 하나님 기원의 메시지를 성령으로 전달하는 것(1:20)이기에 거짓 선지자들은 선포의 기원과 전달 방식에 있어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들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심판을 부인하고(겔 13장) 자기 이익을 위해 평안만 전했습니다(렘 6:13-14; 미 3:5). 그들은 하나님의 부정적 심판의 대상이었습니다(렘 14:13-15). 문제는 이들이 하나님 백성 중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들을 미혹해서 그분께 돌아가는 길을 막아 멸망을 피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베드로는 이런 모습이 과거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상기시킵니다. 비록 교회에서 문제 일으키는 자들이 예언을 무시했기에 ‘선지자’ 대신 ‘교사’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그들의 본질과 행태는 동일합니다.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은 하나님에 기인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재림과 심판에 대한 가르침을 무시하고 오직 평안과 쾌락만을 추구합니다. 그렇기에 심판으로 망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인 독자들 안에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독자들도 망할 수 있었습니다. 구약 거짓 선지자들의 모습은 거짓 교사들에 의한 폐해와 결과를 짐작케 합니다. 이런 연결은 4-8절에서 과거의 예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을 설명하는 방식과 잇닿아 있습니다.

(2) 거짓 교사들의 특징과 운명(1b-3)

거짓 교사들의 특징을 소개합니다. 그들이 ‘너희’ 안에 있다는 제로 시작합니다(la). 어떻게 교회 속에게 되었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점은 교회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세 가지 차원으로 그 모습으로 설명합니다. 첫째, 그들 개인에 대해서입니다(16). 그들은 이단 가르침을 비밀리에 교회 안으로 유입시킵니다. 저자는 멸망이란 표현을 통해 그 가르침의 끝이 부정적임을 말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교회 안에서 계속 진리를 희석시킵니다. 심지어 자기를 구원하신 주도 부인합니다. 공개적 선포는 아닐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교회 모임에서 축출되어 영향력을 끼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부분적인 왜곡과 그에 따른 삶의 모습으로 배교를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둘째, 교회 안 다른 성도들에 대해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극한 방탕의 삶을 따라가고(2a), 거짓말로 착취를 당하며 탐욕의 희생양이 될 것입니다(3). 거짓 교사들의 배교의 영향으로 성도의 삶이 망가지고 교회가 허물어진다는 말이다. 셋째, 세상 속 교회에 대해서입니다(2b). 삶이 망가진 성도와 교회는 세상에서 욕을 먹고 진리의 도, 곧 복음과 하나님 따르는 삶이 비방 받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세상을 하나님과 연결하는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하고, 하나님을 수치스럽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단순히 한 개인의 일탈 수준에서 끝나지 않으며, 개인 차원의 배교가 성도와 교회를 흔들고 복음을 막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들에게 오래전에 결정된 그분의 심판은 지체하지 않고 반드시 임할 것입니다(36).

 

하나님의 심판의 예들(4-9)

주변의 말들에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를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절대 거짓 가르침에 휩쓸리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말하고 어떤 행동을 하든지,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십자가의 진리만을 따르겠다는 의연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4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5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6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7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8(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9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4-9)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예를 드는데, 그 이유는 앞에서 심판이 임박했다고 말했지만 현실은 달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심판 받지 않고 있었고, 그들이 재림과 심판의 가르침을 조롱할 만도 했습니다(3:35). 저자는 하나님 심판의 확실함을 더 설명하기 위해 과거 역사를 통해 세 가지 예를 듭니다.

(1) 범죄한 천사들에 대한 심판(4)

첫째, 범죄한 천사에 대한 심판입니다(4). 노아 홍수와 관련해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맞이한 천사들입니다(창 6:1-4). 구약에는 이들에 대한 심판이 기술되지 않았지만, 유대교 전승을 담고 있는 에녹 1서 6-19장에 묘사되어 있고 유다서 6절에도 그 표현이 있습니다. 주목할 것은 그 천사들의 상태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할 때(계 20:10,14)까지 지옥에 감금당해 있습니다. 하나님이 단죄하셨지만, 완전한 심판은 유보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거짓 교사들과 관련해 하나님 심판의 확실성과 유보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2) 노아 홍수 때의 구원과 멸망(5)

둘째, 홍수로 인한 심판입니다(5). 첫째와 달리 구원과 멸망이 함께 있습니다. 죄로 얼룩진 옛 세상을 물로 심판하실 때 노아와 그 식구들은 보존하셨지만 다른 이들은 멸망케 하셨습니다. 이 부분은 심판 과정과 관련해 주목할 표현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노아와 관련해 사용된 ‘의’입니다. 노아가 의롭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의 의, 즉 심판을 행하실 창조주의 신실함을 선포했다는 말입니다(참조. 요세푸스 Ant 1:74).

다른 하나는 세상 사람을 묘사하는 불경건입니다. 하나님의 의에 합당하게 반응하는 신자의 경건(1:3,6,7; 3:11)과 반대 상태입니다. 결국, 창조주 하나님의 의를 따른 심판으로 경건하게 사는 자는 구원받았고 그렇지 않은 자는 벌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3) 소돔과 고모라 때의 구원과 멸망(6-8)

셋째, 소돔과 고모라 성을 잿더미로 만든 심판입니다(6-8). 둘째처럼 멸망과 구원은 함께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했습니다.

‘경건하지 않은 자’라는 표현을 통해 그들이 홍수로 심판 받은 자들과 같은 상태였음을 말해줍니다. 또 무법하고 방탕한(아셀게이아, 2) 자들이라고도 묘사합니다. 이 역시 진리에 순종하지 않는 거짓 교사들의 상태와 같습니다. 반면, 롯은 구원받았습니다. 그의 특징은 ‘의로움’입니다. 노아에 대해 사용한 것과 달리,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합당한 반응을 의미합니다. 절대적 의미라기보다는, 하나님을 인식하고 당시 세상과 구별되게 살았던 롯의 모습을 말합니다.

(4)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재진술(9)

4-8절의 예를 따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정리합니다. 두 가지 원리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평가하는 분입니다. 창조주이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피조물의 반응을 평가하셨고(창 1:4,31), 마지막 날 모든 것을 평가하실 것입니다(계 20:10, 12-13).

둘째, 하나님의 평가는 공정합니다. 그분의 의로움, 곧 창조주의 신실함에 대한 피조물의 반응을 기준으로 긍정 반응인 경건은 구원으로, 부정 반응인 불의와 불경건은 진노로 응답하십니다(참조. 롬 1:18). 이 과정에 불공정은 없습니다. 오직 행위대로 응답하십니다(참조, 롬 2:6-11;계 20:12).

셋째, 하나님의 심판은 때가 있습니다. 그분의 평가가 당장 나타나기도 하지만 미뤄지기도 합니다. 주의 재림으로 진행될 최후 평가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평가를 게을리 하시거나 구원과 멸망의 판결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3). 단지 유보하고 계실 뿐이다. 오래 참으심으로 회개의 기회를 주기 위함입니다(3:9). 이 원리들은 거짓 교사들에게 적용됩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 있음에도 창조주 하나님께 합당한 반응을 하지 않기에 진노의 대상입니다. 단지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최후 심판을 유보하고 계실 뿐입니다.


세상의 지식은 잘못 배우면 다시 바르게 배워 수정할 수 있지만, 거짓된 교리에 학습되어지면 잘못된 진리를 빠지면 빠져 나오기 매우 힘듭니다. 영적인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불의한 사람들을 벌하시고, 경건한 사람들을 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단들을 경계하며 예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바르게 배우고 제대로 살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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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01-02)


그리스도의 영광과 성경의 예언

베드로후서 1장 12-21절


무엇인가를 배울 때 계속해서 읽고 쓰며 반복하는 것을 ‘반복학습’이라고 합니다. 공부할 때 한 번만 보고 알면 잊어버리기 쉽지만, 계속해서 반복하면 쉽게 잊어버리지 않게 됩니다. 기독교 교육은 항상 반복교육입니다. 하나님과 사람들 그리고 구원 받은 성도들의 삶에 대해 교육되어진 것입니다. 베드로도 반복 학습 효과를 알았습니다.

 

앞서 언급한 신자의 삶에 대한 가르침(3-11절)을 부연합니다. 2:1부터 거짓 교사들 문제를 다루기 전에 저자의 가르침의 권위와 확실성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려는 의도입니다.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12-15절은 독자를 향한 베드로의 태도와 마음을 전합니다. 16-18절은 예수님의 목격자임을 강조해 가르침의 권위를 확증합니다. 19-21절은 성경의 예언에 대한 태도를 다룹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기억(12-15)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반복해서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신 후에도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베드로는 예수님께 받은 사명을 감당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듯이 베드로는 예수님께 받은 사명을 감당하고 천국에 가고 싶어 한 것입니다. 자신이 죽임당할 날이 임박했음을 알고서 성도에게 말씀을 일깨워 주려고 합니다.

12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13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14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15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내가 떠난 후에라도 어느 때나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12-15)

본문은 서신의 두 번째 부분입니다. 베드로가 진단하는 소아시아 문제는 거짓 교사들이 교회 내에서 종말과 성도의 삶에 대한 왜곡된 가르침을 퍼뜨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성도의 삶에 대한 바른 가르침을 첫 권면으로 제시했습니다(3-11).

다음 과정은 종말에 대한 바른 가르침이나 거짓 교사들에 대한 반박이어야 할 것 같은데, 저자는 대신 권면의 이유를 소개하고 자기 가르침의 권위와 확실성을 부연합니다. 거짓 교사들의 영향력을 분별할 수 있도록 분명한 근거를 제공하기 위함입니다. 크게 세 가지 영역을 추가합니다. 첫째, 12-15절은 독자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전해서 자기 가르침의 중요성을 각인시킵니다. 이런 의도는 여러 방식을 통해 전달됩니다. 첫째, 1인칭과 2인칭의 친밀한 대화 구도 설정입니다. 3-11절은 주로 신자의 삶이라는 객관적 주제에 대해 독자에게 명령하는 방식이었지만, 이 부분에서는 1인칭 단수 지시어를 사용해 ‘나와 너희’의 관계를 만듭니다. 어조도 명령법 대신자기 상황을 소개하는 다소 부드러운 방식을 사용합니다. 저자의 관심을 표현해 독자들 마음을 이끌어내기 위한 상황 설정입니다. 둘째, 독자들을 이미 진리 안에 서 있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12). 베드로는 편지 전체에 걸쳐 한 번도 독자들을 책망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믿음 안에 있는 자로 인정하고, ‘그들’이라 부르는 거짓 교사들의 위험성을 경고할 뿐입니다. 3-11절도 명령법을 사용했지만, 책망은 아닙니다. 오히려 독자를 ‘형제’로 부르며 신자 삶에 대한 진리를 확인시켰습니다(10). 편지에서 거짓 교사들의 상황을 미래형으로 묘사한 것(2:1,2,3,12; 3:3)은 아직 그들의 영향력이 교회를 본격적으로 흔드는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영향력은 실재합니다. 이 상황에서 베드로는 독자가 여전히 진리 안에 있다는 신뢰를 전합니다. 거짓 교사들의 영향에 대해 저자의 가르침에 계속 거하라는 간접 명령으로 볼 수 있습니다. 셋째, 양괄식 구조를 통해 전달합니다. 12절에서 항상 기억하게 하기 위해 3-11절 내용을 썼다고 말하고, 15절에서 다시 어느 때나 생각나게 하기를 힘쓴다고 합니다. ‘항상 기억하라’를 앞뒤에 배치한 반복을 통한 강조합니다. 저자의 가르침에만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넷째, 저자의 죽음에 대한 언급입니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기억하라고만 해도 됩니다. 그럼에도 소개하는 것은 독자를 향한 저자의 강렬한 사랑과 의무감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저자는 임박한 죽음을 인식하고 있습니다(14). 자기가 죽더라도 독자들은 바른 진리를 기억해 그 안에 계속 머물게 하고 싶었습니다. 숨이 다하기까지 그 일을 계속하려 했고, 이제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진리를 확인시켰습니다(15). 저자는 독자들이 자신의 이 마음을 알아 자기 가르침에 집중하기를 기대했습니다. 마치 자기 명령을 유언처럼 생각하고 항상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12-15절을 단순히 저자의 사역 변호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더 나아가 이 부분은 사역자와 성도의 관계도 잘 보여줍니다. 사역자는 성도가 진리 안에 계속 서기를 기대하는 사랑의 마음으로 진리를 전하고, 성도는 사역자의 그 마음을 헤아려 지속적 삶을 위해 진리의 가르침을 항상 기억하고 적용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의 목격자로서 베드로 가르침의 확실성(16-18)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으므로 성령의 감동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감동을 받은 수많은 사람이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정리한 신학을 바탕으로 해석해야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제대로 깨닫기 위해 늘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16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17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8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16-18)

저자 가르침에 대한 두 번째 부연입니다. 12-15절이 독자와의 관계에 근거했는데, 16절 구조에 의하면 이 부분에서 저자의 초점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가르침의 내용입니다. 예수 메시아의 능력과 재림에 대한 것이며, ‘알게 하다’ 동사를 사용해 독자들에게 전한 내용입니다. 편지에서 처음 등장하는 주제입니다(참조. 3:4,12). 3-11절에서 신자 삶을 다룰 때 언급하지 않았기에 별개의 가르침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주의 재림은 어둠의 통치 영역을 끝내고 구원을 완성하는 과정입니다. 여기에는 창조주로서 모든 것을 평가하고 심판하는 하나님의 공의로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자의 삶은 예수님을 통해 구원 과정에 참여하게 된 것에 대한 감사로 새 언약 관계에 충실해야 하는 차원도 있지만, 최후 평가를 염두에 두고 조심해서 정성스레 살아야 하는 차원도 있습니다. 전자가 구원 과정의 과거(9)에 근거한 것이라면, 후자는 미래 완성(11)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 두 요소 중 어느 한쪽을 놓치면 구원 과정과 신자의 삶은 사상누각이 됩니다. 이런 면에서 사도의 가르침은 구원의 과거와 미래를 함께 붙잡아 오늘을 바른 신자의 모습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둘째, 가르침의 기원입니다. 두 분사절의 대조를 통해 전달됩니다. 독자에게 전한 주의 재림에 대한 가르침은 교묘히 꾸며낸 신화를 따라 전한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거짓 교사들이 이렇게 비방한 듯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의 위대함을 직접 목격한 증인으로서 전했다고 합니다.

17-18절에서 그에 대한 설명을 추가합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 사역, 곧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과정에서 저자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거룩한 산에 올라갔을 때 경험한 사건입니다(마 17:1-8). 베드로는 예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16:마 17:2). 그분이 원래 소유하고 있던 것으로 부활을 통해 드러낼 영광이자 장차 다시 오실 때 보일 능력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음성도 들었습니다(17-18: 마 17:5). 예수님께서 구약(시 2:7; 참조. 삼하 7:12-14)에서 약속한 메시아라는 하나님의 확증이요 선포입니다. 이 두 경험은 주의 재림에 대한 저자의 가르침이 참이라는 것을 방증합니다. 장차 능력으로 재림할 영광의 예수, 하나님께서 친히 확증한 메시아 예수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예. 마 24:44; 막 13:26). 이런 면에서 베드로의 가르침은 거짓 교사들이 폄하하듯 한갓 신화 속 허구가 아닙니다. 하나님에 기인한 진리이며, 그분들에 의해 반드시 실현될 실재입니다. 독자들은 이미 서 있는 그 진리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의 예언에 대한 확증(19-21)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대하는 자세에 따라 구원과 멸망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절대 권위를 지닌 삶의 척도로 삼아야 합니다. 모든 성도는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계 22:7)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지켜 행해야 합니다.

19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20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21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19-21)

저자의 가르침에 대한 세 번째 부연입니다. 재림에 대한 가르침은 구약 예언과 맥을 같이하고 있기에 권위와 확실성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예언은 어두운 세상에서 버티고 살아가게 하는 소망의 등불과 같습니다(19). 문제는 신뢰성입니다. 성취함 없는 예언은 가짜이기 때문입니다(신 18:22). 그렇다면 주의 재림에 대한 예언은 확실한 빛입니까?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한 열쇠는 예수입니다. 메시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예언이 예수를 통해 성취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의 확증을 들은 베드로의 경험은 예언의 확실성에 대한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재림과 심판으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는 ‘주의 날’(참조. 3:10)에 대한 구약 예언(예. 사 13:6,9; 겔 30:3; 욜 1:15; 2:11; 3:14; 암 5:18,20 등등) 역시 성취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구약의 예언은 확증된 예언이자 동시에 장차 성취될 예언이기도 합니다. 독자들은 그 예언이 온전히 성취되는 그날, 마치 새 날을 알리는 샛별이 마음에 떠오르듯 그때까지 예언의 말씀에 집중하고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19). 하지만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예언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주의 날이 없다고 말하는 거짓 교사들처럼 되면 안 됩니다. 예언은 사람들이 말한 것이지만, 하나님께 기인한 것으로 성령을 통해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성령 안에서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 과정과 예수의 존재와 사역의 관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그 관점이 없습니다. 주를 부인하고(2:1) 탐심을 채우고자 성경을 아전인수로 해석해서 사람들을 이익의 도구로 삼습니다(2:3). 세상을 즐기는 삶을 포기하지 않아 미래 심판의 진리를 부인합니다(3:3-4). 성경과 삶을 대하는 동기와 태도가 복음과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다릅니다. 예수님에 대한 실제 경험으로 복음의 참 관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독자들은 저자의 가르침을 따라 주의 약속을 담고 있는 구약 예언을 기억하고(3:2), 거짓 교사의 교훈에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대로 예수님께서 오신 메시아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다가 가셨던 것처럼 다시 오실 것입니다. 성도들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고대하면서 영적 진보를 이루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주신 성경을 통해 날마다 예수님을 알아가는 데 힘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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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01-01)


바른 신앙을 위한 준비

베드로후서 1장 1-11절


‘이름 값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명성에 걸맞은 행동이나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 혹은 ‘그리스도를 따른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 ‘이름값’하는 생활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베드로의 첫 편지가 고난 받는 성도들을 향한 것이었다면, 두 번째는 거짓 교사들의 영행을 받고 있는 성도들 위한 편지의 시작 부분입니다. 본문은 두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1-2절은 도입부로 발신자와 수신자와 인가 담겨 있습니다. 3-11절은 편지 몸말의 시작으로 하나님의 부르심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근거해 바른 삶을 만들어가라고 권면합니다.

 

베드로의 안부 인사(1-2)

하나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흔히 이것을 지적이고 사변적인 측면에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베드로는 매우 실천적이고 윤리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을 설명합니다. 믿음은 단순히 인간의 신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믿음에 근거한 경건한 삶을 통해 점진적으로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1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1-2)

사도 베드로는 소중한 믿음을 선물로 받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믿음 안에서 날마다 성장하기를 바라며 두 번째 서신을 보냅니다. 당시 거짓 교사들에게 신앙이 미혹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교만한 우월의식과 무질서한 방탕한 생활을 살았습니다. 이러한 거짓 교사들의 삶으로부터 성도들을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1) 발신자(1a)

어떤 사람들은 본 서신을 익명의 저자가 쓰고 베드로의 이름을 붙였다는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주장에 결정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1절에 베드로가 저자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베드로는 순교하기 직전인 65-66년에 로마에서 이 편지를 썼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수신자들에게 소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라고 합니다.

① 예수 그리스도의 종(1a)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에 복종하며 그분의 명령을 따르는 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은 겸손함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의 일에 쓰임을 받는다는 영광스러움을 내포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이리에 쓰임을 받는 종이 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② 사도(1b)

‘사도’라는 표현은 베드로가 사도적 권위를 가지고 이 편지를 썼음을 드러냅니다. 권위의식을 가지고 우월성 때문에 말한 것도 아닙니다.

(2) 수신자(1b)

이 편지의 수신자를 베드로는 ‘믿음을 받은 자들’이라고 소개합니다. ‘믿음을 받았다’는 표현은 믿음이 외부로부터 주어진 선물임을 나타냅니다. 믿음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믿음을 갖게 된 것에 대해서도 감사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소아시아 성도들이 받은 믿음을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이라고 묘사합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믿음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베드로의 믿음과 성도의 믿음은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입니다. 그는 이 믿음이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우리 하나님’과 ‘구주’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우리 하나님과 구주’라고 고백합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 믿음을 받은 것입니다.

(3) 인사말(2)

베드로는 소아시아의 성도들을 향해 문안 인사에서 ‘믿음’과 ‘지식’이라는 두 개념을 소개합니다.

① 믿음(2a)

그는 먼저 소아시아 성도들의 ‘믿음’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특히 ‘우리와 같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이라는 표현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은 사도들의 믿음과 동일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믿음은 사도들의 믿음보다 열등하거나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동일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통하여 받은 것입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믿음이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우리가 그것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믿음이 개인의 자질이나 노력에 의한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믿음이나 독자들의 믿음은 모두 같은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동일하게 보배로운 것입니다. 베드로가 동일한 믿음을 강조하는 이유는 독자들 가운데 활동하고 있던 거짓 교사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사도들이 가르친 것과 다른 믿음을 가르치면서 독자들을 현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독자들이 가져야 할 참된 믿음은 사도들의 믿음과 동일한 것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둘째, 베드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해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은 그를 아는 지식을 통해서 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지식’(에피그노시스,επίγνωσις)은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사변적인 지식이 아닙니다. 이것은 복음에 근거한 믿음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개인적으로 더욱 친밀해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하나님(3-11)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셔서 그의 성품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또한 성도들에게 영원한 생명과 신령한 경건에 이르게 하는 모든 은사를 아낌없이 주십니다. 그래서 영광의 광채와 탁월한 덕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권합니다.

3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5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8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9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10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11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3-11)

모두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의 선물인 성령님을 받았습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죄에 넘어지지 않고 하나님을 닮아가도록 도우십니다. 성령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하고 살아가십니까? 처음 구원 받을 때와 지금 당신은 얼마나 변화된 삶을 살고 있습니까?

(1)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3-4)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을 명하시거나 기대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한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경건한 삶을 살라고 명하시기 전에 먼저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을 주십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신 두 가지 일을 설명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의 경건한 삶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능력을 이미 주셨습니다(3). 둘째,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의 현재적 삶에 필요한 것만 주신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크고 보배로운 약속을 주셨습니다(4).

먼저 경건한 삶을 위한 능력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아는 지식을 가진 자들에게 주어진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경건에 필요한 능력이 ‘믿음’이 아닌 앞을 통해 주어진다고 말하는 것은 다소 생소합니다. 그러나 저자가 ‘믿음’대신 그리스도를 앎에 대해 언급한 이유는 아마 스스로 믿는다고 주장하면서도 음행과 불의를 일삼던 거짓 교사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입니다(2:1-14). 그러한 믿음은 사도들이 독자들에게 전한 믿음이 아니며 그것을 통해서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누릴 수 없습니다. 사도적 믿음은 그리스도를 바로 아는 것에 근거를 둡니다. 따라서 저자는 믿음보다 앞에 더 많은 관심을 둡니다. 2절의 은혜와 평강이나 3절의 신기한 능력은 모두 그리스도를 앞으로 주어집니다. 5절에서는 지식이 믿음과 덕이란 기반 위에 세워지는 것이며, 8절에서는 5-7절에서 설명한 믿음에 근거한 경건한 삶이 곧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경건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즉 믿음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1), 경건한 삶에 필요한 모든 능력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경건을 위한 능력에 이어서 하나님께서 주신 또 다른 선물이 있는데 그것은 곧 보배롭고 큰 약속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말하는 약속은 1:11과 3:13을 통해 볼 때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 곧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약속을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약속을 바라봄으로 세상의 썩어질 것에서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현재적 삶에 필요한 모든 능력과 미래를 위한 약속을 주신 것은 그리스도인들로 이 세상에서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2) 믿음에서 사랑으로(5-7)

5절에서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은 3-4절에서 설명한 하나님의 구속사역이 지금부터 저자가 하는 권면의 근거와 기초가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경건한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고 또한 위대한 약속을 주셨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은 5-7절에서 설명하는 믿음의 덕목들을 실천하도록 힘써야 된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힘써야 할 여덟 가지의 덕목을 소개하는데, 그것은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5-7)고 믿음에서 시작하여 사랑으로 끝납니다. 이미 1절에서 우리가 가진 보배로운 믿음을 하나님에게서 받았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선물은 모든 경건한 삶의 기초이며 원동력입니다. 반면에 ‘사랑’은 그 완성이며 끝입니다.

‘사랑’은 모든 기독교적인 덕목의 왕관입니다. ‘믿음’과 ‘사랑’ 사이에 있는 여러 덕목들은 순서에 있어서 서로 어떤 논리적인 연관성이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덕목들을 힘써 행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을 성취하는 것입니다(10).

(3) 힘써 그리스도를 알아가라(8-10)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 성육신하셨고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셨으며 나중에 다시 재림하실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아는 것을 말합니까? 그러나 이러한 교리적 내용들을 알고 있는 것은 엄격히 말하면 그리스도에 관해 아는 것이지 그리스도 자신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을 매우 실천적이고 점진적인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실천적이란 것은 5-7절에서 열거한 덕목들을 힘써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점진적인 이유는 그것이 믿음에 근거한 삶의 과정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8절에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 즉’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흡족하다’(플레오나조,πλεονάζω)라는 단어는 ‘증가하다’, ‘성장하다’ 혹은 ‘더 해지다’라는 뜻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지식은 그리스도인들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성장해가는 것이며 마치나무가 자라서 열매를 맺는 것과 같습니다.

반면에 이러한 지식의 성숙이 없으면 영적인 무지에 빠져서 진리를 보지 못하고 맙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가리켜 근시안이나 소경과 같이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의 덕목을 열심히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스스로 영적인 진리를 외면하고 보지 않기 위해서 눈을 감는 것과 같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결코 철학적인 사변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가 우리를 부르신 목적에 합당하게 경건한 삶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것입니다.

(4)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11)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에게 약속으로 주어진 것입니다(4). 그러나 그 약속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이 경건의 덕목들을 힘써 행함으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을 굳게 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행위 구원을 말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너희에게 주시리라’는 표현을 통하여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힘써 경건을 행하는 것도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믿음이나 신기한 능력에 근거한 것이기에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선물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생활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성령이 임하기 전과는 놀라운 모습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성도들도 과거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와는 변화된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에 속한 자들이 어떤 환경으로 유혹해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항상 변함없이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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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서론)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 해.

머리 들고 멀리 멀리 바라보는 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위의 노래는 손양원 목사님의 <주님 고대가>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주님 오심을 기대하고 있겠습니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갈수록 ‘재림’이나 ‘심판’이 신자들에게도 긴박하거나 절대적인 진리로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문제는 이것이 신자들의 실제적인 삶에 미치는 심각한 영향입니다. 이와 같은 재림과 심판에 대한 신앙적 회의와 그로 인한 도덕적 타락에 대한 문제의식이 베드로후서의 출발이 아닌가 싶습니다. 

교회의 위기는 성도의 신앙적 삶의 위기에서 기인합니다. 교회 구성원인 성도 각 개인의 삶의 정황이 곧 교회의 형편을 좌우합니다. 그렇다면 교회 위기의 배경은 무엇입니까?

베드로전서는 외적인 박해로 인한 위기에 대한 지침서인 반면에, 베드로후서는 이단 사설로 인해 교회의 내적 위기에 대한 경계서입니다. 성도 각 개인이 거짓 교회와 것 메시지에 물들어 반성경적인 신앙을 지난다면 교회는 영원히 멸망할 것입니다.

 

베드로후서의 저자

(1) 내적 증거

베드로는 서신 초두에 분명하게 자신을 ‘시몬 베드로’라고 밝혔습니다(1:1). 만일 위작이라면 그냥 베드로 사도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맨 처음 부르심 받은 제자들 중의 하나이며, 예수님께서 항상 데리고 다니시던 수제자 그룹에서도 대표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 생생한 신앙의 경험담, 즉 변화산에서 주님이 변모하신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벧후 1:16-18). 이는 자신이 경험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내용입니다. 자신이 예수님에게 직접 그의 죽음에 관한 예언을 들었다고 말합니다(1:14). 그는 바울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3:15). 본서가 베드로전서의 후편임을 밝혔다(3:1).

(2) 외적 증거

신약성경 중 베드로후서처럼 저자의 진위 논란이 많은 정경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2-3세기부터 논란의 대상이었습니다. 유세비우스(Eusebius)는 베드로전서는 베드로가 썼지만, 베드로후서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교부 오리겐도 다소 의심스럽다고 했습니다. 종교 개혁 시대에 와서도 루터(Luther)만이 베드로의 저술로 인정했고, 칼빈(Calvin)이나 에라스무스(Erasmus)는 부인했습니다. 그 이유는 위에서 말한 필체의 문제점이었습니다.

다음으로 문체나 어휘가 약간 차이가 있는 것은 ‘베드로전서’는 베드로의 감독 하에 실루아노의 대필로 작성된 것이라면, ‘베드로후서’는 베드로가 직접 작성한 것임으로 문체가 다른 것입니다.

 

베드로후서의 시기, 장소

(1) 기록 시기

본 서신은 베드로에 의해 집필 시기는 63-64년에서 순교한 주후 58년경 사이일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 13절에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 옴을 암시한 듯한 내용으로 볼 때, 67-68년 사이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2) 기록 장소

바울이 기도한 장소는 로마 감옥 안에 있을 때인 로마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베드로후서의 수신자

이 서신의 수신자는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1:1)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3:1)라고 쓴 것을 볼 때, 이 서신의 수신자들이 적어도 베드로가 보낸 첫 번째 편지를 받아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3장 15절에서는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라고 함으로, 그들은 사도 바울의 편지의 수신자이기도 하다. 베드로전서와 마찬가지로 그가 이 편지를 로마에서 썼다면, 그의 편지의 수신자들은 사도 바울의 편지의 수신자이기도 한 소아시아 교회 신자들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본 강해서에서는 수신자를 소아시아 성도들이라고 확정하며 서술해 갈 것입니다.

 

베드로후서의 목적

이 공동서신 역시 베드로의 첫째 서신과 마찬가지로 특정한 교회나 성도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던 모든 교회를 대상으로 한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서신을 쓰게 된 목적을 두 차례에 걸쳐서 밝히고 있습니다.

12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13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 15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내가 떠난 후에라도 어느 때에나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1:12,13,15)

1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두 편지로 너희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여 2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3:1,2)

베드로후서는 어떤 목적으로 기록했습니까? 그 목적은 크게 베드로 사도의 개인적인 문제와 당시 세계 교회의 보편적인 당면 문제 때문일 것입니다. 즉 사도 베드로는 유언적으로 온 교회에 당부하고 싶은 말을 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는 ‘일깨운다’라는 단어로 성도들이 영적인 감각을 잃어버리거나 혹은 그와 같은 위험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벧후 1:15)는 말대로 입니다. 그 다음 세계 각처에서 성행하는 이단적 종교 사조인 ‘영지주의 풍조’를 경계하고자 본 서를 쓴 것으로 추정됩니다(벧후 2:1-3). 영혼만 귀한 것이요, 육체는 하찮은 것이니 육체로 어떤 죄를 지어도 구원과는 관계없다는 교설로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종말적인 심판을 염두에 두고 거룩한 생활을 할 것을 강조합니다.

 

베드로후서의 주제

‘신앙적인 참 지식’이 본 서의 큰 주제입니다. ‘앎’, ‘지식’(Know, Knowledge)이라는 말이 16회나 반복됩니다. 끝에도 ‘오직 우리 주 곧 구주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벧후 3:18)고 했습니다. 이는 당시 특별한 영적 지식과 지혜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미혹하는 영지주의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생활을 강조했습니다(벧후 1:5-7). 영지주의에 미혹된 자들이 극단적으로 무도덕한 생활을 했기에 그리스도를 닮아 거룩한 생활을 하는 것이 참 지식과 지혜임을 교훈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생활은 종말에 필히 시행될 하나님의 대심판을 염두에 두고 행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신앙의 참 지식, 참지혜가 본서의 강조점입니다.

 

베드로후서의 내용

제1장

1-2 발신자와 수신자 및 안부

3-11 사도의 메시지

12-15 편지를 쓰는 목적

16-21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에 대한 반론(1) : 예수님의 능력과 재림

(1) 사도가 직접 목격하였고, 더 확실한 구약의 예언

(2) 구약 예언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

 

제2장

1-3 거짓 선생들이 일어날 것에 대한 예언

4-10a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에 대한 반론(2) : 심판

(1) 노아 시대

(2) 소돔과 고모라

10a-16 거짓 선생들의 실제적인 삶 : 탐욕, 쾌락 그리고 거짓된 가르침

17-22 다시 정욕에 굴복하여 사는 자들에 대한 경고

 

제3장

1-2 두 번째 편지를 쓰는 목적

3-4 말세에 심판과 재림을 기롱하는 자들의 주장

5-10 기롱하는 자들(거짓 선생들)에 대한 사도의 반론(3) :

(1) 불로 심판 받도록 보존

(2) 주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재림과 심판

11-16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17-18 마지막 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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