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13-01)
법궤의 운반과 웃사의 죽음
역대상 13장 1-14절
잘못된 사상이나 신학이 교회를 넘어뜨릴까, 진리를 훼손할까 노심초사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목사는 떠날 사람이니 교회는 우리가 지켜야 한다는 교회도 있습니다. 수설의 강박증에 예민하고 피곤합니다. 늘 전투태세입니다. 누가 보호자이고 누가 보호의 대상인지 잊은 것은 아닙니까?
- 13-16장은 한 단락으로 다윗이 언약궤를 들여오는 이야기인데, 14장만 다윗 성 건설 이야기와 예루살렘에서 얻은 자녀들의 명단을 소개합니다. 13장은 첫 번째 언약궤를 가져오는 것을 실패한 이야기이고, 15장은 언약궤를 다윗 성으로 무사히 가져오는 이여기이며, 16장은 언약궤를 다윗 성에 두는 행사에 대한 자세산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언약궤를 다윗 성으로 옮길 계획(1-4)
온 땅이 다윗을 지지하고 수십만 군사가 진을 쳐도, 하나님께 묻지 않는 이스라엘은 지켜질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다 ‘좋게 여기’더라도 주님 뜻이 아니면 멈추어야 합니다. 왕이 된들 법궤가 없으면 힘이 없습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였고, 법궤가 없는 사울 왕조는 정당성이 없었습니다.
1다윗이 천부장과 백부장 곧 모든 지휘관과 더불어 의논하고 2다윗이 이스라엘의 온 회중에게 이르되 만일 너희가 좋게 여기고 또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면 우리가 이스라엘 온 땅에 남아 있는 우리 형제와 또 초원이 딸린 성읍에 사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에게 전령을 보내 그들을 우리에게로 모이게 하고 3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우리에게로 옮겨오자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매 4뭇 백성의 눈이 이 일을 좋게 여기므로 온 회중이 그대로 행하겠다 한지라(1-4)
이 단락은 언약궤를 다윗 성으로 옮겨오기 위해 지휘관들과 백성들과 의논하는 부분입니다. 1절은 갑자기 다윗이 천부장과 백부장 등 자신의 신하들과 의논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무엇에 대한 의논인지는 2절에서 다윗이 온 회중을 설득하는 장면에서 등장합니다. 다윗은 지도자들과의 의논이 끝난 후 온 백성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언약궤를 가져오자고 설득합니다.
여기서 다윗의 말은 상당히 조심스러운데 ‘너희가 좋게 여기고 또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면’이란 말을 통해 두 가지 조건이 만족되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겠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백성들과 신하들의 동의입니다. 언약궤를 가져오는 일은 국가적 일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동원해야 합니다. 따라서 다윗은 미리 이 일에 참여해야 할 백성들의 동의를 구하여 반발이 일어나지 않도록 합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함께하는 사람들을 이해시키지 못하고 혼자 독선적으로 하는 것은 백성들을 무시하는 처사로 백성들의 반발을 살 수 있었습니다. 둘째는 여호와의 허락을 받게 되면 가져오겠다고 합니다. 여호와의 법궤는 여호와께서 임재하시는 장소를 상징하는 물건으로 여호와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의 허락을 받고 움직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3절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와야 할 이유인데, 여기서 ‘사울 때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라는 말은 사울 시대에는 여호와께 대한 제대로 된 예배도 없고 신앙도 없어서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역대상 10:13-14에서 역대기 저자가 사울이 망한 이유를 여호와를 찾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이런 다윗의 말에 모든 백성들은 다윗의 말대로 법궤를 가져오기로 동의합니다. 이는 다윗을 비롯한 온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와 여호와께 예배드리는 일에 대해 동의한 것입니다. 이 부분은 평행 본문인 사무엘하 6장에 없는 부분입니다. 역대기 저자는 다윗이 정치적인 입지를 굳히기 위해 언약궤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동의하에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언약궤를 가져왔다는 것을 좀 더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언약궤를 수레에 실어 옮김(5-8)
하나님께서는 관리나 보호의 대상이 아닙니다. 진리의 수호자로 자처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지키는 게 아니라 진리가 우리를 지킵니다. 웃사는 법궤를 지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지키는 분입니다.
5이에 다윗이 애굽의 시홀 시내에서부터 하맛 어귀까지 온 이스라엘을 불러모으고 기럇여아림에서부터 하나님의 궤를 메어오고자 할새 6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바알라 곧 유다에 속한 기럇여아림에 올라가서 여호와 하나님의 궤를 메어오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두 그룹 사이에 계시므로 그러한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았더라 7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웃사와 아히오는 수레를 몰며 8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연주하니라(5-8)
5절에서 다윗은 기럇여아립에서 예루살렘으로 언약궤를 가져오기 위해 온 이스라엘 사람을 모읍니다. 이때 이스라엘의 영역을 애굽의 시홀부터 하맛 어귀까지라고 하는데, 애굽의 시홀은 나일강 어귀 삼각주 지역의 동쪽 끝부분이고 하맛 어귀는 이스라엘 땅의 가장 북쪽 경계로 이 범위는 여호수아 13:3-5에서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 전체입니다. 역대기 저자는 실제 다윗이 차지하고 있던 지역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땅을 이스라엘 땅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후에 역대하 7:8에서 솔로몬 성전을 봉헌할 때도 동일하게 언급합니다.
언약궤가 기럇여아림에 있었던 이유는 사무엘하 6장의 이야기에서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독자들이 이미 이 사건을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6절에서 하나님의 궤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하나님의 궤가 무엇인지 모르는 세대를 위한 것입니다. 역대기는 포로에서 돌아온 후 주전 450년경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바벨론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궤에 대해서 잘 모를 수도 있습니다. 7-8절은 언약궤를 가져오는 장면으로 하나님의 궤를 수레에 싣고 다윗과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온갖 악기를 연주하고 춤추며 즐거운 축제의 행렬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언약궤 앞에서’라는 뜻이지만, 이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이유가 여호와 때문이라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궤를 자신들의 수도로 옮기면서 여호와의 실존을 기억하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서 항상 그들과 함께하시고 지켜주시며 더 큰 복을 내려주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소가 끄는 새 수레에 싣고 오는 방식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식이 아니라, 블레셋 사람들이 벧세메스에서 기럇여아림으로 하나님의 궤를 보낼 때 하던 방식입니다. 언약궤는 원래 레위인이 어깨에 메고 옮기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는데, 다윗과 신하들은 궤를 옮기는 원래 방법을 기억하지 못하고, 이전에 이방인들이 궤를 옮겼던 방식을 따라 하나님의 궤를 운반하고 있었습니다.
언약궤를 오벧에돔의 집에 둠(9-14)
다윗은 법궤를 옮겨올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법궤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웃사가 지키려면 법궤가 이방인의 집에 머뭅니다. 그냥 있었을 뿐인데 온 집과 소유에 복이 임합니다. 무얼 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주 앞에 가만히 있어 그분의 하나님 되심을 알아야 합니다.
9기돈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들었더니 10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그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 11여호와께서 웃사의 몸을 찢으셨으므로 다윗이 노하여 그 곳을 베스 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12그 날에 다윗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이르되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궤를 내 곳으로 오게 하리요 하고 13다윗이 궤를 옮겨 자기가 있는 다윗 성으로 메어들이지 못하고 그 대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가니라 14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 그의 가족과 함께 석 달을 있으니라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9-14)
기돈의 타작마당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소들이 법궤를 떨어뜨렸고, 수레를 몰던 웃사는 손으로 법궤를 잡았습니다. 급한 마음에 법궤가 떨어지는 것을 막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법궤를 손으로 잡은 웃사에게 진노하시고 그를 쳐서 죽이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기쁨의 축제가 갑자기 공포의 장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웃사를 죽이신 이유는 하나님의 거룩성을 침범했기 때문입니다. 레위기에서 법궤는 가장 거룩한 것으로 대제사장만이 접근할 수 있고, 제사장만이 멜 수 있으며, 절대 다른 사람이 만지거나 다른 방식으로 운반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웃사는 법궤를 보호하려는 급한 마음에 법궤를 만짐으로 하나님의 거룩성을 침해한 것이 자기 공포의 장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까이 계시고 우리를 지키는 보호자이시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높으심과 거룩하심을 인정하는 거리를 두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시다고 하여 우리가 함부로 접근하거나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는 위대하신 존재입니다. 11절을 보면 다윗은 이것에 대해 분노하는데, 10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를 대변한 것입니다. 눈앞에서 하나님의 무서움을 실감한 다윗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법궤를 자신의 집에 가져가는 일을 꺼리게 됩니다. 다윗은 법궤를 통해 자신과 자신의 왕조가 더욱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법궤 때문에 오히려 재앙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갑자기 만나는 재앙이나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하나님의 크심을 발견하듯이 승승장구하던 다윗도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더 커졌습니다.
다윗은 법궤를 두려워한 나머지 원래 계획한 대로 궤를 자신이 살고 있는 다윗 성으로 가져가지 못하고 방향을 틀어 오벧에돔의 집에 가져다 둡니다. 석 달 동안 오벧에돔의 집에 법궤가 있었고, 그동안 하나님께서는 오벧에돔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무서운 분만도, 복 주기만 하는 분만도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면 가까이하시며 복을 주시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성을 함부로 침해하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면 멀어지고 재앙을 내리시는 분입니다.
역대기 저자는 다윗의 약한 부분이나 부정적인 부분을 거의 드러내지 않지만, 여기서는 사무엘하 6장의 이야기를 거의 그대로 가져옴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다윗의 두려움은 숨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역대기 저자는 긍정적인 모습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므로 더욱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은 이어지는 역대상 14장에서 잘 나타납니다.
다윗의 실수에서 열심보다 순종이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열정이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면 오히려 해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인간적인 생각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의 생각과 다를 수 있지만 가장 완전합니다. 순종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과 임재를 경험하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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