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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몬서(01-02)


유익한 오네시모를 받아주길 원하는 바울

빌레몬서 1장 17-25절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시스템이 있습니다. 이 시스템을 ‘가치관’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가치관은 과연 세속적인 가치관인지, 하나님 나라 가치관인지로 구분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가치관과 시스템은 어떤 시스템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세속적인 가치관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길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빌레몬은 바울을 영접하는 것처럼 오네시모를 영접해야 합니다. 비록 오네시모가 종일지라도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종과 자유자는 하나입니다. 바울은 그를 사랑받는 형제로 인정할 뿐 아니라, 만일 그가 빌레몬에게 손해를 입힌 것이 있다면, 그것까지 배상하고자 합니다. 빌레몬 역시 오네시모를 영접함으로써 바울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


 
 오네시모에 관한 바울의 구체적인 요청(17-19)
 

자신에게 막대한 손해를 끼친 원수라고 합니다. 사극에 보면, 이 원수를 갚기 위해 평생을 찾아다닌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인간적인 가치관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 안에 있을 때 가능합니다.
 
17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18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19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17-19)
 
사도 바울은 빌레몬의 종이었던 오네시모를 다시 빌레몬의 집으로 보냅니다. 그는 빌레몬 집에서 도망하면서 부당한 짓을 했었습니다. 오네시모나 빌레몬은 좋은 관계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오네시모를 이제는 믿음의 형제로 영접하라고 부탁합니다.
 
(1) 오네시모를 영접하라는 요청(17)
 
이제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영접하라고 구체적으로 요청합니다. 빌레몬은 바울을 영접하는 것처럼 오네시모를 형제로 영접해 주길 요청합니다. 빌레몬은 자신에게 손해를 끼치고 도망간 노예를 어떻게 사도 바울을 영접하는 것처럼 영접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가능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합니다.
바울의 요청은 빌레몬과의 긴밀한 관계에 근거한 것입니다. 바울은 빌레몬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깊은 영적 친교를 나누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함께 일하는 동료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의 동역자로서 자신의 영적 아들이 된 오네시모를 영접하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빌레몬이 하는 역할을 오네시모가 감당했으며, 바울에게 있어서 빌레몬이나 오네시모는 동급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게다가 바울의 요청은 그리스도 안에서 종과 자유인이 하나라는 복음의 진리에 근거한 것입니다(갈 3:25). 빌레몬은 자신의 동역자의 신뢰와 사랑을 받는 회심한 오네시모를 동료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고 그를 영접해야 합니다.
 
(2) 손해 배상에 관한 언급(18-19)
 
바울은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불의를 행한 것이나 빚진 것이 있다면, 그것까지도 기꺼이 담당하겠다고 말합니다. 18절에서 ‘불의를 행하다’와 ‘빚을 지다’라는 이중적인 표현은 오네시모가 자기 주인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뿐 아니라 그의 돈 얼마를 훔쳤다는 점을 암시할 수 있습니다. 또는 그가 주인으로부터 부당하게 도망한 기간 동안 수행하지 못한 일에 대해 빚을 지고 있음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18절에서 ‘계산하다’라고 번역한 동사 ‘엘로게오(ἐλλογγέω)’는 ‘어떤 사람의 회계장부에 기입하다’를 의미하는 전문적인 상업용어이며, 19절에서 ‘갚다’라고 번역한 동사 ‘아고티노(ἀποτίνω)’는 배상합니다. ‘손해를 지불하다’를 의미는 전문적인 법률용어입니다. 이런 용어들을 사용함과 동시에 약속 어음에 서명하는 것처럼 “나 바울이 친필로 쓴다”라고 말함으로써, 바울은 오네시모가 끼친 손해들이 있다면 반드시 그것들을 배상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입니다(새번역, “그가 그대에게 잘못한 것이 있거나, 빚진 것이 있거든, 그것을 내 앞으로 달아놓아 주십시오”).
이어서 빌레몬 자신도 바울에게 빚진 것이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빌레몬은 바울의 전도로 회심했을 것입니다. 그가 바울에게 진 영적 빚은 오네시모가 그에게 입힌 경제적 손해보다 훨씬 큰 것입니다. 큰 빚을 진 빌레몬은 상대적으로 작은 빚을 진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그를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로 받아야 합니다. 자신이 받은 은혜, 사랑의 빛을 아는 자만이 모든 차별의 담을 허물고 진정한 형제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빌레몬의 순종에 대한 요청과 확신(20-22)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을 때,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차별이나 판단하지 아니하고 가족으로 형제의식을 가지고 하나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한 이 하나님 나라가 임한 모습을 우리를 통해 세상에 보여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서로를 돌아볼 때, 우리 안에 형제로서 지체의식을있어야만 사랑이 실천될 수 있습니다.
 
20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21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22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숙소를 마련하라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노라(20-22)
 
바울은 오네시모에 대한 자비를 호소하면서도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간과하지 않고, 만약 오네시모가 불의를 행했거나 경제적인 손실을 끼친 일이 있다면 자신이 배상하겠다고 제안합니다.
 
(1) 빌레몬의 순종에 관한 요청과 확신(20-21)
 
‘오 형제여’라는 표현에서 오는 확인, 동의 혹은 강조를 나타내는 불변화사 ‘나이’(ναί)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단어는 ‘예’, ‘그래’, ‘진실로’, ‘분명히’ 등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와 함께 애정 어린 호칭인 ‘형제’는 바울의 요청을 강화시켜 줍니다. 그것은 한 형제를 위하여 다른 형제에게 하는 형제의 애정 어린 요청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이 자신의 요청을 들어줌으로써 바울 자신을 기쁘게 하고 그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길 기대합니다. 빌레몬이 사랑의 행위로 성도들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었듯이(7), 이번에는 오네시모를 영접하는 사랑의 행위로 바울 자신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길 바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의 사랑과 관대함과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잘 알고 있었고, 따라서 그가 오네시모를 따뜻하게 영접해줄 것을 확신합니다. 빌레몬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도저히 받올 자격이 없는 오네시모에게도 사랑을 나눠야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됩니다. 신실한 믿음과 사랑의 사람인 빌레몬은 바울의 요청에 기꺼이 응할 뿐 아니라 바울이 요청한 것들보다 더 많이 행할 것입니다. 즉, 빌레몬은 단지 오네시모를 용서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가 바울의 복음 사역에 동참할 수 있도록 오네시모를 자유인이 되게 해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바울의 방문을 위한 준비(22)
 
지금 바울은 로마에서 죄수의 몸으로 편지를 보내지만, 자유의 몸으로 풀려나 골로새를 방문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빌레몬에게 자신이 묵을 숙소를 마련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여기서 숙소라고 번역한 헬라어 명사 ‘크세니아(ξεία)’는 일반적으로 ‘환대’, 혹은 ‘대접’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손님이 투숙하는 장소, 곧 객실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골로새를 방문하여 자신이 요청한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직접 확인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풀려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레몬과 그의 집에 있는 교회가 자신을 위해 기도해주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면, 바울은 자유의 몸이 되어 골로새에 있는 빌레몬을 방문할 것입니다. 왜, 이런 방문 계획을 말했습니까? 빌레몬이 바울의 부탁을 들어서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그에게 자유를 줄 때 이 방문이 가능하고, 또 반가이 서로를 맞이하고 기다릴 수 있는 방문이 될 것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마지막 인사와 은혜의 축도(23-25)

 
복음은 자신의 편이와 이해를 위해 거리를 두는 사랑이 아니라 세상의 상식과 통념, 자신이 정한 기준과 한계를 넘어서는 사랑을 요구합니다. 용서에는 허비도 없고 지나침도 없습니다. 지치지 않는 용서의 사랑, 지체와 이웃이 기대한 것 이상의 사랑을 베풀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23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 에바브라와 24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25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있을지어다(23-25)
 
마지막으로, 바울은 편지를 끝내면서 자신과 함께 있는 사람들의 인사를 빌레몬에게 전합니다. 에바브라는 골로새 교회의 설립자이자 사역자입니다(골 4:12-13). 그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할 때 복음을 듣고 회심했으며, 그 후에 고향인 골로새에 교회를 설립했습니다(행 19:10; 골 1.17).
얼마 뒤 골로새 교회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던 그는 아킵보에게 사역을 맡기고 로마에 있는 바울을 찾아갔습니다. 바울은 에바브라의 보고를 듣고 골로새서를 썼습니다. 에바브라는 로마에 남아 바울을 섬기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그와 함께 옥에 갇히는 편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또한, 바울이 언급한 아리스다고는 데살로니가 출신으로 에베소에서 바울과 함께 사역했고(행 19:29; 20:40), 바울이 로마로 갈 때에도 그와 동행했습니다(행 27:2). 데마는 바울이 로마에 있을 때, 그의 곁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말년에 세상을 사랑하여 그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습니다(딤후 4:10).
 
동역자들의 문안 인사를 전한 뒤 바울은 은혜의 축도로 편지를 끝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빌레몬과 그의 집에 있는 교회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그가 여기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언급한 것은 편지의 문맥상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빌레몬의 심령에 역사하면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사랑받는 형제로 영접하는 어려운 일을 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집에서 모이는 성도들 역시 오네시모를 영접해야 합니다. 신자들의 심령 속에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들의 공동체 안에 진정한 화해와 교제가 이루어지게 할 것입니다. 이 편지에서 빌레몬 개인에게만 보낸 서신이 아니라 공동체에 보내는 형식을 취한 것은 빌레몬이 가정 교회의 리더로서 예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실천하여 본을 보이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레몬서 곳곳에 묻어나는 바울의 진심 어린 호소는 개인의 한계와 사회적 관계의 벽을 극복하지 못하는 이 시대의 교회 현실을 그대로 반영해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국의 지배적 가치와 질서에 순응하지 않고, 복음이 요구하는 사랑의 원리를 따라 ‘사랑의 사람’이 되고, ‘용서와 사랑의 공동체’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큰 울림과 긴 여운을 안겨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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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몬서(01-01)

 


무익했던 오네시모를 받아주길 원하는 바울

빌레몬서 1장 1-16절


인생의 여행에서, 여행을 즐겁게 하는 것은 행복한 동행이 있기 때문입니다. 혼자 떠나는 여행은 외롭고 때로는 고달프기도 합니다. 하지만, 서로 위로해주고 격려해주는 동행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 바로 행복한 인생입니다. 이러한 행복한 동행하는 사람을, 우리는 ‘동역자’라고 부릅니다. 동역자는 같은 비전을 가지고, 함께 하며, 함께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의 종 오네시모를 위하여 사랑으로 간청합니다. 오네시모는 도망한 노예였기 때문에 엄한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는 바울에게서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제 오네시모는 단지 빌레몬의 노예가 아니라 바울의 영적 아들입니다. 빌레몬은 오네시모가 더는 종이 아니라 사랑받는 형제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서신의 인사(1-3)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성도들의 마음에 평안을 주고, 큰 기쁨과 위로를 줍니다. 이처럼 사랑의 삶과 본은 우리를 더 깊고 풍성한 믿음의 교제로 이끌고, 공동체에 활력과 지도자에게 큰 힘을 더해주며, 주 안에서 있는 복을 함께 깨닫고 누리게 합니다. 주님의 교회는 지도자와 성도의 관계, 성도와 성도의 관계는 서로 자신을 낮추고 섬기며 사랑하는 관계로 성장해야 합니다.

1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2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 3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1-3)

바울은 빌레몬을 ‘우리의 사랑받는 자’라고 부릅니다. 성도의 관계가 십자가의 사랑에 뿌리를 둔 사랑의 관계이며, 빌레몬이 사랑의 수혜자요, 사랑에 빚진 자임을 언급합니다.

(1) 빌레몬에게 편지를 보냄(1-2)

사도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라며, 어떤 죄를 범에서 구속된 상태가 아닌 복음을 위해서 갇힌 자라고 소개합니다(1). 그런 구속된 상태에서 빌레몬서를 써 보냅니다. 이때 바울 곁에는 디모데가 바울과 함께 로마에 있었습니다.

이 서신의 일차적인 수신자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입니다(1). 아마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사역할 때 빌레몬과 친분을 맺었을 것입니다. 오네시모가 골로새 출신이라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골 4:9) 그의 주인인 빌레몬이 골로새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큰 집을 소유한 부자였습니다. 골로새의 가정 교회가 그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빌레몬과 함께 이 편지를 받은 자매 압비아와 아킵보는 빌레몬의 아내와 장성한 아들일 것입니다. 두 사람은 교회와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빌레몬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이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킵보가 바울과 함께 병사 되었다는 표현은 그가 골로새 교회의 중요한 사역자라는 사실을 암시합니다(참조. 골 4:17).

(2) 은혜와 평강의 인사(3)

바울은 동역자인 수신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인사를 전합니다(3).

이곳에서 말하는 ‘은혜와 평강’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은혜’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 죄인들에게 먼저, 그리고 값없이 베푸시는 구원의 사랑입니다. 또한, 자기 백성을 돌보시고 그들이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사랑이기도 합니다. ‘평강’은 하나님의 구속 행위의 결과로서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죄인들이 누리는 평화로운 상태입니다.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빌레몬을 위한 바울의 감사(4-7)

목회자로 성도를 위해 기도할 때,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성도는 그분만 생각하면 감사가 넘쳐나지만, 어떤 분은 안타까움으로 염려 속에 기도해주는 분이 있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의 사랑과 믿음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우리를 위해 누군가 중보할 때, 눈물의 대상이 아니라 감사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4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5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6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7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4-7)

바울은 빌레몬이 이 사랑의 호의를 공동체 안의 성도들만 아니라 그에게 손해를 끼친 오네시모에게도 베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나이 든 사도로서 권위 있게 명령할 수 있지만, 사랑으로 설득하고 간청합니다.

(1) 빌레몬의 믿음과 사랑에 대한 감사(4-5)

바울은 기도할 때 빌레몬을 기억하면서, 그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가 감사하는 이유는 빌레몬의 사랑과 믿음에 관한 좋은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랑은 모든 성도들을 향한 것이며, 믿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것입니다. 성도들을 향한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사랑합니다. 건강한 신자들에게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함께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2) 빌레몬을 위한 기도(6)

본문 4절에 있는 “기도할 때에”라는 구절에 종속된 헬라어 접속사 호포스(ὅπως)로 시작합니다. 이 접속사는 기도의 내용을 진술하는 절을 소개합니다. 따라서 ‘기도한다’라는 동사가 없을지라도 이 본문을 빌레몬을 위한 바울의 기도로 간주하고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네 믿음의 교제가 효력 있게 되어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선을 네가 알게 되기를 내가 기도하노라.”

이것은 믿음에 기초한 교제, 즉 바울과 함께 나누는 빌레몬의 교제가 더욱 효력 있게 되어서 바울 안에 있는 모든 선을 온전히 알게 되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모든 선이란 빌레몬의 노예인 오네시모를 위한 바울의 요청과 관련이 있습니다. 즉, 오네시모의 모든 잘못을 용서하고 그를 받으라는 요청은 바울 자신의 모든 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빌레몬은 그 모든 선을 알고 오네시모를 기꺼이 용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한 것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위한 자신의 요청을 빌레몬이 받아들이도록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빌레몬으로 인해 기쁨과 위로(7)

바울은 빌레몬이 성도들에게 베푼 사랑을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7)라고 다시 언급합니다. 그는 빌레몬의 사랑에 관한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감사할 뿐 아니라 빌레몬으로 인해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빌레몬의 사랑의 행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의 마음이 평안함을 얻었다고 말할 뿐입니다. 빌레몬은 성도들을 섬기고 그들의 유익을 위해서 헌신한 사랑의 사람, 바울과 함께 하나님을 위한 동역자였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에 관한 자신의 요청을 빌레몬이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빌레몬은 바울의 마음도 평안하게 해줄 것입니다(20).

 

오네시모를 위한 바울의 간청(8-16)

우리를 통해 복음이 전해지므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신실한 제자가 된다면, 영적인 열매를 보면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제자를 낳을 때는 많은 고생과 희생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무익했던 사람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수고는 잠시 힘들겠지만, 미래의 영적 열매를 바라보면서 행복한 사명자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8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9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10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11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12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13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14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15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 16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8-16)

권위보다 사랑으로 가르치고 설득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과 본이 된 삶은 오네시모 문제를 명령과 지시로 해결해도 될 만큼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권위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1) 오네시모를 위한 바울의 간청(8-10)

바울은 8절에서 빌레몬의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위한 중재를 시작합니다. 그는 사도의 권위를 앞세워 빌레몬에게 명령할 수 있으나 그렇게 하지 않고 사랑으로 간구합니다. 그리고 오네시모를 자신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로 소개합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오네시모를 만났습니다.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복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노예이었습니다. 그는 빌레몬의 집에서 도망쳐 나온 자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만나게 하시고, 바울에게 복음을 듣게 하셨고, 변화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9)라고 소개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헬라어 본문에서는 ‘내가 갇힌 중에서 낳은 나의 아들’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옥에 갇혀 있을 때, 그의 사역을 통해 오네시모가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9절에서 ‘아들’이라고 번역한 ‘테크논’은 바울이 오직 디모데와 디도를 아들이라고 부를 때에만 사용한 단어입니다(딤전 1:12; 딤후 1:2; 딛 1:4). 이 단어는 ‘자식’, ‘아이’, ‘어린이’ 등을 의미합니다. 오네시모는 디모데나 디도와 같은 바울의 영적인 자녀입니다. 지금 바울은 자신의 영적인 아들을 위하여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오네시모를 돌려보냄(11-12)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낸다. ‘오네시모’(ὀνήσιμος, 오네시모스)라는 이름은 헬라어로 ‘이익이 되는 유용한’, ‘유익한’ 등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오네시모는 이름과는 달리 자기 주인에게 무익한 존재였습니다. 주인에게 손해를 입히고 로마로 도망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에 큰 변화가 일어났고, 그 결과 그는 바울과 빌레몬 모두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오네시모를 “내 심장”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이 자신의 심장이라고 부를 만큼 오네시모는 그에게 소중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바울의 영적인 아들일 뿐 아니라 바울의 심장입니다.

(3) 오네시모를 돌려보내는 이유(13-16)

바울은 오네시모를 자기 곁에 머물러 있게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빌레몬의 동의를 얻기 위해서 오네시모를 돌려보냅니다. 바울은 빌레몬이 선한 일을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원해서 하기를 바랍니다.

14절에서 “너의 선한 일”이란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처벌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자비로 다시 받아주는 것이며, 더 나아가 바울과 함께 복음 사역을 하도록 그를 자유롭게 해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로마로 도망한 것과 그곳에서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을 하나님의 섭리의 일부로 생각합니다(15). 오네시모는 자신의 과오 때문에 빌레몬을 떠났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오네시모를 변화시키셨고, 그를 빌레몬의 사랑받는 형제로 영원히 머물 수 있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더는 종이 아니라 사랑 받는 형제로 받아야 합니다. 오네시모는 특별히 바울에게 사랑받는 형제입니다. 그렇다면 육신적으로, 그리고 주안에서 밀접한 관계가 있는 빌레몬에게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빌레몬에게도 오네시모는 사랑받는 형제인 것입니다.


바울은 짧은 서신을 통해 아낌없는 사랑과 남김 없는 용서의 메시지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한없는 사랑이 끝없는 용서를 낳는다고 말합니다. 내게 사랑 없음을 가슴 치기 전에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깊이 생각해보라고 도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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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몬서 서론


빌레몬서 서론


Ⅰ. 제목

본서의 제목은 ‘빌레몬’인데 헬라어 원문에는 ‘프로스 필레모나’로 ‘빌레몬에게 보낸 서신’이란 의미입니다.

 

Ⅱ. 저자

본서가 바울의 서신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일부 학파에서는 이의를 제기하지만, 믿을 만한 견해는 될 수 없으며 외증과 내증이 너무 확실합니다.

(1) 내증

본서를 자신이 언급하고 있습니다(1,9,19). 사상, 표정, 감정, 문체 등 모든 것이 철저한 바울적인 표현입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데 어떠한 증거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그리고 본서는 골로새서와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골 4:10-17, 몬 2:23-24). 그래서 골로새서의 증거는 본서의 증거에 큰 도움을 줍니다.

(2) 외증

본서는 익나티우스의 편지 가운데도 본서의 한 구절(20)을 시사하고 있으며, 다른 목회서신이 빠져 있는 말시온의 정경(Marcion's Canon)과 무라토리 단편(Munatorian Fragment)에도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오리겐도 본서 14절을 바울의 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태복음 주석에도 7,9절을 가리키고 있으며 역사가 유세비우스, 구라틴어, 구수리아역에서도 본서를 바울이 저자라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Ⅲ. 수신자

수신자인 ‘빌레몬’은 교회의 명칭이 아니고 사람의 명칭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빌리몬에게 서신을 보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에 관해 많은 소개가 없습니다. 다만 골 4:9과 본서 6,7,10절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는 골로새 출신의 부자로서, 에베소 두란노 서원에서 전도할 때 회개하고 돌아온 듯합니다. 그는 골로새 교회의 장로요 골로새 교회도 그의 집에서 모인 것 같습니다. 또한, 전승에 의하면 골로새 교회의 감독으로 있다가 네로 황제의 박해 때 순교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은 그 당시 노예제도가 있어서 적어도 로마시에 6000만 명이나 되는 노예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빌레몬이 어떻게 노예를 가질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인데, 당시 상당 수의 성도들이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도 여러 곳에 언급하고 있기도 합니다(고전 7:20-24, 골 3:22-4:1, 엡 6:5-9). 그리고 본서의 수신자와 함께 언급된 압비아와 압킵보는 그의 가족으로 추측됩니다.

 

Ⅴ. 기록 연대 및 장소

본서가 골로새서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은 이미 논하였습니다. 본서의 기록 시기는 골로새서와 같은 시기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왜냐하면, 본서도 옥중서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서를 기록한 당시는 바울이 죄수의 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3,10).

골로새서 4:7-17을 자세히 보면 본서가 기록된 곳이 동일한 장소임을 암시해 줍니다. 그러나 바울의 투옥 문제를 놓고 의견이 분분합니다. 바울이 옥에 있을 때 오네시모가 함께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본서를 기록할 때는 에베소 감옥에 있었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집에서 도망하여 은닉하여 가장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던 장소는 에베소 보다는 로마가 더 유리했을 것이고 그곳에서 사도 바울을 만나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후 오네시모가 바울을 시중들게 되었고 바울의 많은 사랑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곁에 두고 싶었으나 빌레몬의 허락을 받고 싶었습니다(13-14). 그러므로 오네시모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서신을 보내게 되었는데 그 시기가 A.D 62년경 로마 옥중에서 기록한 것입니다.

 

Ⅵ. 기록 목적

본서는 바울서신 중에서는 가장 짧은 서신입니다. 그래서 원어는 335개의 단어로 되어있습니다.

본서에 나오는 빌레몬에게는 오네시모라고 하는 종이 있었습니다. 그는 주인의 재산을 도적질하여 달아나게 되었습니다. 그가 도망간 곳이 로마였으며(18,19), 그곳에서 바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무엇이 참 자유인지를 깨닫게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시중을 들어주고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 노예는 주인의 소유였으며, 그에게는 사형에 해당하는 형벌이 내려진다 해도 바울로서는 속수무책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된 오네시모를 주인에게 보내어 주인과 화해시키기 위해 붓을 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손해를 입힌 돈 문제도 자신이 해결하겠다고(18)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본서는 단지 인간적 동기에서 기록된 것이 아니고 기독교적 사랑으로 종 오네시모를 형제같이 대우하라는 사랑의 실천적인 복음인 것입니다. 더욱이 당시에 골로새 교회에는 빌레몬 만이 노예를 소유한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본서는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사이를 화해시키는데 주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 빌레몬의 신앙을 칭찬하기 위해, (2) 오네시모를 용서하라는 간구, (3) 오네시모를 복음 전파자로 만들기 위한 목적이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Ⅶ. 특징

바울 서신을 분류한다면 공적인 서신과 사적이 서신으로 나눌 수 있는데, 본서는 전적으로 사신입니다. 대상도 한 가정만을 상대하여 기록하였습니다. 그래서 주제가 개인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그리고 본서에서는 바울의 부탁을 살펴보면 개인의 인격과 성품이 포함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노예제도와 같은 사회 윤리성, 즉 사회악을 취급하고 또한 기독교인이 취해야 할 신앙적 태도가 무엇인가 하는 기독교로써의 해답을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의 윤리의 아름다운 면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공통적인 견해다. 또한 기독교인들은 주님을 영접하는 순간부터 주종관계를 벗어나 형제 관계로 돌입하기 때문에 주 안에서의 주종 관계 성립은 불가능한 일이다.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요 형제이므로 서로가 용서하고 사랑해야 할 것을 특징으로 한다. 때문에 본서는 사랑의 서신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의 기본 진리가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해야 마땅함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므로 본서에서는 바울이 기독교의 사랑을 실천하고자 사도적인 권위조차 주장도 않고 오히려 한 계단 더 내려가 겸손한 태도로 오네시모를 위한 간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본서는 이간이 아닌 설득을 통하여 무신자가 순종하도록 만들고 있다. 한 때는 존경받는 선배요 신뢰할 만한 친구가 이제는 탄원자로서 데리고 있는 사람을 위하여 자비를 호소하고 있는 바울의 모습이 한층 더 돋보인다. 그러므로 본서의 특징을 통해서 그리고 바울의 모습을 보면서 죄인들을 대속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셔서 수난을 당하시고 또한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드리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한다.

 

Ⅷ. 개요

1. 도입 인사(1:1-3)

2. 서신의 본론(1:4-22)

    (1) 기도(4-7)

     (2) 새로운 그리스도인이 된 오네시모의 부탁(8-14)

     (3) 부탁을 충분히 전개함(15-22)

          15-16 오네시모와 빌레몬 간의 새로운 관계

          17-20 오네시모와의 화해 시도

          21-22 요점 요약과 추가적인 부탁

3. 맺는 인사(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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