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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34-01)

 

 


모세의 마지막 사역

신명기 34장 1-12절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새롭게 창조된다는 뜻입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주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우 시작입니다. 새롭게 창조된 백성으로, 새로운 나라에서, 새로운 가치관으로, 새 주인을 모시고 살기 위해 맨 먼저 요구되는 것은 죽음입니다. 모세가 죽어야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광야 시대의 죽음, 엣 시대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 본 장은 신명기의 마지막일 뿐만 아니라 모세오경의 마지막 장입니다. 모세의 죽음으로 ‘출애굽 시대’라는 한 시대의 막을 내립니다. 그러나 다른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나안 동편까지는 ‘모세의 시대’라면, 이후부터는 ‘여호수아 시대’입니다. 모세의 안수를 받은 여호수아는 지혜로 충만해졌고 백성은 그의 말에 순종합니다. 그 이후로 모세와 같은 선지자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마지막 가는 길(1-8)

죽음은 인간의 눈으로 볼 때 불행해 보입니다. 하지만 죽음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계가 있기 때문에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주신 사명을 다 이룰 때까지 사명자의 생명을 보호하십니다. 그 사명이 다 하는 날, 하나님께서 모세처럼 수고의 눈물을 닥아 주실 것입니다.

 

1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 산에 올라가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 산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2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의 유다 온 땅과 3네겝과 종려나무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까지 보이시고 4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5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6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 7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8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모세를 위하여 애곡하는 기간이 끝나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니라(1-8)

 

⑴ 약속의 땅을 바라본 모세(1-4)

 

하나님의 사람인 모세는 이제 120세의 나이로 가나안 땅 동편에 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요단강 동편 산인 느보 산 정상에서 비스가 산꼭대기에 세우셨습니다(1). 특별히 34:1-6은 신명기 전체의 역사적 배경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줍니다(1:1-3:27; 32:48-52: 민수기 27:12-14).

34장은 긴 화자의 설명이 짧은 여호와의 명령(4)을 압도합니다. 이제 모든 수고와 노력들 그리고 모든 교훈과 노래들과 축복을 진술한 모세는 희망과 절망의 장소로 올라가게 됩니다. 이미 모세는 짜인 군사적 리더십과 종교적 리더십의 퇴임사를 모두 낭독한 후입니다. 비록 모세는 오래전에 약속받았던 조상들(아브라함 이삭 야곱)처럼 약속의 땅에 들어가자는 못하지만, 그가 들어가고자 애쓴 지경들을 마치 아브라함처럼 높은 산에 올라가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보여주신 약속의 땅에 대한 조망(2-3)은 시각적인 측면에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일종의 파노라마적 시야를 제공하는 것으로, 수사학적 측면에서 과장법일 수 있고, 계시적인 측면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초자연적 행위로 그 전체를 볼 수 있었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북쪽을 향하여 자신의 시야를 열고 시계 반대방향으로 지평선을 따라 서쪽으로 그리고는 남쪽으로 이동하며 그 후에는 다시 사해 계곡을 구성하는 데 ‘리프트 밸리(Great Lift Valley)’를 지나 시작점으로 돌아갑니다. 길르앗 지파의 영토는 느보산의 북쪽이며 요단강의 동쪽으로 이릅니다. 여기서 언급된 단은 단지파가 사사 시대에 라이스를 정복하고 새로 붙인 지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 14:14에서 말하는 단을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납달리 지파의 영토는 긴네렛 너며 북서쪽에 이르고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들의 영토는 요단강의 서쪽 산지에 위치합니다. 유다의 영토는 요단강과 사해 너머의 산지에 위치합니다. ‘평지’는 사해의 북쪽 지역을 의미하지만 소알, 즉 사해의 남쪽 끝에 대한 언급으로 인해 사해의 양쪽 끝 지역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화자는 신명기의 독자가 모세가 행한 이상한 은퇴사와 그의 초자연적인 죽음을 오해할까 봐 그것을 교정하려는 차원에서 ‘모세가 죽을 때 120세였지만, 그의 눈이 흐리지 않았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는 말을 첨언합니다. 사실상 모세는 7절이 말해주듯이 기력이 쇠하여 이스라엘의 리더십에서 은퇴한 자가 아니고, 자신의 건강과는 상관없이 여호와의 뜻에 따라 은퇴해야 했습니다. 그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던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자신의 모든 권세와 특권을 내야놓았습니다.

 

⑵ 모세의 임종과 장례(5-8)

 

모세는 120세에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눈을 감았습니다. 본문에서는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습니다. 이곳은 모세의 마지막 설교가 행해진 곳이며, 이스라엘이 시혼과 옥과의 싸움에서 승전한 곳입니다(3:29; 4:46-49). 이 지역은 모세에게 실패의 장소이며, 이스라엘에게는 희망의 장소입니다. 야곱은 자식들에 둘러싸여 죽음을 맞이했지만 모세는 여호와의 인도로 홀로 장엄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모세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기억으로만 남아있을 뿐, 그의 육신이 매장되어있는 무덤은 잊혔습니다. 모세가 죽자 백성들은 아론의 장례처럼 30일을 애곡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전에 아론이 호르산에서 죽었을 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습니다.

 

여호수아의 리더십 승계(9)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역과 백성을 위해 언제든지 그분이 원하시는 일꾼들을 예비하십니다. 지도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끌고 그로 인하여 살아계신 하나님, 온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 천지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시기를 원하신다. 참으로 훌륭한 일꾼은 죽었더라도 다른 사람들을 일으켜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더욱 훌륭하게 이어가도록 역사하십니다.

 

9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9)

 

모세의 죽음은 이스라엘에게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모세의 죽음과 함께 여호수아에 대한 지도력의 승계 언급은 민수기 27:12-23에서도 나타납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사망 직후 보고되는 이 임명식이 집행됩니다. 민수기의 임명식에 잘 기록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모세의 염려는 ‘여호와의 회중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라는 기원(祈願)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 부분은 앞서 언급한 대로 신명기의 결론뿐만 아니라 모세오경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즉 이것이 모세의 마지막 언급이라는 점에서 그렇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모든 준비의 대단원이라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9절에서 화자는 민수기 27:18-23처럼 여호수아의 승계를 한 번 더 언급합니다. 31장에서는 여호수아의 임명에 대한 (백성 앞에서의 제시와 위임의 요소들을 강조했다면, 34장에서는 모세가 안수한 결과들(지혜의 영이 충만 백성들의 순종)을 언급합니다. 이러한 절차들은 모세에서 여호수아로 ‘신정적 통치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상징입니다. 모세와 같은 이가 없어도 이제 백성들 앞에는 여호수아가 있습니다. 그는 국가적 리더십의 위임으로, 모세에게 안수를 받았고, 그로 인해 지혜의 영이 충만한 자입니다. 이와 같은 안수식은 전임자와의 동일시, 혹은 대체 직책의 임명 혹은 시작, 권위와 권능의 전가와 같은 상징적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민수기 27:18에서 ‘영이 이미 내재하는 여호수아에 대한 안수’라는 묘사와 모순된다는 견해도 있으나, 임직 후 ‘지혜의 영’은 여호수아에게 주어진 특별한 은사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모순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는 약속의 땅을 직접 정복하고 분배하는 국가적 과제를 수행할 준비가 되었다 게다가 신명기는 민수기 27:20의 여호와의 명령인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라’는 말씀의 성취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라는 낙관적인 묘사로 종결됩니다. 이것은 신명기 화자의 ‘오늘’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모세와 같은 이가 없다는 말로 인해서 비관적인 결론으로 볼 사람도 있지만, 화자의 견해와 같이 그 점에 대해서 모든 사람이 동의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낙관적 묘사는 신약의 사도행전의 말미(28:30-31)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신명기 내부의 미래에 대한 우울한 제시와는 대조됩니다.

 

모세에 대한 평가(10-12)

한 나라의 지도자가 그의 사후(事後)에 역사적 평가를 기대한다면 지금 이 시대의 국민의 뜻을 이해하고 국민의 바라는 바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10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11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의 모든 신화와 그의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12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이더라(10-12)

 

모세라는 인물에 대한 짧고 강렬한 평가가 신명기의 마지막을 장식합니다. 본문을 많은 학자들은 이것을 모세에 관한 일종의 ‘문학적 묘비명’, 혹은 ‘부고(訃告)’라고 부릅니다. 모세는 전무후무한 지도자였습니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라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사실 모세는 지금까지 40년간 이스라엘의 성공적인 지도자였습니다.

4장에서는 이스라엘과 여호와의 비교 불가능성이 대조된 바 있었는데, 이제는 여호와와 제시됩니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시던 자며, 바로와 그의 신하들과 애굽 땅에서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이스라엘 앞에서 행한 유일한 대행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후로 모세와 같은 선지자는 이제 더 이상 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도 모세처럼 하나님 앞에서 직접 행하지 못하고 엘르아살 제사장 앞에 서며 엘로아살이 우림의 판결을 통하여 여호와의 뜻을 물어야 했습니다(민수기 27:21). 그러므로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을 직접 듣고 백성에게 대언하는 기능을 계승한다는 측면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의 미래적 등장에 대한 언급(18:15-22)과 전혀 모순되지 않습니다.


모세는 죽는 그 순간까지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자신이 바라던 것은 이루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이뤄드린 지도자이십니다. 완악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기까지 인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순종 때문일 것입니다. 인생 끝에서 우리는 어떤 평가를 받을 것 같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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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33-02)

 


모세의 축복 : 지파들의 축복⑵

신명기 33장 18-29절


정체성은 성도의 현재를 규정하고 미래를 결정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우리 공동체인지 망각하는 순간, 지금 서 있어야 하는 곳에 있지 못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찾지 못합니다. 이제 낯선 땅 가나안에 들어갈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그 정체를 분명히 알게 하십니다. 그들이 얼마나 큰 사랑을 받은 행복한 백성인지 알게 하십니다. 그것을 알고 수용하는 것이 그들의 삶의 방식과 목표를 결정해 줄 것입니다.

 

지파들을 향한 모세의 마지막 축복은 나머지 지파들로 이어집니다. 그들은 스불론과 잇사갈, 갓과 단, 그리고 납달리와 아셀입니다. 스불론과 잇사갈은 레아가 낳은 아들들이고, 갓은 실바의 첫째 아들, 단은 빌하의 첫째 아들입니다. 납달리는 빌하의 둘째 아들이며, 아셀은 실바의 둘째 아들입니다. 이들의 순서는 어떤 일관된 원칙에 따른 배열은 아니나 대체로 태어난 순서를 따르고 있습니다.

 

(1) 지파들의 축복 : 스불론와 잇사갈(18-19)

 

18스불론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스불론이여 너는 밖으로 나감을 기뻐하라 잇사갈이여 너는 장막에 있음을 즐거워하라 19그들이 백성들을 불러 산에 이르게 하고 거기에서 의로운 제사를 드릴 것이며 바다의 풍부한 것과 모래에 감추어진 보배를 흡수하리로다(18-19)

 

표제는 스불론 지파에게만 행한 모세의 축복이지만, 그 내용은 스불론과 잇사갈 두 부족을 위한 것입니다. 레아의 다섯째와 여섯째 아들입니다(창세기 30:20).

가나안에서 잇사갈의 땅은 서편 므낫세의 북쪽에 있고, 스불론의 땅은 남쪽으로 잇사갈을 두면서 북쪽으로 아셀과 납달리 사이에 있다 모세는 두 지파에게 즐거워하라고 요청합니다. 스불론지파는 장막에서 나감으로, 잇사갈 지파는 장막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합니다.

이 단락에서 나오는 ‘즐거워하다’와 ‘제사하다’라는 말은 각각 잇사갈과 스불론이라는 이름과 언어유희를 이룬다고 보기도 합니다. 집안과 밖에 대한 언급은 주로 일상적인 면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러한 표현은 모든 영역에서 복을 받게 됨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혹은 야곱의 축복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스불론 지파의 외향성과 잇사갈 지파의 내향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야곱의 축복에서도 언급된 바 있는(창 49:13-15) 바다와 관련된 풍성한 복은 하나의 가능한 독법으로 이방인들도(혹은 이스라엘 사람이) 산에 모여 하나님께 의의 제물을 드릴 수 있도록 해달라는 모세의 기원을 담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 단락은 스불론 지파와 잇사갈)에게 땅과 바다 즉 모든 자원의 복이 임하기를 기원하는 것 같습니다.

 

(2) 지파들의 축복 : 갓(20-21)

 

20갓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갓을 광대하게 하시는 이에게 찬송을 부를지어다 갓이 암사자 같이 엎드리고 팔과 정수리를 찢는도다 21그가 자기를 위하여 먼저 기업을 택하였으니 곧 입법자의 분깃으로 준비된 것이로다 그가 백성의 수령들과 함께 와서 여호와의 공의와 이스라엘과 세우신 법도를 행하도다(20-21)

 

모세는 갓 지파가 넓은 땅을 갖도록 축복합니다(신명기 3:12-16). 물론 이 부분은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도록 기원한다거나 ‘그들을 돕는 자에게 복이 있으리라’는 식의 다양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것은 야곱과 모세 모두에게서 나타나는 호전성과 관련 있는 것 같다 여기서 우리는 갓이라는 이름의 의미가 ‘행운’와 연관된다는 점을 발할 수 있습니다. 그는 사자처럼 매복하고 먹잇감의 다리와 머리를 찢을 것이며 최상의 몫(약속의 땅)을 스스로 준비하여 대장의 몫을 보존합니다.

여기서 최상의 몫은 므낫세 반지파 르우벤 지파와 함께 받았던 요단 동편의 땅을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르우벤 지파는 요단 동편의 남쪽을 얻었고 갓 지파는 중앙을, 그리고 므낫세 반지파는 북쪽을 얻었습니다.

갓이 얻은 분깃은 가장 윤택한 곳이다 법을 세운 자(메호퀘크)는 모세를 가리키며, 그의 분깃은 요단 동편에 있는 그의 매장지를 의미한다고 봅니다. 그는 전쟁을 시작할 목적으로 백성(혹은 군대)의 두령들에게 옵니다. 그는 여호와의 공의를 행하며 이스라엘과 함께 그의 심판을 수행할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이미 얻은 영토와 그후에도 수행해야 할 가나안 정복 사명에 따른 전과(戰果)를 예견하는 것이거나 통치자의 정의 수행 기능을 언급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3) 지파들의 축복 : 단(22)

 

22단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단은 바산에서 뛰어나오는 사자의 새끼로다(22)

 

모세는 갓 지파처럼 단 지파를 사자 비유와 연관시킵니다. ‘사자 새끼’라는 표현은 원래 야곱의 축복에서 유다 지파에게 적용되었습니다(창세기 49:9). 그러나 여기에서 단 지파는 (다른 독법에 따라서 ‘바산’이라는 지연이 아니라) 독사로부터 도망쳐 나온 새끼 사자라고 묘사됩니다. 정통적인 입장에서는 바산에서 나왔다는 표현을 단 지파의 ‘라이스 이주’(사사기 18:27-28)와 연관하기도 합니다. ‘새끼 사자’란 아직 어린 미숙함이 남아있지만, 조만간 용맹과 강력한 힘을 가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어린 탓에 독사 앞에서도 두려움을 느낍니다. 야곱의 축복에서는 길에 있어서 지나가는 말을 공격하여 말 탄 자를 뒤로 떨어뜨리는 뱀과 같은 존재로 묘사합니다(창세기 49:17).

 

 

(4) 지파들의 축복 : 납달리(23)

 

23납달리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은혜가 풍성하고 여호와의 복이 가득한 납달리여 너는 서쪽과 남쪽을 차지할지로다(23)

 

야곱의 첩 빌하의 아들인 납달리 지파에 대한 모세의 축복인 ‘은혜가 풍성하고 여호와의 복이 가득한’은 야곱의 축복(창세기 49:21)과는 무관해 보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 납달리 지파와 아셀 지파는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었습니다.

납달리 지파는 그들의 분깃 북쪽 갈릴리와 관련된 여호와의 복이 가득하며, 남방과 서방(갈릴리 호수)을 얻을 것입니다. ‘(바다가 있는) 서쪽과 남쪽’이라는 표현을 호수의 서쪽 지역으로 해석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야곱의 축복에서는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암사슴으로 묘사합니다(창세기 49:21).

 

(5) 지파들의 축복 : 아셀(24-25)

 

24아셀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아셀은 아들들 중에 더 복을 받으며 그의 형제에게 기쁨이 되며 그의 발이 기름에 잠길지로다 25네 문빗장은 철과 놋이 될 것이니 네가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24-25)

 

모세는 야곱의 첩 실바의 아들인 아셀 지파의 복이 가장 클 것이며, 다른 지파들에게도 사랑받을 것을 기도합니다. ‘아셀’이라는 말 자체가 행복을 의미하며, ‘그의 발이 기름에 잠길 것이다’라는 모세의 축복은 특정적으로는 그들이 거할 장소(갈릴리의 고원지대)의 특산물인 올리브 나무의 소산(기름)이 충분한 결실을 얻을 것을 의미할 수 있고, 또 결실이 많은 지역을 소유할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그와 유사하게 자손 번성을 기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신명기 32:13: 욥기 29:6). 문빗장은 강한 요새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함께하실 때 나타나는 현상으로) 그들이 평생 안전하고 안락할 것을 말해줍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지파들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에는 물질적 번영과 대적들로부터 안전보장에 대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야곱의 축복에서는 기름진 음식을 먹으며 그것을 왕에게 진상(珍賞)하는 존재로 묘사합니다(창세기 49:20).

 

 

결론(26-29)

 

26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이가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27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 28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29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26-29)

 

서론처럼 여기에서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전사이며 보호자)과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갖고 있는 탁월성과 특권이 재진술됩니다(사실 26-27절의 본문은 난해하다). ‘여수룬의 하나님과 같은 분이 없도다.’ 이스라엘이 탁월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하늘들을 병거(兵車) 삼아 타시고(참조. 사무엘하 22:11; 시편 18:10: 68:33: 104:3; 이사야 19:1; 에스겔 1장: 하박국 3:8),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거주처인 하늘로부터 영원하신 손을 뻗으사 이스라엘 앞에서 원수를 몰아내시고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풍요의 땅에 안착케 하시는 분이며,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통하여 구원받은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풍요로운 약속의 땅에 대한 묘사(‘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는 앞서 언급된 요셉에 대한 축복(하늘의 보물인 이슬, 13절)과 야곱이 이삭에게 받은 축복(하늘의 이슬, 창 27:28)을 상기시킵니다. 또한 이 복의 언급은 28장의 복 목록을 떠올립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풍요로운 땅에 홀로 안전하게 거할 것이며, 야곱의 샘은 신적 축복의 상징들인 곡식과 포도주의 땅에 있고, 이제 그의 하늘은 (축복과 번영을 위한) 이슬을 내리는 곳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온갖 축복을 독차지하게 됩니다. 그들은 여호와로 인해 구속 받은 백성입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방패이며 영광의 칼이십니다. 그러니 그로 인해 이스라엘의 대적들이 굴복할 것이며, 그들의 등(‘높은 곳들’)을 밟아 영광을 얻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모든 대적들과의 전쟁에서 승승장구하신 전사 여호와의 보호를 바라는 이스라엘의 행복입니다.


모세 오경의 마지막 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레위 지파의 역할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말씀대로 성취하시고, 돌보시고, 붙드시고, 지켜주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누가 어떤 기준을 들어대면서 우리를 다른 식으로 정의한다 해도 우리는 단호하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자신의 정체를 규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진정으로 행복한 백성의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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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33-01)

 


모세의 축복 : 지파들의 축복(1)

신명기 33장 1-17절


성도는 이 세상에서 몸답고 살아갑니다.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여수룬의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살아갑니다. 세상은 자신을 의지하라고, 즉, 하나님보다 재산과 학식과 그리고 인간관계에 더 의지해야 한다고 속삭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다스림 가운데 그분이 주시는 복을 힘입어 사는 존재입니다. 복의 군원이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어떤 분이시겠습니까?

 

 

본문은 임종을 앞둔 모세가 이스라엘을 향한 유언이자 축복의 노래의 전반부이며, 더 이상 질책과 훈계와 경고, 저주의 선언이 없습니다. 여기서는 온전히 희망찬 미래에 대한 축복만이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이 예언적 축사는 오경에서 가장 어려운 본문으로 꼽힙니다. 드문 단어들이 나열되고, 많은 문법적, 구문론적 어려움이 있으며, 뜻 자체도 매우 모호한 것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서문 :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1-5)

모세의 마지막 유언적인 축복의 노래는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우선 1절은 모세의 이 노래를 도입하는 서사적 진술이며, 2-29절이 시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2-5절 서언(Exordim), 6-25절 지파들의 축복; 26-29절은 종언(Code)입니다. 각 지파를 축복하는데 시므온 지파만 누락되어 있는데, 불행히도 축복해야 할 미래가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중에 시므온의 후손들은 유다 영토로 흡수됩니다(여호수아 19:1,9; 창세기 34:25).

 

1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함이 이러하니라 2그가 일렀으되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오시고 세일 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 산에서 비추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에 강림하셨고 그의 오른손에는 그들을 위해 번쩍이는 불이 있도다 3여호와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나니 모든 성도가 그의 수중에 있으며 주의 발 아래에 앉아서 주의 말씀을 받는도다 4모세가 우리에게 율법을 명령하였으니 곧 야곱의 총회의 기업이로다 5여수룬에 왕이 있었으니 곧 백성의 수령이 모이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함께 한 때에로다(1-5)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의 영웅이며, 광야 40년 동안 불순종하던 이스라엘을 인도했고, 이제 약속의 땅 가나안을 문 앞까지 인도한 위대한 지도자 모세에게 놀랍게도 죽음을 선고하십니다. 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를 ‘새로운 시대 사람’이 아니라 ‘옛 시대 사람’으로 정하셨습니다. 그가 행한 단 한 번에 불순종을 하나님께서는 용납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냉정하게 보이지만 그것은 그의 존재 차체가 가나안 정복의 장애가 되며, 또한 여호수아의 지도력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의 존재보다 그의 사라짐이 하나님 나라에 기여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서언은 하나님께서 영광스러운 임재의 현상으로 묘사하면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이 거쳐간 시내 산, 세일 산, 바란 산은 특정한 산봉우리라기보다는 높은 산지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빛이 바란 산에서 비치고 오른손에 번쩍 이는 불이 있습니다. 시내산에서 영광의 광채로 임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바란 광야에 거하고 있을 때에도 그 영광의 빛을 발현하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수많은 성도 가운데 임재하시고 말씀을 주십니다. 시내산에서 백성들이 하나님의 현현을 경험했던 풍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토라) 자체를 ‘모세가 우리에게 율법을 명령하였으니 곧 야곱의 총회의 기업이로다’라고 율법이 상속받을 재산이요 기업이 된다는 것이 강조됩니다(시편 119:11). 이스라엘은 여수룬 백성입니다. ‘여수룬’은 앞서 32:15에서 살펴본 대로 ‘올바른 자’, ‘곧게 선 자’라는 뜻의 이스라엘의 별명입니다.

 

각 지파들을 향한 축복(6-25)

모세가 각 지파를 위해 축복한 본문을 읽고 있으면, 창세기 49장에서 요셉이 12지파를 위한 축복한 예언과 비슷한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신명기 본문에 집중해서 해석하겠습니다.

 

⑴ 르우벤 지파(6)

 

6르우벤은 죽지 아니하고 살기를 원하며 그 사람 수가 적지 아니하기를 원하나이다(6)

 

첫 번째 등장하는 지파는 르우벤으로 야곱의 장자입니다. 그에 대한 축복권은 단 한 줄로 도입부가 없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르우벤의 자리는 선두에 배정했으나, 그의 축복은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여 단 한 줄에 그칩니다. 그가 장자 지파지만 장자의 축복권을 실질적으로 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레아의 아들이자 야곱의 장자인 르우벤 지파가 수적으로는 소수(창세기 34:30: 신명기 4:27; 예레미야 44:28; 시편 105:12; 역대상 16:19)이나 그의 후손이 끊이지 않을 것을 기원합니다. 물론 독법에 따라 수가 많아지기를 소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면에서 야곱의 유언은 서모를 범한 르우벤의 소행 때문에 부정적이었으나(창세기 49:3-4), 모세의 유언은 다소 긍정적입니다.

실제 이후의 역사에서 급격히 침체의 길을 걷습니다. 창세기 49장 야곱의 예언에서 그는 ‘물의 끓음’과 같은 성급한 기질과 분별력 없는 성격을 지녀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는 죄악을 저지른 일로(창세기 35:22) 더는 ‘탁월하지 못할 것’이라는 저주를 받습니다(창세기 49:4).

르우벤의 실질적인 장자권은 요셉의 두 아들에게 넘어갑니다. 장남의 특수한 위치는 통상적으로 두 배의 지분과 지도권을 보장받습니다. 법적으로는 르우벤이 일련의 계보들 속에서(창세기 49:3-4: 출애굽기 6:14; 민수기 26:5; 역대상 5:1) 장남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지만, 실제 두 배 몫은 요셉에게 배당됩니다(참조 창 48장).

16절은 르우벤이 인구가 줄어 간신히 유지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민수기를 보면 다른 지파와 비교해 볼 때 평균치를 유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 시대 이후로 요단 동편에 있던 그들의 땅이 갓과 길르앗 땅으로만 언급될 뿐 르우벤은 언급되지 않아 그들이 급격히 쇠퇴했음이 암시됩니다(사무엘상 13:7; 사무엘하 24:5). 그들은 요단 동편 땅의 동쪽에 자리한 여러 부족들의 공격을 받아 약해졌을 것입니다.

결국 주전 730년경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의 침략으로 다수의 백성이 포로로 잡혀가고 동쪽 유브라데 강 쪽으로 이주하면서 점점 흩어집니다(역대상 5:3-10).

 

⑵ 유다 지파(7)

 

7유다에 대한 축복은 이러하니라 일렀으되 여호와여 유다의 음성을 들으시고 그의 백성에게로 인도하시오며 그의 손으로 자기를 위하여 싸우게 하시고 주께서 도우사 그가 그 대적을 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7)

 

다음은 유대에 대한 축복입니다. 야곱의 축복에서(창세기 49:8-12) 유다는 장자권을 넘겨받지 않았으나, 온 이스라엘 지파를 이끌도록 지도권을 양도받는 지파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장차 그가 수행할 군사적인 지도자로서의 역할이 크게 부각됩니다(민수기 2:3-4; 10:14; 그리고 사사기에서의 전쟁들, 사사기 1:1-19; 2-:18). 이후 유다 지파에서 다윗 왕이 등장하고, 그 후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오십니다. 유다는 요셉을 구하고 언약 가족을 세우기 위해 희생했기 때문에 이런 축복을 받았을 것입니다(창세기 44:18-34).

 

⑶ 레위 지파(8-11)

 

8레위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 주께서 그를 맛사에서 시험하시고 므리바 물 가에서 그와 다투셨도다 9그는 그의 부모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내가 그들을 보지 못하였다 하며 그의 형제들을 인정하지 아니하며 그의 자녀를 알지 아니한 것은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주의 언약을 지킴으로 말미암음이로다 10주의 법도를 야곱에게, 주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며 주 앞에 분향하고 온전한 번제를 주의 제단 위에 드리리로다 11여호와여 그의 재산을 풍족하게 하시고 그의 손의 일을 받으소서 그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와 미워하는 자의 허리를 꺾으사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옵소서(8-11)

 

레위 지파는 성직으로 임명된 특별한 지파입니다. 이 부분은 모세의 기도 중에서 둘째로 길며, 해석하기 어려운 점들도 많습니다. 여기에서는 야곱의 축복에 나타난 비제의적 측면보다는 상대적으로 제의적 축제의적 측면보다는(창세기 49:5-7) 상대적으로 제의적 측면(8-10)이 강조됩니다. 그들에게는 ‘우림과 둠밈’이 있다는 점이 강조되는데, 이는 대제사장의 흉패에 보관된 물품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신탁의 도구입니다.

여기에서 레위인들이 맡은 신탁, 교육 그리고 제의적 업무가 언급됩니다. 레위지파는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쓰는 ‘둠밈과 우림’을 맡은 ‘헷세드’의 사람들입니다. 우림과 둠밈은 레위인들을 통하여 특정한 질문들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즉 ‘예’의 ‘아니오’)을 확인하려는 목적으로 사용된 신탁의 매체입니다.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백성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용된 여러 사건들이 시적 형태로 혼합되어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맛사와 므리바 사건 때에 백성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그들과 다투셨지만(모세와 아론으로 대표되는 레위인들, 출애굽기 17:1-1; 민수기 20:1-13; 신명기 32:51, 시편 81:7; 95:8-9; 106:32),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여호와의 명령과 언약을 지키고 백성에게 계명과 토라를 전하기 위해서 부모와 형제와 자녀의 인연도 무시하였습니다(황금 송아지 사건, 출애굽기 32:25-29; 민수기 25:1-9).

이들은 여호와의 규례들을 야곱에게 여호와의 토라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며 여호와 앞에서 향(희생제물의 타는 연기, 참조. 사무엘상 2:16; 호세아 4:13; 11:2: 이사야 1:13)을 피우며, 여호와의 제단에 아침저녁으로 상번제를 드리는 것과 같은 직무를 받았습니다. 본격적인 레위에 대한 축복은 11절에만 나옵니다.

본문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때 레위인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이것이 옳다면, 모세의 이 진술은 사건들을 뭉뚱그려 설명하는 신명기의 특징을 보여주는 셈입니다. 부모와 형제와 가족들에게 냉정하라는 레위인에 대한 명령은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주의 언약을 지킨다’는 말로 미루어 볼 때, 성막에 봉헌된 특수한 신분을 보여주는 것이 분명합니다.

레위인들은 ‘하나님과의 약속(언약)’을 지켜 이 일을 우선시하므로, 부모와 가족들에게 더는 우선순위를 둘 수 없었습니다. 특히 대제사장의 경우 직계 가족이 사망해도 장례에 가지 못했습니다(레위기 21:11). 그들은 백성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성막에서 백성의 모든 제사, 특히 매일의 아침과 저녁의 번제를 맡았습니다. 이러한 직무를 수행하는 레위인들이 비록 땅을 분배받지는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늘 부족함 없이 풍성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11). 그들이 특별히 원수의 허리를 꺾는다는 것은 실제로 레위인들이 전쟁에서 수행하는 중요한 임무를 지시 합니다. 전쟁 중에 제사장들은 법궤를 멘 뒤 실제 전투에서 싸우지는 않지만, 전쟁터의 최전선까지 앞장서 백성을 이끄는 역할을 했습니다.

모세는 여러 제사와 다양한 직무수행을 위하여 그들에게 힘(혹은 재산)을 주시기를 레위인들의 업무가 하나님께 용납되기를 원수들에게서 보호하시기를 간구합니다.

 

 

⑷ 베냐민 지파(12)

 

12베냐민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곁에 안전히 살리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날이 마치도록 보호하시고 그를 자기 어깨 사이에 있게 하시리로다(12)

 

베냐민은 야곱의 열두째인 막내이자 라헬의 둘째 아들입니다(창세기 35:18,24; 참조. 창세기 42:4,38; 44:1-34). 하나님께서는 베냐민을 마치 아버지가 아들을 돌보는 것처럼 보호하실 것입니다.

모세는 야곱의 축복과 같이 군사적인 탁월성을 강조합니다. 모세는 베냐민 지파를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라고 부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오래 함께하실 것이며, 그들이 여호와의 어깨 사이에 거할 것을 기대합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애정과 보호의 자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고대 근동에서 아버지가 아이를 품에 안거나 목말을 태워 이동하던 관행에서 비롯된 유비입니다. 즉 모세는 베냐민 지파가 안전하게 거하기를 기원합니다.

훗날 베냐민은 남북 분열 시 유다의 보호 아래 남유다와 동맹하며 포로 귀환기에는 유다와 함께 국가 재건을 위해 쓰임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열왕기상 12:21,23; 역대상 12:2,16; 역대하 15:9;25:5; 34:9,32; 스 1:5;4:5).

 

⑸ 요셉 지파(에브라임 므낫세/13-17)

 

13요셉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원하건대 그 땅이 여호와께 복을 받아 하늘의 보물인 이슬과 땅 아래에 저장한 물과 14태양이 결실하게 하는 선물과 태음이 자라게 하는 선물과 15옛 산의 좋은 산물과 영원한 작은 언덕의 선물과 16땅의 선물과 거기 충만한 것과 가시떨기나무 가운데에 계시던 이의 은혜로 말미암아 복이 요셉의 머리에, 그의 형제 중 구별한 자의 정수리에 임할지로다 17그는 첫 수송아지 같이 위엄이 있으니 그 뿔이 들소의 뿔 같도다 이것으로 민족들을 받아 땅 끝까지 이르리니 곧 에브라임의 자손은 만만이요 므낫세의 자손은 천천이리로다(13-17)

 

이 부분은 모세의 축복에서 가장 긴 내용이며 야곱의 축복(창세기 49:22-26)과 유사한 점들이 많습니다. 요셉에게는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통한 두 배의 축복이 주어집니다. 그들은 하늘의 상수원과 땅의 지하수로부터 물이 넉넉히 공급되는 좋은 땅, 농사와 목축이 잘되는 기름진 땅을 얻을 것입니다. 넉넉한 일조량을 통해 열두 달 내내(‘태음’) 소산물이 잘 자랄 것입니다. ‘옛 산’은 당시 문화권에서 풍성한 자원들이 쏟아지는 곳을 의미했습니다. 이를테면, 목재, 돌, 금속, 귀금속, 과일 등. 실제로 요셉 족속의 땅 에브라임과 므낫세 반 지파의 요단 서편 땅은 삼림이 우거지고 나중에 많은 과수원이 개간되었습니다(여호수아 17:16-18).

므낫세 반 지파의 요단 동편 고원 지대도 좋은 숲과 목초지를 지녔다. 축복의 근원은 모세 가 광야에서 만난 하나님, 불타는 떨기나무에 현현하신 여호와 하나님 이십니다(16). 그들은 ‘구별된 자’란 말을 들을 만큼 특별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북왕국 에브라임은 결국 하나님의 축복을 쏟아 붓고 배교의 길을 가고야 말았지만, 대단한 물질적 번영과 더불어 큰 영광을 누렸습니다. 요셉에게 실질적인 ‘첫 수송아지’의 권리, 즉 장자권의 축복이 옮겨왔습니다. 원래 르우벤은 ‘내 기력의 첫 열매’라는 수식어가 붙은 장자의 신분이었습니다(창세기 49:3). 그러나 그 별칭이 요셉에게 넘어갑니다. 장남이 통상적으로 두 배의 지분을 받는 것처럼, 요셉은 두 아들을 통해 두 배의 몫을 상속 받습니다. 다만 자손 번영의 축복은 므낫세보다는 에브라임에게 압도적으로 크게 주어질 것입니다.

 

요셉지파는 야곱이 가장 사랑한 지파이며, 모세의 축복에서도 그러한 영향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요셉 지파보다는 두 개의 독립된 지파들로 언급됩니다(참조. 3:13-14: 삿 5:14). 요셉 지파에 대한 축복은 두 지파들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물질적인 풍요(13-16)와 이방 국가들 사이에서 군사적 능력(17)에 대한 것입니다.

먼저 13-16절에서 모세는 요셉지파의 지도자들(나실인)의 머리에 임하길 원하는 하늘 위의 물과 지하의 물과 태양의 결실물과 달의 결실물(곡식)과 옛 산들과 영원한 언덕들(참조, 창 49:26; 합 3:6)의 탁월한 것들(삼림)과 땅과 그 위에 거하는 것들과 가시떨기 나무 가운데에 계시던 이의 은혜를 나열합니다. 비와 물은 하늘과 땅의 소산(所産)이자 하나님이 하늘에서 주시는 선물로 이해합니다. 산과 언덕에 대한 표현은 영적 풍요를 의미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삼림은 풍요와 번성을 의미하는 갈멜산의 삼림을 언급하는 것처럼 보인다. 모세는 요셉지파가 군사적(혹은 수적으로 막강해지길 기원한다. 16절의 가시떨기 나무 가운데에 계시던 이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으로, 출애굽기 32 이하에서 양을 찾아 헤매다가 하나님의 산 앞에 있던 불타는 덤불 가운데 계신 여호와를 지칭하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17절은 요셉 지파의 첫 수송아지 같은 위엄이 뿔에서 나타나며 민족들을 세상 끝까지 들이받을 것을 묘사합니다. 이것은 에브라임 지파의 수만 마리와 므낫세


모세 오경의 마지막 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레위 지파의 역할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도 말씀을 가르칠 때 책임감과 특권이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그 의무를 충성스럽게 감당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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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32-03)


모세의 찬양(3):여호와의 보응

신명기 32장 34-52절


모든 사람들은 칭찬 듣기를 원합니다. 꾸중을 좋아한 사람은 없습니다.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칭찬 듣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심지어는 나쁜 일을 하는 사람들까지도 칭찬 듣기를 원합니다. 칭찬을 받는다는 것은 인정받는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녀들을 교육하는 데는 칭찬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계속 칭찬만으로 교육하면 실수 앞에서 자신의 실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좋은 일을 했을 때는 칭찬을 해야 하겠지만, 나쁜 일을 했을 때는 분명히 잘못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육에는 ‘당근’과 ‘채찍’이 필요합니다.

 

모세의 시가 막바지에 이릅니다. 시의 분위기는 반전되어 백성을 행한 회복의 약속이 낭송됩니다. 원수를 향해서는 심판의 맹세가 선언됩니다. 원수들이 제압되고 이스라엘 백성의 위상이 만국 중에서 회복됨으로써 이제 모든 민족들이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 할 것입니다. 시는 종언과 더불어 마무리되고 시가 노래된 후 백성을 향한 모세의 당부가 덧붙이고 있습니다.

 

백성을 행한 회복의 약속(34-39)

무조건 악인을 용납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니지만, 자기 백성들이 범죄하였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계획마저 포기하신 것은 아닙니다. 백성들이 포로된 곳에서 회개하면 다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건져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심판하실 것은 심판하실 것입니다. 

  

34이것이 내게 쌓여 있고 내 곳간에 봉하여 있지 아니한가 35그들이 실족할 그 때에 내가 보복하리라 그들의 환난날이 가까우니 그들에게 닥칠 그 일이 속히 오리로다 36참으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고 그 종들을 불쌍히 여기시리니 곧 그들의 무력함과 갇힌 자나 놓인 자가 없음을 보시는 때에로다 37또한 그가 말씀하시기를 그들의 신들이 어디 있으며 그들이 피하던 반석이 어디 있느냐 38그들의 제물의 기름을 먹고 그들의 전제의 제물인 포도주를 마시던 자들이 일어나 너희를 돕게 하고 너희를 위해 피난처가 되게 하라 39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36-39)

 

시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 말씀의 주체가 누구인지 분지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단 20-35절까지가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36-37a절은 모세의 말이며, 37b-42절은 다시 여호와의 직접 적인 말씀이고 마지막 43절은 모세에 의한 시의 종언입니다.

여기서는 모세가 다시 주어로서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실 것이다.’ ‘판결하다’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이 재판은 뒤따르는 총들에 대한 애정에 비추어 볼 때, 분명히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긍휼한 판정을 내리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이 무력한 가운데 있을 때, 또한 종들이든 자유인이든 아무도 보이지 않는 비참한 가운데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을 위해 유리한 판결을 내리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따지실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의 직접 적인 발언으로 전환됩니다(37b).

‘너희가 신뢰하던 그 반석이 이제 어디 있느냐?’, ‘너희가 바친 짐승을 먹고 붓던 포도주를 마시던 그 신들이 어디 있느냐?’ 여기서 ‘반석’은 비아냥대기 위한 풍자적 표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진정한 반석(Rock)은 하나님이신데, 너희의 반석(rock)은 하나님이신데, 너희의 반석은 무엇이냐?이 가짜 반석은 바로 앞에 언급된 ‘신들’과 이어지는 우상들을 가리킵니다.

39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결정적인 말씀을 꺼내십니다. ‘내가 바로 그인 줄 알라.’ 다시 말해 ‘내가 바로 그 반석이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모두 가짜 신들이며, 오직 여호와만이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유일한 하나님이십니다(39).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다.’ ‘빼앗다’는 엄밀히 ‘구원하다,’ ‘구출하다’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발언은 ‘내 손에서 능히 구해낼 자가 없도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붙들고 계시는 언약 백성을 빼앗아갈 자가 없다는 뜻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사로잡은 대적들을 아무도 구할 수 없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즉, 패배한 이스라엘의 대적들은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하나님 외에 의지할 곳은 없습니다. 하나님 외에 끝까지 우리의 피난처가 될 것은 아무 곳은 없습니다. 진정한 반석은 누구입니까?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원수를 향한 심판의 맹세(40-42)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한 분노는 영원히 멸하실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멸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백성을 향해서 보호를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대적들을 향해서는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40이는 내가 하늘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말하기를 내가 영원히 살리라 하였노라 41내가 내 번쩍이는 칼을 갈며 내 손이 정의를 붙들고 내 대적들에게 복수하며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할 것이라 42내 화살이 피에 취하게 하고 내 칼이 그 고기를 삼키게 하리니 곧 피살자와 포로된 자의 피요 대적의 우두머리의 머리로다(40-42)

 

원수들이 받을 절망적 심판이 더 구체적으로 묘사됩니다. 하나님은 불변을 약속하는 전형적인 맹세 형식을 사용하여 자신의 말과 약속의 확실성을 보장하십니다.

손을 하늘을 향해 드는 것은 원래 하늘에 계신 분을 부르는 행위입니다. 자신의 발언을 보장해줄 신적 존재의 임재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맹세의 주체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상위의 어떤 존재에게 맹세하는 분이 아니 기에, 단순히 ‘맹세 형식’으로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스스로의 다짐입니다. ‘내가 영원히 살리라’는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올바로 번역하면 ‘내가 영원히 살아 있는 한’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맹세와 약속의 불변성에 대한 보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십니다. 그것은 대적들을 향한 전쟁과 심판 철저한 복수에 대한 맹세입니다.

‘칼을 간다는 것’은 여호와의 본격적인 전쟁 준비를 의미합니다(42). ‘정의를 붙는다’는 말을 다소 추상적인데, ‘정의’는 ‘공의’, ‘정의’ 판결을 의미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정의의 심판’을 말할 것입니다. 여호와는 적들이 정의의 심판을 받게 하십니다. 그분의 무기는 강합니다. 그분이 쏜 화살에는 피가 잔뜩 묻을 것이고, 칼은 많은 육체를 삼킬 것입니다. 여기서 ‘화살’과 ‘칼’은 모든 무기를 가리키는 총칭 어법(merism)으로 볼 수 있습니다. 칼에 피살된 자들은 물론 포로로 잡힌 자들도 그 칼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포로로 잡힌 자들은 포로로 잡혀와 도륙을 당한다기보다, 칼에 부상을 입고 붙잡힌 것을 뜻할 수 있습니다. 대적들의 왕들과 대장들도 그분의 강력한 무기를 피할 수 없습니다.

‘대적의 우두머리의 머리’는 다소 모호한 번역입니다. 한글개역(개정)의 번역은 대장들의 ‘머리카락’이라기보다 베인 ‘머리’를 가리킬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어 원문은 다른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는 장발을 가리킬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이 어구의 의미는 ‘장발의 우두머리’일 수 있습니다. 즉, 여호와의 화살과 칼이 장발의 우두머리의 피를 흘리게 하고 살을 벤다는 뜻입니다.

여기 ‘긴 머리’는 지도자나 장군들의 위엄 있는 풍채와 뽐내는 장식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예. 압살롬의 장발). 어쨌든 적들은 피살자나 포로나 나아가 우람한 풍채를 자랑하는 그들의 지도자들이나 누구든지 하나님의 심판의 무기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종언(Coda)(43)

*******

    

43너희 민족들아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 주께서 그 종들의 피를 갚으사 그 대적들에게 복수하시고 자기 땅과 자기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43)

 

모세의 노래가 마무리됩니다. 이 종결부에서 갑자기 시의 분위기가 반전됩니다. 민족들이 이스라엘 백성과 구원의 대열에 합류하여 함께 즐거워합니다. 주께서는 주의 백성의 대적들에게 복수하심으로써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열국을 초대하셔서 잔치를 베푸시는 장면을 연출하십니다. 그분은 자기 땅과 자기 백성을 속죄 할 것입니다! 여기서 매우 흥미롭고 중요한 단어 키페르가 나타납니다. 이 동사는 모세의 노래의 마지막 동사라는 점에서 대단히 의미가 있습니다. 이 동사에 대한 번역이 학자들과 역본마다 갈리는데, 키페르는 밀그롬이 말한 대로 속죄제 본문에서는 ‘정결케 하다’라는 뜻을 지니고, 그 외의 본문에서는 단순히 어떤 값을 지불해서 ‘보상적 대속을 하다(make atonement for)’라는 뜻을 지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민수기 35:33에 비추어 볼 때, 동사 키페르가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갖는 이중적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하나님의 대적을 향한 보응은 곧 이스라엘을 위한 보상적 대속이자 그들로 인해 더럽혀진 오염의 씻어냄입니다.

 

시 낭송의 완료와 당부(44-47)

오늘날 교회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도록 신실한 선포하고 바르게 가르치고 마음에 새기도록 돕는 일을 잘 감당해야합니다. 그럴 때, 교회가 여전히 모든 사람들을 축복과 생명의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생명의 잔치에 초대할 때,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동참하는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이 될 것입니다.

 

44모세와 눈의 아들 호세아가 와서 이 노래의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말하여 들리니라 45모세가 이 모든 말씀을 온 이스라엘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46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오늘 너희에게 증언한 모든 말을 너희의 마음에 두고 너희의 자녀에게 명령하여 이 율벌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47이는 너희에게 헛된 일이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니 이 일로 말미암아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 차지할 그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44-47)

 

모세는 눈의 아들 호세아(여호수아)와 함께 백성들 앞에서 ‘이 노래의 모든 말씀’을 낭송했습니다. 이곳에서는 ‘호세아’로 등장하지만, 모세가 눈의 아들 호세아를 ‘여호수아’로 부른 것은 민수기 13:36절에 나옵니다. 여호수아는 실제로 낭송을 하지는 않고, 단지 시의 공동 선포자 자격으로 모세 옆에서 참관했을 것으로 추론됩니다. 45절이 그것을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모세는 이 시를 기억하라고 요청하면서 이 모압 평지에서 선포된 하나님의 율법을 모두 지켜 행하고, 자녀들을 잘 가르치라고 당부합니다. 이것만이 그 땅에서의 축복과 장수와 생명을 보장받는 길입니다. 이제 모세가 이 노래(32:1-43)를 다 부른 후에 모든 설교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백성들에게 교훈합니다.

 

모세의 죽음 예고(48-52)

무지한 인생들은 자신이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합니다. 겉으로는 생을 만끽하면서 사는 보이지만, 실은 걸음을 내디딜수록 더 죽음에 가까이 갈 뿐입니다. 뒤틀린 인생의 결국은 죽음입니다. 모세는 이제 모든 사역을 마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죽음 앞에 한 발 더 다가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8바로 그 날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49너는 여리고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아바림 산에 올라가 느보 산에 이르러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라 50네 형 아론이 호르 산에서 죽어 그의 조상에게로 돌아간 것 같이 너도 올라가는 이 산에서 죽어 네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 51이는 너희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 가에서 이스라엘 자손 중 내게 범죄하여 내 거룩함을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타내지 아니한 까닭이라 52네가 비록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을 맞은편에서 바라보기는 하려니와 그리로 들어가지는 못하리라 하시니라(48-52)

 

여호와께서 같은 날(출애굽 40년 11월 1일),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죽음을 준비합니다. 모세에게 아바림 산지의 느보 산에 올라가 약속의 가나안 땅을 바라봅니다. 들어갈 수 없지만 가나안 땅을 조망하도록 허락해줍니다. 그리고 아론이 이전에 호르 산에서 죽은 것처럼 모세도 이제 조상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모세는 민수기에서 신명기에 이르도록 아바림 산, 비스가 산 그리고 느보 산을 모두 오릅니다. 모세는 아바림 산맥에 올라 여러 봉우리들 중 하나인 느보 산을 등산해야 합니다. 느보 산은 해발 850여 미터에 이르는 그 일대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요단 동편과 서편 양쪽 모두를 조망할 수 있다고 알려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다소 가혹하고 냉정하게 느껴질 수 있는 드라마와 같았던 모세의 인생에 마지막 슬픔을 자아내는 말을 다시 꺼내십니다. 그는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가데스 므리바의 사건은 식수난의 현장에서 백성들이 아우성치고 하나님께 대들며 범죄했을 때, 모세는 그들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모습을 들어내야 했습니다. 사실상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에 합류했기 때문입니다(민수기 20장). 당시 그는 지도자로서 백성들의 범죄에 대한 책임을 지는 위치에 있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혈기를 드러내며 이 일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백성들과 거의 동일한 불순종을 범하였습니다. 그는 그 땅을 멀리서 바라볼 수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잘 사는 것만큼이나 잘 죽는 것도 중요합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인생을 사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말씀과 때를 따라서 사는 백성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는 이스라엘이 세상의 법칙을 따라 살아가지 않길 간절히 원합니다. 세상의 법칙은 하나님을 멀리하는 법칙이며 영적인 타락을 가져오는 법칙이요, 결국에는 재앙을 불러오는 법칙입니다. 하나님의 법칙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면, 심판과 보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단순히 협박이 아니라 무서운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면 축복의 길이요 생명의 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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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32-02)

 


모세의 찬양(2):패역한 이스라엘

신명기 32장 15-33절


어린 시절 여름 방학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섬진강에서 수영하며 놀았습니다. 항상 부모님들께서는 수영하려 가는 자녀들에게 조심시키고 타이르십니다. 그러나 자녀들은 부모님들의 말씀을 잔소리로 들리지 훈계로 들리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종종 물길을 알지 못한 타지 사람들이 익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사건들은 아이들에게 큰 경고의 메시지로 들리고 한 동안은 조심스럽게 물놀이하곤 했습니다.

 

  •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배반합니다. 우상을 섬기고 새로운 신을 찾아 나섭니다. 그들의 패역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민족을 불러들여 치시고, 갖가지 자연재해와 질병과 전염병을 보내 벌하실 것입니다. 이때 다른 민족들은 승리를 자신들의 공적으로 여기며 자랑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방 민족들도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배반(15-18)

‘관계’라는 것은 가변적입니다. 예를 들어 결혼이라는 예식을 부부라는 관계를 결정해준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당연한 관계는 없습니다. 하나님과 자기 백성의 관계도 사람들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아도, 항상 기계적 무조건적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상태에서 ‘하나님의 사랑’이나 ‘하나님의 은혜’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15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 16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 17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귀신들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이 알지 못하던 신들, 근래에 들어온 새로운 신들 너희의 조상들이 두려워하지 아니하던 것들이로다 18너를 낳은 반석을 네가 상관하지 아니하고 너를 내신 하나님을 네가 잊었도다(15-18)

 

서론 부분(1-14절)에 묘사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 설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변함없으신 분인 것을 보여주지만, 대조적으로 이스라엘은 얼마나 하나님 앞에 패역한 백성인가를 강조합니다. 본문은 이 ‘모세의 노래’는 당시 근동 지방의 소송 형식을 띄고 있는데, 아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지만, 마치 눈 앞에서 이루어진 일처럼 세세하게 묘사합니다.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의 구체적인 고발’과 ‘하나님의 판결’, 그리고 ‘하나님의 고민’을 다루고 있습니다.

 

‘모세의 노래’는 역사의 회상과 함께 시작하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백성들을 인도하셨고 높이셨는지를 기술하며 그분을 찬미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땅을 정복했던 ‘여수룬’ 민족입니다. ‘여수룬’은 ‘올 곧은’, ‘곧게 선’이라는 뜻을 지녔는데, 그들은 이름값을 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여수룬이라는 명칭은 항상 의로우시고 올바르신 하나님과 대비되면서, 이스라엘의 배은망덕에 대한 반어적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여수룬이 냉소적인 뉘앙스를 내포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모세와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이 깃든 표현으로 보입니다. ‘너희가 잘도 여수룬이겠다. 이 나쁜 녀석들아!’라기보다는 ‘너희가 여수룬 민족인데, 패역의 길로 가는구나!’ 힘든 40년간의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상상 그리던 젖과 꿀의 향연을 마음껏 누리면서, 육신은 기름지고 비대해졌습니다. 그러나 기껏 살찌우고 키워 놓았더니 이들이 주인에게 발길질을 합니다.

그들은 다른 신, 가짜 신들을 섬기고, 질투하시는 하나님은 격분하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닌 ‘귀신들’에게 희생을 바칩니다. 이 귀신들은 그들이 알지 못하고, 최근에 가나안에서 접하게 될 신들, 곧 조상들이 겪어보지 못했던 신들입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의 신들에 빠르게 매료되고, 심지어 새로운 신들을 찾아 나섭니다. 그들은 이제 그 신들을 두려워하고 제사를 바치며, 그들의 명령을 따르기에 열중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조상들은 그 신들을 두려워한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가나안 땅 초기에 잠시나마 순수했던 조상들의 신앙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낳으시고 조성하신 분입니다. ‘낳다’는 하나님의 여성적인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어머니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낳으셨고 그들에게 젖을 먹여 키우고 살찌워서 비대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그들은 잊고 우상을 섬기고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하나님의 진노와 백성 심판(19-25)

종종 하나님의 성품 중에서 사랑의 하나님을 강조하면서 심판하신 하나님에 대해 성경에서 지워버리려고 하는 시도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을 자기 쓸모대로 만들어서 이용하겠다는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란 계념이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품는 것이 불편할 수 있겠지만, ‘심판’을 말할 수 없다면 ‘정의’를 말할 수 없습니다.

 

19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보시고 미워하셨으니 그 자녀가 그를 격노하게 한 까닭이로다 20그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얼굴을 그들에게서 숨겨 그들의 종말이 어떠함을 보리니 그들은 심히 패역한 세대요 진실이 없는 자녀임이로다 21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내 질투를 일으키며 허무한 것으로 내 진노를 일으켰으니 나도 백성이 아닌 자로 그들에게 시기가 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리로다 22그러므로 내 분노의 불이 일어나서 스올의 깊은 곳까지 불사르며 땅과 그 소산을 삼키며 산들의 터도 불타게 하는도다 23내가 재앙을 그들 위에 쌓으며 내 화살이 다할 때까지 그들을 쏘리로다 24그들이 주리므로 쇠약하며 불같은 더위와 독한 질병에 삼켜질 것이라 내가 들짐승의 이와 티끌에 기는 것의 독을 그들에게 보내리로다 25밖으로는 칼에, 방 안에서는 놀람에 멸망하리니 젊은 남자도 처녀도 백발 노인과 함께 젖 먹는 아이까지 그러하리로다(19-25)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은 존재합니다. 선과 악의 기준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기준을 탓하거나 거부할 수 있겠지만, 그런 기준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버리고 잊으며 우상 숭배하는 이스라엘을 어떻게 심판하실 것인지 상기시킵니다.

 

⑴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백성(19-21)

 

하나님은 언약을 깨트린 그들에게 언약의 약속대로 책임을 물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무시하고 거절하십니다(19). 패역한 아들을 향해 부모가 진노하듯이 맹렬히 진노하십니다. 그들은 패역했고, ‘진실이 없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셨지만(4), 그들은 진실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헛된 우상으로 하나님을 격분케 했습니다. ‘하발람’은 공기나 증기를 말합니다. 우상들은 바람처럼 흩어지고 증기처럼 사라질 헛된 것들입니다. 그러한 허망한 존재들에게 제사를 바치는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정당합니다.

21절은 기막힌 반어법을 보여줍니다. 이 구절은 동일한 동사들을 사용하면서 뚜렷한 대구법을 만듭니다. 그들이 내 질투를 일으키며 분노(진노)를 일으켰으니/나도 질투를 일으키며 …분노를 일으키리라. 말하자면, 그들이 ‘신이 아닌 우상들’을 시중들어 하나님의 질투와 진노를 일으킨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민족이 아닌 사람들’을 지원하여 이스라엘의 질투와 진노를 일으키실 것입니다(21). ‘민족 취급을 받지 한 사람들’은 매우 미개하고 문명이 발달하지 못한 떠돌이 민족 집단을 일컫습니다. 이런 유형에 해당하는 족속은 역사 속에서 뚜렷한 영토를 구축하지 못한 미디안 족이나 아말렉, 다른 어떤 종족일 수 있는데, 이 용어가 굳이 특정한 종족을 가리킨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민족답지도 않은 민족이나 나라를 사용해서라도 교만한 이스라엘을 치실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지식 없는 ‘우둔한/어리석은 민족’을 일으켜 그들을 치실 것입니다.

6절에 나오는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분별력이 없는 ‘우둔한 백성’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들이 우둔하니 그들을 징계하는 것은 다른 우둔한 백성으로도 충분합니다.

 

⑵ 백성을 심판하시는 하나님(22-25)

 

하나님의 진노가 재앙으로 표출되어 나옵니다. 스올(음부)은 당시 세계관에서 무덤 아래 망자들이 가는 지하 세계입니다. 분노의 불이 일어납니다. 여기서 ‘불’은 하나님께서 보내실 각종 재앙에 대한 은유입니다.

스올까지 하나님의 진노의 불이 번진다는 것은 심판의 범위가 하늘 아래 모든 것을 포함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불길이 온 땅을 뒤덮고, 땅 위의 모든 소산물을 삼키며 산들의 기초들, 곧 땅의 뿌리까지 불에 탈 것입니다. 재앙에 의한 전면적 파국입니다. 23-25절에 그 재앙의 목록이 나열됩니다. 23절은 24-25절의 재앙들에 대한 요약적 진술로 볼 수 있으며, 그것이 ‘재앙’과 ‘화살’로 묘사됩니다. ‘재앙’은 24절의 다섯 가지 목록으로 구체화되고, ‘화살’은 25절의 전쟁의 두 가지 비극적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24절의 재앙 목록은 히브리어가 너무 난해해 번역과 주석이 다양합니다.

특히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재앙들의 정체는 더욱 그렇습니다.(한글개역은 ‘더위와 독한 질병’). 필자의 견해로 24절에 나오는 재앙들의 종류는 다음과 같습니다: 기근, 열병(fever, CJB, ‘더위’ 대신), 역병, 맹수, 독사. 25절에 두 가지가 추가됩니다. 검, 공포, 마지막 공포는 전쟁으로 인한 공황 상태를 가리키는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젖먹이까지 온 백성이 넋을 잃습니다. 이렇듯 모세의 시는 재앙들을 완전수 ‘7’에 맞춰 일곱 가지로 간추려 열거하면서 백성들이 이것을 기억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대적들 심판(26-33)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다른 이방 민족을 통해 심판하시지만, 지속하지 않습니다. 원수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업신여길까 걱정하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심판을 되돌리신 상황은 광야생활에서도 종종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다가 멈추고 대적을 심판하십니다.

 

26내가 그들을 흩어서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에 대한 기억이 끊어지게 하리라 하였으나 27혹시 내가 원수를 자극하여 그들의 원수가 잘못 생각할까 걱정하였으니 원수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수단이 높으며 여호와가 이 모든 것을 행함이 아니라 할까 염려함이라 28그들은 모략이 없는 민족이라 그들 중에 분별력이 없도다 29만일 그들이 지혜가 있어 이것을 깨달았으면 자기들의 종말을 분별하였으리라 30그들의 반석이 그들을 팔지 아니하였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주지 아니하셨더라면 어찌 하나가 천을 쫓으며 둘이 만을 도망하게 하였으리요 31진실로 그들의 반석이 우리의 반석과 같지 아니하니 우리의 원수들이 스스로 판단하도다 32이는 그들의 포도나무는 소돔의 포도나무요 고모라의 밭의 소산이라 그들의 포도는 독이 든 포도이니 그 송이는 쓰며 33그들의 포도주는 뱀의 독이요 독사의 맹독이라 (26-33)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때, 이스라엘은 피할 길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엄격한 하나님의 진노 때문에 이스라엘은 역사상으로 사라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진노 중에도 다시 한 번 큰 하나님의 반전이 일어납니다.

 

⑴ 심판을 오해하는 대적들(26-3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한 맹렬한 진노를 계속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멈추십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긍휼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개역개정 성경번역에 아쉽게도 ‘그러나’(27)가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이 확고하지만, 하나님께서 스스로 ‘그러나’라는 표현을 통해 스스로 제동을 거십니다. 이스라엘의 원수들이 이스라엘을 조롱하고 그들의 반석이셨던 하나님을 멸시하며 우쭐대는 모습을 저지하기 위해서입니다(27). 대적들이 준동하도록 자극하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원수들은 그것을 오해합니다. 자신들의 모략과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제압한 것으로 생각하며 우쭐댑니다.

28-29절은 이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자신의 능력에 의한 업적이라 생각하며 우쭐대는 그 대적들은 모략도 없고 분별력도 없으며 지혜도 없습니다. 자신들의 능력과 힘이 여호와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마침내 그들도 종말의 파국을 맞을 것입니다. 30절의 그들의 반석에서 그들은 이스라엘, ‘반석’(Rock)은 하나님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반석이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이스라엘) 팔고 그들을 내주지 않았다면, 어찌 대적들이 그들을 격파할 수 있었겠습니까? 어떻게 그들은 한 명이 이스라엘 백성 천을 쫓고 둘이 만 명을 도망가게 했을 것입니까? 31절은 분명하게 확증합니다. 그들의 ‘반석’(rock)이 이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반석은 우리의 반석 (Rock)과 다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스스로 판단하여 자신들의 반석이 이 일을 도왔고 자신들의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제압했다고 오판합니다.

 

⑵ 대적들이 받을 심판(32-33)

 

그러나 이토록 교만한 대적들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합니다. 그들의 포도나무는 소돔의 포도나무요 고모라의 밭의 소산이라는 말은, 그들이 소돔과 고모라와 똑같은 운명을 맞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좋아 보이는 포도는 쓴 포도일 뿐이고, 포도주는 뱀의 독이요 독사의 맹독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이 든 포도주를 창고에 잔뜩 쌓아두셨으며, 언제든지 원수들에게 공급하여 마시고 쓰러지게 하실 것입니다. 그 대적들이 웃음이 그칠 환난의 날이 곧 다가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원문 그대로 변역하면 ‘복수는 나의 것! 내가 보응할 것이며 그날이 속히 오리라!’라는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은 계속 실패하고 하나님을 배반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과 씨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과 씨름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업신여기고 계속해서 어기는데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씨름하시며, 결국 자기 백성과 맺은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해 가십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바로 이스라엘의 회복은 시작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흥망성쇠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과의 씨름을 포기한 순간, 이스라엘은 정말로 역사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의 역사가 증명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해 자신과의 씨름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연민과 사랑을 남겨주십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씨름하시며,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자기 백성을 위한 연민과 사랑을 보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보고 반응하는 자들을 일으키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풍요로움 속에 타락하면 진노의 매를 드시지만, 자신의 백성들이 소멸하기까지 심판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자기 백성들이 바르게 살아가길 원하고, 의에 길로 돌아오길 기다린 것입니다. 성도들은 항상 심판의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바르게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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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32-01)

   


모세의 찬양(1):신실하신 하나님

신명기 32장 1-14절


복음송 중에서 ‘하늘 문이 열리면 노래할 이유 있네. 놀라운 일 그곳에 있으리 노래할 이유 있네!’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들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생명수가 될 것입니다. 생명을 생명답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성도가 성도다워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모세 역시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와 찬양의 제목을 삼고 있습니다.

 

  • 본문은 모세의 노래로서 첫째 부분의 내용을 시를 여는 서언과 더불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을 먼저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간결하게 그러나 최상의 표현들을 동원하여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그분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하신 과거의 일을 기억하라고 요청합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아는 순간,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세의 노래 : 서언(1-3)

성도들은 세상의 어떤 위엄이나 권위 권세보다 하나님께 그 위엄을 돌리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가장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루하루를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 돌리면서 살아갑니다.

 

1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 2내 교훈은 비처럼 내리고 내 말은 이슬처럼 맺히나니 연한 풀 위의 가는 비 같고 채소 위의 단비 같도다 3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전파하리니 너희는 우리 하나님께 위엄을 돌릴지어다(1-3)

 

이 찬양은 ‘모세의 노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르치라고 지시하신 노래가 신명기 32장에 전체를 담고 있습니다. 이 노래는 기쁨의 찬양이기보다는 어두운 면을 나타내는 슬픈 찬양입니다.

먼저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을 어떤 분이신지를 소개하면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백성들과 더불어 초대하고 하늘과 땅을 청중의 일원으로 불러들임으로써 시작됩니다. 하늘과 땅이 증인으로 초대되고 있습니다.

앞서 여러 차례 ‘하늘과 땅’을, 혹은 ‘천지를’ 증인(증거)으로 삼는다는 표현들이 사용된 바 있습니다(3:24; 4:26; 30:19, 28; 한글개역[개정]의 번역에 일관성이 없는 아쉬움이 있다). 이들이 믿을 만한 증인인 것은 사람은 변해도 천지는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땅의 많은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습니다.

자신의 교훈이 백성에게 생명수와 같다고 말합니다. 이 교훈은 마치 단비와 이슬이 대지를 적시는 것같이 백성들에게 잘 흡수되어 그들의 생명을 살리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흥미롭게도 증인으로 초대된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고 또 다른 증인인 땅은 그 비를 흡수하여 생명을 풍성케 합니다. 시의 첫째 교훈은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과연 누구이신가 하는 것입니다(3). 모세가 증인으로 청한 땅과 하늘이 가장 잘 알 것입니다. 그래서 증인으로 부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다(4-6)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물고기가 물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에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는 모습을 가는 비와 이슬처럼 그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은 이러한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4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5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고 삐뚤어진 세대로다 6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네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4-6)

 

본문에서 모세는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노래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성품과 속성을 시(詩)이기 함축적으로 짧은 구절 안에 비유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석이십니다. 사실 반석의 의미는 반석보다 커다란 바위산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견고한 바위 요새와 같으며, 결코 흔들리지 않는 바위산과 같으신 분이십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완전하시고 진실하십니다. 의로우시고 바른 분입니다. 참고로 ‘의로운’은 사법적 뉘앙스가 강한 ‘공의롭다’ 보다는 ‘의롭다’가 더 나은 번역입니다. ‘야샤르’는 ‘올곧다’, ‘올바르다’를 뜻하는데, 사실 두 단어는 비슷한 의미의 동어 반복이며, 이러한 그분의 성품과 속성은 형편없는 인간 존재와 잘 대비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흠투성이에 때가 묻어있고 금이 가 있는 존재이며, 늘 변하고 의롭지도 않고 바르지도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악을 행하고 흠이 있으며, ‘뒤틀리고 비뚤어진’ 백성일 뿐입니다. 그들은 ‘어리석은 백성이요 무지한 백성’입니다. 자신들은 하나님께 특별한 선택을 받았다고 자랑했습니다. 선택 받은 이스라엘은 무한 감사해야 하고 무한 책임을 느껴야 했습니다. 하지만 순종치 않고 악을 행했습니다. 이것은 베풀어주신 은혜를 배반하는 행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드시고 세우시는 분이시고, 그분은 그들을 지으시고 만드신 아버지이십니다(6). 아마도 신약에서는 자주 등장한 표현이지만, 구약에서는 여기서 최초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이미 출애굽기 4:22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이스라엘의 아버지이심을 천명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라고 하셨지만, 직접 이렇게 ‘아버지’라 부른 것은 여기가 처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 역할을 해주셨기에 불순종과 패역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을 수 있었고, 그들을 향한 기대와 계획을 철회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성도들의 삶을 거룩하게 살아가야할 이유가 이곳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한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보다 무엇인가 차이가 나야 합니다. 더 거룩하고 귀감된 삶을 살아갈 때, 주변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역사를 기억하라(7-14)

우리에게 전해진 성경은 기억에 대한 명령에 누군가가 순종한 결과입니다. 기억과 기록은 과거의 역사를 현재화 시키고 그 역사를 이어가게 하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가장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 지존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7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 8지극히 높으신 자가 민족들에게 기업을 주실 때에, 인종을 나누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백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9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 10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11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12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 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13여호와께서 그가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시며 밭의 소산을 먹게 하시며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빨게 하시며 14소의 엉긴 젖과 양의 젖과 어린 양의 기름과 바산에서 난 숫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또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게 하셨도다(7-14)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쉽게 잊어버린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은혜를 잊지 않고 거룩한 성도로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본문에서 그 비결을 소개합니다.

 

⑴ 이스라엘을 선택하심(7-9)

 

모세는 하나님께서 아버지로서 과거에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역사를 열거하면서 기억하라고 노래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신 역사를 말씀합니다.

모세는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고 찬양합니다. 태고의 역사부터 최근의 역사를 짧은 몇 개의 소절에 담고 있습니다. ‘역대의 연대’란 문자적으로 ‘세대와 세대의 해들(the years of generation and generation)’ 즉 여러 세대의 날들입니다. 그들의 역사를 돌아보고 또한 아버지에게서 조상들의 역사를 배워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존하신 분입니다. ‘지존’이란 히브리어 ‘엘욘’은 ‘최고’, ‘지존’을 가리키는 말로 견줄 대상이 없이 가장 높으신 분이라는 뜻이며, 구약에서 종종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는 하나님의 별칭에 사용됩니다(창 14:18-20; 민 24:16). 가장 높으신 분이 세계 질서를 정하시고, 각 민족의 경계선을 그으셨습니다. 그분이 ‘인종을 나누실 때’ 곧 인류를 세계에 흩어 분산시키시고 각 민족에게 기업, 곧 땅을 배분하실 때, 그분은 이스라엘 자손의 수에 맞춰 그 일을 행하셨습니다. ‘백성들의 경계를 정했다’(8)는 뜻은 민족들의 땅을 나누어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인류의 경계선을 나누실 때, 이스라엘 자소의 수대로 나누셨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창세기 10장은 인류가 분산되어 구성된 70개 나라의 목록을 제시하는데, 이 것은 70명의 야곱 가족의 숫자에 부합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언제나 그러하듯이 실제적으로 정확히 70개의 나라라는 의미가 아니며, 야곱의 가족도 사도행전에서는 75명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 숫자 ‘70’은 많은 민족들과 야곱의 첫 가족의 숫자에 대한 어림수이며, 문학적 숫자로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어림수의 문학적 사용이 성경의 무오성을 저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성경을 신학적으로 기술하는 방법입니다. 이를테면 족보의 세대를 계산할 때도 여러 세대를 의도적으로 생략하는 특징을 보입니다(예, 마태복음의 14대 족보는 중간에 여러 세대가 누락됨).

경계를 정해 흩어진 열국 중에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자신의 기업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구원의 섭리와 계획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선택이기에, 인간은 이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다만 선택받은 이스라엘 민족은 무한히 감사해야 할 뿐입니다.

 

⑵ 이스라엘을 보호하심(10-12)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보배로운 민족으로 택하시고, 그들을 황량한 광야 길에서 인도하셨습니다. ‘광야에서 만났다’의 원래 뜻은 ‘발견하다’는 뜻입니다. 우연히 광야에서 만나 뒷바라지를 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지속적인 관심에 대한 문학적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친 광야 길을 독수리가 새끼를 업어서 오는 것처럼 그들을 홀로, 완벽히 안전하게 인도하셨습니다.

 

⑶ 이스라엘을 높이심(13-14)

 

백성을 광야 길에서 안전하게 인도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더 큰 복으로 채우십니다. 가나안 땅은 고원 지대인데, 하나님께서 그들이 그곳을 주로 타고 다니게 하시고, 땅의 온갖 풍성한 소산물들을 만끽하며 즐기게 하실 것입니다.

‘높이신다’는 말은 지정학적으로만 높이시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 중에서 으뜸 되는 민족으로 높이셔서 그들이 가장 큰 복을 누리며 살게 하실 것입니다.

반석의 꿀과 굳은 반석의 기름은 바위산의 여러 갈라진 틈과 구멍들에서 발견되는 막대한 양의 야생 꿀과 석회질 암반의 감람나무 단지에서 대량으로 채취되는 감람유를 말합니다. 그 외 우유와 각종 유제품들과 최고 품질의 (‘기름’이 그런 뜻이다) 양과 염소 고기를, 들판의 곡식과 과수원의 포도를 마음껏 먹게 하실 것입니다.


신앙은 기억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는 기억의 활동입니다. 찬양과 기도 그리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될 잊지 않도록 노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한 사람들만이 살아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기억하고 그 뜻을 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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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31-02)

 


부인할 수 없는 증거들

신명기 31장 14-30절


부모의 가르침을 무시하던 아들이 결국 패가망신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만약 그 아들이 ‘이것이 다 부모가 나를 잘못 가르친 탓이다.’라고 한다면, 부모의 심정은 어떤 느낌이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죽음 이후 가나안 이방신들을 섬기며 언약을 어기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해 징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날에 백성들이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다.’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입을 다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죄악된 역사를 부인할 수 없는 증거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임박한 모세는 이제 마지막 유언의 메시지들을 남기고 있습니다. 앞서 여호수아를 ‘실무적인’ 후계자로 세우는 절차를 시작했는데(이미 후계자 임명식은 민수기 27장에서 완료되어 일종의 대통령 당선자 신분), 이제 하나님께서 모세와 여호수아를 회막으로 불러 직접 명령을 내리시고 격려하십니다.

 

여호수아의 임명 준비(14-15)

노래는 그 시대의 문화와 철학을 반영하는 도구이며, 다음 세대를 향한 교육적인 증거입니다. 그래서 역사상 독재자들은 노래를 통해 사람들을 자극하고 통제했습니다. 진실을 드러내고 불의를 고발하는 노래는 매우 강력한 증언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노래를 만들어 후손에게 가르치라고 권고합니다.

 

1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죽을 기한이 가까웠으니 여호수아를 불러서 함께 회막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에게 명령을 내리리라 모세와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회막에 서니 15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에서 장막에 나타나시고 구름 기둥은 장막 문 위에 머물러 있더라(14-15)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그의 후계자로 내정된 여호수아를 회막으로 불러들이십니다. 회막 장면은 신명기에서 이곳이 유일합니다. 출애굽기와 민수기에서 익숙한 장면이 여기서 재현되는데, 바로 하나님의 구름 기둥이 회막 위에(14), 구체적으로 회막 입구에(15, ‘장막 문 위’의 장막은 곧 회막) 내려와 있습니다. 이 구름 기둥은 하나님 임재의 대표적인 현상입니다. 비평학자들은 이 회막이 진영 밖에 존재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보수적 견해는 이 회막을 진영 안의 성막으로 봅니다.

일단 15절 자체의 표현은 언뜻 모순되어 보입니다. ‘장막에’(in the Tent)와 ‘장막 문 위에’(on the entrance of the Tent), 이 중 ‘장막에’는 비평 주의자들이 말하는 진영 밖 회막의 특징에 들어맞지 않습니다. 진영 밖 회막은 항상 회막 입구에 구름이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5절을 신명기 특유의 대략적인 표현 방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회막/성막은 구체적으로는 마당 구역을 제외한 천막 건물 부분, 즉 내성소와 지성소로 구성된 본당만으로 국한됩니다. 따라서 현재 그 건물 위에 하나님의 구름이 내려와 있고, 모세와 여호수아는 그 내성소를 가리는 휘장 앞의 성막 마당에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때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지성소에도 특별하게 입장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여호수아와 함께 진영 안 성막 마당에 성막 본당 앞에 서 있습니다.

 

그 땅에서 백성들의 반역이 예언됨(16-18)

풍요는 축복의 결과이지만, 동시에 멸망의 단초가 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보다 가나안이 더 축복의 공간입니다. 하지만 광야만큼 가나안은 영원한 복락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기가 더 쉬운 공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반역할 것을 예언합니다.

 

16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조상과 함께 누우려니와 이 백성은 그 땅으로 들어가 음란히 그 땅의 이방 신들을 따르며 일어날 것이요 나를 버리고 내가 그들과 맺은 언약을 어길 것이라 17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이 우리에게 내림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냐 할 것이라 18또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들을 따르는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16-18)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의 죽음 이후 이스라엘이 걷게 될 배교의 길을 알려주십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여호와를 버리고 그 땅 신들을 섬기며 언약을 파기할 것입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기는 이스라엘의 배교가 부부의 정절을 버리는 것(‘음란’)에 비유됩니다.

이어지는 진술에서 맺은 언약을 어긴다는 말에서도 확인되듯이, 우상숭배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맺은 일종의 결혼 서약의 파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실 하나님을 버린 적은 없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다른 신들을 동시에 섬긴 것입니다. 이것은 간통이며 결혼과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시고 얼굴을 숨기실 것입니다(17,18). ‘얼굴이 함께 있다’라는 히브리어 표현은 당사자가 거기에 있음을 의미하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창세기 3:8;4:16;35:1; 신명기 4:37; 사무엘상 1:22; 이사야 63:9). 반대로 ‘얼굴을 숨기다’는 역겨움과 반감, 거절을 표현하는 숙어입니다(이사야 53:3; 시편 132:10). 백성을 ‘외면’하시는 하나님의 이탈은 그 자체로 심판이요 재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방패요 산성이요 강한 보호막입니다. 그분이 백성 가운데 계셔서 질병과 기근과 메뚜기 떼를 비롯하여 모든 재앙을 막아주시며 적들이 노리지못하게 하시고, 그들의 침입을 물리치십니다.

하나님께서 떠나시는 순간 이 모든 재앙들이 한꺼번에 그 땅과 백성들에게 엄습할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가 ‘이 허다한 재앙과 환란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지 않은 까닭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비관적 예언은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희망에 부풀어 있던 백성들에게 찬물을 끼얹은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백성의 미래는 열려 있습니다. 이 예언은 어쩌면 배교의 길을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예방적 경고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역사는 모든 왕들과 이스라엘 백성이 결국 패역하여 하나님을 배반하고 이방 신들을 따라 여로보암의 길로 갔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이 경고대로 숱한 재앙들을 맞았고 이 땅에서 추방당하였습니다.

  

모세가 노래를 지어 백성들을 가르침(19-23)

신신하신 하나님을 신실하게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시지만, 목이 곧은 이스라엘은 신실하신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신들을 따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교육하는 방법으로 노래를 만들어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19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르쳐 그들의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20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21그들이 수많은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바를 아노라 22그러므로 모세가 그 날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르쳤더라 23여호와께서 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인도하여 내가 그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하시니라(19-23)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자손 대대로 불러야 할 노래를 지어 가르치라고 명하십니다. 이 노래는 세대를 거듭하며 백성들이 불러서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노래를 그들에게 마치 옆에서 사실을 증언하는 ‘증인’(21절에서 보듯이 증거라기보다는) 같은 역할을 할 것입니다. 백성들은 그 땅에 들어가 젖과 꿀의 온갖 풍요를 누리며 배부르고 살찐 뒤 정작 하나님을 버릴 것입니다.

그들은 축복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자신들의 풍요가 가나안의 농경 신 바알과 풍산의 신 아세라의 선물이라고 착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배은망덕이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입니다. 32:19에서는 반대로 하나님께서 백성을 ‘멸시하실’ 것입니다.

 

모세가 지어서 들려줄 이 노래는 장차 그 땅에서 그들이 불순종으로 인해 온갖 재앙과 고초를 당할 때도 여전히 그들의 입술에서 불릴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노래 자체가 그들 곁에서 소리쳐 그들의 역사와 하나님의 은혜를 증언하는 증인 역할을 할 것입니다. 원래 민간에서 오래 전부터 구전되어온 노래는 세대를 거치며 그들의 삶에 중요한 교훈을 기억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미리 아시고 이 노래를 통해 예방적 조치를 취하고 계십니다(21). 모세는 그 날 이 시를 지어 백성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는 당연히 하나님의 영감에 사로잡혀 이것을 작시했을 것입니다.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직접 말을 건네 그를 격려하십니다(23). 그가 이제 모세를 이어 백성을 인도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힘을 북돋는 것입니다. 모세와 함께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제 여호수아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흥미롭게도 여기서 하나님의 명령이 모세의 중재를 거치지 않고 직접 여호수아에게 하달됩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직접 말씀을 받는 장면은 이곳이 처음입니다.

 

율법책을 법궤 옆에 보관(24-30)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해석하고, 예고하고, 경고하고 돌이키게 합니다. 날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사후에 일어날 일을 예측하고 후계자를 세우는 한편, 말씀을 기록하고 언약궤 곁에 두게 하는 등의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했습니다.

 

24모세가 이 율법의 말씀을 다 책에 써서 마친 후에 25모세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사람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26이 율법책을 가져다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곁에 두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27내가 너희의 반역함과 목이 곧은 것을 아나니 오늘 내가 살아서 너희와 함께 있어도 너희가 여호와를 거역하였거든 하물며 내가 죽은 후의 일이랴 28너희 지파 모든 장로와 관리들을 내 앞에 모으라 내가 이 말씀을 그들의 귀에 들려주고 그들에게 하늘과 땅을 증거로 삼으리라 29내가 알거니와 내가 죽은 후에 너희가 스스로 부패하여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길을 떠나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너희의 손으로 하는 일로 그를 격노하게 하므로 너희가 후일에 재앙을 당하리라 하니라 30그리고 모세가 이스라엘 총회에 이 노래의 말씀을 끝까지 읽어 들리니라(24-30)

 

모세는 이 율법서를 기록해서 책을 만들었습니다. 그 책은 당시의 관행대로 양피지 두루마리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일단 이 책이 신명기에서 모세가 강론한 율법들의 기록이라 볼 수 있지만, 앞서 말한 대로 오경의 정경론적 관점에서는 어쩌면 이전에 모세를 통해 반포된 모든 율법들을 포괄하는지도 모릅니다.

모세를 이 율법책을 레위 사람들에게 ‘법궤 옆에’ 보관하라고 지시합니다. 여기서 ‘레위 사람’은 제사장 계층을 포함한 포괄적인 명칭을 볼 때, 좁게는 제사장을 지시할 것입니다. 레위 지파 고핫 자손들이 법궤를 운반할 때, 그 율법책은 제사장들이 별도로 운반 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이런 각자의 임무에 대한 포괄적인 묘사로 보아야 합니다. 고대 중동에 조약문들은 성소에 보관하는 관행이 있었습니다. 아마 이 책을 어떤 항아리나 상자에 넣은 뒤 법궤 옆에 두었을 것입니다(예레미야 32:14; 탈굼). 법궤 옆에 보관한 이 율법서는 그들에게 증거가 될 것입니다. 앞서 모세의 노래가 증인이 된다고 언급되는 반면, 여기서는 이 율법서가 그들에게 증거가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율법서가 의인화된 ‘증인’이라기보다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조약문으로서 ‘증거’ 능력을 갖는 징표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참고로 법궤 옆에 보관되어야 할 이 율법서는 오랜 배교 역사 속에서 어느 순간 사라졌습니다. 훗날 요시야 왕 때 대대적인 종교개혁과 더불어 성전을 정비할 때 성전의 어느 구석에 오랜 세월 방치되어 있던 이 율법서가 발견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모세는 지파의 모든 어르신들, 곧 장로들과 관리들(행정 지도자들)을 소환하여 이 언약의 말씀을 거듭 읽어준 뒤 앞서 31:19에서와 같이 이 언약의 불변성을 확증하기 위해 하늘과 땅을 증거로 삼습니다.

모세는 염려합니다. 자신이 이렇게 오래도록 그들을 지도했음에도 그들이 여호와를 거듭 배반했는데, 자신이 죽으면 어찌 될 것입니까?(27) 하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모세도 그들이 장차 배교의 길을 갈 것이 라고 경고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분노의 재앙으로 어려움을 당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래와 율법과 천지를 증거물로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변할 수 있어서 나중에 다른 소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확실한 증거를 통해 다른 소리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연약하고 미련한 우리가 죄악의 길로 가지 않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미리 할고 조심하라는 배려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세의 노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매우 사랑하신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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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31-01)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

신명기 31장 1-13절


올림픽이 끝나면 개최국에서 다음 개최하는 나라로 올림픽 기(旗)를 전달합니다. 한 회기 올림픽이 끝났기 때문에 다음 회기로 넘어 가는 것입니다. 인생도 절정기에는 열정적으로 일하지만, 시간이 서서히 지나면 현직에서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까지 계속 붙잡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율법선포와 모압 언약의 체결을 선언한 뒤, 모세는 후계자 임명의 절차를 밟습니다. 여호수아는 오래전부터 후계자로 내정된 인물로서 모세의 일을 가까이서 도왔습니다. 여호수아의 지도자 내정은 민수기에서 이미 완료된 바 있는데(민수기 27:18-23), 이지 실무적인 지도권이 넘어가는 것입니다. 모세는 후계자 여호수아를 격려한 뒤 장로들과 제사장들에게 백성을 향한 철저한 말씀 교육을 당부합니다.

 

여호수아에게 이양된 지도권(1-6)

참으로 위대한 지도자는 자기를 높이지 않습니다. 자기 분수를 정확히 알고 거기 맞게 행동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훌륭한 리더십은 이런 것입니다. 타자 속에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알고 모든 영광을 그분께 돌렸습니다. 모세도 이제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음 지도자를 세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또 모세가 가서 온 이스라엘에게 이 말씀을 전하여 2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내 나이 백이십 세라 내가 더 이상 출입하지 못하겠고 여호와께서도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3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과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보다 먼저 건너가사 이 민족들을 네 앞에서 멸하시고 네가 그 땅을 차지하게 할 것이며 여호수아는 네 앞에서 건너갈지라 4또한 여호와께서 이미 멸하신 아모리 왕 시혼과 옥과 및 그 땅에 행하신 것과 같이 그들에게도 행하실 것이라 5또한 여호와께서 그들을 너희 앞에 넘기시리니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명령대로 그들에게 행할 것이라 6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하고(1-6)

 

신명기 서사의 흐름은 31장에서 새로운 장면으로 전화됩니다. 모세는 다른 사역자들과 전혀 다른 훌륭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이 행하시는 일들은 여과 없이 나타냈기 때문입니다. 이제 자신의 사역을 내려놓은 순간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진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⑴ 새로운 일꾼을 세운 모세(1-3)

 

모세는 긴 연설을 일단 마무리한 뒤 계속해서(‘가서’) 이제 자신의 죽음 준비와 후계자 임명에 대해 설명합니다. 모세는 80세에 부름을 받고 이제 나이는 120세가 되었습니다. 그의 나이는 34:7에서 다시 언급되는데, 고령인데도 기력은 여전했다고 진술됩니다. 하지만 많은 나이 때문에 더는 현역으로 활동하기 힘들게 되었고, 임박한 죽음을 직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언과 같은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가나안 땅 입성을 위해 싸워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도 참아가면서 보내온 시간들입니다. 그런 모세는 가나안 입구 요단강 앞에 서서 정말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모세는 담담하게 말을 전합니다. 이제 모세의 역할을 여호수아가 감당할 것입니다. 여호수아를 백성 앞에 세워 놓고 말합니다.

먼저 그는 백성들에게 ‘내가 더 이상 출입하지 못하겠다’고 고백합니다. ‘들어오고 나감’은 군사적 지도자로서의 활동을 가리킵니다. 모세는 더 이상 회중을 특별히 군대를 이끌 수 없습니다. 더욱이 가나안 땅에 진격해서 수많은 전투를 수행해야 하는데, 노쇠한 몸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이제 여호수아가 대신해서 군대를 이끌고 진영을 오갈 것입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그 땅에 건너가지 못하다고 선언하신 바 있습니다. 우리는 1:34-38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였습니다. 모세의 가나안 입성 금지가 민수기에서는 모세 자신의 커다란 실수 때문인 것으로 보고되지만(민수기 13-14장), 신명기의 관점에서는 백성의 중대한 반역들에 대한 지도자로서의 책임을 물은 것이기도 했습니다.

 

현재 모세는 고령도 문제지만, 자신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기 에 시급히 후계자를 세워야 했습니다. 이제 후임자 여호수아를 세움으로 모세의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수아를 세운다고 할지라도 모세 자신이 지도자로서 일할 때와 마찬가지로 백성을 실질적으로 진두지휘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3). 하나님께서 ‘너보다 먼저’, 즉 여호수아의 앞에 서서 요단강을 건너실 것이며, 그분이 여호수아 앞에서 가나안의 대적들을 무찌르시고 그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행진 대열 선두에 서신다는 사실은 민수기에서 확인됩니다. 그것은 신명기에서 언급되지 않는데, 법궤가 맨 앞에서 행진을 이끄는 방식입니다(민수기 10:11-28). 더불어 구름 기둥이 백성들을 이끌었는데, 법궤 위에는 하나님 임재의 현상으로 신적 구름이 내려와 있었습니다. 결국 구름의 이동은 곧 법궤의 이동입니다.

그러나 신명기는 제의적 문제에 큰 관심을 두지 않기에, 법궤의 구체적인 역할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고, 단지 ‘여호와께서 너와 백성들보다 앞서 건너가셨다’고만 진술합니다. 이제 모세의 역할을 여호수아가 감당할 것입니다. 여호수아를 백성 앞에 세워 놓고 말합니다.

 

⑵ 가나안 입성에 함께하신 여호와(4-6)

 

이스라엘 군대를 이끄시는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해 싸우시리라’(13:22), 동시에 모세는 백성들을 향해 ‘여호수아가 네 앞에서 먼저 건너갈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제 여호수아가 백성들의 지휘자로서 그들을 이끌어 전쟁을 수행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모세의 자리에 이제 여호수아가 서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총사령관, 군대 장관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 왕의 자격으로 이끄십니다. 여호수아는 부관이자 참모일 뿐입니다. 여호수아는 유능한 사령관으로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 것입니다. 모세가 모압을 몰아낸 강력한 전투력을 지닌 아모리의 두 왕을 연달아 격파했던 것처럼, 여호수아는 모든 가나안 족속을 무찌를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서도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여호와께서 멸하신 아모리 왕들처럼 가나안 족속도 그렇게 여호와께서 멸하실 것이다(4), 모세는 여호수아를 뒤따를 백성들의 용기를 힘껏 북돋습니다.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5). 대장 되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호와의 동행의 약속을 ‘너와 함께 가시며,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다.’라고 삼중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이루셨던 사역들을 보며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나가면 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모세의 부재는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과 특히 여호수아는 두려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자신보다 먼저 하나님께서 이 여정을 주도하실 것임을 기억하고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모세가 떠나가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떠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모세가 이끌어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끌어오셨습니다. 이제 가나안 입성도 하나님께서 앞장서 가실 것입니다. 한 사람의 훌륭한 지도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삶에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믿고서 강하고 담대하시길 바랍니다.

 

모세가 여호수아를 격려하다(7-8)

하나님의 사명에 헌신된 사람은 상황에 동요되지 않습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마음을 집중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에게 주신 사명에만 집중 합니다. 모세가 이렇게 사명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7모세가 여호수아를 불러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에게 이르되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들에게 그 땅을 차지하게 하라 8그리하면 여호와 그가 네 앞에서 가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7-8)

 

모세는 자기 개인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고 사명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대한 신뢰 때문입니다. 모세는 확신에 찬 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권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항상 이스라엘에 앞서 행하셨던 것을 경험했습니다. 자기 백성을 온전히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일을 온전히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세는 경험에서 울러 나오는 신앙을 담대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여호수아 개인을 향해 동일한 내려와 권면으로 용기를 북돋습니다. 백성들에게 했던 말을 여호수아에게 반복합니다.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가서 그 땅을 차지하라’(7),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라.’ 모세는 여호수아 앞에서 여호와께서 앞장서실 것이라고 격려합니다(8). 진정한 대장은 여호수아가 아니라 여호와이십니다.

이미 신명기 서두의 모세 연설에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세워 그를 격려하라는 명령을 주신 바 있습니다(1:38; 3:28). 이것은 31:23과 여호수아 1:5-6, 9에서 여호수아를 향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으로 반복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는 권고는 차기 지도자인 여호수아를 안심시킬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격려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하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말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모세의 관계에서 오는 신뢰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는 상황에 크게 연연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신 사명에만 마음을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모세가 말씀 교육을 당부(9-13)

성도들은 자신들이 떠난 자리에 무엇을 남겨야 합니까? 많은 재산, 높은 업적 그리고 넓은 영향력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가 떠난 자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남도록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입성이라는 전쟁 앞서서 최첨단 무기로 무장하는 일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는 일이 더 중요했습니다.

 

9또 모세가 이 율법을 써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자손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에게 주고 10모세가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매 칠 년 끝 해 곧 면제년의 초막절에 11온 이스라엘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그가 택하신 곳에 모일 때에 이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에게 듣게 할지니 12곧 백성의 남녀와 어린이와 네 성읍 안에 거류하는 타국인을 모으고 그들에게 듣고 배우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고 13또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 거주할 동안에 이 말씀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자녀에게 듣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할지니라(9-13)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전쟁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이었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에게 군사적 무장보다 더 중요한 말씀 무장을 강조합니다. 이 영적 무장이 물질적 무장보다 우선되어야 하며 가장 중요한 준비라 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율법 강론을 책에 기록했다는 진술이 최초로 등장합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모세가 기록한 이 ‘율법’이 신명기라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앞서 반포된 모든 율법, 곧 출애굽기 19장 이후의 시내산에서 백성들이 들은 말씀들 두 돌판에 기록한 십계명을 제외한 ‘언약서’(출애굽기 20:22-23:33)와 성막법, 레위기, 그리고 민수기에 포함된 제반 율법들을 포함할 수도 있습니다. 출애굽기 24:4에서 모세가 앞서 반포된 율법들을 기록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시내산에서 반포된 말씀들을 차례로 기록해 두었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모세가 기록한 말씀이 신명기의 율법 문집이든, 앞서 반포된 제반율법들을 포함한 거대한 율법 문집이든, 모세는 그것을 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위탁했습니다(9). 흥미롭게도 여기서 ‘언약궤’가 언급되고, 그것을 제사장들이 멘다고 진술됩니다. 비평학자들은 민수기에서는 레위 지파의 고핫 자손들이 언약궤를 메기에(민수기 4장), 두 책은 모순을 이야기하며 결국 서로 다른 전승에 속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명기 내에서도 민수기와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10:8과 31:25은 같은 신명기의 진술임에도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사람’이라고 적시합니다. 율법책을 맡은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매 7년의 ‘면제년’이 돌아오면 초막절에 성소에 집결한 백성들 앞에서 그 말씀을 낭독해야 했습니다. 여기서도 ‘그 택하실 곳’을 우리는 특정한 단일 성소로 보지 않고 지방의 레위 도성들에 지정된 복수의 성소들로 받아들입니다.

‘신명기 개관’에서 강조한 대로, 이것이 신명기의 법적 현실에도 부합합니다. 왜 7년 주기의 면제년에 이 말씀이 낭독되었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아마도 빚 탕감이 선언되는 해이기 때문에, 그들이 애굽 노예의 속박에서 해방된 날임을 기억하면서 이 말씀을 기억하기에 가장 적절했을 것입니다. 면제년의 유월절/무교절이 아닌 초막절에 율법을 낭독하라는 이유는, 초막절에 백성들이 성소에 장기 체류를 했고, 또 그 절기의 중요성 때문일 것입니다. 추가적인 이유로 우리는 7월이 새로운 달로서 모든 것이 시작하는 달이기 때문이라고 추론해볼 수 있습니다. 7월 1일 나팔절은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의 새해로 지킵니다.

게다가 7월 10일은 대속죄일로서 이날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누적된 1년의 모든 죄를 다 용서받고 성소도 완전히 정결케 되어 새 출발을 합니다. 따라서 닷새 후인 초막절은 심령이 새로워 진 백성들이 율법의 말씀을 듣기에 가장 적절했습니다. 참고로 크리스텐슨은 레위인들이 음악적 형태로 성경 본문을 전달하는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그의 말대로 낭독은 곡조가 달린 음악적 낭독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신명기가 매일의 말씀 교육과 기억, 규칙적인 강론을 강조하는 것을 볼 때, 7년의 율법 낭독으로 말씀 훈련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날 국가적 행사로 성대한 율법 낭독과 훈련이 전개되지만, 매일 백성들은 율법을 묵상하고 낭독하고 가르치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모세가 자신의 명예와 권력 그리고 안위를 추구했더라면, 그의 퇴장은 추하고 비루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사명과 몫을 알고 떠나야할 때를 알았기 때문에 가장 아름다운 은퇴식으로 마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부재가 백성들에게도 누구를 의지해야 하는지 교훈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영원히 의지할 존재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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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30-01)


  복과 저주 사이에서

신명기 30장 1-20절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주님입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나 생각도, 꿈과 소망도 다 알고 계십니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도 알고 계십니다. 현재 연약한 모습만 가지고 매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 가운데로 돌아오길 간절히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미래에 아름답게 변화되어 충성스러운 일꾼이 될 것을 인내하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교회들도 장차 어떻게 형성되어 갈지 알고 계십니다. 큰 꿈을 가지고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부흥의 역사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모세 연설의 분위기가 신명기 30장에서 바뀝니다. 잇따른 저주의 경고가 마무리되고 온화하고 자비로운 말투와 더불어 회복과 희망의 미래가 약속됩니다. 백성이 가장 밑바닥까지 떨어진 절망의 상태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소생과 제가의 불씨를 아직 남겨두셨습니다. 그들이 회개한다면 회복될 것입니다. 잃어버린 땅으로 귀환할 것이며 순종에 따른 모든 축복들이 다시 그들의 현실이 될 것입니다.

 

회복의 약속(1-10)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역사 속에서 계속적으로 언약을 유지할 것인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속적으로 순종하지 않을 것을 알았습니다. 불순종할 가능성이 있는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그 백성을 변함없이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하지만 알맞은 인간의 반응인 율법을 향한 순종을 가볍게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1내게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2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것을 온전히 따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3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4네 쫓겨간 자들이 하늘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 5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네 조상들이 차지한 땅으로 돌아오게 하사 네게 다시 그것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네게 선을 행하사 네게 네 조상들보다 더 번성하게 하 실 것이며 6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네게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네게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7네 하나님 여호와에서 네 적군과 너를 미워하고 핍박하던 자에게 이 모든 저주를 내리게 하시리니 8너는 돌아와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 모든 명령을 행할 것이라 9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이 율법책에 기록된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10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가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을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1-8)

 

이스라엘은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있습니다. 모압 평지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갱신하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토라’가 언약의 조건입니다. 서로 지켜야 될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약속을 지켰을 때와 어겼을 때, 각각 어떤 결과가 나올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⑴ 회개에 따른 귀환의 약속(1-8)

 

저주와 재앙이 언약 백성의 마지막 운명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소생과 회복의 희망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모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이야기합니다. 이 모든 일들 곧 모든 복과 저주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현실화하면, 불순종한 결과 저주들이 모두 그들에게 쏟아진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떠올려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이 모든 일을 기억 속에 되살린 뒤, 하나님께 ‘돌아온다면’(회개를 가리키는 동사),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마음과 뜻을 다해 순종한다면, 하나님께서도 ‘돌아오실 것입니다.’(3) 3절의 원문의 문자적 의미는 하나님께서 ‘너의 포로됨과 더불어 돌아오다’입니다. 이것은 또한 미드라쉬의 해석이기도 한데, 혹자는 이 해석을 하나님께서 그들이 포로로 잡혀간 곳에서 그들과 함께하시고 고통을 함께 나누실 것이고, 그들이 포로로부터 돌아올 때 함께 돌아온다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좋은 해석이지만, 이 의미는 이어지는 진술인 ‘하나님은 너를 긍휼히 여겨 돌아오신다’와 동일한 맥락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네가 포로 되어 있을 돌아오실 것이며, 너를 긍휼히 여겨 돌아오실 것이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하여 흩으셨던 그들을 모든 민족들로부터 모으실 것입니다. 그들이 하늘 끝까지 내쫓겼을지라도 데려오실 것입니다(4).

세상의 끝자락인 절망의 땅에 잡혀가면, 그들을 다시 데려온다는 것이 사람에겐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는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고, 그 땅을 다시 차지하게 하실 것이며, 그들에게 순종의 대가로 약속된 모든 복을 다시 쏟아주시고, 그들을 번성케 하실 것입니다(5).

이 모든 행동들의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그들의 순종의 대가로 이 일을 행하시지만, 이 모든 일을 하나님이 하십니다. 백성은 결국 생명을 얻을 것이나 그들을 압제했던 적군과 원수들에게 그 모든 저주들이 퍼부어질 것입니다(7). 이러한 극적인 반전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이며 선물입니다. 순종이 조건으로 이루어진 일이나, 6절에서는 ‘회개’와 ‘순종’마저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명시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자손들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셔서 그들이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까지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얻은 생명, 곧 영생의 선물은 우리의 공로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동시에 신명기에서 나아가 신구약 전체에서 요구되는 것은 인간의 의무와 사명입니다. 따라서 이어지는 8절에서 모세는 '너는 돌아와 말씀에 순종하고 모든 계명을 준행하라고 명령하며, 이것은 9절 이하에서 크게 강조됩니다.

 

⑵ 순종에 따른 축복의 회복(9-10)

 

하나님께서 마음의 할례를 시켜 말씀에 순종하는 백성으로 만드신다고 했지만, 동시에 여기서 하나님께 돌아와 순종하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만일 그들이 순종하면 그들은 번성과 번영의 축복을 넘치도록 받을 것입니다(10).

바로 여기에 ‘이미’와 ‘아직’이라는 인간의 이성으로 조화시키기 어려운 신자들의 삶의 변증법적 긴장이 놓여 있습니다. 우리의 최종적 구원은 하나님이 결정하실 일이니, 그분께 맡겨둔 채 우리는 그저 명령하신 대로 구원의 확신 속에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순종해야 할 하나님 말씀(11-20)

복과 저주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동시에 둘 다 선택할 수 없고, 하나만 선택할 수 있습니다. 고난을 감수하고 나와의 싸움을 감행하고서라도 순종을 택하여 복을 누릴 수 도 있고, 결국 자신의 바람과 쾌락과 욕망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을 저버릴 수 있습니다. 심오한 기독교 진리의 한 핵심에는 사랑과 순종의 길만이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11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12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13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14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15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16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17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18내가 오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할 것이니라 19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0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11-20)

 

하나님께서 순종을 명령하시면서 그것을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율법의 뜻을 잘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를 아는 이들에게 순종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⑴ 순종하기 쉬운 말씀(11-14)

 

모세는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이 결코 어려운 것도 아니고 먼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비유를 들어 이 말씀을 소유하기 위해 하늘에 올라가 그것을 가져오거나(12), 바다 밖의 먼 곳에 가서 가져와(13), 들려주어 행하도록 할 필요가 없다고 설명합니다. 그 말씀이 자신을 통해 그들에게 전달되고 설명되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말, 이 명령이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가 무슨 의미인지 정확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율법을 지키기 어렵지 않다는 의미인지, 율법의 뜻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는 의미인지 견해가 갈립니다. 우선 이 율법을 가르치고 배우라는 강조로 비추어 볼 때, 율법은 배우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동시에 모세의 이 진술이 순종에 대한 강조의 문맥에서 나오기에, 분명 순종하기 어려운 말씀이 아니라는 취지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 율법이 하늘 위, 바다 건너에 있지 않고, 지금 여기서 주어졌다는 말도 지체 없이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이 말씀이 지금 여기에 있으니, 우리에게 선포되어 들려지는 이 말씀을 지켜 행해야 합니다(12). 바울은 모세의 이 비유를 자신의 설교에 각색해서 인용합니다.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얻고자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고 하늘로 올라가거나, 무저갱에 내려가 죽은 자 가운데 그분을 모셔 올리려는 시도는 헛되며 불필요하다고 말합니다(로마서 10:57). 말씀이 땅에 내려와 가까이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내려와 우리와 함께 있으니, 그분을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로마서 10:8-9). 이것은 순종하기 어려운 말씀이 아니며 순종하기에 너무 멀리 있는 말씀도 아닙니다.

 

⑵ 생명과 죽음, 복과 저주(15-20)

 

모세는 1절에 이어 다시 백성들 앞에 양자택일의 선택지를 내놓습니다. 그것은 생명과 복 그리고 사망과 화입니다. 복과 화의 문자적 의미는 각각 ‘선과 악’입니다. 여기서 ‘생명과 사망’이 양극의 짝을 이루고 ‘선과 악’이 또한 양극의 짝을 이룹니다. 백성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선은 온갖 좋은 복들을 말하고, 악은 온갖 두려운 재앙들을 말합니다. 여기서 모세는 다시 28장에서 강조한 원론적인 법칙을 반복합니다. 순종은 축복의 길, 불순종은 재앙의 길입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명령을 온전히 따른다면 그것은 생명과 선을 선택하는 결정입니다. 반대로 마음을 돌이켜 우상을 따라가 섬기면, 그것은 사망과 악을 선택하는 결정입니다. 그 결과는 엄중합니다. 그들은 그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서 장수라는 히브리어 표현은 여러 세대 장구한 세월의 땅의 거주를 말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개인의 오랜 장수의 복을 가리키기도 합니다(잠언 32, 16, 전도서 8:13). 이것은 마지막 20절의 ‘네 생명이요, 네 장수’라는 표현에도 적용됩니다. 출애굽기 20:12에서 부모를 공경하면 ‘그 땅에서 네 생명(날들)이 길리라’도 마찬가지로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문자적으로 ‘너의 날들이 길어질 것이다). 장수를 비롯하여 16-20절에서 순종과 불순종에 따른 대조적 결과의 비교는 단순합니다. 그것을 다음과 같이 간단히 도식화할 수 있다.

 

순종-생명, 번성, 오랜 거주(장수), 번영

불순종-사망, 멸망, 짧은 거주(단명), 저주

 

모세는 이 언약의 불변성을 확증하기 위해 강한 상징성을 동원합니다. ‘내가 하늘과 땅을 불러 증거를 삼노라.’ 하늘이나 땅과 같은 불변의 자연물을 상징적으로 증인으로 삼는 것은 고대 중동의 조약과 계약 관행입니다. 이것은 쌍방 간의 조약과 계약의 불변성을 강조하여 모든 조약문들을 엄중히 지킬 것을 요구하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다면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그 약속의 땅에서 ‘생명’이시고, ‘장수’가 되시는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오래도록 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순종했을 때, 어떤 복을 누릴 수 있는지 말씀하셨습니다. 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의지하면 당연히 그 백성은 생명을 누릴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는 길이 자유의 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고 그 분의 사랑에 응답한다면, 우리는 생명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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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29-02)

   


거룩한 하나님의 공동체

신명기 29장 14-29절


‘교회’는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거룩한 공동체가 되지 못할 때 안팎으로 실망을 줍니다. 때로는, 성도들뿐만 아니라 세상까지도 교회를 향해 ‘교회까지도 이러느냐?’는 말을 합니다. 이 세대의 마지막 소망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분명히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는 이 지상 교회는 완전할 정도로 거룩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언약의 참여자는 수평적으로 현 세대의 회중에서부터 수직적으로 미래 세대의 회중으로까지 확대됩니다. 언약 조항의 법적 유효성이 세대를 거슬러 지속되는 것입니다. 시내산 언약과 그것의 개정판인 모압 언약을 후세대가 잘 지키면 축복이 임하지만, 후세대가 언약을 파기하면 동일한 저주가 쏟아질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기어코 불순종의 길을 가게 된다면, 이 경고는 현실이 될 것입니다.

 

세대로 확대되는 언약 참석자(14-17)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방 민족과 별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거룩한 백성’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거룩한 백성으로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지만, 그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거룩한 백성으로써 거룩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14내가 이 언약과 맹세를 너희에게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15오늘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우리와 함께 여기 서 있는 자와 오늘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한 자에게까지이니 16(우리가 애굽 땅에서 살았던 것과 너희가 여러 나라를 통과한 것을 너희가 알며 17너희가 또 그들 중에 있는 가증한 것과 목석과 은금의 우상을 보았느니라)(14-17)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한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종교들처럼 사람들이 신이나 종교를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애굽의 종이 되어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렀습니다.

 

‘시내산 언약’과 그것을 재확인한 ‘모압 언약’은 본질상 동일한 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지금 동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체결하는 것만이 아니라 미래의 잠재적 참 여자들도 이 역사적 현장에 함께 서 있습니다(15). 후대로 이어지는 조약의 유효성은 ‘에살핫돈 조약’ 문서를 비롯하여 고대 중동의 여러 계약 문서에서도 발견됩니다.

베드로 또한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라는 성령의 선물에 대한 약속이 ‘너희와 너희 자녀와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고 외칩니다(사도행전 2:39).

하나님의 언약은 당대에만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모든 세대에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삽입부로 처리된 16-17절은 흐름을 깨지 않는 모세의 말로 간주해도 무방합니다. 모세는 과거 그들이 애굽 땅에서 살았던 때와 또한 출애굽 후 40년 광야에서 생활하다가 ‘여러 나라’를, 즉 에돔과 모압을 통과했던 순간을 상기 시킵니다. 그때 그들은 특별히 많은 종류의 우상들과 거짓 신들을 목격한 바 있습니다. 피조물인 생물과 자연물을 신으로 숭배한 고대의 종교와 사상은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가나안 일대뿐 아니라 애굽에서 가장 두드러졌습니다. 예를 들어, 출애굽 시 하나님께서 애굽 전역에 퍼부으신 10대 재앙은 사실상 애굽의 여러 신들에 대한 심판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에돔과 모압을 통과하면서 그들의 우상들도 목격하고 경험했을 것입니다. 에돔의 신은 구약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으나, 고대 애굽의 문헌과 에돔 지역에서 발견된 비문과 여러 주상들과 석상들의 조사를 통해 코스(Qos)라는 신으로 밝혀졌습니다. 구약에서 모압 신은 그모스, 암몬 신은 밀곰으로 등장합니다(열왕기상 11:1). 이스라엘이 암몬 국경을 통과한 적이 없으므로 그들은 에돔과 모압 국경을 통과하면서 그들의 신에 대해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중 모압의 우상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큰 해를 끼쳤습니다.

그것은 바로 5:3-4에서 살펴보았던 바알브올 사건입니다. 바알은 주인을 뜻하므로, 바알브올을 해석하자면 ‘브올 성읍의 주인’을 의미합니다. 그는 모압의 주신 그 모스를 가리킬 것입니다. 에돔과 모압은 국가 신을 중심으로 다신 숭배를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들 중에 있는 목석과 은금의 우상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우상에 대해서 신명기에서 사용되지 않은 단어 ‘길룰림’이 특징적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똥’이란 단어와 비슷합니다. 이것은 우상의 더러움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적인 단어 선택이 분명하며, 또한 그것들을 ‘가증한 것들’로 칭합니다. ‘시 쿠즈’는 특히 부정한 짐승의 고기를 가증하게 여기는 레위기 11장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그들은 이런 이방 민족들의 우상에 현혹되어 하나님을 떠나 그것들을 ‘섬기게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그로 인해 그들 가운데 쓰디쓴 독초의 뿌리가 사방으로 뻗고 쑥이 무성히 자랄 것입니다. 이런 비유는 그들이 당할 고통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스스로 교만한 마음을 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이런 두려운 저주의 경고를 지금 분명하게 들었음에도 스스로를 위안하고, 자기 확신에 빠져 ‘젖은 것과 마르 것이 멸망할지라도’ 내 마음은 편하다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젖은 것과 마른 것’에 대한 해석은 다양한데, 가장 무난한 견해는 이 문구를 ‘모든 것’을 가리키는 총칭어법(merism)으로 보는 것입니다. 땅에는 물 공급을 충분히 받는 동식물과 땅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동식물과 땅도 있는데, 그것과 상관없이 모든 것들이 다 ‘쓸려 간다’(사파트의 분사 세포트)는 뜻입니다. 즉, 세상이 어찌 되었든 그 마음이 완악한 죄인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스스로 위안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은혜이기 때문에 말씀을 따라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 공동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높이 세우셔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길 원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거룩한 백성이 되길 원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기준에 의해서 거룩해져야 합니다.

 

언약 파기에 따른 저주(18-21)

하나님께서 열방에게 당신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순종하는 자기 백성에게 복을 주어주시는 것입니다. 작은 나라가 척박한 땅에서 번성하고 강대국 사이에서 안전한 것을 보면 열국도 그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인정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것입니다. 불순종한 이스라엘이 큰 재앙으로 쏙대밭이 되는 것을 보면, 열국도 하나님의 존재감을 놀라게 될 것입니다.

 

18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 19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복을 빌어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이 완악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이 멸망할지라도 내게는 평안이 있으리라 할까 함이라 20여호와는 이런 자를 사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그 위에 여호와의 분노와 질투의 불을 부으시며 또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를 그에게 더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천하에서 지워버리시되 21여호와께서 곧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그를 구별하시고 이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언약의 저주대로 그에게 화를 더하시리라(18-21)

 

다시금 여호와의 분노와 저주가 확정적으로 선언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며, 앞서 모세가 나열한 모든 저주가 그에게 쏟아질 것입니다. 그의 이름이 땅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이다 이름의 제거는 앞서 아말렉에게 선언된 가장 무서운 저주였는데, 모세는 언약 백성에게도 해당된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 중에서 구별되어’ 모세가 강론한 뒤 기록될 율법서의 경고대로 저주를 받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구별이란 동사 ‘힙딜’은 특별한 떼어놓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저주를 붓기 위한 구별을 의미하는데, 풍자적 의도로 쓴 단어입니다. 이것은 평화로운 공동체 안에서 악을 행하는 개인에 대한 경고다 한 사람의 죄로 인해 공동체 전체가 징벌을 받지만, 여기서는 공동체의 보존을 위해 하나님께서 직접 징벌하신다고 경고합니다. 공동체가 우상숭배자들을 감시하여 통제할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공동의 책임을 지고 벌을 받게 되지만, 적발되지 않은 채 은밀히 우상을 섬기는 행위를 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직접 제거하실 것이라는 경고로 이해됩니다.

 

열국을 놀라게 한 이스라엘의 재앙(22-29)

심판의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사랑의 하나님만 믿는 자들은 사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바라고 원하는 우상 하나를 만든 것에 불과합니다. 자신의 상태와 상관없이 좋기만 한 그런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은밀히 저질러진 죄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드러난 일은 사람을 통해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22너희 뒤에 일어나는 너희의 자손과 멀리서 오는 객이 그 땅의 재앙과 여호와께서 그 땅에 유행시키시는 질병을 보며 23그 온 땅이 유황이 되며 소금이 되며 또 불에 타서 심지도 못하며 결실함도 없으며 거기에는 아무 풀도 나지 아니함이 옛적에 여호와께서 진노와 격분으로 멸하신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의 무너짐과 같음을 보고 물을 것이요 24여러 나라 사람들도 묻기를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이 땅에 이같이 행하셨느냐 이같이 크고 맹렬하게 노하심은 무슨 뜻이냐 하면 25그 때에 사람들이 대답하기를 그 무리가 자기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더불어 세우신 언약을 버리고 26가서 자기들이 알지도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시지도 아니한 다른 신들을 따라가서 그들을 섬기고 절한 까닭이라 27이러므로 여호와께서 이 땅에 진노하사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대로 재앙을 내리시고 28여호와께서 또 진노와 격분과 크게 통한하심으로 그들을 이 땅에서 뽑아내사 다른 나라에 내던지심이 오늘과 같다 하리라 29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22-29)

 

이스라엘이 불순종으로 인해 당할 재난은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할 정도로 처절할 것입니다. 우선 그 재앙을 당할 그들의 후손들과 그 땅을 잠시 찾은 외국의 방문객들이 이 광경을 보고 충격에 빠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재앙으로 그 땅이 온통 유황과 소금이 뒤 섞이고, 가뭄으로 건조하여 산과 들판이 불에 타 농사는커녕 풀도 나지 않는 땅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유황과 소금’은 이어지는 ‘불 심판’과 소돔과 고모라 및 위성 도시들인 아드마와 스보임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황불 심판으로 이해될 수도 있으나, ‘소금’이 뿌려진 것으로 보아 다른 성격의 재앙으로 볼 수 있습니다. 소금은 하늘에서 심판의 일환으로 뿌려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제국이 침략하여 소금과 유황을 들판에 뿌려 농사를 불가능하게 만든 것으로 해석됩니다. 후손들과 외국의 방문객뿐 아니라 주변의 여러 나라들도 그 재앙들이 자연 재앙들일 수가 없음을 알고 놀랍니다. 그들은 자문자답할 것입니다(25).

 

25-26절에서 네 개의 일련의 동사가 연속되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이방인의 입술을 통해 증거 됩니다. 그들이 ‘언약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가서’, ‘그들을 섬기고’, ‘절했다.’ 27-28절에서도 일련의 동사들이 나열되면서 이방인의 입술을 통해 하나님의 진노가 표현됩니다. ‘진노하사’, ‘재앙을 내리시고’, ‘크게 통한하시어’, ‘뽑아내시고’, ‘내던지셨다’. 여기서 불순종하는 백성들을 약속의 땅에서 뽑아내 내던졌다는 것은 나무나 작물을 뽑아내 짐승의 먹거리나 폐기물로 내던진 것처럼 그들이 버려질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주변의 열국들도 여호와와 그분의 율법 및 율법서의 경고를 잘 알고 있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29절의 결론적 진술은 난해 구절입니다. ‘감추어진 일은 여호와께 속했고 나타난 일은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했습니다.’ ‘감추어진 일들’과 ‘나타난 일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 은밀히 저질러진 죄는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드러난 일은 사람이 심판한다는 의미라는 해석이 있습니다(탈굼 요나단). 둘째, 감추어진 것은 율법의 신비로운 의미이며, 드러난 것은 율법의 표면적 의미로 인간은 그저 감추어진 의미를 몰라도 율법을 순종하는 것이 의무라는 해석입니다. 셋째, 감추어진 것은 하나님만 아시는 미래의 일이고, 드러난 것은 현재 주어진 율법들이며, 인간은 주어진 율법에 따라 사는 것에 충실해야 한다는 해석입니다(현대의 일부 해석가들). 이 중 첫째 견해가 가장 타당해 보입니다.

이것은 이어지는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라는 진술과 잘 어울립니다. 율법을 불순종하면 은밀한 행위는 하나님이 직접 재앙을 내리시고 드러난 행위는 공동체가 사법적 징벌을 내리기에, 두려운 마음으로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종종 성도들에게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문제점들을 듣습니다. 모든 문제점들을 인정합니다. 한 가지 기억해야 될 사실은 지상의 교회는 완벽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구성원들이 완벽하지 않지만, 그래도 때를 따라 교회는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 문제들을 들추기보다는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보다는 자신부터 거룩해져 갈 때,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로 변화되어 갑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자녀들에게 예수 믿어야 복을 받는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잘못 이해한 자녀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복 받은 방편으로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이제는 ‘예수 믿는 것 자체가 바로 복’이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항상 하나님을 가까이 한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시편 73:28). 하나님 앞선 성도들은 축복만 아니라 불순종의 대가 역시 바르게 전해야 합니다. 개인이 아름다운 신앙을 가질 때, 하나님의 공동체가 거룩하고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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