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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07-02)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미가 7장 14-20절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영적 세계’, ‘신의 세계’가 내면적인 동기가 되어 종교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 우리 영혼의 아버지,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어주신 분, 오늘도 그분과 말씀을 통해 교제하고 행복하게 동행하는 것은 놀라운 특권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친밀하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던 날처럼 주님이 이적을 보이시리니 사람들이 이를 보고 두려워하며 돌아올 것입니다.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않으시는 주님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깊은 바다에 던지시며,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성실과 인애를 베푸실 것입니다.

 

응답하시는 하나님(14-17)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목자로 인도하시며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알려주십니다. 비록 죄로 인해 고통받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세우고 회복시키고자 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회복의 약속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우리는 그분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그 길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14원하건대 주는 주의 지팡이로 주의 백성 곧 갈멜 속 삼림에 홀로 거주하는 주의 기업의 양 떼를 먹이시되 그들을 옛날같이 바산과 길르앗에서 먹이시옵소서 15이르시되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이 내가 그들에게 이적을 보이리라 하셨느니라 16이르되 여러 나라가 보고 자기의 세력을 부끄러워하여 손으로 그 입을 막을 것이요 귀는 막힐 것이며 17그들이 뱀처럼 티끌을 핥으며 땅에 기는 벌레처럼 떨며 그 좁은 구멍에서 나와서 두려워하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리이다(14-17)

 

14절에서는 선지자가 7-13절, 특히 7절에 표현된 하나님에 대한 확신 가운데 직접 하나님께 간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15-17절은 이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담고 있습니다.

 

(1) 선지자의 기도(14)

 

성경에서 종종 그렇듯이,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를 목자와 양 떼의 관계로 표현합니다(시 23:1-6; 28:9, 23; 80:1; 95:7; 100:3). ‘먹이다’라는 동사는 목자가 양 떼를 돌본다는 의미로 사용되며, 명사 ‘목자’도 동사와 같은 어근을 사용합니다. 또한 ‘기업’이라는 표현 역시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의 특별한 관계를 나타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입니다.

‘삼림’을 반드시 위험한 곳으로 보지 않을 수도 있으며, 개역개정처럼 ‘갈멜 속 삼림’으로 연결시켜 뒤에 나오는 ‘바산과 길르앗’과 병행구로 볼 수도 있습니다. ‘갈멜’은 초원과 포도원과 감람원이 있는 팔레스타인의 가장 아름다운 곳에 속합니다(사 35:2). ‘바산과 길르앗’은 요단 동편에 있는 곳으로 바산은 소로 유명하며(시 22:12; 암 4:1), 길르앗 역시 목축하기에 좋은 장소였습니다(민 32:1). ‘홀로 거하는’이라는 표현도 평안히 사는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14절에서 심판으로 말미암은 황폐함과는 대조적으로 평화롭고 풍요로움 가운데 하나님의 보호를 간구합니다. 어떤 경우든 미가 선지자가 하나님께 구원을 베풀어달라고 간청하는 기도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2) 하나님의 응답(15-17)

 

15절의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이”에서 출애굽 때의 ‘이적’을 베푼 것을 상기시키며 구원을 약속하는데, 선지서에서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제2의 출애굽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렘 16:14,15). 뿐만 아니라 메시아를 통한 궁극적인 승리를 가리킬 것입니다(사 52장). 여기서 ‘이적’은 출애굽할 때의 놀라운 이적들(출 3:2; 시 78:4.11)을 떠올리게 합니다. 16절에서는 바로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여러 나라’가 이 이적들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 앞에서 ‘자기의 세력’은 부끄러운 수준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입을 막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사 52:15).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언약을 맺으려고 임재할 때 ‘우레와 번개’를 동반하여 백성들이 두려워 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출 19:6; 20:18).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임재할 때에 귀를 막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여호와가 임할 그때에 온 민족이 여호와를 인정하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을 묘사합니다. 이런 묘사는 당시의 상황과 대조적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가 선지자가 활동할 당시, 특히 히스기야 왕이 통치할 때, 주전 701년 산헤립이 유다를 침공한 상황에서는 나라의 미래가 밝지 않습니다. 이미 앗수르에 패망한 북이스라엘의 운명이 남유다의 운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여기서의 확신에 찬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 신실하게 남은 자로서 하나님을 붙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메시지가 될 것입니다.

17절의 ‘티끌을 핥으며’는 정복당한 왕이나 백성의 굴복하는 자세를 묘사합니다(사 49:23). 또한 정복당하였으므로 ‘좁은 구멍’ 즉 자신들의 은신처나 요새에서 나와 두려워 떨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15절에서 하나님께서 예전처럼 이적을 보일 때에, 16-17절에서처럼 온 민족이 하나님 앞에 굴복하며 압도당하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을 예언합니다. 미가서의 마지막 부분에 다다르면서 구원하실 하나님에 대한 확신(7-13)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 앞으로 펼쳐질 하나님의 구원과 그 구원의 결과에 대해 예언하는데, 무엇보다 이 단락의 목적은 이스라엘에게 돌아오라는 권고의 목소리를 점차 높이기 위함입니다. 이런 권고는 다음에 이어질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18)라는 신앙 고백에서 절정에 다다르게 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찬양)(18-20)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자비를 통해 우리는 새로운 시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과거를 덮어 주시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 믿음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 됩니다.

 

18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19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20주께서 옛적에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18-20)

 

18-20절의 찬양은 14-17절의 단락과 밀접한 관계를 지닙니다. 14절에서 구원의 하나님에 대한 확신에서 간구하고 15-17절은 그 간구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집니다. 18-20절에서의 찬양은 이 하나님의 응답 속에 있는 약속을 확신하고 선지자 자신도 찬양하고 이스라엘에게도 하나님을 찬양하며 ‘남은 자’가 되도록 촉구합니다. 여기서의 특이한 점은 2인칭(18)에서 3인칭(18b-19)으로, 다시 2인칭(20)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개역개정에서 ‘주’로 번역한 것은 원래 2인칭 ‘당신’으로 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선지자 미가와의 친밀한 관계를 가리키며, 여기서의 찬양이 선지자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중간에 여호와를 3인칭으로 표현한 것은 여호와를 객관화하여 청중에게 소개함으로써 청중도 여호와에 대한 찬양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즉 18-20절의 찬양은 미가 선지자 개인의 찬양이 아니라, 이스라엘도 여호와에 대한 확신 가운데 찬양하며 여호와께 돌아오도록 권고하는 역할을 합니다.

18절은 하나님의 성품, 곧 용서를 베푸시는 근원이 되는 인애에 대해 찬양하고, 19-20절은 그 인애를 행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처럼 찬양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요소가 인애인데, 7장의 흐름에서 볼 때, 1-6절의 탄식에서 7-20절의 구원과 회복의 하나님, 그리고 그 하나님에 대한 기도와 찬양으로 바뀌는 토대는 바로 그 하나님께서 인애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18절의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는 선지자 미가의 이름에 함축된 표현과 같습니다. 수사적 의문문을 사용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이심을 강조합니다(시 86:10). 특히 18절에서는 여호와는 인애의 하나님이심을 강조합니다. ‘인애를 기뻐하시므로’는 원문상으로 18절의 가장 마지막 문장에 해당하는데, 죄악과 허물을 용서하고 진노를 오래 품지 않으시는 이유로(18) 마지막에 제시되며 강조됩니다. 18절에서 죄악과 허물을 용서받는 대상을 “그 기업에 남은 자”로 제한합니다. ‘남은 자’는 미가서에서 거듭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끝까지 신실한 자들을 가리킵니다(2:12: 4:7; 5:7,8). 이는 대부분의 백성들이 북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는 것과는 다르게 ‘남은 자’로서 하나님께 신실하도록 촉구하는 역할을 합니다. 비록 상황은 여의치 않아 보일지라도 하나님께 계속 신실하게 남을 때에, 결국에는 회복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찬양의 자리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19절에는 죄와 관련된 세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온갖 종류의 죄악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함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에 마땅하지만(7:9), 하나님께서 죄를 해결하시고 용서함으로써 인애를 베푸십니다. 발로 밟는 행위는 정복을 당한 나라가 당하는 수치를 가리키는데,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미 경험하거나 앞으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임하셔서 죄악을 해결하고 구원을 베풀 때에는 그 상황이 역전되어 죄악이 짓밟히게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깊은 바다’는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한 번 죄를 던지면 돌아올 수 없게 되어 죄를 완전히 해결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같이 19절에서는 하나님의 인애로 말미암아 죄악을 완전히 해결하실 것을 강조합니다.

20절은 이스라엘을 회복할 예언이 이전 조상들과의 언약에 기초한 것이며, 그 언약을 성실과 인애로 행하기 때문임을 강조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언약(창 12:23)은 이삭(창26:24)과 야곱(창 28:13-14)에게 확약된 바이며, 이를 기억하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내어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었고(출 19장), 다시 다윗 언약(삼하 7장)을 통해 확증됐습니다. 포로로 끌려간다고 하더라도 언약은 취소되지 않고 하나님께서는 신실하게 행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랜 역사 가운데 신실하게 행하셨던 그 하나님께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권고는 이스라엘에게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올 것입니다.


미가는 마지막으로 정리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인도하고 회복하겠다는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금 우리를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원수들을 심판하시고, 그분의 의를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을 믿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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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07-01)


마지막은 찬란한 회복

미가 7장 1-13절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도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소망의 원천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죄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하나님께 회개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용서와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세상의 부정과 악이 일시적으로 승리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정의를 세우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계획을 믿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 세상에 경건한 자도 정직한 자도 없고 무리가 다 악을 행하므로, 파수꾼들의 날 곧 형벌의 날이 임합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공의로 대적이 거리의 진흙같이 밟히고, 성벽을 건축하는 그날에는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돌아올 것입니다.

 

재앙이로다(1-6)

인간은 본질적으로 연약하며, 죄와 타락으로 인해 서로에게 실망을 안기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서로 불신하며 미워하는 공동체는 파멸하게 됩니다. 주변 사람들, 심지어 가족조차도 믿지 못할 상황이 많다는 것을 인식하고, 인간 관계의 한계를 이해해야 합니다. 세상의 부정과 악이 만연하더라도,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정의를 세우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1재앙이로다 나여 나는 여름 과일을 딴 후와 포도를 거둔 후 같아서 먹을 포도송이가 없으며 내 마음에 사모하는 처음 익은 무화과가 없도다 2경건한 자가 세상에서 끊어졌고 정직한 자가 사람들 가운데 없도다 무리가 다 피를 흘리려고 매복하며 각기 그물로 형제를 잡으려 하고 3두 손으로 악을 부지런히 행하는도다 그 지도자와 재판관은 뇌물을 구하며 권세자는 자기 마음의 욕심을 말하며 그들이 서로 결합하니 4그들의 가장 선한 자라도 가시 같고 가장 정직한 자라도 찔레 울타리보다 더하도다 그들의 파수꾼들의 날 곧 그들 가운데에 형벌의 날이 임하였으니 이제는 그들이 요란하리로다 5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 6아들이 아버지를 멸시하며 딸이 어머니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사람이리로다(1-6)

 

지금까지 언약 소송의 형식을 통해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하고 회개를 권고하였습니다. 그러나 백성은 그 경고를 듣지 않고, 여전히 죄악에 머물러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재앙이로다”라는 탄식이 나오게 됩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고통과 하나님의 슬픔을 동시에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1) 예루살렘에 대한 탄식(1)

 

어떤 학자는 1절이 추수한 후에 일부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 남겨둬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언약법(레 19:9-10; 신 24:19-22; 참조. 룻 2장)을 어긴 상황을 반영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2절 이후의 문맥을 고려할 때, 1절은 하나님의 공의와 인자를 행하는 자가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비유로 들어 제기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1절에서 포도송이가 없고 무화과가 없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언약 백성으로서의 결실을 맺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일반적인 상황을 가리킵니다. 전반적으로 온 백성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2) 사람들에 대한 탄식(2-4)

 

1절이 전반적으로 열매를 맺지 못했다는 선언이라면, 2-4절에서는 1절의 비유를 이제 더 구체적으로 지적합니다. 물론 2-4절에서 지적하는 이스라엘의 죄악은 이미 2-3장의 고발에서도 드러났고, 바로 앞에서는 6장의 두 번에 걸친 언약 소송의 형식을 빌린 고발에서도 드러났습니다. 여기서의 차이점이라면 이전의 죄악에 대한 고발은 이런 죄악들을 법정이라는 배경에서 한 것이었다면, 여기서는 탄식시의 형식을 빌려 선지자 개인의 죄악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탄식시의 형식은 6-7장이 미가서 전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미가서의 본래 목적이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촉구하는 데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안타까움과 죄악의 현실과 심각성을 감정에 호소함으로써 그 죄악에서 돌이키도록 하는 것입니다.

1절에서 표현한 대로, 과실수에 열매가 없듯이, 2절에서는 이제 하나님의 공의와 인자를 행하는 ‘경건한 자’와 ‘정직한 자’가 없다고 탄식합니다. 그 심각성은 이런 죄악상이 우연한 일이거나 비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계획된 일이고 의도적이라는 데 있습니다. 2절의 ‘매복하며’는 죄악을 저지르려는 계획을 잘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3절의 ‘부지런히 행하다’는 죄악이 우연한 결과가 아니며 그것을 목적으로 삼고 행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3절의 “자기 마음의 욕심을 말하며 그들이 서로 결합하니”는 마음의 악한 계획을 드러내놓고 말하고 서로 공모하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죄악을 저지르는 것이 더 이상 마음의 거리낌이 되거나 부끄럽지 않은 상황이 된 것입니다. 4절에서 그 없는 정도가 심각하여, 가장 선한 자라도 ‘가시’ 같고 가장 정직한 자라도 ‘찔레 울타리’보다 더하다고 합니다. 참으로 참혹한 상황입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귀하게 여기고 그 뜻을 실천하는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형벌의 날’이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4). 4절의 ‘파수꾼들의 날’은 ‘형벌의 날’과 병행구로 나옵니다. ‘파수꾼’은 선지서에서 여호와의 날에 여호와의 임함을 보는 자들을 가리킵니다(사 52:8; 렘 6:17). 이들이 여호와를 본다는 것은 여호와의 날 곧 심판과 회복의 날이 임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하였으므로 여호와의 날은 곧 심판의 날, ‘형벌의 날’이 될 것입니다.

 

(3)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탄식(5-6)

 

점진적으로 메시지를 받는 개인에게 가까워집니다. 1절이 전반적인 상황을 언급했다면, 2-4절은 이런 전반적인 상황에 구체적으로 사람들에게서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다루었습니다. 5-6절은 그 죄악의 심각성이 깊어지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가까운 사람들, 즉 이웃과 친구, 가족에게로 좁혀갑니다. 이와같이 5-6절은 가까운 사람들조차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죄악의 깊이가 더해가는 상황을 지적합니다.

 

주님은 내 변호인 (7-13)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소망을 제공합니다. 또한,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하나님께 회개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에게 용서와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비록 세상의 부정과 악이 일시적으로 승리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정의를 세우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의 공의를 믿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7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8나의 대적이여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에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9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 그의 진노를 당하려니와 마침내 주께서 나를 위하여 논쟁하시고 심판하시며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시리니 내가 그의 공의를 보리로다 10나의 대적이 이것을 보고 부끄러워하리니 그는 전에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 하던 자라 그가 거리의 진흙같이 밟히리니 그것을 내가 보리로다 11네 성벽을 건축하는 날 곧 그날에는 지경이 넓혀질 것이라 12그날에는 앗수르에서 애굽 성읍들에까지, 애굽에서 강까지,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이 산에서 저 산까지의 사람들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나 13그 땅은 그 주민의 행위의 열매로 말미암아 황폐하리로다(7-13)

 

본문의 교훈은 믿는 자가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그분의 구원을 기다리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악의 세력이 일시적으로 승리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정의를 세우실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면, 그분의 용서와 회복이 임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상의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희망을 잃지 않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점이 강조됩니다.

 

(1) 징벌에서 구원과 회복으로(7-10)

 

1-6절을 탄식시로 보듯이, 7-13절을 제사 때에 노래하는 제의시(liturgy)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14-20절 역시 기도와 찬양의 시로 되어 있는 것과 맥을 같이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돌아올 때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의 운명을 구원과 회복으로 바꿀 것이라는 확신에서 제사 가운데 드리는 예언적 제의시로 봅니다. 1-6절의 탄식시에서 죄악의 현실성과 심각성이 두드러졌듯이, 하나님 앞에 돌아올 때의 구원을 다 같이 부르는 제사 때의 노래 형식을 취해, 하나님 앞에 돌아오라는 권고를 합니다.

1-6절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해 탄식하지만, 7절 이후부터는 구원과 회복의 하나님을 예언하기 시작합니다. 1-6절과의 관계에서 내용의 흐름을 고려할 때, 7절의 ‘오직 나는’이라는 표현은 ‘그러나 나는’으로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여기서 심판에서 구원으로 전환이 일어나는데, 미가서에서 종종 심판과 구원의 메시지가 번갈아 나오는 것과는 다릅니다. 여기서 7절의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라는 표현을 보면, 전환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시므로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8절에 대적이 이스라엘로 말미암아 기뻐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멸망하므로 조롱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조롱은 “네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10)로도 표현됩니다. 고대 근동에서 한 나라의 멸망은 그 나라를 보호했던 신 혹은 신들의 패배로 인식됐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멸망으로 너희를 지키던 신은 어떻게 된 것이냐는 조롱을 듣게 됩니다. 10절의 “거리의 진흙 같이 밟히리니”라는 표현 역시 당시 전쟁에서 패배하고 조롱당하는 상황을 반영합니다. 이런 상황이 아직 먼 훗날의 이야기라도 히스기야 왕(주전 715-686년) 당시 주전 701년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침공한 경험을 고려하면, 생생한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고통과 멸망을 경험하더라도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8절의 어둠이 암울한 이스라엘의 운명을 상징한다면, ‘빛’(8)은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을 상징합니다.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돌아올 때에 다시 회복되고, 어둠에서 빛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10절에서처럼 전쟁에서 일시적으로 이겨 의기양양해 하며, “네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고 조롱했던 이들이 자신들이 했던 그 행동 그대로 짓밟히며 상황이 역전될 것입니다(10). 9절의 “그의 공의를 보리로다”에서 ‘공의’는 여호와께 범죄한 자들에게 내리는 여호와의 진노의 근거가 됩니다. 동시에 이는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돌아올 때에, 그들을 위해 논쟁하고 옹호하며 구원을 베푸는 근거도 됩니다. 따라서 “그의 공의를 보리로다”라는 표현은 이스라엘의 죄악에 따라 심판을 내리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돌아올 때에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도 되실 것이라는 고백의 표현입니다.

 

(2) 성벽과 경계의 회복(11-13)

 

이 단락을 처음 시작하는 세 문장은 원문상으로 “네 성벽을 건축하는 날 지경을 넓히는 날, 네가 돌아오는 날”이라고 표현됩니다. 곧 이 날에 성벽이 건축되고 지경이 넓혀지며 백성이 돌아오면서 점차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성벽의 재건은 안전함을 의미하며, 이스라엘의 구원을 상징합니다(시 51:18). 12절에서는 온 민족이 하나님께로 온다는 의미보다는, 각처에 흩어져 있던 백성이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며, 이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13절에서 그 땅이 황폐하게 된다는 것은 각처에 흩여져 있던 땅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대조하는 표현입니다. “그 주민의 행위의 열매로 말미암아”는 그 땅이 황폐하게 된 원인을 가리키는데, 그들의 행위에 따라 멸망을 당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며, 다시 한 번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미가는 대적들에게 기뻐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비록 죄로 인해 걸려 넘어졌을지라도 남은 백성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와 징계를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을 단련하신 후에 광명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고 조롱하던 대적들이 마침내 수치를 당할 날이 올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성벽을 건축하셔서 열국에 흩어진 남은 백성을 모으시고 오대양 육대주에서 사람들이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백성으로서 절대 소망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인간의 연약함과 타락한 현실을 드러내며, 의로운 자를 찾기 어려운 상황을 강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며 회개와 구원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때, 그분의 은혜와 자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새로운 시작을 주실 것이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의 삶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평안과 소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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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06-01)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

미가 6장 1-16절


 

하나님께서 제사를 요구하신 뜻은 단순히 동물 제사의 향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제물 자체보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진정성과 헌신을 더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제물은 상징적인 행위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자신의 마음을 바치는 행위를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받기 원하시는 제사는 깨끗한 마음과 진심 어린 예배입니다. 이를 통해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도록 돕습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외적인 행위보다는 내적인 순종과 헌신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전한 제물을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예배의 특권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것이며,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지상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풍성한 은혜가 바로 거룩한 산 제물입니다.

 

일반적인 언약 소송(1-8)

바른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것과 본 것만을 전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자신이 어린아이 같아 말할 줄 모른다고 했습니다. 이는 선지자가 자신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만 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지자의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선지자는 자신의 의견이나 해석을 덧붙이지 않고 하나님께 받은 것만을 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는 일어나서 산을 향하여 변론하여 작은 산들이 네 목소리를 듣게 하라 하셨나니 2너희 산들과 땅의 견고한 지대들아 너희는 여호와의 변론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변론하시며 이스라엘과 변론하실 것이라 3이르시기를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슨 일로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증언하라 4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종노릇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네 앞에 보냈느니라 5내 백성아 너는 모압 왕 발락이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기억하며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기억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공의롭게 행한 일을 알리라 하실 것이니라 6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8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1-8)

 

미가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합니다. 지금부터 전하는 말은 자기 말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은 재앙의 시작입니다. 미가 선지자를 통해 선포하는 형식은 선지서에게 자주 사용하는 언약 소송의 형식입니다(사 1:2-3;3:13-15; 렘 2:4-13). 언약 당사자들이 모여서 언약을 맺듯이, 언약을 어긴 사항에 대해 증인과 피고인을 소환하고, 언약 당사자인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고발과 반론이 이어지고,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논고가 선포되는 식으로 언약 소송이 진행됩니다.

 

(1) 증언과 피곤인 소환(1-2)

 

본문에서는 언약 당사자인 이스라엘을 부르고 변론할 기회를 주는데, 그 증인들로서 ‘산’, ‘작은 산’과 ‘땅의 견고한 지대’를 부릅니다. 이 증인들은 이전에 언약을 맺을 때에도 증인들로 소환됐었습니다(신 31:28;32:1). 이런 언약 소송은 본래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었던 언약에 근거하여 진행되는데, 소송의 결과에 따라 언약을 어겼다고 판결이 나오면, 원래 언약에서 규정했던 조항에 근거하여 징벌을 받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이 언약의 순종 여부에 따른 언약적 저주와 축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선지서에 자주 등장하는 언약 소송은 본래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맺었던 언약에 근거합니다.

 

(2) 하나님의 고발(3-5)

 

3-5절에서는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고발이 이어집니다. 3절의 “무슨 일로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에서 하나님께서 고발하게 된 계기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해 항변하는 것은 자신들을 괴롭게 했다는 것입니다. 괴롭게 한다는 것은 짐이 되었다는 의미도 되는데, 여기서 짐이 된다는 것은 언약을 유지하기 위한 지침으로서의 일반적인 율법의 요구사항을 가리킬 것입니다. 미가서에서 상당 부분 지도층에게 공의를 행하지 못함을 지적하는 데서도 엿볼 수 있듯이, 특히 선지자를 통해 비판하는 공의와 관련된 율법. 곧 공동체 내에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공의가 자신들에게 짐이 되었을 것입니다. 4절은 언약을 맺을 때 ‘역사적 서언’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게 된 배경을 언급할 때 나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언약에 순종하도록 요구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논지를 펼치기 위해 제시하고 있습니다. 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구원하여 먼저 은혜를 베풀었다는 것을 역설합니다. 5절에서는 발람 왕과 발락의 사건에서도 인간의 어떤 방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보호하고 인도한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싯딤은 요단을 건너기 전에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곳이고(수 3:1), 길갈은 요단을 건넌 후 진을 친 첫 장소입니다(수 4:19).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은 요단을 건너는 모든 과정 가운데 인도하셨던 하나님의 역사를 가리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먼저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이스라엘을 보호하며 공의롭게 행하셨음을 강조합니다. 먼저 속량하고 공의를 베푼 하나님께서 율법의 실천을 통해 공의를 행하도록 하는 것이 무슨 짐이 된다는 것이냐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3) 이스라엘의 변론(6-7)

 

6-7절은 이스라엘이 반론하는 내용을 다루는데,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율법에 규정한 제사와 제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다고 오해했습니다. 이런 제사와 제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이런 절차를 따라함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주술적 행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발락 왕이 발람에게서 얻으려 했던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누구신지, 그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수 있는지, 그리고 그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제사와 제물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알 수 있는 통로가 됩니다. 제사와 제물을 통해 이스라엘은 하나님만을 온전히 섬겨야 하며, 또한 언약 백성으로서 공동체 가운데 하나님의 이상을 실현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제사와 제물이라는 절차와 과정에만 주목하고, 그 절차의 의미, 그 절차를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시했습니다.

 

(4) 하나님의 논고(8)

 

8절의 하나님의 논고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합니다. 제사라는 형식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았다면, 그 하나님의 성품을 세상에서, 공동체에서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정의와 인자를 실현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전혀 그런 모습과는 거리가 멉니다. 경제적인 이익을 위해 공의가 무너졌고, 인자를 행하는 삶이 전혀 아닙니다. 기독교의 영역을 예배당에서의 예배에 국한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당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림이 실제 삶에서 실현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속함을 받았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그 혜택을 누린다면 은혜로 살아가는 자답게 살아야 하며, 그리스도가 희생한 것처럼 경제적인 논리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는 모습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구체적인 언약 소송(9-1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악을 회개하고, 그분의 뜻에 진심으로 순종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는 단순한 외적인 행동이 아닌, 내면의 진정성과 순종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깨닫고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회복과 구원의 길임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마음과 진실된 신앙을 지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9○여호와께서 성읍을 향하여 외쳐 부르시나니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 너희는 매가 예비되었나니 그것을 정하신 이가 누구인지 들을지니라 10악인의 집에 아직도 불의한 재물이 있느냐 축소시킨 가증한 에바가 있느냐 11내가 만일 부정한 저울을 썼거나 주머니에 거짓 저울추를 두었으면 깨끗하겠느냐 12그 부자들은 강포가 가득하였고 그 주민들은 거짓을 말하니 그 혀가 입에서 거짓되도다 13그러므로 나도 너를 쳐서 병들게 하였으며 네 죄로 말미암아 너를 황폐하게 하였나니 14네가 먹어도 배부르지 못하고 항상 속이 빌 것이며 네가 감추어도 보존되지 못하겠고 보존된 것은 내가 칼에 붙일 것이며 15네가 씨를 뿌려도 추수하지 못할 것이며 감람 열매를 밟아도 기름을 네 몸에 바르지 못할 것이며 포도를 밟아도 술을 마시지 못하리라 16너희가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모든 예법을 지키고 그들의 전통을 따르니 내가 너희를 황폐하게 하며 그의 주민을 사람의 조소 거리로 만들리라 너희가 내 백성의 수욕을 담당하리라(9-16)

 

1-8절에서는 언약 소송에서 일반적인 문제를 다뤘습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을 다룰 때, 일반적인 차원에서 그들이 공의와 인자를 행하지 못했음을 지적했습니다. 이제 9-16절에서는 언약 소송의 형식을 이어가면서도, 더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합니다.

 

(1) 소송의 대상(9)

 

9절의 ‘성’은 백성들 전체를 가리킵니다. 온 백성을 향해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할 것을 강조합니다.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라”는 표현은 자신들이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그것은 지혜라기보다는 얕은 잔꾀에 불과하다는 의미입니다. 궁극적인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 오며, 이스라엘의 복은 그 경외함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지혜롭다고 하나 어리석게 행동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의와 인자를 행하지 않으면서 지혜롭게 행동한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2) 소송의 내용(10-12)

 

10-12절은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불의한 방법으로 재산을 축적했습니다. 부정한 에바와 저울과 저울추를 사용했습니다. 율법에서도 분명히 금하고 있으며(레 19:36; 신 25:15; 참조. 젤 45:10; 암 8:5). 이런 행위는 명백히 언약을 파기하는 행위입니다. 강포와 거짓을 행하였습니다. 이는 가난한 자의 재물을 탈취하는 행위입니다.

 

(3) 신판 선언(13-15)

 

13-15절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합니다. 13절의 ‘그러므로 나도’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공동체에서 행해야 했으나 그러지 못했음을 지적하는 것이며, 따라서 너희가 그런대로 나 여호와도너희에게 보응하겠다는 의미입니다. 13-15절의 심판의 내용은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에 드러나는 대로, 보통 언약에 순종하지 않았을 때의 언약적 저주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대표적으로 질병과 기근 그리고 칼에 의한 고통(전쟁) 등이 언약적 저주로 등장하는데, 여기서의 심판의 내용도 동일합니다(참조. 암 5:11; 호 4:10). 이는 이스라엘이 당할 심판이 명백히 하나님의 언약에 순종하지 않은 결과라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4) 최종 선고(16)

 

16절은 1-8절의 일반적인 언약 소송과 9-15절의 구체적인 언약 소송 전체를 마무리하면서, 최종적으로 선고합니다. 16a절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발하고, 16b절은 그 죄악에 따라 판결합니다.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모든 예법’은 이스라엘이 잘못 따른 선례를 가리킵니다. 오므리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여”라고 평가받았던 인물입니다(왕상 16:25). 오므리의 아들 아합은 아내 이세벨과 더불어 바알 숭배로 유명하며, 그 역시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라는 평가를 받은 인물입니다(왕상 16:30). 오므리와 아합은 악의 대명사인 셈입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을 조롱거리로 만들어 수치를 당하게 하겠다고 합니다. 수치를 당하는 형태는 다양하겠지만, 이는 포로로 끌려가는 상황과 가장 잘 어울립니다.


미가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백성에게 전했습니다. 그는 백성이 듣기 거북한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가감 없이 전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듣기 원하십니다. 말씀을 겸손히 받아 들려야 합니다. 그 말씀으로 죄의 유혹에서 이기게 하시고,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과 풍성한 교제를 나누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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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05-01)


베들레헴에서 나올 만왕의 왕

미가 5장 1-9절


모든 인류가 하나같이 찾는 것은 ‘참된 평강’입니다. 역사적으로 지금까지 ‘무엇으로 인류에게 참된 평강을 가져올 것이냐?’에 대해 연구해 왔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하나같이 생각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만족할 만한 대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평강’은 아무런 환란이나 어려움이 없는 상태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환란이 다가온다 해도 그 중에서도 완전한 평강을 얻을 수 있습니다. 본문에 분명히 가르쳤다. 이제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평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성경을 통하여 말한다.

 

 

  • 미가 선지자는 베들레헴 에브라다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태어날 것을 예언 합니다. 그의 통치는 땅 끝까지 미칠 것이며 이스라엘의 침략자들을 물리치고 그 백성들을 건져 낼 것입니다. 남은 자들은 강하여 모든 원수를 진멸합니다. 많은 백성 가운데에서 야곱의 남은 자는 젊은 사자같이 대적을 진멸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심판(1)

많은 사람들 앞에서 모욕적인 행동을 받는 것은 큰 수치와 고통을 동반합니다. 이는 존재의 가치를 부당하게 격하시켜 모멸감을 유발합니다. 특히, 인정받아야 할 자리에서 인정받지 못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자존감에 큰 영향을 미치며, 심리적 상처를 남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서로의 가치를 존중하고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1딸 군대여 너는 떼를 모을지어다 그들이 우리를 에워쌌으니 막대기로 이스라엘 재판자의 뺨을 치리로다(1)

 

미가 선지자는 본 장을 시작하면서 또다시 심판과 구원이라는 극명한 대조법을 통해서 메시아를 강조합니다. 남유다 사람들은 당할 어려운 일을 예언합니다. ‘딸 군대’는 시온을 가리키며, 위기의 상황에 처한 시온을 향한 애처로움을 표현합니다. 특히 ‘막대기로 뺨을 치리로다’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이방의 침입을 받아 수치를 당할 것을 가리킵니다(욥 16:10; 애 3:13). ‘재판자’는 왕의 사법적인 기능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암 2:3). 왕이나 통치자가 이방인들에게 뺨을 맞는 것, 그것도 손바닥이 아닌 막대기로 짐승을 때리듯 극도로 수치를 표현한 것입니다. 본 구절은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아 침략자 의해서 침략자에 의해 함락되어 그 이방 침략들로부터 치욕을 당케 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분명히 수치를 당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이 힘이 없어서도, 강대국 사이에 끼어 국제 정세가 불리한 상황에 있어서도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범죄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악 때문에 징계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최종적인 심판이 아니라 회복을 위한 경고이며, 여전히 이스라엘을 위하 계획이 있습니다.

 

새로운 왕을 통한 이스라엘의 회복(2-6)

사람들은 낮고 천하고 초라한 곳은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구간 같은 낮고 처한 곳으로 찾아오십니다. 인생에도 바닥으로 떨어지고 외롭고 쓸쓸할 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당시 낮고 천한 베들레헴으로 오셔서 눈물을 닦아 주시고 생명을 허락해 주십니다.

 

2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3그러므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의 형제 가운데에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 4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목축하니 그들이 거주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끝까지 미치리라 5이 사람은 평강이 될 것이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궁들을 밟을 때에는 우리가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을 일으켜 그를 치리니 6그들이 칼로 앗수르 땅을 황폐하게 하며 니므롯 땅 어귀를 황폐하게 하리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지경을 밟을 때에는 그가 우리를 그에게서 건져 내리라(2-6)

 

미가 선지자는 무리가 이스라엘의 재판자의 뺨을 칠 것과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탄생할 것을 예언합니다. 신약에서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성취되고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미가서는 구약 소선지서이지만 유명합니다.

 

(1) 새로운 왕의 기원(2)

 

지금 미가야는 그 당시에 우상숭배하고 하나님을 멀리하는 유다 백성들에게 이 예언을 합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미래의 일들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한 장소인 ‘베들레헴 에브라다’를 언급합니다. 이 장소는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곳입니다. ‘베들레헴’은 ‘떡집’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름도 없던 낮고 천한 ‘베들레헴’으로 선택하신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낮고 천하고 소외된 자들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메시아를 사람들이 기대한 그 시대의 왕으로 보낸 것이 아니라 이렇게 낮고 천한 베들레헴과 가장 초라한 마구간에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아마 미가는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도 우연이 없이 선지자를 통해 앞으로 이루어질 일들을 예고하고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마침내 성취하시고 이루고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 시대 사람들은 역사와 말씀을 통해서 성취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2) 새로운 왕의 행할 일(3-6)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에 앞서서 예언하십니다. 미가는 바벨론이 이스라엘에 쳐들어와 왕(히스기야)에게 수치를 안길 것이라 예언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이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셔서 그들을 모두 송장이 되게 하시고, 종국에는 이스라엘의 영원한 왕이 오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다스리실 것임을 암시합니다.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고통이 있듯이, 이스라엘이 그 평강의 왕을 맞이하기 전까지 고통이 있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북이스라엘은 이미 멸망했지만, 지금 남아 있는 남 유다를 향하여서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하고 백성들은 포로로 사로잡혀 갈 것이라고 경고의 예언합니다. 더불어 먼 미래에 예수님 다시 오시는 그 날에 동일하게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이중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가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유다는 도시가 아닌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지만(마 2:1) 그의 근본은 태초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그의 다스림은 땅 끝까지 미칠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평강이 될 것입니다. 병거와 요새, 우상과 외교력을 의지하다 백성을 지키지도 못하고 잡혀가는 시드기야와 달리, 새 왕은 당당히 서서 백성을 먹이는 목자가 될 것이며, 침입하는 적들(앗수르, 니므릇)을 칠 것입니다.

 

이 예언과 같이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모든 악한 세력에게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메시아는 작은 베들레헴에 오시지만, 결국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을 의지해 나라를 세우시고 자기 백성을 그 안에 모아 목양하십니다. 주님은 백성의 평강이 되시고, 그분의 나라는 대적을 물리칠 만큼 견고하고 강성합니다. 주님 안에 있을 때 우리 영혼은 안전합니다.

 

남은 자의 희망과 역할(7-9)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메시아가 오기 전에 세상은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구원의 손을 내미십니다. 그들의 대적들을 친히 상대해 주시고, 자기 백성을 거룩하게 만들어 가십니다. 하나님 백성이 의지할 힘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7야곱의 남은 자는 많은 백성 가운데 있으리니 그들은 여호와께로부터 내리는 이슬 같고 풀 위에 내리는 단비 같아서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하며 인생을 기다리지 아니할 것이며 8야곱의 남은 자는 여러 나라 가운데와 많은 백성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들은 수풀의 짐승들 중의 사자 같고 양 떼 중의 젊은 사자 같아서 만일 그가 지나간즉 밟고 찢으리니 능히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라 9네 손이 네 대적들 위에 들려서 네 모든 원수를 진멸하기를 바라노라(7-9)

 

이제 하나님께서는 미가 선지자를 통해 바벨론 포로 이후 ‘남은 자’들의 할 일을 예언합니다. 그들은 돌아와서 무너진 다시 이스라엘을 회복할 것입니다.

 

(1) 남은 자의 무수함(7)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창세기 12:3)을 그 후손들, 곧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게도 신실하게 지키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회복시키시는 새 백성인 야곱의 남은 자는 여호와께로부터 내리는 이슬 같고, 풀 위에 내리는 단비 같은 존재입니다. 생명력과 풍성한 은혜의 통로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이슬과 소나기 같은 ‘남은 사람’들을 통해 열방에 복과 구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2) 남은 자의 역할(8)

 

이들은 유대 민족뿐아니라 여러나라와 백성가운데서 나옵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언제나 그들을 대적한 자들의 패망역사가 남습니다. 예레미야 24장 5-7절에서 보면, 그 ‘남은 자’들을 ‘좋은 무화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남유다가 멸망하면서 끌려갔던 노예들이 절망했을지 모르지만, 그 많은 인재들과 훌륭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는 사용될 것입니다. 다시 돌아와서 나라를 세우고 영향력을 미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하는 자들에게 그들은 양 떼를 밟고 찢는 젊은 사자와 같은 존재가 될 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한 자들, 즉 그리스도인이 전하는 복음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세상은 축복과 저주로 나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사람은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보다 더 견디기 힘들 것입니다(눅 10:14).


(3) 남은 자에 대한 권고(9)

 

하나님 백성이 최고로 강해질 때는, 그들이 의지하던 군마와 전차, 견고한 성벽을 하나님이 무너뜨리시고 우상을 철저히 제거하신 때입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이 그들을 전적으로 통치하시며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도 동일하게 ‘남은 자’를 찾고 계신 하나님을 모델로 보여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할 때까지는 고난이 있을 것을 믿고 믿음을 지키며 주님께서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의 정화(10-15)

하나님과 우상은 빛과 어두움처럼 동시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거룩함을 유지해야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임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상을 제거하라고 명하십니다.

 

10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날에 이르러는 내가 네 군마를 네 가운데에서 멸절하며 네 병거를 부수며 11네 땅의 성읍들을 멸하며 네 모든 견고한 성을 무너뜨릴 것이며 12내가 또 복술을 네 손에서 끊으리니 네게 다시는 점쟁이가 없게 될 것이며 13내가 네가 새긴 우상과 주상을 너희 가운데에서 멸절하리니 네가 네 손으로 만든 것을 다시는 섬기지 아니하리라 14내가 또 네 아세라 목상을 너희 가운데에서 빼 버리고 네 성읍들을 멸할 것이며 15내가 또 진노와 분노로 순종하지 아니한 나라에 갚으리라 하셨느니라(10-15)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그들이 의지했던 모든 우상과 거짓 신들을 제거하신다는 내용입니다. 이 구절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순종해야 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의지와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1) 의지할 것을 제거(10-14)

 

하나님의 통치와 우상숭배는 같이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 여호와만을 의지하도록(4:5) 하나님께 나가는 일에 방해되는 모든 것을 제거하십니다. 본문에는 사람들이 의지할 만한 것은 모두 제거시키십니다.

 

① 심리적 의지(10-11)

‘군마’와 ‘병거’는 공격용 무기이며, 전쟁을 수행하는 필수적인 무기입니다. 또한 ‘성읍’과 ‘견고한 성’은 방어를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공격용 무기와 방어용 성읍을 없앰으로 오로지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합니다.

 

② 종교적 의지(12-14)

‘복술’과 ‘점쟁이’ 역시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께 의지해야 하지만, 가나안 사람들처럼 이런 주술과 마술에 의지하는 것을 경고합니다. 그래서 우상은 모두 다 멸할 것을 명령합니다.

 

이처럼 손으로 만든 우상을 섬기는 것이나 손으로 이루어진 군사력을 신뢰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동일합니다. 심리적인 것이나 종교적인 거들은 모두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들입니다. 이런 요소들을 제거하여 이스라엘이 온전히 구원을 받기에 합당하도록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2) 철저한 순종(15)

 

하나님보다 인간적으로 의지할만한 것들을 버려랴 합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의 능력이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라고 하십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을 담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불의와 우상 숭배를 엄격히 다루시며, 우리에게 겸손과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믿고 의지할 때, 회복과 구원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나아가며,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진정한 평화와 번영의 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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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04-01)


여호와의 통치하실 날

미가 4장 1-13절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평안하고 아름답게 살아가길 원합니다. 그래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창조하실 때, 사람들을 위해 에덴동산까지 만드셨습니다. 아름다운 에덴이 죄로 인해서 파괴되자, 하나님께서는 ‘교회’라는 새로운 공동체를 주셨습니다. 교회는 아름다운 모임이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만나는 곳입니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만나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본문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꿈이 담겨 있습니다. 교회라는 비밀 속으로 안내합니다.

 

  • 미가 선지자를 통해 끝 날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선포합니다. 그날에 이방 민족들이 여호와의 산으로 물려오고, 말씀이 그곳에서부터 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이 그치고 완전한 평화가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영원히 행할 것입니다.

 

여호와가 통치하실 날(1-5)

하나님께서는 심판 중에도 긍휼을 잊지 않으십니다. 죄로 인해 무서운 징계를 내리신 후에도,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약속이 있습니다.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일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결국, 마지막에 하나님 백성은 교회로 모여 추수될 것입니다. 이 과정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사랑을 통해 이루어지며, 우리는 그분의 회복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며, 희망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1끝 날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2곧 많은 이방 사람들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니라 우리가 그의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3그가 많은 민족들 사이의 일을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 사람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4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라 5만민이 각각 자기의 신의 이름을 의지하여 행하되 오직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영원히 행하리로다(1-5)

 

하나님께서는 미가 선지자를 통해 3장에서는 이스라엘의 타락으로 지적했습니다. 이로 인해 ‘여호와의 전’인 ‘시온성’은 멸망할 것입니다. 하지만 멸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미가 선지자를 통해 대조적으로 다시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의 치욕을 벗기시고 명예를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1) 하나님 임재의 온전한 성취(1-2)

 

3:9-12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메시지가 전해지는데, 메시지의 대상이 확연하게 다릅니다. 이전 심판의 메시지는 지도자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었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께 신실한 ‘남은 자’들이 메시지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에 맞서 죄를 저지르는 자들에게는 심판이 임하지만, 악한 상황 가운데서도 신실하게 남은 자들에게는 구원과 회복을 베푸신다는 것이 여기서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또한 내용에서도 상당한 대조를 이룹니다. 시온,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데, 3장에서는 시온이 죄로 물들어 완전히 파괴될 것을 선포했습니다(3:10,12). 이는 하나님께서 떠나시거나 침묵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4장에서의 회복은 그와 반대로 나타납니다. 시온이 여호와의 말씀과 율법으로 가득한 곳이 되며(4:2), 여호와의 전의 산은 세상에서 가장 으뜸이 된다고 합니다(4:1). 이는 하나님께서 침묵을 거두시고 하나님의 임재, 곧 통치가 온전히 실현되는 것을 가리키며, 이후의 내용은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실현됨으로 말미암아 드러난 여러 양상의 결과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2절은 온 민족이 여호와 앞에 나아와 예배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특히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도’와 ‘길’과 ‘율법’을 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현재 남유다는 북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이상인 공의와 정의가 무너졌습니다. 정치적 지도자와 종교적 지도자와 부자는 공의와 정의를 왜곡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좇아서만 살았습니다(3:11). 그러나 남은 자들의 회복을 통해서 이루신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 곧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불의가 사라지고 하나님의 온전한 이상이 실현될 것입니다. 곧 율법에 드러난 하나님의 이상이 실현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3-4)

 

3절은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로 말미암아 공의에 따른 심판이 이뤄질 것이고, 칼과 창 같은 무기는 농기구인 보습과 낫으로 바뀌어 전쟁이 사라질 것이며, 나라 사이의 분쟁도 없어지고, 심지어 전쟁 연습마저 없어지는 온전한 평화가 임할 것을 언급합니다. 4절은 여호와의 통치로 인한 풍요로움을 언급합니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감람나무와 더불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풍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나무들입니다. 각자가 자기 나무 아래 앉는다는 것은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의 풍요로운 결실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인정(5)

 

5절은 온전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끝날(4:1, 여호와의 날)의 이상을 단적으로 표현한 구절입니다. 하나님의 ‘남은 자’ 곧 그분의 신실한 백성은 하나님만을 의지할 것입니다. 이는 이미 여러 언약을 통해 드러났듯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관계의 온전한 회복을 가리킵니다. 또한 신약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이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함으로 말미암아 2-4절에서 언급한 온 민족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고, 전쟁이 없어지고 평화가 찾아오며, 풍성한 결실을 누리게 되는 결과가 따라오지만, 하나님의 궁극적인 이상은 하나님만이 진리라고 인정하고 하나님만을 온전히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6-8)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난과 아픔을 깊이 이해하시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회복의 가능성을 열어 주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것에 대한 희망을 잃지 말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모으시고 새로운 시작을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은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공동체와 사회에서도 하나님의 회복과 변화를 이루기 위한 노력을 촉진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주시는 희망을 통해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교훈은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6.○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 날에는 내가 저는 자를 모으며 쫓겨난 자와 내가 환난 받게 한 자를 모아 7발을 저는 자는 남은 백성이 되게 하며 멀리 쫓겨났던 자들이 강한 나라가 되게 하고 나 여호와가 시온 산에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들을 다스리리라 하셨나니 8너 양 떼의 망대요 딸 시온의 산이여 이전 권능 곧 딸 예루살렘의 나라가 네게로 돌아오리라(6-8)

 

본문은 하나님께서 고난 중에도 자신의 백성을 회복시키고, 그들을 다시 모으실 것이라는 약속을 전합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내어 새로운 땅에서 그들을 세우시며, 그들의 영광을 회복하실 것입니다. 이 구절은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한 인도를 믿고 의지해야 한다는 교훈을 줍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의 소망과 미래를 책임지시는 분임을 깨닫게 합니다.

 

(1) 남은 자의 귀환(6-7a)

 

2:12에서의 ‘남은 자’를 여기서는 더욱 자세히 규정하며, 남은 백성의 회복을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영원히 통치할 것이라는 약속으로 표현합니다(7). 또한 1-5절에서는 ‘끝날’(여호와의 통치의 날)에 이뤄질 일들을 언급했다면, 이제 여기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이뤄진 그 혜택을 누릴 자들, 곧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누가 될 것인가를 언급합니다. 6절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되는 하나님께서 화자로서 직접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계획을 밝힘으로써, 분명히 성취될 말씀이라는 확신을 더 해줍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는 악을 행하는 지도자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는 경고의 메시지가 되겠지만, 하나님의 회복의 메시지를 들은 ‘남은 자’들에게는 희망과 확신의 메시지가 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통치 선포(7b)

 

7b절의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들을 다스리리라”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언의 절정을 이룹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현재의 고통에서 구원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영원히 하나님의 이상이 자신의 백성 가운데 실현되는 것입니다.

 

(3) 시온을 향한 선포(8)

 

8절의 “예루살렘의 나라가 네게로 돌아오리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회복된다는 것을 가리키며, 하나님의 임재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의 관계가 회복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시온에서 끌려가는 비참함과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회복의 때는 1-5절에서도 묘사됐듯이 온전한 회복과 평화가 드러나는 때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메시지를 듣는 당시 하나님의 백성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현재의 암울한 상황, 하나님의 이상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상황이 전부가 아닙니다. 장차 임할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고 희망과 확신 가운데 ‘남은 자’로서 신실하게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다.

 

포로에서의 회복(9-13)

우리에게 어려움과 고난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슬픔과 아픔을 아시고 그 가운데서 회복의 길을 마련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그분의 뜻을 이루시며, 우리가 회복될 때 다른 민족들도 그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회복의 과정에서 우리는 인내와 신뢰를 가져야 하며, 하나님의 힘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주시는 희망을 붙잡고 나아갈 때, 우리는 진정한 회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9○이제 네가 어찌하여 부르짖느냐 너희 중에 왕이 없어졌고 네 모사가 죽었으므로 네가 해산하는 여인처럼 고통함이냐 10딸 시온이여 해산하는 여인처럼 힘들여 낳을지어다 이제 네가 성읍에서 나가서 들에 거주하며 또 바벨론까지 이르러 거기서 구원을 얻으리니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네 원수들의 손에서 속량하여 내시리라 11이제 많은 이방 사람들이 모여서 너를 치며 이르기를 시온이 더럽게 되며 그것을 우리 눈으로 바라보기를 원하노라 하거니와 12그들이 여호와의 뜻을 알지 못하며 그의 계획을 깨닫지 못한 것이라 여호와께서 곡식 단을 타작 마당에 모음 같이 그들을 모으셨나니 13딸 시온이여 일어나서 칠지어다 내가 네 뿔을 무쇠 같게 하며 네 굽을 놋 같게 하리니 네가 여러 백성을 쳐서 깨뜨릴 것이라 네가 그들의 탈취물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며 그들의 재물을 온 땅의 주께 돌리리라(9-13)

 

1-5절은 먼 훗날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임할 그날에 대해 예언하고 6-8절은 그날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백성들에 대해 예언한다면, 9-13절은 가까운 미래의 고통(남유다의 멸망) 또는 현재의 고통(주전 701년 산헤립의 침공)에서, 먼 훗날 임할 하나님의 통치를 기대하고 견디라는 취지의 메시지입니다.

 

(1) 고난 후의 회복(9-10)

 

9절은 현재의 고통에서의 괴로움 또는 미래의 고통에서의 가상적인 괴로움을 표현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닥친 고통을 이해하지 못해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분명히 하나님의 징벌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왕이 있고 모사가 있어도 그들은 백성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10절의 “해산하는 여인처럼 힘들여 낳을지어다”라는 표현은 풍자적으로 생명을 낳기 위해 산고를 겪듯이, 구원을 이루기 위해 고통의 시간이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포로로 끌려가고 바빌론에 이르렀을 때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집니다(10). 하나님의 구원은 심판이라는 역경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을 다시 붙드는 가운데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에 이르는 과정임을 기억한다면 포로로 끌려가며 고통을 당한다고 괴로워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시지 않다고 원망하거나 좌절하기보다는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하게 될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이 망한 후(주전 722년) 한참 후에야 남유다가 망하게 되지만(주전 586년), 심판의 메시지로 인하여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것은 남유다가 그동안에도 수많은 전쟁에서 강대국으로부터 고통을 당하였기 때문이고 이것은 생생한 메시지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11절에 온 민족이 모여 시온을 친다는 메시지도 먼 훗날에 대한 예언일지라도 바로 가깝게 일어날 것처럼 고통을 느낄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 당시 주전 701년 앗수르의 산헤립이 많은 군사를 끌고 와 유다를 포위하고 침략한 사건이 있습니다. 이런 사건들은 유다가 멸망에 대한 경고를 더욱 생생하게 느끼도록 했을 것입니다.

 

(2) 이방 사람들에게서의 구원(11-13)

 

11-12절은 유다가 당할 고통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 가운데 일어나는 일임을 보여줍니다. 온 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을 치려고 의기양양하게 모이지만,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모은 것이며,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깨닫고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한, 곧 구원에 이르기 위한 단계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온 민족이 득세한 듯하지만, 결국 딸 시온이 일어나서 온 민족을 치며 승리하고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13).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이루실 평화와 회복에 대한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모든 민족이 하나님께 나아와 그분의 가르침을 배우며, 전쟁이 종식되고 평화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전합니다. 또한, 이스라엘이 회복되어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실 것임을 강조합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소망을 믿고 의지하며, 세상의 고난 속에서도 그분의 약속을 붙잡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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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03-01)


타락한 지도자를 향한 말씀

미가 3장 1-12절


 

좋은 지도자를 만나는 것은 큰 복입니다. 특히 좋은 스승과 목사를 통해 좋은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더욱 귀한 은혜입니다. 그러나 지도층의 부패는 그들이 속한 공동체를 파멸로 이끌 수 있으며, 이는 일반 백성에게도 악영향을 미칩니다. 따라서 우리는 좋은 지도자가 되고, 또한 좋은 지도자를 만나야 합니다. 지도자가 올바르게 세워질 때, 건강한 공동체가 형성되고 아름답고 견고한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지도자들에게 주시는 경고와 훈계를 담고 있습니다.

 

  • 세 개의 큰 덩어리(1-2장 3-5장: 6-7장) 중에서 두 번째 단락이 시작되는 부분입니다. 3장은 비판의 대상에 따라 1-4절과 5-8절 그리고 마지막 심판을 선포하고 마무리하는 9-12절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각 소단락에서는 ‘정의’라는 단어가 반복되면서 각 단락의 주제 형성에 기여합니다.

 

범죄한 지도자들(1-4)

좋은 지도자의 수고는 그 공동체의 건강과 직결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공동체가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지도자가 올바른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도자가 부패하게 되면, 그 공동체는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부패한 지도자는 공동체의 신뢰를 잃게 하고, 그로 인해 많은 참혹한 일들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공동체의 기반을 흔들고, 결국에는 그 공동체의 생존을 위협하게 됩니다. 따라서 건강한 공동체를 위해서는 올바른 지도자의 역할이 필수적입니다.

 

1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아 들으라 정의를 아는 것이 너희의 본분이 아니냐 2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기뻐하여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3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냄비와 솥 가운데에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 4그때에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을지라도 응답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행위가 악했던 만큼 그들 앞에 얼굴을 가리시리라(1-4)

 

미가서 3장 1절에서는 지도자들의 죄악을 고발하며, 2-3절에서는 그들의 구체적인 죄를 묘사합니다. 이어서 4절에서는 이러한 죄에 따른 하나님의 징벌이 선포됩니다. 이 과정은 법정에서의 소송 형식을 띠고 있으며, 지도자들의 부패와 그로 인한 심판을 강하게 강조합니다. 결국 이 말씀은 하나님이 정의를 세우시고, 부정한 행동에 대해 책임을 묻는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1) 죄악 고발(1)

 

1절의 ‘들으라’는 1:2과 6:1에서 각각 큰 단락의 처음에 등장하여 주목하게 하는 역할을 하며, 큰 단락을 나누는 기준이 됩니다. 3장에서는 1-2장에서 다룬 주제를 더욱 심도 있게 다룹니다.

 

(2) 구체적인 죄 묘사(2-3)

 

1-4절은 주로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죄악을 지적하는데, ‘우두머리들’과 ‘통치자들’은 지파를 정의로 다스리고 재판해야 할 자들입니다. 이들은 ‘정의’를 알고 실천해야 할 자들이었으나, 오히려 압제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살을 먹고 가죽을 벗긴다는 묘사는 압제에 흔히 사용되는 표현입니다(시 14:4; 27:2;잠 30:14; 습 3:3). 무엇보다 ‘정의’ 곧 공의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지켜야 할 덕목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출 21:1). 이것은 언약을 파기한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징벌 선포(4)

 

그러므로 언약에 불순종한 대가로 마땅히 징벌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여호와께 부르짖을 시기, 곧 북이스라엘이 멸망하듯이 유다가 멸망당할 때에 또한 그들이 어려움을 겪으며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얼굴을 가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거부하신다는 의미입니다(사 1:15; 신 31:17). 지도자들에게 해당하는 덕목인 공의는 그리스도인들이 실천해야 할 덕목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 공의가 온전히 이뤄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압제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언약을 맺고 가나안 땅에서 언약 백성으로 살아야 하듯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구원을 얻었지만 하나님 나라의 의를 이루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거짓 선지자들과 미가(5-8)

우리는 항상 진리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하며,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고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현재 혼란스러운 시대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 속에서 우리는 참된 지도자를 찾아야 하며, 그들의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참된 지도자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의 지혜를 존중하고, 함께 진리를 지켜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립하며, 진리 안에서 성장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5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들은 이에 물 것이 있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 이런 선지자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6그러므로 너희가 밤을 만나리니 이상을 보지 못할 것이요 어둠을 만나리니 점치지 못하리라 하셨나니 이 선지자 위에는 해가 져서 낮이 캄캄할 것이라 7선견자가 부끄러워하며 술객이 수치를 당하여 다 입술을 가릴 것은 하나님이 응답하지 아니하심이거니와 8오직 나는 여호와의 영으로 말미암아 능력과 정의와 용기로 충만해져서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5-8)

 

하나님께서는 유다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들으라’고 외칩니다. 좋은 지도자가 되길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지도자의 가슴 속에 불타오를 때, 공동체는 희망이 있습니다.

 

(1) 거짓 선지자들 비판(5)

 

이 단락 역시 언약 소송의 형식을 이어가며, 죄의 대가에 대한 징벌을 선포합니다. 5-7절은 백성들을 잘못 인도하는 선지자들에 대해 선포하는데, 5절에서는 거짓 선지자들을 비판하고 6-7절에서는 그들의 죄에 대해 징벌을 선포합니다. 8절은 그와 대조적으로 미가 자신의 사명을 전하면서, 본질적으로 참된 선지자들이 무엇을 전해야 하는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의 대립은 성경에서도 자주 등장하는데(왕상 18:20-41; 22:6-13; 렘 28:1-17;암 7:10-17). 이런 대립을 통해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가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거짓 선지자에 대해 풍자할 때에, ‘평강’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5), 평강(샬롬)은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온전한 회복을 통해 온전하고 충만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언약의 완성이 지향하는 목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거짓 선지자가 실제적인 ‘평강’ 추구를 위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곧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은 등한시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평강’을 이용만 할 뿐, 그 평강을 실제로 추구하지는 않았습니다(렘 6:14). 여기서 명확히 표현하지는 않지만, '평강'을 실제로 추구한다는 것은 언약의 율법에 드러난 공의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3장에서 줄곧 강조하듯이 공의를 실천하지 않으면서, 지도자든 선지자든 제사장이든 자신의 이익만을 좇을 뿐입니다(11).

 

(2)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징벌(6-7)

 

6절에서 ‘점 치다’는 점술 행위를 가리키며, 명백히 율법에 금하는 것으로 언약을 파기하는 행위입니다(신 18:10). 다른 선지서 곳곳에서 이런 행위를 지적한 바 있습니다(사 44:25; 렘 27:9; 29:8; 겔 13:9,23).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하는 자들이 입으로만 ‘평강’을 외칠 뿐만 아니라, 율법에서 금하는 행위를 공공연히 행했지만, 이런 일들조차 하지 못할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합니다.

7절의 ‘입술을 가리는’ 행위는 슬픔과 애곡을 표시합니다(겔 24:17,22).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데, 이를 막음으로써 그들이 애통해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나병환자도 공동체와 격리되며 애곡을 표시로 이런 행위를 하게 됩니다(레 13:45). 이처럼 선지자들이 예언하는 제 역할을 못할 뿐만 아니라, 이런 애곡의 행위를 할 정도로 비참한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8절의 ‘오직 나는’이라는 표현은 원문상으로는 삼중적인 강조를 통해 위의 거짓 선지자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미가는 8절에서 크게 세 가지를 언급합니다. 첫째, 자신의 사역의 기원입니다. “여호와의 영으로 말미암아 능력으로 충만해져서”는 자신의 예언이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밝힙니다. 사리사욕을 위해 예언하는 거짓 선지자들과는 대조를 이룹니다. 둘째, ‘정의’로 충만하다는 것은 자신의 예언의 기본 내용이나 지향점을 가리킵니다. 곧 하나님의 성품이기도 하면서 공동체에 온전히 반영되기를 원하는 ‘정의’가 미가 선지자의 메시지의 중심이 됩니다. 3장에서 줄곧 정의(공의)가 행해지지 못함을 강조하는 것과는 대조를 이룹니다. 셋째, 자신의 주된 역할은 ‘이스라엘의 죄’를 선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역시 자기 이익에 따라 평강과 전쟁을 선언하는 것과는 대조를 이룹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자나 받는자나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중심이 되어야 하며 하나님에게서 기원한 말씀에 초점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지도자들과 시온의 멸망(9-12)

지도자는 그들의 행동이 미치는 영향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그들은 백성을 올바르게 인도할 책임이 있으며, 이 책임을 소홀히 할 경우 공동체 전체가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부패하고 부정한 행동은 신뢰를 잃게 하고, 그로 인해 사회가 혼란에 빠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도자는 항상 정직하고 공정하게 행동해야 하며, 그들의 결정이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야 합니다. 올바른 지도력이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데 필수적입니다.

 

9야곱 족속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 곧 정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하는 자들아 원하노니 이 말을 들을지어다 10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11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12이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이 되리라(9-12)

 

이 소단락은 앞의 1-4절 소단락과 비슷하게 시작합니다. 5-8절에서 거짓 선지자들을 다루다가 다시 1-3절의 지도자들을 다루기 시작하지만, 이 단락은 단순히 1-4절을 반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도자들의 죄악에 대한 지적과 그 죄악에 대한 심판이 1-4절에서는 풍자를 사용하여 일반적으로 나타지만, 여기서는 더욱 구체적으로 다루고, 시온과 예루살렘이라는 심판의 대상을 명시합니다.

 

(1) 지도자들과 시온 고발(9-11)

 

이처럼 이 단락은 앞의 1-8절의 내용을 더욱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종합적으로 다루면서 마무리한다는 점에서 3장 전체의 논리를 엿볼 수 있습니다. 1-4절과 5-8절에서 ‘정의’를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정의를 이루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지적하듯이, 역시 9절도 ‘정의’를 지적합니다. 2절에서는 “선을 미워하고 악을 기뻐하며”라고 일반적으로 표현했으나, 비슷한 문구를 사용하면서도 “정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하는 자들아”라고 ‘정의’와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는 정의를 행하는 것을 단순히 회피한 것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미워하며 대적한 모습을 가리킵니다.

시온은 여호와의 성전이 있는 산으로, 예루살렘과 병행하여 자주 사용됩니다. 즉 시온은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는 장소입니다. 그러나 그곳을 ‘피’와 ‘죄악’으로 건축했다는 것(10)은 하나님의 성품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행위로 가득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11절은 총체적으로 각계각층의 지도자들의 죄악을 지적합니다.

 

(2) 지도자들과 시온의 멸망(12)

 

따라서 하나님의 임재의 중심 장소를 더럽힘으로 “시온을 갈아엎고”, “예루살렘을 무더기가 되게”하는 심판을 맞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12). 12절의 시온과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은 곧 여호와의 임재의 거부, 곧 여호와의 침묵을 가리킵니다. 유다가 망하여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되는 것은 유다의 국력이 약해서도, 바벨론의 힘이 너무 강하여서도 아닙니다. 언약 백성으로서 언약에 충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재 내지 침묵을 경험하는 것이며, 그 땅에서 쫓겨나는 것입니다(레 18:24-29).


지도자들의 부패와 그로 인한 심판을 경고합니다. 우리는 지도자가 올바르게 행동해야 할 책임이 있으며, 그들의 결정이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을 깊이 인식해야 함을 배웁니다. 부정한 행동은 결국 공동체의 파멸로 이어지며, 하나님은 이러한 불의에 대해 심판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정의와 공의를 지키는 지도자를 찾아야 하며, 올바른 길로 인도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회개와 바른 길로 돌아서는 마음을 원하십니다. 이러한 교훈을 통해 우리는 개인과 공동체의 건강한 미래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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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02-01)


심판하신 후에 회복하실 하나님

미가 2장 1-13절


 

자녀들이 공부를 잘해서 좋은 학교를 가고, 좋은 직장을 얻고, 돈도 많이 벌고 그리고 명예를 가지고 살아가길 원합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공부하라! 공부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자녀들에게 돈과 명예 그리고 좋은 직장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는 가르치지 않습니다. 자녀들에게 ‘공부해서 남 주느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공부해서 남 주어야 한다’고 가르쳐야 합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만 위해 사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소유한 모든 것들을 자신만을 위해 살아갈 때, 얼마나 많은 문제가 발생하는지 말씀 속에서 볼 수 있습니다.

 

  •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자신의 힘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들을 압제하고 착취합니다. 미가 선지자가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지만 그들은 말씀을 듣기를 거부하고 악행을 계속 저지릅니다. 그리고 거짓 선지자들은 용납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큰 멸망을 선언하시고,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으시고 그들을 양 떼같이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심판하실 하나님(1-11)

세상에서 부와 권세 그리고 명예를 가진 사람들은 그만큼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유한 것들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결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선한 수단으로 사용하면 좋은 지도층이 되지만, 반대로 불의한 방법으로 사용하면 악한 열매를 맺습니다. 본문의 이스라엘의 권력자들이 악한 열매를 맺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1그들이 침상에서 죄를 꾀하며 악을 꾸미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2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차지하니 그들이 남자와 그의 집과 사람과 그의 산업을 강탈하도다 3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 족속에게 재앙을 계획하나니 너희의 목이 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요 또한 교만하게 다니지 못할 것이라 이는 재앙의 때임이라 하셨느니라 4그때에 너희를 조롱하는 시를 지으며 슬픈 노래를 불러 이르기를 우리가 온전히 망하게 되었도다 그가 내 백성의 산업을 옮겨 내게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 밭을 나누어 패역자에게 주시는도다 하리니 5그러므로 여호와의 회중에서 분깃에 줄을 댈 자가 너희 중에 하나도 없으리라 6그들이 말하기를 너희는 예언하지 말라 이것은 예언할 것이 아니거늘 욕하는 말을 그치지 아니한다 하는도다 7너희 야곱의 족속아 어찌 이르기를 여호와의 영이 성급하시다 하겠느냐 그의 행위가 이러하시다 하겠느냐 나의 말이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유익하지 아니하냐 8근래에 내 백성이 원수같이 일어나서 전쟁을 피하여 평안히 지나가는 자들의 의복에서 겉옷을 벗기며 9내 백성의 부녀들을 그들의 즐거운 집에서 쫓아내고 그들의 어린 자녀에게서 나의 영광을 영원히 빼앗는도다 10이것은 너희가 쉴 곳이 아니니 일어나 떠날지어다 이는 그것이 이미 더러워졌음이니라 그런즉 반드시 멸하리니 그 멸망이 크리라 11사람이 만일 허망하게 행하며 거짓말로 이르기를 내가 포도주와 독주에 대하여 네게 예언하리라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이 이 백성의 선지자가 되리로다(1-11)

 

하나님께서는 사회 곳곳마다 만연해 있는 죄악들을 정확하게 보고 계십니다. 여기서는 언약을 파기하는 죄들을 짓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지적합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합니다.

 

(1) 심판의 이유 : 지도자들의 경제적 착취(1-2)

 

‘화 있을진저’로 시작하는 재앙 신탁은 심판이 임박했다는 긴박감을 조성하면서 죄의 심각성을 강조합니다. 1장에서는 언약 소송의 형식을 빌려 죄악을 지적하는데,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언약을 파기하는 죄들을 짓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1절의 ‘죄’와 ‘악’은 각각 속임수와 사악함을 가리키는데, 죄를 짓는 자들의 간교하고 사악함을 지적합니다. 또한 권력을 쥔 자들이 우연히 또는 의도하지 않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밤에 계획하고 그것을 낮에 실행하는 사악한 자들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2절의 ‘탐하여’라는 행위는 십계명의 제10계명을 어기는 것으로 명백히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기는 행위입니다. 지도자들은 탐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가진 권력으로 빼앗고 강탈했습니다. 특히 ‘산업’의 강탈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산업은 지파와 가문별로 물려받는 재산을 가리킵니다. 땅은 하나님이 언약을 맺은 대가로 이스라엘에게 허락한 것으로, 본래 하나님에게 속합니다(레 25:23; 민 36:2,7). 하나님에게서 위임받은 것으로 대대로 물려받으며 존속시킬 의무가 있습니다. 때로 기업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갈 위기에 처할 때, 기업 무름 제도나 안식년과 희년 제도를 통해 땅을 유지하려는 것도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가 파괴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이상적인 공동체로 남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업을 빼앗는 이런 행위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행위입니다.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어 빼앗은 행위가 본문에서 지적하는 전형적인 죄에 해당합니다(왕상 21장).

 

(2) 하나님의 심판(3-5)

 

1-2절에서 죄악을 지적하고, 여기서는 그에 대한 심판을 선포합니다. ‘그러므로’는 1-2절에서 지적한 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언약을 파기하였으므로 이제 심판을 내리겠다는 의미입니다. “너희의 목이 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요”라는 표현은 정복당해 목에 멍에를 지는 데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표현이며(신 28:48;사 10:27), 언약에 불순종할 때의 언약적 저주의 내용에도 포함됩니다. 4절의 ‘산업’은 언약을 맺은 이후 가나안 땅을 할당받는 것을 가리키며, 산업을 옮긴다는 것은 언약에 불순종했으므로 땅에서 쫓겨난다는 의미입니다. “밭을 나누어 패역자에게 주시는도다”라는 표현 역시 비슷한 의미를 반복한 것입니다. 여기서 ‘패자’는 원래 ‘반역자’를 의미하지만, 학자들은 부유한 자들이 멸시하던 사람들을 풍자적으로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여, 결국에는 자신들이 풍자하며 멸시한 자들의 몫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본문을 봅니다. 에스겔 48장에서 종말론적으로 각 지파에게 기업이 할당될 것을 예언한 것과 비슷합니다. 역설적이게도 자신들이 권력을 이용해 사람들과 그들의 집과 기업을 빼앗았으나, 이제 자신들이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5절에서 ‘여호와의 회중’은 여호와의 백성에 속해 절기에 참여하고 의사를 결정한 회합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5절은 여호와가 인정하는 백성에 속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3) 심판 이유: 심판의 메시지에 대한 안이함(6-7)

 

1-2절에서 죄악을 지적하고 3-5절에서 그 죄악에 따른 심판을 선포했는데, 여기서는 이 선포에 대한 반응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6절은 올바른 예언을 하는데도 자신들이 듣기 싫다고 거짓 예언 취급하는 반응을 묘사합니다(암 2:12; 호 9:8). 7절에서는 자신들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인데, 자신들을 급하게 심판하실 이유가 없다고 항변하는 반응을 묘사합니다.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보고도, 안일하게 대처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지 않는 태도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4) 심판 이유: 약자를 탈취함(8-9)

 

6-7절에서 지적한 대로, 메시지 선포를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오만한 태도를 보이는 자들에게 다시 그들의 죄악을 지적합니다. 의복을 벗어 빼앗는 행위는 언약의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출 20:15;22:26-27). 9절의 ‘백성의 부녀들’은 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과부일 것입니다. 과부와 그들의 어린 자녀들은 사회의 대표적인 약자로 율법의 보호 대상입니다(출 22:22). 명백히 언약의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보호해야 할 대상에게서 하나님께서 허락한 영광, 곧 복을 탈취하며,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고 있습니다.

 

(5) 하나님의 심판(10-11)

 

6-7절에서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지 않을 것이라며 오만한 태도를 보이는 자들을 지적하고, 8-9절에서 약자를 보호해야 할자들이 언약의 법을 어기고 오히려 탈취한 것을 지적하는데, 10절에서는 따라서 언약에 불순종하므로,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따른다고 선언합니다. 10절의 ‘쉴 곳’은 ‘안식’이나 ‘안식처’로 자주 번역되는 용어로,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서 자기 백성에게 궁극적으로 허락하신 ‘안식’이기도 합니다. 선지서에서는 종말론적으로 ‘남은 자’에게 허락된 복을 가리킵니다(사 32:15-18). 따라서 이 ‘쉴 곳’에서 떠나는 것은 언약을 파기한 백성이 맞이하게 될 운명입니다(레 18:24-28; 신 23:14).

11절은 6절의 논의를 다시 끌어들이면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자들에게 조롱의 말로, 심판의 메시지를 마무리합니다. “사람이 만일 허망하게 행하며 거짓말로 이르기를”은 거짓 선지자를 가리킵니다. 포도주와 독주는 백성이 원하는 것을 가리키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예언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예언하는 선지자가 “이 백성의 선지자”가 된다는 것은 참 선지자가 아님에도 그들을 좇아 살라는 조롱 섞인 말로 그들의 죄악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회복시키실 하나님(12-13)

우리는 하나님의 주도하심을 신뢰해야 하며, 하나님은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회복을 원하십니다. 그분의 회복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 해결에 그치지 않고, 공동체가 함께 일어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사랑하시지만, 동시에 모든 이가 함께 회복되고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회복은 우리가 서로를 지지하고 함께 하나님을 의지할 때 더욱 완전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하나님의 계획에 참여하고, 서로를 격려하며 회복의 길을 함께 걸어가야 합니다.

 

12야곱아 내가 반드시 너희 무리를 다 모으며 내가 반드시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으고 그들을 한 처소에 두기를 보스라의 양 떼같이 하며 초장의 양 떼같이 하리니 사람들이 크게 떠들 것이며 13길을 여는 자가 그들 앞에 올라가고 그들은 길을 열어 성문에 이르러서는 그리로 나갈 것이며 그들의 왕이 앞서가며 여호와께서는 선두로 가시리라(12-13)

 

1-11절에서 줄곧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다가 12-13절에서는 회복의 메시지를 전하는데, 이렇게 심판과 회복의 메시지를 번갈아 전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겨, 회복의 메시지는 후대에 추가된 것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심판과 회복의 메시지가 번갈아 나오는 것은 선지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언약을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에 따라 언약적 축복과 저주를 제시하는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을 반영하고 있으며, 이렇게 축복과 저주를 제시하는 이유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언약을 맺고 그 언약을 유지하기 위한 지침으로서 율법을 제시하며, 언약에 충실하도록 하기 위한 조건으로 언약에 순종하느냐 그러지 않느냐에 따라 축복과 저주를 제시한 것입니다. 그러나 언약의 주요 목적은 언약의 관계, 곧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이 온전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저주의 선포는 경고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며, 비록 심판을 내리더라도 여기 본문에서처럼 ‘남은 자’를 통하여 그 관계를 유지하려 하는 것이 하나님의 본래 의도입니다.

미가서는 북이스라엘에 임한 심판이 남유다에도 임박했으며, 여호와께 돌아오지 않을 때 반드시 멸망의 심판이 기다린다고 강조합니다. 그런 가운데도 남은 자를 두어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계속될 것을 자주 언급합니다. 12절에서 ‘남은 자’를 처음 언급하지만 미가서 전반에서 거듭 언급하고 있습니다(2:12; 4:7; 5:7,8; 7:18).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모습이 유다 전반에 걸쳐 나타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 신실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려는 자들은 남유다가 멸망을 당한다고 해도 남겨 두시고 이들을 “수풀의 짐승 중의 사자 같고 양떼 중의 젊은 사자 같이” 강하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교만과 패역함을 오래 참으시며 사랑으로 강권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이제는 반응하길 원합니다. 항상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판단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은 헛된 것에 욕심으로 부리며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만족하며 살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듣고, 주신 말씀에 감사해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악한 것에는 미련하고 선한 것에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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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01-02)


각 지역에 심판자로 임하실 여호와

미가 1장 8-16절


당신은 어떤 친구들을 만나길 원하십니까? 힘들고 어려울 때나 잘못된 선택을 하고 다른 길로 갈 때에 당신에게 틀렸다고 말해주는 친구들이 있어야 합니다. 무조건 당신 편으로 잘못된 것도 잘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당신을 망치게 한 것입니다. 정말 당신을 사랑한다면 객관적으로 보아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당신의 실수를 말할 때에 마음이 아플 지라도 그렇게 말해주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입니다. 미가가 바로 그런 선지자였습니다.

 

  • 미가 선지자는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재앙이 임할 것을 보며 애통하고 애곡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사용한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유다 성읍들이 입은 상처는 치유될 수 없고, 주민이 의지할 곳도 없습니다. 급기야는 이스라엘의 영광은 사라지고, 기쁨이었던 자식들도 포로로 사로잡혀 떠날 것을 예언합니다.

 

애통하는 선지자(8-10)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정치, 경제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까지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이용해서 자기 이득부터 먼저 챙기는 모습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모르고 당하지만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진실을 나타나게 됩니다. 진정한 지도자는 백성의 상처가 자신의 아픔처럼 느껴지는 사람입니다.

 

8이러므로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개같이 애곡하고 타조같이 애통하리니 9이는 그 상처는 고칠 수 없고 그것이 유다까지도 이르고 내 백성의 성문 곧 예루살렘에도 미쳤음이니라 10가드에 알리지 말며 도무지 울지 말지어다 내가 베들레아브라에서 티끌에 굴렀도다(8-10)

 

본문은 슬픔과 애통의 감정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과 경고를 전합니다. 성읍의 파멸과 고통이 강조되며, 이는 회개와 경각심을 일깨우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정의와 진리를 세우기 위한 경고의 필요성을 상기시킵니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영적 상태를 점검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필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1) 도시의 황폐화로 인한 애통(8)

 

‘이러므로’라는 첫 단어는 8절 이하의 사건을 1-7절의 사건과 연결짓습니다. 이어 등장하는 일인칭 화자는 그 사건으로 인한 애통을 다섯 개의 동사를 통해 표현합니다. 이 동사들은 화자의 깊은 슬픔을 강조하며, 특히 ‘들개같이’와 ‘타조같이’라는 표현이 주목할 만합니다. 이러한 동물들은 황폐한 지역에 서식하는 야생 동물로, 이사야서와 욥기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사 13:21-22; 34:13; 43:20; 욥 30:29). 이들은 황폐해진 도시의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며, 슬픔과 고통을 더욱 부각시킵니다. 미가는 이 동물들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고통의 깊이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유는 독자에게 강렬한 이미지를 남기며, 애통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드러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황폐한 상황과 그로 인한 정서적 반응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2) 예루살렘까지 미친 심판의 상처(9)

 

‘그 상처’에서 ‘그’는 6-7절에 언급된 사마리아와 연결됩니다. 이는 사마리아의 상처가 치료 불가능함을 나타내며, 그 상처가 유다까지 이르렀다는 점이 두 번의 ‘진실로’로 강조됩니다. 전치사 ‘-까지’가 세 번 사용되어 유다의 성문과 예루살렘까지 이어지는 과정이 나타납니다. 이는 상처의 확산이 단순히 지역적이지 않고, 중심부로 확대됨을 시사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사마리아의 위기 상황이 유다와 예루살렘에 미치는 영향을 부각시킵니다. 결국, 이 구절은 사마리아의 상처가 유다의 안전과 안정성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상처의 심각성과 그 여파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3) 가드, 베들레아브라(10)

 

여기 언급된 성읍들은 미가의 고향과 인접한 지역으로, 그 중에는 르호보암이 건축한 ‘방비하는 성읍들’에 속하는 곳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각 성읍과 연결된 명령이나 동작의 서술은 애통과 애곡의 감정을 담고 있으며, 이는 슬픔의 깊이를 더욱 강조합니다. ‘가드’와 ‘알-타기두(알리지 말라)’는 문자적으로 연관성을 지니고 있어, 가트의 김멜과 부정어가 역순으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가드에 알리지 말라’는 표현은 가드가 방비하는 성읍임을 고려할 때, 예루살렘에 닥친 파멸에 대해 이미 조치를 취하기에는 늦었다는 탄식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또한, 베들레아브라는 ‘아프라를 위한 집’이라는 뜻을 지니며, ‘내가 티끌에 굴렀도다’와 연결됩니다. ‘아프라’는 ‘흙’이나 ‘먼지’를 의미하는 ‘아파르’와 동일한 어근을 갖고 있어, ‘내가 티끌에서 뒹굴었다’는 표현은 그 행위를 하는 장소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는 8절에서 슬픔을 표현하는 행위로 해석될 수 있으며, 이와 관련하여 ‘도무지 울지 말지어다’라는 구절을 ‘울어라, 그래 울어라’로 수정해 번역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슬픔의 감정을 더욱 생생하게 전달하며, 독자에게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수치와 불명예의 성읍들(11-16)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고 진정으로 회개하는 태도는 개인의 영적 성장에 필수적입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삶의 방향을 바로잡는 첫걸음이 됩니다. 외적인 행동은 내면의 감정을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슬픔이나 고통을 외부로 드러내는 것은 자신의 상태를 인식하고 치유의 과정을 시작하는 방법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공동체 내에서의 회복과 변화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내면의 변화를 외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진정한 회개와 성장의 중요한 요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11사빌 주민아 너는 벗은 몸에 수치를 무릅쓰고 나갈지어다 사아난 주민은 나오지 못하고 벧에셀이 애곡하여 너희에게 의지할 곳이 없게 하리라 12마롯 주민이 근심 중에 복을 바라니 이는 재앙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문에 임함이니라 13라기스 주민아 너는 준마에 병거를 메울지어다 라기스는 딸 시온의 죄의 근본이니 이는 이스라엘의 허물이 네게서 보였음이니라 14이러므로 너는 가드모레셋에 작별하는 예물을 줄지어다 악십의 집들이 이스라엘 왕들을 속이리라 15마레사 주민아 내가 장차 너를 소유할 자로 네게 이르게 하리니 이스라엘의 영광이 아둘람까지 이를 것이라 16너는 네 기뻐하는 자식으로 인하여 네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할지어다 네 머리가 크게 벗어지게 하기를 독수리 같게 할지어다 이는 그들이 사로잡혀 너를 떠났음이라(11-16)

 

미가 선지자는 성읍들의 이름을 이용한 언어유희를 통해 유다에 닥칠 심판을 상상하게 전달해줍니다. 하나님께서 임박한 심판에 대한 경고를 통해 회개와 반성을 촉구합니다. 슬픔과 애통의 상징인 외적인 행동을 통해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진정한 회개가 필요함을 강조합니다. 궁극적으로, 이 구절은 하나님의 정의와 진리를 깨닫고 돌아가야 할 필요성을 일깨워줍니다.

 

(1) 사빌, 사아난, 벧에셀(11)

 

여기서 지명과 행위의 연결은 대조적인 연관성을 드러냅니다. ‘벗은 몸에 수치’는 ‘아름다운 곳’이라는 뜻의 ‘샤피르’(사빌)와 대비되며, ‘나가라’라는 명령은 수치를 무릅쓰는 행위를 전제하므로 아름다운 곳의 주민에게는 혹독한 의미를 지닙니다. ‘나오지 못하고’와 연결된 사아난(차아닌)은 ‘나가다’라는 뜻의 야차와 관련이 있어, 아름다운 사빌의 주민은 벗은 몸의 수치로 인해 나가지 못하는 상황에 처합니다. 반면, 사아의 주민은 ‘잘나가는/출전하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나가지 못하는 아이러니를 겪습니다. 이는 2:13의 성문에 이르러 ‘그리로 나갈 것’이라는 구절에서 동일한 동사가 사용되어, 여호와께서 선두에서 길을 여시며 거침없이 전진하시는 모습과 비교됩니다. 마지막으로, ‘벤에셀’은 ‘제거의 집’이라는 의미로, 의지할 곳이 없게 된 매우 곤란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슬픔과 고통의 깊이를 더욱 부각시키며, 독자에게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

 

(2) 마롯(12)

 

‘마롯’의 어원은 ‘마라르(쓰다)’로 추정되며, 이는 마롯 주민이 근심 중에 복을 바라는 상황을 더욱 부각시킵니다. 이러한 바람은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의 성문에 임한 재앙의 성격을 더욱 강조하게 됩니다. ‘야라드(임하다, 내려오다)’와 ‘예루살렘’에서 두 글자가 겹치는 것처럼, 이들 사이의 연결은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또한, ‘그라아(재앙)’와 ‘샤아르(성문)’에서 아인과 레쉬가 역순으로 겹치는 현상은 ‘재앙’과 ‘샬롬’의 대조를 나타냅니다. 이러한 언어적 유비는 마롯 주민의 고통과 그에 대한 여호와의 응답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며, 슬픔과 희망이 얽혀 있는 복합적인 감정을 전해줍니다.

 

(3) 라기스(13)

 

‘라기스’는 병거성과 마병의 성(왕상 9:19) 중 하나로 유다의 군사적 요충지였으며, 산헤립이 정복한 성읍 중 하나(왕하 18:14,17)였는데, 그가 라기스 정복 자신의 전승 기록 벽화에 그려 넣을 정도로 중요한 요새였습니다. 그러나 라기스는 다른 곳들과는 달리 ‘딸 시온의 죄의 근본’으로 정의되고, 이스라엘의 허물이 그곳에서 보였다고 지적됩니다. 따라서 준마에 병거를 메우라는 명령은 아이러니 혹은 비난과 조롱으로 보입니다. 한편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죄가 그들의 강함에서 비롯된 교만에 있음을 상기시키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4) 가드모레셋, 악십의 집들(14)

 

‘작별하는 예물’은 시집가는 딸 편에 보내는 ‘혼수’의 개념으로 이해됩니다. ‘모레셋’에 포함되어 있는 어근 ‘야라쉬’(유업으로 주다)라는 점을 고려하면, 혼수를 주어 낯선 곳으로 보내라는 명령이 지명의 뜻과 대조적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악의 집’은 이스라엘 왕궁에 토기를 만들어 바치던 곳인데, 이들이 이스라엘의 왕을 속인다는 것은 그들을 실망시킨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모두는 유다의 패망과 연결됩니다.

 

(5) 마레사, 아둘람(15)

 

마레사 주민은 그들을 장차 ‘소유할 자’에게 넘어갈 것입니다. 마레사의 어근이 ‘야라쉬’(유업으로 주다)임을 감안할 때 지명과 행위가 대조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아둘람과 이스라엘 두 성읍이 라기스와 함께 방비하는 성읍들에 속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본절의 ‘소유’와 ‘영광’은 먼 장래의 일이거나, 현재의 맥락에서 역설적 표현이라 볼 수 있습니다(참조, 16).

 

(6) 대머리 같게 하라(16)

 

슬픔과 애통의 감정을 담고 있는 구절로, 이스라엘의 백성이 겪는 고통과 그로 인한 비통함을 표현합니다. 이 구절에서 “너는 네 머리털을 밀고, 수염을 깎고, 애통하는 자처럼 너 자신을 가꾸라”는 명령은 심각한 경고를 의미합니다. 이는 그들이 처한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회개와 반성을 통해 하나님께 돌아가야 함을 촉구하는 메시지입니다.

머리털과 수염을 밀고 깎는 행위는 전통적으로 슬픔과 애통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이러한 모습은 그들의 고통을 외적으로 드러내는 방법입니다. 이는 또한 그들이 겪고 있는 재앙이나 심판, 즉 하나님의 의도된 심판에 대한 깊은 슬픔을 나타냅니다. 결국 이 구절은 백성이 자신들의 죄와 잘못을 깨닫고, 진정한 회개와 변화를 통해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메시지는 독자에게도 영적 각성과 회개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중요한 경고로 다가옵니다.


미가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백성에게 전했습니다. 그는 백성이 듣기 거북한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가감 없이 전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듣기 원하십니다. 말씀을 겸손히 받아 들려야 합니다. 그 말씀으로 죄의 유혹에서 이기게 하시고,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과 풍성한 교제를 나누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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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서(01-01)


심판자로 임하실 여호와

미가 1장 1-7절


모든 성경들은 목적이 있겠지만, 특히 예언서에는 분명한 기록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반복해서 행하는 죄악의 사이클을 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우상숭배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하여 경고하시고, 끝까지 듣지 않는 백성들을 향하여 심판하셨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면, 그들을 용서하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러나 또 다시 백성들은 범죄하는 일에 빠진 패턴이 계속되어 반복되어진 것을 봅니다.

 

  • 미가서의 내용은 아름다운 사마리아 도시와 아주 훌륭한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 성을 볼 때, 겉으로 보기에는 풍요롭고 매력적인 도시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미가 선지자를 보내시며 ‘너희가 타락하였다’, ‘너희에게 죄가 무성하다.’, ‘내가 너희를 심판하겠다.’라고 경고하는 메시지로 1장이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심판하시기 위해 강림하실 것입니다. 사마리아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될 것이며 성들과 우상들은 모두 파괴될 것입니다.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1)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어두운 시대를 변혁시키십니다. 주의 종들을 통해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의 종들에게 전달됨을 믿고

 

1유다의 왕들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곧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1)

 

미가가 활동하던 일들을 ‘미가서 개론’에서 살펴보았지만, 본문을 중심으로 해서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앞에서 서술한 ‘미가 개론’을 한 번 더 살펴보신다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원어 성경에는 ‘여호와의 말씀’로 시작하지만, 우리나라 성도들을 위해서 우리 성경에 변역된 순서대로 설명해 가겠습니다.

 

(1) 미가의 활동 시대

 

하나님께서는 미가를 선지자로 부르셨습니다. 그가 활동한 시기는 남왕국 유대 왕들인 요답, 아하스, 히스기야 시대에 약 54년 동안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당시에는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것임을 밝힙니다. 그들의 죄악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선지자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정확한 대상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2) 미가의 활동 내용

 

‘미가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첫 단어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표현을 통해 미가서는 단순한 문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권위를 명시합니다. 선지자들을 통해 전해주신 말씀에 권위를 부여하는 형식에 예언서는 ‘호세아’, ‘요엘’, ‘스바냐’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미가는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묵시(word)’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당사자들에게 전합니다. ‘묵시’는 ‘예언’, ‘말씀’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간단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미가 선지자를 통하여 ‘너희들에게 심판이 임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회개하라.’고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시 전에 이렇게 말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3) 미가의 활동 대상

 

하나님께서 부르신 미가는 유대 작은 마을인 모레셋(Morasthite)에 살고 있었습니다. 선지자인 미가를 통해서 당시 유명한 두 도시를 향해 주신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그 메시지는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와 남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범죄하여 하나님을 배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갑자기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먼저 선지자를 보내셔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메시지를 전하시면서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오길 기다리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언되는 과정의 모든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누구를 선택해 말씀을 받게 하실 것인지, 어떤 말씀을 주실 것인지, 얼마나 오랫동안 사역하게 하실 것인지, 누구에게 전하게 하실 것인지 등 모두가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선지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는 겸손하게 엎드려야 하는 존재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그대로 전파해야 합니다. 오늘날 말씀을 전하는 일을 맡은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미가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선포(2-4)

서로 언약을 맺을 때는 일련의 절차와 규칙이 있습니다. 언약 당사자를 확인하고, 그 내용을 확인하고 그리고 직접 대면하면서 언약을 맺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맺은 그 언약을 실천하느냐 그렇지 않으냐 라는 점입니다.

 

2백성들아 너희는 다 들을지어다 땅과 거기에 있는 모든 것들아 자세히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언하시되 곧 주께서 성전에서 그리하실 것이니라 3여호와께서 그의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 4그 아래에서 산들이 녹고 골짜기들이 갈라지기를 불 앞의 밀초 같고 비탈로 쏟아지는 물 같을 것이니(2-4)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사랑하시는 자들을 징계하시고 채찍질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히 12:6).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대상에 대해 “땅과 거기 있는 모든 것들아”(2)라고 모든 피조물들은 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피조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어그러진 상태에 있는 피조물들이 본 모습(identity)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에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서 자신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미가 선지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은 너무나 생생했습니다. 선지자는 묵시에 압도되어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3)라고 외쳤습니다. 그는 산과 골짜기가 녹고 갈라지면서 힘을 잃고 맺을 못 추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엄청난 위엄으로 강림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그 묵시를 통해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죄악을 더는 견딜 수 없어 일어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마음으로 온 백성, 땅과 거기에 있는 모든 것을 향해 외칩니다. “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언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될 때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 말씀에 회복의 길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 특히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모든 만물과 사람들을 회복시키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새롭게 듣기 위해서 어떻게 노력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삶의 변화로 이어지고 있습니까?

 

심판하실 이유(5) - 죄와 허물

예배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예배가 무너진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진 것입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예배를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무너지지 않았습니까? 그것을 수축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5이는 다 야곱의 허물을 인함이요 이스라엘 족속의 죄를 인함이라 야곱의 허물이 무엇이뇨 사마리아가 아니뇨 유다의 산당이 무엇이뇨 예루살렘이 아니뇨(5)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시는지 이유를 밝히십니다. 이곳에서 ‘야곱’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하는 조상의 이름입니다. 그리므로 하나님께서 심판자로 임하시게 된 것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 때문입니다. 이스라엘과 유다 모두 그 중심에서부터 죄가 가득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북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는 허물 자체였으며,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에 타락과 변질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 예배하는 곳으로 중심적인 도시이지만, 그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산당과 다름없었습니다. 이곳에 죄와 허물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은 백성들의 예배가 무너졌습니다. 그곳은 더 이상 하나님을 예배라는 종사가 아니라 우상과 죄가 가득한 곳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신 죄가 우상숭배입니다. 성전이 있고 예배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께 대해 죄가 들어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참으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많은 왕들이 나옵니다. 왕들 중에서 예배하는 왕들은 왕과 백성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왕이 산당을 짓고 우상숭배를 하면서 하나님을 멀리할 때에 어김없이 그 나라를 심판하시고 백성들을 멸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찾으시는 자는 바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이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복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전파되길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특히 성도들은 예배를 회복해야만 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가 필요합니다. 잘못하면 이 시대에도 교회를 산당으로 만들 수 있는 어리석임이 우리에게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심판의 결과(6-7)

문화가 중요한 것은 악이 만연하면 처음에는 괴롭지만, 나중에는 내성이 생겨서 견딜만해집니다. 점점 자신도 생존하기 위해서 자신도 악을 범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그래서 악한 문화에 별 불편 없이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심판이 닥치면, 그 심판을 온전히 맞게 되어 있습니다.

 

6이러므로 내가 사마리아를 들의 무더기 같게 하고 포도 심을 동산 같게 하며 또 그 돌들을 골짜기에 쏟아내리고 그 기초를 드러내며 7그 새긴 우상들은 다 부서지고 그 음행의 값은 다 불살라지며 내가 그 목상들을 다 깨뜨리리니 그가 기생의 값으로 모았은즉 그것이 기생의 값으로 돌아가리라(6-7)

 

사마리아는 주위 골짜기보다 90m정도 높은 곳에 세워졌습니다(사 28:1). 하지만 그곳이 분주하고 화려하게 보이지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면 아무 쓸모없는 땅으로 사람들이 살지 않고 돌무더기와 포도를 심을 동산 같이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결국 사마리아는 BC 722-721년 앗수르 의해 침략으로 멸망당하고 그런 모습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무너진 성의 돌들이 골짜기로 쏟아져 내림으로 성의 기초가 드러났습니다.

우상의 신전 기생들에게 준 재물로 우상을 만들고, 성전을 치장하였습니다. 이 악한 모습을 하나님께서 지적하십니다. 그리고 심판하실 것을 예언하십니다. 앗수르에게 빼앗겼고, 앗수르 사람들은 그 재물을 자기 신들의 신전의 기생들에게 주었습니다. 죄로 인한 결과는 이렇듯 비참합니다. 그리므로 죄를 멀리하고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시대에도 우리 안에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기생의 값으로 모은 돈이 없는지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방법으로 돈으로 거래하면서 교회를 세워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마치 중세시대에 면죄부를 팔아서 교회를 건축했던 것처럼 우리 안에 없는지 살펴야 합니다. 이러한 모습들로 교회와 자신의 삶 가운데 기생의 값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스라엘 왕들을 형통함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우상숭배를 했던 왕들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현재 당신의 실패와 어려움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과 관계에 단호하게 끊어버리라고 계속 촉구하시는 죄는 무엇입니까?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백성에게 전하는 쉽지 않는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듣기에 거북한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가감 없이 전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듣기 원하십니다. 말씀을 겸손히 받아 들려야 합니다. 그 말씀으로 죄의 유혹에서 이기게 하시고,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과 풍성한 교제를 나누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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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서(01)


미가서 서론


미가서는 12소선지서 중 하나로, 몇몇 구절들로 인해 오늘날 성도들에게 잘 알려진 책이기도 합니다. 특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5:2)라는 말씀은, 마태복음 2장 6절에 약간 변형되어 인용되어 성탄 메시지에 빠지지 않고 등장합니다. 이 말씀 외에도 찬양의 가사로 사용된 6장 6-8절도 친숙한 말씀입니다.

 

기록자

◇ ‘미가'는 ‘미가야’의 약자입니다. 예레미야 26장 18절에는 완전한 이름인 ‘미가야’가 나옵니다. 이 이름의 원래의 형태는 ‘미가야후’인데, 이것은 ‘누가 여호와와 같은가?’라는 의미입니다. 선지자의 이름은 중요합니다. 하나님이나 주와 관련된 이름들은 그 선지자의 태도와 충성을 나타내는, 미가의 경우에는 거짓 선지자와 죄인들에 대한 도전의 표시였습니다.

(1) 외적 증거 : 미가서에 대한 다양하고 심층적인 연구 결과로 미가서의 저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되고 있지만, 미가 선지자를 저자로 보는 데는 큰 이견이 없습니다.

(2) 내적 증거 : 본문에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1:1)이라고 선언이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기록자 미가에 대한 정보가 역사적으로 많지 않습니다. 단지 모레셋 출신이라는 것, 그가 활동한 시기가 본문에 소개된 데로 ‘유다의 왕들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였다는 것, 그리고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는 것 외에는 다른 정보가 없습니다.  
 

 역사적 배경

미가의 활동 시기는 본문을 근거로 역사를 거슬러 산출해보면, 대략 BC 735에서 700년 사이로 볼 수 있습니다. 선지자 호세아(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와 아모스(웃시야/여로보암 2세)보다는 조금 늦은 시기입니다.

역사적인 배경은 주전 8세기로 올라갑니다. 앗수르 제국이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함에 따라 지중해 국가들의 토대와 정치적 안정이 흔들리는, 대 변동과 위기의 시기였습니다.

앗수르의 세력 확장으로 인해, 미가가 활동하고 있는 유다도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열왕기상 17-19장에서 서술된,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앗시리아의 공격은 예루살렘 멸망을 전망하는 본문(3:9-12)과 미가의 고향에 대한 위협(1:8-16)에 직간접인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산헤립의 군대장관 랍사게가 ‘민족의 신들 중에 어느 한 신이 그의 땅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진 자가 있느냐?’(열왕기하 18:33)라고 도발했는데, 이에 대해 미가는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미가서 7:18)라고 강하게 대답한 것처럼 울려 퍼집니다.

암울하고 불안한 역사적 상황은 이미 황폐해진 사마리아와 유다 곳곳의 참상과 함께 미가서 곳곳에 배어 있는 슬픔과 고통의 부르짖음의 근거가 됩니다.

 

미가서 구성

◇ 미가서는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미가서 전문에서 ‘들으라’는 단어는 두 번 나옵니다(1:2; 6:1). 그것을 기준해서 두 부분으로 1-5장과 6-7장으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1) 미가서 1-5장 : ‘들으라’는 명령과 함께, 여호와께서 자신의 민족에 대한 증인으로 등장하며
2) 미가서 6-7장 : ‘들으라’는 또 다른 명령과 함께, 자기 백성에 대해, 이어서 모든 민족을 대상으로 여호와께서 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변론을 요구한다.   

 

미가서 메시지

(1) 사회 지도층에 대한 고발

미가서에서 나타난 메시지의 특징 중 가장 주장된 메시지는 사회 지도층에 대한 고발입니다. 미가는 국가의 부패를 사회 종교지도자들의 탓으로 보았습니다. 특히, 3장에 나타난 ‘야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 그리고  7장의 ‘지도자와 재판관 그리스도 권세자’의 타락한 모습은 오늘의 현실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2)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확실한 심판을 예언

이러한 타락한 모습은 하나님 심판의 근거가 됩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사마리아가 멸망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미가서 1:6;이사야서 7:8-9;아모스서 3:12-14 참고). 그러나 미가는, 자기 시대에 예루살렘이 안전할 것을 약속했던 이사야와는 달리, 사마리아가 멸망할 것(3:12)과 백성들이 포로가 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1:16).

(3) 회복과 메시야의 평화의 통치

그럼에도 미가는 언젠가 하나님께서 신실한 소수, 또는 그의 백성 가운데 ‘남은 자’를 일으키시리라고 예언합니다(2:12-13; 5:7-8). 미가와 이사야는 사실상 같은 용어를 가지고 여호와의 평화의 우주적 통치를 드러낸다(4:1-4;이사야서 2:1-4). 미가는 이런 메시야적 희망에다 베들레헴에서 나올 하나님의 백성의 통치자에 관한 예언을 추가합니다(5:2-5; 또한 마 2:6; 요 7:42 참고). 미가서의 절정과 결론은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은 심판이 아니라 자비라는 것입니다(7:18-20).

 

미가서의 구조

1. 미가서의 표제(1:1)

2. 이스라엘과 유다에 임박한 심판(1:2-16)

(1) 백성들의 주의를 환기시킴(1:2)
(2) 여호와의 도래에 대한 선포와 묘사(1:3,4)
(3) 유다의 죄를 대표하는 예루살렘의 죄(1:5)
(4) 무서운 결과(1:6,7)
(5)심판에 대한 미가의 환상(1:8-16)

3. 악인에 대한 심판(2:1-3:12)

(1) 땅을 빼앗는 압제자에 임하는 재난(2:1-5)
(2) 설교하는 도적들(거짓 선지자)(2:6-13)

① 참 선지자의 설교를 방해함(2:6)
② 여호와의 신이 편협하다고 거짓 설교함(2:7)
③ 불안한 생활 문제 (2:8-13)

(3) 거짓 지도자들에 대한 비난(3:1-7)

① 미가의 답변(3:1)
② 사악한 압제자들(3:2,3)
③ 여호와께서 듣지 아니하심(3:4)
④ 더욱 악한 거짓 선지자들(3:5)
⑤ 불신당함(3:6,7)

(4) 성령의 능력에 대한 미가의 자각(3:8)
(5) 죄악은 수치임(3:9-12)

4. 오시는 메시야를 통한 회상적 환상(4:1-5:15)

(1) 예루살렘의 최후 승리(4:1-5:1)

① 참 신앙의 부흥과 여호와께로 돌이킴(4:1,2)
② 평화와 번영(4:3-5)
③ 포로에서의 귀환 약속(4:6,7)
④ 예루살렘이 더 큰 영광과 능력으로 회복됨(4:8)
⑤ 고난 후의 구속(4:9,10)
⑥ 원수들이 하나님의 그 백성에 대한 변호를 보게 됨(4:11,12)
⑦ 포위 당한 후의 승리(4:13-5:1)

(2) 오실 메시아의 베들레헴 탄생과 야곱의 남은 자의 회복(5:2-15)

①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메시야(5:2,3)
② 메시야의 은혜로운 통치(5:4-7)
③ 위대한 정복자가 될 영적 이스라엘(5:8,9)
④ 믿고 의지하던 것을 빼앗긴 영적 이스라엘(5:10-15)

5. 여호와의 논쟁(6:1-7:20)

(1) 여호와의 첫 번째 쟁변(6:1-5)
(2) 이스라엘의 첫 번째 답변(6:6-8)
(3) 여호와의 두 번째 쟁변(6:9-16)
(4) 이스라엘의 두번째 답변(7:1-10)
(5)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축복(7:11-13)
(6) 이스라엘에 대한 마지막 탄원(7:14-17)
(7) 여호와의 은혜의 승리(7:18-20)

① 용서하시는 여호와(7:18)
② 구속하시는 여호와(7:19)
③ 신실하신 여호와(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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