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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04-02)

   


사도 바울의 마지막 부탁

디모데후서 4장 9-22절


바울의 사역은 탄탄대로가 아닌 여러 고비가 많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하셨지만, 그렇다고 항상 그를 돕는 손길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려움과 외로운 과정도 있었습니다. 지금 편지를 받는 디모데의 도움이 절실한 정도로 그는 곤란한 상황이었습니다. 그의 사역에 대한 다양한 반응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디모데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을 위임한 바울은 이제 죽음을 앞둔 자신의 마지막 부탁을 말합니다.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떠나고 외로움 가운데 있던 바울은 죽기 전에 디모데를 한 번 더 보기 원했습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겨울의 추위를 대비해서 드로아에 두고 온 겉옷과 책을 가지고 오라고 부탁합니다.

 

디모데에게 속히 오라고 부탁함(9-13)

‘교인은 많지만 성도는 적다.’란 말이 있습니다. 진실한 믿음의 성도를 분별할 수 있는 것은 어려움을 통해서 구별할 수 있습니다. 바람을 통해 알곡과 쭉정이가 구별됩니다. 알곡은 남아있지만, 쭉정이는 멀리 날아가 버립니다. 바울 곁에 있던 사람들도 동일했습니다.

9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10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11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12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13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9-13)

고난이 닥쳐오자 주변 모든 사람들이 하나씩 떠났습니다. 쓸쓸하고 외로움 가운데 있던 바울은 차디찬 로마 감옥에서 최후에 순간을 기다리는 노사도의 숙연함이 잘 들어나고 있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디모데를 한 번 보기를 원했습니다.

⑴ 모두 떠나고 홀로 있는 바울(9-10)

바울은 노년에 인생의 무상함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젊었을 때 힘 있게 복음을 전할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바울 주변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감옥에 갇혀 더는 세상적인 소망이 없게 되자, 그렇게 많던 사람들은 바울을 버리고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을 떠난 자들 중에는 바울을 배신한 자들도 있고 바울이 보낸 자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누가만 그와 함께 남아있었습니다. 바울은 죽기 전에 디모데를 보기 원하는 마음을 피력합니다. 바울의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는 말에서 디모데를 보기 원하는 간절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디모데가 에베소 교회의 사역을 두고 바울에게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속히 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라고 부탁합니다.

 

10절을 보면 디모데에게 속히 오라고 말한 이유를 짐작하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떠나고 바울은 외로운 가운데 있습니다. 젊어서 복음을 위해 담대하게 일했던 바울도 이제 죽음을 앞두고 연약한 한 인간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홀로 된 것도 외로운 일이지만, 그보다 더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배신하고 떠난 일입니다. 바울을 배신한 것은 믿음을 배신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데마’는 바울의 동역자였지만, 그는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떠났습니다. 데마가 데살로니가로 간 것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간 것인데, 그것은 믿음을 버리고 과거의 세상적인 삶으로 돌아간 것을 의미합니다. 혹자는 ‘데마’가 복음을 전하다가 겁을 먹고 데살로니가로 도망한 것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그레스게’와 ‘디도’는 바울을 배신하고 떠난 것이 아니라, 바울이 임무를 부여하여 다른 곳으로 보냈습니다. ‘디도’는 원래 그레데 섬에 남겨두었으나 얼마 후에 그를 불러들이고 아테마를 대신 그곳으로 보냈습니다(디도서 3:12), 바울은 두기고를 에베소로 보내고 대신 디모데로 하여금 바울에게로 오게 했습니다(디모데후서 4:12)

⑵ 마가와 함께 책을 가지고 오라(11-13)

바울은 디모데가 올 때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부탁합니다. 마가는 요한이라고 불리는 사람인데, 한때 바울을 실망시켰지만 지금은 바울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제1차 전도여행 때에 바나바와 함께 떠나면서 마가를 데리고 갔습니다. 어떤 이유인지 마가는 밤빌리아에서 중도 하차하여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제2차 전도여행에서 바나바는 다시 마가를 데리고 가려고 했으나, 바울은 중도에 하차한 마가를 다시 데리고 갈 수 없다고 반대했습니다. 바나바와 크게 다툰 후 결국 바울과 바나바는 헤어졌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갔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육로로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사도행전 15:36-41). 그러나 그 후에 바울과 마가는 서로 화해하고 마가는 바울의 사역에 동참했으며, 바울과 함께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골로새서 4:10; 빌레몬 24). 전승에 따르면 마가가 마가복음을 기록했으며,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가는 한 번의 실수를 거울삼아 신실한 복음의 일꾼으로 거듭났으며 바울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두기고는 바울의 형제이며 신실한 일꾼입니다(에베소서 6:21; 골로새서 4:7). 두기고는 아시아 출신이었기에, 디모데를 대신해서 에베소로 보낸 것은 적절한 선택입니다(사도행전 20:4). 바울은 두기고가 도착하는 대로 디모데가 오기를 원했습니다. 디모데가 올 때 드로아에 있는 가보의 집에 들러서 겉옷과 책을 가지고 오라고 부탁합니다. 이는 바울이 스페인에 다녀온 후 그레데와 에베소를 거쳐서 로마로 돌아올 때 두고 온 것들입니다. 책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추측컨대 성경일 것입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떠나고 외로운 때에 주의 말씀과 함께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려고 합니다.

 

바울을 대적한 자들(14-18)

우리가 항상 바라봐야 할 이는 주님 한 분입니다. 주님께 초점을 맞추고 살아갈 때, 어떤 사역이든지 감당할 수 있습니다. 사명을 주신 주님은 또한 감당할만한 능력까지 주실 것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힘과 건강을, 어떤 이에게는 물질이나 사회적인 지위를 주셨습니다. 그 능력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 나라를 위해 사용될 것입니다.

14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15너도 그를 주의하라 그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16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17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18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14-18)

교회 안에 있으면서 바울의 가르침을 심하게 반대하여 어려움을 준 알렉산더를 특히 조심하라고 경계합니다. 그의 영향력이 크다고 할지라도 낙심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의로운 재판장이 다 알고 계시고 행한 대로 갚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⑴ 알렉산더를 주의하라(14-15)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악한 대적자를 주의하라고 디모데에게 경고합니다. 구리장색 알렉산더는 바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주었던 거짓 교사입니다. 본문에서 ‘해를 많이 입혔으매’란 ‘밀고하다’란 어원입니다. 주석가들은 바울이 감옥 두 번 투옥되었는데, 그 중에 2차 투옥은 알렉산더의 밀고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는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반대하도록 주동했습니다. 그는 얀네와 얌브가 모세를 대적했던 것처럼 알렉산더는 바울을 대적했습니다. 알렉산더는 믿음과 양심을 버린 배신자이며, 급기야 바울은 그를 출교 조치했습니다(디모데전서 1:20). 그러나 여전히 에베소 교회에서 영향력은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모세를 대적했던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셨듯이, 알렉산더도 심판하실 것이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에게도 알렉산더를 조심하라고 당부합니다.

⑵ 재판정에 홀로 서게 된 바울(16-18)

거짓 교사 알렉산더에 대해서 잠시 언급했던 바울은, 다시 자신의 외로운 상황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바울이 처음에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나서서 바울을 변호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모두 바울을 버리고 떠나고 아무도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내리고 떠났다’는 말은 10절에서 데마가 나를 버리고 떠났다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데마가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과 믿음을 배신하고 떠났듯이, 이들도 바울을 배신하고 떠난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배신하고 떠난 자 때문에 심히 아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그 허물을 돌리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바울의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알렉산더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 것과 아주 대조적입니다.

바울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버리고 떠났지만 주께서는 결코 자신을 떠나지 않으시고 함께하셨다는 사실에 대해서 위로를 받습니다. 세상에는 영원한 참된 친구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떠나 홀로 외롭고 두려운 가운데 있었지만, 주께서 함께하셨기에 담대하게 감옥에서 복음을 변증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이방인 권력자와 재판장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다’는 말은 아마도 당장 죽임을 당하지 않고 디모데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에 대한 설명일 것입니다.

바울은 결국 감옥에서 순교하게 되지만, 그들 앞에서 복음을 온전히 전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키셨습니다. 바울은 또한 지금까지 자신을 지켜주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모든 악한 일에서 건지시고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해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마지막 순교를 앞두고 끝까지 은혜로 지켜주실 것이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끝인사(19-22)

인생의 마지막에 기억나는 사람들은 역시 충성스러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생애 가운데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축복을 전하는 메신저가 되어야 합니다. 연약한 자를 돌아보고 배려하게 하시고, 누군가의 생애 최후에 따뜻한 기억으로 남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사역에서 가장 소중했던 이름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19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 20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러 있고 드로비모는 병들어서 밀레도에 두었노니 21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다 네게 문안하느니라 22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19-22)

아무도 복음을 위한 바울을 변호해주지 않고 떠났지만 바울은 그들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주께서 변호인이 되어 바울 곁에 서서 그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근신의 영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굴복하지 않고 복음 전파자의 사명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⑴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안부를 전함(19-20)

바울은 마지막으로 아는 사람들에게 문안 인사를 전합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글라우디우스 시대에 로마에서 쫓겨난 후 고린도에 와서 바울과 함께 텐트를 만들었으며, 나중에 바울과 함께 에베소로 가서 거기서 머물렀습니다(사도행전 18:2).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을 사람들’(로마서 16:3-4)이라며 바울이 극찬할 정도로 특별한 애정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에라스도’와 ‘드로비모’는 바울의 동역 자들이었지만, 지금 그들은 바울과 함께 있지 않습니다. 특히 드로비모는 병들어서 밀레도에 두고 왔다고 말하는데 그를 향한 바울의 안타까운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⑵ 로마에 있는 형제들이 디모데에게 안부(21-22)

마지막으로 바울은 겨울 전에 속히 오라고 한 번 더 디모데를 독촉합니다. 그리고 로마 교회의 성도들 중에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를 비롯한 모든 형제들의 문안 인사를 전합니다. 아마도 디모데가 이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겨울 전에 속히 오라는 말은 두 가지 필요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째, 겨울이 오기 전에 바울의 겉옷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둘째, 겨울이 되며 항해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에 그 전에 속히 출발하라는 뜻입니다.


결국 복음의 일꾼들은 끝까지 곁에서 변호해주시고 증인이 되실 예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위로와 격려도 힘이 되고,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위로가 큰 힘이 됩니다. 현실에서 실제적인 필요를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여 끝까지 감당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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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04-01)


디모데에게 하는 바울의 명령

디모데후서 4장 1-8절


‘유언’은 죽어가는 사람들이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남긴 부탁입니다. 당신은 ‘유언’을 남긴다면 무슨 말을 남기고 싶습니까? 바울에게는 오늘 본문이 사실상 유언입니다. 가장 남기고 싶은 것들,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남겼을 것입니다. 가장 미더운 사람에게 남겼을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앞부분 3:16-17에서 성경의 교육적인 기능과 능력에 대해서 설명했는데, 그것은 복음 선포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이제 디모데에게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고 명령합니다. 지금까지는 바울이 그 일을 감당해왔지만, 이제 디모데가 이어받아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디모데에게 주는 바울의 명령(1-5)

하나님의 말씀에는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지혜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주는 유일한 능력이며, 하나님의 사람들을 바르게 하여 선을 행하기에 온전한 사람들이 되게 하는 것이라면 마땅히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1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4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5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1-5)

복음 전도자는 말씀을 들은 청중들을 기쁘게 하기보다 심판하실 그리스도만을 유일한 청중으로 모시고 받은 말씀을 가감 없이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께서 다시 오셔서 완성하실 그 나라 백성에 어울리도록 전하라고 엄히 명령합니다.

⑴ 말씀을 전파하라(1-2)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이 사람을 바르게 하여 선을 행하기에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라면, 디모데는 마땅히 그것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복음 선포 사명과 명령을 엄중히 부여하고 있습니다. ‘엄중하게 명령한다’는 것은 맹세와 함께 명령한다는 뜻입니다. 경기를 앞둔 운동선수가 공정하게 규칙을 지키면서 경기하겠다고 선서하듯이, 바울은 디모데가 맹세하게 하면서 명령하고 있습니다. 맹세를 할 때는 그걸 증명할 어떤 사람 앞에서 하든지 혹은 무언가를 걸고 합니다. 바울은 맹세의 신실함을 증거할 증인으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재림, 하나님의 나라를 제시합니다.

이것은 디모데에게 주어진 복음 선포 사명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명령한다는 것은 복음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분으로 묘사되는데, 이것은 디모데에게 주어진 사명의 엄중성을 더욱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언급은 디모데가 선포하는 복음이 지금 이 세상에 관한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며, 복음의 미래지향적인 특징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것이지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기 위한 것이 아입니다(디모데후서 4:18). 그러므로 디모데는 이 세상에서 복음으로 인해 고난 받는 것에 대해서 너무 슬퍼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2)라고 다섯 개의 명령법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모두 디모데에게 주어진 복음 선포의 성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먼저, 말씀을 ‘전파하라’는 명령은 복음 선포에 대한 가장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사명입니다. ‘힘쓰라.’는 명령은 항상 준비된 상태로 있으라는 뜻이며, 언제든지 복음을 선포할 태세를 갖추고 있으라는 의미입니다. 이 준비 태세는 때와 관련이 있습니다. 디모데는 복음을 선포하기 좋은 때만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기 힘들고 어려운 때에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어려운 때는 아마도 3-4절과 같은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것입니다. ‘경책하라는 명령은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하여 교정하라는 뜻이 있는데,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과 행위를 염두에 둔 것입니다. ‘책망하라’는 명령은 좀 더 일반적인 불순종에 대한 책망입니다. 마지막으로 ‘권하라’는 명령은 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측면에서 성도들이 행해야 할 올바른 길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명령은 3:16에서 말한 성경의 역할에 대한 재설명입니다. 따라서 복음 선포에 대한 바울의 명령에는 다음과 같은 논리적 연관성이 있습니다. 복음을 선포하여 가르치되, 잘못된 길을 가는 자들은 경책하여 돌이키게 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은 책망하여 올바른 길을 가도록 권면하는 것입니다.

⑵ 말씀 전파에 힘써야 할 이유(3-4)

바울은 2절에서 명령한 것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떼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써 복음을 전하고, 경책하고, 책망하여, 권면해야 할 이유는 앞으로 사람들이 복음의 진리를 붙들기 싫어하고 이단적인 가르침을 따라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사람들의 탐욕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미 말세의 특징으로 사람들이 더욱 탐욕적으로 변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디모데후서 3:1-5). 탐욕적인 사람들은 복음의 진리를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따라 사는 것은 핍박과 고난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탐욕을 채워줄 거짓 교사들의 허탄한 이야기를 더욱 듣기 좋아하고, 그것을 따라갈 것입니다. 허탄한 이야기는 인간의 세속적인 욕망에 부합하는 이단적인 가르침을 말합니다. 그것은 가려운 귀를 시원하게 해주는 것처럼 탐욕적인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들릴 것입니다.

⑶ 신중하게 직무를 감당하라(5)

바울은 노파심에서 다시 디모데를 염려하고 있습니다. 디모데가 성도들을 잘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디모데 자신이 허탄한 이야기에 미혹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모든 일에 신중하라’는 명령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따라가는 것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니란 사실을 기억하고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고난을 받으라’는 말은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는 번역입니다. 이것은 고난을 견디라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일부러 고난을 택해서 받을 필요는 없지만 고난이 있을 때는 견뎌야 됩니다. 고난을 견디라는 것은 디모데후서에서 바울이 반복적으로 강조했던 것입니다. 신중하게 고난을 견디면서 복음 선포의 직무를 다하라는 명령은 에베소 교회의 거짓 교사들을 상대해야 하는 디모데에게 아주 적절한 권면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경건의 모양을 가지고 있었기에 성도들이 잘 속았으며, 그들은 무정하고 모함하며 사나운 자들이었기에 디모데가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디모데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신중함과 인내입니다.

 

바울의 유언적 고백(6-8)

사역의 마지막은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인정받느냐가 아니라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다고 하면 두려울 것이 없고, 예수님을 전하는 복음이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심판이 있고 예수님께서 이루신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유언 같이 말씀으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6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7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6-8)

바울은 평생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후회 없이 싸웠습니다.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신앙의 경주에서 멈추지 않고 끝까지 완주하였습니다. 네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참된 재판장임을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의 마지막을 알리고 있습니다.

⑴ 바울이 죽음을 예감함(6)

바울이 디모데에게 명령한 모든 것은 사실 지금까지 바울이 해왔던 일입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직감하고, 이제 자신의 사역을 디모데에게 넘겨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전제와 같이 다 부어진 인생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구약의 제사 제도에서 나온 표현인데, 복음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자신의 삶을 드러냅니다. 바울이 로마서 12:1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⑵ 바울의 삶에 대한 회고(7)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 전력투구한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면서 운동선수의 삶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전제로 부어진 삶의 비유가 헌신과 희생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이라면, 운동선수의 비유는 5절에 있는 ‘네 직무를 완수하라는 말을 상기시킵니다. 선한 싸움은 경기에서 이기기 위해서 투쟁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마라톤 경기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미 자신이 달려가야 할 모든 코스를 완주했습니다. 운동 경기는 법대로 해야 하는 것인데, 바울이 지켜야 했던 법은 믿음입니다.

그는 믿음을 지키면서 모든 경기를 마쳤기에 승리의 면류관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열심히 일했지만 믿음을 버린 자들입니다.

⑶ 의의 면류관을 기대함(8)

자신이 살아온 과거를 회상한 바울은 이제 자신 앞에 놓여있는 미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는 선한 싸움을 싸웠고, 믿음을 지켰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했기에 의의 면류관이 자신을 위해 예비되어 있다고 확신합니다. 경기의 심판자는 주님, 즉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디모데후서 4:1). 그는 의로운 재판장이므로 공정하고 의롭게 판단하십니다. 이 세상의 심판들은 뇌물에 매수되어 불의한 판결을 내릴 수도 있지만, 주님은 의로운 재판장이시다. 사실 바울은 지금까지 세상에서 많은 재판을 받으면서 불의하고 억울한 판결을 받은 적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공정하게 판단하셔서 지금까지 바울이 당한 모든 억울함을 한꺼번에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바울에게 감옥은 옹골지고 알찬 신앙으로 창조되는 공간이었습니다. 의의 면류관을 받을 소망을 향해 비상하는 도약대였습니다. 그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부활의 몸을 입고 누리는 참된 ‘자유’와 ‘해방’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편지를 통해 그는 자신의 유언을 실천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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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03-02)

 


경건하게 살아가야할 그리스도인

디모데후서 3장 10-17절


그리스도인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인으로 향기가 있습니다. 종종 전혀 모르는 사람을 만났는데, ‘혹시 목사님이 아니십니까?’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를 아십니까?’라고 반문하면, ‘아니요! 외모에 풍기는 모습이 목사님 같아서 묻는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목회자는 목회의 풍기는 것이 있습니다. 장로님은 장로님의 풍기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집사님은 집사님으로서 풍기는 외모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표지’입니다.

 

바울은 말세에 일어날 거짓 교사들의 불의한 행위의 경고하고, 그들이 결코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말한 후, 이제 자신이 지금까지 어떻게 가르치며 살아왔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거짓 교사들의 행위에서 돌아서라고 했는데, 이제 디모데가 따라야 할 참된 모법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바울을 본받는 경건한 자가 되라(10-13)

본질을 추구하는 삶, 그것은 성경의 진리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결과가 당장 나오지 않더라도,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말씀이 칭찬하면 칭찬을 받고 책망하고 바로 잡아주는 것을 따라 살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경건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10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11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12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13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10-13)

거짓 교사와는 달리 바울은 진리 안에 거한 자신의 삶을 제시합니다. 바울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 그의 사랑과 믿음과 인내의 삶이 그가 진리의 사람임을 증명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바울은 십자가의 예수님처럼 이 땅에서 부귀와 명예 대신에 핍박과 고난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⑴ 고난 중에 인내한 바울을 기억하라(10-11)

거짓 교사들의 이기적이고 정욕적인 행위에 대해서 지적한 후, 바울은 이제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했던 자신의 삶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10-11절에는 바울의 삶에 대해서 묘사하는 아홉 개의 목록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거짓 교사들의 삶에 관한 열여덟 개의 목록과 대조됩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의 교훈과 행실이 어떠했는지 디모데에게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교훈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교훈뿐만 아니라 행실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바울의 행실은 자신이 가르친 복음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짓 교사들의 위선적인 행위와 대조됩니다. 또한 겉으로 드러나는 행실뿐만 아니라 속에 감주어진 의도와 믿음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바울은 거짓 교사들처럼 성도들을 속이려는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의 의도와 믿음은 정직하고 진실합니다. 바울에게는 진실한 믿음이 있었기에, 핍박과 고난 가운데서도 인내와 사랑을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믿음과 인내와 사랑은 목회자가 가져야 할 신앙의 덕목입니다(디모데후서 2:22). 거짓 교사들은 무정하고 잔인하고 포악하지만, 바울은 핍박 가운데 인내하고 거역하는 자들을 사랑으로 가르쳤습니다. 이런 일들은 바울의 제1차 전도여행 때 비시디아의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바울은 극심한 핍박과 고난으로 사망의 위험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구원하셨던 일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만사의 주권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위해 헌신했던 바울을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디모데는 복음을 위해서 고난 받은 바울의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삶을 본받는 것은 디모데에게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렇더라도 바울을 본받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자신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고린도전서 4:11; 데살로니가후서 3:7,9)

⑵ 경건한 자들에게는 핍박이 따라온다(12)

디모데가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감당해야 하는 이유는 경건하게 살려는 자들에게 고난은 반드시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경험한 핍박과 고난의 삶을 일반화해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은 모두 그런 핍박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디모데는 핍박을 이상하게 여기면서 놀랄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경건한 삶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삶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경건한 삶이란 뜻입니다. 예수 밖에는 경건한 삶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고난 받고 죽으셨듯이 바울도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받았습니다. 이제 디모데가 경건하게 살고자 한다면,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을 것을 각오하고 담대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⑶ 악한 자들과 속이는 자들의 특징(13)

바울은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이 박해를 받은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말세에 악한 사람들이 있는데, 이 사람들이 점점 더 악해진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 많은 사람들을 속이는 일들이 교회 안에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본문은 12절과 경건한 사람과 악한 자들이 대조적으로 묘사합니다. ‘악한 자들’은 일반적인 표현이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역하는 모든 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속이는 자들은 악한 자들 중에서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을 염두에 둔 말입니다. ‘속이는 자들’이란 말에는 마술사라는 의미가 들어 있는데, 8절에서 언급한 얀네와 얌브레를 상기시키는 표현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거짓 교사들은 속이는 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12-13절의 경건한 자와 악한 자의 바울과 거짓 교사들의 대조인 셈입니다. 바울은 경기는 자이지만 거짓 교사들은 속이는 자들입니다. 경건한 자의 특징은 핍박과 고난을 받는 것이지만, 속이는 자들은 핍박을 받지 않습니다. 그들은 불의한 세상에 속하여 경건한 자들을 핍박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앞으로 그들이 점점 더 악해져 갈 것이 라고 경고합니다.

1절에서 말한 것처럼 비록 지금이 말세이지만, 고통이 극에 달하는 말세는 앞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들은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는데, 이것은 불의한 자들이 서로 물고 뜯으면서 다투는 악한 습성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디모데후서 2:24).

 

온전케 하는 하나님의 말씀(14-17)

성경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입니다. 누구보다도 우리를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과 인격을 담아 기록하였으니, 그 말씀 앞에 나아가서야 우리를 하나님과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14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15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14-17)

성경 없는 세상에는 ‘선’의 기준이 없습니다. 성경은 바른 삶의 기준을 전달합니다.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빛의 열매는 빛의 자녀요 성경의 사람인 그리스도인만 맺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태도를 가지고 살고 권고합니다.

⑴ 배우고 확신하라(14-15)

이 말세에게 악한 것들이 득세하고 거세집니다. 이런 것들로부터 오염되지 않고 속지 않으려면, 바울은 배우고 확신한 가운데 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현재명령법인 것을 보면 지속적인 행동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는 자들이 잘 속습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이미 배우고 확신하는 가운데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디모데가 해야 할 일은 이미 배워서 알고 있는 지식과 확신 가운데 계속해서 거하는 것입니다. 디모데는 이미 배운 지식만으로도 거짓 교사들의 잘못을 책망하고 성도들을 진리 가운데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중요한 것은 디모데가 핍박에 대한 두려움과 복음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에 그 확신을 잃어버리지 않는 데 있습니다. 거대한 악한 세력과 맞서 싸울 능력이 성경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이미 배운 것으로 인해 확신할 수 있는 이유를 두 가지 제시합니다.

첫째, 디모데는 자신이 누구에게서 배웠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디모데를 가르친 자들이 믿을 만한 인물들이기 때문에 확신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훌륭한 스승 밑에서 배운 사람은 자신의 지식에 대한 자부심과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디모데를 가르친 스승은 그의 어머니 유니게와 외조모 로이스와 바울 자신입니다(디모데후서 1:5-6). 이들은 디모데를 속이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경건하고 진실한 자들이기에 디모데는 자신이 배운 것에 대해 확신해야 합니다.

⑵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16)

디모데가 확신할 수 있는 둘째 이유는, 그가 어려서부터 배운 성경이 가지고 있는 능력 때문입니다. 성경은 디모데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깨닫게 된 성경 지식은 디모데에게 참된 구원의 지혜를 주는 것이기에, 디모데는 자신이 배운 것에 대해 확신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감동이란 하나님 이 바람을 불어 넣으셨다는 뜻인데, 마치 태초에 인간을 만드신 후에 그 코에 바람을 불어넣어 생명을 주신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호흡은 생명을 주고 활동할 수 있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단순한 글자 모음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것은 성도들을 교훈하고 책망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의로운 자가 되도록 교육하는 능력입니다.

⑶ 성경이 기록된 목적(17)

성경이 그러한 교육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어떤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이 성취하고자 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모든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으로 완전히 무장시키는 데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선을 행해야 할 사명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명을 부여하실 때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해주십니다. 성경은 단지 어떤 교리적인 지식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행할 능력까지 줍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모든 도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함으로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주는 것도 성경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세에 말씀을 붙잡으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타락해 가는 말세에 바른 길을 제시한 것은 성경뿐입니다. 성경에서 배우고 성경의 기준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거기에서 지혜를 얻고 능력을 얻어야 합니다. 그래야 시대를 분별할 수 있고,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으며, 그래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성경이 우리를 경건의 능력 있는 자로 빚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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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03-01)

   


마지막 때의 나타나는 현상들

디모데후서 3장 1-9절


하나님의 사람들은 말세에 불의한 자들이 행하는 죄악에 물들지 않도록, 그들의 유혹으로부터 넘어지지 않도록, 그들의 행위로부터 완전히 떠나 돌아서야 합니다.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드는 죄에 대해 어떠한 타협도 안 됩니다.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속성 상 죄를 지을 수 있는 환경에서 돌아서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에 죄를 이기는 것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친분관계와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어떤 것을 제안한다며 또 그런 환경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영혼을 죽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깨끗한 그릇으로 쓰임을 받고 가르치기를 잘하는 종이 되라고 권면했습니다. 이제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과 모습에 대해서 폭로합니다. 디모데는 그들이 어떤 자들인지 정확하게 파악해서 그들로부터 자신과 성도들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종말의 때를 살아가고 있다고 상기시킵니다.

 

마지막 때에 일어날 불의한 일들(1-5)

지금은 끔찍할 만큼 고통스러운 시대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좀 더 편하게, 좀 더 성취하고 누리며 살겠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위장된 거짓 만족이요 남는 것은 고통뿐입니다.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는 성도들은 분별력과 순결함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1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1-5)

어지러운 말세에 성도답게 살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고난은 피할 수 없는 삶의 일부입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의 고통을 호소합니다. 그 고통은 진리를 거절하는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고통입니다. 이 고통스러운 시선을 디모데도 공유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디모데에게 진리 편에서 거짓 진리가 주는 고통을 기꺼이 받으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제 바울은 두려워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어떤 모습이 성도답지 않는 모습으로 피할 것인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⑴ 종말에 대한 예언(1)

지금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 시키고 있습니다. 종말의 시대의 특징을 ‘고통의 때’로 묘사합니다. 종말의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유대적 전통뿐만 아니라 신약성경에도 설명되어 있습니다. 만약 지금이 종말의 시대라면 그리스도인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바울은 말하는 ‘고통’은 성도들은 그 시대를 살지만 그 시대의 풍속을 따르지 않고 거스르기 때문에 겪는 고통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사단에 매어서 스스로 자기 고통을 만들어내는 모든 인류가 겪는 고통이기도 합니다. 이 시대는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 모두에게 고통의 시대인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 재림하시기 전까지 기간인 이 말세의 가장 큰 특징이 될 것입니다. 디모데에게 ‘종말의 때가 곧 이를 것이다’라고 미래 시제로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임박한 것이어서 이미 종말의 시대가 시작된 것과 같습니다.

디모데후서에서의 고통은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자들 때문에 생기는 고통, 즉 진리의 실현 때문에 겪는 고통입니다. 바울은 2-4절에서 종말의 특징인 여러 불의한 일에 대해서 설명하는데, 이는 모두 에베소 교회가 당면한 문제였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런 불의한 행위로부터 돌아서라고 명하는데, 여기서 돌아서라는 명령은 현재 시제입니다. 종말이 현재적인 실재지만 미래 시제로 표현한 것은 종말의 특징인 불의한 일들이 앞으로 갈수록 더 심해질 것임 을 암시합니다. 디모데가 현재 경험하는 불의와 고난은 지금이 종말의 때라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종말의 때가 완전히 도래한 것은 아니며 앞으로 더 큰 고통의 때가 올 것입니다.

⑵ 종말에 일어날 악한 일들(2-4)

바울은 왜 이 시대가 고통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종말의 특징인 불의한 일들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모두 열여덟 개의 악을 열거합니다. 이런 목록은 디모데가 현재 경험하는 에베소 교회의 현실을 반영합니다.

① 자기를 사랑, 돈 사랑(2a)

종말의 특징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기독교의 중요한 덕목이지만 사랑의 대상은 하나님과 이웃입니다. 그러나 불의한 자들은 이기적인 자기 사랑에 집착하여 하나님과 이웃 대신 자신과 돈을 사랑합니다.

자신과 돈에 대한 사랑은 자기 자랑과 교만으로 표현됩니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자신을 드높이는 자랑과 교만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주 경고하신 대표적인 불의한 행위입니다.

② 비방하고 부모를 거역하는 것(2b)

‘비방하고 부모를 거역하는 것’도 이기적인 자기 사랑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기적인 자기애는 다른 사람을 비방하고 부모를 거역하는 행위로 나타납니다.

③ 감사하지도 거룩하지도 않은 것(2c)

‘감사하지도 않고 거룩하지도 않은 것’은 하나님을 향한 불의한 태도입니다. 불의한 자들의 특징은 자신을 향해서는 자랑과 교만으로 다른 사람을 향해서는 비방과 불순종으로, 하나님을 향해서는 감사하지 않고 거룩하게 행하지 않는 태도로 나타난다.

④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않는 것(3)

계속해서 불의한 자들의 특징을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향한 불의가 말의 비방을 넘어 악한 행위로 표출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정함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자연스러운 사랑의 마음조차 상실한 악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⑤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는 것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는 것’은 사탄적인 본성을 가진 타락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모함하며’라는 단어는 2:26의 마귀라는 단어와 같습니다. 마귀의 특징은 속이고 모함하는 것입니다. ‘절제하지 못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여기서는 특히 성적인 정욕을 절제하지 못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6).

⑥ 사나운 것과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

‘사나운 것과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불의한 자들의 난폭하고 악한 본성을 말합니다. 이러한 성격은 결코 지도자의 자질이 아닙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온유함으로 거역하는 자들을 가르치라고 했습니다(디모데후서 2:25).

⑦ 배신하며 조급한 것

‘배신하며 조급한 것’은 사려 깊지 못하고 인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만하고 쾌락을 사랑하는 것’은 2절에서 말했던 자기 사랑과 교만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특히 사랑의 대상이 여기서는 하나님 대신 쾌락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사랑하면서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거룩하고 경건한자가 될 수도 있고, 불의하고 악한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⑶ 종말의 특징인 위선적인 신앙(5)

바울은 악에 대해 열거한 후에 그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라고 권고합니다. 이러한 악을 저지른 자들은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보편적인 모습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돌아서라’고 권고합니다. ‘돌아서라’는 ‘~으로부터 멀어지도록 자신을 돌이키라’는 매우 강한 뜻을 지닌 것입니다. 즉 지금 즉시 그리고 계속해서 그것으로부터 돌이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2-4절에서 언급한 모든 악의 목록들을 행하는 자들을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로 규정합니다. 이것은 거짓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에서 언급한 악의 목록들은 거짓 교사들의 불의함을 드러내는 증거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경건의 모양으로 그러한 불의를 덮고 있습니다. 그들이 겉으로 드러내는 말과 행위는 아주 종교적이고 경건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속에는 복음의 진리가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처럼 겉으로만 경건한 척하는 위선자들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러한 사람들로부터 돌아서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은 지금 디모데도 조심하지 않으면 그러한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위선적인 신앙은 특히 목회자들이 빠지기 쉬운 대표적인 불의입니다.

에베소 교회 내에서 거짓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방향이 잘못된 곳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와 돈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쾌락을 사랑했습니다.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서 돈을 사랑했고, 하나님 없는 영혼의 공허함을 돈으로 채우려고 했습니다. 첫 인류가 하나님을 버린 것도 하나님 밖에서 자기 사랑을 추구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불의를 행하는 거짓 교사(6-9)

진리의 공동체 안에 머물면서도 진리를 외면하면 거짓과 위선이 찾아옵니다. 십자가에 순종하는 삶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참 능력을, 그럴듯한 분주한 활동으로 흉내만 내게 됩니다. 단호하게 인간의 욕심을 지적하고 자기중심성을 버리지 않으면 더 자기 확신이 강한 위선자들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6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7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8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그들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 받은 자들이라 9그러나 그들이 더 나아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이 된 것과 같이 그들의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라(6-9)

모든 관계를 희생하면서까지 자신과 돈을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자기 쾌락을 더 사랑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척하는 위선의 시대입니다. 그런 자들이 다수입니다. 오히려 경건하게 하려고 하는 자들이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이제 말세에 고통을 주는 자들이 어떻게 교회를 유린하고 미혹하는지를 보여줍니다.

⑴ 미혹하는 자들(6-7)

바울은 이제 직접적으로 에베소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짓 교사들의 불의한 행위 중 한 가지를 지적합니다. 그것은 성적인 욕구를 절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의 특징은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주 은밀한 방법으로 자기의 의도를 알아채지 못하도록 집근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겉으로는 성도들을 돌아보기 위해서 방문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다른 목적을 위해서 몰래 들어가는 도적과 같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어리석은 여자들을 유혹하기 위해 몰래 들어갑니다. 어리석은 여자는 단지 지능이 떨어지거나 많이 배우지 못한 여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형적인 분별력이 없는 여자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5:11-15에서 정욕적인 젊은 과부들에 대해서 말했는데, 어리석은 여자는 이런 여자들을 말합니다. 이런 여자들은 오랫동안 정욕으로 인해 음란의 죄를 지어온 여자들입니다. 그들은 죄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아무리 배워도 진리를 잘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여자들입니다.

⑵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8)

바울은 이런 거짓 교사들을 얀네와 얌브레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얀네와 얌브레는 모세를 대적 했던 애굽의 술사들을 가리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보낸 자이지만, 얀네와 얌브레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입니다.

마찬가지로 바울과 디모데는 하나님의 종이지만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일 뿐 결코 복음의 사역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 논리로 무장하고 있어서 사람들이 속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이미 부패해 있었습니다.

디모데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거짓 교사들의 이러한 정체를 정확히 파악해야 합니다. 그들은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이며, 마음이 부패하여 믿음을 버린 자들입니다.

⑶ 그들은 패망할 자들(9)

마지막으로 바울은 이런 거짓 교사들은 결국 오래지 않아 멸망할 것임을 확신합니다. 얀네와 얌브레의 경우처럼 거짓 교사들도 불의한 정체가 곧 드러날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거짓 교사들이 득세해서 많은 성도들에게서 인기를 얻고 있을지 몰라도, 오래지 않아 버림을 받고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갈수록 더 악해질 것입니다. 거짓 교사의 본색이 모든 사람들이 알만큼 명백하게 들어날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을 유혹하고 미혹하지 못할 것이며, 발전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거짓 교사들 때문에 고통당하고 있는 디모데에게는 희망적이고 격려가 되는 말입니다. 따라서 디모데는 거짓 교사들의 일시적인 성공을 보면서 너무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인내하면 결국 진리가 거짓을 이기는 것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역사에 수많은 거짓 가르침이 있었지만, 결국에는 그들은 사라졌습니다. 교회와 진리는 넘어지지 않고 든든히 지금까지 서왔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겪기지 않고 지금도 위세를 떨치는 세력은 번영과 탐욕의 신 바알입니다. 이 시대에 교회들이 할 일은 그 허위를 폭로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더 이상 나가지 못하도록 모든 성도들에게 실상을 알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회 안에서 사단이 축복이라고 하는 미끼를 던지고, 또 그것을 위해서 봉사하는 하수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 시대가 가까우면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 쉽지 않습니다.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면 오히려 바보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더욱 진리를 따라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밤이 어두울수록 빛이 더 빛을 발한 것입니다. 겉을 꾸미려 하지 말고 본질에 충실해야 합니다. 진짜로 믿으면 하나님께서는 세우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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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02-02)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

디모데후서 2장 14-26절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갈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메시지와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특히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더 그렀습니다. 자신 안에 증거가 있지 않으면 미덥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전하는 사람의 인격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찾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바울은 그 일군의 자질을 소개합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두려워하는 디모데에게 용기와 격려를 주었습니다. 이에 반해 2:14-4:8절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주는 실천적이고 목회적인 권면입니다. 이 중에서 본문은 디모데가 불의한 거짓 교사들과 구별되는 복음의 참된 일꾼으로 인정받는 자가 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삶과 말씀에서 구별되어야 했습니다.

 

인정받은 일꾼(14-19)

요즘 이단들이 교회 안에 논쟁을 일으킨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될 수 만 있으면 논쟁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비진리가 교회를 공격해도 조용히 피하란 의미가 아닙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논쟁하지 말라는 것은 어리석고 무식한 논쟁을 버리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14너는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 15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16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17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18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19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14-19)

바울은 앞에서 두려워하는 디모데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목회자 디모데에게 실제적이고 목회적인 권면을 합니다. 불의한 거짓 교사들과 구별되는 복음의 참된 일꾼으로 인정받는 자가 되도록 권면합니다.

⑴ 말다툼하지 말고 진리를 바로 분별하라(14-15)

바울은 먼저 두려워하는 디모데에게 담대하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자가 되라고 격려했습니다. 이제 거짓 교사들을 대하는 실질적인 방법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① 논쟁을 그치라(14)

지금 디모데가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는 성도들 사이에 퍼져 나가고 있는 말다툼을 그치게 하라고 명령합니다. 말다툼의 근원은 거짓 교사들의 헛된 논쟁이었습니다. 그들의 논쟁은 진리를 깨닫게 하는 건설적인 토론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영지주의 이단의 영향으로 진리가 혼탁해지고 왜곡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영지주의란 간단히 말해, 영은 선하고 물질은 악한 것으로 단정하는 이원론적인 사상에 기반을 둡니다. 이 사상에서 두 가지 극단적인 행동이 나오게 됩니다. 하나는 육체를 포함한 모든 물질을 절제해서 영혼의 숭고함을 보호하려는 철저한 ‘금욕주의’이고, 또 하나는 육체의 어떤 타락과 방종도 숭고한 영을 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쾌락주의’입니다. 이런 극단적인 사상은 교회 내에서 물의를 일으키며 사람들을 유혹하였습니다. 때문에 자연적으로 교회 안에는 이런 신학적인 논쟁에 휘말리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상황에서 디모데에게 논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는 디모데에게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여 헛된 논쟁을 하지 말도록 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는 말은 그러한 논쟁은 잘못이며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하라는 뜻입니다.

② 진리를 옳게 분별하라(15)

다만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씀을 옳게 분별하고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힘쓰라고 명합니다(15). 하나님께 인정받는 일꾼의 조건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이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디모데는 배우고 확신한 가운데 거할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디모데후서 3:14).

둘째,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란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사는 자를 가리킵니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께서 드리기를 힘쓰는 자입니다. 아무리 말씀에 대해 지적으로 잘 알고 있다고 해도 삶과 인격에서 경건하지 않은 자는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⑵ 진리에서 떠난 망령된 자들을 경계하라(16-18)

바울은 이제 거짓 교사들이 어떤 자들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먼저 거짓 교사들은 망령되고 헛된 말을 하는 자들입니다. 망령되고 헛된 말이란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말합니다. 그것은 진리의 말씀과 반대되는 말입니다. 망령되고 헛된 말은 성도들을 점점 더 불의한 길로 나아가게 합니다. 복음의 진리에서 벗어난 헛된 말은 불의한 행실로 나아가게 만듭니다. 거짓 교사들의 헛된 말을 바울은 질병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암을 치료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온몸에 퍼져서 생명을 잃게 하듯이 거짓 교사들의 암적인 가르침을 당장 중단시키지 않으면 공동체에 지명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암적인 존재의 예로 후메내오와 빌레도를 언급합니다. 그들은 에베소 교회의 이단적인 지도자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그릇된 종말론과 부활에 대한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영지주의적인 가르침에 물든 자들이며 바울이 선포했던 부활의 교리를 왜곡했습니다. 육체의 부활을 부인하고 영적인 부활을 주장하면서, 자신들은 이미 영적으로 부활한 존재라고 자랑했습니다. 그러한 사상은 육체로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의 중요성과 가치를 소홀히 여기도록 만들고 반대로 정욕적이고 불의한 삶을 살면서도 스스로 영적이며 이미 구원받았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되게 하였습니다.

⑶ 주의 백성답게 불의에서 떠나라(19)

디모데는 자신이 진리의 터 위에 굳게 서 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침을 받은 자라는 사실을 굳게 믿음으로 담대하게 거짓 교사들에게 맞서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침을 받은 증거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들을 알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민수기 16:5를 인용한 것입니다. 반역자 고라가 스스로 제사장의 직분을 취하려고 할 때, 모세가 그들에게 한 말입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인침을 받은 자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둘째 증거는 그가 불의에서 떠난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불의에서 떠나라’는 것도 민수기 16:26에서 온 것입니다. 모세는 회중에게 고라 일당으로부터 떠나라고 명령했는데, 불의한 고라에게서 떠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에 대한 표시가 됩니다.

즉, 19절의 요점은 후메내오와 빌레도 같은 거짓 교사들로부터 떠나는 자들이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후메내오와 빌레도는 고라와 같은 반역자들이며, 그들과 함께하는 것은 고라와 함께 멸망했던 반역자의 일당이 되는 것입니다.

 

깨끗한 그릇에 대한 비유(20-21)

세상에 쓰임을 받기 위해서는 큰 그릇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작은 그릇도 좋으니 깨끗한 그릇이 되라고 하십니다. 작아도 깨끗한 그릇은 쓸모 있지만, 커도 더러운 그릇은 도무지 쓸모가 없습니다.

20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21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20-21)

바울은 그릇에 대한 비유를 통해서 디모데에게 귀하게 쓰임 받는 그릇이 되라고 권면합니다. 귀하게 쓰임 받는 그릇이 되려면, 이단적인 가르침에서 떠나 자신을 깨끗하게 지켜야 합니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귀한 그릇이 되어 모든 선한 일을 위해서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깨끗한 그릇으로 쓰임 받는 자(22-26)

불의를 떠난 하나님의 백성은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고 선한 일을 위해 잘 준비된 귀한 그릇과 같습니다. 그들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믿음, 사랑, 화평을 좇아 사는 삶을 통해 정결함과 거룩함을 지킨 성도입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에 휩쓸리지 않고 진리 안에 거한 성도입니다.

22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23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24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25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26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22-26)

아무도 복음을 위한 바울의 삶을 변호해주지 않고 떠났지만,바울은 그들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주께서 변호인이 되어 바울 곁에 서서 그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근신의 영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일꾼으로 흐트러지지 않도록 건고합니다.

⑴ 깨끗한 마음으로 화평을 추구하라(22)

바울은 디모데가 귀하게 쓰임 받는 깨끗한 그릇이 되기 위해 피해야 할 것과 추구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합니다. 먼저 청년의 정욕으로부터 피해야 합니다. 정욕적인 삶은 거짓 교사들의 대표적인 삶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은 이성적인 판단보다 본능적인 욕구에 따라 행동하기 쉽습니다. 아직 젊은 디모데는 이것을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피하라’는 명령은 ‘도망하라’는 뜻입니다. 마치 나를 사로잡으려고 다가오는 정욕으로부터 도망가듯이 적극적이고 긴급한 태도로 피해야 한다. 대신 추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디모데는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붙잡기 위해서 쫓아가야 합니다. ‘따르라’는 말도 놓치지 않기 위해 추격해서 붙잡으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추구하면서 디모데는 깨끗한 마음으로 주를 부르는 자들과 함께 추구해야 합니다. 혼자만의 거룩과 경건이 아니라, 다른 믿음의 형제들과 함께 추구해야 합니다.

⑵ 어리석은 변론을 버리라(23)

위 14절에서 말다툼하지 않도록 금하라고 했던 것을 상기시킵니다. 그런데 14절은 다른 사람들에게 말다툼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지만, 23절은 디모데에게도 그러한 어리석고 무식한 논쟁을 하지 말라고 명합니다. 그것은 다툼을 만드는 것이지 디모데가 추구해야 할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가져오는 것이 아닙니다.

⑶ 온유함으로 가르치라(24-26)

바울은 목회자로서 디모데가 해야 할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은 가르치는 것을 잘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먼저 다투지 말고 모든 성도들을 온유하게 잘 가르쳐야 합니다. 다투는 것과 온유한 것은 대조되는 덕목입니다. 다툼은 거짓 교사들의 특징이지만, 디모데는 온유함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둘째, 가르침의 대상들 중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거역하는 자들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거역하는 자들도 온유한 마음으로 훈계해야 합니다. 훈계에는 책망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 책망은 미워함과 정죄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온유함에서 나오는 책망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그들이 진리를 깨닫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훈계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잘 가르치는 것은 잘못된 생각에서 깨어나 올바른 길로 가도록 인도하는 일입니다. 마치 술 취한 사람이 술에서 깨어나게 하듯이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들이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은 논쟁을 즐겨하는 자가 아닙니다.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을 삶과 인격으로 살아내는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입니다. 헛된 말들로 진리를 혼탁하게 하는 시대 속에서 무엇보다 하나님께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 되길 원합니다. 누가 하나님께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입니까? 진리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배우는 자입니다. 또한 그 말씀이 삶과 인격 속에 흘러나오는 성령의 지배를 받는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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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02-01)


심는 대로 거두는 법칙

디모데후서 2장 1-13절


옛 속담에 ‘콩 심은 대 콩 나고 팥 심은 대 팥 난다.’고 했습니다. 이런 의미로 성경에서는 ‘자기가 심은 대로 거둔다.’(갈라디아 6:7)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행한 대로 열매를 거두는 법칙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의 법칙도 심는 대로 거둔데,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더 정확하게 평가하시고 합당한 열매를 주실 것입니다.

 

바울은 앞에서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격려했습니다. 이제는 좀 더 적극적으로 담대하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1장이 디모데의 낮은 자신감과 자존감을 회복시키는 말이었다면, 2장에서는 맡은 책임을 담대하게 감당할 수 있도록 사명감을 고취시키는 말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이 되라(1-7)

그리스도의 증인들은 그리스도를 드러냅니다. 그리스도처럼 살면서 보여주어야 합니다. 병사처럼, 경기하는 자처럼, 농부처럼 우직하게 고난을 감내하면서, 결과를 확신하면서, 승리의 순간을 소망하면서 꿋꿋이 살아야 합니다. 그게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게 의미 있는 삶인 것입니다.

1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2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3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4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5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6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7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1-7)

신앙은 영적 전쟁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순간, 영적 전쟁 한복판에 서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단은 성도들을 넘어뜨리려하고 예수님께서는 사단과 싸우는 군사로 부르십니다. 바울은 그 과정을 너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⑴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강해져라(1-2)

디모데는 대적들에 대한 두려움과 복음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담대하게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의 낮아진 자존감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1장에서는 그가 얼마나 훌륭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설명한 후에, 두려워하지 말고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격려했습니다.

이제 좀 더 적극적으로 그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라고 명령합니다. 바울의 명령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이제 더는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해지라는 것입니다(1). 디모데는 마땅히 강해져야 하고 강해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두려워하는 영이 아니라 능력의 영을 은사로 주셨기 때문입니다(디모데후서 1:7). 그런데 강해지는 것은 인간적인 용기와 자신감을 회복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로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담대함의 원천은 그리스도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바울에게서 들은 것을 충성된 사람들에게 맡기라고 명령합니다(2). ‘내게 들은 것’이란 바울이 디모데에게 가르친 복음을 말합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부탁한 복음은 이제 디모데에 의해서 다른 신실한 사람들에게 맡겨져야 합니다. 디모데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계속해서 전파될 수 있도록 신실한 일꾼들을 가르치고 세워서 복음을 맡겨야 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에베소 교회에 남겨둔 목적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디모데전서 1:3).

⑵ 좋은 병사로서 고난을 받으라(3-4)

앞에서 말한 바울의 명령을 감당하는 데는 반드시 고난이 따릅니다. 특히 거짓 교사들과 겨루어 그들로부터 성도들을 지켜야 하는 디모데에게 핍박과 고난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고난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기꺼이 감당하라고 명령합니다. 바울은 세 비유를 통해 고난을 극복하면서 임무를 완수해야 할 필요성을 설명합니다.

첫째 비유는 병사의 비유입니다.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의 병사로 부름 받았습니다. 병사는 마땅히 고난 받을 것을 각오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병사는 고통스러운 훈련을 감당해야 하고, 언제라도 상관의 명령에 따라 피 흘리고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전투에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고난을 두려워하는 자는 병사로 복무할 수 없습니다. 또 좋은 병사는 자기 일에 얽매이지 않고 상관을 기쁘게 하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디모데가 그리스도의 좋은 병사가 되려면,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⑶ 승리하는 경기자가 되라(5)

둘째 비유는 경기자의 비유입니다. 경기자가 상을 받기 위해서는 고통스러운 훈련을 감수해야 합니다. 또 상을 받으려면 합법적으로 경기에 임해야 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훈련을 받고 실력이 있어도 법대로 경기하지 않으면 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는 디모데가 사역을 감당하면서 고난을 받되 합법적이고 옳은 일을 하면서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합법적으로 경기하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속이고 비방하고 거역하고 모함하면서 경기하는 자들입니다. 복음의 참된 일꾼으로 부름 받은 디모데는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디모데가 하나님의 법에 따라 합당하게 경기하지 않으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의 사역에 있어서도 결코 결과를 위해서 부당한 과정이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위해서는 십자가의 방법이 동원되어야 합니다.

⑷ 수고하는 농부처럼 하라(6-7)

복음을 위해서 고난 받는 것에 대한 셋째 비유는 농부의 비유입니다. 바울은 주인에게 고용된 일꾼이나 소작농의 경우를 염두에 두고 설명합니다.

농부가 일하는 목적은 곡식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추수한 후에 곡식을 받을 수 있는 우선순위는 일한 농부에게 있습니다. 이것은 수고한 농부에게 주어지는 대가입니다. 추수는 종종 종말론적인 심판을 상징하며, 곡식은 그 상급에 해당합니다. 농부가 곡식을 얻기 위해서 땀 흘리며 일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듯이 복음의 일꾼들도 자신들에게 주어질 상급을 바라보면서 고난을 인내해야 합니다.

바울은 세 가지 비유를 마친 후에 자신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생각해보라고 말합니다. 깊이 묵상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바울의 비유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실천적인 삶에 적용할 수 있을지 고민하라는 뜻입니다. 이론적인 깨달음과 그것을 실천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말씀을 깨닫는 것은 쉽지만 삶의 현장에서 그것을 적용하여 살아가는 데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디모데 자신과 자신이 처한 상황을 텍스트로 삼아서 묵상하고, 그것을 이 복음에 비추어 해석하는 작업입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이 세 비유를 묵상한다면 하나님께서 디모데가 어떻게 처신할지 깨닫게 하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 받음의 결과(8-13)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죽음에 매어둘 수 있는 세력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오늘 죽으면 다시 살 것입니다. 함께 왕노릇 할 것입니다. 고난 받는 왕, 그게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당장에는 근사하지 않아도 주님이 아시니 괜찮습니다.

8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9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10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11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2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13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8-13)

본문에서는 주의 사역자들이 군사, 경기하는 자, 농부와 같은 자세로 충성할 때, 훗날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게 될 영광이 어떠한 것인지를 밝혀 위로와 확신을 주고 있습니다.

⑴ 복음이 매이지 않게 됨(8-9)

세 가지 비유를 통해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이 어떤 것인지 설명한 바울은 이제 바울 자신이 진실로 그렇게 살아왔다고 말합니다. 그는 말로 명령만 하는 자가 아니라 본을 보인 지도자였습니다.

8-13절은 그리스도의 좋은 병사로, 경기자로 수고하는 농부로 살아온 바울 자신의 삶에 대한 자전적 보고입니다. 바울은 8절에서 복음의 정체성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라’는 말은 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잘못된 메시아 이해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당시엔 다윗의 씨로 오시는 메시아가 원수를 정복하고 영광스러운 승리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 드러난 복음의 진리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고난 받고 죽임을 당한 후에 부활의 영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바울도 복음 때문에 갇혔지만 복음은 매이지 않고 널리 선포되었습니다. 바울의 매임은 실패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좋은 병사로 살아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⑵ 고난 후 구원의 영광(10)

10절은 법대로 경기하는 자가 승리의 관을 얻는다고 했던 5절의 비유를 상기시킵니다. 바울은 복음과 함께 고난 받음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강조했는데, 인내는 복음의 일꾼들에게 요구되는 하나님의 법과 같습니다. 바울은 법대로 인내했고 그 결과 택한 자들이 영광스러운 구원을 받게 됩니다. 택한 자들이 구원을 받는 것은 바울에게 주어지는 승리의 관과 같은 것입니다.

⑶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의 결과(11-13)

복음과 함께 고난 받음에 대한 결론적 진술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면 그의 영광에도 참여하겠지만, 그것을 부인하면 주께서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입니다. 주와 함께 죽는 것은 그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와 함께 부활하는 것은 그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인내하신 것처럼 우리도 인내하면 그의 왕권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진실하고 신실하신 주의 말씀이므로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징징거리지 말아야 합니다. 힘들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 이해할 수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하지만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치러야 할 대가를 알았다는 뜻도 됩니다. 세상에 대해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 그게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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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01-02)


아름다운 복음을 지키라

디모데후서 1장 9-18절


‘죽음의 협곡’이란 영화의 한 장면을 소개합니다. 한 연인이 산을 등반하다가 그만 여자 친구가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로 떨어질 뻔했다가 다행히 줄을 잡았습니다. 줄만 놓으면 깊은 계곡 아래로 떨어져 죽습니다. 하지만 점점 손에 힘이 빠져 떨어지는 죽는 충격적인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이 잡고 있는 줄 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살아가는 동안 얼마나 안전한 삶을 살길 원합니다. 그 안전함에 평가는 그 사람이 잡고 있는 줄이 얼마나 견고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습니다. 성도들은 세상 줄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줄을 잡고 있습니다.

 

바울은 8절에서 디모데에게 부끄러워하지 말고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했는데, 이제 왜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한지를 설명합니다. 바울과 디모데가 복음 선포자로 부름 받은 것은 하나님의 목적과 뜻에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분면하다면,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나 부끄러움을 극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9-10)

어려운 현실만 보면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현실 안에 감추어 놓으신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발견하게 되면 담대해 지는 것입니다. 지금 당하는 고난과 어려움은 무엇입니까? 복음이신 예수님 때문에 부끄러움과 고난을 당한다면, 부끄러워 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상황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계획과 뜻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9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10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9-10)

사람들은 자신이 피해나 고난당한 사실에 대해 부끄러워하며 숨기려 합니다. 특히 믿음이 깊지 않으면 신앙으로 인해 어려움이 닥치면 떠나버리게 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권고했는지 설명합니다.

⑴ 거룩하신 부르심(9)

바울은 먼저 자신이 감옥에 투옥된 사실을 말합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소명에 대해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과 디모데를 복음 사역자로 부르신 것은 그들의 행위에 따라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은혜로 부르셨습니다. 자신의 행위에 따라 부름을 받았다면 그들은 실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바울은 갇혀 있고 디모데는 거짓 교사들 앞에서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상황은 로마의 네로(주후 54-68년) 황제가 기독교인들이 복음 전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기독교를 범법단체로 낙인찍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로마 대 화제 사건을 기독교인의 소행이라고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연장선상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도 인간적으로 볼 때 자랑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십자가의 복음과 감옥에 갇힌 바울을 부끄러워하면서 떠나버렸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실패한 것처럼 보이고 바울도 실패한 것 같아서 디모데도 지금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상황이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라면,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모든 일을 계획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면 지금 당하는 고난의 상황은 실패가 아니라 그의 뜻에 따라 된 일이고 성취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어려운 현실만 보고 두려워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을 보고 담대해지도록 인도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투옥이나 디모데가 두려워하는 현실이 자신들이 무능해서 실패한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마땅히 일어날 일이었고 심지어 은혜였습니다. 그러므로 디모데는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 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⑵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복음(10)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설명한 후 이제 자신들이 전하는 복음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설명합니다. 복음의 위대함을 깨닫는다면 그 복음을 전하다가 받는 고난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하나님의 구속의 복음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완전히 드러났습니다. 그러면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복음은 무엇을 드러냈습니까? 사망을 멸하고 썩지 아니할 영원한 생명을 드러냈습니다. 사망을 멸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죽음의 저주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는 뜻입니다. ‘사망을 폐하신’라는 표현은 사망을 완전한 정복한 결과로 영원한 생명이 드러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듯이 장차 성도들도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5:20-24, 50-54). 이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만을 바라보고 부활하심을 보지 못하면, 복음을 부끄러운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신 예수를 바라본다면 복음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것이 될 것입니다. 디모데는 이 복음의 실체를 정확히 깨닫고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을 위해 부름 받음(11-14)

처음 복음을 전한 사람들은 부끄러워합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하면서도 단순하게 수준 낮은 복음이나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오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구원의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분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11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12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13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14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11-14)

바울은 두려워하는 디모데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사역자인 것과 사역자로서 자부심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더 나가서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자세를 소개합니다.

⑴ 복음의 일꾼으로 세움을 받음(11)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영광스러운 복음을 선포하는 자로 세우심을 받은 것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그는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움을 받았다’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사명에 대한 바울의 자부심을 드러냅니다.

바울은 자신이 행할 사역을 ‘선포자’, ‘사도’, ‘교사’ 등으로 세 가지 측면에서 소개합니다(참고 디모데전서 2:7). 여기서 ‘선포자’는 복음을 전하는 자를 의미하며, ‘사도’는 복음 전파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위임받은 제자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교사’는 기독교 진리를 체계적으로 잘 가르치는 사람을 의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 감옥에서 외롭고 쓸쓸한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의 복음의 선포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매우 자랑스러워하고 있습니다.

⑵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음(12)

바울은 복음 전파자로서 감옥에 갇힌 자 되었지만(8), 그러한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영광스러운 복음의 선포자로 부름 받은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신을 부끄럽게 하실 분이 아니라고 확신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의탁한 것’은 아마 죽음을 앞두고 바울의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의 손에 맡겼다는 뜻일 것입니다. 이것은 10절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바울의 생명을 썩지 아니할 것으로 지켜주실 것임을 확신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혜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있었기에 바울은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죽음조차 바울을 두렵게 할 수 없었는데,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망의 권세를 멸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나타나게 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⑶ 디모데에게 부탁하는 것(13-14)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 설명한 후, 이제 디모데도 그것을 본받으라고 말한다.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라’는 것은 바울이 선포한 복음을 지키라는 뜻입니다.

복음을 가리켜 ‘바른 말’이라고 표현한 것은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반대자들의 가르침이 아무리 그럴듯하고 지혜롭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속이는 것이고 잘못된 것입니다. 바른 진리의 말씀은 오직 바울이 선포한 복음 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가르친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과 사랑으로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7절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는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짓 교사들은 사랑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경건한 척하지만, 사실은 교만하고 비방하고 거역하며 무정하며 모함하는 자들입니다(디모데후서 3:2-5).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14)고 권면하면서 복음이 얼마나 선하고 아름다운 것인지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아름답고 선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을 지키는 것은 단지 인간의 의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합니다. 다시 10절에서 말한 것처럼 성령은 우리게 주신 능력의 영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도우시는 능력으로만 우리는 복음을 온전히 지킬 수 있습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삶의 모범(15-18)

진정한 믿음이란 항상 변함없는 믿음입니다. 악한 사단의 세력들은 끊임없이 믿음을 꺾기 위해 공격과 유혹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진정한 믿음을 변치 않고 굳게 지키기 위해 깨어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라는 견고한 터 위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믿음은 결국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15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느니라 16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17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음이라 18(원하건대 주께서 그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 또 그가 에베소에서 많이 봉사한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15-18)

근신(勤愼)하는 마음이라는 바른 삶을 살고자 절제하고 조심하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굽은 마음을 곧게 하며 악한 마음을 의롭게 합니다. 자신을 항상 돌아보고 가꾸어가며 다른 사람 또한 바른 마음을 가지도록 근신케 하는 마음입니다.

⑴ 바울을 떠난 사람들(15)

마지막으로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과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에 대한 실례를 소개합니다. 디모데가 어떤 모범을 좇아야 하는지는 분명합니다. 먼저 바울을 부끄럽게 생각하면서 그를 버리고 떠나버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버렸다고 말하면서, 대표적으로 부겔로와 허모게네를 거론하고 있습니다.

⑵ 바울을 찾아온 사람들(16-18)

반면에 감옥에 갇힌 바울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찾아와준 사람도 있었습니다. 오네시보로는 에베소 출신이면서 로마까지 와서 바울을 만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감옥에 갇힌 바울을 쉽게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찾아서 바울을 위로하고 격려해주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오네시보로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제 디모데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분명해졌습니다. 오네시보로가 바울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고 또 자신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도리어 열심히 찾아 만났던 것처럼, 디모데도 그리스도의 복음이나 그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마다하지 않은 바울을 그렇게 대해야 합니다. 디모

데는 마음속에 있는 부끄러움과 두려움은 떨쳐버리고 담대하게 바울이 전한 복음을 선포하고 지켜야 했으며, 바울이 걸어간 그 길을 걸어가야 했습니다. 바울을 부끄러워한 것은 사실상 복음을 부끄러워한 것이고, 그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부끄러워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바울 자신에 대한 돌봄이나 관심을 촉구하는 말이 아니라, 디모데가 바울이 전한 복음과 그리스도를 어떤 상황에서도 따르고 신뢰하라는 격려인 것입니다.


복음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준다는 소식입니다. ‘보기에 심히 좋다’하신 하나님의 잔잔한 탄성을 다시 듣게 하겠다는 소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정하는 착한 사람 같이 울어주고 믿어주고 어깨를 빌려주고 잘되기를 빌어주는 가람이 되게 하시겠다는 소식이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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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01-01)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

디모데후서 1장 1-8절


고대 전쟁에서 승전가가 울리면 승리한 군사들에게는 좋은 소식이지만, 패한 군사들에게는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슬픈 소식이었습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이 모두에게 좋은 소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악한 자들에게 시대를 거스르고 지배 체제를 부정하는 세계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조롱과 수치를 당하더라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유언과도 같은 편지입니다. 고난과 어려움 중에 처하면 신앙의 순수함과 열심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이럴 때는 처음 은혜 받았던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현실에 압도당하면 신앙이 약해지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 다시 용기가 생깁니다. 바울은 의기소침한 디모데에게 처음에 하나님께서 주셨던 은사를 기억하고 힘을 내라고 격려합니다.

 

문안 인사(1-2)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을 줍니다. 사망의 문화 속에서 생명이 역사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이고, 그 사망이 끝이 나고 생명이 영원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 영원한 생명을 현재로 가져오신 분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1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2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1-2)

이 서신은 바울이 순교를 앞두고 쓴 최후의 서신입니다. 그는 자신이 복음 전파를 위해 참고 견디었던 수모와 박해를 돌아보면서 후계자인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최후의 권면을 주고자 본 서신을 기록한 것입니다. 당시 서신의 관습에 따라 문안 인사를 하면서 자신을 소개하고 수신자인 디모데에게 축복의 인사를 전합니다.

⑴ 바울 자신에 대한 소개(1)

바울은 자신에 대한 소개에서 세 가지 사실을 강조합니다.

① 사도권의 기원

바울은 사도권의 기원에 대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사도가 되기 위해 인간적인 노력이나 의지의 결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임을 말해줍니다. 이는 또한 그가 전한 복음의 기원과 권위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② 부르심을 입은 이유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에 따라 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바울이 사도로 부름 받은 목적은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의 구원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③ 그리스도의 사역

자신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라고 합니다. 그가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된 것이지만, 보냄을 받은 것은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서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에베소 교회의 거짓 교사들이 복음을 부인하고 율법주의를 가르쳤던 것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원은 그들이 주장하는 율법이 아니라, 오직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주어진다고 말합니다.

⑵ 디모데를 위한 축복(2)

본 절은 이 서신을 보내는 수신자를 밝힘과 동시에, 발신자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더욱, 수신자에게 사도적 축도를 해주고 있습니다.

① 아들과 같은 디모데

바울은 디모데를 향해 부자 관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신뢰하는 선생과 제자 관계를 부자 관계로 표현하는 관습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바울은 단순히 지식만 전달해준 것이 아니라 영적 아비로서의 역할을 온전히 감당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② 은혜와 긍휼과 평강

바울이 디모데에게 사도적인 축복해 주었던 것은, 여기서 ‘은혜’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해 주기 위해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은총을 가리키며, ‘긍휼’은 하나님께서 한없는 사랑과 위로로 죄로 인해 영원한 죽음에 처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불쌍히 여기신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평강’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통하여 구원을 얻은 자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과 심적인 평안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디모데후서에서는 ‘긍휼’이 다른 바울의 서신들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한 단어가 아니라 온갖 어려움을 무릎 쓰고 사역하는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큰 위로를 생각하며 쓴 단어입니다.

 

디모데로 인한 하나님께 감사함(3-5)

동료를 그리워하시는 마음으로 서로 눈물 나게 그리워하고 눈물로 기도해주는 성도와 성도, 성도와 목회자의 관계를 보신다면, 하나님께서도 눈물 나게 좋아하실 것입니다. 믿음과 은사를 가진 자를 세상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 성령을 감당할 세상은 없기 때문입니다.

3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4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5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3-5)

간단한 문안 인사를 전한 후 바울은 자신이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3-4절은 바울의 감사하는 생활 그 자체에 대한 설명이며, 5절은 감사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⑴ 하나님께 감사함(3-4)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면서 많은 시간을 홀로 외로이 보내야 했습니다. 먼저 자신이 감사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설명합니다.

① 하나님께서는 그의 조상 때부터 섬겨온 분입니다. 이것은 유대적인 전통과 그리스도의 복음 사이에 있는 연속성을 강조합니다.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은 결코 조상들의 믿음의 유산을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② 정결한 양심으로 섬겨온 하나님입니다. 이것은 유대적 전통이면 무엇이나 다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정결한 양심으로 섬겨온 신앙만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참 믿음이란 뜻입니다. 거짓 교사들이 율법을 강조하지만, 그들은 정결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아님을 암시합니다.

바울은 그 하나님께 밤낮 기도하면서 감사합니다. 또 기도할 때마다 디모데를 생각합니다.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며’라는 표현과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라는 표현이 연결되면서 바울이 기도할 때마다 디모데에 대한 생각을 빼놓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디모데를 생각하면서 기도하는 이유는 그만 홀로 에베소 교회에 남겨두고 떠나왔기 때문입니다(디모데전서 1:3). 바울은 디모데가 얼마나 어려운 가운데 사역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4절에서 ‘네 눈물을 생각하며 너 보기를 원한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디모데가 지금 얼마나 힘든 상황 가운데 있는지를 드러 내줍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임무를 잘 완수하고 속히 자신을 만나러 와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⑵ 감사의 이유(5)

바울이 기도할 때마다 디모데를 인하여 감사하는 것은 그의 거짓 없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디모데의 ‘거짓 없는 믿음’은 바울의 ‘정결한 양심’과 비교됩니다. 디모데의 진실한 믿음은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물려받은 것입니다. 디모데의 아버지는 헬라인이었으나, 그의 신앙은 유대적 전통을 따른 진실한 믿음을 계승했다. 바울이 정결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겼던 조상들의 신앙을 계승한 것처럼, 디모데도 진실한 믿음의 영적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이렇게 바울과 디모데의 신앙이 유대적인 유산을 물려받은 것이라고 설명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거짓 교사들은 유대적인 전통을 강조하면서 율법주의를 가르쳤지만, 그것은 참된 신앙의 유산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의 유산은 바울과 디모데가 계승하고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도 유대적인 전통을 주장하지만, 사실 그들은 모세를 대적했던 얀네와 얌브레와 같은 자들입니다(디모데후서 3:8).

그들은 유대적인 전통을 주장하지만, 그것은 참된 유대적인 신앙의 유산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진리에서 떠난 자들이며 속이는 자들입니다(디모데후서 2:16-18; 3:13). 그러한 상황 가운데서도 디모데가 진실한 믿음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디모데가 받은 은사를 상기시킴(6-8)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사랑과 능력과 절제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복음을 가지고 죽음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복음이 준 자긍심과 약속 때문입니다.

6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7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8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6-8)

성령님께서는 성도들이 겁쟁이가 되지 않게 해주십니다. 바울처럼 핍박과 죽음 앞에서 생명의 약속을 붙잡고 믿음의 싸움을 싸울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십니다. 바울은 두려워하는 디모데에게 궈면하고 있습니다.

⑴ 네 속에 있는 은사를 생각하라(6)

사도 바울은 여기서 디모데에게 주어진 은사와 사명을 상기시킵니다. 젊은 디모데는 에베소 교회의 대적자들을 상대하면서 두려움으로 인해 자신감을 잃고 받은 은사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잠자고 있는 디모데의 은사가 다시 불 일 듯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디모데가 자신의 믿음과 받은 은사를 다시 기억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의 믿음이 얼마나 훌륭하며, 그가 받은 은사가 얼마나 위대한지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의 변론이 아무리 뛰어나 보여도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여러 고난이나 어려움 때문에 주눅이 들고 자신감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지금 디모데가 그러한 상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디모데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이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큰 은사를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담대하게 사는 것입니다.

⑵ 디모데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7-8)

바울은 6절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불 일 듯 일으키라고 했는데, 이제 그 은사가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디모데에게 주신 은사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은사는 두려워하는 영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영이다. 두려워하는 영이 아니라는 것은 지금 디모데가 거짓 교사들을 상대하면서 두려움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두려움의 영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능력의 영입니다. 아마 디모데는 지금 홀로 에베소에 버려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디모데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능력의 영으로 함께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담대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디모데는 또한 고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사랑의 영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반대자들은 사랑이 있는 자들이 아니라 사나운 대적자들 입니다(디모데후서 3:3,8). 거짓 교사들은 또한 절제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모함하고 절제하지 못하며, 조급하고, 쾌락을 사랑하는 자들이다(디모데후서 3:2-6).

둘째, 디모데가 받은 은사는 주의 복음과 바울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영이다. 복음의 해시 은 십자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사를 받은 자는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도리어 자랑합니다. 디모데는 또한 지금 감옥에 갇힌 바울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이 복음으로 인해 고난 받고 감옥에 갇힌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부끄럽게 생각하면서 그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들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네시보로는 감옥에 있는 바울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주 방문하여 격려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바울처럼 복음과 함께 담대하게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8).

그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합당한 성도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메시지와 십자가의 삶을 사는 메신저를 구분할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그 복음을 따라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따라 사는 삶을 고수하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따라 사는 일이 항상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꽃길만 기다리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어차피 우리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기준이 달라졌으니 세상이 뭐라고 평가하고 푸대접하든, 그것이 사역의 성패, 믿음의 성채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 복음이 생명이니 죽음의 평판을 무시해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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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서론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 디모데후서 서론-


오늘날 많은 신학교를 통해 목회자들을 배출해 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진정한 종인지 의문이 갈 때가 있습니다. 수많은 신학생들을 보면서 과연 그들이 진정한 목회자의 사명감으로 신학교를 다니고 있을까 하고 반문이 들기도 합니다. 디모데후서는 ‘교회와 그리스도의 사역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자격을 구비해야 합니까?’라는 즉, 목회자의 자격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이 질문은 초대교회 시대부터 지금까지도 묻는 질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고 일꾼인지 묻습니다.

 

저자와 기록 연대

(1) 저자

디모데후서의 저자는 전서와 같이 서두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사도 바울입니다.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를 목회서신이라 부릅니다. 왜냐하면 이 세 개의 서신들은 교회의 목회 사역에 관한 원리들과 구체적인 지침들에 관하여 교훈하기 때문입니다.

(2) 기록 시기

주후 62년경에 로마의 옥에서 풀려난 사도 바울은 다시 4차 전도 여행을 떠납니다. 디모데전서와 디도서를 기록한 시기는 바로 이 전도 여행 기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주후 66-67년경, 네로 황제(재위 주후 54-68년) 치하 시 다시 체포되어 수감되었습니다. 이때에 본서를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옥에 갇혀 있던 바울은 자신의 일생이 거의 끝나가고 있음을 의식하면서 본 서신을 기록하였습니다.

(3) 수신자

사도 바울은 본 서를 본 서의 수신자인 디모데전서와 마찬가지로 디모데에게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에베소를 중심으로 아시아 지역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디모데는 어떤 사람입니까? ① 디모데는 ‘하나님께 사랑 받는 자’라는 뜻이며, ② 모친은 유대인 유니게, 부친은 헬라인, 외조모는 로이스(행 16:1;딤후 1:5)이며, ③ 루스드라 출신(행 16:12)입니다. ④ 그는 바울의 제자이며 동역자(행 16:3;살전 3:2)이며, ⑤ 어려서부터 신앙교육을 받았습니다(딤후 3:15). 그리고 ⑥ 에베소 교회의 목회자(딤전 1:3)였습니다.

 

기록 배경

사도 바울은 잠시 동안 자유를 누린 후 재차 체포되었습니다. 그가 석방되었던 기간 동안의 여행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디도서 3장 12절은 그가 니고볼리를 방문하였음을 시사합니다. 거기서 그는 드로아로 간 것이 분명하며 드로아를 급히 빠져나오느라고 그의 집 주인인 가보에게 외투와 책들과 양피지들을 두고 왔었습니다(디모데후서 4:13).

그가 어디서 어떻게 체포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는 것은 네로가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무서운 박해를 가했다는 것과, 바울의 두 번째 감금의 상태는 첫 번째와는 매우 달랐다는 점입니다(사도행전 28장). 그는 이제 로마 감옥에 있는 미움 받는 죄수였고, ‘자신이 빌린 집’에서 재판을 기다리는 피고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이 마지막 편지를 읽을 때 우리는 그가 재판과 분명한 순교에 직면하여 외로움과 가슴 아픔을 느끼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는 ‘누가만 나와 함께 있으며 ...’라고 쓰고 있는데, 이 말은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가능한 한 빨리 그에게로 오라고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14절에 언급된 알렉산더가 사도행전 19장 33절에 나오는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면, 바울이 에베소나 그 근처에서 체포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말하면서 ‘유대인들의 음모’에 대하여 언급하였는데(사도행전 20:19), 아마도 은장색 알렉산더가 이 음모에 관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알렉산더가 우상 제조업자들의 조합에 들어 있었으며, 바울이 전에 에베소에서 도망한 것을 인하여 기분이 상해 있었다고 추정합니다.

디모데는 에베소에서 더 이상 영적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지위를 대신하도록 두기고가 파송되었기 때문입니다(4:12). 아마도 디모데는 에베소 지역을 여행하며 사역을 하는 부흥사로 일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로마로 오기를 기대했던 것이 확실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디모데에게 드로아(4:13)와 에베소(1:16-18)에 가라고 쓰고 있는데, 이 도시들은 로마로 가는 길에 위치한 도시들이기 때문입니다.

 

기록 목적과 주요 내용

⑴ 기록 목적

본 디모데후서는 3가지 동기에서 디모데에게 본 서신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① 사도 바울은 외로운 상태였습니다. 부겔로와 허모게네를 포함한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버렸고(1:15), 데마도 그를 내버려두고 데살로니가로 가버렸습니다(4:10). 바울은 디모데가 에베소에서 로마로 와서 자기와 함께 있어 주기를 간절히 소망하였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동역자’였으며(로마서 16:21), 그는 자식이 아버지에게 한 것처럼, 가까이에서 바울을 섬겼습니다(빌립보서 2:22; 고린도전서 4:17). 바울은 그를 두고 말하기를 ‘이 밖에 내게 없다’(빌립보서 2:20)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를 그리워하여(1:4) 두 번씩이나 속히 오라고 요청하였습니다(4:19, 21).

② 바울은 네로의 박해 기간에 교회의 안전과 번영에 마음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는 디모데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복음을 지키고(1:14),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며(3:14),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고(1:2), 필요할 때면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으라(1:8;2:3)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③ 디모데전서의 마지막 부분과 마찬가지로, 본서의 끝 부분에서도 ‘너희’라는 복수 대명사를 부가하여 에베소 교회의 일반 성도들도 본 서신을 읽고 이해하도록 의도하였습니다.

(2) 주요 내용

①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1장)

디모데후서는 고난에 대해서 많이 강조합니다(1:3-8). 바울은 디모데에게 감옥에 갇히게 된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담대하게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라고 격려합니다(1:8).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는 항상 고난이 동반되고, 신실한 주의 종은 그러한 고난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난 때문에 복음과 바울을 버리고 떠나갔지만 오네시보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1:15-16). 마찬가지로 디모데도 담대하게 고난에 맞서서 좋은 군사처럼, 혹은 운동선수처럼, 혹은 농부처럼 기꺼이 고난을 감당해야 합니다(2:3-6). 바울은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로 그것을 받으라고 말합니다. 고난을 피하지 말고 오히려 승리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적극적으로 맞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위한 고난은 실패가 아니라 영광스러운 승리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난을 당할 때 그리스도를 생각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복음으로 인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했지만, 그 결과는 영광스러운 부활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부금에 동참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고 왕 노릇하게 된 것이기 때문에 복음을 위해 고난 받는 것을 슬퍼해서는 안 됩니다(2:8-19).

② 부끄러움이 없는 진리의 일꾼으로 서라(2장)

바울은 디모데에게 진리의 일꾼으로 굳건히 서기 위해 주의해야 할 몇 가지 사항을 설명합니다. 첫째, 거짓 교사들을 추방해야 합니다.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은 교회를 부패하게 만듭니다. 특별히 부활이 지나갔다고 주장하는 후메내오와 빌레도를 책망해야 합니다(2:17-18). 둘째, 청년의 정욕을 피해야 합니다(2:22). 디모데는 아직 젊은 사람이기에 정욕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 상대에 있었습니다. 특히 거짓 교사들이 공공연하게 행하는 정욕적인 삶에 유혹을 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디모데는 귀하게 쓰는 깨끗한 그릇으로 자신을 항상 준비해야 합니다. 셋째, 무식하고 어리석은 변론을 피해야 합니다(2:23). 거짓 교사들을 상대하면서 그들의 무익한 변론에 말려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온유함과 겸손함으로 그들을 가르치고 훈계해야 하지만 무익하고 어리석은 변론으로 다툼을 일으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③ 종말론적인 경건한 삶을 살라(3장)

디모데는 목회자로서 시대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신실한 일꾼으로 서기 위해서는 시대의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종말에 만연하게 될 불의한 사람들의 행실에 대해서 설명합니다(3:1-9). 거짓 교사들의 맘과 행위는 불의한 삶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디모데는 그들의 행실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불의한 시대를 살아가는 디모데가 자신을 경건하게 지킴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첫째, 바울이 지금까지의 삶을 통해서 보여준 모범을 기억하하고 그것을 본 받는 것입니다(3:9-11). 경건하게 살고자 할 때에는 고난과 핍박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디모데는 그러한 고난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이 과거에 고난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인내했던 것을 기억하고 디모데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둘째, 경건하게 살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배운 복음의 진리에 따라 산아야 합니다.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성경의 진리를 잘 배웠기 때문에 복음의 진리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모데는 더욱 복음의 진리를 배우고 그 가운데 거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으며, 교훈과 책망으로 우리를 의로 교육하며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3:14-17).

 

디모데후서의 구조

Ⅰ. 문안인사(1:1-2)

Ⅱ.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1:3-18)

1. 디모데가 받은 믿음과 은사(3-8)

⑴ 디모데의 믿음으로 인해 감사함(3-5)

⑵ 디모데의 은사를 상기시킴(6-8)

2. 두려워 말고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9-18)

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계획(9-10)

⑵ 우리는 복음을 위해 부름 받음(11-14)

⑶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라(15-18)

Ⅲ. 충성된 주의 종이 되라(2:1-26)

1. 담대한 군사처럼 고난 가운데 인내하라(1-13)

⑴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이 되라(1-7)

⑵ 복음과 함께 고난 받음의 결과(8-13)

2. 부끄러움이 없는 진리의 일꾼이 되라(14-26)

⑴ 헛된 논쟁을 버리고 인정받는 일꾼이 되라(14-19)

⑵ 깨끗한 그릇으로 쓰임 받는 자가 되라(20-26)

Ⅳ. 종말론적인 삶(31-17)

1. 종말에 있을 불의한 자들의 삶(1-9)

⑴ 마지막 때에 일어날 불의한 일들(1-5)

⑵ 불의를 행하는 거짓 교사(6-9)

2. 종말을 살아가는 경건한 삶(10-17)

⑴ 바울을 본받는 경건한 자가 되라(10-13)

⑵ 온전케 하는 하나님의 말씀(14-17)

V. 바울의 고별적인 권면(4:1-18)

1. 힘써 복음을 전파하라(1-5)

2. 죽음을 앞둔 바울의 고백(6-8)

3. 사적인 부탁과 권면(9-18)

⑴ 디모데에게 속히 오라고 부탁함(9-13)

⑵ 대적자들을 경계하라(14-18)

Ⅵ. 끝인사(4: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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