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디모데후서(01-01)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

디모데후서 1장 1-8절


고대 전쟁에서 승전가가 울리면 승리한 군사들에게는 좋은 소식이지만, 패한 군사들에게는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슬픈 소식이었습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이 모두에게 좋은 소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악한 자들에게 시대를 거스르고 지배 체제를 부정하는 세계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조롱과 수치를 당하더라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유언과도 같은 편지입니다. 고난과 어려움 중에 처하면 신앙의 순수함과 열심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이럴 때는 처음 은혜 받았던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현실에 압도당하면 신앙이 약해지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 다시 용기가 생깁니다. 바울은 의기소침한 디모데에게 처음에 하나님께서 주셨던 은사를 기억하고 힘을 내라고 격려합니다.

 

문안 인사(1-2)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을 줍니다. 사망의 문화 속에서 생명이 역사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이고, 그 사망이 끝이 나고 생명이 영원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 영원한 생명을 현재로 가져오신 분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1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2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1-2)

이 서신은 바울이 순교를 앞두고 쓴 최후의 서신입니다. 그는 자신이 복음 전파를 위해 참고 견디었던 수모와 박해를 돌아보면서 후계자인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최후의 권면을 주고자 본 서신을 기록한 것입니다. 당시 서신의 관습에 따라 문안 인사를 하면서 자신을 소개하고 수신자인 디모데에게 축복의 인사를 전합니다.

⑴ 바울 자신에 대한 소개(1)

바울은 자신에 대한 소개에서 세 가지 사실을 강조합니다.

① 사도권의 기원

바울은 사도권의 기원에 대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사도가 되기 위해 인간적인 노력이나 의지의 결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임을 말해줍니다. 이는 또한 그가 전한 복음의 기원과 권위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② 부르심을 입은 이유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에 따라 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바울이 사도로 부름 받은 목적은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의 구원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③ 그리스도의 사역

자신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라고 합니다. 그가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된 것이지만, 보냄을 받은 것은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서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에베소 교회의 거짓 교사들이 복음을 부인하고 율법주의를 가르쳤던 것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원은 그들이 주장하는 율법이 아니라, 오직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주어진다고 말합니다.

⑵ 디모데를 위한 축복(2)

본 절은 이 서신을 보내는 수신자를 밝힘과 동시에, 발신자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더욱, 수신자에게 사도적 축도를 해주고 있습니다.

① 아들과 같은 디모데

바울은 디모데를 향해 부자 관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신뢰하는 선생과 제자 관계를 부자 관계로 표현하는 관습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바울은 단순히 지식만 전달해준 것이 아니라 영적 아비로서의 역할을 온전히 감당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② 은혜와 긍휼과 평강

바울이 디모데에게 사도적인 축복해 주었던 것은, 여기서 ‘은혜’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해 주기 위해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은총을 가리키며, ‘긍휼’은 하나님께서 한없는 사랑과 위로로 죄로 인해 영원한 죽음에 처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불쌍히 여기신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평강’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통하여 구원을 얻은 자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과 심적인 평안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디모데후서에서는 ‘긍휼’이 다른 바울의 서신들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한 단어가 아니라 온갖 어려움을 무릎 쓰고 사역하는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큰 위로를 생각하며 쓴 단어입니다.

 

디모데로 인한 하나님께 감사함(3-5)

동료를 그리워하시는 마음으로 서로 눈물 나게 그리워하고 눈물로 기도해주는 성도와 성도, 성도와 목회자의 관계를 보신다면, 하나님께서도 눈물 나게 좋아하실 것입니다. 믿음과 은사를 가진 자를 세상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 성령을 감당할 세상은 없기 때문입니다.

3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4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5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3-5)

간단한 문안 인사를 전한 후 바울은 자신이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3-4절은 바울의 감사하는 생활 그 자체에 대한 설명이며, 5절은 감사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⑴ 하나님께 감사함(3-4)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면서 많은 시간을 홀로 외로이 보내야 했습니다. 먼저 자신이 감사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설명합니다.

① 하나님께서는 그의 조상 때부터 섬겨온 분입니다. 이것은 유대적인 전통과 그리스도의 복음 사이에 있는 연속성을 강조합니다.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은 결코 조상들의 믿음의 유산을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② 정결한 양심으로 섬겨온 하나님입니다. 이것은 유대적 전통이면 무엇이나 다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정결한 양심으로 섬겨온 신앙만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참 믿음이란 뜻입니다. 거짓 교사들이 율법을 강조하지만, 그들은 정결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아님을 암시합니다.

바울은 그 하나님께 밤낮 기도하면서 감사합니다. 또 기도할 때마다 디모데를 생각합니다.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며’라는 표현과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라는 표현이 연결되면서 바울이 기도할 때마다 디모데에 대한 생각을 빼놓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디모데를 생각하면서 기도하는 이유는 그만 홀로 에베소 교회에 남겨두고 떠나왔기 때문입니다(디모데전서 1:3). 바울은 디모데가 얼마나 어려운 가운데 사역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4절에서 ‘네 눈물을 생각하며 너 보기를 원한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디모데가 지금 얼마나 힘든 상황 가운데 있는지를 드러 내줍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임무를 잘 완수하고 속히 자신을 만나러 와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⑵ 감사의 이유(5)

바울이 기도할 때마다 디모데를 인하여 감사하는 것은 그의 거짓 없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디모데의 ‘거짓 없는 믿음’은 바울의 ‘정결한 양심’과 비교됩니다. 디모데의 진실한 믿음은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물려받은 것입니다. 디모데의 아버지는 헬라인이었으나, 그의 신앙은 유대적 전통을 따른 진실한 믿음을 계승했다. 바울이 정결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겼던 조상들의 신앙을 계승한 것처럼, 디모데도 진실한 믿음의 영적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이렇게 바울과 디모데의 신앙이 유대적인 유산을 물려받은 것이라고 설명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거짓 교사들은 유대적인 전통을 강조하면서 율법주의를 가르쳤지만, 그것은 참된 신앙의 유산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의 유산은 바울과 디모데가 계승하고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도 유대적인 전통을 주장하지만, 사실 그들은 모세를 대적했던 얀네와 얌브레와 같은 자들입니다(디모데후서 3:8).

그들은 유대적인 전통을 주장하지만, 그것은 참된 유대적인 신앙의 유산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진리에서 떠난 자들이며 속이는 자들입니다(디모데후서 2:16-18; 3:13). 그러한 상황 가운데서도 디모데가 진실한 믿음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디모데가 받은 은사를 상기시킴(6-8)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사랑과 능력과 절제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복음을 가지고 죽음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복음이 준 자긍심과 약속 때문입니다.

6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7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8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6-8)

성령님께서는 성도들이 겁쟁이가 되지 않게 해주십니다. 바울처럼 핍박과 죽음 앞에서 생명의 약속을 붙잡고 믿음의 싸움을 싸울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십니다. 바울은 두려워하는 디모데에게 궈면하고 있습니다.

⑴ 네 속에 있는 은사를 생각하라(6)

사도 바울은 여기서 디모데에게 주어진 은사와 사명을 상기시킵니다. 젊은 디모데는 에베소 교회의 대적자들을 상대하면서 두려움으로 인해 자신감을 잃고 받은 은사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잠자고 있는 디모데의 은사가 다시 불 일 듯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디모데가 자신의 믿음과 받은 은사를 다시 기억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의 믿음이 얼마나 훌륭하며, 그가 받은 은사가 얼마나 위대한지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의 변론이 아무리 뛰어나 보여도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여러 고난이나 어려움 때문에 주눅이 들고 자신감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지금 디모데가 그러한 상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디모데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이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큰 은사를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담대하게 사는 것입니다.

⑵ 디모데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7-8)

바울은 6절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불 일 듯 일으키라고 했는데, 이제 그 은사가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디모데에게 주신 은사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은사는 두려워하는 영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영이다. 두려워하는 영이 아니라는 것은 지금 디모데가 거짓 교사들을 상대하면서 두려움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두려움의 영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능력의 영입니다. 아마 디모데는 지금 홀로 에베소에 버려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디모데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능력의 영으로 함께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담대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디모데는 또한 고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사랑의 영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반대자들은 사랑이 있는 자들이 아니라 사나운 대적자들 입니다(디모데후서 3:3,8). 거짓 교사들은 또한 절제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모함하고 절제하지 못하며, 조급하고, 쾌락을 사랑하는 자들이다(디모데후서 3:2-6).

둘째, 디모데가 받은 은사는 주의 복음과 바울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영이다. 복음의 해시 은 십자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사를 받은 자는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도리어 자랑합니다. 디모데는 또한 지금 감옥에 갇힌 바울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이 복음으로 인해 고난 받고 감옥에 갇힌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부끄럽게 생각하면서 그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들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네시보로는 감옥에 있는 바울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주 방문하여 격려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바울처럼 복음과 함께 담대하게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8).

그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합당한 성도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메시지와 십자가의 삶을 사는 메신저를 구분할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그 복음을 따라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따라 사는 삶을 고수하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따라 사는 일이 항상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꽃길만 기다리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어차피 우리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기준이 달라졌으니 세상이 뭐라고 평가하고 푸대접하든, 그것이 사역의 성패, 믿음의 성채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 복음이 생명이니 죽음의 평판을 무시해도 좋습니다.


구독과 광고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