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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14-01)


여호와의 구원 약속과 회복

호세아 14장 1-9절


 

삶에서 우리가 잘못된 길을 걸을 때,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받아주시고, 영혼을 치유해 주십니다. 또한 교회는 하나님의 회복의 메시지를 세상에 전하고, 공동체가 함께 하나님께 돌아와 그분의 은혜를 경험하도록 돕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회개와 회복은 개인과 교회 모두에게 필요한 은혜의 과정입니다.

 

  • 이스라엘이 죄악으로 넘어졌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끝장난 것은 아닙니다.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각자의 결단에 따라 여호와와 새로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집니다. 여호와의 긍휼이 고아 신세로 전락한 자들에게 그분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줍니다.

 

여호와께로 돌아오라(1-3)

회개는 죄로 인해 끊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첫걸음입니다. 이는 단순한 외적인 행동이 아닌, 마음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회개를 통해 우리를 그분께로 돌아오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회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중요한 영적 행위입니다.

 

1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졌느니라 2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거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열매를 주께 드리리이다 3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만든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고아가 주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할지니라(1-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그들의 죄로 인해 엎드러졌으니,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권면하십니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인간이나 우상에게 의지하지 않고, 입술의 열매로 하나님께 참회와 헌신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구원임을 강조합니다.

 

(1) 회개의 요청(1)

 

예언자는 거듭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외쳤지만, 이스라엘은 그분께로 돌아오지도, 그분을 찾지도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완강한 거절이 결국은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초래합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버리고 헛것인 우상을 좇은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 앗수르에 멸망을 당합니다. 호세아는 이미 엎드러진 이스라엘에게 다시금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을 호소합니다. 불순종의 죄로 심판을 받은 이스라엘은 구원이 여호와께 있음을 인정하고 그분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네 하나님’은 심판에도 불구하고 언약관계가 유효함을 시사해줍니다.

 

(2) 회개의 내용(2-3)

 

이스라엘은 전에도 여러 번 여호와께로 돌아왔지만(참조. 6:17:16), 이들의 돌아옴은 제의적 울타리를 넘지 못했습니다. 양 떼와 소 떼를 끌고 성소를 찾아가서 그분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참조. 5:6). 제의적 경건에 사로잡힌 자들에게 예언자는 짐승 대신에 ‘말’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충고합니다. 병행하는 ‘입술의 열매’가 보여주듯이 ‘말’은 고백적 행위를 가리킵니다. 구체적으로는 그분께 불의(죄)의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돌아오면(회개하면) 자동적으로 용서받는 것은 아닙니다. 죄의 용서는 여호와의 은총에 속하는 것으로, 선행하는 용서의 선포가 회개의 문을 열어줍니다. “선한 바”는 뒤따르는 ‘입술의 열매’를 가리킵니다.

여호와께 드려야 할 ‘입술의 열매’로 이스라엘은 자신을 멸망으로 이끈 거짓 믿음과의 단절을 선언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먼저 여호와 대신 앗수르를 정치적 구원자로 섬겼던 ‘불의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내용상 첫 번째의 연속입니다. 이스라엘은 말에 의지했던 정치를 청산해야 합니다. 여호와를 성전에 유폐하고 자신의 군사적 경제적 능력에 의존했던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은 우상숭배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우리의 손으로 만든 것”은 우상의 본질을 보여주는 풍자적 표현입니다. 우상이란 존재는 이스라엘이 제 손으로 만든 값비싼 작품에 불과할 뿐입니다. 돌아옴과 고백은 관계 회복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닙니다. “불의함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졌기에”(1) 이스라엘에게는 용서를 청할 자격이나 권리가 없습니다. 곧,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스라엘이 끊어버렸기에 그분의 동의 없이는 돌아올 수 없습니다. 예언자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고아를 긍휼히 여기시는 그분의 성품에서 찾습니다. 멸망한 이스라엘은 부모가 없는 고아와 다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그분의 공의로운 심판에 넘겨져 고아가 된 이스라엘에게 다시 기회를 제공해줍니다. “긍휼”은 자녀에 대한 어머니의 일방적 사랑으로, 이스라엘은 그분의 긍휼에 매달려 용서와 도움을 구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구원 약속(4-8)

회개는 하나님의 구원 약속을 이루는 필수적인 과정으로, 우리가 죄악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갈 때 회복과 축복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받아주시며, 그분의 은혜에 감사하며 돌아가는 삶이 필요합니다. 삶 속에서 하나님께 돌아가는 결단이 중요하며, 회개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구원과 회복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며 그분의 약속을 붙들어야 합니다.

 

4내가 그들의 반역을 고치고 기쁘게 그들을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그에게서 떠났음이니라 5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6그의 가지는 퍼지며 그의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의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 7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는 자가 돌아올지라 그들은 곡식 같이 풍성할 것이며 포도나무 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 같이 되리라 8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내가 그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4-8)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회개할 때 그들의 반역을 고치고, 사랑과 축복으로 그들을 회복시키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스라엘은 다시 번성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유일한 도움과 보호자가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온 자들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됩니다.

 

(1) 반역의 치료(4)

 

멸망이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이스라엘의 마지막 운명은 아닙다. 고아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고아처럼 절망적 처지에 떨어진 이스라엘에게 마찬가지로 긍휼을 베푸십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돌아오길 가만히 기다리지 않으시고, 적극적으로 움직이십니다. 의사가 되셔서 이스라엘의 반역을 고쳐주십니다. 이스라엘이 당신께로 돌아올 수 있도록 죄에 사로잡힌 마음을 고쳐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새 마음으로 만들어주십니다(참조, 렘 31:33; 겔 11:19; 36:26-27). 이스라엘의 돌아옴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대한 그분의 사랑이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합니다. 긍휼에 근거한 그분의 일방적 사랑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그분의 사랑이 반역한 이스라엘에게 임하였던 그분의 진노를 떠나게 합니다(참조. 11:8-9). ‘반역’과 ‘떠나다’와 ‘돌아오다’(1,2,7)는 동일한 어근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반역하고 떠났던 이스라엘에게 임하였던 여호와의 진노가 떠남으로써 이스라엘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2) 구원의 비유적 모습: 생명의 회복(5-7)

 

여호와께서 반역의 마음을 고쳐주실 뿐만 아니라 풍요로운 삶도 약속해주십니다. 전에 진노하심으로 이스라엘의 생명을 끊으셨던 여호와께서 다시 생명을 허락하십니다. 다양한 비유를 통해 생명의 회복이 인상적으로 표현됩니다. ‘쉬 없어지는 이슬’ 같은 인애로 여호와를 섬기다가(6:4) 그분의 심판으로 ‘쉬 사라지는 이슬’같이 역사의 무대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이스라엘에게(13:3) 여호와께서 이슬과 같이 되셔서 다시 생명의 싹을 틔우게 하십니다. 여호와의 이슬(긍휼과 사랑)에 힘입어 생명력을 회복한 이스라엘은 꽃을 피웁니다. 독초가 돋아(파라흐) 못 쓰게 된 밭이랑처럼 불법과 무법으로 황폐해진 이스라엘(10:4)에 다시 백합화가 핍니다(파라흐). 이른 봄에 빠르게 성장해 꽃을 피우는 백합화처럼 이스라엘은 빠르게 생명력을 회복하면서 무성하게 자랍니다. 또 그 뿌리가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땅 속 깊이 박힙니다. ‘박히다’로 옮긴 히브리어 동사 ‘나카’는 원래 ‘때리다’, ‘치다’를 의미합니다. ‘매를 맞아 그 뿌리가 말라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된 에브라임(9:16)이 여호와의 축복으로 다시 그 뿌리를 땅 속 깊이 박고 크게 번성합니다. 지금은 그 기둥이 잘려 그루터기만 남아 죽은 나무처럼 보이지만, 여호와께서 주시는 이슬을 먹고 생명이 깨어나 다시 그 뿌리가 뻗고 가지가 사방으로 퍼져 감람나무처럼 아름답게 자랍니다. 구원 시대의 시작과 더불어 여호와께로 돌아온 자들에게 다시 복이 주어집니다. 그 그늘이 좋아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분향하며 음행을 즐겼던(4:13)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그늘로 돌아와서 그분의 보호를 받으며 쉼을 즐깁니다. 전쟁과 질병과 폭력과 기근으로부터 벗어나 샬롬의 삶을 누립니다. 구원의 묘사는 즐거움과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포도주에서 그 정점에 도달합니다. 이스라엘은 유명한 레바논의 포도주처럼 최고급 포도주를 생산하는 포도나무가 됩니다.

 

(3) 푸른 잣나무 여호와(8)

 

개역개정의 번역에 따르면 상반절은 에브라임의 고백에 해당합니다. 너무 늦어서 심판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에브라임은 마침내 깨달음에 도달합니다. 우상숭배가 파국적 결말을 초래했음을 인정하고 우상과의 완전한 결별을 선언합니다. 물론 에브라임의 깨달음과 고백은 여호와께서 ‘그들의 반역’을 고쳐주신 결과이지, 그 출발점은 아닙니다. 여호와의 구원 약속이 에브라임으로 하여금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며 바르게 반응할 수 있게 합니다. 여호와와 에브라임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됩니다. 이전에는 에브라임의 기도를 거절하셨던 여호와께서 앞으로는 응답하시고 돌아보십니다.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에게 ‘푸른 잣나무’가 되시고, 에브라임은 ‘푸른 잣나무’ 여호와에게서 열매를 얻습니다. 가나안의 신 바알이 아니라, 사철 푸름과 싱싱함을 간직한 잣나무인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풍요를 주관하십니다.

 

호세아서의 결어(9)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의 길이 옳음을 깨닫고 그 길을 따르며,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삶에 적용하여 축복과 인도하심을 경험합니다. 반면,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의 길을 무시하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 멸망의 길로 갑니다. 지혜로운 자는 단순히 이해에 그치지 않고,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실천합니다. 진정한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행동하는 데 있습니다.

 

9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은 그 길로 다니거니와 그러나 죄인은 그 길에 걸려 넘어지리라(9)

 

호세아의 청자처럼 그의 선포를 기록한 호세아서를 읽는 독자도 양자택일의 갈림길에 놓입니다. 지혜롭고 총명한 의인이 되어 역사와 개인의 운명을 결정하시는 여호와께 순종하며 그분의 말씀을 준행하거나, 또는 미련한 죄인이 되어 자신의 생각과 의지에 따라 살아가거나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돌아오고 회개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회복과 축복의 약속을 강력히 전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치유하시고, 다시 사랑과 축복으로 가득한 삶을 제공하십니다. 우리는 이 약속을 믿고,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결단을 내릴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하나님의 회복의 메시지를 세상에 전하며, 공동체가 함께 하나님께 돌아와 그분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회개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참된 회복과 번영을 가져올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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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13-01)


구원의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의 비극

호세아 13장 1-16절


 

우상숭배는 단순히 형상에 대한 숭배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우상은 물질적인 것, 인간 관계, 심지어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질적 성공이나 사회적 지위, 자아 실현 등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상이 무엇인지 명확히 이해하고, 그것이 우리의 신앙을 방해하고 있는지 자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 이스라엘 지파 가운데 탁월한 지위를 자랑하던 에브라임이 우상숭배의 죄악에 떨어져 멸망을 자초한다. 사람들은 장인들이 만든 신상에 희생제사를 드리고 입을 맞추며 경배를 표한다. 가나안에 정착한 에브라임은 황당하게도 여호와께서 배불리 먹여주시자 교만해져 출애굽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었다.

 

에브라임의 우상숭배(1-3)

이스라엘의 타락은 공동체의 문제였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신앙을 지지하고 격려하며 함께 성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서로 기도하고, 말씀을 나누며, 신앙의 길을 함께 걸어가면서 공동체의 신앙을 강화하고 우상숭배의 유혹을 경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공동체의 지지와 격려는 우리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 신앙을 더욱 굳건히 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1에브라임이 말을 하면 사람들이 떨었도다 그가 이스라엘 중에서 자기를 높이더니 바알로 말미암아 범죄하므로 망하였거늘 2이제도 그들은 더욱 범죄하여 그 은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부어 만들되 자기의 정교함을 따라 우상을 만들었으며 그것은 다 은장색이 만든 것이거늘 그들은 그것에 대하여 말하기를 제사를 드리는 자는 송아지와 입을 맞출 것이라 하도다 3이러므로 그들은 아침 구름 같으며 쉬 사라지는 이슬 같으며 타작 마당에서 광풍에 날리는 쭉정이 같으며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 같으리라(1-3)

 

에브라임 지파가 이전에는 존경을 받았지만, 바알을 숭배하면서 타락하게 되었음을 지적합니다. 그들의 죄로 인해 이스라엘은 파멸의 길을 걷게 되었고, 하나님은 그들이 안개처럼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이 구절은 우상숭배의 결과로 이스라엘이 무가치하게 될 것을 예언합니다.

 

(1) 고발:우상숭배(1-2)

 

축복받은 처음 지위에 대비시켜 북 왕국을 대표하는 에브라임 지파의 파멸적 현재를 고발합니다. 한때 에브라임이 말을 하면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 정도로 그는 이스라엘에서 뛰어났습니다(참조, 창 49:26; 신 33:16). 그러던 에브라임이 언제부턴가 바알을 섬김으로써 죽음을 자초했습니다. 어리석게도 바알과 음란을 즐김으로써 힘과 생명을 상실하고 죽음에 넘겨졌습니다. 이미 사망에 사로잡혔음에도 에브라임은 죄로부터 떠나지 않고 더욱 깊이 죄에 빠져들어갈 뿐이었습니다. 청동을 녹여 신상을 만들고 개인의 취향과 생각에 따라 우상에 금이나 은을 덧입혀 화려하게 꾸밉니다. 장인의 작품에 불과한 신상과 우상에게 희생제사를 드리고 송아지에 입을 맞춥니다(참조. 왕상 19:18). ‘송아지’는 벧엘의 송아지상보다는 이를 모방하여 작게 만든 송아지상을 가리킵니다. 가나안에서 송아지는 바알을 상징했기에 송아지 신상을 매개로 가나안적인 것이 이스라엘의 종교로 은밀하게 침투했습니다.

 

(2) 멸망의 심판(3)

 

우상숭배의 결과는 자손의 번성과 풍요로운 결실과는 전혀 반대였습니다. 여호와의 심판으로 에브라임은 아침 구름이나 이슬같이, 광풍에 날리는 쭉정이나 창문으로 새나 가는 연기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합니다.

 

은혜를 배반당한 여호와(4-6)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지 않기 위해서는 교회 공동체와의 연대가 중요합니다. 서로의 신앙을 격려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공동체 생활을 통해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더욱 굳건히 할 수 있습니다. 서로를 기도하고, 말씀을 나누며, 신앙의 길에서 함께 걸어가는 것이 은혜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됩니다.

 

4그러나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5내가 광야 마른 땅에서 너를 알았거늘 6그들이 먹여 준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르니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이로 말미암아 나를 잊었느니라 7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사자 같고 길 가에서 기다리는 표범 같으니라 8내가 새끼 잃은 곰 같이 그들을 만나 그의 염통 꺼풀을 찢고 거기서 암사자 같이 그들을 삼키리라 들짐승이 그들을 찢으리라(4-8)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신 유일한 하나님임을 상기시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그들을 돌보셨지만, 이스라엘은 배부르고 번영하자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교만해졌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하게 되었음을 경고합니다.

 

(1) 출애굽과 광야의 하나님 여호와(4-5)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는 십계명의 서두(출 20:2)에 나오는 여호와의 자기소개와 거의 일치합니다. 출애굽과 십계명의 결합은 십계명의 준수가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분의 명령이자 새로운 출애굽의 약속임을 시사해줍니다. 십계명의 준수를 통해 이스라엘은 거듭 역사 안에서 여호와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첫 번째 명령이 십계명의 대표로 사용됩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출애굽 사건을 통해 알게 된 하나님 여호와만 섬기면 보장됩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의 구원자 여호와를 생명에 적대적인 광야에서도 경험했습니다. 그분이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선택하셨기에, 이스라엘은 그분만 알아야 합니다.

 

(2) 고발:에브라임의 배은망덕(6)

 

역설적이게도 여호와의 축복이 에브라임을 교만하게 만들어 파탄에 이르게 합니다. 세 개의 동사(‘배가 불렀고’-‘교만하여’-‘잊었느니라’)가 점층적으로 연결되면서 에브라임의 배반을 배은망덕으로 고발합니다. 에브라임은 여호와께서 주신 가나안의 초장에서 꼴을 먹고 배가 불렀습니다. 그러나 황당하게도 여호와께서 주신 땅의 축복이 에브라임을 교만하게 만들었습니다. 척박한 광야에서 여호와께 순종하였던 에브라임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농사를 지으며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되자 구원자를 잊어버렸습니다. 에브라임은 여호와께서 주신 축복을 자신의 능력과 힘의 열매로 착각하고 자신을 역사와 삶의 주인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3) 멸망의 심판선언(7-8)

 

은혜를 배반한 에브라임에게 엄한 징벌이 선언됩니다. 굶주린 사자와 표범처럼 에브라임을 덮치실 것입니다. 새끼 잃은 곰의 비유는 심판이 얼마나 무섭고도 철저하게 집행될지를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새끼를 잃고 흥분하여 사납게 날뛰는 암곰처럼 에브라임을 덮쳐 염통 꺼풀을 찢어발기십니다. ‘염통 꺼풀’은 갈비뼈로 감싸 심장을 보호하는 흉곽을 가리킵니다. 배은망덕에 진노하신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의 가슴을 찢어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으십니다.

 

왕권의 종말(9-11)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의 권력이나 물질적 성공이 아니라, 참된 평안을 주십니다. 환경이나 상황이 어려울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구하고, 그 평안으로 삶의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걱정과 두려움을 아시고, 그분의 평안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매일 기도를 통해 그 평안을 경험하고, 삶의 중심에 하나님을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9이스라엘아 네가 패망하였나니 이는 너를 도와 주는 나를 대적함이니라 10전에 네가 이르기를 내게 왕과 지도자들을 주소서 하였느니라 네 모든 성읍에서 너를 구원할 자 곧 네 왕이 이제 어디 있으며 네 재판장들이 어디 있느냐 11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9-11)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죄로 인해 스스로를 멸망으로 이끌었음을 지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왕을 구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셨으나 이제 그 왕들을 없애버릴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결국, 하나님만이 그들의 참된 구원자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 구원자를 대적하는 이스라엘(9)

 

유일한 구원자 여호와를 대적하고 왕권에 의존하는 이스라엘에게 멸망이 선포됩니다. 도와주시는 분을 적으로 만들었기에 멸망 외의 다른 길은 없습니다. 전쟁은 이스라엘이 그처럼 의지했던 왕과 재판장들의 무능력만 보여줄 뿐입니다. 제 목숨 보존하기에 급급할 뿐, 이들은 적의 침략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하지 못합니다. 완료시제 ‘패망하였나니’는 이스라엘의 멸망이 어떤 경우에도 되돌려질 수 없게 확정된 결정임을 보여줍니다. ‘너를 도와주는 나’는 다른 한편으로 패망 이후에라도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도움을 구한다면 도와주실 수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해줍니다. 이스라엘의 배반이 여호와의 질투를 유발했지만, 그럼에도 그분은 출애굽의 하나님이십니다.

 

(2) 여호와 진노의 둑인 왕권(10-11)

 

“전에 네가 이르기를 내게 왕과 지도자들을 주소서 하였느니라”는 사무엘상 8장의 왕정 도입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왕정은 여호와의 선물이기는 하지만 은총의 선물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왕권은 하나님의 진노의 도구였습니다. 여호와께서 권력욕에 사로잡힌 자들의 모반을 허락해 사회를 폭력과 혼란에 빠뜨리게 하시고, 이를 통해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사람들로 당신의 진노를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에브라임의 종말(12-16)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며,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또한 자비로우시며,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돌아올 때 용서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죄악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돌아가기를 결단할 때, 그분은 우리를 받아주시고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12에브라임의 불의가 봉함되었고 그 죄가 저장되었나니 13해산하는 여인의 어려움이 그에게 임하리라 그는 지혜 없는 자식이로다 해산할 때가 되어도 그가 나오지 못하느니라 14내가 그들을 스올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스올아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눈 앞에서 숨으리라 15그가 비록 형제 중에서 결실하나 동풍이 오리니 곧 광야에서 일어나는 여호와의 바람이라 그의 근원이 마르며 그의 샘이 마르고 그 쌓아 둔 바 모든 보배의 그릇이 약탈되리로다 16사마리아가 그들의 하나님을 배반하였으므로 형벌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그 어린 아이는 부서뜨려지며 아이 밴 여인은 배가 갈라지리라(12-16)

 

이스라엘이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임을 경고합니다. 그들의 죄악은 쌓였고, 하나님은 그들을 무자비하게 벌하실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특히 그들의 거짓된 안전과 번영이 파괴될 것이며,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1) 마지막 기회를 상실한 에브라임(12-14)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에 대한 모든 기대를 거두십니다. 더 이상의 기다림도, 책망도, 경고도, 위협도 아무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마치 중요한 문서나 값진 물건을 잘 묶어 안전한 곳에 보관해놓는 것처럼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이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 범한 불의와 죄를 잘 싸서 따로 보관하십니다. 에브라임의 죄는 재고할 여지가 없어졌습니다. 너무도 많은 죄악이 수집되었기에 또 다른 증거가 불필요해졌습니다. 저지른 악한 죄에 대한 판결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개역개정의 13절 번역은 일부 불충분합니다. ‘그를 위한 해산의 진통이 와도, 그는 어리석은 아들이다. 때가 되어도 그는 자궁 입구로 나오지 않는다.’ 출산의 진통이라는 비유를 통해 에브라임의 어리석음을 고발합니다. 원래 출산의 진통은 해산하는 여인이 경험하는 고통이지만 여기서는 태아에게 적용됩니다. 자궁의 문이 열리고 해산의 진통이 시작되었는데도 자궁 안에 있는 아이가 나오려 하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에브라임은 목숨을 건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마저 놓쳐버립니다. 죽는 순간까지 여호와의 손을 뿌리치는 에브라임에게 구원의 문이 최종적으로 닫힙니다. 14절 전반절은 문맥에 따라 수사적 의문문으로 옮겨야 합니다. “내가 그들을 스올의 권세로부터 속량해야 하겠는가? 내가 그들을 사망으로부터 구속해야 하겠는가?” 여호와께서 이제 구속자의 역할이 끝났음을 선언하십니다. 그분은 오직 죽음의 길로 내닫는 에브라임을 스올의 권세로부터 속량해야 할 어떤 동기나 이유도 찾지 못하십니다. 그분은 지금까지의 구원 노력을 포기하시고 어리석은 에브라임을 사망에게 넘겨주십니다. 사망이 역병(흑사병)으로 에브라임을 멸망시켜 스올로 데려갈 것을 허락하십니다. 마지막 문장 “뉘우침이 내 눈 앞에서 숨으리라”는 여호와의 심판 결정이 취소될 수 없음을 선언적으로 보여줍니다. 에브라임에게 더 이상 연민을 느끼지 않으실 것입니다.

 

(2) 사마리아의 멸망(15-16)

 

주전 733년 앗수르의 침략으로 온 나라가 전화에 휩싸이기는 했지만, 다른 지파들에 비해 에브라임은 전쟁의 피해를 상대적으로 적게 받았습니다. 앗수르의 직접적인 공격으로부터 벗어나 있었던 에브라임은 다른 지파들보다 비교적 빠르게 전란의 상처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심하기에는 이릅니다. “광야에서 일어나는 여호와의 바람”이 불어올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보내신 동풍이 근원과 샘을 말려 에브라임을 죽입니다. 보물 창고에 쌓아둔 모든 값진 기구가 약탈을 당하고, 남자나 여자나 아이나 할 것 없이 모두 무자비한 살육에 넘겨집니다. 사마리아는 여호와를 배반한 죄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잊고 교만해지는 것은 결국 파멸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번영과 안전의 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 각자가 하나님 앞에 돌아와 회개하고, 그분을 다시 삶의 주인으로 모셔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돌아오는 자를 기꺼이 용서하시고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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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12-01)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회복

호세아 11장 12절-12장 14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불순종과 교만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의 성공이나 부유함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회복시킵니다.

 

  •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적으로 간주하고 거짓과 속임수로 공격합니다. 정치에서는 여호와를 떠나 앗수르와 애굽 사이에서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합니다. 경제에서도 재물을 얻기 위해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고, 거짓 저울로 부를 축적하면서도 무죄를 주장합니다. 종교적으로는 제사에만 열중하고 여호와의 예언자의 경고를 무시합니다. 결과적으로 거짓과 속임수가 정치, 경제, 종교 모든 영역을 지배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회복(11:12-12:1)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불순종과 배반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면, 우리의 마음과 행동을 돌아보고,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하나님께 진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회복의 기회를 붙잡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12에브라임은 거짓으로, 이스라엘 족속은 속임수로 나를 에워쌌고 유다는 하나님 곧 신실하시고 거룩하신 자에게 대하여 정함이 없도다 1에브라임은 바람을 먹으며 동풍을 따라가서 종일토록 거짓과 포학을 더하여 앗수르와 계약을 맺고 기름을 애굽에 보내도다(11:12-12:1)

 

이스라엘과 유다는 하나님께 대한 신실함을 잃어버리고, 그들의 불신앙과 배반으로 인해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호세아 11:12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지적하시며, 유다는 하나님께 대해 속이는 자가 되었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잃고 자신들의 길을 선택했지만,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십니다. 호세아 12:1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기회를 주시며, 그들의 행동을 돌아보라고 촉구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과 보호를 잊고, 세상의 것들에 의존하며 자신만의 길을 가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회복의 기회를 제공하며,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과 다툰 조상 야곱(2-6)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것들에 의존하거나, 하나님을 떠나 자신의 길을 걷고 있다면,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돌아가고, 그분의 길을 따르는 것이 진정한 회복과 축복의 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2여호와께서 유다와 논쟁하시고 야곱을 그 행실대로 벌하시며 그의 행위대로 그에게 보응하시리라 3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4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께서는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5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께서시라 여호와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니라 6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2-6)

 

호세아의 야곱은 큰 틀에서 창세기의 야곱에 대부분 일치하지만, 후자를 그대로 따르지는 않습니다. 호세아의 야곱 이야기가 그 전체 구조에 있어 창세기의 야곱 이야기와 일치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구조적 불일치는 호세아의 의도와 해석에서 기인합니다.

 

(1) 기억할 이름 여호와(2-4)

 

호세아 12장 틀 안에서 보자면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에 아람으로 도망합니다. 창세기에서 야곱의 아람 체류는 벧엘에서 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어가는 하나의 과정이지만, 호세아서에서는 약속과 권면(6)을 무시한 도망이 됩니다. 호세아는 야곱의 아람 체류 이야기와 출애굽 사건을 함께 연결시킵니다. 12절과 13절을 함께 보면 다시금 야곱(이 한 일)과 여호와(께서 하신 일)의 대조를 읽을 수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호세아는 창세기의 야곱 이야기를 비교적 자유롭게 활용하면서, 야곱 이스라엘을 여호와를 거역한 자기시대 이스라엘의 원형으로 보여줍니다.

호세아는 족장 야곱 이스라엘을 모델로 활용해 에브라임을 고발합니다. 먼저 이름 ‘야곱’과 ‘이스라엘’에서 출발합니다. 고대적 사고에 따르면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을 대표했습니다. 원래 독립적이었던 야곱의 출생 이야기와 얍복나루의 씨름 이야기를 결합시켜 야곱 이스라엘의 성품과 본성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소개합니다. ‘모태에서부터 한창힘을 쓸 때까지’ 이웃과 불화하고 하나님과도 다툰 자가 바로 야곱이었습니다. 호세아는 에브라임의 조상 야곱을 부정적으로 해석하면서 자기 시대 사람들을 고발합니다. 지금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서로 싸우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은 그 조상 때부터 기원하는 뿌리 깊은 죄입니다.

천사와 겨루어 이긴 야곱은 울면서 그에게 (축복을) 간구했고, 하나님께서는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습니다. 창세기에서는 야곱의 긴 여정의 처음에 속하는 벧엘에서의 만남이 야곱 인생의 후반으로 옮겨집니다. 호세아에게 벧엘의 계시 사건은 울며 간구하는 야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자애로운 응답입니다. 출생 이야기와 씨름 이야기가 쌈꾼 야곱의 본질을 보여준다면, 벧엘에서의 만남은 야곱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4절 하반절에 동사의 시제가 미완료로 사용되고, 하나님의 대화상대로 ‘우리’가 등장함은 우연이 아닙니다. “벧엘에서 그분께서 그를 만나시고 거기서 우리와 말씀하시리라.” 벧엘에서의 만남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사건임을 시사해줍니다. 지금 벧엘은 송아지를 숭배하는 벧아웬이 됐지만, 원래 벧엘은 쌈꾼이었던 야곱이 울며 간청하자 여호와께서 만나주셨던 곳입니다. 에브라임이 배교 했을지라도 울며 간청한다면 조상 야곱이 만났던 벤엘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2) 권면의 말씀(5-6)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는 벧엘에서 조상 야곱에게 나타나셨던 분으로, 에브라임이 알고 섬겨야 할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하나님과도 싸우기를 주저하지 않았면 야곱이 울며 간구하자 그(죄인)에게 은총을 베푸셨던 여호와는 야곱의 하나님께서실 뿐만 아니라 현 세대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조상에게 베푸신 은총에 후손도 참여해야 합니다.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은 문자적으로는 ‘그분의 기억’입니다. 에브라임이 기억해야 할 이름은 송아지 형상 속에 숨은 가나안의 신 바알이 아니라, 야곱에게 은총을 베푸셨던 ‘여호와’이십니다. 호세아는 아람으로 도망하는 야곱에게 준 무사 귀환의 약속을 자기 시대의 이스라엘에게 주는 약속과 권면의 말씀으로 옮깁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처럼, 그의 후손 이스라엘은 그분의 도움을 받아 그분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옴’은 구체적으로는 ‘인애와 정의’의 준수를 의미합니다. ‘거짓과 속임수’를 버리고 ‘인애와 정의’를 실천하며 사는 삶이 돌아옴의 참모습입니다. 제의적으로 여호와를 찾는 관습화된 신앙을 버리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을 실천하면서 파괴된 그분과의 관계를 회복시켜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옴’은 또 삶의 방향을 그분께 고정하고 항상 그분만 바라보며 사는 삶이기도 합니다.

 

상인이 된 에브라임(7-9)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진정한 부유함을 경험하는 길입니다. 세상의 재물과 성공이 우리의 가치와 자아를 정의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분의 은혜에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길을 버리고, 하나님의 길을 따르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진정한 부유함을 얻는 길입니다.

 

7그는 상인이라 손에 거짓 저울을 가지고 속이기를 좋아하는도다 8에브라임이 말하기를 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 내가 수고한 모든 것 중에서 죄라 할 만한 불의를 내게서 찾아 낼 자 없으리라 하거니와 9네가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내가 너로 다시 장막에 거주하게 하기를 명절날에 하던 것 같게 하리라(7-9)

 

하나님께로 돌아와 살길을 찾으라는 예언자의 호소는 무시됐습니다. 에브라임은 손에 거짓 저울을 든 상인의 길을 택했습니다. “상인”의 히브리어는 ‘가나안’으로 ‘가나안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거짓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상인이 됐다는 점에서 에브라임은 가나안 사람과 차이가 없었습니다. 장사꾼 에브라임에게 인애와 정의는 사치였고, 이웃은 없었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재물이었습니다. 죄가 될 만한 어떤 잘못도 범하지 않았다고 무죄를 주장하는 에브라임에게 출애굽의 하나님께서 징벌을 선언하십니다. 에브라임은 초막절에 그러하듯이 장막에 거주해야 합니다. 척박한 유복 생활로 돌아가야 합니다. 온갖 방법으로 애써 모은 재산은 다 빼앗기고, 거주지는 폐허가 됩니다.

 

참 예배와 거짓 예배(10-11)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이 단지 외적인 의식이나 형식적인 행위에 그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진정한 회개와 신앙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고, 올바른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형식적이지 않고, 진정한 회개와 변화로 이어져야 합니다. 신앙의 진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외적인 의식과 형식에 집중하기보다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우선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삶이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는 것입니다.

 

10내가 여러 선지자에게 말하였고 이상을 많이 보였으며 선지자들을 통하여 비유를 베풀었노라 11길르앗은 불의한 것이냐 과연 그러하다 그들은 거짓되도다 길갈에서는 무리가 수송아지로 제사를 드리며 그 제단은 밭이랑에 쌓인 돌무더기 같도다(10-11)

 

여호와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당신의 의지를 제시하셨지만, 이스라엘은 그분 말씀을 청종하기보다는 형식적 제의에 매달렸습니다. 여호와께서 원하는 인애와 정의는 이스라엘의 모든 영역에서 철저히 무시됐습니다. 그분께서 길르앗을 멸망시켜 바알화된 제의 종교를 심판하셨지만, 이스라엘은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길갈의 제단들은 여전히 많은 희생제물로 넘칩니다. 사람들은 양 대신 값비싼 황소를 드리는 것으로 답합니다. 여호와는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시지만, 이스라엘은 제사와 번제로 그분을 찾을 뿐입니다(6:6). 제도화된 죽은 제의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대체합니다.

 

야곱과 여호와(12-13)

야곱의 여정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계획과 노력도 중요하지만, 결국 하나님께 의존하고 신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자손을 애굽에서 구속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 안에 있으며, 그분의 약속을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고 보호하실 때, 우리는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12야곱이 아람의 들로 도망하였으며 이스라엘이 아내를 얻기 위하여 사람을 섬기며 아내를 얻기 위하여 양을 쳤고 13여호와께서는 한 선지자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고 이스라엘이 한 선지자로 보호 받았거늘(12-13)

 

아내를 얻기 위해 아랍에서 종이 된 이스라엘과 종이 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신 여호와가 대조됩니다. 야곱은 특정 목적을 위해 (라반의) 종이 되어 양 떼를 돌보았습니다. 야곱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누구의 종도 될 수 있고, 누구/무엇이라도 섬길 수 있는 인물입니다. 에브라임이 재물을 얻기 위해서면 거짓 저울도 사용하는 것처럼, 조상 야곱은 여자를 얻기 위해 이방 땅에서 종살이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여호와는 모세를 보내 이방 땅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해 돌보셨습니다. “쳤고”와 “보호 받았거늘”의 동사는 히브리어로는 동일합니다. 야곱은 여자를 얻기 위해 누구/무엇인가를 돌보고,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보내신 예언자를 통해 돌봄을 받습니다.

 

종결부: 징계의 심판(14)

하나님의 승리에 대한 신뢰는 우리가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이 문제를 해결하시고 승리하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회복의 약속을 붙잡는 것은 하나님이 고난 중에도 새로운 시작을 주실 것임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승리와 회복의 약속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14에브라임이 격노하게 함이 극심하였으니 그의 주께서 그의 피로 그의 위에 머물러 있게 하시며 그의 수치를 그에게 돌리시리라(14)

 

여호와를 괴롭히며, 이웃에게 피를 흘리게 하고 수치를 가한 에브라임에게 남은 유일한 것은 여호와의 진노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행위에 따라 그대로 같으실 것입니다. 예브라임은 자신의 악행에 책임을 지고 상용하는 징벌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면 교만과 자아를 내려놓고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 꿇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의지하며 인애와 공의를 지키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의미와 방향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회복을 기다리시며, 회개와 순종을 통해 진정한 회복과 평안을 경험하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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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11-01)


하나님의 아버지 사랑과 그리움

호세아 11장 1-11절


 

종종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세상의 것들에 더 마음을 빼앗겨 그분의 사랑을 외면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그분의 품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를 사랑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그 사랑을 잊고, 하나님을 떠나 다른 것들을 추구하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시며, 우리를 그분의 사랑으로 붙들고 계십니다.

 

  • 여호와께 돌아감을 허락하지 않는 에브라임의 완악함과 무능력이 구속사를 파탄에 빠뜨립니다. 에브라임의 행위에 상응하여 여호와께서 진노하실 경우 에브라임은 (여호와를 알지 못했던) 출애굽 이전 단계로 돌아가야 합니다. 막다른 골목에 처한 여호와는 에브라임과의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는 대신에 자기희생을 선택하십니다.

 

여호와의 사랑과 이스라엘의 배반(1-4)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의 압박에서 구출하셨고, 그들에게 자유와 약속의 땅을 주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구출을 넘어서 하나님의 사랑이 담긴 구속의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을 행동으로 표현하셨고, 이스라엘은 그 사랑의 결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2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3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 4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1-4)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어린 시절 애굽에서 구출되었음을 회상하시며, 그들을 사랑으로 양육하고 돌보신 것을 상기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었으나, 이스라엘은 그 사랑을 알지 못하고 우상 숭배로 배신했습니다. 그들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을 돌보고 인도하시려는 깊은 사랑을 표현하십니다.

 

(1) 아버지께 등을 돌리는 아들(1-2)

 

여호와께서 바로의 압제 아래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켜주셨습니다는 진술은 이스라엘의 원초적 신앙고백에 속합니다. 출애굽의 해방 사건을 통해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은 그분의 백성이 됐습니다. 호세아는 출애굽 사건을 가족관계의 시각에서 새롭게 조망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당신 아들로 불러내셨습니다. 출애굽 사건이 이스라엘을 양자로 선택한 여호와의 부성적 사랑을 보여주신 사적 사건이 됩니다. 출애굽 사건을 통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되시고, 이스라엘은 그분의 아들이 됩니다. “어렸을 때”는 아직 제 힘으로 서지 못하고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할 때를 가리킵니다. 시선을 끌 만한 매력이나 남다른 자질이 전혀 없었음에도 여호와의 일방적 사랑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거의 시작부터 어긋났습니다. 이스라엘은 아버지의 보호와 인도를 거절하고 가나안에서 알게 된 바알을 따랐습니다. 개역개정은 모두 과거시제로 옮겼지만, 동사 ‘멀리하다’는 완료가, ‘제사하다’와 ‘분향하다’는 미완료가 사용됩니다. 이스라엘은 반복적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떠난 것이 아니라 한 번 떠난 후로는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배교는 일시적 이탈이 아니었습니다. 의도적이며 지속적이었습니다.

 

(2) 아버지의 사랑(3-4)

 

여호와의 사랑은 출애굽의 구속사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분은 애정과 헌신을 갖고 계속 에브라임을 돌보셨습니다. 그러나 에브라임은 보호와 인도를 받으면서도 여호와의 사랑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가르치시고 돌보실 뿐만 아니라 아들을 고쳐주기도 하셨습니다. 여호와는 에브라임의 병을 고쳐주려 애쓰시지만 에브라임은 거절할 뿐이었습니다. 에브라임은 자신이 환자임을 알지 못했거나, 설혹 알았다 할지라도 여호와가 아닌 다른 곳에서 치료를 받으려 했습니다. 호세아서는 농부의 비유적 표상을 사용해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와의 애정 어린 돌봄을 기술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에브라임을 이끄셨습니다. 농부가 줄을 당겨 소나 송아지를 제 길로 이끄는 것처럼 여호와는 아직 길에 익숙하지 못한 에브라임이 빗나가지 않고 바른 길을 가도록 계속 관심을 갖고 이끌어주셨습니다. ‘사람의 줄’과 ‘사랑의 줄’에서 때로는 율법과 예언자를 보기도 하지만, 아마도 에브라임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인간적이고도 애정이 넘치는 방법으로 인도하셨음을 시사해주는 것 같습니다. 또 여호와는 에브라임에게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셨습니다. 팔레스티나에서 농부는 보통 소 두 마리에 멍에를 씌우고 밭일을 한 후에 일이 끝나 집으로 돌아오면 목에서 멍에를 벗겨 편히 쉬면서 꼴을 먹을 수 있게 해줍니다. 농부가 가족의 일원처럼 소를 아끼고 돌보듯이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을 정성껏 보살펴주셨습니다.

 

심판의 선고(5-7)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인한 결과를 통해 우리는 불순종이 가져오는 파괴적인 결과를 이해해야 합니다. 회개와 순종의 삶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께 돌아오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이해하고,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회개하는 자세를 가져야 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5그들은 애굽 땅으로 되돌아 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 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 6칼이 그들의 성읍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하리니 이는 그들의 계책으로 말미암음이니라 7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5-7)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미래를 예언하시며, 그들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고 아시리아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불순종과 회개하지 않는 태도로 인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선언하시며, 그들의 경향성을 지적하십니다.

 

(1) 앗수르에 의한 멸망(5-6)

 

아버지의 사랑과 호의를 짓밟은 배은망덕한 아들 에브라임에게 징벌의 심판이 선포됩니다. 서두의 ‘애굽 땅으로 돌아가지 못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아마도 애굽에서 도움을 찾으려는 자들에게 주는 경고의 말씀 같습니다. 여호와께로 돌아오기를 거절하고 애굽으로 돌아가려 한다면, 에브라임은 앗수르의 종살이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돌아오기를 완강히 거절한 에브라임은 전쟁의 참혹한 재앙에 떨어집니다. 성읍들이 여호와께서 보내시는 칼로부터 백성을 안전하게 지켜주지 못합니다. 성의 가장 약한 곳이 빗장을 걸어 닫아놓은 성문이기에 일반적으로 공성은 성문에 집중됩니다. 적이 미친 듯이 칼을 휘두르며 성문을 낍니다. “그들의 계책”은 아마도 적의 침략에 대비해서 세워놓은 동맹정책이나 방어계획과 같은 정치적군사적 계획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에브라임의 맹목적 거절에 여호와께서 탄식하십니다.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는 문자적으로 옮기면 ‘내 백성은 내게서 떠나려는 일에만 매달린다’ 정도가 됩니다.

 

(2) 마지막 기회의 상실(7)

 

에브라임은 마치 여호와로부터 떠나는 것을 생존 목표로 삼은 것처럼 완강하게 그분으로부터 떠나가기만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돌아오라고 호소하시지만 아무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에브라임은 높은 곳에 계신 여호와께서 내미는 구원의 손길을 단호하게 뿌리치고 멸망의 길로만 내달렸습니다. 심판하시는 것 이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어졌습니다.

 

진노를 억누르는 여호와의 사랑(8-9)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인자와 긍휼로 이스라엘을 회복하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과 계획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 회복의 길을 열어두시는지를 보여줍니다. 회복의 약속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회복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회복과 구원의 약속을 붙잡고, 새로운 시작을 위해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8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9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8-9)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한 깊은 사랑과 자비를 보여주십니다.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기로 결심하시며, 자신의 거룩함으로 인해 극진한 긍휼을 베푸십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용서하고 회복시키려는 마음을 나타냅니다.

 

(1)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8)

 

비극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려야 하는 마지막 순간에 여호와에 의해 극적 반전이 이뤄집니다. 이스라엘이 되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해졌지만, 그렇다고 멸망의 심판이 여호와의 최종 답변은 아닙니다. 은혜를 배반한 에브라임은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영원한 멸망에 넘겨져야 하지만,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공의의 진노를 억누르고 아들에게 무조건적인 구원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내 마음이 내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는 아들 에브라임을 두고 심각한 내적 갈등에 빠진 아버지 여호와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긍휼”(니후밈)은 ‘앞서 품었던 의도를 다시 거둬들이는 의지의 전환’과 관련된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의지의 전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려는 그분의 결정이 모든 면에서 정당함에도 이를 실행하지 않으시고 거둬들이시는 그분의 신비스러운 내적 전환을 가리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태도와 상관없이 하나님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자기극복이기도 합니다. 부정부사 ‘아니’를 네 번 사용하면서 결정된 심판의 취소를 장엄하게 선포합니다. 배반한 에브라임을 진멸하시려는 여호와의 진노가 그분의 사랑에 의해 극복됩니다. 완전한 멸망으로부터 에브라임을 구원하기 위해 여호와께서 자신의 심판 의지를 거슬러 행동하십니다. 심판 포기에 관한 이유나 배경은 달리 제시되지 않습니다.

 

(2)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9)

 

단지 그분의 본질에 근거하여 선언적으로 선포됩니다.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절대주권과 절대자유의 선언입니다. 행위와 보응의 상관관계는 공의의 전제이지만, 여호와는 이러한 윤리적 원칙에 구속당하지 않으십니다. 여호와는 공의를 판단하시는 최고의 재판관이지만, 공의에 종속당하지 않으십니다.

 

흩어진 자들의 귀환(10-11)

우리가 죄로 인해 하나님을 떠났을지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다시 받아주시며, 우리의 삶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삶은 평안과 안전이 약속된 삶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하나님께서는 주시며, 그분의 집에서 우리는 참된 안식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시 그분의 품으로 돌아와 함께 살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10그들은 사자처럼 소리를 내시는 여호와를 따를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내시면 자손들이 서쪽에서부터 떨며 오되 11그들은 애굽에서부터 새 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 같이 떨며 오리니 내가 그들을 그들의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10-11)

 

유배의 심판을 전제하는 이 단락은 심판포기 선언이 사랑에 의한 공의의 극복이지, 공의를 무시하는 임의적 결단이나 변덕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에브라임에 선포된 심판이 무효화한 것은 아닙니다. 에브라임과 관계를 정리하시려는 여호와의 의지가 변경되었을 뿐입니다. 여호와께서 포기하신 것은 심판 자체가 아니라 관계의 단절입니다. 출애굽에서 시작된 관계가 회복불능의 파탄에 직면했지만 그분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출발점에서 새롭게 시작하십니다. 사자처럼 에브라임을 덮쳐 갈기갈기 찢으셨던(5:14; 13:7) 여호와께서 죽음에 떨어진 당신 자녀들을 위해 다시사자처럼 포효하십니다. 첫 번째 출애굽 때 기사와 이적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던 여호와가 이번에는 자의 포효로 유배민들을 구출하십니다. 북서쪽 지중해 연안과 애굽과 앗수르로부터 자녀들을 인도해 내려서 다시 제 집으로 돌아가 살게 하십니다.


호세아 11:1-11절은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그리움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아버지의 사랑으로 돌보시고, 우리가 그분을 떠날 때에도 여전히 우리를 그리워하시며,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우리의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우리는 그분의 자비와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그분께로 돌아가는 결단을 내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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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10-01)


심판과 회복의 하나님

호세아 10장 1-15절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때, 오히려 그 축복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물질적 풍요나 성공이 하나님을 잊게 만들 수 있으며, 그 결과는 파멸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시며, 우리가 우상화한 모든 것들은 결국 무너질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심판받은 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불의와 폭력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심판은 우리가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할 때 받을 수 있는 경고입니다.

 

  • 송아지가 여호와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하나님의 집이었던 벧엘이 죄악의 소굴인 벧아이되고, 그 영향으로 이스라엘의 종교와 왕정도 여호와를 떠납니다. 제의는 번성하지만, 여호와는 부재합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는 왕권은 아무 유익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하나님 백성이 송아지의 백성이 되어 송아지와 함께 수치를 당합니다.

 

제의의 고발과 심판(1-8)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 오히려 우리를 교만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잊게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축복을 감사히 여기고, 그분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다른 것들을 의지하고, 세상의 가치를 쫓아가면 결국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참된 보호자이시며, 그분께 돌아가야 합니다.

 

1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번영할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2그들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벌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뜨리시며 그 주상을 허시리라 3그들이 이제 이르기를 우리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므로 우리에게 왕이 없거니와 왕이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리요 하리로다 4그들이 헛된 말 내며 거짓 맹세로 언약을 세우니 그 재판이 밭이랑에 돋는 독초 같으리로다 5사마리아 주민이 벧아웬의 송아지로 말미암아 두려워할 것이라 그 백성이 슬퍼하며 그것을 기뻐하던 제사장들도 슬퍼하리니 이는 그의 영광이 떠나감이며 6그 송아지는 앗수르로 옮겨다가 예물로 야렙 왕에게 드리리니 에브라임은 수치를 받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계책을 부끄러워할 것이며 7사마리아 왕은 물 위에 있는 거품 같이 멸망할 것이며 8이스라엘의 죄 곧 아웬의 산당은 파괴되어 가시와 찔레가 그 제단 위에 날 것이니 그 때에 그들이 산더러 우리를 가리라 할 것이요 작은 산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1-8)

 

이스라엘이 번영하면서 우상 숭배에 빠져 하나님을 배신했음을 지적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에 대해 심판을 내리실 것이며, 이스라엘은 두려움 속에서 우상들을 버리게 될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의지했던 산당들이 파괴되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1) 제단과 주상(1-2,8)

 

역설적이게도 여호와의 축복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여호와를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이스라엘은 축복에 감사하여 제단을 많이 만들고 주상(기념기둥)을 아름답게 치장합니다. 이스라엘은 땅의 축복에 나름대로(!) 정성껏 응답하지만, 이들의 경건과 감사는 가나안의 제의적 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혼합주의에 물든 이스라엘에게 심판이 선포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이 당신께 만들어 바쳤던 제단을 쳐서 깨뜨리시고 주상을 허물어버리십니다. 죄악(아웬)의 소굴이 된 산당이 파괴되고 제사를 드리던 제단이 황폐해져 가시와 찔레로 뒤덮입니다. 생존 기반이 철저하게 파괴되기에 심판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차라리 산과 작은 산에 있던 산당과 제단이 파괴될 때 함께 죽지 못한 것을 원망하며 죽기를 소망합니다.

 

(2) 왕권의 고발과 심판(3-4.7)

 

이스라엘의 종교가 여호와를 잃어버리고 제의라는 껍질만 붙잡고 있었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정치도 여호와를 완전히 떠났습니다. 제단과 산당이 부서질 때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왕권도 마찬가지로 그분의 징계에 떨어집니다. 여호와께서 심판하실 때 백성들은 왕권의 무능력과 한계를 분명하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왕권이 가져다준 유익함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설혹 새로운 왕이 세워집니다 할지라도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그들은 정치적 빈말이나 즐기며 거짓 맹세나 무의미한 조약을 남발하고 백성을 미혹하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독초가 밭이랑을 못 쓰게 만들듯이 왜곡된 재판이 이스라엘 사회를 속속들이 부패시켰습니다. 벧아웬의 송아지에게서 영광이 사라질 때 ‘사마리아 왕’도 멸망 당합니다. ‘사마리아 왕’은 벧엘의 송아지보다는 사마리아 왕궁의 왕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예언자는 아마도 부정적 어감을 갖고 이스라엘 왕을 ‘사마리아 왕’이라 부른 것 같습니다. 사마리아의 정치가들이 당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세운 왕일 뿐입니다. 홍수가 밀려오듯이 앗수르가 침략하여 에브라임 산지를 뒤덮을 때 왕은 나무에서 잘려 물에 떠내려가는 가지(거품)와 같은 신세가 됩니다.

 

(3) 송아지상(5-6)

 

예언자는 이제 벧엘의 송아지에게로 눈을 돌려 사마리아 국가종교의 핵심을 조롱하며 그 멸망을 선포합니다. 어리석게도 사람들은 벧아웬의 송아지 조각을 두려운 마음으로 경배합니다. 송아지 조각을 숭배하는 벧엘은 ‘죄악의 소굴’(벧아웬)일 뿐입니다. 5절 하반절은 다음과 같이 옮길 수 있습니다. “그(송아지의) 백성은 그(송아지) 때문에 슬퍼하고, 그(송아지의) 제사장들은 그(송아지의) 영광을 환호하리라. 그것(그 영광)이 그(송아지)에게서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사마리아 주민과 제사장들이 송아지 때문에 슬퍼하고 또 환호합니다.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과 제사장들이 아니라, 송아지에게 속한 백성과 제사장들입니다. ‘슬퍼하다’와 ‘기뻐하다’는 바알의 풍요제의를 암시해줍니다. 벧아웬의 제의는 바알 제의일 뿐입니다. 벧아의 송아지는 숭배자들을 보호해주기는커녕 제 자신도 지키지 못하고 수치 가운데 사로잡혀 갑니다. 이스라엘은 파국을 모면하기 위해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지만, 그 계획은 부끄러움을 가져다줄 뿐입니다.

 

멸망의 전쟁(9-15)

우리가 과거의 죄를 회개하지 않고 반복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직시하고 회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인내가 무한하지 않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도 계속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9이스라엘아 네가 기브아 시대로부터 범죄하더니 지금까지 죄를 짓는구나 그러니 범죄한 자손들에 대한 전쟁이 어찌 기브아에서 일어나지 않겠느냐 10내가 원하는 때에 그들을 징계하리니 그들이 두 가지 죄에 걸릴 때에 만민이 모여서 그들을 치리라 11에브라임은 마치 길들인 암소 같아서 곡식 밟기를 좋아하나 내가 그의 아름다운 목에 멍에를 메우고 에브라임 위에 사람을 태우리니 유다가 밭을 갈고 야곱이 흙덩이를 깨뜨리리라 12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13너희는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었나니 이는 네가 네 길과 네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음이라 14그러므로 너희 백성 중에 요란함이 일어나며 네 산성들이 다 무너지되 살만이 전쟁의 날에 벧아벨을 무너뜨린 것 같이 될 것이라 그 때에 어머니와 자식이 함께 부서졌도다 15너희의 큰 악으로 말미암아 벧엘이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이스라엘 왕이 새벽에 정녕 망하리로다(9-15)

 

이스라엘 백성이 길갈에서 죄를 짓고 우상을 숭배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경고합니다. 그들의 불의한 행위로 인해 전쟁과 파괴가 닥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벌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따랐기 때문에 그들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난 대가로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1) 두 가지 죄악(9-10)

 

호세아는 기브아 시대를 자기 시대의 예표로 사용하면서 현재의 악한 형편을 과거의 사건 안에 위치시킵니다. 기브아에서 공공연히 자행됐던 파렴치한 악행은 일과성의 범죄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이후에도 하나님의 법을 유린한 기브아의 불법에 그대로 머물렀습니다. 기브아의 범죄는 그 이후 이스라엘이 자행한 모든 악의 뿌리가 됩니다. 길손을 접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삿 19:15) 욕정에 사로잡혀 그의 소실을 강제로 끌어내 강간하여 능욕한(삿19:22-25) 기브아의 범죄는 과거가 아니라 진행 중인 현재에 속합니다. 패역한 기브아 사람들 때문에 지파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범죄가 다시금 전쟁을 초래합니다. 기브아를 징벌할 때는 형제를 두둔하는 베냐민 지파에 맞서 이스라엘의 나머지 지파들이 모여(삿 20:11, 14) 전쟁에 나갔지만, 호세아 시대의 이스라엘을 징계할 때는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심판의 도구로 사용됩니다.

 

(2) 하나님의 실망(11-13a)

 

소의 비유적 표상을 사용해 에브라임의 처음과 나중을 대조적으로 기술합니다. 한때 에브라임은 여호와께 기쁨이었습니다(참조, 9:10a). 에브라임은 마치 길든 암소와 같아서 힘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타작하기를 좋아하였습니다. 지금은 ‘완강한 암소’(4:16)가 되었지만 에브라임은 한때 유능하고 쓸모 있는 암소였습니다. 원래 ‘배워 익힌’을 의미하는 “길들인”과 자발적 순종을 뜻하는 “좋아하나”는 선택의 정당성을 시사해줍니다. 에브라임은 처음부터 고집 센소가 아니었습니다. 여호와의 의지에 부응할 만한 자질과 배움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순종적이었습니다. 개역개정의 번역 “내가 그의 아름다운 목에 멍에를 메우고 에브라임 위에 사람을 태우리니”는 에브라임의 종살이를 말하는 듯하다. 원문을 문자적으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름다운목 곁을 지나갈 때 나는 에브라임에게 쟁기를 끌도록 맘을 먹었다.” 암소 에브라임은 여호와의 시선을 붙잡기에 부족함이 없는 든든한 목덜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농부가 힘세 보이는 소를 만나면 그 소를 어디에 쓰면 좋을지 생각해보는 것처럼, 여호와께서도 에브라임을 만나자 먼저 그에게 맡길 과제를 찾으셨습니다. 타작마당에서 곡식을 밟고 있기에는 아까운 소였습니다. 에브라임은 여호와에 의해 가나안 땅을 개간하는 일에 투입할 만한 자질과 힘이 있는 소로 택함을 받았습니다. 소에게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처럼 유다와 야곱에게도 맡겨진 사명이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경작하는 것이 이들에게 맡겨진 사명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선택이 책임을 수반하는 특권임을 보여줍니다. 땅의 개간과 관련된 세 개의 동사는 역할 분담이 아니라, 경작의 전체과정을 보여줍니다.

가나안에 정착해 농사를 지으며 살게 될 이스라엘에게 여호와는 공의의 씨를 뿌리고 인애의 열매를 거두도록 권면하셨습니다. 풍성한 결실을 기대하며 곡식의 씨를 뿌리는 가나안 사람들과 달리 에브라임은 공의를 뿌리고 인애를 그 열매로 거둬야 했습니다. 열매로서의 인애는 여호와께서 주시는 구원의 선물이기에, “인애를 거두라”는 명령은 약속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호와의 의지와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 백성으로 그분의 보호와 축복을 즐길 수 있게 됩니다. 또 이스라엘은 묵은 땅을 농경지로 개간해 씨를 뿌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부푼 기대는 고통스런 실망으로 끝납니다. 공의와 인애를 바라신 분께 이스라엘은 악과 죄와 거짓으로 응수하였다. 공의를 심는 대신에 악으로 밭을 갈고, 인애를 거두는 대신에 죄를 거두고, 여호와를 찾는 대신에 거짓 열매를 먹었습니다.

 

(3) 멸망의 길(13b-15)

 

악의 씨를 뿌리면 죄의 열매를 거둬야 하는 것처럼, 여호와를 찾지 않고 제 능력과 군사력에 의존하는 이스라엘은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네 길”은 아마도 강대국 의존책이나 군사동맹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왕은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죽임을 당하고 여자와 아이들이 침략군의 무자비한 칼에 희생당합니다. 동시대에 잘 알려진 살만에 의한 벧아벨의 파괴처럼 처참하게 멸망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그 속에서 여전히 우리를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과거의 죄를 반복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회개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불의와 거짓이 아니라, 정의와 사랑을 심고, 하나님의 길로 돌아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하시지만, 그 목적은 우리를 다시 그분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우리가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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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09-01)


하나님을 떠난 삶의 고통과 심판

호세아 9장 1-17절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죄악에 빠진 이스라엘의 상태와 그로 인해 맞이할 고통을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회복의 기회를 주시며, 진심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형식적인 예배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를 회복하며 순종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중심으로 삼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아야 합니다.

 

  • 예언자는 타작마당에서 초막절을 즐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앞으로는 축제가 더 이상 없을 것을 선포합니다. 제의적으로 불결한 이방 땅으로 쫓겨날 것이기에 명절과 절기가 돌아와도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거나 축제의 모임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초막절의 들뜬 분위기에 젖어있던 자들은 축제를 망쳐버린 예언자에게 욕설로 응답합니다.

 

축제의 끝(1-6)

하나님을 잊고 세상의 것에 의존할 때, 그들의 기쁨은 잠시일 뿐이고 영적인 공허와 혼란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 죄악에 빠지면 고난과 심판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회복의 기회를 주시지만, 이를 놓치면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진정한 회개와 순종의 삶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이스라엘아 너는 이방 사람처럼 기뻐 뛰놀지 말라 네가 음행하여 네 하나님을 떠나고 각 타작 마당에서 음행의 값을 좋아하였느니라 2타작 마당이나 술틀이 그들을 기르지 못할 것이며 새 포도주도 떨어질 것이요 3그들은 여호와의 땅에 거주하지 못하며 에브라임은 애굽으로 다시 가고 앗수르에서 더러운 것을 먹을 것이니라 4그들은 여호와께 포도주를 부어 드리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바도 되지 못할 것이라 그들의 제물은 애곡하는 자의 떡과 같아서 그것을 먹는 자는 더러워지나니 그들의 떡은 자기의 먹기에만 소용될 뿐이라 여호와의 집에 드릴 것이 아님이니라 5너희는 명절 날과 여호와의 절기의 날에 무엇을 하겠느냐 6보라 그들이 멸망을 피하여 갈지라도 애굽은 그들을 모으고 놉은 그들을 장사하리니 그들의 은은 귀한 것이나 찔레가 덮을 것이요 그들의 장막 안에는 가시덩굴이 퍼지리라(1-6)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들을 숭배하며 죄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이방 제사에 참여하고, 여호와의 제사와 율법을 무시하며 죄를 계속 저지르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심판과 고난을 맞이할 것이며, 하나님은 그들의 악행에 대해 심판을 내리실 것입니다.

 

(1) 음행의 대가(1-3)

 

다시 결실을 얻게 된 이스라엘은 타작마당에서 열광적으로 춤을 추며 수확의 기쁨을 만끽합니다.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들처럼 기뻐서 날뜁니다.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열광하는 수확의 기쁨에서 가나안의 풍요제의를 봅니다. 여호와의 축제가 바알의 축제로 변질되었음을 보고 이들이 기뻐하는 수확을 음행의 대가로 정합니다. 이스라엘은 해웃값을 위해서라면 아무에게나 몸을 파는 창녀와 같았습니다. 매음의 대가로 받은 해웃값(화대)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하는 자들에게 예언자는 심판을 선언합니다. 2절을 문자적으로 옮기면 “타작마당과 술틀이 그들을 먹이지 못할 것이며 새 포도주는 그들을 속이리라”입니다. 이스라엘이 의존하는 타작마당과 술틀은 양을 오도하는 거짓 목자에 불과합니다. 이스라엘은 타작마당과 술틀에서 얻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즐기지 못하고 적에게 모두 빼앗길 것입니다. 여호와를 배반하고 이방신을 섬겨 얻은 풍요는 이스라엘의 것이 되지 못합니다. 수확한 곡식과 포도주를 빼앗기는 것은 심판의 서곡에 불과합니다. 가나안 땅이 여호와의 땅임을 잊어버린 이스라엘은 그분 백성이 아니기에 가나안 땅을 떠나야 합니다. 에브라임은 출발지인 애굽(11:1)으로 돌아가야 한다. ‘애굽으로 돌아감’은 출애굽에서 시작한 이스라엘의 구원사가 끝장났음을 의미합니다. 에브라임은 멸망을 당하고 사람들은 포로로 사로잡혀 갈 것입니다. 에브라임은 조상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하였듯이 이제는 앗수르에서 종살이해야 합니다.

 

(2) 제의와 축제의 상실(3b-5)

 

여호와의 통치권은 가나안을 넘어 민족들에도 미치지만, 제의적 정결은 ‘여호와의 땅’ 가나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우상을 섬기는 가나안 밖의 지역은 제의적으로 부정하고, 부정한 땅에서 살고 자라는 동식물도 마찬가지로 부정합니다. 유배민은 부정한 앗수르에서 부정한 음식을 먹어야 하기에 부정을 피할 수 없고, 따라서 거룩하신 여호와께 나아갈 수 없게 됩니다. 부정한 땅 앗수르에서 생산되는 곡식이나 포도주나 짐승은 모두 초상집(참조, 민 19:11 이하) 음식과 같아서 여호와께 드릴 수 없습니다. 호세아는 아주 파격적으로 제물을 초상집 음식에 비교합니다. 아마도 유배를 이스라엘 민족의 죽음으로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내용상 애굽으로 돌아감과 유사합니다. 이스라엘이 지금 즐기고 있는 축제는 앞으로는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쫓겨난 이스라엘은 부정한 이방 땅에서 빼앗긴 초막절의 풍요로움과 기쁨을 고통스럽게 탄식할 것입니다.

 

(3) 폐허가 되는 에브라임(6)

 

일부는 유배를 벗어나 애굽으로 도망하겠지만, 그들에게 애굽은 무덤이 될 뿐입니다. 애굽은 그들을 모으고 놉은 그들을 장사할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이스라엘은 구원사의 출발점이었던 애굽에서 구원사의 종말을 맞습니다. 주민들이 모두 쫓겨난 ‘여호와의 땅’은 폐허가 됩니다. 애써 모아놓은 재물은 모두 약탈당하고 찔레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축제의 즐거움이 넘쳤던 장막에는 가시넝쿨이 자랍니다. 유배민은 유배지 앗수르에서, 피난민은 피난지 애굽에서 멸망을 당하고, 여호와의 땅은 찔레와 가시넝쿨이 자라는 황무지가 됩니다. 출애굽으로 시작된 하나님 백성의 역사가 완전한 죽음으로 끝납니다.

 

형벌의 날(7-9)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와 불순종으로 인한 고난과 심판을 예고하시며, 이는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진지한 회개와 회복을 촉구하는 부르심입니다. 그들의 도덕적 부패가 심각하다고 보시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경고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회복의 기회를 제공하시며 진심으로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회복의 기회를 놓치면 결국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7형벌의 날이 이르렀고 보응의 날이 온 것을 이스라엘이 알지라 선지자가 어리석었고 신에 감동하는 자가 미쳤나니 이는 네 죄악이 많고 네 원한이 큼이니라 8에브라임은 나의 하나님과 함께 한 파수꾼이며 선지자는 모든 길에 친 새 잡는 자의 그물과 같고 그의 하나님의 전에는 원한이 있도다 9그들은 기브아의 시대와 같이 심히 부패한지라 여호와께서 그 악을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7-9)

 

이스라엘은 그들의 죄로 인해 형벌의 날이 다가오고 있으며, 이 날에는 고통과 혼란이 올 것이라는 경고를 받습니다. 그들은 악한 길로 가면서 스스로를 멸망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형벌의 날에는 그들의 모든 희망과 기쁨이 사라지고, 고난과 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1) 예언자를 대적하는 에브라임(7-8)

 

이스라엘은 자신이 한 짓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7-9). 혼합주의에 빠져 음행을 즐기며 기뻐 떠들지만 곧 고통스런 현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을 생명과 구원의 하나님으로 알길 거절한 이스라엘에게 심판을 통해 당신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예언자가 형벌의 날을 선포하자, 이스라엘은 격렬하게 반응합니다. ‘어리석은 놈’, ‘미친 놈’이라고 욕설을 퍼붓습니다. 예언자에 대한 이스라엘의 적대감은 이들의 죄악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줄 뿐이다. 8절은 문맥에 따라 다음과 같이 옮길 수 있습니다. “예언자는 나의 하나님과 함께하는 에브라임의 파수꾼이다. 새 잡는 자의 그물이 그의 길에 있고 그의 하나님의 집에(도) 증오가 있다”(ESV;NRS: NIV). 새 잡는 자가 그물을 쳐놓고 새가 걸려들길 기다리는 것처럼 대적들은 예언자의 길에 함정을 파고 그가 걸려들길 기다립니다. 여호와는 애굽과 앗수르로 가는 에브라임 위로 그물을 던져 하늘의 새처럼 낚아채시고(7:12), 에브라임은 예언자를 잡으려 그물을 놓습니다. “그의 하나님의 전”은 아마도 한때 예언자에게 우호적이었던 어떤 성소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전에 예언자를 도와주었던 성소마저 그 사이에 적대적으로 바뀌어 그를 증오합니다. 도처에 대적들이 있어 생명마저 위협을 받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알기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거듭된 고발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를 떠나 음행을 즐기는 에브라임은 정욕에 사로잡혀 불의와 불법을 범한 기브아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삿 19-20장). 에브라임의 현재가 사사시대 말기에 비교되면서 부패가 호세아 시대의 일시적인 현상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2) 여호와의 응답(9)

 

여호와께서 부패한 에브라임에게 심판으로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오래 참으시기는 하지만, 죄악을 마냥 내버려두시지는 않습니다.

 

에브라임의 멸망(10-17)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배반과 타락으로 인해 심판을 내리실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이스라엘이 받은 축복과 기회는 그들의 죄로 인해 사라지고, 공의롭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회복의 기회를 주시지만, 이스라엘은 회개하지 않고 계속 죄악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이 회복의 기회를 놓치면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10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거늘 그들이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가 사랑하는 우상 같이 가증하여졌도다 11에브라임의 영광이 새 같이 날아 가리니 해산하는 것이나 아이 배는 것이나 임신하는 것이 없으리라 12혹 그들이 자식을 기를지라도 내가 그 자식을 없이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떠나는 때에는 그들에게 화가 미치리로다 13내가 보건대 에브라임은 아름다운 곳에 심긴 두로와 같으나 그 자식들을 살인하는 자에게로 끌어내리로다 14여호와여 그들에게 주소서 무엇을 주시려 하나이까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젖 없는 유방을 주시옵소서 15그들의 모든 악이 길갈에 있으므로 내가 거기에서 그들을 미워하였노라 그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내 집에서 그들을 쫓아내고 다시는 사랑하지 아니하리라 그들의 지도자들은 다 반역한 자니라 16에브라임은 매를 맞아 그 뿌리가 말라 열매를 맺지 못하나니 비록 아이를 낳을지라도 내가 그 사랑하는 태의 열매를 죽이리라 17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내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시리니 그들이 여러 나라 가운데에 떠도는 자가 되리라(10-17)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 숭배에 빠져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죄에 빠져 멸망의 길을 걷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그들의 고통과 파멸을 선언하시며 회복의 기회를 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1) 광야의 첫 만남(10a)

 

고발에 앞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처음 만났을 때의 기쁨을 회고하십니다. 광야를 지나는 목마른 여행자가 전혀 예기치 않은 곳에서 포도송이를 발견하고 기뻐하듯이 길을 가다가 우연히 무화과나무에 첫 열매가 열린 것을 보고 즐거워하듯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처음 만나셨을 때 그렇게 황홀해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뜻밖의 장소에서 발견한 값진 보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무엇이 그분의 가슴에 사랑의 격정을 불러일으켰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여호와에 의한 이스라엘의 선택이 기적적 신비적 결합에 속함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듯합니다.

 

(2) 에브라임의 종교적 배반과 심판 선언(10b-14)

 

그러나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사랑은 가나안에 들어가기도 전에 삐걱대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바알브올에서 우상에게 몸을 줘 간음을 범했습니다. ‘몸을 드리다’(나자르)는 바알브올의 나실인이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은 바알과의 처음 접촉부터 자신을 전적으로 바알에게 내맡겼습니다. 부끄러운 우상을 선택한 에브라임에게 여호와께서 생명력과 생산의 박탈로 응답하십니다. 에브라임은 자식을 낳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어렵게 얻어도 전쟁이나 기근이나 질병으로 그마저도 빼앗길 것입니다. 후손이 끊어져 완전히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엄중한 멸망 선언에 예언자가 개입합니다. 멸망이 여호와께서 결정하신 에브라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임을 확신하는 예언자는 심판의 고통이라도 줄여줄 것을 간구합니다(참조, 삼하 24:1225). 에브라임이 제 자식을 모두 살인자에게로 끌고 가야한다면, 죽음에 넘겨질 자식이 없는 부모가 덜 고통스럽게 멸망의 심판을 맞을 수 있을 것입니다.

 

(3) 에브라임의 정치적 배반과 심판 선언(15-17)

 

여호와께서 군주정체 도입부터 시작하는 에브라임의 정치적 배반을 고발하시며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여호와는 길갈에서 시작된 왕정을 처음부터 미워하셨습니다(참조. 삼상 11:14-15;13:7-15;15:10-33), 왕정은 처음부터 악이었기에 그 뿌리에서 자라는 것도 악행뿐이었습니다. 우상숭배의 경우처럼 정치적 배교도 멸망을 가져옵니다. 에브라임은 가나안(‘내 집’)에서 쫓겨나 민족들 가운데 떠도는 자가 됩니다. 미래의 회복을 기대할 수 없게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을 완전히 끊어버리십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는 삶의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지를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난 결과로 겪은 고통과 심판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이 됩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 번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며 회복과 구원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임을 명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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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08-01)


하나님의 법을 무시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호세아 8장 1-14절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삶은 큰 위험을 초래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면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노력은 결국 헛되고 실패할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결과는 매우 참혹할 수 있으며, 지속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오직 하나님을 중심으로 할 때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찾을 수 있습니다.

 

  •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죄악으로 인해 멸망할 것임을 선언하시며, 이스라엘의 왕들이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자신의 길을 가는 모습을 지적하십니다. 또한,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와 인위적인 신들에 의존하며, 하나님을 버리고 외세에 의존한 결과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선을 버린 이스라엘(1-3)

우리는 하나님의 경고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겉으로만 고백하고, 실제로는 우리의 길을 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말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행동을 보십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그분의 말씀을 따를 때, 우리는 진정한 평안과 보호를 누릴 수 있습니다.

 

1나팔을 네 입에 댈지어다 원수가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치리니 이는 그들이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이로다 2그들이 장차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 하리라 3이스라엘이 이미 선을 버렸으니 원수가 그를 따를 것이라(1-3)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고 율법을 무시한 결과, 하나님께서 심판을 내리실 것임을 경고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났기에 원수가 그들을 공격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1) 언약을 어긴 이스라엘의 심판(1)

 

처음 세 절은 이스라엘의 제의적 형식적 경건을 고발합니다. 여호와를 ‘나의 하나님’이라 부르며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라고 말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미 선을 버렸습니다. 여호와의 언약을 어기고 율법을 범한 이스라엘에게 원수가 독수리처럼 덮칠 것입니다. 4-14절은 이스라엘이 버린 선(좋은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섯 가지 예를 들어 진술합니다. 여호와께서 누군가에게 나팔을 불어 경고하라고 명령하십니다(1). 경고의 동기는 적의 침략이지만 적의 신분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집’은 성전보다는 가나안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상속재산으로 주신 가나안 땅이 독수리의 사냥감처럼 적의 침략으로 유린당할 위험에 처합니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여호와의 집을 덮치는 독수리는 앗수르가 됩니다. 앗수르에서 독수리 표상은 자주 앗수르신과 왕의 위엄이나 능력을 표현하는 데 사용됐습니다. 이스라엘의 위기는 이유가 없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와 맺은 언약을 어기고 그분께서 주신 율법을 거슬러 악을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언약준수의 의무를 위반하고 우상과 이방민족을 섬긴 것입니다.

 

(2) 부르짖는 이스라엘(2)

 

여호와는 이스라엘이 언약을 어기며 율법을 범했다고 고발하시지만,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나의 하나님’으로 부르며 자신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합니다. (개역개정은 시간의 부사 ‘장차’를 첨가하여 적이 침략하면 그때에야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부르짖게 될 것처럼 말하지만, 문맥에 따라 현재로 옮기는 것이 좋다.) 이스라엘은 언약을 어기고 선을 버렸음에도 하나님을 안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주장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한계와 위선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이 알고 있는 여호와는 곤경에 처해 부르짖으면 언제든지 개입하여 도와주시는 구원자였습니다. 이스라엘은 구원사에 관해서는 잘 알고 있지만, 언약 백성의 의무와 책임에 관해서는 무지했습니다. 언약을 어겼으면서도 언약 안에 있다고 믿기에 여호와의 징계가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하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3) 선을 버린 이스라엘의 심판(3)

 

‘좋은 것’으로 옮길 수 있는 ‘선’은 현재의 문맥에서는 언약과 관련된 표현입니다. 언약과 율법은 여호와의 구원 의지를 담고 있기에 ‘선’입니다. 어리석은 이스라엘은 언약을 어김으로 좋은 것을 버리고 심판과 저주를 택했고, 그 결과 원수에게 쫓기게 됩니다.

 

선을 버린 구체적 예(4-14)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의존할 때 그 결과가 얼마나 허망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우리의 정치적, 종교적 선택이 하나님을 기초로 하지 않을 때, 결국 그 선택은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노력은 결국 헛되며, 신뢰와 의지의 대상이 하나님이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자기를 의지하고 세상의 것들에 의존할 때, 결국 그 모든 것이 파멸로 끝나게 됨을 경고합니다.

 

4그들이 왕들을 세웠으나 내게서 난 것이 아니며 그들이 지도자들을 세웠으나 내가 모르는 바이며 그들이 또 그 은, 금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었나니 결국은 파괴되고 말리라 5사마리아여 네 송아지는 버려졌느니라 내 진노가 무리를 향하여 타오르나니 그들이 어느 때에야 무죄하겠느냐 6이것은 이스라엘에서 나고 장인이 만든 것이라 참 신이 아니니 사마리아의 송아지가 산산조각이 나리라 7그들이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 심은 것이 줄기가 없으며 이삭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요 혹시 맺을지라도 이방 사람이 삼키리라 8이스라엘은 이미 삼켜졌은즉 이제 여러 나라 가운데에 있는 것이 즐겨 쓰지 아니하는 그릇 같도다 9그들이 홀로 떨어진 들나귀처럼 앗수르로 갔고 에브라임이 값 주고 사랑하는 자들을 얻었도다 10그들이 여러 나라에게 값을 주었을지라도 이제 내가 그들을 모으리니 그들은 지도자의 임금이 지워 준 짐으로 말미암아 쇠하기 시작하리라 11에브라임은 죄를 위하여 제단을 많이 만들더니 그 제단이 그에게 범죄하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2내가 그를 위하여 내 율법을 만 가지로 기록하였으나 그들은 이상한 것으로 여기도다 13그들이 내게 고기를 제물로 드리고 먹을지라도 여호와는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악을 기억하여 그 죄를 벌하리니 그들은 애굽으로 다시 가리라 14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이를 잊어버리고 왕궁들을 세웠으며 유다는 견고한 성읍을 많이 쌓았으나 내가 그 성읍들에 불을 보내어 그 성들을 삼키게 하리라(4-14)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고 헛된 노력에 의존하며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을 무시하고 자력으로 해결하려 했지만, 모든 것이 실패로 끝났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삶을 살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1) 사람의 손으로 만든 왕권과 우상(4-6)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하는 이스라엘이 한 짓거리는 제 마음대로 왕들을 세우고 우상을 만든 것이었습니다. 왕들을 세운 것과 우상을 만든 것이 한 묶음으로 언급됩니다. 먼저 사마리아 왕궁의 권력투쟁을 신학적으로 고발합니다. 왕을 세우는 일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완전히 배제됐습니다. 사마리아의 권력자들은 여호와께 물어보지 않고 당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왕들과 지도자들을 세우고 폐했습니다. 정변으로 왕위에 오른 자는 정권찬탈에 공이 많은 자들을 고위직에 등용해 보상했습니다. 물론 왕권 자체를 부인하는 말은 아닙니다. 여로보암 사후 사마리아 왕궁에서 거듭 발생했던 정변을 고발하는 말입니다(참조. 7:3-7). 정치에서 여호와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은 사마리아의 권력집단은 종교에서도 여호와를 배반했습니다. 이들은 자기 은과 금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정치를 사유화한 자들은 소유가 불가능한 여호와를 버리고 우상을 만들어 신을 소유합니다. 이스라엘이 알고 있는 여호와는 실제로는 우상에 불과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마리아를 직접 위협하십니다. “사마리아여 네 송아지는 버려졌느니라.” 8장에서 여기서만 2인칭이 사용됩니다. ‘사마리아의 아지’는 벧엘 제의를 경멸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든 표현이다. 벧엘의 송아지는 여호와와 상관없이 사마리아의 국가권력이 사마리아를 위하여 만든 송아지에 불과하다. 선을 버리고 이스라엘이 택한 송아지는 버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심판을 되돌릴 수 없는 절망적 현실에 그분의 분노가 탄식으로 바뀝니다. “그들이 어느 때에야 무죄하겠느냐?”

사마리아의 정치권력이 국가 송아지로 만들어 벧엘에 세운 송아지의 본질과 기원이 좀 더 폭넓은 시각에서 다시 언급됩니다. 사마리아의 정변이 여호와에게서 난 것이 아닌 것처럼,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 숭배하는 송아지도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만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서 난, 장인의 작품에 불과합니다.

 

(2) 강대국에 의존하는 정치(7-10)

 

여호와를 무시하고 우상숭배의 씨를 뿌린 사마리아의 정치와 종교는 멸망의 결실을 피할 수 없습니다. 바람의 씨를 심었기에 광풍의 열매를 거두고, 씨가 싹이 터서 줄기가 자라지만, 이삭이 없어 알곡을 맺지 못합니다. 극히 일부가 열매를 맺을지라도 이스라엘은 이를 이방인에게 넘겨주어야 합니다. 무익하고 헛된 것을 추구하는 이스라엘은 멸망과 죽음의 열매를 거둬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사망은 이제 확정됐습니다. 용도 폐기된 물건이 버려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운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멸망의 심판을 되돌리고 살아남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 에브라임은 마지막까지 바람을 쫓습니다. 무리에서 떨어져 혼자 남은 들나귀 신세가 된 에브라임은 자진하여 앗수르로 올라가서 선물을 바치고 사랑을 삽니다. 어리석게도 광풍과도 같은 앗수르에 기생하여 목숨의 연장을 꾀합니다. ‘홀로 떨어진 들나귀’는 에브라임의 절망적 상황을 반영하는 비유입니다. 여호와를 무시한 동맹정책은 그분의 진노를 돋울 뿐이었습니다. 돈을 주고 앗수르의 사랑을 사서 살아남으려는 에브라임의 시도에 여호와께서 징벌로 응답하십니다. 뇌물과 조공으로 주변 나라들의 환심을 살지라도 확정된 멸망을 막지 못합니다.

 

(3) 여호와가 없는 희생제사(11-14)

 

고발의 대상이 동맹정치에서 예배로 바뀝니다. 에브라임은 선을 버리고 제의적 경건을 선택했습니다. 제단과 희생제사로 언약과 율법을 대체했습니다. 에브라임은 죄를 멀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오기보다는 제단을 만들어 지은 죄를 씻는 제의적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제단을 만들어 지은 죄를 씻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경건도 과시합니다. 죄를 많이 할수록 제단도 더 많이 세워집니다. 여호와의 은총에 속한 속죄가 그 원래적 의미를 상실하고 제의적 행위에 종속됩니다. 에브라임이 도처에 만들어 놓은 제단은 범죄를 세탁하는 우상의 제단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 우상숭배에 떨어진 에브라임을 구하기 위해 여호와는 당신의 율법을 수만 번 써주셨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습니다. 제단 쌓기를 통해서 여호와를 만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에브라임에게 그분의 율법은 이해될 수 없는 이방 언어와도 같았습니다. 가나안적 풍요제의에 익숙해진 에브라임에게 여호와의 가르침은 이질적이었습니다. 바알에 친숙한 에브라임에게 여호와는 차라리 이방 신과 같았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이상한 것으로 여기는 자들에게는 제사가 다였습니다. 여호와와의 친교는 뒷전으로 물러나고 제의 참석자의 친교가 중심에 놓입니다. 여호와를 만나는 유일한 통로로 에브라임이 알고 있는 제사가 여호와에 의해 거절됩니다. 에브라임과 여호와 사이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됩니다. 이제 에브라임은 다시 애굽으로 가야 합니다. 구속사 이전 단계로 되돌아갑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로암미’가 됩니다(1:9). 이스라엘과 유다는 왕궁과 견고한 성읍이 안전을 보장해주리라 믿지만 허상에 불과합니다(14). 여호와께서 타오르는 진노의 불로 이스라엘과 유다를 공격하시기에 어떤 방어시설도 무용지물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다른 것을 의지하며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이루려 할 때, 그 결과는 파괴적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리고 자신의 길을 가면 결국 심판을 불러오게 됩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잊고 세상의 것들을 의지하면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삶의 중요성을 되새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길은 파멸을,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은 회복과 구원을 가져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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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07-01)


하나님의 경고와 이스라엘의 불순종

호세아 7장 1-16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신의 죄를 직시하고, 그것이 삶에 미치는 영향을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의 유혹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질 때, 우리는 회복을 위해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회복은 내면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는 것이며, 우리를 향한 사랑과 인내로 기다리십니다. 이 인내는 우리를 깊은 회개와 변화를 이끄는 은혜로 이끕니다.

 

 

  • 7장에서는 이스라엘의 죄와 배신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악행을 밝혀내고, 이스라엘이 외적인 회개를 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계속해서 죄를 짓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외국의 도움을 구하면서 하나님을 멀리하며, 결국 자신들의 악행 때문에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경고를 받습니다.

 

에브라임의 죄악(1-2)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것은 아닌지, 우리의 영적 상태가 건강한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알고 계시고,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그분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언제나 우리의 회복을 원하시며, 그분의 사랑과 인내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1내가 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할 때에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이 드러나도다 그들은 거짓을 행하며 안으로 들어가 도둑질하고 밖으로 떼 지어 노략질하며 2내가 모든 악을 기억하였음을 그들이 마음에 생각하지 아니하거니와 이제 그들의 행위가 그들을 에워싸고 내 얼굴 앞에 있도다(1-2)

 

여호와의 구원 의지와 이스라엘의 죄악이 배타적으로 충돌한다. 여호와께서 치료하려 애쓰실수록 이스라엘의 병은 더 악화된다. 여호와의 치료행위가 반대결과를 가져온다. 나아지는 것은 없고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만 더 노출시킬 뿐이다. 죄의 심각성을 전혀 깨닫지 못하기에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치료해주시는 줄을 알지 못한다(참조. 11:3). 여호와의 노력이 이스라엘의 죄만 더 드러낸다. 돌아가면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죄악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들 도둑이나 강도처럼 탐심에 자신을 맡긴다. 필요하면 범죄도 주저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모든 악을 기억하고 계심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 제사 드릴 때는 여호와를 찾지만, 성전의 울타리를 벗어나면 그분은 이들의 마음에서 사라진다. 이웃에게 악을 범하고 성전을 찾아와서 용서를 받고, 다시 이웃에게로 가서 악을 범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음모로 밤을 지새우는 사마리아 왕궁(3-7)

진정한 회개와 변화는 우리의 악행과 거짓이 드러날 때 하나님께 진심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아시며 진정한 모습을 보십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며,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지도자와 리더로서 우리의 행동이 다른 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항상 염두에 두고 정직하게 섬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3그들이 그 악으로 왕을, 그 거짓말로 지도자들을 기쁘게 하도다 4그들은 다 간음하는 자라 과자 만드는 자에 의해 달궈진 화덕과 같도다 그가 반죽을 뭉침으로 발효되기까지만 불 일으키기를 그칠 뿐이니라 5우리 왕의 날에 지도자들은 술의 뜨거움으로 병이 나며 왕은 오만한 자들과 더불어 악수하는도다 6그들이 가까이 올 때에 그들의 마음은 간교하여 화덕 같으니 그들의 분노는 밤새도록 자고 아침에 피우는 불꽃 같도다 7그들이 다 화덕 같이 뜨거워져서 그 재판장들을 삼키며 그들의 왕들을 다 엎드러지게 하며 그들 중에는 내게 부르짖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3-7)

 

예언자는 화덕에 빵을 굽는 과정을 활용해(4,6,7) 사마리아 왕궁에서 거듭 발생한 정치적 혼란과 음모를 고발합니다. 왕궁에 나라와 백성을 염려하는 자는 하나도 없고, 오직 악과 거짓과 간음만 가득합니다. 탐욕적 권력투쟁에 사로잡힌 정치지도자들은 음모와 배신을 일삼으며 나라를 무정부 상태의 혼란에 빠뜨립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멸망으로 이끄는 사마리아의 죄악에 차라리 절망감을 느끼며 탄식하십니다. 거사 과정에 따라 대략 요약하자면, 3-4절은 거사 준비와 계획에, 5절은 거사 전날 밤에, 6-7a절은 계획을 행동에 옮기는 거사 날에 해당합니다. 본문의 역사적 배경은 비교적 분명합니다. 북 왕국은 주전 747년 여로보암 2세가 죽은 이후 마지막 왕 호세아 (주전 731-23)가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대략 십육 년 사이에 다섯 명이 왕위에 오르는데, 그 가운데 네 명이 암살당하는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경험합니다. 왕권이 음모와 폭력에 의해 거듭 피를 흘리며 교체됩니다. 본문은 어떤 특정 사건을 반영하기보다는 사마리아의 반복된 정변을 요약적으로 고발하는 것 같습니다. 불을 지펴 뜨겁게 달궈진 화덕이 빵을 태워버리는 것처럼 음모자들의 욕망의 불꽃이 파괴의 불이 되어 재판장들을 집어삼킵니다. ‘재판장들’ 왕을 도와 통치하는 고위관료들을 가리킵니다. 개역개정은 7절 하반절의 두 동사를 부정확하게 번역했습니다. “엎드러지게 하며”는 자동사 ‘엎드러지며’로, “부르짖는”은 ‘부르는’으로 옮겨야 합니다. “그들의 왕이 모두 죽었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나를 부르지 않는다.” 거듭된 정변으로 기존의 왕과 그 측근들이 제거되고 새로운 왕과 지배집단이 등장하지만, 아무도 여호와의 의지가 어디에 있는지 묻지 않습니다.

 

정체성을 상실한 에브라임(8-12)

우리의 삶에서 회복을 이루려면 자신의 죄와 결점을 직시하고, 하나님께 진심으로 회개하며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능력이나 자원에 의존하지 말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뢰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신앙 생활에서 경각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신뢰하는 자세를 유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심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8에브라임이 여러 민족 가운데에 혼합되니 그는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 9이방인들이 그의 힘을 삼켰으나 알지 못하고 백발이 무성할지라도 알지 못하는도다 10 이스라엘의 교만은 그 얼굴에 드러났나니 그들이 이 모든 일을 당하여도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구하지 아니하도다 11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 같이 지혜가 없어서 애굽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앗수르로 가는도다 12그들이 갈 때에 내가 나의 그물을 그 위에 쳐서 공중의 새처럼 떨어뜨리고 전에 그 회중에 들려 준 대로 그들을 징계하리라(8-12)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들과의 연합과 외적 안보를 추구하면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불법과 부패에 대해 무감각하고, 오히려 그들의 죄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자기의 길로 가고 있으며, 결국 그들의 죄로 인해 큰 고난을 맞이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1) 정체성의 상실(8-9)

 

에브라임이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민족들 가운데에 혼합됩니다. 곡식 가루에 기름을 넣어 만든 과자나 전병에서 다시 가루와 기름을 분리해낼 수 없는 것처럼, 에브라임은 민족들과 완전히 뒤섞여 차이가 없어집니다. 여호와 백성의 성격과 지위를 포기하고 주변 나라들처럼 됩니다. 정치적 생존을 위해 여호와의 보호와 인도를 거절하고 민족들과 연합하는 길을 선택하지만, 에브라임을 기다리는 것은 “뒤집지 않은 전병”의 운명입니다. 본문의 전병은 뜨겁게 달궈진 돌 위에 구운 빵을 가리킵니다. 제때에 뒤잡지 않으면 금방 타버렸습니다. 윗면은 잘 익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 밑면은 까맣게 타서 버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에브라임은 뒤집지 않아 아래가 타서 쓸모없게 된 전병입니다. 에브라임은 치명적인 위험에 빠져들면서도 이를 깨닫지 못합니다. 뒤집기를, 곧 멸망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인 여호와께 돌아오길 거절합니다. 불에 탄 전병이 내버려지는 것처럼, 여호와를 버린 에브라임도 버려집니다. 이방인들이 그의 힘을 먹어 치우는데도 에브라임은 깨닫지 못합니다. ‘이방인들’로 번역한 ‘자림’은 외국인뿐만 아니라, 여호와와 이스라엘 사이의 실존적 관계를 위태롭게 하는 모든 이질적 요소를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이방인들’은 아람과 앗수르와 애굽을 가리킨다.)

 

(2) 이스라엘의 교만(10)

 

민족들과 뒤섞여 살기를 선택한 에브라임은 이방의 요소들이 제 힘을 먹어 치워도 이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벌써 흰머리가 자라기 시작했는데도 이를 깨닫지 못합니다. 민족들이 다 집어삼켜 그 힘이 거의 고갈됐는데도 자신의 능력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교만에 사로잡혔기에 여호와께로 돌아가지도 그분을 찾지도 않습니다.

 

(3) 심판을 자초하는 에브라임의 어리석음(11-12)

 

에브라임이 어떻게 해서 '뒤집지 않은 전병이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여호와를 떠난 에브라임은 어리석고 지혜가 없는 비둘기 같아서 애굽과 앗수르에 양다리를 걸치고 춧대 없이 처신한다. 여호와를 부르지 않고(7절) 애굽을 부르고,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않고(10절) 앗수르로 간다. 에브라임은 자신의 운명을 신뢰할 수 없는 기회주의적 외교정책에 내맡긴다. 바로 이러한 지각없는 처신이 에브라임을 '뒤집지 않은 전병'으로 만든다. 방향감각을 상실한 비둘기 같은 에브라임에 맞서 여호와께서 새 사냥꾼이 되신다. 여호와께서 앗수르와 애굽을 찾아가는 에브라임 위로 그물을 던져 공중의 새처럼 낚아채실 것입니다. 예언자가 선포한 대로 여호와께서 징계하실 것입니다. “징계하리라”는 여호와의 징벌이 관계의 완전한 단절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시작을 내다보는 정화의 심판이 될 것임을 함축적으로 보여줍니다(참조, 5:2,9).

 

화를 선포(13-16)

하나님의 진리를 떠나지 않고 자신의 죄를 직시하며 회개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우리의 힘이나 자원에 의존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며, 그분만이 우리의 참된 도움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려움과 재난 속에서도 하나님께 돌아가 그분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며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13화 있을진저 그들이 나를 떠나 그릇 갔음이니라 패망할진저 그들이 내게 범죄하였음이니라 내가 그들을 건져 주려 하나 그들이 나를 거슬러 거짓을 말하고 14성심으로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며 오직 침상에서 슬피 부르짖으며 곡식과 새 포도주로 말미암아 모이며 나를 거역하는도다 15내가 그들 팔을 연습시켜 힘 있게 하였으나 그들은 내게 대하여 악을 꾀하는도다 16그들은 돌아오나 높으신 자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니 속이는 활과 같으며 그들의 지도자들은 그 혀의 거친 말로 말미암아 칼에 엎드러지리니 이것이 애굽 땅에서 조롱거리가 되리라(13-1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배신과 죄악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자신의 고통을 외면하고, 회개하지 않으며, 도움을 다른 곳에서 찾으려는 모습이 언급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불순종과 교만으로 인해 심판을 내리실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1) 에브라임의 거역(13-14)

 

6:7에서 시작한 고발이 이제 그 정점에 도달합니다. 여호와께서 비통한 마음으로 에브라임의 불순종과 배반을 개인적으로 고발하십니다. 여호와는 도와주려 애쓰시지만 에브라임은 도망치려고만 합니다. 여호와께서 심판의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리십니다. 에브라임의 배반이 여호와의 구원 의지를 심판 의지로 바꾸어놓습니다. 이들은 여호와를 떠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거짓에 불과합니다. 여호와를 찾기는 했지만, “성심으로” 그분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여호와를 부르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가나안의 신 바알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곡식과 새 포도주”를 위해 “침상에서” 슬피 부르짖습니다. ‘풍요의 부재’가 이들이 탄식하는 이유였습니다. 여호와의 부재는 이들의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여호와를 떠나 범죄한 결과로 곡식과 포도주가 사라졌는데, 사라진 곡식과 포도주만 안타까워하며 탄식합니다.

 

(2) 에브라임의 배은망덕(15)

 

에브라임의 배반은 한마디로 배은망덕입니다. 여호와께서 구원의 역사와 말씀의 가르침을 통해 당신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훈련시켜 주셨지만, 에브라임은 자신의 능력과 강대국의 도움을 선택하고 그분께 거슬러 악을 꾀할 뿐입니다. 에브라임은 여호와께로 돌아왔다고 말하지만, 이는 이들의 생각일 뿐입니다. 에브라임이 돌아오기는 했지만, ”높으신 자에게로“ 돌아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원 능력이 있는 ‘높으신 자’(여호와)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구원 능력이 없는 ‘높지 않은 자’(바알)에게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동맹정책을 통해 국가의 생존을 도모하던 지도자들은 모두 칼에 맞아 죽고, 에브라임은 쓸모없는 활처럼 버려질 것입니다.

 

(3) 애굽의 조롱거리(16)

 

예전에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이적과 기사를 경험했던(신 6:23) 애굽이 우상을 섬기다 멸망당한 에브라임을 보고 그 어리석음을 조롱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잊고 교만에 빠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시며 회복의 약속을 주십니다. 진정한 회개는 우리의 마음과 행동을 변화시키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어지게 합니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격려하며, 하나님께 돌아가고 그분의 사랑을 경험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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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06-01)


진정한 회개와 하나님의 사랑

호세아 6장 1-11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회복을 원하시며, 우리가 그분의 사랑에 응답할 때 놀라운 일들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회복의 약속을 믿고 적극적으로 나아갈 때, 우리에게 생명과 회복을 주십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새벽같이 나타날 것”이라는 약속은 우리를 감싸고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합니다. 진정한 헌신은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우리의 삶은 자연스럽게 그분의 뜻을 이루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 본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하기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회개를 원하시며, 그들을 치유하고 회복시키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회개는 일시적이고 진실하지 못했으며, 그들의 불순종과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임을 경고하십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음을 선언하십니다.

 

에브라임의 회개(1-3)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우리의 삶은 자연스럽게 그분의 뜻을 이루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기반이 되며, 이는 우리의 신앙 생활의 중심이 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는 우리의 삶에서 많은 변화를 일으키고, 우리가 세상에서 마주하는 도전과 시련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게 합니다.

 

1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3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1-3)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로 돌아가 회복을 경험할 것을 촉구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치유하시고 회복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에서 그분의 사랑과 은혜가 새롭게 나타날 것임을 강조합니다.

 

(1) 여호와께 돌아가자(1-2)

 

현재의 문맥에서 1-3절은 하나님의 부재에 직면한 에브라임의 반응입니다. 여호와께서 구원자를 찾아 앗수르로 내려가는 에브라임을 사자처럼 찢고 당신 처소로 돌아가시자 이스라엘이 구원을 바라고 여호와께로 돌아옵니다. 정치적 시각에 따라 병을 진단했던(5:13) ‘우리’가 마침내 신학적 시각으로 병을 바라봅니다. 이들은 여호와께로 돌아가면 그분께서 고쳐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이들의 돌아감은 일견 확신에 찬 신뢰의 고백처럼 들리지만, 조금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결여된 피상적인 고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이 돌아오는 유일한 목적은 병을 치료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들은 돌아가기만 하면 여호와께서 무조건 병을 치료해주시리라 믿습니다. 현재의 환난이 여호와로부터 왔음은 인정하지만, 이스라엘의 의사이신 여호와께서 어떤 연유에서 ‘좀’과 ‘썩이는 것’이 되셨는지 (5:12)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들의 돌아옴에는 죄와 고난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나 이해가 빠져있습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이 고난 중에 당신을 간절히 구하기를 기대하시지만(15), 이들은 여전히 제의적 언어로 여호와를 찾습니다. ‘이틀 후’와 ‘셋째 날’은 아주 짧은 시간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사자에 찢긴 양처럼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음에도, 이들은 여호와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즉각적으로 구원이 주어지리라 생각합니다. 이들의 이해에 따르면 ‘돌아감’이 치료와 구원을 결정합니다. 곧 구원에 있어 돌아가기로 결정한 이스라엘이 주체가 되고, 여호와는 종속변수가 됩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로 돌아오면, 상응해서 당신 처소로 돌아가신 여호와께서도 다시 성전으로 돌아오십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었던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제의에 종속된 바알처럼 이해합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도 그 자체로는 흠이 없는 완벽한 고백입니다.

 

(2) 여호와를 알자(3)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에 여호와께로 돌아갈 수 없었던(5:4) 이스라엘이 여호와께로 돌아가서 그분을 알자고 서로 권면합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다는 호세아의 고발을 이스라엘이 그대로 받아들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뒤따르는 이스라엘의 고백은 이들이 힘써 알고자 했던 여호와가 이름만 여호와일 뿐, 실제로는 바알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활동을 순환적인 자연현상에 비교합니다. 어둠이 지나면 반드시 새벽빛이 나타나는 것처럼 얼굴을 숨기셨던 여호와께서도 때가 되면 반드시 다시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의 숨으심(심판)과 나오심(구원)을 주기적인 자연현상처럼 이해합니다. 이들에게 여호와는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러 오시는 분입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에게서 바라는 것은 가나안 사람들이 숭배하는 바알의 역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4-6)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내적 평화를 가져오고,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이는 대인 관계를 개선하고 삶의 목적을 찾게 하며, 신앙의 성장을 촉진합니다. 또한,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감사의 마음을 키우는 계기가 됩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우리의 삶을 더욱 의미 있게 변화시킵니다.

 

4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5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6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4-6)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그들의 헌신이 형식적이지 않기를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인애와 진정한 관계를 원하시며, 백성이 진심으로 그분께 돌아오기를 바라십니다. 이러한 회개와 헌신을 통해 하나님은 그들에게 생명과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1) 하나님의 탄식(4)

 

돌아가기만 하면 언제라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이스라엘의 자신감 넘치는 고백에 여호와께서 깊이 탄식하십니다. 이들의 피상적인 돌아옴이 그분을 절망에 빠뜨립니다. 에브라임과 유다는 상황의 심각성과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제의적 경건으로 반응합니다. 이들의 돌아옴에는 철저함과 지속성이 결여 됐습니다. 이들의 인애는 아침 구름 같고, 곧 사라져버리는 이슬 같습니다. ‘아침 구름’과 ‘이슬’의 표상은 여호와의 탄식을 3절에 연결 시켜줍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구원은 어둠을 뚫고 나타나는 새벽빛처럼 확실하고, 때에 따라 내리는 비처럼 축복을 가져다준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여호와는 이들의 인애라고 하는 것은 새벽빛이 비추기 시작하면 곧 사라져버리는 아침 구름이나 이슬에 불과하다고 답변하십니다. 에브라임과 유다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다면, 이들의 운명도 ‘아침 구름같이 쉬 사라지는 이슬같이’ 허무하게 끝나버릴 것입니다(13:3).

 

(2) 하나님의 답변(5-6)

 

인애가 없는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의 심판은 필연입니다.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도 4절을 3절에 연결시켜줍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는 자들에게 그분의 빛은 심판을 의미할 뿐입니다. 그분의 빛은 아침 구름과 이슬에 불과한 이스라엘의 인애의 실체를 폭로하고, 이들의 위선과 거짓을 심판합니다. 이스라엘은 열심히 제사와 번제를 드렸다고 여호와의 책망에 반론을 제기할 수 있겠지만, 이는 이들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음을 보여줄 뿐입니다. 인애가 없는 자들의 제사는 참석하는 자들만의 축제에 불과합니다. 여호와께서 우선적으로 원하시는 것은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제사와 번제로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인애(헤세드)는 언약에 근거한 개념으로, 하나님께 대해서는 성실함과 전적인 신뢰로, 이웃에 대해서는 하나님 백성으로 함께 살아가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연대성으로 나타납니다. 한마디로, 인애는 사회적 공간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성실하게 준수하며 사는 삶을 가리킵니다.

 

에브라임의 구체적 고발(7-11)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회복의 기회를 주시며, 우리의 진정한 회개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흔들리면 세상의 유혹에 빠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언약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과의 신뢰를 쌓는 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그 말씀에 귀 기울이며 회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7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 8길르앗은 악을 행하는 자의 고을이라 피 발자국으로 가득 찼도다 9강도 떼가 사람을 기다림 같이 제사장의 무리가 세겜 길에서 살인하니 그들이 사악을 행하였느니라 10내가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거기서 에브라임은 음행하였고 이스라엘은 더럽혀졌느니라 11또한 유다여 내가 내 백성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네게도 추수할 일을 정하였느니라(4-1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형식적인 제사보다 진정한 마음의 회개와 헌신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인애와 관계를 중시하시며, 백성이 회복의 약속을 믿고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삶에 놀라운 변화를 이루시길 바라십니다.

 

(1) 구체적 고발(7-9)

 

현재의 문맥에서 6:7-7:16의 고발은 이스라엘의 불성실한 회개를 보여주는 구체적 증거들입니다. 히브리어 본문을 따르는 개역개정의 번역에 의하면 여호와는 “그들”의 반역을 아담의 불순종에 비교해 고발하십니다. 아담이 언약을 어긴 것처럼 ‘그들’도 언약을 어기고 여호와께 신의 없이 행동하였습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 동산 가운데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는 창조주의 명령(창 2:17)을 위반하고 그분께 반역하였습니다. 아담이 불순종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탄에 빠뜨린 것처럼 ‘그들’도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언약을 파기하였습니다. (때로는 ‘아담처럼’을 ‘아담에서’로 수정하여 읽기도 한다.) 병행의 “거기에서”는 앞에 장소가 나왔음을 전제하고, 8절과 9절도 특정 장소에서 자행된 범죄를 고발하기에 ‘아담’을 장소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 더 일치합니다. ‘아담’은 요단 동편 얍복 강가에 있는 성읍으로 여호수아 3:16에 한 번 더 언급됩니다. 두 번째 고발 길르앗의 악행입니다. 길르앗은 피 묻은 발자국으로 가득찬, 악을 행하는 자들의 고을입니다. 길르앗은 이곳을 제외하고 거의 언제나 요단 동편 지역을 가리키는 지방의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악을 행하는 자”는 불의와 불법을 범해 공동체에 재앙을 가져오는 자를 가리키는 포괄적 표현입니다. 피 묻은 발자국은 사회정치적 불의와 폭력을 함축하는 표현처럼 보입니다. 세 번째 고발은 제사장들의 사악입니다. 강도가 길가에 숨어서 약탈할 대상을 기다리듯이 제사장 무리가 세겜으로 가는 길목에 진을 치고 살인을 합니다. 살인을 주저하지 않는 제사장들의 정체와 그 배경에 관해서는 본문이 달리 언급하지 않습니다. “사악으로 옮긴 히브리어(지마)는 특히 근친상간의 수치스러운 악행을 의미합니다.

 

(2) 에브라임의 음행(10)

 

제사장들의 살인 행위를 파렴치한 성적 이탈로 고발합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음행으로 더럽혀졌습니다(10-11). “가증한 일”(10)은 우상숭배나(참조, 렘 18:13), 하나님께 속한 제사장이나 예언자가 그분께 거슬러 범하는 악행을(참조, 렘 5:30; 23:14), “음행”은 가나안의 풍요제의(참조. 4:4-5:7)를 가리킵니다. 에브라임의 음행을 고발한 다음에 갑자기 유다에게 심판을 선포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유다라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3) 유다의 심판(11)

 

유다도 에브라임과 동일한 운명에 떨어집니다. 특이하게도 여호와께서 ‘내 백성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유다가 심판을 받습니다. 아마도 본문은 유다도 에브라임처럼 심판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말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가 회복을 경험하고 진정한 헌신으로 그분의 사랑에 응답해야 하며, 이를 통해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세우고 그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회복의 약속을 기억하며 공동체 전체가 함께 나아가 그분의 은혜를 경험하는 과정 속에서 서로 격려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양할 때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 흘러넘칠 것이며, 하나님은 우리의 회복을 원하시기에 우리가 그분의 사랑에 응답할 때 놀라운 일을 이루실 수 있도록 오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회복의 약속을 믿으며 적극적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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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05-01)


이스라엘의 죄와 하나님의 경고

호세아 5장 1-15절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사랑해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보다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속속히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숨길 수 있는 죄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르시는 아픔과 고통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하나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아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회개할 수 있습니다. 모든 눈물과 상처를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회복의 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통해서 다시 새로운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 에브라임은 음행하고 이스라엘은 더러워져 음란한 마음 때문에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여호와께 돌아가지 못합니다. 또한 여호와를 찾아도 만나지 못합니다. 에브라임과 유다가 진노로 인한 병과 상처를 깨달으나 고칠 자가 없습니다. 고난의 때에 그들은 주님을 간절히 구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떠나신 여호와(1-7)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을 떠난 삶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의 유혹과 죄는 처음에는 달콤해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이 우리를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고, 결국 영적으로 무감각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빛을 떠난 삶은 어둠 속에서 길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인도하심 없이는 바른 길을 찾을 수 없으며, 결국 영적으로 파멸에 이를 수 있습니다.

 

1제사장들아 이를 들으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깨달으라 왕족들아 귀를 기울이라 너희에게 심판이 있나니 너희가 미스바에 대하여 올무가 되며 다볼 위에 친 그물이 됨이라 2패역자가 살육죄에 깊이 빠졌으매 내가 그들을 다 벌하노라 3에브라임은 내가 알고 이스라엘은 내게 숨기지 못하나니 에브라임아 이제 네가 음행하였고 이스라엘이 더러워졌느니라 4그들의 행위가 그들로 자기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나니 이는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 5이스라엘의 교만이 그 얼굴에 드러났나니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과 에브라임이 넘어지고 유다도 그들과 함께 넘어지리라 6그들이 양 떼와 소 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갈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은 이미 그들에게서 떠나셨음이라 7그들이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고 사생아를 낳았으니 그러므로 새 달이 그들과 그 기업을 함께 삼키리로다(1-7)

 

1-4절 정치 종교지도자들의 악행과 에브라임의 타락 이스라엘의 종교와 사회와 정치를 책임진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족속들과 왕족들이 여호와의 고발에 넘겨집니다. 제사를 드리기 위해 짐승을 잡듯 백성을 잡는 패역자들이 바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입니다. 지도자들이 부패했는데 백성이 깨끗할 수는 없습니다(3-4).

 

(1) 정치-종교지도자들의 악행(1-2)

 

이스라엘의 종교-정치지도자들은 부패한 무능력자들이었습니다. 사냥꾼이 올무와 그물로 짐승을 잡듯이 이들은 공공연하게 불의와 폭력으로 백성을 억압합니다. 지도자들에 의해 바른 길로 인도받지 못하는 백성은 우상숭배의 음행에 빠져 사생아를 낳습니다. 위로부터 아래까지 어느 곳도 예외 없이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여호와께서 다 알고 계시기에 이스라엘은 자신의 음행과 더러움을 감추거나 변명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기에 에브라임은 자신의 음행을 숨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여호와는 에브라임의 음행)을 아십니다. 에브라임의 형편이 절망적인 이유는 죄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풍요의라는 마약에 중독돼 성전과 산당을 찾아가서 바알을 숭배하듯이 여호와를 섬기면서도,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우상숭배에 불과한 자신들의 제의적 경건에 만족해하기에, 되돌아볼 동기나 필요가 생기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에브라임은 죄의 종이 됐습니다.

 

(2) 떠나신 하나님(5-7)

 

“이스라엘의 교만이 그 얼굴에 드러났나니”는 ‘이스라엘의 교만이 그들 자신을 거슬러 증거하나니’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음행으로 더러워졌다는 하나님의 고발에(3) 이스라엘은 무죄를 주장하지만, 얼굴에 쓰인 이들의 교만이 유죄를 증거합니다. 음행의 증거가 너무 분명하기에 다른 증인이 필요 없습니다. 음행의 더러움을 인정하지 않는, 여호와께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이스라엘의 영적 무지와 무감각을 가리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교만의 죄악에 걸려 넘어집니다. “유다도 그들과 함께 넘어지리라”는 죄악에 있어 유다도 이스라엘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알기에 성소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냐고 항변하지만, 예언자는 ‘여호와를 앎’과 ‘성소를 찾음’을 구별합니다. 성전이나 산당을 찾아가는 제의적 경건은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이도 가능합니다. 누구나 제의 규정에 따라 양 떼와 소 떼를 끌고 성전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전을 찾는 자가 모두 여호와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를 아는 자만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음행으로 더러워진 자들에게 그분은 멀리 떠나신 분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고 사생아를 낳았으니”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새 달이 그들과 그 기업을 함께 삼키리로다”의 의미는 약간 모호합니다. ‘그 기업’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각 씨족에게 상속재산으로 주신 땅을, ‘새 달’이 초하룻날의 축제를 가리킨다면, 새 달에 즐겁게 축제 음식을 먹었던 이스라엘이 이제 그 기업과 함께 새 달의 먹이가 됩니다.

 

에브라임과 유다의 징벌(8-15)

우리가 삶의 고통과 어려움을 겪을 때, 그것을 단순한 불행으로 여기지 말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통 속에서 그분을 찾고, 회개하며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께 돌아올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다시 회복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하나님께 온전히 돌아가는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8너희가 기브아에서 뿔나팔을 불며 라마에서 나팔을 불며 벧아웬에서 외치기를 베냐민아 네 뒤를 쫓는다 할지어다 9벌하는 날에 에브라임이 황폐할 것이라 내가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반드시 있을 일을 보였노라 10유다 지도자들은 경계표를 옮기는 자 같으니 내가 나의 진노를 그들에게 물 같이 부으리라 11에브라임은 사람의 명령 뒤따르기를 좋아하므로 학대를 받고 재판의 압제를 받는도다 12그러므로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좀 같으며 유다 족속에게는 썩이는 것 같도다 13에브라임이 자기의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고 에브라임은 앗수르로 가서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그가 능히 너희를 고치지 못하겠고 너희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리라 14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사자 같고 유다 족속에게는 젊은 사자 같으니 바로 내가 움켜갈지라 내가 탈취하여 갈지라도 건져낼 자가 없으리라 15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8-15)

 

이스라엘과 유다가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경고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교만과 죄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그들을 징벌할 것이며, 결국 그들이 하나님을 찾을 때까지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하려는 의도입니다.

 

(1) 에브라임을 벌하시는 날(8-9)

 

나팔을 부는 목적이 모호합니다. 유다의 공격에 대비하여 성안으로 피하라는 신호로도, 기브아와 라마 사람들에게 함께 에브라임을 치러 전쟁에 나가자는 외침으로도 이해가 가능합니다. 언급된 지명에 따르면 공격이 예루살렘에서 산지의 분수계(分界)를 따라 난 간선도로를 이용해 북 왕국의 중심부인 에브라임 산지로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분명한 것은 정조를 버리고 사생아를 낳은 에브라임에 선포된 심판이 이제 현실화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유다가 예루살렘 북쪽 경계의 베냐민 땅을 넘어 진격해 올라가고, 에브라임은 기브아와 라마를 빼앗기고 후퇴합니다. 에브라임 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경계에 있는 북왕국의 국가 성소 벧엘(벧아웬)에서도 전쟁의 경고음이 발합니다. 여호와께서 정치적 이해타산에 따라 다메섹과 함께 유다를 공격한 에브라임을 폐허로 만드십니다. 그러나 에브라임의 황폐함은 깨달음에 이르게 하려는 징벌입니다.

 

(2) 유다 지도자들에 대한 위협의 말씀(10)

 

하나님께서 아람과 연합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한 에브라임을 징계하기로 결정하셨지만, 그렇다고 앗수르의 침략으로 야기된 북 왕국의 군사적 위기를 이용해 국경을 넘는 유다의 침략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10). 정치적 이유에서 형제를 침략한 에브라임이나 유다나 모두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현재의 문맥에서 유다의 역할은 이중적입니다. 유다는 사생아를 낳은 에브라임을 징계하시려는 하나님 심판의 도구이자 동시에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에브라임의 땅을 빼앗아 영토를 확장하려는 유다 정치가들이 “경계표를 옮기는 자”에 비유됩니다. 신명기의 율법은 땅의 경계를 임의적으로 바꾸지 못하게 엄히 금합니다(신 19:14). 유다의 북침은 언약법 위반에 해당했습니다.

 

(3) 에브라임에 대한 탄식(11)

 

원문이 일부 불분명하기는 하지만, 11절은 다음과 같이 옮길 수 있습니다. “에브라임은 억압당하고 심판을 받아 짓밟혔다. 그가 헛된 것을 애써 좋았기 때문이다”(ESV; NIV;NRS). 에브라임을 벌하는 날이 그 모습을 드러내자,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의 절망적 처지를 탄식하십니다. 불법과 폭력이 심판에 떨어진 에브라임을 지배하고, 사람들이 억압을 당합니다. 현재의 문맥에 따르면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의 파국적 결과가 가져온 비극입니다. 남쪽 국경지대로 제한된 유다의 공격과 달리 앗수르의 침략은 전면적이었습니다. 에브라임은 앗수르에 항복해서 겨우 목숨은 연명할 수 있었지만 전쟁의 피해는 치명적이었습니다. 에브라임 산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영토를 빼앗겼고, 사회는 통제할 수 없는 무질서에 빠졌습니다. 에브라임은 헛된 것을 좇다가 헛 것이 됐습니다. ‘헛된 것’은 우상이나 이방 정치세력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4) 에브라임과 유다의 징벌 선언(12-14)

 

에브라임과 유다에 대한 위협의 말씀이 나옵니다. 음행과 불순종이 의사이신(출 15:26) 여호와를 병의 원인으로 만듭니다.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에게 ‘좀처럼 유다에게 썩이는 것’처럼 되십니다. 옷을 해어지게 해서 못쓰게 만드는 좀은 언제나 멸망이나 덧없음과 관련된 부정적 문맥에 등장합니다(참조. 욥 4:19; 시 39:11; 사 50:9). ‘썩이는 것’은 뼈를 곪게 만드는 골(骨)로 죽음에 이르는 부패나 부식을 함축합니다(참조, 욥 13:28; 잠 12:4; 합 3:16). 좀과 골저가 조금씩 속에서 진행되다가 결국에는 옷을 못 쓰게 만들거나 사람을 죽이는 것처럼, 여호와께서 에브라임과 유다에 보내신 질병도 그러합니다. 옷을 상하게 하는 좀은 외적 파괴를, 뼈를 썩게 하는 상처는 내적 부패를 함축하는 것 같습니다. 에브라임과 유다는 너무 늦지 않게 자신의 병과 곪은 상처를 인식하지만, 그 원인을 찾는 데는 실패합니다. 이들은 정치적·사회적 재앙이 언약 파기에 따른 여호와의 징계로 생긴 병임을 깨닫지 못하고, 병의 원인을 군사적 열세에서 찾습니다. 병의 진단이 잘못되면 처방도 잘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의사이신 여호와를 찾지 않고 ‘헛된 것’인 앗수르에게 병의 치료를 맡깁니다. 에브라임과 유다의 병은 여호와에게서 기인하기에 하나의 정치세력에 불과한 앗수르가 이들을 고쳐줄 수는 없습니다. 굶주린 사자가 먹이를 찾아 공격하듯이 여호와께서 에브라임과 유다를 무섭고도 난폭하게 공격하실 것입니다. ‘좀과 썩이는 것’의 비유가 심판의 점진성을 보여준다면, ‘사자와 젊은 사자’의 비유는 심판의 단호함과 철저성을 강조합니다.

 

(5) 당신 처소로 돌아가신 하나님(15)

 

심판에 떨어진 이스라엘에게 기회가 한 번 더 주어집니다(15). 여호와는 이스라엘이 당신의 얼굴을 찾을 때까지 당신 처소로 돌아가 기다리십니다.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는 단절과 징계를 의미하지만,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는 단절과 징계가 그분의 궁극적 목적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이 벌을 받고 고난 중에 있을 때 당신을 간절히 찾기를 기대하십니다.


우리에게 죄의 심각성과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께 돌아올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에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며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우리의 삶을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 나아갑시다. 회개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기쁘게 받아주시고, 우리의 영혼을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올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께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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