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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21-02)

 


이스라엘의 비극적인 결말

사사기 21장 13-25절


 

지난번 한 드라마의 내용이 주인공이 비극적으로 죽어가는 상황으로 마무리되는 작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청자들이 드라마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주인공을 죽어서는 안 된다고 글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슬프게 끝나야 할 드라마가 해피엔딩으로 끝난 경우를 보았습니다. 대부분 드라마의 결말은 행복하게 끝나길 원합니다. 모든 소설, 연극 그리고 영화들을 보면, 결말이 두 가지 중 하나입니다. 주인공이 행복하게 살았다는 “happy ending”과 비극적으로 끝납니다. 사사기의 결말은 비극적인 결실을 맺습니다. 우리의 삶이 행복한 결말로 맺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 반복되는 우상숭배를 비롯해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기록한 사사기는 막을 내립니다. 사사기에 기록된 크고 작은 사건들과 죄악들은 결국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한 결과입니다. 사사 시대의 문제는 왕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했다는 것입니다. 지난 강에 보았던 베냐민 지파에 대한 아내를 구하는 것도 인위적인 방법으로 구합니다. 이제 사사기의 결말을 보겠습니다.

 

더렵혀진 결혼 제도(13-18)

성숙한 성도들은 문제가 발생하면 스스로 해결하기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해결하려 합니다. 미숙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문제를 해결하려다가 더 큰 문제를 만들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일들은 어떤 좋은 결과가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고민은 고민을 낳고 문제는 문제를 낳으면서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 남아있습니다.

 

13온 회중이 림몬 바위에 있는 베냐민 자손에게 보내어 평화를 공포하게 하였더니 14그 때에 베냐민이 돌아온지라 이에 이스라엘 사람이 야베스 길르앗 여인 중에서 살려둔 여자를 그들에게 주었으나 오히려 부족하므로 15백성들이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쳤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 한 지파가 궐이 나게 하셨음이더라 16회중 장로들이 가로되 베냐민의 여인이 다 멸절되었으니 이제 그 남은 자들에게 어떻게 하여야 아내를 얻게 할꼬 17또 가로되 베냐민의 도망하여 면한 자에게 마땅히 기업이 있어야 하리니 그리하면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사라짐이 없으리라 18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딸을 그들의 아내로 주지 못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맹세하여 이르기를 딸을 베냐민에게 아내로 주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하였음이로다(13-18)

 

모든 이스라엘이 베냐민 지파 기브아 사람들의 잘못한 것을 징벌하기 모였습니다. 너무나 분노한 나머지 베냐민 지파를 전멸시켜 버립니다. 남녀노소를 칼날로 다 죽이고 그 베냐민 성읍까지 불태워 버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딸들을 주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른 후, 마음이 평정심을 찾아보니깐, 자신들의 행위가 지나친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동족인 베냐민 지파들이 불쌍했던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온 회중과 베냐민 사이에 화해 분위기가 조성됩니다. 림몬 바위에 숨어 지내는 베냐민 자손 600명(20:47)에게 사람을 보내 평화를 선언합니다. 그 동안 베냐민 자손은 죽을까봐 두려워했겠지만, 이제 상황이 호전된 이상 이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기브아의 죄인을 내놓으라고 요구받았을 때는 이기적으로 거절했으나(20:13-14),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순순히 기회를 잡습니다. 이들의 이기심 때문에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마땅한 죗값을 받았는지조차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전쟁에서 다 죽었을 수 있지만, 이 600명 속에 끼어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스라엘 회중은 베냐민 자손에게 야베스 길르앗의 젊은 처녀 400명(12)을 화해의 선물처럼 주어서 아내로 삼게 합니다. 베냐민 자손들이야 고맙겠지만, 가족과 친척을 다 잃고 강제로 남의 아내가 되어야 하는 야베스 길르앗의 여인들의 심정은 짐작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관심은 남은 200명의 베냐민 자손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데만 있었습니다. 15절은 6절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베냐민을 위해 뉘우쳤다’로 시작하면서 18절까지 다시금 앞의 1-2, 6-7절의 내용을 소환합니다. 반복된 내용은 베냐민 지파의 멸족위기와 여자의 부족 문제입니다. 여기서 이를 반복하는 목적은 200명의 여자를 찾을 다른 방책(19-22)을 제시하기 위함입니다. 한편 15절의 이스라엘의 뉘우침은 6절과 비교했을 때 달라진 점이 있습니다. 6절에서는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사라지는 것에 안타까움을 표현했지만, 이번에는 여호와가 이스라엘 지파들 사이에 ‘틈’을 만드셨다고 설명합니다. ‘틈’이란 ‘파열’, ‘터짐’을 뜻합니다. 이 설명은 6절과 같이 백성들의 생각인지, 저자의 해석인지 모호합니다. 저자의 해석이라면 이스라엘 공동체의 분열이 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임을 알리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백성의 생각이라면 2절에서처럼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스라엘 중 한 지파가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이번에는 이스라엘 회중의 장로들이 개입합니다. 이미 베냐민 여자들이 전쟁에서 멸절했기 때문에(16), 야베스 길르앗의 여자들을 구해준 후에도 여전히 200명이 모자랍니다. 장로들 또한 자기들의 딸을 베냐민의 아내로 주지 못하는 실정에 개탄합니다. 그렇게 하는 자들에게 저주가 임할 것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입니다(18). 또한, 그들은 600명의 베냐민 자손이 그들에게 할당된 기업을 제대로 돌볼 수 있을지도 신경을 씁니다. 장로들의 염려는 얼핏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백성을 향한 관심과 긍휼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베냐민 여자들이 전쟁에서 멸절되었다.’라고 함으로써 자신들이 멸절의 장본인임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은 저주받을까 봐 딸을 못 준다고 하면서, 다른 백성의 딸을 빼앗아 주려는 심보는 얼마나 고약합니까? 남겨진 베냐민 자손을 ‘베냐민의 도망자’로 부르는 것은 그들을 업신여기고 있음을 보여줍니다(참조. 12:4). 백성들이나 지도자 사이에 여전히 존재하는 상대 지파에 대한 무시와 비하의 태도입니다. 사사 시대의 장로들 역할은 여호수아 사후 생존했던 장로들이 이스라엘로 여호와를 섬기는 데 한몫을 감당한 것(2:7)과 아주 대조적입니다. 입다 당시 길르앗 장로들은 하나님께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를 보내 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스스로 용사를 물색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권력을 홍정하여 입다를 길르앗의 머리로 고용했습니다(11:5).

본문의 장로들 또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하나님 눈에 옳은 방법을 찾아야 하지만, 인간적인 머리를 짜내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방법을 찾아냅니다. 두 예를 통해 본 장로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이나 그들의 행위는 영적 지도자와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들 안에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이 우선순위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참한 유괴사건(19-24)

왕이 없는 사람들의 행동은 자기 편할 때로 생각하고 행동함으로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또 다른 비극을 낳습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지도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말도 되지도 않는 이상한 제안을 합니다. 본문에는 여호와의 절기에 이루어진 비참한 유괴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9또 가로되 보라 벧엘 북편, 르보나 남편 벧엘에서 세겜으로 올라가는 큰길 동편 실로에 매년 여호와의 절기가 있도다 하고 20베냐민 자손에게 명하여 가로되 가서 포도원에 숨어 21보다가 실로의 여자들이 무도하러 나오거든 너희는 포도원에서 나와서 실로의 딸 중에서 각각 그 아내로 붙들어 가지고 베냐민 땅으로 돌아가라 22만일 그 아비나 형제가 와서 우리에게 쟁론하면 우리가 그에게 말하기를 청컨대 너희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들을 우리에게 줄찌니라 이는 우리가 전쟁할 때에 각 사람을 위하여 그 아내를 얻어 주지 못하였고 너희가 자의로 그들에게 준것이 아니니 너희에게 죄가 없을 것임이니라 하겠노라 하매 23베냐민 자손이 그같이 행하여 춤추는 여자 중에서 자기들의 수효대로 아내로 붙들어 가지고 자기 기업에 돌아가서 성읍들을 중건하고 거기 거하니라 24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그곳을 떠나 각각 그 지파, 그 가족에게로 돌아가되 곧 각각 그곳에서 나와서 자기 기업으로 돌아갔더라(19-24)

 

이에 이스라엘 장로들은 부족한 200명의 여자를 얻어 줄 방법을 생각해 베냐민에게 가르쳐 줍니다. 베냐민 사람들의 범죄 함이 크니깐, 그들에게 화를 내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맹세를 어기지 않으면서도 좋은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들의 방법은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잘못된 맹세를 했다면, 그 자리에서 고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한 지나친 맹세를 지키기 위해서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장로들이 생각해낸 방법은 실로의 여자를 납치하는 것입니다. 이는 앞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야베스 길르앗 해결책(7-11)보다 더 추악하여, 악행과 망령된 일의 표본을 만들어냅니다. 장로들은 실로의 명절을 여자 납치의 절호의 기회라 여겼습니다. 그들은 실로가 뻗엘의 북쪽, 르보나의 남쪽, 벧엘에서 세겜으로 가는 큰 길 동쪽이라며, 구체적인 지리를 알려줍니다.

이 실로에서 매년 여호와의 명절이 있었습니다(19). 이스라엘의 3대 절기는 유월절, 장막절, 오순절이나, 본문에서는 특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포도원에서 절기 행사를 하는 것을 보면 장막절이거나 일반적인 포도 수확기의 축제(9:27)로 유추됩니다. 명절은 하나님의 구원을 묵상하고, 수확의 은혜에 감사하며, 서로 기쁨을 나누는 때입니다. 그런데 이런 절기를 노려 여자를 납치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처사입니다.

장로들은 베냐민 자손에게 행할 일을 명령합니다(20). 먼저 실로에 가서 포도원에 숨어, 여자들이 춤을 추러나오면, 포도원에서 나와 각각 한 여자를 붙듭니다. ‘붙들다’의 의미는 사자가 몰래 숨어 있다가 먹잇감을 움켜쥐는 것과 같은 의미로서(시 10:9), 폭력과 강압성이 암시됩니다. 그 후 여자를 데리고 베냐민 땅으로 갑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장로들이 생각했던 것은 당시 이방인의 방법이었습니다. 그 주변에 이방인들은 자신들에게 여인들이 부족하면 ‘처녀 사냥’을 통하는 방법으로 여인들을 보충시키려 했습니다.

결국 베냐민의 강간죄를 벌하려 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베냐민 자손에게 다른 여인들을 납치하고, 강간하라고 명함으로써 사건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이들의 행위는 자신의 딸과 레위인의 첩을 불량배에게 스스럼없이 내주려 했던 노인의 행동(19:24)과 똑같이 존중의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이스라엘 자손과 레위인은 기브아의 행위를 ‘망령된 일’(20:6,10)과 ‘악행’(20:12,13)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죄가 중하여, 죽여야 마땅하다고 주장했습니다(20:13). 그러나 지금은 악행을 지시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딸들 가족이 일으킬 만한 시비에 대한 강구책까지 미리 마련해놓았습니다. 딸의 아버지나 형제가 이의를 제기하면, 장로들은 그들에게 ‘딸을 베냐민에게 아내로 주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라는 맹세(18)를 이용하여 그들의 이의를 묵살할 계획입니다. 전쟁할 때, 그들이 베냐민에게 아내를 얻어주지 못했기에, 실로의 가족들은 딸을 보내는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이 계획을 수용하면, 자진해서 딸을 베냐민에게 준 것이 아니므로 가족은 죄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따르지 않으면 딸을 베냐민에게 자진해서 준 것으로 여겨 그들에게 저주가 임할 것입니다. 실로의 가족들은 아무런 잘못도 없이 장로들의 이기적인 계획에 연루되어, 모든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다. 베냐민 자손은 장로들의 명령을 그대로 따릅니다. 죄인을 넘겨주어 악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어겼듯이(20:13-14) 죄악을 저지르는 데는 기꺼이 동의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23절의 “춤추는 여자들 중에서 자기들의 숫자대로 붙들어 아내로 삼아”는 원문에서 보면 세 동사가 나와 이들이 여자를 아내로 삼은 과정을 보여준다. 먼저 그들은 자신들의 숫자에 맞게 춤추는 여자들 중에서 여자를 강제로 붙들었습니다. ‘붙들다’(가잘)는 ‘(강제로) 찢다, 뜯어내다.’의 뜻으로서 21절의 ‘붙들다’와 마찬가지로 강제성과 폭력성을 드러냅니다. 베냐민 자손은 강제로 붙잡은 각 여자를 들어 올렸습니다. ‘붙들다’와 ‘들어올리다’는 그들이 여자들을 납치하고 강간했음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자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이후 자기들 기업으로 돌아와, 성읍들을 건축하고, 거기에 정착했습니다. 한편, 이스라엘 자손은 이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온전히 유지하게 되었으므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각각 자기의 지파, 자기의 가족에게 돌아갑니다. 아비멜렉이 죽은 것을 보고 이스라엘이 각자 자기 처소로 떠난 것을 상기시킵니다(2:6).

 

사사기의 결론(25)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는 사람들은 자기 눈에 옳은 대로만 합니다.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서도 자신이 좋은 대로만 주장하고 진행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격을 갖추지 못한 채 죄악만 확대 재생산하고 죄질을 심화시킬 뿐이었습니다. 사사기의 기록된 내용은 실패라는 결론을 냅니다. 그러나 그 실패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말씀입니다.

 

25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25)

 

사사기의 마지막 부분은 이 시대의 영적 상태를 다시금 상기시키며 마무리합니다. 이스라엘의 왕의 부재는 왕정 시대를 내다보고 있긴 하지만, 왕정 시대를 환영하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왕으로 두지 않으면 그 자리에 내가 들어섭니다. 내 눈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은 ‘여호와의 눈에 악’입니다. 사사기가 주는 교훈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렇게 사사기 기간 내내 되풀이 되는 타락상의 원인은 왕이 없었다고 합니다. 왕이 없었던 사사시대의 특징을 다시 한 번 밝히며 끝맺습니다. 그 왕은 지도자를 말하지만, 눈에 보이는 왕보다는 전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삶을 사니깐, 삶 자체가 흔들리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의 중심은 하나님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이 사사 시대를 영화로 만든다면 “happy ending”이 아닌 비극적인 결말을 맺습니다.

 

사사기는 이러한 패역한 일이 일어난 이유를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의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말로 정리합니다. 왕이 없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왕으로 섬길 수 있다는 긍정적 측면을 갖기도 하지만, 사사시대의 이스라엘은 이런 적극적인 자유를 방종과 타락으로 바꾸어 살아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제나 말씀의 법 없이 사는 생애의 비참함이 사사기가 주는 교훈입니다.


 

사사기를 마치면서 성도들에게 숙제를 내고 싶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자서전(自敍傳)’을 써 보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생애를 지금까지만이 아닌 죽음까지 아니 하나님 앞에 서는 장면까지 기록해 보시길 바랍니다. 당신의 결말은 어떻게 마감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비극적인 결말이 아닌 해피엔딩으로 마치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 시간 이후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순종함으로 행복한 인생을 맞이하길 바랍니다. -사사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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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베스 길르앗을 진멸한 이스라엘

사사기 21장 1-12절


이 세상에서 쉽게 행동할 수 있겠지만, 그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져야 할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말(言語)입니다. 하긴 쉽지만, 그 결과는 대단히 어려운 때가 있습니다. 좋은 의도로 하지만, 때로는 종종 오해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말뿐만 아니라, 생각까지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잘 구분해서 해야 합니다.

 

  • 이스라엘 사람들은 스스로 미스바에서 한 맹세 때문에, 그들은 겪지 않아도 될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두 가지 문제는, 하나는 달아난 600명(20:47)을 제외한 베냐민 지파의 모든 사람을 죽음으로써 베냐민 지파가 없어질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미스바에서 회의를 할 때 오지 않은 사람은 죽이기로 맹세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가겠습니까?

 

벧엘로 올라간 이스라엘(1-5)

서양에는 ‘우유는 한 번 엎질러지면 담을 수 없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우유만 다시 담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말(言語)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은 뱉어내면 다시 담을 수 없는 것뿐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좋은 영향이든 나쁜 영향이든 영향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본문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맹세한 말이 나옵니다. 무슨 말이겠습니까?

 

1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맹세하여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구든지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라 2백성이 벧엘에 이르러 거기서 저녁까지 하나님 앞에 앉아서 대성통곡하여 3가로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오늘날 이스라엘 중에 어찌하여 한 지파가 이즈러졌나이까 하더니 4이튿날에 백성이 일찌기 일어나서 거기 한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라 5이스라엘 자손이 가로되 이스라엘 온 지파 중에 총회와 함께하여 여호와 앞에 올라오지 아니한 자가 누구뇨 하니 이는 그들이 크게 맹세하기를 미스바에 와서 여호와 앞에 이르지 아니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라 하였음이라(1-5)

 

사사시의 마지막 21장은 19-21장의 결말이자, 이스라엘과 베냐민 간 전쟁의 후속 이야기입니다. 내전 후 ‘베냐민 지파의 멸족’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언약 공동체가 붕괴 위기에 봉착했음을 인지합니다.

 

(1) 잘못된 맹세(1)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스바에서 출전하면서 분노에 상응하는 맹세를 했습니다. 그들은 베냐민 사람에게 분노하면서, 그 감정에 상응하는 행동을 함께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그들은 합당한 처벌과 복수의 기준을 생각하지 않고 감정에 따라 맹세했습니다. 그들의 감정과 맹세는 올무가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베냐민 지파와 싸워서 승리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문제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베냐민 지파 중 남자 600명만 살아남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칼날을 피해 림몬 바위에서 넉 달째 거주하고 있었습니다(20:47).

그런데 문제는 미스바 총회(20:1)에서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우리 중에 누구든지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1)라고 맹세했던 것입니다. 이 맹세를 어기는 자에게는 저주가 선언되었습니다(18). 결과적으로 베냐민 지파의 멸족 위기와 딸을 줄 주 없는 상황이 상충하게 되었습니다.

 

(2) 벧엘에서 새로운 맹세(2-5)

 

예기치 못한 난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벧엘에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벧엘에서 저녁까지 하나님 앞에 앉아 목소리 높여 통곡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하나님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오늘날 이스라엘 중에 어찌하여 한 지파가 이즈러졌나이까?”(3)라고 울면서 기도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습니다(2-3). 그들이 울고 있는 것은 베냐민 지파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도 이렇게 당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문제만 생기면 벧엘에 올라가 울곤 합니다. 베냐민과의 싸움에서 두 번 패배했을 때도 벧엘에 올라가 울었습니다(20:23.26). 그때와 마찬가지로 본문의 이 눈물은 회개의 눈물이 아니라 원망의 눈물이었습니다. 원래 베냐민 지파를 치는 계획은 그들이 자기 눈에 옳다고 여겨 세운 계획이었고, 하나님을 졸라 허락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베냐민 지파를 진멸하라고 명하지는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베냐민을 치라고 허락은 하셨으나(20:18,23,28), 베냐민 지파를 진멸하라고 명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도 처음에는 기브아의 불량배들만 죽이려 했으나, 베냐민이 거절하자, 분노에 차 자신들의 감정대로 베냐민 지파를 멸절한 것입니다(20:13-14).

베냐민의 아내 문제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족속과의 결혼을 금하셨지(신 7:3-4), 동족 간의 결혼을 금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경솔한 맹세가 그들을 자가당착에 빠지게 했습니다.

 

이처럼 베냐민과의 전쟁에서 전멸당해, 한 지파가 없어진 잘못을 자기들이 다 저질러놓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기도에 응답한 결과로 이스라엘 지파 중 하나가 없어졌다며, 모든 화살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또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하면서도, 이스라엘은 이 문제를 자기들 식대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이들은 제사를 드림으로써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튿날 일찍 일어나 벧엘로 올라갔습니다. 거기서 한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4). ‘번제’는 속죄, 헌신, 순종의 목적으로 드리며(레 1:1-17), ‘화목제’는 ‘화목’과 ‘천교’를 상징합니다(레 3장). 그러므로 이 두 제사는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 어그러진 관계를 바로잡고, 헌신을 다짐하는 제사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은 깨닫지 못한 채, 종교적 의식에 치중하고 맙니다.

어쩌면 곁으로는 이런 목적을 앞세웠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대답 없는 하나님께 응답을 촉구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알맹이는 없고 형식에만 익숙한 이들의 신앙 형태를 볼 수 있습니다(참고 6:28).

한편, 이스라엘의 기대와 달리 이번에도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없자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나서서 난관을 헤쳐나가려 합니다. 그러나 기왕에 베냐민 지파의 멸족 책임을 하나님께 떠넘겼으니, 하나님께서 그 일을 처리하시도록 계속 간구하며 기다리는 게 지혜로웠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현듯 미스바 총회 때, 그들이 한 다른 맹세를 떠올립니다(5). 그 내용은 이스라엘 지파 중 미스바 총회에 참석하지 않고, 여호와 앞에 올라오지 않은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라 저주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맹세를 두 번째 해결책으로 삼을 작정이었습니다. 이번에 이스라엘 총회로 모인 것은 기브아의 악행이 출애굽 이후에 듣도 보도 못한 흉악한 범죄임을 인식하여, 그 악행을 함께 벌하고자 했기 때문이었습니다(19:30). 그런데 이 목적을 알고도 총회에 참석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이 악행을 처벌하는 일에 무관심하거나 반대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큰 맹세’를 했다고 나오는데(5), 이는 언약 공동체에서 스스로의 역할을 포기한 자들을 마땅히 죽음, 특히 ‘진멸’로 다스려야 한다고 결정한 것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이제 그런 자들이 있는지 물색하여, 그들을 처리함으로써 베냐민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회개와 화목을 앞세우지만, 제사 직후에는 거리낌 없이 다른 형제를 죽일 가능성을 타진합니다. 또한, 그들이 죽이려는 대상을 “여호와 앞에 올라오지 아니한 자”로 표현하여(5), 자기들 계획을 마치 하나님의 계획인 것처럼 선언합니다.

 

야베스 길르앗을 진멸한 이스라엘(6-12)

진리에 대한 이해가 없는 가운데 종교적 열심으로 행동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할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자기 마음대로 행한 악행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잘못된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이런 파괴적이고 불법적인 행위가 없도록 늘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6이스라엘 자손이 그 형제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쳐 가로되 오늘날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끊쳤도다 7그 남은 자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아내를 얻게 하리요 우리가 전에 여호와로 맹세하여 우리 딸을 그들의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8또 가로되 이스라엘 지파 중 미스바에 올라와서 여호와께 이르지 아니한 자가 누구뇨 하고 본즉 야베스 길르앗에서는 한 사람도 진에 이르러 총회에 참예치 아니하였으니 9백성을 계수할 때에 야베스 길르앗 거민이 하나도 거기 없음을 보았음이라 10회중이 큰 용사 일만 이천을 그리로 보내며 그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가서 야베스 길르앗 거민과 및 부녀와 어린 아이를 칼날로 치라 11너희의 행할 일은 모든 남자와 남자와 잔 여자를 진멸할 것이니라 하였더니 12그들이 야베스 길르앗 거민 중에서 젊은 처녀 사백인을 얻었으니 이는 아직 남자와 자지 아니하여서 남자를 알지 못하는 자라 그들이 실로 진으로 끌어 오니라 이는 가나안 땅이더라(6-12)

 

이스라엘 백성은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이전의 맹세를 점검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림몬 바위에 숨어 있는 600명의 베냐민 사람들이 베냐민 지파를 부활시킬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음을 인식합니다.

 

(1) 총회에 참석하지 않는 야베스 길르앗(6-9)

 

이스라엘 백성은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이전의 맹세를 점검하기 시작합니다. 6절은 “이스라엘이 베냐민 자손에 대해 뉘우쳤다”로 시작하면서, 7절까지 앞의 1,3,5절의 내용을 반복합니다. 이런 반복은 내용상 매끄럽지 않지만, 이스라엘이 베냐민의 멸족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사안을 해결하는 데 절박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때 이스라엘의 뉘우침은 후회는 하지만 회개와는 다릅니다. 그들은 생존한 베냐민 자손이 대를 잇지 못하고, 이스라엘 중에서 베냐민 지파가 끊어지게 된 것을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뉘우침 전에 베냐민의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무자비하게 여자와 아이와 가축까지 쓸어버린 행동에 대한 뉘우침이 먼저 우선해야 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남은 베냐민 남자들인 림몬 바위에 숨어 있는 600명의 베냐민 사람들이 베냐민 지파를 부활시킬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음을 인식합니다. 이 남은 사람들에게 아내를 제공한다면, 그 지파는 부활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아내를 얻어줄 방법만 고심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딸을 베냐민의 아내로 주지 않겠다고 여호와께 맹세했기 때문입니다(1,7). 자신들의 경솔한 맹세에 발목이 잡힌 것입니다. 사사 입다가 조급하게 서원하여 자신의 딸을 희생하게 된 사건을 상기시킵니다(11:30,34-39).

두 경우 모두 감정에 치우쳐 이 서원이 무슨 의미이며 어떤 여파를 가져올지 생각하지 않은 결과였습니다.

입나다 이스라엘은 모두 경솔한 서원이나 맹세를 했으므로 이를 되돌리는 방도를 율법에서 찾거나 하나님께 여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늘 자기들이 방법을 강구하고 자기들이 결정합니다.

 

(2) 야베스 길르앗을 진멸한 이스라엘(10-12)

 

이때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가지 방책이 떠올랐습니다. 그들이 미스바 총회에 모일 때 여호와 앞에 참석하지 않은 자들을 죽일 것이라 맹세하지 않았습니까?(5).

이제 그런 자들이 있는 지를 조사해서 나오기만 한다면 베냐민의 아내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 그들을 죽인다고 맹세했으니, 그들을 죽이고 여자만을 남겨 베냐민에게 아내로 줄 계책인 것이다. 조사해보니 마침 야베스 길르앗에서 아무도 총회에 오지 않았음이 발견되었다. 야베스 길르앗은 요단 동편에 있는 길르앗 산지의 북부로 추정된다. 총회에서 출석을 점검했을 때, 그들이 하나도 참석하지 않았음이 증명되었다. 이에 이스라엘 회중은 큰 용사 12,000명을 야베스 길르앗으로 보냅니다. 그들에게 그곳 주민과 부녀와 어린아이를 다 칼로 죽이라고 명했습니다. 지난 번 베냐민 사건 때는 베냐민 지파 모두에게 그런 악행이 일어나게 된 경위를 설명할 기회를 주었습니다(20:12-13). 그러나 이번에는 그들이 왜 참석하지 않았는지 말할 기회도 주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야베스 길르앗의 모든 남자, 남자와 동침한 여자를 ‘진멸하여 바칠 것’을 명했습니다(11). 그렇게 되면 남자와 동침하지 않은 처녀를 얻을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특수한 진멸 방식은 이전에 광야 바알브올에서 음행 사건이 있었을 때 실행되었던 방식입니다(민 31:17-18). 그때는 미디안 사람들을 진멸했으나, 이번에는 동족을 진멸합니다. 더구나 이번에는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이 기브아의 죄에 무관심하고 거부를 표명한 데에 대한 처벌이 아니기 때문에, 맹세의 원래 취지에서 벗어납니다. 단지 자기들의 조급했던 맹세로 파생된 다른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대체방법이었습니다.

그들은 얼마 전까지도 베냐민 지파를 진멸하려 했던 자들이었으나(20:48), 이제는 베냐민이 멸족하는 것을 막으려고 다른 이스라엘 백성을 진멸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것 같지만, 실제 방식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셈입니다. 마침내 이스라엘은 야베스 길르앗에서 젊은 처녀 400명을 얻는 데 성공합니다. 젊은 처녀들은 실로의 진영으로 끌려옵니다.

이때 성막이 있는 실로를 ‘가나안 땅’이라고 부른 것은 아마도 요단 동편(야베스 길르앗)에 대한 상대어로 요단 서편을 지칭하거나, 가나안 땅에 물든 이스라엘을 꼬집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딸을 베냐민 지파에 주지 않겠다고 한 서원을 어기지 않으면서, 그들에게 자식을 낳을 수 있는 여인을 공급할 궁리를 합니다. 길르앗 야베스에서 한 사람도 미스바에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만이천 명의 군인을 보내 맹세한 대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전멸했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젊은 처녀 4백 명을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이렇게까지 베냐민 지파의 멸망을 염려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나누어 주신 기업 중 하나가 사라지는 것은 언약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 모든 족속도 그런 결과를 맞을 수 있다는 것을 예고하기 때문입니다. 분노의 현장에서 이루어진 성급한 맹세의 아픈 결과를 보며, 하나님 앞에 늘 진지한 자세로 살아가야 함을 되새겨 봅니다. 바른 결단을 위한 인내와 지혜로운 마음을 갖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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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20-03)


교만으로 몰락한 베냐민 지파

사사기 20장 29-48절


한 가지 일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면 신선도가 떨어집니다. 그리고 의미없이 기계적으로 일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역사가 오래된 교회는 타성에 젖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역에 신선함은 살아지고 사역의 기준이 ‘전례(前例)가 무엇인가?’라고 생각합니다. 사역은 궁극적인 목표는 ‘영혼 구원’입니다. 전례를 따라 사역하면 결국 일하는 사람도 사역도 무의미해져 버립니다.

 

  • 본문은 승리의 약속을 받고 세 번째 전투에서 이스라엘 자손은 유인전법을 사용하여 기브아 성을 정복하고 베냐민 자손을 남자 600명만 남기고 모두 죽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전과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이스라엘 자손은 베냐민 지역에 성읍을 돌아다니며 모든 성읍의 사람들을 죽이고 파괴하는 진멸 전쟁을 수행하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함정에 빠진 베냐민 지파(29-35)

엉터리같이 불의하게 사업해도 얼마든지 성공처럼 보이는 결과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대박을 노리는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됩니다. 투자한 것, 이상으로 대박을 원하는 것은 토박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베냐민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격 없는 승리를 두 번이나 맛보았습니다. 자신들이 강해서 마땅히 누릴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었습니다.

 

29이스라엘이 기브아 주위에 군사를 매복하니라 30이스라엘 자손이 셋째 날에 베냐민 자손을 치러 올라가서 전과 같이 기브아에 맞서 전열을 갖추매 31베냐민 자손이 나와서 백성을 맞더니 꾀임에 빠져 성읍을 떠났더라 그들이 큰 길 곧 한쪽은 벧엘로 올라가는 길이요 한쪽은 기브아의 들로 가는 길에서 백성을 쳐서 전과 같이 이스라엘 사람 삼십 명 가량을 죽이기 시작하며 32베냐민 자손이 스스로 이르기를 이들이 처음과 같이 우리 앞에서 패한다 하나 이스라엘 자손은 이르기를 우리가 도망하여 그들을 성읍에서 큰 길로 꾀어내자 하고 33이스라엘 사람이 모두 그들의 처소에서 일어나서 바알다말에서 전열을 갖추었고 이스라엘의 복병은 그 장소 곧 기브아 초장에서 쏟아져 나왔더라 34온 이스라엘 사람 중에서 택한 사람 만 명이 기브아에 이르러 치매 싸움이 치열하나 베냐민 사람은 화가 자기에게 미친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 35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베냐민을 치시매 당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베냐민 사람 이만 오천백 명을 죽였으니 다 칼을 빼는 자였더라(29-35)

 

이스라엘은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도 베냐민과의 전투(26-48)에서 두 번이나 패했습니다. 1차전도, 2차전도 패한 이스라엘이 비로소 전쟁의 승리가 자신들의 힘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패배의 원인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의 약속을 힘입어 특별한 전략을 다시 세웁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행동합니다.

 

(1) 세 번째 전투에서 베냐민을 이기는 이스라엘(29-34)

 

하나님께 승리를 약속받은 이스라엘 자손들은 전날과는 다른 전법을 구사합니다. 이전에는 전면전을 하여 성을 끼고 전투하는 베냐민에게 유리한 전법을 사용하였다면, 이번에는 양면작전인 ‘매복과 유인의 전법’을 사용합니다.

먼저, 군사 일부를 매복시킨 후 나머지 군사들은 전날처럼 전열을 맞추어 기브아로 갑니다. 이때 베냐민 자손이 기브아 성에서 나오는데, 본문은 베냐민 사람들이 성에서 나오도록 유인당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후에 37절에서 44절에 자세히 설명합니다. 이들은 성을 중심으로 싸우는 전법 대신 성에서 나와서 전처럼 이스라엘 자손들을 치기 시작하였고, 이전처럼 초반에 이스라엘 연합군을 몇몇을 죽이자 베냐민에는 이스라엘을 다시 승리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일종의 전략이었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그들은 베냐민을 성에서 끌어내기 위해서 패하는 척하며 도망하였던 것입니다. 베냐민의 기브아 성 밖으로 유인하여 큰 길로 나오게 하였고, 곧 도망하던 자들이 전열을 가다듬어 쫓아오는 베냐민과 맞섰습니다. 이때 매복해 있던 이스라엘 군대도 일어나서 베냐민과 싸웠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10,000명의 정예 부대를 기브아 성에 보내어 대다수가 빠져나가 수비에 취약해진 기브아 성을 정복하게 하였습니다. 양면 작전으로 베냐민이 진퇴양난에 빠지게 되었지만, 베냐민이 이런 심각한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전투에서 베냐민이 이겼기 때문에 자신들이 패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날 전투는 이전 전투와는 양상이 크게 달랐습니다. 본문은 35절에서 여호와께서 이 날의 전투에서는 이스라엘 앞에서 베냐민 지파를 치셨다고 말합니다. 즉, 이 날의 전투는 여호와께서 직접 참전하신 여호와의 전쟁이었습니다.

 

(2)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베냐민의 결과(35)

 

왜 성경은 베냐민과의 전쟁을 여호와의 전쟁으로 설명하겠습니까? 그 이유는 기브아의 악한 상황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소동과 고모라 같았기 때문에 이런 기브아는 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베냐민 지파가 이들의 죄악을 감쌌기 때문에 기브아 주민과 똑같은 죄를 지은 것으로 간주하고 하나님이 손수 심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참전하시자 승승장구하던 베냐민은 하루아침에 26,000명 중 25,000명이 죽는 참극을 겪습니다.

 

연합군의 승리와 베냐민 지파의 몰락(37-48)

세상의 사업하는 방식으로 교회를 경영해서는 안 됩니다. 성도들이 늘어났다고 성령께서 역사하셨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엉터리입니다. 목사가 능력의 종이며,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는 종이기 때문에 수가 늘어났다고 착각해서도 안 됩니다. 그런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말씀대로 충실히 설교하고 목회하면, 오히려 인기가 없고 수적으로 성장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36이에 베냐민 자손이 자기가 패한 것을 깨달았으니 이는 이스라엘 사람이 기브아에 매복한 군사를 믿고 잠깐 베냐민 사람 앞을 피하매 37복병이 급히 나와 기브아로 돌격하고 나아가며 칼날로 온 성읍을 쳤음이더라 38처음에 이스라엘 사람과 복병 사이에 약속하기를 성읍에서 큰 연기가 치솟는 것으로 군호를 삼자 하고 39이스라엘 사람은 싸우다가 물러가고 베냐민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 삼십 명 가량을 쳐죽이기를 시작하며 이르기를 이들이 틀림없이 처음 싸움 같이 우리에게 패한다 하다가 40연기 구름이 기둥 같이 성읍 가운데에서 치솟을 때에 베냐민 사람이 뒤를 돌아보매 온 성읍에 연기가 하늘에 닿았고 41이스라엘 사람은 돌아서는지라 베냐민 사람들이 화가 자기들에게 미친 것을 보고 심히 놀라 42이스라엘 사람 앞에서 몸을 돌려 광야 길로 향하였으나 군사가 급히 추격하며 각 성읍에서 나온 자를 그 가운데에서 진멸하니라 43그들이 베냐민 사람을 에워싸고 기브아 앞 동쪽까지 추격하며 그 쉬는 곳에서 짓밟으매 44베냐민 중에서 엎드러진 자가 만 팔천 명이니 다 용사더라 45그들이 몸을 돌려 광야로 도망하였으나 림몬 바위에 이르는 큰 길에서 이스라엘이 또 오천 명을 이삭 줍듯 하고 또 급히 그 뒤를 따라 기돔에 이르러 또 이천 명을 죽였으니 46이 날에 베냐민 사람으로서 칼을 빼는 자가 엎드러진 것이 모두 이만 오천 명이니 다 용사였더라 47베냐민 사람 육백 명이 돌이켜 광야로 도망하여 림몬 바위에 이르러 거기에서 넉 달 동안을 지냈더라 48이스라엘 사람이 베냐민 자손에게로 돌아와서 온 성읍과 가축과 만나는 자를 다 칼날로 치고 닥치는 성읍은 모두 다 불살랐더라(36-48)

 

이번 전투에서도 자신의 승리와 이스라엘의 패배를 호언장담한 베냐민(32)은 이스라엘의 전술에 꼼짝없이 걸려들었습니다. 37절부터는 베냐민의 관점에서 셋째 날 전투를 다시 설명합니다. 매복 장르부터 시작해서 그들이 림몬 바위에 도망간 부분까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전투의 과정(36-46) 

 

35절에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베냐민을 찢었다고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자세히 설명하진 않았는데 여기서는 베냐민 지파의 관점에서 그들이 어떻게 폐하였는지를 설명하였습니다.

자기들이 이길 줄 알고 기브아 성을 나와 이스라엘을 치려고 하였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매복하고 있었습니다. 또, 베냐민 사람들이 성을 비운 사이에 이스라엘 군대는 지체하지 않고 기브아로 돌진하여 성을 정복하였습니다. 또, 성읍을 점령하면 연기를 점령의 신호로 삼기로 미리 약속하였습니다. ‘큰 연기가 일어난다’는 것은 일부러 연기를 피웠다기보다 점령하는 과정에서 도시의 일부분을 태울 때 생기는 연기를 의미합니다.

베냐민 사람들은 기브아 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유인하기 위해 이스라엘 자손들은 싸움하면서 점점 뒤로 후퇴합니다. 이스라엘 자손 30여 명이 죽고 이스라엘 자손이 이전처럼 밀리자 베냐민 자손들은 자만했습니다. 자만심에 빠진 사이에 기부와 정복을 알리는 연기가 피어올랐고 베냐민 자손들도 이 연기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베냐민 자손들이 이 연기의 의미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도망하던 이스라엘 자손들이 베냐민을 공격하기 위해 뒤돌아섰고, 그때야 기브아 성읍을 빼앗기고 자신들이 덧에 걸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자손의 잘못을 깨닫게 하시려고 두 번이나 전쟁에서 패하게 하셨지만,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이용하여 베냐민을 방심하게 하시고 결과적으로 유인 작전이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덫에 걸린 베냐민은 광야로 도망하였지만, 이들을 추적하는 이스라엘 군대와 또한 성읍을 점령한 군대가 성읍에서 나와 퇴로를 막으며 베냐민을 완전히 포위하였고, 이들은 쉬지 않고 도망하는 베냐민 자손을 추적하여 기부 앞에 있는 해 뜨는 곳까지 따라가서 그들을 쳤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맹렬한 추적으로 베냐민 자손이 엄청나게 죽었는데, 이렇게 추적을 당하여 죽는 자가 18,000명이나 되었습니다. 26,000명 중에서 8,000명만 남고 모두 죽은 것입니다. 하루 만에 전세가 역전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전쟁은 어떤 초자연적인 힘이 아닌 이스라엘의 전술과 베냐민의 착각을 통해 성취되었습니다. 마치, 여호수아에서 나오는 아이성 전투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본문은 ‘베냐민이 꾀임에 빠졌다’라는 표현을 통해 여호와께서 이 전쟁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전쟁을 하나님의 관점과 인간의 관점의 두 버전으로 보여준 것은 인간의 눈으로 보면 전략적으로 이긴 것 같지만,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싸워주신 여호와의 전쟁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것입니다.

 

(2) 전쟁의 결과(45-48)

 

이 단락은 전쟁의 결과를 요약한 부분으로 베냐민의 남은 잔당들을 어떻게 소탕하였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림몬 바위로 도망가는 베냐민을 쫓아가서 5,000명을 죽였고 여기서 도망하여 기돔까지 도망하는 자들을 쫓아가 2,000명을 죽입니다(45). 8,000명 중에서 7,000명을 죽였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은 베냐민을 끝까지 추적하여 죽였습니다. 결국 베냐민 자손 가운데 1,000명만을 남기고 모두 죽였습니다. 45절에서 5,000명을 ‘이삭 줍듯 하였다.’라는 표현을 하는데, 이것은 싸움할 힘도 능력도 남지 않은 도망한 자들을 손쉽게 죽였다는 의미입니다. 과연 싸울 힘도 없이도 도망하는 동족을 이렇게까지 죽이는 모습은 지나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살육을 통해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1,000명인데 나머지는 흩어지고 600명만 모여 광야로 도망하였습니다. 이곳은 유다 광야로 기브아의 동쪽에 있는 지역이며 여기에 림몬 바위가 있었고 이곳에 넉 달 동안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베냐민 지파 26,000명 중에서 최후로 살아남은 사람은 600명이었습니다. 이렇게 한 지파의 남성들이 거의 사라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전쟁은 기브아 성읍을 정복하고 베냐민의 군사를 거의 몰살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베냐민 지경에 있는 성읍들을 전부 불태우고 짐승들과 사람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본문은 이들이 적극적으로 찾아다니며 사람들을 죽이고 성업을 파괴하고 다닌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베냐민을 진멸하기 위한 행동입니다. 하지만, 베냐민 지파는 헬렘의 대상이 아닌 동족이므로 이들을 대상으로 여리고를 정복하듯 그리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듯이 잔인하게 정복하는 모습은 이스라엘 자손이 지나치게 복수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비록 베냐민의 악을 심판하기 위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사용하셨지만, 이스라엘 자손은 적당한 선에서 멈추지 못하고 자신의 동족에게 지나친 폭력과 학살을 자행함으로 또다시 어리석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것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비록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베냐민에 대한 심판의 도구로 이스라엘 자손을 사용하시기는 했지만, 이들이 여전히 하나님께 온전히 돌아오지 못하고 자신들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우리가 한두 번 기적적인 체험으로 하나님께 돌아오기가 힘들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바로 알고 자신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대로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연합군과 베냐민 지파 모두에게 패배를 주신 것입니다. 레위인이 대표하는 온 이스라엘이나 그 레위인의 첩을 죽인 베냐민 지파나 하나님 앞에서는 당장 심판받아 마땅한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한 힘을 민뜬 명분을 믿는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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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20-02)

 


베냐민 지파와 동족 전쟁한 이스라엘

사사기 20장 12-23절


청년 시절에 성탄절 이부에는 회원들끼리 교제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시간에 서로 선물 교환합니다. 한 번은 선물 받을 상대방에게 장난치려고, 한 번은 백화점 포장지로 상자를 포장하고 내용물은 형편없는 것을 넣었던 것이 생각이 납니다. 선물을 일부러 성의 없게 주는 사람은 없겠지만, 만약 다른 사람에게 받은 선물이 포장은 그럴듯한데, 속 내용물이 별 볼 일 없다면, 선물은 받은 사람은 정말 실망스러울 것입니다.

 

  • 베냐민 지파가 기브아 사람을 내놓기를 거절하자 베냐민과 전쟁하기 위해 이스라엘 자손이 모였고 전쟁에 관한 것을 하나님께 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쟁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이들은 전쟁에 나가 자신들보다 수적으로 열쇠인 베냐민에게 두 번이나 크게 패하고 돌아옵니다. 이에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 앞에 금식하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기브아를 징계를 결정한 이스라엘(8-16)

하나님의 말씀을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성급하게 판단할 때 일을 망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뜻보다 앞서는 섣부른 결정과 행동을 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오만된 행동입니다. 총체적인 난국에 빠진 이스라엘 상황은 지혜로운 왕이 부재한 한계와 현실을 보여줍니다.

 

8모든 백성이 일제히 일어나 이르되 우리가 한 사람도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지 말며 한 사람도 자기 집으로 들어가지 말고 9우리가 이제 기브아 사람에게 이렇게 행하리니 곧 제비를 뽑아서 그들을 치되 10우리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백 명에 열 명, 천 명에 백 명, 만 명에 천 명을 뽑아 그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준비하고 그들에게 베냐민의 기브아에 가서 그 무리가 이스라엘 중에서 망령된 일을 행한 대로 징계하게 하리라 하니라 11이와 같이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하나 같이 합심하여 그 성읍을 치려고 모였더라 12이스라엘 지파들이 베냐민 온 지파에 사람들을 보내어 두루 다니며 이르기를 너희 중에서 생긴 이 악행이 어찌 됨이냐 13그런즉 이제 기브아 사람들 곧 그 불량배들을 우리에게 넘겨 주어서 우리가 그들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거하여 버리게 하라 하나 베냐민 자손이 그들의 형제 이스라엘 자손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14도리어 성읍들로부터 기브아에 모이고 나가서 이스라엘 자손과 싸우고자 하니라 15그 때에 그 성읍들로부터 나온 베냐민 자손의 수는 칼을 빼는 자가 모두 이만 육천 명이요 그 외에 기브아 주민 중 택한 자가 칠백 명인데 16이 모든 백성 중에서 택한 칠백 명은 다 왼손잡이라 물매로 돌을 던지면 조금도 틀림이 없는 자들이더라(8-16)

 

사사 시대는, 특히, 본문에서는 한 레위인의 사건을 조작한 이런 것 때문에 많은 사람이 선동되었습니다. 이러한 선동에 휘둘렸다는 것 자체가 이 레위인은 물론이고, 이 시대 자체가 얼마나 분별력이 없는지를 보여줍니다.

 

(1) 기브아를 징계하기로 경의한 이스라엘(8-11)

 

레위인이 기브아 사람들이 한 일을 왜곡하여 보고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레위인의 이야기를 진중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액면 그대로 모두 사실로 받아들이고 흥분하여 베냐민 지파를 응징하기로 결정합니다. 정확히 잘못한 사람들을 응징해야 하는데, 베냐민 지파 전체를 응징하려고 전쟁을 위해 모인 사람들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먼저 이러한 엄청난 일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지 물어야 마땅했습니다. 자기 소견대로 옳은 대로 행했던 것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에서 나타난 사건입니다.

 

병사 40만 명이 모였습니다. 군인 중에서 10분의 1을 제비를 뽑아 베냐민의 기부와 사람들을 치기로 결정하고, 자신들의 결심이 확고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기브아를 칠 때까지 한 사람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8).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광기입니다. 이런 무자비함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성범죄는 율법에서 강력하게 금하고 강간에 경우에는 돌로 처 죽이라고 명했습니다. 이 모든 결정에 이스라엘 모두가 단결했습니다. 모든 단결과 하나 됨이 항상 좋은 것만 아닙니다. 무엇을 위해 하나가 되려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독재나 전체주의가 됩니다. 사사 시대는 볼 수 없었고,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도 쉽게 볼 수 없었던 이스라엘의 연합이 동족을 전쟁의 대상으로 할 때 나타난 것은 슬픈 일입니다. 외부의 적과 전쟁하는 상황에서는 기드온 때부터 내부적으로 갈등을 빚었던 이스라엘이 자기 동족을 치는 데 합심하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발상이 가능했겠습니까? 참으로 심각하게 병은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2) 이스라엘의 요구를 거부한 베냐민 지파(12-16)

 

이스라엘 연합군들은 베냐민을 공격하기 전에 베냐민 지파에게 용서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회개를 유도하기 위해, 베냐민 사람들에게 전갈을 보내 기브아 불량배의 악행을 설명하며 그들을 넘기라고 요구하였습니다(12-13). 그들을 죽여서 악을 제거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베냐민 지파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합리적인 제안을 듣지 않고 사람들을 기브아에 모아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합니다(14). 본문은 베냐민의 이런 행동을 형제 이스라엘 자손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표현함으로써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형제이지 결코 서로 싸울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13). 동족 에브라임 지파에게 무력을 행하여 입다나, 우상숭배를 선언해서 영적으로 해악을 끼친 단 지파가 했던 악행이 또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본문은 베냐민 지파에 대한 설명입니다(15). 베냐민 지파는 잘못을 인정하고 처벌을 받는 대신에 기브아로 모여서 전쟁을 준비합니다. 이런 지파 분위기 때문에 불량배들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모은 군사의 수가 26,700명이었습니다. 칼 빼낸 자 즉 전투병이 2만 6천 명이며, 기브아 주민 중에서 뽑은 용사들은 왼손잡이로 700명 모두가 물매로 돌을 던지면 조금 더 틀림없는 자라고 표현합니다. 왼손잡이 에훗이 생각나게 하는 장면으로, 매우 용맹스러운 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표현합니다. 이런 배경에서 베냐민은 전쟁을 택한 것입니다. 하지만, 베냐민이 기브아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서는 선악간에 판단하지 않고, 자기 지파 사람이라고 무조건 감싸며 형제들인 모든 이스라엘을 적으로 삼은 것은 어리석은 결정이었습니다.

 

베냐민 지파에게 패배한 이스라엘 연합군(17-28)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모든 문제의 시작입니다.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하나님과의 화평을 구하며, 이 문제의 모든 주도권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우리 삶에 겪는 이 문제들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17베냐민 자손 외에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칼을 빼는 자의 수는 사십만 명이니 다 전사라 18이스라엘 자손이 일어나 벧엘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유다가 먼저 갈지니라 하시니라 19이스라엘 자손이 아침에 일어나 기브아를 대하여 진을 치니라 20이스라엘 사람이 나가 베냐민과 싸우려고 전열을 갖추고 기브아에서 그들과 싸우고자 하매 21베냐민 자손이 기브아에서 나와서 당일에 이스라엘 사람 이만 이천 명을 땅에 엎드러뜨렸으나 22이스라엘 사람들이 스스로 용기를 내어 첫날 전열을 갖추었던 곳에서 다시 전열을 갖추니라 23이스라엘 자손이 올라가 여호와 앞에서 저물도록 울며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다시 나아가서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올라가서 치라 하시니라 24그 이튿날에 이스라엘 자손이 베냐민 자손을 치러 나아가매 25베냐민도 그 이튿날에 기브아에서 그들을 치러 나와서 다시 이스라엘 자손 만 팔천 명을 땅에 엎드러뜨렸으니 다 칼을 빼는 자였더라 26이에 온 이스라엘 자손 모든 백성이 올라가 벧엘에 이르러 울며 거기서 여호와 앞에 앉아서 그 날이 저물도록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고 27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물으니라 그 때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거기 있고 28아론의 손자인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그 앞에 모시고 섰더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쭈기를 우리가 다시 나아가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하시는지라(17-28)

 

사사기가 시작하면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민족인 가나안 족속들과 전쟁을 시작했지만, 사사기 마지막 부분은 동족들 간의 전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 베델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음(17-18)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기브아 사람들을 징벌하는 대신 전쟁을 도모하자, 온 이스라엘 자손들은 전쟁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런데 그 수가 40만 명이 이르렀습니다. 신실하지도 않는 한 레위인을 위한 복수에 40만 명이 모여 형제 베냐민 지파를 상대로 전쟁하는 이 모습은 상식에서 벗어난 결정입니다(17).

이때 제사장이 비느하스였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도 베델에 함께 있었습니다. 전쟁하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은 베델로 올라가 하나님의 뜻을 묻습니다(18). 베델에 언약궤가 있다는 것은 임시로 언약궤만 베델에 옮긴 것 같습니다. 20장 27절에서 “그 당시에는 베델의 여호와의 궤가 있었고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가 그 앞에서 제사장을 하고 있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그들은 베델의 여호와의 성소로 올라갔을 것입니다. 법궤를 마치 부적처럼 사용한 것입니다.

사사기 1장에서 가나안 정복 전쟁을 하기 전에 하나님께 물은 것처럼, 이번에도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과 싸우리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전쟁을 해야 되는지에 관해 물어야 하는데, 전쟁을 사실화하고 누가 먼저 올라가는지를 묻습니다(18). 놀랍게도 여호와께서는 ‘유다가 먼저 갈지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베냐민을 너희 손에 넘겨주겠다’라는 승리 약속이 없습니다.

 

(2) 이스라엘과 베냐민과의 쉽지않는 전쟁(19-21)

 

19-21절은 전쟁 장면을 설명한 부분으로 이스라엘과 베냐민 전쟁이 이스라엘이 이방인과 치르는 전쟁과 같은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전쟁의 결과는 놀랍게 이스라엘 연합군은 베냐민에게 패배하여 22,000명이 죽습니다(2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잘못된 기도와 이기적인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베냐민 지파를 심판하시기 전에 이스라엘을 먼저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기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한 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전쟁하기 위해 재정비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진영에 약간의 변화가 생깁니다. 이들은 전쟁에 진 것을 애통하며 하나님 앞에 저녁까지 울었는데, 이 부분은 사사기 2장의 보임 사건을 기억나게 합니다. 보임에서 하나님의 사자의 질책을 얻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께 회개하며 울었습니다. 그런데 보임에서처럼 이들의 눈물은 고통 좌절 분노에서 나온 눈물일 뿐 진정한 회계와 하나님께 대한 부르짖음의 눈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다급한 이 순간에 하나님께 부르짖었지만, 이 상황이 끝나자 곧바로 하나님을 떠나 자기 생각대로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 전쟁이 여부를 묻는 이스라엘(22-26)

 

다음으로 전쟁에 과연 형제 베냐민과 싸워야 하는지에 대한 여부를 물었습니다(23). 이제야 그들은 베냐민이 자신의 적이 아닌 형제이자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인식하고 하나님께 베냐민을 줘도 좋을지에 대해서 물은 것입니다.

이들은 패배를 통해 하나님 앞에 겸손해졌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올라가라고 응답하십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승리의 약속은 주지 않으셨습니다. 이들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베냐민과 전쟁하러 나갑니다. 하지만, 전날 졌기 때문에 더욱 소극적으로 전투에 임하였습니다. 한 번의 패배에 베냐민에 대한 두려움이 생긴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베냐민 사람들은 전날처럼 용맹하게 전투에 임했고 이번에도 이스라엘 군대를 이깁니다. 25절에 보면 칼을 빼는 자가 1만 8천 명이 죽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칼을 빼는 자’라는 것은 무장한 군인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전날 죽은 사람의 숫자보다 4천 명이 적지만, 전쟁에 능한 장군이 죽었다는 것은 전력 면에서 매우 큰 손실을 입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왜 전쟁에서 졌겠습니까? 이 베냐민과 유다의 전쟁은 양 진영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성격이 강한 전쟁이기 때문에 형제가 비록 잘못했더라도, 그 역시 하나님 백성이기 때문에 싸울지 말지는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도록 해야 했는데, 싸움을 기정 사실화하고 묻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패배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질문은 28절의 세 번째와 같지만, 그들은 울기만 할 뿐 진정으로 회개하진 않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전쟁에서 또다시 진정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이스라엘 향해 경고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만한 주제가 있습니다. 전쟁은 군사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수적으로 20대 1의 대결이기 때문에 분명히 베냐민은 이스라엘의 적수가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전쟁에서 사람의 수가 많고 적음은 전혀 중요하지 않고 오직 전쟁의 승패는 여와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수의 이스라엘이 적은 수의 베냐민에게 크게 진 것입니다.

 

두 번의 패배를 통해서 교훈을 깨달은 이스라엘 자손들은 다시 하나님 앞에 모여 울며 금식하고 번죄와 화목죄를 들였습니다. 이것은 23절보다 종교적으로 진일보한 것으로 구약에서 금식은 해계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금식과 번죄 함목재는 하나님 앞으로 진정으로 나오려는 행동들입니다.

 

(4) 승리를 약속하신 하나님(27-28)

 

그리고 27절에서 28절에 언약궤와 아론의 후손인 비느하스의 제사장에 대한 설명을 추가하므로 그들의 금식과 회개가 올바르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회개하고 올바른 모습을 갖춘 뒤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베냐민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세 번째로 다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형제 베냐민과 전쟁을 해야 하는지 여부를 물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질문이 점점 더 길어지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이들이 점점 더 겸손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하나님은 베냐민을 내 손에 넘겨주시겠다고 승리의 약속을 해 주십니다.


이스라엘 동족끼리 서로 죽이는 전쟁은 영적인 타락에서 왔습니다. 영적인 타락은 도덕적인 타락이 오게 됩니다. 도덕적인 타락이 오게 되면 이기심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또한, 판단력이 흐려지면 어려움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보다 먼저 자신의 원하는 바를 선택한 것이 있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어두워진 영안을 다시금 밝혀 주심으로 말씀을 분별하고 순종하는 사람이 될 때, 능력 있는 사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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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20-01)

 


경악으로 미스바에 모인 모든 이스라엘

사사기 20장 1-11절


하나님을 떠난 세상은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합니다. 마음이 항상 불안합니다. 자기를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시킬 마음이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자기 만족의 수단으로만 사용하려 희생의 대상으로 만듭니다. 그 속에는 사랑도 없습니다. 철저하게 이기주의적으로 행동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중심성은 결국 자기 파멸로 이끌 것입니다.

 

  • 본문에는 레위인의 첩의 조각난 시체를 본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이 미스바에 모였습니다. 레위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사건을 설명하라고 말합니다. 이에 레위인은 기브아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였고, 자신의 첩은 간강하여 죽게 만들었으며, 이 기브아 사람들의 악행을 처벌하기 위해 자신이 이런 일을 하였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로 인해 이제 기브아 사람들은 한 개인의 원수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모두의 원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미스바에 모인 이스라엘 사람들(1-2)

‘군중심리(群衆心理)’란 ‘많은 사람이 모였을 때에, 자제력을 잃고 쉽사리 흥분하거나 다른 사람의 언동에 따라 움직이는 일시적이고 특수한 심리 상태’입니다. 쉽게 흥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 같은 다혈질 기질에게는 군중심리는 잘 먹힙니다. 이 군중심리를 이용해서 통치했던 사람이 독일의 히틀러입니다. 첩을 잃었던 레위인도 첩의 시신을 토막 내어 이스라엘 전체에 보낸 엄청난 파급효과로 대단한 군중심리를 얻습니다.

 

1이에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와 길르앗 땅에서 나왔는데 그 회중이 일제히 미스바에서 여호와 앞에 모였으니 2온 백성의 어른 곧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어른들은 하나님 백성의 총회에 섰고 칼을 빼는 보병은 사십만이었으며(1-2)

 

본문에 나온 레위인에게 첩을 자기만족의 수단이었습니다. 첩을 위해 자신을 내어줄 마음이 없었습니다.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위해 희생시킬 대상에 불과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도 이용에 대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알고 경배해야 할 레위인에게 남은 것은 경건에 껍질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원했겠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영광을 원하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자기 복수를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고 종교적인 명분을 만들어갔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공동체를 파멸시키는 결과는 가져 왔습니다.

 

레위인은 자신의 첩이 강간을 당하고 죽음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첩의 죽음에 대해 슬퍼했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첩의 죽음은 다만 기브아 사람들을 보복할 명분을 얻는 사건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첩의 시신을 12도막 내서 각 지파에 보냈습니다. 그는 죽은 첩을 향해 일말의 예의나 존중도 없습니다. 이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 레위인의 행동을 칭송할 것이고,

 

레위인이 보낸 시체 도막을 보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깜짝 놀라서 ‘미스바’에 여호와 앞에 모였습니다. ‘여호와 앞’이란 ‘여호와의 성막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스바에 모여서 국가를 위해 회의하고 결정하는 장소였습니다. 본문은 온 이스라엘이 모인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와 길르앗 땅에서”(1)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한국에 ‘백두에서 한라 그리고 독도까지’라는 의미와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경악스러운 일이 무슨 일인가 하는 알아보기 위해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백성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무장한 병사들이 무려 40만 명이나 모였습니다(2). 흥미로운 것은 지금까지 사사 시대에 그 어떤 전쟁에도 이처럼 하나되어 많은 병력이 모인 적이 없습니다. 또 한 가지는, 무장한 40만 명입니다. 아직 어떤 판결도 없는데 전투의 태세로 모인 것입니다.

 

이전 사사들의 이야기에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적에 대항하여 지파별로 싸우거나 전체 이스라엘을 소집하며 도움을 요청해도 이렇게 모이지는 않았습니다. 드브라 이야기의 경우 소집에 응하지 않는 지파 명단이 언급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드온이나 입다 이야기에서는 참여하지 않는 에브라임이 시비를 걸었으며, 삼손의 경우, 삼손을 잡기 위해 유다 지파가 모인 적이 있을 뿐 한 번도 제대로 모든 이스라엘이 직결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레위인이 보낸 참혹한 시체를 본 후에 모든 이스라엘이 한 마음으로 모입니다. 이들은 그 땅에서 끔찍하고 황당한 일을 겪고서야 여호와 앞에 모여 엎드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한 것입니다.

 

사건의 전말을 설명함(3-7)

어떤 문제가 일어나면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입장에서 말합니다. 지도자들은 문제에 바른 판단을 요구할 때는 사리가 분명해야 합니다. 자기 변론적인 주장만 듣고 판단하고 결정하면 큰 실수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레위인에게 일에 대한 자초지정을 듣습니다.

 

3이스라엘 자손의 미스바에 올라간 것을 베냐민 자손이 들었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가로되 이 악한 일의 정형을 우리에게 고하라 4레위 사람 곧 죽임을 당한 여인의 남편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내 첩으로 더불어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유숙하러 갔더니 5기브아 사람들이 나를 치러 일어나서 밤에 나의 우거한 집을 에워싸고 나를 죽이려 하고 내 첩을 욕보여서 그로 죽게 한지라 6내가 내 첩의 시체를 취하여 쪼개어 이스라엘 기업의 온 땅에 보내었노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음행과 망령된 일을 행하였음을 인함이로라 7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가 다 여기 있은즉 너희의 의견과 방책을 낼찌니라(3-7)

 

미스바에 도착한 모든 이스라엘이 모였을 때, 베냐민 사람들은 이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들은 단순히 이 모임에 대해 들었다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누군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는 소식을 베냐민에게 전해주었지만, 베냐민은 의도적으로 그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것입니다(3a).

 

미스바에 모인 이스라엘 자손들은 제일 먼저 상황 파악을 나섭니다. 구약에서 시체 토막을 전 이스라엘에 보낸 일은 사무엘상 11장에서 암몬과 전쟁하기 위해 사울이 소 두 마리를 잡아 각을 떠서 이스라엘 전 진역에 보낸 사건에서도 등장합니다. 이 행동이 의미하는 것은 만일 자신을 따라 전쟁에 참여하지 않으면, 그들의 소들도 이 모양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일종의 위협입니다(삼상 11:6-11).

하지만, 이 경우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레위인에게 위협을 느껴서라기보다는 레위인의 행동에 경악하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기 위해 모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모여서 이런 악한 일, 즉 사람의 시체를 토막내어 보내는 끔찍하고 악한 일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되었는지 사건 당사자인 레위인에게 묻습니다(3).

 

본문은 레위인을 ‘죽음을 당한 여인의 남편’이라고 호칭으로 부릅니다(4). 이것은 레위인이 그 여자의 남편 자격, 즉 피해자의 자격으로 이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레위 인이 말할 때, 계속해서 “내 첩”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전국에서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 40만 명 앞에서 자랑스럽게 ‘내 첩’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인가 잘못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지켜야할 사람이, 도덕불감증에 걸려서, 첩(倿)을 얻어 사는 것을 아무런 자책감도 없이 당당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5-6절에 레위인의 진술은 자신에게 불리한 말은 모두 빠져 있고 또 과장되어 있습니다. 미스바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가 일을 저질렀느냐?’라는 질문합니다. 그는 “내가 내 첩의 시체를 취하여 쪼개어 이스라엘 기업의 온 땅에 보내었노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음행과 망령된 일을 행하였음을 인함이로라”(6)고 말합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 아무런 언급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음행과 망령된 일을 인함이라고 합니다.

19장에서는 본문은 ‘기브아의 불량배들’이라고 하였는데, 레위인은 오히려 기브아 사람이라고 말하여 기브아 주민 전체가 이런 일을 벌인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또한, 무엇의 문제에서 19장에서 보면, 기브아 사람들은 레위인을 강간하려 하였는데, 그들이 자신마저 살해할 것처럼 생각되었다고 말함으로써, 그들의 죄가 강간죄가 아니라 살인죄에 해당 되는 것처럼 고발합니다. 첩을 욕보였고 그 결과 그녀가 죽은 것은 사실이지만, 비겁하게 자신이 첩을 집 밖으로 끌어내어 그들의 손에 넘겨준 일이나 그가 돌아온 자신의 첩의 상태를 전혀 돌보지 않아 첩이 죽게 된 사실에 대해서는 조금도 거론하지 않습니다.

그는 기브아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였고 첩을 욕보이고 죽인 것으로 말하여 자신의 잘못은 모두 숨기고, 첩의 죽음이 전부 기브아 사람들의 잘못 때문인 것처럼 고발한 것입니다. 첩을 12조각으로 나누어 각 지파에 보낸 자신의 끔찍한 행동은 기브아 사람들의 죄악상과 강간 범죄를 폭로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한 일로 포장하고 있습니다. 레위인은 첩의 시체 조각을 통해 기브아 사람들의 제약성을 드러내고 정의를 짓기 위한 행동이라고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런 행동 자체가 그의 무자비함과 잔인성을 보여줍니다. 그는 억울하게 희생당한 첩의 죽음을 위로하고 장례를 잘 치러줄 의무가 있는데도, 그녀의 죽음을 복수의 구실로 삼는 반인륜적인 행동을 하고 있던 것입니다.

 

이런 레위인의 극단적 행동은 당시 이스라엘 상황이 영적 도덕적으로 매우 탈락한 상태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죄에 대해 무감각하고 웬만한 자극적인 사건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 풍토가 만연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만일 레위인이 이렇게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조치 없이 다만 편지를 써서 자신의 첩이 강간당하여 죽은 사실을 알렸다면, 한두 지파 정도나 참여하고 나머지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사기를 전체적으로 보면, 적들이 쳐들어와 적을 물리치기 위해 전쟁을 해야 되는 상황에서 이웃 지파들에게 도움을 청해도 서너 지파 정도가 참여하면 많이 모였다라고 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한 개인의 원한을 갚아주기 위해 지파들이 모였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은 평범한 상식과 하나님 말씀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 무정한 사였던 것입니다. 증언을 마친 레위인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명령하여 지금 당장 여기서 어떻게 할지 계획을 만들어 내라고 합니다. 겉으로 보면 방책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가만히 있으면 안 되니 전쟁하자 라고 다그치는 말입니다.

‘여기서’라는 말을 함으로써, 그는 당장 이런 일을 심판해야 된다라고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좀 더 시간적 여유를 갖고 이성적으로 생각하거나 다른 증인들을 불러 자신의 진상을 조사할 필요가 없이 무조건 자신의 말을 믿고 자신의 말대로 따라야 한다라고 몰아붙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격앙된 상태를 충분히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한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서 감정이 가라앉고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사건을 조사하다 보면, 자신의 허물도 드러나게 되고 그러면 자신에게 불리한 사항으로 변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레위인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정의를 이루기 위해 행동하는 것처럼 포장하고 사람들을 선동하였던 것입니다.

영적으로 어둡고 혼란스러울 때, 이런 선동가들이 일어나 교회와 사회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심각한 문제가 생겼을 때 흥분한 감정으로 선동에 휘둘러 행동하기보다는 감정을 가라앉히고 사건을 차근차근 조사한 후에 행동으로 옮겨도 늦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는 일은 시간에 쫓겨 급하게 행해야 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과도 중요하게 여기시지만, 과정을 더 중요하게 보시는 분이며 자신의 계획과 이를 인간의 약함이나 더딤 때문에 포기하는 분이 결코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억울함을 해결하기 위해 끔찍한 짓을 자행할 뿐 아니라 자기중심적으로 사건을 왜곡하고 말하는 이러한 태도가 우리 속에도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길 원합니다. 분명한 원칙이 무너지면 권위는 무너집니다. 진리의 원칙이 분명할 때, 하나님께서는 권위를 바르게 세워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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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19-03)

 


기브아 불량배들과 레위인의 악행

사사기 19장 22-30절


세상이 점점 걷잡을 수 없게 타락해 가면서, 마지막 희망을 기독교에게 갔습니다. 그들은 ‘우리는 타락해도 성도만이라도 거룩해야 한다.’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성도마저 타락하면,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점점 시대가 영적으로 어두워지면, 많은 징조를 보여 주십니다. 그 증거 중에는, 성도들에게 거룩성이 상실되어 갑니다. 거룩해야 할 사람들이 거룩성을 잃어버리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악랄할 수 있습니다.

 

  • 본문에서 레위인은 자기 대신 자신의 첩을 끌어내서 기부 사람들에게 내놓습니다. 그녀는 밤새도록 기부한 사람들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새벽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무도 돌봐주지 않았기에 결국 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레위인은 죽은 첩의 시신을 12개의 토막으로 나누어 이스라엘 온 지파를 보내어 전쟁하기 위해 이스라엘 자손들을 소집합니다.

 

불량배들의 악행과 첩의 죽음(22-25)

말씀의 부재가 가치의 혼동과 인류의 실종을 낳습니다. 영적인 기준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법을 집행할 지체가 무너지면 저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게 됩니다. 결국, 왕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의 부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의 가치에 물들어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삶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줍니다.

 

22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집 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 하니 23집 주인 그 사람이 그들에게로 나와서 이르되 아니라 내 형제들아 청하노니 이같은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 이 사람이 내 집에 들어왔으니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 24보라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 있은즉 내가 그들을 끌어내리니 너희가 그들을 욕보이든지 너희 눈에 좋은 대로 행하되 오직 이 사람에게는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 하나 25무리가 듣지 아니하므로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붙잡아 그들에게 밖으로 끌어내매 그들이 그 여자와 관계하였고 밤새도록 그 여자를 능욕하다가 새벽 미명에 놓은지라(22-25)

 

본문의 사건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에서 이어났다고 해도 끔찍할 것인데, 하나님의 백성들인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일입니다. 참 경악스러운 일입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를 수 없고,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는지를 잘 표현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을 습관적으로 입에 올릴 수 있다는 사실이 이런 무서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1) 불량배들의 악한 요구(22)

 

기브아에 도착한 레위인 일행은 한 노인의 환대로 집에서 편안히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은 무사하게 지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작은 연회를 즐기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기브아 성읍의 불량배들이 등장합니다. 이 불량배는 사회적 질서를 파괴한 자들로 표현합니다.

“집을 에워쌌다”(22)라는 표현을 통해서, 한두 명이 아니라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폭력 사건에 관여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의 등장으로 갈등은 최고조에 이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집을 에워싼 채 문을 두드리며 사람을 내놓으라고 소리 지르는 모습은 매우 위협적이고 기브아 사람들의 폭력성을 잘 보여줍니다. 이들은 레위인을 내놓으라고 하면서 “그와 관계하겠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성관계를 의미합니다. 나그네를 환대하기는커녕 냉대하고 박대했던 그들이 이제는 학대 하겠다고 덤빈 것입니다. 이런 성폭행은 상대방에게 가장 치욕을 줄 수 있는 굴복의 방식으로 폭력입니다. 이런 모습은 그들이 얼마나 깊숙이 가나안의 악한 풍습에 빠져 있고, 또 그것을 즐기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합니다.

이 짓을 하는 자들은 소위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이란 자들입니다. 같은 유대인을 향해서 이런 악행을 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땅이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정복했으니, 항상 나그네라는 생각으로 다른 나그네를 환대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동족을 폭행하려고 합니다.

이런 행동의 패턴 반복은 기브아가 하나님께 멸망 당한 소돔과 고모라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성읍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 백성이 아니었지만, 기브아는 하나님 백성이었기에 더욱 참담하고 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불량배들의 악행을 말리는 노인(23-24)

 

이런 불량배들의 요구에 집주인 노인은 그들을 “내 형제들아 청하노니 이같은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23)라고 간곡히 부탁합니다. 이러한 일은 망령된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망령된 일’이란 지혜롭지 못한 어리석은 일이며 하나님 앞에 제가 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기브아 사람들에게 잘못된 일을 하지 말라라고 타이르던 노인은 사태를 진정시킬 수 없다라는 판단했는지, 대안으로 “보라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 있은즉 내가 그들을 끌어내리니 너희가 그들을 욕보이든지 너희 눈에 좋은 대로 행하되 오직 이 사람에게는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라고 말합니다(24). 자기 역시 악행이라고 생각할만한 행동을 제안합니다. 그는 레위인에게만 어리석은 일을 하지 말라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여기서 노인의 가부장적이고 차별적인 관점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남자인 레위인만 보호의 대상으로 생각하였고, 망령된 일을 행해서는 안 되는 대상으로 여긴 것입니다. 자신의 딸들과 레인의 첩인 여성들은 사정에 따라 얼마든지 남성들의 안전을 위해 버려지고 희생당해도 좋은 존재로 생각한 것입니다. 원래 정상적인 사회에서는 아버지와 남편은 딸을 지키고, 아내를 지켜야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이 보호해야될 대상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희생양으로 내놓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롯이 이러한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창 19:1-11). 소돔 문화에 젖은 롯처럼, 이 노인 역시, 다른 사람보다 나아 보였지만, 사실은 비교할 것이 못 됩니다. 이렇게 사회가 하나님 말씀에 멀어질수록 차별과 강자의 횡포는 심해지고 약자는 희생당하게 됩니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분별할 수 없는 시대이며, 자기 눈에 옳은 데로 결정하다 보니 이러한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3) 노인의 제안을 거절하는 불량배(25)

 

자신들의 딸들과 레인의 첩을 내놓겠다는 노인의 제안을 기브아 불량배들은 거절합니다. 원하는 것은 기어이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욕망의 노예를 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인간은 포기하고 실망하고 기다리고 체념하는 존재입니다. 성취욕에 불타서 도전만 하는 존재는 인간답지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도전만 하고 산다면, 모두 미치광이가 될 것입니다. 그들은 옳은 말도 어리석은 말도 모두 듣지 않고 오직 자기주장만을 되풀이하였습니다. 이미 죄가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말도 들리지 않은 것입니다.

기브아 사람들의 위협이 계속되자 레위인은 자신의 첩을 직접 잡아서 밖으로 끌어내 기브아 사람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아마도 그의 첩은 끌려나가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며 저항하였을 것입니다. 레위인은 이런 첩을 강제로 끌어내어 밖으로 내보낸 것입니다. 친정으로 간 첩을 데리고 오기 위해 나귀까지 챙기면서 첩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던 레위인은 자신이 위험에 처하자 첩을 헌신짝 버리듯 버리고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결국, 남편의 손에 붙들려 밖으로 쫓긴 첩은 기브아 불량배들에게 어떤 수모를 당했을지 상상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첩이 얼마나 오랫동안 끔찍한 성폭행을 당하며 시간을 보냈겠습니까! 사사기 저자는 그 고통스러운 시간을 시간의 흐름을 표시함으로써 보여 주며, 불량배들의 잔악무도함을 알 수 있습니다.

 

잔혹한 사건을 잔혹한 방법으로 알림(26-30)

교회는 거룩한 울타리가 되어 악을 바로잡고 약한 자들의 삶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사회 전반에서 일어나는 추악한 일들 무자비한 폭행,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러한 일들이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악한 세상에 거룩한 울타리가 되어줘야 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놀랄 만한 더 큰 스캔들과 더 큰 사건이 있어야지만, 정신을 차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교회가 깰 때입니다.

 

26동틀 때에 여인이 자기의 주인이 있는 그 사람의 집 문에 이르러 엎드러져 밝기까지 거기 엎드러져 있더라 27그의 주인이 일찍이 일어나 집 문을 열고 떠나고자 하더니 그 여인이 집 문에 엎드러져 있고 그의 두 손이 문지방에 있는 것을 보고 28그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우리가 떠나가자 하나 아무 대답이 없는지라 이에 그의 시체를 나귀에 싣고 행하여 자기 곳에 돌아가서 29그 집에 이르러서는 칼을 가지고 자기 첩의 시체를 거두어 그 마디를 찍어 열두 덩이에 나누고 그것을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내매 30그것을 보는 자가 다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도다 이 일을 생각하고 상의한 후에 말하자 하니라(26-30)

 

레위인의 첩은 밤새도록 남자들에게 범하여지고 새벽에 풀려나 동 뜰 때 자신의 남편이 있는 집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날이 밝을 때까지 문 앞에 엎드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풀려나 집에 왔을 때도 그녀를 맞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서 문 앞에서 날이 다 밟도록 엎드려져 있습니다(26). 이것이 더 큰 비극입니다. 그녀의 남편조차 집 밖으로 끌려간 그녀의 안부에 관심이 없기에, 그녀가 새벽녘에 집 앞에 왔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 날이 완전히 밝았고 첩의 남편은 길을 떠나기 위해 문을 열었습니다. 그의 머리에는 첩의 안부나 그녀에 관한 생각은 전혀 없고 오직 기브아를 일찍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본문은 “그가 일찍 일어나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27).

 

문을 열었을 때, 문 앞에 엎드려져 있던 자신의 첩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엎드려져 있던 첩의 모습을 자세히 보면, 그녀는 문 집 앞에 쓰러져 있고 그녀의 손은 문지방 위에 올려져 있습니다. 이 장면은 사사기에서, 혹은 구약 천지에서 가장 가슴 아픈 장면 중 하나입니다. 손이 문지방에 놓여 있다는 것은 그녀가 안전한 집으로 들어가기를 얼마나 바랐는지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간신히 살아서 집 앞에 왔지만, 문을 두드릴 힘도 없어 문도 들리지 못한 채 문 앞에 쓰러져서 문을 향해 손을 뻗은 채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도 그녀의 안부를 걱정하며 돌아오기를 기다린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정한 남편은 문 앞에 쓰러져 있는 첩을 보자 안부를 묻거나 그녀의 상태를 살펴보지도 않고 ‘일어나라’라고 명령합니다(28). 그는 한시바삐 이 기브아를 떠나기 원했기에, 첩의 상태나 안보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레위인의 말에 첩은 아무런 대답이 없습니다. 레위인의 이중적인 행동을 보면서, 우리 자신에게는 그런 모습이 없는지 살펴야 합니다. 남의 폭력성에 대해 거품을 물고 비난하면서, 정작 우리 일상에 스며든 우리의 비정함과 냉정함에 대해서 관대한 존재들이 아닙니까!

 

본문에서 ‘레위인이 그의 시체를 나귀에 싣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번역하고 있지만, 원문에서는 ‘시체’라는 말이 없습니다. 여기서 대답이 없는 것을 죽은 것으로 간주하고 ‘시체’라고 해석하고 번역했지만, 실제 원문에서는 죽은 것인지 아니면 의식이 없는 상태인지 알 수 없습니다. 본문은 그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지 않은데, 이런 모호한 표현이 레위인이 자신의 첩의 상태를 살피거나 치료할 생각보다는 짐짝처럼 나귀에 실어 그 성을 빠져나오기에 급급했다는 사실을 부각시킴으로써 이 레위인의 무정하고 이기적인 행동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레위인은 첩을 12토막 내어서, 이스라엘 전 지역에 보내는 매우 엽기적인 일을 벌입니다. 전체적으로 레위인이 첩을 토막 내는 것은 마치 제사에 쓸 짐승을 잡는 것과 같습니다. 레위인은 첩의 시체를 토막 냄으로써, 그녀를 다시 한번 모욕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첩을 죽음으로 몰았을 뿐 아니라, 그 죽음마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시신을 모욕하며 철저히 이용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당한 것을 보복하기 위해 이스라엘 자손들이 토막 난 시체를 보고 분노와 경악하여 전쟁을 일으키도록 선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레위인을 결코 긍정적으로 보지 않고 무정할 뿐 아니라 분노하면 잔인한 짓을 서슴지 않는 인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레위인이 이런 분노를 표하고, 온 이스라엘을 모을 만큼 정의로운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레위인의 첫 이야기는 폭력으로 인해 비극으로 끝나게 되지만 이 비극이 더 큰 비극을 일으키는 원인이 됩니다. 사사기 19장에서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데, 이것은 등장 인물 중,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없는 것처럼 자신의 생각대로만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의 결과가 얼마나 끔찍한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레위인은 명분만 쫓은 사람이었지만, 사실은 그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정직한 사람이 되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고 옳은 것을 주장하는 것은 누구든지 해야 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이런 주장에 알맞은지에 대한 문제는 다른 문제입니다. 다른 문제점을 지적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은 생각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만 올바른 요구한다면, 다른 사람도 변화되지 않고, 자신은 더욱 왜곡된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자신의 기준에 요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어서, 자신의 기준을 재정립하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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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19-02)


기브아에서 동족에게 천대 받는 레위인

사사기 19장 11-21절


 

교회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곱지 않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 대해서 세상은 어떻게 봅니까? 욕심 많은 사람, 말이 많은 사람, 고집이 센 사람, 실속은 없고 말한 대로 살지 않는 사람, 인정하기 싫지만, 그런 이미지가 강합니다. 그러니 교회로부터 이탈하는 세력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말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서 우리를 평가할 겁니다. 오늘날 교회들의 모습이 사사 시대 말의 상황과 비슷하지는 않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 장인의 환대를 받은 레위인은 오후 늦게 출발하였기 때문에 결국 에브라임까지 돌아가지 못하고 하룻밤을 머물기 위해 동족 베냐민이 사는 기브아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냉대를 당합니다. 다행히 에브라임 출신으로 그곳에 거래하고 있던 한 노인을 만나 그의 집에서 무사히 하룻밤을 보내게 됩니다.

 

기브아에 도착한 레위인 일행(11-15)

교회가 사탄과 싸우는 일도 힘든데, 교회 안에서 형제들끼리 싸우는 바람에 세상으로부터 더욱 신뢰를 잃어버려가는 것입니다. 이제는 교회가 대외적으로 지역 사회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할지, 같이 고민하고 실천에 박차를 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잃은 신뢰를 회복하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 나갈 수 있습니다.

 

11그들이 여부스에 가까이 갔을 때에 해가 지려 하는지라 종이 주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가 돌이켜 여부스 사람의 이 성읍에 들어가서 유숙하십시다 하니 12주인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돌이켜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하지 아니한 이방 사람의 성읍으로 들어갈 것이 아니니 기브아로 나아가리라 하고 13또 그 종에게 이르되 우리가 기브아나 라마 중 한 곳에 가서 거기서 유숙하자 하고 14모두 앞으로 나아가더니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가까이 이르러 해가 진지라 15기브아에 가서 유숙하려고 그리로 돌아 들어가서 성읍 넓은 거리에 앉아 있으나 그를 집으로 영접하여 유숙하게 하는 자가 없었더라(11-15)

 

하나님의 사람 레위인과 그의 첩은 장인의 지나친 환대를 뿌리치고 늦은 오후에 떠납니다. 여부스(현 예루살렘) 근처에 갔을 때 해가 지려 하였기에 레위인의 종은 여부스 성읍으로 들어가서 유숙하자고 조심스럽게 요청합니다(11). 여부스는 베냐민 지파에게 주신 땅인데, 그들이 이 지역을 완전히 정복하지 못하고, 당시는 가나안 토착민인 여부스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레위인은 이방 사람에게 속한 여부스에 들어가지 않고 그 대신 기브아로 가겠다고 말합니다(12). 당시 이방인은 제의적으로 부정한 존재이며 이스라엘에게 완전히 정복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위험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종교적이고 사회적 이유로 그는 여부스에 들어가기를 거절하고 기부하러 가자고 제안합니다. 이방인이 사는 여부스보다 동족이 사는 기브아가 훨씬 안전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기브아는 여부스에서 8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베냐민 지파에게 할당된 지역이며 훗날 이스라엘의 첫 왕 사울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동족의 땅이 훨씬 더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부스 대신 기브아를 선택한 것이 현재까지는 매우 상식적이고 바람직한 결정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레위인의 선택은 뒤에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기브아가 이방인의 땅 여부스보다 결코 더 안전하지 않고 정결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더욱 강조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정말 안전한 여행을 원했다면, 장인의 제안대로 다음 날 아침 일찍 떠나는 것을 택해야 했습니다.

 

레위인은 기브아 말고 라마라는 다른 장소에도 머물 수 있을 것이라며, 여부스 말고 다른 선택지를 제안합니다(13). 지리적으로 베들레헴에서 시작하여 에브라임으로 가는 길은 남북으로 연결되는 길을 따라 가다가 동쪽으로 빠지면 되는데, 베들레헴에서 북쪽으로 가면 제일 먼저 여부스를 만나게 되고 그 다음 기브아와, 그 다음이 라마입니다.

 

즉, 종은 여부스쯤 와서 이제 유숙을 하자 하였고, 레위인은 이방 땅이라는 이유로 좀 더 북쪽에 있는 기브아나 혹은 좀 더 갈 수 있으면 라마까지 가자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런 레위인의 모습을 보면 에브라임까지 가는 길을 매우 서두르고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들이 열심히 갔지만, 결국 기브아에 도착했을 때 해가 져서 더 이상 여행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14).

 

여기서 기브아가 베냐민 지파에 속했다는 사실을 밝히므로 훗날 기브아에서 일어난 사건이 이방 땅에서 이방 민족에 의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 동족에게 저지른 범죄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레위인 일행은 하룻밤 머물기 위해 기부하러 들어갑니다. 성문에서 레위인의 일행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 일행은 사람을 기다리기 위해 성문 가까이 있는 광장으로 가서 그곳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거두어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 사람이 없었습니다(15). 이것은 이 당시 관습에서 볼 때, 매우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여행객이 자신의 성읍으로 오면, 그를 자신의 집에 하룻밤 재워주는 것은 당연히 그 성읍 사람들이 해야 될 의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방인도 아닌 같은 이스라엘 민족의 여행자가 성읍에 들어와서 자신을 영접할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도 초대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회적 연대의식 혹은 도덕이 붕괴되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레위인 일행을 영접한 노인(16-21)

선을 베푼 사람들이 하는 말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라고 말합니다. 인간으로써 인간답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돌봄과 베풂과 배려가 성도에게 요구되는 삶입니다. 불안하고 두려워 쌓고 경계하고 빼앗는 데만 몰두하는 세상에서 성도에게 요구되는 것은 돌봄과 베풂과 배려의 삶입니다.

 

16저녁 때에 한 노인이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오니 그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 산지 사람으로서 기브아에 거류하는 자요 그 곳 사람들은 베냐민 자손이더라 17노인이 눈을 들어 성읍 넓은 거리에 나그네가 있는 것을 본지라 노인이 묻되 그대는 어디로 가며 어디서 왔느냐 하니 18그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는 유다 베들레헴에서 에브라임 산지 구석으로 가나이다 나는 그 곳 사람으로서 유다 베들레헴에 갔다가 이제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 중인데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는 사람이 없나이다 19우리에게는 나귀들에게 먹일 짚과 여물이 있고 나와 당신의 여종과 당신의 종인 우리들과 함께 한 청년에게 먹을 양식과 포도주가 있어 무엇이든지 부족함이 없나이다 하는지라 20그 노인이 이르되 그대는 안심하라 그대의 쓸 것은 모두 내가 담당할 것이니 거리에서는 유숙하지 말라 하고 21그를 데리고 자기 집에 들어가서 나귀에게 먹이니 그들이 발을 씻고 먹고 마시니라(16-21)

 

이스라엘 백성의 성읍인 기브아에서 하룻밤을 유속하려고 했던 레위인 일행은 당혹스러운 상황에 처했습니다. 아무도 그들을 환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같은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것이 더 이상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율법은 그들의 삶에 어떤 영향력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1) 환대하지 않는 기브아(16-19)

 

이제 한 노인이 등장합니다. 그는 베냐민 사람이 아니라 에브라임의 사람이라고 본문을 소개하면서, 그가 외지인임을 밝히고 있습니다(16). 이것은 베냐민 사람들의 무정함과 에브라임 출신의 노인의 호의를 비교하기 위한 포석입니다. 그는 베냐민 사람들과 다르게 눈을 들어 나그네를 바라보았고,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다가와 어디로 가며 어디서 왔는지 물었습니다(17).

 

이런 호의에 레위인은 자신이 베들레헴에서 에브라임 산지로 간다고 말하고, 자신의 집이 에브라임에 있음을 밝힙니다(18). 여기서 ‘여호와의 집’을 언급함으로써 자신의 레위인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자신을 영접하는 사람이 없다며 자신의 곤란한 상황을 노인에게 설명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자신을 영접해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레위인은 최대한 겸손하게 자신들을 종과 여정으로 지칭하며 자신들과 자신들의 나이가 먹을 충만한 음식과 사료가 있음을 길게 설명하였습니다(19). 이것은 노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 것이니 잠만 재워달라고 간곡히 부탁하기 위해서입니다.

 

레위인은 기브아 성읍 사람들의 야박함을 체험한 후,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 이 노인에게서도 거절 당하지 않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장인의 지나친 환대에 지쳐 급하게 나온 것과 대조를 이루는데, 환대에 지쳐 나온 사람들이 이제는 환대를 구걸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장인의 지나친 환대나 기브아의 지나친 냉대와 레위인의 구걸에 가까운 모습들은, 당시 사회가 상식이 통하는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라 비정상과 비상식적인 행동들이 만연한 사회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2) 레위인의 간청에 대한 노인의 대답(20-21)

 

노인은 레위인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합니다. 그는 레위인이 스스로 쓸 것을 담당하겠다는 말을 무시하고 자신이 뭐든 쓸 것을 담당할 것이라고 말합니다(20). 그러고는 그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나귀에게 먹을 것을 주고 발을 씻고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물과 음식을 제공해 줍니다. 고대 근동에서 손님이 집에 오면 나귀와 손님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씻을 물을 제공하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비정상적인 베냐민 사람들과 달리 노인은 매우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한 대를 베풀었습니다(21). 그리고 이런 환대의 레위인은 장인의 집에서처럼 편안하게 먹고 마시며 노인의 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사사 시대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기 마음에 원하는 대로 살아감으로써 폭력이 난무하는 잔인한 세상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죄악 된 삶에서 벗어나 거룩하고 정결한 행실을 회복하기 원한다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지켜 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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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19-01)


제사장 지파 사람 레위인과 첩

사사기 19장 1-10절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안정감을 경험하기도 하고 고통을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른 인간관계는 단지 두 사람의 노력만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때 우리의 이기심으로 깨어진 인간관계가 온전히 희복되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 에브라임 산지에 살던 레위인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였습니다. 첩이 화를 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레인은 이 첩을 데리고 오기 위해 장인의 집을 방문하고 환대를 받습니다. 장인의 강권을 이기지 못한 레이는 그곳에 더 머물게 되고 날이 저물어 떠나게 됩니다.

 

레위인의 첩이 친정으로 감(1-3)

자기 뜻과 욕심대로 살면서 공동체를 일으키고 죽어가는 세상을 살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돌릴 수는 없습니다. 성도들이 거룩하게 살지 않으면 세상은 더 악한 길로 치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한 타락과 몰락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정체성까지 위협했습니다. 그 사건의 발단이 오늘 이야기입니다.

 

1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였더니 2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 그의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서 거기서 넉 달 동안을 지내매 3그의 남편이 그 여자에게 다정하게 말하고 그를 데려오고자 하여 하인 한 사람과 나귀 두 마리를 데리고 그에게로 가매 여자가 그를 인도하여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니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기뻐하니라(1-3)

 

본문은 시대적 배경으로 볼 때, “이스라엘의 왕이 없던 그 때”라는 표현을 통해서 사자 시대를 말하고 있습니다(1). 하나님을 떠난 인간 사회가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함 때문에 세상과 차별화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욕망이 세상과 차이가 있어야 합니다.

 

사사기 17장과 18장의 관계 속에 볼 때,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는 영적으로 얻은 시기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에브람 산지 구석에 거류하는 레위인입니다. 그 또한 17장에 레위인처럼 거류자로 소개됩니다. 동일한 장소적 배경과 고려하는 레위인의 등장은 19장 이야기가 17장과 18장의 이야기와 상당히 연속성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레위인의 이름과 첩의 이름은 소개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은 등장 인물들의 행동이 어떤 특별한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당시의 보편적인 인물들의 모습을 대표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이들은 당시 타락한 이스라엘 자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 레위인이 유다 베들레헴 출신의 첩을 얻습니다(1). 첩은 정부인이 아닌 다른 부인을 일컫는 말로, 주로 정부인의 불임으로 인해 아들을 얻기 위해서 맞이하는 경우도 있지만, 성적인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얻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사기의 맥락에서 보면 입다나 아비멜렉의 예에서 보듯이 첩을 보는 사사기의 시각은 부정적입니다.

 

그런데 그 첩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 넉 달이나 그곳에 거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우리 말 번역에서는 ‘행음하다’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원래 원음을 본다면 ‘싫어하다’, ‘화를 내다’라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만일, 원래 번역처럼 ‘행음하다’라고 이 단어가 해석된다면 아내가 행음하는 일은 남편이 그 아내를 죽일 수 있을 만큼 심각한 범죄이며 이혼의 사유가 되었습니다. 이런 경우 남편이 첩을 데리러 간다는 것 자체가 설득력이 전혀 없어집니다. 대신 첩이 남편을 싫어하여, 혹은, 남편과 다투고 아버지의 집으로 간 경우에는 남편의 첩을 데리고 오는 상황이 충분히 납득됩니다.

 

특히 3절에서 “다정하게 말하고”라는 표현을 통해, 남편이 첩을 설득하고 달래는 입장으로 표현한 것을 보면, 첩이 남편한테 화가 나거나 다투어서 집을 나간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남편과 싸우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간 첩은 넉 달 동안 아버지의 집에 지내게 됩니다.

 

넉 달 후 남편은 첩에게로 갑니다. 아마 스스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안 돌아오니 직접 데리고 오려고 나선 것입니다. 하인과 함께 나귀 두 마리를 가지고 가는데, 나귀 한 마리는 첩을 태워서 데리고 오기 위해 마련한 것입니다. 이는 첩을 반드시 데려오고 싶은 그의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가 첩의 집에 도착하자 아내가 그를 마중 나와서 그를 자신의 아버지의 집으로 데리고 들어갑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아마도 그간 남편에 대한 화가 풀렸고 오랜만에 보는 남편이 반가웠던 것 같습니다. 첩의 아버지도 사이의 방문을 매우 기뻐하며 환영하고 있습니다.

 

날이 저물어서야 떠나는 레위인(4-10)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무한 이기주의 늪에 깊이 ᄈᆞ져들게 되어 서로를 이한 배려나 선행을 찾기 어려운 사회가 되어 버립니다.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은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공동체성을 상실한 이기적인 백성으로 전략했습니다.

 

4그의 장인 곧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를 머물게 하매 그가 삼 일 동안 그와 함께 머물며 먹고 마시며 거기서 유숙하다가 5넷째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의 사위에게 이르되 떡을 조금 먹고 그대의 기력을 돋운 후에 그대의 길을 가라 하니라 6두 사람이 앉아서 함께 먹고 마시매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청하노니 이 밤을 여기서 유숙하여 그대의 마음을 즐겁게 하라 하니 7그 사람이 일어나서 가고자 하되 그의 장인의 간청으로 거기서 다시 유숙하더니 8다섯째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 그 여자의 아버지가 이르되 청하노니 그대의 기력을 돋우고 해가 기울도록 머물라 하므로 두 사람이 함께 먹고 9그 사람이 첩과 하인과 더불어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 그의 장인 곧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에게 이르되 보라 이제 날이 저물어 가니 청하건대 이 밤도 유숙하라 보라 해가 기울었느니라 그대는 여기서 유숙하여 그대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내일 일찍이 그대의 길을 가서 그대의 집으로 돌아가라 하니 10그 사람이 다시 밤을 지내고자 하지 아니하여 일어나서 떠나 여부스 맞은편에 이르렀으니 여부스는 곧 예루살렘이라 안장 지운 나귀 두 마리와 첩이 그와 함께 하였더라(4-10)

 

사위가 딸을 데리고 가기 위해 집을 방문하자, 3일 동안 환영 잔치를 엽니다. 3일 동안 먹고 마시며 장인의 집에 머문 것을 간략하게 언급한 것을 보면 일반적으로 사위가 왔을 때, 3일 정도 머물게 하며 한다는 것이 당시의 관습으로 보입니다. 여기까지 보면 부부 싸움 한 부부가 잠시 떨어져 있다가 다시 만나 화해하고 즐겁게 지내는 평범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환대가 끝나고, 이제 레위인과 첩은 일찍 일어나 떠나려고 하였습니다. 둘이 화해를 하고 같이 떠나려고 한 것입니다. 근동 지역은 낮에는 햇빛이 강하기 때문에 한낮을 피하여 주로 오전이나 오후에 여행을 합니다.

 

유다 베들레헴에서 에브라임 산지까지는 반나절 거리였기 때문에 일찍 오전에 출발하면 오전 중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첩의 아버지는 레위인에게 음식을 좀 먹고 기운을 얻은 후에 출발하라고 명령합니다. 명령형을 사용한 것을 통해 장인이 사이를 강하게 붙잡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강권의 레인과 접은 장인과 같이 먹고 마십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첩의 장인은 레위인에게 묻고 가라고 부드럽게 설득합니다. 앞에 명령한 어조와는 대조적으로 매우 부드럽게 의사를 타진한 것입니다.

 

7절에서 보면, 이런 요청에 레위인은 일어나서 가려고 하지만, 장인이 그를 강압적으로 잡았기에 하루를 더 머물게 되었습니다. 다섯째 날도 넷째 날과 동일한 일이 반복됩니다. 레위인은 첩을 데리고 출발하려고 하고 장인은 이를 하루라도 더 잡아두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장인이 일반적인 환대를 벗어나 강압적인 방법으로 사위를 환대하려는 모습을 보면서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환 대는 긍정적인 것입니다. 구약에서 남을 대접하는 것은 분명히 좋은 미덕입니다. 후에 기브아와 거민들이 레위인들을 환대하지 않고 공격하려 했던 것과는 완전히 대조를 이룹니다. 장인은 과도한 환대를 통해 사이의 마음을 즐겁게 만들어 딸과 사이좋게 지내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환대 장면에 딸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딸의 생각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런 비정상적인 한 대를 통해 출발하는 레위인의 의지를 반복적으로 막는 것을 보면서, 본문은 무언가 불안감을 느끼게 합니다. 상황이 레위인의 계획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이런 극진한 환대에도 레위인은 더 이상 출발을 지연시키지 않고 싶었습니다. 그는 대접을 받는 동안 음식을 먹었지만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8절에서 보면 6절과 다르게 ‘마셨다’라는 표현이 빠져 있습니다. 이것은 레위인이 반드시 이날 떠나겠다고 결심하고 술을 마시지 않고 맨 정신을 유지했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9절에서 레위인은 첩과 그의 하인과 더불어 일어나서 떠나려고 하였습니다. 이때도 장인은 7절처럼 또다시 머물러 가라고 간청합니다. 이번에는 6절과 다르게 이유가 나옵니다. 해가 이미 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8절에서 해가 기울도록 머물라라는 말은 한낮이 지나서 가라는 의미이고 9절에서 날이 저물어 간다라는 말은 해가 저물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오전에 쉬었다가 한낮을 피해 오후에 출발하라며 잡고 연회를 베풀었는데, 레위인의 의도와는 다르게 그 연회가 너무 길어져서 오후를 지나 저녁이 가까워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베들레헴에서 에브라임 산지가 반나절이라고 해도, 여행을 해가 저물 무렵에 하는 것은 결코 지혜로운 행동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인은 이번에도 사이에게 하룻밤 더 머물면서 즐겁게 지내다가 내일 일찍 출발하라고 조언합니다.

 

이 부분은 19장에서 21장의 서론 부분으로 레위인에 대한 장인의 지나친 환대와 출발 지체가 이후에 일어날 일련의 사건의 시발점이 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레위인은 장인이 간곡하게 하룻밤 더 자라고 붙잡았지만, 그곳에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장인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다는 이성적 판단보다는 그곳에 더 머물고 싶지 않은 감정적 판단을 따라서 고향까지 가기 전에 해가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늦은 오후에 길을 나섰습니다.

아마도 장인의 지나친 환대가 지겨웠거나 부담스럽기에 빨리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는 결심이 서자마자 일어나서 곧바로 떠납니다. 일어나자마자 여브스 근처에 이르렀다라고 부모는 말하는데 중간 과정을 모두 생략함으로써 레인의 급한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브스는 예루살렘의 다른 이름으로 이곳은 사사기 1장 7-8절에 유다가 아도니 백섹을 죽이면서 승리하였고, 사사기 1장 21절에서 베냐민 사람들이 이곳을 공격하였지만, 완전히 정복할 수 없었기에 그곳에는 여전히 이방인들인 여브스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들의 통치자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이방인들과 다를 바 없는, 오히려 더 악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지 않고 살아간다면 불신자들보다 더 악한 모습이 우리에게 나타날지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주인으로 모시는 참된 성도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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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18-02)

 


불순종으로 건축한 단 지파 성읍

사사기 18장 21-31절


인간의 힘으로 만든 신은 인간의 힘으로 무너집니다. 우리가 의지한 우리의 우상은 배반할 것입니다. 결국 다른 우상들에 의해서 대체될 것입니다. 말씀에 기초하여 세워진 신앙이 아니라 언제든지 우리가 믿는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은 우리 교회의 우상이요, 개인의 우상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계속 단 지파와 미가의 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본문에서 단 지파 사람들은 미가의 집에서 신상과 제사장을 훔친 후, 이에 항의하는 미가를 죽이겠다고 협박하여 쫓아 보냅니다. 그 후에 단 지파는 평화로운 라이스를 점령하고 그곳을 단 지파의 거주지로 삼습니다. 또한, 그곳에 미가의 집에 신상을 세우고 그들과 같이 온 모세의 손자 요나단을 자신들을 위한 제사장으로 세웁니다.

 

미가의 요구와 단 지파의 협박(21-26)

세상은 힘의 논리가 진리인 것처럼, 통용되는 세상에서 부와 권력은 누구도 떨칠 수 없는 유혹입니다. 하지만 세상보다 더 큰 힘을 가질 때가 아니라 세상과 다르게 살 때 실추된 교회와 성도의 위상은 회복될 것입니다. 세상보다 더 큰 힘을 가질 것이 아니라 세상과 다르게 살 것을 힘써야 합니다.

 

21그들이 돌이켜서 어린아이들과 가축과 물품을 앞에 두고 진행하더니 22미가의 집을 멀리 떠난 때에 미가의 이웃집 사람들이 모여서 단 자손을 따라 미쳐서는 23단 자손을 부르는지라 그들이 낯을 돌이켜 미가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일로 이같이 모아 가지고 왔느냐 24미가가 가로되 나의 지은 신들과 제사장을 취하여 갔으니 내게 오히려 있는 것이 무엇이냐 너희가 어찌하여 나더러 무슨 일이냐 하느냐 25단 자손이 그에게 이르되 네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리게 하지 말라 노한 자들이 너희를 쳐서 네 생명과 네 가족의 생명을 잃게 할까 하노라 하고 26단 자손이 자기 길을 간지라 미가가 단 자손이 자기보다 강한 것을 보고 돌이켜 집으로 돌아갔더라(21-26)

 

단 지파는 라이스를 정복하기 위해 미가의 집에 신상을 훔쳐서 떠나버립니다. 부적같이 여긴 것입니다. 아마도 그 신상을 가지고 있고, 제사장을 소유하고 있으면, 조금이라도 전쟁에서 여호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미가의 신상을 훔친 단 지파는 가족들을 앞세우고 미가의 집을 떠났습니다. 일반적으로 가족과 귀중한 물건들은 뒤에 놓고 보호하는데 여기서 앞세운 것을 보면 미가가 뒤에서 쫓아올 것을 예견하는 행동으로 보입니다(21).

단 지파 사람들이 미가의 집에서 어느 정도 멀어지자 미가는 이웃 사람들을 불러모았습니다(22). 미가는 자기 혼자서 일단 600명의 군사를 당할 도리가 없어서 두려우므로, 그들이 집에 있을 때는 꼼짝없이 당하기만 했었습니다. 그들이 멀어지자 이웃들을 불러 모아서 단 지파 사람들을 쫓아간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을 모아 단 지파를 따라잡은 미가는 그들을 불러 세웠습니다.

 

하지만, 단 지파 사람들은 태연하게 미가를 보며, “네가 무슨 일로 이같이 모아 가지고 왔느냐”(24)라고 묻습니다. 무슨 일인지 뻔히 알면서 태연하고 오만하게 질문합니다. 미가는 분통을 터뜨리며, “나의 지은 신들과 제사장을 취하여 갔으니 내게 오히려 있는 것이 무엇이냐 너희가 어찌하여 나더러 무슨 일이냐 하느냐”라고 반문합니다(24).

 

미가의 이 말에는 미가의 생각을 잘 반영하는데, 그는 일단 신상을 ‘내가 만든 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놓고 ‘너희를 애굽에서 구원해 낸 신’이라고 했던(신 32:1-10) 이스라엘 백성들과 닮았습니다. 이런 미가의 말은 미가의 신앙이 여호와를 믿는 신앙이 아님을 나타냅니다. 여호와의 신앙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만든 피조물이며 사람이 만든 신상은 결코 신이 아니라 단순한 물건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만든 신상과 제사장이 없으니,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이냐?’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말은 눈에 보이는 신상과 제사장을 모두 빼앗아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라고 강조합니다. 그의 신앙은 신상과 제사상에 의존한 신앙이었는데 그것이 없으니 그를 축복한 하나님도 사라지게 되어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신상과 제사장에 의지한 신앙의 결과입니다. 보이는 물건이나 제도를 의지하는 신앙은 그 제도와 물건이 사라지면 신앙도 사라집니다. 이것은 진짜 신앙이 아닙니다.

 

단 지파는 사과하기는커녕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리게 하지 말라!” 즉, ‘떠들지 말라’라고 경고합니다. 혹시, “네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리게 하지 말라 노한 자들이 너희를 쳐서 네 생명과 네 가족의 생명을 잃게 할까 하노라”라고 협박합니다(25). 레위인에게도 “잠잠하라”라고 하면서, 위협하던 단 자손은 이제 미가의 항의를 완전히 묵살하면서 죽일 수 있다라고 협박한 것입니다.

 

단 지파는 힘 있는 자가 약한 자의 것을 빼앗는 것을 죄로 여기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당당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 지파가 하나님 말씀이 아닌 철저한 약육강식의 법칙을 따라 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실 미가가 신상을 만들고 레인을 제사장으로 들인 이유는 여호와께 복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 복을 받기 위해 만든 것 때문에 이제 미가와 그의 가족은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축복의 수단으로 여겼던 것이 재앙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가의 잘못된 신앙에 대해 상실과 죽음의 위협으로 심판하셨습니다.

 

도둑질로 시작한 미가는 단 지파의 도둑질의 희생자가 되어 모든 것을 잃고 빈손으로 집에 돌아왔고, 이제 이 재앙의 물건들은 단지파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개인의 범죄가 점점 확대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집안의 위험에 빠뜨린 물건들이 이제는 한 지파 전체에 영향을 주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에서도 ‘나 한 사람쯤이야! 괜찮겠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나 한 사람부터’라고 생각하면서, 잘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가족과 자녀들에게 선한 영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것입니다. 다음 세대까지 그 영향은 미칠 것입니다.

 

라이스 정복과 우상숭배(27-31)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번영을 축복으로 착각하고 불의를 일삼는 자기만족의 종교를 향해 분노하십니다. 죄와 함께 쌓여가는 모든 것은 한순간에 다 무너질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하루하루 자기 일상이 아니라 순종의 일상을 쌓아가는 주의 백성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화려한 신상과 명망 있는 사람을 제사장으로 세운다 할지라도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으면, 세상에 사로잡힘을 면할 수 없습니다.

 

27단 자손이 미가가 만든 것과 그 제사장을 취하여 라이스에 이르러 한가하고 걱정 없이 사는 백성을 만나 칼날로 그들을 치며 그 성읍을 불사르되 28그들을 구원할 자가 없었으니 그 성읍이 베드르홉 가까운 골짜기에 있어서 시돈과 거리가 멀고 상종하는 사람도 없음이었더라 단 자손이 성읍을 세우고 거기 거주하면서 29이스라엘에게서 태어난 그들의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 그 성읍을 단이라 하니라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라이스였더라 30단 자손이 자기들을 위하여 그 새긴 신상을 세웠고 모세의 손자요 게르솜의 아들인 요나단과 그의 자손은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 그 땅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이르렀더라 31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가 만든 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27-31)

 

단 지파 사람들은 미가가 만든 것과 그 제사장을 취하여 목적지인 라이스에 도착하였습니다. 다시 한번, 라이스 사람들을 한가하고 겁 없이 사는 백성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27). 즉, 라이스 백성들은 어떤 분쟁이나 폭력도 없이 서로를 신뢰하는 백성이었습니다. 이런 라이스의 모습은 위에서 보여준 폭력적인 단 지파의 모습과 대조적입니다. 폭력적인 단 지파는 여기에서 폭력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평화로운 라이스를 칼날로 치고 성읍을 불살라 버렸습니다(27). “칼날로 치고 불살랐다”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완전히 진멸할 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28절에서 이렇게 라이스가 소수무책으로 당한 이유를 설명하는데, 그들이 시돈 지배하에 있었지만, 시돈과는 거리가 멀어 무슨 일이 생겨도 도와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단 지파는 미가의 신상을 폭력으로 빼앗았던 것처럼, 라이스도 같은 수법으로 빼앗았습니다. 단 지파는 라이스를 정복하고 그곳의 성업을 세워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29절에서 라이스가 ‘단’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된 배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결국, ‘단’은 자기보다 힘이 센 자들과 싸워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땅을 차지하기보다는 평화롭게 살던 약한 라이스를 정복하였습니다. 단 지파에게는 전쟁이 하나님께 속하였으며 승리는 군사력에 달려 있지 않다라는 신앙이 전혀 없었습니다(대하 20:15). 하나님을 의지하며 승리를 거둔 많은 신앙의 유산들을 잃어버린 채 단 지파는 보잘 것 없는 자기만 의지하였습니다. 그래서 강한 아모리 앞에서는 도망하고 만만한 라이스만 정복한 것입니다. 단 지파의 라이스의 정복은 단 지파가 폭력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뿐 아니라, 이들에게 하나님 믿는 신앙이 없었음을 보여줍니다. 단 지파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신앙이 없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단에 자리를 잡자마자 신상과 제사장을 세웁니다.

 

여기서 본문은 이들 제사장에 대해 부연 설명을 합니다.

첫째, 제사장이 모세의 손자여 게르솜의 아들 요나단이라고 말합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모세의 가문까지 영적으로 부패하였다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온 지 100년도 되지 않았지만, 매우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불과 모세 이후 3대만에 부패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모세 가문 출신의 제사장을 통해서 매우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단 지파는 지금은 잘 나가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단 지파의 범죄를 묵인하지 않으셨습니다. 30절 하반절에 “그 땅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이르렀더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사로잡힌 날’이라는 것은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의 포로로 잡혀간 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앗수르에게 사로 잡힘으로서 심판하실 것을 보여줍니다.

다시 “미가가 만든 바로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다”(31)라는 말을 통해서, 단 지파에게 오랫동안 지속된 잘못된 제의가 바로 미가가 만든 신상 때문이었다라는 것을 다시 상기시키며 미가의 신상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이렇게 17장과 18장은 미가의 도둑질이라는 도덕적 잘못이 신상을 만드는 종교적 범죄로 넘어가게 되었고, 이 일에 레위인이 동참하므로 일반 백성뿐 아니라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도 종교적 탈락에 일조하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한 가정과 한 레인의 문제에 단 지파가 합류함으로써 한 가정의 탈락과 한 레위인의 잘못된 선택이 한 지파 전체가 잘못된 종교적 행위를 지속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한 개인의 종교적 탈락이 점차 심화되고 확대되어 온 이스라엘로 퍼져나가고 있음을 잘 그려냄으로써, 한 개인이 신앙을 바로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단 지파의 모습은 하나님을 떠난 세상적 삶의 기준을 정확히 보여줍니다. 자기 눈에 좋은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ㅅ갊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삶의 절대 기준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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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18-01)

 

 


라이스를 정복한 단 지파와 레위인

사사기 18장 1-20절


 

기독교가 타락할 때 나타나는 증상은, 종교 지도자가 세워지는 과정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일정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 종교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기준이 없어지고, 다만 아무런 경로든지 목사나 선교사 그리고 장로가 되어서 지도자 행세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입니다. 소위 ‘성직 매매’도 성행하게 됩니다. 돈을 주고, 혹은 돈이 많은 사람이 그런 자리를 차지하거나, 혹은 돈을 위해서 그 자리를 탐하는 사람들이 용납되는 시대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사기 마지막으로 갈수록 그런 현상이 두드러집니다.

 

  • 본문에서 단 지파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기업을 정복하지 못하고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곳을 정탐하려 다닙니다. 그러다 라이스를 발견하고 그곳을 정복하려고 출발합니다. 그들은 도중에 미가의 집에 들러 미가 집에 있는 신상들과 에봇과 드라빔을 무력으로 뺴앗으며, 제사장 역할을 했던 레위인에게 단 지파의 제사장 자리를 제안하였습니다. 이에 이 레위인은 기쁘게 이 제안을 수락합니다.

 

라이스를 정복하러 가는 단 지파(1-6)

사사 시대 당시 이스라엘은 주변국들과는 달리 아직 왕정 체제가 확립되어 있지 않아 정치, 사회, 종교적으로 혼란했습니다. 그러나 혼란의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백성들이 더 이상 하나님을 자신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영원토록 살아 계셔서 우주 만물을 통치,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저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며 범죄하였습니다.

 

1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단 지파는 그 때에 거주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그 때까지 기업을 분배 받지 못하였음이라 2단 자손이 소라와 에스다올에서부터 그들의 가족 가운데 용맹스런 다섯 사람을 보내어 땅을 정탐하고 살피게 하며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가서 땅을 살펴보라 하매 그들이 에브라임 산지에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러 거기서 유숙하니라 3그들이 미가의 집에 있을 때에 그 레위 청년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리로 돌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누가 너를 이리로 인도하였으며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며 여기서 무엇을 얻었느냐 하니 4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미가가 이러이러하게 나를 대접하고 나를 고용하여 나를 자기의 제사장으로 삼았느니라 하니라 5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 보아서 우리가 가는 길이 형통할는지 우리에게 알게 하라 하니 6그 제사장이 그들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너희가 가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 하니라(1-6)

 

앞에서는 에브라임 지파가 등장했지만, 본 18장은 단 지파가 등장합니다. 그때까지 단 지파는 기업을 분배받지 못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에게 기업이 없다’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여호수아가 단 지파에 기업을 주었지만, 그 땅을 아모리 사람들 때문에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본문은 “그 때 이스라엘의 왕이 없었다”라는 구조로 시작합니다(1). 이 구절은 새로운 상황의 시작을 달리는 일종의 표시입니다. 단 지파의 이야기도 부정적일 수밖에 없음을 암시합니다.

 

1절 하반 절에서 단 지파는 거주를 얻지 못하여 거주할 지역을 찾고 있는 집단으로 소개됩니다. 이들은 기업으로 분배 받은 땅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은 아모리 사람들이 점령하고있었습니다. 그래서 소라와 에스다올로 도망쳐 와서 살면서 새 정착지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2). 이들은 갈렙처럼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라고, 말하는 여호수아 14장 12절에 나오는 그러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길을 떠난 단 지파가 도착한 곳이 에브라임 산지 미가의 집이었고 그들은 그곳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두 개의 이야기가 한 장소에서 만납니다. 단 지파 사람들이 미가의 집을 떠날 때, 이들은 레위인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가던 길에서 돌아와 레위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레위인의 목소리를 구별한 것에 대해 여러 견해가 있지만, 레위인의 특유의 어투로 토라를 외우고 있는 소리를 들었을 것으로 유출됩니다. 레위인과 단 지파 사람의 만남은 사건의 절정으로 치닫는 도화선이 됩니다.

뜻밖의 장소에서 레위인을 만나자, 단 지파 사람들은 의아해서 “누가 너를 이리로 인도하였으며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며 여기서 무엇을 얻었느냐?”라고 많은 질문을 쏟아놓았습니다(3). 레위인은 이 질문에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을 말하면서, 모든 일은 미가가 한 일이고, 미가가 자신을 고용하였고 자신은 그의 제사장이 되었다라고 대답합니다(4). 레위인은 당당하게 자신이 미가에게 고용된 개인 제사장이라고 밝히는데, 이는 자신의 불법에 전혀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는 뻔뻔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단 지파 사람들은 이런 레위인의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제자장이라는 직분을 가진 그에게 하나님께 “청하건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 보아서 우리가 가는 길이 형통할는지 우리에게 알게 하라”라고 알아봐달라고 부탁합니다(5). 이 질문은 단 지파 사람들의 영적인 수준을 짐작하게 하는 말입니다. 그들에게 이 신상(神像)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레위인이 합법적인 제사장인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단이 있고 신상이 있고 제사장이 있으니, 하나님의 뜻을 물어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미 정해 졌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번복하려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면, 그 뜻을 순종할만한 마음의 준비가 된 것입니까! 자신들을 살피지 않고 자기 뜻대로만 맞추려고 한 것입니다. 자기 뜻과 반대되는 말을 하면, 그렇게 말한 사람들을 자격없다고 말하며 거절할 것입니다.

 

이에 레위인의 수준도 그만그만합니다. 그 역시 제사장으로서 바른 여호와의 뜻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듣고 싶은 말만 골라서 해줍니다. 하나님께 관심도 없는 이 레위인이 신탁을 내립니다. “평안히 가라! 너희가 가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라는 말을 해줍니다(6). 본문 레인이 여호와께 기도했다든지 물어봤다든지 하는 말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레위인은 하나님께 물어보고 답을 얻은 것이 아니라, 단지 단 지파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축복한 것입니다. 레위인 자체가 믿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일단, 그는 하나님 말씀을 어기고 고향을 떠난 인물입니다. 그런 사람이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다른 곳을 떠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가는 길은 여호와의 뜻이라고 말하며 축복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 뜻을 묻고 여호와의 이름을 말하고 여호와께 제를 드리고 있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여호와의 올바른 뜻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었고, 전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만 행하고 있습니다.

 

라이스 정탐 빛 침략 준비(7-13)

많은 사람이 방황합니다. 그러한 방황의 종식할 방법은 참된 왕이신 하나님을 아는 데서 시작됩니다. 실수한 사람들은 하나님 외에 다른 곳에서 찾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방황의 종식은 안전한 땅을 찾는 데서 끝나지 않고, 참되신 왕이신 하나님을 아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7이에 다섯 사람이 떠나 라이스에 이르러 거기 있는 백성을 본즉 염려 없이 거주하며 시돈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평온하며 안전하니 그 땅에는 부족한 것이 없으며 부를 누리며 시돈 사람들과 거리가 멀고 어떤 사람과도 상종하지 아니함이라 8그들이 소라와 에스다올에 돌아가서 그들의 형제들에게 이르매 형제들이 그들에게 묻되 너희가 보기에 어떠하더냐 하니 9이르되 일어나 그들을 치러 올라가자 우리가 그 땅을 본즉 매우 좋더라 너희는 가만히 있느냐 나아가서 그 땅 얻기를 게을리 하지 말라 10너희가 가면 평화로운 백성을 만날 것이요 그 땅은 넓고 그 곳에는 세상에 있는 것이 하나도 부족함이 없느니라 하나님이 그 땅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는지라 11단 지파의 가족 중 육백 명이 무기를 지니고 소라와 에스다올에서 출발하여 12올라가서 유다에 있는 기럇여아림에 진 치니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이 오늘까지 마하네 단이며 그 곳은 기럇여아림 뒤에 있더라 13무리가 거기서 떠나 에브라임 산지 미가의 집에 이르니라(7-13)

 

제사장의 신탁을 들은 단 지파 정탐꾼들은 그곳을 떠나 라이스에 이릅니다. 본문은 라이스를 염려 없이 거주하며 시돈 사람이 사는 것처럼 평온하며 안정하니 그 땅에는 부족한 것이 없으며 부를 누리며 시돈 사람들과도 상종하지 않는다라고 표현합니다(7).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평화로운 곳’이라는 것입니다. 이곳은 시돈 사람들의 영향력 아래 있지만, 그들의 간섭을 받지 않고 평화롭게 사는 곳입니다. 이 라이스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정복하라고 주신 땅의 명단에 들어있지 않는 곳입니다. 하지만, 이곳을 정탐하고 소라와 에스다올로 돌아간 정탐꾼들은 그들의 눈에 보기 좋으니 그들을 치러 올라가자라고 합니다. 그것도 게으르게 말고 빨리 올라가자라고 선동합니다(9).

 

10절에서 정탐꾼들이 라이스로 전쟁을 하러 가야 하는 이유를 말하는데, 첫째는, 그들이 평화로운 백성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전쟁에 능하지 않는 민족이고 자신들이 쫓아내지 못한 아모리 족속처럼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민족이란 뜻입니다. 둘째, 그곳은 부족함이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정복 전쟁의 핵심적인 이유입니다. 지금 사는 곳은 한 지파가 살기에 매우 모자랐기 때문입니다. 셋째, 전쟁의 승리를 여호와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땅을 너희 손에 넘겨주셨느니라”라는 표현은 여호와께서 승리를 약속하실 때 사용되는 구문으로 일반적으로 여호와의 전쟁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정탐꾼들은 미가 집에 있던 레위인에게서 받은 엉터리 신탁을 정말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탐꾼들의 선동을 받은 단 사람들은 당장 군사 600명을 모집하여 라이스를 정복하기 위해 출발합니다. 이들은 유다 지역 기럇여아림을 지나서 에브라함 산지 미가의 집까지 오게 됩니다.

 

미가의 신상과 제사장을 탈취함(14-20)

오늘날에도 일어나는 성직자가 돈과 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있는 암울하고 절망적인 모습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은 절대 돈과 권력의 하수인이 되어선 안 됩니다. 우리는 돈과 권력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이 땅이 아닌 저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14전에 라이스 땅을 정탐하러 갔던 다섯 사람이 그 형제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집에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신상과 부어 만든 신상이 있는 줄을 너희가 아느냐 그런즉 이제 너희는 마땅히 행할 것을 생각하라 하고 15다섯 사람이 그 쪽으로 향하여 그 청년 레위 사람의 집 곧 미가의 집에 이르러 그에게 문안하고 16단 자손 육백 명은 무기를 지니고 문 입구에 서니라 17그 땅을 정탐하러 갔던 다섯 사람이 그리로 들어가서 새긴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과 부어 만든 신상을 가져갈 때에 그 제사장은 무기를 지닌 육백 명과 함께 문 입구에 섰더니 18그 다섯 사람이 미가의 집에 들어가서 그 새긴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과 부어 만든 신상을 가지고 나오매 그 제사장이 그들에게 묻되 너희가 무엇을 하느냐 하니 19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잠잠하라 네 손을 입에 대라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의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네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의 한 지파 한 족속의 제사장이 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낫겠느냐 하는지라 20그 제사장이 마음에 기뻐하여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우상을 받아 가지고 그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니라(14-20)

 

단 지파의 다섯 정탐꾼은 이전에 라이스뿐 아니라 미가의 집도 정탐하였고, 미가의 집에는 에복과 드라빔 신상들이 있음을 수사학적 질문을 통해 은근히 형제들에게 알립니다. 그러면서 “이제 너희는 마땅히 행할 것을 생각하라”라는 간접적인 표현으로 그것을 빼앗아 갈 것을 선동합니다(14). 이렇게 600명의 군인들을 선동한 다섯 정탐꾼들은 미가의 집으로 향합니다. 그들은 600명의 무장한 군사들로 레위 청년을 곱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샬롬’이라고 인사한 뒤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을 훔쳤습니다.

 

16절에서 18절에 미가의 집에서 신상들과 에봇과 드라빔을 취하는 것이 세 번 반복됩니다. 17장 2절에서 4절에 미가가 어머니의 돈을 훔친 것과 같은 동사가 동일하게 세 번 사용됩니다. 어머니에게 훔친 은으로 만든 신상을, 이제 단 지파 사람들이 훔쳐가고 있음을 같은 동사를 반복하여 사용함으로 나타내고 이를 통하여 인과응보를 강하게 부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이 도둑질 당하는 사이에, 레위인은 문 앞에 서 있다가 “너희가 무엇을 하느냐?”라며 미약한 반항을 했지만, 그들이 “잠잠하라 네 손을 입에 대라”라고 하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저항을 포기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단 지파의 아버지와 제사상이 되라는 제안을 하자, 기쁨의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미가의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을 들고 단지파 사람들과 합류하였습니다. 한 사람의 집에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에 의한 한 지파의 족속의 제사상이 되는 것 중 어느 것이 낫겠느냐는 정탐꾼의 말이 레위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20절에서 “그 제사장이 마음에 기뻐하여”라는 표현은 그가 자발적으로 단 지파에 합류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뿐 아니라 그가 직접 에봇과 드라빔과 신상을 들고 갑니다. 더 이상 미가의 물건을 훔친다라는 죄책감이 없이 단 지파의 도둑질에 동참한 것입니다.

 

레위인이 자기 고향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으로 미가 집을 떠던 곳도 좀 더 살기 좋은 곳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한 지파의 제사장이 되는 길이 열렸으니, 이를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미가 집 제사장이 된 것도 미가 준 돈 때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레위인이었지만 여호와의 종이 아니며 돈만 주면 어디든지 가서 무엇인지 할 수 있는 삯꾼이며 종교 행위자였던 것입니다.


라이스로 향하는 단 지파의 모습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가나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는 모습이 아니라 욕심에 휩싸여 자신들의 눈에 좋은 것을 차지하려고 혈안된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복된 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자신의 욕심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 앞에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고 순종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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