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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19-03)

 


기브아 불량배들과 레위인의 악행

사사기 19장 22-30절


세상이 점점 걷잡을 수 없게 타락해 가면서, 마지막 희망을 기독교에게 갔습니다. 그들은 ‘우리는 타락해도 성도만이라도 거룩해야 한다.’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성도마저 타락하면,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점점 시대가 영적으로 어두워지면, 많은 징조를 보여 주십니다. 그 증거 중에는, 성도들에게 거룩성이 상실되어 갑니다. 거룩해야 할 사람들이 거룩성을 잃어버리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악랄할 수 있습니다.

 

  • 본문에서 레위인은 자기 대신 자신의 첩을 끌어내서 기부 사람들에게 내놓습니다. 그녀는 밤새도록 기부한 사람들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새벽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무도 돌봐주지 않았기에 결국 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레위인은 죽은 첩의 시신을 12개의 토막으로 나누어 이스라엘 온 지파를 보내어 전쟁하기 위해 이스라엘 자손들을 소집합니다.

 

불량배들의 악행과 첩의 죽음(22-25)

말씀의 부재가 가치의 혼동과 인류의 실종을 낳습니다. 영적인 기준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법을 집행할 지체가 무너지면 저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게 됩니다. 결국, 왕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의 부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의 가치에 물들어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삶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줍니다.

 

22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집 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 하니 23집 주인 그 사람이 그들에게로 나와서 이르되 아니라 내 형제들아 청하노니 이같은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 이 사람이 내 집에 들어왔으니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 24보라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 있은즉 내가 그들을 끌어내리니 너희가 그들을 욕보이든지 너희 눈에 좋은 대로 행하되 오직 이 사람에게는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 하나 25무리가 듣지 아니하므로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붙잡아 그들에게 밖으로 끌어내매 그들이 그 여자와 관계하였고 밤새도록 그 여자를 능욕하다가 새벽 미명에 놓은지라(22-25)

 

본문의 사건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에서 이어났다고 해도 끔찍할 것인데, 하나님의 백성들인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일입니다. 참 경악스러운 일입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를 수 없고,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는지를 잘 표현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을 습관적으로 입에 올릴 수 있다는 사실이 이런 무서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1) 불량배들의 악한 요구(22)

 

기브아에 도착한 레위인 일행은 한 노인의 환대로 집에서 편안히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은 무사하게 지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작은 연회를 즐기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기브아 성읍의 불량배들이 등장합니다. 이 불량배는 사회적 질서를 파괴한 자들로 표현합니다.

“집을 에워쌌다”(22)라는 표현을 통해서, 한두 명이 아니라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폭력 사건에 관여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의 등장으로 갈등은 최고조에 이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집을 에워싼 채 문을 두드리며 사람을 내놓으라고 소리 지르는 모습은 매우 위협적이고 기브아 사람들의 폭력성을 잘 보여줍니다. 이들은 레위인을 내놓으라고 하면서 “그와 관계하겠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성관계를 의미합니다. 나그네를 환대하기는커녕 냉대하고 박대했던 그들이 이제는 학대 하겠다고 덤빈 것입니다. 이런 성폭행은 상대방에게 가장 치욕을 줄 수 있는 굴복의 방식으로 폭력입니다. 이런 모습은 그들이 얼마나 깊숙이 가나안의 악한 풍습에 빠져 있고, 또 그것을 즐기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합니다.

이 짓을 하는 자들은 소위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이란 자들입니다. 같은 유대인을 향해서 이런 악행을 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땅이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정복했으니, 항상 나그네라는 생각으로 다른 나그네를 환대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동족을 폭행하려고 합니다.

이런 행동의 패턴 반복은 기브아가 하나님께 멸망 당한 소돔과 고모라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성읍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 백성이 아니었지만, 기브아는 하나님 백성이었기에 더욱 참담하고 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불량배들의 악행을 말리는 노인(23-24)

 

이런 불량배들의 요구에 집주인 노인은 그들을 “내 형제들아 청하노니 이같은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23)라고 간곡히 부탁합니다. 이러한 일은 망령된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망령된 일’이란 지혜롭지 못한 어리석은 일이며 하나님 앞에 제가 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기브아 사람들에게 잘못된 일을 하지 말라라고 타이르던 노인은 사태를 진정시킬 수 없다라는 판단했는지, 대안으로 “보라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 있은즉 내가 그들을 끌어내리니 너희가 그들을 욕보이든지 너희 눈에 좋은 대로 행하되 오직 이 사람에게는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라고 말합니다(24). 자기 역시 악행이라고 생각할만한 행동을 제안합니다. 그는 레위인에게만 어리석은 일을 하지 말라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여기서 노인의 가부장적이고 차별적인 관점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남자인 레위인만 보호의 대상으로 생각하였고, 망령된 일을 행해서는 안 되는 대상으로 여긴 것입니다. 자신의 딸들과 레인의 첩인 여성들은 사정에 따라 얼마든지 남성들의 안전을 위해 버려지고 희생당해도 좋은 존재로 생각한 것입니다. 원래 정상적인 사회에서는 아버지와 남편은 딸을 지키고, 아내를 지켜야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이 보호해야될 대상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희생양으로 내놓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롯이 이러한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창 19:1-11). 소돔 문화에 젖은 롯처럼, 이 노인 역시, 다른 사람보다 나아 보였지만, 사실은 비교할 것이 못 됩니다. 이렇게 사회가 하나님 말씀에 멀어질수록 차별과 강자의 횡포는 심해지고 약자는 희생당하게 됩니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분별할 수 없는 시대이며, 자기 눈에 옳은 데로 결정하다 보니 이러한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3) 노인의 제안을 거절하는 불량배(25)

 

자신들의 딸들과 레인의 첩을 내놓겠다는 노인의 제안을 기브아 불량배들은 거절합니다. 원하는 것은 기어이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욕망의 노예를 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인간은 포기하고 실망하고 기다리고 체념하는 존재입니다. 성취욕에 불타서 도전만 하는 존재는 인간답지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도전만 하고 산다면, 모두 미치광이가 될 것입니다. 그들은 옳은 말도 어리석은 말도 모두 듣지 않고 오직 자기주장만을 되풀이하였습니다. 이미 죄가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말도 들리지 않은 것입니다.

기브아 사람들의 위협이 계속되자 레위인은 자신의 첩을 직접 잡아서 밖으로 끌어내 기브아 사람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아마도 그의 첩은 끌려나가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며 저항하였을 것입니다. 레위인은 이런 첩을 강제로 끌어내어 밖으로 내보낸 것입니다. 친정으로 간 첩을 데리고 오기 위해 나귀까지 챙기면서 첩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던 레위인은 자신이 위험에 처하자 첩을 헌신짝 버리듯 버리고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결국, 남편의 손에 붙들려 밖으로 쫓긴 첩은 기브아 불량배들에게 어떤 수모를 당했을지 상상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첩이 얼마나 오랫동안 끔찍한 성폭행을 당하며 시간을 보냈겠습니까! 사사기 저자는 그 고통스러운 시간을 시간의 흐름을 표시함으로써 보여 주며, 불량배들의 잔악무도함을 알 수 있습니다.

 

잔혹한 사건을 잔혹한 방법으로 알림(26-30)

교회는 거룩한 울타리가 되어 악을 바로잡고 약한 자들의 삶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사회 전반에서 일어나는 추악한 일들 무자비한 폭행,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러한 일들이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악한 세상에 거룩한 울타리가 되어줘야 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놀랄 만한 더 큰 스캔들과 더 큰 사건이 있어야지만, 정신을 차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교회가 깰 때입니다.

 

26동틀 때에 여인이 자기의 주인이 있는 그 사람의 집 문에 이르러 엎드러져 밝기까지 거기 엎드러져 있더라 27그의 주인이 일찍이 일어나 집 문을 열고 떠나고자 하더니 그 여인이 집 문에 엎드러져 있고 그의 두 손이 문지방에 있는 것을 보고 28그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우리가 떠나가자 하나 아무 대답이 없는지라 이에 그의 시체를 나귀에 싣고 행하여 자기 곳에 돌아가서 29그 집에 이르러서는 칼을 가지고 자기 첩의 시체를 거두어 그 마디를 찍어 열두 덩이에 나누고 그것을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내매 30그것을 보는 자가 다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도다 이 일을 생각하고 상의한 후에 말하자 하니라(26-30)

 

레위인의 첩은 밤새도록 남자들에게 범하여지고 새벽에 풀려나 동 뜰 때 자신의 남편이 있는 집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날이 밝을 때까지 문 앞에 엎드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풀려나 집에 왔을 때도 그녀를 맞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서 문 앞에서 날이 다 밟도록 엎드려져 있습니다(26). 이것이 더 큰 비극입니다. 그녀의 남편조차 집 밖으로 끌려간 그녀의 안부에 관심이 없기에, 그녀가 새벽녘에 집 앞에 왔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 날이 완전히 밝았고 첩의 남편은 길을 떠나기 위해 문을 열었습니다. 그의 머리에는 첩의 안부나 그녀에 관한 생각은 전혀 없고 오직 기브아를 일찍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본문은 “그가 일찍 일어나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27).

 

문을 열었을 때, 문 앞에 엎드려져 있던 자신의 첩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엎드려져 있던 첩의 모습을 자세히 보면, 그녀는 문 집 앞에 쓰러져 있고 그녀의 손은 문지방 위에 올려져 있습니다. 이 장면은 사사기에서, 혹은 구약 천지에서 가장 가슴 아픈 장면 중 하나입니다. 손이 문지방에 놓여 있다는 것은 그녀가 안전한 집으로 들어가기를 얼마나 바랐는지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간신히 살아서 집 앞에 왔지만, 문을 두드릴 힘도 없어 문도 들리지 못한 채 문 앞에 쓰러져서 문을 향해 손을 뻗은 채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도 그녀의 안부를 걱정하며 돌아오기를 기다린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정한 남편은 문 앞에 쓰러져 있는 첩을 보자 안부를 묻거나 그녀의 상태를 살펴보지도 않고 ‘일어나라’라고 명령합니다(28). 그는 한시바삐 이 기브아를 떠나기 원했기에, 첩의 상태나 안보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레위인의 말에 첩은 아무런 대답이 없습니다. 레위인의 이중적인 행동을 보면서, 우리 자신에게는 그런 모습이 없는지 살펴야 합니다. 남의 폭력성에 대해 거품을 물고 비난하면서, 정작 우리 일상에 스며든 우리의 비정함과 냉정함에 대해서 관대한 존재들이 아닙니까!

 

본문에서 ‘레위인이 그의 시체를 나귀에 싣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번역하고 있지만, 원문에서는 ‘시체’라는 말이 없습니다. 여기서 대답이 없는 것을 죽은 것으로 간주하고 ‘시체’라고 해석하고 번역했지만, 실제 원문에서는 죽은 것인지 아니면 의식이 없는 상태인지 알 수 없습니다. 본문은 그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지 않은데, 이런 모호한 표현이 레위인이 자신의 첩의 상태를 살피거나 치료할 생각보다는 짐짝처럼 나귀에 실어 그 성을 빠져나오기에 급급했다는 사실을 부각시킴으로써 이 레위인의 무정하고 이기적인 행동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레위인은 첩을 12토막 내어서, 이스라엘 전 지역에 보내는 매우 엽기적인 일을 벌입니다. 전체적으로 레위인이 첩을 토막 내는 것은 마치 제사에 쓸 짐승을 잡는 것과 같습니다. 레위인은 첩의 시체를 토막 냄으로써, 그녀를 다시 한번 모욕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첩을 죽음으로 몰았을 뿐 아니라, 그 죽음마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시신을 모욕하며 철저히 이용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당한 것을 보복하기 위해 이스라엘 자손들이 토막 난 시체를 보고 분노와 경악하여 전쟁을 일으키도록 선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레위인을 결코 긍정적으로 보지 않고 무정할 뿐 아니라 분노하면 잔인한 짓을 서슴지 않는 인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레위인이 이런 분노를 표하고, 온 이스라엘을 모을 만큼 정의로운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레위인의 첫 이야기는 폭력으로 인해 비극으로 끝나게 되지만 이 비극이 더 큰 비극을 일으키는 원인이 됩니다. 사사기 19장에서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데, 이것은 등장 인물 중,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없는 것처럼 자신의 생각대로만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의 결과가 얼마나 끔찍한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레위인은 명분만 쫓은 사람이었지만, 사실은 그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정직한 사람이 되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고 옳은 것을 주장하는 것은 누구든지 해야 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이런 주장에 알맞은지에 대한 문제는 다른 문제입니다. 다른 문제점을 지적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은 생각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만 올바른 요구한다면, 다른 사람도 변화되지 않고, 자신은 더욱 왜곡된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자신의 기준에 요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어서, 자신의 기준을 재정립하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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