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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20-01)

 


경악으로 미스바에 모인 모든 이스라엘

사사기 20장 1-11절


하나님을 떠난 세상은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합니다. 마음이 항상 불안합니다. 자기를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시킬 마음이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자기 만족의 수단으로만 사용하려 희생의 대상으로 만듭니다. 그 속에는 사랑도 없습니다. 철저하게 이기주의적으로 행동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중심성은 결국 자기 파멸로 이끌 것입니다.

 

  • 본문에는 레위인의 첩의 조각난 시체를 본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이 미스바에 모였습니다. 레위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사건을 설명하라고 말합니다. 이에 레위인은 기브아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였고, 자신의 첩은 간강하여 죽게 만들었으며, 이 기브아 사람들의 악행을 처벌하기 위해 자신이 이런 일을 하였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로 인해 이제 기브아 사람들은 한 개인의 원수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모두의 원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미스바에 모인 이스라엘 사람들(1-2)

‘군중심리(群衆心理)’란 ‘많은 사람이 모였을 때에, 자제력을 잃고 쉽사리 흥분하거나 다른 사람의 언동에 따라 움직이는 일시적이고 특수한 심리 상태’입니다. 쉽게 흥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 같은 다혈질 기질에게는 군중심리는 잘 먹힙니다. 이 군중심리를 이용해서 통치했던 사람이 독일의 히틀러입니다. 첩을 잃었던 레위인도 첩의 시신을 토막 내어 이스라엘 전체에 보낸 엄청난 파급효과로 대단한 군중심리를 얻습니다.

 

1이에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와 길르앗 땅에서 나왔는데 그 회중이 일제히 미스바에서 여호와 앞에 모였으니 2온 백성의 어른 곧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어른들은 하나님 백성의 총회에 섰고 칼을 빼는 보병은 사십만이었으며(1-2)

 

본문에 나온 레위인에게 첩을 자기만족의 수단이었습니다. 첩을 위해 자신을 내어줄 마음이 없었습니다.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위해 희생시킬 대상에 불과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도 이용에 대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알고 경배해야 할 레위인에게 남은 것은 경건에 껍질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원했겠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영광을 원하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자기 복수를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고 종교적인 명분을 만들어갔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공동체를 파멸시키는 결과는 가져 왔습니다.

 

레위인은 자신의 첩이 강간을 당하고 죽음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첩의 죽음에 대해 슬퍼했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첩의 죽음은 다만 기브아 사람들을 보복할 명분을 얻는 사건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첩의 시신을 12도막 내서 각 지파에 보냈습니다. 그는 죽은 첩을 향해 일말의 예의나 존중도 없습니다. 이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 레위인의 행동을 칭송할 것이고,

 

레위인이 보낸 시체 도막을 보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깜짝 놀라서 ‘미스바’에 여호와 앞에 모였습니다. ‘여호와 앞’이란 ‘여호와의 성막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스바에 모여서 국가를 위해 회의하고 결정하는 장소였습니다. 본문은 온 이스라엘이 모인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와 길르앗 땅에서”(1)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한국에 ‘백두에서 한라 그리고 독도까지’라는 의미와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경악스러운 일이 무슨 일인가 하는 알아보기 위해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백성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무장한 병사들이 무려 40만 명이나 모였습니다(2). 흥미로운 것은 지금까지 사사 시대에 그 어떤 전쟁에도 이처럼 하나되어 많은 병력이 모인 적이 없습니다. 또 한 가지는, 무장한 40만 명입니다. 아직 어떤 판결도 없는데 전투의 태세로 모인 것입니다.

 

이전 사사들의 이야기에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적에 대항하여 지파별로 싸우거나 전체 이스라엘을 소집하며 도움을 요청해도 이렇게 모이지는 않았습니다. 드브라 이야기의 경우 소집에 응하지 않는 지파 명단이 언급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드온이나 입다 이야기에서는 참여하지 않는 에브라임이 시비를 걸었으며, 삼손의 경우, 삼손을 잡기 위해 유다 지파가 모인 적이 있을 뿐 한 번도 제대로 모든 이스라엘이 직결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레위인이 보낸 참혹한 시체를 본 후에 모든 이스라엘이 한 마음으로 모입니다. 이들은 그 땅에서 끔찍하고 황당한 일을 겪고서야 여호와 앞에 모여 엎드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한 것입니다.

 

사건의 전말을 설명함(3-7)

어떤 문제가 일어나면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입장에서 말합니다. 지도자들은 문제에 바른 판단을 요구할 때는 사리가 분명해야 합니다. 자기 변론적인 주장만 듣고 판단하고 결정하면 큰 실수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레위인에게 일에 대한 자초지정을 듣습니다.

 

3이스라엘 자손의 미스바에 올라간 것을 베냐민 자손이 들었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가로되 이 악한 일의 정형을 우리에게 고하라 4레위 사람 곧 죽임을 당한 여인의 남편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내 첩으로 더불어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유숙하러 갔더니 5기브아 사람들이 나를 치러 일어나서 밤에 나의 우거한 집을 에워싸고 나를 죽이려 하고 내 첩을 욕보여서 그로 죽게 한지라 6내가 내 첩의 시체를 취하여 쪼개어 이스라엘 기업의 온 땅에 보내었노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음행과 망령된 일을 행하였음을 인함이로라 7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가 다 여기 있은즉 너희의 의견과 방책을 낼찌니라(3-7)

 

미스바에 도착한 모든 이스라엘이 모였을 때, 베냐민 사람들은 이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들은 단순히 이 모임에 대해 들었다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누군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는 소식을 베냐민에게 전해주었지만, 베냐민은 의도적으로 그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것입니다(3a).

 

미스바에 모인 이스라엘 자손들은 제일 먼저 상황 파악을 나섭니다. 구약에서 시체 토막을 전 이스라엘에 보낸 일은 사무엘상 11장에서 암몬과 전쟁하기 위해 사울이 소 두 마리를 잡아 각을 떠서 이스라엘 전 진역에 보낸 사건에서도 등장합니다. 이 행동이 의미하는 것은 만일 자신을 따라 전쟁에 참여하지 않으면, 그들의 소들도 이 모양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일종의 위협입니다(삼상 11:6-11).

하지만, 이 경우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레위인에게 위협을 느껴서라기보다는 레위인의 행동에 경악하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기 위해 모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모여서 이런 악한 일, 즉 사람의 시체를 토막내어 보내는 끔찍하고 악한 일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되었는지 사건 당사자인 레위인에게 묻습니다(3).

 

본문은 레위인을 ‘죽음을 당한 여인의 남편’이라고 호칭으로 부릅니다(4). 이것은 레위인이 그 여자의 남편 자격, 즉 피해자의 자격으로 이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레위 인이 말할 때, 계속해서 “내 첩”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전국에서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 40만 명 앞에서 자랑스럽게 ‘내 첩’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인가 잘못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지켜야할 사람이, 도덕불감증에 걸려서, 첩(倿)을 얻어 사는 것을 아무런 자책감도 없이 당당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5-6절에 레위인의 진술은 자신에게 불리한 말은 모두 빠져 있고 또 과장되어 있습니다. 미스바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가 일을 저질렀느냐?’라는 질문합니다. 그는 “내가 내 첩의 시체를 취하여 쪼개어 이스라엘 기업의 온 땅에 보내었노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음행과 망령된 일을 행하였음을 인함이로라”(6)고 말합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 아무런 언급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음행과 망령된 일을 인함이라고 합니다.

19장에서는 본문은 ‘기브아의 불량배들’이라고 하였는데, 레위인은 오히려 기브아 사람이라고 말하여 기브아 주민 전체가 이런 일을 벌인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또한, 무엇의 문제에서 19장에서 보면, 기브아 사람들은 레위인을 강간하려 하였는데, 그들이 자신마저 살해할 것처럼 생각되었다고 말함으로써, 그들의 죄가 강간죄가 아니라 살인죄에 해당 되는 것처럼 고발합니다. 첩을 욕보였고 그 결과 그녀가 죽은 것은 사실이지만, 비겁하게 자신이 첩을 집 밖으로 끌어내어 그들의 손에 넘겨준 일이나 그가 돌아온 자신의 첩의 상태를 전혀 돌보지 않아 첩이 죽게 된 사실에 대해서는 조금도 거론하지 않습니다.

그는 기브아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였고 첩을 욕보이고 죽인 것으로 말하여 자신의 잘못은 모두 숨기고, 첩의 죽음이 전부 기브아 사람들의 잘못 때문인 것처럼 고발한 것입니다. 첩을 12조각으로 나누어 각 지파에 보낸 자신의 끔찍한 행동은 기브아 사람들의 죄악상과 강간 범죄를 폭로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한 일로 포장하고 있습니다. 레위인은 첩의 시체 조각을 통해 기브아 사람들의 제약성을 드러내고 정의를 짓기 위한 행동이라고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런 행동 자체가 그의 무자비함과 잔인성을 보여줍니다. 그는 억울하게 희생당한 첩의 죽음을 위로하고 장례를 잘 치러줄 의무가 있는데도, 그녀의 죽음을 복수의 구실로 삼는 반인륜적인 행동을 하고 있던 것입니다.

 

이런 레위인의 극단적 행동은 당시 이스라엘 상황이 영적 도덕적으로 매우 탈락한 상태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죄에 대해 무감각하고 웬만한 자극적인 사건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 풍토가 만연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만일 레위인이 이렇게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조치 없이 다만 편지를 써서 자신의 첩이 강간당하여 죽은 사실을 알렸다면, 한두 지파 정도나 참여하고 나머지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사기를 전체적으로 보면, 적들이 쳐들어와 적을 물리치기 위해 전쟁을 해야 되는 상황에서 이웃 지파들에게 도움을 청해도 서너 지파 정도가 참여하면 많이 모였다라고 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한 개인의 원한을 갚아주기 위해 지파들이 모였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은 평범한 상식과 하나님 말씀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 무정한 사였던 것입니다. 증언을 마친 레위인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명령하여 지금 당장 여기서 어떻게 할지 계획을 만들어 내라고 합니다. 겉으로 보면 방책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가만히 있으면 안 되니 전쟁하자 라고 다그치는 말입니다.

‘여기서’라는 말을 함으로써, 그는 당장 이런 일을 심판해야 된다라고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좀 더 시간적 여유를 갖고 이성적으로 생각하거나 다른 증인들을 불러 자신의 진상을 조사할 필요가 없이 무조건 자신의 말을 믿고 자신의 말대로 따라야 한다라고 몰아붙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격앙된 상태를 충분히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한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서 감정이 가라앉고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사건을 조사하다 보면, 자신의 허물도 드러나게 되고 그러면 자신에게 불리한 사항으로 변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레위인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정의를 이루기 위해 행동하는 것처럼 포장하고 사람들을 선동하였던 것입니다.

영적으로 어둡고 혼란스러울 때, 이런 선동가들이 일어나 교회와 사회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심각한 문제가 생겼을 때 흥분한 감정으로 선동에 휘둘러 행동하기보다는 감정을 가라앉히고 사건을 차근차근 조사한 후에 행동으로 옮겨도 늦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는 일은 시간에 쫓겨 급하게 행해야 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과도 중요하게 여기시지만, 과정을 더 중요하게 보시는 분이며 자신의 계획과 이를 인간의 약함이나 더딤 때문에 포기하는 분이 결코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억울함을 해결하기 위해 끔찍한 짓을 자행할 뿐 아니라 자기중심적으로 사건을 왜곡하고 말하는 이러한 태도가 우리 속에도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길 원합니다. 분명한 원칙이 무너지면 권위는 무너집니다. 진리의 원칙이 분명할 때, 하나님께서는 권위를 바르게 세워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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