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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후서(03-02)


복음을 따라 사는 삶

데살로니가후서 3장 1-16절


종종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기도를 부탁할 때 형식적으로 부탁하고, 다른 사람이 기도를 부탁해올 때 기도해주겠다고 말도 형식적으로 말하고는 합니다. 그러나 기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인에 대한 믿음이고 기대감의 표현인데, 기도 부탁이라는 핑계로 하나님께서 아니라 사람의 도움을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바울은 질서 있게 행하고 성도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주야로 일했습니다. 성도들은 이를 본받고, 게으른 자는 조용히 일하며 자기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선을 행하다 낙심치 말고, 불순종한 자를 형제같이 권면해야 합니다. 바울은 평강의 주님이 그들과 함께하시길 원하며 편지를 맺습니다.

 

기도(1-5)

기도는 믿음의 사람에 대한 정체성을 지키게 하는 척도입니다. 기도는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개입을 촉구하는 행위이며, 우리 자신의 한계를 긍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안전은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미쁘신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굳건하게 하사 악한 자들로부터 지키실 것입니다.

 

1끝으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고 2또한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3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4너희에 대하여는 우리가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고 또 행할 줄을 우리가 주 안에서 확신하노니 5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5)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도 자신과 일행을 위한 기도를 요청한바 있습니다(살전 5:25). 그때는 간략하게 언급했지만, 이제는 구체적인 두 가지 기도제목을 서술합니다. 먼저 사역과 관련해 자신과 일행이 전하는 “주의 말”이 달음질하듯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도록 기도를 부탁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사역을 자주 달음질에 비유하곤 했습니다(고전 9:24: 갈 2:2; 빌 2:16). 사실 그들의 달음질의 결과가 지금 데살로니가 성도들입니다.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같은 또 다른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여전히 말씀을 들고 달리고 있습니다. 바울은 기도를 통해 성도들이 그 일에 등장하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이 부당하고 악한 자들에게서 건져주시도록 기도를 부탁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자신들이 위탁받은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 늘 치열한 전투를 겪었던 사실을 언급했습니다(살전 2:24). 두 번째 편지를 쓰는 지금도 그런 위협 가운데 있습니다(살전 2:18: 3:7). 복음을 전할 때 모두가 환영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거절과 물리적 저항은 다반사였습니다. 따라서 복음의 최전선을 달리는 사역자들을 위해 공동체의 기도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힘이 됩니다. 바울은 나중에 다른 공동체에 똑같은 기도를 부탁하기도 합니다(롬 15:31; 고후 1:8-11).

그런데 복음을 방해하는 악한 자들은 최전선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데살로니가에도 존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늘 전투 가운데 서 있습니다.

 

기도를 부탁했던 바울은 동일한 내용으로 성도들에게 복을 빕니다. 그는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악한 자”로부터 그들을 건져주실 것을 강하게 확신합니다. 더불어 그들이 앞서 부탁한 전통을 잘 따라 행할 것도 확신합니다. 교회가 비록 치열한 영적 전투 속에 있지만,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그들과 동행하시기 때문에 두렵지 않습니다. 바울은 주께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로 그들을 이끄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기원합니다. 비록 현실은 녹록치 않지만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히 경험하고 그리스도의 인내를 온전히 배우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복음에 따라 사는 삶(6-15)

선한 사업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선한 사업 자체를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상대방의 수준을 고려하지 않고 너무 자기 생각대로 완고한 윤리적 요구는 사랑이 아닙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무위도식하는 형제들을 떠날 뿐 아니라 사귐을 중단하여 부끄럼을 느끼게 하라고 합니다.

 

6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7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지를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8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9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10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11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12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13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14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15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6-15)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형제 사랑과 관련해 ‘조용히 자기 일을 할 것’과 ‘자기 손으로 일하기를 힘쓸 것’을 명령했습니다(살전4:9-12).

공동체 내에 무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그의 명령이 기대만큼 충분히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까? 그때보다 문제가 더 심각해진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바울은 이 문제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따라야 할 삶의 규범에서 이탈한 사람들이 공동체에 있었습니다.

이들의 문제는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먼저 삶 자체가 무질서했습니다. 무질서는 앞서 언급된 주님의 미쁘심과 반대되는 성품입니다. 더욱이 과거 바울 일행이 보여주었던 질서 있는 삶(7)과도 반대됩니다.

두 번째 특징은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앞서 바울은 자신과 일행이 성도들에게 가르쳐준 전통(2:15)과 명령들(3:4)을 잘 지킬 것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공동체 내 일부 성도들이 그 전통 따르기를 거부했습니다. 왜 그들이 신앙 윤리에 반하는 태도를 취했는지 구체적 이유를 단정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앞선 주제와 직접적으로 연결해 그들이 주의 날이 이미 왔다는 생각에 더 이상의 노동을 포기할 정도로 나태하고 게으른 삶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와 무관하게 그들이 그저 생계를 위해 사회적 시스템에 기대어 복음의 가치를 저버리면서까지 불필요한 일에 참여하며 신앙인의 본분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한쪽만을 직접적 원인으로 고집하기는 어렵습니다. 종말에 대한 오해도 일부 원인이 되었겠지만, 그들의 문제를 소위 시한부 종말론자들과 같이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재림만을 열렬히 기다리는 과격한 태도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들의 진짜 문제는 바울이 가르친 전반적인 신앙 전통을 거부한 것입니다. 이는 복음이 요구하는 신앙 윤리에 걸맞지 않은 대단히 무질서한 삶입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안 한것(not busy)이 아니라 무질서하게 모든 일에 참견하는 바쁜 삶(busybody)을 살았습니다. 그것은 예수 공동체 다움을 훼손하고 복음의 가치를 허무는 행위입니다.

 

바울이 이 문제를 교정하기 위해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울 일행이 최초 보여주었던 질서 있는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전서에서도 언급한 바 있습니다(살전 2:9). 바울 일행은 늘 복음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도록 질서 있게 행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주야로 노동하며 사역을 이어갔습니다. 여기 8절에 “수고하고 애써”라는 말을 어떤 영어번역본(JB)에서는 ‘노예처럼 중압감에 사로잡힌’으로 번역하며 바울 일행의 노동 강도를 실감케 해줍니다. 그렇게 지낸 까닭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먼저 신생 공동체에 어떤 폐도 끼치지 않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 일행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았습니다. 물론 사역자가 어떤 환대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성도들의 형편을 잘 알았기 때문에 폐가 되는 일을 스스로 삼갔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올바른 본을 보이기 위해서였습니다. 곧 복음을 품은 자의 신실함을 삶으로 가르친 것입니다. 사도로서 누릴 마땅한 특권과 권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섬기셨듯이 그 본을 따라 신생 공동체 성도들을 진심으로 섬기려고 자기 권리를 기꺼이 포기했습니다. 성도들의 기억 속에 여전히 생생하게 자리하고 있는 모범적인 삶이었습니다. 그때 바울은 성도들에게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10)고 자신 있게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종말을 사는 성도의 신앙 윤리를 몸소 보여주며 질서 있는 삶을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떠난 이후 비교적 최근에 그 가르침에서 벗어나 무질서에 빠진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라고 직설적으로 묘사합니다. 이들에게 바울은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고 명령한다. 전서에서 언급한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손으로 일하기를 힘”(살전 4:11) 쓰고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살전 4:12)라는 명령을 다시금 떠올리게 합니다. 바울은 다시 한 번 선명한 신앙 전통과 윤리를 제시하며 그것을 따라 살도록 독려합니다. 물론 그런 삶이 쉽지는 않습니다. 고단함만 생각하면 낙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본받는 일이기에 즐겁고 명예로운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낙심하지 말라고 또다시 격려합니다. 바울은 단호한 명령으로 본 단락과 편지 본론의 결론을 맺습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편지에 묵직하게 새겨 넣은 내용에 순종하지 않는 자가 있거든 그 사람을 특정하여 부끄럽게 하고 교제를 단절하라는 대단히 강력한 징계 수준의 명령을 내립니다. 앞서 6절에서도 그런 자들에게서 “떠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런 권징은 궁극적으로 대상자를 회복하고 명예로운 자리로 되돌리는 목적이 있습니다.

 

축복(16-18)

성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권태로운 현실이나 고난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평화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은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평화가 생각과 마음을 지켜줄 것입니다. 바울은 어떤 상황에도 처할 줄 안 믿음의 선배였습니다.

 

16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17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시로서 이렇게 쓰노라 18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16-18)

 

신생 공동체가 견디기에 만만치 않은 안팎의 도전이 있었지만, 바울에게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큰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이 평강 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바울 역시 성도들이 끝까지 복음 안에 거하며 순종의 삶을 성실히 살아내길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러려면 성도들이 그의 편지를 권위 있는 가르침으로 무겁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며 친필 인증을 합니다. 그렇게 마지막 글자에까지 자신의 사도적 진심을 불어넣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라는 축복의 말로 맺습니다.


기도는 희망의 하나님을 향한 기대감의 표현이요, 무에서의 창조, 죽음에서의 살림에 대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표지이며, 주님의 초월적 개입을 구하는 행위입니다. 불합리한 현실에서 자신을 지켜주는 강력한 능력임을 확신한 자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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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후서(02-01)

 


그리스도의 강림과 그때의 모임

데살로니가후서 2장 1-12절


일반적으로 집에서 항상 먹는 밥이기 때문에 식상합니다. 그러다가 한 번씩 하는 외식이 특이하고 맛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식당에서 제공한 식사는 살로 가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손님들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 화학조미료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식사는 한두 번 먹을 순 있겠지만, 계속 먹을 순 없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집에서 해준 식사가 점점 그리워집니다. 영적인 부분도 식상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주님의 날에 관한 잘못한 가르침에 속지 않게 하려고 마지막 때 일어날 일들을 알려줍니다. 누군가가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도 두려워하거나 미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날이 오기 전에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불법의 사람이 나타나 자신을 하나님이라 높일 것입니다. 불법의 사람은 주님이 강림하셔서 폐하실 것이고,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는 심판받을 것입니다.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요청(1-3)

한 때 종말론이 한국을 휩쓸고 간 뒤, 요즘은 종말론에 대해 너무 무관심한 것 같습니다. 주님의 날에 과도한 관심을 가졌던 데살로니가 성도들과는 다르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날을 잊고 살아갑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큰 소망입니다. 주님의 날을 소망 중 기다려야 합니다.

 

1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2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3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1-3)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의 기록 목적은 대동소이합니다. 첫째는 박해받는 신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성경적 재림 신학과 신앙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는 특히 ‘주님의 재림이 이미 임했다’는 잘못된 사상을 바로잡아 줍니다. 주님이 이제 곧 오신다는 임박한 재림 사상도 문제가 있지만, 주님이 이미 오셨다는 사상은 더 큰 문제였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 중에는 “주의 날이 이르렀다”는 거짓 교훈에 흔들리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아직 주님이 오시지 않았다는 증거 두 가지를 말합니다. 하나는 아직 배교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불법의 사람이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

종말 전에는 하나님께 강력하게 도전하는 일(배교)이 일어날 것이고,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사람들을 현혹할 것입니다(4). 그런데 그런 일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소문을 듣고 흔들리는 이유는 믿음보다 감정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감정이 앞서면 두렵고 초조해집니다. 그릇된 선택과 결정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말씀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전했던 주님의 날에 대해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대다수는 밤에 도둑처럼 오신다고 한 것을 자세히 알고 있었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5:1-2). 하지만 당시에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거짓 예언과 가짜 편지를 내세우면서 예수님의 재림이 관해 잘못된 교훈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었고, 실재로 이 잘못된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들 중에는 주님의 날이 벌써 왔다고 잘못된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잘못된 주장에 마음이 흔들릴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불법한 자의 결말(4-8)

개인이나 국가가 법을 고려하지 않고 행동하면 벌금, 투옥 또는 기타 법적 영향과 같은 처벌을 받습니다. 법 집행 당국은 질서를 유지하고 법을 집행하기 위해 노력하며, 법을 위반한 사람들을 법의 심판대에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목표는 범법자에게 책임을 물음으로써 정의를 수호하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4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5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6너희는 지금 그로 하여금 그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이 있는 것을 아나니 7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은 그것을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겨질 때까지 하리라 8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5-8)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불법의 사람이 나타날 것입니다. 바울은 이 불법의 사람이 자기를 높이고 자칭 하나님이라고 할 것임을 증언합니다.

로마의 여러 폭군 중에 ‘가이우스칼라큘라’라는 악명 높은 황제가 있습니다. 그는 백성의 지지를 얻기 위해 유흥을 권장했고, 국가행사 때 신으로 분장하고 마치 신처럼 행동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신상을 예루살렘 성전 안에 설치해 유대인들을 자극했습니다. 바울은 그와 같은 불법의 사람이 나타나리라고 말합니다.

불법의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이라 주장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탄압하고 엄청난 재난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강림하셔서 그 불법의 사람을 죽이실 것입니다. 그는 큰 세력을 가진 듯하지만, 예수님의 입의 기운(입김)만으로 도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8). 그러므로 우리는 종말의 때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종말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현재도 믿음 안에서 평안할 수 있습니다.

 

 

멸망의 심판을 받을 자들(9-12)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놀라운 이적이 곧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눈에 보이는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이 이적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는 중요한 표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이적이 하나님의 능력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9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11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2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9-12)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시고 진리의 사랑을 베푸십니다. 그 은혜와 사랑을 받지 않고 거부하는 자들은 사탄의 능력으로 권세를 행사하는 불법의 사람에게 넘어가 멸망 당하고 맙니다(10).

바울이 이 말씀을 전하는 이유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잘못된 소문에 흔들리지 말고, 구원을 확신하고 진리의 사랑 안에 거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재림의 소문에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사탄의 세력에 넘어가 불의한 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성도가 두려워할 것은 도처에서 들려오는 소문이 아닙니다. 사탄에게 현혹돼 넘어질까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진리의 말씀을 붙잡고 항상 진리의 사랑 안에 거해야 합니다. 오직 말씀에 근거해 재림을 소망하고 구원을 확신해야 합니다.

아직 억제하시는 분이 물러나서 않았고, 불법자가 나타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날의 벌써 왔다는 주장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불법자는 사단의 작용에 따라 나타나서 온갖 능력과 표징과 이적을 행하고 불의한 속임수로 사람들을 미혹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법자를 나타나게 하시고 그에게 미혹하게 하는 힘을 주십니다. 또한 그를 멸하십니다. 또한 그를 멸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종말에 일어날 일들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종말의 때가 가까이 올수록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를 두려워하거나 그에게 미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임하셔서 그를 죽이고 멸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말의 때 모든 성도들은 주님 앞에 모이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멸망은 성도들과 상관없는 일입니다. 잘못된 소문에 흔들릴 것도 없고, 사탄의 현혹에 귀 기울일 필요도 없습니다. 진리의 사랑을 매일 공급받으며 그 사랑을 전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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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후서(01-01)


자랑스러운 교회의 모습

데살로니가후서 1장 1-12절


 

이 세상에서는 악인들이 떵떵거리면서 살아간 것 같습니다. 더 나가서 의인들을 괴롭히는 불공평한 일들이 종종 일어나곤 합니다. 언젠가는 반듯이 악인과 의인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분명히 행한 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악인들은 벌을 받고, 의인들은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발생한 문제로 인해 이 서신을 쓰게 되었지만, 바울은 이 교회 성도들의 성장과 성숙으로 인해 뿌듯함과 기쁨을 감추지 않습니다. 잘못은 따끔하게 책망하고 정확히 지적하여 교정해야 함을 강조하면서도, 좋은 태도와 열매에 대해서는 아낌없이 칭찬하고 기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데살로니가후서에 나타난 바울의 핵심입니다.

 

바울의 인사(1-2)

믿음의 성숙은 수직적인 차원에서 풍성한 사랑은 수평적인 차원입니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믿음이 자라고 사랑이 뜨거운 곳에는 감사도 넘쳐 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성숙한 믿음은 형제자매에 대한 사랑으로 드러납니다.

 

1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2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1-2)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 이어 데살로니가 교회에 두 번째 서신을 보냈습니다. 핍박과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굳게 지키며 서로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칭찬하며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와 같이 공동 발신자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실라와 디모데인데, 바울의 2차 전도여행 때, 데살로니가에 가서 함께 복음을 전한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편지 서두에서 동역자들의 이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들은 데살로니가 교회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디모데는 최근 데살로니가를 다시 방문하고 돌아와 교회 소식을 바울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공동 발신자로 언급하고 있지만, 2장 18절, 3장 5절, 5장 17절에서 1인칭은 ‘나’를 사용한 것을 볼 때, 바울이 이 편지를 쓰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고대 편지들에 감사가 서두에 이어 나오는데, 그것은 신에 대한 짤막한 감사입니다. 바울의 감사 대상은 하나님이며 내용이 길고 구체적입니다. 바울의 감사 방법은 기도할 때 그들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의 인사는 전서와 매우 유사하지만, 몇 가지 작은 차이도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아버지’에서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점입니다. 하나님을 개인보다는 교회 공동체를 돌보시는 분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름으로써 모든 성도가 한 아버지의 영적 자녀들임을 시사합니다. 둘째는 은혜와 평강의 기원이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임을 두 번이나 밝힌 것입니다. 불필요한 반복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신앙 연대(連帶)가 하나님과 예수님 안에서 얼마나 친밀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강조하려는 바울의 의도입니다. 그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힘은 하나님과 예수님으로 주어지는 은혜와 평강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두 번째 편지도 성도들을 향한 삼위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교회를 붙드셔서 은혜와 평안을 경험하기를 바라며 요구합니다.

 

바울의 감사(3-10)

고난은 믿음과 사랑을 시험하고 촉진하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아무 탈이 없고 평탄한 삶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 중에도 하나님과 이웃의 존재감을 더욱 또렷하게 경험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고난을 당하고 있었지만, 믿음은 더욱 자랐고 사랑은 풍성해졌습니다.

 

3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4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5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6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7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8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9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10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3-10)

 

본문은 바울의 편지 중에서 가장 근 문장이 등장합니다. 헬라어 원문 3-10절은은 한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상황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모두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진심 어린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의 이유는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그들의 신앙입니다. 이번에는 그냥 ‘감사한다’가 아닌 강한 의무감과 감격이 섞여 당연히 감사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성도 간의 사랑이 풍성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람’과 ‘풍성’은 그들의 믿음과 사랑이 사방으로 거침없이 뻗어가는 매우 역동적인 이미지를 품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것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음을 의무와 당연으로 표현하는데, 이 표현은 2:13에 한 번 더 등장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이런 감사의 요소들은 철저히 과거 기억에 의존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현재진행입니다. 나무가 무럭무럭 자라듯 그리고 물이 넘쳐흐르듯 그들의 믿음과 사랑은 이전보다 더 역동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등장했던 삼중 표현인 ‘믿음과 사랑과 소망’ 중 ‘믿음과 사랑’만 언급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곧바로 등장하는 “인내”는 전서에서 언급한 “소망의 인내”를 급히 소환합니다. 이 부분을 따로 언급한 까닭은 현재 교회가 겪는 박해와 환난이 이전보다 훨씬 심각해졌음을 암시합니다. 고난에 대한 그들의 견딤은 이미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훌륭한 본과 자랑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다시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 여전히 그들을 자랑하고 있음을 언급하며 신앙을 독려합니다. 외부의 적대감이 더욱 거세진 상황에도 그들은 인내하며 견뎠습니다. 물론 그 동력은 전서에서도 언급했듯 주의 강림에 대한 확고한 소망에서 비롯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현재 당하는 박해와 환난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여 설명했습니다. 특히 동족으로부터 당하는 고난은 유대에 있는 교회와 바울 자신도 경험하고 있는 성도의 숙명으로 해석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한 걸음 더 들어가 박해와 환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좀 더 넓게 필칩니다. 그는 고난의 현실을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로 정의하며 성도들을 안심시킵니다. 현재의 고난은 하나님이 침묵하신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공의가 실현되고 있는 생생한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성도들이 인내하고 믿음을 놓지 않을 근거가 확보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성도와 핍박자들의 운명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자연스럽게 궁금해집니다.

바울은 성도와 핍박자의 운명을 교차로 두 절씩 소개하는데(5,7절 vs 6, 8: ABA'B'구조), 현재와 장차 주의 강림 때로 구분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선 핍박받는 성도들의 현재 운명을 다룹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현재 당하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존재로 여김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곧 하나님 나라의 영광의 수혜자가 되는 것인데, 그 증거가 바로 현재의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고난받은 예수님을 영광으로 높이신 것이 하나님의 완벽한 공의였듯, 현재 고난당하는 성도들에게도 영광은 확실히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받을 영광에는 장차 주가 강림하실 때 얻을 안전한 쉼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7). 이것이 고난받는 성도에게 공의의 하나님이 베푸시는 현재와 장래의 은혜입니다.

 

한편 하나님의 공의가 핍박자들에게는 어떻게 실현됩니까? 성도들에게 까닭 없이 환난을 가한 자들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기에 합당한 불의한 자들입니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악인을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강조합니다(참조, 롬 2:6).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확실한 현재적 보응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성도들의 고난의 현재에 실제하듯이, 악인을 향한 신적 보응인 환난도 그들의 현재에 실재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 예수가 강림하실 때에 최종적인 신적 형벌이 내려질 것입니다(9).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에게 현재의 보응인 환난을 되갚으시고, 장래의 보응인 피할 수 없는 형벌이 내리십니다.

바울은 장래의 심판과 보응을 피할 수 없는 자들의 특징을 두 가지로 묘사하는데, 하나님을 모르는 것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것입니다(8). 대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이방인으로,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은 유대인으로 구별하려 할 것입니다. 하지만, 재림 때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전자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은 자들을, 후자는 복음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며 교회를 핍박한 자들을 지칭한다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런 자들과 그들의 우두머리인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은 다음 장에서 매우 진지하게 다루어질 것입니다(2:3-4). 하나님을 모르고 복음에 대적한 자들이 심판당할 자들의 특징이라면, 반대로 고난받는 성도들은 하나님을 알고 예수의 복음에 순종하는 자들입니다.

 

바울은 이와 같은 긴 진술을 통해 현재 고난받는 성도들의 신앙을 격려하며, 현재와 장래에 항상 의로 우신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할 것을 강력히 독려합니다. 마침내 주의 강림의 날에 있을 영광스런 모습을 다시 한번 상기시킵니다. 악인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기 위해 “주의 얼굴”과 영광에서 떠나가지만(아포, 9절), 성도들은 예수님 안에(엔 아우토, 12절) 그 얼굴 앞에 나와 영광에 참여합니다. 바로 그 자리에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모두 포함될 것입니다.

 

 

성도들을 위한 기도(11-12)

은혜는 우리 안에 믿음을, 믿음은 영광을 낳습니다.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고 선을 기뻐하고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름을 통해서 가능할 것입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공의를 신뢰하는 자는 고난과 불공정한 현실 속에서도 부르심에 함당한 삶을 살아갑니다. 기도는 불의한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지켜가게 만듭니다.

 

11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12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11-12)

 

사도 바울은 비록 육체로는 떨어져 있으나 영으로는 항상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함께합니다. 바로 기도를 통해서입니다. 바울은 자신과 일행이 성도들을 위해 늘 기도한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들려주면서 그들을 안심시킵니다. 문장 앞에 위치한 “이러므로”는 앞에서 언급한 내용을 종합합니다. 그들을 위한 바울의 기도가 어떤 확신 속에 드려지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도의 내용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성도들을 어떻게 여기시며, 또 그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하실 것인가로 채워집니다. 우선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심에 할당한 자”로 여겨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아직 합당하게 여겨주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미 그렇게 여겨주셨음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즉, 바울의 기도를 듣는 성도들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 이런 존재로 서 있는지 상기시키는 기도입니다. 그들은 복음만으로 부름을 받은 거룩한 성도로서 그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부름받은 성도를 부르신 하나님의 마땅한 요구이자 기대입니다. 바울은 그 부르심에 합당한 성도의 삶에 선한 열매가 맺히기를 간구합니다. 그런 성도들의 삶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영광을 받으십니다. 더불어 성도들 역시 예수 안에서 영광이 되는 은혜를 누립니다. 바울은 이미 12절에서 예수가 강림하실 때 성도들로부터 영광 받으실 것을 언급했습니다. 그것이 성도가 모든 신앙 여정을 마치고 드릴 미래적 영광이라면, 여기 영광은 그 여정 가운데 합당한 삶으로 드리는 현재적 영광입니다.


믿음의 성숙과 풍성한 사랑이 환난 중에도 이어질 수 있었던 비결은 악인과 선인에 대한 공정한 심판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기대하는 마음은 불공평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께 원수 갚는 것을 말기는 태도에서 비롯합니다. 그런 기대가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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