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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12-02)


인생에 대한 결론

전도서 12장 9-14절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혼자서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드셨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누군가의 도움을 주면서 살아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도움을 주면서 무리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을 ‘공동체’라고 합니다. 그래서 가족공동체, 지역공동체, 교회공동체라는 말이 형성된 것입니다. 공동체에는 질서를 세우는 법칙이 있습니다. 이것을 관습, 규칙, 조례 그리고 법이라고 부릅니다.

 

  • 본문은 전도서를 최종적으로 마감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전도자 솔로몬은 자신의 삶 가운데서 경험과 공부했던 지혜를 통해 ‘전도서’라는 지혜서를 작성했습니다. 본문은 전도서의 결론적인 부분입니다. 그 결론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허무를 알아야만, 거듭해서 인생의 허무를 말하고 또 말했던 것입니다.

 

전심으로 알아 가고자 함(9-10)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한 첫 단계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자신을 알리시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인생 결론을 살펴보면서, 전도자가 주는 인생의 결론을 우리 마음 가운데 새기고 간직하고 지켜나가기 원합니다.

 

9전도자는 지혜자이어서 여전히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쳤고 또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 10전도자는 힘써 아름다운 말들을 구하였나니 진리의 말씀들을 정직하게 기록하였느니라(9-10)

 

옛날이나 현대나 국가를 통치하는 지도자들은 자기 백성들이 배우지 못함으로 무지 속에 빠지지 않도록 교육 기관을 만들어 교육시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교육은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란 표어로 교육을 위해 투자를 많이 합니다. 그런 연장선상에서 전도자인 솔로몬은 9-10절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역할을 밝힙니다.

 

(1) 지혜를 집대성한 전도자(9)

 

전도자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백성들을 위해 많은 헌신한 부분이 많습니다. 그중에 백성들을 지혜롭게 만들어 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첫째, 전도자는 “여전히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쳤고”(9)라고 백성을 가르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는 지혜자로서 전도자에게 무엇보다 우선하는 역할입니다. 전도자는 많은 백성을 모아 지혜를 가르치는 자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시는 교육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백성들을 모아놓고 많은 교육을 했던 것 같습니다. 둘째, 전도자는 “또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9)라고 하였습니다. 솔로몬은 백성들이 하나님 안에서 지혜로운 백성들이 되길 원하는 마음으로, 지혜의 보고인 잠언을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가지고 잠언을 많이 지었습니다. 열왕기 4장 32절에 의하면 솔로몬은 잠언 삼천을 말했습니다. 가히 상상할 수 없는 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많은 잠언들을 순서에 맞게 정리하여 잠언집을 만들었습니다. 전도자는 많은 사람에게 익숙한 잠언들을 연구해서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집대성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혜를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했던 것입니다.

 

(2) 즐거움과 진리의 수호자(10)

 

전도자인 솔로몬은 이스라엘 백성이 지혜로운 백성이 되기 위해 노력한 것 중에, 지혜를 얻기 위한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1-8절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인생의 한계를 인정하고, 부족한 속에서 ‘즐겁게 사는 것’이 의미 있는 인생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아름다운 말’은 ‘즐거움의 말들’이라고 변역할 수 있습니다(10). 이것은 단순히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우스게 말들 모았단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복과 기쁨이 되는 말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당시 뭇 백성들에게 ‘은혜로운 말’(눅 4:22)을 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전도자 솔로몬은 이 책의 진리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실제적으로 호감이 가는 형식을 갖춘 책으로 만들고자 노력했다고 말했습니다. 즐거움이나 은혜를 강조하다 보면, 정도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정말 진리가 딱딱하지 않고 흥미롭게, 흥미롭지만 너무 가볍지 않게 진리를 정리해 나가려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는 유익을 끼치고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는 진리의 말씀들을 정직하게 기록했습니다.

 

말씀으로 경계를 받음(11-12)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가는 과정에는 그 말씀이 우리를 찌르는 채찍과 같이 마음을 찌를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 앞에 죄인으로 드러나지 않을 자가 없기 때문에, 허물과 실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죄인임을 지적하고,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이 우리의 약점이나 연약한 점을 들추어내기 때문입니다.

 

11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가 주신 바이니라 12내 아들아 또 이것들로부터 경계를 받으라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11-12)

 

전도자의 수고를 통해 잘 갖추어진 진리의 말씀이 끼친 영향력을 설명합니다. 전도자는 지혜자여서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쳤고, 자신이 깨달은 이치를 잠언으로 지었으며 전그 진리의 말씀을 정직하게 기록했다고 진술합니다. 전도서는 다른 지혜서의 목표와 의도, 그리고 권위의 궁극적인 근거에 관련시킵니다.

 

(1) 채찍 같은 진리의 말씀(11)

 

첫째는 자혜자들의 말씀이 ‘찌르는 채찍들 같고’(11)라고 표현합니다. 채찍은 짐승들을 볼 때 쓰는 막대기로, 끝에 못을 달아놓았습니다. 이 채찍은 목자들이 말을 듣지 않은 가축들을 바른 길로 가도록 하는데, 유용한 도구입니다. 따라서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라는 말씀은, 지혜자들의 가르침이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 교정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까지 찔러 자극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질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음 비유로, ‘잘 박힌 못’으로, 스승들의 말씀이 마음에 깊이 새겨진 것을 의미합니다. ‘스승들이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여기서 스승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의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잘 박힌 못’ 같다고 합니다. ‘잘 박힌 못’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고 싶으면 암벽가들을 보면 됩니다. 그들은 온 몸을 팩 하나에 싣고 바위에 매달려 있습니다. 그래도 안전합니다. 만약 못이 제대로 박혀 있지 않아서 못이 뽑혀 버린다면 천 길 낭떠러지기로 떨어져 죽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잘 박힌 못과 같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에 힘이 들기는 하지만 일단 받아들이면 그 말씀은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할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을 걸고하게 지지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변화를 받았습니다. 어거스틴을 변화시킨 말씀은 로마서 13장 13-14절 말씀이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마르틴 루터를 변화시킨 말씀은 시편 22편 1-2절이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요한 웨슬리는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듣다가 변화되었습니다. 고아의 아버지 조지 뮬러는 시편 68편 5절의 말씀으로, 영적 대각성운동의 선구자 조나단 에드워드는 디모데후서 1장 17절의 말씀으로, 중국내지선교회 창시자인 허드슨 테일러는 요한복음 15장 5절의 말씀으로, ‘메시아’를 작곡한 음악가 헨델은 이사이 53장 4절의 말씀으로도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2) 전도자의 고충(12)

 

전도자는 이제 “내 아들들아!”라고 부릅니다. 이는 지혜 문학에서 아버지나 스승의 교훈을 전할 때 사용하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청중의 관심을 환기시킬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많은 책들’은 하나님이 없는 세상의 지식 모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쓴 책은 끝이 없는 지식의 쓰레기를 모으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지식은 아무 쓸데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없는 책을 짓는 일은 쓸데없는 일이고, 책을 쓰기 위해 공부하는 일은 그저 몸만 피곤하게 하는 것입니다.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다른 것 몰라도 하나님만 알면 그 사람은 산더미 같은 책을 읽은 사람보다 나은 것입니다.

 

마지막 충고(13-14)

하나님 경외는 인간의 기본 의무이며, 단순한 두려움을 넘어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는 삶입니다. 이 경외심은 계명 준수로 구체화되어 도덕적 삶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굳건히 합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이며, 현재의 삶은 미래의 심판에 영향을 미칩니다.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고 계명을 지키는 것이 진정한 삶의 의미와 영원한 가치를 찾는 길입니다. 전도서 전체를 마무리하는 결론은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기본적인 것들입니다.

 

13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14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13-14)

 

본문은 인간의 본분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모든 행위와 숨겨진 일까지 선악 간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중요함을 역설합니다.

 

(1) 사람의 본문(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솔로몬은 이제 전도서의 대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 결론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이것이 바로 솔로몬이 허무를 통해서 깨달은 진리였습니다. 그는 사람의 본분이 무엇인가를 깨달았습니다. 여기서 ‘본분’이라는 말은 전부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에게 있어서 전부, 인생의 모든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목적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며는 것이고, 인생의 가치는 하나님을 섬기는데 달려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을 나서는 헛된 것이고, 사람도 하나님을 떠나서는 무의미한 것입니다. 인생은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며 사는데서 참다운 만족을 얻을 수 있고 진정한 행복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위하기에 앞서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며 사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의 번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리수를 두고 있습니다. 성도들조차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손해 본다고 생각해서 현실과 타협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외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면 돌아가는 길 같아도 지름길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면 지름길 같아도 돌아가는 길이요 결국에는 멸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하신 뜻 가운데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때로는 멀리 돌아가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는 그 대표적인 한 예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곧바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지 않으시고 광야에서 무려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연단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고, 우리 인생의 여러 국면에서 모순이 있을지라도 실망하지 말고, 끝까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2) 사람의 본분(14)

 

원문에는 이 구절 첫머리에 ‘왜 그러냐고 하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14절은 앞서 언급한 13절의 이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명령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최후심판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모든 행위에 대하여 선악 간에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행위는 씨를 심는 것과 같습니다. 씨를 심으면 반드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선을 심으면 반드시 선한 열매를 거두고 악을 심으면 반드시 악한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선을 행하기가 절대 쉽지 않습니다.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는 일도 어렵지만, 선을 행하려 해도 사람들이 좋게만 보지 않고 이러쿵저러쿵 가만히 놔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남을 판단하기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너무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래야 할까요? 사람의 판단은 즉흥적이고, 부정확하고, 편파적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판단은 결코 완전하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판단에 안절부절못하고, 밥맛을 잃어버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므로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들에게 판단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어쩌다 선한 마음으로 선을 행했는데 좋지 못한 판단을 받으면 ‘내가 뭐 아쉬워서 이런 소리까지 들으면서 할 필요가 있겠는가?’라 하면서 쉽게 그만두고 말 것입니다. 선행의 모범입니다. 선행은 할 수 있는 한 은밀한 것이 좋은 것입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바라보고 계시고 때가 되면 은밀한 중에 갚아 주시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며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에서는 인생의 궁극적인 결론을 하나님 앞에서의 삶으로 정리합니다. 지혜자는 많은 가르침을 주었지만, 그 핵심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인간의 본분임을 강조합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 앞에 드러나므로, 순간적인 만족이 아니라 영원한 가치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지식과 노력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을 중심에 두지 않으면 헛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삶을 통해 참된 지혜를 실천해야 합니다.[임마누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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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12-01)


미래를 준비하는 인생들

전도서 12장 1-8절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을 깨닫고 살아가느냐?’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깨달음에 따라 지금까지 살아온 것과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더욱 바르고 온전하며 가치 있게 만들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내가 깨달아 주의 계명들을 배우게 하소서”(시 119:73)라고 기도했습니다.

 

  • 전도자 솔로몬은 청년의 때에 창조주를 기억해라고 명합니다.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아무 낙이 없다고 하기 전에, 어둡기 전에 그리해야 합니다. 그날에는 모두가 무너지고 쇠하며 깨질 것입니다. 영이 하나님께 돌아가기 전에 기억해야 합니다. 전도자의 말대로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됩니다.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1)

사람은 성장 과정에서 시기가 있습니다. 공부해야 할 시기가 있고, 일해야 할 시기, 쉬어야 할 시기가 있다고 합니다. 젊었을 때 열심히 수고한 삶을 살았다면, 노년에서는 수고한 열매들을 먹으면서 즐겨야 합니다. 그래서 나라에서는 유원지나 관광지에 입장료를 어르신들은 받지 않고 ‘무료입장’하도록 배려합니다. 젊었을 때, 나라를 위해 수고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그 수고에 보답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인생도 나이가 들어서 젊었을 때, 열매를 먹는 늙을 때가 있습니다.

 

1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1)

 

솔로몬은 이 말씀 속에서 중요한 두 가지 단어가 ‘청년’과 ‘기억하라’라는 단어입니다. 이곳에서 말하는 ‘청년의 때’은 연령적으로 나이가 ‘젊은 사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을 향해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기회는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가 있을 때, 그 기회를 잡아야 합니다. 인생의 의미를 발견할 시간이 있고, 자신의 인생 여정을 바꿀 만할 때 하나님께 돌아서야 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다름 아니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입니다. 1절에 ‘기억하라’는 것은 하나님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단순히 암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고 주권적인 계획으로 세상에 살도록 하신 목적을 따라 결단하고 살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왜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하셨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해답은 소요리문답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제1문 : 인생의 제일 된 목적은 무엇인가?

       답 : 인생의 제일 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일이다.”

 

‘소요리문답’이란 영국에서 어린이들에게 기독교 교리를 가르치기 위한 교리학습서입니다. 영국에서는 어린아이들에게 어렸을 때부터, 교리교육의 첫 질문이 ‘인생의 제일 된 목적이 무엇인가?’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시면서 각자에게 사명을 주셨다면, 그 사명을 결산할 날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날을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있음을 깨닫고, 그 목적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함께 우리 인생을 결산할 때가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하고 반드시 깨달아야 할 깨달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행위, 모든 은밀한 일, 선과 악의 행실에 대하여 정확하게 심판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 중 주인이 달란트를 맡긴 종들과의 결산하는 것은 심판의 결산입니다. 한 달란트를 쓸모없이 그대로 땅속에 보관했던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아.......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마 25:26,29)고 심판받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일에 충성했던 2,5달란트 받은 종들은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21,23)라고 상을 주십니다.

 

기회를 잃어가는 시기(2-7)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연약할 때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늙어 아프고 외롭고 우울하며 고통당할 때에도 주님을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약할 때 강함 되시는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바라보지 못할 때가 가장 아두울 때입니다. 영적인 어둠의 때가 와서 무기력해지기 전에 우리의 속삼을 날마다 새롭게 하시는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2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3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4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로 말미암아 일어날 것이며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5또한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정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객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니라 6은 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지고 7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2-7)

 

젊었을 때는 기회가 항상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자 솔로몬은 전도서 3장에서 분명히 “1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2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3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4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5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6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7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8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전도자 솔로몬이 묘사한 내용을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 빛이 사라지기 전(2)

 

솔로몬은 문학적으로 사람이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2)라고 명령합니다. 전도자는 우주의 발광체를 거론하며 그 빛이 어두워지기 전에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합니다. 그 빛이 어두워지고 먹구름이 끼는 것은 종말론적 이미지이며, 개인적으로는 생명의 불이 꺼져가고 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누리고 살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눈이 어두워지고, 총기(聰氣)도 사라져 갑니다. 나이가 들어가면 봉사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2) 노쇠해지기 전(3-4)

 

3-4절은 집의 이미지로 묘사합니다. 노년기에 인간의 육체에 나타나는 보편적 특징들을 묘사합니다. 청년은 늙어서 노인이 됩니다. 몸은 쇠약해져서 집을 지키는 남자들의 힘이 약해지고 맷돌질하는 여인의 눈이 어두워집니다. 노인이 되면 무릎과 관절이 약해지고 이가 약해지고 눈이 어두워지는 현상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또는 신체로 비유해서 늙어진 신체의 모습을 상징하는 표현으로도 이해하기도 합니다.

 

(3) 두려움에 사로잡히기 전(5)

 

5절은 공포와 두려움의 영상들을 통해 죽음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음을 묘사합니다. 노인이 되면 쉽게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고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며 길을 가면서도 들리는 작은 소리에도 공포심을 느끼게 됩니다.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정욕이 그치리니’라는 세 가지 묘사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은 죽음이 임박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사람이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객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니라’는 말은 그가 죽을 때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즉 그가 죽어서 영원한 집으로 들어갔고 문상객들이 왕래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4) 생명줄이 끊어지기 전(6)

 

6절은 전도자는 인생을 은줄과 금 그릇에 비유합니다. 금등잔은 은줄에 매달려 있는데 줄이 끊어지면 등잔도 함께 부서집니다. 등잔물이 꺼지면 집(몸)이 어두워지는데 이것도 사람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우물에 매달린 도르래가 썩어 부서지면 두레박도 함께 깨지게 됩니다. 역시 사람의 죽음을 상징하며 사람이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을 말해줍니다.

 

(5) 흙으로 돌아가기 전(7)

 

7절은 하나님이 사람을 흙먼지로 빚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어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죽으면 다시 흙먼지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여기서 죽음은 우리를 창조주 하나님과 분리시킬 수 없음을 알게 합니다.

정리하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간은 소중하지만, 젊은 날에는 기회와 혈기를 남용해, 쾌락과 방탕에 빠지기 쉬우니 주의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명을 다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인생의 단계마다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아동기는 배워야할 시기입니다. 청년기는 열심히 일해야 할 시기입니다. 장년기는 가정을 만들어갈 시기입니다. 그리고 노년기에는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누리면서 삶을 정리해 나아가야 합니다. 젊음이 언제까지나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젊고 강건했던 몸이 쇠약해져 높은 곳을 오르기가 힘들고 자신을 지탱하기 힘든 때가 다가옵니다. 정욕도 그치고, 부실한 치아로 먹을 것을 제대로 씹지 못해 식욕조차 상실하는 노년의 때가 속히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청년의 때, 하나님께서 아직까지 총명을 유지하도록 하셨을 때에 무엇보다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요셉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코람데오) 순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죽기 전에 기억할 창조주(8)

성도들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언제나 죽음에 대해 준비를 하면서 살아갑니다. 때로는 이 사실을 망각하면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이라는 현실이 오기 전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성도는 죽음 너머에 영원한 삶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8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8)

 

전도자는 전도서 마무리져 가면서, 전체 주제 구분인 1장 2절인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8)라고 돌아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헛되다’는 것은 단순히 비관적이거나 허무적인 의미가 아니라 인간의 지혜로는 인간과 세계 그리고 하나님에 관해 다 파악할 수 없음을 깨달았기에 인생은 헛되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의 능력과 이성에 대한 무한 신뢰에 반기를 든 것으로도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만 보내주신 것이 아니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요 3:16).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려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죄와 사망의 권세는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고, 우리는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청년의 때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억한다면 헛되고 헛된 삶이 아니라 영광스럽고 복된 삶이 남은 인생에 펼쳐질 것입니다.


우리는 젊은 시절에 하나님을 기억하고 경외하는 것이 후회 없는 삶을 사는 데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의 덧없음을 인식함으로써, 더욱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매 순간의 선택이 우리의 인생에 미치는 영향을 깊이 고민해야 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최우선으로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기억하고, 모든 행동의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러한 교훈들은 전도서를 통해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찾는 삶으로 안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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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11-01)


지혜로운 자의 삶

전도서 11장 1-10절


부모님들은 대부분 자신의 살아온 경험에 비추어봐서, 자녀들에게 될 수 있으면 안전하게 살아가길 원합니다. 그래서 ‘무슨 무슨 일을 하라!’는 긍정적인 말보다, ‘이것, 저것을 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말을 많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부모는 자녀들에게 ‘무엇을 해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에게 축복해 주실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행동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고 누립니다.

 

  • 솔로몬은 지금까지 전도서를 통해서 여러 가지 이론들을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11장부터 12장까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을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로 설명하면서 전도서를 마무리를 짓습니다. 미래를 준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권합니다. 본문은 그 중에 처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어떻게 하면 지혜롭게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말씀합니다. 이 세상을 지혜롭게 사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미래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관용의 미덕(1-2)

미래를 대비하는 지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현명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협력하며 살아가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둘째, 세상의 변화를 정확히 파악하고 적절히 대처하는 능력입니다.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변화를 감지하고 유연하게 대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인간 관계와 변화 대응 능력은 미래를 성공적으로 준비하는 핵심 요소입니다.

 

1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2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1-2)

 

사람들은 자신과 관련 있으면, 유난히 관심을 가집니다. 자신과 관계가 없으면, 사랑과 관용이 적은 편입니다. 무관심하려고 합니다. 상관했다간 자신만 다친다는 의식이 강하게 깔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위한 사랑과 관용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솔로몬은 하는 말은, 당시에 속담을 인용한 것입니다. 당시에는 곡식을 파종하는 방법이 발달되지 않았습니다. 나일과 같이 큰 강들은 배를 타고 상류로 올라가서 강물 위에 씨앗을 뿌립니다. 그러면 이 씨앗들이 강물을 따라 흘러내려 가면서 강가에서 자라게 됩니다. 그리고 추수 때에는 이삭만 잘라서 추수합니다. 그러므로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을 향해 ‘네 식물을 강물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라’라는 속담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미래를 위하여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입니다.

 

(1) 다른 사람을 위한 배려

 

사람들이 보험을 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미래의 어려운 시기를 대비하는 것입니다. 삶에서도 지혜로운 사람은 미래를 위하여 준비해 놓습니다. 자기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포용하면서 그들을 위해 배려를 합니다.

 

(2) 모든 사람을 위한 배려

 

2절에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할 때, 자신만 이해하고 함께하는 사람들만 배려하는 것은 진짜 배려가 아닙니다. 자기 생각과 다른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배려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마음 통한 사람들과는 편한하기 때문에 그 사람들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점점 시야가 적어져 버립니다.

 

35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8:35)

 

하나님의 자녀들은 누구든지 친구가 되려고 해야 합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밖에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자기 경험이 모든 것이 옳고, 자기 생각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넓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음이 적으면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 됩니다.

이러한 생각은 세상 사람들과 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짚 발고 올라서야만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다른 사람의 단점을 헐뜯어야만 자신이 성공한 성도인 줄 착각합니다. 결국은 모두 공멸(共滅)하는 지름길입니다. 다른 사람을 나보다 더 낫게 여기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서로 살아나는 상승(相乘)의 원리를 가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에 사랑은 곧 자신을 위한 사랑입니다. 이 세상에는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강한 자와 약한 자가 같이 동거동락(同居同樂)하는 것입니다. 연약한 사람들의 손을 잡아 주고 같이 일어서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사랑과 미움은 부메랑이 되어 다시 돌아옵니다. 당신이 무엇을 뿌리는가에 따라 그 열매를 다음에 그것에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거둡니다. 다른 사람이 고통스러워하고 힘들어할 때, 무관심과 미움으로 심게 되면, 대구 지하철 참사와 같은 재앙의 열매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잠언 28장 27절에서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 하려니와 못본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많으리라”고 말합니다.

사랑을 심으면 때가 되면, 온 세상이 평화롭게 자유로운 좋은 열매로 돌아와 거둡니다. 잠언 19장 17절에서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사랑을 베풀만할 때, 베풀어야 합니다. 때가 되면 반드시 다시 받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을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잠 14:31)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천국의 보좌를 버리고 가난하고 병들고 약한 자들의 친구가 되시기 위해 낮아지셨습니다(막 2:17). 주님의 자녀들이 된 당신도 주님을 따라서 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시대와 추세를 살핌(3-4)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솔로몬과 같이 세상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대처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이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바탕으로 한 올바른 판단을 요구합니다. 세상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신앙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독교인은 이러한 대책을 세워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야 합니다. 결국, 믿음과 지혜를 통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3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땅에 쏟아지며 나무가 남으로나 북으로나 쓰러지면 그 쓰러진 곳에 그냥 있으리라 4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못할 것이요 구름만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못하리라(3-4)

 

특별히 4절에서 “풍세를 살펴보는 자”나 “구름을 바라보는 자”는 시대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믿음의 선배들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시대를 읽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물로 멸망시키실 것을 알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조롱에도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노아의 방주를 만들어 갔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될 사실을 알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안고 간곡히 기도했습니다.

세상의 문화는 점점 타락해져 악해져 갑니다. 이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세상을 어떤 대책이 있습니까? 점점 죄악의 불길이 타오른데 세상 탓 만해야 합니까! 악한 세상을 피하는 것이 지혜입니까! 당신은 지금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썩어져 가는 세상만 바라보고 있다면, 당신 또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세상이 점점 악해져가니깐, 이 더러운 세상 꼴을 보지 않고 기도원으로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란 이 세상을 이끌고 나가는 사람이지, 세상이 악한 물이 들었다고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방어만 한다고 보수(保守)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운동경기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수비만 하면 승리할 수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공격이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내가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리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하지만, 진리의 검(劍)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 나가서 담대히 싸워야 합니다. 이 시대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방향을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더 적극적으로 대안 방법이 있어야 합니다.

악한 세력에 자리를 내주어서는 안 됩니다. 정치, 경제, 문화, 예술, 모든 면에서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을 주관해야 합니다. 가만히 앉아서 기도만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세상의 풍속이 어떻게 변할 것인가를 세대를 읽으면서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의 변화를 잘 읽고 그곳에 적절하게 잘 대응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적기와 실천의 시기(5-8)

솔로몬은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일에 대한 태도를 말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일할 수 있는 적기(適期)를 알 수 없지만, 지금 일을 해야 합니다. 열심히 미래를 준비한 사람들은 언젠가는 그 열매를 거둘 때가 있을 것입니다.

 

5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 6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7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 8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 그러나 캄캄한 날들이 많으리니 그 날들을 생각할지로다 다가올 일은 다 헛되도다(5-8)

 

‘지혜로운 사람’은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는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무조건 아무 때나 씨앗을 뿌린 것이 아니라 적기에 뿌려야 합니다.

 

(1) 시기를 알아야 축복을 누림(5-6)

 

사람에게 좋은 기회는 3번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러한 기회를 언제 주실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화가가 ‘기회’라는 그림을 그리면서 마치 올챙이와 같은 모양으로 그렸습니다. 이유는 기회가 왔을 때, 처음에 잡으면 쉽게 잡을 수 있지만, 나중에 잡으려 하면 빠져나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실천이 없으면 이론가나 사상가일 뿐입니다.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미래 축복을 받기 위해 삽니까? 지금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어떤 씨앗이 축복으로 열매를 거둘지 모릅니다. 적기라고 생각하면 열심히 뿌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4계절 자연을 통해 교훈해 주십니다. 봄에는 씨앗을 뿌려야 하고, 여름에는 가꾸어야 하며, 가을에는 추수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겨울에 편하게 쉴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선배들을 통해 교훈하십니다. 우리가 항상 젊은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의 선배들이 가야 했던 것처럼 우리도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가야한다는 사실입니다.

솔로몬은 기회에 대해서, 5절에서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고 합니다. ‘기회’는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기회를 위해,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요행을 바라고 있습니까? 복권 열풍이 불고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요행은 기회가 아닙니다. 자신이 수고의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포기해 버린 사람은 이미 축복을 다 받아버렸습니다. 많은 기회가 다가와도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씨는 뿌리지 않으면서 요행을 바랍니다. 또 열심히 일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유가 많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자신 앞에 먹을 밥이 왔는데도 불구하고 숟가락질을 하기도 귀찮아합니다(잠 19:24). 자신이 지금 일해야 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일하지 않고 잠만 잡니다. 이불 속에서 놀면서 생각은 많이 합니다(잠 26:14). 하루 저녁에도 빌딩을 수십 채를 지었다 부수었다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향해, 잠언 6장 9절에서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고 권고합니다.

 

(2) 부지럼함을 통한 복을 누림(6)

 

하나님께 축복을 받을 사람들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세상을 시대의 흐름을 파악합니다. 적절한 시기라고 판단 되어지면 열심히 씨앗을 뿌리는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씨앗을 뿌려야할 때 부지런히 쉬지 않고 뿌립니다. 그래서 6절에서 “6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솔로몬은 잠언에서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잠 10:4)고 하였습니다. 자신에게 주신 달란트와 자신의 사업에 부지런히 마음을 두어라고 합니다(잠 27:23).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성공의 기회가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기회를 주신지 모릅니다. 당신이 그것을 믿음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부정적인 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축복을 만한 사람은 믿음의 생활도 축복 받을 만하게 합니다. 심방을 해보면, 벌써 말씀의 축복을 받을 집은 다릅니다. 말씀 앞에서 너무나 정숙하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13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22:13)

 

당신에게 오늘 가장 행복한 일이 있을 것을 기대하길 바랍니다. 당신에게 인생의 최대로 놀라운 일이 있을 것입니다.

 

젊은 시절을 위한 충고(7-10)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인정하고 주어진 상황에서 열심히 사는 것이 최선의 삶을 위한 슬기임을 교훈한 데 이어 본 단락에서 전도자는 인생의 절정기인 청년 시절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해 충고하고 있습니다. 전도자가 특별히 젊은 시절의 삶에 관해 언급한 것은 청년의 때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풍요롭고 아름다운 시기인 동시에 잘못 행할 위험성 또한 높은 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젊은 시절을 위한 전도자의 충고 역시 이제까지 그가 참된 삶과 관련해서 강조했던 바와 일맥상통하는 것으로서 인생의 젊은 날이 덧없이 지나갈 것을 생각하고 주어진 삶을 누리되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을 기억하여 세월을 아끼라는 것입니다.

 

7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 8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 그러나 캄캄한 날들이 많으리니 그 날들을 생각할지로다 다가올 일은 다 헛되도다 9○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10그런즉 근심이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이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검은 머리의 시절이 다 헛되니라(7-10)

 

본문은 젊은 날의 기쁨을 누리되, 모든 행위에 대한 심판이 있음을 기억하라는 내용입니다. 젊음의 활력을 즐기되,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기 전에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해야 합니다. 결국, 젊은 시절의 쾌락과 즐거움도 중요하지만, 인생의 마지막에는 모든 행위에 대한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1) 삶을 즐기라(7-9)

 

참된 삶을 사는 것과 관련해서 특히 젊은 시절에 관한 교훈을 주기에 앞서 전도자는 삶의 기쁨과 아름다움에 대해 언급합니다.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7). 이 구절은 ‘삶에 대한 찬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빛”은 태양 빛을 뜻하는 말인 동시에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자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 즉 살아서 태양빛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자체는 지극히 기쁘고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는 동안 여러 가지 어려움과 슬픔을 만나고 끊임없이 수고해야 하며 결국은 죽음을 맞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욱 적극적으로 삶을 누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조건 속에서 즐겁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 그러나 캄캄한 날이 많으리니 그날을 생각할지로다 장래 일은 다 헛되도다”(8), 사람은 사는 동안 죽음을 절실하게 느끼지 못하고 현재의 소중함을 알지 못합니다. 특히 젊은 시절에는 삶이 얼마나 속히 지나가고 덧없이 끝나게 되는지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를 소중하게 생각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살지 않습니다. 또한 생명으로 충만한 젊은 시절에는 인간의 한계나 불가해한 현실 배후에 있는 창조주의 섭리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시절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인생이 얼마나 연약하고 세월이 얼마나 속히 지나가며 자신이 얼마나 귀한 것을 흘려보냈는가를 아쉬워합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다음과 같이 충고합니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9절). 생명으로 충만한 젊은 시절에 마음껏 삶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을 후회 없이 열심히 살라는 것입니다. 기회가 있을 때 많은 것을 해보고 사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며 주어진 인생을 풍요롭게 하라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하라(9-10)

 

마음과 눈이 원하는 것을 따라 삶을 즐기라고 한 권면이 결코 방탕하게 살라는 뜻이 아님은 이어지는 구절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9). 전도자는 젊은 날을 즐기고 원하는 것을 좇아 행하라고 했던 자신이 전하려는 뜻이 왜곡되지 않도록 한 가지 단서를 붙이고 있습니다. 맘껏 삶을 즐기되,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기억하고 책임 있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삶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맘껏 누려야 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 주어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홀려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산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삶을 누리되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하여 절제해야 한다는 전도자의 충고는 이어지는 구절을 통해 다시 한 번 강조됩니다. “그런즉 근심으로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으로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청년의 때가 다 헛되니라”(10). 이 구절에서 전도자는 두 가지를 충고하면서 그렇게 해야 할 이유를 밝힙니다. 첫째, “근심으로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근심”이란 ‘고민’, ‘고통’을 뜻하는 것으로 인생을 즐기지 못하게 하는 요소들을 떨쳐버리라는 것입니다. 지나친 걱정이나 근심은 삶을 좀먹는 것으로서 적극적인 삶을 방해합니다. 둘째, “악으로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악”이라는 말은 해로운 것을 뜻하는 것으로 참된 삶을 사는 데 해가 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해롭게 하는 모든 것들, 즉 방탕하고 무절제한 생활과 질병, 그리고 죄 등은 삶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결국 “근심이나 악”은 모두 삶을 파괴하고 생명을 해치는 것들로서 전도자가 이런 것들에 빠지지 말라고 당부하는 이유는 삶이 덧없이 지나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와 청년의 때 다 헛되니라.” 여기서 “헛되다”는 말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신속히 가는 젊은 날을 허비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 젊음을 누리는 것, 그것이 최선의 삶입니다.


본문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지혜로운 태도를 강조합니다. 먼저, 가진 것을 나누고 투자하여 미래를 대비하되, 결과를 미리 알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둘째, 삶의 모든 순간을 즐기되, 젊음의 때를 헛되이 보내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넷째, 어둠의 날, 즉 고난의 때가 올 수 있음을 기억하고 미리 대비해야 합니다. 결국, 전도자는 불확실한 미래를 두려워하지 말고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면서도 지혜롭게 미래를 준비하라고 권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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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10-02)


어리석은 자의 행동(2)

전도서 10장 12-20절


 

목사님이 성경 공부 시간에 한국 교회도 미래에 예배당이 술집으로 팔릴 수 있다고 경고하며 중직자들의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하지만 한 집사님이 이 내용을 "교회가 20년 후에 술집으로 팔린다"라고 왜곡하여 다른 집사님에게 전달했습니다. 이로 인해 오해가 발생했고, 목사님은 말의 정확한 전달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말은 가감 없이 전달해야 오해를 줄일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왜곡된 정보는 듣는 사람에게 분노를 일으킬 수 있으며, 공동체 내 갈등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 여호와 경외는 지혜의 최고 경지로 여겼습니다. 지혜의 삶은 또한 단지 세상의 방식을 터득하는 출세의 방식만이 아니라 여호와를 섬기는 신앙의 길이기도 했습니다. 10:12-20은 지혜의 삶이 경계해야 할 우매의 길을 소상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전도자는 형이상학적인 지혜를 추구하는 자가 아니라 일상을 귀히 여기는 실천적인 지혜자라 할 수 있습니다.

 

말이 적을수록 지혜로운 사람이다.(12-15,20)

성도는 말에 신중해야 합니다. 말은 지혜와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거울과 같습니다. 현대 사회는 소셜 미디어와 이메일 등으로 소통이 잦아지면서 부주의하게 말을 쏟아내기 쉽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더욱 신중하게 말을 선택해야 합니다. 자신의 말이 지혜를 드러낼 수 있도록, 불필요한 말은 줄이고 신중하게 생각한 후 말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12○지혜자의 입의 말들은 은혜로우나 우매자의 입술들은 자기를 삼키나니 13그의 입의 말들의 시작은 우매요 그의 입의 결말들은 심히 미친 것이니라 14우매한 자는 말을 많이 하거니와 사람은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나중에 일어날 일을 누가 그에게 알리리요 15우매한 자들의 수고는 자신을 피곤하게 할 뿐이라 그들은 성읍에 들어갈 줄도 알지 못함이니라 ... 20심중에라도 왕을 저주하지 말며 침실에서라도 부자를 저주하지 말라 공중의 새가 그 소리를 전하고 날짐승이 그 일을 전파할 것임이니라(12-15,20)

 

말은 그 사람의 본질을 드러내는 통로입니다. 전도자는 12-15절에서 어리석은 자의 고질병을 지적하는데, 그들의 ‘말’에서 시작됩니다. 12절에서 반의적 평행법을 사용하여 두 부류의 사람이 무엇이 다른지를 설명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말 때문에 다른 사람의 호감이나 먹을 보지만,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말 때문에 망신을 당하게 됩니다. 지혜로운 자는 적절하고 유익한 말을 남기지만 어리석은 자는 자기 파괴적인 방식으로 말을 이끌어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통 지혜의 관점이 그대로 반영된 것입니다(잠 10:21.32: 15:2.7; 집회서 20:13; 21:15-17).

어리석은 자는 말의 실수로 일어나는 여러 과오를 일으킵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은 것을 말할 뿐만 아니라 어리석음으로 시작해서 미친 짓으로 끝난다고 합니다. 자기 말에 자신이 삼켜집니다. 이들은 너무 많이 오랫동안 말할 뿐만 아니라 근거 없이 말합니다. 저들은 본인도 알지 못하는 말을 합니다. 자칭 지혜롭다고 하지만 그는 미래에 무엇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어리석은 자의 수고는 스스로를 지치게 만들 뿐입니다(15). 심지어 본인이 사는 동네도 찾지 못한다며 어리석은 자를 조소합니다(15b). 어리석은 자의 미끈한 말과는 달리 내용 없이 쏟아내는 말과 무지한 말을 꼬집고 있습니다. 지금도 말 때문에 곤욕을 치르는 이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말은 인간의 내면이 구체화되고 형상화된 것으로서 말은 발설자의 인격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중한 말의 중요성이 다시 20절에서 익숙한 속담으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낮 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한국 속담과 유사합니다.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교훈이 신약성서에도 많이 언급되어 있습니다(약 1:26;3:5-8: 요일 3:18), 20절에서 밀담(密談)이 중요한 정치 스파이나 밀고자와 같은 특정 계층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행동에서 말의 신중함(prudence)이 중요하고, 이것은 특히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이 됩니다(전 5:5(6); 잠 10:19-21,32;11:12; 12:18;15:2:17:28; 눅 12:2-3). 이렇게 혀 곧 말의 절제와 신중함을 강조하는 것은 이 역시 지혜와 어리석음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말을 절제하고 말을 아껴 비밀을 유지하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반드시 지켜야 할 지혜입니다.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의 절대 경계란 없기 때문에 말에 있어서 어리석음을 피하고 말의 절제와 비밀 유지를 통해 지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긴장하고 주의할 것을 전도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통치자는 절제와 근면의 덕을 갖춰야 한다.(16-19)

어리석은 사람의 특징은 말이 무절제하다는 것입니다. 그의 말은 미련하게 시작했다가 미치광이처럼 마칩니다. 그는 많은 말을 내뱉지만, 1분 뒤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는 어리석게도 말하는 일에 지쳐서 자신의 마음을 찾아가는 길도 헤매게 됩니다.

 

16○왕은 어리고 대신들은 아침부터 잔치하는 나라여 네게 화가 있도다 17왕은 귀족들의 아들이요 대신들은 취하지 아니하고 기력을 보하려고 정한 때에 먹는 나라여 네게 복이 있도다 18게으른즉 서까래가 내려앉고 손을 놓은즉 집이 새느니라 19잔치는 희락을 위하여 베푸는 것이요 포도주는 생명을 기쁘게 하는 것이나 돈은 범사에 이용되느니라(16-19)

 

이 부분은 부패한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리석은 통치자의 생활양식을 반영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복된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보여줍니다. 전도자는 정의를 행하지 않는 관리들(3:16; 8:11)과 백성들과 종들을 억압하고 독재하는 권력자들(8:2-4; 10:4)에 대하여 불평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그는 다시 그들의 일상적 행동들에 주목하고 있습니다(16-17). 전도자가 지도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평범한 일상에서 발견되는 절제와 근면입니다. 그는 결코 파티나 즐거움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일상적 기쁨을 만끽할 것을 여러 차례 권유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무책임하고 부패한 지도자들을 통해서 본 현실 세계는 ‘서까래가 내려앉는 것’(18)과 ‘집에 물이 새는 것’(18) 같습니다. 지도자들에게 게으름을 경계하고 근면성과 책임성을 갖출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전도자는 왕 혹은 귀족과 같은 지도층을 관심 대상으로 삼으면서 이들의 통치를 축복과 저주의 대상으로 대조하고, ‘어린 아이’(나아르)가 왕이 되는 상황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나아르’가 왕이 된다는 것은 자격이 없는 사람이 불의한 방식으로 통치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기에 ‘어리석은 일’에 속한 것입니다. 통치자가 지녀야 할 또 다른 자질은 독주(毒酒)를 피하는 일입니다(잠 31:4). 술은 통치자(모든 사람)로 하여금 어리석음에 쉽게 빠지게 만듭니다. 16절에서 ‘아침부터 잔치하는 나라여!’라는 표현은 공직의 의무를 게을리하고 노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는 방종을 나무라고 있습니다(사 5:11-12,22). 책임성 없는 귀족들이 꼭두각시 왕을 왕좌에 앉혀놓고, 권력과 향락에 도취되어 있는 상태를 묘사한 것입니다. 반면에 복 있는 나라는 왕의 인품이 고결하고, 먹고 마시는 데 육체의 욕망을 절제할 줄아는 관리들이 섬기는 나라입니다(17).

이어서 빵과 포도주와 돈의 문제를 다루는 19절(“잔치는 희락을 위하여 베푸는 것이요 포도주는 생명을 기쁘게 하는 것이나 돈은 범사에 이용되느니라”) 역시 근면이라는 주제와 맞물려 있습니다. 사실 이 문장은 의미가 모호한 것이 사실입니다. 전도자에게 있어서 빵과 포도주는 인생의 기쁨의 기초가 되고, 돈은 이 둘을 얻게 해주는 수단이 됩니다. 포도주와 빵은 인간의 욕구를 부분적으로 충족시켜주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적절하게 취할 때 인생에 유익합니다(10:16-17). 돈은 부지런한 노동으로부터 나오고 노동은 인생을 진지하고 지혜롭게 살도록 합니다. 그러나 그 돈이 불의하게 얻어지거나 사용될 때(뇌물과 같이) 그 돈은 독약이 됩니다. 이 주제를 16-17절과 연관 지을 때 이 단락은 전체적으로 ‘절제’야말로 지혜로운 사람의 특징이라는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찰을 근거로 할 때 18절(“게으른 서까래가 내려앉고 손을 놓은즉 집이 새느니라”)은 부지런함과 게으름은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을 구별하는 기준이 되므로 근면은 지혜로운 사람의 특징입니다. 은혜로운 사람은 어리석은 행동인 게으름과 태만과 무책임을 피해야 합니다. 이를테면 게으름 때문에 적시(適時)에 대처하지 못해 집이 붕괴되고 심할 경우 어리석은 자의 가정 혹은 개인 집은 비참한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것을 다시 16-17절의 왕과 연결해 볼 때 18절의 집을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왕국과 같은 국가적 범위로 확대한다면 게으름은 여기서 국가의 파멸까지 일으킬 수 있습니다(삼상 20:16: 삼하 7:11; 왕상 12:26;13:2; 사 7:2.13 등). 이와 같은 어리석음은 종류나 분량에 관계없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모든 지혜를 순간에 망칠 수 있는 ‘향유에 빠진 죽은 파리’(10:1)와 같습니다.

전도자는 지혜의 힘보다는 지혜의 유약성의 문제를 강조하고 일상생활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그런 실례들을 들려주면서 지혜를 유지하고 보존하도록 주의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예들은 언제라도 돌출할 수 있는 잠재적인 위험성이 있기에 지혜로운 자라도 늘 조심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혜의 고전적 유익만을 주장하는 전통 지혜라는 측면에서 볼 때 새로운 관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자는 전통적으로 가치를 두고 있는 여러 형태의 지혜로운 삶(말, 근면과 절제 등)에도 가치를 두고 이를 조심스럽게 선택하고 지키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전도자가 제시하는 지혜로운 사람은 오늘 여기, 평범한 일상을 충실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평생 지혜를 좇은 신앙적 지혜의 정수입니다. 전도자가 그리고 있는 지혜로운 사람은 바로 오늘의 평범한 일상을 가장 충실하고 정직하게 절제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 감사하십시오! 그러나 입의 열매가 잘못 맺어질 때는 심판을 자초합니다. 그러므로 한마디 한마디에 신중을 기해서 말하길 바랍니다. 한마디를 할 때마다 3번 이상 생각하고 말을 하면, 말에 대한 실수가 적어질 것입니다. 당신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입 때문에 축복을 비는 입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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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10-01)


어리석은 자의 행동(1)

전도서 10장 1-11절


 

어리석음은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작은 어리석음이라도 큰 가치를 훼손할 수 있습니다. 반면, 지혜는 삶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주고, 성공적인 삶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삶의 기술은 지혜를 바탕으로 연마되며, 다양한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어리석음을 경계하고 지혜를 추구하며, 삶의 기술을 꾸준히 연마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우리는 더욱 풍요롭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 ‘지혜의 힘과 연약함’이라는 주제가 다뤄지고 있습니다. 전도자는 자신의 경험을 기초로 지혜의 이중성, 즉 지혜의 유익함과 무익함을 진술합니다. 지혜의 힘은 크지만 동시에 언제라도 무효화하고 파멸할 수 있기에, 지혜 자체는 보존이 쉽지 않고 영원하지도 않습니다. 전도자는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를 대조하면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바른 선택은 지혜의 척도다(1-4)

참으로 복된 인생은 참된 지혜를 깨닫고 그 지혜를 따라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전도자는 이러한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에 주목합니다. 이는 단순히 세상의 지식이 아닌, 하나님을 섬기는 데 필요한 지혜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지혜는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지혜를 통해 우리는 더욱 풍요롭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그 지혜를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1죽은 파리들이 향기름을 악취가 나게 만드는 것 같이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를 난처하게 만드느니라 2지혜자의 마음은 오른쪽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쪽에 있느니라 3우매한 자는 길을 갈 때에도 지혜가 부족하여 각 사람에게 자기가 우매함을 말하느니라 4주권자가 네게 분을 일으키거든 너는 네 자리를 떠나지 말라 공손함이 큰 허물을 용서 받게 하느니라(1-4)

 

전도자는 지혜가 위협받을 수 있는 인간의 불확실한 세계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비록 무기보다 강할지라도 작은 실수나 과오로 지혜의 힘이 발휘되지 못하기도 합니다. 때문에 전도자는 ‘죄인 한 사람’이 ‘많은 선’을 파괴할 수 있다고 9:18에서 우려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죄인’은 어리석은 선택을 한 사람입니다. 지혜를 소유한 사람들조차도 때때로 실수하여 평생 쌓은 지혜를 한순간에 망가뜨릴 수 있습니다(7:20). 비록 지혜의 힘이 강하고 위대하더라도 그 지혜가 한순간에 망쳐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바른 선택을 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지혜의 위험성, 즉 인간의 지혜란 그렇게 부서지기 쉬운 것입니다. 지혜의 힘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단지 지혜는 위대한 힘과 유약성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전도자는 이것을 10:1 상반절에서 지혜를 “죽은 파리가 실수로 빠져 못쓰게 된 값비싼 향유”로 비유합니다. 아무리 값비싼 향유라 할지라도 죽은 파리 한 마리 때문에 쉽게 버려질 수 있듯이(잠 13:5) 지혜도 작은 실수나 어리석음 때문에 망쳐질 수 있는 것입니다. 2-3절에서도 역시 지혜와 어리석음 사이의 바른 선택을, 4절 역시 신중함이라는 생활 지혜를 충고하는 데서 읽을 수 있듯이, 2-4절의 내용은 바른 선택을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혜자의 행동은 조심스럽고, 성공적이고 도덕적으로 올바르다는 주제는 잠언에서 자주 발견되고 있습니다(잠 12:15; 13:20; 14:3,8; 15:2).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경계를 풀지 않고 바른 선택을 하는 사람입니다. 죽은 파리가 향유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하는 것처럼 일상생활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바른 선택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현실은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하다(5-7)

어리석은 사람은 쉽게 ‘하나님은 없다’거나 ‘나만 외면하신다’고 불평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으신 분인데, 스스로 변하면서 하나님이 변했다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오해는 ‘이러한 하나님은 신뢰할 수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변함없으심을 믿고, 자신의 변화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우리의 믿음과 태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5○내가 해 아래에서 한 가지 재난을 보았노니 곧 주권자에게서 나오는 허물이라 6우매한 자가 크게 높은 지위들을 얻고 부자들이 낮은 지위에 앉는도다 7또 내가 보았노니 종들은 말을 타고 고관들은 종들처럼 땅에 걸어 다니는도다(5-7)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 사람들에게 정의와 지혜에 대한 보상은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선택의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전도자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모순과 부조리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런 현실에 대하여 어떤 행동을 권유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고발하고 비판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가 세상에서 발견한 것은 ‘재난’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대체로 ‘악’으로 번역하는 히브리어 ‘라’를 옮긴 것입니다. 이 단어는 전도자가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가 차별 없이 동일하게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세상의 악’으로 표현한 것입니다(9:3).

세상의 주권자 곧 통치자에게서 큰 죄악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그 ‘죄악’을 6-7절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은 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모순과 부조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리석은 자가 크고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반면 부자들이 오히려 낮은 자리에 앉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과 부자의 대조는 서로 맞지 않는데 이것은 번역상의 문제입니다. 6절에서 ‘부자’라고 번역하기보다는 ‘새번역’의 번역처럼 ‘존귀한 사람’으로 번역해야 문맥상 적절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번역해야 할 것입니다: 우매한 자가 높은 지위들을 얻고 존귀한 자가 낮은 자리에 앉습니다. 또한 종은 말을 타고 고관들은 땅에 걸어 다니는 상황, 이것은 전통 신앙에 따르면 제대로 된 모습이 아닙니다. 전도자는 당시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교육자로서 활동했을 텐데(12:9), 이런 상황을 학생들에게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때문에 그는 묻고 물어야 합니다. 지금의 상황은 죄악이라고! 전도자의 시대는 신분제가 정당한 질서로 자리를 잡았던 시대였던 만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바른 세상이 아니라고 전도자는 고발하고 있습니다.

 

지혜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8-11)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무슨 업적을 남기려는 것보다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실망시킬 수도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안들어 주실 수도 있습니다. 오늘 내 삶이 꼬이고 막힐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변함없는 분이다.’, ‘우리들이 변했을 뿐이다.’라는 것입니다.

 

8○함정을 파는 자는 거기에 빠질 것이요 담을 허는 자는 뱀에게 물리리라 9돌들을 떠내는 자는 그로 말미암아 상할 것이요 나무들을 쪼개는 자는 그로 말미암아 위험을 당하리라 10철 연장이 무디어졌는데도 날을 갈지 아니하면 힘이 더 드느니라 오직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 11주술을 베풀기 전에 뱀에게 물렸으면 술객은 소용이 없느니라(8-11)

 

전도자는 지혜의 유약성에 대한 실례를 담은 일련의 다른 예들을 연속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8-11). 8절의 상황은 구덩이를 파다가 실수로 빠질 수 있는 것처럼 지혜롭고 부지런한 사람도 위험에 빠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다시 벽을 허물 때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또 다른 예로 들고 있습니다. 벽을 허물던 사람이 거기에 숨어있던 뱀을 실수로 건드려 물릴 수 있는 경우입니다. 그런 점에서 8절의 ‘뱀’과 ‘벽’ 역시 모두 위험을 내포한 실제 가능한 상황이며, ‘벽을 허무는 사람’ 역시 그가 비록 벽을 허무는 건축 전문가라 하더라도 위험은 언제나 잠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8절의 두 가지 실례 모두 궁극적으로는 지혜의 유약성을 말하기 위한 것입니다.

다시 9절에서 행동과 예기치 않은 결과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숙련된 기술이나 행동이라도 때때로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9절의 ‘돌을 깨는 사람’은 이스라엘의 건물이 대부분 돌로 건축되는 만큼 당시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숙련된 석공일지라도 자신이 다루는 그 돌로 인해 상처를 입을 수 있는 상황을 말합니다. 역시 장작을 팰 때 실수로 상해를 당할 수 있습니다(신 19:5). 이렇게 8-9절은 자연과 일상에 대한 관찰과 경험에서 터득한 주변 세계의 모습을 간결하고도 인상적으로 표현한 것으로써 전문가, 즉 지혜자에게도 실수가 일어날 수 있고 또 위험에 처할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지혜도 이처럼 위태로울 수 있습니다.

한편 11절은 뱀 주술에 관한 특이한 기술 곧 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뱀 주술의 기술과 경험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실수로 뱀에게서 해를 입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술을 사용할 시기를 놓치면 그 기술마저 불필요하게 된다고 경고합니다. 11절 역시 어떤 전문가라 할지라도 실수나 실패를 할 수 있으며, 자신의 전문성을 제때에 살릴 수 없을 때는 전문가마저도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반대로 비록 독사라 할지라도 적절하게 다룰 수 있다면 결코 유해한 것이 아닌 것처럼 지혜 역시 잘 활용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상황들을 나열한 것은 어떤 전문가에게도 잠재적인 위험이 있는 것처럼 지혜자라도 바른 선택과 긴장을 해야 합니다. 전도자는 지혜의 힘을 잘 알고 있지만 역시 지혜의 허점도 말하고 싶어 합니다.

이 모든 언급들을 종합해 볼 때 전도자에게 있어서 지혜로운 사람은 조심스럽고 자만하지 않고 신중하고 바른 선택을 하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어리석은 사람은 모든 것을 갖췄으나 심지어 지혜조차 얻었다 하여도 작은 실수로 얻은 지혜마저 놓치는 사람입니다.

지혜를 얻기 위해 평생 지혜를 좇았던 전도자, 그가 얻은 지혜로운 삶은 형이상학적이거나 고상한 철학을 기초로 일상을 벗어난 초인(超人)이나 도인(道人)의 것이 아닙니다. 그가 구하는 지혜로운 삶은 지극히 전통적인 지혜와 맥을 같이하며 특히 현실 안에서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친숙한 지혜입니다. 그는 지혜를 얻었다고 하여 자만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지혜와 어리석음은 분명 차이가 있으나 지혜는 언제든지 어리석음의 그물에 빠질 수 있습니다. 지혜를 얻기 어려우나 그 지혜를 망치기도 쉽습니다. 지혜는 어리석음으로 오염될 수도 있습니다. 그가 구하는 일상적 지혜란 평범한 생활에서 조심하고 신중하고 말과 행동에 절제하고 자기 일에 충실하고 근면하며 책임을 다하는 일입니다. 특히 지도자의 경우 그 사람이 지녀야 할 이런 속성의 지혜는 한층 더 엄격한 기준이 요구됩니다.


오늘날 전문성과 경쟁력만이 개인이나 국가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힘이라고 사방에서 외칩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가꾸고 닦아온 신앙과 도덕과 양심과 덕이 참으로 무색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나님 없는 풍요, 지혜 없는 지성과 도덕 없는 경쟁력이 가져올 끔찍한 결과를 참으로 전도자가 본문에서 요구하고 있는 평범한 기독교적 지혜와 기독교적 윤리가 새롭게 우리 모두에게 긴급하게 요청됩니다. 이런 점에서 전도자는 참 지혜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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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09-02)


삶의 불확실성 속에서의 확신

전도서 9장 11-18절


 

국립묘지에 가보신 적 있습니까? 수 많은 젊은이들이 민주화를 위해 산화한 사람들이 많은 묘지가 있습니다. 묘지 중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사람의 묘지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매스컴에 대단히 크게 대두되었지만, 지금은 점점 사람들에게 이름이 잊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은 모든 사람을 계속 기억하지 않고 점점 잊혀집니다.

 

  • 규범(패턴)을 익히면 불행을 피하고 성공할 확률이 높아지지만, 그렇다고 성공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불행이 닥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불행은 누구에게나 언제든 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규범에 어긋나 보이는 사건 역시도 헤벨로서,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일일 뿐입니다.

 

규범(패턴)대로 되지 않는 삶(11-12)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착각에 빠집니다.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이 자신의 노력으로 많은 열매를 거둘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간단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성공은 단순히 능력에만 의존하지 않고,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합니다. 결국, 겸손한 태도와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1○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임함이니라 12분명히 사람은 자기의 시기도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들이 재난의 그물에 걸리고 새들이 올무에 걸림 같이 인생들도 재앙의 날이 그들에게 홀연히 임하면 거기에 걸리느니라(11-12)

 

“해 아래” 세상에서 모든 일들이 항상 인간들의 상식과 이해 가능한 범주 안에서 논리적으로 진행되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뛰어난 재능과 능력을 가진 사람이 행하는 일도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미묘한 요소들에 의해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규범적 지혜에서 패턴을 배우고 따라야 할 이유는 그것이 실패와 재난을 피하고 성공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그 지혜를 소유하고 있는 이들이 “지혜자들”, “명철자들”, “지식인들”로 불립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지혜서에서 지식과 지혜는 동의어입니다. 모두 규범을 알고 따르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규범을 따른다고 해서 반드시 성공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현실 경험을 통해 알게 됩니다. 그것이 반성적 지혜의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빠르고 가볍고 날 새면 달리기를 잘할 것이고, 그러면 경주에서 승리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그리고 강한 자는 전쟁에서 이길 확률이 높습니다. 그렇다고 언제나 그런 조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경주와 전쟁에서의 항상 승리가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토끼가 항상 거북이와의 시합에서 이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반성적 지혜입니다. 11절의 흥미로운 점은 “지혜자들”과 “음식물”을, “명철자들”과 “재물”, “지식인들”과 “은총”을 연결시킨다는 점입니다. 전도서의 반성적 지혜가 대화 상대자로 상정하고 있는 규범적 지혜의 실체를 엿볼 수 있는 표현들입니다. 이 규범적 지혜를 소유하는 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얻게 되는 것은 물질적 부요입니다. 잠언 같은 규범적 지혜에서는 먹을 것이 풍성하여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는 지혜자이고 의인입니다. 반면에 먹을 것이 없고 가난한 현실은 무지와 악의 결과물입니다. 그런데 그런 규범적 지혜에 대해 여기서는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요는 지혜/의와 동의어이고, 가난은 무지/악과 연결되는 이러한 ‘세속적 번영신학’이 전도자의 시대에 널리 퍼져 있던 신앙의 모습인 듯합니다. 비단 전도자가 살던 시대뿐 아니라 신약시대에도 주된 신앙관이었던 것으로 사료됩니다. 예수님의 ‘부자’와 관련한 비유들과 부자 청년과의 대화 등은 전도서가 비판하는 지혜관과 유사한 신앙관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을 독자로 상정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눅 16:19-31)에서 부자가 “음부”에 가고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간다는 이야기는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부자와 거지에 대한 이해를 완전히 뒤집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가장 많이 받은 지혜자이자 의인을 가리키는 표현이 바로 “부자”이고, 그 정반대에 위치하고 있는 사람이 “거지”입니다. 이 관점에서는 죽어서 가장 좋은 대접을 받아야 할 사람이 바로 부자이고, 거지는 “음부”의 맨 아래에 위치해야 마땅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전도서가 그런 것처럼 당대의 규범적 지혜의 가치관을 무너뜨립니다.

그렇다면 삶의 성공을 좌우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코헬렛은 시기와 기회가 바로 그것이라고 합니다. 모든 일에는 때와 기회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우연히 일어난 것 같은 사건들이 실제로는 때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결국 그 모든 일에 하나님의 간섭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시간에 대해서 인간이 아는 바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비극의 때가 언제인지 인간은 예지할 능력이 없습니다(12). 그래서 사람은 비극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인간의 형편을 새와 물고기에 비유합니다. 인간의 한계를 강조하기 위하여 동물세계에까지 확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새들도 물고기들도 사람이 놓은 덫에 걸려서 죽고 맙니다. 살아있는 생명이 중요하고 소망이 있지만 새와 물고기가 죽어야 할 때가 있는 것처럼 인간도 원하지 않는 재앙과 죽음의 때를 만나게 됩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인간 세계에는 예기치 않은 때에 재앙이나 갑작스런 죽음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인간은 이 모든 것을 이해하거나 극복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닙니다(비교. 7:15; 8:14). 이 역시 인간이 인정해야 하는 하나님의 질서요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니 인간은 자신의 능력을 자만하지 말아야 하고, 모든 일에 때를 살펴 행동해야 합니다. 그렇게 조심한다고 해도 우리는 우리 앞에 언제 재앙이 닥칠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삶의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지혜도 헤벨(13-18)

지혜로운 행동은 어리석은 행동보다 훨씬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행동조차 인간의 눈에는 상대적인 평가에 그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상황에 따라 다르게 판단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판단을 넘어서,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보십니다. 결국,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아무것도 아닐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13○내가 또 해 아래에서 지혜를 보고 내가 크게 여긴 것이 이러하니 14곧 작고 인구가 많지 아니한 어떤 성읍에 큰 왕이 와서 그것을 에워싸고 큰 흉벽을 쌓고 치고자 할 때에 15그 성읍 가운데에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그의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그것이라 그러나 그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 16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지혜가 힘보다 나으나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의 말들을 사람들이 듣지 아니한다 하였노라 17○조용히 들리는 지혜자들의 말들이 우매한 자들을 다스리는 자의 호령보다 나으니라 18지혜가 무기보다 나으니라 그러나 죄인 한 사람이 많은 선을 무너지게 하느니라(13-18)

 

‘내가 보았다’라고 단어를 사용하여 13-16절의 새로운 단락을 시작합니다. 저자는 해 아래서 자신이 관찰한 것 중에서 매우 감명적인 스토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14-16절에서 담화의 내용이 소개됩니다. 여기서 전도자는 이 세상에서 위기를 극복하는 데 지혜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실감나게 증언합니다(14-15). 그러나 그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그 인간 지혜의 한계를 선언하고 그와 관련된 한 사례를 제공합니다(15b-16). 그가 관찰한 사람은 가난하지만 지혜로운 남자입니다. 그를 소개하는 데 있어서 ‘가난하다’는 말을 15-16절에서 3회나 사용한 것을 보면 전도자는 지혜가 많은 그가 가난하다는 것이 못마땅한 것 같습니다. 4:13에서도 가난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을 소개한 바 있다. 9장에 소개된 그 지혜자는 자신의 성읍을 큰 왕의 침략으로부터 구출할 만큼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큰 왕’이 그가 살던 성을 공격하였는데 다행히도 그의 지혜 때문에 성읍과 주민들은 그 공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지혜는 위대했고 성을 구한 그는 온갖 칭송을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공로가 있었음에도 성읍 사람들은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 때문에 그를 기억해주지 않았습니다. 지혜가 가난을 극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를 기억하는 일이 그 성읍 지도자들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일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무시해도 좋을 만큼 그의 존재감이 없었던 것인지 모릅니다. 어쨌든 그의 공로는 묻히고 말았습니다. 전도자는 그 이유를 그의 가난으로 돌리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 물질 숭배 사상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당시 인간의 가치가 모두 경제적 가치로 측정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의 지혜와 업적이 가난한 현실 앞에서 무너지고 맙니다. 대신 무능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높은 자리에서 존경을 받고 있으며 반대로 공로를 쌓은 지혜로운 사같은 낮은 자리에 앉거나 버림받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전도자가 본 그 시대의 지혜와 현실의 충돌이요 모순이다. 오늘날 사회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광경입니다.

그러니까 14절은 규범적 지혜에서 패턴대로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경우를 상정한 것입니다. 대단히 막강한 침략 세력과 아주 작고 힘없는 마을. 강한 자가 전쟁에 승리할 확률이 높은 것처럼(11) 이 성읍은 무너질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지혜자”라는 규범에서 벗어난 사람에 의해 이 규범적 지혜의 가능성은 실현되지 못합니다. 마치 욥기처럼 규범(패턴)의 예외에 대해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전도서는 여기서 한 발 더 나갑니다. 이렇게 마치 불가능해 보이는 예외적 현상이 벌어지더라도 그 일마저 곧 잊히고 마는 ‘헤벨’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일으킨 사람마저 곧 잊히고 맙니다(15). 이것은 8:10의 악인들의 악한 행실도 곧 잊히는 ‘헤’일 뿐이라는 전도자의 관찰과 일치합니다. 규범대로 되지 않는 경우(“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 8:14)가 발생하더라도 그것마저 ‘헤벨’입니다. 그러니 세상이 기대하고 예측한 대로 흘러가지 않더라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정의와 공의가 짓밟는 것을 볼지라도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5:8). 지혜가 “힘”(16), “다스리는 자의 호령”(17), “무기”(18)보다 더 선하고 좋지만, 그 지혜마저 멸시당하고 잊히고 무너집니다.


본문에서 강조되는 것은 삶의 불확실성과 지혜의 중요성입니다. 우리는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기회를 포착하고, 지혜롭게 행동해야 합니다. 인간의 노력과 판단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지혜에 의존해야 합니다. 또한, 진정한 성공은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는 가치에 달려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결국, 우리의 삶에서 지혜를 구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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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09-01)


장래에 대한 지혜(1)

전도서 9장 1-10절


헬리 나우웬(Henri Jozef Machiel Nouwen, 1932-1996)은 ‘죽음이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 중에 하나’라고 하였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인생에게 참으로 가장 중대한 문제입니다. 죽음을 잊으려 하거나 무시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다고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죽음은 어떤 의미입니까? 어떻게 준비하고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 솔로몬은 사람이 만든 철학에 빠져드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인생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해줍니다. 의인과 악인, 선인과 죄인의 결국이 똑같습니다. 그래도 산 자에게 소망이 있음은 자신이 죽을 줄 알기 때문입니다. 해 아래서 사는 동안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사는 것이 자신이 수고하고 얻은 몫입니다. 스올에는 일도 계획도 없으니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죽음(1-3)

죽음보다 더 힘든 것은 아무런 소망이 없이 고난 중에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 모든 사람들은 죽음을 피해 갈 수 없지만,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 가운데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위해 하나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셨음을 알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합니다.

 

1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 본즉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들의 미래의 일들임이니라 2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 선한 자와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아니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3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이것은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1-3)

 

솔로몬은 인생의 문제에 대해 관찰하고 성찰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진리를 발견합니다. 미래의 일을 알 수 없지만, 오직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세상만사가 모두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것처럼, 사람이 죽고 사는 것 또한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솔로몬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진실을 보게 하는 세 가지 열쇠를 제공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주권입니다(1). 둘째는, 죽음의 확실성입니다(2,3). 마지막으로, 인간의 전적 부패했다는 사실입니다.

 

(1) 하나님의 주권(1)

 

솔로몬은 사람들의 삶에 대한 실상을 깊이 살펴보면서, 깨달은 사실은 인생을 주장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말합니다. 인생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고 사람은 아무도 자기 앞일을 알지 못하지만, 모든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상관없이 죽임이라는 똑같은 운명에 처한 것만은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모두 다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1)는 고백은 하나님께서 만사를 창조한 분이실 뿐만 아니라 주권적으로 역사하는 분이심에 대한 고백입니다. 솔로몬은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사람의 행위에 따른 심판과 연결해서, 사람이 장차 사랑을 받을지 미움을 받을지도 역시 하나님의 주관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이 역시 인간의 한계에 대한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2절부터 다루는 ‘죽음’이라는 주제를 설명하기 위한 서론 역할을 합니다.

 

(2) 인간의 운명(2-3)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주신 두 가지가 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은 ‘하루 24시간(時間)’을 주시고, 그리고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았던지 마지막은 ‘죽음’이라는 사실입니다. 모든 사람은 공평하게 죽음 앞에 섭니다. 이런 것까지도 불공평하면 세성은 정말 살맛 안 날 것입니다. 솔로몬은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라고 선언합니다. 인간의 기대와 달리, 의인이나 악인이나 동일한 종말을 맞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는 2장에서 이미 언급한 것으로(2:14), 인간이 그 삶과 상관없이 모두 동일하게 운명적 종말인 죽음을 맞는다는 한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죽음을 피하지 못하지만, 모두가 똑같은 죽음을 맞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인과응보의 원리’에 따라 의인은 복을 받고 악인은 벌을 받아야 한다는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뿐 아니라(8:11), 더 나아가 악인이 의인의 상을 받고 의인이 악인의 벌을 받는 모순도 일어납니다(8:14). 솔로몬은 이러한 인생의 모순을 설명하기 위해 다섯 개의 평행구(의인/악인, 선한 자/죄인, 깨끗한 자/깨끗하지 아니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제사를 드리지 않는 자, 맹세하는 자/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를 통해 대조되는 인생의 양식을 묘사합니다. 처음 두 개는 도덕적인 것이고, 나머지 세 개는 종교적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죽음을 또다시 부각하고자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3)라고 말합니다. 의인이나 악인이나, 제사에 충실한 자나 충실하지 못한 자나 동일하게 죽음으로 마친다는 사실이 전도자에게는 ‘악한 것’으로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솔로몬은 도덕적 측면이 아니라 신학적 측면에서 인간의 한계를 악한 것으로 인식합니다. 의인이 복을 받고 악인이 벌을 받아야 하는 창조 질서에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죽음 조차도 불공평하다면, 재산의 많고 적음에 따라, 오래살고 적게 산다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그러나 공평하신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이러한 부분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대하십니다. 인생의 최종적인 목적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미래의 최종적인 것은 ‘사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래 삶에 대한 가치(4-6)

살아가다 보면, 정말로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과 극한 공포가 밀려올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극단적인 방법으로 죽음을 선택해야 합니까? 솔로몬은 “산 개가 죽은 사자 보다 나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죽은 사람들을 ‘다시’라는 소망이 없지만, 살아있는 사람들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소망이 남아 있습니다. 생명이 있는 동안은 소망은 살아 있습니다.

 

4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 5산 자들은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며 그들이 다시는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니라 6그들의 사랑과 미움과 시기도 없어진 지 오래이니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 중에서 그들에게 돌아갈 몫은 영원히 없느니라(4-6)

 

모든 사람의 결국은 죽음이라는 인생이 비록 한계를 갖고 있지만, 살아있는 자는 죽은 자에 비해 소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4)라는 속담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자가 죽은 자보다 낫다라는 의미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표현은 모순적인 표현입니다. 고대 근동지역에서 개는 매우 천박하고 멸시 받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사용됩니다. 반면에 ‘사자’는 품위 있고 존경 받는 고귀한 지위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삶’과 ‘죽음’이라는 수식어가 이 둘의 지위를 뒤바꿔 놓은 것입니다. 그 이유를 5절에서 “산 자들은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며 그들이 다시는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니라”라고 설명합니다. 솔로몬은 ‘산 자’가 ‘죽은 자’보다 더 나은 차이를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지적인 능력’입니다. ‘산 자’는 아무리 지혜롭지 못해도 자신이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죽은 자는 그 어떤 지적인 의식도 없습니다. 여기에는 전도자의 실질적인 가치관이 반영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인생의 기회’입니다. 죽은 자는 상을 받고 그 이름이 기억되는 북을 누릴 기회가 다시 없다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사랑과 미움과 시기’라는 인간관계의 형성 고리 조차 없어진 죽은 자의 운명과 그들에게 돌아갈 ‘몫’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통해 더욱 강조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세상의 흐름에 살아가야 합니까? 모든 것을 포기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독교를 믿음에도 죽음을 향해 간다면 다른 종교와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포기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지혜로운 사람은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고 소개합니까?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원하는 것입니다.

 

미래 삶에 대한 누림(7-9)

솔로몬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최선을 다해 행복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정의했습니다. 이제는 인생을 마음 것 즐기라고 합니다. 이 즐거움은 육신적인 쾌락을 말하진 않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에 꿈과 희망을 가지고 일을 이루는 행복을 느끼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곳은 바로 가정이었습니다. 미래가 불확실하고 불안스러울 때, 가정에서 위안을 얻는 곳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가정은 이 세상에 존재한 천국의 모형입니다.

 

7○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8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아니하도록 할지니라 9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7-9)

 

본문에서 기쁨을 누리며 삶을 즐기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음식을 먹고 기쁜 마음으로 마시며, 가족과 함께하는 행복한 순간을 소중히 여기라는 권고가 담겨 있습니다. 인생의 유한성을 인식하고, 현재의 삶을 의미 있게 살아가라는 교훈을 제공합니다. 솔로몬은 가정이 행복을 사람들에게 주는 것인 세 가지를 말합니다.

 

(1) 음식을 통한 즐거움(7)

 

7절에서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너의 하는 일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한 식탁 안에서 밥을 먹는다는 것은 가족의 사랑을 전달하는 장소입니다. 현대는 집안의 식구들끼리도 얼굴을 볼 수 없습니다. 시간이 한결같지 않고, 각자가 따로따로 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가정이 하숙집 같습니다. 같은 형제도 사랑을 나눌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역할이 큽니다. 형제의 사랑을 나눌 수 있도록, 한 식탁에서 식사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한 것입니다. 한 식탁 안에서 가족간에 사랑을 전합니다. 행복을 만들어 냅니다.

 

(2) 가족 간에 나누는 즐거움(8)

 

8절에서 “네 의복을 항상 희게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않게 할지니라”라고 합니다. 솔로몬은 가족들에게 항상 흰옷을 입게 하고, 비싼 향수를 뿌리라고 충고합니다. 오늘날 가정 식구들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고 예쁘게 단장하라는 것입니다. 어느 부모는 자신은 화려하게 꾸미는데, 자녀들은 돌보지 않아 더러운 모습으로 다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적용하면, 정결하게 하고 성령의 능력 안에 살게 하는 것입니다.

 

(3) 결혼 생활에 즐거움(9)

 

9절을 보면,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 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가정은 지상 천국입니다. 당신의 가정이 심각한 문제가 있어서 싸움과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다면, 당신의 가정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입니다. 당신의 가정이 심각한 문제가 있다면 먼저 그것을 치료하실 바랍니다. 가정에서 천국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합니다. 솔로몬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자신의 배우자와 함께 행복하길 원하십니다. 자신이 희생해서 가정을 천국으로 만드시길 바랍니다. 가정은 모든 기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창조하시기 전에 가정을 창조하셨습니다. 가정에서 행복해야만 사회에서도 교회에서도 어디에서나 행복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가정은 천국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까! 자녀들이나 배우자가 가정에서 자신감 있어야 밖에서도 자신감 있습니다.

불안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무엇이 진정한 행복을 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대단한 것이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 먼저 가정을 가정답게 만들어 갈 때, 진정한 행복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신 가정을 통한 진정한 행복을 위해 수고합니다. 또한 그 행복을 지키면서 살아갑니다.

 

미래 삶에 대한 노력(10)

미래에 대한 불안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한국의 상황이 항상 밝지 않다는 점을 인식해야 합니다.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두려움에 갇히지 말고 오늘의 행복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행복은 우연히 찾아오는 것이 아니며, 가족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물질이나 권력으로 가정의 행복을 살 수는 없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가정을 가정답게 만드는 과정에서 이루어집니다.

 

10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10)

 

솔로몬은 인생의 유한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미래를 위해서 수고할 수 있는데, 열심히 수고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노력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인생의 시간은 제한적이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고 열심히 살아가라는 권고입니다. 또한, 죽음 이후의 세계에서는 더 이상 어떤 일도 할 수 없기 때문에, 현재의 삶에서 의미 있는 행동과 결정을 중요시해야 한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결국, 삶의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최선을 다하라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불확실성과 유한성을 깨닫고, 현재의 삶에서 최선을 다해야 함을 배웁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소중히 여기고, 우리의 손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힘껏 하라는 권면이 주어집니다. 인생의 각 순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죽음 이후에는 더 이상 기회가 없으므로, 오늘의 행복을 적극적으로 찾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을 위해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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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08-02)


악인의 형통을 바라보는 자세

전도서 8장 9-17절


 

세상에는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특히 정직하고 순전한 사람들이 고통 받는 사건을 일어나면 보고 있는 것이 힘듭니다. 그 사건이 당하는 입장이라면 참으로 괴롭습니다. 예를 들어서 ‘518광주민주화운동’과 같은 사건을 당하면 정말 괴롭습니다. 더욱이 악을 행한 사람들이 기세등등해서 다니는 것을 보면, 의분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 전도자는 자신의 지혜로 살펴본 모든 것들, 그중에서 악한 것들을 나열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악을 행하는 악인들. 그 악인들에 대한 올바른 심판이 적절히 행해지지 않는 현실, 악인들이 오히려 이 땅에서 장수하고, 의인이 마땅히 받아야 할 복을 악인들이 누리는 (인과응보의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부조리 역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인간의 지혜로 그것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인과응보의 원리로 설명할 수 없는 현실(9-14)

세상에는 불공정한 일이 많고, 악인이 잘되며 의인이 고난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선한 삶을 살아가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 올바른 길을 걷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결국, 불공정한 세상 속에서도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9○내가 이 모든 것들을 보고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마음에 두고 살핀즉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하는 때가 있도다 10그런 후에 내가 본즉 악인들은 장사지낸 바 되어 거룩한 곳을 떠나 그들이 그렇게 행한 성읍 안에서 잊어버린 바 되었으니 이것도 헛되도다 11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12죄인은 백 번이나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또한 내가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를 경외하는 자들은 잘 될 것이요 13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 14○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9-14)

 

전도자는 해 아래 모든 수고의 헛됨을 증명하려고 세상을 살피면서 자기가 찾아낸 모순의 예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전도자는 악의 현실이 실재함을 직시하고(9), 그 악을 바로잡는 인과응보의 원리가 규범적 지혜가 말하는 것처럼 제대로 작동하지 않음을 토로합니다(10-11). 악/죄/무지에 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어야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규범에 경외심(두려움)을 가지고 따르게 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 규범적 원리가 적절히 작동하지 않는 때가 적지 않습니다. 전도자는 불의로 인한 인생의 헛됨을 특별히 악인의 삶 속에서 목격하였습니다. 생전에 성소에 드나들던(10, “거룩한 곳을 떠나”) 악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악행에 대한 심판도 받지 않은 채 죽음을 맞이했고(10-11) 죽은 후 악인들은 제대로 매장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후에는 악인들이 성소에 드나들었던 점이나 거기서 그들이 저질렀던 악한 일들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이와 같이 악인으로 살던 자들이 죽어 장사되고 그 후에도 아무런 심판을 받지 않으니 얼마나 헛된지! 심지어 “죄인은 백 번이나 악을 행하고도”(다시 한 번, 전도자가 예로 드는 경우들은 대부분 규범적 지혜의 원리에서 벗어난 극단적인 예들이다) 잘 먹고 잘살며, 게다가 아주 오랫동안 장수하며 평안을 누립니다(12). 이러한 규범적 지혜의 ‘예외’로 인해 사람들은 규범을 따라야 할 당위성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게 됩니다(11). 전도자는 14절에서 악인의 행위에 따라 징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반대로 의인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고 진술하며, 해 아래서 일어나는 헛된 일을 상기시킵니다. 특히 이 구절에서 헛됨을 강조한다는 것은 원문에서 ‘헌된 일이 있다’(애쉬 체벌)로 시작해서 ‘헛되다’(헤벨)로 끝나는 데서도 나타납니다. 그렇지만 헛된 세상을 관찰하고 세상의 헛됨을 증명하는 전도자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행복이, 하나님을 정의하지 않는 악인에게는 짧은 수명이 징벌로 올 것을 확신하며 거대하고 있습니다(12-13). 12b절과 13절을 접속사 ‘키’에 종속되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잘되며 악인은 잘되지 못하고 장수하지 못한다는 것을 나 역시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백 번이나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는 죄인도 있다.’ 전도자는 규범적 지혜의 원리가 적용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적용되지 않는 현실을 아프도록 직시하며 끔찍한 고통으로 받아들입니다(2:17-21; 4:8; 5:16; 6:1-2), 전도서의 지혜는 시각과 시야를 확장하되 현실을 탈피하거나 초월하지 않습니다.

전도서의 반성적 지혜를 오해하지 않으려면 다음의 것들을 올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1) 반성적 지하는 악의 세계를 지배하는 어떤 존재를 상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절대주권)는 것과 하나님은 선하시다(절대선)는 신학적 명제는, 그렇다면 왜 악한 현실이 존재하며 부당한 고통이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이 신정론의 문제를 풀어가는 현대신학의 방식은 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선하시다’라는 하나님의 절대선을 강조하는 입장을 취합니다. 사탄 등의 악의 세계를 지배하는 주권자를 상정하여, 어떤 불행한 일이나 악한 현실이 벌어지는 이유가 그 ‘악의 주권자’에게 있다고 책임을 전가합니다. 그러나 악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반성적 지혜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우선 욥기는 “사탄”과 같은 악한 세력을 상정하고 있음에도, 불행과 고통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명확히 합니다(42:11). 사탄은 읍의 고난이 시작되는 원인을 제공하지만, 욥기 1-2장에서만 등장하는 조연일 뿐 3장 이하부터는 언급조차 되지 않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언설(38-41장)은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분이 하나님임을 천명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전도서의 반성적 지혜는 잠언의 “음녀”나 욥기의 “사탄” 갑은 존재를 아예 등장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은, 심지어 죽음이나 질병, 전쟁과 미움 등도 하나님의 때에 적절하게 (‘아름답게’) 발생한다고 말합니다(3:1-11). 반성적 지혜는 ‘하나님의 선하심’이라는 개념보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화하고 강조하는 방식으로 신청론 문제를 풀어갑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악하고 부당한 현실은 한 개인의 입장에서는 ‘나쁜 것’(악)이라고 규정할 수 있지만, 영원(올림)이라는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렇게 볼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인과응보의 원칙을 설명할 수 없는 현실은 크신 하나님을 작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을 뿐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2) 반성적 지혜는 규범적 지혜가 틀렸기 때문에 폐기되어야 할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욥 또한 규범적 지혜의 화신으로 묘사되며(욥 1:5), 전도자 역시 뿌린 대로 거두는 원칙에 따라 좋은 것들을 심고 그 결과로 좋은 열매들을 얻습니다(전 2:4-9). 욥기의 반성적 지혜는 (1) 인과응보의 원칙이 항상 적용되는 기계적인 법칙이 아니며, 예외도 존재한다는 점(규범적 지혜의 한계), (2)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인간의 이해 범위를 훨씬 넘어선다는 점(인간의 한계)을 지적합니다. 전도서의 반성적 지혜는 (1) 한 사람의 인생의 범위 안에서는 인과응보의 원칙을 설명할 수 있지만, 긴 시간(영원)의 관점에서는 뿌린 대로 거둔다는 원칙을 모두 적용할 수 없다는 점(규범적 지혜의 한계), (2) 하나님과 창조세계의 영원성(올람)과 인간의 한계성(헤벨)을 대비함으로 인간은 하나님을 다 알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규범적 지혜(인과응보의 원칙)는 여전히 가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뿌린 대로 거두는 원리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훨씬 많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한가지 원리만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규범은 당위로서 가치를 지니지만 그것이 항상 현실화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전도자 역시 규범적 지혜를 잘 알고 있으며, 그 규범적 지혜의 원리대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12-13).

 

인간의 지혜로 이해할 수 없는 사역(15-17)

삶은 불확실성과 고난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기쁨을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작은 것들에서도 기쁨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순간의 행복을 소중히 여기고, 이를 누리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태도를 통해 우리는 어려운 시기에도 긍정적인 마음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15 이에 내가 희락을 찬양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해 아래에는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을 해 아래에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일 중에 그러한 일이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라 16○내가 마음을 다하여 지혜를 알고자 하며 세상에서 행해지는 일을 보았는데 밤낮으로 자지 못하는 자도 있도다 17또 내가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 보니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알아보려고 할지라도 능히 알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알아내지 못하리로다(15-17)

 

전도자는 “마음을 다하여”, “세상에서 행해지는 일”을 살펴봅니다(16). 이 “세상에서 행해지는 일”이 17절에서는 “하나님의 모든 행사”로 나옵니다. 규범적 지혜의 원리(인과응보)로 설명될 수 있는 현상뿐 아니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마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전도서의 반성적 지혜는 하나님의 주권에서 벗어나서 주체적으로 활동하는 악의 존재(사탄, 마귀 등)를 상정하지 않으며 언급조차 하지 않습니다(하나님의 절대주권). 설명할 수 없고 이해되지 않는 이 일들 앞에서 인간은 아무도 지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이해하고 아는 지혜란 헤벨인 인간에게는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반성적 지혜는 규범적 지혜의 ‘교만과 겸손’을 재정의합니다. 규범적 지혜에서는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패턴을 알고 그것에 따라 사는 것이 체데크(의)와 미쉬파트(정의)입니다. 하나님게서 창조하신 이 세계의 규범을 알고자 노력하는 것이 그 규범을 창조하신 분 앞에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겸손한 자세입니다. 반면에, 반성적 지혜에서는 안다고 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어떤 특정 원리로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태도는 하나님을 그 원리 안에 가두려는 교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규범(패턴)을 창조하신 분인 동시에 그 규범 안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인간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이 겸손이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두려움)입니다.


본문에서는 인생의 불공정함과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부조리 속에서도 선한 삶을 살아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악인이 잘되고 의인이 고난받는 현실을 받아들이며, 기쁨을 찾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고 자신의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우리는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도 올바른 길을 선택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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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08-01)


권위 앞에선 지혜자(1)

전도서 8장 1-8절


 

세상을 살아가는 데 지혜가 필요합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 앞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특히 아랫사람으로서 올바른 태도를 갖는 것이 복을 받는 비결임을 강조합니다. 솔로몬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는 권위와의 관계 속에서 지혜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복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 패턴과 미래를 예측할 수 없을 때 무엇이 지혜입니까? “왕”이라는 메타포로 표현되는 하나님은 절대주권자로서 그분의 뜻대로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고 하시는 분입니다. 왕의 입에서 어떤 명령이 나올지 모르는 것처럼, 죽음이나 전쟁 등의 재앙은 언제 닥칠지 모릅니다. 언제든 나쁜 일이 생길 수 있음을 염두에 두는 것이 지혜입니다.

 

절대주권자 앞에서의 지혜로운 자세(1-4)

진정한 지혜는 우리의 삶을 밝히고, 복잡한 상황에서도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현대 사회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우리는 매일 수많은 선택과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이때 지혜로운 판단이 필요한 이유는, 단순히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을 어떻게 활용하고 적용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지혜를 추구하는 것은 단순한 지식의 축적을 넘어, 삶의 다양한 측면에서 균형 잡힌 시각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1누가 지혜자와 같으며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이냐 사람의 지혜는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의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 2내가 권하노라 왕의 명령을 지키라 이미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였음이니라 3왕 앞에서 물러가기를 급하게 하지 말며 악한 것을 일삼지 말라 왕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을 다 행함이니라 4왕의 말은 권능이 있나니 누가 그에게 이르기를 왕께서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수 있으랴(1-4)

 

1절의 “누가 지혜자와 같으며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이냐”는 질문에는 상반되는 두 대답이 가능합니다. 첫째, 1a절을 1b-8절에 연결하지 않고 7:23-29에 잇따른 질문으로 본다면, ‘지혜자는 없다’가 답입니다. 8장의 마지막(16-17)에서도 지혜자가 없다고 말하고 있으므로 1절에 같은 내용을 반복, 강조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둘째, 1a절을 1b-8절에 연결해서 읽는다면, 1a절은 지혜자에게 ‘왕의 명령을 지키라’는 조언하는 머리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8절까지 의미상 무리가 없으며, 8장의 끝인 16-17절과는 상반되는 내용으로 시작하고 끝나는 것으로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두 해석은 전도서 전체의 문맥에서 봐도 다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전도서에서 지혜의 유익과 지혜의 한계를 둘 다 논하기 때문입니다. 첫째 해석은 전도서 전체에서 반복하는 인간이 가지는 지혜의 한계를 설명한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둘째 해석은 지혜자에 대한 조언과 유익의 논의로 읽을 수 있습니다. 1bc절은 지혜로 인해 지혜자에게 생기는 유익과 변화에 대한 설명입니다. 전도자는 지혜가 사람의 얼굴을 빛나게 하고 굳은 얼굴(1; “얼굴의 사나운 것”으로 번역됨)을 부드럽게 풀어준다고 설명합니다. 얼굴의 광채와 부드러움은 지혜를 통해 분별력과 통찰력을 얻어 나타나는 긴장되지 않은 느긋함, 너그러움, 자유, 평안함 등을 표현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얼굴의 광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온 것에 대한 표현으로도 기술되었습니다(출 34:29; 행 6:15). 지혜가 자기를 소유한 자를 높여주고 영화롭게 해준다는 내용과 의미상 유사하게 연결된다고도 볼 수도 있습니다(잠 4:8-9).

잠언과 전도서 모두 “왕”의 이미지를 두려운 절대주권자로 묘사합니다. 그 왕은 사자만큼 무서운 존재이고(잠 20:2), 쳐다보기만 해도 “모든 악을 흩어지게”합니다(잠 20:8). “악인들을 키질하며 타작하는 바퀴를 그들 위에” 굴리고(잠 20:26), “사람의 깊은 속”을 모두 헤아려 보시는 분이라 절대 속일 수 없는 분으로 묘사됩니다(잠 20:27). 이 왕이 무엇을 싫어하는지,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 잠언은 상세히 묘사합니다: 다툼(잠 20:3), 게으름(4), 모략(5), “한결 같지 않은 저울추와 한결같지 않은 되”(10), “잠자기”(13), “속이고 취한 음식물”(17), 한담과 비밀 누설(19), 부모를 저주하는 것(20) 등을 싫어하고, 반면에 인자함과 충성됨(6), 올바른 품행과 정직(11), 지혜로운 말(15) 등을 사랑합니다. 전도서의 “왕” 역시 자신의 마음대로 명령과 처분을 내릴 수 있는 “권능”(쉴톤)을 가진 존재입니다. 아무도 “왕께서 무엇을 하시나이까”라고 물을 수 없습니다(전 8:4). 그러나 그 왕이 어떤 명령을 내릴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싫어하는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이 잠언과의 차이입니다. 이것은 반성적 지혜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절대주권)과 하나님의 선하심(절대선) 중에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강조점을 두기 때문입니다. 절대주권자 앞에서 겸손한 태도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정하신 규범과 창조세계의 원리(“사물의 이치”)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어느 누구도 지혜자라 할 수 없습니다(1). 그렇기에 인간은 절대주권자의 “입”에 주목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왕의 입을 지키라’(“왕의 명령을 지키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명령을 잘 지켜야 한다는 표면적인 의미와 더불어 어떠한 명령이 나올지 모르니 주의하라는 뜻을 내포합니다. 전도자는 왕에게 순복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맹세 때문이라고 합니다(2). 여기서 ‘하나님의 맹세’는 청중이 왕에게 순종할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약한 맹세나, 혹은 하나님이 다윗왕에게 그와 그의 후손을 지키신다고 약속하신 예(시 18:19-37)처럼 하나님께서 왕에게 약속하신 맹세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왕 앞에서 지혜로운 태도는 무엇입니까? 왕 앞에서 두려운 마음으로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고(“물러가기를 급하게 하지 말며”) 악한 것을 일삼지 않는 것입니다(3). 왕은 자신의 마음대로 하는 존재이며(3), 인간은 누구도 그분께 왜 그렇게 하시냐고 이유를 따져 물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4). 잠언과 전도서가 동일한 혹은 유사한 어휘를 사용한다고 해서 그 의미마저 같은 것은 아님을 파악하는 것이 성경의 지혜(규범적 지혜와 반성적 지혜)를 이해하는 길입니다. 따라서 전도서의 표현을 잠언으로부터 의미를 도출하려거나, 전도서가 설명하고 있지 않은 빈자리를 잠언의 표현에서 끌어와서 이해하려는 시도는 방법론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장래 일을 알지 못할 때의 지혜(5-8)

인생에서의 불확실성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자세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미래를 예측하고 통제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현실은 종종 우리의 계획과는 다르게 흘러갑니다.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지혜입니다.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더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고, 예상치 못한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습니다.

 

5명령을 지키는 자는 불행을 알지 못하리라 지혜자의 마음은 때와 판단을 분변하나니 6무슨 일에든지 때와 판단이 있으므로 사람에게 임하는 화가 심함이니라 7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8바람을 주장하여 바람을 움직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사람도 없으며 전쟁할 때를 모면할 사람도 없으니 악이 그의 주민들을 건져낼 수는 없느니라(5-8)

 

명령에 순복하면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익이 있습니다. 5절의 “명령”은 ‘계명’으로 자주 번역되는 말이며, “불행”은 ‘위험’, ‘재앙’ 등을 의미합니다. 여기 5절의 ‘명령’은 2절의 ‘왕의 말’과 동일하게 이해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계명’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5절의 표현(“명령을 지키는 자는 불행을 알지 못하리라”와 “지혜자의 마음은 때와 판단을 분변하나니”)은 잠언을 연상케 하는 규범적 지혜 어휘를 구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1-4절과 마찬가지로 독자들에게 익숙한 ‘잠언스러운’ 표현으로 주의를 환기합니다. “때”(에트)는 어떤 일이 발생하는 적절한 시간을 가리킵니다. 지혜서 안에서는 각각의 일들이 발생하도록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을 의미합니다. 지혜로운 자는 인간 왕의 권세나 하나님의 권세에 복종하면서 “때와 판단”(5,6)에 대한 분별력과 통찰력을 키워 대처할 수 있어야 합니다. “판단”으로 번역된 ‘미쉬파트’는 주로 ‘의’, ‘정의’, ‘재판’, ‘심판’ 등으로 번역되는데, 어근 ‘샤파트’는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올바른 판단이란 지혜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그분이 창조하신 규범에 맞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의’이고 ‘정의’이고, 올바른 재판이자 심판입니다(잠 2:8,9; 8:20; 12:5; 13:23; 16:8,10,11,33; 17:23;18:5; 19:28; 21:3,7,15; 24:23; 28:5; 29:4,26). 그러나 만일 “때와 판단을 분변”하는 것이 지혜자의 특질이라면, 전도서의 관점에 따르면 어느 누구도 지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실상 사람은 언제가 적절한 때인지, 어떤 방법이 적절한 방법인지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알지 못함의 수준이 아니라 사람 능력의 한계를 나타냅니다. 전도자는 7-8절에서 다섯 가지 예를 들어 사람이 가진 지혜와 능력의 한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전도자는 모든 것에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있음을 이미 천명했습니다(3:1). 그러나 문제는 헤벨인 인간은 그 때가 언제 임할지 예측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3:11). 첫째, 사람은 장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도 없고 어떻게 일어날지 예측할 수도 없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사람을 초조하고 근심하게 만듭니다. 둘째, 자연을 다스릴 능력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바람을 불게 할 수도, 바람을 붙잡아 맬 수도 없습니다. 자연이 반응을 보이고 순종하는 경우는 오직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나타나시거나 명령하시는 때뿐입니다(시 114:5-8). 셋째, 어느 누구도 자기의 생명과 죽음을 지정할 수 없습니다. 생명은 온전히 하나님에게서 나왔으며 생명의 시작, 지속, 연장, 끝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영역입니다. 넷째, 전쟁과 같은 재앙이나 위기를 몰고 오는 환경을 미리 대피할 자도 없습니다. 다섯째, 사람은 자기의 실수나 악에서 스스로 건질 수 없습니다. 실수나 죄의 결과는 그것을 행한 자(8, “그의 주민들”)를 떠나지 않습니다. 전도서의 반성적 지혜는 헤벨로서의 인간의 한계성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 지혜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게서 정하신 패턴을 파악할 수 없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없는 경우들이 많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을 설명하려고 하지 않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지혜자의 태도입니다.


본문은 지혜의 중요성과 권위에 대한 존중을 강조합니다. 지혜는 우리의 판단을 밝히고, 복잡한 상황에서도 올바른 길을 안내합니다. 또한, 사회의 법과 규칙을 따르는 것이 공동체의 안전과 조화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임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는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도 인내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결국, 진정한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인도를 통해 이루어짐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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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07-02)


지혜의 탐구와 한계

전도서 7장 15-29절


관광을 많이 해본 사람들은 소지품이 많으면 여행을 힘들다는 것을 합니다. 특히 해외여행을 하면서 물건이 많으면, 관리를 매우 힘들고, 이동 비용도 많이 들고, 세관 통과하는데 복잡하다는 것을 압니다. 여행을 많이 한 사람은 꼭 필요한 물건만 가지고 다닙니다. 간단하게 다녀야 여행이 편안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으면 부러워 보입니다.

 

 

  • ‘인간의 한계’라는 주제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전도자는 지혜를 찾고 행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합니다. 참된 지혜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의 크심과 놀라우신 손길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나침에 대한 주의(15-18)

인생은 여러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지혜를 구하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됩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균형을 이루기를 소망합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더 깊은 믿음과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15○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 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16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17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 18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15-18)

 

전도서 7:15-18에 전도자는 지나치거나 과한 것을 조심하라고 경고합니다. 그는 의인과 악인을 예를 들어 지나치게 의인이나 악인이 되지 말고 지나치게 지혜자나 우매자가 되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여기서 의인과 지혜자 그리고 악인과 우매자는 동일시되며, 이는 잠언이나 시편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잠 1:3; 10:11,14: 시 14편). 전도자가 이 조언에서 공통으로 강조하는 것은 ‘지나침’을 버리고 균형을 잡으라는 것입니다. 그가 살펴본 바로는 이 세상에는 멸망하는 의인도 있고 장수하는 악인도 있습니다. 의인과 악인에 대한 전통적인 사고는 ‘의인은 축복을 받고 악인은 저주를 받는다’지만, 전도자는 인간 세상에 질서와 규칙만이 아니라 예외와 모순도 존재한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전도자의 이런 논쟁은 욥과 그의 세 친구의 논쟁과도 유사합니다. 욥은 자신의 결백을 고수하며 자기의 의로움을 주장했으나 엘리후가 지적하듯 인간의 의는 공의롭고 크신 하나님 앞에 논쟁할 거리가 되지 못합니다(욥 33:12-13). 욥의 친구들은 악인과 죄인이 하나님께 반드시 심판을 받는다고 주장했으나(욥 4:7-9) 욥이 지적하듯 세상에는 장수하고 편안히 살다가 여러 사람의 호위 속에 매장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목격됩니다(욥 21장). 마찬가지로, 전도자는 틀에 박힌 사고와 극단에 치우치는 것이 패망과 죽음에 이를 수 있다고 경고하며, 하나님께서 해 아래의 삶에 일어나게 허락하신 기본과 예외를 다 겸허히 수용하라고 조언합니다. 전도자는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태도라고 설명합니다.

 

지혜의 유익(19-22)

지혜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능력을 줍니다. 또한, 인간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배우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타인의 행동을 쉽게 비난하기보다는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반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자기 성찰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인생은 복잡하므로 여러 상황 속에서 지혜롭게 대처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19지혜가 지혜자를 성읍 가운데에 있는 열 명의 권력자들보다 더 능력이 있게 하느니라 20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 21또한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에 네 마음을 두지 말라 그리하면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듣지 아니하리라 22너도 가끔 사람을 저주하였다는 것을 네 마음도 알고 있느니라(19-22)

 

전도자는 한 사람의 지혜자가 마을에 있는 열 명의 권력자보다 더 능력이 있다고 말하며 지혜가 권력보다 훨씬 뛰어남을 밝힙니다. 해 아래 세상에는 권력, 지위, 재물, 학식, 건강 등 지혜에 비교될 수 없는 것들이 주목을 받고 그 힘을 발휘하는 듯 보이지만, 전도자는 지혜가 이것들보다 더 뛰어나고 사람들에게 유익을 준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지혜가 의를 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지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전도자는 완전한 의인도, 완전한 악인도 없음을 언급하면서 완전한 지혜자가 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지적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누구나 때로 타인을 자기 맘대로 평가하고 험담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설령 다른 이가나에 대해 섣부른 소리를 하고 험담을 한다 해서 격분할 이유가 없습니다. 만약 분노하여 거기에 반응을 보인다면 도리어 우매와 죄악에 빠지게 됩니다. 지혜가 있다 하더라도 혹은 의와 선을 행한다 하더라도 죄나 실수에서 완전히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매달리며 그의 뜻을 분별하여 살려는 의지,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태도를 삶의 모든 행동의 기본이자 시작으로 삼아야 합니다.

 

지혜의 탐구(23-29)

인생의 진정한 가치와 지혜에 대해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좋은 이름이 기름보다 귀하고,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을 강조하며,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아야 합니다. 또한, 지혜는 세상의 무상함을 깨닫게 하고, 삶의 역설적인 진리를 이해하게 합니다. 모든 일에는 정해진 때가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고 받아들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결국, 지혜로운 삶은 어려움 속에서도 평안을 찾는 것을 의미합니다.

 

23○내가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하며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 하였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 하였도다 24이미 있는 것은 멀고 또 깊고 깊도다 누가 능히 통달하랴 25내가 돌이켜 전심으로 지혜와 명철을 살피고 연구하여 악한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요 어리석은 것이 얼마나 미친 것인 줄을 알고자 하였더니 26마음은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은 포승 같은 여인은 사망보다 더 쓰다는 사실을 내가 알아내었도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는 그 여인을 피하려니와 죄인은 그 여인에게 붙잡히리로다 27전도자가 이르되 보라 내가 낱낱이 살펴 그 이치를 연구하여 이것을 깨달았노라 28내 마음이 계속 찾아 보았으나 아직도 찾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 천 사람 가운데서 한 사람을 내가 찾았으나 이 모든 사람들 중에서 여자는 한 사람도 찾지 못하였느니라 29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23-29)

 

전도자는 “지혜가 나를 멀리 하였도다”(23)라며 통탄하는데 이는 인간으로서 지혜를 얻기에 한없이 부족함을 실감했기 때문입니다. 전도자는 지혜를 찾고자 탐구하고 살폈으나 지혜는 멀리 있고 그 깊이가 깊어 발견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전도자는 왜 이렇게 지혜를 찾으려고 애습니까? 그 이유는 그가 비록 해 아래 헛된 세상에서 살지만 지혜의 가치와 유익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지혜에 대한 가치와 탐구는 옵기 28장에서도 유사하게 기록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진귀한 보물의 가치를 알고 있으며 그 보물이 묻혀 있을 만한 곳을 알기에 산이든 강이든 동굴이든 목숨을 걸고 찾아갑니다. 그들은 보물을 채취하는 방법도 알고 기술도 갖고 있다. 반면 지혜는 이런 보석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진귀하지만 사람이나 동물에게나 다 감추어져서 찾을 수가 없습니다. 지혜를 찾는 방법도 기술도 사람에게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혜는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전도자는 지혜를 찾는 것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다고 시인하였습니다(23-24). 이 말은 결국 지혜를 찾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함을 암시합니다. 욥기 저자 또한 인간에게 숨겨진 지혜가 오직 하나님께 드러나 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는 특히 하나님의 창조 사역 때 하나님이 지혜를 세우셨고 지혜를 선포하신 점을 드러냈고, 결론적으로 지혜란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나는 데 있다고 선언했습니다(욥 28:28). 전도자는 지혜와 세상의 이치를 찾고 악이 어리석으며 우매는 미친 것임을 알려고 무척 노력하였습니다(25; 1:17; 2:12). 물론 이것의 결과도 헛되고 바람을 잡는 것과 같다고 전도자는 이미 1:17에서 진술했습니다.

 

이제 여기서는 전도자 자신이 그런 노력 끝에 발견한 것을 제시함으로써 듣는 이나 독자에게 다시금 악의 어리석음과 우매의 광기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전도자가 발견한 것은 죄인을 유혹하여 사망으로 이끄는 여인의 존재였습니다(26). 그는 이 여인의 꾐에 빠진 것이 죽음보다 더 쓰다고 말합니다. 이는 죄가 죽음보다 더 치명적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전도자가 설명하는 이 여인은 잠언에서 종종 소개하는 음녀와 흡사합니다. 이 음녀는 문자적으로 음란한 여인일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매’의 비유적인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음녀와 같은 우매는 달콤한 말과 적극적인 태도로 상대에게 다가갑니다(잠 5:3-4; 7:13-21). 그러나 우매의 마음은 새나 짐승을 잡는 올무와 그물 같아 미끼를 던져놓고 기다렸다가 상대방이 걸려들기만 하면 꼼짝 못하게 낚아챌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음녀인 우매의 행동(손)은 죄수를 묶는 포승줄과 같아 상대방이 죄에 옭매여 벗어나지 못하게 단단히 잡아둡니다. 이때 전도자는 우매에게 다가간 자는 이미 죄인이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우매에게 간 자는 하나님 앞에 선한 자(26: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로 번역됨)가 아니라 자신 앞에 선한 자, 즉 자신에게 즐거움이 되는 것을 좇는 자입니다. 여호와 경외를 떠올리며 우매의 유혹의 손짓을 뿌리칠 수 있었으나 그 손짓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육신의 욕심과 겉으로 보이는 우매의 유익을 쫓아온 자는 우매에게 붙잡혀 죄악의 먹잇감이 될 것이 자명합니다(잠 5:5-6).

전도자는 계속적으로 세상의 이치를 탐구하면서 지혜를 찾은 자를 발견하려 했으나 그런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는 천 명의 남자 중 한 명을 찾았지만 여자는 한 사람도 찾지 못했다고 진술합니다. 이 말을 통해 전도자가 남녀 사이의 차별화를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확실한 것은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서 지혜를 찾은 자가 드물고 대부분 죄와 우매에 붙잡혀 있다는 점입니다. 여호와 경외하는 마음과 분별력을 가지고 조심하지 않으면 지혜를 찾으려다 우매의 올무에 걸려 죄와 사망의 길로 빠지기 쉽습니다. 전도자는 자신이 탐구하여 찾아낸 결과를 계속 진술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29). 전도자는 욥기 저자처럼 창조의 시간(28:23-27)까지 되돌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올바르고 정직하게 만드셨지만, 사람이 죄를 짓고 하나님 눈에 정직한 대로(왕상 11:38)가 아니라 자기 눈에 정직한 대로(삿 21:25) 계획하고 행하는 어리석고 악한 자가 되었습니다. 전도자도 욥기 저자처럼 참된 지혜란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떠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찾을 수 있고 실천됨(28:28)을 피력합니다.


타인의 행동을 쉽게 비난하기보다는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반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자기 성찰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인생은 복잡하므로 여러 상황 속에서 지혜롭게 대처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상호 이해와 배려를 통해 더 나은 삶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도 강조됩니다. 이러한 교훈들은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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