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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09-02)


삶의 불확실성 속에서의 확신

전도서 9장 11-18절


 

국립묘지에 가보신 적 있습니까? 수 많은 젊은이들이 민주화를 위해 산화한 사람들이 많은 묘지가 있습니다. 묘지 중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사람의 묘지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매스컴에 대단히 크게 대두되었지만, 지금은 점점 사람들에게 이름이 잊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은 모든 사람을 계속 기억하지 않고 점점 잊혀집니다.

 

  • 규범(패턴)을 익히면 불행을 피하고 성공할 확률이 높아지지만, 그렇다고 성공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불행이 닥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불행은 누구에게나 언제든 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규범에 어긋나 보이는 사건 역시도 헤벨로서,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일일 뿐입니다.

 

규범(패턴)대로 되지 않는 삶(11-12)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착각에 빠집니다.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이 자신의 노력으로 많은 열매를 거둘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간단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성공은 단순히 능력에만 의존하지 않고,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합니다. 결국, 겸손한 태도와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1○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임함이니라 12분명히 사람은 자기의 시기도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들이 재난의 그물에 걸리고 새들이 올무에 걸림 같이 인생들도 재앙의 날이 그들에게 홀연히 임하면 거기에 걸리느니라(11-12)

 

“해 아래” 세상에서 모든 일들이 항상 인간들의 상식과 이해 가능한 범주 안에서 논리적으로 진행되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뛰어난 재능과 능력을 가진 사람이 행하는 일도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미묘한 요소들에 의해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규범적 지혜에서 패턴을 배우고 따라야 할 이유는 그것이 실패와 재난을 피하고 성공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그 지혜를 소유하고 있는 이들이 “지혜자들”, “명철자들”, “지식인들”로 불립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지혜서에서 지식과 지혜는 동의어입니다. 모두 규범을 알고 따르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규범을 따른다고 해서 반드시 성공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현실 경험을 통해 알게 됩니다. 그것이 반성적 지혜의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빠르고 가볍고 날 새면 달리기를 잘할 것이고, 그러면 경주에서 승리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그리고 강한 자는 전쟁에서 이길 확률이 높습니다. 그렇다고 언제나 그런 조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경주와 전쟁에서의 항상 승리가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토끼가 항상 거북이와의 시합에서 이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반성적 지혜입니다. 11절의 흥미로운 점은 “지혜자들”과 “음식물”을, “명철자들”과 “재물”, “지식인들”과 “은총”을 연결시킨다는 점입니다. 전도서의 반성적 지혜가 대화 상대자로 상정하고 있는 규범적 지혜의 실체를 엿볼 수 있는 표현들입니다. 이 규범적 지혜를 소유하는 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얻게 되는 것은 물질적 부요입니다. 잠언 같은 규범적 지혜에서는 먹을 것이 풍성하여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는 지혜자이고 의인입니다. 반면에 먹을 것이 없고 가난한 현실은 무지와 악의 결과물입니다. 그런데 그런 규범적 지혜에 대해 여기서는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요는 지혜/의와 동의어이고, 가난은 무지/악과 연결되는 이러한 ‘세속적 번영신학’이 전도자의 시대에 널리 퍼져 있던 신앙의 모습인 듯합니다. 비단 전도자가 살던 시대뿐 아니라 신약시대에도 주된 신앙관이었던 것으로 사료됩니다. 예수님의 ‘부자’와 관련한 비유들과 부자 청년과의 대화 등은 전도서가 비판하는 지혜관과 유사한 신앙관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을 독자로 상정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눅 16:19-31)에서 부자가 “음부”에 가고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간다는 이야기는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부자와 거지에 대한 이해를 완전히 뒤집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가장 많이 받은 지혜자이자 의인을 가리키는 표현이 바로 “부자”이고, 그 정반대에 위치하고 있는 사람이 “거지”입니다. 이 관점에서는 죽어서 가장 좋은 대접을 받아야 할 사람이 바로 부자이고, 거지는 “음부”의 맨 아래에 위치해야 마땅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전도서가 그런 것처럼 당대의 규범적 지혜의 가치관을 무너뜨립니다.

그렇다면 삶의 성공을 좌우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코헬렛은 시기와 기회가 바로 그것이라고 합니다. 모든 일에는 때와 기회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우연히 일어난 것 같은 사건들이 실제로는 때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결국 그 모든 일에 하나님의 간섭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시간에 대해서 인간이 아는 바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비극의 때가 언제인지 인간은 예지할 능력이 없습니다(12). 그래서 사람은 비극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인간의 형편을 새와 물고기에 비유합니다. 인간의 한계를 강조하기 위하여 동물세계에까지 확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새들도 물고기들도 사람이 놓은 덫에 걸려서 죽고 맙니다. 살아있는 생명이 중요하고 소망이 있지만 새와 물고기가 죽어야 할 때가 있는 것처럼 인간도 원하지 않는 재앙과 죽음의 때를 만나게 됩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인간 세계에는 예기치 않은 때에 재앙이나 갑작스런 죽음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인간은 이 모든 것을 이해하거나 극복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닙니다(비교. 7:15; 8:14). 이 역시 인간이 인정해야 하는 하나님의 질서요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니 인간은 자신의 능력을 자만하지 말아야 하고, 모든 일에 때를 살펴 행동해야 합니다. 그렇게 조심한다고 해도 우리는 우리 앞에 언제 재앙이 닥칠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삶의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지혜도 헤벨(13-18)

지혜로운 행동은 어리석은 행동보다 훨씬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행동조차 인간의 눈에는 상대적인 평가에 그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상황에 따라 다르게 판단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판단을 넘어서,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보십니다. 결국,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아무것도 아닐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13○내가 또 해 아래에서 지혜를 보고 내가 크게 여긴 것이 이러하니 14곧 작고 인구가 많지 아니한 어떤 성읍에 큰 왕이 와서 그것을 에워싸고 큰 흉벽을 쌓고 치고자 할 때에 15그 성읍 가운데에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그의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그것이라 그러나 그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 16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지혜가 힘보다 나으나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의 말들을 사람들이 듣지 아니한다 하였노라 17○조용히 들리는 지혜자들의 말들이 우매한 자들을 다스리는 자의 호령보다 나으니라 18지혜가 무기보다 나으니라 그러나 죄인 한 사람이 많은 선을 무너지게 하느니라(13-18)

 

‘내가 보았다’라고 단어를 사용하여 13-16절의 새로운 단락을 시작합니다. 저자는 해 아래서 자신이 관찰한 것 중에서 매우 감명적인 스토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14-16절에서 담화의 내용이 소개됩니다. 여기서 전도자는 이 세상에서 위기를 극복하는 데 지혜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실감나게 증언합니다(14-15). 그러나 그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그 인간 지혜의 한계를 선언하고 그와 관련된 한 사례를 제공합니다(15b-16). 그가 관찰한 사람은 가난하지만 지혜로운 남자입니다. 그를 소개하는 데 있어서 ‘가난하다’는 말을 15-16절에서 3회나 사용한 것을 보면 전도자는 지혜가 많은 그가 가난하다는 것이 못마땅한 것 같습니다. 4:13에서도 가난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을 소개한 바 있다. 9장에 소개된 그 지혜자는 자신의 성읍을 큰 왕의 침략으로부터 구출할 만큼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큰 왕’이 그가 살던 성을 공격하였는데 다행히도 그의 지혜 때문에 성읍과 주민들은 그 공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지혜는 위대했고 성을 구한 그는 온갖 칭송을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공로가 있었음에도 성읍 사람들은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 때문에 그를 기억해주지 않았습니다. 지혜가 가난을 극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를 기억하는 일이 그 성읍 지도자들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일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무시해도 좋을 만큼 그의 존재감이 없었던 것인지 모릅니다. 어쨌든 그의 공로는 묻히고 말았습니다. 전도자는 그 이유를 그의 가난으로 돌리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 물질 숭배 사상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당시 인간의 가치가 모두 경제적 가치로 측정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의 지혜와 업적이 가난한 현실 앞에서 무너지고 맙니다. 대신 무능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높은 자리에서 존경을 받고 있으며 반대로 공로를 쌓은 지혜로운 사같은 낮은 자리에 앉거나 버림받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전도자가 본 그 시대의 지혜와 현실의 충돌이요 모순이다. 오늘날 사회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광경입니다.

그러니까 14절은 규범적 지혜에서 패턴대로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경우를 상정한 것입니다. 대단히 막강한 침략 세력과 아주 작고 힘없는 마을. 강한 자가 전쟁에 승리할 확률이 높은 것처럼(11) 이 성읍은 무너질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지혜자”라는 규범에서 벗어난 사람에 의해 이 규범적 지혜의 가능성은 실현되지 못합니다. 마치 욥기처럼 규범(패턴)의 예외에 대해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전도서는 여기서 한 발 더 나갑니다. 이렇게 마치 불가능해 보이는 예외적 현상이 벌어지더라도 그 일마저 곧 잊히고 마는 ‘헤벨’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일으킨 사람마저 곧 잊히고 맙니다(15). 이것은 8:10의 악인들의 악한 행실도 곧 잊히는 ‘헤’일 뿐이라는 전도자의 관찰과 일치합니다. 규범대로 되지 않는 경우(“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 8:14)가 발생하더라도 그것마저 ‘헤벨’입니다. 그러니 세상이 기대하고 예측한 대로 흘러가지 않더라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정의와 공의가 짓밟는 것을 볼지라도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5:8). 지혜가 “힘”(16), “다스리는 자의 호령”(17), “무기”(18)보다 더 선하고 좋지만, 그 지혜마저 멸시당하고 잊히고 무너집니다.


본문에서 강조되는 것은 삶의 불확실성과 지혜의 중요성입니다. 우리는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기회를 포착하고, 지혜롭게 행동해야 합니다. 인간의 노력과 판단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지혜에 의존해야 합니다. 또한, 진정한 성공은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는 가치에 달려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결국, 우리의 삶에서 지혜를 구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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