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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22-04)


유다 왕 여호사밧의 통치

 

열왕기상 22장 41-53절


세상에는 많은 길들이 있습니다. 하늘에는 비행기가 다니는 ‘항로’, 바다에는 배가 다니는 ‘해로’, 그리고 육지에는 ‘고속도로’, ‘차량전용도로’, ‘국도’ 그리고 ‘지방도로’ 등이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길이 놓여진 형세에 따라서 ‘고빗길’과 ‘평탄한 길’,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처럼 이름을 붙여지게 됩니다. 이와 달리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에 따라 ‘선한 길’과 ‘악한 길’,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 등으로 길의 형색으로 구분하여 부르기도 합니다. 신앙적으로는 ‘믿음의 길’과 ‘불신의 길’ 그리고 ‘배교의 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길을 가고 있습니까?

 

아합이 아람과 전쟁할 때 함께 참여한 여호사밧은 아람 정예군과 맞닥뜨렸지만,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무사히 돌아옵니다. 하지만 아합은 누군가 쏜 화살에 맞아 죽음을 맞이 합니다. 이렇게 북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선지자를 계속 보내 심판을 경고하셨지만, 여호와께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유다의 아사 왕과 그의 아들 여호사밧은 여호와를 신실하게 섬기는 왕으로 소개됩니다.

 

유다 왕 여호사밧의 통치(41-50)

단순하게 생각하면 믿음 생활이 자신만의 신앙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녀들은 부모의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살펴볼 때, 단순하게 믿음의 모습이 자신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선배들의 신앙적인 열정과 헌신 그리고 목표를 바라보며 자라고 있습니다. 그만큼 기존 세대들의 신앙 태도가 매우 무겁습니다.

41이스라엘의 아합 왕 제사년에 아사의 아들 여호사밧이 유다의 왕이 되니 42여호사밧이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삼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수바라 실히의 딸이더라 43여호사밧이 그의 아버지 아사의 모든 길로 행하며 돌이키지 아니하고 여호와 앞에서 정직히 행하였으나 산당은 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아직도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44여호사밧이 이스라엘의 왕과 더불어 화평하니라 45여호사밧의 남은 사적과 그가 부린 권세와 그가 어떻게 전쟁하였는지는 다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46그가 그의 아버지 아사의 시대에 남아 있던 남색하는 자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었더라 47그 때에 에돔에는 왕이 없고 섭정 왕이 있었더라 48여호사밧이 다시스의 선박을 제조하고 오빌로 금을 구하러 보내려 하였더니 그 배가 에시온게벨에서 파선하였으므로 가지 못하게 되매 49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내 종으로 당신의 종과 함께 배에 가게 하라 하나 여호사밧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더라 50여호사밧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조상 다윗 성에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장사되고 그의 아들 여호람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41-50)

본문에서는 유다 왕 중의 한사람이었던 아사 왕의 아들인 여호사밧의 통치에 대해 간략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1) 등극(41-42)

여호사밧은 앞에서 기술한 북이스라엘 아합 왕이 전사한 아람과의 전쟁에 잠시 등장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아버지 아사 왕과 함께 여호와 앞에 선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북 이스라엘 아합 왕 제 4년(B.C 872)에 등극하게 됩니다. 여호사밧이 등극한 나이는 35세이고, 25년 동안 남 유다를 다스렸습니다. 그는 여호사밧의 뒤를 이어 유다의 왕이 된 아들의 이름을 ‘여호람’, 그 의미는 ‘여호와는 높으시다’는 뜻으로 지었습니다. 아마도 여호사밧이 스스로 여호와를 찬양할 뿐만 아니라 그 아들이 여호와를 높게 받드는 사람이 되기를 바래서 그 아들에게 이 여호람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을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과 동시대를 살았고,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와 여호람이 왕위에 오를 때가지 살았습니다. 여호사밧은 기원전 872년부터 869년까지 3년 동안 그의 부친 아사 왕의 섭정 하에 있었고, 기원전 853년부터 848년까지 5년 동안 그의 아들 여호람과 함께 통치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버지 아사 왕은 그가 늙어서 발에 병이 생겨 통치가 어려워지자 함께 통치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사밧의 실질적인 통치 기간은 33년 정도 됩니다. 여호사밧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수바라 실히의 딸이었습니다.

(2) 여호사밧 왕에 대한 평가(43-44)

여호사밧은 아사 왕과 함께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는 아버지 아사의 모든 길로 행하며 돌이키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 아사가 단호하게 우상숭배를 배격한 정책을 그대로 유지하였습니다.

아사는 조상들이 만든 모든 우상을 없애고 태후가 만든 아세라 우상도 파괴하였으며, 태후까지도 폐위시켰습니다. 하지만 아사도 산당을 없애지는 못하였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열왕기 기자는 부정적으로 말하지 않고,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하였다’(열왕기상 15:14)고 평가합니다.

여호사밧은 올바르게 행동하였지만 산당 제의는 그대로 허용하였습니다. 아사의 경우는 다른 것은 다 완전한데 산당이 유일한 결함이었다면, 여호사밧은 일반적으로 올바르게 행했다고 평가하면서도 산당을 없애지 않은 것을 아사 때보다 문제를 삼습니다. 백성들이 여전히 산당에 가서 제사를 드리고 분향하였기 때문입니다. 산당은 여호와를 위한 제단이 아니라 이방신을 위한 제단이며, 산당을 중심으로 바알이나 각종 우상들을 섬기는 일이 생겼습니다.

비록 아사는 산당을 남겼지만, 자신을 왕으로 세운 태후를 폐하면서까지 강력한 종교개혁을 시행한 것을 하나님께서는 높이 평가하십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이 단행된 유다를 물려받은 여호사밧이 아버지의 개혁을 발판으로 더 앞으로 나아가 산당까지 없애 종교개혁을 완성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을 저자는 아쉬워하는 것입니다.

여호사밧이 이스라엘의 왕과 더불어 화평한 것을 언급하는데, 이것 역시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보기 어려운 결정입니다. 이전의 왕들과 달리 전쟁을 하지 않고 평화롭게 지낸 것은 좋지만,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왕들인 아합과 아하시야와 정략결혼을 통해 결혼동맹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사밧은 아합과 이세벨의 딸인 아달랴와 자신의 아들 여호람을 결혼시켰습니다. 그래서 여호사밧은 아람과의 전쟁에 참여해달라는 아합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호사밧이 아합을 도운 행동에 대해 역대하에서는 선지자 예후는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것이 옳으니이까?’(19:2)라고 비난합니다. 이후에 아합과 이세벨의 딸 아달랴는 자신의 아들 아하시야가 죽은 후 다윗 자손을 모두 멸절시키고, 스스로 여왕이 되어, 6년 동안 유다를 다스리며 바알 신앙을 퍼뜨렸습니다. 악한 아합 가문의 영향력이 유다 가문까지 위태롭게 만든 것입니다. 이런 결과를 통해 볼 때 결혼동맹으로 얻은 평화는 긍정적으로 해석하기 어렸습니다.

(3) 여호사밧의 업적(45-49)

이 부분은 기본적으로 죽음 공식의 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45절과 50절에서는 전향적인 죽음 공식에 해당하는 구문입니다. 여호사밧에 대한 왕의 업적이 다른 왕들보다 길게 언급되고 있습니다. 45절에서 언급된 다른 왕들과 다른 점은 그가 싸움을 잘하는 힘 있는 장수였다는 것과 전쟁을 했다는 것인데, 열왕기에는 언급되지 않지만, 역대하 20장에 따르면, 여호사밧은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과의 전쟁에서 여호와의 도움으로 크게 승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열왕기상에서는 이 부분은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46절에서 그는 아버지 아사 시대에 남은 이방 신전의 남창 제도를 없애버리고, 그곳에 일하던 남창들을 모두 근절시키고 있습니다.

에돔에 왕이 없고 총독이 왕의 역할을 하였다는 것은 에돔을 유다에 부속시켜서 유다에서 총독을 보내어 다스렸다는 의미로 유다의 국력이 강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여호사밧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았기 때문에 유다를 강성하게 해주셨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여호사밧은 다시스에서 선박을 제조하여 무역업을 하려고 시도합니다. 이것은 솔로몬이 하던 일이며, 솔로몬은 무역선으로 많은 금은을 실어 날랐습니다. 하지만 여호사박의 경우에는 이런 시도가 에시온게벨에서 배가 파선되어 실패합니다. 그러자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여호사밧에게 자신과 합작으로 다시 배를 만들어 무역업을 하자는 제안한 히람과 유사합니다. 이것은 같이 무역을 하여 금전적 이익을 나누자는 것입니다.

열왕기에는 거절한 이유가 언급되지 않는데, 여호사밧과 아하시야는 결혼으로 동맹을 맺은 상태지만 경제적인 이익을 나눌 정도로 친밀한 관계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 역대하 20장에서 이 사건에 대해 여호와께서 여호사밧이 악한 왕 아하시야와 교류하는 것을 싫어하셨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20:35-37).

역대기는 오므리 왕종조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열왕기는 여호사밧이 북이스라엘과 교류하는 것까지 문제 삼지는 않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 관계를 설명하는 선에서 그치고 있습니다.

(4) 죽음 공식(50)

여호사밧에 대한 죽음은 전형적인 죽음 공식의 장례 부분입니다. 그가 죽어서 그의 조상 다윗 성에 안장되었고, 그의 아들 여호람이 이어서 왕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여호사밧은 아버지 아사가 시작한 종교 개혁을 완성하고 유지한 인물이며,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북이스라엘과 달리 유다는 두 세대 동안 평화의 시대를 느렸습니다.

그가 남 유다의 왕위에 오른 것은 아합이 왕위에 오른 지 4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그의 통치는 한마디로'여호와보시기에 정직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여호사밧의 통치는 그의 부친 아사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아사의 종교 개혁 정책을 기억합니다(15:9). 그는 그 땅에서 남색하는 모든 자들을 내어쫓고 우상들을 몰아내는 일을 하였었습니다. 여호사밧 역시 아버지의 그 같은 정책을 이어받아 아버지가 다 내어쫓지 못한 남색하는 자들을 그 땅에서 추방하였습니다(46절). 그러나 그 역시 부친과 마찬가지로 산당을 폐하지 아니하고 그 백성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에서가 아니라 여러 산당에서 분향하게 함으로써 불완전한 종교 개혁을 하였습니다.

한편, 우리가 앞에서도 잠시 살펴보았지만. 그는 아버지 아사와는 달리 북 이스라엘과 평화하는 정책을 취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의 부친 아사와 북 이스라엘 왕 바아사 사이에 일평생 전쟁이 있었다는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15:16). 그때 유다는 아람과 손을 잡고 북 이스라엘을 견제하였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정책을 바꾸어 북 이스라엘과 손을 잡고 아람을 치는 일을 하였습니다. 47절에서 언급하는 에돔에 왕이 없었고 섭정왕이 있었다는 말은, 그 나라가 남 유다의 속국이었으며 그곳을 다스리는 왕의 임명을 유다가 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는 야곱과 에서에 관한 예언(창 25:23)이 성취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여호사밧의 또 다른 정책은 배로 무역을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상선들을 건조하고 그것들을 오빌로 보내어 황금과 교환하여 오도록 하는 계획을 추진하였습니다. 여기서 다시스의 선척은 장기간 큰 바다를 항해할 수 있는 큰 배를 의미합니다. 이런 큰 배들이 지중해의 한쪽 끝인 이스라엘 지역에서 지중해의 다른 쪽 끝인 스페인의 다시스까지 운행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큰 상선들을 다시스의 선척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여호사밧의 정책은 솔찍이 솔로몬이 실행했던 계획이었습니다(9:26) 이러한 정책은 여호사밧이 나라의 부를 극대화하려는 경제 정책을 썼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에시온게벨에서 그 배가 파선됨으로 인하여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결코 우연한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역대하 20장 35절 이하는 이 사건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곧 여호사밧이 아합 뿐 아니라 그의 아들 아하시야와 연합 정책을 취하는데 대한 하나님의 경고의 일환이었던 것입니다.

 

아하시야의 통치(51-53)

믿음의 사람들은 경제적인 실익도 계산해야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상태도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보며 교훈을 얻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다시 따라 진행하기 때문입니다.

51유다의 여호사밧 왕 제십칠년에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52그가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의 길과 그의 어머니의 길과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53바알을 섬겨 그에게 예배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기를 그의 아버지의 온갖 행위 같이 하였더라(51-53)

본 성경에는 열왕기가 두 권으로 나눠지지 않았습니다. 헬라어 번역서인 70인역에서는 두 권으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마지막 부분에 소개되는 아하시야 왕의 이야기는 열왕기하에서도 계속 이어집니다. 열왕기상에서는 그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가 나오고, 열왕기하에서는 구체적인 사건들이 언급됩니다.

(1) 등극의 공식(51)

남 유다 왕인 여호사밧이 유다를 지혜롭게 통치하던 17년, 북 이스라엘은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2년 동안 다스립니다. 여호사밧이 참여했던 아람과의 전쟁에서 아합이 죽은 후 바로 아하시야가 왕위를 계승하게 됩니다. 하지만, 상당히 짧은 기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병들어 일찍 죽습니다. 아합의 아들이 왕좌에 등극한 것은, 아하시야의 자신의 의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부친 아합이, 잠시 동안, 여호와 보시기에 겸비한 자세를 취한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총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2) 아하시야의 업적(52-53)

아하시야는 미가야의 진실한 예언을 따라 그 부친의 비참한 죽음을 목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패역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인물로 평가됩니다. 그 길을 아버지의 길과 어머니의 길이며, 또한 여로보암의 길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어머니 이세벨의 길을 따랐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아하시야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북이스라엘의 중심 종교로 바알 숭배를 하고 예배하였습니다. 그이 아버지가 했던 온갖 못된 행동을 그도 따라했다고 합니다. 길을 걸었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로 파멸을 맞이하였던 것처럼, 그 역시 그 길을 걸으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를 격동시키며 파멸을 재촉하였습니다. 유다의 여호사밧이 아버지 아사의 길을 따라가며 여호와의 축복을 받은 것과는 대조가 됩니다.


열왕기상을 통해서 서로 다른 두 왕국을 통해서 전혀 다른 두 행보를 지켜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남북 시대의 역사는 두 길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그 길은 ‘다윗의 길’과 ‘여로보암의 길’, ‘신앙의 길’과 ‘불신앙의 길’에 대한 것입니다. 그 끝에서 번영과 쇠퇴의 결말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 앞에도 여전히 두 길이 있습니다. 당신의 선택과 당신이 아끼는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길은 어떤 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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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22-03)


이스라엘과 아람의 세 번째 전쟁(III)

 

열왕기상 22장 29-40절


차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높은 출력을 내는 엔진의 성능보다 멈추어야할 때 멈출 수 있는 브레이크의 제동력입니다. 차량이 멈춰서야 할 때 멈추지 못하면 사고를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활 속에서도 멈추어야할 때 멈추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멈출 때를 놓친 채 내달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멈추어야할 때 스스로 멈추지 못하면 타인에 의해 멈출 수밖에 없습니다. 멈추어야할 때, 멈추지 못한 것들은 대부분 죄들입니다. 악이 죽음으로만 멈추게 된다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강제로 끌어내려지는 인생이 아니라 노을의 속도로 아름답게 드리운 저녁노을과 같기를 바랍니다.

 

아합에게 불려온 마가야는 그에게 전쟁에 올라가면 여호와께서 죽이기 위한 거짓 예언이라고 말해줍니다. 하지만 시드기야 선지자는 미가야의 예언을 거짓이라고 하면서 때렸습니다. 그리고 아합은 그를 옥에 가두고 죽지 않을 만큼만 물과 떡을 주라고 명령합니다. 결국 아합은 미가야의 경고를 무시하고 아람과 전쟁하기 위해 올라갑니다. 이제 누가 참 선지자인지가 밝혀질 것입니다.

 

변장하고 전쟁에 올라간 아합(29-30)

사람들은 종종 자신을 과장하기 위해 거짓의 가면을 쓰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눈은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감추려고 쓴 가면이 있다면 그 가면을 벗어버리고 있는 모습 그대로 나가야 합니다.

29이스라엘의 왕과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니라 30이스라엘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나는 변장하고 전쟁터로 들어가려 하노니 당신은 왕복을 입으소서 하고 이스라엘의 왕이 변장하고 전쟁터로 들어가니라(29-30)

북이스라엘 아합은 전쟁에 올라가면 죽을 것이라는 미가야의 선탁을 무시하고 남유다 여호사밧과 함께 아람과 전쟁하기 위해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갑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자신이 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말씀까지 합리화 하는 아합은 참 예언자인 미가야에게는 귀를 닫고, 충동의 소리인 시드기야에게는 귀를 열고 반응하고 있습니다.

길르앗 라못은 이스르엘에서 동쪽으로 약 70km 정도 떨어진 요단 동편에 있습니다. 이곳은 왕의 대로와 주요 대간선이 만나는 곳에 전략적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20장 34절에서 아람왕은 이스라엘에게서 취한 성읍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하였지만, 이곳은 아직 돌려주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아합은 앗수르가 힘이 조금 약해진 틈을 타서 아람과 전쟁하여 이곳을 되찾으려고 한 것입니다.

아합은 전쟁 전에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을 따라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상당히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호사밧에게 자신은 변장하고 갈 것이니, 여호사밧은 왕복을 입으라고 합니다. 아합이 변장을 하려는 이유는 미가야의 신탁을 무시하고 전쟁터에 올라왔지만, 마음 한편에 두려움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옷을 입고 다른 사람인 것처럼 가장하면 죽음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대신 여호사맛에게 왕복을 그대로 입으라고 명령한 것은 여호사밧이 자기 대신 적들의 공격 대상이 되도록 만들기 위한 의도였습니다. 아합은 변장하고 전쟁터로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두려움이 있지만, 그 두려움이 자신이 추구할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는 성도들을 향한 모습입니다. 아합처럼 신앙의 가면을 쓰고 입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실제 삶에서는 자신의 왕국을 세우고 사는 종교인은 아닙니까? 혹시 자신에게 아합의 가면처럼 여전히 포장되어 있다면 이제는 가면을 벗어버리고 선명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길 바랍니다.

 

아합만 잡으라고 명령한 아람 왕(31-33)

31아람 왕이 그의 병거의 지휘관 삼십이 명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작은 자나 큰 자와 더불어 싸우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 왕과 싸우라 한지라 32병거의 지휘관들이 여호사밧을 보고 그들이 이르되 이가 틀림없이 이스라엘의 왕이라 하고 돌이켜 그와 싸우려 한즉 여호사밧이 소리를 지르는지라 33병거의 지휘관들이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아님을 보고 쫓기를 그치고 돌이켰더라(31-33)

모든 계획이 아합 왕이 정한 꾀대로 순탄하게 이루어져 간 것처럼 보여 집니다. 이 장면은 아람 군대의 상황으로 아람 왕은 그의 병거 지휘관들 32명에게 특별한 명령을 내립니다. 병거 지휘관들은 아람 군대의 주요 지휘관들로 아람 왕은 그들에게 작은 자나 큰 자와 싸우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 왕과 싸우라고 지시합니다.

아람 왕은 전쟁에서 지휘관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병사들이나 지휘관들 몇 명을 죽이고 잡는 것보다는 왕을 잡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고 확실하게 승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특히 왕이 이끄는 전투에서는 왕이 죽으면, 부대는 그대로 흩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아람 왕의 명령은 미가야가 아합에게 했던 예언과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람 왕을 통해 아합을 죽이려는 계획을 실행하고 계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작전 명령에 지휘관들이 왕복을 입고 있는 여호사밧을 보고,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확신하고 그에게로 돌아서서 싸우려고 달려왔습니다. 여호사밧은 큰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여기서 ‘부르짖다’라고 번역한 동사는 일반적으로 위험이나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여호와께 도움을 요청하며 부르짖을 때 사용하는 것입니다. 여호사밧은 자신이 위험한 상황에 몰라지 여호와께 부르짖은 것입니다. 여호사밧은 여호와를 잘 섬겼고 여호와 보시기에 선한 왕이었습니다.

이렇게 여호사밧이 큰소리로 부르짖을 때, 병거의 지휘관들은 자신들이 쫓고 있던 사람이 이스라엘의 왕 아합이 아닌 것을 확인한 후 추격을 멈추고 돌아섭니다. 여호사밧은 자신의 부르짖음으로 인해 죽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역대하 18장 31절에서는 ‘여호사밧이 소리를 지르매 여호와께서 그를 도우시며 하나님이 그들을 감동시키사 그를 떠나가게 하신지라’라고 말하면서, 여호와의 도움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여호사밧 왕은 여호와의 도움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우연한 화살에 맞아 죽은 아합(34-36)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은 계산하지 않는 우연까지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환경을 의지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가 운명을 결정지었습니다.

34한 사람이 무심코 활을 당겨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맞힌지라 왕이 그 병거 모는 자에게 이르되 내가 부상하였으니 네 손을 돌려 내가 전쟁터에서 나가게 하라 하였으나 35이 날에 전쟁이 맹렬하였으므로 왕이 병거 가운데에 붙들려 서서 아람 사람을 막다가 저녁에 이르러 죽었는데 상처의 피가 흘러 병거 바닥에 고였더라 36해가 질 녁에 진중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어 이르되 각기 성읍으로 또는 각기 본향으로 가라 하더라(34-36)

아합의 잔꾀처럼 이루어져 간 것 같았지만, 돌발 상황이 벌어집니다. 이렇게 여호사밧이 여호와의 도움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난 반면에, 아합은 우연히 어떤 사람이 아합을 맞힐 의도 없이 쏜 화살에 맞습니다. 그것도 가슴 갑옷 솔기 사이에 맞았습니다. 아람 왕의 칼을 위장한 가면으로 피한 아합은 무명의 병사가 쏜 화살에 맞고 맙니다. 무심히 당기고 쏜 화살이 아합 왕의 갑옷 중에도 가슴막이의 아주 조금 여백이 있는 이음새 사이를 뚫고 들어간 것입니다. 여기서 화자는 ‘의도하지 않게’, ‘갑옷 솔기 사이에 맞는다’라는 표현하는데, 이것은 거의 일어날 가능성이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이렇게 아합이 기적에 가까운 확률로 화살을 맞았다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가리킵니다.

아합 왕은 적장의 시선은 피했지만 심파나의 화살을 겨누고 있는 하나님의 시선은 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정교한 갑옷도, 현장에 처세술도 하나님의 시선을 막지 못합니다.

미가야를 통해 들은 여호와의 신탁을 피하려고 왕복을 입지 않았고, 대신 유다 왕을 미끼로 세웠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갑옷까지 꼼꼼하게 입었지만, 여호와께서 날릴 화살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아합이 왕이고 갖은 책략을 갖고 있어도, 세상의 왕이신 여호와의 눈은 피할 수 없었고, 여호와의 지혜를 능가할 수 없었습니다. 아합은 여호와의 명령을 어기고 여호와의 손과 눈을 피하려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였고, 그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전장의 한복판에서 아합의 최후를 알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앞에서 미가야가 예언한 내용이 성취된 것입니다(열왕기상 22:17). 화살을 맞은 아합은 병거를 모는 자에게 자신이 화살을 맞았으니 빨리 전쟁터에서 벗어나라고 명령합니다. 그는 치료를 받기 위해 급히 전장을 벗어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아합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점점 치열해져 그의 병거는 아람 군대 앞에서 마저 오도 가도 못하다가, 저녁 무렵에 결국 아합은 병거 바닥에 많은 피를 흘리고 죽게 됩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무참히 패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아합의 마지막 모습은 참혹합니다. 죽음을 피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매우 고통스럽게 하루 종일 피를 흘리고 죽었습니다. 아합 왕이 죽고 저녁 무렵이 되자 각자 집으로 가라는 소리가 울려 펴졌습니다. 아합의 죽음이 확인된 후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입니다. 결국 아합은 미가야가 예언한 것처럼 전쟁터에서 죽었고, 미가야가 참 선지자였다는 것이 분명하게 증명되었습니다.

오늘날 광야를 살아가는 많은 성도들의 삶 속에서 가면을 쓰고 진리를 왜곡하는 삶을 살면서도 멈추지 않습니다. 일상 생활 속에서 자기만의 성을 쌓는 일에 몰두하며 계속 진격하고 있습니다. 누가 과연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진격하는 사람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합처럼 시퍼런 칼끝이 심장에 파고 들어와야만 욕망의 경주를 멈출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 전에 하나님의 진검의 말씀 앞에 나가야 합니다. 가면을 벗어던지고 자기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신실한 말씀 앞에 내보여야 합니다.

 

죽음의 공식(37-40)

하나님 없이 죄와 함께 쌓여 가는 재물과 지위와 명성은 다 헛될 뿐입니다. 삶을 통해 순종한 말씀의 흔적들이 인생의 요약이 되게 해야 합니다. 아합의 죽음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평가하실지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37왕이 이미 죽으매 그의 시체를 메어 사마리아에 이르러 왕을 사마리아에 장사하니라 38그 병거를 사마리아 못에서 씻으매 개들이 그의 피를 핥았으니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거기는 창기들이 목욕하는 곳이었더라 39아합의 남은 행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건축한 상아궁과 그가 건축한 모든 성읍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40아합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37-40)

전쟁터에서 죽은 아합의 시체를 그의 부하들이 사마리아까지 메고 와서 사마리아에 안장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봇 사건으로 인해 아합의 가문에 심판을 내리셨을 때, 아합이 회개하여 아합 때에 내리시기로 한 징벌을 미뤄주셨습니다. 그래서 아합은 사마리아에 안장할 수 있었습니다.

전에 아합은 자신의 탐욕 때문에 순전한 사람 라봇의 포도원을 빼앗고 그를 죽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엘리야를 통해 개들이 라봇의 핥은 못에서 아합의 시체의 피도 핥을 것이라고 예언이 있었습니다. 다만 열왕기상 21장 19절에서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던 곳에서 네 피를 핥았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아합에게 내린 심판을 이제 시작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후에 아합의 아들 요람은 예후에 의해 나봇이 죽은 곳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아합을 통해 선지자들을 통해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됨을 보여줍니다.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 결론을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38)고 맺습니다.

아합의 업적을 이야기하면서 특별히 그가 건축한 상아궁을 말하고 있는데, 당시에는 상아로 만든 가구 장식과 널판을 벽에 붙여서 만들었습니다. 상아는 주로 아람에서 수입하였습니다. 아합이 사마리아에 상아로 만든 호화로운 궁전을 만들었다는 것은,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백향목 궁을 만든 것과 비교됩니다. 이것은 아합이 다스렸던 왕국이 매우 부유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솔로몬의 백향목 궁을 만드는 것도 솔로몬이 매우 큰 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합은 바알 숭배를 수단으로 부와 영화를 얻었고, 그 결과물이 호화로운 상아 궁입니다. 아마도 아합의 가장 큰 업적일 것입니다. 하지만 열왕기 기자는 솔로몬과는 다르게 그의 상아궁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한마디만 언급하고 넘어갑니다. 아합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아합의 긴 이야기는 끝을 맺습니다.

아합은 북이스라엘 왕들 중에서 가장 악한 왕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그것은 그의 아내 이세벨이 시돈 사람으로 이스라엘 땅에서 여호와 신앙을 없애고 바알 숭배를 퍼뜨렸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여호와 신앙을 없애려는 시도에 대해 여호와께서는 엘리야를 비롯한 여러 선자지들을 보내시고 큰 권능을 보여주시며, 아합과 이스라엘에게 여호와께 돌아올 기회를 여러 번 주셨지만, 결국 아합은 이런 기회를 모두 버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가장 악하다고 평가 받던 시대에 가장 강한 선지자와 많은 선지자를 보내신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표현입니다.


진실 대신 믿고자 했던 거짓은 아합을 보호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역시 거짓으로 위장한 차림으로 맞게 되었습니다. 실체를 가리고 위장해도 하나님의 화살은 피할 수 없습니다. 아합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를 제시하셨습니다. 성도들이 잘못된 길을 가는 발을 멈추어 세우는 것이 말씀이어야지, 치명상을 입히는 화살이 되어선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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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22-02)


이스라엘과 아람의 세 번째 전쟁(II)

 

열왕기상 22장 15-28절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들고 따르려 하지만, 자신을 세우려는 사람들은 자신이 꼭 들어야할 말씀을 듣고 따릅니다. 자신을 세우려는 사람의 바른 말은 때로는 아프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핵심이 있는 말씀을 통해 바르고 굳건하게 세워지는 것입니다. 듣기 좋은 말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세움 받기 좋은 말을 따를 것인가 라는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잠시라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 편에 서려면 비진리가 주는 위협을 감수해야 합니다. 진실만이 거짓을 향해 사형선고를 내릴 수 있습니다.논란의 중심에 진실이 있어도, 결국 판결의 중심에 진실이 설 것입니다. 진실과 거리가 먼 사람들이 더 진실을 찾고 진실한 척하는 세상에서 끝까지 진실을 위해 살아가길 바랍니다.

 

마가야는 전쟁의 패배와 아합의 죽음에 대해 예언합니다. 이것을 자신이 보고 들은 천상회의 환상을 상세히 소개하면서 제시합니다. 아합은 분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게 합니다. 미가야는 아합이 전쟁에서 패배할 것과 거짓 선지자들의 꾐에 빠져 죽게 될 것을 선고합니다. 그 결과 옥에 갇히지만, 거침없이 예언의 정당성을 말합니다.

 

아합 앞에서 예언하는 마가야(15-18)

종종 하나님의 뜻인 줄 알지만, 자신의 욕망과 다를 때가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보다 욕망을 앞세울 수 있습니다. 듣고 싶은 말만 가려듣는 사람에게 큰 재앙은 더 이상 싫은 소리를 전해주지 않고 듣기 좋은 메시지만 들려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언제든지 미혹되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15이에 왕에게 이르니 왕이 그에게 이르되 미가야야 우리가 길르앗 라못으로 싸우러 가랴 또는 말랴 그가 왕께 이르되 올라가서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 16왕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몇 번이나 네게 맹세하게 하여야 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진실한 것으로만 내게 말하겠느냐 17그가 이르되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이 무리에게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자기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18이스라엘의 왕이 여호사밧 왕에게 이르되 저 사람이 내게 대하여 길한 것을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것을 예언하겠다고 당신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15-19)

아합왕의 선지자들은 하나같이 아람을 치러 올라가야 한다며 하나님께서 아람을 이기도록 승리를 주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하지만 유다왕 여호사밧은 이 예언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선지자를 찾습니다. 아합은 평소에 자신에게 쓴 소리만 하는 미가야 선지자를 안 불렀는데, 어쩔 수 없는 그를 불러서 예언을 듣게 됩니다. 왕의 사자는 아합에게 듣기 좋은 소리를 하라고 하지만, 선지자 미가야는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그의 예언이 본문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선지자 미가야가 아합왕 앞에 오자, 아합왕은 사백 명의 선지자들에게 물었던 것처럼 그에게 길르앗 라못으로 전쟁하러 가도 되는지를 물었습니다. 놀랍게도 미가야는 사백 명의 선지자처럼 ‘올라가라. 그리고 승리하라’고 말합니다. 그곳을 왕의 손에 넘겨주셨다는 긍정적인 신탁을 합니다.

선지자 미가야의 예언을 들은 아합은 자신에게 좋은 예언을 한 그의 예언을 믿지 못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항상 안 좋은 예언만 하던 사람이 좋은 예언을 하는 것이 이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몇 번이나 맹세하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진실하지 않은 것은 말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미가야의 좋은 예언이 사실임을 확신 받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미가야는 아합이 진실한 말만 하라고 하지 미가야는 자신이 여호와로부터 실제로 받은 환상과 말씀을 전달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같이 산에 흩어진 것을 보았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길 이들을 위한 주인들이 없으니 각 사람들은 그들의 집으로 평안하게 들어가게 하라고 말씀하셨다고 알려줍니다.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같이 산에 흩어져 있다는 것은 목자인 아합이 없어질 것이라는 의미이며, 아합의 죽음에 대한 예고였습니다. 그래서 전쟁터에 가면 아합은 죽고 백성들은 왕을 잃고 이리저리 흩어지게 되니, 전쟁하지 말고 백성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라는 의미입니다. 이전에 있던 예언은 거짓 예언이고 불길한 예언을 한 것이 진실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아합은 여호사밧 왕에게 이전에 자기가 한 말이 맞지 않느냐고 하면서 쓸데없는 데 시간을 낭비했다고 푸념했습니다. 이런 아합의 태도를 보면, 그가 미가야의 예언을 믿지 않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입으로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임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 모습은 아합이 여호와께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아합은 여호와께 경고를 받고 회개하여 목숨을 연장했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는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합은 여호와를 늘 자신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벌을 주시는 분으로 여긴 것입니다. 미가야가 진정한 여호와의 선지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말 듣기를 싫어하고 불평합니다.

아합은 자신이 왜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지에 대한 성찰이 전혀 없습니다.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오직 여호와밖에 없다는 것을 여러번 보여주었지만, 여전히 여호와를 자신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합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이방신을 섬기는 것을 질책하고 벌을 내렸지만, 아합은 아직도 이런 자신의 잘못을 못 깨닫고 불평만 하였습니다. 전체적으로 아합은 매우 유아적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듣고 싶은 말만 듣고, 자기고 싶은 것은 반드시 가져야 하며, 징계를 하면 잠시 두려워하다가 결국 토라지는 아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합의 전쟁 계획을 그를 심판하시는 기회로 삼으십니다. 아합의 관심은 전쟁의 승리였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아합의 심판이었습니다. 그래서 아합은 어용 선지자들을 동원해 전쟁의 명분을 쌓고 승리를 선전하게 했지만, 하나님은 자기 맘대로 사는 아합에게 듣기 좋은 거짓 예언을 하게 하여 패망의 길을 자초하게 하셨습니다.

 

아합을 꾀어낼 하나님의 계획(19-23)

다수의 거짓 선지자들을 통한 미혹은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통한 미혹은 가장 효과적인 사탄의 전술입니다. 말씀을 기준으로 따라서 살아가지 않으면, 사탄의 유혹에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습니다. 사탄은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제일 두려워합니다.

19미가야가 이르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의 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는데 20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합을 꾀어 그를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또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21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그를 꾀겠나이다 22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이르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의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있겠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꾀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23이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 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19-23)

선지자 마가야는 계속해서 어린 아이처럼 투정하는 아합에게 계속 자신이 본 환상을 통해 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는 ‘여호와의 천상회의’ 환상을 전달합니다. ‘여호와의 총회’는 욥기 1-2장이나 이사야 6장 등 구약에서 가끔 언급되는 장면인데, 여기서는 하늘의 군대가 보좌 좌우에 서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전쟁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천상회의’에서 여호와께서 누가 아합을 유인하여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서 죽게 하겠느냐고 물으시니, 영들이 다양한 의견을 내었습니다. 한 영이 나와서 자신이 유인하겠다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어떤 방법으로 하겠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는 자신이 거짓의 영이 되어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다고 말합니다. 모든 선지자에게 거짓말을 하도록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속이는 것을 허락하시며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미가야는 이런 이유로 해서 여호와께서 당신의 선지자들의 입에 거짓의 영을 두셨고, 결국 여호와는 당신에게 재앙을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결국 사백 명의 선지자들이 아합에게 전쟁에 올라가면 승리하리라고 예언한 거짓의 영으로 인한 속임수이며, 아합에게 재앙을 주기 위한 유인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합에게 있던 사백 명의 선지자는 여호와의 진정한 선지자가 아니라, 아합이 원하는 말을 해주는 아합의 선지자들이며,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이용해서 아합을 유인하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여호와의 영뿐만 아니라 거짓의 영도 주관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참조 사무엘상 19:9). 여호와의 악령 혹은 거짓의 영은 항상 심판의 상황에서 등장합니다. 심판받는 사람들을 악령의 손에 두셔서 정상적인 사고를 못하게 하시고, 그 결과 파멸의 길을 걷게 하십니다.

미가야가 여호와께서 아합을 속이려고 한다는 계획까지 아합에게 말해줌으로써 아합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아합이 미가야의 말을 믿었다면 하나님께서 유인하는 덫에 걸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합은 여호와께서 주신 마지막 기회를 잃었고, 결국 거짓의 영에 미혹되어 전쟁을 하기로 결정합니다.

 

마가야를 감옥에 가두는 아합(24-28)

아무리 사람들이 거부해도 그것이 진리라면 하나님의 말씀은 그 의도대로 역사할 것입니다. 지금도 지도자들은 같은 성경 말씀으로 정반대의 주장을 펼치기도 합니다. 성도들은 무분별한 맹종이 아니라 분별력 있는 순종을 하는 것이 자신의 책임입니다.

24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가까이 와서 미가야의 뺨을 치며 이르되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가서 네게 말씀하더냐 25미가야가 이르되 네가 골방에 들어가서 숨는 그 날에 보리라 26이스라엘의 왕이 이르되 미가야를 잡아 성주 아몬과 왕자 요아스에게로 끌고 돌아가서 27말하기를 왕의 말씀이 이 놈을 옥에 가두고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까지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먹이라 하였다 하라 28미가야가 이르되 왕이 참으로 평안히 돌아오시게 될진대 여호와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이다 또 이르되 너희 백성들아 다 들을지어다 하니라(24-28)

마가야는 아합에게 전쟁에 나가면 이긴다고 예언하는 예언자들은 모두 거짓말하는 영에 이끌려 아합을 죽음으로 꾀어내는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 예언을 들은 시드기야는 미가야의 빰을 때리면서 마가야의 말을 반박했습니다. 그는 철뿔을 만들어 아합 왕에게 승리를 확신시켰던 사람입니다. 여호와의 영이 너와 말하기 위해 자신을 떠난 것이냐며 질책합니다. 이는 자신이 한 예언은 여호와의 영을 받아서 한 여호와의 말씀이며, 미가야의 말은 여호와의 영을 받아서 한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둘은 정반대의 예언을 하였기 때문에, 한 명은 여호와의 참 선지자이고, 다른 한 명은 거짓 선지자입니다. 그러나 현재 말만 가지고는 누가 참 선지자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자 마가야는 시드기야에게 골방에 들어가 숨는 날에 누구의 말이 진정한 여호와의 말씀인지 알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즉, 아합과 아람이 전쟁하여 아합이 패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거짓 예언 때문에 두려워 골방에 숨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참 예언자인지 여부를 분별하는 방법은 그의 말이 이루어졌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아합은 자신에게 불길한 예언을 한 미가야를 잡아서 성주 아몬과 왕자 요아스에게로 끌고 가도록 지시합니다. 자신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평안히 돌아올 때까지 옥에 가두고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먹이라고 지시합니다.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은 죄인에게 주는 매우 적은 떡과 물을 의미합니다. 새번역에서는 ‘빵과 물을 죽지 않을 만큼만 먹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아합의 의도를 잘 드러낸 번역입니다.

여기서 아합은 미가야의 예언이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은 평안히 돌아올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런 아합의 말에 미가야는 왕이 정말로 평안히 돌아오면 자신이 여호와의 거짓 선지자로 판명될 것이라고 당당히 말합니다.

그러면서 백성들을 향하여 ‘다 들으라’고 합니다. 백성들이 자신이 참 선지자인지 거짓 선지자인지를 판정하는 증인이 되라는 뜻입니다. 미가야는 자신이 받은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참된 말씀인 것을 알았기에, 아합 왕의 협박과 모욕에도 당당하게 자신을 시험하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미가야는 아합이 이런 반응을 할 줄 알고도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아합에게 가감 없이 말하고 있었습니다. 미가야나 엘리야 모두 이스라엘에서 여호와의 선지자로 사라면서 아합의 마움을 받았습니다. 주류 세력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늘 광야로, 이방 땅으로 도망을 다니는 등 어렵게 살았습니다.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에는 여호와의 종들은 비주류에 속하여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미가야처럼 간신히 목숨을 연명하며 가난과 억압 속에 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존재하기에 여전히 이스라엘 땅에 여호와의 말씀이 전달되고, 여호와의 공의와 사랑이 실행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 미가야는 기존 축을 사정없이 흔듭니다. 아합 왕이 확신하는 승리에 패배를 선언하고, 자기 예언을 참으로 여기는 시드기야의 착각에 찬물을 끼얹습니다. 역설에 진실이 담길 때 진실은 강력한 도전을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진실 편에 서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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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22-01)


이스라엘과 아람의 세 번째 전쟁(Ⅰ)

열왕기상 22장 1-14절


참된 제자는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주위 사람들의 거짓 충고와 여론과 대세를 따르지 않습니다. 그 대신 성령님께서 말씀 가운데 깨닫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따릅니다.

 

아합은 벤하닷이 길르앗 라못 땅을 돌려주지 않자, 그 땅을 되찾기 위해 전쟁을 계획합니다. 여호사밧은 이 전쟁에 합류 의사를 밝히면서,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자고 아합에게 제안합니다. 이에 아합은 선지자들을 소집했고, 그들 모두는 그에게 출정을 부추기며,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실 것이라 예언했습니다. 여호사밧은 이들의 일치된 예언에 의구심을 품습니다. 결국 아합은 여호와의 선지자 미가야를 불러오게 합니다.

 

아합과 여호사밧의 동맹(1-4)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한한 긍휼로 베푸신 소중한 평화를 버리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 무모한 결정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얼마나 간사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계획하고 결정하는 것은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중대한 결정을 내리고 그에 따라 사람의 도움을 구하고 자신의 형편을 따지기 전에 반드시 성령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뜻을 구한 다음 행동해야 합니다.

1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없이 삼 년을 지냈더라 2셋째 해에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이스라엘의 왕에게 내려가매 3이스라엘의 왕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길르앗 라못은 본래 우리의 것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어찌 아람의 왕의 손에서 도로 찾지 아니하고 잠잠히 있으리요 하고 4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당신은 나와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싸우시겠느냐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나는 당신과 같고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같고 내 말들도 당신의 말들과 같으니이다(1-4)

나봇의 포도원 사건(21:1-29)에 이어 다시 이스라엘과 아람 간의 전쟁이 전개됩니다(1-40). 앞서 아람과의 두 차례 전쟁(20:1-34)은 아람이 먼저 이스라엘을 침략했으나, 이번에는 아합이 먼저 아람을 칠 준비를 합니다. 앞의 두 전쟁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승전을 예고하셨고, 그 예고대로 큰 승리를 이뤄주셨습니다. 이번 길르앗 라못 전쟁에서는 아합이 죽게 되며, 이로써 죽음을 예고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됩니다. 1-28절까지는 갈멜 산에서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이 참 신을 가리는 경합을 한 것(18:20-40)과 유사하게 미가야와 거짓 선지자들이 출정에 대한 하나님의 참 뜻을 가리는 경합의 진행 과정을 그립니다.

아합은 아람에게서 길르앗 라못을 탈환할 합이 계획을 세웁니다. 길르앗 라못은 요단 동편 길르앗의 한 성읍으로 도피성이며 교통의 요지였습니다(수 21:38). 지난 3년 동안은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없었는데, 아합이 아벡 전투에서 승리한 후 벤하닷과 화친 조약을 맺었기 때문입니다(20:34). 그러나 그 조약과 이번 전쟁 사이에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카르카르 전투(주전 853년)가 있었습니다. 당시 아합은 벤하닷 및 열 왕들과 연합하여 시리아 서북부의 카르카르에서 앗수르의 살만에셀 3세(주전 859-824년)에 맞서 싸워 승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전투가 기록된 쿠르크 석비에는 다메섹 왕과 더불어 아합이 가장 막강한 왕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아합은 앞서 아람과의 두 전쟁에서도 크게 승리했고 카르카르 전투에서도 승리했으므로, 이번 길르앗 라못을 탈환하는 일에 큰 자신감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합이 잊고 것이 있습니다. 전쟁의 승리가 하나님 덕분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번 전쟁에는 유다의 여호사밧(주전 872-848년)도 합류합니다. 그와 아합은 자녀의 정략결혼을 통해(대하 18:1) 적대 관계(14:30; 15:6,32)에서 우호 관계로 전환시켰습니다. 이로써 아람과 앗수르 등을 견제하고 각 나라의 입지를 공고히 하려 했습니다. 그가 사마리아에 오자 아합은 후히 접대했습니다(대하 18:2). 당시 아합은 길르앗 라못 탈환을 계획했기에, 신하들에게 그 땅이 여전히 아람 왕의 손에 있는데 왜 가만히 있느냐고 추궁합니다(3). 아벡 전투에서 패한 벤하닷이 이스라엘에게서 뺏은 모든 성읍을 반환하기로 했으나(20:34) 약속을 어겼고, 이에 아합이 분개했을 것입니다. 영토 탈환에 대해 운을 뗀 아합은 여호사밧에게 동참을 권유합니다. 여호사밧은 자신이 아합과 같고 자신의 백성과 말들도 마찬가지라며 기꺼이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그의 적극적이고 호의적인 대답(4)은 아합의 아들 여호람이 모압을 공격하자고 제안했을 때도 나옵니다(왕하 3:7). 그는 여호람 이전에 아하시야와도 동맹을 맺고 교역을 추진합니다(48; 대하 20:35-37). 여호사밧이 이처럼 친이스라엘 정책을 편 것(44)은 군사, 건축, 무역 등(대하 18-20장)에 상승효과를 기대했고, 여러 방면에서 강세를 보였던 오므리 왕조에 대한 호의적 태도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왕이 바알을 섬기는 왕들과 교류하고 돕는 것은 어리석으며, 하나님의 진노를 살 일입니다(대하 19:2).

 

전쟁에 대한 예언(5-9)

자신의 계획을 찬성하고 지지해 주는 종교 자도자와 사람들만 자기 곁에 두고 따라가는 불신앙적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아무리 많은 사람의 의견이 똑같다 해도,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중요하게 여기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5여호사밧이 또 이스라엘의 왕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물어 보소서 6이스라엘의 왕이 이에 선지자 사백 명쯤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길르앗 라못에 가서 싸우랴 말랴 그들이 이르되 올라가소서 주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 7여호사밧이 이르되 이 외에 우리가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있지 아니하니이까 8이스라엘의 왕이 여호사밧 왕에게 이르되 아직도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한 사람이 있으니 그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물을 수 있으나 그는 내게 대하여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그를 미워하나이다 여호사밧이 이르되 왕은 그런 말씀을 마소서 9이스라엘의 왕이 한 내시를 불러 이르되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를 속히 오게 하라 하니라(5-9)

여호사밧은 전쟁에 앞서 여호와의 뜻을 알아보자고 아합에게 제안합니다. 전쟁 전에 신의 뜻을 묻는 것은 관습이지만, 여호사밧이 선지자를 통해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 한 것(5; 왕하 3:11)은 지혜로운 결정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는 왕이었습니다(대하 17:3; 20:3-4).

반면 아합에게서는 여호와의 뜻을 먼저 묻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매번 전쟁에서 하나님이 먼저 선지자를 보내 승리를 예고하셨고, 전쟁을 지도하셨습니다(20:13-14, 22-25,28). 아합과 이스라엘이 하나님 말씀대로 승전을 목격한 후 그가 참 하나님임을 깨닫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20:13,28). 그러나 사르밧 여인(17:24)이나 갈멜산의 백성들(18:39)과 달리 그들은 하나님의 전능함을 경험한 후에도 신앙을 고백하거나 악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행하신 여러 기적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돌아오지 않은 것은그들의 완고함을 증명하며, 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앞당기기에 합당할 뿐입니다. 아합의 선지자들은 승전을 예언하지만, 여호사밧은 그들의 예언이 미덥지 않습니다. 아합이 여호사밧의 제안에 따라 소집한 선지자는 대략 400명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출정하라고 아합을 북돋우며 “주”가 승리를 주실 것을 예언했습니다(6). 아합은 승리에 대한 예언을 들으니 출정의 명분이 더확고해져 흡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아합에게 이들 외에 하나님의 뜻을 물을 “여호와의 선지자”가 없냐고 묻습니다(7; 왕하 3:11). 참 선지자 한 명으로도 족한데 무리가 나서서 왕이 기뻐할 예언을 하고 “주”(6절)의 이름으로 예언하는 점 등이 못미더웠을 것입니다. 아합은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가 있으나 좋은 말은 안 하고 나쁜 말만 예언하기에 그를 미워한다고 대답합니다. 여호사밧은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다독이고, 이에 아합은 서둘러 미가야를 데려오라고 명합니다. 이세벨의 선지자 살생 정책(18:4, 13) 속에 미가야 같은 여호와의 선지자가 생존했다는 것은 엘리야나 오바댜가 숨긴 선지자들 외에도 하나님께서 주권적인 계획 아래 보호하신 자들이 있음을 함축합니다. 그렇다면 400명의 선지자들은 누구입니까? 이들은 ‘여호와의 말씀’(5)을 대언하러 소집됐고, 여호사밧의 떨떠름한 반응 이후에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만(11,12,24), 미가야와 같은 무리는 아닙니다. 당시 여호와의 선지자들은 핍박당하고 있었고 아합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대적으로 여겼기에, 여기에 소집될 만한 자들은 우상을 섬기는 선지자들일 것입니다. 갈멜산 대결에 바알 선지자 450명만 언급되었으므로(18:22) 나머지 아세라 선지자들이든지 바알 선지자들과 섞인 무리였을 것입니다. 이들이 왕이 원하는 예언을 하고 부추기는 점(6), 여호사밧이 여호와의 선지자를 따로 찾은 심(7), 무리 지어 예언행위를 하는 점(10), 예언이 거짓말의 영에 의한 계시라는 점(19-23, 25) 등은 이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는 거짓 선지자임을 알려줍니다.

 

시드기야의 예언(10-12)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말세에 나타날 거짓 선지자를 조심해야 합니다. 그들의 특징은 청중이 듣기 좋아하는 긍정적인 말씀, 축복에 대한 말씀만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메시지도 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여호사밧은 길한 일이든 흉한 일이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전하는 선지자를 찾으려고 합니다.

10이스라엘의 왕과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왕복을 입고 사마리아 성문 어귀 광장에서 각기 왕좌에 앉아 있고 모든 선지자가 그들의 앞에서 예언을 하고 있는데 11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는 자기를 위하여 철로 뿔들을 만들어 가지고 말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리라 하셨다 하고 12모든 선지자도 그와 같이 예언하여 이르기를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 하더라(10-12)

이제 아합과 여호사밧은 성문 입구 광장(또는 타작마당)에 마련된 왕좌에 앉았고, 그 앞에는 선지자들이 승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는철 뿔들을 만들어 와, ‘여호와가 이렇게 말씀하신다’로 시작하며, 아합이 뿔들을 가지고 아람을 진멸할 것이라 예언했습니다(11). 철 뿔은 강력한 힘을 상징합니다(신 33:17). 나머지 선지자들도 아합에게 출정하라고 부추기며, 이제는 “주”(6)가 아닌 “여호와”가 승리를 주실 것이라 예언했습니다(12). 6절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올라가소서’의 주체는 아합을 대표로 지칭하는 ‘당신’으로 나옵니다.

 

여호와의 선지자 미가야(13-14)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한다고 해서 축복과 성공에 대한 메시지만 전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를 전해야 합니다. 자신의 욕망을 따르는 악한 사람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진실한 말씀만을 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서야 합니다.

13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신이 일러 이르되 선지자들의 말이 하나 같이 왕에게 길하게 하니 청하건대 당신의 말도 그들 중 한 사람의 말처럼 길하게 하소서 14미가야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하고(13-14)

선지자들이 예언하고 있는 동안 내시는 미가야를 데리러 갔습니다. 미가야는 당시 성주 아몬과 왕자 요아스의 관할 하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26). 내시는 선지자들이 일치되어 길한 예언을 하니 미가야도 제발 길한 예언을 하라고 종용합니다. 이는 회유이거나 강요일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이나 내시는 여호와의 뜻을 찾기보다는 왕을 기쁘게 하거나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그 뜻을 맞추려 합니다. 내시의 말에 미가야는 ‘여호와가 자기에게 말씀하신 것’을 전할 것이라고 답합니다(14). 이는 내시의 요구에 응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만을 전하겠다는 각오입니다. 과연 미가야가 전할 여호와의 말씀은 길할지 흉할지 청중의 궁금증이 커져 갑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의 계획과 욕망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중대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거짓 선지자의 메시지를 분별하고 대세 대신 성경적 원리를 따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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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21-02)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아합(Ⅱ)

열왕기상 21장 11-29절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선악 간에 행한 모든 일을 아시고 말씀을 통해 죄를 지적하시며 심판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게서는 악인이 감추고 있는 추악한 죄악을 신랄하게 고발하실 뿐 아니라 공의대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절대적인 진리 앞에 모든 성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기 위한 이세벨의 계략은 성읍 지도자들의 조력으로 완벽히 실현됩니다. 나봇을 음해하려는 금식이 선포되고, 그에 대한 위증자들이 나타났습니다. 결국 나봇은 모독죄로 돌에 맞아 죽습니다. 이세벨은 의기양양하고 아합은 포도원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나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무거운 형벌을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아합이 겸손히 회개하자, 아합 왕조의 재앙을 아들 대로 미뤄주십니다.

 

이세벨의 계책과 나봇의 죽음(11-16)

야보고서에서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막강한 힘과 지위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결코 인간은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이 임한 후 근심으로 마음이 답답해도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계속적으로 눈에 보이는 욕망에 사로잡히는 인생은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행한 자를 말씀을 통해 철저히 심판하십니다.

11그의 성읍 사람 곧 그의 성읍에 사는 장로와 귀족들이 이세벨의 지시 곧 그가 자기들에게 보낸 편지에 쓴 대로 하여 12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 앉히매 13때에 불량자 두 사람이 들어와 그의 앞에 앉고 백성 앞에서 나봇에게 대하여 증언을 하여 이르기를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매 무리가 그를 성읍 밖으로 끌고 나가서 돌로 쳐죽이고 14이세벨에게 통보하기를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나이다 하니 15이세벨이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다 함을 듣고 이세벨이 아합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돈으로 바꾸어 주기를 싫어하던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소서 나봇이 살아 있지 아니하고 죽었나이다 16아합은 나봇이 죽었다 함을 듣고 곧 일어나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러 그리로 내려갔더라(11-16)

이세벨의 악한 계책(9-10)이 공조자들에 의해 실행됨으로써 나봇은 억울하게 죽습니다. 계책이 적힌 편지는 나봇의 성읍 장로들과 귀족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편지들은 아합의 인장으로 봉해졌지만(8), ‘이세벨이 그들에게 보냈다’(11)는 문장은 이세벨이 발신인이자 악행의 주모자임을 밝혀주고 성읍 지도자들은 그녀의 협조자들이며 악행의 실행자들임을 확인시킵니다.

지도자들은 먼저 성읍에 금식을 선포했습니다. 금식은 일반적으로 환난이나 위기 때 고난의 원인을 찾고 하나님께 겸손히 간구하기 위한 매개로 선언됩니다(삼상 7:6; 대하 20:3; 욜 1:14; 느 9:1). 그러나 이번 금식은 무죄한 하나님 백성 하나를 함정에 빠뜨리고 죽이기 위해 악용되었습니다. 금식 성회를 진행하던 중 그들은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머리, 꼭대기) 앉혔다.’ 이는 나봇을 우두머리로 세웠다는 의미일 수 있으나, 바로 이어 나오는 재판 장면을 고려하면 나봇을 눈에 띄는 피고인석에 앉혔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재판이 열리고 지도자들이 미리 준비해둔 불량자 둘이 등장합니다. 율법에 따라 최소 두 증인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신 17:6;19:15). 이제 나봇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밑 작업이 다 갖춰졌습니다. 나봇 앞에 증인으로 앉은 불량배들은 나봇이 성읍에 닥친 환난이 하나님과 왕의 탓이라며 저주했다고 위증했습니다. 하나님과 지도자에 대한 저주는 율법에 금지되었고(출 22:28) 이에 해당하는 형벌은 사형이었습니다(레 24:16).

지도자들 무리는 율법에 따라 나봇을 성읍 밖으로 끌고 나가 돌로 쳐 죽였습니다(레 24:14-16). 나봇의 아들들도 함께 죽임 당한 것으로 나타납니다(왕하 9:26). 이처럼 이세벨의 모략은 동조자들의 완벽한 협력, 율법과 사법의 교묘한 활용 속에 완전 범죄로 끝났습니다. 아합을 포함해 이들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권력, 부, 지위, 영민함 등을 악용했고, 백성을 지켜주는 기반인 율법과 사법을 악용하여 백성의 권리와 목숨을 빼앗았습니다(미 2:1). 이들은 사람과 하나님께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아합은 소원대로 이제 나봇의 포도원의 상속인이 됩니다. 이세벨은 나봇의 죽음 소식을 듣고 아합에게 그의 포도원을 ‘차지하라’며 생색을 냅니다(15). ‘차지하다’(야라쉬)는 ‘취하다’란 의미가 아니라 ‘기업으로 소유하다’, ‘상속받다’의 뜻입니다. 이제는 범죄자의 땅이므로 왕이 거둘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세벨에게 있어 포도원은 ‘돈까지 준다 했으나 나봇이 교환을 거부한(“싫어하던”, 15) 소유’일 뿐입니다.

그러나 실상 나봇이 거부한 이유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앞서 선지자의 친구도 거부하다가 죽임을 당했으나, 그는 나봇과 정반대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습니다(20:35-36). 나봇의 죽음은 11-16절에 다섯 번 언급되어(13, 14, 15[×2], 16절), 그 죽음의 부당함이 부각됩니다. 아합은 자기 탓에 죽은 나봇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곧바로 포도원을 차지하러 갑니다.

 

아합과 이세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예고(17-26)

자신의 힘과 지위, 주위 사람을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이루라는 사탄의 충동질을 분별하고 거부해야 합니다. 성도는 사탄의 충돌질에 따라 가장 소중한 자신의 영혼을 팔아넘기면서까지 욕심을 이루려는 죄성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오늘날 더러운 야망에 빠져 나봇과 같은 약자의 소중한 것을 강제로 차지하려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17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18너는 일어나 내려가서 사마리아에 있는 이스라엘의 아합 왕을 만나라 그가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러 그리로 내려갔나니 19너는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고 하셨다 하고 또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였다 하라 20아합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 대적자여 네가 나를 찾았느냐 대답하되 내가 찾았노라 네가 네 자신을 팔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21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재앙을 네게 내려 너를 쓸어 버리되 네게 속한 남자는 이스라엘 가운데에 매인 자나 놓인 자를 다 멸할 것이요 22또 네 집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처럼 되게 하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처럼 되게 하리니 이는 네가 나를 노하게 하고 이스라엘이 범죄하게 한 까닭이니라 하셨고 23이세벨에게 대하여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개들이 이스르엘 성읍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지라 24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고 하셨느니라 하니 25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그 자신을 팔아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그를 그의 아내 이세벨이 충동하였음이라 26그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리 사람의 모든 행함 같이 우상에게 복종하여 심히 가증하게 행하였더라(17-26)

아합과 이세벨의 악행에 대해 하나님은 엄한 심판을 예고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아합에게 보내 그의 죄를 확증하고 심판을 전하라 명하셨습니다. 아합의 죄목은 나봇을 죽인 죄와 그의 포도원까지 빼앗은(야라쉬) 죄입니다. 죄에 대한 형벌로 죽음이 선언되었으나, 이는 아합이 벤하닷을 살려준 대가로 이미 예고된 내용입니다(20:42). 이번에는 거기에 덧붙여, 아합의 시신이 제대로 매장되지 못할 것을 알립니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아합의 피도 핥게 될 것입니다.

한편 포도원에 내려간 아합은 엘리야를 발견하자 “내 대적자여”라고 부르며 자신을 찾았느냐고 묻습니다. 아합에게 있어 참 선지자들은 자신에게 흉한 말을 전하는 자들입니다(17:1; 20:42; 22:8). 그렇기에 그는 그들을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18:17), ‘대적자’(20절), ‘내가 미워하는 자’(22:8)로 부릅니다. “네가 나를 찾았느냐?”(20)란 물음은 ‘이번에는 또 무슨 흉한 소식을 갖고 왔느냐?’는 의미입니다. 그는 그때 나봇의 포도원을 갈취하고 있었기에 속으로 뜨끔했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그를 찾았노라고 답하며 여호와 심판의 말씀이 있음을 알립니다. 아합의 죄는 스스로를 팔아 여호와의 눈에 악을 행한 죄입니다. ‘자신을 팔았다’는 말은 ‘스스로를 포기하고 노예로 만들었다’는 뜻으로 아합이 자신을 탐욕과 죄에 넘겨주어 악을 행했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탐욕을 위해 백성의 재산을 보호하고 백성을 공의로 치리해야 하는 왕의 책무를 버리고 나봇을 죽게 만들었고 포도원을 가로챘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아합을 쓸어버리고 그와 관련된 모든 남자(‘벽에 오줌을 누는 자’)를 다 멸절할 것이라 선언하십니다(21). 아합이 우상숭배로 하나님을 노하게 했고 이스라엘을 우상숭배로 이끌었기에 그의 집안은 같은 죄를 지은 여로보암과 바아사의 왕조처럼 끝날 것입니다. 여로보암과 바아사에게 예고된 내용(14:11; 16:4)과 마찬가지로 아합에게 속한 자들은 성읍에서나 들에서 죽어, 개와 새의 먹이가 될 것입니다(24). 이세벨 또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개들이 이스르엘 성벽에서 그녀의 시신을 먹을 것입니다. 여로보암과 바아사에게 선포된 심판이 다 이뤄졌듯이(15:29; 16:11), 아합과 이세벨에게 선언된 심판도 다 이루어집니다(22:38; 왕하 9:36).

열왕기 저자는 아합처럼 스스로를 팔아 하나님의 눈에 악을 행한 자가 없다고 한탄하며, 그렇게 된 데에는 이세벨의 충동질이 큰 원인이었다고 분석합니다. 시돈의 바알 숭배자인 이세벨이 옆에서 아합을 부추겨 바알을 섬기게 했고, 이스라엘에 바알과 아세라 숭배를 퍼뜨렸으며, 여호와의 선지자들과 나봇을 죽게 했습니다. 그녀의 충동질로 시작된 아합의 우상숭배는 아모리 사람의 우상숭배에 견줄 만큼 심각했습니다. “아모리 사람”(26)은 당시 가나안의 한 족속을 지칭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 이전의 거주민들을 두루 지칭합니다. 그들은 우상숭배, 음란, 가증한 풍습 등으로 그 땅을 더럽혀, 하나님의 징벌 대상이 되었습니다(레 18:24-25). 이스라엘이 그들을 따라간다면, 땅이 이전 거주민들을 토해낸 것처럼, 이스라엘도 그 땅에서 내뱉어져 포로로 끌려갈 것이라 경고되었습니다(레 18:26-30; 26:31-39). 그럼에도 아합은 그들을 뒤따랐고 이스라엘 백성 또한 그 길에 함께했습니다.

 

아합의 겸비함과 하나님의 긍휼(27-29)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겸비해 회개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때늦은 회개도 받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아합의 심판도 연기해 주셨는데, 하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의 회개라면 반드시 받아 주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참된 회개만이 하나님의 심판과 영원한 멸망을 피할 수 있는 길입니다.

27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더라 28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29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그가 내 앞에서 겸비하므로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는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27-29)

자신과 이세벨 및 왕조의 멸망을 선고받은 아합은 놀랍게도 하나님 앞에 회개했고, 하나님은 그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아합은 자신의 죽음을 알게 되었을 때(20:42)나 나봇이 포도원 매도를 거절했을 때(4)는 언짢아 의기소침했으나, 이번에는 심각성을 깨닫고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그는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두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눕고, 걸음걸이까지 조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합의 겸비함을 인정하신 만큼 그의 회개는 당시 진심이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다윗을 위해 이스라엘의 분열을 솔로몬 대가 아닌 솔로몬의 아들 대로 미루셨듯이(11:12-13), 아합의 재앙(왕조의 멸망)을 그의 아들 대에 내리실 것이라 선언하십니다. 크고 많은 악을 행한 아합이었지만, 그가 스스로 겸비하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긍휼을 보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대신 그가 악에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겔 18:23). 그는 불순종하는 자의 죄는 ‘삼사 대’까지 갚으나 순종하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출 20:5-6). 하나님께서 선포하시는 죄의 경고나 심판의 예고는 그의 백성이 죄의 엄중함을 깨닫고 그에게 돌아와 회개하고 순종하기를 독려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빛의 자녀는 죄악의 욕망에 눈멀게 해 영혼을 팔아넘기게 하는 사탄의 충돌질을 거부해야 합니다. 오직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회개할 때 심판을 피할 수 있습니다. 오직 회개만이 심판과 멸망을 피할 수 있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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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21-01)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아합

열왕기상 21장 1-10절


세상은 끊임없이 성도를 유혹하고 비웃고 협박하지만, 성도는 악한 세상에 위축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담대해야 합니다. 반대로 세상의 것이 풍족하다고 그것으로 자랑하는 것은 성도의 모습이 아닙니다. 성도는 세상에서도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빛을 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아합의 탐욕은 이세벨의 간교한 계획을 통해 죄악으로 구체화됩니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에 눈독을 들이고, 이를 구입하려 합니다. 그러나 나봇은 포도원이 조상의 유산이며, 이를 매매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금하셨음을 들어 이를 거절합니다. 이에 아합은 의기소침해집니다. 이세벨은 자초지종을 듣고 나봇에게서 포도원을 빼앗아 아합에게 줄 것이라 약속합니다. 그녀는 성읍 지도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나봇을 함정에 빠뜨리고 위증을 해서 돌로 쳐 죽이라고 명합니다.

 

나봇의 포도원(1-3)

우리는 가진 것이 많다고 해서, 또는 환경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해서 성공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십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인정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지위와 권력은 오직 교만거리일 뿐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성도에게는 소유와 능력이 하나님을 위한 사명거리일 뿐입니다.

1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 이스르엘에 포도원이 있어 사마리아의 왕 아합의 왕궁에서 가깝더니 2아합이 나봇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포도원이 내 왕궁 곁에 가까이 있으니 내게 주어 채소 밭을 삼게 하라 내가 그 대신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네게 줄 것이요 만일 네가 좋게 여기면 그 값을 돈으로 네게 주리라 3나봇이 아합에게 말하되 내 조상의 유산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 하니(1-3)

이 일들 후에 아합은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서 포도원을 매입하려고 합니다(2). ‘이 일들 후에’(“그 후에”, 1)라는 어구는 첫째, 시간적 흐름으로, 아람과의 두 번의 전쟁 및 벤하닷과의 조약 이후라는 뜻입니다. 둘째, 공간의 이동으로, 사마리아에 머물던 아합이 이스르엘에 머물고 있음을 알립니다. “사마리아의 왕 아합의 왕궁”(1)이라는 표현은 아합이 북이스라엘의 왕임을 뜻하고, 이때 왕궁은 사마리아 궁이 아닌 이스르엘의 여름 별궁임을 암시합니다. 셋째, 의미상의 연관성으로 이전 사건들과 이번 일에 관련이 있으므로 이 점을 염두에 두라는 의미입니다. 그동안 아람과 치른 두 번의 전쟁에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 이스라엘의 승리를 예고하셨고 그 말씀대로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아합은 승리의 공로를 가로채고, 처단해야 할 벤하닷과 조약을 맺음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20:34). 이후 아합은 이 일에 대해 선지자로부터 하나님의 책망과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고를 들었습니다(20:42). 아합은 의기소침해져서 사마리아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속 내용이 오늘 본문의 시작입니다.

돌아온 후 그의 행동이나 심경 변화에 대해 언급이 없는 것을 보면, 아합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전 일들을 잊고 일상생활로 돌아간 듯합니다. 이스르엘의 별궁 근처에는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이 있었습니다. 잇사갈 지파의 기업인 이곳(수 19:17-18)은 사마리아에서 북서쪽 37킬로미터 떨어진 평원으로 여러 농산물이 생산되고 있었습니다. 아합은 이곳 포도원을 푸른 정원(“채소밭”, 2)으로 만들고 싶어 눈독을 들였습니다. 그는 포도원이 궁에서 가까움을 핑계로 나봇에게 정당한 대가를 치를 테니 포도원을 주라고 요구합니다. 대가로는 더 좋은 포도원을 주든지 나봇의 눈에 좋다면 돈으로 줄 것입니다. 아합의 토지 매매 제안은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면 아무 문제가 없고, 더 좋은 포도원과 맞바꿔주거나 값을 지불한다니 정당하게 생각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포도원이 조상이 물려준 유산일 뿐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삶의 터전이라는 것입니다. 아합의 토지 매입 시도는 왕이 백성의 가족과 소유를 빼앗을 것임을 경고한 사무엘의 말에 부합합니다(삼상 8:9-17). 백성의 토지를 가지려 한 마음부터가 죄의 시작입니다. 나봇은 땅매각이 여호와께서 금한 일임을 이유로 들어 아합의 요구를 거절합니다. 나봇의 거절은 핑계가 아니라 하나님과 말씀에 대한 진정한 순종 행위였습니다.

그의 대답(3-4)은 유산(기업)으로서의 ‘땅’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와 중요성을 상기시킵니다. 첫째, 땅의 소유주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각 지파와 가문에게 땅을 기업으로 수여하셨습니다. 이는 각 가정에게 삶을 지탱할 가장 기본적인 터전을 제공하기 위함입니다. 둘째, 땅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 관계를 기초로 합니다. 아브라함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그와 이스라엘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창 12:7; 26:3-4; 출 3:17; 신 1:8). 실제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각 지파, 각 가정에게 땅을 분배하셨습니다(수 13-22장). 이때 그들에게 땅을 ‘유산’으로 할당하심으로써 각 가정이 자자손손 영구히 삶의 터전을 확보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신 1:8; 6:10-11). 나봇이 “내 조상의 유산”(3,4)을 반복하는 것은 그 포도원이 조상 대대로 물려온 하나님의 기업이며, 자신에게는 이를 지켜 후손에게 유업으로 물려줘야 할 의무가 있음을 함축합니다. 셋째, 언약 백성으로서 분배받은 땅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헌신이 요구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그가 주신 땅에서 그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할 것을 명하셨습니다(신 30:19-20). 따라서 언약과 기업의 약속이 확고히 유지되도록 이스라엘 백성 간에 땅을 영원히 매각하는 것을 율법으로 금하셨습니다(레 25:23).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일시적인 매매가 허용되기도 하나, 희년에 매입자가 땅을 매도자에게 돌려주도록 규례를 정하여 땅의 주인이 바뀌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희년 전에는 언제든 기업을 되사서 회복할 수 있도록 ‘기업 무르는 제도’를 제정하셨습니다(레 25:23-28). 이와 같은 점들을 참작할 때, 나봇의 “(포도원 매각을)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3), “왕께 줄 수 없다”(4)는 발언은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으며, 이에 순종할 각오임을 드러냅니다.

나봇과 달리 아합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기업'의 의미와 그가 명령한 규례를 가볍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가 백성의 땅을 사들이려 한 것은 부친 오므리가 율법을 어기고 세멜에게서 땅(사마리아)을 매입한 일(16:24)에서 영향을 받았을 수 있습니다.

 

이세벨의 계책(4-10)

세상은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려는 우리의 뜻을 굽히려 합니다. 세상과 타협하는 것은 융통성이 아닙니다. 세상과 타협한 일은 우리의 신앙과 영혼의 건강을 위협하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옵니다. 우리는 세상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는 용기를 구해야 합니다. 세상을 두려워하면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면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길 힘을 주십니다.

4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아합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내 조상의 유산을 왕께 줄 수 없다 하므로 아합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왕궁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식사를 아니하니 5그의 아내 이세벨이 그에게 나아와 이르되 왕의 마음에 무엇을 근심하여 식사를 아니하나이까 6왕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네 포도원을 내게 주되 돈으로 바꾸거나 만일 네가 좋아하면 내가 그 대신에 포도원을 네게 주리라 한즉 그가 대답하기를 내가 내 포도원을 네게 주지 아니하겠노라 하기 때문이로다 7그의 아내 이세벨이 그에게 이르되 왕이 지금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시나이까 일어나 식사를 하시고 마음을 즐겁게 하소서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왕께 드리리이다 하고 8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들을 쓰고 그 인을 치고 봉하여 그의 성읍에서 나봇과 함께 사는 장로와 귀족들에게 보내니 9그 편지 사연에 이르기를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에 높이 앉힌 후에 10불량자 두 사람을 그의 앞에 마주 앉히고 그에게 대하여 증거하기를 네가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게 하고 곧 그를 끌고 나가서 돌로 쳐죽이라 하였더라(4-10)

나봇의 포도원에 대한 아합의 소유욕은 이세벨의 악랄한 계책으로 진전됩니다. 포도원 거래가 성사되지 않자 아합은 마음이 언짢고 답답했습니다. 근심과 답답함(4)은 앞서 벤하닷을 살려둔 대가로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죽음 예고를 들었을 때의 심정이었습니다(20:34).

아합은 이처럼 어떤 일 때문에 수틀리면 이성적으로 원인과 대책을 헤아리기보다는 감정적으로 받고 감정적으로 반응했습니다. 그는 토라진 아이마냥 침대로 들어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음식을 거부했습니다. 이세벨은 아합이 대체 무슨 일로 밥도 안 먹고 침울해 있는지를 묻습니다. 이에 아합은 이전에 갈멜산 사건을 그녀에게 보고해줬듯(19:1) 이번에도 자신과 나봇의 일을 들려줍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나봇에게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포도원을 가지려 했음은 자세히 말하지만, 나봇에 대해서는 그가 거절했다는 점만 언급합니다. 아합이 이세벨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은 데에는 그녀를 통해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갈멜 산 사건을 들려준 이후에 이세벨이 엘리야를 겁주어 달아나게 하지 않았습니까(19:1-3).

한편 아합의 말을 들은 이세벨은 ‘당신이 지금 이스라엘에 왕권을 행사하고 있는 겁니까’라며 어처구니없어합니다(7). 왕이란 자가 백성의 소유를 맘대로 빼앗지 못해 끙끙대고 있다니! 시돈의 공주였던 그녀에게는 이해 불가한 부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왕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야 하고, 그에 따라 백성의 땅을 보호해야 하지만(신 17:14-20), 이방 왕은 절대적인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세벨은 포도원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아합에게 일어나 밥도 먹고 마음을 풀라며, 그를 북돋웁니다. 또한 자기가 나봇의 포도원을 아합에게 줄 것이라 약속합니다. 이세벨은 ‘나’(7)를 강조하며, 자신에게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아 왕에게 줄 능력과 방책이 있음을 은근히 과시합니다. 앞서 아합이 벤하닷과 조약을 맺으며 보여 주었던 교만한 태도(20:34)와 맞먹습니다.

이세벨은 이처럼 적극적인 데다가 지력과 결단력과 추진력까지 갖춘 여인이었습니다. 다만 문제는 이 장점들을 악행을 저지르는 데 사용하고, 아합을 부추겨 죄짓게 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녀는 포도원을 가로채기 위해 나봇에게 누명을 씌우려 합니다. 구체적인 계획을 담은 편지를 아합의 인장으로 봉한 후 나봇의 성읍 장로들과 귀족들에게 보냅니다. 이로써 자신이 왕권을 수행합니다. 이세벨은 나봇이 포도원을 지키려 한 이유인 ‘기업에 대한 하나님의 율법’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봇을 모함하여 죽이려 할 때는 ‘율법’을 제반 활용했습니다. 금식을 선포할 상황을 만들고, 나봇을 높은 곳(또는 지위)에 세우고, 불량배 두 명을 증인으로 준비시키고(신 17:6), 사형이 마땅한 죄목으로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고(출 22:28) 위증하도록 조치하고, 율법에 따라 나봇을 성 밖에서 돌로 치도록(레 24:10-16) 명했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의 행악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는다’(약 1:15)는 사례를 보여줍니다. 그들의 ‘죄’ 뒤에는 ‘사망’만이 따를 것입니다.


자기 자랑과 교만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입니다. 우리의 자랑은 십자가로 이미 승리하셨고 마침내 완전한 승리를 이 세상에 선포하실 주님 예수 그리스밖에 없습니다. 성도는 보이지 않지만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시자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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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20-04)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받은 아합

열왕기상 20장 35-43절


1940년대 많은 성도들이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신앙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 투옥되었고, 목숨을 바치기도 했습니다. 당시 삼척에 끝까지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던 최인규 권사가 있었습니다. 경찰서장은 그에게 똥지게를 지우고 “나는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최인규다”라는 글을 가슴에 달고 거리로 끌고 다녔습니다. 그의 온 몸에는 이미 모진 고문 자국이 피얼룩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지켜보던 친구 한 사람이 경찰서장을 찾아가 부탁했습니다. “나는 최인규의 친구 자국성이오, 내 친구는 본래 정신이상자라 헛소리를 잘하오. 그러니 그를 풀어주시오”. 이 말을 들은 경찰서장은 오히려 “미친 것은 최인규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오. 예수를 믿으려면 최인규처럼 믿으시오. 신념을 가지고 말이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핍박하는 사람에게 적당한 눈속임으로 나의 편안을 찾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믿으려면 최인규처럼 믿어야 참된 믿음입니다.

 

본문에는 하나님의 긍휼함을 받고,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이스라엘의 왕이 나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심으로 말미암아 강한 아람왕 벧하닷의 침공을 두 번이나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자신의 능력으로 생각해 자신의 생각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이 교만한 이스라엘 왕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책해 나가시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선지자가 전한 여호와의 말씀(35-37)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질 때가 있습니다. 믿음은 이에 대해 순종을 선택할 것인가 거부를 선택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섭니다. 우리는 마음의 태도를 점검해야 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승리를 이루신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기 평판에 도취하여 오만한 아람 왕을 살려 보낸 아합 왕에게 하나님꼐서는 생명의 대가를 치르게 하십니다.

35선지자의 무리 중 한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그의 친구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치라 하였더니 그 사람이 치기를 싫어하는지라 36그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나를 떠나갈 때에 사자가 너를 죽이리라 그 사람이 그의 곁을 떠나가더니 사자가 그를 만나 죽였더라 37그가 또 다른 사람을 만나 이르되 너는 나를 치라 하매 그 사람이 그를 치되 상하도록 친지라(35-37)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아합에게 보내어 심판의 소식을 전하기 전에, 선지자의 상징적인 행동을 통해 아합에게 요구한 것이 순종이었음과 불순종의 대가가 죽음임을 알리십니다. 이 선지자는 “선지자의 무리 중 한 사람”(35)이며, 앞에 등장했던 선지자(13,22,28)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선지자의 무리”는 문자적으로 ‘선지자의 아들들’로 선지자 양성 훈련을 받고 있는 학생들을 가리킵니다. 선지자 학교가 성경에 처음 언급된 것은 사무엘 시대이며, 사무엘이 그곳의 지도자였습니다(삼상 19:20). 현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는 벧엘(왕하 2:3), 여리고(왕하 2:5), 길갈(왕하 4:38), 에브라임(왕하 5:22) 등에 많은 생도들이 상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옵니다.

본문의 선지자는 여호와의 명을 받아 그의 친구에게 “너는 나를 치라”고 말합니다(35절). 이 명령에는 ‘제발’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어 상대방이 꼭 들어주기를 바라는 요청임을 알립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때리기를 싫어했습니다. 여기서 ‘싫어했다’(35)는 동사는 ‘거절했다’, ‘거부했다’의 뜻이며, 좋고 싫고를 떠나 그가 의지적으로 치는 행동을 거부했음을 나타냅니다. 그가 어떤 이유로 거절했든지 간에 그 결정은 ‘여호와의 말씀’보다 자신의 감정, 생각, 판단, 경험 등을 앞세운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멸하려고 작정한 벤하닷을 아합이 살려준 행동(42,34)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선지자는 때리기를 거부한 친구에게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36)고 선언함으로써 불순종이 그의 죄목임을 확증합니다. 이어서 그가 선지자를 치지(나카) 않았기 때문에 죄에 대한 형벌로 사자가 그를 칠(‘나카’, “죽이리라”, 36)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이 예언 후 그 친구는 선지자의 곁을 떠났고, 예언대로 사자가 그를 발견하여 쳐(나카) 죽였습니다. 이 사람의 죽음은 아합에게 임할 운명을 미리 보여줍니다. 또 이 사건은 여로보암 때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 명령에 불순종하여 사자에게 죽임 당한 일을 상기시킵니다(13:14-26). 이 모든 사건은 불순종의 죄가 엄중하며 그 심판 또한 엄중하고 피할 수 없음을 교훈합니다.

한편 선지자는 또 다른 사람을 찾아 그에게도 자신을 치라고 요구합니다(37). 이 사람은 선지자에게 상처를 입힐 만큼 세게 쳤습니다. 과한 폭력을 쓴 것으로 보아, 어쩌면 앞선 친구의 죽음을 목격했거나 소식을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이후 선지자는 양 눈을 덮개로 가리고 나타나는데(38,41), 이는 변장의 목적도 있지만(38) 두 번째 사람에게 맞아 눈을 다쳤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위 사건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명령이 ‘순종’만을 요구한다는 점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그의 주권적인 계획과 판단 하에 이루어지며, 그 안에는 그의 공의와 인애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 등으로 판단하려는 성향이 있어 때때로 그 명령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거나 명령을 거부하기도 합니다. 선지자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심판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명령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이에 불복하고 니느웨와 완전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떠납니다(욘 1:1-3).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께 친히 징조를 구하라는 명령을 받은 아하스 왕은 여호와를 시험하지 않겠다며 징조를 구하지 않습니다(사 7:11-12). 신약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부정한 짐승들을 보여주며 잡아먹으라고 세 번이나 명하시지만, 그는 율법에 부정한 짐승 먹는 것을 금하므로 먹지 않겠다고 모두 거절합니다(행 10:10-16). 이들 모두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하는 데에는 자신의 적정한 이유가 있으며, 그 이유를 하나님의 명령보다 더 우위에 두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행위는 단순히 하나님 명령에 대한 불순종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효화하는 행동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앞세우지 않고 ‘가라’는 명령에 따라 미지의 땅으로 출발하는 아브라함의 순종(창 12:1-4)이 성도가 실천해야 할 순종의 태도입니다.

 

아합에게 예고된 하나님의 심판(38-43)

우리는 잠시 작은 승리 앞에서 승리에 도취되어 긴장감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승리가 스스로의 능력처럼 오만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내세울 때는 우쭐하고 하나님께는 우물쭈물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인정, 소유권 인정, 그것이 참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간절히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자는 절대로 모른척하지 않으십니다.

38선지자가 가서 수건으로 자기의 눈을 가리어 변장하고 길 가에서 왕을 기다리다가 39왕이 지나갈 때에 그가 소리 질러 왕을 불러 이르되 종이 전장 가운데에 나갔더니 한 사람이 돌이켜 어떤 사람을 끌고 내게로 와서 말하기를 이 사람을 지키라 만일 그를 잃어 버리면 네 생명으로 그의 생명을 대신하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은 한 달란트를 내어야 하리라 하였거늘 40종이 이리 저리 일을 볼 동안에 그가 없어졌나이다 이스라엘 왕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스스로 결정하였으니 그대로 당하여야 하리라 41그가 급히 자기의 눈을 가린 수건을 벗으니 이스라엘 왕이 그는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인 줄을 알아본지라 42그가 왕께 아뢰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네 손으로 놓았은즉 네 목숨은 그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은 그의 백성을 대신하리라 하셨나이다 43이스라엘 왕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그의 왕궁으로 돌아가려고 사마리아에 이르니라(38-43)

하나님께서는 아합에게 그가 불순종의 심판으로 죽게 될 것임을 예고하십니다. 앞에서 상해를 입은 선지자는 아합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기 위해 길가에서 그를 기다렸습니다. 그는 두 눈을 가려 전투에서 부상 당한 병사처럼 위장한 상태라(38), 그의 정체를 은폐할 수 있었습니다(41).

아합이 지나가자 선지자는 그를 소리쳐 불러, 가상의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이런 방식은 나단 선지자나 드고아 여인이 다윗에게 할 말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입니다(삼하 12:14; 14:5-18). 선지자는 자신이 전장에서 포로(또는 죄수) 한 명을 지키라는 명을 받았는데, 잠깐 다른 일을 보는 새에 그가 도망가, 이제 자신의 생명을 바치거나 은 1달란트를 물어내야 할 형편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배상이 너무 과하므로 선처하여 줄여달라는 요청입니다. 노예 몸값이 은 30세겔이고(출 21:32), 오므리가 매입한 사마리아 산지 가격이 은 2달란트(16:24)인 점을 고려한다면, 은 1달란트(3,000세겔)는 엄청난 액수입니다. 목숨이나 고액의 몸값은 벤하닷을 살려준 아합의 죄가 그만큼 위중함을 암시합니다.

사정을 들은 아합은 그가 자초한 일이므로 원래 정한 대로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립니다. 이 말에 선지자는 재빨리 눈을 가린 수건을 풀었고, 아합은 이내 그가 선지자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진멸’하기로 작정한 벤하닷을 아합이 풀어줬으므로 아합은 벤하닷의 목숨을 대신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아람 백성의 목숨을 대신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합니다(42). 아합이 벤하닷을 석방한 행동은 하나님께서 진멸하라고 준 기회를 자기의 권한으로 악용한 것이며 방심하여 왕의 책무를 잊은 것입니다. 이 일은 과거 사울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아각 왕을 살려둔 사건과 흡사합니다(삼상 15:9). 사울(과 백성)이 아각 왕을 살려두고 최상의 짐승들을 따로 남긴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없으며 그 말씀의 엄중함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데서 비롯된 행동이었습니다. 사울은 살려둔 짐승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 그가 기뻐할 것이라며 자신의 불순종과 죄를 합리화했습니다(삼상 15:15, 21). 그러나 외면의 행실이 내면의 동기와 태도와 부합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순종에 앞서 그것부터 하나님 앞에 악이고 죄입니다. 사울은 자신이 무찌른 상대방 왕에게 위세를 뽐내고, 백성에게 용맹하고 자비로운 군주의 모습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사무엘로부터 하나님의 꾸짖음을 들었을 때에도 백성의 눈치를 보았습니다(삼상 15:30). 아합이 적대국 왕과 조약을 맺은 결정 또한 국제, 정치, 상업 등 상호의존과 유익을 추구한다는 자기 합리화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도 상대국이나 이스라엘에게 권위와 자비가 있는 군주의 모습을 보이는 것을 택했습니다. 아합이나 사울은 이스라엘의 대적을 제거하려는 하나님의 결정이 공의이며, 이스라엘을 향한 보호책이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결국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써 사울은 왕권을 빼앗기고(삼상 15:23,26) 나중에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삼상 31장). 아합 또한 이후 아람과의 전쟁 중에 목숨을 잃게 됩니다(22:35). 그의 자손들과 백성마저 아람의 핍박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됩니다(왕하 13:3). 아합은 벤하닷과의 조약이 자신과 나라에 이득이라고 생각했겠으나 이스라엘과 아람은 결코 화친할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그는 생각지 못한 청천벽력 같은 하나님의 심판 예고에 낙심하고 답답한 심정을 갖고 궁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근심하고 답답하여”(43)란 표현은 후회나 죄책감이 아닌 언짢고 화난 상태를 뜻합니다. 이후 나봇의 포도원을 갈취하지 못했을 때에도 같은 모습을 보입니다(21:4). 아합도 죄를 뉘우칠 때는 옷을 찢고 금식하며 스스로 겸비할 줄 아는 자입니다(21:28). 이런 점을 종합하면, 아합은 이번에 자신의 불순종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심각한 죄인지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 같습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삶에 중독되어 자기만족만을 추구하며 사는 자들에겐 성장도 성찰도 없습니다. 자기 합리화밖에 모는 성인 아잉서 객관적으로 성찰하며 돌이켜 회개하고 변화를 지향하고 율례를 보존하는 어른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성도로 성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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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20-02)

 


이스라엘과 아람의 두 번째 전쟁

열왕기상 20장 22-34절


우리 속담에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은혜를 받아서 감사해야 하는데, 오히려 무례하게 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합 왕에게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마 왕은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본문에서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람이 전쟁을 계획하기도 전에 그들의 계획을 아합에게 알리셨습니다. 벤하닷의 신하들은 앞선 패전 원인을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산의 신이었다는 점으로 결론지었습니다. 이에 벤하닷에게 골짜기에서 전쟁할 것을 권하고 승리를 확증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대패했고 벤하닷은 사로잡힙니다. 아합은 아람의 세력을 제지할 기회를 얻었으나, 어리석게도 벤하닷과 조약을 맺고 그를 살려둡니다.

 

이스라엘과 아람의 두 번째 전쟁(22-34)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악한 세력으로부터 공격당하기 전에 미리 준비하게 하십니다. 성도는 영적 전쟁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대비해야 합니다. 어떤 상항을 다 하시는 하나님께서 미리 주신 말씀대로 싸우면 반드시 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대적의 공격을 이겼다 할지라도 교만하지 말고 또 다른 공격에 대비할 수 있도록 말씀을 따라 항상 깨어 준비해야 합니다.

22그 선지자가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이르되 왕은 가서 힘을 기르고 왕께서 행할 일을 알고 준비하소서 해가 바뀌면 아람 왕이 왕을 치러 오리이다 하니라 23아람 왕의 신하들이 왕께 아뢰되 그들의 신은 산의 신이므로 그들이 우리보다 강하였거니와 우리가 만일 평지에서 그들과 싸우면 반드시 그들보다 강할지라 24또 왕은 이 일을 행하실지니 곧 왕들을 제하여 각각 그 곳에서 떠나게 하고 그들 대신에 총독들을 두시고 25또 왕의 잃어버린 군대와 같은 군대를 왕을 위하여 보충하고 말은 말대로, 병거는 병거대로 보충하고 우리가 평지에서 그들과 싸우면 반드시 그들보다 강하리이다 왕이 그 말을 듣고 그리하니라 26○해가 바뀌니 벤하닷이 아람 사람을 소집하고 아벡으로 올라와서 이스라엘과 싸우려 하매 27이스라엘 자손도 소집되어 군량을 받고 마주 나가서 그들 앞에 진영을 치니 이스라엘 자손은 두 무리의 적은 염소 떼와 같고 아람 사람은 그 땅에 가득하였더라 28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아람 사람이 말하기를 여호와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은 아니라 하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 큰 군대를 다 네 손에 넘기리니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29진영이 서로 대치한 지 칠 일이라 일곱째 날에 접전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하루에 아람 보병 십만 명을 죽이매 30그 남은 자는 아벡으로 도망하여 성읍으로 들어갔더니 그 성벽이 그 남은 자 이만 칠천 명 위에 무너지고 벤하닷은 도망하여 성읍에 이르러 골방으로 들어가니라 31○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말하되 우리가 들은즉 이스라엘 집의 왕들은 인자한 왕이라 하니 만일 우리가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고 테두리를 머리에 쓰고 이스라엘의 왕에게로 나아가면 그가 혹시 왕의 생명을 살리리이다 하고 32그들이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고 테두리를 머리에 쓰고 이스라엘의 왕에게 이르러 이르되 왕의 종 벤하닷이 청하기를 내 생명을 살려 주옵소서 하더이다 아합이 이르되 그가 아직도 살아 있느냐 그는 내 형제이니라 33그 사람들이 좋은 징조로 여기고 그 말을 얼른 받아 대답하여 이르되 벤하닷은 왕의 형제니이다 왕이 이르되 너희는 가서 그를 인도하여 오라 벤하닷이 이에 왕에게 나아오니 왕이 그를 병거에 올린지라 34벤하닷이 왕께 아뢰되 내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버지에게서 빼앗은 모든 성읍을 내가 돌려보내리이다 또 내 아버지께서 사마리아에서 만든 것 같이 당신도 다메섹에서 당신을 위하여 거리를 만드소서 아합이 이르되 내가 이 조약으로 인해 당신을 놓으리라 하고 이에 더불어 조약을 맺고 그를 놓았더라(22-34)

이스라엘의 선지자는 내년에 있을 아람의 보복 공격을 예상하고 준비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시겠지만 그것이 이스라엘의 준비를 면제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준비가 승리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벤하닷도 신하들의 조언을 듣고 철저하게 보복을 준비합니다.

(1) 아람의 전투 전략(22-25)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아합에게 보내 아람이 다시 침략할 것을 예고하십니다. 이 선지자는 첫 전쟁 당시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했던 자입니다(13). 이번 하나님의 말씀에는 전쟁 시기와 대책이 포함되었습니다. 아람은 해가 바뀌는 봄에 출정할 것이다. 봄부터 건기가 시작되므로 공격과 전투에 용이하기 때문이며, 이는 벤하닷이 패전의 수욕을 씻기 위해 서둘러 공격할 태세임을 알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합에게 전쟁을 대비해 힘을 기르고(하자크) 준비하라고 지시하십니다. 이는 지난번 승전이 하나님 덕분인 것을 기억하고, 겸손히 전투를 대비하라는 의미입니다.

한편 아람 궁에서는 왕과 신하들이 패전 원인과 후속 방안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이후에 아람의 회의 장면이 나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들의 논의 이전에 그 내용을 이미 간파하셨음을 보여주고, 그의 전지전능함을 드러냅니다. 이스라엘 수도를 공략했다 실패한 아람은 이번에는 신을 공격할 전략을 세웁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지난 전투에서 강했던(하자크) 근원을 그들의 하나님께서 “산의 신”인 데서 찾았습니다(23). 해발 400미터의 구릉지인 사마리아에서 싸웠기에 이스라엘의 신이 능력을 발휘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산 아래 골짜기(평지)에서 접전한다면 이스라엘의 ‘산의 신’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아람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논리입니다.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신’은 모든 면에 전능한 신이 아니라 특정지역이나 지형, 역할 등에만 초월적인 능력을 가진 존재였습니다. 바알을 바다나 비를 관할하는 폭풍의 신으로 여겼듯이, 이스라엘의 여호와를 산에서만 위력을 떨치는 신으로 오인했습니다. 가나안 정착 이래 이스라엘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과 같은 산악지에 성읍을 건축하여 거주해왔고, 산악 전투에 능했습니다. 그렇기에 많은 말과 병거를 가진 군대가 이스라엘에 맞서려면 평지 전투가 유리했습니다. 옛적 드보라와 바락의 시대에 하솔의 군대 장관 시스라가 철 병거 900대를 끌고 기존 강 계곡에서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도 이 점을 참작한 전략이었습니다(삿 4-5장). 그러나 당시 하나님께서는 상황을 역이용하여 건기에 말라 있던 기존 강에 폭우를 내리셨습니다. 불어난 물과 급류로 병마와 병거는 무용지물이 되었고 이스라엘은 승리했습니다. 이런 사건을 알 리 없는 벤하닷의 신하들은 다음 전투의 승리를 확신하며 왕을 설득합니다. 또한 승리를 위한 새 전략으로 동맹국 왕들을 돌려보내고 그 자리에 총독을 세울 것과 패전으로 인해 수효가 준 군대와 말과 병거를 보충하고 재정비할 것을 제안합니다. 신하들은 이같이 만반의 준비를 하고 평지에서 전쟁을 벌이면 아람이 반드시 이스라엘보다 강할(하자크) 것을 반복하며 승리를 확신합니다. 왕은 그들의 주장과 전략을 받아들여 그대로 시행합니다.

그러나 벤하닷이나 신하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산의 신’으로 전제한 것부터 잘못됐음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강할(하자크) 것이라 장담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미 아합에게 힘을 기르게 (하자크) 하셨고 이스라엘의 승전을 보장하셨습니다.

(2) 아람의 침입과 이스라엘의 승리(26-30a)

봄이 되자 하나님의 예고대로 벤하닷이 이스라엘을 침공하지만, 이스라엘의 ‘산의 신’에게 완패합니다. 아람 군대는 아벡으로 올라왔습니다. 장소가 어딘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곳이 평지라는 점은 확실합니다. 이스라엘군도 소집되고 식량을 배급받고 진영을 쳤습니다. 그들은 적은 수의 염소 두 떼 같았고, 상대적으로 수가 많은 아람 군은 땅을 가득 채웠습니다. 이런 때 하나님의 사람이 다시 아합에게 와서 여호와가 승리를 주실 것을 선언했습니다. 이번 승리의 약속은 아랍 사람이 “여호와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평지)의 신은 아니라”고 속단한 데에 대한 하나님의 조치이기도 합니다(28).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승전을 주어 아람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의 백성이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여호와로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전쟁은 각 군대가 대치한 지 7일 째에 시작됐습니다. 적은 염소 무리 같은 이스라엘 자손(27)은 그날 하루에 아람의 10만 보병을 무찔렀습니다. 그날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 27,000여 명은 아벡의 성읍으로 도망했습니다. 그러나 성벽이 그들 위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런 점들은 여리고 성벽이 무너진 사건을 상기시켜(수 6:20)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과 능력을 드러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아람 군대에게 ‘산의 신’으로만 국한되지 않는 ‘전능자’임을 증명하셨습니다. 가뭄 예고와 시작, 갈멜 산에서의 불의 응답, 사마리아 전투에서의 승리와 마찬가지로 이번 아벡에서의 승전에서도 자신의 말씀을 성취하심으로써 아합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여호와임을 알게 하셨습니다(28).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이 하나님께서 누구신지 확실히 깨닫고 그에게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3) 아합과 벤하닷의 조약(30b-34)

아람에게 대승을 거둔 아합은 항복한 벤하닷과 조약을 맺고 맙니다. 벤하닷은 이스라엘에 패하여 신하들과 아벡의 성읍으로 도망했습니다. 앞서 사마리아 전투에서는 마병의 원조를 받아 도망할 수 있었지만(20), 이번에는 전투지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와 무리는 성읍의 가장 구석진 곳(“골방”, 30)에 숨어야 할 만큼 궁지에 몰렸습니다. 하나님을 산의 신으로 여기고 골짜기의 신은 아닐 것이라 판단했던 신하들이나 그들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던 벤하닷은 아람의 완패를 통해 이스라엘 하나님의 전능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하들은 벤하닷을 살리기 위해 이번에는 이스라엘 왕의 취약점을 공략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왕들이 ‘인애’의 왕들(“인자한 왕”, 31)이라는 평을 기억했습니다. 이는 조약 맺을 가능성을 타진해보자는 뜻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지략은 어리석었지만 아합에 대한 전략은 영리했습니다. 그들은 참회와 항복의 표시로 굵은 베를 허리에 여미고, 밧줄 같은 띠를 머리에 두르고, 이스라엘의 왕에게 가겠다며 벤하닷의 허락을 구합니다. 그렇게 하면 아합이 벤하닷의 생명을 살려줄지도 모른다고 설득합니다. 그 후 그들은 자기들이 말한 그대로 실행하여 아합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들은 아합에게 자신들의 왕 벤하닷을 ‘당신의 종’이라고 부르며, 그가 자기 생명을 살려달라고 간청했음을 밝힙니다(32). 아합은 ‘그가 살아있냐’고 물으며 뜻밖에도 벤하닷을 자기의 “형제”라고 대답합니다(32). 신하들은 이를 좋은 징후로 여겨 재빨리 아합의 말을 받아 ‘벤하닷이 아합의 형제’라고 응수합니다. 아합은 벤하닷을 데리고 오라고 명합니다. 또한 그가 오자 병거에 태워 자신과 동등한 대접을 해줍니다.

이에 벤하닷은 자신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두 가지 조건을 제시하며 아합에게 조약을 맺자고 회유합니다. 첫째, 부친인 벤하닷 1세가 아합의 부친에게서 뺏은 모든 성읍을 아합에게 반환한다는 약조입니다. 이때 아합의 부친은 오므리가 아닌 ‘바아사’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바아사 때(15:20) 벤하닷 1세가 북이스라엘의 여러 북방 성읍을 친 일이 있었는데(15:2), 이후 엘라와 오므리 때에 그 성읍들을 되찾았다는 기록이 따로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 벤하닷 1세가 사마리아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성읍을 만든 것처럼 다메섹에 아합의거리를 만들라는 제안입니다.

아합은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벤하닷과 조약을 맺고 그를 풀어줍니다. 하나님을 산의 신으로 모욕하고 이스라엘을 업신여겨 쳐들어온 그의 죄는 헤아리지 않고, 정치, 경제, 사회적 유익만 따져 조약을 맺은 것은 섣부르고 어리석은 처사입니다. 더구나 ‘바로 내가 이 조약으로 당신을 풀어주겠소’라고 하며(34), 벤하닷을 풀어줄 권한이 자신에게 있고, 그에게 호의를 베푸는 대인이 바로 자기 자신임을 과시합니다. 이처럼 아합은 승전을 위해서는 하나님께 순종했으나 승전 후에는 순종의 길을 버렸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심판만 남아 있습니다.


사단은 지금도 다양한 미끼로 성도를 유혹하는데, 성도가 야망이나 욕심에 빠지게 되면 결국 세상과 타협하고 말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할 수 없습니다. 영적 대적과의 싸움에서 온전히 승리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대로 준비하고 믿음으로 싸우며 영적 야합을 거절하고 악한 요소를 철저히 제거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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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20-02)


이스라엘과 아람의 첫 번째 전쟁()

열왕기상 20장 13-21절


교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주신 청지기의 자리를 벗어나서 자신이 주인 되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에덴 동산을 맡기셨을 때, 에덴의 관리자인 청지기로 맡기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처럼 주인이 되려고 했을 때, 아담은 범죄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낮추시는 분입니다. 어쩌면 절대 권력자가 망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낮추시기 떄문일 것입니다.

 

아람과의 전쟁 전에 하나님꼐서 한 선지자를 보내 아합에게 승전을 약속하십니다. 또한 아합이 묻는 질문에 답하시며 전투 전략을 알리십니다. 아합은 말씀에 따라 지방 고관의 청년들을 앞세워 먼저 아람을 공격하게 합니다. 아람 왕과 동맹국의 왕들은 술에 취해 있다가 불시의 공격을 받고 도망합니다. 아합은 출정하여 아람을 크게 격파합니다. 승전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이 또 증명됩니다.

 

이스라엘과 아람의 첫 번째 전쟁(II)(13-21)

우리는 자신의 인생이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존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도 소유권을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모든 소유와 능력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겸손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겸손은 모든 것을 소유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앙에서 나옵니다.

13한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아합 왕에게 나아가서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이 큰 무리를 보느냐 내가 오늘 그들을 네 손에 넘기리니 너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셨나이다 14아합이 이르되 누구를 통하여 그렇게 하시리이까 대답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로 하리라 하셨나이다 아합이 이르되 누가 싸움을 시작하리이까 대답하되 왕이니이다 15아합이 이에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을 계수하니 이백삼십이 명이요 그 외에 모든 백성 곧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을 계수하니 칠천 명이더라 16○그들이 정오에 나가니 벤하닷은 장막에서 돕는 왕 삼십이 명과 더불어 마시고 취한 중이라 17각 지방의 고관의 청년들이 먼저 나갔더라 벤하닷이 정탐꾼을 보냈더니 그들이 보고하여 이르되 사마리아에서 사람들이 나오더이다 하매 18그가 이르되 화친하러 나올지라도 사로잡고 싸우러 나올지라도 사로잡으라 하니라 19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과 그들을 따르는 군대가 성읍에서 나가서 20각각 적군을 쳐죽이매 아람 사람이 도망하는지라 이스라엘이 쫓으니 아람 왕 벤하닷이 말을 타고 마병과 더불어 도망하여 피하니라 21이스라엘 왕이 나가서 말과 병거를 치고 또 아람 사람을 쳐서 크게 이겼더라(13-21)

성도는 자신의 소유와 능력으로 인해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주인이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세상과의 타협에는 적정선이 없슨비다. 세상의 가치관을 수용하면 신앙에 있어서 계속적인 후퇴를 초래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과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려믄 헛된 노력을 정산하고 세상과 당당히 맞서야 합니다.

(1) 승리를 약속하신 하나님(13-14)

하나님께서는 아합에게 선지자를 보내 이스라엘의 승전을 약속하십니다. 벤하닷은 아합이 ‘전쟁이나 끝나고 자랑하라’고 훈수를 둔자, 이에 분개하여 사마리아를 향해 공격 준비를 명했습니다(11-12). 그런데 이때 사마리아 궁에서는 한 선지자가 아합 앞에 나아왔습니다. 13절 원문에는 ‘보라!’라는 감탄사가 문장 맨 앞에 나와, 선지자의 등장이 뜻밖의 일임을 알립니다. 당시 여호와의 선지자들이 이세벨에게 죽임 당했고(18:4,13), 엘리야는 혼자만 남았다고 외로워하고 두려워했습니다(19:10,14).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나 이 선지자 외에도 그의 주권적 계획 하에 또 다른 선지자(35), 미가야 선지자(22:8), 오바댜가 굴에 숨겨둔 100명의 선지자들(18:4) 등을 보호하고 계셨습니다. 선지자는 여호와의 말씀으로 이스라엘의 승리를아합에게 전합니다. 이때 사마리아를 향해 진영을 갖춘 아람 군대는 “큰 무리(또는 군대)”였습니다(13). 본문에 아람 군의 수는 언급되지 않았으나, 이듬해에 아람이 다시 이스라엘을 공격했을 때 보병이 10만 명에 달한 점을 참고하면(29) 이번 아람의 병력 또한 10만 명 내외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큰 군대를 아합의 손에 넘기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아합은 하나님의 승전 예고에 어리둥절하여 대체 누구를 통해 승리를 주실지 물어봅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이 주축을 이룰 것이라 답하십니다. 이에 아합은 누가 싸움을 시작할지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선제공격을 하라고 지시하십니다. 이와 같이 오늘 하나님께서 아합처럼 우상을 숭배하고 악을 행하는 자에게 승리를 약속하신 것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 일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그의 언약적 사랑과 긍휼이 깃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승전의 기적을 행하시는 목적은 가뭄이나 갈멜 산 사건과 마찬가지로 그가 여호와인 것을 아합과 이스라엘이 깨닫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13; 18:36). 그들이 하나님께 되돌아오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의 청중과 현대 독자에게도 그와 같은 사랑과 긍휼이 유효합니다. 하나님에게서 돌아선 자가 있다면 이제는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2) 이스라엘의 승리(15-2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적은 수를 이용하여 큰 무리의 아람을 이기게 하실 예정이었습니다. 아합은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대로(14) 각 지방의 고관 청년들을 소집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232명으로 적은 수였습니다. 이들 외에 소집된 이스라엘 백성은 7천 명이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15)으로 지칭되었으나, 이는 백성 중 20세 이상으로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용사의 모든 수가 아니라 이번 전투에 대표로 소집된 용사의 수를 나타냅니다. 이 숫자는 문자적으로 7천 명 또는 상징적인 수로 볼 수도 있습니다. 7천이라는 수는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바알에게 복종하지 않은 자들’(19:18)의 수와 일치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준비하신 자들임을 암시합니다. 적군의 수에 비해 턱없이 작은 이스라엘 군의 규모는 하나님께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병사의 수나 말과 병거의 수가 문제가 되지 않음을 함축합니다. 이는 사사 시대에 하나님께서 바락에게 시스라 군대에 맞설 용사로 두 지파에서 1만 명을 소집하라고 지시한 데에서도 나타납니다(삿 4:6). 이번 아람과의 전투에서 선두에 설 232명의 청년의 수효 또한 사사 시대에 미디안에 대항한 기드온의 용사 300명을 떠오르게 합니다. 당시 세 지파에서 소집된 32,000명 중 1만명 만이 참전하기 위해 남았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들도 많다고 하셨고, 결과적으로 기드온과 300명만으로 미디안을 상대하여 대승을 거두게 하셨습니다(삿 7장).

이스라엘 군대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아람에게 큰 승리를 거둡니다. 이스라엘은 정오에 232명의 고관 청년들을 먼저 출정시켰습니다. 그때 벤하닷은 동맹국 왕들과 함께 술에 취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대적들이 허술한 틈을 공략하셨습니다. 전쟁 중에 술에 취한 벤하닷의 모습은 오므리 장군을 전장에 보내고 디르사에 남아 술에 취해 있었던 엘라 왕을 떠오르게 합니다(16:9). 이런 연결성은 엘라가 방심해 있다가 생각지도 못한 병거 지휘관 시므리에게 암살당했던 것처럼(16:10), 아람 왕도 죽든지 아니면 적어도 큰 해를 입게 될 것을 독자로 하여금 기대하게 만듭니다. 벤하닷은 이스라엘의 움직임을 보고 받고, 군사들을 보내 무슨 일인지 알아보게 합니다. 그들은 사마리아 성에서 사람들이 나와 아람 진영을 향해 오고 있다고 보고합니다. 그들이 본 자들은 선두에서 진격하는 232명의 청년 무리였을 것입니다(17).

벤하닷은 이스라엘이 평화를 위해(“화친하러”) 나오더라도 사로잡고, 전쟁을 위해 나오더라도 사로잡으라고 명합니다(18). “화친”을 언급한 것을 보면 벤하닷이 청년 무리를 항복을 전하러 오는 아합의 사절단으로 오인한 것으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는 술에 취한 상태였으므로 판단력이 흐려 어떤 상황인지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한편, 적군을 사로잡으라는 벤하닷의 두 명령 원문에 ‘산 채로’라는 말이 각각 나와 강조되었습니다(18). 벤하닷이 그들을 왜 생포하려 했는지 이유는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람의 병력 규모가 이스라엘과 비할 수 없이 컸으므로, 이스라엘과 혈전을 벌이지 않아도 그들을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생포하라는 명령은 그의 방심과 과시욕에서 나온 언사였습니다. 한편 이스라엘 군대는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이 선두에 섰고, 나머지 7천 명의 병사가 뒤따라 나왔습니다. 청년들과 나머지 이스라엘 용사는 일대일로 적군을 맞닥뜨려 그들을 무찔렀습니다. 아람 병사들은 전세가 기우는 것을 인지하고 도망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뒤를 추격했습니다. 이때 벤하닷도 말을 타고 마병들과 함께 피했습니다. 이들은 패전에 대비해 왕의 탈주를 돕는 수행원들로 이해됩니다. 또한 그가 술에 취했기에 도움 없이 혼자 도망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는 사마리아를 초토화할 것이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의 신들에게 어떤 벌이라도 받겠다고 떠벌렸지만(10), 그의 위풍은 결국 허풍이 돼버렸습니다. 1절에서 “아람 왕”으로 불리며 등장한 벤하닷은 20절에서도 “아람 왕”으로 불리며 퇴장하나, 그의 모습은 1절과 전혀 다른 형국입니다. 등장 때의 벤하닷은 32명의 동맹 왕의 대표로서 큰 군대를 거느리며 사마리아를 공격하러 온 용맹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퇴장 때는 전장에서 술에 취해 자제력과 판단력을 잃은 왕, 오판으로 아람의 많은 병사를 죽게 했으며, 패배 속에 수욕을 견디며 도망하는 왕의 모습입니다. 이와 반대로 이스라엘 왕 아합은 힘없고 굴욕을 참아야 하는 왕으로 등장했으나, 마지막은 출정하여 용맹스러운 활약을 펼치고 승리하는 왕으로 나옵니다. 아합은 벤하닷 군대의 말과 병거를 치고, 아람 사람을 큰 격파로 격파하며 대승을 거뒀습니다. 이스라엘이 대승을 거둠으로써 승리를 약속하고 예고하신 여호와의 말씀(13)이 성취되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사마리아 전투 전체(1-21)의 구조상으로도 단락 중간 즈음에 나와 벤하닷과 아합의 상황을 반전시키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이스라엘에게 허락한 승전은 이스라엘 군대보다 열 배 이상 많은 군대를 상대하여 얻은 승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이 인간의 계산으로는 불가한 일을 성취하심으로써 그의 전능함을 이스라엘과 열방에게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승전 약속의 성취를 통해 아합과 이스라엘이 그를 “스스로 있는 자”(출 3:14),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여호와”임을 깨닫기 바라셨습니다(13). 앞서 갈멜 산에서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의 대결을 지켜봤던 백성들은 하나님의 불의 응답에 놀라 그가 참 하나님이심을 고백했습니다(18:39). 그러나 오늘 전쟁의 승리를 경험한 아합이나 이스라엘 백성의 입에서는 하나님을 여호와로 고백하는 내용이 기록되지 않아 긴장감을 줍니다.


힘의 노리가 지배하는 세상 질서 속에서 더 강함되기를 추구하기보다 약자의 어려움을 돌봐주며 강함되시는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보이는 것만 의지하는 인간적인 판단과 계산을 헛된 자만심을 갖게 합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의지하며 그것을 자랑하지 말고, 모든 일을 주관하시며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께서 주신 십자가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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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20-01)


이스라엘과 아람의 첫 번째 전쟁(I)

열왕기상 20장 1-12절


교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주신 청지기의 벗어나서 자신이 주인 되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에덴동산을 맡기셨을 때, 에덴의 관리자 청지지로 맡기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을 때, 그곳에 주인이 되려고 했을 때, 아담은 범죄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낮추시는 분이십니다. 어쩌면 절대 권력자가 망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낮추시기 때문입니다.

 

북이스라엘과 아람 사이에 전쟁이 임박했습니다. 벤하닷은 32명의 왕을 이끌고 올라와 사마리아를 포위했습니다. 그는 아합에게 항복하고 조공을 바치라고 위협했습니다. 아합은 납작 엎드리며, 요구에 응하겠다고 답합니다. 그러나 벤하닷의 속내는 사마리아를 완전히 집어삼키는 것이었습니다. 벤하닷의 과해진 요구에 아합은 장로들과 대책 회의를 엽니다. 장로들은 요구를 거절하라고 단호히 조언합니다. 벤하닷은 아합이 요구에 불응하자, 사마리아에 대한 공격 준비를 명합니다.

 

이스라엘과 아람의 첫 번째 전쟁(1-12)

그 누구도 자신의 뜻대로 인생을 살아갈 수 없기에 자신의 소유와 능력을 믿고 교만한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우리의 생명과 소유는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소유를 자랑하고 앞으로의 일을 장담하는 것은 모든 것의 주인이자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소유와 능력으로 인해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주인이심을 인정합니다.

1아람의 벤하닷 왕이 그의 군대를 다 모으니 왕 삼십이 명이 그와 함께 있고 또 말과 병거들이 있더라 이에 올라가서 사마리아를 에워싸고 그 곳을 치며 2사자들을 성 안에 있는 이스라엘의 아합 왕에게 보내 이르기를 벤하닷이 그에게 이르되 3네 은금은 내 것이요 네 아내들과 네 자녀들의 아름다운 자도 내 것이니라 하매 4이스라엘의 왕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내 주 왕이여 왕의 말씀 같이 나와 내 것은 다 왕의 것이니이다 하였더니 5사신들이 다시 와서 이르되 벤하닷이 이르노라 내가 이미 네게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너는 네 은금과 아내들과 자녀들을 내게 넘기라 하였거니와 6내일 이맘때에 내가 내 신하들을 네게 보내리니 그들이 네 집과 네 신하들의 집을 수색하여 네 눈이 기뻐하는 것을 그들의 손으로 잡아 가져가리라 한지라 7이에 이스라엘 왕이 나라의 장로를 다 불러 이르되 너희는 이 사람이 악을 도모하고 있는 줄을 자세히 알라 그가 내 아내들과 내 자녀들과 내 은금을 빼앗으려고 사람을 내게 보냈으나 내가 거절하지 못하였노라 8모든 장로와 백성들이 다 왕께 아뢰되 왕은 듣지도 말고 허락하지도 마옵소서 한지라 9그러므로 왕이 벤하닷의 사신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내 주 왕께 말하기를 왕이 처음에 보내 종에게 구하신 것은 내가 다 그대로 하려니와 이것은 내가 할 수 없나이다 하라 하니 사자들이 돌아가서 보고하니라 10그 때에 벤하닷이 다시 그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사마리아의 부스러진 것이 나를 따르는 백성의 무리의 손에 채우기에 족할 것 같으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하매 11이스라엘 왕이 대답하여 이르되 갑옷 입는 자가 갑옷 벗는 자 같이 자랑하지 못할 것이라 하라 하니라 12그 때에 벤하닷이 왕들과 장막에서 마시다가 이 말을 듣고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진영을 치라 하매 곧 성읍을 향하여 진영을 치니라(1-12)

왕들 중 가장 악하다고 평가받은 아합의 기록(16:29-22:40)은 아합과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과 공의의 심판을 함께 묘사합니다. 아합의 통치 개요(16:29-34)와 석 장에 걸친 가뭄과 엘리야와 관련된 사건들(17:1-19:21) 이후, 다시 세 장(20:1-22:40)에 걸쳐 아합 중심의 사건들이 서술됩니다. 이 단락은 아람과의 세 차례 전쟁(20장, 22:1-40)을 기술하며, 그 중간에 나봇의 포도원 사건(21장)을 두고 있습니다. 본문은 제1차 전쟁인 사마리아 전투(1-21절)의 전반부입니다. 앞서 17-19장에서는 가뭄과 비를 통해 하나님께서 바알에 비견할 수 없는 전능자임을 증명했습니다. 이제 20-22장에 묘사된 하나님께서는 첫째, 아람과의 전쟁을 통해 그가 인간 역사의 주관자임을 증명하십니다. 둘째, 전쟁에 개입하고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심으로써 악한 세대 속에서도 자기 백성에 대한 언약적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셋째, 계속 선지자들에게 말씀을 보내어 왕과 백성을 인도하고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넷째, 선포된 말씀을 이루심으로써 그의 전능함을 나타내십니다. 다섯째, 죄의 경고와 심판을 통해 공의를 행사하고, 순종하고 회개하는 자에게는 긍휼과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통치자임을 입증하십니다. 한편 아합에 관해서 20-22장 단락은 그의 죄악을 고발하고 마땅한 심판을 받았음을 알립니다. 아합의 죄목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신앙적인 죄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이득과 판단에 부합되지 않으면 거리낌 없이 버렸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악을 행했을 뿐 아니라 이세벨을 통해서도 범했습니다. 둘째, 사회적인 죄입니다. 아합은 죄 없는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갈취했습니다. 이로써 백성의 권리가 담긴 율법과 사법 질서를 짓밟았습니다. 셋째, 정치적으로 그는 아람 왕 벤하닷을 살려두고 동맹을 맺음으로써 하나님과의 언약을 버렸고, 백성과 후손에게 전쟁의 고통을 지속시켰습니다. 이는 16장의 개요에 서술된 아합의 악행을 증명하고, 그가 왕들 중에 가장 큰 악을 행한 왕임을 재확인해줍니다.

(1) 사마리아를 포위한 아람군대(1)

아람의 벤하닷 2세(주전 약 860-841년)와 그의 군대가 사마리아를 포위하고 공격했습니다. 말과 병거를 끌고 올라온 무리 중에는 32명의 동맹국 왕들도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다메섹 왕 벤하닷처럼 아람과 인근 지역에 있는 도시국가의 우두머리들입니다. 벤하닷이 ‘아람 왕’이라는 대표성을 가진 칭호로 소개된 것과 32명의 왕이 그의 전투에 동참했다는 것(1)은 벤하닷이 실권을 장악한 주체이며, 각 왕들의 나라가 그에게 예속되었음을 암시합니다. 아람도 다윗 대에 이스라엘에 종속되었으나(삼하 8:6), 솔로몬 대에 르손이 그의 대적자로 일어나 다메섹의 왕이 되면서 독립했습니다(11:24). 이스라엘의 분열 이후 이스라엘과 아람의 전세는 뒤바뀌었습니다. 아람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동맹을 맺기 원하는 나라로 부상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바아사와 유다의 아비얌은 다메섹의 벤하닷 1세(주전 약 896-874년)와 각각 동맹을 맺었습니다. 아비얌의 왕위를 이은 아사도 벤하닷에게 화친을 맺고 자신을 지원해달라고 간청하는 입장이었습니다(15:18-24). 그때 벤하닷은 바아사와의 조약을 깨고 아사의 요청에 응하여 이스라엘의 북부 지역을 공격했습니다(15:20).

(2) 벤하닷의 요구와 아합의 대응 1(2-4)

아합은 순순히 항복하고 조공을 바치라는 벤하닷의 요구에 군말 없이 응합니다. ‘벤하닷이 이렇게 말한다’(“벤하닷이 그에게 이르되”, 2)로 시작하는 서찰은 아합의 기를 꺾으려는 기고만장한 벤하닷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는 아합의 은과 금, 아내들, 자녀들이 다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며 모두 자기에게 바치라고 명합니다. 아내들을 바치라는 것은 왕권을 갖겠다는 뜻이며(2:21-22; 삼하 16:21-22), 자녀들을 바치라는 것은 인질로 삼아 활용하겠다는 뜻입니다. 아합은 벤하닷을 “내 주(주인) 왕”으로 부르며(4), 자신과 자신의 소유가 다 벤하닷의 것이라 답합니다. 이전에 유다의 르호보암과 아사가 예루살렘을 사수하기 위해 각각 애굽과 다메섹 왕에게 성전의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내주었듯이(14:26; 15:18), 벤하닷의 도발에 대한 아합의 굴복은 강대국 왕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소극적이고 굴욕적인 대응입니다. 이는 또한 현재 이스라엘이 아람 군대를 당해낼 수 없는 형편임을 암시합니다.

(3) 벤하닷의 요구와 아합의 대응 2(5-9)

벤하닷이 조공을 빌미로 아합을 옥죄어 오자 아합은 급기야 그 요구를 거절하기에 이릅니다. 벤하닷은 사신들을 다시 보내 앞서 요구한 것을 재확인시킵니다. 그뿐 아니라 다음 날 아합과 그의 신하들의 집까지 다 수색하여 그의 소중히 여기는 재물과 사람들을 취해갈 것이라고 통보합니다. 아합은 지난번에는 저자세를 취하고 소극적으로 대응했으나 벤하닷의 요구 조건이 과도해지자 안색을 바꿉니다. 그는 장로들을 다 불러 회의를 열고 사태를 해결할 방안을 찾습니다. 그러면서 벤하닷을 ‘이 자(사람)’로 낮춰 부르며, 그가 악을 도모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7). 이 설명은 벤하닷이 화평을 위해 조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완전히 멸하려고 시비를 건다는 뜻입니다. 아합은 벤하닷이 재산과 자기 가족을 바치라 명했고, 자신이 이를 거절하지 못했음을 덧붙여 실토합니다. 상황이 어쩔 수 없어 자신이 당한 모욕을 알렸을 수도 있고 이를 통해 장로들의 거부 의견을 모으려 했을 수도 있습니다. 현 상황을 들은 장로들은 모두 벤하닷의 요구를 거부해야 한다고 단호히 입을 모았습니다. 이에 아합은 벤하닷이 처음 요구한 것은 들어주겠으나 그 이상의 요구는 들어줄 수 없음을 사신들에게 전달합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벤하닷을 “내 주 왕”으로, 자신은 “(당신의) 종”으로 부르며 아람의 눈치를 살핍니다.

(4) 벤하닷의 요구와 아합의 대응 3(10-12)

아합과 벤하닷 사이에 마지막 신경전이 오가고, 끝내 아람은 사마리아를 공격할 태세를 갖춥니다. 아합이 태도를 바꿔 자신의 명을 기억하자 벤하닷은 분개했습니다. 이에 벤하닷은 만약 자기 발치에 있는(“나를 따르는”, 10) 백성들이 사마리아의 흙먼지 한 숨을 줘 수 있게 된다면, 신들의 어떤 별도 받겠다고 으름장을 놓습니다. ‘흙먼지 한 줌’의 의미는 군사들의 손으로 먼지나 재의 부스러기를 주워 담지도 못할 만큼 사마리아를 초토화하겠다는 뜻입니다.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10)는 엘리야의 생명을 위협한 이세벨의 말에서도 언급된(19:2)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이는 말하는 자의 분노와 확고한 결단을 함축합니다. 아합은 벤하닷의 큰소리에 지지 않고 “갑옷 입는 자가 갑옷 벗는 자 같이 자랑하지 못할 것이라”(11)고 받아칩니다. 한마디로, ‘호언장담하지 말라’는 훈계입니다. 전쟁하러 나서는 병사(“갑옷 입은 자”)가 승전한 병사(“갑옷 벗는 자”)인 양 나대고 있음을 비꼬는 표현입니다. 이번 아합의 회신에는 “내 주왕”이나 “(당신의) 종”이라는 표현(4,9) 없이, ‘(그에게) 전하라’는 명령만 나와 그의 돌변한 태도를 보여줍니다. 왕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던 벤하닷은 아합의 도발을 전해 듣고 바로 공격 준비를 명합니다(12). 군대는 즉각 공격 태세를 갖춥니다. 그런데 실상 벤하닷은 공격 명령만 내렸을 뿐 연회 자리는 뜨지 않았습니다. 이후 정오가 되어 이스라엘이 선제 공격을 해올 때, 그와 왕들은 술에 취해 있었습니다(16). 이런 상황은 벤하닷이 사마리아를 쉽게 함락할 수 있다는 오만에 빠져 방심했음을 보여줍니다.


성도는 보이지 않지만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세상의 것으로 자랑하는 것은 성도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를 자랑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의 자랑은 십자가로 이미 승리하셨고 마침내 완전한 승리를 이 세상에 선포하실 주님 예수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참된 안정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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