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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15-02)


유다의 아사 왕

열왕기상 15장 9-24절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메시지를 주실 때, 대충 정당하게 전하지는 않습니다. 강한 메시지로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특히 죄악 가운데 있을 때는 메시지가 강하고 무겁게 다가옵니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항상 선명하기 때문에, 죄악에 대해서 분명하게 죄라고 지적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 중에는 ‘정당히’라는 표현으로, 세상에 죄악에 순종하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흰색과 검정색이 합해진 ‘회색지대’는 있을 수 없습니다.

 

아사는 다윗처럼 여호와의 눈에 정직하게 행한 왕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통치 전반에 하나님을 의지하며 신앙 개혁운동을 벌이는 등,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헌신했습니다. 그러나 통치 후반에 이스라엘의 침략을 받자 아람의 원조를 구하는 죄를 짓고 맙니다. 아사의 삶은 서 있다고 생각할 때 넘어질까 조심해야 하며(고전 10:12), 넘어졌더라도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삶을 살도록 교훈합니다.

 

유다 왕 아사(9-24)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하거나 좋은 것에 있는 작은 흠을 일컬어 ‘옥의 티’라고 합니다. 흠과 티가 없을수록 그 보석은 더 귀하고 가치 있는 보석이 됩니다. 신앙에서도 하나님께서 원하는 성도는 흠이 없는 아름다운 성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해야 합니다. 힘든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끝까지 인내하시길 바랍니다.

9○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 제이십년에 아사가 유다 왕이 되어 10예루살렘에서 사십일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마아가라 아비살롬의 딸이더라 11아사가 그의 조상 다윗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12남색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내고 그의 조상들이 지은 모든 우상을 없애고 13또 그의 어머니 마아가가 혐오스러운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므로 태후의 위를 폐하고 그 우상을 찍어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으나 14다만 산당은 없애지 아니하니라 그러나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하였으며 15그가 그의 아버지가 성별한 것과 자기가 성별한 것을 여호와의 성전에 받들어 드렸으니 곧 은과 금과 그릇들이더라 16○아사와 이스라엘의 왕 바아사 사이에 일생 동안 전쟁이 있으니라 17이스라엘의 왕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와서 라마를 건축하여 사람을 유다 왕 아사와 왕래하지 못하게 하려 한지라 18아사가 여호와의 성전 곳간과 왕궁 곳간에 남은 은금을 모두 가져다가 그 신하의 손에 넘겨 다메섹에 거주하고 있는 아람의 왕 헤시온의 손자 다브림몬의 아들 벤하닷에게 보내며 이르되 19나와 당신 사이에 약조가 있고 내 아버지와 당신의 아버지 사이에도 있었느니라 내가 당신에게 은금 예물을 보냈으니 와서 이스라엘의 왕 바아사와 세운 약조를 깨뜨려서 그가 나를 떠나게 하라 하매 20벤하닷이 아사 왕의 말을 듣고 그의 군대 지휘관들을 보내 이스라엘 성읍들을 치되 이욘과 단과 아벨벧마아가와 긴네렛 온 땅과 납달리 온 땅을 쳤더니 21바아사가 듣고 라마를 건축하는 일을 중단하고 디르사에 거주하니라 22이에 아사 왕이 온 유다에 명령을 내려 한 사람도 모면하지 못하게 하여 바아사가 라마를 건축하던 돌과 재목을 가져오게 하고 그것으로 베냐민의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하였더라 23○아사의 남은 사적과 모든 권세와 그가 행한 모든 일과 성읍을 건축한 일이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그는 늘그막에 발에 병이 들었더라 24아사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조상들과 함께 그의 조상 다윗의 성읍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여호사밧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9-24)

아사의 선동으로 아람의 벤하닷이 북구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바아사는 단과 이욘과 아벨마임을 포함한 중요한 교역회랑 지대를 일게 됩니다. 그 지역들은 모두 수리아와 페니키아 연안 성읍인 두로, 시돈, 막고 사이를 연결하는 선상에 있습니다.

(1) 하나님을 의지한 아사(9-15)

아사(주전 910-869년)는 여로보암 제20년에 유다의 셋 번째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다스렸습니다. 통치 기간은 41년으로, 므낫세(55년)와 웃시야(52년)에 이어 세 번째로 깁니다. 그의 어머니로 소개된 마아가는 실제로는 압살롬의 손녀로서 아사의 할머니입니다(15:18의 참고). 부친 아비얌이 등극 3년 만에 죽었고, 아사의 통치 기간이 41년인 점을 생각하면 어릴 때 왕이 되어 조모 마아가가 섭정했을 것입니다. 마아가는 이후에 폐위되는 등 아사의 통치와 깊게 관여된 인물이므로, 모친 대신 소개된 것으로 보입니다. 아사는 ‘다윗처럼 하나님께 순종한 왕’으로 평가받습니다. 이런 평가를 받은 유다 왕 8명 중 처음입니다.

12-13절은 재위 제15년의 신앙 개혁 운동(대하 15:10)을 소개함으로 그 평가의 근거를 제공합니다. 동시에, 우상숭배 근절과 하나님을 향한 순종이 ‘여호와의 눈에 정직한 일’(11)임을 알립니다. 신앙 개혁이 있기까지 하나님의 큰 섭리가 있었습니다(대하 14-15장). 개혁은 전쟁에서의 승리,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격려, 북쪽 백성의 유입 등 군사, 신앙, 사회면에서 고무된 상황 속에서, 아사와 백성이 하나님과 언약을 갱신하면서 일어났습니다. 첫째, 아사는 남색하는 자를 유다 땅에서 쫓아냈습니다. “남색하는 자”는 가나안 족속이 섬기는 우상 신전에서 예배 의식을 따라 매음하던 자들입니다. 아마도 다산 숭배와 관련하여 나타난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런데 이런 신전 창기들이 르호보암 당시 유다에도 존재했습니다(14:24). 약 300년 후 요시야 때는 이들이 여호와의 성전에도 있었던 만큼(23:7), 아사가 이들을 쫓아낸 것은 큰 성과였습니다. 둘째, 아사는 그의 선조들이 만든 우상을 모두 없앴습니다. 솔로몬은 이방 아내들이 섬기는 온갖 우상을 위해 산당을 만들고 분향하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전역에 우상숭배를 퍼뜨렸습니다(11:3-8). 르호보암 때도 유다 곳곳에 산당과 우상들이 즐비했습니다(14:23). 아사의 조모 마아가도 아세라 상을 만들어 섬겼습니다(13). 그러나 아사는 선왕들과 달리 우상이 예배의 대상이 아님을 각인시키고,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했습니다(대하 14:4). 셋째, 아사는 아세라를 숭배한 태후를 폐위했습니다. 친조모를 처벌할 만큼 아사의 신앙개혁 의지가 단호했습니다. 당시 아사가 장성했으므로 태후의 정치, 종교적 세력을 꺾으려는 목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사는 태후가 만든 우상을 잘라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태웠습니다. 한편 14절의 아사가 ‘산당’을 제거하지 않았다는 설명은 긴장을 자아냅니다. 그런데 실상 산당을 제거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대하 14:3,5). 이런 상충된 내용을 정리하면 14절은 아사가 산당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했음을 뜻합니다. 열왕기 저자는 산당이 남아 있어, 아사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우상숭배가 유다에 지속될 것을 전조로 알립니다. 또한 우상숭배로 인해 유다도 결국 멸망했음을 독자에게 상기시켜 경각심을 주는 의도라 볼 수 있습니다. 산당 문제는 남았으나, 아사의 마음은 평생 여호와와 온전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아비양은 부친의 전철을 따라 죄를 지었으나(3), 아사는 부친 아비암의 죄를 좇지 않았습니다. 아비암은 도리어 부친과 자신이 성별한 전쟁 전리품인 은, 금, 기명들을 여호와의 성전에 바침으로써 하나님께 헌신했습니다. 이 일은 이후에 소개되는 사건의 복선이기도 합니다.

(2) 벤하닷을 의지한 아사(16-22)

하나님을 의지했던 아사는 군사적 위기를 맞자 아람(시리아)의 벤하닷을 의지하는 죄를 짓습니다. 분열 왕국 이래 르호보암과 아비얌 그리고 여로보암 사이에 전쟁이 있었듯(14:30; 15:7) 아사와 바아사 간에도 충돌이 계속됐습니다(16). 솔로몬의 죄로 빚어진 왕국의 분열은 지파, 영토, 신앙의 분열만 아니라 이처럼 군사적 충돌과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이어졌습니다.

물론 아사의 통치 초기에는 전쟁 없이 평안했습니다(대하 14:1; 15:19). 그러나 제16년에 바아사(주전 908-886년)가 유다를 공격하여 라마(예루살렘의 북쪽 8km)까지 남하했습니다. 그곳을 요새화하고 국경으로 만들어, 백성의 유출을 차단하고 예루살렘을 공략하려는 전략입니다. 여로보암이 종교 제도를 변형한 것과 방식만 다를 뿐 백성과 나라를 잃을까 두려운 마음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12:26-27 대하 15:9). 아사의 41년 통치 동안 북이스라엘은 여섯 차례 바뀌고(나달, 바아사, 엘라, 시므리, 디브니/오므리, 다합), 왕조가 네 번 바뀌며 불안정한 정국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고하신 대로 물에서 흔들리는 갈대와 같았습니다(14:15).

한편 예루살렘 코앞까지 밀어닥친 바아사의 침략으로 아사는 큰 위협을 느꼈습니다. 그는 얼마 전에 세라와의 전쟁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승리했으나(대하 14장), 이번에는 하나님을 갖는 대신 다메섹의 아람 왕 벤하닷 1세(주전 약 896-874년)를 찾는 어리석음을 보입니다. 다윗의 속국이었던 아람은(삼하 8:5-6) 솔로몬 대에 르손이 다메섹의 독립을 이루며 성장했습니다(11:24). 이미 아비암과 바아사가 아랍과 조약을 맺었고, 이제 아사까지 조약을 맺은 것을 보면(19), 솔로몬 이후 2~3대 만에 이스라엘과 아람의 판도가 역전됐음을 알려줍니다. 솔로몬의 배역의 후폭풍은 이처럼 이스라엘의 신앙과 정치적 평안에 치명적이었습니다. 독자들은 죄의 대가가 얼마나 혹독한 지를 기억하며, 회개와 순종의 길로 가야 합니다. 아사는 예루살렘을 사수하기 위해 르호보암처럼(14:26) 성전과 왕궁합니다. 보물을 다 꺼내어 벤하닷에게 보냅니다.

부친과 자신이 하나님께 바친 모든 성물도 포함되었습니다(15). 아사는 벤하닷에게 부친과의 동맹을 상기시키며, 바아사와의 조약을 깨고 그를 치라고 요구합니다. 이처럼 왕들은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택한 성읍이며 그의 임재가 함께함을 망각하고, 인간적인 힘으로 도성을 지키려 합니다. 벤하닷은 패권을 쥐고 양국 왕들을 저울질하며 자신의 유익에 따라 조약을 맺고 깨는 기회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아사의 요구대로 바아사와의 동맹을 깨고 군대를 보내 이스라엘 성읍을 쳤습니다. 아사가 보낸 예물도 많았겠지만, 이스라엘을 공격했을 때 이득이 컸기 때문임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벤하닷 군대 장관들은 북서쪽에서 남하하면서 이스라엘 북부의 이욘, 단, 아벨벧마아가, 긴네렛 호수 주변 땅과 납달리의 온 지역을 쳤습니다. 이로써 다메섹에서 두로와 지중해로의 무역로를 뚫을 수 있었습니다. 벤하닷의 공격 소식에 바아사는 라마 건축을 중단했습니다. 그리고 수도인 디르사로 돌아가 국정을 살폈습니다. 반면 아사는 온 유다에 강제 명령을 내려, 바아사가 라마의 건축 현장에 남긴 돌과 나무를 가져와, 예루살렘 북쪽 각각 16, 12킬로미터에 있는 게바와 미스바를 요새화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침입을 대비해 방비 성을 마련한 것입니다. 열왕기는 이 사건을 여기서 종결하나, 역대기는 이 일로 하나님께서 하나니 선지자를 보내 아사를 책망한 일을 후기로 기록합니다(대하 16:7-10). 하나니는 아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음을 지적하면서 유다에 전쟁이 있을 것을 예고합니다. 그러나 아사는 하나님의 책망에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선지자를 옥에 가두고 백성을 학대함으로써 분풀이를 하며 죄를 더했습니다. 아사의 변질된 신앙은 순종의 삶에서 긴장을 늦추지 말고 겸손해야 함을 교훈합니다.

(3) 아사의 통치 종결부(23-24)

아사는 노년에 발에 병이 들어 죽었고, 여호사밧이 왕위에 오릅니다. 열왕기는 아사의 병만 언급했으나, 역대기에 따르면 그가 병들었음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찾지 않고 의원들을 찾았음을 지적합니다(대하16:12). 아사의 삶은 이처럼 아쉽게도 순종에서 불순종으로 끝납니다. 이는 열왕기 청중과 현대 독자에게 각자를 돌아보게 하며 겸손히 하나님만 찾는 삶을 권유합니다.


우리 시대와 교회의 현실은 올바른 것을 꾸준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은 예수님처럼 하나님 앞에서 그 마음을 살피면서 일평생 하늘 하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것을 이루어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이 절실하게 필요할 때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을 처리하는 단호하게 결단할 수 있는 힘이 주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끝까지 흔들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변함없이 한결같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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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15-01)


유다 왕 아비얌

열왕기상 151-8


학창시절에 받았던 성적표가 생각이 나십니까? 그 성적표는 1년 동안 우리가 시험을 치렀던 점수도 기록이 되었지만, 1년 동안 학교생활을 어떻게 보냈는지 선생님께서 우리의 생활 태도를 평가해 주신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 부분들 살펴보면, ‘두뇌가 총명하지만 조금 선만합니다’, 또는 명랑하고 정직합니다. 계속해서 기대되는 삶입니다등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표현들이 있는데, 여러분이 받으신 성적표에는 어떤 표현들이 있었습니까?

 

다윗 왕조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변함이 없습니다. 남유다의 왕이 된 아비암은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못하고, 르호보암을 따라 죄를 지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후사를 세워 예루살렘을 견고케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그의 후손으로 왕위를 잇게 하고, 예루살렘을 견고하게 할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의 긍휼과 은혜로 다윗의 순종을 높이 인정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유다 왕 아비얌(1-8)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적표를 주신다면 우리는 어떤 하나님의 평가가 내려지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평가를 반드시 내리신다 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다면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의 문제가 깨끗이 해결되어야 합니다. 아비얌에 대한 인생의 성적표에는 그가 죄를 지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느밧의 아들 여로보암 왕 열여덟째 해에 아비얌이 유다 왕이 되고 2예루살렘에서 삼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마아가요 아비살롬의 딸이더라 3아비얌이 그의 아버지가 이미 행한 모든 죄를 행하고 그의 마음이 그의 조상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나 4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윗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그에게 등불을 주시되 그의 아들을 세워 뒤를 잇게 하사 예루살렘을 견고하게 하셨으니 5이는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고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 6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에 사는 날 동안 전쟁이 있었더니 7아비얌과 여로보암 사이에도 전쟁이 있으니라 아비얌의 남은 사적과 그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8아비얌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니 다윗 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아사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1-8)

르호보암의 아들 아비얌은 아버지의 악행과 아세라 상을 만든 어머니 마아가의 우상숭배를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다윗의 온전한 신앙 전통이 솔로몬과 르호보암을 거치면서 거의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1) 아비의 통치 도입부(1-2)

르호보암의 아들 아비얌(아비야, 주전 913-910)은 북이스라엘 여로보암 제18년에 유다의 제2대 왕으로 등극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3년 동안 통치했습니다. 이처럼 분열왕국 각 왕의 통치 도입부에는 통치기간만 아니라 상대국 왕의 통치 연도를 제시하여, 당대 왕들을 비교 대조할 수 있게 해줍니다. 이런 구체적 정보는 당시의 역사적 배경과 함께 역사적 신빙성 또한 강화합니다. 아비얌의 어머니는 아비살롬(압살롬)의 딸인 마아가로 소개됩니다(2). 아비얌은 모친덕에 르호보암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왕위에 오른 것으로 나타납니다. 르호보암은 18명의 아내와 60명의 첩을 두었고, 그들로부터 아들 28명과 딸 60명을 얻었습니다. 그는 처첩 중에서 마아가를 가장 사랑했기에, 아비얌을 후계자로 세워 왕으로 삼을 계획을 했습니다(대하 11:21-22). 또한 그의 왕권의 안전을 보장하고 불필요한 견제를 막기 위해, 다른 아들들은 많은 아내와 양식을 주어, 유다와 베냐민의 견고한 성읍에 흩어져 살게 했습니다. 한편 아비얌의 어머니 마아가는, 결론부터 말하면, 압살롬의 딸이 아니라 손녀입니다. 히브리어의 가족 관련 단어가 확장된 의미로 사용되는 점을 이해하면 쉽게 해결됩니다. 예를 들어, ‘이라는 단어는 만 아니라 손녀증손녀등 여자 자손을 뜻할 수 있습니다. 압살롬에게는 다말이라는 딸 하나만 있었으므로(삼하 14:27), 마아가는 그의 딸이 될 수 없습니다. 대신 역대하 13:2에서 마아가를 미가야로 부르며, “기브아 사람 우리엘의 딸임을 알립니다. 이를 참작하면, 마아가는 압살롬의 딸 다말과 기브아 사람 우리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미야'(대하 13:2)라는 이름은 마아가의 오기이거나 다른 표기로 유추됩니다.

(2) 아비암의 통치와 평가(3-6)

아비얌의 통치 내용에는 그가 악한 왕이었다는 평가만 나옵니다. 왕에 대한 평가는 열왕기의 특징으로, 분열왕국 각 왕의 통치 도입부에 이어서 언급됩니다. 평가 내용은 각 왕이 여호와의 눈에 선한 왕 또는 악한 왕이었는지에 대한 판정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제정한 왕의 규례(17:14-20)를 기초로 하여, 각 왕이 언약 백성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로서 임무를 다했는지를 최종 진단합니다. 슬프게도, 유다 왕 8명을 제외하고는 양국의 나머지 30여 명의 왕들은 모두 악한 왕으로 평가됩니다. 이와 같은 왕들의 악과 불순종은 역사 속에 반복되면서 각 왕국의 멸망으로 연결됩니다. 이런 구성은 왕들의 불순종이 백성들의 죄와 함께 양국의 몰락을 가져온 필연적 원인이었음을 암시합니다. 이 같은 기록은 열왕기의 청중인 포로기 백성에게 나라를 잃은 고통스러운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순종의 삶을 살도록 유도합니다. 한편 본문의 아비얌에 대한 평가는 구체적으로 부친 르호보암과 조부 다윗의 삶에 비추어 조명됩니다. 먼저 아비얌의 악은 그가 부친이 저지른 모든 죄를 행한 데서 나타났습니다(3). ‘죄를 행했다는 말은 죄 안에서 걸었다', 아비얌이 앞서간 부친의 발자취를 따라 죄의 삶을 지속했음을 묘사합니다. 르호보암의 통치 첫 3년은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의 힘을 입어 다윗과 솔로몬의 길을 따랐습니다(대하 11:17). 그러나 나라가 강성해지자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고 우상숭배로 돌아섰으며, 유다 전역에 우상숭배가 퍼지도록 방치했습니다(14:22-24;대하 12:1,14). 아비얌도 부친처럼 행했으므로 자신만 아니라 백성까지 죄로 이끌었을 것입니다. 다윗과 관련해서, 아비얌은 마음이 다윗처럼 여호와와 온전함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온전함’(샬렘, 3)은 화목하고 평화로운 관계를 뜻합니다. 아비얌이 받은 지적은 솔로몬이 우상숭배로 인해 책망받았던 내용으로(11:4), 마음 및 하나님과의 관계의 중요성을 일깨웁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순종은 명령에 부합하는 행동만 아니라 마음의 헌신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아비얌의 불순종에도 하나님은 다윗을 위해 왕조를 지속시키심으로 그의 은혜를 나타내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다윗 왕조 후손의 지속성은 다윗 앞에 항상허락된 등불로 비유되었습니다. 등불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이미 선언하신 것으로(11:36), 하나님이 이를 신실하게 이행하고 계심을 증명합니다. 이 약속의 근본은 하나님께서 이전에 다윗과 맺은 언약에 있습니다(삼하 7). 열왕기 저자는 이 언약에 암시된 하나님의 은혜에 덧붙여, 다윗의 삶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시킵니다. 다윗은 솔로몬 때부터 다윗 왕조가 끝날 때까지 선한 왕의 표본이 됩니다. 그의 정직과 순종의 삶은 여호와의 말씀을 기준 삼았기에 칭찬받습니다. 말씀에 헌신했기에 다른 왕들처럼 우상에게 돌이키지 않고, 하나님만 향하여 그와 온전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도 헷 사람 우리아(우리야)의 일(삼하 11-12)과 같은 범죄를 저질렀습니다(5). 그의 죄는 밧세바와의 간음과 우리아를 살해한 일로 나타났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정욕을 위해, 또 죄를 덮기 위해 죄 없는 부부를 희생시켰습니다. 게다가이 과정에서 요압이나 신하 등 무고한 자들을 자신의 범죄에 가담시켰습니다. 이 모든 죄악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긴 것이며, 여호와의 눈에 악이었습니다(삼하12:9). 다만 다윗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을 듣고즉각 회개했습니다(삼하 12:13). 이후 하나님의 심판(삼하 12:10-12)을 견뎌냈고, 다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부분이 바로 솔로몬이나 여로보암을 포함한 여러 왕들(11:9-13; 14:7-11)과 달랐던 점입니다. 그렇기에 다윗은 그나마 우리아의 일을 제외하고는 평생 하나님의 명령에서 돌아서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5). 왕들과 백성들 그리고 독자들은 이러한 다윗의 회개와 재헌신을 배워야 합니다. 또한 그의 회개와 재헌신을 용납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다윗 왕조가 존속되는 것은 오직 그의 긍휼과 은혜 아래에서입니다.

(3) 아비암의 통치 종결부(7-8)

아비얌의 통치 종결부는 르호보암의 종결부와 거의 유사합니다. 그의 행적이 역대 지략에 기록되어 보존된 것 외에, 아비얌도 르호보암처럼 여로보암과 국경을 두고 전쟁을 벌였습니다(7; 14:30). 분열왕국 시작 후 양국은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충돌했습니다. 특히 당시는 각 왕국의 초기이므로 상대국에게 백성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지역을 통제하고 자신의 왕국을 견고히 세우려는 목적이 우세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12:21, 26-28; 15:16-22; 대하 15:9). 역대기는 아비얌의 통치 기록에 여로보암과의 전쟁을 주된 사건으로 기술하면서, 악한 왕으로 평가한 열왕기와 달리,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승전한 데 초점을 맞춥니다(대하 13:15,18). 이처럼 열왕기와 역대기에 나오는 왕의 평가는 서로 상충하기도 합니다. 이는 르호보암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왕기와 역대기 둘 다 시삭의 침입을 공통적으로 기록했으나, 열왕기는 그 침입을 죄에 대한 징벌로만 묘사했고, 역대기는 여기에 그의 회개와 하나님의 응답까지 포함시켰습니다. 이런 상충된 내용은 열왕기와 역대기 저자들이 이용한 참고자료들이 서로 다른 데서 기인했을 수도 있습니다(7;대하 13:22). 그러나 무엇보다 저자들의 관점과 강조하려는 의도가 다른 것이 가장 큰 요인이라 볼 수 있습니다. 열왕기가 목표로 한 1차 독자/청중은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역대기의 청중은 포로 귀환자의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열왕기는 이스라엘의 멸망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정당성을 제시하면서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반면 역대기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기초로 하여 성전과 예배를 중심으로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두 책 모두 다윗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신 하나님의 은혜를 부각합니다.


부모가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기는 혼합종교에 열중하는 동안, 아들은 그 문화를 비판하거나 극복할 만한 신앙의 힘을 전혀 기르지 못했습니다. 부모의 신실함에 자식이, 선배 신앙인들의 신실함에 후배들이, 우리의 신실함에 이 사회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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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14-01)


유다 왕 르호보암

열왕기상 1421-31


참된 믿음의 잣대는 믿음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의 대상이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데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다 믿음의 행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음의 행위라 생각한 그 일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행위는 참된 믿음의 잣대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의 대상이 하나님이실 때만 우리의 믿음은 참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통치 동안 남유다도 북이스라엘 못지않게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 그들의 죄악이 조상들이 행한 것보다 더하므로 하나님의 노여움을 일으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쫓아낸 가나안 족속의 가증한 모든 일을 따라 산당과 우상들을 만들고 숭배했습니다. 이들의 죄를 심판하기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시삭으로 하여금 유다를 공격하게 하십니다. 유다는 이 일로 성전과 왕궁의 보물을 다 잃고 애굽의 속국이 됩니다.

 

유다 왕 르호보암(21-31)

세상은 교회가 자신들이 바라는 것을 자신들보다 더 많이 가진 것에 감동하지 않습니다. 부러워할 수는 있어도 우리와 같이 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잣긴들과 다르게 살아도 자신들보다 더 행복할 때 우리처럼 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가나안보다 더 가나안스러웠습니다.

21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유다 왕이 되었으니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사십일 세라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에서 택하신 성읍 예루살렘에서 십칠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나아마요 암몬 사람이더라 22유다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의 조상들이 행한 모든 일보다 뛰어나게 하여 그 범한 죄로 여호와를 노엽게 하였으니 23이는 그들도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산당과 우상과 아세라 상을 세웠음이라 24그 땅에 또 남색하는 자가 있었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국민의 모든 가증한 일을 무리가 본받아 행하였더라 25○르호보암 왕 제오년에 애굽의 왕 시삭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치고 26여호와의 성전의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모두 빼앗고 또 솔로몬이 만든 금 방패를 다 빼앗은지라 27르호보암 왕이 그 대신 놋으로 방패를 만들어 왕궁 문을 지키는 시위대 대장의 손에 맡기매 28왕이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갈 때마다 시위하는 자가 그 방패를 들고 갔다가 시위소로 도로 가져갔더라 29르호보암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30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에 항상 전쟁이 있으니라 31르호보암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니 그의 조상들과 함께 다윗 성에 장사되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나아마요 암몬 사람이더라 그의 아들 아비얌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21-31)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통치 동안 남유다도 북이스라엘 못지않게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 그들의 죄악이 조상들이 행한 것보다 더하므로 하나님의 노여움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쫓아낸 가나안 족속의 가증한 모든 일을 따라 산당과 우상들을 만들고 숭배했습니다. 이들의 죄를 심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시삭으로 하여금 유다를 공격하게 하십니다. 유다는 이 일로 성전과 왕궁의 보물을 다 잃고, 애굽의 속국이 됩니다.

(1) 르호보암의 통치와 평가(21-24)

르호보암(12:1-24; 14:21-31)과 여로보암(12:25-14:20)의 통치 기사는 이스라엘의 분열이 현실화하고 첫 왕들이 계속 불순종함으로써, 두 왕국 또한 멸망으로 다가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에 불순종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의 말씀이 계속 예고되고, 또 실현되어 갑니다.

여로보암의 통치 기록은 왕의 영적 타락을 직접적으로 기술한 반면, 르호보암의 통치 기록은 백성의 영적 타락을 수면에 띄우고 그 아래에서 왕의 책임을 넌지시 묻습니다. 르호보암은 그의 어리석음과 포악함으로 북쪽 열 지파의 신임을 얻지 못한 채 유다와 베냐민의 왕으로 군림했습니다. 41세에 왕이 된 르호보암은 예루살렘에서 17년 동안 다스렸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방비를 위해 유다 남부에 요새성을 건축하여 정치 군사적 안정을 꾀했습니다(대하 11:5-12). 또 통치 첫 3년은 북이스라엘에서 이주한 제사장들과 신실한 백성들에 힘입어 하나님을 따르며 나라를 강성하게 했습니다(대하 11:13-17). 그러나 나라가 견고해지자 그는 하나님과 그의 율법을 버렸습니다(대하 12:1). 그의 죄와 우상숭배에는 암몬 여인인 모친 나아마의 영향이 상당했을 것입니다. 나아마는 솔로몬이 사랑한 이방 아내 중 하나로 다른 아내들처럼 자국의 신들에게 분향하며 솔로몬을 우상숭배로 이끌었던 자입니다(11:1-8). 한편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은 여호와가 그의 이름을 두기 위해 이스라엘 지파 중에 택한 성읍이었습니다. 이곳에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성전이 있어, 그의 눈과 마음이 항상 머물고 있습니다(9:3). 솔로몬의 배역으로 인해 나라를 찢어 여로보암에게 주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그가 택한 예루살렘과 다윗을 위해 유다 지파를 남겨 르호보암에게 주셨습니다(11:32, 36; 12:17). 이처럼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예루살렘과 유다와 다윗과 함께해왔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이에 아랑곳없이 여호와의 눈에 악을 행했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읍 예루살렘은 우상숭배와 죄악이 들끓는 곳으로 바뀌었습니다. 백성은 모든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산당들, 석상들, 아세라 목상들을 지었습니다(23). 이들 장소와 우상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 이전에 가나안 족속이 깊게 관여했던 우상숭배의 현장과 대상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에 들어가면 이 모든 것을 부수고 불살라, 우상숭배를 근절하라고 명하셨습니다(12:2-3). 그러나 23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오히려 가나안 종교를 들여와 자기 것으로 삼았음을 증명합니다. 이처럼 우상숭배는 북이스라엘(13:32)만 아니라 남유다 구석구석에 파고들었습니다. 게다가 이방 신전에서 예배 행위로 매음하던 자들(남색하는 자")이 유다 백성 중에도 생겨났습니다(24). 23-24절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이 쫓아내신 가나안 족속들이 행하던 가증한 일로, 하나님께서 엄히 금한 행위였습니다(23:17). 조상들보다 더한 이들의 행악은 여호와를 더욱 노엽게 했습니다(22). ‘노엽게 하다’(카나)질투를 유발하다의 뜻으로, 언약직 사랑을 배신한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질투를 가리킵니다(20:5: 1:2).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이 다른 대상을 향해 예상과 열성을 품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한편 앞서 22절은 모든 악행의 주체로 유다"만을 기록하는데, 그렇다 해서 르호보암을 제외시키지는 않습니다. 여로보암과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상호관련성을 보여주었듯(14:16), 르호보암의 죄로 인해 유다 백성도 악영향을 받았음을 이미 함축합니다(대하 12:1, 14. 왕들은 하나님께서 제정한 규례에 부응하여(17:14-20) 영적 지도력과 책임감을 가져야 했습니다. 결국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의 배역과 불순종, 백성의 우상숭배를 방관한 죄, 또한 여기에 더불어 왕들의 불순종을 따라간 백성의 죄악이 남북 이스라엘의 멸망을 재촉했습니다. 포로기의 청중이나 현대 독자는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순종을 다시 결단해야 합니다.

(2) 시삭의 침략(25-28)

르호보암과 백성의 죄에 대한 심판으로 하나님께서는 애굽 왕 시삭(셰숑크/쇼생크 1, 주전 945-924)을 보내 유다를 침공하게 하십니다. 이 일은 르호보암 때 일어난 정치적 사건 중 열왕기에 유일하게 기록된 사건입니다. 이집트 제22왕조의 창시자인 시작은 여론보암이 솔로몬을 피해 애굽으로 도망했을 때 그의 망명을 받아준 왕입니다(11:40). 이 사건은 르호보암 제5년에 일어났습니다. 역대기(대하 12:1-16)에 의하면, 시작은 병마 수출국의 왕답게 병거 1,200대와 마법 60,000명을 통솔하고, 리비아(), , 구스 사람들로 구성된 동맹군을 몰고 침투했습니다. 그의 군대는 유다 남부의 요새성들을 함락한 후 예루살렘까지(후에 북이스라엘까지) 올라왔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스마야 선지자를 궁으로 보내 시삭의 침입이 하나님을 버린 죄의 징벌임을 알리셨습니다. 이에 르호보암과 방백들은 겸손히 회개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겸허함을 보고 예루살렘을 지켜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동시에 죄의 대가로 유다가 시작의 종이 됨을 예고하셨습니다. 열왕기는 이런 내용은 생략하고 예루살렘 및 성전과 관련된 내용 위주로 기술함으로써 유나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거룩한 성읍과 성전이 위협받고 더럽혀짐을 부각합니다. 시삭은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보물과 왕궁의 보물 그리고 솔로몬이 만든 금 방패를 다 앗아갔습니다. 26절에서 빼앗다라는 동사는 원문에 세 번 나오고, 특히 그가 모두 빼앗았다라는 문장으로 성전과 왕궁이 철저히 약탈당했음 표현합니다. 결국 솔로몬의 대표 건축물인 성전과 왕궁의 보물을 다 뺏김으로써 하나님의 축복으로 누렸던 부귀영화의 증거물은 다 사라졌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솔로몬과 르호보암에게 경고한 불순종의 결과입니다(삼상 7:14). 르호보암은 빼앗긴 금방패 대신 놋 방패를 만들어 대신했습니다. 왕궁 문을 지키는 시위대 대장들이 이를 맡았습니다. 왕이 성전을 출입할 때마다 시위대가 방패를 꺼내 들고 갔다가 다시 시위대의 저장고에 갖다 보관했습니다. 한편 26절은 시삭이 성전을 훼손하고 약탈한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함락이나 성전 훼손 내용은 기록에 없습니다. 실상 르호보암이 예루살렘을 보전하기 위해 성전과 왕궁에서 보물들을 내준 것입니다. 그는 시삭에 맞서기보다는 항복을 택했습니다. 유다는 결국 하나님의 예고대로 애굽의 속국이 됐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성전을 예배가 아닌 다른 목적으로 개방하고, 하나님께 바친 헌물을 이방 나라에 조공으로 바친 행위는 여호와의 이름과 거룩한 처소를 더럽힌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그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우상을 숭배한다면 이 성전을 손수 던져버리실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9:7). 그러므로 왕과 유다 백성은 이때 다시 하나님께 돌아가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여로보암과 북이스라엘 백성이 심판의 여러 징조와 경고를 받고도 죄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처럼(13), 르호보암과 남유다 백성도 계속 죄를 범했습니다. 종국에 나라는 멸망하고, 성전은 전소되며, 기물과 기둥까지 다 바벨론으로 옮겨지게 됩니다(왕하 25:9, 13-17).

(3) 르호보암의 통치 종결부(29-31)

북이스라엘 왕이나 유다 왕의 업적과 행적은 각 왕국의 역대지략 등 여러 기록물을 통해 보존되었습니다. 이런 자료와 자료에 대한 설명은 남북 이스라엘의 각 왕과 이스라엘 역사의 실재성을 입증합니다. 분열왕국의 시작 초기에는 남북 이스라엘 간의 충돌이 잦았습니다(15:6,7,16,32). 전쟁의 목적은 각각 남북의 국경을 사수하고, 백성들의 왕래를 막아 새로 시작한 왕조의 안전을 확보하려는 의도로 이해됩니다(15:17). 한편 열왕기는 유다 왕의 통치 도입부나 종결부에 종종 왕의 모친 이름을 기록합니다(15:2;22:42; 왕하 12:1; 15:1). 르호보암의 통치 종결부에는 도입부처럼 그의 모친 이름과 그녀가 암몬 사람임을 한 번 더 기술함으로써 유다의 우상숭배를 상기시킵니다. 르호보암을 이어 아비얌이 왕이 되었습니다.


물질만능과 배금사상, 성공주의와 쾌락주의에 젖은 우리 시대를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이스라엘처럼 금 방패나 놋 방패가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는 허튼 기대를 버리시길 바랍니다. 가나안을 이스라엘화할 때, 비록 분열의 심판을 받았더라도 끝까지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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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14-01)


여로보암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

열왕기상 14장 1-20절


참된 믿음의 잣대는 믿음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의 대상이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데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다 믿음의 행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음의 행위라 생각한 그 일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행위는 참된 믿음의 잣대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의 대상이 하나님이실 때만 우리의 믿음은 참될 수 있습니다.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으면 그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여로보암은 아들이 병들자 아내를 시켜 아히야와 면답을 하도록 계획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히야를 통해 여로보암의 죄 때문에 그의 아들이 죽을 것을 알리십니다. 그의 왕조 및 그의 죄에 동참한 이스라엘도 포로로 흩으실 것을 예고하십니다. 병든 아들 아비야는 여로보암 가문에서 유일하게 하나님 앞에 선한 자였습니다. 재앙 전에 그를 죽게 하신 것은 그에게 베푸신 호의였습니다.

 

여로보암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1-20)

하나님께서는 사랑하고 하나님의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지만, 우리가 악행을 거듭하는데도 불구하고 끝없이 용서만 하는 그런 사랑은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병을 주시기도 합니다. 모든 병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빗나간 관심, 우상에게 빠져든 관심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해서 때로는 병도 허락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주권자가 되시고 그분의 뜻을 벗어난 인간을 돌이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것이라도 사용하실 수 있다는 사실에 두려워합니다.

1그 때에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병든지라 2여로보암이 자기 아내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일어나 변장하여 사람들이 그대가 여로보암의 아내임을 알지 못하게 하고 실로로 가라 거기 선지자 아히야가 있나니 그는 이전에 내가 이 백성의 왕이 될 것을 내게 말한 사람이니라 3그대의 손에 떡 열 개와 과자와 꿀 한 병을 가지고 그에게로 가라 그가 그대에게 이 아이가 어떻게 될지를 알게 하리라 4여로보암의 아내가 그대로 하여 일어나 실로로 가서 아히야의 집에 이르니 아히야는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더라 5여호와께서 아히야에게 이르시되 여로보암의 아내가 자기 아들이 병 들었으므로 네게 물으러 오나니 너는 이러이러하게 대답하라 그가 들어올 때에 다른 사람인 체함이니라 6그가 문으로 들어올 때에 아히야가 그 발소리를 듣고 말하되 여로보암의 아내여 들어오라 네가 어찌하여 다른 사람인 체하느냐 내가 명령을 받아 흉한 일을 네게 전하리니 7가서 여로보암에게 말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너를 백성 중에서 들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게 하고 8나라를 다윗의 집에서 찢어내어 네게 주었거늘 너는 내 종 다윗이 내 명령을 지켜 전심으로 나를 따르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만 행하였음과 같지 아니하고 9네 이전 사람들보다도 더 악을 행하고 가서 너를 위하여 다른 신을 만들며 우상을 부어 만들어 나를 노엽게 하고 나를 네 등 뒤에 버렸도다 10그러므로 내가 여로보암의 집에 재앙을 내려 여로보암에게 속한 사내는 이스라엘 가운데 매인 자나 놓인 자나 다 끊어 버리되 거름 더미를 쓸어 버림 같이 여로보암의 집을 말갛게 쓸어 버릴지라 11여로보암에게 속한 자가 성읍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 들에서 죽은즉 공중의 새가 먹으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니라 하셨나니 12너는 일어나 네 집으로 가라 네 발이 성읍에 들어갈 때에 그 아이가 죽을지라 13온 이스라엘이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장사하려니와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는 오직 이 아이만 묘실에 들어가리니 이는 여로보암의 집 가운데에서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선한 뜻을 품었음이니라 14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한 왕을 일으키신즉 그가 그 날에 여로보암의 집을 끊어 버리리라 언제냐 하니 곧 이제라 15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쳐서 물에서 흔들리는 갈대 같이 되게 하시고 이스라엘을 그의 조상들에게 주신 이 좋은 땅에서 뽑아 그들을 강 너머로 흩으시리니 그들이 아세라 상을 만들어 여호와를 진노하게 하였음이니라 16여호와께서 여로보암의 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을 버리시리니 이는 그도 범죄하고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하였음이니라 하니라 17○여로보암의 아내가 일어나 디르사로 돌아가서 집 문지방에 이를 때에 그 아이가 죽은지라 18온 이스라엘이 그를 장사하고 그를 위하여 슬퍼하니 여호와께서 그의 종 선지자 아히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19여로보암의 그 남은 행적 곧 그가 어떻게 싸웠는지와 어떻게 다스렸는지는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니라 20여로보암이 왕이 된 지 이십이 년이라 그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아들 나답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1-20)

이제 여로보암의 마지막 이야기나 등장합니다. 여로보암은 병든 그의 아들을 위해 자신의 아내를 유다의 선지자인 아히야에게 보냅니다. 여로보암은 아내를 북쪽의 선지자가 아닌 남쪽의 선지자, 곧 자신이 왕이 되리라고 예언했던 선지자에게로 보냅니다. 그는 아내를 변장시켜서 보내는데 이것은 북쪽의 신앙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 여로보암의 병든 아들(1-6)

여로보암은 아들 아비야가 병들자 그의 생사를 알기 위해 아내를 아히야 선지자에게 보냅니다. 1절의 “그 때에”라는 어구는 당시를 여로보암이 하나님의 사람의 죽음 사건 후에도 지속적으로 죄를 짓던 때(13:33-34)와 연결합니다. 이로써 아비야의 병고가 여로보암의 죄 때문임을 넌지시 알립니다.

그는 아내에게 사람들이 못 알아보게 변장하고 실로의 아히야 선지자에게 가서, 아이가 어떻게 될지 알아 오라고 시킵니다. 이전에 아히야가 그의 왕 될 소식을 전해줬으므로, 이번에도 호의적인 대답을 은연중에 기대합니다. 그는 아히야를 속이기 위해 아내에게 평범한 백성처럼 떡, 과자, 꿀을 선물로 가져가라고 지시하는 치밀함을 보입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선지자를 속이려는 계획과 속임수는 앞서 벧엘의 선지자(13:11-19)와 진배없습니다.

왕의 말에 따라 왕비는 디르사(17)에서 남쪽 3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실로까지 갑니다. 아히야는 연로하여 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4). 이는 그가 왕비를 알아보기 불가하다는 암시입니다. 아히야의 육체적 눈은 그들의 눈과 같지 않고 쇠했지만, 영적인 눈은 밝아 하나님의 계시를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방문자가 누군지, 방문 목적이 무엇인지, 어떻게 답해야 할지를 보이셨고, 왕비가 변장하고 올 것도 알리셨습니다. 따라서 아히야는 앞서 벧엘 선지자의 속임에 넘어간 하나님의 사람(13:15-19)과는 달리 상대의 속임을 꿰뚫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왕비가 문으로 들어오는 발소리에 “여로보암의 아내여 들어오라”며, 왜 다른 사람인 척 변장했느냐고 선수를 칩니다(6). 왕비가 놀랄 새도 없이,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보내 흉한 소식을 전하도록 했다고 덧붙입니다. 여로보암이 왕비를 보냈으나, 실상은 하나님께서 아히야를 그에게 보내신 셈입니다. 이처럼 여로보암 부부는 눈은 떴으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지 못했고, 선지자를 속이려 했으나 그 속셈이 다 드러나 있었고, 낭보를 원했으나 비보를 들었습니다. 왕비는 벧엘 선지자의 아들처럼 왕의 지시에 순종할 뿐,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무신경하며, 자초지종만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2) 여로보암에게 예고된 여호와의 말씀(7-16)

여로보암에게 전달된 여호와의 말씀은 세 부분(7-9, 10-14, 15-16)으로, 그의 죄를 고발하고 죄에 대한 심판을 선고합니다. 첫 부분(7-9)은 솔로몬 생전에 하나님께서 아히야를 통해 여로보암에게 전한 말씀(11:31-39)을 기초로 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린 죄를 고소합니다. 여로보암을 백성 중에서 높여 사울과 다윗처럼 이스라엘의 주권자(삼상 9:16; 삼하 7:8)로 삼은 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셨습니다(7;11:31). 그는 다윗 왕조에서 왕국을 찢어내어, 그에게 주셨습니다. 새 겉옷을 열두 조각으로 찢어, 열 조각을 그에게 준 일이 그 증표였고(11:30-31), 또 그대로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다윗과 같은 순종, 즉 ‘하나님의 눈에 정직한 일’을 ‘온 마음’으로 실행하는 것을 기대하셨습니다(8). 그러나 여로보암은 다윗과 같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등 뒤로 내던지고, 자기를 위해 우상을 만들어 이전 백성들보다 더 큰 악을 행했습니다. 그가 만든 금송아지는 실상 하나님께서 금한 “다른 신”이며 “우상”이었습니다(9). 그는 순종의 조건으로 하나님의 임재와 견고한 왕조를 약속받았으나(11:38), 스스로 이를 차버렸습니다. 이제 둘째 부분(10-14)은 여로보암의 죄로 인한 가문과 왕조의 몰락을 선고합니다. 처음(11-12)과 끝(14)은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의 집을 ‘끊을 것’(10,14)을 공통으로 서술하고, 중간(12-13)은 아비야의 죽음을 예고합니다. 왕조의 몰락으로 첫째, 가문 남자들의 비참한 죽음이 묘사됩니다. 여로보암에게 속한 사내(‘벽에 오줌을 누는 자’)는 누구든(“매인 자나 놓인 자”) 다 죽임당하여, 대가 끊어질 것입니다(10). 그들은 똥 덩이(“거름 더미”)처럼 쓸어버림을 당하고, 시신은 성읍과 들에 버려져 개와 새의 밥이 될 것입니다(10). 대가 끊기고, 시신이 매장되지 못하고 훼손되는 것은 불순종의 형벌을 받았음을 암시합니다(신 28:26). 둘째, 왕조의 몰락에는 선한 아비야의 죽음도 포함됩니다. 아히야는 여로보암의 아내에게 그녀가 디르사에 발을 디딜 때 아들이 죽을 것임을 예고합니다(12). 역설적이게도 여로보암과 관련된 남자 중 이 아들에게서만 여호와를 향한 선한 일이 발견되었습니다. 그가 병고로 죽어가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 그 원인은 여로보암의 죄였습니다. 이처럼 겉만 보고 하나님의 축복과 형벌을 가릴 수는 없습니다. 비야의 병과 죽음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를 재앙에서 건지시는 방법이었습니다. 그가 곧 죽게 되므로 육체적 고통도 곧 끝납니다. 똥 덩이처럼 취급되는 죽음의 재앙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가 죽으면 온 이스라엘이 그를 위해 가슴을 치며 애곡할 것입니다. 그의 시신은 고이 묘지에 안치될 것이므로, 짐승에게 뜯길 재앙에서 벗어납니다. 여로보암이나 아내는 아들의 죽을 운명에 애통하며 하나님을 원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의 죽음은 다가올 재앙에서 그를 미리 건지신 하나님의 섭리이자 은혜입니다. 이 사건은 그 의미를 제대로 숙고하는 자들에게는 두려움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될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다른 왕을 일으켜 여로보암 왕조를 끊으실 것입니다. 그때를 바로 ‘오늘’, ‘심지어 지금’(14)이라고 표현함으로써 하나님의 계획이 확정되었고, 심판이 신속할 것을 알립니다. 실제로 여로보암이 죽은 후 아들 나답이 왕이 되지만, 1년 만에 바아사가 일어나 그를 죽이고 왕이 됩니다(15:28). 그는 여로보암 가문에서 생명 있는 모든 자를 죽이며, 이로써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됩니다(15:29). 마지막으로, 여호와의 말씀의 셋째 부분(15-16)은 여로보암의 죄로 인한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선고합니다. 물에 심긴 갈대가 바람에 맥없이 흔들리듯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쳐서 불안정한 왕조로 휩쓸리게 하실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가 이스라엘 조상에게 기업으로 준 좋은 땅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을 뽑아내어, 유브라데 강 너머 나라로 끌려가게 하실 것입니다(왕하 17:23). 이들의 죄목은 아세라와 같은 가나안 신들의 형상을 만들고 숭배한 죄입니다(15;왕하 17:10). 그러나 근본적인 원인은 여로보암의 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택했고, 성전, 제사, 절기, 제사장 등 하나님께서 제정한 신앙 체계를 맘대로 바꿈으로써 이스라엘 백성까지 죄로 내몰았기 때문입니다(왕하 17:21-22). 지도자의 불순종과 죄는 공동체의 멸망을 자초합니다(6:12-13).

(3) 여로보암의 아들의 죽음(17-18)

하나님이 아히야를 통해 예고하신 대로 여로보암의아들은 죽음을 맞는다. 아히야로부터 여로보암 집안에 대한 선고를 전달받은 여로보암의 아내는 일어나 디르사로 돌아갔다. 이전에는 세겜이 수도였으나(12:25), 이즈음에는 세겜에서 북동쪽 9킬로미터의디르사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궁의 문지방에이르렀을 때, 아들이 죽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온 이스라엘은 그를 장사하고, 그를 위해 애곡했다. 여호와의 말씀이 이처럼 선포된 대로 성취됨으로써 앞으로 여로보암과 북이스라엘에 대한 그의 말씀또한 다 실현될 것이 증명된다.

(4) 여로보암의 통치 종결부(19-20)

여로보암의 22년(실제는 21년) 통치의 나머지 행적은 이스라엘 왕의 역대지략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는 통치 말기에 유다의 아비얌(르호보암의 아들)과 전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아비얌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전쟁에 승리하고 점점 강성해갔습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세력을 회복하지 못했고 하나님이 그를 치심으로 죽었습니다(대하 13:20). 그의 아들 나답이 왕위를 잇습니다.


오늘 한 사람의 우상 숭배의 죄가 얼마나 큰 지를 봅니다. 그가 왕이였기에 나라가 멸망하게 되고 그가 아버지이기에 가문이 멸망하게 됩니다. 여로보암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은 다윗처럼 되기를 원하신 것이었습니다. 오늘 여로보암에게 진노하시고 저주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자신 안에 어떤 우상도 남기지 말고 다윗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눈 앞에서 정직하게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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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13-03)


여로보암의 불순종을 심판하신 하나님

열왕기상 13장 20-34절


하나님의 일을 동참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대한 일이고 가슴 벅찬 일입니다. 하지만 그 일에 순종해 나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해나가면서 온전한 순종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순종은 복으로 통하고 불순종은 화로 통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은 이유를 불문하고 죄입니다.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의 선지자에게 속아 여호와의 말씀을 어겼고, 이에 징벌을 선고받습니다. 그는 유다로 돌아가는 길에 사자를 만나 죽임을 당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선지자는 그를 자신의 묘실에 매장합니다. 이로써 여호와의 말씀이 성취됩니다. 여로보암은 이 사건 후에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계속 죄를 짓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왕조는 멸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임한 여호와의 심판(20-32)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짓말하지 않으시며, 말씀하신 것을 꼭 실행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더불어 엄정하심에 대해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약속하신 좋은 일도 이루어 주시는 분이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경고하신 말씀도 그대로 실행하시는 분입니다.

20저희가 상 앞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 사람을 데려온 선지자에게 임하니 21저가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을 향하여 외쳐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며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한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22돌아와서 여호와가 너더러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 한 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으니 네 시체가 네 열조의 묘실에 들어 가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23자기가 데리고 온 선지자가 떡을 먹고 물을 마신 후에 그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니라 24이에 그 사람이 가더니 사자가 길에서 저를 만나 죽이매 그 시체가 길에 버린 바 되니 나귀는 그 곁에 섰고 사자도 그 시체 곁에 섰더라 25지나가는 사람들이 길에 버린 시체와 그 시체 곁에 선 사자를 보고 그 늙은 선지자가 사는 성읍에 와서 말한지라 26그 사람을 길에서 데리고 돌아간 선지자가 듣고 말하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이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를 사자에게 붙이시매 사자가 그를 찢어 죽였도다 하고 27이에 그 아들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라 저희가 안장을 지우매 28저가 가서 본즉 그 시체가 길에 버린바 되었고 나귀와 사자는 그 시체 곁에 섰는데 사자가 시체를 먹지도 아니하였고 나귀를 찢지도 아니하였더라 29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떠들어 나귀에 실어가지고 돌아와 자기 성읍으로 들어가서 슬피 울며 장사하되 30곧 그 시체를 자기의 묘실에 두고 그를 위하여 슬피 울며 가로되 오호라 나의 형제여 하니라 31그 사람을 장사한 후에 저가 그 아들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가 죽거든 하나님의 사람을 장사한 묘실에 나를 장사하되 내 뼈를 그의 뼈 곁에 두라 32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벧엘에 있는 단을 향하고 또 사마리아 성읍들에 있는 모든 산당을 향하여 외쳐 말한 것이 반드시 이룰 것임이니라(20-32)

여로보암 통치(12:25-14:20)의 둘째 단락(13:1-34) 중 둘째 에피소드(13:11-32) 후반부(20-32)에서는 하나님의 사람의 죽음을 통해 불순종의 위중함과 불순종에 대한 여호와 말씀의 성취를 기술합니다. 선지자에게 속아 벧엘로 돌아와 떡과 물을 먹은 하나님의 사람(18-19)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선언됩니다. 이로써 여호와의 심판을 전했던 자(2)는 심판을 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말씀은 둘의 식사가 끝나기도 전에 선지자에게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즉각적인 대응은 불순종에 대한 진노가 크심을 보여줍니다. 선지자의 첫마디는 하나님의 사람이 여로보암에게 심판을 경고한 때처럼 ‘여호와가 이렇게 말씀하신다’입니다. 말씀의 출처가 여호와임을 분명히 밝힙니다(2, 21). 하나님께서는 먼저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입(“말씀”)을 거역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이어서 누누이 반복했던 여호와의 금령을 하나씩 재언급하고, 그가 모든 명령에 불순종했음을 밝혀(돌아왔다, 떡을 먹었다, 물을 마셨다), 유죄를 확증합니다(22).

끝으로 죄의 형벌로 그의 시체가 조상들의 묘실에 매장되지 않을 것을 선고합니다. 그가 타지에서 죽거나 시신이 유기되는 등 불순종의 징벌로 죽을 것(신 28:26)을 뜻합니다. 이 예언 후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을 자신의 나귀에 태워 보냅니다. 이 사건은 순종했던 자라도 한순간에 불순종할 수 있음을 보여주어 경각심을 높입니다. 한편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에게 임했다 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유혹과 거짓을 용인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돈과 사술에 매인 거짓 선지자 발람을 이용해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을 선언하셨듯이(민 22-24장) 이번에는 사람을 속인 선지자를 이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밝히셨습니다. 그를 ‘하나님의 사람을 데리고 돌아온 자’(20,23,26)로 부르는 것은 ‘데리고 돌아온 행위’가 엄연한 죄임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유다로 돌아가는 길에 비참하게 죽임 당함으로써 여호와의 말씀이 성취됩니다. 그는 홀연히 나타난 사자에게 공격당해 죽었고, 그의 시신은 찢긴 채로 길에 버려졌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한 여호와의 말씀이 있은 후 경각간에 일어난 이 사건은 제단의 징조, 여로보암의 손 회복(2-6)에 이어 여호와의 말씀이 분명히 성취됨을 알리는 또 다른 증표가 되었습니다. 이는 또한 이스라엘에게 불순종의 심각성과 위중함에 대해 경종을 울립니다. 하나님께서 때때로 죄를 즉각적으로 징벌하시는 것은 죄를 심판하기 위한 것만 아니라 두려움과 경각심을 주어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한편 하나님의 사람을 해한 사자는 놀랍게도 그를 태우고 온 나귀는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사자가 사람만 죽이고 시신을 훼손하지 않은 점, 먹이인 나귀를 가만히 둔 점, 행인들을 공격하지 않은 점, 나귀도 사자에게서 도망하지 않고 시신 옆에 있었던 점(24-25)은 이 모든 일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입증합니다. 동물들의 행동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일을 감당하고 순종함을 보여줍니다. 이들의 순종행위는 하나님의 사람이 선지자의 말에 타협하여 가던 길에서 돌아서고, 빵과 물을 먹은 불순종 행위와 대조를 이룹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처럼 불순종으로 죽었으나, 그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예고한 심판(2)을 반드시 이룰 것을 증명하는 표적이 되었습니다. 행인들은 사건 현장을 통해 불순종한 자의 처참한 죽음의 경위를 목격했고 이 사건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벧엘 선지자에게 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소식을 들은 선지자는 여호와의 말씀을 어긴 자의 최후와 그의 죽음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성취됐음을 확증합니다(26). 선지자도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전한 말(21-22)이 실현된 데에 큰 두려움과 양심의 가책, 책임감 등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는 아들들에게 안장을 지우라고 명하고, 아들들은 그의 말에 순종합니다. 선지자는 직접 가서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그 현장(28)은 24절에서 묘사된 현장과 동일 했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다시 부각합니다. 선지자는 시신을 나귀에 실어 벧엘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그를 “내 형제여”라 부르며 애곡하고, 시신을 자기 묘실에 안치했습니다(30). 매장되지 못한 시신은 재앙과 형벌로 인식되므로(신 28:26), 그의 시신을 거둬 그를 예우한 것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여호와의 말씀(22)은 그대로 성취되었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전능함이 증명되었습니다. 선지자는 자신이 죽거든 자기 뼈를 하나님의 사람의 뼈 옆에 안치하라고 아들들에게 명합니다. 이는 그 사람을 존중하는 태도에서 비롯되었습니다(창 23:6). 선지자는 그의 죽음을 보고 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전한 벧엘 제단과 북이스라엘(“사마리아”) 모든 산당에 대한 징벌(2)이 성취될 것을 확신하며 선언합니다. 이로써 남북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여로보암의 죄에 대한 심판을 선언한 셈입니다. 여호와의 계시를 전한 사람은 죽었으나, 그 계시는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300년이 지난 요시야 왕 때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벧엘 산당은 빻아져 가루가 되며, 산당 제사장들의 뼈는 무덤에서 제단 위로 옮겨져 불태워집니다. 그러나 계시를 전했던 하나님의 사람과 이를 확신했던 선지자의 뼈는 온전히 무덤에 보존됩니다(왕하 23:16-18).

 

여로보암의 죄악과 왕조의 멸망 예고(33-34)

죄에 빠진 채 하나님의 경고를 듣지 않으면 자기 자신뿐 아니라 공동체까지 악에 빠지게 됩니다. 어리석은 자는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징벌을 받게 될 것을 알려 줘도 깨닫지 못하고 계속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죽음을 통해, 여로보암은 자신이 회개하지 않으면 심각한 징벌 받게 될 것을 알 수 있었음에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33여로보암이 이 일 후에도 그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고 다시 보통 백성으로 산당의 제사장을 삼되 누구든지 자원하면 그 사람으로 산당의 제사장을 삼았으므로 34이 일이 여로보암 집에 죄가 되어 그 집이 지면에서 끊어져 멸망케 되니라(33-34)

본 13장을 마무리하는 33-34절은 여로보암의 죄의 심각성을 밝히며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정당함을 알려줍니다. 여로보암은 앞 사건 후에도 죄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미 배역에 대한 심판의 경고를 직접 전달받았습니다(2). 심판의 징조와 그의 손이 말랐다 회복하는 표적도 목격했습니다(3). 또한 33절에서 “이 일”을 구체적으로 명시했듯, 여로보암은 자신에게 심판을 경고한 자가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소식까지 분명히 들었습니다.

이 모든 사건은 하나님께서 불순종을 반드시 징계하며, 그가 선언한 말씀을 꼭 이루심을 증명해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로보암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자신의 행위를 돌아봐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유혹을 뿌리치고 고고히 떠났던 하나님의 사람이 늙은이에게 속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일에 놀랐겠지만 동시에 그의 연약함을 비웃으며 안심했을 것입니다. 벧엘의 심판은 나중 일이므로 자신과 상관없으며, 팔도 멀쩡하고, 자신에게 심판을 전달한 자도 이제 죽었으므로, 그는 계속 죄악의 길로 갔습니다. 대표적인 죄는 “일반 백성”(‘백성의 말단’) 중에서 원하기만 하면, 수송아지 하나와 수양 일곱을 가져오기만 하면(대하 13:9) 누구든 제사장으로 임명한 일입니다(33). 이처럼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며 스스로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백성을 불순종과 범죄의 길로 내몰아 공동체의 영적 질서와 도덕을 와해했습니다(14:16). 백성 또한 자기가 제사장이 되기에 가당치도 않음을 알면서도 직분을 탐하여 여로보암 못지않은 죄악을 행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들은 사람이 심판을 목격하거나 경고를 받아도 죄에서 떠나기가 무척 어려움을 보여줍니다. 앞서 솔로몬도 우상을 숭배하여 불순종한 까닭에 하나님의 경고를 받았습니다(11:9-11). 그도 죄의 심각성과 형벌의 엄중함을 숙고해야 했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다. 거기에는 죄에 무딘 마음, 교만, 방심, 합리화, 타협, 미루기 등 여러 이유가 결부됐을 것입니다. 결국 솔로몬의 불순종으로 인해 그의 아들 대에 이스라엘이 분열되었듯, 여로보암도 그의 죄로 인해 그의 왕조는 아들 대에서 끊어지고 맙니다(34). 그가 제사장으로 세운 백성들 또한 그들이 제사한 제단 위에 자신의 뼈가 불태워지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왕하 23:16). 왕과 백성의 죄악은 끝내 이스라엘의 멸망을 초래합니다(14:15-16). 이처럼 불순종은 심판에 이르며, 선포된 여호와의 말씀은 다 실현됩니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계속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의 죽음을 통해 늙은 선지자를 변화시키셨고, 여로보암의 불순종에 대해 경고하셨습니다. 우리도 어리석은 여로보암처럼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계속 죄를 지으며 자신도, 공동체도 죽게 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완수하기까지 어떤 것에도 타협이나 양보하지 않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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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13-02)


벧엘의 선지자와 유다에서 온 하나님 사람

열왕기상 13장 11-19절


오래전 세계 각국의 체인점을 두고 있는 홀리데이 인 호텔이 경영난에 빠져 있을 때, 수입증진의 일환으로 호텔 내에 도박장을 만들자는 의견이 주주총회에서 수렵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의견은 끝내 이행되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에 호텔의 회장이었던 클리머 라는 사람이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성도였던 클리머 회장은 자신을 압박하던 주주들에게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고 합니다. “내가 회장에 취임하면서 하나님과 호텔내에 절대로 도박장을 만들지 않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지금 그 약속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다면 내가 회장직을 사임하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 당시에 호텔에 회장이었다면 어떤 결정을 내리셨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순종은 그와 그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할 때만 가능합니다.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은 여로보암에게 불순종의 심판을 경고한 후 유다로 돌아갑니다. 이 소식을 들은 벧엘의 노인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고, 그를 속여 집으로 데려가 떡을 먹으라고 청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다시 상기했지만, 선지자의 일과 호의에 방심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고 맙니다.

 

벧엘의 늙은 선지자(11-19)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뜻을 따라 움직이는 삶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늘 영적인 분별력을 갖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나아가며, 그분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이 되도록 영적인 분별력을 키워 나가도록 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고, 묵묵히 주님만을 의지하고, 주님만을 의뢰하면서 주님과 함께 목적지를 향해 달려 나가도록 해야 합니다.

11벧엘에 한 늙은 선지자가 살더니 그의 아들들이 와서 이 날에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서 행한 모든 일을 그에게 말하고 또 그가 왕에게 드린 말씀도 그들이 그들의 아버지에게 말한지라 12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이르되 그가 어느 길로 가더냐 하니 그의 아들들이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의 간 길을 보았음이라 13그가 그의 아들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라 그들이 나귀에 안장을 지우니 그가 타고 14하나님의 사람을 뒤따라가서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은 것을 보고 이르되 그대가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냐 대답하되 그러하다 15그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으로 가서 떡을 먹으라 16대답하되 나는 그대와 함께 돌아가지도 못하겠고 그대와 함께 들어가지도 못하겠으며 내가 이 곳에서 그대와 함께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17이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이르시기를 네가 거기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며 또 네가 오던 길로 되돌아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로다 18그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 19이에 그 사람이 그와 함께 돌아가서 그의 집에서 떡을 먹으며 물을 마시니라(11-19)

여로보암 통치(12:25-14:20)의 둘째 단락(13:1-34)중 둘째 에피소드인 13:11-32은 벧엘의 한 선지자와 하나님의 사람의 만남을 배경으로, 하나님의 사람의 불순종과 심판을 기술합니다. 이 부분은 앞뒤(1-10, 33-34)에 기록된 여로보암의 불순종을 부각시키고, 선포된 여호와의 말씀의 성취를 강화하는 역할을 합니다.

(1) 벧엘의 늙은 선지자(11)

벧엘에 거하는 한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 산당에서 행한 일과 그가 왕에게 선포한 여호와의 계시 등 모든 일을 아들들에게서 전해 듣습니다. 그가 “선지자”로 소개되고(11), 스스로도 선지자라 일컬으며(18), 여호와의 계시를 받고(21), 후에 “사마리아(‘북이스라엘’을 지칭)에서 온 선지자”(왕하 23:18)로 불린 것을 볼 때 북이스라엘의 선지자임에 확실합니다. 다만 그를 참된 선지자로 여기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있습니다. 첫째, 그는 아들들과 함께 우상숭배가 만연한 벧엘에 잔류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여로보암은 아무 백성이나 산당 제사장 자리에 앉혔고, 북이스라엘에 상주하며 예루살렘의 성전 직무를 담당하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다 파면했습니다. 그들은 신앙을 위해 집과 산업을 버리고 남유다로 돌아갔습니다(대하 11:13-16). 이때, 하나님을 찾는 북쪽 백성들도 이주했으나, 이 선지자 가족은 벧엘에 남았습니다. 물론 참 선지자나 신앙인이 다 떠난 것은 아니었습니다(14:4). 그러나 이 선지자와 아들들의 행보는 그들이 여로보암의 새로운 종교 정책을 거부하지 않았거나 타협했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둘째, 그는 아들들을 여로보암이 만든 절기에 참여하게 두었습니다. 그들이 벧엘에서 일어난 일을 다 알고 있었고, 하나님의 사람의 행방까지 목격한 점(11-12)은 그곳 절기 행사에 가담했다는 증거입니다. 엘리 제사장이 아들들의 범죄를 두고 보았듯(삼상 2장), 이 선지자도 본인이나 아들들을 우상숭배의 영향권에 머물게 했습니다. 셋째, 이 선지자는 사람을 속이고, 여호와께 계시를 받았다는 등 거짓말을 서슴지 않습니다(18). 물론 그는 나중에 자기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을 선언하기도 하고 그가 속인 하나님의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기도 합니다(20-32). 그러나 15-18절에 기록된 그의 유혹과 거짓은 그 동기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죄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2) 선지자와 하나님의 사람 만남(12-14)

하나님의 사람에 대해 듣고 큰 관심을 갖게 된 벧엘의 선지자는 마침내 그를 만나게 됩니다. 선지자는 아들들에게 물어 그가 간 길의 정보를 입수합니다. 그리고 신속히 그를 따라잡기 위해 아들들에게 나귀에 안장을 묶으라고 명합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말에 순종합니다. 나귀를 타고 하나님의 사람의 뒤를 쫓은 선지자는 마침내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 그를 보았습니다(14). ‘보았다’는 ‘발견하다’로, 그 사람을 바로 알아봤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그에 대해 소상히 전해 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선지자는 확인 차 그가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인지 물었고, 그 사람은 자기가 맞는다고 확인해줍니다. 선지자의 계획대로 만남이 순조롭게 진행되어갑니다.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도 벧엘에서 사명을 잘 감당하고 돌아가는 순조로운 상황입니다. 그러나 일의 진행에 있어 순조로움(이나 어려움)이 늘 하나님의 뜻을 진단하는 기준이 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바쁘고 긴장된 일정을 보냈으므로 육체적으로 피곤하고 허기지고 목마르며,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치고 긴장이 풀린 상태였으리라. 그의 목적지가 예루살렘(17km)이라면, 2만 보정도 거리로서 걸음걸이에 따라 2-3시간이 소요됩니다. 목적지가 어디든 왔던 길이 아닌 다른 경로로 가고 있었으므로(10) 시간이 더 걸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휴식을 좀 취하고 다시 여정을 계속하려 했을 수 있습니다. 그의 휴식에 대한 이유나 잘잘못을 유추해볼 수는 있겠으나, 확실한 실마리는 없으므로 이에 대한 결론은 열어두는 게 낫습니다.

(3) 선지자와 하나님의 사람 속임과 속음(15-19)

벧엘 선지자와 하나님의 사람의 만남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속임과 속음’의 과정을 통해 결국 ‘여호와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벧엘의 노인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임을 확인한 후, 자신의 소개도 하지 않고 곧바로 그를 자기 집으로 초대합니다. 그의 초대와 하나님의 사람의 반응은 앞서 여로보암과 하나님의 사람 사이의 초대와 반응과 유사하게 진행됩니다. 하나님의 사역자를 접대하는 일은 드물지 않았습니다(왕하 4:8-10). 모르는 나그네라도 환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레 19:33-34). 그러나 선지자의 초대 동기가 미심쩍고, “나와 함께 집으로 가서 떡을 먹으라”(15)는 초대의 말이 앞서 여로보암의 회유적인 발언(7)과 유사하여 그의 초청 또한 회유임을 암시합니다. 게다가 “떡을 먹으라”는 제안은 하나님이 금한 것이며, 이 행동은 실상 나머지 금령인 ‘벧엘로 돌아가는 것’, ‘물을 마시는 것’을 다 포함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이 이 초청을 수락한다면 여호와의 명령을 다 어기게 됩니다. 선지자도 이를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를 초대하려 한 것은 다른 의도가 있거나 ‘사역자를 대접하는 일인데 뭐 어떠냐’는 식의 섣부른 판단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의 아들들도 이런 점을 짐작할 수 있었겠지만 나귀에 안장을 지우라는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13), 아버지나 하나님의 사람이 불순종의 길로 가도록 동조한 셈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나 아들들이 여로보암의 행위를 눈감아주거나 따른 것을 고려하면, 그들은 모두 영적으로 무디고, 하나님 말씀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신의 생각을 우선시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영적 상태는 이스라엘 백성을 대변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선지자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지만, 결국은 그의 초대에 응하고 맙니다. 처음 거절의 내용은 여로보암에게 한 말과 대부분 같고, 여기에 선지자와 함께 ‘돌아가지 못한다’는 표현이 더해졌습니다(8,16). 그 후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금령을 선지자에게 조목조목 나열하여(9,17) 그의 거절이 ‘여호와의 말씀’ 때문임을 명확히 밝힙니다. 여로보암과의 대면은 이 시점에서 끝났지만, 선지자와의 대면은 계속됩니다. 선지자는 그가 초청을 거절하자 자신도 그와 같은 선지자임을 밝힙니다. 그뿐 아니라 그의 초청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거절의 이유’로 댔으므로 선지자도 ‘여호와의 말씀’을 ‘초청의 이유’로 되받아칩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그를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거짓말이었습니다(18).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을 접대하려 한 동기나 의도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선한지 악한지 파악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자기와 같은 선지자라 대접하고 싶었는지, 그가 전한 여호와의 말씀의 진위를 시험하거나 확인하려 했는지도 모릅니다. 확실한 것은 그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욕심으로 이미 벧엘을 떠난 자를 뒤쫓았습니다. 그 사람을 회유하고 속이는 데 단호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과 천사를 운운하면서라도 자신의 뜻을 이루려 했습니다. 이 모든 행위에는 여호와 경외가 결여되어 있고, 영적, 도덕적 판단력이 마비되었으며, 욕심과 집착이 서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선지자가 말한 여호와의 말씀이 자신이 받은 말씀과 완전히 반대되는 내용임을 주의하지 못했습니다. 자기와 같은 선지자라는 말에 경계심을 풀었고, 여호와가 사자를 보내 자기를 대접하라고 했다는 선지자의 말에 속아 넘어갔습니다. 결국 그와 함께 벧엘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의 집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사람은 여호와의 명령을 다 어기고 말았습니다.


한 선지자가 다른 선지자에게 거짓말까지 하여 실족하게 할 만큼 이 시대는 어두웠습니다. 유다에서 온 선지자도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과 달랐지만 듣고 싶은 말을 해주니 따른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천사의 말이나 선지자의 말이 늘 진실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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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12-03)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의 통치

열왕기상 12장 25-33절


‘신앙의 성숙하다’는 의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나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성숙한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삶의 우선순위를 두고 생활합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예배를 소중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중요한 순간마다 성경 말씀대로 선택하고 결정합니다. 성숙한 신앙인이 되는 데 필요한 요소가 무엇인지 본문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보암에게 좋은 왕이 될 수 있는 기회와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여로보암은 스스로 그 기회를 차 버렸습니다. 하나님과 백성을 신뢰하지 못하게 된 여로보암은 두려움 속에서 자구책을 강구합니다. 여로보암은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위해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려고 종교를 이용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 죄가 되었습니다.

 

종교를 정치에 이용한 여로보암(25-33)

사람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 종교를 아용하곤 합니다. 교회는 정치와 무관할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정치가 무엇인지 늘 생각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준비된 지도자가 누구인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누구인지를 살피고 적합한 사람을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울타리 되어주시도록 신앙을 챙겨야 했지만, 주변 나라들과 백성의 심기를 살피는 일부터 했습니다.

25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산지에 세겜을 건축하고 거기서 살며 또 거기서 나가서 부느엘을 건축하고 26그의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27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들의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의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28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 29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30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경배함이더라 31그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32여덟째 달 곧 그 달 열다섯째 날로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고 제단에 올라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가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가 지은 산당의 제사장을 벧엘에서 세웠더라 33그가 자기 마음대로 정한 달 곧 여덟째 달 열다섯째 날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절기로 정하고 벧엘에 쌓은 제단에 올라가서 분향하였더라(25-33)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 여로보암(주전 930-909년)의 통치는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과 배역으로 점철됩니다. 통치 기록은 르호보암(12:1-24; 14:21-31)을 앞뒤에 두고 약 3장(12:25-14:20)에 걸쳐 전개되지만, 이는 후대 왕들에게 악한 왕의 표본으로 예시될 악행의 발자취입니다. 열왕기는 남북 이스라엘의 멸망 원인이 하나님에 대한 왕과 백성)의 불순종임을 증명하고 있으므로, 각 왕의 정치, 군사적 공적보다는 신앙적 업적 또는 악행을 묘사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1) 여로보암의 방비(25)

여로보암은 수도를 세겜으로 정하고 방비에 힘씁니다. 세겜은 예루살렘 북쪽 약 65킬로미터에 있는 에브라임의 성읍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처음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고(창 12:7) 내내 이스라엘의 신앙, 정치의 중심지였습니다. 이곳에서 이미 르호보암과 북이스라엘의 두 차례 만남이 있었습니다(12:1-16). 그리심 산과 에발 산 사이에 위치한 세겜은 상업적, 군사적 교통의 요지였고, 같은 이유로 남북으로부터의 침입에 취약했습니다. 여로보암은 요단 동편 얍복 강 부근에도 부느엘(브니엘)을 건축하고 요새화했습니다. 다윗의 든든한 지지 세력이었던 길르앗(삼하 17:27-29; 19:31-39)을 통제하고, 요단 서쪽의 세겜을 보호하려는 목적일 것입니다.

(2) 여로보암의 두려움(26-27)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선택과 열 지파의 지지 속에 왕이 됐으나, 백성의 마음을 잃을까 봐 두려움에 사로 잡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여로보암에게 다윗의 행위를 따라 하나님의 율례와 명령을 지키라고 명하셨습니다(11:38). 여로보암은 이 점을 상기하며 어떻게 순종할 수 있을지를 궁구하고, 마음이 순종에서 멀어질 때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지어준 견고한 왕조를 자기에게도 약속하셨음(11:38)을 굳게 붙잡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신뢰와 순종에 집중하는 대신 백성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전전긍긍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마음에는 백성이 다윗의 집인 르호보암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불안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북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제사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대하 11:16). 여로보암은 이처럼 백성이 계속 예루살렘에 가다 보면 그들의 마음이 르호보암에게 돌아갈 것이며, 언젠가 자기를 죽이고 그에게 완전히 돌아갈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랐습니다. 여로보암은 르호보암을 “유다의 왕”이자 북부 백성의 “주(인)”로 여겼고, 백성이 그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자신의 추측을 기정사실인 양 스스로에게 주입시켰습니다(26-27). 이로써 하나님께서 자신을 열 지파의 왕으로 세우셨다는 점과 그 선택의 위중함과 감사함을 망각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여로보암의 사고는 현실을 직시한 이성적인 추론과 판단으로 들립니다. 실제로 르호보암에게 돌아간 자들이 있었을 테고, 이미 르호보암을 죽이려 들었던 백성이었으므로(12:18) 그도 암살당할 가능성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눈앞의 현상과 인간적인 한계로 괴로운 이때가 하나님께 돌아가야 하는 때임을 그는 결코 깨닫지 못했습니다.

(3) 여로보암의 배역(28-33)

여로보암은 백성의 마음이 르호보암에게 돌아가지 못하도록 두 금송아지를 만드는 방안을 채택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신앙 전통을 깨뜨립니다. 28절의 “이에 계획하고(야아쯔)”는 스스로 계획한 것이 아닌 ‘누군가와 의논했다’는 뜻입니다. 이 동사는 이미 6, 8절에서 르호보암이 원로들 및 친구들과 ‘의논했다’에서 똑같은 형태로 나왔습니다. 여로보암도 자문을 거쳤으나 르호보암처럼 지혜롭지 못한 조언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백성에게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고 선포합니다(28). 이 선언은 송아지 형상을 만든 근본목적이 경배에 있지 않고 백성의 예루살렘 방문을 차단하는 데 있음을 알려줍니다. 여로보암은 두 금송아지를 북이스라엘 백성의 신들로 소개하며, 이 신들이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올라오게 했다고 설명합니다. 이런 발언은 과거 이스라엘이 시내 산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자기들의 신으로 숭배한 사건을 떠오르게 합니다(출 32장). 이처럼 여로보암은 여호와가 이룬 출애굽의 구원 사건을 자신이 만든 금송아지에 결부시켜, 백성들의 신앙을 미혹에 빠지게 합니다. 그가 송아지를 어떻게 여기든, 하나님께서는 그가 만든 송아지가 “다른 신”이며 “우상”임을 분명히 지적하십니다(14:9). 그가 금송아지를 두 개나 만든 것은 북이스라엘의 남쪽 벧엘과 북쪽의 경계인 단에 하나씩 두기 위함입니다. 특히 예루살렘 북쪽 17킬로미터에 있는 벧엘은 아브라함과 야곱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은 유서 깊은 장소였으므로(창 12:8; 28:18-19; 35:17), 백성의 판단을 흐리게 했습니다. 이에 북부 지파 백성은 차차 예루살렘에 갈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잘못된 대상과 잘못된 장소에서 예배 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착각했습니다. 여로보암의 정책은 결국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의 근간을 흔들었습니다. 또한 북부의 열 지파를 이스라엘의 나머지 형제 지파와의 연합에서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여로보암의 배역과 불신앙은 자신과 백성을 영적, 도덕적 타락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는 금송아지 숭배에 이어, 부차적인 죄를 계속 지었습니다.

29-33절에 기록된 그의 죄악은 히브리어로 ‘만들다’, ‘하다’의 뜻인 ‘아싸’로 대부분(9번) 설명되었습니다. 본문에서는 ‘짓다, 삼다, 정하다, 행하다, 만들다, 쌓다’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동사는 앞서 히람과 솔로몬의 성전 기구 제작에 대한 설명에 사용되어 그들의 순종을 부각했는데(7:40, 45, 48, 51), 여기서는 대조적으로 여로보암의 불순종과 악행을 부각합니다. 그의 악행은 첫째, 산당을 만들었습니다. 산당은 높은 곳에 지은 제사처로, 성전 완공 전에 백성들이 제사하던 곳입니다(3:2). 이곳에는 가나안의 우상 신들을 위한 제단들도 함께 있어, 이스라엘을 우상숭배로, 여호와의 신앙과 혼합된 종교로 이끄는 지름길이 되었습니다. 여로보암은 그런 신앙의 유혹 장소를 도처에 만들고 백성을 그곳으로 유인했습니다. 이는 산당과 다른 예배처를 없애고 오직 하나님께서 지정한 곳,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하라는 명령(신 12:2-5)을 거역한 행위입니다. 둘째, 그는 “보통 백성” 중에서 산당 제사장을 만들었습니다(31). 이는 ‘백성의 말단’이란 의미로 제사장이 되기에 가당치도 않은 자들임을 나타냅니다. 제사장직은 레위 자손 중 아론의 자손에게 주어진 직임입니다(출 28:1; 민 18:6-7). 여로보암이 이런 규례를 무시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반대로 그는 성전에서 일하던 제사장들과 레위인의 직분을 박탈했습니다(대하 11:13-16). 그러나 이들은 참된 신앙을 위해 북부의 삶의 터전을 버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감으로써 하나님께 헌신했습니다. 셋째, 여로보암은 자기 마음대로 제8월 15일을 절기로 만들었습니다. 유다에서 제7월 15일부터 지키는 장막절을 북부의 추수 때에 맞췄거나 다른 달력을 사용하여 정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절기를 만들었다고 생각했으나(33), 절기가 여호와께 속했으며 여호와를 위해 지켜야 함(레 23:34)을 망각했습니다. 넷째, 여로보암은 죄악을 행하는 데 솔선수범했습니다. 그는 벧엘에서 자기가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하고, 자기가 만든 산당의 제사장을 그곳에서 일하게 두었습니다. 또한 자기가 만든 절기에 자기가 만든 제단 위에 희생제물을 바치고 분향했습니다. 지도자가 영적으로 타락했으므로 백성의 타락은 불 보듯 뻔했습니다. 그렇기에 여로보암의 악행은 이스라엘 역사 내내 불순종과 죄의 표본이 되었습니다(16:2,19,26).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복된 삶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만 주신 것이 아니라, 성령님도 주셨습니다. 우리 마음에 계신 성령님께서 우리를 항상 하나님의 말씀과 뜻대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항상 성령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충만하셔서 우리를 온전히 다스려 주시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들의 생각, 말, 행동을 통해 죄의 열매가 아닌 하나님이 받으시는 성령의 열매를 아름답게 맺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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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12-02)


이스라엘 왕이 된 여로보암

열왕기상 12장 12-24절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면, 작게는 가정에서부터 크게는 국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조직과 공동체가 존재합니다. 이 공동체 안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것은 지도자와 그 통치를 받은 사람들과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직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지도자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목들과 자질들을 조사하고, 어떤 지도자가 바람직한 지도자인지를 제시해 줍니다. 오늘날 대부분 지도자의 자리에 서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리더십 관련 프로그램의 등록하거나 서적을 읽으면서 좋은 리더가 되고자 노력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위대한 지도자로 기억되길 원하십니다.

예고된 대로 솔로몬의 배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스라엘은 분열됩니다. 르호보암은 여로보암과 북쪽 지파의 의중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원로들의 충정 어린 조언을 버리고 또래 신하들의 조언을 수용했습니다. 그 결과 유다와 베냐민 지파만 르호보암을 왕으로 삼았고, 북쪽의 열 지파는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았습니다. 이에 르호보암과 그를 따르는 자들은 북이스라엘을 무력으로 통합하려 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포기합니다.

 

힘으로 통치하려는 르호보암(12-16)

지도자의 덕목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경청입니다. 지도자는 모든 분야에 정통한 사람이 아니라, 각 분야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 최상의 선택을 내리는 사람입니다. 지도자의 능력은 다양한 의견을 듣고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지를 판단할 때 드러납니다. 르호보암은 장로 그룹과 청년 그룹의 의견을 들었으니 결단을 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결정 기준은 무엇입니까?

12삼 일 만에 여로보암과 모든 백성이 르호보암에게 나아왔으니 이는 왕이 명령하여 이르기를 삼 일 만에 내게로 다시 오라 하였음이라 13왕이 포학한 말로 백성에게 대답할새 노인의 자문을 버리고 14어린 사람들의 자문을 따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는 너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아버지는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였으나 나는 전갈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리라 하니라 15왕이 이같이 백성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 일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여호와께서 전에 실로 사람 아히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심이더라 16온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말을 왕이 듣지 아니함을 보고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라 다윗이여 이제 너는 네 집이나 돌아보라 하고 이스라엘이 그 장막으로 돌아가니라(12-16)

여로보암과 북쪽 지파 모든 백성은 3일 후에 다시 르호보암을 만났습니다. 그들이 르호보암의 명령을 따라 그날에 나온 것은 그를 왕으로 세울 마음이 아직 남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어리석게도 원로들의 지혜롭고 융화적인 자문을 버리고, 젊은 신하들의 자문을 따랐습니다. 그는 솔로몬이 무겁게 한 멍에를 덜어달라는 백성의 요구를 무시하고, 솔로몬의 정책보다 더 거센 정책으로 그들을 다스릴 것이라고 호되게 대답했습니다. 어느 백성이 더 버거운 세금과 부역, 거기다 전갈로 징치할 왕을 원하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왕의 지지 세력은 유다(와 베냐민)밖에 없지 않습니까? 르호보암의 어리석은 선택으로 열 지파의 마음은 그에게서 완전히 돌아섰습니다. 열왕기 저자는 르호보암이 백성의 요구를 듣지 않은 것은 여호와의 주권적인 계획이었다고 설명합니다(15).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아히야를 통해 여호보암에게 전달한 말씀을 성취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람들의 마음과 행동을 적절히 사용하십니다. 예를 들면, 모세 당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애굽 백성에게 열 재앙을 내리고 이스라엘을 구출하신 사건(출 7:13), 압살롬으로 하여금 아히도벨의 전략을 버리고 첩자 후새의 전략을 따르게 하심으로써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고 다윗을 복위시킨 사건(삼하 17:14) 등에서도 나타났습니다. 한편 르호보암의 답변을 들은 북쪽 지파들은 ‘우리가 다윗에게서 가진 몫(“관계”)이 무엇이냐? 이새의 아들의 유산이 없도다’(16)라며, 불만과 거절을 내비칩니다. 여기 16절에서 “관계”로 번역된 단어(헬레크)는 할당받은 ‘땅’, ‘몫’을 뜻하며, 뒤 문장의 “유산”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들의 말은 이전에 베냐민 사람 세바가 북쪽 지파와 동조하여 다윗에게 반기를 들며 내뱉었던 말에서 한 단어만 빠졌을 뿐 똑같습니다(삼하 20:1). 이로써 압살롬의 반란 후 일어난 북쪽 지파와 유다 간의 분열이 르호보암 대에 다시 전면에 떠오릅니다(삼하 20:2). 세바의 발언과 같이 몫과 유산을 언급하는 북쪽 지파 백성의 발언은 그들이 다윗 자손에게서 어떤 은혜나 특혜를 얻은 적이 없고, 앞으로도 유익이 없을 터이므로, 더 이상 자기들이 다윗 자손에게 충성해야 할 명분이 없다는 뜻입니다(삼하 19:42-43). 북쪽 지파는 그들의 요구를 짓밟고 무력으로 자신들의 왕이 되기를 고집한 르호보암에게 분개하여, 각자 해산을 명합니다. 그들은 르호보암을 “다윗”이라 부르며, 그를 왕으로 삼는 유다 지파(“네 집”)나 돌보라고 조롱합니다. 이 말은 그들이 더 이상 르호보암과 협상할 의사가 없으며, 더 이상 다윗 왕조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자기들의 이익에 걸림돌이 된다면 자신의 형제라도 버릴 것이며,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은 언약이라도 개의치 않을 것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었습니다. 지파 간의 경쟁과 갈등은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을 시기하고 미워한 때부터 시작하여(창 37장), 이스라엘 역사 내내 서로 오해하고 다투고(민 32장), 칼날을 겨누다가(삿 20-21장), 이제는 분열의 상황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분열된 이스라엘(17-20)

민심을 다시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은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백성은 공평과 정의, 사랑과 자비, 즉 섬김의 정치를 바랍니다. 지도자가 최소한 조심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과격한 말투, 난폭한 언어, 강압적이고 위협적인 자세는 함께하는 사람들의 분노와 불만을 일으키게 되고 결국 공동체를 파멸로 이끌게 돤다는 사실입니다.

17그러나 유다 성읍들에 사는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르호보암이 그들의 왕이 되었더라 18르호보암 왕이 역꾼의 감독 아도람을 보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쳐죽인지라 르호보암 왕이 급히 수레에 올라 예루살렘으로 도망하였더라 19이에 이스라엘이 다윗의 집을 배반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더라 20온 이스라엘이 여로보암이 돌아왔다 함을 듣고 사람을 보내 그를 공회로 청하여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으니 유다 지파 외에는 다윗의 집을 따르는 자가 없으니라(17-20)

이스라엘은 마침내 남북으로 나뉘었고, 르호보암과 여로보암이 각각 왕이 되었습니다. 애초에는 “온 이스라엘”이 르호보암을 왕으로 삼고자 했으나(1), 지금은 “유다 성읍들에 사는 이스라엘 자손”인 유다와 베냐민 족속 및 그곳에 남은 다른 지파의 백성(23)만이 그를 왕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르호보암은 북쪽 지파와 어그러진 일을 수습하기 위해 아도람(하도람, 아도니람)을 대표로 보냈습니다. 아도람은 다윗 때부터(삼하 20:24) 솔로몬 시대(4:6; 5:14)에 이르기까지 강제 노동을 총지휘한 자로 소개된 인물입니다. 삼 대 왕에 걸쳐, 적어도 40년 이상 봉직하고 있는 셈이므로, 노년의 아도람이거나 혹은 그의 아들이나 총감독자 지위를 가진 자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그의 임무는 북쪽 지파를 달래거나 재협상을 시도하거나 해서 다시 그들을 르호보암에게로 돌리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솔로몬 통치 당시 고된 부역에 시달려왔고, 이제는 더 강압적인 정책을 계획한 르호보암에게 치를 떨고 있는 북쪽 지파에게 고역 현장의 총감독자를 보냈습니다! 이것은 르호보암과 그의 젊은 신하들이 작금의 돌아가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어리석은 조치입니다. 르호보암의 이런 행보는 북쪽 지파의 예민해진 심기를 크게 거슬렸습니다. 그들은 아도람을 돌로 쳐 죽임으로써 자신들의 분노와 적개심을 르호보암에게 전했습니다. 르호보암은 예상치 못한 반응이 일어나자 그때서야 상황을 파악했습니다. 그는 놀라 다급히 수레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도망했습니다. 그가 그제야 예루살렘으로 떠났다는 점은 그가 세겜에서 머물며 이 일을 타개하고 북쪽 지파의 신임을 얻을 수 있다고 오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가 다급히 도망한 것을 보면 북쪽 지파 백성이 아도람만 아니라 르호보암의 목숨도 가만 놔주지 않을 요량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 저자는 북쪽 열 지파의 봉기를 다윗 집에 대한 배반으로 설명합니다(19). 다윗 왕조에 대한 북이스라엘의 어그러진 시선은 분열왕국 이래 쭉 지속되었습니다. 이제 르호보암을 왕으로 삼으려 했던 “온 이스라엘”(1)은 그 대신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습니다(20). 여기서 “온 이스라엘”이란 유다와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나머지 열 지파를 가리킵니다. 여로보암이 애굽에서 돌아왔음을 들었을 때 그들은 그를 공회로 초대했습니다. 이는 공식적인 절차를 밟아 그를 왕으로 추대하는 과정입니다. 마침내 그들은 여로보암을 북이스라엘의 공식적인 왕으로 삼았습니다. 여로보암이 왕이 되고 유다 지파만 다윗의 아들 르호보암을 따르게 된 것은 다 하나님께서 예고하신 대로입니다(11:12-13,31-39). 르호보암의 무자비함과 어리석음으로 왕국의 분열이 실현되었으나, 분열의 직접적인 원인은 솔로몬의 우상숭배였습니다(11:4-13).

 

스마야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21-24)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신앙의 출발점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그분이 만들려고 하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알아야 끝까지 신앙의 여정을 완주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나를 넘어서서 하나님과 세상을 향한 주님의 관심을 일어내야 합니다.

21르호보암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유다 온 족속과 베냐민 지파를 모으니 택한 용사가 십팔만 명이라 이스라엘 족속과 싸워 나라를 회복하여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에게 돌리려 하더니 22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사람 스마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23솔로몬의 아들 유다 왕 르호보암과 유다와 베냐민 온 족속과 또 그 남은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24여호와의 말씀이 너희는 올라가지 말라 너희 형제 이스라엘 자손과 싸우지 말고 각기 집으로 돌아가라 이 일이 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하셨다 하라 하신지라 그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돌아갔더라(21-24)

르호보암은 깨어진 나라를 회복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려고 하나, 하나님의 개입으로 무산됩ㄴ다. 아도람의 죽음으로 르호보함은 신변의 위협을 느껴 예루살렘으로 속히 도망했습니다. 그 후 그가 계획한 것은 ‘이스라엘 족속’과 전쟁을 벌여 강제로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강압적이고 무자비한 방법을 생각해낸 르호보암에게는 이처럼 교만과 악과 어리석음만 남았습니다. 그는 유다와 베냐민 지파에서 18만 명을 소집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이 즉각 개입하셔서 전쟁을막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스마야 선지자(“하나님의 사람”,22)를 보내, 르호보암과 유다와 베냐민 및 그곳에 남은 다른 지파 백성에게 그의 뜻을 전달하십니다. 스마야(대하 12:2-8)는 아히야(11:29; 14:4)와 당대의 선지자로서 왕과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으며, 이들의 예언은 글로도 전해 내려왔습니다(대하 9:29;12:15).

24절의 “여호와의 말씀이”란 어구는 원래 ‘여호와가 이렇게 말씀하신다’라는 문장으로, 선지자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할 때 첫 문장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르호보암과 그 무리에게 싸우러 올라가지 말고 집으로 돌아갈 것을 명하십니다. 그들이 전쟁을 벌이려는 대상이 다름 아닌 그들의 “형제”인 “이스라엘 자손”임을 상기시키십니다(24).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소집은 강제적이었겠지만, 이들 또한 르호보암처럼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형제들을 죽이는 일도 마다하지 않을 요량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분열이 자신의 뜻임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르호보암과 백성은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 돌아갔습니다. 선지자를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여 따른 것은 그동안 르호보암과 백성이 보여준 가장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오늘도 삶 속에서 우리는 크고 작은 일을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선택의 길에서 많은 고민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선택 장애까지 발생합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다수가 모인 공동체의 진로를 결정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선택의 시점에서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결정하지 말고, 섬김과 화합의 관점에서 결정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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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12-01)


어리석음을 택한 여로보암

열왕기상 12장 1-11절


노련함과 패기는 적절한 균형을 이뤄야 합니다. 이 둘은 모두 공평과 정의, 사랑과 자비의 정치학에서 제대로 해석되고 적용되어야 합니다. 우리나라 정치가 노련한 섬김의 지혜와 공평과 정의, 사랑과 자비의 정치학에 방해되는 장애물을 극복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솔로몬이 죽은 후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과 만나기 위해 세겜에 모였습니다. 르호보암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특히 북쪽 지파들이 아버지 솔로몬의 실정(失政)을 거론하면서 개선을 요구하지만 거절당합니다.

 

여로보암과 백성들의 호소(1-5)

공동체를 세워가는 일은 매우 어렵고 오래 걸리지만, 균열과 와해는 순식간에 맞닥뜨릴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제대로 듣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마음으로 듣는가 하는 것입니다. 순종할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솔로몬은 백성의 희생을 등에 업고 부귀와 영화를 누린 것입니다. 그 경계가 모호하지만, 권력자가 사적인 이익을 위해 권력을 남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지켜보고 분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1르호보암이 세겜으로 갔으니 이는 온 이스라엘이 저로 왕을 삼고자 하여 세겜에 이르렀음이더라 2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전에 솔로몬왕의 얼굴을 피하여 애굽으로 도망하여 있었더니 이제 그 소문을 듣고 오히려 애굽에 있는 중에 3무리가 보내어 저를 불렀더라 여로보암과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와서 르호보암에게 고하여 가로되 4왕의 부친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부친이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 5르호보암이 대답하되 갔다가 삼일 후에 다시 내게로 오라 하매 백성이 가니라(1-5)

열왕기상 12-14장은 예고된 이스라엘의 분열(11장) 과정과 남북 이스라엘의 초대 왕들을 기술합니다. 단락의 앞뒤(12:1-24; 14:21-31)는 르호보암, 중간(12:25; 14:20)은 여로보암 중심으로 기술되었습니다. 왕권에 대한 논의를 위해 르호보암과 북쪽 지파 간의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장소는 에브라임에 속한 성읍인 세겜으로 예루살렘에서 북쪽 약 65킬로미터에 위치했습니다.

오늘 그에게 담화를 요청한 “온 이스라엘”(1)은 가나안 북부에 기업을 얻은 ‘열 지파’를 가리킵니다. 이런 표현은 이미 이스라엘 역사 속에 지파 간의 분열이 존재했음을 암시합니다. 이스라엘의 왕정 역사가 시작된 이래 왕은 하나님에 의해 지명되고, 그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승인을 공식화했습니다. 그러나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곧바로 자동적으로 군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백성들의 지지와 승인이 필요했습니다. 초대 왕 사울도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기름부음을 받았고(삼상 10:1), 미스바에서 제비뽑기를 통해 백성들에게 왕으로 선언되었으며(삼상 10:17-24), 다시 길갈에서 공식적 절차를 밟고 왕이 되었습니다(삼상 11:15). 다윗이나 여로보암의 경우는 기름부음을 받거나 하나님께 왕으로 지목받은 후 시일이 지나서야 왕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공식적인 언약을 통해 승인을 받아 왕권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삼상 16:13; 삼하 2:4; 5:3; 왕상 11:31-39;12:20). 등극 과정에서 백성의 지지를 받는 일도 쉽지 않았습니다. 사울에게는 그가 왕이 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자들이 있었습니다(삼상 10:27). 다윗은 통치 첫 7년 반 동안 유다의 왕이었으며, 그 이후에야 열두 지파의 왕이 되었습니다(삼하 5:5).

본문에서 르호보암 또한 유사한 어려움에 봉착합니다. 북쪽 지파들이 르호보암을 “왕으로 삼고자” 모였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1), 그들은 르호보암을 왕으로 추대할 의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 집안의 세습을 용인하기 전에 이것이 자신들에게 어떤 손익이 있을지를 먼저 타진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북쪽 지파의 무리에 여로보암이 대표로 나와 있습니다(2). 여로보암의 등장은 하나님께서 아히야 선지자를 통해 그가 이스라엘 열 지파의 왕이 될 것이라 예고하신 일(11:31-39)을 상기시키기에 앞으로 어떻게 일이 전개될지 긴장감을 줍니다. 그동안 여로보암은 자신을 죽이려 한 솔로몬을 피해 애굽에서 은신하고 있었습니다(2; 11:40). 솔로몬이 죽자 북쪽 지파의 요청으로 귀국했습니다. 여로보암과 북쪽 지파 온 회중은 르호보암을 왕으로 추대하는 조건으로 솔로몬이 그들에게 지운 세금과 고역의 무거운 멍에를 덜어줄 것을 요구합니다. 그동안 백성은 물리적, 경제적, 군사적 등 다방면으로 고통의 시간을 보냈기에 다윗 왕조에 대한 불만이 쌓여 있었습니다. 과거 다윗의 통치 말기에 압살롬의 반역과 세바의 반란 등으로 다윗의 왕권은 약화되었습니다(삼하 15-20장). 당시 유다 지파에 대한 북쪽 지파들의 반목 및 이들 사이의 대립과 균열이 가중되었고, 다윗 왕조에 대한 불만도 높아갔습니다. 그 후 아도니야와 추종자들의 반란까지 일어나 분열은 지속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솔로몬은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로 왕좌에 올랐습니다(1-2장). 왕이 된 솔로몬은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함으로써 예배의 통합과 지파 간의 통합을 추진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에게서 받은 지혜와 부귀영화로 다스리므로 백성은 화합하고 평화를 누렸습니다(4:20,25). 그러나 이스라엘 전 지역을 열두 개 행정구역으로 나눠 예루살렘과 유다 지파 중심의 통치 체제로 이끌었습니다(4:7-19). 그 결과 유다 지파의 혜택이 늘어갔지만 나머지 북쪽 지파들은 소외되었으며 예루살렘 왕궁에 식량을 공급해야 하는 등 정치적, 재정적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습니다(4:27-28). 조직 개편과 더불어 솔로몬의 건축 및 국제 무역의 확장으로 백성은 과중한 세금과 고역까지 떠안았습니다(5:13-16; 9:15-23). 게다가 북쪽에서는 아람이, 남동쪽에서는 에돔이 이스라엘을 압박하므로(11:14-25) 백성의 중압감과 불안은 고조되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북쪽 지파의 여로보암은 하나님으로부터 열 지파의 왕으로 지명되었습니다. 이제 솔로몬은 죽고 르호보암이 그들 위에 군림하기 원합니다. 북쪽 지파들은 다윗 왕조에 계속 충성해야 할지, 여로보암과 새 나라를 시작해야 할지 갈림길에 섰습니다. 백성의 요구를 들은 르호보암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자문관들의 의견을 구하고 숙고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북쪽의 백성들에게 3일 후 다시 오라고 명합니다. 이에 백성은 해산합니다.

 

원로들과 젊은 신하들의 조언(6-11)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어떻게 평화롭게 살 수 있을지 말씀해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뿐 아니라 주위의 지혜로운 지도자들을 통해 조언을 해주십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높아지라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낮아지라고 하십니다. 어떤 일을 선택할 때 주로 지혜로운 어른들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어른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려야 합니다.

6르호보암 왕이 그 부친 솔로몬의 생전에 그 앞에 모셨던 노인들과 의논하여 가로되 너희는 어떻게 교도하여 이 백성에게 대답하게 하겠느뇨 7대답하여 가로되 왕이 만일 오늘날 이 백성의 종이 되어 저희를 섬기고 좋은 말로 대답하여 이르시면 저희가 영영히 왕의 종이 되리이다 하나 8왕이 노인의 교도하는 것을 버리고 그 앞에 모셔 있는 자기와 함께 자라난 소년들과 의논하여 9가로되 너희는 어떻게 교도하여 이 백성에게 대답하게 하겠느뇨 백성이 내게 말하기를 왕의 부친이 우리에게 메운 멍에를 가볍게 하라 하였느니라 10함께 자라난 소년들이 왕께 고하여 가로되 이 백성들이 왕께 고하기를 왕의 부친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우리를 위하여 가볍게 하라 하였은즉 왕은 대답하기를 나의 새끼손가락이 내 부친의 허리보다 굵으니 11내 부친이 너희로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찌라 내 부친은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너희를 징치하리라 하소서(6-11)

르호보암은 원로들과 젊은 신하들로부터 각각의 자문을 받습니다. 원로들은 솔로몬의 생전에 솔로몬을 보필했던 자들입니다(6). 원로들은 대부분 지혜와 경험이 풍부하고, 시세를 읽을 줄 알며, 왕에게 충성하는 자들입니다(삼하 17:1-14; 에 1:13-22). 반면 젊은 신하들은 르호보암과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친구들이었습니다(8). 열왕기 저자는 이들을 “어린 사람”(옐레드, ‘소년’, ‘아이’)이라 칭했으나, 르호보암이 41세에 왕이 되었으므로(14:21) 그들은 결코 어리지 않습니다. 이는 원로들과 대조되는 그들의 미숙함과 어리석음을 조롱하는 표현입니다. 원로들은 그들의 경륜을 통해 충심으로 르호보암에게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라는 온건책을 제시합니다. 왕이 이번에 자존심을 버리고 백성을 섬기는 위치에 서서 그들에게 좋게 얘기하면, 백성은 그의 영원한 종이 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조언은 백성을 종으로 삼기 위해 그들을 속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진정한 왕은 영적 지도자여야 한다는 하나님의 지침(신 17:19-20)을 함축한 조언입니다. 현실적으로는 르호보암의 권력욕과 혈기를 잠시 잠재우고 백성에게 왕으로서 승인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 것입니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어리석게도 노인들의 자문을 버리고 또래의 조언에 귀 기울입니다. 그의 어리석음은 친구들의 조언을 듣기도 전에 원로들의 자문을 이미 버렸다는 데서도 나타납니다(8). 이는 원로들의 조언이 그의 구미에 맞지 않았음을 암시합니다. 그는 자기 친구들이라면 원하는 답을 해줄 것이라 생각했고, 결국 그들은 유유상종의 관계임을 보여줍니다. 친구들에게 편향된 르호보암의 속내는 질문에서도 은연중에 나타납니다. 그는 원로들에게 “당신들은 이 백성에게 어떻게 대답하라고 조언하겠소?”라고 물었습니다(6). 그러나 친구들에게는 “너희는 우리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대답할지 조언하겠느냐?”라고 물으며(9) 자신과 그들을 ‘우리’라는 공동체로 묶어, 함께 일을 해결하려 합니다.

젊은이들은 원로들의 제안과 정반대로 백성을 권력과 무력으로 통제하라는 강경책을 제시합니다. 첫째, ‘왕의 새끼손가락이 솔로몬의 허리보다 굵다’(10)는 말은 르호보암의 약함이 솔로몬의 강함을 능가한다는 뜻으로서, 백성에게 그가 솔로몬보다 더 능력자임을 선언하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르호보암을 치켜세워주려는 젊은 신하들의 아첨일 뿐입니다. 둘째, 백성들은 세금과 부역의 멍에를 가볍게 해달라고 했으나, 그럴수록 왕은 멍에를 더 무겁게 하라고 조언합니다. 셋째, 솔로몬은 채찍으로 징계했으나 왕은 전갈 채찍으로 징계할 것이라 으름장을 놓으라고 부추깁니다. “전갈 채찍”은 독침을 가진 전갈 또는 쇳조각 등을 박은 채찍을 가리켜, 무력 정치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르호보암이 원했던 답변입니다.

르호보암과 그의 친구들은 왕이 국가의 최고 권력자로서 약한 자들을 강경하고 무자비하게 다루는 게 합당하다고 여깁니다. 이번에 백성의 불만을 들어준다면 그들의 요구는 점점 늘어나고 내용의 강도도 높아질 것입니다. 따라서 차후에 불만이 제기되지 못하도록 이번에 그들을 강압적으로 제압함으로써 왕이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를 증명해야 한다는 작전입니다. 이런 의견은 백성의 요구를 완전히 무시한 처사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현실을 외면하고 권력과 무력으로 왕권을 획득하려 드는 미련한 자들입니다.


당신의 모든 삶 부분이 예수님을 본받아 섬기는 일꾼들이 되길 바랍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선택의 순간마다 하나님과 지도자들의 충고를 잘 듣고 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역사의식의 부제가 망각과 태만을 낳았고 결국 국가의 분열로 이어지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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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11-03)


솔로몬을 대적하는 원수들()

열왕기상 1126-43


바닷물은 항상 하루에 두 번 들고 납니다. 하지만 그 들어오는 물을 밀물과 나가는 물을 썰물이라고 합니다. 그 바닷물이 밀고 들어올 때나 빠져 나갈 때나 물은 눈에 뛰지 않게 서서히 빠져나갑니다. 솔로몬에게 거룩한 예배자로 살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들을 한없이 부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그릇된 길로 갈 때, 하나님의 복이 썰물처럼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었습니다. 솔로몬을 대적하는 원수들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라밖에서 하닷과 르손으로 솔로몬을 괴롭힌다면, 안에서는 여로보암이 솔로몬의 대적으로 자라나고 있습니다. 아히야 선지자를 통해 여로보암을 세워서 우상숭배에 빠진 솔로몬을 심판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솔로몬이 여로보암을 죽이려고 하자 여로보암은 애굽으로 도망갑니다.

 

솔로몬의 대적() : 여로보암(26-40)

하나님께서는 순종과 신실함을 요구하십니다. 다윗, 솔로몬, 여로보암에게 모두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며 옳은 일을 행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 없는 영광은 헛되며 영원하지 않습니다. 솔로몬은 이 세상의 모든 찬란한 부귀와 영광을 누렸지만, 그도 역시 죽어 장사되었습니다. 영원하지 못한 지혜와 권력을 얻기 위해 영원하신 하나님을 저버리는 어리석은 행동이 당신 안에는 없는지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도 같습니다.

26솔로몬의 신복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또한 손을 들어 왕을 대적하였으니 저는 에브라임 족속인 스레다 사람이요 그 어미의 이름은 스루아니 과부더라 27저가 손을 들어 왕을 대적하는 까닭은 이러하니라 솔로몬이 밀로를 건축하고 그 부친 다윗의 성의 무너진 것을 수축하였는데 28이 사람 여로보암은 큰 용사라 솔로몬이 이 소년의 부지런함을 보고 세워 요셉 족속의 역사를 감독하게 하였더니 29그 즈음에 여로보암이 예루살렘에서 나갈 때에 실로 사람 선지자 아히야가 길에서 저를 만나니 아히야가 새 의복을 입었고 그 두 사람만 들에 있었더라 30아히야가 그 입은 새 옷을 잡아 열 두 조각에 찢고 31여로보암에게 이르되 너는 열 조각을 취하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 32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뺀 성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니 33이는 저희가 나를 버리고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모압의 신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신 밀곰을 숭배하며 그 아비 다윗의 행함 같지 아니하여 내 길로 행치 아니하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과 나의 법도와 나의 율례를 행치 아니함이니라 34그러나 내가 뺀 내 종 다윗이 내 명령과 내 법도를 지켰으므로 내가 저를 위하여 솔로몬의 생전에는 온 나라를 그 손에서 빼앗지 아니하고 주관하게 하려니와 35내가 그 아들의 손에서 나라를 빼앗아 그 열 지파를 네게 줄 것이요 36그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에게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리라 37내가 너를 취하리니 너는 무릇 네 마음에 원하는대로 다스려 이스라엘 위에 왕이 되되 38네가 만일 내가 명한 모든 일에 순종하고 내 길로 행하며 내 눈에 합당한 일을 하며 내 종 다윗의 행함 같이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다윗을 위하여 세운것 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 39내가 이로 인하여 다윗의 자손을 괴롭게 할터이나 영원히 하지는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한지라 40이러므로 솔로몬이 여로보암을 죽이려 하매 여로보암이 일어나 애굽으로 도망하여 애굽 왕 시삭에게 이르러 솔로몬의 죽기까지 애굽에 있으니라(26-40)

하나님을 떠난 솔로몬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사라져갔습니다. 그래서 이전에 나라 밖에서 에돔 왕 하닷과 수리아 왕 르손이 대적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제는 솔로몬 왕권의 내부에서도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이스라엘 사람 여로보암이 솔로몬의 적수로 등장합니다. 저자는 솔로몬에 대항하는 이방인들을 대적’(사탄)으로 불렀고, 이 대적을 일으킨 주체가 하나님임을 분명히 제시했습니다(4,23). 이에 반해서 내국인 여로보암의 경우는 여로보암을 주어로 하여 그가 왕을 대항해 손을 들어 올렸다’(26)는 완곡한 어조를 사용합니다.

27-40절은 여로보암이 솔로몬에게 반기를 든 계기를 설명합니다. 당시 애굽 아내를 위한 별궁을 완공한 솔로몬은 자국의 방비를 위해 밀로를 건축하고, 예루살렘 성벽 공사를 진행했습니다(27; 9:15,24). 밀로는 다윗 때에 돌로 제작한 계단식 구조물입니다(삼하 5:6-9). 솔로몬은 다윗의 성읍인 예루살렘의 성벽에 뚫린 틈이나 헐은 벽(“무너진 것”, 27)을 보수하고 강화했습니다. 다윗 성읍의 부실한 틈은 이같이 보강되었으나, 다윗 왕조를 대변하는 솔로몬의 신앙적, 영적 틈은 메꿔지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은 예루살렘 외에 북부에서 남부까지 여러 성읍을 요새화하는 데 힘썼습니다(9:15-19). 그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속국 지역에서도 그가 원하는 대로 건축 사업을 벌였기에, 이방인의 노역과 이스라엘 백성의 부역도 끊임없이 요구되었습니다(9:20-23). 공사를 위해 솔로몬은 여러 감독을 뽑았고(9:23), 그중에 여로보암이 있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흡족히 여겨 무기를 담당하게 하고(삼상 16:21), 시키는 일마다 그가 성공적으로 수행하므로 군사령관을 삼았듯이(삼상 18:5), 솔로몬은 여로보암의 능력을 알아보고 그를 요셉 족속의 부역 감독자로 임명했습니다.

이때 여로보암은 사울(삼상 9:1)과 다윗(삼상 16:18)처럼 힘의 용사’(“큰 용사”)로 소개되어(28) 그가 솔로몬의 경쟁자가 될 것을 넌지시 암시합니다. ‘’(하일)이란 단어는 군사력 외에도 어떤 방면에서 유능함과 출중함을 뜻합니다. 여로보암이 감독자로 발탁된 것을 보면 성실함, 통솔력, 수행력을 구비한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그가 감독하게 된 요셉 족속은 원래 에브라임과 므낫세 두 지파를 가리키며, 때로는 유다를 제외한 이스라엘 북쪽 지파 전체를 지칭하기도 합니다. 어느 경우든 대개 에브라임이 대표로 소개됩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야곱과 모세의 기도 중 땅과 후손의 축복을 예고 받았으며(49; 33), 적극적이고 호전적인 자들이었습니다(참조. 60:7). 하나님께서는 에브라임 사람 여로보암에게 북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선언하십니다. 여로보암은 감독이 된 무렵 예루살렘에서 나오다 선지자 아히야를 길에서 만납니다. 아히야는 실로 사람이며, 나단 이후 열왕기에 처음 등장하는 선지자입니다. 아히야는 이때 새 의복(겉옷)을 입고 있었는데, 이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복선입니다. 또한 그의 신분이 선지자인 만큼(14:2; 대하 9:29) 새 겉옷을 입었다는 것은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에게는 그에게 뭔가 중요한 용무가 있음을 눈치 챌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여로보암과 아히야의 만남은 에서 갑작스럽게 로 전환됩니다. 인적이 드문 이라는 장소와 두 사람만”(29)이라는 표현은 사람의 눈을 피해 만나야 할 만큼 아히야에게 비밀스럽고 신중한 용건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아히야는 자신의 새 옷을 붙잡고는 그것을 열두 조각으로 찢었습니다. 옷은 이스라엘 전체를, 열두 조각은 열두 지파를 상징합니다. 아히야는 여로보암에게 열 조각을 취하라고 명하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열 지파를 그에게 줄 것임을 선언합니다. 아히야는 이때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로 칭하는데, 이는 그가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이며, 그가 전하는 말이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확신시키는 의도입니다(31).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에게 약속한 열 지파는 이스라엘의 북부 지파 전체를 상징합니다. 나머지 지파는 숫자상 두 지파로서 유다와 베냐민이지만(12:21,23), 유다가 대표이므로 한 지파로 언급되었습니다(32). 아히야가 전달한 이 내용은 앞서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예고하신 그대로입니다(11:11-1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분열 원인이 솔로몬과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고 그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임을 알리십니다. 그들이 시돈의 아스다롯, 모압의 그모스, 암몬의 밀곰을 섬긴 것은 심판받기에 합당한 죄입니다. 이런 삶은 하나님의 길로 행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 일과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킨 다윗의 삶과 대조됩니다(33). 그런데 이러한 솔로몬의 배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에게 한 지파를 남기시는 이유는 다윗과 맺은 언약을 지키시기 위함이며, 자기 이름을 두려고 선택한 예루살렘을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32, 36; 대상 28:4). 이스라엘의 분열이 솔로몬 대가 아닌 그의 아들 대에 일어나도록 호의를 베푸시는 이유도 다윗의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12,34-35).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그의 앞에서 등불을 항상 가질 것을 선언하십니다(36). 꺼지지 않는 등불은 다윗의 후손을 가리키며, 다윗 왕조를 끊지 않으실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를 상징합니다(2:4; 8:25; 15:4).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죄 때문에 다윗 자손들을 괴롭게 하실 것이나 영원히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39). 이처럼 하나님께서 다윗 왕조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푸심으로 하나님의 크신 사랑만이 두드러집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그가 분명히 여로보암을 취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을 것을 약속하십니다(37). 여로보암은 왕으로서 그의 마음에 원하는 대로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로보암도 솔로몬과 마찬가지로(3:14) 다윗을 따라 하나님의 율례를 지키고, 하나님의 눈에 정직한 일을 행해야 합니다(38). 순종한다면 여로보암 또한 하나님의 임재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한 견고한 왕조의 축복을 누릴 것입니다(38). 이처럼 이스라엘의 분열은 하나님께서 예고하신 대로 점점 가시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솔로몬이나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일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죄의 징계로 고난을 주시는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심판에 앞서 그들에게 돌아올 기회를 주시는 데 있습니다(5:6-11). 솔로몬은 그가 간구한 대로(8:30)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용서하시고 심판을 거두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다면 예고한 환난을 피할 도리가 없습니다. 아히야와 여로보암의 비밀 회담과 그 내용은 솔로몬에게도,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알려진 것으로 보입니다(12:2-3, 20). 솔로몬은 자신의 신하가 왕이 될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11) 여로보암을 죽여 장래에 있을 반란을 막으려 합니다. 여로보암은 솔로몬을 피해 애굽 시작(쇼생크 1, 주전 945-924)에게로 도망합니다.

 

솔로몬의 통치 종결부(41-43)

사람들은 죄악된 길로 가면서 자신에게 있는 능력을 생각하면서 안도(安堵)합니다. 아직도 자신에게 은혜가 남아 있는 것을 자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자신을 망하게 하지 안했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죄악된 길로 가면 서서히 꺾이지만 반드시 꺾인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번성했던 나라와 집안이 서서히 망해갑니다. 그러므로 서서히 망해가는 조짐이 보일 때에, 바로 무릎을 꿇고 회개하셔야 합니다.

41솔로몬의 남은 사적과 무릇 저의 행한 일과 그 지혜는 솔로몬의 행장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42솔로몬이 예루살렘에서 온 이스라엘을 다스린 날 수가 사십년이라 43솔로몬이 그 열조와 함께 자매 그 부친 다윗의 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르호보암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41-43)

솔로몬은 다윗 왕조의 두 번째 왕으로서 예루살렘에서 40년 동안 통치했습니다(주전 970-930). 열왕기는 역대기와 마찬가지로 각 왕의 통치 기록 마지막에 유사한 형식과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남은 사적, 그가 행한 모든 것, 그리고 지혜는 솔로몬의 실록에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서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것)”은 각 왕의 통치 종결부에 공통으로 나오는 어구입니다(14:29; 15:7). “사적으로 번역된 단어(데바림)는 왕이 수행한 행적’, ‘업적을 가리키며, ‘말씀의 의미도 있습니다. 솔로몬의 경우 공통 어구 다음에 그의 지혜가 특별히 언급되었습니다. 이는 긍정적으로는 그의 지혜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며, 그 지혜로 인해 부귀영화를 누렸음을 상기시킵니다. 부정적으로는 그가 전무후무한 지혜를 가졌음에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데서 멀어져, 하나님의 진노를 샀고 결국 나라의 분열을 가져왔음을 기억하게 합니다. 따라서 솔로몬에 대한 이 평가는 포로기의 청중이나 현대 독자에게 여호와를 신뢰하고 경외하는 것이 진정한 지혜임을 교훈합니다. 솔로몬은 다윗의 성읍에 장사되었고, 그 뒤를 이어 르호보암이 왕좌에 오릅니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다는 솔로몬의 지혜도 하나님의 뜻을 꺾을 수 없습니다. 결국 지혜의 왕이신 하나님의 계획만이 성취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을 잊고 세상에 마음을 빼앗겨 세상을 섬길 때 하나님께서 징계의 도구인 영적 여로보암을 일으키십니다. 하나님꼐서 그들을 일으키시기 전에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징계에 대한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해 우리 삶에 두신 영적 여로보암을 보호하고 살려 두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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