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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12-02)


이스라엘 왕이 된 여로보암

열왕기상 12장 12-24절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면, 작게는 가정에서부터 크게는 국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조직과 공동체가 존재합니다. 이 공동체 안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것은 지도자와 그 통치를 받은 사람들과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직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지도자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목들과 자질들을 조사하고, 어떤 지도자가 바람직한 지도자인지를 제시해 줍니다. 오늘날 대부분 지도자의 자리에 서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리더십 관련 프로그램의 등록하거나 서적을 읽으면서 좋은 리더가 되고자 노력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위대한 지도자로 기억되길 원하십니다.

예고된 대로 솔로몬의 배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스라엘은 분열됩니다. 르호보암은 여로보암과 북쪽 지파의 의중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원로들의 충정 어린 조언을 버리고 또래 신하들의 조언을 수용했습니다. 그 결과 유다와 베냐민 지파만 르호보암을 왕으로 삼았고, 북쪽의 열 지파는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았습니다. 이에 르호보암과 그를 따르는 자들은 북이스라엘을 무력으로 통합하려 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포기합니다.

 

힘으로 통치하려는 르호보암(12-16)

지도자의 덕목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경청입니다. 지도자는 모든 분야에 정통한 사람이 아니라, 각 분야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 최상의 선택을 내리는 사람입니다. 지도자의 능력은 다양한 의견을 듣고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지를 판단할 때 드러납니다. 르호보암은 장로 그룹과 청년 그룹의 의견을 들었으니 결단을 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결정 기준은 무엇입니까?

12삼 일 만에 여로보암과 모든 백성이 르호보암에게 나아왔으니 이는 왕이 명령하여 이르기를 삼 일 만에 내게로 다시 오라 하였음이라 13왕이 포학한 말로 백성에게 대답할새 노인의 자문을 버리고 14어린 사람들의 자문을 따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는 너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아버지는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였으나 나는 전갈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리라 하니라 15왕이 이같이 백성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 일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여호와께서 전에 실로 사람 아히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심이더라 16온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말을 왕이 듣지 아니함을 보고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라 다윗이여 이제 너는 네 집이나 돌아보라 하고 이스라엘이 그 장막으로 돌아가니라(12-16)

여로보암과 북쪽 지파 모든 백성은 3일 후에 다시 르호보암을 만났습니다. 그들이 르호보암의 명령을 따라 그날에 나온 것은 그를 왕으로 세울 마음이 아직 남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어리석게도 원로들의 지혜롭고 융화적인 자문을 버리고, 젊은 신하들의 자문을 따랐습니다. 그는 솔로몬이 무겁게 한 멍에를 덜어달라는 백성의 요구를 무시하고, 솔로몬의 정책보다 더 거센 정책으로 그들을 다스릴 것이라고 호되게 대답했습니다. 어느 백성이 더 버거운 세금과 부역, 거기다 전갈로 징치할 왕을 원하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왕의 지지 세력은 유다(와 베냐민)밖에 없지 않습니까? 르호보암의 어리석은 선택으로 열 지파의 마음은 그에게서 완전히 돌아섰습니다. 열왕기 저자는 르호보암이 백성의 요구를 듣지 않은 것은 여호와의 주권적인 계획이었다고 설명합니다(15).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아히야를 통해 여호보암에게 전달한 말씀을 성취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람들의 마음과 행동을 적절히 사용하십니다. 예를 들면, 모세 당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애굽 백성에게 열 재앙을 내리고 이스라엘을 구출하신 사건(출 7:13), 압살롬으로 하여금 아히도벨의 전략을 버리고 첩자 후새의 전략을 따르게 하심으로써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고 다윗을 복위시킨 사건(삼하 17:14) 등에서도 나타났습니다. 한편 르호보암의 답변을 들은 북쪽 지파들은 ‘우리가 다윗에게서 가진 몫(“관계”)이 무엇이냐? 이새의 아들의 유산이 없도다’(16)라며, 불만과 거절을 내비칩니다. 여기 16절에서 “관계”로 번역된 단어(헬레크)는 할당받은 ‘땅’, ‘몫’을 뜻하며, 뒤 문장의 “유산”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들의 말은 이전에 베냐민 사람 세바가 북쪽 지파와 동조하여 다윗에게 반기를 들며 내뱉었던 말에서 한 단어만 빠졌을 뿐 똑같습니다(삼하 20:1). 이로써 압살롬의 반란 후 일어난 북쪽 지파와 유다 간의 분열이 르호보암 대에 다시 전면에 떠오릅니다(삼하 20:2). 세바의 발언과 같이 몫과 유산을 언급하는 북쪽 지파 백성의 발언은 그들이 다윗 자손에게서 어떤 은혜나 특혜를 얻은 적이 없고, 앞으로도 유익이 없을 터이므로, 더 이상 자기들이 다윗 자손에게 충성해야 할 명분이 없다는 뜻입니다(삼하 19:42-43). 북쪽 지파는 그들의 요구를 짓밟고 무력으로 자신들의 왕이 되기를 고집한 르호보암에게 분개하여, 각자 해산을 명합니다. 그들은 르호보암을 “다윗”이라 부르며, 그를 왕으로 삼는 유다 지파(“네 집”)나 돌보라고 조롱합니다. 이 말은 그들이 더 이상 르호보암과 협상할 의사가 없으며, 더 이상 다윗 왕조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자기들의 이익에 걸림돌이 된다면 자신의 형제라도 버릴 것이며,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은 언약이라도 개의치 않을 것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었습니다. 지파 간의 경쟁과 갈등은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을 시기하고 미워한 때부터 시작하여(창 37장), 이스라엘 역사 내내 서로 오해하고 다투고(민 32장), 칼날을 겨누다가(삿 20-21장), 이제는 분열의 상황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분열된 이스라엘(17-20)

민심을 다시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은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백성은 공평과 정의, 사랑과 자비, 즉 섬김의 정치를 바랍니다. 지도자가 최소한 조심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과격한 말투, 난폭한 언어, 강압적이고 위협적인 자세는 함께하는 사람들의 분노와 불만을 일으키게 되고 결국 공동체를 파멸로 이끌게 돤다는 사실입니다.

17그러나 유다 성읍들에 사는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르호보암이 그들의 왕이 되었더라 18르호보암 왕이 역꾼의 감독 아도람을 보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쳐죽인지라 르호보암 왕이 급히 수레에 올라 예루살렘으로 도망하였더라 19이에 이스라엘이 다윗의 집을 배반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더라 20온 이스라엘이 여로보암이 돌아왔다 함을 듣고 사람을 보내 그를 공회로 청하여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으니 유다 지파 외에는 다윗의 집을 따르는 자가 없으니라(17-20)

이스라엘은 마침내 남북으로 나뉘었고, 르호보암과 여로보암이 각각 왕이 되었습니다. 애초에는 “온 이스라엘”이 르호보암을 왕으로 삼고자 했으나(1), 지금은 “유다 성읍들에 사는 이스라엘 자손”인 유다와 베냐민 족속 및 그곳에 남은 다른 지파의 백성(23)만이 그를 왕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르호보암은 북쪽 지파와 어그러진 일을 수습하기 위해 아도람(하도람, 아도니람)을 대표로 보냈습니다. 아도람은 다윗 때부터(삼하 20:24) 솔로몬 시대(4:6; 5:14)에 이르기까지 강제 노동을 총지휘한 자로 소개된 인물입니다. 삼 대 왕에 걸쳐, 적어도 40년 이상 봉직하고 있는 셈이므로, 노년의 아도람이거나 혹은 그의 아들이나 총감독자 지위를 가진 자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그의 임무는 북쪽 지파를 달래거나 재협상을 시도하거나 해서 다시 그들을 르호보암에게로 돌리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솔로몬 통치 당시 고된 부역에 시달려왔고, 이제는 더 강압적인 정책을 계획한 르호보암에게 치를 떨고 있는 북쪽 지파에게 고역 현장의 총감독자를 보냈습니다! 이것은 르호보암과 그의 젊은 신하들이 작금의 돌아가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어리석은 조치입니다. 르호보암의 이런 행보는 북쪽 지파의 예민해진 심기를 크게 거슬렸습니다. 그들은 아도람을 돌로 쳐 죽임으로써 자신들의 분노와 적개심을 르호보암에게 전했습니다. 르호보암은 예상치 못한 반응이 일어나자 그때서야 상황을 파악했습니다. 그는 놀라 다급히 수레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도망했습니다. 그가 그제야 예루살렘으로 떠났다는 점은 그가 세겜에서 머물며 이 일을 타개하고 북쪽 지파의 신임을 얻을 수 있다고 오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가 다급히 도망한 것을 보면 북쪽 지파 백성이 아도람만 아니라 르호보암의 목숨도 가만 놔주지 않을 요량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 저자는 북쪽 열 지파의 봉기를 다윗 집에 대한 배반으로 설명합니다(19). 다윗 왕조에 대한 북이스라엘의 어그러진 시선은 분열왕국 이래 쭉 지속되었습니다. 이제 르호보암을 왕으로 삼으려 했던 “온 이스라엘”(1)은 그 대신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습니다(20). 여기서 “온 이스라엘”이란 유다와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나머지 열 지파를 가리킵니다. 여로보암이 애굽에서 돌아왔음을 들었을 때 그들은 그를 공회로 초대했습니다. 이는 공식적인 절차를 밟아 그를 왕으로 추대하는 과정입니다. 마침내 그들은 여로보암을 북이스라엘의 공식적인 왕으로 삼았습니다. 여로보암이 왕이 되고 유다 지파만 다윗의 아들 르호보암을 따르게 된 것은 다 하나님께서 예고하신 대로입니다(11:12-13,31-39). 르호보암의 무자비함과 어리석음으로 왕국의 분열이 실현되었으나, 분열의 직접적인 원인은 솔로몬의 우상숭배였습니다(11:4-13).

 

스마야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21-24)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신앙의 출발점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그분이 만들려고 하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알아야 끝까지 신앙의 여정을 완주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나를 넘어서서 하나님과 세상을 향한 주님의 관심을 일어내야 합니다.

21르호보암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유다 온 족속과 베냐민 지파를 모으니 택한 용사가 십팔만 명이라 이스라엘 족속과 싸워 나라를 회복하여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에게 돌리려 하더니 22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사람 스마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23솔로몬의 아들 유다 왕 르호보암과 유다와 베냐민 온 족속과 또 그 남은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24여호와의 말씀이 너희는 올라가지 말라 너희 형제 이스라엘 자손과 싸우지 말고 각기 집으로 돌아가라 이 일이 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하셨다 하라 하신지라 그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돌아갔더라(21-24)

르호보암은 깨어진 나라를 회복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려고 하나, 하나님의 개입으로 무산됩ㄴ다. 아도람의 죽음으로 르호보함은 신변의 위협을 느껴 예루살렘으로 속히 도망했습니다. 그 후 그가 계획한 것은 ‘이스라엘 족속’과 전쟁을 벌여 강제로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강압적이고 무자비한 방법을 생각해낸 르호보암에게는 이처럼 교만과 악과 어리석음만 남았습니다. 그는 유다와 베냐민 지파에서 18만 명을 소집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이 즉각 개입하셔서 전쟁을막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스마야 선지자(“하나님의 사람”,22)를 보내, 르호보암과 유다와 베냐민 및 그곳에 남은 다른 지파 백성에게 그의 뜻을 전달하십니다. 스마야(대하 12:2-8)는 아히야(11:29; 14:4)와 당대의 선지자로서 왕과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으며, 이들의 예언은 글로도 전해 내려왔습니다(대하 9:29;12:15).

24절의 “여호와의 말씀이”란 어구는 원래 ‘여호와가 이렇게 말씀하신다’라는 문장으로, 선지자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할 때 첫 문장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르호보암과 그 무리에게 싸우러 올라가지 말고 집으로 돌아갈 것을 명하십니다. 그들이 전쟁을 벌이려는 대상이 다름 아닌 그들의 “형제”인 “이스라엘 자손”임을 상기시키십니다(24).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소집은 강제적이었겠지만, 이들 또한 르호보암처럼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형제들을 죽이는 일도 마다하지 않을 요량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분열이 자신의 뜻임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르호보암과 백성은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 돌아갔습니다. 선지자를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여 따른 것은 그동안 르호보암과 백성이 보여준 가장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오늘도 삶 속에서 우리는 크고 작은 일을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선택의 길에서 많은 고민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선택 장애까지 발생합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다수가 모인 공동체의 진로를 결정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선택의 시점에서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결정하지 말고, 섬김과 화합의 관점에서 결정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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