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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05-02)


영생을 가진 자의 확신과 승리

요한일서 5장 13-21


교회 밖에서 누군가 목사님하고 크게 부르면 뜨끔합니다오늘날 목사 혹은 기독교인인 것이 부끄럽게 느껴질 만큼 낯 뜨거운 뉴스들이 넘쳐납니다회사에서 교회 다시는 걸 숨긴다는 성도들의 말을 들을 때마다 민망하고 아픕니다우리가 잊고 사는 하나님 자녀의 영광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형제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고우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사람입니다편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사도 요한은 기도하는 것과 우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을 강조합니다우리는 하나님께 속해 있지만 세상은 악한 자의 지배 아래에 있습니다.

 

기도하는 삶(13-17)

영생을 가진 자의 특권은 살아계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영생이 있기에 성도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벗고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거기서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면 응답 받을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13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14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15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16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17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13-17)

하나님의 자녀가 가진 가장 큰 특권은 영생입니다영생은 끝까지 죽지 않고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예수님께서 곧 참 하나님과 영생입니다주님을 알고 그분과 영원한 사귐을 누리는 놀라운 선물입니다.

⑴ 영생을 가진 자의 기도하는 삶(13-15)

앞선 단락에서 밝힌 대로하나님의 아들-믿음-영생은 하나님 자녀들의 신앙생활의 핵심 요소로서 함께 연결되어 있습니다. 3:23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으로 나타는 데 반해여기서는 하나님 아들의 이름을 믿는 것으로 나타납니다(13).

요한문헌에 나타는 데 반해여기서는 예수님의 정체성이 그의 그리스도 되심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관련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여줍니다(요한복음 20:31). 이러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는 영생을 소유하고 있습니다소유하다란 영생을 지속적으로 소유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영생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가집니다(14). 요한일서에 나오는 담대함 중(2:28;3:21;4:17;5:14), 특히 이 구절과 3:21은 담대함을 기도와 연결하고 있습니다하나님의 아들을 믿고그 안에서 영생을 가지고 있으면하나님께 기도할 때 담대함을 가지게 됩니다담대함의 내용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에 그가 응답하신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그리스도와 신자가 상호거주할 때기도하는 바를 응답받는다고 하였습니다(요한복음 15:7). 또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응답받는다고 하였습니다(요한복음 14:13-14; 15:16; 16:21-24,26). 이 구절에서 그의 뜻대로 하는 기도는 요한복음이 말하는 응답받는 기도의 형태와 다르지 않습니다그리스도와 상호거주 안에 있을 때그의 뜻을 분별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자는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는 자이며그의 뜻을 구하는 자입니다이것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에도 나타납니다(마태복음 6:9-10).

하나님 나라를 구하며그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이렇게 기도할 때우리가 기도하는 모든 바를 하나님께 들으십니다(15).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구한 바를 받을 수 있습니다.

⑵ 형제를 위한 기도하는 삶(16-17)

하나님의 자녀의 기도 중특히 형제를 위한 기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16).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를 범하는 것을 볼 때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합니다하나님의 자녀도 죄를 범합니다(비교 3:6). 이런 하나님의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고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신다는 말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망에 이른 죄가 무엇일까에 대해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그러나 본문 자체는 그 죄의 종류가 무엇이냐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형제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공동체 안에 있는 형제자매들의 죄를 볼 때그들이 믿음 위에 굳건히 서도록 하나님께 구하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여기서 하나님을 대적하고교회를 파괴하는 이단 세력들은 제외됩니다다만 보든 불의가 죄이지만하나님의 자녀들이 넘어지는 것은 마땅히 주위의 형제자매들이 기도해야 할 부분입니다(17).

이를 통해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하나님의 공동체는 더 굳건한 사랑의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쉽게 비판하거나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그들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도록 기도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공동체를 온전한 하나님의 가족으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우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삶(18-21)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아들 예수님의 도움으로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그분이 우리에게 지각을 주셔서 참된 것을 분별하게 하십니다우리는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악한 세상으로부터 지켜주십니다아들을 믿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절대 손을 놓지 않으십니다.

18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19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20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21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18-21)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지키십니다지속적인 죄에 빠지지 않도록 지키시고악한 마귀로부터 보호하십니다죄로부터 승리할 능력을 주십니다하나님의 아들이 지켜주시는 특권을 받았으니 우리도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함이 마땅합니다.

⑴ 하나님의 자녀가 기억할 세 가지(18-20)

하나님의 자녀가 범죄했을 때기도해야 한다는 당위를 앞서 설명했습니다(5:16). 그런데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자녀는 범죄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이는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왜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는 요한일서에서 영생을 가지고 오신 분이고(1:2), 죄로부터 깨끗하게 하시는 분입니다(1:7). 또한 하나님 앞에서 자녀들을 위해 중보하시는 분이며(2:1), 화목제물이 되신 분이고(2:2),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확신을 주시는 분입니다(2:20). 그리고 마귀의 일을 멸하신 분이며(3:8), 신자들에게 사랑을 가르치신 분입니다(3:16).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그와 교제하는 자는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기 때문에악한 자가 하나님의 자녀에게 해를 입히지 못합니다이는 곧 하나님 자녀들의 믿음이 든든히 서갈 것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하나님의 자녀들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키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을 말합니다하나님의 자녀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18).

두 번째로 하나님의 자녀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19).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하나님께 소속되든지세상에 소속되든지 해야 합니다세상은 악한 자의 지배를 받습니다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자녀는 그러한 세상에 소속된 것이 아니라하나님께 소속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셋째로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자녀에게 어떤 일을 행하셨으며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선물을 받았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20).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지각을 주셨습니다지각이란 잘 이해하도록 생각하는 과정과 능력을 가리킵니다이 지각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참되신 분을 알게 되었습니다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어떤 능력이나 자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지각을 통해서 옵니다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진리이신 그분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십니다그분은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이제 저자는 예수님의 완전한 타이틀을 사용하여 그를 묘사한다요한일서에서 계속 따로 언급되었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이 여기서 연합되어 완벽하게 등장합니다그리고 이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요영생으로 묘사됩니다여기에서 예수님의 신성이 충분히 설명되고또 그 안에 생명이 있어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님의 지키심으로 범죄하지 않는 삶을 삽니다그들은 하나님께 소속된 자들이며그들의 믿음과 영생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⑵ 우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삶(21)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한다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역설이 있습니다하나님께서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를 지키시지만(5:18), 하나님의 자녀는 또한 스스로 자기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21). 본문에 우상들이라 표현된 이들은 누구입니까다양한 주장들이 있습니다이는 요한의 공동체 당시 유행했던 로마 제국의 우상들일 수도 있습니다요한일서의 저작 장소인 에베소 지역의 아데미 여신을 비롯한 많은 우상들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이는 또한 기독교로 회심하기 이전에 성도들이 섬겼던 다른 종교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일반적으로 말하면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는 모든 것들이 다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그러나 요한일서의 저작 동기나 배경에 비춰 볼 때잘못된 복음이 만들어낸 잘못된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한 모습이 우상일 수 있습니다우상들은 사도들이 전수해준 참 복음에 기초한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모습과 다릅니다다시 말하면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신앙이 아니라요한의 적대자들이 만들어낸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왜곡된 모습이 우상이다그 우상을 믿고 섬기는 것을 하나님의 자녀들은 조심해야 합니다.

이러한 우상을 전하는 자들이 곧 거짓 선지자들이요그리스도들입니다그러한 악인들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들은 스스로를 지켜야 합니다.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된 교회 때문에 위축된 성도들이 많습니다. 수치를 아는 사람이 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도로사의 자긍심과 기쁨까지 버려서는 안 될 일입니다. 특권 의식을 버리더라도, 받은 바 특권을 잊어버리지는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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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05-01)


하나님의 아들 안에 있는 생명

요한일서 5장 1-12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그래서 하나님 자신을 알 수 있게 해주셨고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하나님과 우리가 소통할 수 없다면하나님과 우리의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형성될 수 없습니다하나님께서 우리를 인격적인 존재로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과 소통하기 위해서입니다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의와 거룩과 선하심을 요구할 수 있고또 사랑과 은총의 삶을 촉구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그분이 우리에게 그런 삶을 보여주셨고 알려주셨기 때문에 당연히 요구하실 수 있습니다이런 계시가 있었기 때문에 소통과 교제가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와 사람들 그리고 피조 세계에 나타나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에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예수님의 지상 사역과 하나님의 증언그리고 성도 안에 있는 영생은 성도의 믿음을 굳건하게 세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삶(1-5)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준수할 수 있도록 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데서 시작하여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대로 나아가며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어지는 것입니다그러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준수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1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2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3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4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5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1-5)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입니다사랑의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났으니 사랑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고 드러냅니다하나님께 사랑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니사랑하라는 계명이 무거운 짐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1-3)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라고 소개합니다(1). 믿음과 영적 출생과의 관계를 언급하는 본문입니다믿음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2:22).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니(4:15,5:5)는 고백과 함께 쌍을 이루는 기독론적 고백입니다.

물론 요한일서의 배경에서 주요 기독론적 고백은 그의 성육신에 관한 것이지만(4:2),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요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고백도 요한일서의 독특한 배경을 전제로 합니다즉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부인하는 각각의 대적자들을 향하여저자는 위의 기독론적 고백을 통해 그의 신성과 인성을 분명히 밝힙니다.

이러한 고백을 가진 자들이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라고 천명하는 것입니다(1). 이 고백은 곧 믿음입니다이 믿음을 통해 한 사람이 하나님 가족의 일원이 되는데이것은 요한일서 교회론의 중요한 개념입니다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를 출생시키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렇게 태어난 다른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합니다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2절에서는 이와 반대되는 말을 합니다하나님을 사랑하고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2). 이는 결국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다른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다는 뜻입니다우리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될 때또한 그의 계명을 지키기 원합니다이는 결국 하나님의 자녀들인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에서 잘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3). 이는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이고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며 자녀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합니다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그의 계명을 지킵니다심지어 여기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마저 하나님께서 주십니다그렇기 때문에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다시 말하면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해주셨기 때문이요그 사랑에 반응할 수 있는 힘마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기 때문에 이는 무겁지 않은 계명입니다.

⑵ 세상을 이기는 믿음의 삶(4-5)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을 이깁니다(4).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들악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들은 지속적인 승리를 합니다여기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을 이기는 이유는 믿음 때문입니다이 믿음은 단순히 믿는 행위를 의미하기보다는믿는 행위와 함께 믿음의 내용을 주목하게 합니다믿음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시며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세상을 이깁니다(5). 예수님의 신성은 앞서 이미 언급되었습니다(4:15).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의 신성을 믿는 자만이 세상을 이깁니다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는 지속적인 승리를 뜻하는 물음입니다이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지속적으로 믿는 자가 세상을 이긴다고 합니다결국 하나님 자녀의 신앙 여정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지속적인 믿음으로 친밀한 교제를 하는 것이고이 관계 위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에게 지속적으로 승리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들(6-12)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으로 드러납니다아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하나님께서는 아들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셨고아들을 통해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하나님께서는 주신 생명은 오직 아들을 통해서만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6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7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8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 9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의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것이니라 10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11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12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6-12)

예수님을 믿으면 왜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무조건 믿는 것도 덮어놓고 믿는 것도 아닙니다믿는 자는 그 안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가 있습니다.

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세 증언들(6-8)

물과 피로 임하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6). 이는 앞의 구절이 믿음을 강조했는데그 믿음의 내용에 해당하기도 합니다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물과 피는 앞서 밝힌 대로 세례부터 죽으심까지 예수님의 공생애를 지칭하는 말입니다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실제 역사 속에서 그러한 삶은 하나님 사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물로만 아니라 물과 피로 임하셨고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좀 더 강조하는 표현입니다예수님의 십자가는 분명히 그가 육신으로 오셔서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 화목제물로 죽으셨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또한 이 사실을 성령께서 증언하십니다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기에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증언하시는 분입니다그러므로 물과 피와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합니다한편 물과 피로 임하신 예수는 부정과거 동사로 묘사되었고성령의 증언은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이는 예수께서 지상 사역을 통해 역사적 인물로 실제 과거에 나타났음을 의미하며동시에 성령께서 그 사실을 지금도 계속해서 증언하고 계심을 뜻합니다또한 물과 피와 성령이 함께 현재에도 증언합니다(7). 물과 피는 과거 사실을 나타내지만그 사실이 현재에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합니다이 셋이 하나라는 말은 이 셋의 증언이 일치(agreement)한다는 말입니다(8). 세 증언은 아마도 율법이 요구하는 증인의 숫자를 충족하는 상징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신명기 17:6; 19:15). 그러므로 물과 피와 성령이 동일하게 예수님의 지상 사역의 역사적 진실성을 증언하고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바로 이 사실에 기초합니다.

⑵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증언(9-10)

또한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아들을 증언하십니다(9). 두세 명이 하는 사람들의 증언도 받아들인다면물과 피와 성령의 증언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증언은 못 받을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증언을 요한복음 5:31-40을 바탕으로 이러한 물과 피와 성령의 증언을 제외한 다른 어떤 증언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왜냐하면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증언은 세례 요한이나 성경의 증언예수님의 사역의 증언 등과 구분되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증언은 쇼ᅟᅥᆼ령을 통한 증인과 좀처럼 분리할 수 없습니다문맥에서 볼 때이는 앞서 나오는 물과 피와 성령의 증인이 곧 하나님의 증언이며이 증언의 신빙성과 사실성을 더욱 강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증언이 자기 안에 있습니다(10).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지속적으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 역사적 사실임을 증언하십니다이를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즉 세상에 속한 자로 만들어 하나님을 대적하게 됩니다.

⑶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생명의 증언(11-12)

하나님께서 그 증언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결과는 그가 하나님의 자녀에게 영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11). 하나님의 증언을 통해물과 피와 성령의 중언을 통해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영생을 주셨다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습니다왜냐하면 영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하나님의 증언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영생을 가졌고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영생이 없습니다(12).

가지다(소유하다)는 요한 신학의 독특한 표현인데, 2:23에서는 아들을 인정하는 자가 아버지를 소유합니다요한이서 9절에서는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는 자는 아버지와 아들을 소유합니다요한복음 5:24에서는 예수님의 말씀과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자는 영생을 소유합니다마찬가지로 이 구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자가 영생을 소유한다고 합니다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살게 되고그리스도가 그 사람 안에 살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하나님의 증언-예수 그리스도-믿음-영생은 함께 하나님 자녀의 신앙 핵심을 형성합니다.


거대한 세상 앞에 무기력해질 때가 많습니다교회 안에서 충만한 듯 보였던 믿음이 세상에서는 매우 초라하게 느껴지곤 합니다그러나 아무리 악한 세상에서라도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삽니다믿음이 세상을 이깁니다흔들림 없이 믿음의 주인 예수 그리스도 바라보며 나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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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04-02)


사랑이 이루는 담대함

요한일서 4 11-21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다.’는 말에, 언제까지나 공기는 눈에 안 보이지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안 보이시지만 존재한다.’는 식상한 답변만 되풀이 될 것입니까! 성도는 눈에 안 보이는 세계를 볼 뿐 아니라, 그 세계를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부름 받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어떻게 하나님과 상호내주하며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또한 우리가 하나님과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삶(11-15)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으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봅니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 원수끼리 화해하고 서로 사랑하는 모습이 교회 안에 이루어질 때 세상은 그 안에 계신 사랑의 하나님을 목도합니다. 하나님을 보여달라는 요청에 교회는 언제쯤 우리를 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11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13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14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15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11-15)

예수님을 세상의 주주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자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이며,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거하십니다.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는 이단들의 주장은 세상의 핍박과 오해를 피할 수 있는 묘책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인간 예수처럼 죽음의 순종으로 아버지와 사람을 사랑한 사람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쳐서 윤리적 가현주의를 조장하는 하책입니다.

 사랑을 통해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삶(11-13)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은 요한복음 3:16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 문맥에서는 아들을 속죄제물로 삼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일컫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이 이같이 나타났은즉, 우리가 마땅히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하지 않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11).

물론 여기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암시되어 있지만, 본문의 초점은 하나님의 사랑을 기반으로 하여 형제를 사랑하는 데로 나아갑니다. 여기서 마땅하도다(11)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이지만, 동시에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의무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제 다음 구절에서 저자는 하나님의 사랑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각각 나타나지만, 또한 그 사람들을 통해 그들이 서로 사랑하게 하는 것이라 합니다(12). 이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형제 사랑을 통해 온전히 성취된다는 말입니다(2:5). 또한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형제 사랑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12).

요한복음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고,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나옵니다(요한복음 1:14,18). 이러한 사상은 요한일서에서도 계속 이어집니다(1:1; 2:1-2; 3:8, 16:42, 9-10,14). 그러나 또 다른 한 모습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현현이 그리스도의 공동체 가운데 나타나는 것입니다. 형제를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고 합니다(4:12; 요한복음 17:21-23).

그러므로 형제 사랑은 하나님 임재의 표시이며, 하나님의 사랑의 완성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시며, 우리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완성하십니다.

 예수를 통해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삶(14-15)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셨습니다(14).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여, 생명을 얻게 하려고 구주를 보내셨습니다. 요한일서에서 구원은 무지로부터의 해방이라보기보다, 예수님의 화목제물 되심으로 말미암아,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17, 2:2; 4:2,10; 5:6). 구주 되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면, 하나님과 그 사람과의 상호거주가 일어납니다(15).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은 진정 그 사람과 함께하십니다. 2:22에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강조했다면, 이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심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이 본문은 요한일서의 대표적인 대적자인 가현설주의자들(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는 자들)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 반대로 예수님의 인성을 지나치게 신봉하여, 그의 신성을 의심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저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그의 신성을 온전히 믿을 때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는 요한일서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하나님과 신자의 상호거주(reciprocal indwelling) 개념입니다.

요한일서는 상호거주 개념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과 함께하시는 아버지가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의 친밀한 언약적 관계를 떠올리게 합니다(에스겔 11:20, 37:23,27; 예레미야 31:33, 스가랴 8:8; 고린도후서 6:16; 히브리서 8:10).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영원한 사귐 가운데 있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는 이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3:24; 4:13,16), 요한일서는 상호거주 개념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과 함께하시는 아버지가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의 친밀한 언약적 관계를 떠올리게 합니다(에스겔 11:20, 37:23,27; 예레미야 31:33; 스가랴 8:8; 고린도후서 6:16; 히브리서 8:10).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영원한 사귐 가운데 있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는 이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형제를 사랑하는 삶(16-21)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은 다른 두 계명이 아니라 한 계명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눈에 안 보이는 존재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증명합니다.

16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17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9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16-21)

우리가 사랑해야할 이유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먼저 자격 없는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있습니다. 그 사랑을 받았기에 마땅히 우리도 사랑해야 하고, 그 사랑의 하나님이 내주해주시니 우리도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 담대한 삶(16-18)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는 신자의 삶은 또 다른 말로 사랑 안에 거하는 삶입니다(16). 사랑 안에 거할 때,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됩니다. 사랑 안에 거할 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안에 거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랑은 하나님의 자다들 안에서 완성됩니다(17). 하나님과 신자의 상호거주를 통해 사랑이 그 절정에 이르러, 그 충만한 완성의 상태가 계속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상호거주를 통해, 또한 사랑의 완성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는 심판 날에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습니다.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가지시는 그 친밀한 관계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도 하나님에 대하여 가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하여 담대함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계심과 같이, 하나님의 자녀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기 때문입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기 때문입니다(18).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 속에 있는 사람은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온전한 사랑은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사랑, 그리고 자녀들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다같이 포함합니다. 이 완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는 최후 심판을 의미하는데, 하나님과 사랑 가운데 있는 자는 미래에 최후 심판이 없을 것이고 그러므로 헌재에 어떤 두려움도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 사랑하는 삶(19-21)

우리가 사랑함은(19)이라는 말은 하나님 자녀들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물론이거니와, 형제를 서로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하나님 자녀들의 사랑을 가능케 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사랑의 삶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경험한 그 경험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아들을 회복제물 로 보낸 데에서 철정을 이룹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희생하시면서까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시고 영생을 갖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자녀들은 이 사랑에 반응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위의 형제자매를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한 두 가지 사랑(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은 함께 나타납니다(20).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시를 지닌 사람입니다. 이는 아마도 요한 공동체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암시하는 듯하다. 다시 말하면, 거짓된 가르침에 영향을 받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주위 사람들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자는 옆에 있는 형제자매를 돌보지 않는 자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 고백을 믿지 못하겠다고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를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는 데서 찾겠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또한 주의 계명입니다(21). 주의 계명은 헬라어 원문에는 그로부터의 계명이라 되어 있습니다. 이 문맥에서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가리킵니다. 예수님도 또한 사랑의 계명을 주셨습니다(요한복음 13:34; 15:12,17). 또한 신명기 6:45과 레위기 19:18을 연결하여, 사랑의 큰 계명을 주셨습니다(마가복음 12:30-31).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계명과 그리스도의 계명을 분리하는 것이 무의미할 뿐 아니라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따지자면 여기서는 하나님의 계명을 가리키며, 그 사랑의 계명이 예수님에 의해 또한 반복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이 계명을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21). 그러나 하나님 사랑과 형제자매 사랑은 두 개의 따로 존재하는 계명이 아니고 하나의 단일한 계명입니다. 즉 하나님 사랑 없는 형제 사랑은 있을 수 없고, 형제 사랑 없는 하나님 사랑도 불가능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보고 다니는 곳이지 사람 보고 다니는 곳이 아니다.’라는 말이 서글프게 들릴 때가 있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한복음 14:9).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그분의 몸인 교회는 왜 말하지 못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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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04-01)


진리 안에서의 사랑

요한일서 4장 1-10


통일교 때문에 속아서 한국의 남자와 결혼한 필리핀 여인이 있습니다그 여인은 개신교에서 성장한 여인이었습니다그녀는 개신교 교회를 간절히 나가고 싶어 했습니다그러나 한국어도 한국 상황도 잘 모르기 때문에 함부로 선택하지 못하고 집에만 있었습니다한 목사님께서 전도하려 나서그 여인을 만났습니다그리고 교회를 권했습니다그 여인이 당신이 믿는 종교가 무엇이냐?’고 물어왔습니다영어를 잘 모른 목사님께서는 지혜롭게 영문 사도신경을 제시해 주었습니다그 여인에게 우리는 이대로 믿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그 여인은 그것을 읽고, ‘내가 믿던 종교와 같습니다라고 하더란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을 바르게 알고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영을 통해 하나님께 속한 자들입니다또한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은 사랑하고 섬기는 자들입니다따라서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바른 믿음은 사람을 향한 바른 사람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영을 통해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1-6)

세상에는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이 있어서 그 분별의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그 시금석 가운데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육체를 입고 사셨다가 죽으시고 부활하여 승천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정하는지 여부입니다성도들을 진리 앞에 겸손하게 세우고 공동체가 성령의 열매를 통해 하나로 연합되는 지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1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2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3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4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5그들은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느니라 6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1-6)

모든 영이 다 선한 것은 아닙니다하나님께 속한 영인지 분별해야 합니다영 분별은 신비의 영역도 아니고, ‘영적 권위자만 하는 것도 압니다예수님의 성육신을 믿는지를 보면 됩니다. ‘영적인 것을 강조하며 몸을 무시하지는 않는지몸으로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따르고 있는지 분별해야 합니다.

⑴ 하나님의 영과 적그리스도의 영(1-3)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1)는 말씀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면영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를 분별하라는 뜻입니다왜냐하면 모든 명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때로는 적그리스도의 영들도 있기 때문입니다(3).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다는 적그리스도의 영에 영향을 받는 거짓 선지자들이 이미 세상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그렇다면 거짓 선지자들의 정체는 무엇입니까(1)? 2-3절을 통해우리는 이 거짓 선지자들이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당시의 가현설주의자들 혹은 세린투스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 하셨다는 것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온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보지 않았습니다다시 말하면인성과 선성을 가지신 완벽한 존재로서의 예수님의 죽음으로 보지 않았습니다요한의 공동체 입장에서 보면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셔서 즉음을 온전히 맛보지 않으셨다면사람을 대신한 속죄제물로서의 역할에 모순이 생깁니다그러므로 저자는 예수님의 성육신과 그의 속죄제물(화목제물되심을 강조합니다이러한 예수님의 성육신을 인정하는 영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이고거짓 선지자들입니다이들은 종말의 때에 오리라는 것이 예언되어 있었고요한일서 상황에서 이들은 벌써 활동하고 있었습니다(마태복음 24:24; 마가복음 13:22; 요한1서 2:18). 이것은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종말의 때의 표징이 필요합니다많은 가르침과 설교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바른 교리에 기반한 건전한 교훈을 가르치는가를 분별해야 합니다사람을 위로하거나 축복을 일방적으로 선포하거나기적을 보여주는 것에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그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주신 삼위 하나님과 그분의 교회에 대한 교훈성도들의 삶에 대한 교훈의 터 위에 온전히 서 있도록 해야 합니다이를 왜곡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이 아니라거짓 선지자요적그리스도의 영입니다.

⑵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께 속함(4-6)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문자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4).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들입니다이들은 거짓 선지자들을 물리친 자들이며지금도 그 믿음을 가지고 승리 속에 있는 자들입니다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이들이 믿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하나님이 세상에 있는 적그리스도보다 훨씬 강하고 크기 때문입니다이 거짓 선지자들은 세상으로부터 온 자들입니다(5). 그리고 그들은 세상의 관점에서 이야기합니다그러므로 세상이 그들의 말에 집중합니다이에 반해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들입니다(6). 우리는 사도들을 가리킬 수도 있고혹은 요한일서 전체에서 볼 때 저자와 수신자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하나님을 아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들의 말에 집중합니다왜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8:47; 10:4, 16, 27;18:37).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과 인격적 교제를 나누는 상태를 말합니다그러므로 이 단락에서는 하나님께 속한 자들과 세상에 속한 자들이 나뉩니다이들은 진리의 영을 따르는 자들이고또 다른 쪽은 미혹의 영을 따르는 자들입니다(6). 진리의 영은 성령을 일컫는 말입니다(요한복음 14:17; 15:26; 16:13). 미혹의 영은 진리를 거스르는 거짓의 영적 실체를 뜻합니다.

 

사랑을 통해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7-10)

우리는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니 우리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이웃을 사랑할 때 내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알며하나님께서 사랑이신 것도 알게 됩니다머리로 알던 하나님 사랑을 가슴으로 알게 되며입술로 사랑하던 사람들이 신천으로 상할 수 있게 합니다참 신앙은 사랑의 가시성을 특징으로 합니다가시성이 사라지면 가식만 남습니다.

7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7-10)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그러나 사랑이 하나님은 아닙니다하나님께 속한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입니다상대를 구속하고 억압하는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 형제간에 사랑에 대해 설명합니다.

⑴ 하나님의 사랑에 바탕을 둔 형제 사랑(7-8)

자랑하는 자들아는 요한1서에서 저자가 성도들을 향해 자주 부르는 호칭입니다(2:7; 3:2,21; 4:1,7,11). 이 구절에만 특화된 호칭은 아닙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이제 본격적으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려 할 때저자는 자신이 수신자들을 사랑하고 있음을 먼저 밝힙니다왜냐하면 본인은 사랑하지 않으면서 수신자들에게 사랑을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먼저 저자는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합니다(7).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입니다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아는 자입니다만약 그 사람이 사랑하지 않는다면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8).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랑이 시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요한일서에서 두 번 등장합니다(4:8,16). 하나님의 속성을 사랑이라 합니다요한문헌에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속성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그리스도인의 예배 생활은 하나님은 영이시다라는 말씀에 기초합니다(요한복음 4:24). 또한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은 하나님은 빛이시다라는 말씀에 기초합니다(요한1서 1:5).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형제 사랑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씀에 기초합니다하나님의 속성이 사랑이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아는 자는 형제를 사랑합니다.

⑵ 아들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9-10)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은 그가 그의 아들 독생자를 화목재물로 보내셨다는 데 있습니다(9-10).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 예수님을 묘사하는 두 단어가 사용됩니다하나는 독생자이고(9), 다른 하나는 화목제물입니다(10).

독생자는 요한복음에 세 번 등장하지만요한1서에는 한 번 나옵니다하나님께서는 그의 특별하고 존귀한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자명합니다우리 죄를 용서하여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참고 요한복음 3:16).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를 희생시키셨습니다독생자의 희생은 화목제물로 표현됩니다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를 화목제물 삼으셨습니다.

화목제물은 앞서 밝힌 바와 같이(2:2), 하나님의 형벌을 대신 받는 것이고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하기 위함입니다이것은 모든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던 대속죄일의 완성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이것이 사랑입니다자기 아들을 주셔서우리를 위한 속죄제물 만드신 것이것이 사랑입니다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우리의 형제 사랑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 사랑에 바탕을 둡니다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바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처럼 자신도 사랑하는 존재로 자리매김합니다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형제를 이해하고용서하며사랑해야 합니다.


세상은 왜곡된 사랑이 넘쳐납니다. 감정만 자극하는 사랑, 사랑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폭력과 자기 비하, 그릇된 애국심, 심지어 타인에 대한 혐오까지, 다 사랑을 말하지만 거기 진짜 사랑은 없습니다. 모든 영을 다 믿지 말고 모든 말을 다 듣지 말고 하나님께 속했나 분멸하여 봐야 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랑인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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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03-02)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사랑

요한일서 3장 13-24


성도는 언제나 세상으로부터 마움을 받습니다아무런 미움도 받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히 여길 일입니다문제는 미움 받는 이유입니다우리의 위선과 욕심 때문에 받는 미움입니까사랑하다가 받는 미움입니까?

 

앞 단락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정체성과 윤리에 대해 언급한 후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형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기술하고 있습니다이를 위해 친히 독자들을 형제라 부르며형제를 사랑하는 것과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설명합니다뿐만 아니라무엇이 진정한 형제 사랑인지 말하고 있는데형제 사랑은 실제적으로 형제를 도와주는 것입니다이것이 곧 게명을 지는 삶입니다.

 

하나님 자녀의 형제 사랑의 삶(13-20)

형제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드러냅니다열정적인 예배나 교회 봉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갔음을 증명해주지 않습니다형제를 미워하는 자 안에 영생은 없습니다사랑은 곧 생명의 증거입니다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드려내셨습니다성도가 사랑해야 할 이유로 이보다 더 분명한 근거가 또 있겠습니까!

13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14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15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6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7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18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19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20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13-20)

우리가 주 안에 거하면서 서로 사랑하나는 계명에 순종하여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살면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담대해집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성령님은 우리 안에 예수께서 거하심을 알게 해주십니다.

⑴ 영생과 형제 사랑의 삶(13-15)

수신자들을 향해 형제들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13). 요한일서에서 유일한 표현이지만앞서 나오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표현과 함께 요한의 공동체가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13).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생각나게 합니다(요한복음 15:18-21; 마태복음 5:11-12; 베드로전서 4:13).

미움은 세상의 영역입니다미움은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향해 가지는 것이지공동체 안에서 형제자매를 향해 가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또한 여기서 저자는 하나님의 자녀의 특징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이라 합니다다시 말하면세상의 특징은 미워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의 특징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따라서 세상으로부터 오는 미움에 그리스도인은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또한 하나님의 자녀는 영생을 소유한 자들인데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14).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서로 형제를 사랑할 때 증명됩니다이는 이 단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자녀의 두 번째 특징입니다.

앞서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당한다고 했는데(13), 이 구절에서 이제 하나님의 자녀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증명됩니다세상의 영역에는 미움이 있고하나님의 가족으로서 그리스도 공동체의 영역에는 사랑이 있습니다만약 형제를 미워한다면 이는 살인이나(15), 이것은 그 속에 영생이 없음을 증명합니다미움은 세상이 신자들에게 가지는 것이지형제가 형제를 향하여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13).

미움과 살인의 관계는 12절에 예가 나옵니다가인이 아벨을 미워하여 살인하기에 이릅니다가인이 세상에 속하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미움과 살인에 대한 이 구절의 교훈은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합니다(마태복음 5:21-22; 27-28).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그리스도인일 수 없다는 말입니다.

⑵ 행함으로 나타나는 형제 사랑의 삶(16-20)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목숨을 버림으로 우리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16).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고사랑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죄 용서를 받고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보여주는데그의 사랑은 십자가 희생을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났다는 말입니다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구체적으로 자신을 희생함으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이를 통해 우리는 그의 사랑을 깨닫고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이는 또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형제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그 모범을 보여줍니다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을 따라우리는 형제를 구체적 삶으로 사랑하며 섬겨야 합니다저자는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랑까지 이야기합니다세상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미움은 다른 사람을 죽이는 살인까지 의미합니다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은 형제를 위해 자신을 죽이는 희생까지 의미합니다진정한 사랑은 나를 위해 형제를 합니다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은 형제를 위해 자신을 죽이는 희생까지 의미합니다진정한 사랑은 나를 위해 형제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형제를 위해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17절에서는 더 분명하게 우리의 사랑은 형제의 필요를 채워주는 구체 적인 행동에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곳에는 형제의 필요를 채워주는 사랑이 일어나게 됩니다그러므로 형제에 대한 긍휼의 마음을 닫고그의 필요를 무시하는 것은 곧하나님의 사랑이 자신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그러면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때어떤 결과를 가져옵니까?(19-20첫째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게 됩니다둘째하나님 앞에서 확신을 갖게 됩니다심지어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지라도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확신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 자녀의 계명을 지키는 삶(21-24)

사랑은 우리를 담대하게 만듭니다사랑할 때 우리는 진리에 속한 줄 알고주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확인합니다비록 허물이 있어도 우리 안에 계신 주님 때문에 담대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사랑은 믿음으로 더하고그 믿음은 소망을 불러일으킵니다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언제나 함께 갑니다.

21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22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23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24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21-24)

사랑의 계명을 순종할 때 우리는 삼위 하나님과 즐거운 사귐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그런 자는 하나님께 더욱 정직하게 그리고 담대하게 나아가 기도합니다하나님께서도 그렇게 계명을 지킴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자의 기도를 기쁘게 응답하십니다.

⑴ 기도와 계명을 지키는 삶(21-22)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때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습니다(21). 담대함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갖는 하나님 자녀들의 담대함을 뜻하기도 합니다(2:28; 4:17), 그러나 이 구절에서는 현재의 상태에서 갖는 하나님 자녀의 담대함을 뜻하는데신자의 기도생활 중에 나타납니다(3:21-22; 5:14).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의 담대함과 성도의 기도생활과의 관계는 요한복음에도 등장합니다(요한복음 14:12-14; 15:7). 저자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기도하는 바는 무엇이든지 받게 된다고 합니다이러한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그런데 이러한 기도의 응답은 조건을 가집니다기도자가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될 때기도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22). 그렇다면 여기서 계명은 무엇이고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계명은 요한 서신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인데자주 형제간 서로 사랑에 대한 명령을 가리킵니다(3:23: 4:21; 요한2서 1:5).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먼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입니다(요한복음 8:29),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하셨는데글의 문맥은 그의 아버지의 말씀을 드러내는 계시의 사역과 십자가 죽음을 가리킵니다(요한복음 8:21-30). 요한일서 저자는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신을 부인하고하나님을 드러내며형제를 사랑하는 자기희생적 삶을 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암시합니다이러한 계명 순종과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자녀는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응답을 받습니다(22).

⑵ 형제 사랑과 계명을 지키는 삶(23-24)

앞 구절(22)에 언급된 계명을 지키는 것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이 계명은 두 가지인데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이고또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23). 하나님의 아들예수그리스도라는 세 가지 이름이 등장합니다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데이는 그의 신성을 드러냅니다예수는 그 이름에 구원자라는 뜻이 있고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그의 왕권을 상징합니다이러한 하나님의 아들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입니다이 믿음은 과거의 단회적 사건을 뜻하는데 예수님에 대한 제일 처음의 확실한 믿음을 뜻합니다.

두 번째로앞서 계속 살펴본 대로형제와 서로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이 됩니다사랑하는 것은 계속적인 행동을 암시하는 현재형 동사입니다제일 처음에 예수님에 대한 획기적 믿음으로부터 그리스도인의 삶이 시작된다면그 이후에 지속적인 형제 사랑을 통해 믿음의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그러나 이 두 가지 계명즉 믿음과 사랑은 사실 하나입니다왜냐하면 서로 연결되어 있고서로는 다른 하나 없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다시 말하면형제 사랑 없이 예수님의 이름을 믿을 수 없고예수님에 대한 믿음 없이 형제를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이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주는 그의 안에 거합니다(24).

이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갖는 영원하면서도친밀한 상호거주를 나타냅니다이것을 우리는 성령을 통해 알게 됩니다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은 구약에 나타난 종말론적 기대와 소망이었습니다(에스겔 37:27).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러한 종말론적 상호거주가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에 일어난다는 것은 요한문헌의 일관된 진술입니다(요한복음 14:23; 17:21).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갖는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 자녀들의 상호거주는 이제 형제 사랑으로 나아갑니다형제 사랑을 통해 하나님과 성도의 상호거주가 증명됩니다.

요약하자면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고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곧 하나님 안에 사는 길입니다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드러냅니다.


허버트 멕케이트는 복음이 가진 역설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사랑하지 않는다면 죽을 것이라는 것이고다른 하나는 당신이 정녕 사랑함다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것이다.’ 사랑하지 않고 죽는 것보다 사랑하다 죽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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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03-01)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

요한일서 3장 1-12


비록 교회가 혼란 속에 있지만적어도 우리가 누구인지는 알아야 합니다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하나님을 알지 못함이기 때문입니다그렇다면 하나님을 아는 우리는 우리의 신분을 명확히 알고 있습니까우리는 어떻게 될 것이며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은 무엇보다 죄 짓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그리스도는 죄를 없이하기 위해 나타나셨기에 그리스도인은 죄와 단절되어야 합니다반면에 마귀의 자녀는 죄를 짓는 자입니다왜냐하면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자녀들 죄짓지 않는 삶(1-6)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될 수 있습니다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처럼 주의 영광을 볼 때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할 것입니다(고린도후서 3:18). 지금 내 모습이 전부가 아닙니다.

1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2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3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4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5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6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1-6)

예수님께서는 죄 없으신 분으로서 우리의 죄를 없이 하려 오셨습니다그뿐 아니라 마귀의 일을 멸하려 오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더는 마귀가 우리를 미혹해도 넘어지지 않을 만큼 진리의 사람빛의 사람으로 새롭게 창조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⑴ 그리스도의 나타남과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1-3)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사랑으로 죄인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인의 하나님 자녀 됨이 강조됩니다(1-2). 하나님의 자녀는 앞서 조사된 대로요한일서에서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명칭입니다이를 통해 저자는 교회가 하나님의 가족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의 자녀 들을 모릅니다(1b). 요한의 대적자들은 교회가 하나님의 자녀요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혼자 잘 믿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형제 사랑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또한 하나님의 자녀는 미래에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그와 닮은 사람이 됩니다(2b). 이는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통한 영적 하나 됨을 의미하는데요한 문헌에서 자주 볼 수 있습니다(요한복음 14:20-23). 요한복음에서 종말의 현재적 상태가 강조된다면요한일서에서는 종말의 미래적 성격이 강조되고 있습니다다시 말하면그리스도인이 갖는 하나님 자녀로서의 정체성은 곧 예수님과의 연합을 통해 그를 닮아가는 것인데이는 현재에도 일어나지만 하늘에서 온전히 완성된다는 뜻입니다한편 3절에서는 이러한 정체성이 이 땅에서도 삶으로 나타남을 말하고 있습니다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도덕적윤리적으로 깨끗한 삶을 삽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아하나님의 가족에 편입됩니다하나님의 자녀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그와 온전한 영적 연합을 이루어 그처럼 변화될 것입니다그 변화는 하늘에서 온전히 이루어지지만이 소망을 가진 자는 땅에서부터 윤리적으로 자신을 깨끗하게 합니다.

⑵ 그리스도 안에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4-6)

본 단락은 그리스도인과 죄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죄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대항하는 것입니다이는 앞서 나온 거짓 선지자들즉 요한의 적대자들의 행태와 유사합니다그들은 죄 없다 하여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들었습니다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여참 그리스도의 모습을 대적하였습니다이렇게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대항하는 것이 죄입니다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나셨습니다나타나셨다는 그리스도의 초림을 가리킵니다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처음 오신 이유즉 성육신의 이유는 죄를 다루시기 위해서였습니다그는 깨끗하고(3:3), 의로운 분으로서(2:1), 속죄제물이 되기에 충분하셨습니다(2:2).

그래서 마침내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 죄를 속죄하셨습니다그는 또한 전능하신 왕으로서죄를 정복하고 물리치신 분입니다(28,22).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즉 믿는 신자들은 계속해서 죄를 반복적으로 짓지 않습니다그리스도의 주되심을 고백하면서계속해서 죄 가운데 있는 자들은 사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아닙니다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없이하기 위해 오셨는데계속해서 죄 가운데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경험하지 못하고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면서계속해서 죄를 짓는 요한의 대적자들은 참 믿음이 없는 자들입니다.

 

대조되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죄 짓지 않는 삶(7-12)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은 사탄에 속하지 않았고 어둠에 속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완벽하여 죄를 짓지 않는 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사탄에 매여 살 수도 없습니다의로우신 하나님을 닮아 의를 행하며사랑을 받은 대로 사랑하는 자녀가 됩니다불의와 이기심을 특징으로 하는 이 세상과 구별된 거록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7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8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9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10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11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12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7-12)

의를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합니다새로운 계명이 아니라 처음부터 들은 소식입니다요한은 세상을 둘로 나눕니다하나님의 자녀 혹은 마귀의 자녀입니다이 둘을 구별하는 기준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동일합니다.

⑴ 하나님의 자녀들의 죄 짓지 않는 삶(7-9)

수신자들이 요한의 대적자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 것을 권면합니다그들은 교묘한 논리와 속임수로 교회를 미혹하는 자들입니다의를 행하다(7)는 무엇을 말하십니까예수님께서는 요한일서에서 의로운 분으로 묘사됩니다(2:1,29). 그러므로 여기서 예수님을 닮아윤리적으로 정결한 삶을 사는 것을 의를 행하다로 말하는 것 같습니다여기서 윤리적 행동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는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왜냐하면 기본적으로 는 구약에서 관계적 개념인데마찬가지로 도덕적으로 옳은 행동도 결국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한편이와 반대로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 속합니다(8b). 앞 구절과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의를 행하는 자는 예수님처럼 의롭고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합니다죄를 짓는 자는 왜 마귀에게 속합니까왜냐하면 마귀는 속이는 자요거짓을 행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죄를 짓는 자는 그 원천이 마귀에게 있다는 뜻입니다그런데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 하신 이유는 바로마귀를 멸하기 위해서입니다(8b). 이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마귀를 물리치고 승리하셨음을 의미합니다그리하여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자는 계속해서 죄를 범하지 않습니다(9). 왜냐하면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하나님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는 죄를 계속해서 짓지 않습니다하나님의 씨란 무엇입니까씨는 새로운 출생을 가능케 하는 영적 원리로서의 말씀과 성령을 가리킵니다신약은 하나님의 말씀(누가복음 8:11: 야고보서 1:18,23; 베드로전서 1:23,25) 혹은 성령(요한복음 3:3-6)으로의 출생을 말합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씨는 말씀과 성령을 함께 뜻할 것입니다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에게 주어지고그 사람은 성령을 통해 말씀을 깨닫고 회심하여새로운 생명을 가집니다이것이 곧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는 것입니다그러므로 마귀의 자녀와 하나님의 자녀를 대조하는 이 단락은 죄를 짓는 자를 마귀에게 속한 자 마귀의 자녀라 부릅니다반면에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고의롭게 사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라 합니다.

⑵ 사랑과 하나님의 자녀들의 죄 짓지 않는 삶(10-12)

마귀의 자녀는 의를 행하지 않거나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을 가리킵니다(10).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어지는 도덕을 뜻합니다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돌과 마귀의 자녀들은 의를 행하느냐행하지 않느냐에 따라 나뉩니다마귀의 자녀는 의를 행하지 않습니다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의를 행합니다이것은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도덕적 삶이 아닙니다의로우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의이며그들을 본받아 살 때 나오는 의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갈라놓는 차이는 형제 사랑의 유무입니다마귀의 자녀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습니다왜냐하면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반대로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자이므로하나님의 사랑을 따라 형제를 사랑하는 삶으로 나아갑니다서로 사랑은 처음부터 들은 소식입니다(11). 서로 사랑이라는 말은 요한일서에서 처음 나오는 구절입니다혹자는 이 서로 사랑이 형제 사랑보다는 사회적 사랑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그러나 요한 문헌의 사랑에 대한 명령은 1차적으로 공동체 안의 형제자매를 향한 사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처음부터 들었다는 것은 수신자들이 복음을 처음 들었을 때이 서로 사랑에 대한 명령도 함께 받았음을 의미합니다그러나 이는 또한 사도적 교훈을 넘어 구약에서부터 내려온 명령이라는 것을 암시하기도 합니다다시 말하면 처음부터라는 말이 요한문헌에서 창조 시대로 거슬러 가기 때문에(1:1, 2:13), 서로 사랑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창조 원리라는 것을 암시합니다이는 또한 옛 율법에서부터 강조되어 온 명령이 기도합니다(27, 레위기 19:18).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따라구약에서부터 가르쳐진 교훈대로우리는 하나님의 가족 안에 있는 형제자매로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가인과 아벨은 한 육신의 가족이지만 대조적 모습을 보여줍니다(12).


구원 받았으니 이제 죄 지어도 괜찮은 것은 아닙니다구원 받았으니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바른 재림 신앙은 우리 삶을 더 단정하게 하며건강한 종말 신앙은 우리의 형제 사람을 더욱 깊고 단단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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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02-02)


적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자녀

 

요한일서 2장 12-27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무엇입니까어떤 사람들은 조금 더 성숙해지기 위해서조금 더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서 등다름대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본질적인 이유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그것에 대해 요한복음 3:16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일서의 수신자들이 어떠한 그리스도인 공동체인지를 설명합니다.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님 안에서 주시는 죄 용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세상이나 적그리스도가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사귐이 있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아버지와 아들 안에 거하기를 힘쓰고,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세상과 자귀지 말라(12-17)

 

12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13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4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5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12-17)

성경에서 말하는 세상은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땅을 의미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사람들의 가치관과 삶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영적으로 악하고 세속적인 세력을 뜻합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세 부류로 나누어 지칭합니다. 아비, 청년, 아이들입니다.

(1) 하나님 자녀의 정체성을 기억하라(12-14)

전체 신자를 가리키는 ‘자녀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 용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12). 앞서 1:9에서는 죄의 고백을 통한 용서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죄용서는 인간의 고백 이전에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로 말미암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을 의미합니다(마 1:21; 행 4:12;10:43).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에 의해 죄 용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한편, 같은 의미인 ‘아이들’은 아버지를 알았던 사람들로 묘사됩니다(14). 2:12 의 죄 용서 받은 자녀들과 2:14의 아버지를 아는 아이들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결국 사람의 구원은 예수님의 이름을 통해서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을 알고 경험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2:13, 14절에서 아비들의 특징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것이라 합니다. 이 ‘태초부터 계신 이’를 하나님 아버지로 볼 수도 있으나, 아들 예수님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는 요한복음과 요한일서가 일관되게 강조하는,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신적 선재성을 가리킵니다(요 1:1; 요일 1:1-2). 왜냐하면 당시에 이단들이 예수님의 이러한 신성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2:14에 나오는 아이들의 특징이 ‘아버지를 알았다’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같은 말의 반복을 2:14에서, 아이들과 바로 뒤에 나오는 아비들에게 하는 것은 부자연스럽습니다. 즉 만약 ‘태초부터 계신 이’가 하나님을 가리킨다면, 2:14은 아이들도 ‘아버지를 아는 자들’로, 그리고 아비들도 ‘아버지를 아는 자들’로 묘사하는 부자연스러운 문장이 되기 때문입니다. ‘안다’는 완료형으로 ‘예전부터 지금까지 쭉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비들은 영원 전부터 존재하신 예수님을 알고, 그분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경험하는 성숙한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청년들의 특징은 악한 자를 이기는 것입니다(13). 남성 정관사와 함께 쓰인 이 ‘악한 자’는 사탄을 가리킵니다(5:18-19). 사탄은 성경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대적자로서, 고소하는 자로 혹은 유혹하는 자로 묘사됩니다(민 22:22; 욥 2:1-7; 막 1:13; 눅 22:31; 요 13:27; 행 5:3; 고전 7:5). 요한 문헌에서는 특히 ‘승리’의 모티브가 강조되는데(요 16:33; 계 2:7; 12:11; 15:2; 21:7 등), 요한일서에서도 자주 나타납니다(4:4; 5:4-5). 그리스도인은 예수께서 이루신 종말론적 승리(4:4)를 믿음으로 실현하고 경험하는 자입니다(5:4-5).

(2)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15-17)

앞선 단락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해 밝혔다면, 이제 그리스도인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교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이란 요한일서에서 두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고(3:17; 4:17), 또는 일시적으로 악의 세력의 지배를 받는, 그래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 세상을 말하기도 합니다(4:3; 5:19). 여기서는 후자의 뜻으로, 죄악 된 세상을 가리킵니다.

이 죄악 된 세상에서 나오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조심하라고 합니다(2:16). ‘육신의 정욕’은 단순히 육체로 말미암는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의 모든 죄악 된 욕심을 가리킵니다. ‘안목의 정욕’은 일차적으로 눈으로 하는 범죄를 뜻하지만, 그 근저에 있는 눈으로 하는 범죄의 동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는 잘못된 생각이나 욕심을 뜻합니다. 특히 눈과 관련하여 죄악 된 가치관 혹은 세계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생의 자랑’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잘못된 허영심을 일컫기도 하고, 그 소유에서 오는 죄악 된 자랑을 일컫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악한 영의 지배를 받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하나님과 관계없는 이기적 욕망인데, 이는 잘못된 가치관과 세상에 속한 것에 대한 거짓된 자만심을 포함합니다.

이러한 죄악은 사라지고 있습니다(2:17a). 헬라어 현재형으로 쓰인 것은, 2:8처럼 죄와 죄의 세력은 점차 사라져서, 마지막 날에 완전히 없어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는 영원히 삽니다(2:17b).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계명에의 순종을 의미하는데, 요한일서에서 이는 곧 그를 믿는 것이고, 그의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3:23).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욕심을 사랑하지 말고, 주님을 사랑하며,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적그리스도(18-23)

 

18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19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20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21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알기 때문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이라 22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23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24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 25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26너희를 미혹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27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28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29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18-29)

요한 사도는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세 부류 모두에게 처음부터 들은 복음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복음은 이제 막 새롭게 들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보리 언덕에서 이루신 구속의 사건이 복음입니다.

(1)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적그리스도(18-23)

본 단락은 요한일서에 언급되는 적그리스도의 정체에 대해 자세히 밝히고 있습니다. 먼저 적그리스도는 종말과 관련이 있습니다(18). 유대 전통에서 ‘마지막 때’는 메시아의 오심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초기 기독교 전통에서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신앙으로 발전되었습니다. 한편 요한일서는 이 종말론적 세계관을 적그리스도의 출현과 연계시키고 있습니다. 적그리스도는 또한 원래 요한의 공동체에 속했던 자들이었습니다(19). 그러나 공동체 안에 있었다고 해서, 참 교회에 속했던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적그리스도들은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부인하고,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자들이었습니다(22). 이에 반해, 그리스도인들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들입니다(20). 거룩하신 분으로부터 성령 받은 자임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분입니다(시 78:41; 사 1:4). 또한 아들 그리스도도 거룩하신 분입니다(요 6:69). 요한복음에서 보혜사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오는 것으로 묘사됩니다(요 14:18,26; 15:26; 16:7).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러한 성령을 받은 자이기에, 적그리스도의 거짓을 분별하고, 진리를 알 수 있습니다(21). 왜냐하면 성령께서 진리이신 예수님을 증언하시고(요 15:26), 직접 가르치시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생각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요 14:26).

(2) 아버지와 아들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인(24-29)

‘처음부터 들은 것’(2:24)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일컫는 말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처음 복음을 들었을 때를 지칭합니다. 문맥에서 보건대, 이는 특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것을 말합니다. ‘거하다’는 계속적인 관계를 의미합니다. 즉, 들은 바 복음의 말씀에 계속 거하게 될 때,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친밀하면서도 깊은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를 통해 또한 영원한 생명을 경험하게 됩니다(2:25).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신들이 받은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뿌리박고 있어야 합니다(2:27). 이는 그들이 처음부터 받은 사도적 교훈이며, 그리스도로서 예수님의 정체성을 포함하는 가르침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다른 가르침을 따를 필요가 없습니다. 사도로부터 받은 교훈이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 즉 기름부음이 됩니다. 이러한 신앙의 태도는 결국 주의 재림 때 증명됩니다(2:28). 성령 안에, 사도가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아버지와 아들 안에 거하는 자들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담대함을 가지게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 담대함을 가집니다.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는 다양한 부류의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돌아보고, 주신 말씀을 적용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거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영원한 생명(25)을 주십니다. 우리에게서 성령의 능력이 떠나가면 우리는 한 덩이의 진흙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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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02-01)


대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한일서 2장 1-11


세상에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하지만 죄는 무서운 것입니다양심이라는 감옥에서 처절하게 몸부림치며 버려진 존재로수치와 절망으로 고독과 외로움에 빠지게 합니다모든 관계는 단절되고 자신은 한 없이 비참해집니다이런 우리를 주님께서 손잡아 주시면서 변호하시고 십자가의 희생에 근거하여 화목케 하시는 것입니다이 얼마나 놀랍고 위대한 은총의 선물입니까사죄라는 은총의 선물을 받고서 죄의 사슬과 감옥에서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입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은 중보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에 기초합니다앞 장에서 생명의 말씀으로 묘사되었던 예수님께서는 이제 자기 백성의 죄 용서를 위한 천상의 대언자로 나타나십니다그분은 자기 백성의 죄를 속죄하신 화목제물로 묘사됩니다그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사귈 수 있기 때문입니다또한 성도들이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갖는 사귐은 형제와의 사귐으로 확대되고 발전합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한 하나님과의 사귐(1-6)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죄입니까죄책감입니까비록 죄를 범하여도 우리에게는 의로우신 대언자가 있습니다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한 변호인이며 중보자인 동시에세상 모든 죄를 사하기 위한 화목제물이십니다죄를 가볍게 여기는 일보다 더 치명적인 실수는 은혜를 가볍게 여기는 것입니다.

1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3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5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6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1-6)

예수님께서는 하늘 법정에서 우리를 위해 변호하시는 대언자가 되어 주십니다친히 자신이 화목제물이 되어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셨기 때문입니다사도 요한은 성도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해 나가고 있습니다.

⑴ 예수님의 중보를 믿음으로 사귐(1-2)

앞서 이 편지의 목적은 사귐을 위해서라고 밝힌 저자는이제 이 편지를 수신자들의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썼다고 합니다(1a). 죄를 범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하나님과그리고 다른 신자들과 사귐을 갖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곧이어 저자는 심지어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그리스도인이 붙들어야 할 사실이 있는데그것은 우리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사실입니다첫째우리의 중보자는 하나님 앞에 의로운 대언자이십니다(1b). 하나님 앞이란 하늘의 법정을 의미할 수도하늘의 성전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대언자(파라클레토스)는 하늘 법정에서 신자를 돕는 변호자(Advocate)를 뜻할 수도하늘 성전에서 신자를 돕는 중재자(Intercessor)를 뜻할 수도 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완벽하면서도 의로우신 분입니다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이렇게 우리를 위해 변호하며중보해주실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어야 합니다.

둘째우리의 중보자는 온 세상의 죄를 사하기 위한 화목제물이십니다(2). 이는 사람들의 죄를 없애줘서 성도를 정결하게 하는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담당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제물 되심을 나타내는 말입니다예수님께서는 모든 죄에 대해 우리의 심판을 대신 담당하셨고모든 죄에 대해 우리를 정결하게 하셨습니다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예수님을 기억하며 그에게 나아가야 합니다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를 붙들고 있는 성도는 하나님과 참다운 사귐을그리고 다른 성도들과 진정한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본문은 성자들이 죄를 지었을 때 어떻게 사귐의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데그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입니다.

⑵ 예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 사귐(3-6)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그와 사귀는 사람은그의 계명을 지킴으로 사귐의 진실성을 나타냅니다(3). 예수님을 아는 것은 그에 대한 정보를 아는 것이 아니라친밀한 교제 가운데그를 인격적으로 안다는 말입니다사도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안다고 하는 자는 진리가 그 속에 없고 거짓말하는 자라 합니다(4). 그는 거짓의 아비인 마귀와 관련된 자이지진리이신 예수님과는 관련이 없습니다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혹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그 안에 온전하게 됩니다(5). 다시 말하면예수님의 사랑의 계명을 따라 그 말씀을 지킬 때하나님의 사랑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그 사람 안에서 완성된다는 의미입니다하나님께서 아들을 주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그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주위의 형제를 사랑하라는 뜻입니다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 주위의 형제자매를 사랑하게 될 때 온전히 증명됩니다그때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이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이 증명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 있는 자는 예수님이 행하신 것처럼 행하는 자입니다(6). 예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셨듯이우리 도 그와 같이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이것이 곧 예수님과의 참다운 사귐이고하나님 아버지와의 깊이 있는 교제이며성도와의 진정한 나눔입니다.

 

형제와의 관계를 통한 하나님과의 사귐(7-1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시대가 도래 했고구원의 시대입니다어둠이 물러가고 참 빛이신 예수님께서 새 언약의 시대를 가져오셨습니다새 시대에 어울리는 새 계명이 주어졌습니다그 계명이 예수님에게서그리고 새 언약 백성들 안에 실현되기 시작했습니다참 빛 되신 예수의 통치를 따르는 백성이 창조된 것입니다.

7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8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9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10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11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7-11)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옛 계명인 동시에 새 계명입니다구약부터 이어져온 계명이니 옛 계명이요참 빛인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었으니 또한 새 계명입니다그러므로 형제를 미워하면서 빛 가운데 거할 수 없습니다요한은 이제 하나님과 사귐다음으로 하나님 안에서 형제들끼리 서로 사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⑴ 옛 계명과 새 계명을 통한 형제와의 사귐(7-8)

요한의 대적 자들은 사랑의 계명을 무시하며하나님과의 관계만 강조했던 것 같습니다그러나 사도는 사랑의 계명은 구약(레 19:18)에서부터 일관되게 강조되어 온 하나님 백성의 윤리임을 강조합니다(7). 그러나 이는 동시에 새 계명입니다(8). 왜냐하면 구약의 사랑의 계명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또한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본을 보여 주심으로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요한복음 13:34; 에베소서 5:2). 다시 말하면구약의 옛 계명이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완성되었으며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모델을 제시하셨습니다이런 의미에서 사랑은 옛 계명이면서 동시에 새 계명입니다이 계명은 예수님과 그의 사람들에게 진실하게 나타납니다왜냐하면 어둠은 사라져가고참 빛이 비추고 있기 때문입니다(8b). 어둠은 악의 세력 혹은 영역을 의미하고참 빛은 그리스도를 지칭하지만그리스도의 영역을 암시합니다이제 어둠의 영역은 사라져가고그리스도의 영역이 점점 더 왕성해져갑니다악의 세력은 멸망해가고그리스도께서 점차 어둠의 영역을 지배해갑니다이는 요한복음 1:5에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깨닫다로 번역된 카타람바노(καταλαμβάνο)는 이기다라는 뜻도 되므로 과거의 단회적 사건을 강조합니다즉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한 과거의 단회적 사건십자가와 부활을 암시하고 있습니다이에 반해 요한일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고계속해서 그의 나라를 확장해가는 승리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이는 또한 요한일서의 종말론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데, ‘이미와 아직의 종말론적 긴장을 의미합니다예수님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그의 나라가 이 땅에서 확장되어 가지만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다른 한편 실현된 종말론을 강조합니다새 계명을 통해 그의 나라가 시작되었고 점차 발전해간다는 것을 강조합니다이러한 그의 나라의 발전과 확장의 핵심에 사랑이 있습니다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에 바탕을 둔 형제 사랑이 하나님 나라 발전에서 핵심을 차지합니다.

⑵ 빛 가운데서 형제와 사귐(9-11)

빚은 하나님을 가리킬 수도(1:5,7),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2:8), 즉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하면서 죄의 영역 안에 머무는 자에 대해 언급합니다(9). 이런 모순된 사람이 누구냐 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면서 형제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입니다반대로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증명하게 됩니다(10).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한 자는 그리스도를 사랑할 뿐 아니라그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했다는 뜻이요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이런 사람은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습니다(10b). 이는 그 자신 안에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이 없다는 뜻입니다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람을 넘어지게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11절은 다시 앞의 내용을 반복하는데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바로 어둠에 있는 자입니다즉 그가 하나님과 단절되어 계속죄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것을 말합니다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여 갈 바를 알지 못합니다(요한복음 12:40).

이는 당연한 결과입니다예수께서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길인데(요한복음 14:6), 그는 예수님도 모르고 예수님의 사랑도 모르기 때문입니다예수님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형제를 사랑하지 않습니다그러므로 가는 길을 알지 못합니다.


많은 성경공부와 교회 봉사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만들어주지 못합니다스스로 속이기까지 하니 때론 해가 되기도 합니다차라리 모른다 할 일입니다차라리 어둠 속에 있다 자백할 일입니다그래야 희망이 있습니다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우리에게는 의로우신 대언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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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01-01)


빛이신 하나님

요한일서 1장 1-10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방 안에 불을 키면스위치를 누르는 순간 어두움은 사라집니다빛이 어두움을 몰아낸 것입니다하나님과 교제하는 삶도 이와 같습니다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 우리 삶의 어두움도 사라집니다.

 

사도 요한은 이단의 영향을 받던 소아시아 교인들에게 이 서신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참된 교제를 나누기를 권면합니다특히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말씀이심을 강조하며이 서신을 쓰는 목적이 바로 그분과의 교제를 통해 충만한 기쁨을 누리는데 있음을 설명합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의 시작(1-4)

성도의 사귐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에 기초합니다주님과의 교제를 통한 기쁨은 교회가 진정한 사귐의 공동체가 될 때 확장되고 완성됩니다우리와의 사귐을 위해 몸을 입고 이 땅에 나타나신 말씀(로고스)’입니다말씀을 묵상할 때 그 분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집니다.

1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3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4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1-4)

사도 요한은 독자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함으로써 참 기쁨을 누리게 하기 위해 이 편지를 썼습니다이를 위해 요한은 자신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합니다예수님은 생명이시며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⑴ 말씀을 통한 하나님과의 사귐(1-2)

저자는 예수님께서 생명의 말씀(로고스)이심을 언급합니다그는 말씀이실 뿐 아니라생명이십니다로고스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창조(시편 33:6), 구원(이사야 55:1), 계시(에스겔 33:7)를 대행합니다.

이제 요한일서는 로고스를 생명과 연결합니다예수 그리스도는 생명 자체이십니다우리가 예수님과 교제하기 될 때 생명을 얻고생명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또한 로고스이신 그리스도의 선재성과 성육신을 함께 언급합니다태초부터 계속 존재하셨던 하나님의 로고스는 이제 이 땅에 나타나셔서 사람들에 의해 경험됩니다이는 요한복음 1장을 생각나게 합니다(요한복음 1:1,14). 로고스가 우리에게 나타났다는 말은 저자가 예수님의 성육신의 증인들 중에 있음을 의미하는데이는 예수님의 사역과 고난부활을 목격한 사도적 그룹을 암시합니다.

2절에서 2절의 내용 중예수님이 생명 되심과 이 생명이 성육신하셨다는 사실을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아버지와 함께 계셨다와 우리에게 나타나셨다는 예수님의 하늘에서의 위치와 성육신하신 땅에서의 위치를 다시 묘사하는 말입니다따라서 이 단락에서 저자는 자신의 증언 내영이 무엇이고자신의 증언이 왜 믿을 만한지도 진술합니다그 증언은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그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육신이 되어 생명을 주신 로고스입니다이 생명의 로고스를 증언하는 것입니까그 이유는 다음 단락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⑵ 성도의 사귐과 하나님과의 사귐(3-4)

저자가 자신이 직접 경험한 생명의 로고스를 전파하는 이유는 사귐을 위해서입니다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경험한 사도들과 이 예수님을 전해 듣는 교회 사이의 사귐을 위해서 저자는 증언한다고 진술합니다(3).

사귐(코이노니아)’이란 신자 간에혹은 신자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갖는 교제를 뜻하는데헌신을 동반한 영적물질적 나눔을 뜻합니다따라서 저자는 자신이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는 이유는 바로 수신자들과 이러한 전인격적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라고 밝힙니다그런데 이 사귐은 곧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누리는 사귐입니다사도와 교회의 사귐의 기초는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각자가 갖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와의 사귐이 없으면기독교적 교제와 나눔은 무의미하며 불가능합니다저자는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우리의 사귐을 헬라어 강조 용법을 써서 강조하고 있습니다다시 말하면사도와 교회의 사귐의 특징은 바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의 기초 위에 있고그 사귐과 함께 이루어집니다.

저자는 사도들의 종말론적 기쁨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과의 사귐에 기초해서 교회와 의 사귐을 통해 완성된다고 말합니다(4). 이러한 종말론적 기쁨의 완성을 통해 저자는 지금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이 단락에서 저자는 자신과 교회와의 사귐은 하나님과의 사귐에 기초하며그 사귐을 통해 교회 공동체의 교제와 나눔이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그리고 이러한 사귐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종말론적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의 발전(5-10)

사귐 자체가 선한 것은 아닙니다어둠과 사귀는 자는 빛과 사귈 수 없습니다복 있는 사람은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시편 1:1). 빛이신 하나님과 사귄다 하면서 어둠 가운데 행하는 자는 거짓을 말하는 것입니다죄의 고백은 거룩하신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출발점입니다.

5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6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7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8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0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5-10)

성도의 사귐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에 기초합니다주님과의 교제를 통한 기쁨은 교회가 진정한 사귐의 공동체가 될 때 확장되고 완성됩니다.

⑴ 빛이신 하나님과의 사귐(5-7)

사도적 메시지의 핵심을 소개하고 있습니다그것은 하나님이 빛이시라는 것입니다(5).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부터 빛과 연관된 분으로 나타납니다그분은 빛을 창조하신 분이고(창세기 1:3), 이스라엘에게 빛과 같은 존재입니다빛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을 뿐 아니라이스라엘에게 빛을 주시는 분입니다(출애굽기 10:23; 13:21). 그분의 계시와 인도는 빛과 같았습니다(시편 27:1; 미가 7:8). 이제 사도는 여기서 하나님을 빛 자체라고 소개하면서어둠과 대조되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조금도(5)라는 말은 그가 빛으로서 어둠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분이 라는 것을 강조합니다어둠은 여기서 도덕적 의미로 사용되었는데죄와 악을 일컫습니다그러므로 여기서 하나님의 빛 되심도 일차적으로 도덕적 의미가 있습니다하나님은 죄와 악이 조금도 없으신 거룩하고 완전하신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어둠 가운데 행하는 자는 두 가지 잘못을 하는 것입니다(6). 첫째그는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왜냐하면 하나님과 어둠은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절대 함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사귀는 자는 어둠과 사귈 수 없습니다둘째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어둠 가운데 행하는 자는 진리를 행하지 않는 잘못이 있습니다요한복음 3:20-21에 의하면 진리를 행하는 자는 빛으로 나오고악을 행하는 자는 빛을 피합니다그렇기 때문에 어둠가운데 행하는 자는 결국 진리를 행하지 않는 자입니다요한복음 3:19-21에 의하면진리를 행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계시에 반응하는 긍정적 태도와 삶을 이야기합니다.

한편 빛 가운데 행하는 자는 두 가지 결과를 갖습니다(7). 첫째신자 간의 교제를 갖게 됩니다예상치 못한 진술입니다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언급될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저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넘어신자 간의 친밀한 사귐까지도 언급합니다아담이 사람들 간의 관계를 단절시켰다면이제 그리스도를 통한 빛 된 삶은 사람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킵니다둘째빛 가운데 행하는 자는 예수님의 보혈로 정결케 된다빛 가운데 행하는 자 진리를 행하는 자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항상 열려 있습니다그래서 언제나 예수님의 보혈즉 예수님의 용서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여기서 행하다와 정결케 하다는 모두 헬라어 현재형으로이 두 가지 사실이 신자에게 늘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⑵ 회개와 하나님과의 사귐(8-10)

죄에 대한 두 가지 태도를 언급합니다먼저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인데이는 두 가지 결과를 초래합니다(8). 첫째스스로를 속이게 된다둘째진리가 그 사람 속에 있지 않게 됩니다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은 유대 전통이든 헬라 전통이든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또한 성경은 인간이 죄인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시편 14:1; 로마서 3:23). 따라서 죄를 부정하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진리가 없다는 증거입니다.

이어서 죄에 대한 또 다른 태도는 죄를 고백하는 것인데이 또한 두 가지 결과를 초래합니다(9). 첫째미쁘시고(신실하시고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용서하십니다미쁘시면서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출애굽기 34:6-7에 나옵니다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이렇게 죄를 용서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모습은 구약에서 자주 묘사됩니다(민수기 14:18, 느헤미야 9:17; 시편 86:15;103:8; 요엘 2:13; 요나서 4:2). 또한 그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입니다죄를 기뻐하지 않으시며죄와 함께하지 않으십니다그래서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즉 우리가 죄를 고백할 때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신실하심은 우리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우리를 모든 불의로부터 분리시키십니다.

범죄하지 아니하였다(10)는 말은 8절의 죄가 없다는 말의 반복처럼 보입니다그러나 본문에 쓰인 완료 시제는 이 구절이 앞에서 언급된 네 개의 조건 절(1:6-9)의 결론으로 보이게 합니다앞에 나오는 이들의 결론으로서범죄하지 아니하였다고 하는 것은 두 가지 결과를 초래합니다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들게 되고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 없게 됩니다요한문헌에서 거짓은 마귀의 영역에 해당합니다(요한복음 8:44; 요한계시록 21:8) 그러므로 이런 행위는 하나님을 마귀처럼 표현하는 것이 되며동시에 1:1에 나온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그 사람 속에 없음을 나타냅니다.


사귐 없는 사역은 영혼을 갉아먹고 공동체를 메마르게 합니다주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도의 깊은 사귐(코이노니아)이 교회를 메마른 사역 기관에서 인격적인 사귐의 공동체로 변화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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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개요


요한일서 저자

본 서신은 전통적으로 사도 요한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⑴ 내적 증거

저자의 이름이 본문에는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지만저자가 영적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은 서신 전반에 어도 나타나 있습니다요한복음과의 내용문체주요 단어 등이 너무나 유사합니다이런 공통점으로 볼 때 사도 요한이 기록을 반증합니다.

⑵ 외적 증거

사도 요한의 제자인 폴리캅 및 초대교부였던 오리게네스클레멘트이레네우스 등 초기 기독교 저술가들은 본 서신을 요한의 저술로 인용하고 있어그의 저작설을 뒷받침해 줍니다.

 

요한일서 기록 시기

기록 시기와 관련하여이레니우스는 요한이 예루살렘 함락(AD 70직전에 그 성을 빠져나와 트라쟌 황제의 통치 때(AD 98-117)까지 에베소 교회에 머물러 있었다고 전합니다따라서 이 서신은 아마도 요한이 그곳에 머물던 시기인 AD 85-95년이라는 10년 어간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그런 의미에서 정경들의 배열 순서상 가장 마지막에 놓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요한일서 기록 목적

먼저 당시 진리를 위협하며 교회를 혼란에 빠뜨렸던 영지주의 등 이단을 경계하기 위하여(2:26), 다음으로 구원의 유일한 방편이신 그리스도에 관한 바른 지식을 가르치기 위하여(1:1) 기록하였습니다.

 

기록 배경

본 서신은 독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사실 이외에는 그들의 신분이나 거주 지역에 대해서 아무런 암시도 주지 않았습니다초대교회 전통이 요한을 로마행 아시아와 연관시키고 있기 때문에독자들이 그곳에 살던 사람들이라는 주장이 자주 대두되었습니다이 주장이 옳을지도 모릅니다특히 이러한 연관은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서 확증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단락 구분

 Ⅰ. 서론 1:1-4
     1.생명의 말씀이신 그리스도와의 개인적 친분을 선언함 1:1-3 상단
     2. 편지를 쓰는 목적 1:3 하단-4
       (1) 그리스도인들과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북돋우기 위하여 1:3 하단
       (2) 기쁨이 충만케 하기 위하여 1:4

Ⅱ. 하나님과 사람과의 사귐을 위한 요구사항들 1:5-10
     1. 빛 가운데 행하라 1:5-7
     2. 죄를 자백하라 1:8-10

Ⅲ. 무죄한 생애에 대한 권면 2:1-28
     1. 대언자이시며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신 그리스도 2:1, 2
     2. 그의 행하시는 대로 행함 2:3-6
     3. 새 계명 2:7-11
     4. 영적 자녀들에 대한 개인적 호소 2:12-28
       (1) 쓰는 이유 2:12-14
       (2)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2:15-17
       (3) 적 그리스도들과 그들의 이단을 경계하라 2:18-26
       (4) 그의 오심을 위해 준비하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 거하라 2:27, 28

Ⅳ. 하나님의 아들들과 마귀의 자녀들과의 대조 2:29-3:24
     1. 하나님의 아들들의 의 2:29-3:7
     2.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함 3:8, 9
     3.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마귀에게 속함 3:10-18
     4.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구원을 확증하심 3:19-24

Ⅴ. 진리와 사랑과 믿음은 사귐에 필수적임 4:1-5:12
     1. 진리의 영과 오류의 영 4:1-6
     2.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은 하나님께 속함 4:7-21
     3. 믿음은 승리와 생명을 가져옴 5:1-12

Ⅵ. 결론 5:13-21
     1. 목적의 재천명 5:13
     2. 무죄에 대한 권고 5:14-17
     3. 하나님과 그의 아들을 알라는 마지막 격려 5: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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