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02-01)
대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한일서 2장 1-11절
세상에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지만 죄는 무서운 것입니다. 양심이라는 감옥에서 처절하게 몸부림치며 버려진 존재로, 수치와 절망으로 고독과 외로움에 빠지게 합니다. 모든 관계는 단절되고 자신은 한 없이 비참해집니다. 이런 우리를 주님께서 손잡아 주시면서 변호하시고 십자가의 희생에 근거하여 화목케 하시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위대한 은총의 선물입니까! 사죄라는 은총의 선물을 받고서 죄의 사슬과 감옥에서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입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은 중보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에 기초합니다. 앞 장에서 생명의 말씀으로 묘사되었던 예수님께서는 이제 자기 백성의 죄 용서를 위한 천상의 대언자로 나타나십니다. 그분은 자기 백성의 죄를 속죄하신 화목제물로 묘사됩니다. 그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사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도들이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갖는 사귐은 형제와의 사귐으로 확대되고 발전합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한 하나님과의 사귐(1-6)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죄입니까? 죄책감입니까? 비록 ‘죄를 범하여도’ 우리에게는 의로우신 대언자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한 변호인이며 중보자인 동시에, 세상 모든 죄를 사하기 위한 화목제물이십니다. 죄를 가볍게 여기는 일보다 더 치명적인 실수는 은혜를 가볍게 여기는 것입니다.
1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3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5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6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1-6)
예수님께서는 하늘 법정에서 우리를 위해 변호하시는 대언자가 되어 주십니다. 친히 자신이 화목제물이 되어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성도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해 나가고 있습니다.
⑴ 예수님의 중보를 믿음으로 사귐(1-2)
앞서 이 편지의 목적은 ‘사귐’을 위해서라고 밝힌 저자는, 이제 이 편지를 수신자들의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썼다고 합니다(1a). 죄를 범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그리고 다른 신자들과 사귐을 갖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곧이어 저자는 심지어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그리스도인이 붙들어야 할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첫째, 우리의 중보자는 하나님 앞에 의로운 대언자이십니다(1b). 하나님 앞이란 하늘의 법정을 의미할 수도, 하늘의 성전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대언자(파라클레토스)는 하늘 법정에서 신자를 돕는 변호자(Advocate)를 뜻할 수도, 하늘 성전에서 신자를 돕는 중재자(Intercessor)를 뜻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완벽하면서도 의로우신 분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이렇게 우리를 위해 변호하며, 중보해주실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어야 합니다.
둘째, 우리의 중보자는 온 세상의 죄를 사하기 위한 화목제물이십니다(2). 이는 사람들의 죄를 없애줘서 성도를 정결하게 하는,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담당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제물 되심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죄에 대해 우리의 심판을 대신 담당하셨고, 모든 죄에 대해 우리를 정결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예수님을 기억하며 그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를 붙들고 있는 성도는 하나님과 참다운 사귐을, 그리고 다른 성도들과 진정한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본문은 성자들이 죄를 지었을 때 어떻게 사귐의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데, 그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입니다.
⑵ 예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 사귐(3-6)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와 사귀는 사람은, 그의 계명을 지킴으로 사귐의 진실성을 나타냅니다(3). 예수님을 아는 것은 그에 대한 정보를 아는 것이 아니라, 친밀한 교제 가운데, 그를 인격적으로 안다는 말입니다. 사도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안다고 하는 자는 진리가 그 속에 없고 거짓말하는 자라 합니다(4). 그는 거짓의 아비인 마귀와 관련된 자이지, 진리이신 예수님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혹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그 안에 온전하게 됩니다(5).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을 따라 그 말씀을 지킬 때,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그 사람 안에서 완성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그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 주위의 형제를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 주위의 형제자매를 사랑하게 될 때 온전히 증명됩니다. 그때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이,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이 증명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 있는 자는 예수님이 행하신 것처럼 행하는 자입니다(6). 예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셨듯이, 우리 도 그와 같이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예수님과의 참다운 사귐이고, 하나님 아버지와의 깊이 있는 교제이며, 성도와의 진정한 나눔입니다.
형제와의 관계를 통한 하나님과의 사귐(7-1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시대가 도래 했고, 구원의 시대입니다. 어둠이 물러가고 참 빛이신 예수님께서 새 언약의 시대를 가져오셨습니다. 새 시대에 어울리는 새 계명이 주어졌습니다. 그 계명이 예수님에게서, 그리고 새 언약 백성들 안에 실현되기 시작했습니다. 참 빛 되신 예수의 통치를 따르는 백성이 창조된 것입니다.
7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8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9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10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11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7-11)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옛 계명인 동시에 새 계명입니다. 구약부터 이어져온 계명이니 옛 계명이요, 참 빛인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었으니 또한 새 계명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미워하면서 빛 가운데 거할 수 없습니다. 요한은 이제 하나님과 사귐, 다음으로 하나님 안에서 형제들끼리 서로 사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⑴ 옛 계명과 새 계명을 통한 형제와의 사귐(7-8)
요한의 대적 자들은 사랑의 계명을 무시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만 강조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사랑의 계명은 구약(레 19:18)에서부터 일관되게 강조되어 온 하나님 백성의 윤리임을 강조합니다(7). 그러나 이는 동시에 새 계명입니다(8). 왜냐하면 구약의 사랑의 계명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본을 보여 주심으로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요한복음 13:34; 에베소서 5:2). 다시 말하면, 구약의 옛 계명이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완성되었으며,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모델을 제시하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은 옛 계명이면서 동시에 새 계명입니다. 이 계명은 예수님과 그의 사람들에게 진실하게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어둠은 사라져가고, 참 빛이 비추고 있기 때문입니다(8b). 어둠은 악의 세력 혹은 영역을 의미하고, 참 빛은 그리스도를 지칭하지만, 그리스도의 영역을 암시합니다. 이제 어둠의 영역은 사라져가고, 그리스도의 영역이 점점 더 왕성해져갑니다. 악의 세력은 멸망해가고, 그리스도께서 점차 어둠의 영역을 지배해갑니다. 이는 요한복음 1:5에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깨닫다’로 번역된 카타람바노(καταλαμβάνο)는 ‘이기다’라는 뜻도 되므로 과거의 단회적 사건을 강조합니다. 즉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한 과거의 단회적 사건, 십자가와 부활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요한일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고, 계속해서 그의 나라를 확장해가는 승리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또한 요한일서의 종말론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데, ‘이미’와 ‘아직’의 종말론적 긴장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그의 나라가 이 땅에서 확장되어 가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 실현된 종말론을 강조합니다. 새 계명을 통해 그의 나라가 시작되었고 점차 발전해간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그의 나라의 발전과 확장의 핵심에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에 바탕을 둔 형제 사랑이 하나님 나라 발전에서 핵심을 차지합니다.
⑵ 빛 가운데서 형제와 사귐(9-11)
빚은 하나님을 가리킬 수도(1:5,7),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2:8), 즉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하면서 죄의 영역 안에 머무는 자에 대해 언급합니다(9). 이런 모순된 사람이 누구냐 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면서 형제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증명하게 됩니다(10).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한 자는 그리스도를 사랑할 뿐 아니라, 그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했다는 뜻이요,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습니다(10b). 이는 그 자신 안에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이 없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람을 넘어지게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11절은 다시 앞의 내용을 반복하는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바로 어둠에 있는 자입니다. 즉 그가 하나님과 단절되어 계속죄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것을 말합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여 갈 바를 알지 못합니다(요한복음 12:40).
이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길인데(요한복음 14:6), 그는 예수님도 모르고 예수님의 사랑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형제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가는 길을 알지 못합니다.
많은 성경공부와 교회 봉사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만들어주지 못합니다. 스스로 속이기까지 하니 때론 해가 되기도 합니다. 차라리 모른다 할 일입니다. 차라리 어둠 속에 있다 자백할 일입니다. 그래야 희망이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의로우신 대언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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