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01-01)
빛이신 하나님
요한일서 1장 1-10절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방 안에 불을 키면, 스위치를 누르는 순간 어두움은 사라집니다. 빛이 어두움을 몰아낸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도 이와 같습니다.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 우리 삶의 어두움도 사라집니다.
사도 요한은 이단의 영향을 받던 소아시아 교인들에게 이 서신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참된 교제를 나누기를 권면합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말씀이심을 강조하며, 이 서신을 쓰는 목적이 바로 그분과의 교제를 통해 충만한 기쁨을 누리는데 있음을 설명합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의 시작(1-4)
성도의 사귐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에 기초합니다. 주님과의 교제를 통한 기쁨은 교회가 진정한 사귐의 공동체가 될 때 확장되고 완성됩니다. 우리와의 사귐을 위해 몸을 입고 이 땅에 나타나신 ‘말씀(로고스)’입니다. 말씀을 묵상할 때 그 분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집니다.
1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3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4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1-4)
사도 요한은 독자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함으로써 참 기쁨을 누리게 하기 위해 이 편지를 썼습니다. 이를 위해 요한은 자신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시며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⑴ 말씀을 통한 하나님과의 사귐(1-2)
저자는 예수님께서 생명의 말씀(로고스)이심을 언급합니다. 그는 말씀이실 뿐 아니라, 생명이십니다. ‘로고스’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창조(시편 33:6), 구원(이사야 55:1), 계시(에스겔 33:7)를 대행합니다.
이제 요한일서는 로고스를 생명과 연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 자체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교제하기 될 때 생명을 얻고, 생명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또한 로고스이신 그리스도의 선재성과 성육신을 함께 언급합니다. 태초부터 계속 존재하셨던 하나님의 로고스는 이제 이 땅에 나타나셔서 사람들에 의해 경험됩니다. 이는 요한복음 1장을 생각나게 합니다(요한복음 1:1,14). 로고스가 ‘우리’에게 나타났다는 말은 저자가 예수님의 성육신의 증인들 중에 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예수님의 사역과 고난, 부활을 목격한 사도적 그룹을 암시합니다.
2절에서 2절의 내용 중, 예수님이 생명 되심과 이 생명이 성육신하셨다는 사실을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아버지와 함께 계셨다’와 ‘우리에게 나타나셨다’는 예수님의 하늘에서의 위치와 성육신하신 땅에서의 위치를 다시 묘사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단락에서 저자는 자신의 증언 내영이 무엇이고, 자신의 증언이 왜 믿을 만한지도 진술합니다. 그 증언은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그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육신이 되어 생명을 주신 로고스입니다. 이 생명의 로고스를 증언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다음 단락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⑵ 성도의 사귐과 하나님과의 사귐(3-4)
저자가 자신이 직접 경험한 생명의 로고스를 전파하는 이유는 사귐을 위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경험한 사도들과 이 예수님을 전해 듣는 교회 사이의 ‘사귐’을 위해서 저자는 증언한다고 진술합니다(3).
‘사귐(코이노니아)’이란 신자 간에, 혹은 신자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갖는 교제를 뜻하는데, 헌신을 동반한 영적, 물질적 나눔을 뜻합니다. 따라서 저자는 자신이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는 이유는 바로 수신자들과 이러한 전인격적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라고 밝힙니다. 그런데 이 사귐은 곧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누리는 사귐입니다. 사도와 교회의 사귐의 기초는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각자가 갖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와의 사귐이 없으면, 기독교적 교제와 나눔은 무의미하며 불가능합니다. 저자는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우리의 사귐을 헬라어 강조 용법을 써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와 교회의 사귐의 특징은 바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의 기초 위에 있고, 그 사귐과 함께 이루어집니다.
저자는 사도들의 종말론적 기쁨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과의 사귐에 기초해서 교회와 의 사귐을 통해 완성된다고 말합니다(4). 이러한 종말론적 기쁨의 완성을 통해 저자는 지금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락에서 저자는 자신과 교회와의 사귐은 하나님과의 사귐에 기초하며, 그 사귐을 통해 교회 공동체의 교제와 나눔이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귐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종말론적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의 발전(5-10)
사귐 자체가 선한 것은 아닙니다. 어둠과 사귀는 자는 빛과 사귈 수 없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시편 1:1). 빛이신 하나님과 사귄다 하면서 어둠 가운데 행하는 자는 거짓을 말하는 것입니다. 죄의 고백은 거룩하신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출발점입니다.
5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6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7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8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0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5-10)
성도의 사귐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에 기초합니다. 주님과의 교제를 통한 기쁨은 교회가 진정한 사귐의 공동체가 될 때 확장되고 완성됩니다.
⑴ 빛이신 하나님과의 사귐(5-7)
사도적 메시지의 핵심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빛이시라는 것입니다(5).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부터 빛과 연관된 분으로 나타납니다. 그분은 빛을 창조하신 분이고(창세기 1:3), 이스라엘에게 빛과 같은 존재입니다. 빛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빛을 주시는 분입니다(출애굽기 10:23; 13:21). 그분의 계시와 인도는 빛과 같았습니다(시편 27:1; 미가 7:8). 이제 사도는 여기서 하나님을 빛 자체라고 소개하면서, 어둠과 대조되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조금도’(5)라는 말은 그가 빛으로서 어둠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분이 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어둠은 여기서 도덕적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죄와 악을 일컫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하나님의 빛 되심도 일차적으로 도덕적 의미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죄와 악이 조금도 없으신 거룩하고 완전하신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어둠 가운데 행하는 자는 두 가지 잘못을 하는 것입니다(6). 첫째, 그는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어둠은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절대 함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사귀는 자는 어둠과 사귈 수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어둠 가운데 행하는 자는 진리를 행하지 않는 잘못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3:20-21에 의하면 진리를 행하는 자는 빛으로 나오고, 악을 행하는 자는 빛을 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둠가운데 행하는 자는 결국 진리를 행하지 않는 자입니다. 요한복음 3:19-21에 의하면, 진리를 행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계시에 반응하는 긍정적 태도와 삶을 이야기합니다.
한편 빛 가운데 행하는 자는 두 가지 결과를 갖습니다(7). 첫째, 신자 간의 교제를 갖게 됩니다. 예상치 못한 진술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언급될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넘어, 신자 간의 친밀한 사귐까지도 언급합니다. 아담이 사람들 간의 관계를 단절시켰다면, 이제 그리스도를 통한 빛 된 삶은 사람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킵니다. 둘째, 빛 가운데 행하는 자는 예수님의 보혈로 정결케 된다. 빛 가운데 행하는 자 진리를 행하는 자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항상 열려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예수님의 보혈, 즉 예수님의 용서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행하다’와 ‘정결케 하다’는 모두 헬라어 현재형으로, 이 두 가지 사실이 신자에게 늘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⑵ 회개와 하나님과의 사귐(8-10)
죄에 대한 두 가지 태도를 언급합니다. 먼저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인데, 이는 두 가지 결과를 초래합니다(8). 첫째, 스스로를 속이게 된다. 둘째, 진리가 그 사람 속에 있지 않게 됩니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은 유대 전통이든 헬라 전통이든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또한 성경은 인간이 죄인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시편 14:1; 로마서 3:23). 따라서 죄를 부정하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진리가 없다는 증거입니다.
이어서 죄에 대한 또 다른 태도는 죄를 고백하는 것인데, 이 또한 두 가지 결과를 초래합니다(9). 첫째, 미쁘시고(신실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용서하십니다. 미쁘시면서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출애굽기 34:6-7에 나옵니다.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이렇게 죄를 용서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모습은 구약에서 자주 묘사됩니다(민수기 14:18, 느헤미야 9:17; 시편 86:15;103:8; 요엘 2:13; 요나서 4:2). 또한 그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입니다. 죄를 기뻐하지 않으시며, 죄와 함께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 즉 우리가 죄를 고백할 때,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신실하심은 우리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모든 불의로부터 분리시키십니다.
‘범죄하지 아니하였다’(10)는 말은 8절의 ‘죄가 없다’는 말의 반복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쓰인 완료 시제는 이 구절이 앞에서 언급된 네 개의 조건 절(1:6-9)의 결론으로 보이게 합니다. 즉, 앞에 나오는 이들의 결론으로서, ‘범죄하지 아니하였다’고 하는 것은 두 가지 결과를 초래합니다.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들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 없게 됩니다. 요한문헌에서 거짓은 마귀의 영역에 해당합니다(요한복음 8:44; 요한계시록 21:8) 그러므로 이런 행위는 하나님을 마귀처럼 표현하는 것이 되며, 동시에 1:1에 나온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그 사람 속에 없음을 나타냅니다.
사귐 없는 사역은 영혼을 갉아먹고 공동체를 메마르게 합니다.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도의 깊은 사귐(코이노니아)이 교회를 메마른 사역 기관에서 인격적인 사귐의 공동체로 변화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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