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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66-02)


확장되는 하나님 나라

이사야 66장 15-24절


 

하나님의 날은 항상 양면성을 가집니다. 그날은 전쟁이 끝난 후 돌아오는 날 같아서 승리한 편은 크게 기뻐하는 날이지만, 포로로 잡혀 온 적군에게는 가장 수치스러운 날이 됩니다. 이사야 역시 하나님의 날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그 두 가지 날의 의미를 자세히 묵상해 봅시다.

 

  • 이사야 마지막 부분입니다. 진노하신 여호와께서 불과 폭풍 가운데 임하셔서 불과 칼로 모든 혈육을 심판하십니다. 그분은 당신 종들에게는 구원의 능력으로 함께하시고, 당신 원수들에게는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진노의 불로 당신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모든 혈육이 죽음에 넘겨지지는 않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심판을 넘어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기 위해 강림하시기에 일부 살아남은 자들이 그분께로 돌아옵니다.

 

불 가운데 임하시는 여호와(15-17)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마지막 때를 사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줄이 될 것입니다. 지금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 열심을 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 전에 가까운 사람부터 복음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전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고 듣는 것은 그들의 책임입니다.

 

15보라 여호와께서 불에 둘러싸여 강림하시리니 그의 수레들은 회오리바람 같으리로다 그가 혁혁한 위세로 노여움을 나타내시며 맹렬한 화염으로 책망하실 것이라 16여호와께서 불과 칼로 모든 혈육에게 심판을 베푸신즉 여호와께 죽임당할 자가 많으리니 17스스로 거룩하게 구별하며 스스로 정결하게 하고 동산에 들어가서 그 가운데에 있는 자를 따라 돼지 고기와 가증한 물건과 쥐를 먹는 자가 다 함께 망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5-17)

 

하나님께서는 장차 세상을 심판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선포하셨습니다. 불에 둘러싸여 강림하시는 여호와의 모습은 진노와 심판의 맹렬함을 보여 줍니다. 여호와의 심판은 모든 혈육을 대상으로 합니다. 모두가 심판대 앞에 설 것이고,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하지 못하고 죽임 당할 것입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자가 많습니다(마 7:13).

 

(1) 모든 혈육의 심판(15-16)

 

주제가 예루살렘의 회복과 위로에서 민족들의 심판으로 바뀝니다. 여호와께서 노여움과 책망을 발하시려고 불과 폭풍 가운데 오십니다(15; 참조. 51:20). 불과 회오리바람과 화염은 하나님의 현현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전형적인 요소들입니다. 마치 외투를 두르신 것처럼 여호와께서 불에 둘러싸여 오십니다. 불 가운데의 임재는 위협과 접근 불가(출 3:2)를 내포합니다. 불은 그분의 출현을 알려주는 외적 표지일 뿐만 아니라 악인을 멸하는 무기이기도 합니다. 회오리바람에 비교된 수레(병거)는 전쟁 무기로 신속하고도 막강한 공격력을 자랑합니다. 구름(병거)을 타고 하늘을 이동하는 여호와는 잘 알려진 신현의 모습입니다(19:1; 시 18:10; 68:4). “혁혁한 위세”의 ‘헤마’는 화가 나서 감정적으로 뜨거워진 상태를 가리킵니다. “맹렬한 화염으로 책망하실 것”은 그분의 견책이 매우 파괴적일 것을 시사해줍니다. 맹렬한 화염이 건물을 잿더미로 만들듯이, 그분의 타오르는 분노가 심판에 떨어진 모든 것을 남김없이 태워버립니다. 여호와께서 불과 칼로 모든 육체를 심판하시기에 많은 사람이 칼에 찔려 죽임을 당합니다(16).

“모든 혈육”은 민족들을 가리킵니다. 심판의 범위가 하나님 백성 가운데 악을 행하는 자들을 넘어 민족들로 확장됩니다. 15-16절에서는 모든 혈육이 여호와의 심판에 떨어지고, 66:23에서는 모든 혈육이 “매월 초하루와 매 안식일에” 여호와 앞에 나아와 예배합니다.

 

(2) 우상숭배자들의 멸망(17)

 

동산의 우상숭배를 고발하는 17절은 내용과 표현에서 65:3-5에 가깝다. 후자에서처럼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발의 대상입니다. 제의에 참가하는 자들이 동산에서 의식을 거행하기 전에 자신을 성별하고 정결하게 합니다. “동산”은 울타리로 둘러싸인 제의 공간으로 나무들이 있는 작은 숲을, “그 가운데에 있는 자”는 신상보다는 제의를 주관하는 사제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제의 참가자들은 “돼지 고기와 가증한 물건과 쥐”를 먹습니다. “가중한 물건”의 ‘셰케츠’는 가증한 짐승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참조, 레 11:10 이하; 겔 8:10). 제의의 성격은 달리 언급되지 않지만, 풍요제의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17절의 현재 위치는 주목할 만합니다. 불과 칼에 의한 민족들의 심판 선언(15-16) 다음에 놓이면서, 이교적 제의에 빠진 예루살렘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바로 앞에서 언급한 불과 칼의 심판임을 시사해줍니다. 여호와께서 모든 육체를 심판하실 때 이스라엘의 배교자들도 마찬가지로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종말론적 전망(18-2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하지 않을 때는 도리어 이방인들에게 그 역할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이방인들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징계하셨습니다. 우리는 기쁨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역할에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18내가 그들의 행위와 사상을 아노라 때가 이르면 뭇 나라와 언어가 다른 민족들을 모으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볼 것이며 19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징조를 세워서 그들 가운데에서 도피한 자를 여러 나라 곧 다시스와 뿔과 활을 당기는 룻과 및 두발과 야완과 또 나의 명성을 듣지도 못하고 나의 영광을 보지도 못한 먼 섬들로 보내리니 그들이 나의 영광을 뭇 나라에 전파하리라 20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자손이 예물을 깨끗한 그릇에 담아 여호와의 집에 드림 같이 그들이 너희 모든 형제를 뭇 나라에서 나의 성산 예루살렘으로 말과 수레와 교자와 노새와 낙타에 태워다가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 것이요 21나는 그 가운데에서 택하여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18-21)

 

사람은 속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행위와 사상을 모두 꿰뚫어 보고 계십니다(18).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은 공평하고 의롭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패역한 이스라엘 대신 이방 민족을 모으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겠다고 선언하십니다.

 

(1) 여호와의 영광을 보는 민족들(18)

 

여호와께서 당신 영광을 보게 하시려고 민족들을 불러 모으십니다(18). 15-16절에서 “불과 칼로 모든 혈육에게 심판”을 베푸시는데, 여기서는 민족들을 모으십니다.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를 모으시는”(56:8)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모으시고, 그분의 모으심(오심)에 호응해서 민족들이 그분의 영광을 보기 위해 옵니다. 민족들이 보게 될 여호와의 영광에 관한 구체적 내용은 달리 언급되지 않습니다.

 

(2) 파송 받는 살아남은 자들(19)

 

이방 선교사로 파송을 받는 “그들 가운데에서 도피한 자”는 15-16절의 심판에서 살아남은 자들을 가리키기에, 민족들이 볼 그분의 영광은 심판과 구원을 함께 포함하는 그분의 우주적 통치권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든 혈육을 불과 칼로 치는 심판을 경험한 민족들 가운데 일부가 여호와의 왕권을 인정하고 그분께로 돌아옵니다. 민족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여호와께서 민족들의 왕으로 보좌에 오르는 종말론적 사건을 보고(참조, 24:23; 25:6-8) 그분의 왕권(영광)을 선포하는 증인이 됩니다. 여호와께서 민족들 가운데 세우시는 “징조”(오트)는 선교사의 파송이 시작됐음을 알려주는 신호라기보다는 그분의 현존과 권능을 보여주는 놀라운 사건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민족들에게 당신의 영광(왕권)을 보여주기 위해 권능을 행하시고, 이들 가운데서 일부 살아남은 자들이 자신들이 경험한 여호와의 영광을 전하도록 땅 끝으로 파송받습니다(19). 여호와에 관해 들어본 적도 없고 그분의 영광을 본 적도 없는 자들이 선교의 대상이 됩니다. 이방 선교가 여호와의 주도로 개종한 이방인들에 의해 시작됩니다. 선교사들에 의해 많은 이방인이 여호와 종교로 개종하고, 선교사들과 개종한 자들이 여호와께 드릴 예물로 유배민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순례의 길을 나섭니다.

 

(3) 흩어진 자들의 귀향(20)

 

마치 이스라엘 사람들이 깨끗한 그릇에 예물(소제)을 담아 여호와의 집으로 가져오듯이, 이들은 모든 민족에게서 “너희 모든 형제”를 여호와께 드리는 예물(소제)로 말과 수레와 교자와 노새와 낙타에 태워 여호와의 거룩한 산 예루살렘으로 데려옵니다(20). 세상에 흩어진 유배민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데려오는 사건이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는 제의적 행위처럼 묘사됩니다. “깨끗한 그릇”에 담긴 예물에 비교함으로써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유배민이 제의적으로 온전한, 여호와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예물임을 보여줍니다. 부정한 이방 땅에서 부정한 이방인들 가운데 거주한 유배민이 여호와에 의해 깨끗한 자들로 인정을 받습니다.

 

(4) 제사장 직분의 개방(21)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일부를 제사장과 레위인으로 삼으십니다(21).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분이 집안이나 지파의 경계를 넘어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개방됩니다.

 

맺는 말(22-24)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찬송하는 일이 이루어집니다. 지구촌 방방곳곳에 하나님을 찬송하는 소리는 끓이지 않습니다.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고 있으며 많은 이방인이 하나님께 헌신하려고 돌아옵니다. 이미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했습니다.

 

22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23여호와가 말하노라 매월 초하루와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내 앞에 나아와 예배하리라 24그들이 나가서 내게 패역한 자들의 시체들을 볼 것이라 그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여 모든 혈육에게 가증함이 되리라(22-24)

 

하나님이 창조하신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매월 초하루와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할 것입니다(23). 그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새 하늘과 새 땅에 충만하게 나타날 것이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온전히 실현될 것입니다.

 

(1) 영원한 실존의 약속(22)

 

본 절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를 약속하는 65:17을 다시 받습니다. 새 창조의 목표가 65:17-25에서는 예루살렘과 하나님 백성의 구원과 축복인데, 여기서는 “모든 혈육”이 여호와 제의에 참여하는 것으로 화장됩니다. 여호와께서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그분 앞에 “항상 있는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을 것입니다(22). 멸망의 위험에 처했던 이스라엘에게 항구적 실존의 약속이 주어집니다. 다시는 멸절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지속적인 보호와 돌봄 속에 자손들이 번성하고 그 이름이 커질 것입니다. 현재 문맥에서 “너희 자손”은 육신의 자녀보다는 영적 후손을 가리킬 것입니다(참조, 53:10).

 

(2) 여호와께 예배하는 모든 혈육(23)

 

성전이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56:7)이 되는 것처럼 여호와께서 민족들의 예배 대상이 되십니다. “매월 초하루와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여호와께 나아와서 경배를 드립니다(23). 여호와께 나와 예배를 드린다는 점에서 이스라엘과 민족들의 구별이 사라집니다. 정기적이고 지속적인 예배는 민족들이 여호와를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인정했음을 전제합니다.

 

(3) 악인의 영원한 멸망(24)

 

여호와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시고 민족들이 그분께 나아와 경배 드리지만, 여전히 그분의 구원 밖에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패역한 자들에게는 평화와 구원이 없습니다. 이들의 시체는 죽지 않는 벌레의 먹이가 되고, 심판의 꺼지지 않는 불에 넘겨집니다(24). 이들의 심판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죽음 이후에도 형벌은 계속됩니다. 이들의 시체는 새로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가증함의 대상이 됩니다. 23절과 24절을 함께 읽으면,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는 “모든 혈육”이 성 밖에 널린 시체를 봅니다.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의 전통적 구분이 ‘예루살렘 성에서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는 자들’과 ‘예배를 거절하고 성 밖에 남은 자들’로 대체됩니다. ‘여호와께 예배를 드림’이 하나님 백성의 판단기준이 된다. 성전(하나님 백성의 종교적 특권)과 예루살렘(하나님 백성의 시민권)이 여호와와 연합하여 초하루와 안식일을 지키는 모든 혈육에게 돌려집니다(56:3-7).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새 하늘과 새 땅, 즉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실현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열방 가운데서 당신의 백성을 택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택함 받아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며 항상 하나님께 기쁘게 예배드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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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66-01)


시온을 통해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

이사야 66장 1-14절


 

예루살렘에 있는 중요한 건물은 솔로몬의 궁전과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궁전의 용도는 왕의 거주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성전의 용도는 예배와 제사입니다. 성전은 그 이상으로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 본 장은 이사야를 대단원을 마감하는 결론부입니다. 예루살렘 신앙공동체가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와 ‘오직 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며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는 자들’로 분열됩니다. 혼합주의에 물든 자들에 의해 여호와의 통치를 고대하며 종말론적 기쁨 가운데 사는 자들이 쫓겨납니다. 여호와께서 시민권과 종교적 권리를 박탈당하고 생존의 위협에 노출된 당신 종들을 돌보실 것입니다.

 

참된 예배자(를 옹호하시는 여호와(1-6)

우리는 하나님을 측량할 수 없습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요, 땅은 하나님의 발판입니다. 세상은 하나님께서 거하실 만한 장소가 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안식할 집을 지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온 세상도 하나님께서 계시기에는 너무도 좁을 텐데 세상의 한 귀퉁이에 너무도 작은 하나님의 집을 만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1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2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3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이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하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이 하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행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4나 또한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듣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며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라 하시니라 5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들아 그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르시되 너희 형제가 너희를 미워하며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쫓아내며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영광을 나타내사 너희 기쁨을 우리에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라 하였으나 그들은 수치를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6떠드는 소리가 성읍에서부터 들려 오며 목소리가 성전에서부터 들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원수에게 보응하시는 목소리로다(1-6)

 

하나님께서는 하늘이 당신의 보좌이고 땅이 발판이라고 선포하십니다. 성전 건물이 하나님의 집이 될 수 없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착각했던 자들을 염두에 둔 선언으로 볼 수 있습니다.

 

(1) 하늘과 땅을 보좌와 발판으로 삼으신 분(1-2a)

 

여호와의 절대성과 초월성이 공간적 관점에서 언급됩니다. 여호와께서 하늘과 땅을 당신 보좌와 발판으로 지으셨는데, 그분을 위해 사람이 어디에 그분의 집(성전)을, 그분의 안식처(쉴 곳)를 지어드릴 수 있겠습니까(1)? 하늘과 땅을 지으신 그분은 사람들이 지어준 집에 거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참조․ 왕상 8:27). 이는 성전과 하나님 사이의 상대적 관계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성전에서 독립적이신 반면에 성전은 의존적입니다. 성전이 그분의 의지를 대변하지 못할 때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6; 참조. 겔 9:1-7).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는 여호와의 우주적-보편적 왕권을, 그분의 전지(全知)하심과 전능(全能)하심을, 그분의 의로우심을 담고 있는 표현이며, 현재 문맥에서는 성전 밖에서도 그분의 왕권을 경험하고 그분께 예배드릴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한]”(신 12:11) 예루살렘 성전이 그분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아닙니다.

 

(2) 말씀에 떠는 자들을 돌보시는 분(2b)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고, 하늘 보좌에 앉아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를 바라보시는 분이기에(2), 성전을 통하지 않고도 그분과 교제하는 것은 언제나 가능합니다. 그분은 사람들에게 ‘쉴 곳’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라, 쉼이 필요한 자들을 돌보시는 분입니다. ‘가난한 자’는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하나님께 도움과 소망을 찾는 자를, ‘심령에 통회하는 자’(문자적으로는 ‘영이 부서진 자’)는 갑작스럽게 경제적-영적으로 빈곤에 떨어진 자를, “내 말을 듣고 떠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그분 말씀을 범하지 않으려 애쓰는 자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3) 우상숭배자들의 고발(3-4)

 

어려움에 처해 자들이 하나님께로 피한 자들의 보호를 약속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우상숭배를 고발하십니다(3).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의 환난이 우상숭배자들의 핍박으로 인한 것임을 시사해줍니다. 고발의 대상이 제의를 집전하는 자들인지, 제사를 드리는 자들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여호와를 찾는 자들이 “가증한 것”도 기뻐한다는 점입니다.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면서 동시에 우상에게도 제사를 드립니다. 소와 양을 제물로 드리는 자가 사람을 제물로 죽이고 개의 목을 꺾습니다. 제단에서 소제를 사르는 자가 돼지의 피를 전제로 드리고, 여호와의 마음에 들도록 향을 사르는 자가 우상을 축복합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가르침보다 자기가 선택한 ‘자기의 길’이 우선적이었습니다. 우상숭배자들이 임의로 자기의 길을 선택한 것처럼 여호와께서도 징계를 선택하십니다. 그분은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으로 보응하십니다. 우상숭배를 통해 피하려 했던 것을 여호와께서 이들에게 들이닥치게 하실 것입니다. 우상숭배자들이 두려워하는 것들이 우상을 숭배한 대가로 임하게 됩니다. 징계를 결정하시기 전에 여호와께서는 이들을 부르셨지만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습니다(50:2; 65:12). 이들은 그분 목전에서 악한 짓을 하며 그분이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귀를 막고 우상숭배의 길을 고집하기에 재앙 외에 다른 선택이 없어집니다.

 

(4) 형제를 쫓아낸 자들의 심판(5-6)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들”, 곧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2)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인해 그들의 형제들에 의해 공동체에서 쫓겨납니다(5). 미워하고 쫓아내는 자들을 지칭하는 “너희 형제”와 축출 근거로 제시된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는 다툼과 분열이 예루살렘 신앙공동체 안에서 같은 유대인들 사이에 발생했음을 전제합니다(참조. 65:13-14). 내쫓는 자도 내쫓김을 당하는 자도 모두 여호와께 속한 예루살렘 주민들입니다. 내쫓는 자들의 조롱하는 말(“여호와께서는…원하노라”)은 신학적 노선의 차이가 분열의 원인이었음을 시사해줍니다. 공동체에서 쫓겨나는 자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그분의 종말론적 통치를 고대하던 자들이었다면, 쫓아내는 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질서를 따르는 자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은 혼합주의에 물든 자들(3)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 공동체의 종교와 행정을 책임진 자들의 눈에 종말론적 열정과 기쁨은 여호와 종교의 전통에 어긋나 보였던 것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당신 말씀에 떠는 자들을 위해 개입하십니다. 쫓겨난 자들이 아니라 쫓아낸 자들이 수치를 당합니다. 예루살렘 성과 성전에서 여호와께서 복수하시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립니다(6). 성읍과 성전이 심판의 대상으로 언급됩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떠는 자들’이 성전과 예루살렘에서 쫓겨났음을, 이들의 종교적 권리와 시민권이 박탈됐음을 전제합니다. “목소리가 성전에서부터 들리니”는 그분의 원수가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무리(제의 종사자들)임을 시사해줍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들”을 쫓아낸 자들, 시온 공동체의 주류에 속하는 집단이 여호와의 원수가 됩니다(참조. 59:18;63:10).

 

시온의 구원(7-14)

하나님께서는 중국에는 악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은 시온을 통해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를 풍족히 누리며 기뻐할 것입니다. 그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받은 새 예루살렘 백성입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7시온은 진통을 하기 전에 해산하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아를 낳았으니 8이러한 일을 들은 자가 누구이며 이러한 일을 본 자가 누구이냐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한 순간에 태어나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진통하는 즉시 그 아들을 순산하였도다 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아이를 갖도록 하였은즉 해산하게 하지 아니하겠느냐 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해산하게 하는 이인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 하시니라 10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라 다 그 성읍과 함께 즐거워하라 그 성을 위하여 슬퍼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의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성과 함께 기뻐하라 11너희가 젖을 빠는 것 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 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라 12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 같이, 그에게 뭇 나라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 같이 주리니 너희가 그 성읍의 젖을 빨 것이며 너희가 옆에 안기며 그 무릎에서 놀 것이라 13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14너희가 이를 보고 마음이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여호와의 손은 그의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의 원수에게 더하리라(7-14)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은 시온을 통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온에 평강과 영광이 넘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 백성은 시온을 통해 위로, 만족, 기쁨, 즐거움, 평강, 영광을 풍성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관계는 마치 아이가 어머니의 젖으로 필요한 모든 것을 채우는 것에 비유됩니다.

 

(1) 시온이 자녀 출산(7-9)

 

진통과 산고의 과정도 없이 아이가 태어납니다(7). 아이의 출생이 하나님의 개입에 의한 특별한 출생임을 시사해줍니다. 나라와 민족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형성되지만, 여호와께서 단 하루 만에 단번에 이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8). 그분의 간섭과 축복으로 시온은 왕성한 생명력을 회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궁을 열고 태어나게 하시는 분이기에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9). 그분께서 시온의 자궁을 다시 닫지 않으시기에 후손이 많이 태어나 주민이 넘치게 됩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다시 큰 기쁨이 주어집니다.

 

(2) 슬퍼하는 자들의 기쁨(10-11)

 

폐허가 된 시온을 바라보며 슬퍼하던 자들이 넘치는 주민들로 활기를 되찾은 시온을 보며 기뻐하게 됩니다(10). 아이들이 어머니의 품 안에서 풍족하게 젖을 먹으며 평안함을 즐기듯이 예루살렘 주민들도 다시 풍요를 즐기며 안전하게 살게 됩니다(11).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 예루살렘을 통해 주민들이 위로를 받습니다. 풍족함을 상징하는 “그 영광의 풍성함”(‘그 영광의 가슴’)은 예루살렘이 민족들로부터 영광을 받게 될 것을 시사합니다. 위로받지 못하던 예루살렘이 위로의 샘이 되고, 땅바닥에 떨어져 멸시를 받던 예루살렘이 높여져 영화롭게 됩니다.

 

(3) 위로 받는 시온(12-14a)

 

예루살렘에 평강과 풍요의 약속이 주어집니다(12). 항상 물이 흐르는 강처럼 평강이 예루살렘에 함께하고, 민족들의 많은 부가 예루살렘으로 흘러 들어와 넘칩니다. 아이가 어미 품에서 젖을 빨듯이 주민들이 예루살렘의 넘쳐흐르는 부를 풍족하게 즐깁니다. 어머니가 슬픔에 잠긴 제 자식을 위로하듯이 하나님께서 당신 종들을 위로하십니다(13). 자식에게 무한 책임을 지는 어머니처럼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주민에게 무한한 연민을 느끼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머니의 마음으로 위로하시기에 위로받는 자의 마음은 즐거움으로 가득 차고, 비 온 후에 어린 풀이 싱그럽게 돋아나는 것처럼 강건하게 자랍니다(14).

 

(4) 여호와의 종들과 원수들의 대조적 운명(14b)

 

모든 사람이 위로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종들”에게는 여호와의 손이 알려지고, “그의 원수에게는 그분의 진노가 알려집니다. ‘그의 종들’은 그분과의 개인적 관계 속에서 그분의 의지를 따르는 경건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에게는 그분의 구원 능력이 드러납니다. 그분 손에서 진노의 잔을 받았던 시온(51:17)이 이제는 그분 손에서 위로와 구원의 기쁨을 맛봅니다. 진노에 떨어지는 ‘그의 원수’의 신분은 얼마간 모호합니다. 앞 문맥(5-6)에 따르면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들”(여호와의 종들)을 예루살렘 공동체에서 쫓아낸 그들의 형제들이 되고, 뒤 문맥(15-16)에 따르면 “모든 혈육”(민족들)이 됩니다. 후자의 경우 ‘그의 종들’은 9-14a절의 청자 ‘너희’(예루살렘 주민들)를 받습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에 속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이렇게 세상과 다르게 살아가는 것이 힘들어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 반드시 자기 백성들을 부르시고 위로하시며 기쁨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으로 오늘도 예수님의 제자로서 당당히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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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65-01)


택함을 받은 여호와의 종

이사야 65장 1-16절


우리는 종종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복을 받고, 이방인들은 저주를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맞기도 하지만 틀린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복을 받을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면 하나님의 복도 사라집니다. 이것은 이방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이방인들도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의 복이 임합니다.

 

  •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찾지도 않는 자들을 만나줄 준비가 돼 있으셨지만 이들은 그분을 찾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들이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했지만, 아들은 끝까지 제 길로 갔다. 이스라엘의 안중에 하나님의 기다림은 없었다. 이스라엘의 배반은 노골적이고 인내의 한계를 훨씬 지나쳤기에 하나님께서 기다림을 접고 이들을 징벌하기 위해 책동에 나서신다.

 

여호와를 찾지 않고 제 길을 가는 우상숭배자들(1-7)

하나님께서는 항상 다가오기만 하면 만날 준비가 되어 계십니다. 심지어 부르기만 하면 대답하려고 가까이 계십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팔 벌려 기다리시는 하나님 품에 안기기보다는 우상을 숭배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가까이할 수 없는 거룩한 존재라고 착각합니다. 이 모든 악행을 낱낱이 기록하여 다 알고 계시니 그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분노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1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2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3곧 동산에서 제사하며 벽돌 위에서 분향하여 내 앞에서 항상 내 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 4그들이 무덤 사이에 앉으며 은밀한 처소에서 밤을 지내며 돼지 고기를 먹으며 가증한 것들의 국을 그릇에 담으면서 5사람에게 이르기를 너는 네 자리에 서 있고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라 하나니 이런 자들은 내 코의 연기요 종일 타는 불이로다 6보라 이것이 내 앞에 기록되었으니 내가 잠잠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보응하되 그들의 품에 보응하리라 7너희의 죄악과 너희 조상들의 죄악은 한 가지니 그들이 산 위에서 분향하며 작은 산 위에서 나를 능욕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먼저 그들의 행위를 헤아리고 그들의 품에 보응하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1-7)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버리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묻지 않는 그들에게 언제든지 대답하려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그들을 언제든지 만나려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부르지 않는 그들에게 계속해서 외치고 게십니다.

 

(1) 여호와를 찾지 않는 자들(1-2a)

 

처음 두 절은 이스라엘을 향한 여호와의 실망감과 간절한 마음을 점층적으로 묘사하면서 고발합니다. 여호와께서 1절에서는 소극적으로 이스라엘이 당신 찾기를 기다리셨고, 1b절에서는 적극적으로 언어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당신을 알리셨고, 2a절에서는 행동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당신의 뜨거운 관심을 보여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묻지도 찾지도 부르지도 않았고 그분께로 돌아가지도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주께서 아직도 가만히 계시려 하시나이까”(64:12; 63:15) 하고 탄식하지만, 이는 이스라엘의 생각에 불과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잠잠했던 것이지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셨던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이스라엘이 묻기만 하면 응답하실 준비가 돼 있으셨고, 찾기만 하면 만나주실 준비가 돼 있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하며 적극적으로 다가가시며 이스라엘에게 당신을 알리셨습니다. 기다려도 당신을 찾지 않는 이스라엘에게 당신이 발견될 수 있도록, 당신의 가까이 계심을 깨달을 수 있도록 소리쳐 알려주셨습니다. 죽어가는 자가 살려달라고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구원자가 도움을 완강히 거절하고 멸망의 길로 가는 자를 살려주기 위해 온갖 애를 씁니다. 이스라엘의 무지와 절망적 형편이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향해 손을 펴고 간구해야 하는데, 역으로 하나님께서 팔을 벌리셨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패역한 백성”은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자들이었습니다.

 

(2) 자기 생각과 길을 따르는 자(2b-5a)

 

이스라엘이 선택한 자기의 길은 우상숭배였습니다(3-5a 참조. 66:3,17; 57:5-10). 온갖 종류의 우상을 숭배하면서 대놓고 여호와를 화나게 했습니다. “동산에서 제사하며”는 사철 푸른 큰 나무 아래서 드려진 풍요제의와 관련된 제사를 가리킬 것입니다(참조, 1:29; 66:17). “벽돌 위에서 분향하여”는 벽돌로 된 평편한 지붕에서 향을 피우는 일월성신 숭배(참조, 렘 19:13; 습 1:5)나 벽돌로 만든 제단에서의 분향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무덤 사이에 앉으며”는 이스라엘에서 엄격하게 금지된 강령술(레 19:31; 신 18:11; 사 8:19)과 관련한 언급입니다. 우상숭배자들은 점을 치기 위해 무덤을 찾아가서 죽은 자들의 영을 불러냈습니다. “은밀한 처소에서 밤을 지내며”도 초자연적 존재와 접촉하려는 제의적 행위에 속합니다. 이들은 계시를 받기 위해 신성한 장소에서 밤을 지새우며 그 지역의 수호신이나 조상신과 교통을 시도했습니다. “돼지고기를 먹으며”는 제사 음식과 관련된 언급입니다. 이스라엘에서 돼지고기는 부정하기에 식용이 금지된다(레 11:7; 신 14:8). “가증한 것들의 국”은 식용이 금지된 부정한 고기를 돼지의 피에 섞어 끓인 죽과 같은 것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가증한 것”의 ‘피굴’은 원래 정해진 기간 안에 먹지 않아 부정해진 희생제물의 고기(레 7:18; 19:7) 또는 부정한 동물의 고기를(겔 4:14) 가리킵니다.

 

(3) 보응하시는 여호와(5b-7)

 

어이없게도 이교적 제의에 빠진 자들은 우상을 섬김으로써 자신들이 거룩해졌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네 자리에 서 있고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교적 제의를 집전하는 자가 추종자들에게 하는 말처럼 보이는데, 자신들이 거룩함에 있어서 우월하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냥 스쳐 지나가는 악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숭배로 당신을 노엽게 하는 패역한 백성에게 보응하십니다. 5절의 “이런 자들은 내 코의 연기요 종일 타는 불”은 이들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임을 보여줍니다. 6절의 “이것이 내 앞에 기록되었으니”는 죄인의 악행을 빠짐없이 기록해놓은 하늘의 책(출 32:32; 시 69:28; 사 4:3; 말 3:16)을 배경으로 하는 언급입니다. 우상숭배자들의 악행이 기록됐으니 이들의 운명은 정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침묵을 깨고 개입하실 것입니다. 이 침묵은 기다림의 기간이었지만, 이스라엘은 그분을 찾지도 그분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습니다(참조. 57:11). 이스라엘을 기다리는 것은 이제 그분의 보응(대갚음)뿐입니다. 우상숭배의 죄악에 있어 “너희”와 “너희 조상들”은 한통속이었습니다. 조상들이 산 위에서 분향하며 여호와를 모욕했던 것처럼 ‘너희’도 우상을 숭배하며 여호와를 화나게 했습니다(7). ‘너희’는 구원 약속이 주어진 ‘여호와의 종들’(8-10)과 구별되는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자들입니다. 하나님 백성이라고 모두 시온의 미래적 구원에 참여하는 것은 아닙니다. 멸망의 심판을 경험했음에도 여전히 조상들처럼 우상숭배에 빠진 패역한 자들에게는 구원이 주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위를 헤아려서 되갚아주실 것입니다.

 

여호와의 종들과 우상숭배자들의 대조적 운명(8-16)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드리는 일은 놀라운 일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 숨어 계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도 자신을 드러내시고 그들의 경배와 찬양을 받으십니다. 이방인들을 배척했던 유다 사람들은 밀려나고 오히려 이방인들이 유다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는 기이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구원을 향해 뛰어들었고, 천국을 침노하게 되었습니다.

 

8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포도송이에는 즙이 있으므로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것을 상하지 말라 거기 복이 있느니라 하나니 나도 내 종들을 위하여 그와 같이 행하여 다 멸하지 아니하고 9내가 야곱에게서 씨를 내며 유다에게서 나의 산들을 기업으로 얻을 자를 내리니 내가 택한 자가 이를 기업으로 얻을 것이요 나의 종들이 거기에 살 것이라 10사론은 양 떼의 우리가 되겠고 아골 골짜기는 소 떼가 눕는 곳이 되어 나를 찾은 내 백성의 소유가 되려니와 11오직 나 여호와를 버리며 나의 성산을 잊고 갓에게 상을 베풀며 므니에게 섞은 술을 가득히 붓는 너희여 12내가 너희를 칼에 붙일 것인즉 다 구푸리고 죽임을 당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하며 내가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고 나의 눈에 악을 행하였으며 내가 즐겨하지 아니하는 일을 택하였음이니라 13이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나의 종들은 먹을 것이로되 너희는 주릴 것이니라 보라 나의 종들은 마실 것이로되 너희는 갈할 것이니라 보라 나의 종들은 기뻐할 것이로되 너희는 수치를 당할 것이니라 14보라 나의 종들은 마음이 즐거우므로 노래할 것이로되 너희는 마음이 슬프므로 울며 심령이 상하므로 통곡할 것이며 15또 너희가 남겨 놓은 이름은 내가 택한 자의 저줏거리가 될 것이니라 주 여호와 내가 너를 죽이고 내 종들은 다른 이름으로 부르리라 16이러므로 땅에서 자기를 위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 이는 이전 환난이 잊어졌고 내 눈 앞에 숨겨졌음이라(8-16)

 

패역한 이스라엘은 끝내 심판을 자초했습니다. 조상들과 똑같이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능욕했으니, 조상들처럼 심판당할 것입니다. 반복된 심판의 선언은 심판이 불가피함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지만, 죄악에 반드시 보응하신 분이십니다.

 

(1) 가나안을 상속하는 여호와의 종들(8-10)

 

모든 사람이 우상숭배에 빠진 것은 아니다. 여호와께 신실한 자들도 있었습니다(8). “포도송이에는 즙이 있으므로”는 신실한 자들의 남겨둠과 관련한 비유입니다. 포도원 농부가 즙을 가득 품은 포도송이를 귀하게 다루듯이 하나님께서도 당신 종들에게 그렇게 하십니다. 포도원 농부가 나쁜 송이가 있다고 포도나무를 잘라버리지 않듯이, 우상숭배자들이 있다고 이스라엘 전체가 멸망 당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종들을 위하여” 남겨두십니다. 족장들에게 주신 후손과 땅의 약속이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들에 의해 계승됩니다(9). 여호와께서 야곱에게서 나오게 할 씨가 그분의 종들이 되어 그분의 산들을 기업으로 얻어 살게 됩니다. 하나님 백성의 적통과 가나안의 상속권이 야곱과 유다에서 여호와의 종들에게로 옮겨집니다. 야곱과 유다의 후손 가운데서 여호와께 신실한 자들만 그분 백성으로서 산들을 상속합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여호와의 종들이 양 떼와 소 떼를 이끌고 사론 평야와 아골 골짜기에까지 가서 꼴을 먹입니다(10). 여호와의 종들에게 평화와 축복의 시대가 약속됩니다. “나를 찾은(찾는) 내 백성”은 2절의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과 대조되며, 여호와를 찾는 자만이 그분의 백성에 속함을 시사합니다.

 

(2) 멸망에 넘겨지는 우상숭배자들(11-12)

 

11-12절은 다시 우상숭배자들에게 심판을 선포합니다. 이들은 여호와와 그분의 성산을 버리고 갓에게 상을 차려 올리고 므니를 위해 혼합주로 잔을 가득 채운다. "갓은 행복을 의인화한 행운의 신으로 시리아와 페니키아에서 섬겼고, “므니”는 운명을 의인화한 신으로 아라비아의 여신 마낫(Manat)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섞은 술”은 새로운 맛을 더하기 위해 향료를 섞은 술을 의미합니다. 여호와께서 좋아하지 않는 것만 택해 그분의 눈에 거슬리는 짓을 하는 자들은 모두 칼에 맞아 살육당할 것입니다. 여호와께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한 사람은 구원을 받지만(45:23), 여호와를 버린 자들은 살육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불러도 대답하지 않고 말하여도 듣지 않은 자들에게 멸망의 심판은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3) 여호와의 종들과 우상숭배자들의 대비(13-15)

 

13-15절은 여호와의 종들(9-10절)과 여호와를 버린 자들(11-12절)의 운명을 대조적으로 기술합니다. 여호와의 종들은 배불리 먹고 마시며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고, 그분을 배반한 자들은 굶주림과 목마름과 수치와 슬픔을 당하게 됩니다. 여호와를 찾은 자들은 영적으로나 물질적으로 풍족한 삶을 누리고, 그분을 버린 자들은 영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궁핍하게 살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택한 자들은 “다른 이름”, 곧 복 받은 자로 불리고, 여호와께서 좋아하지 않는 것만 선택한 자들은 “저줏거리”가 된 이름, 곧 누군가를 저주할 때 예로 사용하는 이름으로 남겨집니다(참조. 렘 29:22).

 

(4) 여호와의 종들에게 주는 권면(16)

 

새 이름의 종들은 “진리의 하나님”께 복을 빌고 그분 이름으로 맹세합니다(16). 하나님을 수식하는 ‘진리의’는 그분의 신실하심, 곧 그분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모두 성실하게 실행하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이제 환난의 시대가 끝나고 구원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민족 안에 속해 있다고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무조건 특별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 복을 받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선민이었지만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이제 오히려 하나님을 몰랐던 이방인들은 복음을 듣고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유다 사람들과 이방인들의 처지가 뒤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은 혈통을 따라 구원하시고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며 섬길 때 구원과 복을주십니다. 지금 내 모습에 교만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오직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따라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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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64-01)


풍성한 은총을 주시는 하나님

이사야 63장 15절- 64장 12절


 

이스라엘에게 임한 어두움은 하나님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고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죄가 그들을 원수들의 손에 빠지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택하신 백성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은혜로 그들을 기억하사 구언해 주셨습니다.

 

  • 7-14절에서 이스라엘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푸신 하나님의 구속사를 돌아본 공동체는 하나님을 자신들의 아버지와 구속자로 고백하며 도움을 간구합니다. ‘우리의 아버지’와 ‘우리의 구속자’는 가족의 안녕을 지켜주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언약관계뿐만 아니라 사적-혈연적 관계로 맺어진 사이이기에 자격 없음에도 구해 달라고 매달릴 수 있습니다.

 

간곡한 자비와 사랑이 내게 그쳤나이다(15-19)

신앙은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어미 새가 배고픈 새끼에게 먹이를 물어 주듯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구하는 자에게 능력을 베푸십니다. 믿고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신앙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15주여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주께서 베푸시던 간곡한 자비와 사랑이 내게 그쳤나이다 16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옛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 17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원하건대 주의 종들 곧 주의 기업인 지파들을 위하사 돌아오시옵소서 18주의 거룩한 백성이 땅을 차지한 지 오래지 아니하여서 우리의 원수가 주의 성소를 유린하였사오니 19우리는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으며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지 못하는 자 같이 되었나이다(15-19)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죄를 여호와께 돌립니다.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냐고 묻습니다. 바로처럼 완고한 마음을 주셔서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주님 때문에 성소에 우상이 가득하고, 주님 때문에 제사장들이 타락했고, 주님 때문에 백성이 하나님을 멀리합니다.

 

(1) 탄식과 신뢰의 고백(15-16)

 

여호와께서 사랑과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큰 은총을 돌아본 예언자는 이제 시선을 하늘로 돌립니다. 공동체를 대표해서 하늘의 하나님께서 굽어살피시고 개입해주시길 간청합니다(15; 시 80:14).

과거의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과 “간곡한 자비와 사랑”이 다시 나타나길 호소합니다. 하늘은 여호와의 처소로 이중적 의미를 갖습니다. 한편으로는 거리감 곧 그분의 물러나심을, 다른 한편으로는 그분의 전능하심과 전지하심을 함축합니다. 전자의 입장에 따라 예언자는 64:1-3에서 여호와의 강림을 간구하고, 후자의 입장에 따라 이스라엘의 절망적 현실(17-19)을 호소합니다.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는 64:11의 불에 타버린 “우리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과 대비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여호와의 왕권에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하늘에서 모든 것을 굽어보시는 분은 “우리의 아버지”시고, 그분의 이름은 옛날부터 “우리의 구속자”이십니다(16).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는 구약성경에 드물게 사용되며(신 32:6),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내밀한 관계를 담은 표현입니다. 신학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양자로 삼으셨기에(참조. 출 4:22; 1:2;64:8; 렘 3:19; 호 11:1) 이스라엘은 그분을 ‘우리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아니할지라도”의 의미는 불분명합니다.

아마도 공동체의 절망적 현실을 강조하기 위해, 곧 여호와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간절히 호소하기 위해 족장들을 언급한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족장 야곱을 가리킵니다. ‘아버지’처럼 ‘구속자’도 친족 관계에 뿌리를 둔 개념으로 하나님(아버지)께 범죄한 이스라엘(자녀들)이 그분께 매달릴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줍니다.

 

(2) 관계 회복의 호소(17)

 

이어서 예언자의 시선이 하늘의 하나님에게서 공동체로 이동합니다(17).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하는 말이 아닙니다. 히브리적 사고에 따르면 땅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결정에 속합니다. 죄와 악도 그분의 능력과 통제 안에 있으며 그분의 의지에 따라 허락되거나 저지됩니다.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책임 사이에 내재하는 긴장 관계를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6:9-10). 하나님께서 죄를 허락하셨기에 용서의 은총 또한 그분께 구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는 죄의 허락에 당혹감을 느끼면서도 그분께 대한 신뢰심을 잃지 않고 “주의 종들”을 생각하시어 돌아와 달라고 호소합니다. 하나님께서 돌아오실 때만 공동체의 죄와 죄 짐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주의 기업인 지파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소유에 속함을 보여줍니다.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을 움직이기 위해 예언자는 공동체가 처한 참담한 상황을 그분께 알립니다.

 

(3) 원수들에 짓밟힌 성소(18-19)

 

여호와의 성소는 주전 587년 바벨론 점령군에 의해 유린당한 이후 폐허로 남겨지고(18), 그분의 백성은 민족들의 지배를 받습니다(19). 예언자는 여호와의 종들이 민족들의 종들이 됐는데도 관심을 보이지 않으신다고 탄식합니다.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64:1-5a)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한 것은 죄를 짓는 일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공로는 한낱 누더기처럼 더러울 뿐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구속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구원의 은혜를 누립니다.

 

1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2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3곧 동산에서 제사하며 벽돌 위에서 분향하여 내 앞에서 항상 내 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 4그들이 무덤 사이에 앉으며 은밀한 처소에서 밤을 지내며 돼지 고기를 먹으며 가증한 것들의 국을 그릇에 담으면서 5사람에게 이르기를 너는 네 자리에 서 있고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 (1-5a)

 

이사야는 계속하여 하나님께 간청합니다. 이스라엘을 내버려 두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회개하도록 이끌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밖에 해결할 이가 없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민족들을 떨게 할 주의 강림(64:1-2)

 

하나님만이 공동체의 운명을 극적으로 전환할 수 있기에 “우리”는 격정적으로 그분의 개입을 호소합니다. 가려놓은 칸막이를 부수고 감추어졌던 모습을 드러내듯, 하나님께서 하늘을 찢고 내려와주시길 간구합니다(la). ‘산들의 진동’과 ‘불’은 하나님께서 강림하실 때 나타나는 자연의 격변 현상입니다(1b-2a). 예언자는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고 “이방 나라들로 주 앞에서 떨게” 하시길 간구합니다(2b). 이스라엘의 멸망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민족들 가운데 더러워졌기에 이스라엘의 구원은 그분의 능력을 과시하고 인정받는 사건이 됩니다. 하나님의 현현은 그분의 성소를 유린한 민족들에게는 파멸적 재앙이기에 무서워 떨게 됩니다.

 

(2) 놀라운 일을 행하신 분(3-4)

 

‘우리’는 다시 과거를 회상합니다. 이스라엘은 예상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강림을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3).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에는 공동체의 기대감과 신뢰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전에는 예기치 못한 때에 개입하셔서 구원해주셨는데, 지금도 생각하지 못한 때에 당신 백성의 역사에 개입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강림이기에 “두려운 일” 보다는 ‘놀라운 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우리’는 과거 경험으로부터 신학적-고백적 결론을 이끌어냅니다(4-5a). 여호와처럼 당신 백성을 위해 산들을 뒤흔들며 역사에 개입했던 신은 없습니다. 여호와만이 당신을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분은 지금도 당신의 구원을 고대하는 자들에게 응답하실 것입니다.

 

(3) 선대하시는 분(5a)

 

“기쁘게 공의를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에 근거해서 바르게 행동하는 자를,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길로 성실하게 걸어가며 그분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사는 자를 가리킵니다.

 

'아직도 가만히 계시려 하나이까'(64:5b-12)

인간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위기에 빠져 있어도 주의 이름을 부르지도, 주를 붙잡지도 못합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감히 하나님께 요청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정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로 인해 돌이키셨고 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셨습니다.

 

5…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라 하나니 이런 자들은 내 코의 연기요 종일 타는 불이로다 6보라 이것이 내 앞에 기록되었으니 내가 잠잠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보응하되 그들의 품에 보응하리라 7너희의 죄악과 너희 조상들의 죄악은 한 가지니 그들이 산 위에서 분향하며 작은 산 위에서 나를 능욕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먼저 그들의 행위를 헤아리고 그들의 품에 보응하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8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포도송이에는 즙이 있으므로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것을 상하지 말라 거기 복이 있느니라 하나니 나도 내 종들을 위하여 그와 같이 행하여 다 멸하지 아니하고 9내가 야곱에게서 씨를 내며 유다에게서 나의 산들을 기업으로 얻을 자를 내리니 내가 택한 자가 이를 기업으로 얻을 것이요 나의 종들이 거기에 살 것이라 10사론은 양 떼의 우리가 되겠고 아골 골짜기는 소 떼가 눕는 곳이 되어 나를 찾은 내 백성의 소유가 되려니와 11오직 나 여호와를 버리며 나의 성산을 잊고 갓에게 상을 베풀며 므니에게 섞은 술을 가득히 붓는 너희여 12내가 너희를 칼에 붙일 것인즉 다 구푸리고 죽임을 당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하며 내가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고 나의 눈에 악을 행하였으며 내가 즐겨하지 아니하는 일을 택하였음이니라(5b-12)

 

하나님의 강림을 간구하고 그분께 대한 신뢰를 고백한 후에 공동체는 죄를 고백합니다. 현재의 비참한 형편이 자신들의 범죄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결과임을 인정합니다.

 

(1) 죄의 고백과 탄식(5b-7)

 

5b절은 죄에 사로잡힌 공동체가 자신들의 무능력을 탄식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6-7절은 공동체의 절망적인 영적 상태를 기술합니다. “더러운 옷”은 월경 중에 있는 여자의 더러운 웃이며 완전한 멸망을 상징합니다.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는 죄에 사로잡힌 자들의 필연적 결말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진노로 침묵하시기에 그분의 이름을 부르고 경배하는 자도 없고, 그분을 붙잡으려고 애쓰는 자도 없습니다. 죄에 대한 징계로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시고 외면하셨기에 더욱 죄악의 늪에 빠집니다. 구원의 지체 또는 부재가 자신들의 죄 때문임을 깨달은 공동체는 이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께 나아갑니다.

 

(2) 용서와 간구(8-9)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기에 하나님께 매달릴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8). 그분은 당신 손으로 지은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토기장이와 진흙’의 비유는 이스라엘의 출생과 존재가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적임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손의 작품이기에 자신을 만드신 분께 관심을 가져주길 간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백성이기에 죄에 대한 의로운 분노를 풀고 용서해달라고 애원할 수 있습니다(9).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마시옵소서”는 심판의 정당성을 인정하면서 가엾이 여겨 용서해주시길 간청하는 말입니다. 공동체는 자신들의 절망적 형편을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3) 황폐해진 성읍과 성전(10-11)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유다의 모든 성읍이 황폐하여 광야가 됐습니다(10). “광야가 되었으며”의 반복적 사용은 폐허의 철저성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이 살던 성읍들이 폐허가 돼 짐승들의 차지가 됐습니다. 조상들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예배를 드리던 “우리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은 불에 타서 잔해만 흉물스럽게 남았습니다(11). “우리가 즐거워하던 곳”은 집과 밭과 포도원을 가리킨다. 공동체의 생존 공간인 예루살렘과 유다의 성읍들, 종교적 구심점인 여호와의 성전, 개인의 생존 기반에 속하는 집과 경작지가 모두 파괴돼 황무지가 됐습니다.

 

(4) 개입의 호소(12)

 

63:7에서 시작된 긴 탄식이 간절한 마음으로 개입을 촉구하는 질문으로 끝을 맺습니다(12). 성전을 비롯하여 모든 것이 폐허가 됐는데도 끝내 가만히 계시렵니까? 저희를 이토록 심히 괴롭게 하시렵니까?


이사야는 소망 없는 땅에서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을 찢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무너지고 파괴된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내려오시지 않으면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민족의 미래를 고독하게 바라보는 선지자 이사야의 눈물을 읽는 자가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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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63-01)


구원하시기 위해 전사로 오신 하나님

이사야 63장 1-14절


 

시온을 향한 새로운 사회 비전을 제시하는 63-66장은 심판으로 시작해서 심판으로 끝났습니다. 아는 새로운 비전은 악에 대한 정의로운 심판으로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심판을 통해 새로운 창조와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자이며 동시에 구원자가 되십니다.

 

  • 예루살렘의 구원 약속(62장) 다음에 에돔의 심판선언(63:1-6)이 나옵니다. 4절이 잘 보여주듯이 에돔의 멸망과 예루살렘의 회복이 하나의 사건으로 연결됩니다. 35장에서처럼 에돔은 사해 동남쪽에 위치한 특징 나라이자 이스라엘에 적대적인 민족들의 대표를 등장합니다. 에돔은 여호와의 심판을 피할 수 없지만, 민족들의 경우는 에돔의 멸망을 반면교사로 삼는다면 여호와의 진노에서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에돔의 심판(1-6)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특히 고난 중에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하신 때에 따라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바란다면 그 하나님의 때를 묵묵히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1에돔에서 오는 이는 누구며 붉은 옷을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이 누구냐 그의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이가 누구냐 그는 나이니 공의를 말하는 자요 구원하는 능력을 가진 이니라 2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틀을 밟는 자 같으냐 3만민 가운데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으로 말미암아 무리를 밟았고 분함으로 말미암아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튀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4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가 구속할 해가 왔으나 5내가 본즉 도와 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으므로 이상하게 여겨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 6내가 노함으로 말미암아 만민을 밟았으며 내가 분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취하게 하고 그들의 선혈이 땅에 쏟아지게 하였느니라(1-6)

 

하나님의 길을 누가 막으며 대적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대적들에게 복수하실 때 온 땅은 피로 물들 것입니다. 원수들은 술에 취한 듯 휘청거리며 혼돈에 빠질 것입니다. 택하신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은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1) 예언자의 질문(1a)

 

예언자가 망루에서 밖을 감시하는 파수꾼이 되어 붉은 옷을 입고 에돔에서 오는 이에게 질문하고, 여호와께서는 피로 얼룩진 옷을 입고 전장에서 돌아오는 용사가 되셔서 답변하십니다.

 

(2) 여호와의 답변(1b)

 

본문은 심판의 철저한 집행에 초점을 맞추고 에돔이 심판을 받는 이유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서쪽을 바라보고 있던 파수꾼 예언자는 붉게 물든 옷을 입고 에돔에서 오는 한 사람을 보고 그의 신분에 관해 묻습니다(1). 전쟁에서 돌아오는 장수처럼 그의 화려한 의복은 피로 물들어 있습니다. 오고 있는 방향은 에돔을 심판하고 돌아오는 길임을 시사합니다.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은 이 질문에 이중적으로 답변합니다. ‘나이니’는 누구와도 비교를 거절하는 절대 권력자의 자기과시입니다(출 3:14). “공의를 말하는 이요 구원하는 능력을 가진 이”는 여호와께서 자신을 우상들과 구별하는 자기선언입니다(참조. 45:19, 23-24). ‘진리’로 옮길 수도 있는 “공의”는 ‘미래의 예견’을 가리킵니다. 그분은 우상들과 달리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미래를 예견하시고 이를 이루시는 큰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구원하는 능력”은 에돔을 심판하는 목적이 이스라엘의 구원에 있음을 시사해줍니다. 에돔은 이스라엘과 형제지간이지만(창 25:30),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 당한 후에는 철천지원수가 됐습니다. 에돔의 수도 보스라는 사해 남단에서 북동쪽에, 페트라에서 북쪽으로 45km 떨어진, 해발 1,022m의 고지대에 위치했습니다.

 

(3) 예언자의 질문(2)

 

파수꾼-예언자의 두 번째 질문은 화려한 의복의 얼룩진 색에 대한 것입니다(2). 어찌하여 의복이 붉으며, 옷이 포도즙 틀을 밟은 사람 같은가하고 묻습니다.

 

(4) 여호와의 답변(3-6)

 

바위에 판 큰 틀 안에다 포도를 넣고 발로 밟아서 그 즙을 짤 때 포도즙이 튀어 옷이 젖듯이 피에 붉게 물들었습니다. 여호와의 답변도 포도즙틀을 비유로 사용합니다(3). 포도즙틀에서 짓밟히는 포도는 민족들을, 포도즙은 피를 상징합니다. 공의로우신 그분의 ‘노함과 분함’은 불의와 폭력에 대한 그분의 징벌적 응답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홀로 포도즙틀을 밟으셨습니다. 원수의 피로 당신 옷이 붉게 물들기까지 짓밟으셨습니다. 심판의 대상이 에돔을 넘어 모든 민족에게로 확대됩니다. 에돔의 심판이 민족들 심판의 서곡이 됩니다. 민족들이 에돔처럼 이스라엘에 악을 행하고 그 땅을 탐낸다면(참조. 겔 35:10) 그분의 노함과 분함을 피할 수 없습니다. 에돔(민족들)을 심판하는 날은 여호와께서 “원수 갚는 날”이요, 그분께서 “구속할 해”이기도 합니다(4). 그분의 정의에 따라 불의한 민족은 심판에 떨어지고, 백성은 구원과 해방의 기쁨을 경험합니다. 에돔(민족들)을 심판하고 당신 백성을 구해내는 것이 그분의 계획임을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내용상 3a절을 받는 5절은 59:16의 변형에 속합니다. 여호와의 심판 의지를 깨닫고 그분을 거들어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홀로 당신의 능력의 팔과 분노로 에돔(민족들)을 심판하셨습니다. “내 팔”은 애굽의 바로를 굴복시키고 당신 백성을 해방시키셨던 능력의 팔입니다. 6절은 3절을 거의 그대로 받습니다. 여호와께서 ‘노함과 분함’으로 민족들을 짓밟아 으깨셔서 포도즙이 흘러내리듯이 대적의 선혈이 땅에 쏟아졌습니다.

 

구속사의 회고(7-14)

아버지가 자녀를 들고 안아서 보호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아버지로서 이스라엘을 들어 안으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탈출시켰으며 광야에서 돌보셨습니다.

 

7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의 찬송을 말하며 그의 사랑을 따라, 그의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8그가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9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10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11백성이 옛적 모세의 때를 기억하여 이르되 백성과 양떼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시냐 그들 가운데에 성령을 두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시냐 12그의 영광의 팔이 모세의 오른손을 이끄시며 그의 이름을 영원하게 하려 하사 그들 앞에서 물을 갈라지게 하시고 13그들을 깊음으로 인도하시되 광야에 있는 말 같이 넘어지지 않게 하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시냐 14여호와의 영이 그들을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 같이 편히 쉬게 하셨도다 주께서 이와 같이 주의 백성을 인도하사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나이다 하였느니라(7-14)

 

64:12까지 이어지는 공동체의 탄식시의 일부에 해당한다. 7-14절에서 우리 공동체는 과거 조상들에게 베푸신 여호와의 구속행위를 회상하고, 63:15-64:12에서 자신들의 비참한 형편과 죄를 고백하고 죄의 용서와 여호와의 개입을 간구합니다. 구속사의 회상은 물론 역사 공부를 위함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거듭된 경고를 무시하고 완강히 귀를 막고 자기 길을 가다가 멸망에 떨어졌다면, 그분의 도움을 간구할 수 있는 길도 없어진 것입니까?

 

(1) 큰 은총을 말하리라(7)

 

구속사는 자격 없는 이스라엘이 여전히 그분의 자비와 사랑에 매달려 호소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언자는 공동체에게 역사를 되돌아보도록 초대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의 찬송”을, 사랑과 큰 자비에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회상해보도록 권면합니다(7). ‘자비’(헤세드)는 언약에 늘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을, ‘찬송’은 찬양받으실 그분의 업적을, ‘은총’은 행위 가운데 구체화되는 이스라엘을 향한 그분의 호의적 성품을 의미합니다. ‘사랑’(레헴)은 자궁에서 나온 단어이며 하나님의 사랑이 모성적 자기희생과 일방적 헌신에 근거함을 시사합니다.

 

(2) 이스라엘의 선택(8)

 

하나님께서 사랑과 자비로 베푸신 은총의 첫 번째 예로 이스라엘의 선택이 언급됩니다(8).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는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요’가 생략된 언약 양식(레 26:12;신 29:13)의 부분 인용이고, “거짓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녀”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신뢰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선택한 이스라엘의 성실함을 의심하지 않으셨습니다. 신실하신 그분께서는 언약의 상대인 이스라엘의 신실함을 믿으셨습니다. ‘자녀’(아들들)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택(양자결연)에 의해 법적으로 그분의 자녀가 됐음을 시사해 줍니다. ‘구원자’는 절망적인 처지에 놓인 자들에게 도움을 베풀어주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3)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9)

 

하나님께서는 당신 백성의 모든 고난에 함께하셨습니다(9). 백성의 환난은 그분의 환난입니다. 그분은 자녀들을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사랑과 자비로 구원하셨습니다. “자기 앞의 사자”는 ’그분 얼굴의 사자’로 눈에 보이는 여호와의 현현을 가리킵니다.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는 아버지의 애정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보조해주셨음을 보여줍니다(참조, 46:3-4; 호 11:3a). 하나님의 값없는 선택과 헌신은 그분만의 일방적 사랑이었습니다. 그분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처음부터 어긋났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에 이스라엘은 반역으로 응답했습니다.

 

(4) 이스라엘의 반역(10)

 

이스라엘은 그분의 거룩한 영을 배반하고 괴롭혔고, 이에 이스라엘의 구원자 하나님께서 대적이 되셔서 몸소 그들을 치셨습니다(10).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근거한 이스라엘의 선택과 돌봄이 이들의 맹목적 배반으로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았습니다. ‘성령’(10,11)은 역사에 개입해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5) 출애굽의 여호와(11-13)

 

여기서는 구속사의 출발이자 전형에 속하는 출애굽 사건, 특히 홍해의 이적이 미래 구원의 모델로 제시됩니다. 심판을 당하고 난 다음에야 이스라엘은 “옛적 모세의 때”를 기억하고 양 떼의 목자들과 함께 그들을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이’를 찾기 시작합니다(11). 환난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서 이전에 행하셨던 구원 사건을 기억하는 것은 그분의 도움을 간구하는 첫걸음이 될 수 있습니다. ‘기억하다’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순종하다’를 의미합니다. “양 떼의 목자들”은 모세와 아론 그리고 미리암을,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이”는 홍해를 가르고 마른 땅으로 만들어 이스라엘로 하여금 바다를 건널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을, “그들 가운데에 성령을 두신 이”는 이스라엘의 진영을 이끌고 회막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12절의 “그의 영광의 팔이 모세의 오른손을 이끄시며”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도와 당신 영광을 과시하셨음을 보여줍니다. 홍해를 가르고 이스라엘을 구출하신 사건은 여호와의 이름(명성)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공개적 사건이었습니다. 평평한 광야를 다니는 말처럼 이스라엘은 아무 어려움 없이 바다를 걸어서 건널 수 있었습니다(13).

 

(6) 가나안의 여호와(14)

 

홍해의 놀라운 도움은 가나안에서도 계속됐습니다. 여름에도 풀이 무성하게 자라는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 떼처럼 여호와의 영이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편히 쉬고 풍족하게 먹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14).


새로운 사회에 대한 비전이 심판으로 시작합니다. 죄와 악에 대한 분명하고 정의로운 심판은 새로운 사회가 공평과 정의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버지가 자녀를 가르치고 징계하듯 하나님께서는 언약 백성 이스라엘을 가르치시고 징계하셨습니다. 끝까지 책임져 구원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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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62-01)


침묵하셨던 하나님께서 구원하심

이사야 62장 1-12절


 

시온을 향한 새로운 사회 비전을 제시하는 63-66장은 심판으로 시작해서 심판으로 끝났습니다. 아는 새로운 비전은 악에 대한 정의로운 심판으로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심판을 통해 새로운 창조와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자이며 동시에 구원자가 되십니다.

 

  • 예루살렘의 구원 약속(62장) 다음에 에돔의 심판선언(63:1-6)이 나옵니다. 4절이 잘 보여주듯이 에돔의 멸망과 예루살렘의 회복이 하나의 사건으로 연결됩니다. 35장에서처럼 에돔은 사해 동남쪽에 위치한 특징 나라이자 이스라엘에 적대적인 민족들의 대표를 등장합니다. 에돔은 여호와의 심판을 피할 수 없지만, 민족들의 경우는 에돔의 멸망을 반면교사로 삼는다면 여호와의 진노에서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구원 약속: 여호와 손의 아름다운 관(1-5)

영적 침체는 개인과 가정, 교회와 신앙공동체 모두에게 찾아올수 있습니다. 그것은 죄의 직접적인 결과일 수도 있고, 오랜 세월 누적된 영적 권태감의 발로일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영적 침체에서 회복되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어떻게 영적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영적 침체를 극복할 수 있습니까?

 

1나는 시온의 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2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 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3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4다시는 너를 버림 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5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1-5)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을 위해 기도합니다(1). 그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가 드리는 이 중보기도에 함께 동참할 파수꾼을 찾습니다(6). 우리에게 찾아온 영적 침체를 극복하는 가장 효과적인 비결은 바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1) ‘잠잠하지 아니하며’(1)

 

예언자가 자신의 기도 의지를 단호하게 표명한다. 여호와께서 침묵을 깨고 개입하실 때까지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하고” 그분께 간구할 것입니다(1). 예언자는 자신이 선포한 시온의 구원이 더딘 것에 반응하여 구원 약속이 성취될 때까지 하나님과 기도의 싸움에 나서기로 결심한 것 같습니다. 새벽어둠을 깨고 갑작스럽게 빛이 밝아오는 것처럼 시온의 의가, 어둠을 밝히며 환하게 타는 횃불처럼 예루살렘의 구원이 갑작스럽게 드러날 것입니다. “시온의 의”는 병행하는 “예루살렘의 구원”이 보여주듯이 시온의 승리를 의미합니다. ‘광채’를 의미하는(겔 1:4,27,28; 10:4) ‘노가흐’(“빛”)는 종종 어둠의 대립 개념으로 사용되고(9:2;50:10; 60:2-3), “횃불”(라피드)은 신현 묘사에 자주 등장합니다(창 15:17; 출 20:18; 겔 1:13; 단 10:6). 시온의 미래가 영화롭게 묘사됩니다.

 

(2) 시온의 영광(2-3)

 

이방 민족들과 왕들이 시온의 공의와 영광을 보고, 시온은 여호와께서 지어주신 새 이름으로 불립니다(2). ‘시온의 공의’는 여호와에 의한 승리 또는 의로움의 입증을 의미합니다. ‘의, 공의’(체데크/처다카)는 이사야서 후반부의 중심 개념에 속합니다(41:2,10; 45:8,13; 51:5,6,8; 58:8; 59:17). 민족들과 그의 통치자들이 여호와의 영광을 본다는 주제도 드물지 않게 등장합니다(58:8; 59:19; 60:3). 땅의 모든 왕이 하늘 왕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새 이름”은 새 신분을 상징합니다(참조, 1:26). 미래의 시온은 현재의 시온과 구별될 것입니다. 심판으로 황폐해진 시온이 구원과 축복이 약속된 새로운 시온으로 대체됩니다. “오래 황폐하였던”(61:4) 시온이 여호와의 손에 들린 “아름다운 관”, “그분 손바닥에 놓인 왕관”이 됩니다(3). 면류관과 왕관은 통치권을 상징합니다. 시온이 여호와의 왕도가 됩니다(60:14).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왕이 되셔서(24:23) 통치하십니다(40:9-11). 성읍을 그 성읍을 수호하는 신의 (면류)관과 왕관으로 묘사하는 예는 바벨론에서도 발견됩니다.

 

(3) 시온의 새 이름(4)

 

시온에게 새 이름, 새 신분이 주어집니다. ‘버림받은 여자’(아주바)라 일컬어지던(60:15) 시온이 앞으로는 ‘내가 기뻐하는 여자’로, ‘황무지’라 일컬어지던(61:4) 시온의 땅이 ‘결혼한 여자’라 불릴 것입니다(4). 여호와께 버림을 받았던 시온이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그분의 아내로 받아들여집니다. “뿔라”의 ‘버울라’는 ‘소유하다’, ‘결혼하다’를 의미하는 동사 ‘바알’의 수동 현재분사 여성형으로 ‘남자의 소유가 된 여자’, ‘결혼한 여자’를 의미합니다. ‘버림받은 여자’의 아주바도 ‘버리다’를 의미하는 동사 ‘아잡’의 수동 현재분사 여성형입니다. “헵시바”의 ‘헤프지 바흐’는 ‘나의 기쁨이 그녀에게 [있다]’로 ‘내가 기뻐하는 여자’를 의미합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이 아니라 그 땅을 당신 아내로 맞아들이십니다. 황폐해진 땅이 비옥한 땅이 돼서 다시 결실을 얻게 될 것을 시사하는 표현입니다.

 

(4) 시온을 기뻐하시는 하나님(5)

 

청년이 처녀와 결혼하듯이 시온의 아들들이 시온과 연합하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하듯 시온의 하나님께서 시온을 기뻐하십니다(5). 신부 시온을 맞는 신랑 여호와의 기쁨에 초점을 맞춥니다. 시온이 여호와께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보여줍니다. 남편에게 기쁨을 주는 아내이기에 여호와께서 반드시 시온에게 주신 약속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파수꾼들의 쉼 없는 간구: ‘너희는 그분을 쉬시게 하지 마라’(6-7)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보다 더 간절히 이스라엘의 회복을 원하셨습니다. 그들이 적국의 포로로 끌려가 어떤 희망도 품을 수 없는 절망의 자리에 있을 때 이미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회복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직접 만드신 관으로 그들의 머리를 장식해주겠다고 말씀하시며 그들이 회복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6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주야로 계속 잠잠하지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7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6-7)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셨습니다. 파수꾼은 성을 지키며 보호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과 종들을 세우셔서 이스라엘을 깨우치고 그들을 진로의 길로 인도하길 원하셨습니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거룩한 신부로 만들기 위해 수고하였습니다.

 

(1)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6)

 

화자 ‘나’의 신분이 불분명하지만, 역할의 유사성에 근거해서 1절의 경우처럼 예언자로 간주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과 기도의 싸움에 나선(1) 예언자는 더 많은 사람을 참여시킵니다. 그는 여호와의 개입을 촉구하기 위해 가용자원을 모두 동원해 그분께 매달립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벽에 파수꾼을 세워 낮이고 밤이고 한순간도 잠잠하거나 쉬지 않고 여호와께 간구하게 합니다. 파수꾼으로 세워진 자들은 예언자의 동역자들이거나 구원 약속의 성취를 고대하는 자들인 것 같습니다.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은 이들의 역할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이들은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의 구원을 위해 조속히 개입하시도록 쉬지 않고 그분의 기억을 일깨우는 자들입니다. 아브라함(창 20:7)과 모세처럼(출 5:22-23; 8:12-13; 32:11-14) 중보기도의 역할이 이들에게 맡겨집니다.

 

(2) ‘그로 쥐지 못하시게 하라’(7)

 

예언자는 함께하는 자들에게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세움을 받은 파수꾼은 여호와께서 쉬지 못하시도록 한순간도 잠잠하지 않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분께서 약속에 따라 예루살렘을 다시 굳건하게 세우셔서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실 때까지 귀찮아하실 정도로 그분께 매달려야 합니다. 예언자는 기도를 통한 여호와의 개입으로 가까이 온 구원(56:1)이 온전히 성취될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여호와의 응답(8-9)

우리가 기도했다고 영적 침체를 벗어나는 데 필요한 모든 일을 한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는 파수꾼들과 이스라엘을 위해 함께 기도할 뿐 아니라 기도의 응답을 기다리며 그가 해야 할 일들에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기도했다면 우리가 드린 기도에 합당한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8여호와께서 그 오른손, 그 능력의 팔로 맹세하시되 내가 다시는 네 곡식을 네 원수들에게 양식으로 주지 아니하겠고 네가 수고하여 얻은 포도주를 이방인이 마시지 못하게 할 것인즉 9오직 추수한 자가 그것을 먹고 나 여호와를 찬송할 것이요 거둔 자가 그것을 나의 성소 뜰에서 마시리라 하셨느니라(8-9)

 

우리를 영적 침체에서 회복시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놓치지 마십시오. 우리가 기도하고 우리 몫의 수고를 다할 때, 하나님은 속히 우리에게 회복의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1) 원수에게 빼앗기지 않는 양식(8)

 

예언자의 간절함과 절박함이 마침내 여호와를 움직이는 데 성공합니다. 여호와께서 당신 자신을 두고 예루살렘의 구원을 장엄하게 맹세하여 구원 약속이 반드시 성취될 것을 보여줍니다. ‘오른손을 들다’는 맹세할 때의 전형적 몸짓에 속하고(신 32:40; 단 12:7), “능력의 팔”(시 89:10)은 출애굽 전승에 나오는 강한 손과 편 팔을 회상시킵니다. 예루살렘 공동체는 곡식과 포도주를 다시는 이방인들에게 빼앗기기 않을 것입니다. 포로기 이후의 공동체는 애써 농사를 지어 수확해도 상당 부분을 세금이나 공물로 빼앗겼습니다(참조 느 5:15). 이방인에 의한 농작물의 수탈은 언약을 파기한 백성에게 임할 저주 가운데 하나로 자주 언급됩니다(신 28:30,33).

 

(2) 추수한 자가 먹게 될 양식(9)

 

구원 시대에는 원수에게 약탈당하지 않고 수확한 곡식이 모두 수확한 자의 양식이 됩니다. 이들은 수확한 곡식의 첫 열매를 성전에 감사예물로 드리고(신 26:2) 여호와의 축복을 찬송합니다.

 

권면과 격려: ‘네 구원이 이르렀느니라’(10-12)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하신 백성에게 주실 놀라운 선물이 있는데, 그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의 외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요 3:16).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모든 좋은 은혜를 얻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으로 무력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10성문으로 나아가라 나아가라 백성이 올 길을 닦으라 큰 길을 수축하고 수축하라 돌을 제하라 만민을 위하여 기치를 들라 11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선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이르렀느니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하셨느니라 12사람들이 너를 일컬어 거룩한 백성이라 여호와께서 구속하신 자라 하겠고 또 너를 일컬어 찾은 바 된 자요 버림 받지 아니한 성읍이라 하리라(10-12)

 

새롭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이스라엘이 가장 먼저 무엇을 했는지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만민을 위해 깃발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임한 구원을 선포했습니다. 우리 안에 구원의 감격이 계속되기 원한다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 주신 예수님을 이웃에게 증거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1) 구원자 여호와를 맞을 준비(10-11)

 

예언자는 이미 시작된 왕의 귀환을 위해 준비할 것을 제자들에게 명령합니다(10, 40:1-11; 52:7-10). 왕이신 여호와의 귀환에 앞서 공동체는 모든 영적 걸림돌과 잘못된 관습을 제거해야 합니다. 현실적 어려움으로 인해 여기저기 파손된 길(그분께 대한 신뢰)을 다시 닦아야 합니다. 그분께로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되는것은 모두 깨끗하게 내다 버려야 합니다. 예언자와 그의 제자들은 중재자로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막힌 길을 다시 이어주어야 합니다. “백성이 올 길”은 ‘백성을 위한 길’로 옮겨야 합니다. 백성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있는 길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만민을 위하여(민족들위에) 기치를 들라”는 새로운 종말론적 사건의 시작을 알리는 말로,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시는 사건에 세계사적 의미가 주어집니다. 11b절은 40:10b의 문자적 반복입니다. 지체되기는 했지만, 약속은 반드시 그대로 성취될 것입니다.

 

(2) 시온의 새 이름(12)

 

12절은 주제에 있어 26절과 4절에 연결됩니다. 시온의 백성은 ‘거룩한 백성, 여호와께서 구속하신 자들’이라, 시온은 “찾은 바 된 자, 버림 받지 아니한 성읍”이라 불릴 것입니다. “거룩한 백성”은 ‘여호와께 바쳐진 자들, 그분만을 경배하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여호와께서 구속하신 자들”는 35:8-9의 ‘거룩한 길’로 다니게 될 ‘구속함을 받은 자들에 연결될 수 있습니다. “찾은 바 된 자요 버림 받지 아니한 성읍”은 운명의 극적 전환을 시사해줍니다. 여호와께 버림받고 그분이 찾지 않던 시온이 그분께서 기뻐 찾으시는 성읍이 됩니다(4).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타락 때문에 침묵하셨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백성에게 계속해서 침묵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백성을 찾아오시며 그들의 구속자가 되십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에는 아무런 조건도 없습니다. 아무 공로 없이 회복과 구원의 은혜를 당신의 택하신 백성에게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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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61-01)

 


회복하시는 여호와의 영

이사야 61장 1-11절


 

살다보면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듯한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누구에게나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침묵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기간에 침묵하셨습니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 여호와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고 그분의 영으로 무장한 종이 여호와의 개입에 의한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립니다. 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 포로된 자, 갇힌 자, 모든 슬픈 자가 여호와의 은혜에 참여합니다. 자유를 상실하고 억압 가운데 힘겹게 사는 자들에게 고대하던 안식년과 희년이 선포됩니다.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가 됩니다.

 

종의 사명과 선포(1-7)

하나님께서는 회복의 영이십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임하셔서 치유하고 회복하십니다. 이사야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하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십니다. 오랜 후에 그리스도는 이 본문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이 아름다운 소식이 곧 복음임을 상기시킵니다.

 

1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2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4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옛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5외인은 서서 너희 양 떼를 칠 것이요 이방 사람은 너희 농부와 포도원지기가 될 것이나 6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이방 나라들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니라 7너희가 수치 대신에 보상을 배나 얻으며 능욕 대신에 몫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 것이라 그리하여 그들의 땅에서 갑절이나 얻고 영원한 기쁨이 있으리라(1-7)

 

이사야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전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합니다. 놀랍게도 위로는 역설적입니다. ‘은혜의 해’와 ‘보복의 날’이 교차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보복하심으로 은혜의 해가 도래하게 하십니다.

 

(1) 종의 자기소개 (1a)

 

종은 자신을 여호와의 영이 함께하고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 소개합니다(la). 좋은 자기 힘을 의존하지 않고 여호와께 능력을 받아 사명을 완수하는 자입니다(42:1; 48:16). 그에게는 여호와의 영이 지속적으로 함께합니다. 현재 문맥에서 기름 부음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지속적 권위’에 관한 비유적 표현입니다. 구약에서 영의 수여는 주로 통치자에게 나타나고, 기름 부음은 제사장의 서임식이나 왕의 대관식 때 행해지고, 예언자는 열왕기상 19:16에서 한 번 언급됩니다. 갇힌 자의 해방을 선포하는 사면권은 왕의 권리에 속합니다. 따라서 여기 좋은 예언자 이상의 왕적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종의 오중적 사명(1b-3a)

 

이어서 좋은 자기의 사명을 다섯 가지로 요약합니다(1b-3a). 첫째는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52:7-8; 40:9; 41:27). 율법은 가난한 자의 권리를 보장해주지만, 현실에서 이들의 법적 권리는 쉽게 짓밟혔습니다. 강자에 의한 약자의 수탈은 예언자들의 핵심 고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아름다운 소식’은 위로보다는 가난의 굴레에서 해방시키는 사건과 관련 있습니다. 둘째는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는 것입니다. ‘마음이 상한 자’(마음이 부서진 자)는 삶에 지치고 마음에 상처받은 자입니다. 가난한 자는 경제적 어려움뿐만 아니라 힘이 없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도 불이익을 당합니다. 내용상 이들은 66:2의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와 동일시됩니다. 셋째는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자유’는 안식년의 종의 해방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입니다(레 25:10; 렘 34:8,15,17; 겔 46:17). 빚 때문에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사람의 자유를 되찾아주는 안식년 또는 희년을 선포하는 것이 종의 사명입니다. “포로된 자”와 “갇힌 자”는 1차적으로는 경제적 어려움, 특히 빚을 갚지 못해 경작지를 빼앗기고 종이나 소작농 또는 일용직 노동자로 살아가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넷째는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내용상 세 번째 사명에 직접 이어집니다. 율법에 따르면 7년마다(안식년; 출21:2; 신 15:12) 또는 50년마다(희년; 레 25:10-12) 종들의 해방이 이뤄지는 ‘은혜의 해’가 선포됩니다. ‘하나님의 보복의 날’은 하나님의 정의가 불의를 심판하는 날입니다. 그분의 정의는 가난하고 마음이 상한 자에게는 은혜와 구원으로, 부당하게 약자를 착취하는 강자에게는 보복과 심판으로 나타납니다. ‘해’와 ‘날’은 특정 시점의 표시보다는 ‘때의 전환’을 가리키기 위해 함께 언급된 것 같습니다. 다섯 번째는 “모든 슬픈 자”, 곧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를 위로하는 것입니다(40:1;57:18; 마 5:4). 종은 탄식하는 자들을 위로하고 이들에게 축제와 기쁨의 시대가 왔음을 선포합니다. 재를 뿌리던 머리에는 “화관이 씌고, 슬픔으로 얼룩진얼굴에는 “기쁨의 기름이 빛나고, 베옷이 사라지고” “찬양의 옷”을 입습니다. ‘기쁨의 기름’(시 45:7)은 축제를, ‘찬양의 옷’은 축제 때 입는 옷을 가리킵니다.

 

(3) 시온의 재건과 영화(3b-7)

 

3b절부터는 종의 해방과 위로의 말씀을 받은 자들에게 주는 말입니다. 종의 선포를 받아들인 자들에게 새로운 이름이 주어집니다. 이들은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참조. 60:21)라고 불릴 것입니다. 파괴된 땅의 재건과 그 땅에 사는 자들의 의로움(구원)이 하나로 연결됩니다. 새로운 구원 시대를 살아가는 자들은 거대한 의의 나무로 성장해 심으신 분의 영광을 찬양할 것입니다. 종의 사역이 긍정적 결실을 봅니다. 위로받고 놓임을 받은 자들(‘의의 나무’)이 오랫동안 폐허로 남겨진 성읍들을 재건할 것입니다(4). “중수할 것이며”는 원래 ‘새롭게 하다’를 의미합니다. 이사야서 후반부의 용례들은 시온의 재건이 회복을 넘어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을 시사합니다(참조. 48:6-7; 62:2; 65:17; 66:22). 5-6절에서는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직접 약속이 주어집니다. 폐허가 된 성읍을 복구하는 시온의 주민들을 위하여 밭과 포도원에서는 외인(타지인들)과 이방인이 노동자로 일합니다. 이스라엘은 앞으로는 이방인을 위해 일하지 않습니다. 이방인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대신하여 양 떼를 치며, 밭을 경작하고 포도원을 재배하게 됩니다. 시온 공동체는 “여호와의 제사장,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로 불리고, 제사장이 일반 백성이라는 십일조와 예물을 자기 몫으로 받는 것처럼(레 27:30-33; 민 18:21-32), 모든 민족에게서 재물을 받아 향유하게 됩니다(참조, 60:5-7,16). 시온 공동체에게는 제사장의 우월적 지위가, 민족들에게는 시온 공동체를 물질적으로 부양하는 의무가 주어집니다(참조 롬 15:26-27). “의의 나무”에게 “그들의 땅에서 갑절”의 몫과 “영원한 기쁨”이 약속으로 주어집니다. 고난을 이겨낸 욥에게 갑절의 보상적 축복이 주어진 것처럼(욥 42:10), ‘재와 슬픔과 근심’의 삶을 산 시온 공동체가 이전에 소유한 것보다 갑절이나 많은 풍요를 누리게 됩니다.

 

영원한 언약과 축복(8-9)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단순히 죄 사함의 자유를 누릴 뿐 아니라 죄를 이기고 죄의 권세에서 해방되는 자유를 경험하도록 우리에게 성령의 능력을 주시는 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주십니다.

 

8무릇 나 여호와는 정의를 사랑하며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여 성실히 그들에게 갚아 주고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을 것이라 9그들의 자손을 뭇 나라 가운데에, 그들의 후손을 만민 가운데에 알리리니 무릇 이를 보는 자가 그들은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이라 인정하리라(8-9)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것은 그들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벨론 역시 과도한 강탈로 이스라엘을 압제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의를 미워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행위에 보상하십니다.

 

(1) 영원한 언약(8)

 

“정의”를 사랑하시고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시는 여호와께서 폭력적 착취에 시달리는 자들을 위해 개입하십니다. 그분의 정의는 백성에게는 구원으로, 백성을 부당하게 억압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으로 나타납니다. 8b절은 내용상 7절에 연결됩니다. 그분께서 수치와 능욕의 삶을 사는 자들에게 갚아 주시고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으십니다. 수치 당한 자들의 의로움이 여호와에 의해 인정을 받고, “영원한 언약”(55:3; 59:21)체결로 “영원한 기쁨”이 보장됩니다. 다시는 언약의 파기로 징벌에 떨어져 치욕거리가 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구원 사역에 세계사적 전망이 주어집니다.

 

(2)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9)

 

민족들이 이스라엘의 구원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40:5; 52:10) 이들을 “여호와께 복받은 자손”으로 인정하게 됩니다(9). 축복은 언약 준수에 따른 여호와의 선물로, ‘영원한 언약’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한 축복을 보장해줍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손의 축복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창세기 12:23의 약속을 읽어내는 것도 가능한데, 경우 민족들은 단순한 목격자가 아니라 복 받은 이스라엘을 통해 주어질 축복의 수혜자들, 곧 이스라엘의 구원사에 참여하는 자들이 됩니다.

 

감사의 노래(10-11)

하나님의 거룩하신 땅에 하나님의 백성은 모두 공의롭고 정의로운 삶을 살며, 불의는 어느 것에도 없을 것입니다. ‘싹’이 메시아를 상징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이것은 앞으로 전개될 하나님 나라의 비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백성들을 통해 종말에 일어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10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11땅이 싹을 내며 동산이 거기 뿌린 것을 움돋게 함 같이 주 여호와께서 공의와 찬송을 모든 나라 앞에 솟아나게 하시리라(10-1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기뻐합니다. ‘구원의 옷’과 ‘공의의 겉옷’은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에 대한 열매들입니다. 하나님게서는 구원받을 백성들의 삶을 구관하셔서 그들을 거룩하게 하실 것이며 공의로 행하게 하실 것입니다.

 

(1) 넘치는 기쁨(10)

 

화자 ‘나’는 자신의 기쁨과 즐거움을 인생에서 가장 행복할 때인 결혼식에 비교해 여호와께서 주신 은혜를 노래합니다. 신랑 신부가 결혼식을 위해 아름답게 치장하듯이 여호와께서 “구원의 옷”과 “공의의 겉옷”으로 입혀주셨고 슬픔의 베옷 대신 “찬송의 옷”(3)을 입혀주셨기에 그는 기뻐합니다. ‘구원과 공의’는 승리 또는 ‘인정받음’을 의미합니다. “사모를 쓰며”는 문자적으로는 ‘제사장처럼 화관을 쓰며’로, 대제사장의 화려한 의복(출 28:1-43; 39:1-31)을 염두에 둔 표현 같습니다. ‘사모’(퍼에르)는 장식용 머리띠(3:20;겔 24:17,23) 또는 제사장이 머리에 쓰는 가는 베로 만든 관을 가리킵니다(출 39:28; 겔 44:18). 현재 문맥에서는 3a절의 재 대신 쓰게 될 ‘화관’에 연결됩니다.

 

(2) 여호와의 공의와 찬송(11)

 

11절은 9절을 받아 시온의 구원과 축복 가운데 나타난 여호와의 공의가 민족들에게도 알려집니다. 땅이 새순을 내고 동산이 씨를 자라나게 하는 것처럼 그분께서 모든 민족 앞에 ‘공의와 찬송’이 솟아나게 하실 것입니다. 비가 내리면 땅에서 갑자기 싹이 돋아나듯이 민족들이 이곳저곳에서 여호와의 공의를 봅니다.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여호와의 활동과 능력이 민족들에 의해 매우 신속하고도 전격적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수치스러운 삶을 살던 시온이 찬송의 대상이 됩니다. 민족들은 시온이 ‘여호와께 복 받은 자’임을 인정하고(9) 구원받은 시온의 명성을 노래합니다.


사람이 비참한 상황에 빠지는 것은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심판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죄에 빠진 인생들을 그냥 버려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격 없는 이스라엘을 구속해 주셨습니다. 아울러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임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의 영광을 돌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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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60-01)


이스라엘을 회복시시는 하나님

이사야 60장 1-22절


 

하나님께서는 죄를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동시에 긍휼을 베푸시는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인간의 불순종과 타락은 하나님의 형벌을 자초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들에게도 구속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 이사야 60장은 여호와께서 직접 시온에게 주시는 약속과 위로의 말씀입니다. 시온의 미래가 화려하고도 감동적인 언어로 묘사됩니다. 진노한 여호와에 의해 버림 받은 시온이 그분의 은혜로 그분의 성읍이 됩니다. 어둠에 사로잡혀 살던 시온에 빛이 왔고 여호와의 영광이 그 위에 떠올랐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빛나는 시온을 섬기기 위해 민족들이 온갖 재물을 가지고 시온으로 나아옵니다.

 

시온의 구원(1-9)

구원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드러내실 때 우리는 그 영광의 풍성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다’고 선언하십니다. 죄에 빠진 인간이 하나님을 찾을 수 없게 되자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신 것입니다. 죄에 빠진 인간이 하나님을 찾을 수 없게 되자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신 것입니다.

 

1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2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3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4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먼 곳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어 올 것이라 5그 때에 네가 보고 기쁜 빛을 내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이는 바다의 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이방 나라들의 재물이 네게로 옴이라 6허다한 낙타, 미디안과 에바의 어린 낙타가 네 가운데에 가득할 것이며 스바 사람들은 다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할 것이며 7게달의 양 무리는 다 네게로 모일 것이요 느바욧의 숫양은 네게 공급되고 내 제단에 올라 기꺼이 받음이 되리니 내가 내 영광의 집을 영화롭게 하리라 8저 구름 같이, 비둘기들이 그 보금자리로 날아가는 것 같이 날아오는 자들이 누구냐 9곧 섬들이 나를 앙망하고 다시스의 배들이 먼저 이르되 먼 곳에서 네 자손과 그들의 은금을 아울러 싣고 와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에 드리려 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에게 드리려 하는 자들이라 이는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음이라(1-9)

 

세상에 어둠이 임하면 만민은 캄캄한 속에서 길을 잃을 것입니다. 어느 곳이 길인지 무잇이 참인지 알지 못하고, 혼란과 혼돈 속에서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백성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며 빛을 발하십니다. 칠흑 같은 어둠이 애굽을 덮을 때에도 오직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빛이 있었습니다.

 

(1) 시온에 임한 여호와의 영광(1-3)

 

예언자는 시온에게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고 외치며 구원 시대의 도래를 선포합니다(1). 태양이 떠오르듯이 여호와의 영광이 시온 위로 떠올랐기에 시온은 이제 기운을 내고 일어나야 합니다(참조. 51:17; 52:2). 시온 위에 떠오른 “여호와의 영광”은 시온의 빛이 신현의 광채임을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에 나타나셔서 빛으로 채우시고, 시온은 그분의 영광을 발산합니다. 시온은 여호와의 영광의 빛을 받는 수용자이며 또한 그 빛을 반사하는 전달자입니다. 시온은 자신이 경험한 그분의 영광을 사방으로 발산해야 합니다. 시온과 민족들의 처지가 뒤바뀝니다. 빛이 비치는 시온과 달리 땅과 민족들은 어둠과 캄캄함으로 덮입니다(2).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9:2), 예루살렘을 억압하였던 민족들이 빛을 잃고 짙은 어둠에 사로잡힙니다. 어두운 곳에서는 멀리 있는 빛도 잘 보이는 것처럼 땅의 모든 민족이 시온 위에 떠오른 여호와의 영광의 빛을 보고 그 광명을 찾아 시온을 찾아옵니다(3). 2:2-3에서는 민족들이 여호와의 길을 배우기 위해 오는데, 여기서는 조공과 예물을 바치기 위해 시온을 찾습니다(4-9; 49:23).

 

(2) 돌아오는 시온의 자녀들(4-5a)

 

4a절은 49:18a와 문자적으로 일치하지만, 시온으로 오는 자들의 신분이 다릅니다. 후자에서는 시온의 자녀들이 유배지에서 돌아오고, 전자에서는 3절의 ‘나라들과 왕들’입니다 모여 시온으로 옵니다. 순례를 위해 오는 것은 아닙니다. 49:22b을 거의 반복하는 후반절에 따르면 이들에게 인도자와 봉사자의 역할이 맡겨집니다. 민족들 가운데 흩어져 살던 시온의 자녀들이 이들의 인도와 돌봄을 받으며 여호와의 영광이 빛나는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잃어버렸던 자녀들이 모두 무사히 돌아오는 것을 보고 시온의 얼굴이 기쁜 빛으로 가득 차고, 탄식과 절망으로 어두워졌던 마음이 환희의 감격으로 벅차오릅니다(5, 참조. 49:21).

 

(3) 시온으로 오는 민족들의 재물(5b-9)

 

그들뿐만 아니라 봉신이 예물과 조공을 바치기 위해 주군을 찾아오듯 민족들이 해로와 육로로 수많은 보화와 재물을 가지고 시온을 찾아옵니다(5b-9). “오래 황폐하였던 곳”(61:4;58:12)에 다시 영화가 주어집니다. “바다의 부”는 두로와 시돈 같은 지중해 연안의 나라들이 해상무역을 통해 획득한 부를 가리키고(8-9), “이방 나라들의 재물”은 아마도 사막을 횡단하며 거래하는 대상 무역(6-7)을 염두에 둔 표현 같습니다. 6절의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할 것이며”는 어둠에 살던 민족들이 시온의 빛을 보고 이를 전하게 될 것을 시사합니다(참조. 42:10; 40:5). 7b절에 따르면 이들이 가져온 양 떼가시온 성전에서 합당한 제물로 드려지고 여호와에 의해 기쁘게 받아들여집니다.

 

시온을 섬기는 민족들(10-16)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이 구원의 최종 모습이라는 가르침을 종종 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닌 우리가 사는 이 땅에 임하는 천국을 더 자주 가르치셨습니다. 한마디로 성경의 구원은 죄로 어그러진 이 세상에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원은 어떤 회복을 담고 있습니까?

 

10내가 노하여 너를 쳤으나 이제는 나의 은혜로 너를 불쌍히 여겼은즉 이방인들이 네 성벽을 쌓을 것이요 그들의 왕들이 너를 섬길 것이며 11네 성문이 항상 열려 주야로 닫히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들이 네게로 이방 나라들의 재물을 가져오며 그들의 왕들을 포로로 이끌어 옴이라 12너를 섬기지 아니하는 백성과 나라는 파멸하리니 그 백성들은 반드시 진멸되리라 13레바논의 영광 곧 잣나무와 소나무와 황양목이 함께 네게 이르러 내 거룩한 곳을 아름답게 할 것이며 내가 나의 발 둘 곳을 영화롭게 할 것이라 14너를 괴롭히던 자의 자손이 몸을 굽혀 네게 나아오며 너를 멸시하던 모든 자가 네 발 아래에 엎드려 너를 일컬어 여호와의 성읍이라,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의 시온이라 하리라 15전에는 네가 버림을 당하며 미움을 당하였으므로 네게로 가는 자가 없었으나 이제는 내가 너를 영원한 아름다움과 대대의 기쁨이 되게 하리니 16네가 이방 나라들의 젖을 빨며 뭇 왕의 젖을 빨고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 네 구속자, 야곱의 전능자인 줄 알리라(10-16)

 

이스라엘의 권위가 얼마나 대단한지 성문이 항상 열려 있고, 이방 나라들이 재물을 가지고 올 것입니다. 심지어 이스라엘을 ‘섬기지 아니하는 백성과 나라는 파멸’(12)을 당할 것입니다. 그 어떤 나라도 대적할 수 없습니다. 어느 나라도 대적할 수 없습니다. 어느 나라도 그 권위에 복종하게 될 것입니다.

 

(1) 민족들에 의한 시온의 재건(10-12)

 

자유를 빼앗기고 억압을 당하던 시온의 운명이 극적 전환을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를 거두시고 은혜로 긍휼을 베풀기로 하십니다(10; 54:7). 당신 백성을 가엾이 여기시는 그분의 호의가 시온에 새로운 시대를 가져다줍니다. 시온과 민족들의 운명이 역전됩니다. 시온 성벽을 파괴했던 이방인들이 그 성벽을 쌓고, 시온을 점령했던 왕들이 시온을 섬깁니다. 성문들은 항상 열려있고 낮에도 밤에도 닫히지 않습니다(11). ‘열린 성문’의 의미는 이중적입니다. 먼저 민족들이 끊임없이 예물을 바치러 오기에 밤에도 문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영원한 빛이 되어 지켜주시기에(19-20) 밤에도 문을 열어놓고 살 수 있을 정도로 안전해집니다. “그들의 왕들을 포로로 이끌어 옴이라”는 왕들이 시온의 지배력을 상실하고 낮은 자리로 내려갔음을 시사합니다. 여호와의 은혜와 긍휼로 회복된 시온과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가 민족들을 판단하는 기준이 됩니다. 시온을 섬기지 않는 백성과 나라는 멸망을 당합니다(12; 참조․ 슥 14:16-19). 여호와께서 함께하시는 시온을 섬기지 않는 민족은 여호와를 섬기지 않는 민족으로 간주되어 징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2) 성전의 재건(13)

 

여호와의 현존을 상징하는 성전이 재건됩니다. 민족들이 성전 재건과 장식에 필요한 나무를 가지고 시온으로 옵니다(13). “레바논의 영광”(35:2)은 주로 왕궁과 성전을 짓는 데 사용된 레바논 백향목을 가리킵니다. “내 거룩한 곳”과 “나의 발 둘 곳”(참조. 겔 43:7)은 성전을 의미합니다. 전통적으로 지성소 안에 있는 두 그룹의 두 날개 아래 놓인 법궤가 발등상으로 간주 됐습니다(시 132:7). 주전 587년에 파괴된 법궤 대신에 성전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발등상이 됩니다. 시온의 수치스러운 과거와 영광스러운 미래가 대조됩니다.

 

(3) 여호와의 성읍 시온(14-16)

 

시온을 괴롭히고 멸시하던 자들이 그 발아래 엎드려 시온을 “여호와의 성읍,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의 시온”이라 부릅니다(14). 여호와께 징벌당한 성읍으로 조롱당하던 시온이 민족들에 의해 다시 인정을 받습니다. 남편에게 버림당한 여자처럼 수치와 탄식 가운데 살아가던 시온에게 “영원한 아름다움과 대대의 기쁨”이 주어집니다(15). “버림을 당하며 미움을 당하였으므로”는 시온이 남편에게 이혼을 당하고 쫓겨난 여자 신세였음을, “네게로 가는 자가 없었으나”는 완전히 파괴돼 사람들에게 잊힌 성읍이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여호와께 받아들여진 시온은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젖을 먹고 성장하듯 나라들과 왕들의 젖을 먹고 번성합니다(16; 참조. 49:23). 민족들의 부와 재물이 시온의 양식이 되고, 시온은 이 일을 통해 여호와께서 “네 구원자, 네 구속자, 야곱의 전능자”이심을 알게 됩니다(참조. 49:26). 시온의 완전한 회복을 약속하신 여호와께서는 절망적인 처지에 놓인 자들을 도와주시는 구원자이시고, 자녀들의 해방을 권리와 의무로 삼으시는 구속자이시고, 능력으로 시온을 모든 위협에서 지켜주시는 야곱의 전능자이십니다.

 

시온의 영광스러운 미래(17-22)

회복될 이스라엘은 ‘영원한 아름다움과 대대의 기쁨’(15)이 될 것입니다. 소외되고 버림받던 이스라엘을 이제는 이방 나라와 열방들이 나서서 젖을 먹이듯 보호할 것입니다. 그들은 가장의 입장이 아니라 부모와 같은 존재가 되어 이스라엘을 위해 봉사하게 됩니다. 이러한 예언은 고레스와 같은 이방 왕들을 통해 성취되며, 하나님께서 모든 나라의 주인이심을 깨닫게 하십니다.

 

17내가 금을 가지고 놋을 대신하며 은을 가지고 철을 대신하며 놋으로 나무를 대신하며 철로 돌을 대신하며 화평을 세워 관원으로 삼으며 공의를 세워 감독으로 삼으리니 18다시는 강포한 일이 네 땅에 들리지 않을 것이요 황폐와 파멸이 네 국경 안에 다시 없을 것이며 네가 네 성벽을 구원이라, 네 성문을 찬송이라 부를 것이라 19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20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 21네 백성이 다 의롭게 되어 영원히 땅을 차지하리니 그들은 내가 심은 가지요 내가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인즉 22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17-22)

 

더 이상 해의 빛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밤의 달도 비추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회복하실 때는 하나님께서 직접 ‘영원한 빛’이 되며, ‘영광’이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새롭게 하실 이스라엘은 물리적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그 나라는 영원하고, 그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이며, 그 나라는 온전한 곳입니다. 더 이상 그곳에는 슬픔이 없습니다.

 

(1) 물질적 풍요와 공의로운 통치(17-18)

 

시온의 미래는 현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로워집니다. 귀한 광물이 넘쳐나서 금과 은과 놋과 철을 누구나 마음대로 사용하게 됩니다(17). 솔로몬의 황금시대를 염두에 둔 표현처럼 보입니다(왕상 10:21,27). 또한 공의로운 통치가 가져다주는 화평도 누리게 됩니다. 억압과 착취의 통치가 화평과 공의의 통치로 대체되기에 이스라엘 영토 안에 “강포한 일”과 “황폐와 파멸"이 없게 됩니다(18). 시온의 성벽은 “구원”이라, 성문은 “찬송”이라 불립니다. 구원은 승리와 번영을, 찬송은 명성을 의미합니다. 모든 민족이 여호와에 의한 시온의 구원과 승리와 영화로움을 보게됩니다.

 

(2) 시온의 영원한 빛(19-20)

 

여호와께서 해와 달이 되셔서 시온을 비추시기에 어둠이 틈타지 못합니다(19-20; 참조․ 슥 14:7). 그분께서 시온의 영광이 되셔서 “영원한 빛”으로 비추시기에 다시는 슬퍼할 일이 없어집니다.

 

(3) 땅과 후손의 약속(21-22)

 

시온 백성이 모두 의인이 되어 영원히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21). 시온 백성이 야곱의 적법한 후계자로 가나안 땅을 영원히 소유하게 됩니다. 이들은 여호와께서 당신 영광을위하여 손수 “심은 가지”요 “직접 손으로 만든 것”입니다. 시온이 여호와의 보호 아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실존이 그분께 의존적임을 보여줍니다. 땅의 소유 약속에 인구 증가의 약속이 더해집니다. 그들 가운데 작은 자가 한 부족(“천 명”)을 이루고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루게 됩니다(22). 주전 587년 바벨론에 멸망당한 이후 가나안에 사는 이방인들이 점차 증가했고 시온은 많은 주민을 잃은 채 초라한 신세가 됐습니다. 땅의 회복과 후손의 번성 없이는 한 민족으로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60장은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는 약속 성취의 확실성과 임박함을 강조하며 마무리합니다. 새벽빛이 짙은 어둠을 물리치고 그 모습을 환히 드러내는 것처럼 정한 때가 되면 구원 약속이 한순간에 다 성취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온 것은 사람들의 죄와 타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여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시지만, 사람들은 스스로 죄를 짓고 하나님께 형벌을 받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격 없는 인간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가 구속의 은혜를 얻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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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59-01)


평강의 길을 모르는 이스라엘의 죄

이사야 59장 1-21절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리가 기도 응답을 받기 전, 기다리는 법을 먼저 배우길 원하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도 응답이 지체되는 중요한 이유는 해결되지 않은 우리의 죄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고, 기도의 응답을 지체시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지체될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요?

 

  • 기대하였던 대로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자 예루살렘 공동체는 절망감과 좌절감에 빠집니다. 이들은 금식을 해도 아무 유익이 없다고 기도를 드려도 아무 응답이 없다고 불만을 제기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데서 돌이켜 악한 생각대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자들에게 악의 선택은 일상이 됩니다. 정의와 공의와 성실과 정직이 사라지고, 폭력과 거짓이 판치는 세상이 됩니다.

 

예언자의 고발(1-8)

악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합니다. 평강의 길은 하나님께 가는 거룩한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에 고착된 이스라엘을 슬퍼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된 삶을 알려 주시지만, 악에 길든 이스라엘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악인들의 길은 넓고 평탄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은 사망입니다. 오직 좁고 협착한 진리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1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3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냄이라 4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실하게 판결하는 자도 없으며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거짓을 말하며 악행을 잉태하여 죄악을 낳으며 5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나니 그 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 알이 밟힌즉 터져서 독사가 나올 것이니라 6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릴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포악한 행동이 있으며 7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생각은 악한 생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있으며 8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이 행하는 곳에는 정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1-8)

 

하나님께서는 죄를 혐오하십니다. 극도로 싫어하시며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으십니다. 죄는 사람을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게 하지만, 하나님께서도 죄로부터 멀어지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가 없으시며 죄를 멀리하시기에 죄인들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심지어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2) 완전히 단절시킵니다. 다른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이유는 그들 자신 안에 있고,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능력을 막는 것입니다.

 

(1) 죄로 인한 단절(1-2)

 

예언자는 구원이 지체된 원인을 자신들에게서 찾지 않고 여호와께로 돌리는 자들을 신랄하게 고발합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고, “귀가 둔하여” 간구를 듣지 못하시는 것도 아닙니다(1). 그분께는 이스라엘을 구해내실 능력도 이스라엘을 위해 기꺼이 개입하실 의지도 있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이 그들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이스라엘의 죄가 그들에게서 얼굴을 가리어 듣지 않으시게 하였습니다(2).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에 여호와께서 개입하실 수 없었고 간구에 응답하실 수 없었습니다. “여호와의 손”은 그분의 구원 또는 심판의 능력을 의미하고, ‘짧은 손’은 능력의 부재를 의미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일찍이 “강한 손과 편 팔”(신 4:34; 5:15 등)로 이스라엘을 애굽 바로의 압제에서 구해내셨습니다. ‘귀의 둔함’은 6:10(“귀가 막히고”)에서 이스라엘의 완악함을 고발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얼굴을 가리심’은 관계의 단절, 곧 심판 또는 곤경에 그대로 내버려 둔다는 뜻입니다.

 

(2) 악에 사로잡힌 자들(3-8)

 

3-4절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아주 강도 높게 고발합니다. 먼저 행위(손과 손가락)와 말(입술과 혀)을 담당하는 신체 부위를 열거하면서 악행을 신랄하게 지적합니다(3). ‘피에 더러워진 손/손바닥’은 폭력과 불법으로 이웃의 정당한 권리를 억압하는 모든 악행을 가리킵니다. 무죄한 자가 흘린 피는 땅에서 직접 하나님께 호소합니다(창 4:10). ‘죄악으로 더러워진 손가락’은 범죄 행위의 의도성이나 철저성을 시사합니다. 폭력으로 이웃의 생명을 위협하는 자들이 말로도 이웃에게 해를 끼칩니다. 이들의 ‘입술’은 거짓을 말하고 이들의 ‘혀’는 악독을 지어냅니다. 서로 속이고 함정에 빠뜨리는 말만 뱉습니다. 속임수와 불의의 언어로 가득 찬, 서로에게 적대적인 탐욕의 사회로 타락합니다. 3절을 1절과 함께 읽으면, 피와 죄악으로 더러워진 손바닥을 펴고(1:15) 거짓과 악독을 쏟아내는 입으로 간구하기에 여호와께서는 이들의 기도를 들어주실 수 없었습니다. 또 4절과 함께 읽으면, 3b절은 거짓 소송과 거짓 증거로 무죄한 자의 생명을 위협하는 사법적 폭력을 고발하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폭력을 휘두르고 거짓을 일삼는 자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사법제도도 기능을 상실합니다. 불의와 불법을 정죄해야 할 법정이 그 온상이 됩니다(4). 재판에 참여하는 자들, 곧 고소인과 재판관과 증인이 모두 부패하여 불법의 공모자가 됩니다. 악행(재앙)을 잉태하여 죄악(불법)을 낳는 자들뿐입니다. 5-6a절은 청자에게 잘 알려진 비유를 활용해 고발합니다. 악인에게서 나오는 것은 독사의 알이며, 그것을 먹는 자는 누구나 죽습니다. 독사의 알이 으깨지면 살무사가 나오듯이 이들에게서는 더 사악한 것만 나옵니다. 거미줄을 부적당한 옷의 비유로 사용하는 6a절은 아마도 함정에 빠뜨려서 약탈한 재물이 이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할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 행위가 “죄악의 행위” 뿐이고, 그 손에는 폭행만 있는 자들에게는 탐욕의 만족이 삶의 유일한 목적이자 가치관이 됩니다(6b-7). 피를 흘리기에 주저함이 없고 “악한 생각”(재앙)으로 가득 찼기에, 이들의 길에는 “황폐와 파멸”의 흔적만 남습니다. 8절은 57:21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는 말을 받아 확대합니다. 이들은 자기네 길을 굽게 만들어 그 길로 가는 자들이기에 이들의 길에는 평강과 정의가 없습니다.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57:20) 같은 자들이기에 사회가 피와 죄악과 거짓과 악독으로 가득 찹니다.

 

공동체의 고백(9-15)

알코올 의존자들의 회복을 지원하는 단주동맹에서는 알코올 의존에서 회복하기 위해 제일 먼저 스스로 술을 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자신의 힘으로 조절할 수도 있고, 끊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는 한 음주 습관은 고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자가조절의 희망을 품고 음주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해 더 이상 애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도 이와 동일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9그러므로 정의가 우리에게서 멀고 공의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즉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둠뿐이요 밝은 것을 바라나 캄캄한 가운데에 행하므로 10우리가 맹인 같이 담을 더듬으며 눈 없는 자 같이 두루 더듬으며 낮에도 황혼 때 같이 넘어지니 우리는 강장한 자 중에서도 죽은 자 같은지라 11우리가 곰 같이 부르짖으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정의를 바라나 없고 구원을 바라나 우리에게서 멀도다 12이는 우리의 허물이 주의 앞에 심히 많으며 우리의 죄가 우리를 쳐서 증언하오니 이는 우리의 허물이 우리와 함께 있음이니라 우리의 죄악을 우리가 아나입니다 13우리가 여호와를 배반하고 속였으며 우리 하나님을 따르는 데에서 돌이켜 포학과 패역을 말하며 거짓말을 마음에 잉태하여 낳으니 14정의가 뒤로 물리침이 되고 공의가 멀리 섰으며 성실이 거리에 엎드러지고 정직이 나타나지 못하는도다 15성실이 없어지므로 악을 떠나는 자가 탈취를 당하는도다(9-15)

 

우리의 의지는 죄로 기울어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을 깊이 해도, 아무리 의지적 노력을 해도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내가 죄를 해결하는 데 무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두 손을 들고 나갈 때, 비로소 회복의 기회가 열립니다.

 

(1) 어둠 속에 살아가는 자들(9-11)

 

‘우리의 죄악을 우리가 아나이다’ 구원 약속이 지체되었다고 실망하거나 회의하는 공동체는 소망의 빛을 놓치고 어둠에 사로잡힙니다. 이들을 감싸고 있는 어둠은 예언자들의 핵심 메시지에 속하는 ‘정의와 공의’의 부재에서 기인합니다(9). 하나님의 결정적 행위(재판)와 관련하여 사용될 때 정의(미슈파트)는 ‘악인의 정죄’와 ‘의인의 인정’을(3:14; 4:4; 28:6; 34:5; 41:1), 공의도 ‘부당한 판결에서 무죄한 자의 해방’을(51:6,8; 56:1; 59:9, 16-17; 61:10-11; 63:1) 함축합니다. 맹인이 담을 더듬듯이 사람들은 한낮에도 제 길을 찾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갑니다. ‘눈’의 모티브는 이스라엘의 영적 무지를 보여주는 비유입니다(42:19; 43:8;56:10). 보기는 보아도 깨달을 수 없었던 왕정시대의 이스라엘처럼(1:3; 6:9-10) 죄에 사로잡힌 포로기의 공동체도 “눈 없는 자”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불순종한 자들에게 주어진 저주의 삶이었습니다(참조. 신28:29; 습 1:17; 애 4:14). 정의와 구원이 사라지고 어둠만 남은 곳에서 이들은 곰이 으르렁대듯이(참조. 시 42:5, 11; 43:5), 비둘기가 슬피 울듯이(참조. 38:14; 겔 7:6; 나 2:8) 절망적으로 탄식합니다(11). 죽음의 위협에 직면해서야 이들은 자신들의 삶이 죄에 빠진 삶이었음을 깨닫고 인정합니다.

 

(2) 죄의 고백 (12-13)

 

“우리의 죄가 우리를 쳐서 증언하오니 이는 우리의 허물이 우리와 함께 있음이니라 우리의 죄악을 우리가 아나입니다”(12). 이들의 삶 자체가 이들의 죄악을 고발하기에 죄를 인정하기 위해 다른 증거를 제시할 필요가 없습니다.

 

(3) 정의와 공의가 사라진 사회(14-15a)

 

13-15a절은 죄와 관련한 열네 개 이상의 단어를 사용해 철저하게 죄를 고백합니다. 이들은 여호와를 배반하고 등을 돌린 결과가 윤리적 파탄이었음을 인정합니다. 여호와를 인정하지 않기에 사회의 근본 토대인 정의와 공의가 그 기능을 상실하고, 성실(진실)과 정직이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진실되고 정직한 삶을 사는 자가 약탈의 대상이 되고, 힘 있는 자만 살아남게 됩니다.

 

긍정적 답변: 시온을 위하여 직접 개입하시는 여호와(15b-21)

하나님을 떠난 그들은 마음이 부패해 소생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정의와 공의가 그들에게서 도망칩니다. 성실과 정직은 죽은 것처럼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패역한 시대이기에 악을 떠나는 자가 오히려 탈취를 당하였습니다. 철저히 무능한 자들이 되었고, 오직 악을 행하는 것에만 능수능란했습니다.

 

15…여호와께서 이를 살피시고 그 정의가 없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16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공의를 스스로 의지하사 17공의를 갑옷으로 삼으시며 구원을 자기의 머리에 써서 투구로 삼으시며 보복을 속옷으로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으로 삼으시고 18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시되 그 원수에게 분노하시며 그 원수에게 보응하시며 섬들에게 보복하실 것이라 19서쪽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워하겠고 해 돋는 쪽에서 그의 영광을 두려워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기운에 몰려 급히 흐르는 강물 같이 오실 것임이로다 20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의 자손 가운데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21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5b-21)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악한 행위대로 보응하십니다. 사람은 무엇이든지 자신이 심은 대로 하나님께 받습니다. 이것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죄악 때문에 하나님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삶을 심어야 합니다. 그것이 형통으로 가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참된 구속자가 되십니다. 장차 상의 서쪽과 동쪽 모든 열방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사모할 것입니다

 

(1) 중재자 없음에 실망하신 하나님(15b-16a)

 

공동체의 뼈저린 죄의 고백에 여호와께서 긍정적으로 응답하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어둠에 사로잡힌 공동체를 위해 중재하려는 자가 한 사람도 없는 것을 보고 실망하시지만(15b-16a) 포기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분은 역사에 직접 개입하기로 하십니다.

 

(2) 직접 나서시는 하나님(16b-17)

 

하나님께서 용사처럼 무장하시고 적들과 싸워 공의와 구원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16b-17).

 

(3) 행위대로 갚으시는 하나님(18-19)

 

하나님께서 각자의 행위대로 갚으십니다. 적에게 분노하시고 원수에게 보응하시고 섬들에게 보복하십니다(18). 공동체 안에 있는 악한 자들은 물론 외부의 대적도 모두 제거하십니다. 예루살렘 공동체가 내부로부터 정화되고 외부의 위협에서도 벗어납니다. 모든 것을 휩쓸어가는 급류처럼 그분께서 분노와 보복으로 심판하시기에 온 땅이 그 이름과 영광을 두려워합니다(19). 여호와의 이름은 거룩하신 이름으로 더러움과 죄를 용납하지 않고, 그분의 영광은 왕적 권능으로 그분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는 자를 징벌합니다.

 

(4) 회개한 자들의 구원 약속(20)

 

여호와의 역사 개입을 긍정적 관점에서 기술합니다. 그분은 시온에게, 야곱의 자손 가운데 악행에서 돌아선 자들에게 구속자로 오십니다. 구원 약속의 대상이 야곱의 자손에서 회개하고 그분께 돌아간 자들로 한정됩니다. 악을 떠나 여호와께로 돌아온 자만 구원을 받습니다.

 

(5) 영과 말씀의 약속(21)

 

전체 단락을 마무리하는 구절입니다. 여호와의 주도로 언약이 맺어지고, 언약의 내용으로 영과 말씀의 선물이 약속됩니다.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청자 ‘너’는 아마도 20절의 악행에서 돌아선 자들, 곧 참된 야곱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들과 언약을 맺고 이들에게 예언의 영을 주어 당신 말씀을 알게 하십니다(참조, 욜 2:28).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 선포보다는 말씀을 알고 말씀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예언자의 역할이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징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와 타락을 관용하시지 않습니다. 죄에 대해서는 단호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 그들에게 오직 은혜로 구원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구원이 인간의 공로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 임을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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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58-01)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

이사야 58장 1-14절


 

사람들은 모두 복되고 형통한 신앙생활을 원합니다. 그들에게 원하시는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형통에 이른 성경적 원리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 여호와께서 ‘내 백성’과 ‘야곱의 집’으로 부르시며 고발하는 공동체는 제의적으로 흠이 없어 보이는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종교적 열심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이들은 제의적 경건을 여호와에게서 복을 받아내는 수단으로 여겼습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금식하는 날에도 일꾼들을 다그쳐 일을 시키고 이웃과는 다투거나 싸움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금식(1-12)

일반적으로 역경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시야가 좁아져 자신의 문제에만 집중합니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하려는 이와 같은 경향은 우리 안에 있는 죄성과 결합되어 고난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우리 안에서 더욱 강화됩니다. 심지어 우리가 우리 문제를 하나님께 아뢰는 그 순간에도 그런 이기심이 우리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우리가 금식하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자신의 문제로 하나님께 금식하며 기도할 때, 우리는 혹시 이웃들을 힘들게 하고 괴롭히는 것은 없는지를 먼저 돌아보아야 합니다.

 

1크게 외치라 목소리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높여 내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알리라 2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공의를 행하여 그의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하는도다 3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 주지 아니하시나이까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4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5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6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8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9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10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11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12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1-12)

 

하나님께서는 언약 백성들이 범한 배교와 타락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이들은 거룩한 언약 백성답게 살아야 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외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형식적이고 곁치례뿐인 경건이었습니다.

 

(1) 고발(1-2)

 

하나님께서 예언자에게 백성의 허물과 죄를 고발하라고 명령하십니다(1; 호 8:1; 암 3:6a). 예언자는 영적으로 무감각해진 자들에게 경보를 발하여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합니다. 고발당하는 공동체는 겉보기에는 흠은커녕 칭찬받을 만합니다(2). “날마다” 여호와를 찾고 그분의 길 알기를 즐거워합니다. 그분께 “의로운 판단”(판결, 법규)을 묻고 가까이 나아가길 즐거워합니다. 절기 때나 특별한 경우에만 하나님을 찾지 않고 날마다 찾습니다. 철두철미하게 하나님께 의존해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성전 중심의 제의 종교에서는 제사장과 예언자를 통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고, 사람들은 희생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경건은 제의와 성전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진실이 없고 공의가 없[는]”(48:1) 제의적 삶이 언약 공동체의 모범적 삶이 됐습니다.

 

(2) 첫 번째 답변(3-4)

 

금식의 예를 들어 이들의 위선적 경건을 고발합니다(3-4). 금식하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자신들의 경건에 응답하지 않으신다고, 기대한 결과(축복)가 없다고 불만을 제기합니다(참조. 말 2:13; 3:14-15).금식이 그 본래 의미를 잃고 복을 얻어내는 수단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이들은 금식하는 날에 제 유익만 찾았습니다. “오락”(헤페츠)는 ‘[경제적] 이익’을 의미하고, “온갖 일을 시키도다”는 ‘너희 모든 일꾼을 다그치는도다’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금식하는 자들이 일꾼들에게는 더 많은 노동을 강요했습니다. 이들은 탐욕과 착취의 마음을 종교적 경건으로 포장했습니다. 노동으로 힘겹게 사는 이웃을 억압하여 부를 축적했으면서도 그것을 금식이 가져다준 하나님의 축복으로 자랑했습니다. 금식의 날에도 이웃과 다툼이나 주먹질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을 한다고 생각하기에 불의와 불법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웃을 착취하고 자기 경건을 과시하는 자들의 금식에 하나님께서 반응하십니다.

 

(3) 두 번째 답변(5-9)

 

어떻게 이런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금식과 간구에 응답할 수 있겠습니까? 금식하는 자들의 불평에 대한 첫 번째 답변이 이들의 위선적 경건과 윤리적 무감각을 고발한다면, 5절부터 나오는 두 번째 답변은 긍정적인 측면에서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참된 금식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논점이 금식의 형식에서 내용으로 옮겨집니다. 금식에서 중요한 것은 관련 제의 규정과 전통을 준수하려는 열심이 아닙니다(5). 금식일은 사람이 자신을 괴롭히는 날이 아닙니다. 갈대처럼 머리를 숙이고 베옷을 입고 티끌에 눕는 것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희생제사의 경우처럼 금식도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절대선(絶對善)이 아닙니다. 여호와께 열납되려면 그분께서 “기뻐하는” 금식을 해야 합니다. 금식의 정의가 전혀 새롭게 내려집니다.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그분께서 택하신 금식입니다(6). “흉악"(레샤)은 4절의 “악한”과 같은 단어로, “흉악의 결박”이 “악한 주먹으로 치는 자들이 지운 결박임을 시사합니다. 목덜미를 짓누르는 “멍에”는 강자가 약자에게 강요하는 정치-육체적 속박이나 종살이를 상징하며(레 26:13; 렘 28:10-14; 겔 30:18; 34:27), “멍에를 꺾는 것”은 억압과 종살이에서의 해방을 의미합니다. “압제 당하는 자”는 힘 있는 자에 의해 부당하게 학대당하는 자를 가리키고, “끌러 주며”의 ‘나타르’는 ‘갇힌 자를 자유롭게 놓아주다’라는 뜻입니다(시 105:20; 146:7). “자유하게 하며”의 ‘샬라흐 호프시’는 안식년 또는 희년의 종의 해방과 관련해 사용하는 표현입니다(출 21:26-27; 신 15:12-13,18; 렘 34:8-16). 한마디로,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이유로 자유를 빼앗기고 종살이하는 자에게 자유를 되돌려주는 것이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금식입니다. 7절은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지금 굶주린 자에게 빵을 나누어주고, 집이 없어 떠도는 가련한 자를 맞아들여서 잠자리를 마련해주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주어 덮어주고, 가난한 친척을 보고 피하여 숨지 않는 것입니다. 공동체 구성원의 어려움에 눈을 감지 않고 연민의 마음을 갖고 실질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여호와께서 택한 금식입니다.

8-9절은 참된 금식에 따른 구원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금식을 하면, 귀환 공동체가 역경에 처한 이웃을 돕는다면, 어둠을 뚫고 새벽빛이 터져 나오듯, 새 살이 돋아 상처가 치유되듯 이스라엘의 소망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비칠 것이며”는 문자적으로는 ‘터져 나올 것이며’로 약속한 구원이 한순간에 성취될 것을 시사합니다. ‘차마흐’는 ‘싹이 돋다’를 의미합니다. 아마도 40-55장에 나오는 ‘새로운 일들’의 싹틈(42:9; 43:19)과 관련해 사용된 것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금식을 한다면 제의적 경건 때문에 지체된 치유(구원)가 곧 성취될 것을 시사해줍니다(참조. 51:5; 56:1). 후반절은 안전한 출바벨론을 약속한 52:12b에 거의 문자적으로 일치합니다. 바벨론에서 나올 때 여호와께서 귀환 행렬의 선두에 서서 길을 인도하시고 후미에서 지켜주신 것처럼, 예루살렘 공동체를 모든 위험에서 안전하게 지켜주십니다. “여호와의 영광”에 병행하여 등장하는 “네 공의”는 공동체의 의로움을 옹호해주시는 분(의 공의)을 가리킵니다. 위선적 경건 때문에 단절된 관계가 온전히 회복됩니다. 예루살렘 공동체가 부르면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도와달라 부르짖으면 ‘내가 여기 있다’하고 즉각적으로 개입하십니다(52:6: 65:1). 여호와께서 택한 금식을 행할 때 공동체는 그분의 인도와 보호 아래 살게 됩니다. 전체적으로, 본문은 구원 약속이 온전히 이뤄지지 않았다고 불만을 제기하는 귀환 공동체에게 주는 답변입니다.

 

(4) 조건적 약속(9b-12)

 

앞에 나온 것을 반복하는 9b-12절은 조건적 약속의 말씀입니다. 9b절은 내용상 3b-4a절과 6절의 요약에 해당합니다. 제하여 버려야 할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이 구체적으로는 불분명하지만, 이웃에게 해를 끼쳐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행태임은 분명합니다. 10a절은 7a절을 받습니다. 공동체의 가진 자는 자기 재산을 굶주린 자의 배고픔을 해소시켜 주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많이 가진 자가 없는 자의 부족함을 채워주어야 합니다. 따뜻한 음식으로 가난한 자들의 빈속을 채워주는 것이 부자의 금식입니다.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고 그들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함께하십니다. 10b절은 8a절에 일치합니다. 공동체의 선을 지향하는 삶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으로 이스라엘의 소망을 성취시켜줍니다. 지금까지의 흑암이 사라지고 앞으로는 밝은 대낮에 길을 가듯이 안전하게 살게 됩니다. 11절은 8b절을 받아 확대합니다. 여호와의 조건을 완수하는 자들에게 그분의 인도하심과 땅의 풍요와 건강의 약속이 주어집니다. 귀환 공동체가 그분께 의지할 때 현재의 궁핍함과 부족함은 극복될 수 있습니다. 메마른 땅(예루살렘 공동체)이 “물 댄 동산”처럼,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처럼 됩니다. 예루살렘이 재건되고, 그 후손들에게 명예로운 이름이 주어집니다(12).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는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을,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는 성안의 복구를 시사해주는 것 같습니다.

 

안식일 준수(13-14)

우리가 음식을 거절하고 기도의 자리에서 무릎을 꿇는 것은 우리를 철저히 낮추고 하나님만을 높이는 것이며, 하나님 홀로 우리 삶을 다스리는 분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우리의 생각과 계획을, 우리의 시도와 노력을 멈추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안식일의 정신입니다. 현대인들은 바쁘게 사는 것을 미덕으로 여깁니다.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며 유능한 사람이란 것을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증명하려고 합니다.

 

13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14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13-14)

 

바벨론에서 돌아온 구속받은 자들은 황폐한 성과 벽을 재건할 것입니다. 이것은 죄로 말미암아 황폐해진 인류를 구속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상징합니다. 언약의 백성들이 자신들의 육체적 욕망들을 좆지 않고 마땅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안식일을 지키고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면 번성할 것입니다.

 

(1) 조건(13)

 

안식일 준수가 하나님께 대한 복종과 경건 행위로 간주됩니다. 13절은 장사와 관련한 안식일의 이동과 이윤 추구를 금합니다(참조. 느 13:15-19). 안식일은 여호와의 거룩한 날이기에 다른 날들로부터 구별하여“존귀한 날”로 지켜야 합니다.

 

(2) 약속(14)

 

14절은 안식일 준수에 따른 약속입니다. 지금은 이방 압제 아래 “오래 황폐된 곳들”에서 힘겹게 살고 있지만, 안식일을 준수한다면 여호와 안에서 기쁨을 얻고, 승리자가 되어 “야곱의 기업”인 가나안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종교적 형식에 집착했습니다. 그들의 형식적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은 제쳐 두고 종교적 형식과 외형만을 고집한 것입니다. 참된 경건은 종교적 외형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기뻐하시는 뜻을 행하는 자에게 형통의 복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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