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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57-01)


우상숭배의 어리석은 실상

이사야 56장 9절-57장 13절


 

관심을 어디에 두느냐가 우리의 사고와 행동 패턴을 결정합니다. 관심이란 어떤 것에 마음이 끌려 신경을 쓰거나 주의를 기울이는 상태를 일컫는데, 한 가지에 관심을 갖게 되면 다른 것에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하게 됩니다. 그 결과 형성된 삶의 내용이 미래를 결정합니다.

 

  •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맹인이고 벙어리 개들입니다. 들짐승들(외적)이 양 떼를 노리고 우리를 넘어 들어오지만, 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위기가 코앞에 닥쳐왔음에도 인식하지 못합니다. 이들은 양 떼에게 위험을 알려주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삶을 즐기기에만 열심인 자들입니다. 지도자들의 무능력과 탐욕이 공동체를 다시 멸망의 위기로 네몹니다.

 

이스라엘의 부패한 지도자들(9-12)

신앙은 방향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어떤 곳을 지향하느냐가 우리의 믿음을 좌우합니다. 좋은 신앙은 하나님을 지향합니다. 떠라서 세속적 욕망을 지향하는 사람은 좋은 신앙인이 되기 어렵습니다. 분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좋은 신앙인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9들의 모든 짐승들아 숲 가운데의 모든 짐승들아 와서 먹으라 10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들이요 누워 있는 자들이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니 11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 다 제 길로 돌아가며 사람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 12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마시자 내일도 오늘 같이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9-12)

 

하나님께 연합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생각과 삶의 길을 곧게 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들은 탐욕의 길을 걸으며 주님을 욕되게 합니다.

 

(1) 들짐승 초대(9)

 

여호와께서 들짐승에게 와서 먹도록 허락하십니다(9). 심판 선포보다는 위기 상황에 대한 묘사이며, 현재 형편이 파국적 재앙을 초래할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함을 시사합니다.

 

(2) 눈먼 파수꾼들(10)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개들이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입니다(10). 적의 침입을 감시할 수 없고 보아도 짖지를 못합니다. 지도자들이 모두 무능력하고 무지해 위기를 인지하지 못합니다. “벙어리 개들”은 파수꾼-예언자를 조롱하는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의 양 떼를 지키는 파수꾼-예언자는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도 않을뿐더러 맡겨진 일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따사로운 햇살에 코를 벌렁거리며 낮잠을 즐기는 개들과 같습니다.

 

(3) 몰지각한 목자들(11-12)

 

제 입에 들어가는 것만 따라다니는, 게걸스러워 만족할 줄 모르는 개들입니다(11; 참조. 미 3:5, 11). 이들은 “몰지각한 목자들”로 모두 제 길을 가며(53:6a) 제 이익만 추구합니다. 공동체의 안위를 책임진 자들이 제 몫을 챙기기에만 열심입니다. 술자리의 즐거움이 이들의 유일한 관심사입니다(12; 참조. 5:22; 22:13). 여전히 마실 술이 있기에 내일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이들에게 내일은 더 즐겁고 기름진 주연을 즐길 수 있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경고 음성을 듣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파수꾼-목자들 때문에 재앙의 그림자가 공동체 위에 짙게 드리웁니다. 포로기 이후에도 지도자들의 탐욕과 무능력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의인의 죽음에 대한 탄식(57:1-2)

 

우상숭배는 단순히 사람이 만든 형상에 절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우상숭배는 외적 형태보다 내적인 동기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탐심이야말로 우상숭배라고 말합니다. 우상숭배의 현상에는 어떤 것들이 있겠습니까?

 

1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진실한 이들이 거두어 감을 당할지라도 깨닫는 자가 없도다 의인들은 악한 자들 앞에서 불리어가도다 2그들은 평안에 들어갔나니 바른 길로 가는 자들은 그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리라(1-2)

 

탐심은 곧 우상숭배입니다. 탐욕에 이끌리는 사람은 현실을 보지 못합니다. 자기가 만든 세상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의인들의 죽음을 보면서도 마음에 두지 않고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탐심에 눈이 어두워져 현실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1) 의인의 죽음에 무관심한 사회(1)

 

지도자들의 타락과 무능력이 공동체 전체를 오염시켜 일반 사람도 악에 무감각해집니다. 의인과 진실한 이들이 부당하게 죽어가지만 아무도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의인’은 여호와의 임박한 구원과 공의의 성취를 간절히 기다리면서 정의와 의를 실천하며 사는 사람을 가리키고(56:1), “진실한 이들”(안셰 헤세드)은 이웃에게 호의적 태도를 보이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정의와 의를 행하고 이웃에게 선을 베풀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죽어가지만 관심을 기울이는 자들이 없습니다. 위부터 아래까지 모두 제 유익만 추구하기에 사회 내에 불법과 불의가 일상화됩니다. 의인의 죽음은 억울한 희생 이상입니다. 실로 재앙/악에서 의인이 거둬 감을 당합니다.

 

(2) 평안에 들어간 의인(2)

 

의인은 한편으로는 부당한 폭력에 희생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죽음을 통해 임박한 재앙에서 벗어나 조상들에게로 옮겨집니다. 여호와와 이웃에게 성실한 사람이 종교적-사회적 불의에 희생당한다는 점에서 의인의 죽음은 불행에 속하지만, 불의한 공동체가 필연적으로 맞게 될 재앙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의인의 죽음에는 구원의 성격이 주어지기도 합니다. 의인이 ‘악’(하라아) 때문에 죽지만, 그는 악의 필연적 결과인 ‘재앙’(하라아)에서 벗어나 ‘평안’에 들어갑니다. 의인은 죽음을 통해 땅에서의 고난과 억압에서 해방을 받습니다. 의인에게 약속된 평안은 ‘평화로운 죽음’이 아니라 평안을 누리는 장소와 관련한 것으로, 악인의 운명(21)과 대조하기 위해 선택된 표현입니다. 의인 조상들과 함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갑니다. “바른 길가는 자”(똑바로 걷는 자)는 의인의 삶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악한 자는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들고(사 59:8), 의인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잠 4:27) 곧장 나아갑니다.

 

이스라엘의 만연한 우상숭배(57:3-13)

습관적으로 거짓을 말하고 탐심이 내면에 범람하며, 어리석음이 우리 눈을 가릴 때, 우리는 영혼을 돌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구원자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만족과 기쁨은 하나님으로만 충족됩니다.

 

3무당의 자식, 간음자와 음녀의 자식들아 너희는 가까이 오라 4너희가 누구를 희롱하느냐 누구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며 혀를 내미느냐 너희는 패역의 자식, 거짓의 후손이 아니냐 5너희가 상수리나무 사이,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음욕을 피우며 골짜기 가운데 바위 틈에서 자녀를 도살하는도다 6골짜기 가운데 매끄러운 돌들 중에 네 몫이 있으니 그것들이 곧 네가 제비 뽑아 얻은 것이라 또한 네가 전제와 예물을 그것들에게 드리니 내가 어찌 위로를 받겠느냐 7네가 높고 높은 산 위에 네 침상을 베풀었고 네가 또 거기에 올라가서 제사를 드렸으며 8네가 또 네 기념표를 문과 문설주 뒤에 두었으며 네가 나를 떠나 벗고 올라가서 네 침상을 넓히고 그들과 언약하며 또 네가 그들의 침상을 사랑하여 그 벌거벗은 것을 보았으며 9네가 기름을 가지고 몰렉에게 나아가되 향품을 더하였으며 네가 또 사신을 먼 곳에 보내고 스올에까지 내려가게 하였으며 10네가 길이 멀어서 피곤할지라도 헛되다 말하지 아니함은 네 힘이 살아났으므로 쇠약하여지지 아니함이라 11네가 누구를 두려워하며 누구로 말미암아 놀랐기에 거짓을 말하며 나를 생각하지 아니하며 이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나를 경외하지 아니함은 내가 오랫동안 잠잠했기 때문이 아니냐 12네 공의를 내가 보이리라 네가 행한 일이 네게 무익하니라 13네가 부르짖을 때에 네가 모은 우상들에게 너를 구원하게 하라 그것들은 다 바람에 날려 가겠고 기운에 불려갈 것이로되 나를 의뢰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겠고 나의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으리라(3-13)

 

우상 숭배자들은 부끄러움을 알지 못합니다. 나무 사이에, 골짜기 가운데, 높고 높은 산 위에서 음란한 우상 숭배를 행합니다. 글까지기에서 급류에 깎여 만들어진 매끄러운 돌은 어찌나 인가가 많은지 제비뽑기를 통해 얻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1) 여호와의 고발과 탄식(3-6)

 

우상숭배자들이 여호와 앞에 소환당합니다(3). “무당의 자식, 간음자와 음녀의 자식들”은 이들이 점과 관련한 이교적 풍습과 풍요제의에 빠진 자들임을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우상숭배로 감히 당신을 조롱하는 자들을 엄중하게 책망하십니다(4). “너희가 누구를 희롱하느냐 누구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며 혀를 내미느냐.” 이들은 죄악과 거짓에 사로잡혀 사는 자들입니다. 우상숭배 가운데 먼저 풍요제의가 고발됩니다(5). “상수리나무”는 일종의 신목(神木)으로 주위가 울타리로 둘러싸인 정원 가운데 있었고, “모든 푸른 나무는 바알의 풍요제의를 고발할 때 등장하는 전형적인 표현으로 자주 높은 산과 언덕과 함께 언급됩니다. 사람들이 특별히 커다란 나무뿐만 아니라 산과 언덕에 있는 잎이 무성한 온갖 나무 아래서 풍요제의를 드립니다. “골짜기 가운데 바위 틈에서 자녀를 도살하는도다”(5b)는 어린아이 희생제사에 관한 고발입니다. 왕정시대 말엽에는 예루살렘 남서쪽을 두른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을 세우고 어린아이를 희생제물로 바쳤는데(렘 7:31; 19:2-13; 32:35), 여기서는 강바닥과 갈라진 바위틈에서 제사를 드립니다. 공개적 장소에서는 풍요제의가, 어둡고 은밀한 곳에서는 어린아이 희생제사가 벌어집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몫이었던 이스라엘이 죽은 우상의 몫이 됩니다(6).

 

(2) 우상숭배의 고발(7-10)

 

당신께 드려야 할 전제와 예물을 우상에게 바치는 패역함을 보고 하나님께서 탄식하십니다. 이스라엘을 위로하시려는 그분의 의지가 이들의 우상숭배로 난파 위기에 처합니다. 골짜기에서 높은 산과 성읍으로 옮겨가면서 우상숭배를 고발합니다. 이스라엘은 높은 산으로 올라가 음란의 잠자리를 펴고(7), 창기의 집처럼 치장한 집에서는 옷을 벗고 우상들과 몸을 섞고 욕정을 배설합니다(8). 골짜기와 산과 성읍을 가리지 않고 온 땅에서 우상들과 음란을 즐깁니다. 산당의 풍요제의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 계속된 음란이었습니다. 성읍에서도 음란은 노골적이어서 집에서 내놓고 우상을 섬깁니다. 여호와의 구원사가 적혀 있어야 할 문과 문설주에는 창녀의 집임을 알려주는 표지가 자리를 차지합니다. “네 침상”과 “그들의 침상”은 이들의 성적 관계를 잘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은 우상들과 놀기 위해 잠자리를 넓게 마련하고, 이를 우상들의 잠자리로 내줍니다. “벌거벗은 것”으로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습니다. 옮거진 ‘손’은 ‘성기'의 완곡어법에 해당합니다. 9-10절은 죽은 자들의 신 몰렉 숭배에 대한 고발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드려야 할 기름과 향품을 몰렉에게 예물로 바치려고 사신을 스올에까지 내려보냅니다. 몰렉을 만나러 스올로 내려가는 길은 멀고도 위험한 여정이라 지쳤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기력을 회복해가며 끝까지 제 길을 갑니다.

 

(3) 여호와의 탄식과 심판선언(11-13)

 

여호와께서 우상숭배의 늪에 빠진 이스라엘이 거짓을 행한다고 책망하십니다(11). 이스라엘은 혼합주의에 빠져 많은 신, 특히 죽음이 두려워 몰렉을 섬기면서도 여호와께 순종한다고 거짓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땅의 역사를 경영하시는 여호와를 “생각하지” 않고 그분의 의지를 “마음에 두지”도 않습니다. 여호와를 떠나 우상을 섬긴 결과가 어떤 파국적 재앙을 초래할지 돌아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잠잠하신 여호와의 의도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해석했습니다. 그분의 침묵은 이스라엘에게 돌아올 기회를 주시려는 그분의 배려였는데, 이스라엘은 이를 그분의 무능력과 무관심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들은 여호와를 경외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우상들을 찾아가 섬겼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반역에 언제나 침묵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분께서 고발인과 재판관의 자격으로 이스라엘의 잘잘못을 밝히 드러내 보이실 것입니다(12). 이스라엘이 내세우는 공의와 행실의 이면을 폭로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공의와 행실이 유익함을 가져다주리라 자신하겠지만, 이는 착각에 불과할 뿐입니다. 여호와께서 심판하실 때 이스라엘은 도움을 구해 부르짖겠지만,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13). 이스라엘이 “모은 우상들”이 참된 신이라면, 구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람은커녕 그 기운도 견디지 못하고 날려가 버리는 우상이 무슨 도움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상에 의존하는 자들은 우상과 함께 멸망에 떨어지고, 여호와께 피신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고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습니다.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물으십니다. 무엇에 심취하여 사는지 궁금해하시고 때로 우려하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관심하시는 것에 관심을 갖고, 무관심하시는 것에 무관심해집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심사가 일치할 때 그분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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