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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05-02)


성숙한 삶을 살아갈 성도

데살로니가전서 5장 12-28절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같이 세상 것을 추구하는 삶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서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살아가길 원하시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구하는 삶이 성도들이 살아갈 삶의 방식입니다. 그러한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그러한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마지막으로 성도들이 기억하고 실천해야할 몇 가지 항목들을 권고합니다. 바울이 권고한 이 항목들은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도 적용되는 매우 유용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한 은혜의 축도로 편지를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공동체를 위한 마지막 권고(12-15)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좋은 관계를 맺을 때 행복하고, 그 관계를 유지할 때 성공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성도들은 인간관계도 남달라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믿음의 공동체를 견고하게 세우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몇 가지를 권고합니다.

12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13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14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15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12-15)

바울은 앞 단락에서 특정 이슈로 야기된 공동체의 문제들을 주의 말씀으로 풀어주며 성도들 간에 위로와 권면을 독려했습니다. 이제 편지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신앙 전반에 걸친 권면과 명령으로 지면을 채웁니다. 특히 끝인사를 제외하고 12-22절까지 보면 도합 16 개의 주절이 등장합니다.

(1) 지도자에 대한 자세(12-13)

리더십은 교회를 세워나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를 개척할 때마다 지도자들을 세우는데 정성을 쏟았습니다. 자신이 오래 머물 수 없기도 했지만, 교회를 세워 가는 원리가 그렇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13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12-13)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교회를 위해 수고하는 지도자를 존경과 예우를 당연히 해야 할 것을 권고합니다. 교회 안에서 말씀을 가르치며 교육하는 영적 지도자들을 인정하고 사랑하며 그들을 존경해야 합니다. 이러한 지도자는 평신도 지도자일 수 있고, 목회자나 장로님처럼 공적인 자리에 있는 분들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땀 흘린 수고와 대가를 평가해 주라고 권합니다. 이런 지도자들은 존경과 예우를 받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제자 디모데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각각 편지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8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느니라(디모데전서 5:18)

6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라디아서 6:6)

다음으로 지도자에 대해 질투하거나 시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권면하는 것에 대해 분노하지 말고 하나님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면서 용납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지도자들을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존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아가페적인 사랑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으로 지도자를 사랑하라고 바울은 성도들을 위해 일하는 교회 지도자들을 존귀하게 여기라고 간곡하게 권고합니다.

(2) 형제들을 향한 자세(14)

다음으로 교회 안에서 형제들에 대해서 서로 책임 있는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 안에는 성도들에게 서로 화목하게 지내라고 경고합니다. 교회 안에는 온전한 자들이 모이는 것이 교회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는 성실한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때로는 부족한 자들과 약한 자들이 있어서 도움을 필요합니다.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건강한 지체로 자라나는 것이 교회 공동체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에게 게으른 자들에게 권계하고,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고 모든 사람들에 대해 오래 참을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충성스러운 사람들에게 칭찬과 격려와 감사의 표현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무질서하게 사는 사람에게 훈계하고, 넘어지기 쉬운 연약한 사람들을 특별한 관심과 사랑의 격려가 필요합니다. 힘이 없는 사람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성도들끼리는 서로 화목하게 지낼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게으른 자들을 권면하고 모든 사람으로 인내하면서 성장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자신만 잘하면 되지 라는 생각을 하지 마시고,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기도하고 돕는 손길이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서로에게 책임 있는 성도들이 되길 원하셨습니다.

(3) 모든 사람들을 향한 자세(15)

사도 바울은 이제 모든 사람들에게 대한 성도들의 태도를 이야기 합니다. 그는 성도들에게 항상 선을 쫓으라고 권고합니다. 항상 선을 쫓는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비록 손해 보는 일이 있을지라도 그러나 옳고 의롭고 선한 일을 좇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잘못된 길로 가는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 내어야 합니다. 원한과 복수를 금지하며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풀도록 힘쓰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이기 때문에 손해 보아야 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손해 보아야할 이유는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명을 따라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헌신과 수고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것들을 꿈꾸며 선한 일을 쫓아가라고 말씀합니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셨던 그 모습대로 항상 자신의 삶에 선을 즐거워하고 쫓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오래 참고 인내하는 그리스도의 인내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어떤 성도들이 되어야 하며,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성도들이 되길 원하십니다. 자신의 책임을 온전하게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개인을 위한 마지막 권고(16-23)

불의한 현실 속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주께서 다시 오셔서 모든 것을 회복하시고, 이 땅에서 신실하게 살아간 성도들을 신원해주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주님을 기쁘시게 못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도 기쁜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16항상 기뻐하라 17쉬지 말고 기도하라 18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19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20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21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22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23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16-23)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영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살아가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성도들이 영적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수고하고 권하고 다스리는 지도자를 잘 알고, 사람 안에서 가장 귀히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든 항상 기뻐하고 기도하며 감사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세 가지는 연결돼 있으며 절대로 분리할 수 없습니다.

(1) 영적인 삶을 항상 유지(16-18)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해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하라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이 불가능해 보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명령이면서 약속이기도 합니다. 마음에 깊이 세기고 실천해야 할 하나님의 뜻을 알려 줍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명령하신 것을 실천할 수 있도록 방법도 마련해 주셨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부족한 모습이 있지만 성도들을 향해 항상 기뻐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쉬지 않고 성도들의 드린 기도를 기억하고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서 온전하게 이루어 가시는 분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의 계획에 변함이 없으신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계획에 변함이 없으시고 신실하시기 때문에 성도들은 비로소 이 세상에서 살면서 항상 기뻐하며,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확신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서 인생 가운데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우연은 없습니다. 현재 삶 가운데 어려움이 있고 고난이 있어도 하나님의 선한 계획 가운데 있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에 삶의 모든 부분을 하나님께 감사로 돌려 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 가운데 변화된 놀라운 복음의 소식입니다.

(2) 영적인 삶을 항상 노력(19-22)

사도 바울은 또 다시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해 성령에 순종하는 삶, 말씀을 좇아서 살아가는 삶을 원하시고,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하고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는 그런 삶이 아니라 늘 삶 가운데 행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그러한 삶을 살라고 권고하십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성도들 향한 계획들이 참으로 선하시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삶을 통해 기쁨과 기도와 감사가 넘쳐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향한 뜻은 어렵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항상 기뻐하고 기도하며 감사하는 삶을 원하십니다.

성도들은 성령의 감동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성령의 사역하는 것을 막지 말아야 합니다. 예언을 성경의 말씀으로 비추어봐서 확고하면 멸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언은 교회를 든든하게 세우고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14:3-4). 그러나 예언이라고 해서 무조건 수용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분별해 합니다. 분별한 뒤에 좋은 것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악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무조건 멀리하고 그 모양이라고 버려야 합니다. 성도들에게 악한 것이 존재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평강의 하나님께서는 친히 성도들의 모든 것을 흠 없이 보전 해주실 것입니다.

성도들의 믿음은 넘어지기 쉽게 자신들에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약속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선악을 분별하고 구별하지 않고서는 결코 거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한 것과 악한 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선한 것을 붙잡고 악한 것을 멀리해야 합니다.

 

문안 인사(23-28)

삶을 이 땅이 아닌 하늘의 시간에서 보고, 오늘이 아닌 영원의 시각에서 보고, 자기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으로 볼 때만 이렇게 살 수 있습니다. 말씀을 깨닫게 하고 거룩한 삶을 가능케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의지할 때만 가능합니다. 평강의 하나님의 미쁘심을 의지할 때만 가능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대한 송영과 성도들에게 대한 문안으로 서신을 마무리합니다.

23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24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25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25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26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 27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주라 28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23-28)

이제 바울은 축복과 인사, 그리고 몇 가지 부탁으로 편지를 끝맺습니다. 먼저 평안을 위한 기원 양식을 이용해 편지 내내 도도히 흘러왔던 중심 주제를 한 번 더 소환합니다. 그것은 ‘성도의 거룩함’입니다.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으로 명명했던 ‘거룩함’(4:3)은 데살로니가 상황에서 성도들이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할 정체성이었습니다.

온갖 핍박과 회유가 끊이지 않았던 신앙 현실 가운데 세상과 타협하거나 옛 습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복음을 붙드는 삶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현실에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정성껏 설명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성도들을 온전하고 거룩하게 하시며, 그 일을 주의 강림 때까지 멈추지 않으십니다. 바울은 이런 하나님의 역사가 성도의 전인격과 생애에 펼쳐진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삼중 표현으로 강조합니다. 바울이 오직 이곳에서만 언급하는 ‘영과 혼과 몸’이라는 표현은 사람이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강조점은 그것을 수식하는 형용사 “온전히”(홀로클레로스)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강림 때 흠 없도록 성도들의 영과 혼과 몸을 온전하게 하신다는 것을 강조합니다(참조. 약 1:4). 성도의 전인격과 생애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주목하게 합니다. 그 하나님이 성도들을 부르셨고 그분이 이모든 것을 이루실 것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자신과 일행을 위한 기도를 부탁합니다. 그는 현재 고린도에서 또 다른 사역으로 몸과 영혼이 지쳐있었습니다. 물론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소식이 큰 힘과 기쁨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기도를 부탁으로 자신의 사역에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참여시킵니다. 이후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의 사역에 든든한 후원자요 동역자가 됩니다(참조, 롬 15:26; 고후 11:9). 바울은 마지막으로 모든 성도가 거룩한 입맞춤으로 문안하고 이 편지를 낭독할 것을 부탁합니다. 비록 바울이 육체로는 부재하지만, 편지로 그들과 함께 있어 거룩한 입맞춤을 할 것입니다.

바울은 23절에서 “평강”을 기원하는 데 이어 마지막 축도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원합니다. 이는 편지 서문 기원에 등장했던 “은혜와 평강”과 인클루지오를 이룹니다.


성도들은 거룩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을 신뢰하며 작은 일에도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 가운데 연약한 형제를 돌아보고 격려하며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성도들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귀한 날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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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05-01)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성도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11절


어떤 사람이 무디(Moody)에게 와서 구원 받은 것 같이 않아서 걱정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무디는 그에게 “노아의 방주 안에는 안전했을까요?”라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물론이죠!”라고 대답했습니다. 무디는 “무엇이 노아를 안전하게 만들었을까요?”라고 하면서, “방주 때문에 안전했을까요? 아니면 노아의 느낌 때문이었을까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은 그 때 느낌으로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구원 받은 사실을 깨닫게 되어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의문들을 대답해 줍니다. 성도들이 어떤 자세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교훈합니다. 사도 바울의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한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마지막 권고입니다.

 

도적 같이 임할 재림(1-3)

이 세상은 밤과 같은 점점 어두워 가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바울시대보다 훨씬 더 영적, 윤리적으로 어둠이 깊어 가고 있는 시대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빛의 자녀들의 사명이 더 클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권면하신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1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2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3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1-3)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 죽은 사람의 문제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지만, 주님의 날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만약 내일 재림하신다면 오늘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라는 화두로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재림을 도적과 같이 임할 것을 전제합니다. 이것은 아무도 그 때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의 재림이 반드시 있음을 말합니다. 주님은 반드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종말에 대해 부정하거나 무시하거나 오해하고 있습니다. 종말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이런 것이 어디 있냐고 조롱하고, 종말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종말이 없다고 무시하면서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종말에 대해 오해하는 사람들은 종말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일에만 열심히 하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든지 간에 예수님의 재림인 종말은 그때가 반드시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에 대해서 최대의 관심사입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재림의 시기에 대해 정확한 시기와 날짜는 알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재림에 시기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7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39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40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42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43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4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태복음 24:36-44)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재림의 시기를 알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 때는 오직 하나님만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서 시기를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들은 거짓 교사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많은 성도들이 그들에게 현혹을 당할 것입니다(마가복음 13:5-6).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징표는 모든 사람들이 분명히 볼 수 있도록 구름을 타고 오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계시록 1:7). 그러므로 성도들이 어떤 사람이 메시아인지 혹은 자신들이 사는 시기가 마지막 때인지 궁금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것들에 집착하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대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재림은 만약이라는 상황이 아닙니다. 예고 없이 도적같이 임하실 현실적인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어떻게 오실 것인지에 대해서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예수님께 다시 오신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성도들에게 중요한 것은 재림하실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림을 준비하는 것을 임산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임산부들은 자신의 출산일을 예정하여 모든 것을 준비합니다.

그래서 재림을 기다리지 않는 사람들은 거짓된 평안과 거짓된 안정감에 사로잡혀 “평안하다, 안전하다”(3)고 할 것입니다(예레미야 6:14). 하지만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날이 날벼락과 같은 일이 되고 맙니다. 모든 것이 끝이 되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다른 기회도 연기도 없습니다. 더 이상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것이 세상의 마지막인 종말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생각을 하며 살아갑니다. 이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하나님 없이도 평안하다, 안전하다’를 외칠지라도 성도들은 ‘지금이 그리스도 안에서 깰 때이다’라고 외쳐야 합니다.

 

재림을 맞이할 준비들(4-8)

같은 사건이라 할지라도 보는 사람에 따라 관점이 다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성공적인 상황이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위험한 상황일 수 있습니다.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 다르게 살아가야할 점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4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5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6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4-6)

 

사도 바울은 먼저 세상 사람들이 종말에 대해 무지한 상황을 잠들어 있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깨어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그 시기와 때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의 재림은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고, 징조들을 통해 이미 알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재림에 대한 성도들의 준비는 그 시기를 아는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깨어서 근신하는 것이 준비입니다.

 

사도 바울은 재림에 대해서 세상을 향한 교회의 책임을 이야기 합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이야기 해주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무지한다고 해서 내버려 둘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의 삶이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들에게 해답이 되어야 합니다.

당신의 삶 가운데 예수님께서 언제 오시든지 재림을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무지한 세상 사람들이 당신의 삶을 통해 예수님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에 대한 해답을 얻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죄 안에서 빈둥거리거나 유혹에 빠져 있거나, 자신의 의심에 공격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날마다 영적으로 교제하며 하나님을 가까이 동행하는 모습을 보여 줌으로 재림의 자세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처럼 성도들은 그렇게 세상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또 다른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잠든 자들을 깨워야할 사명입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할 사명입니다. 복음을 전한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설명합니다.

 

7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8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7-8)

 

사도 바울은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준비 상황을 무장 군인을 비유로 해서 설명합니다. 데살로니가서 보다 후에 기록된 에베소서에는 더 자세하게 소개합니다(에베소서 6:10-18). 이것에서 소개한 흉배와 투구는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무기입니다. 이런 무기를 가지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말합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경계하라, 분별하라’는 의미입니다. 분명하게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삶, 참 진리를 선택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에 욕심이 이끌려서 미혹되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사도바울은 근신하라고 권고합니다. 근신(勤愼)은 ‘self-control’이란 단어입니다. 자신과 싸워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근신하는 삶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근신과 관련해서, 자기 자신을 무장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무장해야할 것들을 ‘흉배(胸背)’와 ‘투구(鬪毆)’를 말합니다.

‘흉배’는 가슴을 붙이는 것은 마음을 믿음과 사랑으로 지키라는 의미입니다. 종종 살다보면 세상이 부럽고 손 내밀고 싶을 때가 찾아옵니다. 그 때에 세상을 의지하지 말고 더욱 더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랑으로 주님의 복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해야 합니다. 그러면 ‘투구’는 머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인 감성과 지성 중에서 지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살다보면, 주님의 뜻과 계획에 대해 질문과 의심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해답을 알 수 없겠지만, 성실하게 살아가다보면, 주님께서 재림하셨을 때, 지금 알 수 없었던 질문들이 명확하고 분명하게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믿음과 사랑이라는 방탄조끼를 입고,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소망의 투구를 쓰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마지막 때를 살아야 합니다. 스스로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싸움을 해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영원히 함께 할 최후 승리(9-11)

마지막에 이기는 자가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인생이 무너질 것 같을 때, 더욱 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 역사의 마지막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9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10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11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9-11)

 

사도 바울은 종말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구원에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의지하고 살아가지만 때로는 너무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그런 상태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려울 때 일수록 삶을 흔드는 환경을 바라보지 않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셨을 때, 이룰 구원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는 다른 시간 개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세우심’(9) 또는 정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구원’과 ‘획득’이란 말을 병행해 사용합니다. 단지 구원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획득하도록 정해 놓으셨다는 의미입니다. 끝까지 구원을 붙잡고 살아가야 합니다. 특별히 이 일은 우리가 자든지 깨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10) 하시는 예수님의 강한 소망에 근거합니다. 나보다 더 나를 갈망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대에 부응해 우리의 영적으로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세상과 구별된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지나치게 관심 가졌던 예수님의 재림 전에 죽은 사람들이나 지금 살아있는 것이 중요한 사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함께 있을 거라는 사실입니다. 성도들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 때문에 영생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미래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성도들이 사는 방식에 영향을 미칩니다.

성도들은 믿음의 형제들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해야 할 일에 대해 피차 격려하고 덕을 세우며 살아가야 합니다(11). 한 몸의 지체로서 서로 격려하고 세워주어야 합니다. 격려한다는 것은 좋은 말만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에게 꼭 필요한 것을 세심하게 주의를 기우려서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도록 서로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누군가에게 격려가 되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성도들의 모습을 보고 그리스도를 더 닮고 싶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므로 혼자 싸우는 전쟁은 패하기 쉽지만, 서로 협력하면 더 쉽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주변에는 영적인 싸움을 하다가 지쳐서 위로를 기다린 성도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미시길 바랍니다.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재림을 소망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항상 깨어 있어서 마음과 생각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연약한 형제들을 향해 서로 세워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자신에게 주신 사명에 끝까지 충성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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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04-02)


천성을 준비하며 사는 성도들

데살로니가전서 4장 9-18절


어느 곳에 댐을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댐이 건설됨으로 수몰 지역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수몰 사람들은 얼마 있지 않아서 수몰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주변을 고치거나 개선시키는 일이 없었습니다. 곧 물에 잠길 것을 굳이 고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마을은 점점 흉물스러워 갔고 제 기능을 하지 못했습니다. 때로는 성도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세상의 것들은 아무 것도 필요 없기 때문에 세상의 일들은 무의미한다고 생각하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나태함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점점 피폐해져 갈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일들을 세 가지로 요약해서 가르칩니다. 앞에서 첫째는 거룩한 삶을 살아갈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길 원하면서,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을 준비하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9-12)

하나님께 구원을 대가없이 받았지만, 그의 뜻을 실천하는 데는 결단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사랑은 말로만이 아닌 수고와 헌신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명하신 최고 계명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9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10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욱 그렇게 행하고 11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12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9-12)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살아가면서 실천해야할 일들을 계속 조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첫 번째는 성적으로 거룩한 삶을 권고한 후, 이제 성도들이 모든 형제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에 대해 매우 흡족하게 생각합니다. 그들의 사랑으로 마게도냐 지역 있던 모든 성도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들의 사랑 실천은 더 이상 권면할 것이 없다고 칭찬합니다. 그러면 바울은 그들에게 사랑을 실천했던 것처럼 계속해서 행하면서 살라고 권면합니다. 사랑이란 아무리 많이 해도 넘치지 않습니다. 끝이 없이 영원한 과정임을 깨닫길 원했던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나누어 주고 또 줘도 더 주고 싶은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이 바로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아낌없이 주신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성도들이라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처럼 교회의 성도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만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5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복음 13:35)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처럼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 동안 자신이 베푼 사랑을 보면서 스스로 만족하고 자랑스러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의 삶은 기나긴 여행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볼 때까지 여행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지금의 영적인 상태에 만족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만족하지 말고 계속 노력해야 합니다. 그 동안 실천해온 것보다 더욱 힘써야 합니다.

성도는 살아가면서 성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자신의 필요는 물론 다른 사람의 필요까지 채우기 위해 성실하고 지혜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려면 먼저 자신의 일에 책임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을 만큼 자신의 일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그런 이후에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믿음이 훌륭하기 했지만 부족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성도들 중에 자신을 일을 아예 그만 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 기대여 구걸하면서 살았습니다.

이것은 동료들에 대한 사랑의 표현은 아닙니다. 그들은 아마 그리스도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준비하고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성도들은 온 시간을 받쳐서 하나님의 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중에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 외에는 다른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다른 성도들에게 큰 짐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동료들을 궁핍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태도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삶을 조용하게 실천하면 살면서 성실하게 자기 일을 하라고 권고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문제도 시끄럽게 돌아다녔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의 일에 참견하지 말고, 오늘 예수님께서 오신다고 할지라도 종용한 삶을 영위하며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라고 권면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충성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2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린도전서 4:2)

시대에 모범이 되고 본이 되어야 할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성도들은 거룩함과 사랑 그리고 성실함으로 자신의 일을 잘 감당하여서 세상 사람들에게까지 칭찬 받고 인정 받는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생활입니다.

당시 헬라 시대적인 상황에 육체적인 노동은 천하게 생각했습니다. 육체적인 노동은 노예들이나 하는 것으로 경시했습니다. 아무런 격려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런 사람들을 향해 겸손히 낮은 자리에서 자신의 수고로 섬기라고 권합니다. 육체적인 노동을 천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스스로 데살로니가에서 텐트를 만들면서 육체적인 가치를 본을 보였습니다. 이제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도 겸손히 행하라고 권면합니다(2:9-11). 그리스도인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품위 있게 살아가야하며 아무에게도 신세를 지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생계를 위해 일해야 이유를 설명했습니다(12).

첫째는 성도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일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 때문에 불이익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종교적인 일에는 열광적이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의무는 게을리 한다면, 세상들은 성도들을 향해 편견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편견을 가지지 못하도록 자신의 일을 가지면서 하나님의 사역을 해왔던 것입니다. 자신의 생애를 위해 열심히 일한 사람은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적극적인 증인이 됩니다.

두 번째 이유는 성도들이 궁핍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생활에 부족함이 없어야 합니다. 바울은 스스로를 돌보기 위해 게으르게 살지 말라고 권고하십니다. 정직한 방법으로 생활을 유지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이 없어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자신의 일을 성실히 감당하면서 작은 일에 사랑을 신천하시길 바랍니다.

 

성도들의 최고 순간(13-18)

세상에서 가장 절망적인 슬픔이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도들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승전가를 부르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때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하실 때, 최고의 영광으로 예수님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13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16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13-18)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면서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일을 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언젠가 다시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이끄실 것이라고 분명히 전했을 것입니다.

재림에 대해 전해들은 데살로니가 성도들 중에 재림과 부활에 대해 잘못 이해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궁금했습니다. 그 날에는 바울의 가르침은 성도들은 준비해야 동참할 수 있다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너무 집착하며 생각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죽은 성도들은 준비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죽은 성도들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먼저 죽은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먼저 죽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있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크게 슬퍼했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소망이 없는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13). 성도들에게는 죽임이 끝이 아니라 영생에 대한 소망이 있음을 깨닫기 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강림하시면 모든 성도들은 하나가 될 것입니다. 먼저 죽은 성도들이 먼저 부활하고, 그 다음에 살아있는 사람들이 그들과 함께 공중으로 이끌려 올라가서 예수님을 영접할 것입니다. 이처럼 죽은 사람들도 다시 오실 예수님의 영광에 동참할 것이므로 그들의 죽음에 슬퍼하지 말아야 합니다. 도리어 서로 위로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실들이 확실하다는 증거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고, 예수님을 부활시키셨던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먼저 죽은 자들을 다시 일으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뒤에 살아있는 자들이 하늘에서 그들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먼저 죽은 자들이라고 불이익을 당하거나 나중까지 살아있다고 더 큰 영광중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죽은 자들도 구원을 놓치지 않고 부활할 것임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고전 15:12-20). 성도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절망하거나 낙심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다시 만날 것이기 때문에 소망으로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믿음의 힘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게 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야 말로 축복 중에 축복이며 능력 중에 능력입니다. 살아도 주님 안에 있고, 죽어도 주님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죽은 자들이 영원히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고 있다고 말씀합니다(14).

삶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성도들에게는 인생의 개가를 부를 순간이 찾아옵니다. 곧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삶이 세상의 일에 완전히 단절된 삶은 아니라고 권합니다. 현재의 삶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앞날에 일어날 일들만 생각하면서 현재 주어진 일들을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허락해 주신 현재의 삶에 대해 성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직장이든지 학교든지 가정이든지 어떤 역할을 주셨더라도 성실하게 임무를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성도들에게 원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비극적인 죽음은 없습니다. 피곤한 사람에게는 단잠이 있듯이, 주님 안에서 죽은 자들에게 죽음은 복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16)하실 때, 성도들은 인생 최고의 승리를 맛볼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은 인류 역사상 가장 기쁜 날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장자는 모든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함께 잠자던 자들이 모두 일어나 주님 앞으로 함께 들려 올라갈 것입니다. 그리고 산 자들도 함께 들려 올라가 영원히 왕 노릇할 것입니다. 성도들이 주님의 재림에 대한 확신을 가질 때 세상의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을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허락주신 현재의 삶도 성실하게 살아갑니다. 성실한 삶을 통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한 복음을 믿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들에게 있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다시 오실 주님과 부활에 대한 소망을 나누며 살아가길 바랍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살아가야 합니다. 죄악에 물들지 않는 경건한 생활과 진심으로 성도들을 사랑하는 신앙 그리고 재림하실 예수님을 항상 맞을 준비를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한 소망을 가진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갑니다. 자칫 예수님의 재림이 멀었다고 경각심이 사라져 무의미하게 육신을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정신을 차리고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면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성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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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04-01)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데살로니가전서 4장 1-8절


종종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이렇게 질문한 성도들은 어려고 힘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려 하는 분들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뜻은 그다지 어렵고 복잡하지 않습니다. 지금 알고 있는 기초적인 하나님의 뜻만으로 실천한다면 얼마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신앙은 어려운 것보다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기초적인 것들이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이제부터 교회의 미래를 내다보면서 그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행동의 특정 영역에 관해서 조언합니다. 믿음 안에서 걸어가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법은 가르칩니다. 그들의 삶 속에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살아감으로 모든 영역에서 그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드러낸 것을 원합니다.

 

더욱 힘쓰는 거룩한 삶(1-2)

구원을 받는 사실은 단 일회적이지만, 믿음 생활은 단일회적 사건이 아닙니다. 믿음은 천국 가는 순간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우리 속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천국까지 계속되는 영원한 축제입니다. 따라서 매일 기쁨과 감사로 가득한 믿음의 진보를 이루어야 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믿음을 실천하라고 권면합니다.

1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2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1-2)

데살로니가 있는 성도들은 이제 막 신앙을 시작한 교회입니다. 바울 일행이 그들에게 가르치는 시간은 고작 약 3개월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사단의 핍박 때문에 급하게 도망치다시피 빠져 나왔습니다. 마치,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낳은 후에 돌보지 않은 고아와 같은 교회처럼 보였습니다. 극성맞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해 영적으로 걱정이 되었습니다. 항상 부모의 심정으로 데살로니가를 방문하고 싶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믿음을 잘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믿음을 가진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바울은 더욱 아름다운 믿음을 소유할 수 있도록 권고합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인지를 가르칩니다. 지금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약 1년 전 만해도 아주 평범한 데살로니가 사람들이었습니다. 평범한 그들이 이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란 무엇인가가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미 가르쳤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 이렇게 배운 것을 행하고 있어서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천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더 많이 하라고 권고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제 막 시작한 교회였지만, 그들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쁘시게 하는 것’은 살아가면서 인생의 제일 된 목적입니다. 성도들의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면 하나님의 기쁨이 성도들의 기쁨이 되고, 날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데살로니가에서 가르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께서부터 받은 말씀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지혜와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이기 때문에 담대하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하는 자유분방한 삶은 위험합니다. 성도의 삶에는 언제나 말씀에 기초해 배우고 훈련받은 대로 행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지금 열심히 행하는 사람들은 더욱 힘써야 합니다. 신앙의 길에 졸업은 없으면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경주는 계속됩니다. 온갖 유혹으로 가득한 현 시대를 사는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거룩함’(3)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거룩하기를 원하십니다. 성도는 육체의 소욕과 주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거룩함을 지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경험이 있습니까? 내가 넘어지기 쉬운 세상의 유혹은 무엇입니까?

 

 

거룩함을 추구하는 삶(3-6)

성도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본받아야 합니다. 모든 인간관계의 원칙은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상대를 대하는 것입니다. 특히 배우자를 거룩함과 준귀함으로 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3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4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5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 6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3-6)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자신이 배운 대로 잘 살고 있는 것을 칭찬하면서 앞으로 더욱 열심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라고 격려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불러주신 뜻은 성결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당시 성적으로 문란한 헬라 문화권 속에서 살던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해 성적으로 순결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히브리서 13:4). 따라서 성도들은 음행을 멀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색욕에 빠지지 말아야 하며 다른 성도들에게 피해를 입혀서도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6)라는 말은 결혼관계를 넘어 성적 죄를 범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 행위를 일삼는 자들에게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어디서나 우상숭배와 성적인 죄에 경계합니다. 이는 성이 가진 파괴력 때문입니다. 성적인 죄는 몸뿐만 아니라 영혼까지도 하나님과의 관계까지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성결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음행과 색욕에 빠지는 것을 벌하신 분입니다. 항상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것뿐 아니라 성결하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음행을 멀리하고 성결하게 살아가길 바랍니다.

 

 

거룩함을 주시는 하나님(7-8)

 

성***********************************

 

7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8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7-8)

 

만일 이 경고를 저버린다면 그것은 성령을 주시는 하나님을 저버린 것과 같습니다(7). 하나님을 모른 사람들처럼 육체의 정욕을 따라 성적인 죄를 저질러서는 안 되며, 거룩하고 순결하게 살아야 한다고 권면했습니다. 만약 성도가 부정한 습관이나 행동을 버리지 않고 계속적으로 성적인 죄를 범하면, 그것은 거룩하게 살아 기도록 부르신 하나님의 뜻과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인도를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주변의 형제자매를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대하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신 배우자를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대하시길 바랍니다. 올바른 사회는 개개인의 거룩한 가치관이 사회 전반에 부리를 내릴 때에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영향력은 거룩한 백성을 통해 세상에 전파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거룩하게 살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고 성령님을 보내 주셔서 거룩하게 살게 하십니다. 거룩하고 순결한 삶을 살기 위해 피해야 하고 버려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육체의 정욕을 따르지 말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시길 바랍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주변에 성적 타락한 일들이 곳곳에 너부러져 있었습니다. 성도들은 경건한 삶에는 결코 끝이 없습니다. 부정한 습관들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당신이 거룩하게 살려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면, 성령은 도우시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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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03-01)


디모데를 파송한 목적

데살로니가전서 3장 1-13절


속담 중에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진행한 일이 힘들 때 끝까지 하라는 권고입니다. 때로는 지내온 반보다 나머지 반이 훨씬 고통스럽습니다. 구원을 받은 것도 기적이지만 구원 받은 후에 그 믿음을 지켜 나가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 이유는 바른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고 싶은데, 주변의 환경이 녹녹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이 성도들을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디모데를 다시 보낸 목적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디모데를 통해 그들에 대한 들려온 소식은 고난 가운데서도 승리하고 있다는 매우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 머물지 말고 더욱 성숙한 성도들로 성장하길 간구하고 있습니다.

 

디모데를 파송한 바울(1-5)

부모님의 마음은 항상 자식을 향한 불타오릅니다. 특히 어렵거나 힘든 자녀가 있으면 그 자녀에게 부모님의 마음이 집중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아버지의 마음 역시, 영적 자녀들을 향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불타오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1이러므로 우리가 참다 못하여 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생각하고 2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건하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3아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위하여 세움 받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4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5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그를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이니(1-5)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볼 때, 두렵고 떨렸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영적인 자녀들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 폭도들에 의해 데살로니가를 쫓겨나올 때, 심리적인 부담은 매우 컸습니다. 그들에게 말씀을 더 이상 전하지 못한 것은 안타까워했습니다. 자신에게 핍박을 가했던 것처럼 데살로니가에 있는 성도들에게 극심한 핍박을 가할 것입니다. 그들이 이것을 견디어 낼 수 있을까 하는 염려가 남아 있었습니다.

(1) 디모데를 보냄(1-2)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다시 보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하지만 사단의 방해로 가지 못했습니다(2:17-20). 데살로니가 서오들은 초신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신학적 지식이 충분하지 못했으며, 그곳에서 일어난 박해가 생각보다 심각했습니다. 나중에 디모데가 바울에게 돌아와서 그들의 상황 보고는 떠날 때 우려와는 달랐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다시 데살로니가에 보내면서 디모데가 다시 데살로니가로 돌아가는 목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일행은 ‘참다 못하여’(1) 자신은 아테네에 남아 있기로 하고, 디모데를 데살로니가로 보내어 그들의 형편이 어떤지 알아보고 그들을 영적으로 격려하는 일을 맡기기로 했습니다. 사도행전 17:15을 보면, 바울이 아테네에 있는 동안 디모데와 실라가 마게도냐에서 아테네로 돌아와 합류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1-2절에 나타난 결정으로 인해 바울과 실라는 아테네에 채루하고 디모데를 다시 데살로니가로 파송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대 사회에서 여행은 오늘날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도 교회의 안녕을 위하여 자신들의 안위는 뒷전에 두고 장거리 여행을 마다하지 않았던 헌신적인 교회 지도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형제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동역자인’(2) 디모데를 파송했습니다. 바울은 자신과 일행이 전한 복음을 ‘우리의 복음’(1:5), ‘하나님의 복음’(2:2,5,9)에 이어 ‘그리스도의 복음’(3:2)이라 부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주체이고 핵심이 시기 때문입니다. 디모데를 파송한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을 강하게 하고 격려하기 위함이었습니다(2). 바울은 사단이 그들의 믿음을 흔들 때 무너지지 않도록 그들을 강하게 만들기 원했고, 시련 앞에 믿음을 지키도록 격려하기 원했습니다.

(2) 박해가 가져온 위험(3-4)

바울은 박해로 인해서 아무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돕는 것이 그들이 세움 받은(케이메다) 목적이라고 밝힙니다(3).

바울의 일행은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성도가 된 이후에도 그들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교육하고 격려하는 일에 힘을 쏟았습니다. 성도를 생산하는 일과 그들이 건강한 성도가 되게 하는 일은 선후를 따질 수 없이 중대한 사명이었습니다.

4a절은 ‘우리는 너희에게 우리가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을 미리 말했다’고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일행과 데살로니가 성도들 모두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우리’(inclusive we)입니다. 바울은 일행의 환난(데살로니가전서 3:7)만 아니라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환난(데살로니가전서 1:6; 3:3; 2:14)을 전부터 예견했고, 예견대로 실제 박해가 찾아왔습니다(4b).

(3) 디모데를 보낸 이유(5)

5절은 바울이 디모데를 보낸 목적을 한 가지 더 제시하는데,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라고 소개합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우리’를 사용하다가 여기에서 ‘나도’라고 단수를 사용한 것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생겨난 일을 알기 위해 디모데를 보내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이 자신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시험하는 자’, 즉 사단은 하나님의 일꾼들의 사역을 좌절시키기 위하여 휘방하거나 올가미를 놓아 영적 붕괴시키고자 합니다(마태복음 4:3; 고린도전서 7:5). 시험하고 박해하지만, 그들은 시험을 이겨내고 ‘우리 수고를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참조. 고린도후서 15:58; 빌립보서 2:16) 바울의 일행은 디모데를 파송했습니다. 후에는 아테네와 고린도에서 디모데가 가져오는 소식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을 허락하시는 목적은 성도들을 괴롭히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환난의 도가니를 통과해 정결하고 성숙한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을 발견하고 성장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현재 삶의 모습이 영적 자녀들에게 좋은 본이 되어야 합니다.

 

영적 자녀를 향한 기쁨(6-8)

영적 지도자, 말씀을 전하는 자의 보상은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 믿음 가운데 굳게 서있는 일을 보는 일입니다. 그들이 날마다 믿음으로 성장하고 어려움 속에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모습이 기쁨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보면서 그 기쁨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6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7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8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6-8)

사도 바울에게 주는 기쁨은 큰 것에 있지 않습니다. 디모데가 데살로니가에서 돌아올 쯤에 바울은 핍박으로 아덴을 떠나 고린도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도 또한 극심한 핍박과 환난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잘하고 있는 소식을 전해들고 극심한 어려움을 겪는 중에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1) 데살로니가 성도의 애정(6)

마침내 디모데가 실라와 함께 돌아왔습니다(사도행전 18:5).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라는 구절로 볼 때 데살로니가전서는 디모데의 귀환 직후에 고린도에서 쓰였을 것입니다. 마음에 근심과 걱정을 갖고 있던 바울은 디모데가 가져온 좋은 소식을 듣고 기쁨의 환호를 질렸을 것입니다.

디모데가 가져온 소식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소식은 그들이 영적으로 믿음과 사랑이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8회 등장하며, 사랑은 7회 등장합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 충실했습니다. 박해로 인해 낙담하지 않고 서로 사랑은 서로 밀접한 관계 속에서 제시되는 경우가 많으며, 갈라디아서 5:6에서 바울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형제들과 전도자들을 향한 사랑에서 확인되고 있다고 말합니다(‘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둘째 소식은 그들이 바울의 일행에 대한 ‘좋은 기억’을 계속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어쩔 수 없이 데살로니가를 떠날 수밖에 없는 과거 상황에 대해, 감사하게도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고 나쁜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디모데는 그들이 바울과 일행을 간절히 보고 싶어 한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것은 바울과 선교팀이 느끼는 것과 동일한 감정이었습니다.

(2) 데살로니가 성도의 상태(7-8)

데살로니가 성도만이 아니라 바울과 일행도 어려운 시간(궁핍과 환난, 7절)을 겪었습니다. 그런 일행에 디모데가 좋은 소식(6절의 ‘믿음과 사랑’, ‘우리를 잘 생각하여’를 ‘믿음’이라는 단어로 요약)을 전해주었을 때, 일행은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8절은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고 하는데, ‘데살로니가 성도 여러분이 주 안에 굳게 서 있다는 것을 이제 알았으니, 우리는 이제 살맛이 난다’ 정도로 의역이 가능합니다. 믿음 안에 굳게 서는 것의 중요성은 바울이 다른 서신들에서도 강조하는 바입니다(고린도전서 16:13; 갈라디아서 5:1; 빌립보서 1:27; 4:1). 성도들이 핍박에 굴복하지 않고 믿음 안에서 인내하였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을 때 사도는 기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영적인 지도자들과 아름다운 교제를 통해 자신의 성장한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시험과 환난 가운데서 데살로니가 교회가 어떻게 믿음을 지킬까 걱정했는데, 그들이 굳게 선 것을 보고 사도 바울이 하나님 앞에 안위를 얻고 감사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자신의 성장된 모습에 지도자들에게 감사를 표현할 때, 지도자들이 많은 위로를 받고 더욱 힘 있게 사역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작은 배려는 영적 지도자를 세우는 일들을 할 것입니다.

 

영적 자녀를 향한 간구(9-13)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모든 것을 주시면서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신 기쁨은,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 위에 굳게 서있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진정한 열매입니다. 사람들은 짧은 인생 동안에 많은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선택합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과 거룩함’을 선택하며 살아야 합니다.

 

9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 10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 11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갈 수 있게 하시오며 12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13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9-13)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간절히 보고 싶었습니다. 간절히 다시 보고 싶은 이유는 거짓 교사들처럼 어떤 보상을 바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믿음 생활을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그들을 위해 이 세 가지를 간구했습니다.

(1)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볼 소망(9-10)

바울 일행은 그들이 느끼는 감사를 하나님께 보답할 길이 없다고 말합니다. 문자적으로 ‘우리가 기뻐하는 모든 기쁨’(9)이라는 헬라어 표현은 그들이 느끼는 기쁨의 감정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용됐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감사만 표현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향한 간구를 더하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10).

바울은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기’ 원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데살로니가전서 1-3장의 분위기를 볼 때 바울이 이 교회에 심각한 결점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 표현은 그들의 믿음이 지속적으로 성장해야 할 필요성을 바울이 느꼈고 그 부분을 돕기 원했다는 의미입니다.

(2) 그들에게 돌아가 도울 수 있도록 기도함(11-13)

바울은 희구법(optative)을 사용하여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소원을 아뢰는 기도를 합니다. 소원의 내용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데살로니가를 다시 방문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길을 인도해달라는 간구합니다(11). 둘째는 데살로니가 성도 서로와 모든 사람에 대해 사랑이 차고 넘치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12). 셋째는 첫째와 둘째 기도가 이루어진 결과 그들의 마음이 흠 없도록 종말에 하나님 앞에서 세워지기를 간구합니다(13). ‘그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참조. 슥 14:5[칠십인역]; 신명기 33:2)와 ‘거룩함에 있어서’라는 동족어의 중복적 표현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마음이 성도라는 이름답게 ‘거룩’하게 준비되기를 바라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바울의 감사와 간구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격려와 교육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들이 핍박을 받는 중에 믿음을 잘 지켜온 것에 대해 격려하면서도, 그들이 완벽하지 않음을 상기시키며 성도와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을 통해 더욱 성장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재림을 맞이해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그냥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화산이 폭발하듯이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곳에 절대로 인위적인 사랑이 끼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진실한 사랑은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랑을 합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에서 사랑이 넘치는 삶과 거룩한 삶은 절대 떨어질 수 없습니다. 거룩함이 없이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성도들은 날마다 사랑과 거룩함이 충만한 삶을 살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본받아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거룩함으로 세워가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부드러운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험악한 세상을 승리할 수 있는 힘이 이곳에서 나옵니다. 날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며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거룩한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기대하시는 진정한 열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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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02-02)


데살로니가를 통한 감사와 소원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20절


부모님은 자녀들이 상을 받아오면 자랑스러워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액자에 넣어서 벽에 걸어두기고 받아온 트로피는 잘 보이는 장식해 두기도 합니다. 자녀들은 이러한 부모님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기뻐합니다. 자녀의 성공은 자신을 영광스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당신을 기쁘게 하고 희망에 가득 차게 합니까? 당신이 자랑스러워한 것들이 하나님께 보셨을 때, 기쁘시게 하는 것들이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감사합니다. 그가 감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자랑거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고난 속에서 말씀을 통해 승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난 속에 있는 성도들은 말씀으로 위로하게 위해 성도들을 다시 만나길 원했고 자랑스러워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감사(13-16)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 정도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말씀의 능력은 성도가 환난에 처해 있을 때 그 빛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고난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난 가운데서 성장하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통해 여러 가지 조건들이 있었습니다.

13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14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13-16)

바울은 성도들이 복음 때문에 고난을 받았지만, 말씀으로 그 고난을 이겨내는 것을 기억하면서 벅찬 마음을 토로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 안타깝게 여기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13)

첫 번째 감사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그 짧은 시간에 복음을 증거했지만, 많은 고난을 당하면서도 성장하고 신앙이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 말씀을 받는 태도였습니다. 그들은 바울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일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실제로 그러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며 지금 성도들 안에서 ‘또한(και)’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또한’이 보여주는 것은 말씀의 능력이 바울에게 나타났으며, 동일한 능력이 성도들 안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말씀을 받을 때,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받은 말씀이 지금까지도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심령 속에서 생명으로 역사한다고 감사합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스스로 지어낸 인간의 말이라고 하여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었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바울의 말씀을 인간적인 차원의 말로 국한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대단한 용기를 심어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삶 속에서 말씀이 살아 움직이도록 합니다. 말씀이 믿음을 견고하게 만들어 주고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아주고 고통을 통과하는 원동력입니다.

(2) 유대 성도들을 본받음(14)

다음 감사의 조건은 특별히 복음을 받아서 세워진 성도들과 교회들을 본받는 자된 것으로 감사합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1:6에서 사도들을 본받은 자들로서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제 본 절에서는 유대에 있는 교회를 본받았다고 하는 것은 그들의 믿음의 진정성을 보다 확고히 해줍니다. 그것은 유대에 있는 교회에서 일어난 것처럼 진정한 믿음을 갖게 됨으로써 자연히 수반되는 박해를 견뎌내고 믿음을 지킨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 성도들에게서 신앙을 본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본받은 것은 바로 고난까지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믿었던 사람들과 교회들이 고난 가운데서 세워졌습니다. 고난 중에서 흔들림이 없이 세워졌습니다.

참 신앙의 표지 중에 하나가 바로 고난입니다. 고난이 없는 것이 잘 된 것이 아니라 고난 있는 것이 참 신앙의 증거이고 표지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 들림으로 말미암아 능력과 축복 그리고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복음을 받아들일 때, 복음으로 말미암아 고난과 대가를 지불하게 만듭니다. 은혜를 받으면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당신의 신앙이 진실하다는 것을 증거입니다.

 

박해자들의 정체(15-16)

철저히 말씀대로 살면 살수록, 세상과 불화하고 고난은 불가피해질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하는 그 일은 죄를 채워서 주의 분노를 불러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삶인 것을 알 때, 고난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을 핍박하는 그들에게 대해 정체를 밝힙니다.

15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16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받게 함을 그들이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그들에게 임하였느니라(13-16)

믿음의 역사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고난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들은 그 고난을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고난에 동참했습니다. 그 고난은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방해하는 유대인들에게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복음 전파에는 감사와 고난이 항상 따라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핍박한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대해 범죄한 악행들을 낫낫이 들어냅니다.

(1) 예수님과 선지자들을 죽임(15a)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 구약의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예수님을 실제로 죽이는 데 관여한 사람이 실체로는 소수지만, 그들의 지도자들의 악행에 소극적으로 방관함으로써 이스라엘 전체는 메시아를 거절하였고 메시아의 죽음에 공모자가 되었습니다. 빌라도가 손을 씻어 자기 책임을 부인하고 유대인들이 ‘그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돌리라’(마태복음 27:25)고 랬을 때 유대인들은 자신의 죄를 시인한 셈입니다.

그러니 주의해야 할 것은 바울의 이러한 진술은 유대인을 비난하는 데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유대인들이 유대의 그리스도인을 핍박한 것은 주 예수님과 선지자들을 핍박한 것처럼 악한 죄이며, 마찬가지로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을 핍박한 이방인들도 동일하게 악한 죄를 지었다는 논리를 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바울은 반유대주의를 조장하기보다는 예수님과 그의 백성들에 반대하는 ‘모든 자들’의 죄를 지적하는 것이며, 이러한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음을 주장하려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을 쫓아냄(5b)

유대인들은 성도들을 쫓아냈습니다. 사도행전 8:1-3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성도들을 이스라엘 땅에서 몰아냈습니다. 여기서 바울과 그 일행이 쫓겨난 일은 데살로니가에서 쫓겨난 것(사도행전 17:5-10)과 베뢰아에서 쫓겨난 것(사도행전 17:13)을 말합니다.

바울은 그 유대인들이 자신들도 내좇았다고 말함으로써 자신과 그 일행을 예수님과 선지자들의 반열에 올려놓고 있습니다. 동시에 바울은 자신들의 사도성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17:10을 보면 바울과 실라는 데살로니가 인들의 폭동을 동반한 박해로 인해 그 도시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박해를 바울 팀이 당했고, 또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지금 경험하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음(15c)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수직적인 관계에서 실패했음을 나타냅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초대 교회를 박해할 때 그랬던 것처럼 유대인들은 기독교를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4:1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더욱 많이 힘쓰라’고 권면합니다. 4:3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거룩, 순결과 연결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사자들을 박해하였고(2:15) 죄를 항상 채움으로써(2:16)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었습니다.

(4) 모든 사람들에게 대적이 됨(15d)

유대인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대적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고대로부터 타 민족에 대한 적대감이 강했습니다. 타키투스는 유대인들이 서로에게는 신실하지만 타 민족에 대해서는 증오와 적대감만을 보였다고 썼습니다(History, 5.5).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가 유대인들에 대해 이런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 것은 유대인들이 로마의 공적 제의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바울이 여기에서 ‘유대인이 모든 사람의 대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타키투스가 말하는 의미는 아닙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반대를 일삼은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5) 그들의 대적하는 행동(16a)

유대인들의 반대로 모든 사람에게 전해져야 하는 복음이 전해지지 못하므로(16a) 모든 사람의 대적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과 구원의 역사가 그를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에 대하여 감하게 저항하였습니다(사도행전 13:45-50; 14:2,19).

(6)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노하심(16b)

16a절에서 보듯이 바울 팀이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해 복음을 전하려 하지만 유대인들이 막았습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죄를 항상 채우게 되었습니다. 학자들은 이 ‘노하심’을 다양하게 해석합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유대인 추방령(주후 49년) 혹은 예루살렘에서의 유대인 학살 사건(주후 49년) 혹은 심각한 기근(주후 47년) 혹은 예루살렘의 멸망(주후 68-70년)을 가리킬 수 있다고 봅니다. 이 사건들 중 무엇을 가리키든,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유대인들의 완고함이 현재와 미래에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바른 믿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오히려 감사하고 고난 가운데 믿음으로 승리하리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일은 주의 분노를 불러오지만, 그 세상 앞에 굴복하지 않다가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을 주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믿음이 마음속에서만 맴도는 아니라 마음속에 역사하는 것을 보면서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바울의 소원(17-18)

사랑하는 사람들은 만남이 그리워지고, 만나면 서로 헤어지기 싫어하고, 그리고 옆에 있어도 보고 싶어 합니다. 성도 간의 사랑 또한 이런 사랑은 아니지만 친밀해야 합니다. 그 관계에서는 탐심이 있을 리 없고 사람을 기쁘게 하거나 사욕을 취하려고 일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자신의 친밀한 사랑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17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18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17-18)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알리고 싶은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인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1) 그들을 만나려는 노력(17)

데살로니가에서는 바울이 생명의 위협 때문에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떠나 있었습니다(사도행전 17장). 그의 마음은 언제나 그들에게 있었고 항상 만나기를 사모했습니다. 떨어져 있었기 그들을 잊어버리거나 버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떠난 것은 얼굴이 마음은 아니라는 것과 그들을 향한 마음이 얼마나 열망하고 있는지를 알리고 싶었습니다(17). 바울은 자신을 ‘고아(ἀπορφανιξω)’에 비유함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그리워하고 있었는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비록 먼이러한 목자의 심정은 주님의 마음입니다.

(2) 사탄의 방해(18)

바울은 여러 번 데살로니가 교회로 다시 돌아가려고 계획했지만, 뜻을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가고자 하는 바울의 마음이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여의치 않아서 갈 수는 없었습니다.

가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지만, 가로 막은 것은 ‘사단의 방해’였습니다. 사단의 황동 목적은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또한 유대인들로부터의 방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습니다. 본문에서 ‘엥콥토’는 도로에 홈을 파서 말이나 수레의 통행을 금지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마 ‘사단의 방해’는 데살로니가에서의 박해나 바울의 질병이었을 것입니다. 사탄은 데살로니가 선교가 실패하길 원했고, 바울은 사탄과의 영적 전쟁을 감당해야 함을 느꼈습니다.

사단은 언제나 개인적으로 싸움을 붙이고 불화를 조장하기 때문에 주의해야 합니다. 성도 간의 관계는 인간관계, 그 이상이며 영적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인간관계 속에서 혹은 성도간의 교제 속에서 타인에게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합니다.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25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26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에베소서 4:22-27)

사단은 성도들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들이 서로 협력하면 능력이 강력해지기 때문에 구축하지 못하도록 성도들끼리 서로 적대시 하도록 방해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교회의 능력을 약화시키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사단의 방해와 반대에 부딪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울의 자랑(19-20)

사람들은 무엇인가 자랑거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과 성도들의 자랑거리에 대한 대상이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자랑거리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9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20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19-20)

세상 사람들의 자랑거리나 기쁨이나 소망은 세상 것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랑과 소망은 바로 성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가장 기뻐하시고 천하보다 소중한 존재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해 자신의 ‘소망’이요 ‘기쁨’이며 ‘자랑의 면류관’이라고 했습니다.

사탄의 방해가 있지만,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영적 성장과 열매에 대해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바울에게 소망과 기쁨과 자랑의 면류관은 바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입니다(19). 바울은 그들 때문에 면류관을 받을 것이라고 하지 않고, 그들이 면류관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13에서 회심자들을 ‘열매’라고 하였고, 고린도전서 9:2에서는 ‘사도됨에 대한 인침’이라 하였고, 빌립보서 4:1에서는 ‘기쁨이요 면류관’이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분투하고 땀 흘린 바울과 동료 선교사들에게, 그들을 통해 구원하신 영혼들 자체가 하나님이 주시는 면류관입니다.

20절에서 바울은 그의 선교팀이 데살로니가 성도들로 인해 영광과 기쁨을 이미 얻었음을 재확인하면서, 동시에 종말에는 더 충만한 영광과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계획을 등한히 여기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사도 바울처럼 사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당신에게 풍성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인간고나계가 바르게 세워지며 교회 속한 성도들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사람들을 살리는 일과 세우는 일에 충성을 다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신실한 믿음으로 살아가려고 할 때, 시험과 핍박이 당연히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끌면 순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받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주님 없는 인생의 평탄함보다 주님과 함께하는 고난의 삶을 선택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연약한 성도들을 세우는 일에 최선을 다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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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02-01)

 


모범적인 전도자 바울

데살로니가전서 2장 1-12절


같은 일을 하더라도 그 일을 하는 목적에 따라 하려는 자세가 달라집니다. 목적이 분명한 사람은 일에 열정을 가지고 하지만, 타인에 의해 마지못해 무기력하게 일을 해나갑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사람은 사람들이 볼 때에만, 자신을 기쁘게 하려는 사람은 자기에게 이익이 될 때에만 열심히 일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일행이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고린도로 피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을 무너뜨리기 위한 바울의 사역에 대한 공격이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에 대한 일들을 돌아보면서, 자신이 얼마나 순전하고 신실하게 사역했는지를 증언합니다.

 

복음을 위한 진정한 헌신(1-4)

좋은 환경은 항상 좋은 결과를 약속하지는 않습니다. 풍성한 삶을 사는 비결은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환경을 초월합니다. 오히려 주어진 환경을 좋게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환경이란 언제나 변할 수 있습니다.

 

1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2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3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 4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1-4)

 

사도 바울 일행이 전했던 유럽 선교의 일정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바울은 아시아에 복음을 전하기 원했지만, 성령께서 아시아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류시키시고 유럽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유럽 지역에 첫 선교지는 빌립보였고, 두 번째 선교지가 데살로니가였습니다. 이 두 지역에서 바울은 엄청난 대가를 지불합니다. 그의 모습을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2)라고 소개합니다. 데살로니가에서 계속적으로 어려움 중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더 나가서 유대인들이 일으킨 소동으로 인해 밤중에 급히 떠나야 했습니다(사도행전 17:1-10). 이러한 일들은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 적은 열매를 얻었기 때문에 실패한 헛된 일처럼 보였습니다. 바울은 그것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1).

 

세상에서 일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고 수고한 것만 헛되지 않습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지만 반드시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하십니다(시편 126:6). 지금은 그 열매가 희미하게 보이지 않아서 어리석어 보이지만, 믿음으로 순종하며 나가는 것은 때가 이르면 30배, 60배 100배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일들은 아무리 화려해도 결국은 헛된 일이며, 허망한 일이 많습니다. 기쁨으로 심어서 눈물로 거두는 일들이 허다합니다. 그러나 결코 헛되지 않는 일은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이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열매 맺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더 나가서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을 쫓아낸 반대자들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속였다고 모함했습니다. 바울이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다가 어려움이 생기면 가차 없이 떠나 버리는 순회 철학자나 다름없다고 비난했습니다.

이러한 비난을 염두에 두고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동기와 목적을 설명하여 반대자들의 비난에 반박하고 있습니다. 순전한 마음과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자세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스스로 이익이나 기쁨을 위해서가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그 당시는 지역에 대학이나 학교가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순회 철학자들과 순회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가르침과 철학을 전하고 대가를 받았습니다. 많은 헬라 철학자들이 전 그리스 지역을 다니면서 그렇게 했습니다. 바울도 종종 그런 오해를 받았습니다. 마치 떠돌이 순회 철학자들처럼 복음을 통해서 돈을 버는 사람처럼, 자기 경제적인 이익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는 사람처럼 오해해서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복음 전하는 자세를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에게 자세하게 말합니다. 자신이 데살로니가에 갔던 것은 어떤 궤계나 속임수 그리고 아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고 간 것이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서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람을 보지 않고 세상의 인정과 명예를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기쁨을 위하여 한 일만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복음을 위한 헌신된 자세(5-10)

사람들의 실수와 허물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하나님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특별히 복음 전할 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자세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복음 전도자의 말만 보는 것이 아니라 삶과 태도를 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할 때 어떤 태도로 복음을 전했는지에 대해 나누고 있습니다.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시느니라 6또한 우리는 너희에게서든지 다른 이에게서든지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였노라 7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8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9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10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하였는지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5-10)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개척했던 장본인이고, 예수 그리스도께 위임받은 사도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그들에게 권세와 권위를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권위로 나가지 않고 오히려 유모(乳母)처럼 섬기는 자로 나갔다고 말합니다.

진정한 영적인 권위는 섬김의 권위이며 희생의 권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갔던 것은 무엇을 얻으려고 갔던 것이 아니며, 복음을 줄 뿐 아니라 할 수 만 있다면 생명까지도 너희를 위해서 주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이유가 ‘너희는 나의 사랑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8).

바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초청은 우리들로부터 대가를 요구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생명을 통해 구원의 복음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혹시라도 돈 때문에 사역한다는 오해를 받을까봐 그는 손수 텐트를 만들어가면서 자비량(Tent Maker)으로 일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복음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것을 헌신하고 수고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흠이 없는 삶을 살아온 것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합니다.

 

10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하였는지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10)

 

바로 이 시대에 모든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는 가장 필요한 말씀입니다. 이 시대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세와 삶 그리고 말과 행동이 하나 된, 언행일치(言行一致)의 삶이 매우 중요합니다. 복음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실수와 잘못 때문에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세상이나 하나님 앞에서 성도들이 거룩하고 옳고 흠이 없는 사람으로 설 수 있어야합니다. 주는 사람이 받는 사람보다 더 복됩니다. 우리가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은 생명을 담고 있는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날마다 하나님 앞으로 더 가까이 나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주어진 상황 속에서 거짓과 탐심의 탈은 믿음의 생활에서 제거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목자의 심정으로 사람들을 순수하게 사랑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생생하게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복음(11-12)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통해 복음을 전하길 원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도록 명령하셨을 뿐 아니라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방법은 아버지의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주신 말씀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도 주신 말씀입니다.

 

11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12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11-12)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제 막 설립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린 자녀를 대하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사랑으로 위로하고 권면합니다. 부모의 심정으로 그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말로 가르칠 뿐 아니라 몸소 흠 없이 바르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영광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때까지 만족함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사랑이 없기 때문에 사랑의 원형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뒤에야 사랑을 나눠 줄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서 찾을 수 있는 대표적인 사랑은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입니다. 성도들이 나눌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은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때로 젖먹이를 기르는 어머니와 같은 마음으로, 때로는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성도들을 훈계했습니다. 이런 사역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 모두의 몫이 돼야 합니다.


복음이 자신에게 전달될 때까지 수고와 헌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수고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들도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지속적으로 교회 안에서 영적인 자녀로 양육을 받고 또 다른 사람을 양육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전히 서서,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감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힘이 있게 복음을 전파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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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01-01)

 


믿음의 본을 가진 성도들

데살로니가전서 1장 1-10절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 생태계를 보면 식물이 쉬지 않고 계속 성장해 나갑니다. 그들은 먹이 사슬을 따라 성장해 갑니다. 즉 강자는 약자를 먹고 약자는 또 약자를 먹습니다. 이런 먹이 사슬을 속에서 자연생태계는 유지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 성도들이 어떻게 성장되어 나가겠습니까? 성도들의 성장은 선배 신앙인들로부터 후배들에게 본을 보여줌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일행은 2차 전도 여행 때 데살로니가 지역에서 어렵게 복음을 전해서 데살로니가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설립될 때 매우 핍박이 심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두고 다른 지역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막 탄생한 교회 성도들이였지만, 근동에 있던 모든 성도들에게 본이 되었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 바울은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바울의 인사(1)

‘아름다운 교회’는 단지 사람이 많고 건물이 아름다운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이 넘치는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그런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1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1)

데살로니가 교회는 아직 어린 교회였습니다. 빌립보 교회 다음으로 유럽에서 두 번째 설립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니아의 수도였습니다. 헬라 문명으로 화려한 도시이며 무역과 상업 그리고 군사와 정치에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종교적으로는 각 지역으로부터 각종 이방 종교들이 가득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많은 선교 준비하고 많은 기대를 가지고 갔던 도시가 데살로니가였습니다. 빌립보에서 전도하다가 고초를 격은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로 도착해서 복음을 전합니다(사도행전 16장). 이곳에서 많은 열매를 거둡니다. 많은 경건한 헬라인들과 귀부인들이 바울이 전하는 영접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자 데살로니가에 있던 유대인들이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바울 일행을 끌어내리려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럽 선교 중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고생을 데살로니가에서 치렀습니다. 이렇게 바울이 2차 선교여행 중 짧은 사역기간 동안에 세워진 교회가 바로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데살로니가는 세상 헬라 문화가 강력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복음을 받아드린 성도들은 신앙생활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바울도 데살로니가에서 사역할 때 유대인들의 폭동으로 죽이려 했었습니다. 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막 탄생된 교회를 두고 도망치듯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고린도까지 피신하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생활하면서 교회를 개척하지만 그에게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항상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해서 기록한 서신이 바로 ‘데살로니가 전서’였습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성경 중에 하나가 ‘데살로니가전후서’입니다.

 

사도 바울의 염려하는 마음은 목회자의 심정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를 나오면서 남겨 두었던 영적인 아들 디모데를 통해서 데살로니가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직접 가지 못하지만 그의 마음을 담아서 대신 편지로 전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에게 축복과 감사하면서 그들을 위로와 격려하고 있습니다.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데살로니가 교회는 건강한 교회였습니다. 그 안에 믿음의 역사가 있었고, 사랑의 수고가 있었고, 그리고 소망의 인내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믿음이 일하고 있었고, 사랑으로 수고하고 있었고, 어려움은 있지만 소망 가운데서 인내하면서 복음을 지키고 믿음을 지켰던 교회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감사와 격려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택함으로 받고 사랑 받는 형제임을 확인시켜 주면서 위로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하나됨(2-5)

주님을 본받으며 다른 사람에게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은 연약한 교회를 든든하게 세우는 힘이 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다음과 같이 문안합니다.

 

2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3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4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5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2-5)

 

항상 사도 바울은 연약한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우려와는 다르게 믿음으로 싸워나가는 모습은 다른 지역 교회들에게 모범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아직 어렸지만 믿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행하였고, 사랑으로 헌신의 수고하였고, 그리고 소망을 갖고 끝까지 인내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을 중요한 모습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러한 모습으로 성장하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감사는 먼저 ‘믿음으로 행한 일’을 언급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며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성공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성공을 가져다주십니다. 하나님을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만 위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그렇게 행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믿음으로 행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수고입니다. 사랑은 수고에서 나옵니다. 종종 그저 행해야 하기 때문에 수고하고 있진 않습니까! 사람들의 눈에 의식해서 일을 하고 있진 않습니까! 오늘날 이기적인 성도들은 사랑의 헌신이 약해졌기 때문에 성령의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달랐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소망을 갖고 인내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온갖 종류의 일들을 인내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 안에 소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주변에 모든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힘든 과정 속에서도 인내할 수 있는 것은 소망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사실에 그들의 소망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젠가는 다시 오신다는 사실이 소망이었습니다. 그 소망이 우리의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무기력한 삶에서 벗어나고 하나님의 일을 기쁜 마음으로 하기 만듭니다.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큰 특권이고 최고의 복입니다. 이 특권과 복을 받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삶 속에 기도와 감사가 쉬지 않고 계속되는 것이고, 두 번째로 복음의 능력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믿음에는 권능의 역사가 항상 따릅니다. 예를 들면, 믿는 사람들의 언어와 행동에는 그리스도인의 열매가 나타납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진실한 언어와 행함으로 이웃에게 전달됩니다. 기도가 응답되고 나날이 변화되어 가는 모습은 주위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줍니다. 또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 산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도는 선택받는 복된 자들이며, 자기 삶에 복음의 증거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복음이 처음 그들에게 전파될 때도 능ㄹ꽈 성령과 큰 확신이 함께 역사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당신은 신앙생활의 시작이 오래되었든지 아니면 짧던지 기도와 감사가 생활 속에서 계속되어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을 향하여 헌신된 사랑으로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변 사람들에게 복음의 증거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성령의 능력과 확신으로 전할 수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 나타나는 역사(6-8)

믿음은 관념이 아니라 능력입니다. 믿음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그 상황을 뛰어넘어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삶으로 변화시킵니다. 불신자들은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며 사는 성도들을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부러워합니다. 자신들도 그런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 부흥의 비밀입니다.

 

6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8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6-8)

 

비록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한 사람들이지만, 어려움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킨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통해 들려온 소식은 하나님께 온전한 감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특별히 감사할 것은 환난 중에도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서 주님을 본받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이들은 이제 막 믿음 생활 함에도 불구하고 바울과 예수님을 본받아서 마게도니아와 그리스 지역에서 모든 믿는 사람의 본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자신들도 이제 막 믿는 교회였지만, 복음을 전하고 선교하는 교회였습니다. 그 당시 알렉산더 대왕이 통치했던 마게도니아와 아가야 지역과 그리스 전 지역에 믿음의 소문이 펴지고, 믿음의 본이 된 놀라운 역사들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동일한 복음과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복음은 말로 전해지지만 그 말이 믿어지려면 성도의 삶 속에 복음의 능력이 좋은 본보기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과 복음의 능력은 애써 소문을 내지 않아도 그리스도의 향기를 사방에 퍼뜨립니다. 그런데 이런 삶을 가능케 하는 가장 강력한 힘은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모든 믿는 자의 소망이고 확신이며 능력의 근거입니다.

신앙은 오래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르게 믿고 제대로 믿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본 된 신앙생활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본받을 대상이 있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말씀 앞에 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의 믿음의 사람들을 본받는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유익을 얻는 것은 믿음의 모델들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믿음 생활이 얼마 되지 않을지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신앙 생활할 때 가장 중요한 신앙의 요소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일입니다. 그리고 모든 믿는 사람들의 본이 되는 일이 중요한 신앙의 요소입니다. 믿음의 소문난 교회와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믿는 자에게 전파된 복음(9-10)

다른 사람의 본이 된다는 것은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결단하는 모습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그런 아름다운 모습이 있었습니다.

 

9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10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9-10)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가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힘들게 증거한 것이 소문이 납니다. 그 어려운 가운데서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이러한 복음의 핵심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그 때문에 그들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흔들림 없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며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였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어떤 역경과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고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이런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모습은 자랑거리가 되었습니다.

 

세상에 본이 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부정적인 방법은 그 사람처럼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방법과 긍정적인 방법으로 그 사람을 꼭 본받고 싶다는 방법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열매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본받고 싶을 만큼 풍성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 때에 주실 상급을 바라보며 오늘도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오늘날 성도들에게 새로운 메시지를 줍니다. 당신의 삶 속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길 원한 것입니다. 당신을 방해하는 우상들을 버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삶의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는 삶입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그리스도의 재림에 소망을 두고 말씀으로 하루하루 살며 어디에서든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본이 되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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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서론

 


범사에 감사하라

데살로니가전서 서론


 

1. 데살로니가전서의 제목

 

최초 헬라어 필사본 성경들에서 이 서신의 표제는 단순히 ‘데살로니가인들에게 Ⅰ’(Pros Thessalonikeis A)입니다. 「제임스왕역」에서 볼 수 있는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보내는 사도 바울의 첫 번째 편지서’(The First Epistle of Paul the Apostle to the Thessalonians)와 같은 긴 표제는 후대에 수식어를 첨가한 결과입니다.

 

 

2. 데살로니가전서의 저자

 

이 서신은 바울과 실루아노(실라)와 디모데가 부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1:1). 하지만 이 서신은 근본적으로 바울의 저작입니다(참조 3:1,2,6,7; 5:27).

 

(1) 외적 증거 : 이 서신은 최초기의 신약 책들의 목록인 무라토리 정경(Muratorian Canon, AD 170)의 바울 편지들 가운데 포함되어 있습니다. 초기교회의 저술가들인 이레내우스(Irenaeus, AD 130년경~202년경),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AD 220년경 사망),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 AD 160년경~240년경) 등은 바울을 이 편지서의 저자로 간주하였다.

 

(2) 내적 증거 : 사도 바울의 개성과 문체가 편지서들 전체에 역연(歷然)합니다. 그가 인도한 회심자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영적 복리에 대하여 느끼는 심적 부담감이 곳곳에 나타납니다. 위대한 영적 특질인 믿음, 소망, 사랑에 대한 강조는 분명히 그것의 저자가 바울임을 드러내 줍니다(참조 고전 13:13). 오늘날 학자들은 이 편지서의 저자가 바울이라는 사실에 일반적으로 동의합니다.

 

 

3. 데살로니가전서의 저작동기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 사도의 두번째 전도 여행에서 얻은 소산이다(사도행전 17:1-9). 빌립보 감옥에서 풀려난 바울 사도와 그의 동역자인 실라와 디모데 일행은 남쪽 지방과 서쪽 지방을 경유하여 마게도냐의 수도이며 상업 중심지인 데살로니가에 이르렀다. 강력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곳에 유럽에서 두번째 교회를 세웠다. 유대인들에게 어려움을 당한 후(사도행전 17:10-15) 바울은 아덴으로 피신했다. 그런데 거기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염려한 나머지 박해를 받고 있는 교회를 굳게하고 위로하기 위해 디모데를 급히 파송했다(데살로니가전서 3:1-3).

고린도에서 바울 사도와 재회하게 된 디모데는 복음의 씨앗이 좋은 토양에 떨어졌다고 보고했다. 그 소식을 듣고 바울 사도는 그의 신실한 형제들에게 그리스도에게 헌신하며 서로 사랑할 것을 권면하고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려고 데살로니가 전서를 쓰게 되었다.

 

 

4. 데살로니가전서 저작연대와 장소

 

누가가 역사적 사실을 자세하게 기록했기 때문에 데살로니가전서의 저작 연대는 비교적 확실하게 확정지을 수 있다. 또한 누가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체제한 것과(사도행전 18:12) 관련시켜서 갈리오 총독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델피에서 발견된 비문에 의하면, 갈리오 총독의 재임기간은 글라우더오 황제의 치세 때라는 것이 밝혔졌다. 갈리오 총독은 A. D. 51년 여름 동안에 재임한 것으로 추정된다. 갈리오 총독이 부임하기 전 약 18개월 동안 바울 사도께서 고린도에 머물렀다는 것을 누가가 명백히 시사하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사도행전 18:11) 아마도 바울 사도는 A. D. 50년 초에 고린도에 도착했던 것 같다. 그 이후 실라와 디모데가 돌아와 보고한 것은(사도행전 18:5; 데살로니가전서 3:1-6) 아마도 A. D. 50년 중반이었을 것이다. 이 때에 데살로니가전서가 기록되었다. 몇 개월 뒤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데살로니가후서가 기록되었다.

 

 

5. 데살로니가전서의 사상의 전개

 

바울 사도는 성도들이 복음을 뜨겁게 받아들이던 것을 회상하고는, 자신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주던 그 상황을 상기시켰다. 바울 사도의 관심이 핍박받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견고하게 하려는 데 있다는 것은 바울 사도가 디모데와 기꺼이 헤어졌다는 사실에서 증명된다. 디모데의 긍정적인 보고는 바울 사도의 짐을 가볍게 했고, 그로 하여금 실제적인 문제에 대한 권면을 하도록 했다. 이교 문화의 유혹을 알아차린 바울 사도는 성도들에게 성적 타락의 위협과 다툼과 분쟁의 위험에 관하여 경고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은 두 가지 특별한 문제를 일으켰는데, 하나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해서 생활이 나태해지는 것과 다른 하나는 죽은 성도들은 그 놀라운 부활 사건의 영광에 동참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이러한 문제에 직면해서 바울 사도는 근면할 것을 권면하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산 자와 죽은자들의 역할에 관하여 올바로 설명하고 있다.

 

 

6. 데살로니가전서의 중요성

 

이 데살로니가전, 후서는 단순했던 초대교회의 면모를 희미하게나마 보여준다. 복잡한 조직도 없이 성도들은 공통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간직하고 있었다. 비공식적인 지도자들이 나타나기도 했으나 그리스도인들은 아직도 사도단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 서신에서 바울 사도는 자신의 논제보다는 자신의 내면 심정을 솔직히 토로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을 유순한 유모(데살로니가전서 2:7)나 엄격한 아버지(2:11), 그리고 집 없는 고아(헬라어 원문 2:17)에 비교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자신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고 또 그렇게 해왔음을 보여 준다. 우리가 데살로니가전서를 통하여 만나는 사도 바울은 강하면서 부드럽고, 훈계 가운데서도 애정을 보이며, 불굴의 용기와 악의없는 동기를 지닌 그야말로 순수하고 온전한 한 인간이다. 이 서신의 종말론적 가르침들은 그 중오성을 한층 더 높여주고 있다.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일어날 사건의 전말과 그때 죽은 성도들의 역할에 관하여 이처럼 길게 다룬 곳은 없다. 더우기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만 역사의 마지막 때에 스스로를 하나님이라고 주장할 사탄의 전형적인 모습, 즉 적그리스도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다.

 

 

 

7. 데살로니가전서의 역사적 배경

 

데살로니가는 중요한 도시였으며, 마게도냐의 제2행정 구역의 수도였다(참조 행 17:1 주석). 그 도시는 오늘날 살로니카 만(Gulf of Salonika)이라고 알려진 테르마 만(Thermaic Gulf)의 맨 위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동방과 로마를 연결하는 에냐티아 도로(Egnatian Road)가 그곳을 통과하였다. 데살로니가는 그것이 갖고 있는 유리한 입지 조건, 즉 적합한 위치와 훌륭한 항구 때문에 상업상의 요지가 되었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로 그곳에는 많은 유대인이 거주하였고, 회당이 생겼을 것이다(행 17:1). 오늘날 살로니카라고 부르는 이 도시는 북부 헬라의 중요한 상업 중심지 중 하나이다. 게다가 그 도시는 옛날의 에냐티아 도로(Via Egnatia) 위에 세워진 개선문(triumphal arch)이 아직도 고대 로마의 영광과 세력을 상기시켜 주면서 그곳에 서 있기 때문에 고고학적인 관심과 흥미를 끄는 도시이기도 하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처음으로 오게 된 때는 제2차 선교 여행 중 빌립보를 떠난 직후였다(행 16:40; 17:1). 주요 도시들에서 먼저 복음을 전하고 그곳들을 중심으로 주위의 소도시와 촌락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바울의 전도 방법이었으므로, 그와 그의 동료들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 같은 소도시에서는 체류하지 않고 곧장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로 직행하였다(참조 행 17:1 주석).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을 제일 먼저 접촉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세 안식일 계속 회당에 가서 그의 동족들에게 위대한 복음의 진리를 제시하였다. 그는 근래에 빌립보에서 수난을 당했음에도 용기를 잃지 않았으며, 성령의 능력으로 메시야에 관한 구약의 예언들을 증거하고 그 예언들이 예수에게서 성취되었음을 설명해 주었다. 그의 말을 듣던 유대인들 가운데 얼마가 믿게 되었다(행 17:4).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참조 행 17:4 주석)가 그의 기별을 받아들였다. 데살로니가의 신자들 가운데는 “적지 않은 귀부인도” 있었다(행 17:4).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는 동안 그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밤낮으로 일했다고 말한 사실(참조 2:9)과 빌립보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데살로니가에 있는 동안에 그들이 보낸 선물을 언급한 사실(참조 빌 4:16 주석) 등으로 미뤄볼 때, 바울을 대표로 하는 그 선교사들이 데살로니가에서 사업을 계속한 기간이 위에서 언급한 3주일보다도 더 긴 기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바울의 성공적인 전도 활동은 이윽고 유대인들의 맹렬한 반대를 일으켰고, 그 결과 심한 분쟁이 유발되고 마침내 바울은 그 도시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행 17:5, 6). 첫 세 안식일을 회당에서 보낸 다음 바울은 야손의 집에서 계속 전도했던 것으로 보인다(행 17:7). 그는 특별히 헬라인들에게 성공적으로 전도한 것 같다. 왜냐하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주로 이방인들로 구성되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참조 1:9; 4:5 주석).

 

유대인들의 충동을 받아 일어난 폭도들의 난동으로 바울의 전도활동은 로마 당국의 주의를 끌었으나, 바울이 장차 올 그리스도의 왕국에 관한 교리를 전함으로써 반역죄를 범했다는 고발은 치안 판사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공식적으로 데살로니가에서 추방당하지도 않았고 또다시 돌아오는 일이 금지되어 있지도 않았던 것은, 사도가 돌아가지 않은 이유를 그 교회에 설명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던 사실(2:17, 18)과 디모데는 이미 돌아간 사실(3:2)로 보아서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곳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잠정적으로 그 도시를 떠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 전도자들은 남서쪽으로 약간 떨어져 있는 도시인 베뢰아(Berea)로 향하였다. 여기서 다시 바울은 회당에서 전도를 시작했고, 성경을 사랑하는 그곳 유대인들 가운데서 훨씬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새로운 활동에 관한 소식이 이윽고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에게 전해지자 그들은 즉각적인 행동을 취했다. 그들은 즉시 베뢰아로 달려와 또다시 군중을 선동하여 선교사들을 대적하게 하였다(행 17:10~13). 바울의 친구들이 그를 아덴으로 보냈으나, 그의 동료들은 마게도냐에 남아 있었다. 사도는 그들의 도움을 심히 열망하며 아덴에서 기다렸다(행 17:16). 그 후에 디모데는 아덴으로 와서 바울과 합류한 것으로 보이며, 얼마 후에 바울은 그를 데살로니가로 돌려보내 새 신자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상태를 보고하도록 하였다(참조 3:1, 2, 6). 실라는 헬라로 돌아온 디모데와 동행하였으며, 그들은 아덴에서 잠시 체류한 후에 고린도로 간 바울과 합세하였으므로 실라는 마게도냐에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행 18:1, 5).

디모데의 보고를 받자마자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를 썼다. 제5세기까지 거슬러 오르는 필사본들은 이 편지서의 말미에 아덴에서 기록되었다는 진술을 덧붙여 놓았다. 이러한 생각은 아마도 3:1, 2에서 추출했을 것이다. 하지만 3:6을 보면 데살로니가전서는 디모데가 마게도냐에서 돌아온 이후에야 비로소 기록되었음이 뚜렷이 나타나며, 행 18:1, 5을 보면 바울이 그때 고린도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결과적으로 데살로니가전서는 고린도에서 기록되었다고 결론짓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다. 이 편지서는 일반적으로 지금까지 보존되어 온 바울의 편지들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것으로 간주되고 있으며(참조 제11권, 62), 야고보서가 어쩌면 그럴 가능이 있는데 이 야고보서를 제외한다면, 아마도 신약 전체 가운데서 맨 먼저 기록된 책일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의 기록 연대에 관한 토론은 제11권, 62, 63을 참조하라.

 

 

8. 데살로니가전서의 주제

 

열렬한 사랑의 빛난 광채가 이 편지서를 꿰뚫고 있다(참조 1:2~4; 2:7, 8; 3:6, 7). 사도는 데살로니가인들의 신실함과 그에 대한 그들의 극진한 관심을 알려주는 디모데의 보고에 깊이 감사하고 있다. 바울은 그들이 가진 고귀한 특질인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인하여 아낌없이 그들을 칭찬한다. 그는 그들을 방문하기를 열망한다. 왜냐하면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 복음의 진리들을 충분히 가르쳐 줄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디모데가 틀림없이 어떤 문제들을 보고했을 것이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어떤 사람들은, 복음의 기별을 받아들인 후에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영광스러운 부활에 참여하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재림에 관하여 광신적(狂信的)인 태도를 취하여, 아무 일도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나태하며 막연한 기대 가운데 주님의 오심을 기다렸다. 어떤 이들은 세상으로 도로 물러가서 부도덕에 빠질 위험에 처해 있었다. 또 다른 이들은 독립하고자 하는 경향에 빠져, 정당하게 임명된 교회 지도자들을 기꺼이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규모 없는 자들”과 “마음이 약한 자들”과 “힘이 없는 자들”은 모두 도움이 필요했다(5:14). 사도는 할 수만 있었다면 이 사랑하는 신자들에게 지체 없이 개인적인 교훈을 주었을 것이다. 두 번 이상 그는 돌아가고자 시도하였으나 사단이 그를 방해했으며(2:18), 이런 까닭으로 그는 그 교회에 편지를 써 보내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결과로 기록된 이 편지서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관점에서 본 실제적 경건이다. 주님의 영광스러운 재림이 이 책에 제시된 가장 뚜렷한 교리이다(1:10; 2:19; 3:13; 4:13~18; 5:23). 그밖에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4:14), 죽은 의인들의 부활(13~16절), 미래의 보상과 형벌(4:17; 5:3), 사단의 인격체로서의 실존과 적극적인 활동(2:18), 택하심과 성화를 포함한 구속의 진리(1:4; 4:3~7) 등의 교리가 언급되어 있다.

 

 

9. 데살로니가전서의 개요

 

Ⅰ. 인사 1:1

 

Ⅱ. 데살로니가인들에 대한 봉사와 그들에 대한 관계를 회고함 1:2-3:13

 

1. 교인들의 신실한 증거에 대한 감사 1:2-10

(1) 그들의 평판에 대한 감사 1:2-4

(2) 그들이 복음을 충실하게 받아들인 것을 회고함 1:5-10

 

2.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봉사한 일을 회고함 2:1-16

 

3. 바울이 그가 개종시킨 사람들을 방문하고자 노력함 2:17-20

 

4. 디모데가 바울 대신에 파견됨 3:1-13

(1) 디모데의 방문 목적 3:1-5

(2) 디모데의 보고와 그것이 바울까지 끼친 효과 3:6-13

① 보고 3:6

② 보고에 대한 바울의 기쁨 3:7-9

③ 교회를 방문하고 싶어하는 바울의 계속적인 욕망 3:10, 11

④ 그가 개종시킨 사람들을 위한 바울의 기도 3:12, 13

 

Ⅲ. 교훈과 권면 4:1-5:28

 

1. 서론 4:1, 2

 

2. 참된 육신적 성화 4:3-8

 

3. 데살로니가인들의 형제 우애 4:9-10a

 

4. 조용히 일하라는 권고 4:10b-12

 

5. 죽은 그리스도인과 부활 4:13-18

(1) 영광스러운 부활의 소망 4:13-14

(2) 부활의 형편 4:15, 16

(3) 살아있는 의인들과 부활한 의인들의 승천함 4:17

(4) 이러한 확증으로써 신자들은 서로 위로할 것 4:18

 

6.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간은 알지 못함 5:1-11

(1) 주의 날이 갑자기 옴 5:1-3

(2) 신자들은 항상 깨어 있어야 함 5:4-11

 

7. 마지막 권면 5:12-22

(1) 주님의 종들을 존경하라 5:12-13

(2) 교회에 화목을 유지하라 5:14-15

(3)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라 5:16-18

(4) 신령한 은사들을 사모하라 5:19-22

 

8. 마지막 기도와 부탁 5:23-28

(1) 완전한 성화를 위한 기도 5:23-24

(2) 부탁과 인사 5: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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