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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06-02)


예수 그리스도만 위한 성도의 삶

갈라디아서 6장 11-18절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면, 마치 구원을 자기 힘으로 이루어낸 성취처럼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구원을 주신 하나님 구속의 은혜, 그분의 나라의 영광을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아니라 그분만을 나타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제 갈라디아서의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바울은 이 서신의 중요한 내용을 요약적으로 정리해서 강조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십자가의 의미를 희석시켰지만,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합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 옛 세상이 끝나고 새로운 창조가 결정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이 놀라운 은혜가 성도들과 함께하기를 빌며 서신을 마무리합니다.

 

유대주의자들의 이기적인 목적(11-13)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이제부터 삶의 우선순위를 예수님보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겠다는 결단입니다. 무엇을 먼저 사랑하고 다음 사랑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입니다. 지금 당신은 가장 사랑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정해야 합니다.

11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2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11-13)

대적자들은 할례를 강요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몸의 소욕을 죽이지 않고 자기 욕망대로 살았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가로막았으니 그 욕망을 절제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이방인들의 할례를 자신들의 성과물로 자랑하고자 했습니다. 오로지 관심은 자기 자랑이었습니다.

(1) 바울의 친서(11)

바울 당시에 서신을 보낼 때, 편지를 보내는 사람은 말로하고 가까운 사람이 대신 기록하여 전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당시에는 대서인(代書人)을 통해 편지를 작성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마지막에 자신의 서명을 넣음으로써 그 편지의 진정성을 입증했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친필 사인과 같은 역할 한다고 하겠습니다. 간혹 결론부에서 첨가하는 중요한 내용을 직접 쓰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밝히고 있는 것이 바로 그러한 모습입니다. 바울은 본 절부터는 직접 친필로 쓰고 있습니다. 편지 전체가 자기 자신의 편지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는 바울 자신의 서신이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아무나 그의 이름을 도용해서 편지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보낼 수 없습니다. 동시에 바울의 편지가 바울의 견해가 분명하다는 것을 확실히 해주는 것입니다. 이 서신이 결론 부분에 도달했음을 보여줍니다.

(2) 잘못된 가르침의 동기(12-13)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격양된 모습으로 시작했습니다. 그 사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12-13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만약 대적자들의 주장을 수용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을 사실상 반쪽짜리로 만들고, 혼합주의 신앙과 우상숭배와 다르지 않습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무리 사람들에게 믿음을 요구한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사역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신 것은 당연하지만, 우리 스스로 그 믿음을 대단한 것으로 만든다면 은혜를 모르는 행동입니다. 믿음은 먼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대한 마땅한 반응입니다. 그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들에게 성령께서 임하시고 성령의 도움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루는 삶,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 할례를 행하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중심 메시지를 상기시킵니다. 그들을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라고 평가합니다. 본문의 ‘육체’는 다소 중립적입니다.

여기서는 이 세대에 속한 삶의 체계 전체를 통칭하는 표현으로 보입니다. 그것이 악한 속성으로 표출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이 없는 상태’를 지칭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오심으로 시작된 다음 세대의 삶이 아니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육체의 모양을 내려한다’는 표현은 ‘옛 세대의 삶의 체계 속에서 그럴듯하게 보이려 한다’는 의미입니다. 옛 세대에 속한 삶의 체계 중 하나가 유대교입니다. 그 유대교의 체계 속에서 그럴듯하게 보이려 하는 자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였습니다. 이어지는 목적절에서 바울은 그들의 동기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핍박을 면하기 위함’이었다고 주장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전체 유대교의 한 분파로서 유대교의 주류 집단에서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한 셈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해 ‘할례를 받은 그들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면서’라고 합니다. 그리고 과거 베드로의 행동이 일관되지 못함(2:14)을 지적하면서 본문의 유사한 비판을 가합니다. 베드로 자신도 유대교 율법 속에서 일관되게 살지 않으면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대인으로 살 것을 강요한 모순을 지적한 것입니다.

율법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교의 삶의 체계가 옳고 그름을 평가하기 이전에 거짓 교사들이 자신도 그 체계 속에서 일관되게 살지 않으면서 이방인들에게 할례와 율법을 부과하는 것은 그 자체가 모순입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을 유대인화 함으로써 동족 유대인들을 향하여 자기의 자랑거리를 쌓으려 할 뿐입니다. 바울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거짓 교사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위하여 하례와 율법을 부과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임한 새로운 창조(14-16)

종종 십자가에서 베푸신 사랑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생각해봅니다. 그 사랑의 가치는 인류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고도 남을 가치입니다. 죄의 심각성을 알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은 십자가를 통한 용서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깨닫습니다. 그런 사람만이 십자가의 가치와 사랑을 제대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1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6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14-16)

사도 바울의 대적자들이 육체, 곧 옛 세대에 속한 것들을 자랑하려고 한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이제 자신이 무엇을 자랑하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그는 이 자랑을 가장 강한 형태의 이중 부정문을 사용하여 전달합니다. ‘메 게노이토(μη γενοιτο)’라는 표현 자체만으로도 강한 표현인데 이중 부정문 형식을 빌려 강조의 의미를 더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한 것을 제외하고 그 무엇이라도 자랑하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14)라는 의미입니다.

개역개정에서 ‘십자가 외에’라고 번역하기보다는 ‘십자가’ 앞에 있는 전치사 ‘엔(εν)’의 의미를 살려 ‘십자가에 관한 것’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는 궁극적으로는 ‘십자가로 인해 형성된 새로운 삶의 체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12-13절의 ‘육체’와 대조를 이루는 개념입니다. 그 관계대명사의 선행사는 개역개정의 번역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될 수도 있고 그 앞의 ‘십자가’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문맥상 후자가 조금 더 자연스럽습니다. 즉, ‘십자가 사건을 통해 세상이 나에 대해 못 박혔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상’이라고 번역된 ‘코스모스(κοσμος)’는 위의 ‘육체’와 유사한 개념으로, ‘세상’ 역시 하나님이 없는 삶의 체계입니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 그러한 하나님 없는 세상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 더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바울의 선언입니다. 바울에게 있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표현은 ‘그와 함께 부활한다’는 표현과 합하여 옛 세대의 삶을 떠나 다음 세대의 삶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결국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이 ‘이 악한 세대’(1:4)에서 우리를 건지는 것이지, 이 세상에서 다음 세대의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삶을 살도록 허락하였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미 다음 세대의 삶을 시작하였음으로 ‘나 또한 세상에 대해서 못 박힌다’라는 바울의 고백은 당연한 귀결입니다(14).

‘육체’와 ‘세상’으로 대변되는 이전 세대에서는 할례와 무할례의 구분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이미 살기 시작한 다음 세대의 하나님 나라에서는 할례의 여부가 무의미합니다(15). 그것은 할례가 악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15)이라는 번역보다 ‘새로운 창조’가 더 낳은 번역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새로운 몸을 입고 부활하신 것을 시작으로 그 새로운 창조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과연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창조에 속해 새로운 생명과 삶을 살아갈 것인지의 질문이 있을 뿐입니다.

16절의 ‘규례’는 ‘기준’ 혹은 ‘원칙’으로 번역하는 것이 문맥상 더 자연스럽습니다. 지시대명사를 사용하여 ‘이 기준’이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그 기준은 14-15절의 내용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이 기준’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주어진 새로운 창조 속에서 살아가는가?’입니다. 바울은 ‘이 기준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평화와 자비를 구합니다.

바울이 첨가한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16) 이 이스라엘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바울은 여기서 갑자기 육신적 이스라엘에게도 평화와 자비를 신포하고 있습니까? 지금까지 서신 전체를 통해서 바울이 다룬 핵심적인 질문은 ‘누가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인가?’하는 문제였습니다. 이는 곧 ‘누가 진정한 하나님의 이스라엘인가?’라는 질문과 다르지 않습니다.

3:16절에서 그리스도를 유일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규정한 바울은 서신 내내 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야말로 약속의 자녀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마지막 인사로 서신을 끝내기 전에 바울은 이 짧은 한마디로 자신의 주장을 정리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이 이제 진정한 ‘하나님의 이스라엘’입니다.

 

마지막 인사(17-18)

마지막이라고 하면 괜히 섭섭해지고 슬퍼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부분은 당사자의 진심이 들어가 있습니다. 동화는 대부분 해피엔딩으로, 편지는 다시 뵙길 원한다로 끝을 맺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이 생애 마지막이라면, 당신은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바울은 갈라디아서의 마지막 부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7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18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17-18)

바울은 자기 몸에 예수의 흔적이 있기에 앞으로 어느 누구도 자기에게 수고로움을 주자 말라는 명령으로 편지를 마무리하기 시작합니다. 다른 편지와 비교하면 상당히 이례적 방법이고 바울의 불편한 심기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17)는 말라고 합니다. 바울의 선교 여행 중 당한 여러 공격과 그 연장 선상에서 갈라디아 교회 안에서 공격을 기억하게 합니다. 자기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졌기 때문에 바울의 사도성을 가지고 시비를 걸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의 삶에 내세울 것은 ‘내 몸에 예수의 흔적’뿐이란 것입니다. ‘흔적’으로 번역된 원어 ‘스티그마(στιγμα)’는 몸에 새겨진 ‘노예의 표식’이나 ‘종교인들의 문신’을 일컫는 말로, 고대 사회의 관행 중 하나였습니다. 여기서 자신이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신다는 종의 표식을 소유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스티그마’가 타인도 볼 수 있는 표식임을 생각해 볼 때, 바울이 말하는 것은 그가 복음을 전하면서 당한 많은 핍박과 그로 인해 얻은 육신의 연약함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 자신이 4장 13-14절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바울에게 복음을 위해 수고하다가 얻은 상처가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을 빌면서 편지를 시작했던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6:18)을 빌며 편지를 끝맺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창조주요, 구원자요,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일하심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을 통해 결정적으로 계시되었음을 다시 한 번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정리될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십자가입니다. 성도들의 삶은 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가 전부입니다. 여러 가지 대안 중에 하나가 아니라,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 사역을 위해서 율법이 있었고, 그분을 위해서 우리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이 세상의 것들은 모두 불타서 사라질 것입니다. 오직 그와 동행한 흔적만이 하나님 나라에서 출입증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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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06-01)


사랑의 실천에 대한 권면

갈라디아서 6장 1-10절


율법은 선하고 거룩하며 하나님의 뜻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 기능은 하나님을 믿음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은 더욱 율법을 사랑하고 그 속애 담긴 하나님의 뜻에 기쁘게 순종하여 율법이 주신 자유를 누릴 것입니다. 그 모습을 바울은 어떻게 묘사하겠습니까?

 

서신을 마무리하기 전에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들을 향해 여러 가지 윤리적 권면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각자가 자신을 살필 뿐 아니라 공동체 속에서 다른 사람의 짐을 지고, 가르치는 자를 지원하며,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라고 권면합니다. 바울은 이것이 바로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이며 영생에 이르는 길임을 재차 강조합니다.

 

서로 짐을 지라는 권면(1-2)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의미는 은혜로 구원 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로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도록 가능하게 해주신 분이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은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습니다. 서로를 위해 도우면서 살아갑니다.

1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2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1-2)

사도 바울은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사람과 육체를 따라 행하는 사람을 그 열매를 가지고 비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앞에 기록된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에 대한 교훈은 비록 실천적 권면이기는 하나 역시 이론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습니다(5:16-26). 그러나 이어지는 본문은 갈라디아 교회의 현실을 직시하고 기술한 부분으로 교회 내 범죄자들과의 관계를 해소하고 원활한 교제를 권면한 것으로 본 서신 가운데 가장 현실적인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본문은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 공동체 속에서 어떠한 형태로 나타나야 할지에 대해서 다룹니다. 바울은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으로 지칭하면서 이 단락을 이전 단락과 자연스럽게 연결시킵니다. 분쟁에 대한 화해를 권면했던 바울은 이제 더욱 구체적으로 성도가 지향해야 할 생활 규범을 제시합니다.

(1) 범죄한 사람을 바로 잡음(1a)

첫 번째로 사도 바울은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는지에 대해 다룹니다. 당시 갈라디아 지방의 교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관심사였습니다. 이곳에서 말하는 범죄는 고의적인 범죄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 중에 혹은 육체의 연약함으로 인해 불법적 행위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신령한 너희’라고 지칭한데, 이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24)이란 표현과 같은 의미로,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란 의미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할 규범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에게 연약함으로 범죄한 자들에 대해 배척하지 말고, ‘온유한 심정으로 그를 회복시켜주라’는 것이 바울의 첫 번째 명령입니다. 이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건면하여 범죄한 자로 하여금 그 죄 가운데서 돌이키게 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훌륭한 모범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누가복음 5:32).

(2) 유혹을 당하지 않도록(1b)

그렇게 범죄한 사람을 세워주면서 ‘자신도 유혹 당하지 않도록 스스로 살피라’고 권면합니다. 다른 사람이 범죄한 사실을 목격한 사람들은 그를 비난하고 책망하는데 관심을 갖습니다. 특히 이러한 모습은 당시 율법을 잘 지킨다는 바리새인들에게 있어 두드러진 태도였습니다(요한복음 8:3).

하지만 성도들은 그들과 달리 범죄한 자들을 권면하고 또한 바르게 세우는데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도 죄의 유혹을 쉽게 뿌리칠 수 없는 존재하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이를 통해 성도들은 자신의 행동을 더욱 자중하고 실족하지 않도록 스스로 항상 깨어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이 취할 삶의 태도이기 떄문입니다.

(3) 서로 자기 짐을 지라(2)

사도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서로의 무거운 짐을 지라’고 명령합니다. 이곳에서 ‘짐’은 ‘어떤 사람이 혼자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일’(마태복음 20:12)을 뜻합니다. 계속적으로 다른 사람이 지고 있는 무거운 짐, 즉 범죄함으로 겪게 되는 수고와 고통을 서로 같이 나누는데 힘쓰라는 권면입니다.

이렇게 ‘서로의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법’은 율법이나 계명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법’은 이미 5장 14절에서 온 율법이 이웃 사랑의 명령에 의해 성취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선적으로 ‘그리스도의 법’은 그리스도를 통해 이웃 사랑의 명령으로 성취된 율법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서로의 무거운 짐을 짐으로써 이웃 사랑의 명령을 성취하게 된다는 의미는 자연스럽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법이 이웃 사랑의 명령이라면, 그리스도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바로 그 사랑의 정신으로 보여주신 모든 삶과 거기에 내포된 윤리적 명령들로 그리스도의 법을 확장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공생애 기간 동안 이웃이 될 수 없는 세리와 죄인들을 이웃으로 삼으시고 그들의 영적인 필요를 채워 주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법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이 다시 살아내야 할 그리스도의 신실함(2:16; 20)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연약한 우리의 무거운 짐을 대신 져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그리스도처럼 낮아지고 비움으로서 이웃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고 채워질 때,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자만하지 말라는 권면(3-5)

사람들을 평가할 때는 조심스럽게 살펴야 합니다. 쉽게 평가해서도 너무 율법적으로 평가할 필요는 없습니다. 타인의 경우에는 원석에서 순금을 만들어내듯 꼼꼼하게 살피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대충 쉽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반대로 행동해야 하고, 다른 사람의 행동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합니다.

3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4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5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3-5)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들 속에 있는 분쟁과 다툼을 의식하며 이미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말라, 자만하지 말라’(5:26)고 권면했었습니다. 다시 다른 사람의 실수를 보면서 허영과 자기 자랑을 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스스로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착각하는 사람 또는 자기를 높이는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1) 헛된 교만(3)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의 실수나 잘못을 보면서, 허영과 자기 자랑에 빠지지는 일에 대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경고합니다. 특히 당시 갈라디아 교회에서 분쟁을 야기 시키고 또한 성도들을 이간질 시켰던 자칭 진리를 선포한다는 거짓 선생들을 지적합니다. 그들은 온유한 심령을 갖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짐을 나누어지지 않고 외면했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의 특징이 교만입니다. 고린도전서 전반부(1-4장)에서 볼 수 있듯이, 명예와 수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권 속에 살던 당시의 이방인들에게 자기 자랑과 타인으로부터 받는 인정은 모든 공적인 삶의 목표처럼 여겨졌습니다. 심지어는 고린도 교인들은 성령의 은사까지도 자기 자랑의 재료로 삼았습니다. 이방인들이 주를 이룬 갈라디아 교회, 고린도 교회, 빌립보 교회 등에서 모두 교인들 간의 다툼과 분쟁이 발견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다른 사람의 잘못을 통해 의롭게 생각하여 행동하는 것에 대해 성경에서는 ‘스스로 속임이니라’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원어의 ‘프레나파타(ψρεναπατα)’는 ‘마음을 타락시킨다’는 뜻입니다. 교만한 자는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교훈을 삼아야 합니다. 하지만 자신을 의롭게 생각해서 스스로 선하다고 생각함으로써 자기를 반성할 수 있는 기회와 성령의 능력을 힘입을 기회를 상실하게 되어 멸망을 자초한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이것은 또한 성경에서 자주 교훈하고 있습니다(잠언 16:18; 야보고서 4:6).

(2) 자기 점검(4)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자기의 일을 살피라’고 권면합니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생활 속을 점검함으로 규모 있는 실제적인 삶을 살도록 권합니다. ‘점검하라’는 참과 거짓에 엄격하며 행동을 매우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의 불필요한 갈등을 차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쓸데없이 다른 사람의 일을 참견하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를 통해서 자랑거리를 찾는 나쁜 습성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각자가 자기 자신의 일을 점검하라고 명령했지만, 정작 그 점검의 기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그가 말했던 ‘그리스도의 법’이나 ‘하나님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기준에서 ‘자기를 점검하면’ 자신의 행동으로부터 스스로 자랑스러워할 근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를 점검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는, 쓸데없이 다른 사람의 일에 참견하고 그들과의 비교를 통해 자랑거리를 찾는 나쁜 습성(4)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외형적 행동을 연약하여 범죄하는 자들과 견주어 자랑거리로 내세웁니다. 이미 언급한 대로 그런 사람은 ‘스스로를 속이는 행위’일 분입니다. 하지만 자신을 부지런히 살피는 사람은 경거망동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행동을 ‘그리스도의 법’에 비추는 사람은 자신을 변화시킨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악에서 승리하게 된 것에 대하여 자랑할 만한 근거인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합니다(고린도후서 1:12). 그것만 자랑합니다.

(3) 자기 짐을 지라(5)

사도 바울은 더 나가서 ‘각자 자기의 짐을 지라’(5)는 권면합니다. 이 권면은 ‘각자 자기의 일을 살피라’(4)는 명령에 대한 다른 표현입니다. 다른 사람의 무거운 짐과 함께 자기의 짐도 져야 한 것입니다. 자기 일을 살피는 것이 자기 무거운 짐입니다.

이곳에서 ‘짐’은 군인들이 행군할 때 지는 군장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이 생활 속에서 개인 형편에 따라 담당해야 할 의무입니다. 다른 사람의 무거운 짐을 지는 것과 함께 자기의 짐도 져야 하는데, 자기의 일을 살피는 것이 바로 자신의 ‘무거운 짐’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돌보지 않은 채,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일이 얼마나 흔한지 모릅니다. 참 이웃 사랑은 향한 하나님의 용서와 기다림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서부터 역지사지가 가능합니다. 자신이 은혜를 받은 것처럼 다른 사람도 자신을 통해서 관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이웃 사랑입니다.

성령을 좇아 사는 성도는 각기 자기에게 맡겨진 일과 의무를 다른 사람에게 미루지 말고 성실히 수행하라는 신앙적 권면인 것입니다.

 

선을 행하며 살라는 권면(6-10)

교회는 크든 적든 사역자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합니다. 큰 교회라고 많이 누리고 작은 교회라고 힘들어지면 공동체 사역은 점점 어려워질 것입니다. 자립하지 못한 작은 교회가 역부족일 때는 큰 교회에서 후원해서 서로 도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모두가 공생하는 사역자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6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7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6-10)

사도 바울은 스승과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에서는 바울 외에 다른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로부터 성도들에게 사례를 받는 목회자도 있지만, 순회 전도자들도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가르침을 받는 자들’에 대한 영적인 의무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1) 가르치는 자와 함께(6)

사도 바울은 먼저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나누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말씀’은 분명히 바울이 전한 복음의 메시지를 의미합니다. 눈여겨 볼 것은 갈라디아 교회들 속에 바울을 제외하고 소위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무작위로 거짓 선생들까지를 포함하지 않고,

바울은 성도들에게 그들과 ‘모든 좋은 것’을 나누라고 명합니다. 여기서 ‘좋은 것을 나누라’는 것은 곧 교사들에게 일차적으로 물질적인 지원을 제공하라는 의미입니다. 바울 자신에게도 물질적 후원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지만(그린도전서 9:12), 복음을 위해 그 권리를 희생한다고 말합니다. 자신은 그 권리를 희생하더라도 다른 말씀 사역자들을 위해서는 지원을 독려하고 있습니다. 선배 사역자 바울의 사랑 많은 면모를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2) 심는 대로 거둔다(7-8)

사도 바울은 다시 한 번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을 살도록 권면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7)는 이후에 따라올 경고의 내용을 소개하는 도입부입니다.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신다’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든다’는 두 표현은 당시에 잘 알려진 격언입니다. 이러한 도입부과 격언들은 8절의 내용을 강조하는 기능을 합니다.

‘심는 대로 거둔다’는 보편적인 법칙은 성도의 삶에도 적용됩니다. 이 사실을 확실히 아는 사람은 가식적이고 위선적으로 살지 않을 것입니다. 인생은 심는 데로 거두기 때문입니다. ‘육체’는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은 영생을 거둘 것입니다. 그래서 세대의 특징인 ‘육체’ 곧 ‘죄악된 본성’을 위하여 심는 자는 결국 이 세상의 썩어질 것을 거둘 것입니다. 한편으로 ‘성령’으로 대변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어야 제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3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3-4)

주후 1세기경 회심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동족의 종교와 삶의 방식을 버리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이유로 이웃들로부터 소외와 여러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처럼, 철저한 회심을 요구하는 진리일수록 버려야 할 과거의 삶의 방식은 더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과 베드로는 그것이 곧 썩지 않는 영원한 유업을 얻는 길이라는 확신을 전해줍니다.

(3) 낙심하지 말라(9-10)

거대한 제국 속에 흩어져 있는 조그만 가정 교회들이 제국의 억압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와 성령을 위하여 끊임없이 심을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바울이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포기하지 말자’ 그리고 ‘선한 일을 하자’고 종용하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즉, 이 일은 개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함께 해야 할 일임을 강조해주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선을 행하면서 낙심하지 말자’(9)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성령을 따라 심은 선행의 씨앗은 반드시 영생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확신을 줍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이러한 선행을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그들을 욕하는 불신자들을 향해서도 베풀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가정들은 특별한 선행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10).

거대한 제국 속에서 소수집단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신앙적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했던 것은 견고한 신앙공동체와 그 속에서만 가능했을 진실한 교제와 나눔이었을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를 따라, 분쟁과 다툼을 멈추지 않는다면, 바울이 5장 21절에서 경고하는 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다.’ 공동체가 하나 되어 성령을 따라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 바울의 요지입니다.


장신은 지금 무엇을 심고 있습니까? 썩어서 없어질 가치가 아닌 영원히 남을 가치여야 합니다. 성령 안에 거하여 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지키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과 성령은 율법에 온기를 불어넣고 참 생명력을 갖게 하여, 율법의 본래 정신을 따라 사랑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믿음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에게만 율법은 생명의 말씀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바로 그리스도의 법, 사랑의 법을 성취하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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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05-02)


육체의 일과 성령의 사역

갈라디아서 5장 13-26절


세상적인 관점에서 죄는 눈에 보이도록 다른 사람에게 피해나 상해를 입혔는지 여부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죄는 하나님을 떠나 자기중심적 삶으라고 말합니다. 그렀다면, 영생은 이타적인 삶입니다. 타인을 섬기고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사랑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열매가 투기하고 노엽게 하는 것이라면, 성령의 열매의 핵심은 바로 회생적인 사랑입니다. 성령의 사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율법에서 자유하여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놓인 삶은 잘못된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방종의 삶이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을 성취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성령을 받아 하나님 백성이 되었으면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을 살라고 권면합니다. 율법으로부터는 자유 하였으나 오히려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하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 육체의 욕심을 제어하며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고 권면합니다.

 

사랑으로 종노릇(13-15)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의 사망에서 해방시켰습니다. 성도의 자유는 섬김을 위한 자유입니다. 스스로 주장하는 자유가 아니라 타인의 사랑을 통해서 주어지는 자유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우리를 섬기는 사랑이었고, 그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율법의 핵심을 성취한 그리스도의 법이었습니다.

13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14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15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13-15)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의 옛 삶에서 해방시켜 의의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신 데는 위대한 목적이 있습니다. 참된 자유가 무엇인지 빨리 망각한 채 세상적인 개념의 자유로 돌아갑니다.

(1) 자유를 위한 부르심(13)

① 자유를 위해 부르심을 입음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 반복적인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소유한 자유를 강조하였습니다. 그렇게 강조하게 된 이유는 복음을 인하여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된 성도들의 궁극적인 자유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 갈라디아서의 중심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②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

바울은 ‘그러나 그 자유로 유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란 부분을 직역하면, ‘너희의 자유를 육체를 위한 기회로 삼지 바꾸지 말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성도가 복음을 통해 얻은 자유를 방종의 도약대로 삼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이는 곧 갈라디아 지방의 성도들이 ‘새 언약’을 통해 자유를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만큼 율법적 의를 내세워 육체의 할례를 중시하는 율법주의의 유혹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율법으로부터 벗어남을 기회로 육체적 쾌락에 빠져서도 안 된다는 것을 교훈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복음을 통해 영원한 자유를 소유한 성도의 절제된 생활은 바울 서신에서 자주 강조되는 사상입니다(고린도후서 7:1).

③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본 절에서 ‘서로 종노릇하라’(13)와 ‘멸망할까 조심하라’(15)고 두 명령어가 직접적 권면 단락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자유’(13)와 ‘종’의 이미지는 5장 앞에서 이미 언급된 바 있습니다.

바울은 할례와 율법과 같이 한 민족에게 제한된 법을 지키는 것을 ‘종의 멍에’를 지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5:1). 이제 13절에서 바울은 복음이 지니는 자유의 속성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최고의 섭리인 복음을 이해하고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자유’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애초부터 그 자유는 ‘육체의 기회’를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13). 오히려 복음의 진리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본을 보이신 것처럼, 그 ‘자유’는 타인을 사랑하게 하고 타인을 섬기는 종이 되게 합니다.(13).

(2) 율법의 완성(14)

바로 그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율법 전체를 ‘성취’하는 삶이란 점을 재확인해줍니다. 여기서 사용된 동사 ‘페플레로타이(πεπληρωται)’가 완료시제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율법 아래에서 나셔서(4:4) 우리를 대표하여 율법을 성취하셨습니다(마태복음 5:17).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단번에 성취되었습니다. 그 핵심은 이웃을 제가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으로 정리됩니다.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인지를 묻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2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마가복음 12:29-31)

율법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계명으로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사랑의 삶으로 구현되어야 합니다. 그 사랑에 반하는 삶은 결국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자체를 파괴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3) 분쟁의 결과(15)

사도 바울은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15)고 한 마디 덧붙입니다. ‘자유’를 ‘방종’으로 변질되면 교회는 결코 ‘사랑의 섬김(종노릇)’에 대해 알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교회는 서로 물고 뜯는 현장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경고합니다. 교회 안에서 싸움과 다툼은 스스로 자신을 죽이는 영적 자살과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내면의 영적 전쟁(16-18)

인간의 육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성령을 따라 말씀에 순종하는 인생들은 자연스럽게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이렇게 성령의 열매를 맺은 모습은 곧 있을 심판대 앞에서 의로운 자라고 인정을 받을 것입니다. 결과는 영생을 거두는 삶으로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16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16-18)

사도 바울은 본문의 두 번째 주제인, 성도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전쟁에 대해 거론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 속에는 분명히 분쟁과 다툼을 비롯한 여러 윤리적 문제들이 있었음을 암시해줍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유입된 거짓 선생들은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완전한 자격을 획득할 뿐만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의 정체성과 행동 방식 모두의 기준으로 삼으라는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 의하면 그러한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은 율법이 아니라 바로 성령입니다.

(1) 성령을 따라 행해야함(16)

본문은 성도들 안에 ‘육체의 소욕’이 있고 ‘성령의 소욕’이 두 가지가 공존합니다. 다음 절에 설명하겠지만, 이 둘은 서로를 거슬리고 언제나 싸우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들의 정상적인 내면에 일어나는 영적 상태입니다. 절대로 비정상이 아닙니다. 즉 육체와 성령의 전쟁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영적 전쟁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선택하고 행해야 하느냐?’입니다. 바울은 “성령을 좇아 행하라(Live by the Spirit)”고 권고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영적 전쟁에서 육체의 소욕,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여러분의 의지도, 여러분의 결심도 결코 이 영역에 있어서 여러분을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없습니다.

(2) 육체 대 성령(17)

사도 바울은 ‘성령’을 따르는 삶과 ‘육체’를 따르는 삶을 대조하며 설명합니다(17).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를 거스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문제는 성도의 현재적 삶이 이 두 가지 소욕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대가 아직 지속되고 있는 한가운데에 다음 세대의 하나님 나라와 종말의 영인 성령이 앞당겨 침투함으로써 생겨난 현상입니다.

바울신학 속에서 ‘성령’과 ‘육체’의 대조는 매우 중요합니다. ‘성령’은 종말에 임하는 하나님의 영으로서 다음 세대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의 원리입니다. 반면에 ‘육체’는 반대로 세상적인 삶의 원리를 표현해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없이 삶을 대변합니다. 그래서 ‘육체’는 바울서신 속에서 종종 자기중심적이고 자기만족을 구하는 인간의 ‘죄악된 본성’을 일컫는 말로 사용됩니다. 그렇게 때문에 ‘성령을 따라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 것’(16)은 당연합니다.

(3) 성령 안에서 율법(18)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행동방식 모두를 규정하는 대답입니다. 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면 유대인의 율법을 통해 정체성과 행동방식을 규정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는 갈라디아 교인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육체의 소욕’을 제어할 수 있는 길은 성령을 따라 사는 것밖에 없습니다.

 

육체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19-23)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욕심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예수님의 종일 수 없습니다. 성령의 음성에 귀를 닫고 육신의 요구에 굴복할 때, 자신은 물로 공동체를 파괴시킵니다. 입으로는 그리스도를 말한다 할지라도 성령이 없는 사람들에게 무질서와 이기심과 진리에 대한 무관심뿐입니다.

19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19-23)

전쟁터에서 양편의 군대를 묘사하듯이 사도 바울은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에 구분된 선악을 나란히 놓으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1) 육체의 열매(19-21)

사도 바울은 육체, 곧 인간의 죄악된 본성이 성적인 타락, 우상숭배 행위, 내면의 미움과 분노, 외적인 방탕, 공동체의 분열 등과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는 점을 상기시킵니다.

놀라운 것은, 바울이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반지 못한다’(21)고 잘라 말한다는 점입니다. 바울은 이것이 전에도 누누이 경고했던 바라고 덧붙입니다. 이것은 바울의 신학이 처음부터 ‘행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유대파 그리스도 선교사들을 인식하며 줄곧 공격하는 행위는 구체적으로 ‘율법의 행위’이지 불특정 ‘선한 행위’가 아닙니다. 또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행해서는 육체를 따르는 삶의 방식 전체를 공격합니다. 믿음에 합당한 선한 삶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2) 성령의 열매(22-23)

나중에 기회가 되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구체적으로 다루기로 합니다. 다만 이곳에서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간략하게 하나씩 개요만 살펴보겠습니다.

① 사랑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 중 가장 먼저 ‘사랑’이 언급된다는 점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케 하는 영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하게 합니다. 온 율법이 사랑의 계명에서 성취되었다는 이 사랑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② 희락

‘희락’은 내면이 행복과 기쁨으로 충만한 상태를 말합니다.

③ 화평

‘화평’ 또는 ‘평화’는 단순히 고통이나 다툼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샬롬’ 개념이 그러하듯, 하나님과의 관계, 나와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사랑, 정의, 행복이 구현되는 상태를 일컫습니다.

④ 오래 참음

‘오래 참음’은 부정적인 상황을 견디는 것을 넘어서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행위를 일컫습니다.

⑤ 자비와 양선

‘자비’와 ‘양선’은 다소 중복되는 성령의 열매로서 타인의 유익을 구하는 행위들입니다.

⑥ 충성

‘충성’은 헬라어 피스티스()에 대한 번역으로 하나님뿐만 아니라 모든 이를 향하여 ‘신실함’을 다하는 행위를 일컫습니다.

⑦ 온유

‘온유’는 타인을 대함에 있어서 공격적이지 않고 겸손하며 사려 깊은 내면의 상태입니다.

⑧ 절제

마지막으로 ‘절제(節制)’는 욕구가 어디에서 멈추어야 할지를 알고 자신을 제어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성령의 열매들에 반하는 어떠한 율법도 없다’고 말합니다. 온 율법이 사랑의 계명으로 성취되었다는 말씀을 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러한 성령의 열매들이야말로 율법이 지향해 온 삶의 열매들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삶(24-26)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자들, 즉 이제 자기가 왕이던 나라를 버리고 예수님만을 왕으로 모시는 삶으로 전환한 자들에게 성령님은 내주하십니다. 이제 그들의 죽은 옛 자아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창조하여 그들로 예수님의 삶에서 맺혔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24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24-26)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복음의 진리 속에 내포되어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바울은 이미 ‘내가 그리스도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갈라디아서 2:20)고 선언했습니다. 이 표현은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이란 표현은 ‘그리스도 예수에게 속해 있는 사람들’이란 의미로 사실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2:20)는 수동적인 표현이 ‘십자가에 못 박았다’(24)는 능동적 표현으로 바뀌었습니다. 못 박은 대상은 ‘육체와 그것에 속한 정욕과 탐심’입니다. 이 역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표현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이 세대 가운데 있으면서도, 이 세대의 운영원리인 ‘육체’와 그것의 특징인 정욕과 탐석을 따라 살지 않고, 다음 세대의 새로운 창조를 살아갑니다. 바울은 이 은총을 한마디로 ‘성령으로 살게 되었다’(25)고 표현합니다. 그 성령을 따라 ‘계속해서 성령을 따라 살라’(25)는 것입니다. 자만하며 서로를 충동질하는 것(16) 성령을 따라 사는 삶과 모순됩니다. 그것은 이미 못 박은 ‘육체’의 삶으로 돌아가는 격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을 받고 자유로운 성도인지 알고 싶습니까? 성령으로 사는지 또는, 육체로 사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당신의 삶 속에 나타난 열매, 성품에 나타나는 열매를 보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데 열매가 자연스럽게 맺을 것입니다. 반대로 육체를 따라 살면 그에 따른 열매가 당연히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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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05-01)


성령 안에서 누리는 자유

갈라디아서 5장 1-12절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허락해 주신 구원(救援)은 해방의 사건이고 자유를 주는 사건입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기 욕망의 종노릇 한데서 벗어나는 것이고, 창조주 하나님만을 선악과 생사의 주관자로 인정하고,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자유에 대해 오해할 수 있는 것은 자유는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에게 자유를 허락하신 분의 뜻대로 행하는 것은 참다운 자유입니다.

 

사도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이 자유인에게 다시 종의 멍에를 메게 하는 것일 뿐이며, 그러한 가르침의 동기는 십자가로 인한 박해를 피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지적한비다.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과 불순한 동기를 지적하면서, 바울은 대적자들이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는 자유(1)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자유을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헌법에서는 신체의 자유, 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 등은 누려야 할 기본적인 권리입니다. 그러나 이 자유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까지도 자유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한 자유를 방종(放縱)이라고 합니다.

1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1)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갈라디아서 1-4장을 통해서 신학적으로 변증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중간에 자신과 갈라디아 성도들의 관계도 나왔고, 자신이 어떻게 예수님의 부름을 받아서 이방인의 사도가 되고, 복음을 위임 받았는지를 말해서 자신이 전했던 복음이 주님의 복음이라고 논증하였습니다. 이 근거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성도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갈라디아서 5-6장에서 서술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라고,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복음에 대한 선언적으로 시작합니다. 보편적 관점에서 볼 때,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해 자기 몸을 주셨다’(1:4)는 소식입니다. 나아가 그리스도를 통한 다음 세대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 종노릇하였던 우리를 해방시켰습니다(4:3,8).

거짓 교사들의 주장은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조차도 율법을 따라서 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율법에서 해방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율법의 정신에 맞게 살아갈 수 있다는 바울의 주장의 요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것, 그것이 율법을 성취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아무런 목적도 없이 공연히 해방시키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멋대로 방탕하고 부도덕한 삶에 빠지라고 해방시킨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는 구원의 모든 해택을 만끽하면서 죄책감이나 정죄 없이 그리스도 안의 자유를 실천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율법이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고, 율법이 무효화 되거나 폐기되었다는 주장은 아닙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의 삶을 주장해왔던 철학, 종교, 기본적인 삶의 원리들과 함께, 그것이 비록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하더라도 완성된 복음이 오기 전 유대인들에만 한시적으로 주어졌다는 점에서, 유대인의 율법까지도 ‘초등학문’의 범주에 포함시켰습니다(4:8). 사라-하갈 이야기에 대한 해석에서도 자유한 여인 사라와 약속의 자녀 이삭의 후예는 바로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즉, 갈라디아 교회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볼 때, 복음의 자유는 곧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사도 바울은 앞에서도 할례를 부과하려는 자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2:4)하는 자로 설명했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통해 궁극적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복음을 따라 사는 것이 ‘자유’입니다. 반면 이를 거부하고 다시 유대인의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은 오히려 ‘종’이 되는 길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그것을 따라 사는 것을 ‘율법의 멍에’라 표현하며 그 멍에를 명예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제 바울은 ‘율법의 멍에’를 ‘종의 멍에’로 재규정합니다. ‘다시’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표현은 바울이 율법의 멍에를 이방인들이 회심 이전에 메고 살았던 ‘초등학문의 멍에’와 비숫한 수준에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또 다른 표현입니다. 5장 1절은 복음의 선초와 그에 대한 단호한 응답의 요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얻는 의(2-4)

누구든지 율법을 지켜서 완전해져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율법은 죄가 무엇이며, 죄인이 받을 형벌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 줍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도 율법을 지켜 의롭다함을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행위로 하나님께 칭찬받거나 인정받으려 하는 것은 다시 율법에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2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2-4)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도 취하고 하례와 율법도 행하려는 입장의 부당함을 재차 강조합니다. 우리는 구약성경과 옛 언약의 세계 속에서 메시아의 역할과 할례(율법)의 기능이 서로 배타적이지 않았다는 점을 다시 기억해야 합니다. 즉, 유대파 그리스도인 선교사들은 구약과 옛 언약에 기초해서 나름의 타당한 요구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고려하는 순간 완전히 달라집니다.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가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말합니다.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가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말합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자는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에서 제외된다고 말합니다(4). 할례든 음식법이든 정결법이든, 율법의 규정을 지키려 하는 자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율법이 중심이 되는 옛 언약의 체계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는 셈입니다.

이것은 바로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지게 된다는 말(3)의 의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가 아니라 ‘율법 안에’(4) 거하려는 삶을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그것이 초등학문에 의해 다스림 받는 삶을 지칭하는 표현합니다. 이것이 초등학문에 의해 다스림 받는 삶인데도, 이미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가 드러났는데도, 여전히 그러한 ‘종의 멍에’를 지려 한다면 이는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아직 모르고 있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성령과 믿음을 통한 의로움(5-6)

인간의 무지는 철옹성 같아서 성령의 조명하심이 아니면 그 어떤 증언이나 증거도 믿지 못합니다. 성령에 의해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성경의 증언을 절대로 믿을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는 바른 믿음의 눈으로만 하나님의 역사를 바르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5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5-6)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요약적으로 설명해줍니다. 그리스도인은 ‘의로움의 소망’을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의로움’의 은총이 미래형으로 표현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 있는 구절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가 얻게 될 모든 은총을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상과 ‘이미와 아직’이라는 이중적 종말 구조 속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의로움이 하나의 좋은 예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미’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로마서 5:1; 8:30; 고린도전서 6:11).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 안에’ 거하면서 그 의로움이 자라가고 궁극적으로는 완성될 날을 ‘아직’ 기다리고 있습니다(갈라디아서 5:5; 로마서 2:13; 3:20, 30). 같은 절에서, 바울은 미래적 의로움을 기다릴 수 있는 현재적 증거와 수단이 바로 ‘성령’과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자손이 받게 될 복들 중 상징적 복이기도 한 성령의 임재(3:14)는 종말의 영으로서 다음 세대 하나님 나라의 생명과 은총을 매개합니다. 정상적인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인정받았다는 의미인 의로움도 성령이 매개해주는 은총 중 하나입니다.

구속사적 순서로 볼 때, 하나님 백성의 의로움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에 의해 의롭게 되심’(디모데전서 3:16)으로 성취되고 성령을 통해 ‘그 안에’ 있는 우리에게 매개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은총에 참여하게 하는 것은 할레의 여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6). 단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중요할 뿐입니다. 정상적인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반드시 ‘사랑을 통해 역사’합니다(6).

여기서도 ‘믿음’이 지적인 동의와 전적인 신뢰와 더불어 전인격적인 순종의 반응을 내포함을 잘 보여줍니다. 특별히 ‘사랑을 통해 역사하는 믿음’이라는 표현은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 자신을 주신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을 연상케 하는 표현으로,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믿음을 닮아가야 함을 말해줍니다.

 

누룩 같은 거짓 교훈(7-9)

누룩은 수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숫자가 적더라도 모든 음식물에 삽시간에 퍼집니다. 잘못된 거짓 진리들은 누룩과 비슷합니다. 그 숫자가 작다고 무시할 것이 아닙니다. 순식간에 퍼집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변질하면서 까지 찾아온 안정은 영원한 안전이 되지 못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7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8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9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7-9)

대적자들의 가르침은 결과적으로 성도들로 하여금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7). 율법에 대한 그들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구속사적 목적과 그리스도를 통한 성취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즉, 갈라디아 교인들을 부르신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8). 바울은 대적자들의 가르침이 가지는 독소적 요소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진다’는 당시의 격언을 사용하여 표현합니다.

 

거짓 교사들이 받을 심판(10-12)

하나님의 심판은 엄중하기 때문에 매우 두렵기 그지없습니다. 다행히 아직은 심판의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긍휼의 때, 은혜의 때입니다. 그러나 심판이 시작되면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천지가 하나님의 심판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것입니다. 기회가 있을 때,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서야 합니다.

10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11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12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10-12)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진리 안에 굳게 서 있도록 종용하는 한편, 대적자들을 행하여는 심판을 선포합니다. 그는 대적자들을 ‘요동하게 하는 자’(10)와 ‘어지럽게 하는 자’(12)로 칭합니다. 이는 각각 ‘혼돈하게 하는 자’, ‘성도들을 충동하여 잘못된 행동을 하게 하는 자’라는 의미로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희석하고 그리스도의 희생을 무익한 것으로 만들었음을 표현해 줍니다.

유대파 그리스도인 선교사들이 십자가의 복음과 함께 할례와 율법을 전한 것이 유대교의 주류 사회로부터 저주받은 자(3:13)라는 걸림돌이 있었음도 동시에 밝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이야말로 하나님의 계시(1:12)요 완전한 진리(2:5)요 인간을 자유케 하는 소식(5:1)이요 죄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복음(1:4)임을 확인하였습니다.

이러한 진리에 머물지 못하게 성도들을 혼란케 하고 잘못된 판단을 하게 한 대적자들에게 ‘스스로 베어 버리라’고 말합니다. 아포콥토(αποκοπτω)는 육체의 일부를 잘라내라라는 의미입니다. 즉, 할례를 강요하는 그들에게 ‘그렇게 할례가 중요하다면 차라리 거세를 하라’는 의미로 풀이됩니다. 이 표현은 바울의 격한 심정을 잘 표현해주는 문장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우리로 하여금 자유를 누리게 합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진리가 주는 자유를 누립니다. 하례가 아닌 믿음으로, 우리는 율법에서 해방되어 사랑으로 지체의 종이 되기를 기뻐하는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무서워 지키는 말씀이 아니라 기쁨으로 순종하는 자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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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04-03)


자유인인 그리스도인

갈라디아서 4장 21-31절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이 성경이 증거 하는 진리입니다. 종종 사람들은 스스로 구원을 얻을 거라고 착각합니다. 자기 하나도 다스리기 힘든 미약한 사람들이 어떻게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혼자 스스로 구원할 수 있을 것 같으면, 왜 예수님이 오셨겠습니까? 왜 그분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야 했겠습니까? 구약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율법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유업을 이을 자들이 육체를 따라 난 자들이 아니라 약속의 자녀들이라는 점을 재확인합니다. 사라와 하갈의 아들 이야기를 통해 ‘약속과 율법’을 대조하고 ‘성령과 육체’의 대립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누가 아브라함의 유업을 받을 참 후손인지 밝힙니다. 비록 육체를 따라 난 자들이 성령을 따라 난 자들을 핍박하지만, 결국에는 성령을 따라 난 약속의 자녀들만이 유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두 아들(21-23)

불신앙의 세계에게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세상은 성도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이 심할 때는 잠시라도 현실에 순흥하려는 태도를 취하려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태도조차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21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21-23)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는 바울이 거론하기 전에 대적자들이 먼저 사용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할례와 함께 이삭에게 주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현혹되어가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갈라디아서의 중심사상을 체계적으로 교리를 마무리하면서, 명확히 복음과 율법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친숙한 아브라함의 두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인용해서 권면합니다.

(1) 율법의 의미를 청종(21)

사도 바울 당시에 유대인들은 사라-하갈 이야기에 대한 소재는 자주 사용한 성경 본문 중 하나입니다. 특히 약속의 자녀에 대한 소재로서 적합한 본문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할례와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성령을 통해서만 진정한 구원의 방편이요 하나님 백성의 표지임을 주장합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이라고 지적한 사람들은 바울의 대적자들뿐만 아니라 율법을 중심으로 하는 옛 언약의 체계 속에 머물고자 하는 자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아직까지 체계적인 신앙이 정립되지 못하고 초보적인 상황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라고 이 서신을 읽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전하려는 내용에 집중합니다. 그는 당시에 회당에서 랍비나 선생들이 청중들에게 성경을 낭독하기 전에 집중하도록 환기시키기는 방법으로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2) 아브라함의 두 아들(22-23)

사도 바울은 율법을 따라 가려는 자들에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두 아들인 이스마엘과 이삭의 정체성을 통해 설명합니다. 전자는 육체를 통해 태어났지만, 후자는 하나님 약속을 따라서 났습니다.

① 육신을 따라 난 이스마엘

먼저 여종 하갈을 통해 태어난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닌 인간적인 방법으로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옛 언약인 시내산 언약은 하갈의 아들에 빗댈 수 있는 종의 언약입니다. 이 땅의 예루살렘이 그 옛 언약을 대표합니다. 율법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② 약속을 따라 난 이삭

반면에 이삭은 사라에게서 태어난 하나님의 약속의 아들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자유를 얻은 사람들은 이삭처럼 자유인의 아들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자유를 얻은 사람들은 이삭처럼 자유인의 자녀입니다. 그들의 본거지는 이 땅의 예루살렘이 아니라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유인 어머니에게서 난 이삭처럼 하늘의 예루살렘으로부터 태어난 자유인들입니다. 

바울과 그의 대적자들이 동의하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문제는 누가 그 약속과 자유를 소유한 이삭의 후손인가 입니다.

 

사라와 하갈에 대한 비유적 해석(24-26)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은 당시에만 교훈을 주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세대에 숨겨진 하나님의 교훈이 있습니다. 마치 보물찾기처럼 그 숨겨진 영적인 교훈을 찾아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 또한 색다른 기쁨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대표적인 두 아들은 하나님의 감추어진 영적 교훈이 있었습니다.

24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5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26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24-26)

율법주의를 이겨 내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분의 은혜로 모든 죄와 사망의 종의 자리에서 벗어났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자유자로 살 수 있고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1) 언약을 상징한 두 여인(24a)

본 단락에서 바울이 보여주고 있는 사라-하갈 이야기 해석이 알레고리적 해석의 결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지를 놓고 오랜 토론이 있어 왔습니다. 우선 사라-하갈 이야기가 동시대 유대인들이 알레고리 해석의 주요 재료로 사용한 성경본문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2) 종노릇할 하갈의 자녀(24b-25)

바울의 구약 사용을 이해할 때, 그가 1세기 사람들이 사용하였던 다양한 해석 방법을 공유하였다는 점을 기억하면 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이미 갈라디아서 3장 16절에서 바울이 미드라쉬의 일종인 ‘원자화’ 해석 방법을 사용한 것을 보았습니다.

바울과 신약 저자들의 구약해석을 독특하게 만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해석의 준거점이었습니다. 사라-하갈 이야기 이해의 결정적인 준거점도 창세기의 원래 문맥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한 완성된 구원, 즉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외롭다함 받게 되었다는 새로운 틀 속에 사라-하갈 이야기를 재위치 시킨 셈입니다. 그 과정에서 사용된 방법이 알레고리입니다. 사라와 하갈은 각각 새언약과 옛언약에 대한 상징입니다(24).

역사적으로도 몸종이었던 하갈을 바울은 시내산과 연결시키고 나아가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연결시킵니다. 그의 자녀들은 모두 종입니다. 반면, 자유한 사람들의 어머니가 됩니다.

(3) 자유자인 사라의 자녀(26)

바울의 대적자들은 틀림없이 자유자의 자녀요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그의 육신적 후손인 유대인과 그들이 시내산에서 받을 율법과 연결시켰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약속, 유대인, 시내산, 율법, 자유는 하나의 언약 체계 속에서 편안하게 어울립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주장이 (그 자체 내에서 아무리 옳다 하더라도) ‘믿음이 오기 전까지만’이라는 것입니다(3:23). 그리스도는 약속-율법-자유의 연결고리를 끊으셨습니다. ‘약속-자유’라는 새롭고도 보편적인 연결고리를 만드셨슨비다. 그리스도께서 완성시킨 새언약의 체계 속에서 볼 때는, 이방인에게까지 율법 준수를 강요하는 ‘지금 있는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야말로 이방인들을 ‘종’으로 만들려는 사람들입니다. 반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을 받고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자녀들에게 약속된 복을 이미 받은 자들로서 사라를 ‘우리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유업을 누릴 약속의 자녀(27-28)

하나님만 의지할 때 승리할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자신의 재능과 실력이 미래를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붙들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역사해 나가십니다. 성도들은 하나님 자신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27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27-28)

사도 바울은 이사야 54장 1-2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산고를 겪지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이는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2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이사야서 54:1-2)

여기에서 ‘잉태하지 못한 자’는 일차적으로 사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개역개정의 ‘홀로 사는 자’에 대한 원래 표현은 ‘황폐한 여인’ 혹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입니다. 남편 없는 여인이 남편 있는 여인보다 자녀가 더 많은 기이한 현상을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남편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5).

남편 있는 여인은 육신의 자녀를 낳을 뿐입니다. 하지만 육신의 할례를 주장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하나님이 남편이 되어 준 여인은 약속의 자녀를 낳습니다. 약속의 자녀들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사라는 잉태치 못하였으나, 결국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낳았고 지금은 그리스도를 통해 열방으로부터 수많은 약속의 자녀들을 낳은 셈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사야서 54장 1-2절이 ‘고난 받는 종’의 노래(이사야 52:13-53:12)에 뒤이어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그 종은 땅에서 고난을 받고 살 소망까지 끊어졌으나 오히려 그 고난을 통해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담당한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눈으로 볼 때, 그 종이야말로 많은 의로운 후손들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사야 54장 1-2절에서 이 종은 ‘잉태치 못하였으나 많은 자손을 본 여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의도하였습니까? 바울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그 ‘잉태치 못한 여인’이 보게 될 약속이 자녀임을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할례와 율법을 준수해야 아브라함과 이삭이 자손이 된다는 오경 원래의 역사적 문맥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완전히 역전되었습니다.

 

유업을 누릴 약속의 자녀(29-31)

납득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극심한 핍박을 받고 있을 때, 두 가지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먼저, 현실 앞에 탄식하는 사람이 있고, 다른 종류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최후 승리를 주시는 분입니다. 현재 고난에 좌절하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29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29-31)

교회는 교회 안에 율법주의적인 요소가 남아 있는지를 잘 살피고 철저히 제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을 이삭과 함께 두고 문제를 개선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어미인 여종까지 모두 쫓아내라고 하셨습니다.

(1) 성령을 받은 자가 핍박(29)

사도 바울은 ‘육체를 따라 난 자’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대조합니다. 성령의 인치심은 3장과 4장에서 아브라함의 자녀된 징표로 바울이 줄곧 강조해온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자 사라의 요구를 따라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을 내보내라 명령하신 창세기 21장의 이야기를 인용합니다. 지금도 육체를 따라난 자들이 성령으로 난 자들을 핍박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육체를 따라 난 자’와 ‘성령으로 난 자’가 누구인지가 재정의 되었을 뿐입니다.

(2) 여종의 아들은 유업을 나누지 못함(30)

사도 바울은 창세기 21장 30절을 빌려 ‘여종과 그 아들들을 내쫓으라’고 명합니다. 율법을 부과하려는 유대파 그리스도인 거짓 선생들을 내쫓으라는 직접인적 명령인 셈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 주신 약속을 함께 상속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3) 성령 받는 자유자의 자녀(31)

이 단락의 결론입니다. 바울은 갈라이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은 그들이야말로 약속의 자녀, 자유자의 자녀임을 재확인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육체 속의 아이를 희롱했듯이(창 21:90), 바울 당시에도 육체를 따라 난 사람들이 성령을 따라 난 성도들을 핍박했습니다(29). 하지만 그들은 약속의 자녀들이 누리는 유업을 얻지 못합니다. 은혜의 복음으로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들만이 유업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약속의 자녀로, 새 언약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사실에 대해, 또 하나님의 자녀로서 받게 될 유업에 대해 얼마나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의 계보를 이은 것은 육체의 생각과 힘으로 낳은 이스마엘이 아니라, 믿음과 약속을 따라 낳은 이삭입니다. 이삭은 장자가 아니었지만 언약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율법이 아니라 그 율법보다 먼저 주신 약속을 따라 주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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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04-02)


바울의 권면

갈라디아서 4장 12-20절


‘지도자’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주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이 따르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지도자는 몸소 본을 보이는 사람만큼 영향력 있는 지도자는 없습니다. 명확한 증거를 가진 증인만큼 겁날 것이 없는 사람도 없습니다. 바울의 갈라디아 사역에는 지도자가 본을 보이고 성도들은 그 삶을 본받는 아름다운 조화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바란 것은 단 하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직접적인 권면의 단락을 시작합니다. 처음 갈라디아를 방문했을 때 성도들이 그를 환대한 것을 회상하며, 바울로부터 분리하려는 거짓 교사들의 시도를 비판합니다. 성도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임을 밝힙니다.

 

나를 본 받는 자 되라(12a)

예수님의 희생을 본 받아 바울도 유대적인 삶의 방식을 포기하고다.

12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12a)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갈라디아 교인들의 잘못을 이성적신 측면에서 맹렬한 논박을 하였습니다. 이제 본문에서는 ‘형제’로 부르면서 그들의 태도를 변경시킬 것을 정서적인 측면에서 권면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성육신의 원리를 따라서 갈라디아 교인들처럼 되어서 그들을 섬겼던 지난 시절을 추억하고 있습니다. 이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나와 같이 되라’는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나와 같이 되라’는 권면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요구하는 것입니까? 그 권면은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이란 말씀의 의미를 먼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안디옥 사건(2:11-14)에서 이미 암시되었듯이, 이방인들과 하나된 교회를 이루기 위해 자신이 먼저 이방인처럼 되었습니다. 이는 고린도전서 9장 19-22절에서 소개되는 바울의 선교원칙과도 부합합니다. 율법 없는 자들을 얻기 위하여 ‘율법 없는 자에게는 …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되었다’(고린도전서 9:21)라고 ***했습니다. 이방인처럼 된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한 가족으로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이란 말은 ‘내가 복음을 따라 살았은즉’이란 말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너희도 나와 같이 되라’는 말은 우선 ‘너희도 복음을 따라 살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갈라디아서 1장 11-2장 21절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변화된 바울의 삶을 자전적 어조로 보도해주고 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즉, 바울 자신이 바리새인으로 율법에 특별한 열심이 있는 자였으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율법에 대하여 죽은’ 것(2:19)과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을 살게 된 것(2:20)을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의 일인칭 고백은 서신의 결론인 6장 14-17절에서도 다시 한 번 절정에 이릅니다. 따라서 갈라디아서 1장 11절-2장 11절에 나타난 자서전적 고백은 자신의 사도적 권위에 대해 변호하려는 목적이 있겠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그리스도로 인해 변화된 삶의 모델을 제시하려는 데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좋습니다. 결국 ‘나와 같이 되라’는 명령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라, 너희를 사랑하사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 아들의 신실함을 지금 여기에서 다시 살아가라는 명령으로 풀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율법에 대한 열심이 교회를 핍박하였으나, 이제는 변화된 바울 자신처럼 말입니다.

 

환대했던 갈라디아 교인들(12b-16)

현재 우리 신앙의 모습이 어떠한가도 중요하지만, 마지막 신앙의 모습이 어떠할지가 더 중요합니다. 변함없이 한결같은 믿음, 날마다 성장하는 믿음을 소유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믿음을 찾고 계십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의 믿음을 살펴보면 환경에 따라 변질된 믿음이었습니다.

12…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3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5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16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12b-16)

복음은 율법의 영원한 요구인 참된 사랑을 이루는 길입니다. 율법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드러납니다. 복음만이 참된 이웃 사랑을 가능하게 해 율법을 완성합니다.

(1) 연약함을 통해 전한 복음(13)

이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지방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처음 전한 과정을 설명합니다. ‘육체의 약함’ 때문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13)는 말은, 육체의 약함으로 인해 갈라디아 시방을 처음 방문하게 되었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로 인해 계획보다 더 오랜 기간 그 지방에 머물게 되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어떤 ‘육체의 약함’을 말하는 것입니까?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서도 ‘육체의 가시’를 언급하는데, 다수의 학자들은 그가 다메섹 사건 이후 3일간 보지 못한 뒤 시력의 문제를 가지게 되었다고 추측합니다. 아울러 선교 여행 중에 겪은 육체적, 정신적 핍박에 노출된 결과를 말할 수도 있습니다.

(2) 환대했던 갈라디아 교인들(14-15)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할 수만 있었더라면 그들의 눈이라도 빼어 자신에게 주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바울의 육체적 연약함이 눈과 관련된 것이었을 수 있다는 추측에 힘을 보탭니다. 이러한 육신의 질병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을 환대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육신의 질병은 악한 귀신의 역사라고 여겼다는 점에서 바울의 질병은 그들에게 시험거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13). 그러나 그들은 바울을 업신여기거나 경멸하지 않았습니다(13).

오히려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다’고 바울은 회상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처음 접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복음을 인한 진정한 삶의 변화와 복음을 전해준 바울에 대한 감사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그들이 ‘성령으로 시작하였다’(3:2)는 점을 이미 언급한 바 있습니다. 답답한 15절 서두에서 ‘너희에게 있었던 복음으로 인한) 행복/기쁨이 어디로 갔느냐?’라고 질문합니다. 복음 전도자인 바울에 대한 그들의 사랑은 특별했습니다(15b).

(3) 불편한 관계(16)

지금은 오히려 바울이 ‘참된 말을 하므로’ 그들의 원수가 된 형국입니다(16).

 

거짓 교사들의 의도(17-18)

복을 따르는 것이 참된 성숙의 길입니다. 복음만이 죄인을 사랑하사 자기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와 그이 사랑을 드러냅니다. 복음을 믿을 때 복음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을 닮게 됩니다. 복음은 참된 아비의 마음을 갖게 하는 영적 성숙의 길입니다. 복음에서 떠나는 사람은 영적 어린아이의 상태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직 복음 안에서만 다른 사람을 돌보고 섬기는 성숙한 성도가 됩니다.  

17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18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17-18)

복음으로 주님의 자기 부인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으로성릐 모든 존귀와 영광을 버리고 오셨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 가장 낮은 곳까지 낮아지셨습니다. 복음만이 자기를 위한 열심의 한계를 넘어 진정으로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추구하도록 합니다.

(1) 바울과 분리시키려는 거짓 교사들(17)

사도 바울은 유대파 그리스도인 선교사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하여 열심을 품는 것에 다른 동기가 있음을 설명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을 바울과 분리시켜 그들을 향하여 열심을 품게 하려 한다는 것입니다(17).

먼저 바울의 선교 여정을 뒤따라 다니며 이방인 성도들에게 율법을 부과하려 했던 거짓 선생들은 바울의 복음에서 ‘율법’이 결여되었다는 확신 아래,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면서 이방인 교인들을 바울과 분리하려 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열심을 품다’라는 의미의 동사 ‘젤로우’는 율법에 대한 열심을 설명할 때 주로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여기에서도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들에게 열심을 품게 한다는 것은 결국 이방인들로 하여금 유대인들의 율법에 대한 열심을 가지게 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통해 그들이 노리는 것은 결국 무엇입니까? 사도행전은 유대교가 초기 기독교 운동을 어느 정도 용인하였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사도행전 5:34-39). 즉, 할례나 정결법, 안식법, 음식법과 같은 유대교의 핵심적인 표지들을 지키는 이상 다양한 종파들에 대해서 용인할 의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안디옥 사건에서처럼 인방인과 식사 교제를 희생하더라도 주류 유대교와의 관계를 해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나아가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와 율법을 부과할 수만 있다면 주류 유대교로부터 더욱 인정을 받을 만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2) 잘못된 열심을 품은 거짓 교사들(18)

사도 바울은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5:11)라고 말합니다. 즉, 바울의 대적자들이 이방인들에게 할레를 전하고 율법에 열심을 내게 한 것은 결국 자신들이 동족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동기에서 나왔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동기가 온전하다면, 서로를 향하여 열심을 품는 것은 언제라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18).

 

다시 돌아설 것을 요구(19-20)

예수님의 제자로서 따르는 삶은 그저 주님이 좋아서 따르기보다 목적의식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은 앞서지만 실제적인 준비가 덜 갖춰졌다고 판단되면, 열의를 가라앉히고 기도하며 필요를 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현재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이 바른 길인지 살펴야 합니다. 잘못된 길이라면 결단하고 돌아와야 합니다.

19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20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19-20)

복음을 떠난 갈라디아 성도들은 처음부터 다시 돌봐야 할 영적 어린 아이가 되었지만, 바울은 복음 가운데 그들을 위해 다시 해산의 수고를 하겠다고 결정했습니다. 복음에서 떠나는 사람은 영적 어린아이의 상태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직 복음 안에서만 다른 사람을 돌보고 섬기는 성숙한 자가 됩니다.

(1) 다시 수고해야 함(19)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나의 자녀들’이라고 부릅니다. ‘자녀’의 이미지는 곧이어 ‘해산하는 수고’라는 단어로 이어집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이 낳은 영적인 자녀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다시’ 그 해산의 수고를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헬라어 ‘오디노(ὠδίνω)’는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도 그들을 위한 해산의 고통이 계속되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해산의 고통이 계속되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해산의 고통은 ‘그리스도가 너희 안에 형성될 때까지’입니다. 이 말은 성도와 그리스도의 연합을 일컫는 또 다른 표현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해산의 고통은 아이가 태어나야 끝납니다. 즉, 바울은 여기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성도의 태어남과 동일시하고 있는 듯합니다.

(2) 안타까운 교인들(20)

편지를 쓰고 당시에도 바울은 당장에라도 갈라디아 교인들을 만나 그들을 설득하고 싶은 마음을 토로합니다(20). 그만큼 복음의 진리를 떠나 할례와 율법을 채택한 그들의 결정이 바울에게 충격을 주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의 복음이었습니다. 그의 소원은 성도들이 바른 복음을 따라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은 것이었습니다. 복음도 여전하고 바울도 여전한데, 다만 갈라디아 교인들은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간절히 잘못된 길에서 돌아오기를 바랐고 있었습니다. 우리 속한 공동체의 바람은 무엇입니까? 복음으로 지도자와 성도들이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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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04-01)

자녀에서 종으로

갈라디아서 4장 1-9

 

아이를 너무도 사랑하는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너무도 감사하게도 부부에게 하나님께서는 아이를 선물로 주셨습니다그 부부는 자신이 낳은 아이뿐 아니라 다른 아이도 사랑을 나누고 싶어서 한 고아를 입양하였습니다부부의 사랑을 먹고 두 아이는 잘 자라고 있었습니다그러던 어느 정도 성장했을 때입양된 아이는 자신이 입양된 것을 알게 되었고그때부터 아이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부모에게 자유롭게 요구하던 것들이 사라지고부모님께 잘 보이도록 노력하였습니다가지고 싶은 것먹고 싶은 것도 참고 말하지 못했습니다그 이유는 자신이 입양된 아이라는 이유로 자유롭지 못했던 것입니다이것을 알게 된 부모의 마음은 자신의 마음을 모르는 것에 마음이 아팠었습니다자신이 낳은 만큼 사랑한 아이인데 말입니다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된 자녀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했습니다그런데 혹시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 있지는 않습니까본문은 그 하나님의 마음에 대한 말씀입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유대인의 율법을 준행하려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만류합니다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에는 하나님 아닌 것들의 종으로 살았으나이제 하나님의 아들과 그 아들의 영을 통해 아들의 지위를 얻었음을 설명합니다놀랍게도 바울은 이방 성도들이 율법을 지키려 하는 것을 다시 하나님이 아닌 것에 종노릇하려는 행위에 견줍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아들의 명분(1-3)

아버지의 유산을 받을 아들이라도 성인이 되기 전에는 아버지 유산과 상관없는 종과 다름없습니다청지기과 후견인 아래서 통제되고 절제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이와 같이 유대인들도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율법 아래서 종노릇 하며 살았습니다그리스도 안에서만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납니다.

1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3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1-3)

사도 바울은 은혜로 부름을 받았던 갈라디아 교인들이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의 조건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봅니다그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시 율법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고 책망하면서 종과 아들에 대한 비유를 합니다종과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명확하게 들어납니다이방인들이 율법을 지키려는 것은 종노릇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이는 율법의 한시성을 설명하기 위해다시 한 번 갈라디아 교인들이 잘 알고 있는 사회적 관습인 후견인과 청지기’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당시에는 히브리 문화 속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은 대등한 관계였습니다아버지에게 있어 아들은 기업을 이을 상속자로서 아버지와 그 동격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처음부터 모든 것을 가진 상속자로서 동격을 이루진 않았습니다당시 문화적으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성장할 때까지 후견인을 두어 가르침을 받게 하였습니다율법은 그리스도에로 인도하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래서 3장 24-25절에서 훈육교사와 유사한 비유를 제시합니다. ‘훈육교사가 주인집 아들의 교육과 관련되었다면, ‘후견인과 청지기는 주인집 아들의 재산 상속과 관련됩니다후견인 밑에 있을 때는 아들이지만 잠시 동안 종과 같은 위치에서 살게 됩니다하지만 아버지가 정한 때가 되면아들은 아버지와 대등한 위치로 가게 되고종은 계속해서 종의 위치에 머물게 됩니다율법 아래 있었던 유대인들에 대해 설명합니다.

현존하는 그리스-로마의 많은 판례들에서도 볼 수 있듯이유언이나 재산 상속과 관련된 사건들은 당시 사람들의 사회적 관심거리였습니다유산을 상속할 적법한 상속자라 하더라도 성인이 되지 전까지는 재산 관리 차원에서나 법적인 차원에서 후견인이나 청지기에게 의지해야 하는 당시의 관습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그래서 바울은 아버지가 정한 때가 차기 전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는 어린아이의 상태를 종과 다름없는 상태라고 묘사합니다(1).

율법 아래에 있던 시기가 바로 이와 같은 의 상태였다는 것입니다놀랍게도 바울은 율법을 이 세상 초등학문이라고 특징짓습니다여기서 스토이케이아(στοιχεια)’는 영적인 세력보다는 세상이나 우주를 다스리는 기본적인 원리나 정신을 일킵니다바울이 율법을 스토이케이아의 일종으로 분류합니다.

이방인들이 다른 신을 섬기고(8) 나름의 철학과 가르침을 따라 살아온 동안유대인들은 율법 아래에서 살아왔습니다바울은 여기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이전에 따르던 이 모든 원리와 가르침을 다같이 초등학문으로 분류합니다율법도 초등학문인 것은 그것이 한 민족을 다스리는 원리였기 때문입니다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준비 단계에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상속자의 지위를 얻음(4-7)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율법 아래 보내셔서 율법 아래서 종노릇 하던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그 전에는 우리의 신분이 사탄의 자녀요결국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었습니다이제는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과 믿음을 주셨습니다.

4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4-7)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율법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졌지만주어진 율법은 1400년 정도를 청지기와 후견인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결국 하나님의 때가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율법이 후견인과 청지기의 역할을 마치게 된 것입니다.

여러 학자들은 초대교회에서 공적으로 사용했던 신앙고백을 포함합니다로마서 8장 3-4요한복음 3장 16-17요한일서 4장 9-10절에서도 하나님이 을 위해서 그 아들을 보내셨다는 공식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여기에서 하나님이 아들이 오신 목적이 두 가지 인데⑴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자유케 하고⑵ 우리로 아들의 지위를 얻게 하는 것입니다.

한 문장을 이루는 가운데여자에게서 나시고율법 아래에 나신 것이란 구절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실 때의 부대 상황으로 묘사됩니다이는 각각 그리스도의 인성과 사역을 표현해주는 표현들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이 문장이 교차대구법을 이루고 있고 그 중심에 율법 아래에라는 표현이 두 번 등장하는 것만 보더라도 바울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 지 알 수 있습니다즉 어린 상속자가 후견인 아래 있다가 아버지가 정한 때에 상속자가 되는 것처럼우리도 율법 아래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를 통해 아들의 지위를 얻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그래서 때가 차매가 중요합니다이 악한 세대(1:4)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하나님의 종말적묵시적 행동이 일어날 때가 된 것입니다.

아들의 명분과 성령의 관계에 대해 추가적인 설명을 제공합니다갈라디아서 3장 26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음을 설명했습니다그 아들의 영(6) 곧 성령을 받은 것은 이미 아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바울은 3장 2-5절에서도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미 성령을 경험했음을 상기시켰습니다두 다락 모두에서 성령의 경험은 율법 준수와 상관이 없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첫째바울은 여기서 성령을 그 아들의 영으로 묘사합니다즉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으로 부릅니다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부릅니다(로마서 8:9; 빌립보서 1:19).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의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다.’는 표현 또한 같은 맥락입니다하나님의 왕과 완전한 연합을 이루신 그리스도의 모습은 성도의 영광스러운 종말적 소망을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둘째바울은 아들이기 때문에 성령이 주어진다고 표현합니다(6). 그러나 로마서 8장 14절에서는 성령을 양자의 영으로 소개하면서성령 곧 양자의 영을 받은 자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설명합니다바울은 두 본문에서 성령의 임재와 양자됨 사이의 시간적 순서에 대해서 서로 다른 설명을 제시합니까바울의 관심은 시간적 순서에 있지 않고양자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하는 데에 있는 듯합니다.

성령의 임재는 바람과 같아서 언제 임했는지 인간이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양자됨을 얻었고 그 양자됨은 성령의 선물과 관련이 있으므로 또 다른 질문이 가능합니다성령의 선물과 관련이 있으므로 또 다른 질문이 가능합니다.

성령의 임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능케 하였는지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얻었는지에 관한 질문입니다논리적으로 볼 때양방향 모두에서의 추론이 가능해 보입니다어느 방향이건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성령의 임재가 하나님 자녀됨의 증거 하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아들의 영이 있는 자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릅니다(6; 로마서 8:15). 더 이상 종이 아니요 아들입니다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상속자입니다(7) 사도 바울은 3장 2-5절과 4장 6절에서 강조하듯이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자신들에게 성령이 임했음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성령의 임재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려 했다는 사실은 경각심을 느끼게 합니다.

 

초등학문 종으로 돌아가지 말 것(8-11)

구원이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다른 신들로부터 구원을 받으려고 할 것입니다우상에서 종노릇하던 곳에서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외면하고 점점 죄의 길로 들어설 것입니다그리고 결국 죄의 종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8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9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10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8-11)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이전의 상태를 상기시킵니다. 1세기 그리스도-로마 사회에는 종교가 삶의 모든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조상 때부터 섬겨왔던 신들의 종으로 살았을 것입니다또한 각종스토이케이아(στοιχεια)’들이 그들의 삶을 움직이고 있었을 것입니다죄인인 인간을 사랑하여 자신의 몸을 주신 하나님 아들에 관한 복음을 그들은 종 삼았던 전통적인 신들의 이야기와 비교할 수 없었을 것인비다.

더구나 세상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노예정제에 근거하여 이민족들을 착취함으로써 제국의 체제를 고착화하려 했던 황제들의 이야기와도 비교할 수 없는 능력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9) 된 상태로 묘합니다이렇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들이 할례와 율법 아래로 들어가는 것은 마치 그들의 옛 신들과 옛 스토이케이아(στοιχεια)’의 종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고 바울은 평합니다복음과 비교할 때모든 스토이케이아(στοιχεια)’는 약하고 천박하다’(4:9) 한 민족에게 주어졌다는 점에서 율법도 스토이케이아의 일종이 아니었습니까(4:3)?

과연 갈라디아 교인들은 유대인들의 달력을 따른 각종 의식과 율법도 채택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10). 날과 달과 절기와 해는 그 각각이 정기적으로 되풀이되느 유대교의 특징 기념일들을 가리킬 수도 있겠지만유대교 의식에 대한 통칭으로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지킨다는 의미의 동사 파라테레이스테(παρατηρεισθε)’가 현재형으로 쓰인 것을 보면 갈라디아 교인들이 계속해서 유대인들의 절기를 고수하고 있는 중으로 보입니다바울은 이러한 모습에 대해서 자신의 수고가 헛되다고 단정 짓고 갈라이아 교인들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대신자신의 수고가 헛될까 두려워한다고 말합니다(11). 강한 어조로 다시 복음의 진리로 돌아올 것을 명하면서도그들 스스로 마음을 다시 바꿀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는 대목에서 목회자 바울의 면모를 읽을 수 있습니다.

복음을 받았으면서도자신들의 연약함과 무지 때문에 복음의 진리에서 떠나는 아들은 1세기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오직 그리스도의 객관적인 사역에 근거해 의로움을 얻는다는 진리가 모두에게 계속적으로 선포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거짓 선생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율법 준수함으로 먼저 유대인이 되라는 요구했습니다이것은 하나님의 구속 경륜을 무시한 것입니다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신 희생적인 사랑을 헛되게 하는 것이고바울의 목숨을 건 복음의 헌신 또한 헛되게 하는 행동입니다이러한 신앙 행동은 좀 더 고차원적인 신앙생활이 아니라 영적인 노예와 자기 만족의 종교로 돌아가려는 불신앙일 뿐입니다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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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03-03)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의미

갈라디아서 3장 19-29절


부모가 자녀에게 도덕이나 윤리를 가르치려면 어떻게 가르쳐야 합니까? 하나하나 도덕적인 사안들을 법으로 정해두고 그것을 지키지 못할 때마다 정죄하면 그것을 잘 지킬 수 있겠습니까? 아마 이 법으로 인해 부모는 아이들을 정죄하고, 아이들은 그 법 아래에서 곧 고통당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아이들은 아직 도덕이나 윤리가 무엇인지 모르고, 법을 지킬 힘도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아이들과 함께 이 도덕이 왜 필요한지를 나누고, 또 도덕의 정신을 가르치고, 지킬 수 없는 아이들을 보호하며 가르치면, 그것을 자신들에게 왜 필요한지, 왜 지켜야 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힘들지만, 조금씩 지켜갈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와 비슷한 것이 바로 율법(律法)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율법이 왜 있는 것이고, 그것을 어떻게 지켜나가야 하겠습니까? 본문은 은혜와 율법에 대한 내용을 다루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 준수가 더 이상 하나님 백성의 기준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왜 율법을 주셨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합니다. 처음부터 율법이 생명의 수단으로 주어지지 않았으며 구속사 속에서 한시적인 목적을 위해 주셨음을 주장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약속된 생명과 의로움의 유업은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차별 없이 주어진다는 복음의 핵심을 선포합니다.

 

율법을 주신 목적(19-22)

사람들은 혼돈을 머금고 있는 죄인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더 알아야 하고, 선악의 기준을 제시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그런 기능을 합니다. 율법 앞에 설 때, 자신이 얼마나 제한된 존재인지, 죄인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19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20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21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22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19-22)

사도 바울은 거짓 교사들에게 속고 있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계속해서 복음의 진정한 본질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짐을 설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 백성이 되었습니다. 다른 것으로 그 근거를 삼을 수 없습니다. 만약 십자가를 약화시키고 무효화시킨다면, 그것은 바로 ‘다른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의롭게 되는 것은 구약은 율법을 통하고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모든 인류에게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여기서 율법에 대한 의문이 생깁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다면, 율법은 왜 필요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이 무엇이냐?’라는 주제 아래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에 대해서 여러 명제들을 쏟아냅니다.

(1) 죄를 깨달게 한 율법(19)

사도 바울은 율법이 구속사가 진행되는 중 어떤 특별한 목적을 위해, 즉 ‘범법함 때문에’(19) 더해졌다고 말합니다. 즉 ‘범법함 때문에’라는 의미는 ‘범죄하였다는 것을 알도록’, 또는 ‘범죄함에서 돌이키도록’이라 뜻입니다. 이는 율법의 일반적 기능을 내포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오히려 그 범법함의 증가로 인해 그리스도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물론 이러한 내용을 바울도 예수님을 만난 후에 회심하고 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비로소 발견하게 된 율법의 기능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2) 중보자를 통한 율법(19)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 천사들을 통해 중보자, 즉 모세의 손으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천사를 통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의미합니다. 천사들이 개입되었다는 인식은 사도행전 7장 53절과 히브리서 2장 2절에도 등장합니다.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사도행전 7:53)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히브리서 2:2)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천사들을 통해 율법이 주어졌다는 것은 4장 1-3절, 8-11절의 문맥에서 율법이 지니는 한계를 설명하는 하나의 방편입니다.

(3) 한계성 있는 율법(19)

율법은 약속하신 자손, 즉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만 허락되었습니다. 이는 율법의 한시성(限時性)을 분명히 말해주는 구절입니다.

(4) 생명이 없는 율법(21)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처음부터 율법은 생명을 주기 위해 부여된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랬다면 하나님께서는 생명과 의로움을 율법을 통해 주셨을 것입니다. 율법은 생명과 의로움을 주기 위해 복음과 경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을 반대하거나 모순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율법을 성취하시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5)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22)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피스티스 크리스투(πιστις Χριστου)’, 즉 ‘그리스도의 믿음(또는 신실함)’을 통해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을 주신 것을 계획하셨습니다.

개역개정에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라고 번역했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이라고 번역했어야 합니다. 믿음이 칭의의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이 칭의의 근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6) 제한적인 율법(21)

성경은 이 과정에서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어서 은혜 아래 있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경’을 어떻게 해석할지에 대해 여러 견해가 있지만, 문맥에서 ‘율법’과 사실상 유사한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율법이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범법함을 증가시켰습니다(19)는 이해와도 상통합니다.

그러면 20절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개역개정의 번역대로 ‘중재자는 한 편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는 번역이 다수의 의견입니다. 중재자인 모세가 천사들과 이스라엘 백성 두 편 사이에서 중재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이를 통해 바울이 재차 확인하려 하는 것은, 율법이 그리스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천사를 통해 주어졌다(19)는 사실과 모든 민족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즉 율법의 한계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20). 즉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만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요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시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모든 민족을 위한 복음은 다른 방법으로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모든 민족의 구원의 방법이 아니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조건으로 할례를 포함해서 율법 준수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바울이 주장한 것입니다.

율법은 모든 사람을 심판하고 정죄합니다. 그리고 율법으로 정죄 받은 모든 사람은 이제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도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율법으로 구원을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방법(23-25)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인간의 능력이나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가능케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효력이 미치기 전까지는 모두 율법 아래 갇히고 매어 있었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구원에 대해 어쩔 수 없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구할 뿐이었습니다.

23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25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23-25)

율법은 인간 자신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고 그 율법의 저주와 굴례에서 자신을 건져 줄 다른 누군가에 대한 희망을 갖게 만듭니다. 율법의 저주를 해결하고 율법의 요구를 충족함으로 말미암아 믿는 모든 자를 하나님의 의에 이르도록 해 줄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만듭니다.

(1) 율법 아래 갇힘(23)

사도 바울은 19절과 22절을 되풀이해서 표현합니다(23).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갇혀 있었던’ 시기는 율법의 시대가 끝나고 그리스도의 시대가 왔다는 것입니다. 구속사 속에서 하나님 백성이 율법 아래 살던 기간을, 다메섹 이후의 관점에서 묘사한 표현입니다.

추가되는 결정적인 표현은 ‘믿음의 도래’인데, 바울은 ‘믿음이 오기 전’(23)으로 시작해 ‘믿음이 계시될 때까지’로 끝냅니다. 이는 ‘믿음’이 어떤 인물이나 사건인 듯한 인상마저 줍니다. 이곳에서 말하는 ‘믿음’은 원어로 ‘피스티스(πιστις)’인데, 그 앞에 정관사가 있는 점을 고려해, 직전의 피스티스, 즉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으로 특정하여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율법 아래에 놓였다’는 의미로 정리됩니다.

(2) 초등교사가 된 율법(24)

이 모든 것을 종합하는 비유가 24절에 등장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주인의 자녀가 장성할 때까지 그를 맡아 잠시 보호하는 ‘훈육교사’의 관습을 통해 설명합니다. 율법은 훈육교사처럼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우리를 맡아 보호하셨습니다. 결국 율법의 가장 주된 기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하나님 백성으로 인정됩니다.

(3) 율법에서 벗어남(25)

사도 바울은 다시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라고 율법의 한시성을 강조합니다. ‘그 믿음’, 즉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이 역사 가운데 나타나신 이후에는 더 이상 유대인의 율법 아래에 놓여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한 유업(26-29)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모든 민족이 차별의 담이 하물어졌습니다. 이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분이 사라지고, 하나님 나라의 한 가족이요, 아브라함의 유업을 이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소망 없는 우리에게 주신 복음입니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생명의 소식입니다.

26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26-29)

율법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면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야 함을 알게 합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해서 얻은 유업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아들 됨(26)

이 단락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가지는 의미에 집중합니다. 바울 서신 안에서 그리스도의 연합 사상은 본문에서처럼 ‘그리스도 안에’(26), ‘그리스도 안으로 세례 받음’, ‘그리스도로 옷 입음’(27), ‘그리스도에게 속함’(29) 등의 어구로 표현됩니다.

신학적으로 볼 때도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상은 과히 바울신학의 중심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상은 갈라디아서 3장 16절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구속사 속에서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유일한 자손’으로 아브라함 자손에게 약속된 모든 복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성취된 그 은총들은 ‘그 안에’ 거하는 자에게만 주어집니다. 대표적으로 바울은 3장 13절에서 성령의 약속을 언급합니다. 26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2장 17절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이제 그리스도의 생명과 그리스도가 시신 삶을 살아갑니다.

(2) 그리스도와 살아감(27)

‘그리스도 안으로 세례 받다’(27)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와의 연합된 상태를 말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초대교회의 실제적으로 있던 세례의식을 지칭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자들은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이 표현은 ‘어떤 사람의 특징, 성격, 생각을 모방하여 그 사람처럼 되다.’라는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은 이제 그리스도의 성품, 생각, 행동을 본받고 닮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과 같이 동일한 고백입니다.

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20)

(3) 차별이 없음(28)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하여 성령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하나님 자녀된 증거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약속이야말로 인종이나, 사회적 신분이나, 성별의 차이에 구애받지 않고 동일하게 적용되는 복음의 진리입니다.

자신만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기준으로 자신을 거룩하게 지키고 말씀에 순종할 때, 비로서 하나된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4) 아브라함의 자손(29)

이를 다시 확인합니다(29). ‘그리스도의 것’ 혹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는 자’는 누구든지 아브라함 자손이요 약속을 이를 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서로 사랑할 수 있고, 서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뿐만 아니라, 자유인과 종,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이 하나의 교회공동체에 속할 수 없다는 메시지는 당시의 사회적 질서와 관습을 생각할 때 눈여겨 볼 대목입니다.

이제 율법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부름 받은 사람은 죄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인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음으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다는 것은 이제는 옛전 생활을 계속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성품을 본 받아 살아가며, 예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즉, 율법의 요구가 구원의 조건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사람이라도 차별하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이제는 율법을 그 정체성으로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였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 성도들의 정체성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확인됩니다. 율법의 기준으로 살아가며 종노릇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어린 아이가 아니라 주 안에서 서로 종노릇하는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사로 남을 판단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기준으로 자신을 거룩하게 지키고 말씀에 순종할 때, 비로서 하나된 교회 공동체, 하나된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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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03-02)


율법의 저주에서 복으로

갈라디아서 3장 10-18절


당신은 무엇을 소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영적으로 사람들을 구분해 보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사람과 보이는 이 세상에 것만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하루하루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나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백성의 기준이 더 이상 율법 준수가 아님을 구약 성경을 사용하여 또 언약의 권한 사회적 관행에 기대어 설득합니다. 율법으로는 누구도 의롭게 될 수 없고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과, 아브라함의 유일한 자손인 그리스도를 동해 약속하신 유업이 이방인에게까지 미친다는 점을 제차 확인 합니다.

 

구약 핵심을 재해석(10-12)

지혜로운 사람은 영적인 눈으로 삶을 통찰합니다거시적인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기독교는 자기를 버리면 얻는 역설적인 종교입니다아집과 같은 자기 생각을 버리고 새로운 은혜로 채우려 하면하나님께서 때마다 공급해주시는 은혜를 누리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

10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12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10-12)

사도 바울은 율법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여부를 결정할 수 없는지 여부를 구약성경을 사용해서 설명합니다. 결론적으로 율법으로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의인은 믿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1) 율법 안에서 저주를 벗어나지 못함(10)

아브라함의 후손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유업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까지 미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6절부터 성경을 사용하여 율법으로부터 복음에 대해서 논증합니다.

구약 창세기만 놓고 보았을 때, 할례 일만을 언약 백성의 표지로 삼는 바울의 대적자들의 주장이 옳아 보입니다. 율법에 대한 그들의 주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명기 27장26절이나 레위기 18장 5절에서 설명합니다.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명기 27:26)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위기 18:5)

이처럼 율법을 행하는 자는 생명을 유지하고, 그것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대적자들의 주장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구약 해석과 사용을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울이 가지고 있는 해석학적 기준점이 대적자들의 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인, 그리스도로 인해 옛 언약의 시스템이 상당 부분 수정되어야 한다는 깨달음에서 바울의 신학은 출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고, 그래서 의로움과 생명을 얻어 하나님의 백성 되는 방식도 바뀌었고, 성경에 대한 이해, 율법에 대한 이해도 바뀌었습니다. 이제 누구라도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만 이로움과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로 인한 종말이 이미 시작 되었다.’는 문맥 속에서 10-12절을 해석해 보면, 종말 이전에 해당하는 구약(신명기 27:26; 하박국 2:4; 레위기 18:5)의 원래 문맥은 잠시 미루어 두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핵심적인 자신의 주장을 먼저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다’(10)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율법 준수는 옛 세상에 속해 있고, 그것만을 의지하는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다는 말입니다. 왜 그러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종말에 생명과 의로움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만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누구라도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의지할 때만, 생명과 의로움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함(11)

사도 바울은 3장 1-5절에서 이미 종말의 상징인 성령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임했음을 강조했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전체를 통한 바울의 핵심 질문 가운데 하나가 이것입니다. ‘도대체 너희는 어느 시대에 속해 있습니까?’ 신명기 27장 26절이 말하는 것처럼, 옛 시대에는 율법을 ‘준행치 아니하는 자’가 저주 아래 놓였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창조의 시대에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와 함께 ‘율법을 지키는 자’도 저주 아래 놓일 수밖에 없습니다.

11절이 말하는 것처럼, 새 시대 속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을 통해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히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하박국 2장 4절을 통해 믿음의 원리를 설명합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 2:4)

이것이 새 시대의 특징입니다. 이제 새 시대에는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곧 의인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것이 종말의 새로운 원리입니다. 바울은 다시 한 번 율법을 새로운 시대의 삶에서 배제시킵니다. 율법은 믿음이 중심이 되는 새 시대의 삶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래도 ‘율법에 속하여 그것을 지키기를 원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옛 세상, 율법의 저주에서) 살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레위기 18장 5절을 사용한 바울의 수사적 의도일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이 단락에서 바울은 새로운 창조에 속한 사람이 여전히 유대인의 외형적 율법을 그대로 지키면서 살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3)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님(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중심된 새 시대에 방식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율법에 속하여서 지키길 원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 가운데서 율법의 저주 가운데서 살게 하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새로운 창조에 속한 사람이 여전히 유대인의 외적인 율법을 그대로 지키면서 살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이방인(13-14)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복은 받은 사람이 원해서 얻는 것이라기보다는주시고자 하는 분이 줄 만한 자를 보고 주시는 것입니다가난한 자주린 자우는 자예수님 때문에 미움 받고 버림을 받은 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복을 허락하십니다이들의 공통점은 주님이 간절히 필요한 자들입니다.

13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13-14)

이러한 새로운 결정적 변화를 불러온 새로운 세대의 도래가 가능케 된 원인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목적도 없이 율법을 주셨다가 거두어 가셨습니까?

(1)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13)

사도 바울은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집중적으로 다룹니다. 한마디로, 새로운 시대의 도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그 결과로 모든 민족에게 주어진 성령의 선물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구약성경 속에서 메시아와 율법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와 ‘율법’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고 역설합니다(갈라디아서 2:21; 3:21; 5:2-4). 그 결정적인 이유를 십자가의 죽음에서 찾습니다.

바울에게 십자가의 죽음은 율법이 규정하는 매우 독특한 형태의 죽음, 즉 ‘나무에 달려 죽는 죽음’입니다. 그는 예수의 죽음을 신명기 21장 22-23절에 규정된 죽음으로 읽습니다. 하나님의 저주 받은 죽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율법이 구체적으로 규정한, 가장 엄중한 형태의 죽음을 당하면서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2장 19-20a절에서 암시한 ‘그리스도가 율법을 통하여 죽었다’의 구체적인 의미입니다. 예수는 과연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셨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를 향한 저주가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저주’는 10-12절에서부터 이어지는 주제입니다. 율법과 함께 살았던 유대인이든 율법 없이 살았던 이방인이든, 죄의 결과인 저주를 피할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해 자기 몸을 주셨다’(1:14)고 말합니다.

(2)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14)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이 세대에서 건지셔서 다음 세대의 새로운 창조에 속하게 해주셨습니다. 다음 세대에 복의 상징인 성령의 인치심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복입니다. 그러니깐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도 주어졌음을 대변합니다.

이처럼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은 구약의 말씀을 성취하는 원리입니다. 또한 종말이 있을 것이라는 선지자들이 말했던 원리와 동일합니다. 그러니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방법은 없는 것입니다.

 

약속을 통한 하나님의 언약(15-18)

죄 아래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완벽하게 율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율법은 사람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확인해 줄 뿐입니다그래서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과 성령의 약속을 이방인에게까지 이르게 하셨습니다처음부터 율법은 지킬 수 있고 언약에 신실할 수 있는 길로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15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6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17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18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15-18)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6-14절을 통해 성경을 통해 신학적인 논증이라면, 15-18절에서는 사회적인 관습을 통해 논증합니다. 서두에서 ‘사람의 관례를 따라 설명하자면’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1) 약속을 변경치 못한 관행(15)

이곳에서 말하는 ‘언약’이라는 헬라어 ‘디아테케(διαθηκη)’는 ‘언약’이라는 의미보다 더 흔하게는 ‘유언’이라는 의미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유언’이야말로 한 번 작성되고, 작성자가 사망하면, 누구도 더하거나 폐하거나 더할 수 없습니다.

(2) 약속은 아브라함과 그리스도에게 주어짐(16)

문제는 그 언약이 약속하는 내용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언약을 통해 약속하셨는데, 다수를 말하는 ‘자손들’이 아니라 한 사람을 지칭하는 ‘자손’에게만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창세기 12:7; 13:15; 24:7 등이 공통적으로 전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인용합니다. 바울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자손’이라는 단어는 집합명사이기 때문에 단수로 쓰여도 복수의 의미를 내포합니다.

현대인들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이는 해석 방법이겠지만, ‘자손’이라는 단어가 단수인 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한 사람의 자손’을 도출해내는 이 읽기는 1세기의 사람들에는 가능했던 일조의 미드라쉬 해석 방법입니다. 그가 단언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유일한 자손이 그리스도라는 점입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은 처음부터 아브라함과 그의 유일한 자손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3) 언약의 약속을 폐기하지 못함(17-18)

여기서도 바울은 그리스도가 아브라람 이야기의 성취라는 종말론적 확신을 해석의 준거점으로 삼고, 거기서부터 아브라함 이야기에 접근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모든 복이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종말의 현실을 보고서야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비밀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회적 관습에 빗대어 설명한 대로, 바울은 언약의 당사자가 아브라함과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이미 제정된 것이므로, 변경할 수 없다는 점을 17절에서 논증합니다.

이를 다시 확인합니다. 아브라함에게 그리스도의 믿음을 주신 것보다 430년 후에 등장한 율법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믿음을 통한 칭의, 그 언약을 폐기하거나 무효화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약속과 상관이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그 자손이 받을 유업은 ‘약속’을 통해 주신 것입니다. 누가 아브라함이 자손입니까? 누가 그 유업을 이을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통해 그 유업에 동찹한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유일한 자손 되셨음을 말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새 언약, 새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율법은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우리를 정죄하는 도구가 됩니다. 하지만 성령 안에서 율법은 우리를 거룩하고 온전하고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더 이상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고 율법이 필요 없다고도 말하지 않고,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가고 취득해 가는 하나님의 모든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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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03-01)


갈라디아인들의 어리석음

갈라디아서 3장 1-9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성도(聖徒)라고 합니다성도는 하나님 말씀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라고 하지만 때때로 하나님 말씀이 정말 맞는지에 대해서 의문이 들 때도 있습니다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의심하고 있을 때조차도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 분명히 맞다고 하십니다하나님 말씀은 어제나 오늘이나 언제나 한결 같이 변함없습니다그렇다면 성경이 하나님 말씀으로서 진리임을 믿으며 나가는 삶이 되길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3장에서부터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의로움에 대한 주장을 뒷받침한 여러 근거들을 제시합니다이 단락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이 십자가의 망각한 것을 책망하고율법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체험했던 경험을 상기시킵니다더 나아가 구약의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를 빛 아래에서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재해석합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을 책망(1)

역사적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무너뜨리려는 시도가 많이 있었습니다대부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진리를 무너뜨리려고 했습니다그러므로 이단의 거짓 복음이든교회 안에 유사한 복음이든모두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충족성을 허물려는 시도일 뿐입니다십자가의 복음 외에 다른 것으로 구원을 시도하는 것은 십자가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1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1)

본문은 갈라디아서의 두 번째 부분의 시작입니다첫 번째 부분(1~2)에서 바울 자신의 자서전적 이야기를 통하여 사도직을 변호했다면두 번째 부분(3~4)에서는 칭의의 교리에 대한 매우 상세히 논증하는 교리적 부분입니다그리고 마지막으로 5~6장은 교리의 적용 즉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교훈입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자신의 사도직과 사조직의 신적인 기원에 대해 방어하는 입장에서 서술했습니다하지만 이제는 갈라디아서의 기록 목적인 이신득의(以信得義사상을 강조하기 위해서 갈라디아 교인들의 잘못을 적극적인 자세로 비판합니다이미 초대 교회에서는 다음 사실을 결론 내렸습니다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주어지는 칭의 외에다른 율법이나 행위를 통해서도 주어진다면십자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십자가 아래 있는 사람들은 율법의 속박에서 해방되었으며그리스도로 주어진 은혜에 참여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그 동안 바울은 이 복음의 사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사역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헌신하고 성장시켰던 갈라디아 교회까지도 율법주의 거짓 선생들이 침투했습니다분명히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이룬 구속 사역에 믿어야 되며더 나가 사람들이 율법을 준행해야 구원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은 점점 교회는 망치고 복음에서 율법으로 퇴보하게 만들었습니다점점 믿음에서 퇴보해 가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라고 꾸짖습니다어리석도다.’는 원어 상으로 영적 판단력이 없는 사람들아!’라는 뜻입니다당연히 알아야할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지방에서 전할 때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신 사실을 분명하게 전했습니다또한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이 전할 때마치 자신들이 눈으로 직접 본 것처럼 확실히 믿었습니다하지만 거짓 교사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와서 잘못된 가르침을 교훈하자진리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쉽게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현혹되었습니다그리고 이제 그들이 복음의 진리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5:7). 바울은 이렇게 그들의 삶 속에서 더 이상 그리스도의 형상곧 바울이 선포하고 보여준 십자가를 볼 수 없어서 안타까워합니다(4:19).

 

성령에 대한 경험(2-5)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복음만으로도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 백성으로 살기에 충분합니다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고 폐지된 율법을 문자적으로 준수하려 하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헛되게 만드는 일입니다복음에 대한 깊은 이해와 감격이 사라지면언제든지 믿음이 형식만 남아 율법주의와 통제되지 않은 탐욕으로 가득하게 자리 잡습니다.

2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3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4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5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2-5)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어지는 논의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칭의에 집중시킵니다그래서 중요한 사실을 논하기에 앞서사람들의 시선을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라고 집중시킵니다칭의에 둘러싼 갈등을 해결하는 데가장 결정적인 사실로 접근하기 위한 것입니다이는 왜 그리스도가 칭의의 해답인지를 명시적으로 밝혀 줍니다.

⑴ 성령을 통한 칭의(2)

이제 갈라디아 교인들이 범한 가장 근본적인 잘못에 대해 한 가지 핵심적인 질문을 통해 지적하고 있습니다그 질문은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라는 것입니다이런 질문은 먼저 교리적인 질문이 아니라 갈라디아 교인들이 성령에 대한 경험을 상기시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의 회심과 함께 받았던 성령을 기억케 하면서그 성령이 어떻게 주어졌는지 묻습니다.  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가장 먼저 언급하는 증거는 구약 성경은 성령의 임재가 마지막 때에 하나님 백성에게 실현될 중요한 종말의 약속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요엘서 2:28-32; 에스겔 36:27; 예레미야 31:31-34). 갈라디아서에서 바울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받을 복을 말하면서 그것을 성령의 약속과 동일시합니다(3:14).

바울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듣고 그것을 믿었을 때에 성령을 받았음을 전재하고 있습니다유대인의 율법과는 아무런 상관없이아브라함 자손의 표지인 성령의 임재가 그들에게 실현되었다는 것입니다.

⑵ 잘못된 육적인 결과(3)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될 때 성령이 역사한다는 것과 그 복음을 믿을 때 성령이 개인에게 임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이렇듯 아브라함 자손즉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의 소유로 대변됩니다그리고 갈라디아 교인들은 성령으로 훌륭하게 그 삶을 시작하였습니다그런데 그들은 그 삶을 계속해서 이어나가지 않고 돌연 율법으로 성령을 대체하려 했다는 것이 바울의 설명입니다이를 바울은 육체로 완성하려 하였다고 진단합니다.

육체로 번역된 헬라어 사룩스()는 하나님 없는 이 세대이 세상과 그 속에 속한 인간의 모든 활동과 죄악된 본성을 통칭하는 말입니다놀랍게도 바울은 율법을 사륵스()의 한 요소로 평가한 것입니다.

바울이 사용한 시작하다와 완성하다’ 두 동사가 동시에 사용되는 빌립보서 1장 6절에서 바울은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한다.’고 말합니다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시작하신 일을 성령으로 완성하신다는 말입니다성령은 지음 여기에 임한 다음 세대의 하나님 나라를 대표합니다이 악한 세대에서 건짐(1:4)을 받고 다음 세대의 하나님 나라에 속하게 되었으면계속해서 그 나라의 삶의 원리인 성령 가운데 머물라는 것입니다.

⑶ 성령으로 돌아서라(4-5)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라고 질문합니다여기서 사용된 동사 파스코’()는 일반적으로 고통/괴로움을 받다를 의미하는데드물지만 긍정적인 경험을 하다를 의미하기도 합니다후자라면당연히 성령의 경험을 말합니다지금까지 경험한 성령의 역사를 헛되이 경험했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시 한 번 그들이 유대인의 율법과는 상관없이 성령과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음을 상기시킵니다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들은 것을 믿었을 때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그들 가운데 임하사 능력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유대인의 율법을 지키지 않고도 그 율법의 이상을 달성했다면율법 아래 거할 필요가 있겠습니까그리스도의 복음은 율법의 성취요 완성입니다.

부활에 관해서는 단 1회만(그것도 하나님 아버지를 묘사하면서언급한 바울은 십자가를 거듭 강조합니다(2:20; 3;1; 5:11; 6:12, 14). 여기에서도 갈라디아 교인들이 십자가의 의미를 붙잡기만 했어도 꾀임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답답해합니다.

헬라어 완료분사 용법을 통해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그 효력이 지금도 유효하다는 것이 명백히 나타났음을 강변합니다갈라디아서에서 십자가 죽음은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의미를 넘어서 율법의 기능에 대한 중요한 계시를 전해주는 도구입니다십자가를 보면 율법의 진정한 기능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할례와 율법은 하나님 백성의 자격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것이 바울의 가장 중요한 논점인 만큼 바울은 여러 증거들을 통해 본격적으로 이를 뒷받침합니다.

 

아브라함 이야기를 재해석(6-9)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기 전이나 후에도 율법은 우리를 의롭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복에 참여하는 것은 율법을 의지하지 않습니다유대인이나 율법이 없는 이방인 모두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6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8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9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6-9)

이제 바울은 두 번째로 창세기의 아브라함 이야기 해석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합니다아브라함 이야기는 대적자들이 먼저 사용했을 가능성이 큽니다하지만 아브라함도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의 징표는 할례(割禮)입니다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 언약은 430년 후에 모세 언약을 통해 완전하게 표현됩니다두 언약이 하나의 언약인 셈입니다심지어 유대인들은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게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창세기26:5)는 구절에 근거하여아브라함도 미리 율법을 지켰다고 믿었습니다하나님 백성아브라함의 자손 되는 자격은 하례와 율법의 준행이라는 점에서 바울의 대적자들은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조금의 양보도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어떤 점에서 아브라함은 원래 이방인이었으나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율법과 할례를 행한 본보기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대적자들의 논리는 이러합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을 믿고, 17장에서 할례를 행했으며, 26장에서는 율법을 해했습니다갈라디아 교인들도 하나님을 믿었으니이제 할례와 율법을 행할 차례다.’ 매우 성경적으로 보이는 이들의 논리를 바울은 어떻게 반박할 것입니까?

바울의 아브라함이야기 접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고려해야 합니다첫째바울의 아브라함 이야기 사용이 대적자들의 사용에 대한 대응이라는 점입니다창세기에 대한 빈틈없는 주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둘째바울은 아브라함 이야기를 창세기 자체의 문맥에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구속사의 성취와 완성이라는 문맥에서 새롭게 접근합니다다른 해석학적 준거점에서 출발한다는 말입니다앞에서도 언급했듯이다메섹 체험을 통해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브라함 자손에게 약속된 구원을 이미 성취하였다는 확신에 이르렀습니다그리스도만이 아브라함의 유일한 씨앗/자손입니다(3:16). 이제는 믿음과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이 아브라함 자손입니다그는 이 확신 속에 다시 아브라함 이야기를 읽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율법이스라엘 역사의 성취와 완성이라는 구속사적 사실 속에서 보면 아브라함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구절입니다아브라함도 믿음을 통해 의롭다하심을 받았고(6),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이 아브라함의 자손들입니다(7).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주장은 창세기에 대한 객관적인 주해의 결과가 아닙니다창세기 15장 6절이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창세기 17장의 할례나 22장의 이삭 번제 사건이 더 중요한 부분일 수 있다는 대적자들의 예상 가능한 공격을 반박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주장은 예수가 과연 아브라함 이야기와 구약의 성취일 때만 참인 주장입니다예수라는 존재가 바울의 성경해석학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문제의 핵심은 예수가 과연 누구냐는 문제입니다우리가 그를 구약과 구속사의 성취자로 받을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과연 예수가 그러한 분이라면아브라함의 자손은 (예수/하나님에 대한믿음이 있는 자입니다유대인과 이방인이 차별 없이 옛 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의로움을 얻는다는 것이 곧 복음입니다그리고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 복음의 열매입니다갈라디아 교인들은 이방인이 네 안에 복을 받으리라’(8; 창세기 12:3; 18:8; 22:18)라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미리 전하신 복음이 성취되었다는 증거입니다그러므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믿음이 있는 자들은 아브라함과 함께 그의 복음에 참여합니다.

아브라함 안에’ 있는 유일한 자손 예수 그리스도(3:16)가 아브라함의 복에 먼저 참여하고이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 복에 참여하는 구속사의 놀라운 전재를 암시하는 구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으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의 삶을 떠났고 성령을 따라 살았습니다예수님의 제자들로서 기쁘게 고난을 감수하면서 신앙을 지켜나갔습니다올바른 신학이 올바른 삶을 만들어내지만동시에 올바른 신학은 성령의 역사도 설명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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