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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04-01)

자녀에서 종으로

갈라디아서 4장 1-9

 

아이를 너무도 사랑하는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너무도 감사하게도 부부에게 하나님께서는 아이를 선물로 주셨습니다그 부부는 자신이 낳은 아이뿐 아니라 다른 아이도 사랑을 나누고 싶어서 한 고아를 입양하였습니다부부의 사랑을 먹고 두 아이는 잘 자라고 있었습니다그러던 어느 정도 성장했을 때입양된 아이는 자신이 입양된 것을 알게 되었고그때부터 아이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부모에게 자유롭게 요구하던 것들이 사라지고부모님께 잘 보이도록 노력하였습니다가지고 싶은 것먹고 싶은 것도 참고 말하지 못했습니다그 이유는 자신이 입양된 아이라는 이유로 자유롭지 못했던 것입니다이것을 알게 된 부모의 마음은 자신의 마음을 모르는 것에 마음이 아팠었습니다자신이 낳은 만큼 사랑한 아이인데 말입니다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된 자녀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했습니다그런데 혹시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 있지는 않습니까본문은 그 하나님의 마음에 대한 말씀입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유대인의 율법을 준행하려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만류합니다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에는 하나님 아닌 것들의 종으로 살았으나이제 하나님의 아들과 그 아들의 영을 통해 아들의 지위를 얻었음을 설명합니다놀랍게도 바울은 이방 성도들이 율법을 지키려 하는 것을 다시 하나님이 아닌 것에 종노릇하려는 행위에 견줍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아들의 명분(1-3)

아버지의 유산을 받을 아들이라도 성인이 되기 전에는 아버지 유산과 상관없는 종과 다름없습니다청지기과 후견인 아래서 통제되고 절제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이와 같이 유대인들도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율법 아래서 종노릇 하며 살았습니다그리스도 안에서만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납니다.

1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3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1-3)

사도 바울은 은혜로 부름을 받았던 갈라디아 교인들이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의 조건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봅니다그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시 율법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고 책망하면서 종과 아들에 대한 비유를 합니다종과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명확하게 들어납니다이방인들이 율법을 지키려는 것은 종노릇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이는 율법의 한시성을 설명하기 위해다시 한 번 갈라디아 교인들이 잘 알고 있는 사회적 관습인 후견인과 청지기’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당시에는 히브리 문화 속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은 대등한 관계였습니다아버지에게 있어 아들은 기업을 이을 상속자로서 아버지와 그 동격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처음부터 모든 것을 가진 상속자로서 동격을 이루진 않았습니다당시 문화적으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성장할 때까지 후견인을 두어 가르침을 받게 하였습니다율법은 그리스도에로 인도하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래서 3장 24-25절에서 훈육교사와 유사한 비유를 제시합니다. ‘훈육교사가 주인집 아들의 교육과 관련되었다면, ‘후견인과 청지기는 주인집 아들의 재산 상속과 관련됩니다후견인 밑에 있을 때는 아들이지만 잠시 동안 종과 같은 위치에서 살게 됩니다하지만 아버지가 정한 때가 되면아들은 아버지와 대등한 위치로 가게 되고종은 계속해서 종의 위치에 머물게 됩니다율법 아래 있었던 유대인들에 대해 설명합니다.

현존하는 그리스-로마의 많은 판례들에서도 볼 수 있듯이유언이나 재산 상속과 관련된 사건들은 당시 사람들의 사회적 관심거리였습니다유산을 상속할 적법한 상속자라 하더라도 성인이 되지 전까지는 재산 관리 차원에서나 법적인 차원에서 후견인이나 청지기에게 의지해야 하는 당시의 관습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그래서 바울은 아버지가 정한 때가 차기 전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는 어린아이의 상태를 종과 다름없는 상태라고 묘사합니다(1).

율법 아래에 있던 시기가 바로 이와 같은 의 상태였다는 것입니다놀랍게도 바울은 율법을 이 세상 초등학문이라고 특징짓습니다여기서 스토이케이아(στοιχεια)’는 영적인 세력보다는 세상이나 우주를 다스리는 기본적인 원리나 정신을 일킵니다바울이 율법을 스토이케이아의 일종으로 분류합니다.

이방인들이 다른 신을 섬기고(8) 나름의 철학과 가르침을 따라 살아온 동안유대인들은 율법 아래에서 살아왔습니다바울은 여기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이전에 따르던 이 모든 원리와 가르침을 다같이 초등학문으로 분류합니다율법도 초등학문인 것은 그것이 한 민족을 다스리는 원리였기 때문입니다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준비 단계에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상속자의 지위를 얻음(4-7)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율법 아래 보내셔서 율법 아래서 종노릇 하던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그 전에는 우리의 신분이 사탄의 자녀요결국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었습니다이제는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과 믿음을 주셨습니다.

4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4-7)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율법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졌지만주어진 율법은 1400년 정도를 청지기와 후견인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결국 하나님의 때가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율법이 후견인과 청지기의 역할을 마치게 된 것입니다.

여러 학자들은 초대교회에서 공적으로 사용했던 신앙고백을 포함합니다로마서 8장 3-4요한복음 3장 16-17요한일서 4장 9-10절에서도 하나님이 을 위해서 그 아들을 보내셨다는 공식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여기에서 하나님이 아들이 오신 목적이 두 가지 인데⑴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자유케 하고⑵ 우리로 아들의 지위를 얻게 하는 것입니다.

한 문장을 이루는 가운데여자에게서 나시고율법 아래에 나신 것이란 구절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실 때의 부대 상황으로 묘사됩니다이는 각각 그리스도의 인성과 사역을 표현해주는 표현들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이 문장이 교차대구법을 이루고 있고 그 중심에 율법 아래에라는 표현이 두 번 등장하는 것만 보더라도 바울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 지 알 수 있습니다즉 어린 상속자가 후견인 아래 있다가 아버지가 정한 때에 상속자가 되는 것처럼우리도 율법 아래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를 통해 아들의 지위를 얻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그래서 때가 차매가 중요합니다이 악한 세대(1:4)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하나님의 종말적묵시적 행동이 일어날 때가 된 것입니다.

아들의 명분과 성령의 관계에 대해 추가적인 설명을 제공합니다갈라디아서 3장 26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음을 설명했습니다그 아들의 영(6) 곧 성령을 받은 것은 이미 아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바울은 3장 2-5절에서도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미 성령을 경험했음을 상기시켰습니다두 다락 모두에서 성령의 경험은 율법 준수와 상관이 없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첫째바울은 여기서 성령을 그 아들의 영으로 묘사합니다즉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으로 부릅니다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부릅니다(로마서 8:9; 빌립보서 1:19).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의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다.’는 표현 또한 같은 맥락입니다하나님의 왕과 완전한 연합을 이루신 그리스도의 모습은 성도의 영광스러운 종말적 소망을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둘째바울은 아들이기 때문에 성령이 주어진다고 표현합니다(6). 그러나 로마서 8장 14절에서는 성령을 양자의 영으로 소개하면서성령 곧 양자의 영을 받은 자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설명합니다바울은 두 본문에서 성령의 임재와 양자됨 사이의 시간적 순서에 대해서 서로 다른 설명을 제시합니까바울의 관심은 시간적 순서에 있지 않고양자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하는 데에 있는 듯합니다.

성령의 임재는 바람과 같아서 언제 임했는지 인간이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양자됨을 얻었고 그 양자됨은 성령의 선물과 관련이 있으므로 또 다른 질문이 가능합니다성령의 선물과 관련이 있으므로 또 다른 질문이 가능합니다.

성령의 임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능케 하였는지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얻었는지에 관한 질문입니다논리적으로 볼 때양방향 모두에서의 추론이 가능해 보입니다어느 방향이건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성령의 임재가 하나님 자녀됨의 증거 하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아들의 영이 있는 자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릅니다(6; 로마서 8:15). 더 이상 종이 아니요 아들입니다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상속자입니다(7) 사도 바울은 3장 2-5절과 4장 6절에서 강조하듯이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자신들에게 성령이 임했음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성령의 임재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려 했다는 사실은 경각심을 느끼게 합니다.

 

초등학문 종으로 돌아가지 말 것(8-11)

구원이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다른 신들로부터 구원을 받으려고 할 것입니다우상에서 종노릇하던 곳에서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외면하고 점점 죄의 길로 들어설 것입니다그리고 결국 죄의 종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8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9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10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8-11)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이전의 상태를 상기시킵니다. 1세기 그리스도-로마 사회에는 종교가 삶의 모든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조상 때부터 섬겨왔던 신들의 종으로 살았을 것입니다또한 각종스토이케이아(στοιχεια)’들이 그들의 삶을 움직이고 있었을 것입니다죄인인 인간을 사랑하여 자신의 몸을 주신 하나님 아들에 관한 복음을 그들은 종 삼았던 전통적인 신들의 이야기와 비교할 수 없었을 것인비다.

더구나 세상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노예정제에 근거하여 이민족들을 착취함으로써 제국의 체제를 고착화하려 했던 황제들의 이야기와도 비교할 수 없는 능력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9) 된 상태로 묘합니다이렇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들이 할례와 율법 아래로 들어가는 것은 마치 그들의 옛 신들과 옛 스토이케이아(στοιχεια)’의 종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고 바울은 평합니다복음과 비교할 때모든 스토이케이아(στοιχεια)’는 약하고 천박하다’(4:9) 한 민족에게 주어졌다는 점에서 율법도 스토이케이아의 일종이 아니었습니까(4:3)?

과연 갈라디아 교인들은 유대인들의 달력을 따른 각종 의식과 율법도 채택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10). 날과 달과 절기와 해는 그 각각이 정기적으로 되풀이되느 유대교의 특징 기념일들을 가리킬 수도 있겠지만유대교 의식에 대한 통칭으로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지킨다는 의미의 동사 파라테레이스테(παρατηρεισθε)’가 현재형으로 쓰인 것을 보면 갈라디아 교인들이 계속해서 유대인들의 절기를 고수하고 있는 중으로 보입니다바울은 이러한 모습에 대해서 자신의 수고가 헛되다고 단정 짓고 갈라이아 교인들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대신자신의 수고가 헛될까 두려워한다고 말합니다(11). 강한 어조로 다시 복음의 진리로 돌아올 것을 명하면서도그들 스스로 마음을 다시 바꿀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는 대목에서 목회자 바울의 면모를 읽을 수 있습니다.

복음을 받았으면서도자신들의 연약함과 무지 때문에 복음의 진리에서 떠나는 아들은 1세기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오직 그리스도의 객관적인 사역에 근거해 의로움을 얻는다는 진리가 모두에게 계속적으로 선포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거짓 선생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율법 준수함으로 먼저 유대인이 되라는 요구했습니다이것은 하나님의 구속 경륜을 무시한 것입니다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신 희생적인 사랑을 헛되게 하는 것이고바울의 목숨을 건 복음의 헌신 또한 헛되게 하는 행동입니다이러한 신앙 행동은 좀 더 고차원적인 신앙생활이 아니라 영적인 노예와 자기 만족의 종교로 돌아가려는 불신앙일 뿐입니다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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