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03-02)
율법의 저주에서 복으로
갈라디아서 3장 10-18절
당신은 무엇을 소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영적으로 사람들을 구분해 보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사람과 보이는 이 세상에 것만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하루하루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나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백성의 기준이 더 이상 율법 준수가 아님을 구약 성경을 사용하여 또 언약의 권한 사회적 관행에 기대어 설득합니다. 율법으로는 누구도 의롭게 될 수 없고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과, 아브라함의 유일한 자손인 그리스도를 동해 약속하신 유업이 이방인에게까지 미친다는 점을 제차 확인 합니다.
구약 핵심을 재해석(10-12)
지혜로운 사람은 영적인 눈으로 삶을 통찰합니다. 거시적인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기독교는 자기를 버리면 얻는 역설적인 종교입니다. 아집과 같은 자기 생각을 버리고 새로운 은혜로 채우려 하면, 하나님께서 때마다 공급해주시는 은혜를 누리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
10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12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10-12)
사도 바울은 율법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여부를 결정할 수 없는지 여부를 구약성경을 사용해서 설명합니다. 결론적으로 율법으로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의인은 믿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1) 율법 안에서 저주를 벗어나지 못함(10)
아브라함의 후손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유업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까지 미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6절부터 성경을 사용하여 율법으로부터 복음에 대해서 논증합니다.
구약 창세기만 놓고 보았을 때, 할례 일만을 언약 백성의 표지로 삼는 바울의 대적자들의 주장이 옳아 보입니다. 율법에 대한 그들의 주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명기 27장26절이나 레위기 18장 5절에서 설명합니다.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명기 27:26)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위기 18:5)
이처럼 율법을 행하는 자는 생명을 유지하고, 그것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대적자들의 주장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구약 해석과 사용을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울이 가지고 있는 해석학적 기준점이 대적자들의 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인, 그리스도로 인해 옛 언약의 시스템이 상당 부분 수정되어야 한다는 깨달음에서 바울의 신학은 출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고, 그래서 의로움과 생명을 얻어 하나님의 백성 되는 방식도 바뀌었고, 성경에 대한 이해, 율법에 대한 이해도 바뀌었습니다. 이제 누구라도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만 이로움과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로 인한 종말이 이미 시작 되었다.’는 문맥 속에서 10-12절을 해석해 보면, 종말 이전에 해당하는 구약(신명기 27:26; 하박국 2:4; 레위기 18:5)의 원래 문맥은 잠시 미루어 두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핵심적인 자신의 주장을 먼저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다’(10)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율법 준수는 옛 세상에 속해 있고, 그것만을 의지하는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다는 말입니다. 왜 그러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종말에 생명과 의로움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만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누구라도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의지할 때만, 생명과 의로움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함(11)
사도 바울은 3장 1-5절에서 이미 종말의 상징인 성령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임했음을 강조했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전체를 통한 바울의 핵심 질문 가운데 하나가 이것입니다. ‘도대체 너희는 어느 시대에 속해 있습니까?’ 신명기 27장 26절이 말하는 것처럼, 옛 시대에는 율법을 ‘준행치 아니하는 자’가 저주 아래 놓였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창조의 시대에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와 함께 ‘율법을 지키는 자’도 저주 아래 놓일 수밖에 없습니다.
11절이 말하는 것처럼, 새 시대 속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을 통해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히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하박국 2장 4절을 통해 믿음의 원리를 설명합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 2:4)
이것이 새 시대의 특징입니다. 이제 새 시대에는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곧 의인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것이 종말의 새로운 원리입니다. 바울은 다시 한 번 율법을 새로운 시대의 삶에서 배제시킵니다. 율법은 믿음이 중심이 되는 새 시대의 삶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래도 ‘율법에 속하여 그것을 지키기를 원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옛 세상, 율법의 저주에서) 살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레위기 18장 5절을 사용한 바울의 수사적 의도일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이 단락에서 바울은 새로운 창조에 속한 사람이 여전히 유대인의 외형적 율법을 그대로 지키면서 살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3)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님(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중심된 새 시대에 방식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율법에 속하여서 지키길 원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 가운데서 율법의 저주 가운데서 살게 하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새로운 창조에 속한 사람이 여전히 유대인의 외적인 율법을 그대로 지키면서 살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이방인(13-14)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복은 받은 사람이 원해서 얻는 것이라기보다는, 주시고자 하는 분이 줄 만한 자를 보고 주시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 예수님 때문에 미움 받고 버림을 받은 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복을 허락하십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주님이 간절히 필요한 자들입니다.
13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13-14)
이러한 새로운 결정적 변화를 불러온 새로운 세대의 도래가 가능케 된 원인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목적도 없이 율법을 주셨다가 거두어 가셨습니까?
(1)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13)
사도 바울은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집중적으로 다룹니다. 한마디로, 새로운 시대의 도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그 결과로 모든 민족에게 주어진 성령의 선물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구약성경 속에서 메시아와 율법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와 ‘율법’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고 역설합니다(갈라디아서 2:21; 3:21; 5:2-4). 그 결정적인 이유를 십자가의 죽음에서 찾습니다.
바울에게 십자가의 죽음은 율법이 규정하는 매우 독특한 형태의 죽음, 즉 ‘나무에 달려 죽는 죽음’입니다. 그는 예수의 죽음을 신명기 21장 22-23절에 규정된 죽음으로 읽습니다. 하나님의 저주 받은 죽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율법이 구체적으로 규정한, 가장 엄중한 형태의 죽음을 당하면서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2장 19-20a절에서 암시한 ‘그리스도가 율법을 통하여 죽었다’의 구체적인 의미입니다. 예수는 과연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셨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를 향한 저주가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저주’는 10-12절에서부터 이어지는 주제입니다. 율법과 함께 살았던 유대인이든 율법 없이 살았던 이방인이든, 죄의 결과인 저주를 피할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해 자기 몸을 주셨다’(1:14)고 말합니다.
(2)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14)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이 세대에서 건지셔서 다음 세대의 새로운 창조에 속하게 해주셨습니다. 다음 세대에 복의 상징인 성령의 인치심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복입니다. 그러니깐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도 주어졌음을 대변합니다.
이처럼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은 구약의 말씀을 성취하는 원리입니다. 또한 종말이 있을 것이라는 선지자들이 말했던 원리와 동일합니다. 그러니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방법은 없는 것입니다.
약속을 통한 하나님의 언약(15-18)
죄 아래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완벽하게 율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율법은 사람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확인해 줄 뿐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과 성령의 약속을 이방인에게까지 이르게 하셨습니다. 처음부터 율법은 지킬 수 있고 언약에 신실할 수 있는 길로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15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6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17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18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15-18)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6-14절을 통해 성경을 통해 신학적인 논증이라면, 15-18절에서는 사회적인 관습을 통해 논증합니다. 서두에서 ‘사람의 관례를 따라 설명하자면’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1) 약속을 변경치 못한 관행(15)
이곳에서 말하는 ‘언약’이라는 헬라어 ‘디아테케(διαθηκη)’는 ‘언약’이라는 의미보다 더 흔하게는 ‘유언’이라는 의미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유언’이야말로 한 번 작성되고, 작성자가 사망하면, 누구도 더하거나 폐하거나 더할 수 없습니다.
(2) 약속은 아브라함과 그리스도에게 주어짐(16)
문제는 그 언약이 약속하는 내용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언약을 통해 약속하셨는데, 다수를 말하는 ‘자손들’이 아니라 한 사람을 지칭하는 ‘자손’에게만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창세기 12:7; 13:15; 24:7 등이 공통적으로 전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인용합니다. 바울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자손’이라는 단어는 집합명사이기 때문에 단수로 쓰여도 복수의 의미를 내포합니다.
현대인들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이는 해석 방법이겠지만, ‘자손’이라는 단어가 단수인 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한 사람의 자손’을 도출해내는 이 읽기는 1세기의 사람들에는 가능했던 일조의 미드라쉬 해석 방법입니다. 그가 단언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유일한 자손이 그리스도라는 점입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은 처음부터 아브라함과 그의 유일한 자손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3) 언약의 약속을 폐기하지 못함(17-18)
여기서도 바울은 그리스도가 아브라람 이야기의 성취라는 종말론적 확신을 해석의 준거점으로 삼고, 거기서부터 아브라함 이야기에 접근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모든 복이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종말의 현실을 보고서야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비밀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회적 관습에 빗대어 설명한 대로, 바울은 언약의 당사자가 아브라함과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이미 제정된 것이므로, 변경할 수 없다는 점을 17절에서 논증합니다.
이를 다시 확인합니다. 아브라함에게 그리스도의 믿음을 주신 것보다 430년 후에 등장한 율법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믿음을 통한 칭의, 그 언약을 폐기하거나 무효화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약속과 상관이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그 자손이 받을 유업은 ‘약속’을 통해 주신 것입니다. 누가 아브라함이 자손입니까? 누가 그 유업을 이을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통해 그 유업에 동찹한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유일한 자손 되셨음을 말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새 언약, 새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율법은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우리를 정죄하는 도구가 됩니다. 하지만 성령 안에서 율법은 우리를 거룩하고 온전하고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더 이상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고 율법이 필요 없다고도 말하지 않고,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가고 취득해 가는 하나님의 모든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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