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05)
직접 베드로를 책망했던 바울
갈라디아서 2장 11-21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는 역설적인 표현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모순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 대표적인 표현으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라’,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 ‘살고자 하는 자는 죽으라’ 등의 표현들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최대 역설은 바로 기독교의 핵심인 복음입니다. ‘죽음으로 죽음을 이긴다는 것’, ‘한 사람의 죽음으로 다른 죽음에서 살아남’, ‘죽음을 통해서 생명을 얻음’ 등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모든 인류가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죄인인 우리와 율법의 존재에 일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전적 회고로 시작해서 안디옥 사건을 언급으로 마무리 집니다. 이제 베드로가 실수하는데, 이 사실을 꾸짖을 만큼 사도로서 동등함을 가지고 있었음을 증명합니다. 바울은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게 되며,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이 율법의 삶을 대체한다고 천명합니다. 이는 갈라디아서 전체에 걸쳐서 논증하려는 핵심 주장을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위선으로 책망 받은 베드로(11-14)
지도자의 행동은 개인의 행동을 넘어서 대표하는 공동체의 행동이 되곤 합니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항상 신중히 행동해야 합니다. 힘들어도 싫은 것도 바른 길을 가야합니다. 지도자의 위선적인 행동은 서로 신뢰를 파괴하고, 불신을 조장하는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11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12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11-14)
앞에서 바울은 자기가 전했던 복음에 대해 예루살렘의 지도자들로부터 받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등한 관계를 증명했습니다. 예루살렘 지도자들도 이방인 디도라는 사례를 통해 바울과 바나바와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개종한 디도에게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은 사람의 구원이나 성화에 아무것도 더 해주지 못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모든 사건의 회고를 마무리 짖고 있습니다. 마지막 회고로부터 새로운 근거를 제시합니다. 더 신학적인 논쟁을 펼쳤습니다. 다소 충격적인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사도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있었던 일(5:1-10)을 통해 더 확실히 사도들에게 복음과 사도로서 동등한 사실을 인정받았음을 증명합니다.
(1) 책망 받았던 베드로(11)
앞 단락에서도 거론했듯이, 사도 바울 일행은 잠깐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가, 사도직과 복음에 대해서는 예루살렘 사도들과 동등하고 같은 내용이라는 것을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방인 디도를 통해, 개종한 이방인들에게 아무도 율법이나 할례 같은 것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은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이나 사람을 성화하는 일에 아무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바울은 베드로와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나누여서 각자 사역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이방인 구원에 대해 서로 같음을 확인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베드로는 수리아 안디옥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안디옥은 초기 기독교에 매우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가 일어난 후, 예루살렘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대박해가 시작되었고 사도들을 제외하고 그 많던 그리스도인들이 주변의 유대와 사마리아 등지로 피난을 가게 되었습니다(사도행전 8:1). 각지로 흩어져서 비록 피난민의 처지였지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멀리 북쪽으로 베니게와 구브로 섬 그리고 안디옥 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였습니다(사도행전 11:19). 이곳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가 머물면서 사역했는데, 너무 성장한 해서 혼자서 목회하기가 힘에 부쳤습니다. 그래서 다소에 있던 바울을 불러와서 함께 수많은 이방인 초신자들을 가르쳤습니다. 당시에 그리스도처럼 행동한다고 해서 비아냥거리는 말로 ‘그리스도인’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사도행전 11:25-26). 이방 교회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이방 선교의 전초 기지로서 중요한 역할 했던 곳입니다.
안디옥에서 베드로는 자신의 믿었던 사실과는 모순된 행동으로 큰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이 일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바울의 책망을 받았던 것입니다. 책망이란 일반적으로 대등한 관계나 상하 관계이어야만 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예루살렘 교회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모든 지역에서 베드로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량감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바울이 베드로가 잘못되었을 때는 과감하게 책망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대등한 관계였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바울이 베드로에 대한 책망할 때, 무책임하게 책망한 것이 아닙니다. 직접적으로 만나서 베드로의 얼굴 앞에서 직접 책망했다고 소개합니다. 그만큼 베드로가 바울보다 먼저 사도가 되었지만 그의 잘못된 행동은 사도로서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2) 책망을 받아야 할 이유(12-13)
사도 베드로는 이방인 성도들에 대해 전혀 거부감이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방인 지역인 안디옥에 방문해서 아무 거리낌 없이 이방인 성도들과 함께 교제하며 식사를 했던 것입니다. 한 두 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식사를 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식사 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무엇을 먹느냐?’와 ‘누구와 먹느냐?’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규정해 주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베드로는 욥바에서 환상을 통해 이방인 고넬료 회심 사건을 통해(사도행전 10:30-48),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믿음으로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날도 이방인들과 같이 식사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식사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야고보에게서 온 이들’이 온다고 전해주었습니다. 베드로는 돌변하여 그 사람들을 두려워하려 식사 자리를 떠나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를 찾아온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사실 ‘야고보에게서 온 이들’은 야고보가 보낸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루살렘의 파송을 빙자해 야고보의 이름을 팔았던 사람들일 가능성이 큽니다.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이방인 성도에 대한 결정을 했지만, 반대 세력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베드로는 논쟁을 피하기 위해 자리를 떠났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을 두려워했고, 떠나 물러갔던 것입니다. 말과 행동이 다른 외식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정결법을 부과하려 했는지는 의문입니다. 하지만, 베드로에게 유대인 정결법을 따라 이방인을 대해야 한다고 압력을 가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결과적으로 베드로는 이방인과 함께 교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복음의 진리를 역행하는 행동이었습니다. 더 나가서 외식(外飾)은 또 다시 주님을 부인한 결과가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베드로 한 사람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바나바에게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 위선적인 행동은 다른 사람들에게 이방인에 대한 구원에 대해 혼돈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이방인 성도들에게는 정말 많은 상처를 주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이방인과 식사를 한다는 것은 정결법에서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정결법의 종말적 성취라고 할 수 있는데,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이라는 새로운 기준에 비추어 볼 때,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하나님의 백성 되는 복음의 진리를 살아내는 모습입니다. 정결법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백성이 되는 아름다운 모습이 식탁 교제였습니다. 식탁 교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는 아름다운 복음적인 장면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도 베드로의 실수로 인해 자신에게 책망 받았던 일을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진리와 할례의 무의미함을 인정했던 베드로는 큰 실수를 했던 것입니다.
(3) 바울의 책망(14)
사도 바울 역시 안디옥 교회에서 바나바와 함께 사역했기 때문에, 늘 함께 참석하여 식사하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갑작스런 베드로의 행동을 보고 바울은 매우 황당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행동은 언행이 일관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행동은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공동체가 깨어진 순간이었습니다. 보다 큰 문제는, 이 행동 때문에 사실상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백성이 되려면, 할례와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인정하는 꼴이 되었습니다. 곁으로는 이방인과의 식탁 교제의 문제로 보였지만, 은혜의 복음에 대한 싸움이었습니다.
① 바울의 책망
바울은 베드로를 불러 세웠습니다. 그리고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14)고 책망했습니다. 순간 주변 분위기는 매우 싸늘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서로가 눈치를 보며, 베드로의 입만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바울이 베드로를 향한 책망은 동종 사역자에 대한 질투심은 아니었고, 더더욱 바울의 즉흥적인 기질로 인한 책망도 아니었습니다. 연약한 초대기독교의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그 자리에서는 조용히 넘어가고 나중에 조용히 만나서 개인적으로 책망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하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것은 ‘공동체의 평화와 부흥’이 아니라, 진정한 ‘바른 은혜의 복음’이었습니다. 바른 진리가 없는 기독교는 어떤 상태도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기 때문입니다.
② 베드로의 반응
베드로의 반응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의 반응에 따라 초대교회는 분열할 수 있는 위기가 찾아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결과가 나타나있지 않았지만, 베드로의 서신에서 그는 어떻게 받아 들렸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A.D. 65년에 기록한 베드로후서에서 바울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베드로후서 3:15b)
베드로는 바울을 ‘사랑하는 형제’라고 소개합니다. 이것으로 짐작하건데, 그만큼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바울의 책망을 부정적으로 받지 않고 긍정적으로 받아 들렸습니다. 바울의 책망은 두 사람의 관계를 벌려놓은 사건이 아니라 더욱 견고케 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③ 결과
바울의 책망은 결코 쉽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만약 바울이 많은 사람들과 베드로 앞에서 책망하지 않았다면, 당시 많은 교회들이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분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복음의 진리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성병이나 신분 그리고 출신 구별이 없이 모두가 동등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행동을 통해 보면,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진리를 부인하는 것이며, 바울의 행동을 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은 공동체의 평화를 수호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는 것을 위해 평생 헌신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이신칭의(15-16)
하나님 나라에 속한 새로운 백성으로 만드신 사역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역은 어느 누구도 흉내조차도 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그리스도의 신실함만이 이방인과 유대인을 포함한 모든 인류를 구원할 유일한 길을 마련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15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15-16)
사도 바울은 베드로 책망에 대한 이야기를 근거로 좀 더 자세한 신학적인 주장을 펼칩니다. 이 신학적인 내용은 바울과 베드로가 모두 동일하게 인정한 내용입니다. 사도들이 인정한 것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바울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1) 전통적인 유대인 생각(15)
사도 바울은 전통적인 유대인 관점에서 사람들을 구분해서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라고 소개합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출생에 따라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분했습니다. ‘유대인’은 자신들은 ‘하나님의 선민’이며, 나머지 ‘이방인들’을 ‘죄인’이라는 부르고 있었습니다. 이방인이 ‘죄인’이라는 것은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도 없고 또한 율법이 없기 때문에 준수할 수 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바울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해 부른 것은 유대인의 특권을 나타내려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로서 알고 있듯이’라는 뜻으로 설명을 이어가길 원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유대인의 이분적인 잘못된 생각은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게 만듭니다. 결국 자신들을 스스로 멸망으로 이끌어 가는 아무런 가치 없는 헛된 생각입니다. 이것을 반증하고자 바울은 유대인의 신분을 언급했던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이신칭의(16)
바울은 회심 전에 다른 유대인들과 동일한 생각으로 종교적인 열심도 다른 사람들보다 특출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의 신앙은 그동안 자신이 믿었던 믿음과는 다른 정반대 주장을 합니다.
먼저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의롭다고 선포하시는 이유는 사람들이 율법을 지킴으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사실 율법은 어느 누구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율법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부활하신 것은 더 이상 율법이 옳지 않고, 다시 사신 예수님께서 옳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주를 받아 죽은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자신은 더 이상 율법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복음이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주어진 것임을 누누이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목적과 계획이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고 완성되었다는 확신한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누구도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16)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것이 안식법, 정결법, 음식법이든 다른 어떤 율법의 규정이든,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는 이제 누구도 하나님과 정상적인 언약적 관계를 누리지 못합니다.
즉, 의로움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 의로움은 율법의 준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하심’을 통해서만 주어집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실패했지만, 유일하고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인 예수는 하나님을 향한 언약적 신실함(피스티스(πιστις)을 보이셨습니다. 그는 능동적으로 아버지의 모든 뜻에 순종하셨고, 수동적으로는 십자가의 소명을 묵묵히 받아들이셨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에 신실하였던 예수님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유일한 자손’(3:16)입니다. 그의 신실함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모든 언약의 복과 생명, 의로움을 그에게 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그 ‘그리스도 안에서’ 언약의 약속들을 함께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객관적인 사역에만 근거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 이전에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언약적 산실함이 먼저입니다. 즉 우리의 믿음이 근거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에 근거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가 우리 칭의의 근거인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을 통해 의롭다 함 받는 것을 알고’,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잘못된 행동의 근거로 삼은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돌아갈 수 없음(17-18)
‘의로움’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정체성이자 생존의 근거입니다. 이것이 무너지면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의로움이란 범접할 수 없는 신비한 영역이거나 극한 절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의로움은 교회 안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자신의 삶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17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17-18)
계속해서 바울은 의롭게 되는 방법에 대해 말씀합니다. 의로움을 얻기 위해서 더 이상 사람의 노력과 수고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율법을 행한 의로움을 주장하는 자들은 이런 ‘이신칭의’의 교리는 사람들을 방종(放縱)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1) 하수인으로 만드는 것(17)
사도 베드로가 이방인들과의 식사에서 떠나면서, 이방인들과 식사하던 유대인들이 정결법을 어긴 죄인들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의 잘못도 아닙니다.
(2) 스스로 죄인으로 만든 것(18)
사도 바울은 베드로의 행동을 대변하는 주장들을 반박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신학을 염두에 두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제 의로움을 얻기 위해 유대인의 율법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는 안디옥 교회에서 베드로가 처한 상황에 해당합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주어지는 의로움을 장려하다가, 돌연 정결법을 어겨 죄인이 된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의로움을 주신 그리스도의 책임이 아닙니까?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수사적 ‘나’를 통원해 다시 베드로의 딜레마를 묘사합니다. 베드로가 이미 헐어버린 유대인의 정결법을 다시 세운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범법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사는 은혜의 삶(19-21)
믿음은 외적 조건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율법을 통해 사람의 수고로 의롭게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주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끝까지 율법을 통한 구원의 길을 고집한다면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욕보이는 것이 됩니다.
19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19-21)
베드로의 잘못된 행동을 대변하는 주장들, 대적자들의 주장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1) 율법은 죽고 하나님으로 살아남(19)
사도 바울은 안디옥에서의 베드로와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대적자들을 결정적으로 반박합니다. 그는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주었다’고 말합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표현은 더 이상 율법의 요구와 상관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가 말하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다’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저주를 담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은 율법이 더는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을 죽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율법에서 자유롭지만, 율법이 요구하는 수준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그리스도와 성령의 능력으로 율법을 성취하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2) 성도 안에 내주하심(20)
사도 바울의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에게 내주하심을 설명합니다. 이 표현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표현하기 위해 바울이 주자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즉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해 죽은 것은 바울이 아니라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율법이 규정하는 특수한 형태의 죽음, 나무에 달리는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이 규정하는 하나님 백성의 범위 밖으로 쫓겨났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그리스도가 유일한 하나님의 백성,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판명 났습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율법이 더 이상 하나님 백성의 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계시적 사건이다.)
그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바울 역시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은 셈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이 삶은 아무런 제약이 없는 삶입니까? 20절은 갈라디아서 전체의 주제 구절에 해당합니다. 바울은 율법 준수보다 더 강력한 새로운 윤리적 동기, 삶이 목표가 있음을 강조합니다. 즉, ‘내 안에 그리스고가 사시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 아들의 피스티스, 즉 그의 믿음/신실하심을나두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할례 같은 조건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를 믿어 의롭게 되는 은혜를 붙잡았습니다(21). 우리를 의롭게 하려고 예수께서 돌아가셨고, 바울은 그와 함께 죽어 율법과 관계를 끊었습니다. 이제 그의 삶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삶입니다(19-20).
(3)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의로움(21)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그리스도의 믿음/ 신실하심을 지금 여기에서 닮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오히려 바울이 하나님 은혜를 폐하려 한다고 공격했을 것입니다(21). 그들에게 하나님 은혜의 회고의 표현이 율법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입니다.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 은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폭발적으로 계시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그 의로움과 은혜를 율법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다면 그리스도는 과연 헛되이 죽으신 셈입니다(21).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을 폐기하려 오신 분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시키려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의롭게 되는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게 될 수 없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셔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의로워진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상대적인 비교를 통해서 자신의 의를 측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이나 종교적인 행위로 신앙을 대신하지 말아야 합니다. 의무적인 신앙에 머물 것이 아니라 과거에 종교적인 행위를 의지했던 자신이 죽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 살아서 역사하시도록 맡겨 드리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당신을 의롭게 만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살리신 은혜에 감사하고 사랑에 감동하여 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당신 안에 주님께서 살아 역사하시도록 그분과 교제하시는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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