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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01-01)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본질

갈라디아서 1장 1-10절


오늘날은 다른 복음의 전성시대가 되었습니다. 메시지가 과거에는 강단을 통해서 전달되었지만, 현대는 많은 다양한 채널을 통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고갈 되어서 문제가 아니라 홍수처럼 범람해서 문제입니다. 하지만 그 많은 복음들 중에 어떤 것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분간하기 쉽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는 복음을 바르게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줄 것입니다. 바울 당시에도 가짜 사도라고 비난 받을 정도로 가짜 복음은 위세를 떨쳤고 공동체를 뒤흔들었습니다. 오늘날도 사단은 동일하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바른 복음을 만드는 요인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변호하면서 시작합니다. 그는 자신이 전한 복음 이외에 ‘다른 복음’을 따라간 갈라디아 교인들을 질책하고,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향해 강력한 저주를 선언하며 그들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못 박습니다.

 

바울의 첫 인사(1-5)

대부분의 악성 종양, 즉 암은 발견한 즉시 그곳에 어디든지 더 이상 퍼지지 않도록 수술을 실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종양이 온 몸으로 결국에는 퍼져 죽게 됩니다. 이처럼 교회 안에도 악성 종양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단 사설들입니다. 이것들은 발견한 즉시 추방시켜야 합니다.

1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2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3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4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5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1-5)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와 복음을 핍박하던 바울을, 역설적으로 복음을 위한 일꾼으로 부르셨습니다. 그 결과로 바울이 전한 복음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영적 해방의 은혜를 담고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통한 구원이라는 ‘거짓 복음’을 성령의 능력으로 사랑과 믿음의 ‘참된 복음’으로 나갈 수 있게 인도합니다.

(1) 기록자 : 바울의 사도성(1)

사도 바울은 부름 받은 사도로서 서신을 기록합니다. 이 갈라디아서는 다른 서신들과 비교해 볼 때, 갈라디아서에서만의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첫 인사부터 주목할 만한 두 가지인 사도의 근원과 복음의 핵심을 소개합니다.

① 사도의 근원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을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라고 소개합니다. 갈라디아서를 쓰자마자 자신의 사도됨의 기원과 진정성을 변호하는 것으로 갈라디아서를 시작합니다. 이처럼 바로 수술 칼을 집어든 이유는 갈라디아 교회가 악성 종양과 같은 대적자들의 공격 아래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도직에 대한 방법은 그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 가지는 진정성 여부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② 복음의 핵심

사도 바울은 첫인사에서부터 자신이 전하려는 복음의 핵심을 요약하여 첨가합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해 자기 몸을 주셨다’(4)는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이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기원한다는 점을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부활’에 대한 직접적 언급은 갈라디아서 전체에서 1절이 유일합니다. 그것도 그리스도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를 설명하기 위한 표현으로 등장합니다. ‘새 창조’(6:15)와 같이 부활로 인한 구속사적 결과들이 언급되긴 하지만, 부활이 바울신학에서 찾지 하는 위치를 고려할 때 이례적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그 논쟁의 성격상 부활보다는 십자가 죽음이 강조된다는 점을 앞으로의 설명에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2) 수신자 : 형제인 성도들(2)

편지의 수신인이 한 회중이 아니라 갈라디아 지방의 여러 교회들이라는 점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다른 신학적, 목회적 문제가 여러 회중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입니다.

(3) 내용 : 인사하는 내용(3-5)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을 기원했습니다. ‘은혜와 평강’이라는 인사는 신학적인 배경을 갖는 표현입니다. 당시 헬라어가 통용되던 세상에서는 전형적으로 서신의 첫 단어는 ‘문안’을 뜻하는 ‘καρδίαν’라는 인사였습니다(사도행전 15:23; 야고보서 1:1). 그런데 바울의 이 편지는 독특한 안부로 시작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그리스도의 은혜’(5:15)와 ‘하나님의 평화’(5:1)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즉,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이라고 인사는 초대교회가 전한 복음에 대한 또 다른 요약입니다.

① 그리스도의 은혜

구약에서나 그리스-로마의 사회-문화적 배경 속에서나 ‘은혜’는 후견인이 예속인에게 베푸는 선물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이 은혜는 때로는 ‘하나님의 은혜’(2:21; 1:14)로, 때로는 ‘그리스도의 은혜’(1:6)로 표현합니다.

② 하나님의 평강

‘평화’는 구약의 ‘샬롬’ 이해를 그 배경으로 가집니다. 이 샬롬은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 이웃, 자기 자신,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마땅히 누려야 할 기쁨을 충만히 누리는 상태를 일컫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6-9)

아버지의 뜻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으로 죄 아래 있던 모든 인류가 대속을 받아 새로운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결코 가감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어ᅟᅮᆫ에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만이 영원히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되는 구원을 가져다 줍니다.

6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7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6-9)

사도 바울은 인사를 마치자마자 곧 바로, 온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바른 복음을 저버리고 다른 복음으로 배교한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엄하게 꾸짖습니다. 배교한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어쩜 너희들이 이렇게 속히 배교할 수 있느냐?’고 꾸짖습니다. 그만큼 바울은 그들의 배교에 영적인 충격을 받은 듯합니다.

(1) 다른 복음

배교한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이 전한 진정한 복음에 대해 등 돌림으로써 그리스도를 떠난 결과를 맺습니다. 그렇다면 이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이 전한 다른 복음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분명한 것은 이들도 자신들이 이해하는 ‘예수’와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했다는 것입니다.

또 ‘교란케 하는 자들’의 복음을 듣고 갈라디아 성도들이 혼동하여 그들을 따라갈 만큼 그들의 주장에 일리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복음’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복음을 ‘변질케 했다’(7)고 말합니다.

결국 그 다른 복음은 갈라디아 교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6). 이 결과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저주를 받아야 할 이유입니다.

(2) 그리스도의 복음

우선 ‘복음’이라는 단어가 1장에 계속 되풀이되는 점에 유의해야합니다. 헬라어 ‘유앙겔리온(ευαγγελιον)’은 그리스도-로마 세계에서 황제의 즉위, 황제의 전쟁 승리, 황위를 이를 왕자의 탄생 등과 관련된 소식을 일컫는 단어였습니다.

이사야 52장은 이 단어가 소유하고 있는 구약적 배경을 설명해 줍니다.

7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8네 파수꾼들의 소리로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일제히 노래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그들의 눈이 마주 보리로다(이사야 52:7-8)

이곳에서 ‘좋은 소식’은 평화와 구원의 소식으로 이는 곧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이사야 52:7)는 선포입니다. 두 가지 배경에서 공통되는 개념은 왕적인 다스림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복음’(7)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다스림이 임했다는 선포와 그 선포가 가져온 결과들을 일컫는 말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다른 신을 섬기고 다른 삶의 원리를 따라 살아왔던 갈라디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다스림이 임했다는 선포는 이방인인 그들도 이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살도록 부름 받았음을 전재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리스도를 통해 홀로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 없이 하나의 하나님 백성으로 모으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복음’은 무엇입니까? 2장 이하의 문맥에서 더 분명히 드러나겠지만, 다른 복음은 여전히 유대인들만을 하나님의 완전한 백성으로 인정하는 선포입니다. 할례와 율법 준수가 중요한 자격 요건으로 등장합니다. 이는 결국 하나님의 보편적인 다스림과 은혜를 부인하는 복음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을 바라지 않는 사도(10)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 성도들에게 풍성한 보상을 해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면 손익을 떠나서 무작정 순종해야 합니다. 아무리 위험한 일이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나아가는 일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돌보심이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사람에게 인정받기 보다는 하나님께 인정받으려고 노력했습니다.

10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10)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 속에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수 없는 어떤 부분이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반면, 바울의 대적자들이 전한 다른 복음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요소들이 있었던 것을 보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한 유대파 그리스도인 선교사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할례와 율법을 지켜야만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잇다고 가르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다른 복음’은 다른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피하고 오히려 이방인들을 할례와 율법으로 인도함으로써 유대인 공동체의 인정과 칭찬을 받는 결과를 낳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 가르침을 ‘사람을 기쁘게 하는 복음’으로 규정했습니다. 이것은 동족들로부터의 핍박을 면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십자가의 능력을 가리는 것입니다(5:11; 6;12). 어찌 이러한 자들을 ‘그리스도의 종’이라 칭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복음 있는 그대로 지키려는 바울의 열정이 보입니다.


오늘날 상대주의가 우상처럼 떠받드는 시대입니다. 서로를 향한 ‘관용’을 내세우며 단 하나의 진리와 단 하나의 복음만을 주장하는 우리 기독교를 향하여 ‘독선’이라고 비웃고 있습니다. 하지만 메시아인 그리스도가 둘일 수 없기에 천하 만민에게 구원 얻을 길도 둘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복음의 진리됨은 수용성 여부로 판가름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거짓 복음’에 단호히 배격하고, ‘바른 복음’을 더 담대하게 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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