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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13-02)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마지막 권고

히브리서 13장 16-25절


우리들이 즐겨 부르는 찬양은 그 곡에 신앙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찬양 중에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라는 곡이 있습니다. 그 곡 중에서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 삶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그러므로 말미암아 세상 사람들의 기쁨이 되는 삶이 신앙의 전부이며, 믿음의 삶입니다. 어떻게 주님의 기쁨이 되고 세상 사람들의 기쁨이 되겠습니까? 본문 히브리서를 마감하면서 기쁨되는 삶을 제시합니다.

 

히브리서를 살펴보면서 달려왔습니다. 이제 마지막 부분에서 기자는 고난 받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권고했습니다. 우리는 선을 행하고 나눠 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마무리하면서 독자들에게 중보 기도를 부탁하며,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모두에게 있기를 기원합니다.

 

마지막 권면(16-19)

훌륭한 지도자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을 생명의 길로 인도합니다. 지도자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공동체 또한 한 사람의 지도자 때문에 공동체가 성공할 수 있고, 모두 망치게도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공동체는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16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17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18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19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 위하여 너희가 기도하기를 더욱 원하노라(16-19)

14-15절에서 시작된 논의는 15-16절에서 공동체 예배 주제로 귀결됩니다. 이미 성취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준비 기간에 하나님께 대한 성도들의 제사는 지금까지와 다른 형태로 드려져야 합니다. 앞에서 ‘말씀을 맡아서 가르치는 자들에게 복종하라’라고 마무리했습니다. 본문은 영적인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1) 선을 행함(16)

히브리서 저자는 15a절과 16b절의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이라는 개념으로 그 제물의 구체적 형태를 기술하는 15b절(‘찬양’, 곧 ‘입술의 열매’)과 16절(‘선을 행함과 나눔’)을 감쌉니다.

지금까지 논의에 기초하여 저자는 본 소단락의 궁극적 권면을 시작합니다(15a). 그러므로 그분을 통하여 항상 하나님께 찬양의 제물을 올려드리자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 찬양의 제물을 드릴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따라서 수신자들은 반드시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께 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그들이 드려야 할 제물은 ‘찬양의 제물’입니다. 이 표현은 아마도 시편 50:14, 23을 반영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물질과 재능 그리고 능력을 나눌 때, 주님의 기쁨이 흘러가는 복된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고 바로 제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예배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무나도 기뻐하시는 삶이 나눔의 삶입니다.

(2) 영적 지도자에게 순종(17)

히브리서 기자는 독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권면하면서 특별히 지도자들에게 순종하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거룩한 산 제사로 살아가는 데는 삶을 위한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7-8절과 연결해 독자에게 진리를 전해준 참 지도자들에게 순종하라고 다시 권면합니다. 그들은 독자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아끼는 자이기에 그들이 기쁨으로 사역할 수 있도록 잘 순종하라고 합니다. 영혼을 인도하는 영적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영적 지도자의 말을 잘 듣고 순종해야 하며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할 이유는 영적 지도자들의 역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역할은 본문에서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① 인도하는 자

운동장에서 뛰는 선수들은 운동장에서 뛰기 시작하면, 오직 하나의 목적을 위해 달리기 때문에 경기 전체를 흐름을 읽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경기장 밖에서 코치는 전체 흐름을 읽고, 지도해 줍니다. 그래서 코치의 말을 존중하며 들을 때, 원하는 방법으로 게임을 풀어갈 수 있습니다. 인도자의 말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② 경성하는 자

히브리서 기자는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것 같이 하느니라”고 말합니다. 지도자는 개발시켜주는 사람입니다. ‘경성’해 준다고 했습니다. 성도들의 삶을 꽃피워 주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다른 사람들의 재능을 꽃피우도록 해야 합니다. 마음 것 기쁨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지도자의 인생이요 우리 삶의 모습입니다.

영적 지도자들에게 순종하라고 복종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모든 권위를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공동체가 질서 있는 공동체가 되길 원합니다. 질서를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질서가 깨진 곳이 지옥이고 그 만큼 아픔을 겪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는 영적 질서가 바로 세워질 때, 건강하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영적인 권위를 인정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시길 바랍니다.

(3) 지도자를 위해 중보기도(18)

영적인 지도자는 질서를 세우도록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가장 좋은 섬김은 그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라고 말합니다. 분명히 거짓 교사들이 저자에 대해 부정적인 평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거짓 교사들의 평과는 다르게 선을 행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코 자신의 욕망을 따라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깐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중보기도는 자기 자신만 생각던 곳에서 다른 사람을 돌아보고 생각하는 삶으로 변합니다. 초대교회의 당시에 신앙의 고난당하는 성도들이 자신만 고난 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동일하게 고난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생각하고 기도를 통해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도자의 지도력의 부재로 인해 얼마나 많은 공동체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까? 이 지도력의 부제로 얻은 고통은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지도자, 하나님의 손에 인도 받는 지도자 그 인생이 모두를 기쁘게 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4) 공동체를 지도자의 사랑(19)

구체적인 기도 부탁은 저자는 청중에게 ‘속히 복귀하기’를 원합니다. 그는 과거에 히브리서 독자들과 한 공동체에 속해 있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 잠시 떠나 있다가 다시 그 공동체로 돌아가지를 뜻하는 것 같습니다.

성도들이 지도자들에게 순종해야 할 이유는 그들이 성도들의 영혼을 책임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지도자들은 성도들의 영혼이 잘못되면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 책임을 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합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지도자들에게 순종함으로 그들이 기쁨으로 일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성도들은 지도자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라도 지도자에게 순종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지도자에게 순종하지 않는다면 지도자가 존재할 필요도 없습니다.

 

서신의 결말(20-25)

성경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구속하시는 목적은 선한 양심을 가져 선한 일을 행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함이라고 명시합니다. 이러한 구원의 목적을 충분히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간구하고, 하나님의 이끄심에 순종함으로 선한 일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20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21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22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23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그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24너희를 인도하는 자들과 및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25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20-25)

히브리서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가를 설명하면서 마무리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기쁨이 되는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은 삶이라고 주장합니다. 주님은 목자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를 본받아 살아가는 것을 원합니다.

히브리서는 시작 부분에서는 서신이라고 보기 어려웠지만 결말 부분은 서신의 요소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수신자들(독자)을 축복하고 하나님을 송축하는 부분도 편지의 결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요소들입니다. 저자는 기도 부탁을 한 후에 저자 자신이 성도들을 위해 아름답게 축복을 빌어주고 있습니다.

(1) 축복과 송축(20-21)

저자는 압축된 표현을 사용해서 망설임 없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높이고 기리고 독자들에게 축복합니다. 축복의 근원이신 ‘평강의 하나님’입니다. 이 칭호 자체가 이미 송축의 역할을 합니다. 지금 성도들이 극심한 박해 가운데 있기 때문에 그 어떤 하나님의 성품보다도 ‘평강의 하나님’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양들의 큰 목자 되신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큰 목자께서 단 한 번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반목과 질시를 없애시고 평화를 회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평화를 널리 퍼지게 하십니다.

(2) 당부와 소원(21-22)

저자는 감동적인 축복을 빌어준 후에, 그들을 정겹게 ‘형제들아’라고 부르며 개인적인 권면을 해줍니다. 바울의 서신에 나타나듯이 편지의 결말에는 서신을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지에 대한 당부(데살로니가전서 5:27; 골로새서 4;16), 독자들이 알고 있는 어떤 인물의 근황(고린도전서 16:10-12; 디모데후서 4:12), 독자들을 만나기 위한 여행 계획(고린도전서 16:4-8; 디도서 3:12) 등이 언급되곤 합니다.

저자는 히브리서에서 언급한 말들을 ‘권면’이라고 말하면서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고 부탁합니다. 저자와 독자가 서로를 배려하고 신뢰하는 관계임을 내비칩니다. ‘용납’는 인내를 가지고 끝까지 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비록 히브리서에서 하는 말이 강하고 때로는 불편하게 들릴지라도 어떤 편견이나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듣지 말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간단히 썼다’고 말하지만 ‘간절한 심령으로 썼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편지를 마감을 합니다. 디모데가 돌아올 텐데, 디모데를 잘 영접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서로를 이해 섬겨주고 서로에게 대접하는 나눔에 삶을 살아가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3) 문안 부탁과 전달(24-25)

히브리서 기자는 마지막 문안과 인사를 합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은 17절에 언급했던 수신자 공동체의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을 포함해서 모든 성도들이 문안 대상입니다. 특히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이 저자와 함께 문안 인사를 전하는데, 동일한 표현이 사도행전 18:2에 나타납니다. 로마에서 온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현제 이 사람들은 로마를 떠나 있는 상태며, 저자와 같은 지역에 머물면서 저자와 함께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인사를 전하는 것입니다. 이는 이 서신의 수신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마지막 인사를 저자는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찌어다’(25)라고 ‘은혜’로 압축합니다. 이 은혜는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굳게 하고(9) 또한 성장하게 하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베푸신 모든 것을 온전히 잘 누릴 수 있게 합니다.

환란 중에서 믿음을 지킨 하나님의 사람들의 믿음을 본받아 승리함으로 주님의 기쁨이 되고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가길 원합니다. 우리들이 그렇게 살아가면, 어느 순간에 하나님 앞에 영화로운 모습으로 믿음의 선진처럼 서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함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고, 믿음의 가문을 이어가는 성도들이 되길 축복합니다.


지금까지 히브리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고난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갈 때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런 가운데 영적인 질서를 바르게 세움으로 하나님의 공동체가 선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선한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따라 가며,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행해야 합니다. 이것만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감으로 평생 동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 임마누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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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13-01)
 


산 제사로 드린 거룩한 삶

히브리서 13장 1-15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꿈을 가지고 계십니다.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모든 주변 그리고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어가는 것을 원하십니다. 똑똑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좋은 관계를 맺어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본문은 성도들에게 믿음의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일련의 도덕적 권면들이 히브리서의 마지막 장을 채웁니다. 공동체 생활의 대원칙으로 형제 사랑을 전재한 다음 손 대접, 아픔을 공감함, 성 윤리, 그리고 돈에 관한 경고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교회 내 지도자들에 대한 태도와 이단적 가르침에 대해서 경계합니다. 앞서 상술했던 그리스도의 제사 적분 모티브를 재활용해서 저자는 성도들에게 영문 밖으로 나가라고 권면합니다.
 

선한 믿음의 행실(1-8)

참된 예배는 예배당 밖에서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삶은 모호하거나 흐릿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살다 간 선진들은 그런 삶을 살지 않고 선명한 삶을 살아갔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성도들은 좋은 관계를 맺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일상생활에 관련된 권면들을 제시합니다.
1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2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3.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4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5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6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1-6)
12장에서 이미 시작된 권면이 13장에서 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차원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는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섬기는 것과 개인적인 삶을 정결하게 유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생활 속에서 다섯 가지 영역에서 선한 믿음의 행실을 소개합니다.
(1) 형제를 사랑(1)
하나님의 백성을 특징짓는 삶의 최우선 덕목으로서 먼저 ‘형제 사랑’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당신의 형제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2:11-12). 이 지위는 성도들의 고유한 특권입니다, 이처럼 한 가족이 된 성도들은 공동체 안에서 가족 사랑의 수행해 왔습니다(참고, 6:10; 10:32-34). 그런데 저자는 독자들에게 과거 형제 사랑이 약해져서는 안 되고 ‘지속되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지금도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다며, 그들의 ‘형제 사랑’ 역시 흔들림 없이 지속되는 것이 마땅합니다(참조, 12:27).
(2) 손님을 대접(2-3)
‘형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권면은 ‘손님 대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돌봄 대상에는 공동체 내부의 형제자매뿐 아니라 공동 외부의 나그네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당시 순회하면서 사역해야 했던 초대교회 상황에서 나그네 대접은 지극히 중요한 덕목이었습니다(참고, 마태복음 10:40-42; 사도행전 21:16).
저자는 ‘소홀히 하기 마라’라고 권면합니다. 공동체 내부의 형제자매에 비해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성도의 참된 대접의 가치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가운데 그 진정한 가치를 발합니다. 사실 믿음의 선조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부지중에 천사들을 영접하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이 지나가는 세 나그네를 대접했는데, 그 중 둘이 천사들이었던 경험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창세기 18:1-15; 창세기 19:1-12; 사사기 6:11-18; 13:3-22). 보상을 내다보지 않은 대접이 기대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는 원리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도 강조하십니다(마태복음 25:37-40) 누구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기꺼이 섬기는 환대(歡待)의 정신이 기본 전제로 깔려 있습니다.
(3) 고난 받는 자를 생각(3)
저자는 좀 더 구체적으로 ‘형제 사랑’에 대해 예시합니다. 즉, ‘감옥에 갇힌 이들’, ‘학대 받는 이들’을 우리는 ‘기억’라고 권고합니다. 앞서 지적했듯이, 굶주림과 헐벗음에 열악하게 노출될 수밖에 없었던 고대 사회의 수감자들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동료 성도들의 돌봄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독자들은 감옥에 갇힌 자들을 동정한 경험을 이미 가지고 있었습니다(10:34). 그런데 그들은 그러한 관심을 잊지 말고 계속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그 관심의 정도를 ‘마치 자신도 함께 갇혀 있는 것처럼’이라는 어구로 강조합니다. 독자들에게 기대되는 관심은 힘든 일에 있어서도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 형제들과 동질감을 갖는 것입니다(2:11-18). 여기서 ‘학대받는 자들’은 독자들이 이미 경험했던 고난의 내용들을 회상케 해 줍니다. 이미 그들은 비방과 환난을 당해 구경거리가 되기도 하였고, 재산을 빼앗기기까지 했었습니다(10:32-34). 그리고 그들은 그처럼 고난당하는 자들의 동료가 되기도 했었습니다(10:33). 따라서 독자들은 과거에 자신들이 ‘몸으로’ 고난을 경험한 것처럼, 학대받는 자들을 잊지 말고 계속적으로 관심을 기울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4) 가정을 귀하게 지킴(4)
저자는 ‘형제 사랑’하는 것에 대해 이제 성(性)과 관련하여 권면합니다. 저자는 이 권면을 가족관계의 관점에서 접근합니다. ‘모두가 결혼을 귀하게 여기라’라는 권면은 결혼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금욕주의자들에게 결혼의 가치를 인정하라는 권면이라기보다는, 이미 결혼한 자들 모두에게 결혼 관계를 인정하라는 권면이라기보다는, 이미 결혼한 자들 모두에게 결혼 관계를 존중하라는 권면입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도이고(창세기 2:24; 마태복음 19:4-6),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이 그 제도를 존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이와 짝을 이루는 ‘잠자리를 더럽히지 않게 하여라’라는 권면은 앞의 권면의 구체적 의미를 밝혀 줍니다. 오늘날처럼 독자들 당사에도 결혼 관계를 떠난 부적절한 성 행위가 사회적으로 만연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속적 윤리 기준이 적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음란한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씰 예수님께서는 정욕을 품고 여인을 바라보기만 해도 이미 마음속에서 그녀와 간음하였다고 선언하십니다(마태복음 5:28).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육체적으로 간음하는 자들을 심판하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5) 탐심을 버림(5-6)
마지막으로 저자는 탐심과 관련하여 권면합니다. ‘돈을 사랑하지 않은 삶을 살아라’(5a)라는 권면은 당시 윤리적 가르침의 주요 항목입니다(마태복음 6:24; 디모데전서 6:10). 독자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빼앗기는 것도 기쁨으로 당했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러한 과거의 경험 때문에 앞으로 다가올 박해에 대비해서 그들 사이에 돈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돈을 사랑하는 경향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에게 마땅히 기대되는 형제 사랑(곧 나그네 대집, 갇힌 자 돌봄 등)을 위축시키기 마련입니다(16).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단언하십니다(마태복음 6:24),
둘째 권면인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여라’(5b)라는 첫째 권면을 강화시켜 줍니다. 스스로 가진 것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는 자들은 자신을 위해 더 많은 거슬 추구하기 때문에 형제를 위해 나눌 수 없습니다(누가복음 12:13-21). 그런데 독자들이 만족하는 근거는 스스로 가진 것이 많은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돌보심에 있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사실을 구약성경의 인용을 통해 확증합니다(5b). '네가 결코 너를 떠나지고 않겠고, 또한 결코 너를 버리지도 않겠다.‘ 이는 아마도 신명기 31:6,8을 인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두려운 분이시지만, 역설적으로 그분께서 함께 해 주시면 가장 안정합니다(마태복음 6:25-32). 이처럼 안전을 보장해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자신이 가진 것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형제의 필요에 대해 관대하게 나눌 수 있습니다(빌립보서 4;15-19).
형제는 사랑해야 하지만, 방탕한 사랑과 탐욕 가득한 돈 사랑은 멀리해야 합니다. 결혼의 순결함을 잘 지켜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성도를 떠나지 않고 도우실 것을 믿고 하나님보다 제물을 더 사랑하지 말고 자족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관련된 권면들(7-9)

예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한결같이 동일하시니, 그분의 가르침 또한 시대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산할 사람처럼 경성하는 믿음으로 우리에게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들을 존경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되 즐거움으로 해야 합니다. 그것이 형제 사랑이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7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 받으라 8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9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7-9)
위에서 제시했듯이 선진들은 학대받는 사람을 위로하고, 손님을 대접하고, 가족을 사랑하며, 그리고 물질에 대해 자족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삶이 성도의 삶에 믿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제 저자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영적 지도자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보입니다. 영적인 지도자에 대한 적절한 태도를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도하던 설교자 또는 교사들은 지금 그들을 떠나고 없습니다. 저자는 옛 지도자들에 대해 지녀야 할 태도를 세 가지 동사 ‘기억하라’, ‘살펴보라’, ‘본받으라’로 요약합니다.
먼저 ‘기억하라’는 이유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변화시키는 창조적 힘을 캐내기 위해서입니다. 과거 지도자들을 기억하라 권면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히브리서 독자들에게 ‘말하여 주던’ 사람들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앞서 2:3에서 언급된 이들, 곧 구원의 말씀을 독자들에게 확증해 주었던 이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의 행실의 결과’라는 표현은 그 지도자들이 이미 돌아가신 것을 시사합니다. 이처럼 과거 지도자들은 더 이상 살아 있지도 않고, 따라서 그들의 활동을 지속하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독자들이 그들을 잊어버려서는 안 되고 계속 기억할 것을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그 독자들의 힘의 원천은 무엇보다 과거 지도자들이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그 지도자들의 생활과 그 결말을 살펴보고서, 그들의 믿음을 닮아가야 합니다. 삶의 정황이 삭제된 말씀은 생명력도 적용성도 없습니다. 저자는 ‘그들의 행실의 결과를 살펴보면서, 그 믿음을 본받아라.’라고 권면했습니다. 과거 지도자들은 단지 말씀만 전한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따라 살았고 믿음 안에서 죽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11장의 믿음의 모본들과 마찬가지로 독자들에게 믿음의 모본이 되기에 마땅한 자들인 것입니다.
이어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인상적인 고백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동일하심’을 선언합니다(8). 이 선언은 앞뒤 문맥에 잘 연결되지 않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8절에 소개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7절에서 소개된 과거 지도자들의 모습과 현저히 대조됩니다. 과거 지도자들은 훌륭한 믿음의 본들이지만, 이미 떠나갔고, 따라서 독자들 앞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에 반해 믿음의 창시자이자 완성자이신(12:2) 예수 그리스도는 든든한 믿음의 기반으로서 독자들과 항상 변함없이 함께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영원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삼중적 표현을 통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원성을 공유한 분이심을 부각하려 한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의 변함없으심은 지나간 시대의 지도자들을 우리가 기억해야할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또 그리스도의 동일성을 깨달음으로써 ‘여러 가지 다른 교훈’의 허망함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거짓된 가르침은 종종 변화무쌍함과 다채로움으로 그 오류와 거짓을 포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변함없는 사랑의 진정성으로 마음속 중심을 사로잡으십니다. 변함없으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상황과 환경에서도 그들을 언제나 변함없이 인도하시고 도와주십니다(7:25; 12:20-3).
9절은 8절과 대조적인 내용을 담은 명령을 기술합니다. ‘여러 가지 다른 교훈들에 이끌리지 마라’는 아마도 당시 독자들이 ‘여러 가지 다른 교훈들’에 노출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저자는 앞에서 레위적 대제사장의 많음과 대제사장 예수님의 단일성을 대조하였고, 레위적 희생 제사의 많음과 예수님의 단일한 희생 제사를 대조해 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독자들을 위협하던 ‘교훈들’이 ‘여러 가지’라는 사실을 예수 그리스도의 동일한 단일성과 암묵적으로 대조시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다른 교훈들’은 이교적인 가르침을 의미하고, 기독교 신앙에 맞지 않는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교훈들’은 독자들에게 생소한 교훈들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주변에서 이끌려서는 안 되는 잘못된 교훈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훈에 이끌리는 것은 과거 지도자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던 하나님의 말씀(7), 곧 그리스도의 참된 교훈을 떠나는 것입니다.
저자가 이렇게 ‘끌리지 말라’고 명령한 이유를 ‘마음은 음식들이 아니라 은혜로 견고해지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라고 밝힙니다. 저자는 ‘마음이 견고해지는 것’이 독자들의 목표가 되어야 함을 전재합니다. 그 견고해짐의 두 가지 근거, 곧 ‘은혜’와 ‘음식들’이 대조됩니다. ‘음식들’도 마음을 굳건히 해줍니다(시편 104:15). 하지만 이제 ‘음식들’의 규례를 따라 행하는 자들은 더 이상 유익을 얻지 못합니다. ‘음식들’에 관한 규례들은 개혁의 때까지만 부과된, 옛 언약의 규례들이기 때문입니다(9:10). 따라서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새 언약 아래에서 하나님의 은혜로(4;16;10:29;12:15,28). 마음을 굳건히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저자가 비판하는 점은 경건한 삶을 이유로 음식과 같은 눈에 보이는 특정 행동이나 규율의 준수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은혜가 어떤 행동, 규칙보다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동력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고난에 대한 묵상과 권면(10-15)

복음으로 완성된 삶을 살아가는 신앙의 완성입니다. 성도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 신앙의 절정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신앙의 절정을 예수님과 함께 영문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를 설명하면서 성도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어떤 모습이여야 하는지 제시합니다.
10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11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12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4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15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10-15)
본문은 형식상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10-12절은 설명 형식을 띄고, 13-15절은 설명에 기초한 권면형식을 띱니다. 저자는 9절에서 ‘다른 교훈들’을 경계하도록 권면하였습니다. 이 권면은 본 소단락의 도약대 역할을 합니다. 독자들에게 추구해야할 참된 예배의 모습을 ‘다른 교훈들’과 대조하면서 제시해 나갑니다.
(1) 해설 단락(10-12)
이 단락은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로 시작합니다. 독자들에게 지금 ‘제단’을 가지고 있다고 진술합니다. 옛 언약 아래서 이스라엘은 장막의 제단에서 동물을 제물로 제사를 들렸습니다. 하지만 새 언약 아래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제단’에서 하나님께 새로운 형태의 제사를 드립니다(15-16). 그리스도의 죽음 사건을 대유적으로 지칭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사의 유익을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누릴 수 없습니다(10b). 여기서 저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두 가지 방법을 강력하게 대조시킵니다. 십자가에서 단번에 드려진 그리스도의 완전한 제사를 통해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아직도 옛 언약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특권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 특권은 ‘그 제단으로부터 먹을 권한’이라고 말합니다. 옛 언약 하에서 장막에서 제물을 드리는 제사장들과 예배자들은 제사를 드리며 음식을 먹고 즐거워할 권한이 있었지만(신명기 12:6-7; 17-18), 새 언약 시대에는 역설적으로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제사의 유익으로부터 배제된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11절에서 그들이 그 제단으로부터 먹을 권한이 없는 이유를 흥미롭게도 구약에서 제시합니다.
(2) 설명에 기초한 권면(13-15)
저자는 지금까지 해설했던 사실에 근거하여 독자들에게 도전적으로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수치를 짊어지고 진 밖으로 그분께 나아가자.’ 이제 독자들은 중대한 결단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정죄하고 모독하는 성문 안 도시에 머물든지,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저주당한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셨던 성문 밖, 곧 ‘진 밖으로’ 나가든지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른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당하셨던 치욕을 짊어지고 ‘진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당시 종교 체제하에서 ‘진 밖으로’ 나가는 것은 부정한 취급당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레위기 24:14,23; 민수기 15:35). 독자들은 자신의 믿음 때문에 이미 고난과 수치를 경험하였습니다(10:32-34; 12:4). 그런데도 충분하지 않다고 합니다. 오히려 다시 그리스도의 수치에 동참할 것을 촉구합니다(마태복음 10:38; 누가복음 9:23).
이렇게 결단해야할 이유를 명확히 밝혀 줍니다. 본 단락을 시작할 때, ‘가지고 있는 것’을 지적했지만, 이제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지적합니다(14a). 바로 ‘영구한 도성’이었습니다. 독자들이 눈앞에 안락과 안전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되고, 오히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10:34) 믿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영원한 안전을 제공하는 ‘영구한 도성’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제까지 논의를 통해 공동체 예배 주제로 귀결됩니다. 이미 성취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중간 기간에 하나님께 대한 성도들의 제사는 지금까지와 다른 형태로 들려져야 합니다. 옛 언약의 제사는 동물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핵심이지만, 이제 예수님의 단번에 드려진 제사로 종결되었고, 그 대신에 드려야 할 제물은 ‘찬양’입니다(15b). 하나님께서는 동물의 제사보다 감사의 제사를 더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부각됩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드리는 찬양의 제물은 ‘늘’, 곧 지속적으로 드려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고 제물로 돌아가셨습니다. 성도들 역시 성문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예배자로서, 거룩한 산 제물로서 살아갑니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고난도 기꺼이 받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성도들로서 살아가는 것은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외면하지 않고, 가정을 잘 지키며, 그리고 목적을 위해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부으신 것처럼 십자가 놀라운 사랑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품어주고, 그 사랑으로 복음의 삶을 살아가고 그리므로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사람들에게 나타나지는 놀라운 축복의 삶이 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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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12-03)


위대하고 위엄한 그리스도의 복음

히브리서 12장 18-29절


기독교는 율법과 복음으로 두 가지 내용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율법과 복음, 이 두 가지가 어우러진 것이 기독교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율법을 필요 없는 것으로 여기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율법으로 끝나면 결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곳에 복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율법과 복음은 어떤 관계입니까? 율법은 미완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완성케 한 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완성인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함께,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본문은 그 내용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주어질 때 이스라엘은 무서워 떨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른 곳은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복종해야 합니다. 율법이 주어질 때는 땅만 진동했지만 이제는 하늘도 진동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위대성(18-24)

보수계열의 교회들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배를 드리면서 거룩함이 무거운 기운이 감도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 웃거나 드럼을 두드리면서 박수친다는 것을 용납 못했을 때도 있었습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에 대해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 묵상할 때, 하나님에 대한 경외 앞에서 두려움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한 부분입니다.

18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만한 불 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19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20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21그 보이는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 22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23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24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18-24)

율법과 복음은 모두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지만 들의 기능은 매우 다릅니다. 율법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죄인으로 세워 놓기에 우리는 심판을 두려워하며 떨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를 죄 씻음 받은 의인으로 하나님께 인도하기 때문에 우리는 환영받고 하나님 앞에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1) 이스라엘 백성의 시내산(18-21)

먼저 시내산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사건은 출애굽기 19장의 사건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광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그 시내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임재하실 때, 하나님께서 불붙은 산에 강림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받을 때, 그것은 두려움과 놀라움이었습니다. 우레와 번개 그리고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렸습니다. 산에서 연기가 옹기점같이 피어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했습니다. 그 산에 들어가는 자는 누구든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위엄 앞에 그들을 두려워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어떻게 대면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함의 역사 속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히 눈을 들어 쳐다볼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세 조차도 두렵고 떨린다고 말합니다. “그 보이는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21) 모세 조차도 하나님의 위엄과 경외 앞에 두렵고 떨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원치 않는다 할 정도로 그들은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후 시내 산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모습입니다. 옛 언약인 율법 아래 있었던 백성들은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2) 천상의 도착한 그리스도인(22-24)

반면에 복음을 통한 천상의 시온에 도착한 그리스도인의 신분과 상태를 설명합니다. 그들은 새 언약과 피로 완전하게 된 의인이기 때문에 환영 받고 기뻐하는 공동체입니다. 복음이 율법보다 위대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나 또 이것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두려움 속에서 우리를 한 단계 더 나가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나가게 하시는 바로 시온산이라고 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22절 말씀부터 “그러나”로 시작하면서 모든 분위기가 반전이 이루어집니다. 다시 말하면 이제는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시내산’이 아니라 ‘시온산’이 되어야 합니다.

‘너희가 이른 곳’ 곧 ‘너희가 서 있어야 한 곳’은 시온산이라는 것입니다. 그 시온산은 바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과정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나 아직 미완성입니다. 율법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뛰어넘어서, 시내산을 통과해서, 우리가 서야할 곳은 가나안, 시온산 그리고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곳입니다. 그곳에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설 수 있습니다.

그 시온산에 서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24)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중보가 되어서 설 수 있습니다. 두려워하던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은혜 시대를 살아가고 은혜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그는 두렵고 떨렸습니다. 그의 고백은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고 하나님을 두려워한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과해서

 

복음의 위엄성(25-29)

복음이 율법보다 위대한 것만큼 복음은 더 위엄한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더 큰 심판과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입니다. 은혜의 배경이 되는 과거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25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한 저희가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 26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27이 또 한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 28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찌니 29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25-29)

인간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가 시내 산에서는 땅을 진동시켰지만, 복음에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는 하늘과 땅을 모두 진동시킬 만큼 두려운 것입니다.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하는 자들은 더 큰 죄를 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을 약속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히 변치 않는 천상의 나라를 약속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복음 아래 있는 자들은 율법 아래 있던 자들보다 온전하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율법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지만, 복음은 네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스르는 모습이라고 느낄 때 즉시 회개하고 돌이킵니다. 혹시 당신에게 주신 복음의 명령을 등한시하지 않습니까?


시편 기자는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다고 노래합니다(시 125:1). 하늘의 영광을 바라며 당신에게 주신 주님의 명령을 따라, 복음을 따라 경건하게 살기 원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이웃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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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12-02)


징계를 통한 하나님의 교훈

히브리서 12장 9-17절

 


나비가 고치에서 나오는 순간은 안간힘을 쓰고 나오는데 고통스러워 보입니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도움을 주려고 가위로 잘라주면, 나비는 쉽게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날아갈 수 없습니다. 고치 밖으로 나오려 안간힘을 쓰면서 모든 영양분을 날개와 온 몸으로 보내고 몸이 가벼워진 후에 날아갈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통한 자에게 주어지는 능력이 있습니다. 날아올라 승리할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추구할 것은 편안함이 아니라 평안입니다. 편안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능력,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는 그 능력, 그 평안을 추구할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징계로 권고하실 때가 있습니다. 징계는 즐겁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다른 길로 가서는 안 됩니다. 특히 육신의 욕구를 위해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은 사람들이 있을까 두려워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달려갈 것을 권고합니다.

 

거룩함에 참여케 징계(9-10)

이 세상을 이길 능력은 훈련을 통과한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고통스럽지만 그 훈련을 통과해야 합니다. 훈련은 고난을 통해 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당신이 고난을 당할 때, 그 고난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고난을 훈련으로 보는 시각이 있어야 합니다. 그 고난을 통해서 훈련되어지고 그 훈련을 통과함으로 말미암아 유익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9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9-10)

하나님께서 율법인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잇는 중간 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셨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이 속에서 아름다운 형통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육신의 부모에게도 순종하고 공경하는 것을 하물며 하늘의 아버지의 말씀, 훈련에 순종해야 합니다.

육신의 부모들은 자녀가 잘못되기를 바른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모든 부모는 자녀를 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서 근실하게 징계합니다(잠 13:24). 이때 미련한 자녀들은 부모의 징계를 거역하지만 지혜로운 자녀는 오히려 부모님을 공경하면서 복종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징계에 복종해야할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이며 우리가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좋은 아버지이십니다. 그 좋은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셨습니다. 그 고난은 훈련입니다. 우리의 영적 유익으로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우리를 유익하도록 고난을 허락하시고, 이 훈련을 통과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훈련을 통해 유익함과 보람되게 살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그 유익은 “거룩하심에 참여케”(10)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들이 처해있는 어려운 어려움과 역경의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훈련의 기간이라고 생각하시면, 그곳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발견하시길 바랍니다. 좀 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감으로 성숙되어져가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되길 바랍니다.

 

훈육을 대한 성도의 자세(11-13)

혹독한 추위를 견뎌낸 나무는 더 아름다운 꽃과 향기로운 향기를 피우고 충실한 열매를 맺습니다. 시련을 통과한 사람들은 강합니다. 고난에 흔들이지 않습니다. 변함없는 사명을 감당하며 풍성한 삶을 누립니다. 징계의 매서운 바람이 불어올 때는 즐겁지 않습니다.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징계가 나의 모난 부분을 깎아냅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삶의 열매를 먹도록 합니다.

11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12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11-13)

아버지의 훈육은 당장은 즐겁게 느껴지지 않지만 나중에 그것은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마치 운동선수들이 체력과 기술을 단련할 때 고통스럽지만 그런 ‘연단’을 통해서 긴 경주에서 승리하고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저자는 그 기쁨의 정체를 ‘의로움으로부터 나온 평화로 가득한 열매’라고 부릅니다(11b).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잘못을 처벌하기 위해 고통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에는 뜻이 있습니다. 고난을 통과함으로써 빚어지고 체득되는 형화로 가득한 열매가 있습니다.

거룩함에 참여하는 것은 아름다운 열매입니다. ‘의의 평강한 열매’(11)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훈련을 통과했을 때, 그 의와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 훈련은 우리를 성숙케 합니다. 죄로 인해 이기적이고 정욕적인 인간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못난 부분을 깎아내시고 다듬어 가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손길이 훈련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참여해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 먼저이며, 그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의와 평강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의 징계와 연단을 통해 죄와 정욕으로 비틀거리는 마음이 고침을 받아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될 때야 비로소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가 결국은 당신에게 유익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참여하기 위해 무엇을 고침을 받아야 합니까?

 

몇 가지 권면(14-17)

모든 열매는 뿌리로부터 시작됩니다. 뿌리가 무엇을 빨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어떤 열매를 맺느냐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쓴 뿌리를 가지고 있으면 안 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상한 심령으로 살아가면 안 됩니다. 용서하지 않는 삶은 세상의 법칙입니다. 세상의 법칙은 결코 용서할 수 없이 저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쓴 뿌리의 인생이 되길 원치 않습니다. 상한 심령이라는 열매가 썩어버리기 때문에 용서하는 삶, 품어주는 삶 그리고 감싸주는 삶을 말합니다.

14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15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16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17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14-17)

본문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몇 가지 권면합니다.

(1) 모든 사람과 함께 화평과 거룩을 추구(14)

14a절을 기독교인이 교회 밖 사회생활에서 인간관계를 맺는 원리로 이해해서는 곤란합니다. 우선 문장에서

(2) 많은 사람을 더럽게 하는 쓴 부리 제거(15)

여기에서 두 가지 권면이 들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라’는 권면은 각 개인의 분발을 촉구하기보다는 공동체가 함께 서로를 돌아보라는 권면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는 추상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대제사장 예수님께서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심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큰 구원’(2:3)과 연관된 은혜입니다(4:16). 따라서 이 은혜에 이르지 못함은 곧 배교를 뜻합니다. 두 번째 권면은 한국의 기독교에서 오해가 많은 구절입니다. ‘쓴 뿌리’라는 표현은 본래 신명기 29:17에서 유래했습니다. 이것은 어린 시절 심리적 상처나 극심한 고통의 기억 때문에 생긴 어떤 마음의 병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신명기 29장의 맥락에서 이 표현은 쓴 ‘열매’, 즉 우상숭배와 교만을 일으키는 악한 의도와 경향성을 말합니다. 그 결과는 개인의 삶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줍니다. 다른 이들을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더럽혀질’ 수 있습니다.

(3) 음행과 망령됨을 피하라-에서의 사례(16-17)

이 권면에는 이삭의 큰아들 에서가 등장합니다. 그는 헷 족속의 두 여인과 결혼했습니다(창세기 26:34-35). 이 결혼의 부도덕성은 여러 고대 유대 문헌에서 지적되었고 여기서 ‘음행’이 가리키는 것도 그 내용일 것입니다. 또한 그는 당장의 허기를 채울 죽 한 그릇에 장자의 권리를 팔아 넘겼습니다(창세기 5:29-34). 이 행동으로 인해 에서는 ‘망령된 자’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아브라함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을 능멸하고 하찮게 여긴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두 정황은 에서의 가치관이 지극히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욕구 충족에 의존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잠깐 실수했거나 집중력이 흐트러진게 아니라 일관되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무시하고 등진 배교였습니다. 앞서 누누이(6:4-6; 10:26-31) 경고했듯이 배교자의 회복은 불가능합니다(17). 신실함의 요청은 그만큼 엄중합니다.

이것을 '쫓으라'는 것은 노력하고 추구하라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과 화평함과 거룩함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는 우리들이 노력하고 추구하길 원하십니다. 그 때 믿음의 열매를 맺습니다. 믿음의 열매는 주를 보는 것입니다. 그 노력이 없이는 주를 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천국에 가면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천국에 대한 아름다운 환경도 아닙니다. 성도들이 그토록 만나고 싶은 주님을 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보는데,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고 말씀하셨습니다. 간접적으로 거울 통해 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주님을 얼굴과 얼굴로 대면해서 보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이 믿음의 열매입니다.

주님을 온전히 보는 사람에게는 화평함과 거룩함이 있습니다. 그들은 화평한 삶은 서로 사람의 관계 속에서 사람들을 꼭 필요하게 공동체를 편안하게 만드는 사람이 됩니다. 또한 그 삶은 거룩한 삶이라고 했습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구별되었다는 것’입니다. 거룩함 삶이란 영혼이 맑아야 합니다. 영혼이 맑은 사람이 주를 볼 수 있습니다. 교활한 사람은 주를 볼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를 보는 사람은 거룩함으로 그의 삶이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의 거룩함을 닮아가는 중에는 어려움이 따릅니다. 고난은 누구나 힘듭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훈련으로 여기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훈련이라고 여길 때, 오늘 하나님께서 어려움 속에 있는 당신과 동행하신 것을 느낄 것입니다. 감사할 수 있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 기간이 지난 후에는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통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는 복된 영광을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훈련을 통해 다른 형제와 자매를 섬기는 도구로 변화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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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12-01)

 


포기하지 않고 달려야할 믿음

히브리서 12장 1-8절


어떤 목표를 세우면, 그 목표를 향해서 달려갑니다. 목표를 향해 나갈 때,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목표의 열매를 알기 때문에 난관을 이기며 나갑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으로 믿음의 삶을 살아가길 원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며 그 뜻을 향하여 나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와 함께 동행 하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경주를 달려 나가시길 바랍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의 경주를 어떻게 달려 나갈지, 그 지혜와 그 능력을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말씀을 들어가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12장은 11장의 귀결입니다. 오직 인내로써 믿음의 경주를 감당해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 아버지의 징계에 대해 쉽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하나님의 자녀인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징계에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경주 비유를 통한 권면(1)

육상경기에서 가장 먼저 결승점에 도달하는 선수에게 금메달을 수여합니다. 그러나 먼저 골인했다고 할지라도 법대로 하지 않으면, 골치처럼 취급합니다. 믿음의 경주에서는 일등에게만 수여한 것이 아니라 끝까지 달리면 누구나 금메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믿음의 삶을 경주로 표현하여 설명합니다.

1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1)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신실하게 사는 삶이 경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믿음의 경주를 잘 하는 것에 관해 히브리서 기자는 몇 가지 충고를 해주고 있습니다. 12장 첫 단어는 ‘이러므로’입니다. 이는 11장을 12장과 이어주는 중요한 이음말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11장을 쓴 이유는 12:1-13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1) 허다한 증인(1)

저자는 11장에 묘사했던 인물들을 ‘증인들의 구름’(원문 직역)이라고 부릅니다. 하늘의 구름과 달리 증인들의 구름은 세월의 바람에 날아가 버리지 않았습니다. 증인들은 지금도 우리를 둘러싸고 지켜보면서 증언합니다. 이 증인들처럼 살 수 있고 살아야 한다는 도전이 성도들에게 주어집니다.

(2) 육상 경주 같은 믿음(1b)

저자는 1절 말미에 인내라는 주제에다 달리기 경주의 모티프를 입힙니다. 다른 종목들과 달리 육상은 다른 이들과의 경쟁에 앞서 자신과 싸워야 하는 종목입니다.

생각이 집중되어야 하고, 옷차림이나 꾸밈새도 되도록 단순하게 해서 몸을 가볍고 자유롭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라’는 권면이 더 실감나게 다가옵니다. 믿음의 경주는 방해되는 모든 것을 떨쳐버리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출발선에서 준비하고 있는 경주자처럼 우리는 죄를 떨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믿음의 경주는 결승전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저자는 ‘인내로서 경주하며’(1)라고 표현합니다. 혼자만의 싸움으로 인내가 필요합니다. 바르게 신앙생활하려고 할 때,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고독한 일이 많습니다. 하지만 결승전에 이르면 상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끝까지 인내하면서 달려가야 합니다.

성도들은 지속적으로 믿음의 경주를 하고 있습니다. 그 경주에 대한 결과를 알고 있기 때문에, 고독하고 어려운 일들과 힘겹게 싸워 나가고 있습니다. 결승전에 다다를 때까지 멈추지 말고 달려야 합니다. 끝까지 한 순간도 시선을 놓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고정하고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목적지까지 달려가야 할 신앙(2-3)

믿음의 경주를 할 때, 매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준(基準)입니다. 얼마나 경주를 잘 하는지 자신을 바라보면 스스로 자만할 수 있고, 다른 사람과 비교해보면 경쟁심을 느끼며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목적지까지 달리는 것입니다.

2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2-3)

경주할 때 중요한 것은 결승점을 기억하거나 바라보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달리는 경주자는 다른 것을 보거나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믿음의 좋은 경주자는 결승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달려야 합니다.

(1) 모범적인 경주하신 예수(2)

믿음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예수를 바라보자.’(2)고 소개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처한 상황에 낙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선한 일로 인해 교만해질 수 있고, 실패한 일 때문에 낙심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이러한 것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최선의 경주는 예수님께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성도들이 바라본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셨습니다. 성도들에게는 큰 위로가 됩니다. 그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을 위해 수많은 일들을 완성해 놓으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셨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주’, ‘온전케 하시는 주’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의 주’라는 것은 ‘승리하게 하시는 분’, ‘완전하게 하시는 분’, ‘이루어 주시는 완성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바라볼 때, 그 믿음의 경주를 달려갈 수 있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일들에 당면했다고 가정하면, 자신이 힘든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 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게 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당하신 고난은 훨씬 큰 어려움을 극복하셨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당신의 십자가가 무엇이든지 간에 예수님 어깨에 지워 던 십자가의 무게보다 훨씬 가볍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참으신 것을 생각해 보면, 우리들도 다시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보다 앞서가신 예수님께 훨씬 위대한 일을 하신 것을 알고 난 후에, 불평 없이 우리 할 바를 다할 수 있습니다.

(2) 모범적인 경주하는 방법(3-4)

다시 ‘너희’에게로 관심을 돌려 권면을 이어갑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본을따라 행해야 합니다. 죄인들이 거역하는 상황에서 인내하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동일한 싸움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영혼이 쉽게 낙담하지 않으려면 예수님을 생가하고 그분께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그렇지만 당시 히브리서 독자는 지금 죄와 맞서 싸우고 있는 중입니다. 아직 피 흘리는 상태까지 이른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서 ‘피’는 순교를 상징합니다. 전날에 큰 싸움이 있었고(10:32) 지금도 도전이 계속되고 이지만, 아직 순교의 피가 흐르지는 않았습니다. 이 구절에서 ‘죄’는 3절과 같이 ‘죄인’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공동체가 수행하고 있는 싸움은 개인적, 내면적 차원의 투쟁이기보다 ‘교회에 대한 적대적 세력’과의 투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 17:5)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이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 것을 항상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그 믿음의 경주를 십자가까지 다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믿음의 놀라운 사랑의 힘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주를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자가 되는 비결은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님의 인내를 바라보며 끝까지 인내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죄와의 전쟁에서 죄악을 바라보지 마시고, 하나님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죄악과 싸울 때, 인내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이 싸워야할 죄는 무엇입니까? 돌에 맞은 스데반 집사처럼 하늘 보좌에 계신 주님을 보라보시길 바랍니다. 성도들이 위기와 고난 그리고 역경을 이길 수 있는 것은, 그 유일한 길은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승리합니다. 오늘도 우리 함께 주를 바라봅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싶은 사실이 있습니다. 죄가 당신의 사역(삶)가운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든, 그렇지 않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자는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라고 말합니다. 당신의 죄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믿음의 경주를 하지 못하도록 당신을 얽맬 것입니다. 어떤 죄든 당신을 얽어맬 것입니다.

죄(罪)라면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죄의 얽매임에서 벗어나길 간절히 원하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죄를 얽매는 것으로 여기고 얽매는 죄를 벗어 버리라고 말했습니다. 믿음의 경주하는 자들도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시대가 바뀌어도 결코 변하지 않는 유일한 목표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믿음을 지속할 수 있고, 그분을 통해서만 신앙의 경주를 완주할 수 있습니다.

 

제자화 훈련인 징계(5-8)

달리는 말에게 더 잘 달리도록 채찍질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에게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권고 하십니다. 때로는 징계까지 하십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기자는 고난 속에 믿음의 경주에서 떠나고 있는 성도들을 보면서 안타까워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권면을 다음과 같이 합니다.

5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7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5-8)

믿음의 경주를 할 때 낙심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종종 믿음의 경주를 힘껏 달리기보다는 정당히 달려보려고 하거나, 또는 다른 사람의 경주를 방해하고 실패하게 만드는 죄의 유혹에 더 관심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정도로 달렸지만 외부의 핍박에 의해 많은 고난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삶에 어떤 역경, 어떤 어려움이 있던지 간에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이 예수님을 닮아가길 원하시기 때문이라는 것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 삶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에 우리를 예수님과 같이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선한 의도가 있다는 걸 이해한다면, 시련 가운데서도 기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를 상하게 하는 모든 것이 믿음의 경주를 더 빨리 하게 만들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에도 유혹이 있습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어떤 어려움을 주시든 간에 거기서 기쁨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자녀로 여기는 모든 자들을 징계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징계를 기쁘게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징계라는 단어는 ‘훈련’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훈련(discipline)’을 통해서 ‘제자(disciple)’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훈련은 아무나 참가시키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믿음의 훈련을 받고 있다는 것은, 당신이 바로 선택받은 자, 선택받은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고, 믿음의 경주를 달려갈 수 있도록, 당신을 훈련하시기 때문에, 그 훈련을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제자는 훈련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훈련은 고난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훈련과 고난을, 어떤 고난이 당신의 삶 속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훈련으로 보는 시각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훈련에 대해 감사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아버지 하나님께 훈련시키십니다. 자녀를 용맹한 하나님의 군사로 만들어 가시는 훈련시키는 도구입니다.

죄의 유혹에 넘어가 경주를 등한시한다면 실패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감독이신 하나님 아버지는 징계를 통해서라도 다시 경기에 전념하도록 인도하십니다. 경기에 앞서 고된 훈련의 과정에 인내하지 않고 마음대로 먹고 놀고 즐기는 선수는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징계는 괴로운 것이지만, 그것은 우리를 승리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훈련이기 때문에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만약 이런 훈련이 없으면,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8)고 권고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은 어떤 환경에도 살펴보고 계십니다. 당신의 고난 가운데 있는 것을 보고 구원해 내실 것입니다. 당신을 독수리같이 날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바른 길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징계와 당신의 욕심 때문에 받는 시험을 어떻게 구별해야 합니까? 징계의 때를 잘 통과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이러한 모든 당신의 수고와 헌신을 지켜보고 있는 또 다른 무리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1)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우리들이 지내온 신앙을 하나님께 증언할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응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그 날을 바라보며 끝까지 달려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에서 주시는 능력으로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항상 성도들은 주님 닮기 원해서 끝까지 달려가야 합니다. 만약 당신 안에 나쁜 죄악의 습관이 있다면 믿음의 전력투구할 수 없습니다. 나쁜 습관은 죄의 열매를 맺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죄악 속에 빠져 있음을 봅니다. 그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바라보며 용서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용서의 손길에 순종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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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11-04)


믿음으로 말미암은 승리와 상급

히브리서 11장 32-40절


 

믿음은 생명과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것입니다. 진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환경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쉬운 일과 어려운 일과, 좋은 것과 나쁜 것과, 많은 열매를 맺는 것과 적은 열매를 맺는 것 등 환경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환경을 뛰어넘어 승리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 믿음은 소중한 것입니다. 성경 속에서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을 살펴보고 따라가면, 우리들도 그들과 같이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에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라합까지 믿음의 사람들에 대해 소개했습니다. 이제 계속해서 그들에 대해 계속됩니다.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등 믿음의 사람들을 말하려면 시간이 부족할 지경입니다. 이제 믿음의 사람들의 행위를 소개합니다. 믿음으로 이기기도 하고, 의를 행하기도 하고,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삶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승리한 사례들(32-34)

믿음은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물론 이 능력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에게 세상의 어떤 위협이나 고난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본문은 믿음의 선진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32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33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34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32-34)

지금까지 천지창조에서부터 라합의 구원까지 살펴보았습니다. 이만하면 믿음의 본질과 결과가 옛 사람들의 삶 속에 어떻게 나타났는지 충분히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라고 말합니다. 아직 할 말이 많이 있지만 상세히 말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함을 강조합니다. 사사 시대 이후에도 믿음의 주인공들이 많았지만, 더 이상 선진들에 대한 소개는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소개했던 사람들로 인해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대신 대표적인 몇몇 인물의 이름과 몇 가지 성과를 나열합니다. 네 명 사사(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한 명의 왕(다윗)과 선지자(사무엘)가 거명되고 나머지는 ‘선지자들’로 통칭됩니다(32). 이들은 성경에 출현하는 순서대로 거명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중요도 순도 아닙니다. 엄밀하지는 않지만 대략적인 연대순 안에 유사한 공적 또는 성취를 이룬 인물들끼리 이어지도록 배열한 것입니다. 이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루 이스라엘 역사를 수놓은 인물들입니다.

 

활동(33-34) 인물들(32)
나라들을 이김 기드온이 미디안 왕들 정복(사사기 8:2,12,26)
바락이 가나안 왕 야빈 정복(사사기 4:23-24;5:19)
입다가 암몬 족속의 왕 정복(사사기 11장)
다윗
의를 행함 사무엘(사무엘상)
다윗(사무엘하 8:15)
약속을 받음
(= 약속의 성취)
다윗(사무엘상 17:45-47)
엘리야(열왕기상 19:1-3)
엘리사(열왕기하 6:26-32)
예레미야(예레미야 26:7-24)
사자들의 입을 막음 다니엘(다니엘 6:23)
삼손(사사기 14:5-6)
다윗(사무엘상 17:34-37)
불의 세력을 멸함 다니엘의 세 친구(다니엘 3:1-30)
칼날을 피함 다윗(사무엘상 19:10-18; 사무엘하 15:14)
약함으로부터 강해짐 삼손(사사기 16:19-30)
기드온(사사기 7장)
전쟁에서 용감해짐 다윗(사무엘상 17:49-51)
바락(사사기 4:14)
외국 군대를 물리침 기드온(사사기 7:11,14,21)
다윗(사무엘상 17:46)
죽은 가족이 부활함 사르밧 과부와 엘리야(열왕기상 17:17-24)
수넴 여인과 엘리사(열왕기하 4:18-37)

먼저 인물들을 한꺼번에 거명한 다음 저자는 그들의 행적을 열 가지로 기술합니다(33-34). 각 활동을 누가 행했는지 대략 다음과 같이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 목록을 통해서 저자는 무엇을 말하고자 합니까? 위에서 열거한 열 가지 활동 중 대다수는 전쟁에서의 승리 혹은 죽음의 위협으로부터의 구출 사건들입니다. 히브리서의 독자들이 실제 전쟁 중에 처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와의 싸움, 신앙을 물러나게 하는 죄의 유혹과 시험과의 싸움을 싸고 있었습니다. 승산이 없어 보이는 현실 너머에 온 세상을 주관하시고 자기 백성을 주시하시는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그분의 존재, 능력, 선하심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강함으로 바꾸어주시거나,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나게 하십니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역경이나 어려움도 뛰어넘었습니다.

본문에 언급된 선진들은 모두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모든 고난과 역경을 뛰어 넘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우리와 동일한 연약한 사람들이지만, 참 믿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연약함을 들어서 강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사용 받았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인해 고난당한 자들(35-38)

 

믿음의 경주에서는 승리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믿음 때문에 고난 받고 죽임을 당한 자도 있습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들은 실패자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는 믿음으로 고난당한 자들도 결국에는 승리자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핍박과 고난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켰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는 진정한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35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36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35-38)

초대교회 성도들은 믿음 때문에 혹독한 고난과 역경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심한 핍박으로 인해 광야 같은 곳으로 피해 다녀야만 했습니다. 그들이 당한 고난과 역경은 상상할 수 없는 혹독한 고난이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이겨낸 것입니다.

앞 단락에서 묘사된 사건들은 하나같이 성공담들입니다. 자신들이 원하던 것을 얻고, 어려운 상황을 돌파하고, 여러 면에서 형편이 나아진 경우들입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보면서 ‘믿음으로 살면 결국 잘되고 성공한다.’는 법칙을 정립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35b절부터 나오는 사례들은 그런 법칙에 정면으로 위배되기 상황이 나타납니다. 같은 ‘믿음으로’ 행했던 사람들에게 안전, 승리, 성공 대신 고통, 죽음, 따돌림, 유리방황과 같은 좋지 않은 상황들이 지속되거나 더 나빠졌습니다.

저자는 여기에 기술한 사례들과 관련된 인물들이 누구인지 특정하지 않습니다. 몇몇 항목들은 그 표현이 포괄적이고 일반적이라서 특정 인물이나 사건에 국한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비교적 구체적이고 특수한 상황을 떠올리게 하는 묘사도 있습니다. 35b절의 경우 외경 2마카비서 7장에 나오는 일곱 형제와 어머니의 이야기에 딱 들어맞습니다. ‘조롱’과 ‘채찍질’은 구약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2마카비서와 4마카비서 등 제2 성전기의 역사적 상황을 기록한 책들에 여러 번 등장합니다. 헬레니즘 제국들로부터 지배를 받는 동안 유대인들은 정치적, 신앙적으로 심한 박해를 경험했습니다.

저자는 성도들이 당한 것과 같은 고난을 선진들도 당했지만 믿음으로 이겨 냈다고 가르칩니다. 36b절 이하에는 구약 선지자들의 사례에 해당하는 내용이 많습니다.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은 예레미야의 고난을 떠올리게 합니다(예레미야 20:2; 37:15; 38:6). ‘돌로 침’을 당한 선지자는 스가랴입니다(역대하 24:21). 단, ‘톱으로 켬’을 당한 사례는 문헌상으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칼로 죽임’당한 경우는 여럿이다(선지자 우리야, 예레미야 26:20-23; 열왕기상 19:10,14). 엘리야는 양가죽을 입은 것으로 추정되는데(열왕기하 1:8), 일반적으로 가죽옷은 선지자들의 복장과 연관되는 것 같습니다. ‘양과 염소의 가죽’은 조악한 의복을 제유법적으로 표현하고 더구나 그런 옷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다는 기술은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느라 경제적, 사회적으로 매우 열악한 처지에 처했음을 의미합니다.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은 그들이 박해를 피하느라 혐한 지형으로 도망한 상황을 표현합니다. 이세벨의 추격을 피해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동굴에 숨긴 일이 있고(열왕기상 18:4), 엘리야도 광야와 산, 동굴로 피신하며 고생했습니다(열왕기상 19:4,8-9).

38b절은 이 단락에 열거된 사례들에 대한 종합적인 논평이 될 수 있습니다. 앞 소단락(32-35a)과 달리 여기에는 믿음으로 살았지만 부러워할 만한 결과를 누리지 못한 사례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인 등은 세상의 판단 기준에 따라 판단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의 의미는 세상은 그들의 삶을 아주 높이 평가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저자의 요지는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이들의 삶을 잴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그들의 삶의 결과는 최상 등급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공격을 당했지만, 결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히브리서 독자들과 우리까지도 역시 믿음을 붙잡는다면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소중하고 생명과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졌을 때, 꽃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도 함께 받습니다. 놀라운 사명과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임하면, 고난도 함께 임할 것입니다.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로 말미암아 이 세상이 아니라 다가올 세상을 향해 나가는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믿음으로 승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자 고난의 십자가를 지셨지만 결국 부활하시고 승리하셨습니다.

 

맺음말 : 믿음으로 인해 사는 방법(39-40)

세상 사람들은 믿음의 사람들을 볼 때, 잘 믿지 않기 때문에 비웃음을 당한 것이지, 잘 믿는 사람을 보면 두려워합니다. 마귀는 성도들이 제대로 믿지 않으니깐, 비웃는 것이지, 제대로 믿는 사람이라면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참 믿음과 참 신앙으로 승리하길 원하는 것입니다.

39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40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39-40)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 믿음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영광을 다 보지는 못했습니다.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는 못했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고 살았습니다. 믿음으로 보고 믿음에 동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 마지막 두 문장은 11장 전체의 요약도 아니고 결론이라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11장에 서술된 사람들 모두를 아우르는 평가는 이것입니다. 그들은 인정되었지만 약속된 것을 받지 못했습니다.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믿고 맡겨진 하나님의 뜻을 신실하게 이루어드린 점에서 그들은 마땅히 ‘믿음의 영웅들’이라 불릴 만합니다.

저자는 믿음으로 큰일을 행하고 고난을 이겨 낸 선진들이 ‘증거’는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했다고 선언합니다. 즉 메시아에 대한 증거를 받았지만,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지는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믿음으로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헤쳐 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 세대는 더 좋은 것, 곧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맛보는 영광을 부립니다. 역설적으로,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지 못하면 선진들의 믿음이 완성될 수 없습니다.

후대가 선진의 신앙을 이어받는 것은 믿음의 씨앗을 자라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는 사역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 숙한 자들이라면 마땅히 선진들이 뿌린 믿음의 열매를 거둘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선진들을 보면서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우리에게는 귀한 하나님의 사명이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복음이 우리에게 전달되었고, 그 믿음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면 얼마나 가치 있는 삶이었는지 증거 합니다. 믿음으로 온전하게 살아가며 승리하시길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연약한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을 믿음으로 살아갈 때, 능력 있는 사람으로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믿음 생활 때문에 무시당하고 핍박당할 때, 예수님께서 지셨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적인 판단으로 비교하지 않고 믿음의 눈으로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떠한 고난과 어려움도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믿음으로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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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11-03)


믿음으로 살아가는 인생-모세

 

히브리서 11장 17-31절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은 비젼너리(visionary)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전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통찰력을 말합니다. 보이는 작은 씨앗 하나에서 감추어진 많은 열매를 보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에 고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본문은 우리 모두를 믿음으로 살길 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나갈 때, 하나님께서 승리케 하십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의 부모, 모세 등은 믿음으로 행한 사람들입니다. 유월적 의식을 제정한 것과 홍해를 건넌 것, 여리고를 돈 것, 기생 라합이 정탐꾼을 영접한 것 등도 모두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며 나갔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순종했을 때 모두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시험을 이긴 아브라함(17-19)

속담에 ‘몸에 좋은 약이 입에는 쓰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험은 힘들지만 그것을 극복한 후에 주어지는 열매는 영광스럽습니다.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 겸손한 성도들에게 이 모든 것을 더해 주실 것입니다.

17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17-19)

계속해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 대해 소개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일컬음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그 시험은 누구도 스스로의 힘으로 통과할 수 없는 시험이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이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그 시험은 바로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시험이었습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가 말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가지고 기도하길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뜻과 하나님의 뜻을 일치시켜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믿음으로’ 인간의 생각은 접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시험을 통과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이삭을 드렸습니다. 그가 이 시험을 통과할 수 있던 것은 이삭을 통하여 후손을 번성케 해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믿었기 때문입니다.

약속을 믿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약속하신 것들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19)라고 소개합니다. 아브라함은 부활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독자 이삭을 바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지 모르지만, 이삭을 통해 약속하신 약속을 이루실 줄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창세기 15장에서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습니다.

4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5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세기 15:4-5)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이루실 것을 믿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능히 이삭을 죽은 자 다운데서 다시 살리실 것이며, 별과 같이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미음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우리에게 이어지고, 아브라함을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전수받은 후손(20-23)

빛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영역을 나타내고, 어둠은 하나님을 반역하고 거부하는 영역을 나타냅니다. 빛의 영역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고 하나님이 온전히 주인이신 영역입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은 어둠의 영역인 세상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가져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 백성은 빛 가운데 있는 사람들입니다.

20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21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22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23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20-23)

이 단락은 전개가 매우 빠릅니다. 앞서 9절에서 ‘동일한 약속의 상속자들’이라고 언급했던 이삭, 야곱, 요셉의 믿음을 간략하게 차례대로 소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비전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응답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의 이삭에게 전수됩니다. 이후 후손들인 야곱과 요셉 모두 어려운 시절을 보냈지만, 죽는 순간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1) 이삭의 믿음(20)

아브라함의 믿음을 전수 받은 이삭은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을 닮았습니다. ‘장차 있을 일’ 곧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일과 관련해 야곱과 에서를 믿음으로 축복했습니다(창세기 27:27-29; 39-40). 부모로서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을 바꾸어서 축복하는 일은 부모로서 대단한 갈등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습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장차 이루실 모습을 보고 축복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을 따라 축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만난 사람이나 자녀들을 볼 때, 지금 현재의 모습으로 판단이나 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장차 앞으로 이루어질 일을 보고 축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시고 제자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외모적으로 어부였고, 내적으로는 주변 환경에 대해 이리저리 흔들이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반석이다’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가능성을 보고 축복하신 것입니다. 믿음으로 ‘너는 굳건한 사람이다’,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바로 그러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당신도 믿음으로 축복하시길 바랍니다. 믿음의 언어를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당신이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2) 야곱의 믿음(21)

야곱은 아버지 이삭이 한 것과 같은 일을 했습니다. 야곱도 늙어서 기력이 다해갈 때, 잘 알지도 못했던 손자들에게 축복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야곱은 자손들에게 줄 것이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손자들에게 축복을 주었습니다. 자신을 돌보아 주셨던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손자들을 돌봐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야곱은 죽어가면서도 지팡이에 의지하여 하나님을 경배하였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통제력을 잃어가고 기력이 다해갈 때, 어떻게 모든 것이 잘 될 것을 믿고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었겠습니까? 죽어가면서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믿음은 평생 동안 행해 왔던 기도를 통해서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일치시키는데서 옵니다.

(3) 요셉의 믿음(22)

조상의 믿음을 이어받은 요셉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가나안 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야할 목적지는 가나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죽은 후 영원히 애굽 땅에 묻혀있지 않도록 하며 자기 뼈를 가지고 가나안으로 옮겨가서 묻으라고 요구합니다.

요셉은 믿음으로 자신의 최후에 운명이 애굽이 아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약속의 땅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출애굽과 같은 엄창난 일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은 오랫동안 기도에서 온 결과입니다.

(4) 모세 부모들의 믿음(23)

모세의 믿음은 그 부모들의 믿음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바로 왕의 명령에 대해 불순종할 수 있는 능력은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그것은 기도의 힘임에 틀림없습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믿음의 후손들을 열거합니다. 그 약속을 직접 받을 수 없다면 후손들을 통해서라도 이뤄주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들은 약속된 하나님의 축복을 후손들에게 빌어 주고 생을 마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열거하신 이유는 그 믿음은 전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대를 이어서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녀들과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을 가르쳐 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하나님을 보게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복음이 모든 영혼을 살린다고 믿는다면 사람들에게 전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계속 이어져 나가고, 믿음의 가문이 이어져 나가는 축복이 있길 바랍니다.

 

모세의 믿음을 전수 받은 후대(24-29)

고난보다 그 뒤에 오는 영광이 위대한 것을 알면, 기꺼이 고난의 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주실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고 스스로 고난의 길을 선택한 이들도 있습니다. 믿음은 세상을 배반하고 하나님 나라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 선택이 당장에 위험하고 손해를 끼친다 해도 하나님의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모세가 그러한 인물이었습니다.

24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25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27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28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한 것이며 29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24-29)

믿음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기 때문에 어떤 고난과 역경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제 고난을 이긴 사람 모세가 등장합니다. 모세는 바로 공주의 아들로 애굽 궁에서 편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믿음으로 공주의 아들임을 포기했습니다. 어디서 세상의 유혹을 이길 능력이 나왔겠습니까? 그것은 일생 동안 하나님께 기도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1) 바로 공주의 아들로 불리기를 거절함(24-26)

모세 역시 족장들과 마찬가지로 ‘당장 눈앞에 있는 것’을 따르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보입니다. 다만 족장들에게는 그것이 ‘미래’였다면, 모세에게는 ‘이상’이었습니다. 모세가 ‘장성한 후’(24), 이스라엘 동족을 학대하는 애굽 사람을 쳐 죽인 일로 시작합니다. 출애굽기 2:10에 의하면 물에서 건진 아기 모세는 바로의 딸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장성하면서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벗을 때가 왔음을 알았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사람을 자기 형제로 인식하였습니다. 자기 형제를 압제하는 애굽 사람에게 반감을 표출한 것은 그에게 새로운 정체성이 확고했다는 반증입니다. 스데반도 모세가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난’(사도행전 7:23) 때를 나이 40세가 되었다고 서술합니다.

모세의 이러한 행동은 어떤 말보다 크고 분명하게 그의 자의식을 나타내주었습니다. 애굽 왕자의 칭호를 거절함으로써 모세는 안락한 성장 배경과 성공의 자원(‘죄악의 낙’과 ‘애굽의 모든 보화’)을 포기했습니다. 단지 주어진 기회와 자원을 버리는 데 그치지 않고 고난의 상황 속으로 적극적으로 들어갔습니다.

믿음의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은 때로 평범한 보통 사람의 삶마저 포기하고 더 아래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받는 고난’과 ‘그리스도의 수모'가 구체적으로 모세의 생애 동안 어떻게 나타났는지 구체적으로 알 길은 없지만, 애굽의 왕자에서 미디안의 목자로의 신분 변화만으로도 엄청난 하락이었음은 틀림없습니다.

모세는 넓은 길을 두고 좁은 문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신실한 공동체와 함께 받는 고난, ‘그리스도가 받으신 고난’에 동참하기를 더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고난이 끝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반드시 ‘상 주실 것’(11:6)을 믿었고 바라보았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단어 ‘상 주실 것’은 히브리서 2:2에서 하나님의 법을 어긴 행동에 대한 응징(膺懲)을 뜻했고, 10:35에서는 조만간 다시 오실 그리스도께서 인내하는 성도에게 갚아주실 보상을 의미했습니다.

(2) 왕의 분노를 두려워 않고 애굽을 떠남(27)

이 서술이 미디안으로의 탈출을 의미하는지 출애굽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다소 혼동의 여지가 있고 주석가들 사이에도 견해가 갈립니다. 지금까지 설교자가 구약성경에 나오는 순서에 따라 기술해왔기 때문에 이 부분도 바로 앞 사건에 이어지는 상황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고, 뒤에 나오는 유월절 사건이 출애굽보다 앞서므로 출애굽보다는 미디안으로의 탈출에 관한 서술로 보는 게 좋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분을 보는 것처럼 하여 견딘’ 사건은 일차적으로 떨기나무에서의 신현(神現) 사건을 지칭합니다(출애굽기 3:6). 이후 광야 여정에서 몇 차례 하나님의 나타나심에 가까이 있었던 경험도 포괄할 수 있습니다(출애굽기 33:11; 민수기 12:7-8).

모세가 이렇게 결단한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27)라고 소개합니다. 애굽에서 누릴 수 있었던 모든 부귀와 영광을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애굽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신분보다 고난 받더라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신분이 더 크고 영광스러움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3) 유월절을 제정함(28)

모세가 발휘한 믿음의 세 번째 행동은 유월절의 제정이었습니다. 어린 양의 피를 문에 바르라는 명령은 대체 왜 이런 것을 하라고 하나 싶은 명령입니다. 이 행동의 본질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순종이며 의탁이었고 그 결과는 생명이었습니다.

애굽의 모든 ‘처음 난 것들’이 (맏아들과 맏배) 죽던 그 밤에 이스라엘 자손들만이 피 뿌림을 통해 살 수 있었습니다. 모세 시대 생존했던 맏아들들과 맏배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고 오는 세대들이 선하신 하나님과 그분을 믿은 조상들의 믿음을 잊지 않도록, 매년 1회 실행할 제의로서 유월절을 지정했습니다. 전통을 정립한 행위도 믿음으로부터 났다고 저자는 가르칩니다.

잠자는 교회는 사단은 건드리지 않습니다. 사단은 더 깊이 푹 자라고 자장가를 불러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면 사단은 시기하고 질투하고 그리고 공격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며, 하나님의 뜻이 이 땅위에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행진을 가로막고자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은 그러한 방해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찬양하며 전진하며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영적 전투에서 사단은 패하고 절망할 것입니다.

 

출애굽 공동체의 사례(29-31)

믿음의 삶이 어리석게도 보입니다. 믿음으로 이스라엘은 마른 땅을 지나듯 홍해를 건넜습니다. 행동하는 믿음은 고단한 삶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부귀도 하나님 나라에서 누릴 영화와 비교할 바 못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여호수아는 믿음으로 승리의 길을 갑니다. 그는 말씀을 따라 순종함으로 철옹성 여리고를 무너뜨렸습니다.

29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30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31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29-31)

믿는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로 가득 차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애굽을 떠나 바로의 노함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석을 정했습니다.

(1) 홍해를 육지같이 건넘(29)

29-30절에서 서술하는 두 가지 믿음 사건의 주체는 특정인이 아니라 ‘그들’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라는 걸출한 지도자들의 영도력이 작용했지만, 그 두 개인이 행동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 있었습니다. 때로 공동체가 한 마음 한 뜻으로 하나의 행동을 함으로써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첫 유월절 밤 맏아들과 맏배들의 생명이 위험했듯이 홍해 도하(渡河) 사건에서 민족의 생사는 다시 한 번 갈림길에 섰습니다. 유월절 때처럼 이번에도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 선하심에 대한 철저한 신뢰만이 살길이었습니다. 물에 삼켜진 애굽인들의 예에서 보듯이 믿음의 행동은 무작정 한 번 해보는 무모함의 표현이 아닙니다. 다른 이들이 행한대로 따라한다고 해서 같은 성공을 이룰 수 없습니다. 믿음은 거룩한 상상력을 요구하며, 성도들은 변화무쌍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여리고를 칠 일간 돌아서 무너뜨림(30)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분을 찾는 이에게 상 주시는 분임을 믿으면서 여리고 둘레를 돌았습니다. 하나님은 단 하루, 한 바퀴의 행진만으로도 충분히 성벽을 무너뜨릴 수 있었습니다. 아니, 사실 행진하는 것과 하나님의 능력 사이에는 아무런 물리적 상관관계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명령받은 대로 칠 일간 행진했습니다. 칠 일 밤낮 그들은 자기 자신들과 싸웠을 것입니다. 피 흘리는 전투 없이 승리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종종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피땀과 노력의 대가를 우리 스스로 지불하고 싶어 합니다. 믿음의 순종은 때로 너무 쉬워서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묵묵히 참으면서 하루에 맡겨진 사소해 보이는 일을 수행함으로써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고 이렇게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었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3) 라합의 사례(31)

라합의 경우 노아처럼 ‘지금 보이지 않는 일들’에 대한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 경고를 믿었기 때문에 ‘지금 보이는 일들’ 앞에서 지극히 위험한 행동을 감행할 수 있었습니다. 여리고 성의 ‘불순종한 자들’이 멸망한 반면, 라합은 순종으로 빛을 발했습니다. 창녀라는 과거의 출신과 지위가 믿음의 효력을 막지 못했습니다.

기생 라합도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위험에 빠질 수도 있는 행동을 선택했습니다. 미래에 하나님의 약속이 가져다줄 축복과 영광을 바라보는 자들은 현실의 유익만을 위해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은 바로 믿음의 사람의 삶의 모습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 믿음은 과거의 나를 규정하는 현재의 세계를 두려워하지 않고 미래의 세계에 기준을 두고 현제의 나를 규정하는 것입니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과 사귀는 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영광 받으시고, 우리 역시 존귀한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당신에게 닥친 고난으로 인해 절망하지 않도록 힘을 주시고 후에 얻게 될 상급을 생각해야 합니다. 스스로 고난을 택한 신앙의 선배들을 보며 주님의 나라를 위한 시련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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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11-02)


믿음으로 살아가는 인생-아브라함

히브리서 11장 8-16절


그리스도인의 삶에 믿음은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믿음은 낙담 중에 있을 때, 다시 소망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이고, 때로는 세계를 향해 도전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믿음은 불가능하게 보이는 현실을 순종하게 만들고, 아직도 일어나지 않는 사건에 대해서 새로운 꿈과 비전을 가지고 마치 이루어진 것처럼 행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성경을 통해 계속 믿음의 위대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 믿음의 여정을 따르면서 우리의 믿음도 성큼 자라날 것입니다.

 

본문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 대해 소개합니다.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그의 아내 사라 역시, 믿음으로 죽음 것 같은 몸에서 잉태하는 능력을 얻었습니다. 그랬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라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해 한 성을 예비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사례(8-12)

믿음은 연약한 인생을 위대한 삶으로 이끄는 원동력이 됩니다. 노아는 인류 구원의 도구가 되었고, 노쇠한 아브라함은 모래와 같은 많은 후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그릇은 육체의 힘이나 재력이나 지식의 양으로 가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다면 약한 자도 강한 자가 되고, 비천한 자도 위대한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8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11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12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8-12)

성경에서 강조하는 믿음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념과는 다릅니다. 앞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1)이라고 선언했는데,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누군가가 ‘믿음은 익숙한 것과 결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은 때로 우리들이 편안하게 안주할 상황을 박차고 일어나 새로운 세계로 인도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노아에 이어, 이제 유대교와 초대교회에서 이상적 인물로 인정되어 온 아브라함의 믿음을 모본으로 제시합니다.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 독자들이 ‘장차 올 세상’을 기대해야 한다는 것과 그들의 경험을 순례의 한 과정 속에서 어떻게 다루어 나아가야할 것인가에 대한 교훈을 제시합니다.

(1) 부르심에 순종하여 떠남(8)

믿음은 때로 안주할만한 상황을 박차고 일어나서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 세계는 한 번도 가보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두렵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행보에 본을 보인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노아처럼 아브라함도 ‘아직 보이지 않는 일들’을 삶을 지표로 삼았고 떠납니다(8).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 순종하여’ 자신의 터전인 하란을 직각적으로 순종합니다(창세기 12:1-4). 그 떠남은 ‘상속받은 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한 채 떠났던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알아야 했던 모든 것은 땅의 위치가 아니라, 오직 그 땅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선하심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위대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지시한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을 때, 어느 땅인지 전혀 정보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명령하시니깐 장차 받을 땅을 향해 나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순종하며 그 땅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2) 타국에 거류함(9-10)

아브라함의 믿음의 핵심은 순종이었습니다. 그래서 믿음과 순종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다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집을 떠난 사람이라면 어느 곳에 안착하길 원하면서 장막을 치는 건 상식적인 행동입니다. 저자가 부각하고 싶은 점은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에 도착해서도 계속적으로 장막에서 살았다는 점입니다(9b). 아들 이삭, 손자 야곱까지 함께 그렇게 했다면 여기에는 뭔가 심상치 않은 뜻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백 세에 얻은 아들 이삭은 육십 세에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을 얻었습니다(창세기 25:26). 창세기 25:7-9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향년이 175세였으므로 3대가 함께 살았을 기간은 적어도 15년입니다.

아브라함은 본래 유목민도 아닙니다. 그가 자손들까지 거느린 마당에 빨리 정착해서 자기 집을 짓고 안정을 추구하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저자는 아브라함은 ‘마치 외국에서 살듯이 그 땅에 얹혀살았다.’고 소개합니다. 어쩔 수 없는 환경 때문이 장막에서 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기대한 기업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정착하지 않고 유랑 생활을 했던 것은 믿음으로 살기 위한 결단이었고 실천이었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세운 장막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께서 ‘건축자와 창건자’이신 성는 영원하고 안정적인 것입니다. 저자는 이러한 성을 ‘하늘 본향’(13-16),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시’(12:22), ‘하늘 예수살렘’(12:22), ‘흔들리지 않는 나라’(12:28), ‘장차 올 영원한 도시’ 등으로 표현해 확인해 줍니다. 아브라함이 장막 생활을 했던 가나안 땅은 고대했던 진정한 기업이 아닙니다. 그가 진정 원하는 기업은 ‘견고한 기초가 있는 도시’였습니다. 성은 아직 보이지 않지만, 기대 때문에 현재 고난, 상실이나 실패를 자처하는 용기가 신앙입니다.

(3) 많은 후손을 낳음(11-12)

가나안 땅을 차지했어도 그것으로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긍극적으로 성취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자는 ‘땅-도시’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하고, 이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후손에 대한 논의를 전개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초래된 세 번째 결과를 소개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출산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생식 능력의 회복으로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의 미쁘심이 아브라함의 믿음(신실함)으로 전이 되었습니다. ‘죽은 자와 같았던’ 사람에게서 셀 수 없이 많은 후손들이 태어났습니다. 부활을 체험한 것입니다.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믿음의 모본에 ‘사라’라는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실하게 믿었던 것입니다. 비현실적인 상황 아브라함 100세, 사라 90세인 늙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니 ‘죽은 자와 같았던’ 상황에서 아들 이삭을 낳았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랐던 것은 아들을 주시겠다던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그 약속이 실현되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후손을 얻는 것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 약속은 보이지 않았지만,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끝까지 믿었고, 그 믿음으로 죽은 자와 같았던 태를 통해 이삭을 주였습니다. 불가능한 일이 그의 믿음으로 인해 현실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리스도인들만 믿음의 조상이 아니라 유대교도 이슬람교도 자신들의 조상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영적인 비중이 큰 만큼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11절에 걸쳐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중요하게 취급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보이지 않지만, 믿음으로 받기 시작할 때, 보이는 세계도 새롭게 열려지기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대단한 것은 믿음이 생각으로 끝나지 않고, 행동으로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현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살아감으로 실제화 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믿는다면 믿음의 표현을 순종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아브라함 가족의 믿음의 특징(13-16)

하나님의 백성들의 역사는 믿음의 역사입니다. 기라서 같은 신앙의 선조들은 한결같이 믿음을 품고 실천한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처한 상황에 따라 믿음의 곁은 조금씩 달랐지만, 삶의 중심에 주를 행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믿음 있기를 소망합니다.

13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13-16)

아브라함과 사라를 소개한 다음에, 다음 선진들을 소개하기 전에 믿음으로 사는 삶의 원리를 제시합니다. 그 다음에 이삭과 야곱, 요셉을 비롯한 선진들을 소개합니다. 13절에 ‘이 모든 사람들’은 4-12절에서 서술했던 네 사람(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을 지칭합니다. 아브라함을 포함해서 선진들을 통해 믿음의 특징을 몇 가지 볼 수 있었습니다.

(1)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믿음(13a)

믿음의 선진들의 특징은 일평생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허락해 주신 약속에 대해 흔들림 없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따라 죽었다.’ 다시 말해서, 죽는 순간까지 삶 전체가 믿음의 원칙을 따라 일편단심 하나님을 바라보면 살았습니다. 사는 동안 이룩한 성과나 성공이 그들의 믿음을 측정하지 못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의 인생이 별 볼 일 없었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약속된 것을 완전하고 가시적인 형태로 받지 못한 채(‘약속을 받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이삭과 야곱을 품에 안았지만, 모래와 같이, 별과 같이 셀 수 없이 많은 자손은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리고 땅의 약속에 관해서 그는 얻은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그에게 초능력에 가까운 놀라운 시력을 주었습니다. 땅에 있으면서 천상의 세계를 내다볼 수 있는 영적 차원의 시력이었습니다. 그는 약속의 성취를 보았고 멀리서나마 손을 흔들며 기쁘게 인사했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실현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히 믿었습니다. 그 말씀을 순종했습니다.

(2) 나그네처럼 사는 삶(13b-14)

신실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외국인과 나그네’라고 고백했습니다. 창세기 23:4에서 사라의 매장지를 구매하면서 아브라함이 자신을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라고 묘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저자는 이미 8-9절에서 아브라함의 본향 탈출과 거류민적 정체성을 설명했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보통 사람들처럼 한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사회적, 경제적 기득권을 확보하거나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땅에서 누릴 수 있는 권리와 이익을 주장하지 않는 그들의 삶 자체가 증언이었고 웅변이었습니다. 이곳이 본향이 아님을, 다른 한 본향을 추구하고 이씀을 그들은 말이 아니라 삶으로 표현했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족은 나그네처럼 살아갔습니다. 삶을 안주(安住)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은 우리들이 영원한 살고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지탱해준 것은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이 장막생활이며, 나그네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장래에 더 나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실재로 그들이 사모하고 찾아 나선 땅은 가나안이었지만, 히브리서 기자는 그 가나안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도성, 즉 하늘에 있는 도성으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12절에서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졌다고 말하지만, 곧이어 13절에서는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지 못했고 단지 멀리서 그것이 성취될 것을 바라보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곳의 생활은 아침 안개와 같이 이 땅에 왔다갑니다. 우리들이 너무 많은 것을 가지면 나그네로서 거추장스럽습니다. 이 땅에 너무 애착을 가지고 안주하려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단순한 삶(simple life)’이 중요합니다. 재산의 많고 적음을 의미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단순해야 합니다.

(3) 더 나은 본향을 소망(15-16)

믿음은 결국 소망의 다른 이름입니다. 나온 본향 대신 들어갈 본향, 즉 하늘 본향을 추구하는 분명한 목표 의식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수단 삶아, 신앙을 발판 삼아 성공과 안정을 추구하려고 시도한다면 결국 믿음을 배반하는 꼴입니다. 세속적, 물질적 가치의 총화가 ‘나온 바 본향’인데,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그리로 회귀할 기회는 열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오직 한 곳, ‘더 나은 본향 ’을 향해서 눈을 고정하고 손을 뻗어 거기에 다다르려고 했습니다.

소망을 신실하게 붙잡은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선 준비하신 ‘한 성’(16,10)은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에게 약속한 그 ‘처소’이고(요한복음 14:2)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히브리서 12:22-23).

 


믿음의 선진들이 고난과 핍박 중에도 흔들리지 않은 이유는 이 세상에만 소망을 집중하지 안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도 다양한 유혹을 만납니다. 그 유혹은 세상에 안주하는 삶,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마음 그리고 세상 것에 대한 욕심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이 당신의 믿음의 발목을 잡습니다. 그 유혹을 떨칠 수 있는 갓은 더 나은 천성을 바라보며 하나님 나라의 소원을 좇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들은 나그네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나그네는 돌아갈 고향이 있습니다. 영원한 고향인 천성을 바라보며 주님의 약속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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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11-01)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선진들

히브리서 11장 1-12절


사람들과 관계를 결정하는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서로 믿음이 없으면 모든 인간관계가 형성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도 신뢰는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때, 우리 생활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고 변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손바닥 뒤집듯이 배반하고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신뢰하고 기다려 주셨습니다. 믿음의 사람 중에 이와 같은 믿음으로 자신의 신앙 여정을 성공적으로 이끈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명단’이라고도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신실한 사람들의 행적을 기록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아는 것도 믿음 때문입니다. 아벨, 에녹, 노아는 믿음의 본을 보인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이들의 믿음에 대해 증거 하십니다.
 

믿음의 정의(1-2)

‘믿음’은 하나님께서 약속하는 것은 진실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인정한다’라는 뜻이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언약이라면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을 인정함으로 출발점이 되어집니다. ‘믿음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본문처럼 명쾌하게 대답해주는 부분이 없습니다. 믿음의 정의를 살펴보겠습니다.
1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2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1-2)
지금까지 1-10장까지 이론적인 설명이라면, 11-13장은 성도로서 걸맞은 모습에 대한 권면입니다. 거룩한 삶이 없는 기독교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 강조할 뿐,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 복종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은 선택 상황처럼 취급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거짓 복음이며 값싼 구원입니다.
믿음에 대한 설명은 간결함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를 파악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먼저 문장을 시작은 정의하는 개념을 정의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3-40절까지 ‘믿음’에 관한 상세한 논의를 전개하기에 앞서 ‘믿음’의 핵심 특성을 정의 양식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제 본문은 2절이지만, 11장에 전체의 도입부에서 ‘믿음’을 칭송하는 찬사로서, 11장 전체를 읽어나가는 데 활용될 기본 틈을 제공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1절은 통해 앞서 10:38에서 인용된 하박국 2:4를 인용하면서, 곧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는 선언이 실체 삶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를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1a)
구원의 미래 완성에 참여하기 위해 믿음의 인내를 권면한 히브리서 기자는 구원의 여러 경우를 모본으로 제시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확증입니다(1).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기 때문에 정의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믿음에 대해 말하기를 ‘믿음의 소망을 이루는 것이다’라고 정의합니다. ‘바라는 것들이 있는데 그것이 실체가 되게 하는 것이 능력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아직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도, 손에 잡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이 믿음 안에서는 실상이 됩니다. 그것이 보이지 않지만, 믿음 안에서는 증거가 됩니다. 그것이 믿음의 특징이요 그것이 믿음을 가능하게 하는 설명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언제나 소망과 함께 동행합니다. 믿음은 소망을 통해서 구체화 됩니다. 소망은 믿음이 있을 때 그것이 실현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소망이 없는 믿음은 공하한 것이 됩니다. 사람의 야망과 꿈으로 그치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믿음은 소망으로부터 시작되고 그 소망이 믿음을 통해서 믿음을 만날 때, 온전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은 보이지 않는 세계와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그분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습니다. 어떤 부정적인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증명할 수 없다고 주장 합니다. 그러나 만약 증명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연구의 대상이 되실 뿐이지 믿음의 대상이 되실 수 없습니다.
본문은 믿음의 특징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을 서취시킵니다. 여기서 ‘바라는 것’이란 우리의 막연한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축복을 말합니다. 둘째,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증거는 우리가 그것을 믿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보다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왜 믿음이 기적을 일으킵니까? 그것은 우리의 상상 속에 있던 것들이 현실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선배들도 우리와 성정이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자주 쉽게 넘어지고 환경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은 언제나 영적 거인이여서 조금에 흔들림도 없고, 어떤 시험 앞에서도 굳건히 서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들도 어려움을 만나면 휘청거렸을 것입니다. 낙담하고 실망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는 ‘믿음’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증거를 맛보았습니다.
성경은 그곳을 기록했고, 오늘 우리는 그 말씀 앞에 서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현실들이 비록 들어나 있지 않고, 원하는 대로 되어 있지 않다할지라도 실망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믿음의 선진들 가운데는 일하는 그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믿음의 원리는 꿈꾸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믿음은 소망을 통해 구체화 된다고 그랬습니다. 소망을 가지게 되면, 장채 되어질 일들에 대해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구체적인 상상력을 가지고 그리기 시작할 때, 그것이 우리에게서 현실이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도 믿음이라는 큰 권세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주님의 꿈꾸고 소망하기만 하면 그 일들이 현실로 오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한 걸음씩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3-7)

믿음은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본문은 반복적으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관해서 언급합니다. 하나님이나 그분의 말씀이나 약속이 모두 보이지 않지만 믿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으로 축복을 누립니다.
3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4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5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7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3-7)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으로 증거를 얻었던 많은 신앙인이 나옵니다. 본문은 그분들 가운데 세 분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영적 믿음의 세 사람을 살펴보겠습니다.
(1) 창조를 믿음(3)
놀랍게도 믿음의 선진들의 대열 중 맨 앞자리는 비어 있습니다. 믿음의 출발은 천지창조 사건에서 출발합니다. 천지창조 사건은 한 개인의 ‘믿음으로’ 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셨습니다. 그것을 세상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말씀이 임할 때 무형의 세계에서 유형의 세계로 바뀌었습니다. 믿음의 기능은 말씀의 기능을 합니다. 앞에 보이지 않고 만져지는 것이 없는 무형입니다. 믿음이 가해질 때, 이 무형이 유형이 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특징입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것을 믿습니다. 이 세계의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강점입니다. 이 사실이 믿음의 능력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며 이루어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저 상상력에 산물이라 여길 수 있는 산물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취할 때, 이것들이 유형의 세계로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2) 아벨의 사례(4)
첫 번째는 아벨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벨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 기뻐하시는 예배는 제물의 종류가 아니며, 아벨의 성품이 가인보다 나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오직 믿음의 예배였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예배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입니다. 우리는 매번 하나님께 예배로 나갑니다. 이 예배들을 통해서 어떻게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겠습니까? 믿음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3) 에녹의 사례(5-6)
두 번째는 에녹입니다. 에녹은 특별한 기적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성경에서 그의 삶의 행적에서 능력을 행했거나 죽은 사람을 살렸다는 내용은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을 설명한 아주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한 자(He walked with GOD)”이란 단어입니다. 그는 대단한 기적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닌데, 그는 늘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에눅은 하나님께 드림을 받을 때 365세였습니다. 1년은 365일입니다. 이처럼 365일 주님과 동행할 때, 믿음으로 걸어갈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4) 노아의 사례(7)
세 번째 사람은 노아입니다. 노아는 이전에 한 번도 비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홍수가 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그리고 비로 세상을 멸망시킨다고 하셨습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일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예언했지만,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이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120년간 수많은 조롱과 핍박 중에도 방주를 만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노아의 믿음의 여정이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 말씀을 결론처럼 받을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6) 첫 번째는 ‘그가 계신 것과’ 살아계시고 역사하신 하나님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는 우리들에게 상주시길 기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벌주시길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상주시기를 기뻐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잘 되기를 바라시고 우리들의 수고를 다 기억하시고 우리가 행복하길 원하십니다. 우리의 작운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태산을 옮길 만큼, 우리의 믿음을 사용하고 싶어 하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 앞에 작은 믿음이지만 믿음으로 나가시길 바랍니다.


믿음의 열조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매일매일 주와 동행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예배를 드리고 믿음으로 예배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눈앞에 이해되지 않는 일이라도 믿음으로 순종하시면, 믿음으로 동행하는 성도들이 될 때, 하나님께 칭찬 받는 성도들이 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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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10-04)


믿음으로 할 수 있는 일들

히브리서 10장 32-39절


천성을 향해 나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영적 거장이라 하는 사람들도 영적 침체기는 찾아옵니다. ‘영적 슬럼프(slump)’라고 부르는 영적 침체는 아무에게도 예외는 아닙니다. 때로는 신앙이 영적 성장을 통해 엄청난 은혜와 사랑을 경험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지치고 낙담하고 영적으로 후퇴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신앙은 결코 계단처럼 한 길로 쭉 성장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주저앉아다가 다시 일어서기도 합니다. 영적 슬럼프를 겪거나 주변에 영적 침체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본문 말씀은 아름다운 교훈과 지침을 제공합니다. 말씀으로 나가 우리의 영적 회복을 원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귀기우리시길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전에도 여러 가지 힘든 상황들이 있었지만 고난을 견뎠습니다. 우리에게 인내가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입니다. 잠시 잠깐 후면 다시 오실 이가 지체하지 않고 오실 것입니다.

 

과거의 믿음을 기억(32-34)

당신은 과거에 되돌아가고 싶은 시기가 언제입니까? 누구나 가장 행복했던 시기로 돌아가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거칠고 험한 광야 길을 걷던 때를 소망해야 합니다. 성도의 삶은 끊임없는 고난으로 점철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고난의 길을 기억하며 그 길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이 없이는 영광도 없기 때문입니다.

32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33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34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32-34)

6:9에서 그랬듯 설교자는 회중을 두려워 떠는 채로 돌려보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엄중한 경고와 함께 푸근한 격려가 따라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6장과 어조가 다릅니다. 단지 칭찬이 아니라 지난 날 회중이 몸소 겪었던 고통스러운 경험을 떠올리면서 비장한 각오를 다지도록 합니다. 과거를 ‘기억하라’고 설교자는 명령합니다(32). 이 기억은 회중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적인 과거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이전 세대 선배들이 겪었던 공동체의 과거에 관한 것입니다. ‘집단적 기억’(collective memory)은 어떤 면에서 신앙공동체의 소중한 자산입니다. 모든 개인이 겪지 않았더라도 한 몸에 붙은 지체의 경험이 모든 지체에게, 오고 오는 후대에게까지 나누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자가 그리는 히브리서 회중의 기억은 사실 아프고 어둡습니다. 그들은 ‘공공연한 모욕과 환난’을 당하기도 했고 그런 형편에 처한 사람들을 돕기도 했습니다(33). ‘감옥에 갇힌 이들’과 함께 아파하기 위해 그들은 분명 영치금과 의복과 음식을 가지고 자주 방문했을 것입니다. 그런 섬김에 필요한 재정을 자발적으로 내주었고, 어떤 때는 억울하게 재산을 빼앗기는 경우도 있었습니다(34). 하지만 그때의 그 아픔은 반드시 지워질 것입니다.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을 넘치는 복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마 5:3-12; 19:29). 마지막 당부 ‘여러분은 그 확신을 내던지지 마십시오’(35)는 새로운 당부라기보다는 이제까지 여러 차례 했던 권면의 확인입니다(2:1; 3:12-14, 18; 4:2,11; 6:11-12).

 

인내하라(35-39)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분을 따라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세상과는 다른 모습으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핍박과 조롱이 있지만 두려워하지 말고 계속 인내해야 합니다. 새로운 힘을 얻어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35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36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37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38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39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35-39)

‘약속된 것’을 바라는 희망 위에서 ‘인내’라고 말하면서 설교자는 다시 한 번 종말 신앙으로 현재 신앙을 북돋웁니다(36). 하나님께서 오실 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본 모습을 규정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 결론을 확증하기 위해 설교자는 다시 한 번 성경을 읽습니다. 한 구절이 아니고 두 책에서 뽑아낸 두 구절인데, 그것을 마치 한 구절인 양 이어 붙입니다. 이사야 26:20(‘조금만 더 있으면’)과 하박국 2:3-4이 바로 그 두 구절인데, 두 구절 모두 ‘파루시아’(임재)의 임박성을 생생하게 그립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오실 것입니다. 또 우리의 예상을 뒤엎고 ‘곧’ 오실 것입니다. 확실성으로부터 임박성이 배어 나옵니다. 분명코 오실 것이기 때문에 곧 오시리라고 기대하며 두려워합니다.

그분을 맞이하는 우리의 준비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고 있습니까? 예언자 하박국은 아마 위기에 처한 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해 하나님의 묵시를 선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해서 언약 백성이 왜 바벨론과 같은 이방 민족에게 압제당해야 하는지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종말, 즉 심판의 때가 속히 임할 거라고 전제하시면서 악인과 의인을 대조하십니다. 악인은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하므로 형벌에 처해 지지만 의인은 ‘그의 믿음’, 즉 신실함과 삶의 열매로 인해서 죽지 않고 ‘살 것이다.’

히브리서 설교자는 칠십인역을 있는 그대로 따오지 않고 중요한 변화를 주었습니다. 본래 하박국 본문에서 끝에 있던 38a절 문장을 앞으로 가져오고 본래 앞에 있던 38b절 문장을 뒤로 미룸으로써 ‘믿음’의 사건, 즉 회심을 전제하고 그 후에 다가올 배교의 위험을 ‘물러남’이라는 말로 경고합니다. 믿음은 단지 ‘어떤 사실을 참이라고 인식하고 받아들임’에 그치지 않습니다. 다른 인격적 대상을 향한 참되고 정성스러운 태도, 관계, 행실을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또한 하박국의 ‘의인은 나의 믿음으로 살 것이다’를 히브리서 설교자는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고 바꾸어 말합니다. 하박국의 원 문맥에서 의인의 생명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존합니다. 히브리서 설교자는 강조점을 신자 자신의 신실하심으로 옮깁니다. 결론은 명확합니다: 생명을 얻는 신앙은 ‘뒤로 물러나지 않음’입니다(39). 누가 그런 믿음을 지녔습니까? 이제 우리는 물러남 없는 신실함을 보여준 신앙의 선배들, 조상들의 이야기로 들어갑니다.


우리 주변에 믿음의 길을 함께 왔다가 점점 믿음의 길에서 멀어지고 있는 분들은 없습니까? 그 분들 손을 붙잡고 이끌어 오시길 바랍니다. 은혜를 맛보고 떠나는 자들에게 더 무서운 경고의 말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약속을 신실히 지키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 모이기를 힘쓰고, 죄와 타협하지 않고 지금 당하는 시험을 이기도록 합시다. 다시 믿음 가운데 서서 함께 의의 나라를 경험하고 주님이 예비하신 풍성한 축복을 함께 누리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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