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09-03)
완전한 제사를 성취하신 예수님
히브리서 9장 23-28절
전남 담양에 가면, ‘죽녹원’이라는 대나무 테마파크가 있습니다. 그 옆에는 ‘가사문화마을’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곳에는 담양 지역에 있는 가사문학권의 정자들을 한 곳에 모아서 잘 지어 놓았습니다. 한 곳에서 다양한 정자들을 볼 수 있어 좋지만, 아쉬운 것은 진본이 아니라 본을 떠서 만든 모형(model)이라는 것입니다. 실물 정자가 있는 곳에 가야만 정자들과 어우러진 남도의 정원과 주변 풍광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옛 언약을 통해 죄 용서함의 모형인 성전과 제사를 주셨습니다. 그 제사를 통해 죄 용서함을 받았지만, 모형인 까닭에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부족한 것을 완전하게 이루셨습니다.
지상 성소에서의 제의 호라동과 천상 성소에서 자신을 제물로 바친 그리스도의 제의 활동을 병행하고 대비하면서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증명합니다. 옛 언약은 모형인 성소에서 짐승의 피로 여러 번 하나님께 나가야 했지만, 하늘에 있는 성소에서 단 한 번으로 모든 죄를 해결하셨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죄를 완전하게, 영원히 없이 하셨습니다.
대비1 : 실체와 그림자의 비교(23)
‘모형(model)’은 실체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의미가 있었습니다. 견본 주택은 집을 살 사람들에게 미리 보이기 위하여 실제 내부와 똑같게 지어 놓은 집입니다. 건축은 된 후에는 모형은 불필요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그림자 역시 참된 것이 보이기 전에는 유익하나, 참된 것이 나타나면 쓸모없게 됩니다.
23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하게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23)
저자는 직전에서 예수님께서 영원하고 온전한 대제사장으로 오셨다는 것을 소개받았습니다. 이것을 통해 지상에서 드리는 제사는 얼마나 제한적이지 말씀하셨습니다. 이 제사는 흠이 있는 제사가 아니라 한계가 있는 인간들이 드린 제사였습니다. 실체가 오기 전에 실체를 소개하는 그림자 역할을 하는 제사였기 때문에, 실체가 오면 사라지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지상에서 드리는 제사’와 ‘하늘에서 드리는 제사’를 대조하면서, 지상 성소에서 드린 제의 활동과 천상에서 드린 그리스도 제의 활동을 대비시키면서 예수님의 제사가 어떤 점에서 우월한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차이는 지상의 제사는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제사하였지만,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 제사를 드리셨고, 그것으로 모든 사람의 죄를 완전하게 영원히 없게 하셨다는 것이 다릅니다.
지상의 성소에서 짐승의 피를 언약 책과 백성들에게 뿌림으로써, 언약의 확실성을 보증하고 언약 당사자들의 책임을 확증하였습니다. 또 제의적으로 정결케 하기 위해서 각종 기구들에게도 피를 뿌렸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들로는 ‘하늘에 있는 것들’을 정결케 할 수 없습니다. ‘더 좋은 제물’ 즉 그리스도의 피로써만 정결케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하늘에 있는 것들’은, 앞 단락을 염두에 두면, 장막에 배치된 기구들입니다. 저자는 그것들을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습니다. 물건들 하나하나보다 ‘지상-천상’의 대비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에 있는 것들’이 부정하게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하게 될 필요가 있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 드리기 위한 제물을 준비하기 위한 의미로 봐야 합니다. 하늘의 장막에도 지상의 것과 같은 기구들이 있다거나, 그 기구들이 어떤 이유로 정화가 필요한 상태에 있다거나, 그리스도의 피가 그것들에 뿌려져서 정결케 된다는 서술은 히브리서 외 성경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신비스러운 내용입니다. 아마,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필요 이상의 세부적 묘사 대신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력과 가치가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를 지상의 제사와 비교하여 인식하라는 권면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는 모형과 그림자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성소를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제사를 통해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 그리고 용서의 길을 얻게 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참된 것이 올 때까지 한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임시방편의 길이었습니다. 제사를 통해 천국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구약에 따르면 제사장은 매년 제물을 바쳐야만 했습니다. 죄를 씻기 위해서는 정기적으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그런 의식에 매여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궁극적인 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천국의 모형이었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완전한 성취가 된 십자가의 은혜가 임할 때까지 계속적으로 반복되었고,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 앞으로 임시로 길을 열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제사를 드리게 되자 율법의 제사는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구약의 제사는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구원의 복음을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은 마음에 새겨진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사는 것입니다. 매일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고 있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제는 과거의 옛 죄악의 습성을 버리고 주님과 동행하는 빛된 삶을 살아가길 바랍니다.
대비2 : 장소에 대한 비교(24)
인간 대제사장들은 반복적으로 제물을 드려서 자신과 백성을 정결케 해야 했습니다. 손으로 만든 지성소로 들어가기 위해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지성소를 통하지 않고는 곧바로 자기의 피로 하늘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 우리의 제사장으로서 중보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장소에 대해 비교합니다.
24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24)
두 번째 대비는 장소의 대비입니다. 매년 속죄일에 한 번 대제사장이 백성의 죄를 사함 받기 위해서 지상 장막의 성소로 들어갔습니다. 이 세상의 성소는 ‘참 것의 그림자’인데, 여기서 ‘그림자’는 ‘모형’, ‘복사물’을 의미합니다. 성전의 지성소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으로서 그분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지상의 대제사장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짐승의 피를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희생 제물로써 죗값을 치렀음을 상징했습니다. 하지만, 지상의 지성소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참된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짐승의 피가 아니라 자신의 피로 하늘 지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지상의 성전은 하늘 성전의 모형일 뿐입니다.
이렇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들어가신 곳은 완전하지 않은 지상의 성막 아니라, 하늘의 성소 ‘바로 그 하늘’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면전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거기서 어떤 말과 행동을 했는지, 그 세부 사항은 기록하지 않지만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공의로운 면전에 설 수 없습니다. 우리를 변호하고 간구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께서 서셨습니다.
이런 의미는 지상의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말씀드렸지만, 대제사장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성소에서 하신 일들이 더 우월하다는 것을 피력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모든 죄에 대해서 중보하심으로 대속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모든 죄악의 빚을 갚아 주셨습니다.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를 변호하는 중보자로 서신 것입니다.
대비3 : 제사 횟수에 대한 비교(25-26)
예수 그리스도는 모형이나 그림자가 아니라 실체입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로 서 계셨습니다. 마치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선교할 때에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본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저자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와 대제사장을 대비해 봅니다.
25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찌니 26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25-26)
세 번째, 지상의 대제사장과 천성의 대제사장과 대비가 되는 것은 출입하는 횟수에 대한 것입니다. 위 두 번째 대비에서처럼 속죄일 제의의 상황이 전제됩니다. 대제사장은 매년 일 년에 한 번씩 반복해서 지성소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지성소에 들어갈 때는 짐승의 피를 들고 가야 했습니다. 그 피는 다른 짐승의 피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처럼 ‘자주’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은 일이 없이 ‘세상 끝에’ 단 한 번 나타나셨습니다. 이 두 시간 표현은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의 단회성을 묘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이 두 표현을 통해서 처음과 끝, 태초와 종말이 상응하는 구조가 나타납니다. 저자는 이미 1:10에서 시편 102:25-27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가 태초부터 계시고, 더 나아가 천지창조에 참여하셨다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음과 부활이 ‘세상 끝에’ 일어났다는 인식은 ‘이 모든 날 마지막에’(1:2)에서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이 존재하기 전부터 계셨지만, ‘세상 끝에’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그 나타나심을 가리켜 ‘종말’이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누차 언급했었습니다. 이곳에서 ‘종말’이란 하나님의 시간표상으로 마지막이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있어서 절정에 이르렀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과 후에 모든 구원 역사에 클라이맥스 시간이 도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무르익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체의 시간이 왔으니 그림자의 시간은 사라져야 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언약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율법 시대가 끝나고 은혜의 시대가 된 것입니다. 이제는 전처럼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반복되는 종교적인 제사나 행위로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구원은 하늘로부터 주신 전적인 은혜의 산물입니다. 스스로 개척해서 만들어낸 구원의 길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 전적인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대비 4 : 구원의 길(27-28)
사람들은 싫어하는 것은 애써 부인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것입니다. 사랑과 자비가 많으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끔찍한 지옥의 심판을 하실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심판이라는 주제는 하나님의 성품과 절대 어울리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본문은 인간의 죽음이 확실한 것처럼 심판도 확실하다고 말합니다. 이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27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28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27-28)
저자는 앞에 제시한 그리스도 희생의 단회성을 부연하고 보충하려고 합니다. 누구나 관찰하는 일반적 원리에 근거해서(27)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의 유일회성을 역설합니다(28).
(1) 일반적인 원리에 근거(27)
이 구절은 흔히 문맥과 상관없이 분리해서 암송하는데, ‘죄의 형벌’이라는 제목이 붙여서 제시됩니다. 그렇게 해서 얻는 유익이 있지만 성경해석의 측면에서는 중요한 것을 놓치기 십상입니다. 그 제목이 붙을 수 있는 근거는 아마 사후 심판의 확실성을 말하는 하반절일 것입니다.
죽은 이후 세상 혹은 상태에 대해서 경험적으로, 과학적으로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현대인에게 사후 세계는 불확실 그 자체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생애가 육체적 생명만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말하며 예사의 종말에 죽었던 모든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그 결과에 따라 영원한 지복 혹은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런 가르침과 조화를 이룹니다. 이 구절을 암송함으로써 기독교의 심판 교리를 각인할 수 있는 유익이 있습니다.
하지만 얻는 부분과 함께 놓치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것은 히브리서 저자가 이 구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중심 메시지입니다. 심판이나 죄의 형벌을 염두에 두고 이 구절만 떼어서 암송함으로써 사람이 한 번 죽듯이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죽으셨다는 이 단락의 대지를 놓치게 됩니다.
의미의 중심이 하반절의 ‘심판’이 아니라 상반절에 ‘한 번 죽음’에 놓여 있고, 그것이 히브리서의 신학적 주제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입니다. 또한 27절은 그 문장 자체만으로 완결된 의미 전달을 할 수 없도록 서술되었습니다. 27절을 이끄는 접속사 ‘카토손’이 28절 첫머리의 부사 ‘후토스’와 갈고리처럼 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27절은 28절을 말하기 위한 전제 혹은 조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27절만 떼어서 암송하면서 그것 자체의 의미, 그것도 하반절의 의미에만 집중하게 되면 이런 종합적인 내용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27절에 특별한 설명을 덧붙이지 않을 정도로 인간의 필멸성은 아무도 반박할 수 없는 인간의 본질입니다. 또 굳이 인간이 ‘한 번’ 죽는다고 말함으로써 28절에서 그리스도의 유일회적 죽으심을 말하기 위한 논리적 준비를 합니다. 반면, 하반 절에 심판을 언급하지만, 그 구체적 내용은 불명확한 채로 남습니다. 27절만 놓고 보면 마치 육체적 죽음 직후 영원한 심판이 내려지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이 부분 역시 27절과 긴밀한 대구 관계에 있는 28절을 통해서 어느 정도 밝혀질 수 있습니다.
만약 세상에 법도 없고 심판도 없다면 악한 사람들을 좋아하겠지만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그곳이 지옥과 같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최후의 심판자이십니다. 그러나 심판의 날은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날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 심판의 때에 우리를 변호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다시 오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행해 두 가지의 섭리를 집행하고 계십니다. 첫 번째는 ‘모든 사람은 한 번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한 자나 가난한 자, 건강한 자나 약한 자나 누구나 동일하게 맞이하는 필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은 언젠가는 죽음을 마주해야 합니다. 죽음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죽음 이후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이 당해야 하는 현실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보고 겪어야 할 일입니다. 그 심판은 하나님의 의로 인정받은 사람에게는 영생의 은혜가 임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는 영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원을 가름하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2)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의 유일회성(28)
우선 28절 상반절에서 저자는 두 동사 ‘(그리스도가) 드려지다’와 ‘(죄를) 담당하다’를 사용해서 예수님의 죽음의 사실과 그 결과를 기술합니다. 28절 하반절에서는 그리스도의 ‘두 번째 보여짐’의 목적이 성도들의 구원이라고 밝혀집니다. 이러한 내용에 비추어 27절 하반절을 보면, 심판관은 사람마다 죽은 후 바로 행해지지 않고 그리스도의 재림 때 있을 것입니다. 그 심판은 적어도 예수를 ‘바라는’, 즉 간절히 기다리고 사모하는 사람에게 멸망이 아닌 구원의 계기가 될 것입니다. 결국 독자에게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망(待望)하는가?’라는 남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께서 허락하신 두 가지의 섭리 가운데, 우리에게 구원을 받고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없는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심판을 피할 길을 우리에게 나타내셨다고 말합니다. 한 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인데,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따르던 사람들에게는 심판을 피할 길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주님이 담당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죄를 위해 죽으신 것을 믿고 받아들일 때, 구원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천국에 우리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 드린 결과로 이루어진 일들입니다.
미래가 있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본향이라고 부르는 천국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이 복음을 영접한 백성에게는 가장 큰 위로입니다. 그러므로 죽음 후에 심판이 있음을 잊지 않고 살아가야 합니다. 아직 심판을 모르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완전한 속죄를 믿음으로 받아 구원의 기쁨을 누리며, 더이상 사단의 거짓과 미혹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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