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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09-02)


완전한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

히브리서 9장 11-22절


좋은 옷을 구매하면, 이전 허름한 옷은 가치가 없게 됩니다. 좋은 것을 풍족하게 얻은 사람은 전에 허름한 물건은 이제 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은 과거 어떤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자신을 영적으로 깨끗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열심히 죄를 없애려고 노력하지만 절대로 없앨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이 영적으로 깨끗하게 하며, 아버지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시켰음을 이해하게 될 때, 근본적인 문제들이 해결되기 시작합니다.

 

구약 제사법으로는 불완전하므로 새롭게 개혁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짐승의 피로 일시적으로 정결하게 할 수 있었지만, 완전할 순 없습니다. 그 결과, 다른 방법인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완전하게 정결할 수 있습니다. 모든 물건이 피로 정결케 되듯, 피 흘림이 없으면 용서함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피 흘리심으로 영원한 속죄를 이뤄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영원한 속죄의 성취(11-14)

죄를 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죗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노예가 자신의 몸값을 지불해야 결박에서 벗어나 지유인이 될 수 있듯이, 죄의 사슬에 결박된 사람이 죄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그 값을 지불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신의 죄를 속하기 위해 참선, 금욕, 심지어는 자신의 몸을 자해까지 하며 죄를 제거하고 거룩해지려고 노력하기도 합니다. 과연 완벽하게 죄를 제거할 수 있겠습니까?

11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13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14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11-14)

지금까지 9:1-10까지 불안전한 구약에 ‘옛 성막’과 ‘대제사장’에 대해 소개했습니다. 죄인들을 완전하게 할 수 없는 한계와 달리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의 능력(11-14)에 대해 드려진 장소와 제물의 효력을 설명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순히 인간 대제사장 중의 한 분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셨다고 소개합니다(11). 이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벽한 제사 질서가 도입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첫 장막’에서 행하는 제사 예법과 대비되는 ‘둘째 장막’에서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제사 예법을 기술합니다. 첫 장막과 둘째 장막의 대비는 더욱 넓게는 첫 언약과 둘째 언약의 대비이고, 그런 의미에서 8장 후반부에 제시된 예레미야의 새 언약 예언의 해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11-15절은 6:1-10:18에 걸친 큰 단락 내의 주제 단락이 됩니다.

첫 언약에 속한 장막과 제사 행위는 제한적인 속죄의 효력을 발생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개혁될’, 즉 바르게 고쳐질 예정이었습니다. 새 언약에 따른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가 바로 그 ‘개혁’ 사건이었습니다. 첫 언약의 장막보다 더 좋은 장막에서 뛰어난 대제사장께서 더 강력한 속죄 제의를 통해 더 완전한 속죄의 효력을 가져오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어진 좋은 것들’을 주관하신다고 기록한 일부 사본들이 있고, 개역개정처럼 ‘장차 이루어질 좋은 것들’을 주관하시는 분이라고 기록한 사본들이 있지만, 중요한 점은 그분이 새 언약에 따른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 즉 대제사장이라는 사실입니다(15). 그분의 대제사장 직분은 첫 언약에 속한 대제사장과 비교하여 더 뛰어나며 또한 완전합니다. 그 이유를 세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1) ‘더 크고 완전한’ 장막으로 들어가심(11b)

첫째, 그리스도께서는 모세가 지은 장막보다 ‘더 크고 완전한’ 장막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이 사건은 아마 부활에 이은 승천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이 완전한 장막은 하늘에 속하며 ‘이 피조 세계에 속하지 않은’ 장막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당연한 듯 들리는 이 표현은 실은 성경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속성에 대비되는 피조물의 속성, 본질적 한계와 결함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아레오바고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자족성이 ‘손으로 지은’ 전이나 역설 우상에 깃들 수 없음을 역설합니다(사도행전 17:24-25). 스데반 역시 예루살렘 성전(사도행전 7:48-49)과 우상(사도행전 7:41; 참조. 신명기 4:28; 37:19)이 손으로 만들어졌고 그래서 결정적인 결함을 안고 있다고 규정합니다. 첫 언약에 따라 지어진 성소, 거기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신다고 여겨졌고 어쩌면 지상 어떤 장소보다 거룩한 곳이었지만, 그것도 사람의 손으로 지어졌고 그 점에서 연약하고 흠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늘에 있는 더 크고 완전한 장막에 들어가신 그리스도가 지상 성소에서 섬기던 제사장들보다 뛰어납니다.

(2)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성소에 입성(12-14a)

둘째, 그리스도께서는 염소와 황소의 피가 아닌 자신의 피를 통해 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12-14a). 제물의 피는 정화 기능을 가졌습니다. 제물이 제대로 기능하려면 일정한 기준을 만족시키는 ‘흠 없는’ 짐승이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제아무리 흠 없는 제물이라도 그리스도의 흠 없으심에 비길 수 없습니다. 그분은 ‘영원하신 영’이기 때문입니다(14). 그래서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이 다른 제물의 희생보다 뛰어납니다. 또한, 그리스도는 단 한 번 바쳐졌습니다(12). 제사를 거듭 드려야 했던 이유는 개별 제사가 불완전하고 효력이 잠정적이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그리스도의 유일회적 제사는 영원하고 완전한 효력을 지닙니다.

(3)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12)

다음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피로 성소에 들어가 완전한 속죄 혹은 구속을 이루셨습니다(12). 짐승의 피와 그것을 태워 얻은 재는 단지 육체를 정결하게 할 뿐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육체만이 아닌 ‘양심’까지도 ‘죽은 행실’로부터 정결케 했습니다. 전인적 정결을 거친 신자는 하나님을 합당하게 예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14b).

예수님의 자기희생과 속죄하심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하나님을 믿는 백성으로 새롭게 창조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새 백성된 우리의 본분은 정결한 마음과 행실로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는 자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언약/유언과 죽음의 관계(15-17)

범죄한 사람은 죄에 대한 대가를 당연히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범해서 언약을 깨뜨렸기에 우리가 죽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런 우리를 위해 대신 돌아가심으로써 다시 우리를 언약의 파트너로 세워주신 것입니다.

15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6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17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 유언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15-17)

이 모든 그리스도의 제사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새 언약의 중재 활동입니다(15). 여기서 ‘중재자’는 중간에 있는 사람이라는 기본적인 뜻을 갖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두 가지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실행자, 수행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새 언약에서 말씀하신 내용을 그리스도께서 받아 시행하셨고, 언약의 내용이 신자들의 존재와 삶에 작용하도록 하셨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설교자가 15b절에서 설명하는 역할은 그것과 약간 다릅니다. 그것은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연결 혹은 이행되는 과정의 중간에서 그 이행을 담당하는 활동입니다. 그리스도는 ‘첫 언약 때 범한 죄에서’ 사람들을 속량하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 결과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이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첫 언약의 효력을 자신의 존재로 받아 안아서 새 언약의 효력을 성도들에게 안겨주신 분, 그래서 그리스도는 중재자이십니다.

이어지는 ‘유언’과 관련한 논의는(16-17) 한편으로는 앞 14절에서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이라는 생각을 받아서 보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15절에 나온 ‘언약’이라는 단어를 '게제라 샤와' 기법으로 해설합니다. 저자는 하나의 단어 ‘디아테케’가 ‘언약’과 ‘유언’ 둘 다를 의미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합니다. 히브리서 7:22에 처음 나왔고 이후 총 17회 사용된 이 단어는 주로 하나님과 그의 백성 간에 맺는 약속 혹은 언약이라는 의미지만, 16절과 17절에서만큼은 명백히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남기는 말, 즉 유언을 뜻합니다. 유언을 남긴 당사자가 죽은 후에 비로소 유언이 효력을 발휘하듯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비로서 새 언약, 새 유언은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죽음과 언약D,; 효력 관계는 이어지는 소단락에서 죽음의 한 제유법적 심상인 ‘피’를 통해서 상술 됩니다.

예수님께서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셔서 우리를 대속하셨을 뿐 아니라 성도들이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죄사함을 받았으며, 영원한 기업 곧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백성이 되는 약속을 누리며, 완성될 그 날을 바라보게 됩니다. 모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창조된, 그들은 새롭게 태어나 하나님 약속의 기업, 곧 선물을 받는 새 백성입니다. 이 영원한 기업을 잘 누리길 원합니다.

 

언약에서 피의 의미(18-22)

이 세상과 구별되는 삶으로 드리는 산 제사가 없이는 그리스도의 속죄를 누릴 길이 없습니다. 세속에 물든 내 목숨을 주와 복음을 위해 버리지 않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언약은 두 당사자가 목숨을 걸고 하는 맹세입니다. 첫 언약도 피로 세웠습니다. 다음 새로운 언약에도 피가 필요했습니다.

18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19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두루마리와 온 백성에게 뿌리며 20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21또한 이와 같이 피를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22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18-22)

이 단락은 언약 체결할 때도 피가 필요하다는 원리를 첫 언약의 경우를 통해 확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언약을 맺을 때도 짐승들의 피가 필요했습니다. 피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신학적 의미를 파생시킵니다.

첫째, 피 흘림은 죽음을 암시합니다. 피를 많이 흘리면 죽기도 하겠지만 ‘생명이 피에 있기’ 때문에(레위기 17:11) 피 흘림 자체가 곧 생명의 상실하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아울러 피는 언약 당사자들의 책임을 확정합니다(18-20). 계약서의 서명이나 도장과 같습니다. 설교자는 여기에 성경적 근거를 더 합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을 기록하고 나서 소를 잡아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피의 절반을 우슬초에 적셔서 언약 체결의 당사자인 백성에게 뿌려야 했습니다(출애굽기 24:6-7). 즉, ‘언약의 피’라는 표현은 피가 언약 당사자를 책임 있는 존재로 일깨웠다는 의미입니다. 마지막으로 피는 정결케 한다. 장막 자체와 각종 제사 도구들에 피를 뿌려서 정결케 했습니다(21). ‘거의 모든 것’이 피로 정결케 되므로 ‘피를 쏟지 않고서는 죄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22). 여기서 히브리서 설교자는 의식적 정결(ritual purity)을 도덕적 정결(moral purity)과 구별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성막 기구들을 의식적으로 정결케 했던 첫 언약의 피는 사람의 양심을 죄로부터 정결케 하는 둘째 언약의 피를 예표 합니다. 한편, 22절에 사용된 명사 ‘하이마테퀴시아(αἱματεκχυσία)’는 ‘피’라는 명사와 ‘쏟다’, ‘붓다’라는 동사의 의미가 결합된 복합명사입니다. 우리말 ‘피 흘리다’는 대개 사람이나 동물의 몸에서 피가 나오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하지만 이 단락의 맥락, 그리고 그것의 배경이 되는 구약 동물 제사의 맥락에서 보면, 희생제물에서 나온 피를 제단 아래에 쏟거나 그것을 받아 바르거나 뿌리는 행위들을 염두에 두고 이해해야 합니다(레위기 16:11-15).

희생 없는 사랑, 희생 없는 대속, 희생 없는 섬김은 모두 거짓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신의 백성을 택하시고 용서하시며 정결케 하사,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되게 하심은, 모두 다 아들 예수의 피를 흘리고 대속하게 하신 가장 값비싼,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피 흘림을 통해서 우리가 정결하게 되었고 살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믿는 새 백성으로 회복된 것입니다.


범죄한 인간들을 보면,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냥 진멸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천년 세월 동안 죄 사함을 정당화하는 제사를 쌓으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자기 아들을 그 선례에 따라 완전한 제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전의 수많은 제물보다 훨씬 더 비참하고 억울하게, 그러나 훨씬 더 순순히 제물이 되심으로 우리 죗값을 치르셨습니다. 이 죄 사함의 은혜를 되새기는 하루를 보내시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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