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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04-01)


갈라지는 마지막 운명

말라기 3장 16절-4장 6절


 심판의 날은 반드시 임할 것입니다. 그런데 심판의 날에는 모든 사람이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날 멸망하는 삶과 회복하는 사람이 갈릴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판결하시기 전에 우리가 선택하는 길입니다. 멸망이 아니라 회복을 선택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고 섬기는 저와 그러지 않는 자를 의인과 악인으로 구별하십니다. 말일에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마땅한 심판을 내리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두러운 날이 오기 전에 그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주신 말씀을 기억하라고 명하십니다. 말씀에 대한 기억은 실천이라는 결과물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악인과 악인의 구분(3:16-18)

이스라엘의 특징은 아무리 잘못을 지적해도 수용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그들은 당당했습니다. 무슨 짓이든지 정당화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가망이 없습니다. 무엇인가를 배우려 하지 않는 사람은 항상 분만이 가득 차 있습니다. 문제의 원인을 자신으로부터가 아니라 밖에서 찾으려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신 분이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16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17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나는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18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16-18)

이 단락은 3:13부터 시작되는 하나님의 마지막(여섯 번째) 경고로 4:3까지 계속되며, 의인과 악인에 대한 구별(3:13-18), 여호와의 날에 이들에게 임할 구원과 심판(4:1-3)을 중점적으로 다룹니다.

앞서 3:13-15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며, 악인이 복되다고 주장하는 악인들을 먼저 보여주었습니다. 3:16-18에서는 의인들을 묘사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의인들)은 하나님이 악인의 말이나 의인의 말을 분명히 다 들으셨음을 서로 확신합니다. 그뿐 아니라 그 말들을 기념책(출애굽기 32:32)에 기록하여 후에 그를 경외하고 이름을 존중하는 자들을 신원하실 것이라 말합니다(3:16). 앞서 3:5에서 언급되었듯이 하나님께서는 불시에 속히 오셔서 사람들의 악행을 증언하며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는 자들의 경우는 그의 ‘특별한 소유’로 삼으시며 아들을 아끼듯 아끼실 것입니다(17). ‘특별한 소유’로 번역된 ‘세굴라’라는 단어는 출애굽 후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면서 이스라엘을 모든 민족 중에서 자신의 ‘소유’로 삼겠다고 선포하실 때 처음으로 등장합니다(출애굽기 19:5). 그런데, 이스라엘을 ‘특별한 소유’ 혹은 ‘그의 소유의 백성’으로 삼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무조건적인 약속이 아니라, 말씀을 지킬 때 성립되는 조건 약속입니다. ‘보배로운 소유’는 ‘제사장 나라’이자 ‘거룩한 백성’으로서(출애굽기 19:6) 개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성결을 대표하는 제사장과 같은 거룩한 백성으로 거듭나는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킵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보배로운 소유는 ‘이스라엘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에게만 해당합니다. 3:17에서도 그의 정한 날(말일)에 특별한 소유가 될 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 그의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들(3:16)이라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소유가 될 것이며, 이는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과 일치합니다. 또한 혈통상의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온 열방 중에서 그를 경외하는 자들을 보배로운 소유로 삼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앞서 1:5,11,14에 예고되었듯, 해 뜨는 곳에서 해 지는 곳까지 이방 민족 중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정결한 제물을 드릴 자들, 곧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는 자들까지도 마침내 하나님의 보배로운 소유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세워 그를 축복하시면서 그를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예고하신 그 약속(창세기 12:3)이 이렇게 성취됩니다. 하나님께 돌아온 백성은 그의 특별한 소유가 될 뿐 아니라 의인과 악인,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그를 섬기지 않는 자가 어떻게 다른지 구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18).

 

의인과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4:1-3)

두려운 이야기기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매우 공정하고 무자비합니다. 아무리 다수가 악에 치우친다 할지라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무리는 반드시 있습니다. 모든 것이 불살라져 심판을 받을 때에 그들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 치료의 광선으로 온전하게 하실 것이지만, 악인은 불에 타는 심판을 내리실 것입니다. 온 세상이 심판을 받을 때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치유와 회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1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2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3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내가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1-3)

마지막 경고(3:13-4:3) 중 4:1-3은 의인과 악인에게 여호와의 날 각각 임할 구원과 심판에 집중합니다. 4절의 첫마디인 ‘보라!’가 청중의 귀를 사로잡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용광로 같이 불타는 여호와의 날(스바냐 1-3장; 요엘 1:15;2:1-3; 시편 50:3)이 다가옴을 예고하십니다. 이날 하나님 앞에서 의 인과 악인에게 합당한 심판이 내려집니다. 이들에 대한 표현은 3:13-18과 마찬가지로 4:1-2에도 다양하게 소개됩니다(교만을 행하는 자, 악을 행하는 자,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 먼저 악인들은 지푸라기가 될 것인데, 더는 생명력이 없어 말라 시들어질 것이란 뜻입니다. 더군다나 여호와의 날에 그것이 불살라지므로 뿌리나 가지, 즉 소생하거나 접붙일 수 있는 가능성이 남지 않고 다 소멸됩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인들은 공의와 치유와 즐거움을 경험할 것이다. 공의의 해가 떠오르면 어둠 속에 숨겨진 불의가 다 드러납니다. 해의 날개에 함께한 치유는 의인에게 생명과 구원, 하나님의 호의가 임함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불에 타 소멸된 악인들과 달리 밖으로 나가서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공의와 이 모든 혜택을 입고 송아지처럼 즐거워 될 것입니다(예레미야 50:11). 또한 의인들은 악인들을 심판하는 데 동참할 것입니다. 악인들은 지푸라기처럼 다 소멸되어 의인의 발바닥 밑에서 재로 나뒹굴게 됩니다. 미가에서도 의인을 사자로 비유하여 원수를 멸하는 심판의 도구로 기술하고, 이슬과 비로 표현하여 초보의 도구로 쓰임 받을 것을 예고합니다(미가 5:7-9), 이제 질의문답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이 1:2부터 시작하여 4:3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로 일단락됩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라는 표현은 말라기를 통해 전달되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증해줍니다. 여기서 ‘만군의 여호와’(‘많은 군대의 여호와’)란 칭호는 하나님이 온 세상에서 가장 용맹스러운 용사이자 왕임을 함축합니다. 이 호칭은 포로 귀환 공동체에게 언약의 삶을 살며 종말론적 소망을 가질 것을 권고하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권고: 모세의 율법을 기억하라(4:4-6)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끝까지 돌아오라고 촉구하십니다. 구약의 마지막 메시지인 말라기 마지막까지도 이스라엘을 향해 돌아오라고 사랑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스라엘은 은혜로 구원하시고 언약을 맺은 첫 순간을 기억하고 돌아가야 했습니다. 여호와께로 돌아온 열조들처럼 언약 관계를 회복하지 않고서는 크고 두려운 심판의 날에 진멸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4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령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5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4-6)

‘내 종 모세의 율법을 기억하라’로 시작되는 이 단락은 하나님의 마지막 권고로서 말라기의 마지막이자 열두 권의 소선지서(호세아~말라기) 및 전체 선지서의 마지막 단락으로 의미심장합니다. ‘기억하라’는 명령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인지력을 가지라는 의미가 아니라, 말씀에 대한 행동력, 실천을 촉구하는 명령입니다. 잠언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조언, 즉 그의 말을 듣고, 떠나지 말고, 주의하고, 귀를 기울이고, 간직하고, 잊지 말라는 말(잠언 1:8;2:1-2;3:1; 4:1-2,10,20;5:1;7:1)은 궁극적으로 ‘행하라’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수많은 가르침을 나와 관계없는 낯선 것으로 여긴다면(호세아 8:12), 기억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둘째, 기억해서 실행해야 할 구체적 내용은 하나님께서 호렙(시내산)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해 모세를 통해 주신 법(율법), 율례와 법도(4)입니다. 시내산 언약을 통해 주신 율법은 좁은 의미에서는 십계명(출애굽기 20장)과 그에 부속하는 율례들(출 21-23장)들을 가리킬 수 있고, 넓은 의미에서는 모세오경 전체를 지칭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율법이나 율례나 법도의 의미나 내용을 따로 나누는 것은 적절치 못할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언약을 기반으로 하여 거룩한 백성이 되는 지침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크고 두려운 날(4:1,5), 즉 여호와의 날이 이를 것을 예고하시며,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분열왕국 시대 아합 왕 때 사역하던 선지자로서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자(열왕기하 2:11)이며, 앞서 3:1에서 길을 준비할 자로 하나님이 보내겠다고 하신 사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1이나 4:5에 예고된 선지자가 세례 요한임을 밝히셨습니다(마태복음 11:10,14). 종말 전에 이 선지자를 보내시는 이유는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고,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시내산에서 백성에게 준 계명을 통해, 하나님께서 보내는 선지자를 통해, 이제가정에서는 부모가 자녀를, 자녀가 부모를 하나님과의 올바른 언약 관계로 돌아오도록 수고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 방법으로 백성을 부르는데도 돌이키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저주로 그 땅을 치실 것입니다. 여기서 ‘저주’는 ‘진멸’(헤렘)이란 단어다. 호흡이 있는 자를 멸절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실 때 그 땅 일곱 족속을 진멸하라고 명하셨는데(신명기 7:1-2; 20:16-18), 지금은 그 진멸의 저주가 이스라엘에게도 임할 수 있음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가나안의 이방인들이 진멸당한 이유가 죄였듯이, 이스라엘에게 경고된 진멸 또한 죄와 관련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고는 이스라엘이 경각심을 갖게 하여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간절히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이 바람은 엘리야(세례 요한)가 올 당시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는 현 포로 귀환 공동체와 그 후에 올 모든 세대에게 기대하시는 바입니다.


 교만하고 악을 행하는 것은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서 입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아가며 그분을 경외하게 됩니다. 말씀을 통해서 치료의 광선이 주는 회복을 누리게 됩니다. 말씀을 묵상하여 기억하는 삶이 된다면 악이 가득한 세상에서도 희망을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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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03-01)

   


정의와 십일조를 논하시는 하나님

말라기 2장 17절-3장 15절


세상은 정의로워야 한다고 외치면서 정작 자신은 정의롭지 못하게 살아간다면, 그처럼 어불성설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요청하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의로운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정의롭지 못한 삶은 충실한 종교생활로 대체되지나 만회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충실한 삶은 반드시 정의와 공의를 실현하는 삶으로 이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러 세상에 일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그의 길을 준비할 언약의 사자를 보내어 백성을 정결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명령을 어긴 자들은 심판하실 것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하시며,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책망하시고 권고하십니다.

 

네 번째 경고 : 하나님의 정의를 의심하고 비방(2:17-3:5)

정의의 하나님께서는 어디 계시냐는 질문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사자를 보내시겠다고 대답하십니다. 그 언약의 사자가 하는 일은 심판입니다. 정의의 하나님을 기다리면서 악을 행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판의 하나님을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분주한 종교생활로 정의 없는 삶을 가리려 말아야 합니다.

17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롭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좋게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 1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2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3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4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봉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나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 5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점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며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언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2:17-3:5)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해서 언제 여호와를 괴롭혔냐고 반문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을 좋아하신다는 말도 안 되는 말로 하나님의 마음을 괴롭혔습니다. 본문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네 번째 논쟁입니다.

(1) 하나님의 경고(17a)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로 하나님의 정의를 불신하고 어지럽혔습니다. 하나님을 불신하고, 말씀을 곡해하고, 타인에게도 이 생각을 서슴지 않고 전하는 이스라엘의 행위가 하나님을 괴롭게 하고 피곤케 하였습니다.

(2) 백성들의 반응(17b)

이스라엘 백성은 한 발 더 나가서 ‘우리가 어떻게 괴롭혔나이까’라며 반문합니다. 도리어 행악자가 하나님의 눈에 선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기뻐하신다고 빈정거립니다. 그들은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계시냐?’고 떠듭니다.

(3) 하나님의 응답(1-5)

하나님께서는 이 패역함에 대해 심판주로서 직접 예고 없이 임하실 것이라고 응수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오시기 전에 사자를 보내어 그 길을 준비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하나님의 사자들을 부지런히 보내셔서 이스라엘이 돌아오게 하셨습니다(신명기 17:15-19; 역대하 36:15; 예레미야 7:26; 미가 6:4).

특히 이사야 40:3의 광야에 와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처럼, 이 사자는 하나님께서 오시는 길에서 장애물을 없애고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4:5에서 이 사자는 엘리야로 예고되며, 예수님은 그가 세례 요한이라고 하셨습니다(마태복음 11:10, 14). 하나님께서 이 사자를 보낸 후, ‘주’이자 ‘언약의 사자’가 갑자기 성전에 임하실 것입니다. 이 ‘언약의 사자’는 앞에 나온 사자와 동일인이 아닙니다. 이 사자는 하나님과 같이 이스라엘의 주인(1:6)이자, 성전의 주인이며(3:1), 이스라엘의 즐거워하는 대상(3:1)이자,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자입니다.

본문의 문맥과 신약의 맥락(요한복음 2:19-22[성전]; 갈라디아서 3:15-18; 히브리서 12:14[언약])에서 볼 때, 언약의 사자는 메시아, 그리스도입니다. 언약의 사자의 역할은 제련공과 표백하는 자로서 백성들을 정결케 하는 것입니다. 그를 견디거나 그 앞에 당당히 설 자는 없습니다(2). 언약의 사자의 오심이나 불과 표백제의 연단을 통해 백성이 다 죽는다는 뜻이 아니라, 용광로의 불이 광석에서 불순물을 다 제거하여 순전한 금과 은을 만들어내고 표백제가 얼룩을 제거하여 깨끗이 하듯, 그가 하나님의 백성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뜻입니다.

특히 ‘레위 자손’(3)을 먼저 정결케 하여, 그들이 공의의 제물을 바칠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이는 제사장과 레위 자손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버리고 자신과 백성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했기에(2:1-9), 이들이 백성보다 먼저 성결을 회복하여 관계를 재개할 때 자신들은 물론이고 백성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레위인과 백성이 모두 성결하게 되어 악행(1:7-8, 13-14)을 버리고 규례에 따라 예배하며 예불을 드릴 때, 말씀에 따라 예배드렸던 과거처럼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4).

이 연단의 과정 후에 하나님께서 직접 세상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책망과 경고를 하셨고, 그의 사자와 언약의 사자를 통해 정결케 되어 돌아올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기회를 거부한 자들에게는 지체 없이 그 죄악을 법정에서 증언하고 판결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우상을 섬기고 점을 치며 간음을 행하여 가정을 무너뜨렸습니다. 이웃에게 거짓 맹세하고 마땅히 줘야 할 삯을 주지 않고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를 착취하는 불의를 저질러 사회질서를 어지럽혔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관계를 기초로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할 맘이 없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다섯 번째 경고 : 십일조와 헌물에 대한 책망과 권고(3:6-12)

악인이 대접 받는 세상을 보면서 하나님의 공의가 어디 있느냐고 불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불의한 세상 때문에 신음하는 이들을 향해 나아가겠습니다. 백성은 여호와께서 행악하는 자를 선히 여기시고 그들을 기뻐하셨다는 거짓말로 여호와를 되롭게 하였습니다.

6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7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는도다 8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9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10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11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12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6-12)

하나님께서는 앞서 1:6-14에서 희생 제물에 대한 제사장과 백성의 태도와 행위를 지적하셨습니다. 이제 3:6-12에서는 십일조와 헌물에 대한 잘못을 책망(6-9)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권고(10-12)하십니다. 이 단락은 다섯 번째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변치 않으시며 야곱의 자손들이 소멸되지 않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1:2의 하나님의 야곱에 대한 언약적 사랑에 변함이 없었고, 지금도 미래에도 번함이 없음을 암시합니다. 야곱의 후손들은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규례에서 돌아섰고, ‘내게로 돌아오라 그러면 나도 너희에게 돌아가리라’(7절)는 권고를 받지 않았습니다. 이 권고는 스가랴 1:3의 인용이며, 하나님이 귀환자들(주전 520년)에게 그들의 조상들에 대해 하셨던 말씀입니다. 포로 전에도 악한 길과 행실에서 돌아오라고 권고했으나(예레미야 18:11; 31:18)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포로로 끌려갔고, 그들은 바벨론에 가서야 자기들이 마땅한 심판을 받았음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이런 스가랴 시대부터 적어도 70-80년이 지났는데도 이스라엘은 조상들과 똑같은 권고를 받고도 ‘우리가 무슨 방법으로 돌아가리이까?’(7)라며 완악하고 어리석은 반응을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십일조와 헌물을 약탈한 것을 반역의 증거로 들었으나,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어떻게 약탈했느냐고 반문합니다(8). 희생 제물은 죄와 관련된 제물이며, 십일조와 헌물은 의무로 드려야 할 헌물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희생 제물과 십일조를 열심히 바쳤고, 다른 제사와 절기들을 빼먹지 않고 열심히 지켰습니다. 예물이나 절기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형식적, 위선적, 습관적으로 행했을 뿐 식생활에서는 하나님을 찾지 않고 공의를 행치 않았습니다(아모스 4:4-5; 5:4-8, 22-23; 미가 6:6-8; 예레미야 7:21-22. 에스겔 20:39). 그런데 현재 이스라엘은 십일조나 헌물마저 바치지 않았으며, 일부를 드리거나 상한 것을 드리면서도 할 바를 다했다고 대답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이례적인 제안을 하시면서 다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린 후 그가 하늘의 창문들을 열고 이스라엘에게 복이 쌓을 곳이 없도록 쏟아 부으시는지 아니 하시는지 시험을 해보라는 제안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시험하면 안 되는데(신명기 6:16), 자기를 시험하라는 파격적인 제안을 하신 것입니다. 십일조를 하면 해충을 금하고 열매가 떨어지거나 맺지 못하는 일이 없을 것이고, 이스라엘은 ‘즐거움의 땅’이 될 것이며, 이방인들로부터 행복하다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12).

 

여섯 번째 경고 : 하나님을 거슬러 완악한 말을 하는 백성(3:13-16)

땅에 있는 하잘것없는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일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유다 백성과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마땅히 바쳐야 할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고 있었고, 그런 악행이 상습화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돌아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돌려드리는 자들에게는 재앙이 그치고 기쁨의 땅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13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14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서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15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라 16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12-16)

하나님의 마지막(여섯 번째) 경고인 3:13-4:3에서는 의인과 악인이 누구이며(3:13-18), 마지막 때이 여호와의 날에 이들에게 임할 운명(4:1-3)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1) 하나님의 경고(13a)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그를 거슬러 완악한 말을 서슴지 않았음을 지적하십니다(13). ‘완악하게 말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제압하듯 주제넘게 말했다는 뜻입니다.

(2) 이스라엘의 반응(13b)

이스라엘은 ‘우리가 하나님을 거슬러서 무슨 말을 했나이까?’라고 끝까지 반박합니다. 이스라엘은 어떤 말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말인지를 분별하지 못하거나 알면서도 시치미를 떼고 있을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응답(14-16)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헛되다. 악인이 행복한 자들이다’(14-15)라는 말이 완악하다고 일러주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느라 명령을 지키고 슬프게 다니는 행동이 다 쓸데없다고 치부했습니다(14). ‘슬프게 행하는 것’은 상복을 입고 허리를 구부린 채 슬프고 어두운 표정으로 걷는 모습으로(시편 35:14) 겸손과 회개를 뜻합니다. 또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교만한 행악자를 행복자로 부르며(15), 그런 자들이 강성해졌고, 그들이 하나님을 시험하고도 심판을 피했다고 떠들어댔습니다(15). 이스라엘은 악을 행하는 자가 다 선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즐거워하신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2:17). 3:10-12의 십일조의 예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사는 자가 그의 즐거움이 되고 모든 열방으로부터 행복자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신뢰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시편 1:2; 2:12)임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모세가 죽기 전에 말했듯 이스라엘은 만왕의 왕인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행복한 백성(신명기 33:29)인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왕과 주인으로 삼은 것이 행복이며 특권인지를 깨닫지도 못하고 그걸 누리지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일조가 복을 불러오는 것은 아닙니다. 십일조는 은혜에 대한 화답이며, 사회의 약자를 돋보기 위한 세금입니다. 공평과 정의에 참여하는 중요한 방식입니다. 십일조는 소유의 진한 주인이 누군지를 환기시켜 개인적인 탐욕과 야망을 조절하는 길로서 여전히 그 정신이 유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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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01-01)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예배

말라기 1장 1-14절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변질되었다는 것입니다. 뜨거웠던 믿음이 식어지고, 열정적인 헌신도 식어집니다. 이런 형상을 단지 봉사나 예배를 잠시 생각할 시간을 가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점점 타락했습니다. 그들의 타락은 다양한 부류의 사람에게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기기에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누가 타락했으며, 어떤 식으로 타락했으며, 그 타락의 공통점은 무엇인지, 그 모든 것들의 긍극적인 원인은 무엇입니까?

  

말라기는 구약의 마지막 책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사랑하는 백성이 되었으나, 백성으로서의 특권과 의무를 망각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의 말씀에 불순종하면서도 자기 죄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말라기를 통해 이들을 책망하며 회개를 종용하십니다.

 

말라기를 통한 하나님의 경고(1)

하나님께서 부르심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하나님께서는 치밀하고 섬세한 계획 속에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해주시다가 하나님의 때에 맞추어 우리를 부르시고 그 선하신 뜻대로 귀한 사명을 맡기시기 위해 부르신 것입니다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각 순종해야 합니다하나님께서는 형식적인 헌신으로 변해버린 이스라엘에게 바른 관계를 맺자고 부르시고 계십니다.

 1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1)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에서 돌아왔지만, 아직 선지자들이 예언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회복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백성들은 포로에서 돌아온 신앙의 감격이나 긴장감은 살아져 갔습니다. 그러면서 심판의 원인이었던 형식적인 예배와 외식적인 예배의 삶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사랑하신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 백성으로서 특권과 의무를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멸시해서 그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여전히 자기의 죄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말라기를 보내셔서 그들을 책망하시고 그들에게 진심어린 회개를 촉구하고 계십니다.

말라기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말라기 1:1; 스가랴 9:1; 하박국 1:1)로 시작합니다. ‘경고’로 번역된 단어(마싸; 나훔 1:1; 하박국 1:1)는 특징 대상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 또는 선지자가 본 계시 등을 가리킵니다. 이 단어는 원래 ‘집’, ‘부담’이란 뜻이나 ‘여호와의 짐’ 또는 ‘선지자의 짐’이라는 번역이 듣기에 매끄럽지 못하므로, 보통 ‘경고’, ‘계시’, ‘신탁’으로 번역됩니다. 이 단어 뒤에 대부분 하나님의 심판이 선포되므로, 심판을 내리실 하나님이나 전달하는 중개자의 부담과 고통이 이 단어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논쟁 :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 요청(2-5)

때로는 사랑에는 오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모두가 자기 마음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하지 않았으니 사랑 받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끼리도 사랑하기 힘든지 하물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어떻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형식적인 예배는 자기만족을 위한 방편일 뿐이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진실한 예배일 수 없습니다.

2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3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4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역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5너희는 눈으로 보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크시다 하리라(2-5)

말라기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질의문답을 통한 논쟁 형식으로 계시가 전개될 것입니다. 이 형식은 1:2-4:3까지 여섯 번이 반복하여 논의가 진행됩니다. 각 논쟁은 (1) 하나님께서 말씀하심, (2) 이스라엘의 반문, (3) 하나님의 설명과 책망의 세 단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첫 번째 논쟁을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2a)

이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부담을 담은 첫 내용(1:2-5)은 이스라엘을 책망하기 이전에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택한 언약 백성임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라고 하십니다. 이 진술은 언약 백성 이스라엘을 줄곧 사랑하고 충실하게 대하셨음을 뜻합니다(예레미야 31:3).

(2) 이스라엘의 반문(2b)

이스라엘은 이 하나님의 말씀에 못마땅하여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라고 반문합니다(2). 이 물음은 ‘대체 무슨 일을 우리에게 해주었다고 우리를 사랑했다고 하는 겁니까?’란 뜻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불만과 의심의 표현입니다.

이 시기는 포로 귀환 및 성전 재건 이후로 추정되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깨고 그들을 바벨론에 포로(주전 586년)로 보냈다고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포로에서 돌아와서(주전 538년) 성전을 재건하고도(주전 515년) 오래 지났건만(약 주전 5세기 중엽) 기대만큼 정치, 경제적 부흥(학개 2:6-9, 15-23)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 바람대로 해주어야 사랑이라고 착각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탓으로 돌릴 뿐 하나님을 멸시하여 말씀에 불순종하고 있는 자기 실체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3) 하나님의 응답(2-3)

이런 이스라엘의 반문에 하나님께서는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했고 에서는 미워했다’(2-3)라고 말씀하십니다. 에서와 야곱의 대조를 통해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에서와 야곱은 이삭과 리브가가 낳은 쌍둥이인데, 하나님께서는 태중에 있을 때부터 야곱을 선택하셨습니다(창세기 25:22-23). 아브라함과 이삭의 언약이 야곱에게 이어졌고(창세기 17:6; 26:3-4; 28:13-14), 야곱의 아들 열 두 명은 크게 번성하여 이스라엘 각 지파가 되었습니다(창세기 49:28). 이들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으며(출애굽기 19장),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얻었습니다(여호수아 13-22장). 다윗을 통하여 영원한 왕권을 약속받았고(사무엘하 7장), 불순종으로 인해 포로로 잡혀갔으나 다시 돌아와 나라와 기업을 회복하고(역대상 9장; 에스라 1장), 하나님의 도움으로 성전을 재건했습니다(에스라 6:14-15). 오랜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와 구원이 이스라엘과 함께 있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페르시아의 지배 아래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사랑을 입고 있습니다. 반면에, 에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자손의 번성(창세기 35장)과 기업(신명기 2:5; 여호수아 24:4)의 축복을 하나님께 받았지만, 에돔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과 언약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더구나 그들이 바벨론을 도와 유다를 침공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에돔에게 멸망을 선고 하셨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이미 에돔의 터전을 황폐하게 했고, 설령 그들이 폐허가 된 땅을 재건하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헐어버릴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3. 에돔이 산 곳은 악의 지역이 되며, 그들은 크게 패망하여 ‘하나님이 영원히 저주하는 백성’이라 불릴 것입니다(4).

반대로 멸망하여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서 끝장난 것 같았던 야곱은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입니다. 에서와 야곱의 관계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났고 이스라엘도 목격한 바이기에,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이스라엘 밖에서도 위대하심을 찬양해야 마땅합니다.

 

두 번째 논쟁 : 바른 제사 드리기를 원하신 요청(6-14)

하나님을 바르게 알면 알수록 모든 것을 다 드려도 아깝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드린 것들이 빈약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하잖게 여기지 않고서는 그런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전혀 하나님을 공경하거나 경외하지 않으면서도 아쉬울 때는 긍휼과 은혜를 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차라리 성전 문을 닫는 것이 낫겠다고 분노하실 만큼 형식적이고 불손한 제사를 드리진 않습니까? 하나님께 바라는 것은 많으면서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것에는 무관심한 사람은 아닙니까?

6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7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8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9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10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11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12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식탁은 더러워졌고 그 위에 있는 과일 곧 먹을 것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 13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14짐승 떼 가운데에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속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이방 민족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6-14)

말라기를 통한 하나님의 첫 번째 계시가 이스라엘 지체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확증했다면, 두 번째 계시인 1:6-2:9은 본격적인 책망의 시작입니다.

(1) 하나님의 말씀(6a)

여기서는 제사장을 이스라엘의 대표로 지목하여 그들이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고 제사를 업신여겼다고 꾸짖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와 아들, 주인과 종의 비유를 들어서 아들과 종이 각각 아버지와 종을 공경함이 마땅하다고 말씀하신 후, 제사장들이 자신의 아버지와 주인이신 하나님을 왜 공경하지 않느냐고 책망하십니다(6; 이사야 1:2-3). 이 비유 또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을 암시하며, 특히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 나라의 일원이 되어야 함을 함축합니다(출애굽기 19:6), 제사장과 레위인은 언약 백성 중에서도 거룩하게 구별되어 제사를 드리는 일을 담당하는 자들입니다(민수기 3:1-13). 이런 자들조차 하나님을 공경하고 경외하지 않는다면, 남은 백성은 얼마나 더하겠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에게 들어야 할 호칭은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자들’이지만, 현실은 ‘내 이름을 멸시하는 자들’이었으니 굴욕적이었습니다.

(2) 이스라엘의 반문(6b)

그런데 제사장들은 ‘어떻게 우리가 당신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6) 하며 어리둥절해합니다. 적반하장입니다. 이 반응은 1:2의 이스라엘의 반응과 다름없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영적으로 눈감하고 악하고 무지한지를 보여줍니다.

(3) 하나님의 응답(7-8)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더럽고 부정한 떡이나 병들고 눈먼 희생제물처럼 적합하지 않은 제물을 백성에게서 받아 하나님께 드린 행위가 하나님과 그의 이름을 멸시하는 일이었다고 구체적으로 밝히십니다(7-8). 흠 없는 제물을 바쳐야 마땅한데(레위기 1:3,10; 3:1) 이 규례에는 신경 쓰지 않은 것입니다. 도리어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했나이까?’(7)라고 반박하며 하나님의 식탁(제단)을 거룩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그런 곡물과 짐승을 총독에게 드려보라고 비꼬십니다(8). 한 나라의 총독도 그런 물건을 받으면 언짢아하고 받지 않을 터인데, 온 세상의 왕 하나님께 그런 쓸모없는 제물을 드리며 은혜와 용서를 구한다면 어떻겠습니까!

(4) 불만족스러운 하나님(10-14)

➀ 거짓된 예배(10-12)

하나님께서는 형식적인 봉사와 예배에 대해서는 제단 불을 꺼 예배를 없애고 성전문을 닫는 게 낫다고 하십니다(10). 진정한 제사는 예배자가 하나님께 속죄하고 순종과 헌신을 드리는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고 화목을 누리는 ‘향기로운 제사’(레위기 1:9,13)입니다. 제사나 예배의 진정한 의미가 누락되고 가식적인 행사로 남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으시고, 받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제사장과 백성에게 소홀히 취급되고 있지만, 그 이름은 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까지 열방 중에 크게 될 것입니다(11; 이사야 45:6). 그때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예배하며, 그가 명령하고 기뻐하시는 정결한 제물을 드릴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페르시아의 통치 아래 있고 농작물의 피해도 있어(3:11) 형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하나님께 드릴 것을 아까워합니다. 그들이 가진 모든 소유가 하나님에게서 나왔으며, 온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시편 50:8-14).

➁ 거짓된 마음(13-14)

또 하나님의 제단과 제물을 멸시하고, 제사를 번거롭게 여기며, 훔친 것이나 병든 것을 바치고 있습니다(12,13). 제물에 합당한 수컷 짐승이 있어도 흠 있는 것을 가져와 하나님을 속이고 서원하며 복을 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공경심도 감사도 순종도 없는 제물을 저주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기억해야 할 것은 그들의 아버지와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온 땅의 큰 임금이며, 열방으로부터 그 이름이 경외 받을 것이라는 점입니다(14). 제사장과 이스라엘에게 있어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의 책망을 겸허히 받고 하나님 경외를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 예배를 어떻게 받으시는지 잘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하고, 그 이름을 멸시하고, 제사를 하찮게 여겼습니다. 제사장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을 욕보이는 일에는 한마음이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전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분을 공경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는 참 제사가 아닌 형식적인 제사만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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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MALACH) 서론❰

 

말라기서는 구약의 마지막 책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 학개와 스가랴의 시대에 성전 재건되었습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에 예루살렘에 거룩한 회복을 일으켰습니다. 부흥기가 지나고, 그들은 다시 하나님을 멀리하며 형식적인 신앙생황을 하게 되었습니다. 말라기는 이렇게 영적인 암흑기로 들어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경고하며,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을 예언한 선지자입니다. 

 

말라기의 제목

말라기는 히브리어(Mal'aki)로 ‘나의 사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말은 ‘여호와의 사자’라는 뜻을 가진 말라기야(Mal'akiyah)의 단축형인 것 같습니다. 이 이름이 구약 어느 곳에도 나오지 않기 때문에 말라기란 선지자의 이름이 아니고 단지 하나님의 ‘사자’로서의 명칭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말라기의 저자

선지자는 자기의 개인 생애와 봉사의 연대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구약 선지자들 중에 마지막 인물이었다는 것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말라기는 포로 생활이 거의 잊혔을 무렵, 성전이 복구되어 예배 의식이 얼마동안 진행되고 있었을 때에 예언하였다는 것을 이 책의 내용이 밝혀주고 있습니다.

 

말라기의 기록 시기

말라기는 바벨론 포로 귀환 후 성전이 재건되고 학사 에스라(주전 458년 귀환)나 총독 느헤미야(주전 445-425년경)의 종교개혁이 취해지던 어간에 활동한 것으로 보입니다. 말라기의 개혁 조치들은 거의 에스라서나 느헤미야서에 언급된 내용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혹자는 말라기서가 에스라나 느헤미야 시대보다 다소 앞서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주전 460년경), 또 혹자는 느헤미야 시대로 보기도 합니다(주전 435-425년경).

 

말라기의 특징

말라기는 몇 가지 점에서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로 말라기의 강조점이 하나님의 언약에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과(1:2-5) 종결 부분(4:4)이 언약을 기억하고 순종하라는 말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를 부자관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1:1-6; 3:17). 그리고 이스라엘의 가장 심각한 죄가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긴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2:1-30).따라서 2:2-3에서는 언약을 어긴 징계가 어더한지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둘째로 다른 민족 곧 열방들에 대한 심판의 언급이 없다는 것입니다. 본 말라기는 기록 목적은 이스라엘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메시지 이면에는 열방들에 고나한 심판이 적지않게 내포되어 있기도 합니다(1:5,11,14).

셋째로 예배에 대한 언급을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별히 예배의 형식적인 의식보다는 여호와께 대한 순종이 더욱 고귀한 것임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끝으로 의인의 이름이 적인 기념책(3:16)과 주의 길을 예비할 엘리야(4:5)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말라기의 내용분해

Ⅰ. 그 민족의 특권 1:1-5

Ⅱ. 그 민족의 오염 1:6-3:15

(1)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의 죄 1:6-2:9

➀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끄럽게 함 1:6-14

➁ 여호와께서 제사장들을 저주하심 2:1-9

(2)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 2:10-3:15

➀ 백성들이 우상숭배의 죄를 범함 2:10-13

➁ 백성들이 이혼함 2:14-16

➂ 여호와가 오심으로 심판하실 것임 2:17-3:5

➃ 백성들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함 3:6-12

➄ 백성이 하나님의 성품을 의심함 3:13-15

Ⅲ. 그 나라에게 한 약속들 3:16-4:6

➀ 기억의 책의 보상들 3:16-18

➁ 그리스도의 오심의 상급 4:1-3

➂ 엘리야의 도래에 대한 예언 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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