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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8-02)


갈릴리에서 다시 만난 예수님

마태복음 28장 11-20절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아버지께 받으셨습니다. 광야에서 사탄이 십자가를 지지 않고도 ‘세상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주겠다고 한 제안(4:8-9)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자, 더 온전한 권세와 영광을 주신 것입니다.

 

  •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예수님을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예수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부활을 속이는 사람들(11-15)

부활을 두고 전개되는 논쟁은 그것이 실제로 일어날 것인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몸의 부활은 믿어도 그분을 믿는 사람들의 부활은 영적으로, 혹은 믿어도 그분을 믿는 사람들의 부활은 영적으로, 혹은 의미로만 취급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11여자들이 갈 때 경비병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리니 12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13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14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하니 15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11-15)

 

여자들은 기쁨으로 부활의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러 갔지만, 부활을 믿지 못하는 군인들은 부활 사건을 보고하기 위해 대제사장들을 찾아간다. 그들은 일어난 모든 것을 대제사장들에게 보고합니다.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돌을 굴리고 그 위에 앉은 것(2)과 무덤이 비고 시체가 사라진 것(3)을 전했을 것입니다. 경비병들이 무덤을 지킨 이유는 시체가 사라질 수 있다는 예상 때문이었다. 이 말은 당시에 유대인들이 생각한 부활은 '몸의 부활'임을 증언합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부활 사건과 함께 벌어진 일을 생생하게 목격한 경비병들의 보고를 묵살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숨기려는 이들의 행동에서 역설적으로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절망과 슬픔 가운데 있는 제자들이 경비병들의 수비를 뚫고 큰 돌을 옮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런 싸움도 일어나지 않은 채 정예 군인들이 시체를 소수의 민간인들에게 빼앗겼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동일한 사건을 보고서도 한쪽은 신앙을 갖고 기뻐하며, 다른 쪽은 믿음에 이르지 못합니다. 독자들은 부활을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언제나 있 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이 믿지 않는 현상에 대해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갈릴리에서의 재회(16-20)

주님께서는 치유의 하나님으로서 회복과 소망의 메시지를 안고 오십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시는 사랑에 감격하여 남은 생을 주님을 위하여 드렸습니다. 갈릴리에서 열두 명의 소그룹을 데리고 시작한 사역이 예수님의 부활 후에는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전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세계선교의 사역으로 확장되었습니다.

 

16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17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18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16-20)

 

마태복음의 마지막 단락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 당부하시는 장면입니다.

 

(1) 주께서 부활한 사실을 의심하는 제자들(16-17)

 

16절부터 무대가 바뀝니다. 갈릴리 시골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 있는 바닷가 한 언덕입니다. 성전이란 주님의 임재가 있는 장소입니다. 건물로 된 성전이라도 거기에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 속죄와 진리가 있지 않으면 그저 벽돌을 쌓아놓은 돌무덤일 뿐입니다. 하지만 갈릴리에는 부활하신 주님이 계셨습니다. ‘열한 제자’(16)는 너무도 상징적입니다. 유다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26:14-16), 그리고 그들의 선동에 놀아난 대중들까지 포함한(27:20), ‘믿지 않은 이스라엘’을 대표하고 상징합니다. 이제 그 ‘유다’로 대표되는 ‘불신앙의 이스라엘’은 모두 떨어져 나갔습니다. 이제 종말의 새로운 이스라엘의 참 목자가 그들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분은 스가랴 13:7에서 예언한 대로, 버림받고 죽이심을 당해, 그의 양 무리는 흩어졌지만(26:31), 다시 살아나셔서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라는 약속대로 갈릴리에 먼저 가 계셨습니다(26:32). 하지만 아직도 이 ‘열한 제자들’ 곧 종말의 새로운 양 무리 속에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장차 불어날 이 양 무리 안에도, 결국 떨어져 나갈 자들이 또 생길 것이라는 징조입니다. 모두가 그물에 들어오지만, 전부 고기는 아닙니다(13:44-50). 최종적인 심판은 주께서 다시 오실 그때 이루어질 것입니다(24:29-31).

 

(2) 부활하신 주께서 열한 제자들에게 명하심(18-20)

 

이제 부활하신 주께서는 다시 한번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다’는 선포를 하십니다. 공식적으로 자신이 만유의 왕 되신 하나님, 이스라엘의 참 목자 되신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은 대리 통치자, 곧 메시아임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이런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11:27):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하지만 이제 만유를 상속받을 합당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아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복하는(4:1-11) 일에 승리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가 실로 만유의 대리 통치자인 그리스도 곧 메시아시며,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참된 왕이요 목자로 지명되고 임명되었음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18-20절에 기록된 이 장면은 그래서 참으로 놀랍고 기쁘고 황홀하며 감격적인 장면입니다.

18-20절에 기록된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과 종말의 새로운 양 무리의 모습, 그리고 주님의 권세,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뜻, 말씀을 가르침과 주님의 임재의 요소들을 다 갖춘 구약의 배경은 에스겔 34:23-24(37:24-28)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실패하고 흩어진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9-10장)에게 돌아오신 종말의 목자 곧 여호와 하나님 자신의 권세와 긍휼로 오십니다(겔 34:1-16). 그리고 ‘구약의 종말의 다윗 목자’(겔 34-37장: 미 2-5장; 슥 9-14장) 전통에 따라, 특히 스가랴 9-14장에 따라 버림받고 수난당하는 목자로서 죽으시고, 종말에 양과 염소를 심판하시는 심판주-목자로 오십니다. 하지만 지금은 새 언약 백성인 회복된 양 무리에게로 돌아와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세우신 ‘다윗 같은 한 목자’가 되십니다(겔 34:23-24). 이분이 교회의 ‘목자장’이십니다(참조, 벧전 2:25; 5:4).

이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부활의 주님, 교회의 머리 되신 목자장이신 주님은 가장 중요한 명령을 하십니다. 원문에는 ‘제자 삼으라’가 유일한 주동사입니다. ‘가서’와 ‘세례를 주며’ 그리고 ‘지키게 할 목적으로 가르치고’는 모두 분사형태입니다. 그러므로 19-20절은 선교 대명령이 아닙니다. 제자 삼으라는 명령입니다. 가장 최종적인 목적은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들’을 ‘지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말씀, 그 내용, 그 분부하신 ‘모든 것들’을 행하여 지키는 것이 최종 목적입니다. 구약의 율법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에게 가르쳐 분부한 모든 것들’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주님의 순종과 사역을 통해 성취되고, 새롭게 해석되고, 다시 명령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가 주님 안에서 그의 새로운 계명을 순종하고 행할 수 있도록 성령의 능력도 주십니다. 그래서 지킬 수 있다. 이것이 19-20절에 기록된 지상대명령의 핵심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참조, 마 7:26).

‘가서’는 분사로 표현된 부대 상황입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입니다. ‘세례를 주고’ 역시 부대 상황이고 수단입니다. 세례를 주어 교인 숫자를 늘린 것으로 선교가 다 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가르쳐서’도 역시 수단입니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많이 가르치면서도, ‘지키게 하지’ 못하면 그것은 선교 대명령의 실패입니다.

 

주님이 교회와 함께하시는 이유, 종말에 하나님의 임재를 보장하시는 ‘임마누엘’로서 교회 중에 함께하시는 이유는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 죄 사함을 선포하여 교인들을 만드는 것만이 아닙니다. 저들을 선교사로 파송하여 열방으로 ‘보내는’ 것이 궁극적 목적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단지 많이 가르치는 것이 목적도 아닙니다.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제자 되게 하는 것, 곧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그 생명으로 거듭나서, 열방 가운데로, 이방인들 가운데로 나아갈 뿐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고 행하여 그 말씀을 지켜 의의 열매를 맺는 사람, 주님을 닮은 성품을 가진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곧 종말에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들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지상 대명령입니다.


기독교는 화해와 용서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목숨 바쳐 우리 인간을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죽음을 정복하고 다시 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다시 오십니다. 실패한 자, 소외된 자, 소망을 잃고 방황하는 자들에게 부활의 주님으로 지금도 찾아오십니다. 어긋난 우리의 인생을 바로 잡아 주시고 새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오십니다. 우리의 고통과 아픔과 슬픔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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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복음(28-01)

 


부활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28장 1-10절


‘부활(復活) 신앙’의 본질은 예수님의 생애 전체에 대한 긍정이자 세상을 향한 공지(公知)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의 가르침과 삶의 증인으로 교회가 세상을 행해 세워지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증언하고 시ᅟᅵᆯ행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놀라운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 놀라운 사건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통해 앞으로도 계속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 안식 후 첫날 빈 무덤에서 천사를 만나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은 여인들은 이를 알리려고 제자들에게 가던 중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전제하고서, 그로 인한 두 가지 결과를 빈 무덤(1-8,11-15)과 부활하신 예수님(9-10, 16-20)에 초점을 맞춥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1-7)

부활 사건은 하늘과 땅이 움직여야 가능한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위하여 일하셨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일하셨습니다. 부활은 우리가 구경하고 감탄할 일이 아니라 나누고 전할 소식입니다. 부활 신앙은 두려움과 큰 기쁨을 갖고 담대하게 증인의 삶을 살도록 촉진합니다.

 

1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2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3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4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5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7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1-7)

 

안식일이 지난 새벽 동틀 두 여인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갑니다. 그 여인들의 이름은 마리아였습니다. 그 두 마리아는 역사상 처음 있는 위대한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끝나고 밤(토요일 밤)이 니난 다음, 한 주간의 첫날인 지금의 주일 중 새벽 무렵에 부활하셨기 때문에, 여자들은 주의 첫날 새벽 무렵에 무덤을 향했습니다. 충격적이게도 모습이 번개 같고 눈같이 흰 옷을 입은 천사가 무덤을 막았던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아 여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전합니다

 

(1) 천사는 수동태 동사를 사용해서 예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켜졌다.’고 말합니다(6), 부활을 일으켜진 것으로 표현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원하심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고, 특히 아들은 십자가에서 버림받는 순간에 처해도 아버지를 신뢰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죽은 자들 가운데 두지 않고 살려내심으로써 아들의 순종이 옳았음을 입증하십니다. 부활은 신뢰의 입증입니다.

(2) 빈 무덤은 예수님의 부활, 특히 육체의 부활을 알립니다. 9절에서 여자들은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하는데, 발을 잡은 것은 몸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부활이란 영혼이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육체는 썩고 영혼이 하늘에 올라가는 것도 아닙니다. 한 번 살아났다가 때가 되면 다시 죽는 소생과도 다릅니다. 신자들의 소망인 부활은 땅에서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아름다운 육체로 살아가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5장), 신자들은 예수께서 다시 와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그들을 초대할 때 부활해서 새로운 몸으로 영원한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부활은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반복해서 예고하신 대로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바라보면서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신자들은 무덤에서 예수님을 찾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면서 그가 살아나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십자가나 무덤이 아니라 부활에 시선이 향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언제나 부활과 함께 해석되어야 합니다.

(4) 부활의 의미는 예수님과 신자들의 만남이다. 예수님은 부활해서 홀로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만나러 가신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만날 곳으로 먼저 가시기 때문에 환영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자들을 만나려고 부활하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와의 만남입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그를 만나듯이 부활하신 그를 만나 힘과 용기를 얻어야 합니다.

 

여자들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8-10)

부활의 주님은 약속대로 부활하셨고, 약속대로 제자들을 갈릴리에서 기다리겠다고 하십니다. 자신을 버리고 도망한 자들을 ‘형제’로 불어주시고(12:49-50), 자신을 십자가에 매단 예루살렘이 아니라 가난하고 온유하고 애통한 자들의 도시인 변방의 갈릴리에서 제자들이 자신의 일을 이어받게 하시려고 기다리셨습니다.

 

8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9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10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8-10)

 

두 여인은 5-7절에서 부활하신 예수에 대해서 들었으나 8-10절에서는 부활의 예수님을 만납니다. 여자들은 천사의 지시대로 제자들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가던 중에 예수님을 만나 경배합니다(9). 예수님은 천사가 지시한 내용을 다시 확인해주십니다(10). 부활의 메시지를 전하는 주체는 천사에서 여자들로 바뀝니다. 여자들의 모습과 그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다음과 갇은 점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교회는 기쁨으로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공동체입니다. 부활의 메시지를 전하는 여자들의 반응은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들을 만나 기뻐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교회가 즉시 전해야 할 부활의 메시지가 교회의 진정한 기쁨입니다. 부활의 소식, 즉 예수께서 부활해서 우리를 만나시고 우리와 함께하시고 썩지 않을 몸으로 부활한 우리와 함께 영원히 계실 것이라는 사실은 교회의 참된 기쁨입니다.

(2) 부활의 첫 증인은 여자들이다. 만일 초기 교회가 부활의 이야기를 창작했다면, 당시에 증인으로서 신빙성이 떨어졌던 여자들이 아니라 남자들을 첫 번째 증인들로 묘사했을 것입니다.

(3) 부활하신 예수님의 관심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 들을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주시는 메시지는 이미 천사를 통해 여자들이 받았습니다. 여자들은 예수님을 만나지 않더라도 두려움과 기쁨으로 제자들을 향해 달려가기 때문에 천사의 메시지를 전할 것이 확실합니다. 그런데도 여자들을 찾아오신 것은 그들을 만나기 위함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관심은 명령 자체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을 만나 격려하고 위로하는 데 있습니다.

(4)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경배의 대상입니다. 예수님꼐서는 신자들이 기쁨과 감격으로 교제하는 분이며 경배를 받으시는 분입니다. 교회가 경배하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은 제국의 이야기 속에 하나님의 이야기가 숨 쉬고 꿈틀거리는 곳입니다. 피상적으로 돈과 권력이 승리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저번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노래가 흐릅니다. 부활 신앙은 욕심과 허영은 가짜임을 폭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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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7-05)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지내신 예수님

마태복음 27장 57-66절


하나님 나라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이 두 진리는 개인과 교회 신앙의 근본이자 발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하며 좁은 길의 신비를 묵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제자도는 예수님의 살아나심을 깊이 생각하며 영원히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것을 내면화하는 일입니다.

 

  • 본문은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을 매장하고(57-60) 여자들이 무덤을 향해 앉아 있는 장면(61)과 유대 지도자들이 빌라도의 도움으로 무덤을 차단하는 사건(62-66)으로 구성됩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예수님(57-61)

증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직접 보고 만졌다는 것은 몸의 부활에 대한 신앙의 근거입니다. 기절도 아니고 영혼만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몸이 없는 인간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몸의 부활을 믿는다면 우리의 사랑은 구체적으로 몸으로 행하는 사랑이고, 몸을 위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57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58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59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60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61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57-61)

 

예수님께서 예언의 말씀대로 돌아가셨습니다. 그가 스스로 자신이 말씀하신 대로 죽음을 취하셨습니다. 당시에는 십자가에 처형된 시신들을 방치되어 독수리나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습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시신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말합니다. 유대 사회에서는 장사 되지 않는 것은 큰 수치였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반역에 동참한 사람으로 낙인찍힐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없이도 못살 것 같던 사람들도 이 순간만은 피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1)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하는 아리마데 요셉(57-58)

 

저녁이 되었을 때,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기 위해 등장합니다. 본문에서는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57)라고 소개합니다. 그는 아리마대 출신의 요셉이라는 제자가 빌라도를 찾아갔습니다.

유대 문화에서 저녁이 되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 이후 새로운 하루가 시작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금요일(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에 죽으셨고(마가복음 15:42; 23:54; 요한복음 19:31,41) 날이 저물었습니다. 저녁부터 안식일이 시작되고 안식일은 62절의 ‘이튿날’, ‘준비일 다음 날’이므로, 아직은 안식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신 뒤 셋째 날(주일)에,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28:1). 안식일이 되기 전에 빨리 시체를 수습해서 매장해야 합니다.

요셉은 아리마대 출신의 부자였습니다. 마가는 요셉을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마가복음 15:43)고 설명했지만, 마태는 그를 부자로 묘사합니다. 그는 산헤드린 공회원이고 새 무덤을 제공할 정도의 재력이 있었습니다. 당시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잘 갖춰진 무덤을 제공하는 호의를 보이기도 했지만, 예수님의 경우는 처형을 당한 십자가형 범죄자였기에 그의 시체를 요구하기 위해서는 큰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이미 열한 제자들이 도망할 정도로(참조. 26:56; 27:55-56) 예수님과 엮이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예수님의 죽음에 적극적으로 반응했습니다. 요셉은 참 제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마태는 ‘또한 예수의 제자였다’라며 요셉을 예수님의 제자로 소개합니다.

요셉은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58). 요셉은 부자였고 명성을 가진 사람이었으므로 어렵지 않게 빌라도에게 요청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죽기 전에 미리 빌라도를 찾아가서 허락을 받았을 것입니다. 빌라도 역시 예수의 시체를 아무렇게나 다루는 것을 원치는 않았을 것입니다. 요셉은 범죄자로 취급받은 사람의 사체마저 외면하지 않는 의인이었습니다.

 

(2)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지낸 요셉(59-60)

 

요셉의 요구에 빌라도는 응답하였습니다. 군인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십자가에서 끌어 내렸을 것이고 요셉은 곧바로 시체를 수습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시신을 깨끗한 세마포로 쌌습니다. 이것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는 요셉이 새 무덤과 새 세마포를 사용했음을 의미합니다. 세마포가 어떤 종류의 옷감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나체 상태의 시체를 급히 덮을 용도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에는 시체에 세마포로 만든 옷을 입혔는데, 본문에서 시체를 쌌다고 표현한 것은 그런 방식의 옷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요셉은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매장해야 하는 급한 상황에서 비참한 대우를 받고 걸레처럼 찢긴 몸을 존귀하게 다루기 위해 최소한의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리고 바위를 뚫어 만든 자신의 새 무덤에 예수님을 두었고 무덤 입구에 큰 돌을 굴려 놓고 갔습니다(60). 마태는 ‘새’ 무덤인 것을 강조합니다. 누가에 따르면 새 무덤은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이었습니다(누가복음 23:53). 십자가에서 처형된 자는 영예로운 곳에 묻히지 못했으나 요셉은 예수님의 시체를 위해 새 무덤을 제공했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자들은 영에로운 곳에 장사하지 못했지만, 요셉은 당시의 범죄자들이 장사된 것과 다르게 예수님을 영예롭게 매장했습니다.

 

(3) 예수님의 장사에 대한 또 다른 증인들(61)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하는 과정에는 증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녀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 맞은편에 앉아 보고 있었습니다(61). 그녀들은 십자가 현장에도 있었습니다(55-56). 61절의 ‘그곳에 … 있었다’는 표현은 55절에서 여인들이 ‘그곳에 있었습니다’는 내용과 유사합니다.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여자들은 십자가 현장에 있었고, 시체가 묻힌 장소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다른 사람들과 달리 요셉과 여자들은 죽은 예수님에게 끝까지 지켰습니다. 마태는 시체와 무덤을 목격한 증인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 아리마대 요셉이 목격자들의 이름입니다.

요셉은 예수님께서 무언가를 기대하고 따른 제자들이나 무리와 달리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다만 예수님을 위해 또는 예수님 때문에 희생합니다. 그는 재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 19장의 부자 청년과 대조됩니다. 부자 청년은 재물에 대한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지 못했으나(19:16-24), 요셉은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낮은 자로 죽은 자의 시신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요셉은 제자도의 좋은 모본입니다.

여자들 역시 참 제자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죽은 메시아의 길을 이들은 끝까지 따릅니다. 여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목격자들 가운데서 더 이상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중심을 차지합니다.

본문의 여성들은 끝까지 예수님과 함께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강한 사람들입니다. 여성들이 하늘나라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에서 소외되거나 주변부로 몰리는 일은 수난 이야기의 의도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믿음 혹은 예수님을 이익의 수단으로 삼는 사람은 더 이상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언제든지 믿음이나 예수의 가르침을 왜곡하거나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최우선 되는 일로 여깁니다. 제자는 얻게 되는 부산물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합니다.

 

돌로 무덤을 지키는 사람들(62-66)

종교 권력은 예수님을 우습게 여겼지만, 그의 영향력을 인정하였습니다. 기득권 유지에 자신의 방해되는 요인들을 제거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살아난다는 이야기가 회자 되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특별 경계령을 내려 원천봉쇄하였습니다. 진짜여서 두려워한 것입니다.

 

62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63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64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65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66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62-66)

 

예수님의 죽음 뒤에 예수님의 죽음을 염려하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제자들이 시신을 탈취한 후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인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1) 무덤을 지키도록 요구한 종교지도자들(62-64)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을 장사한 장면을 잇는 본 단락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무덤을 굳게 지키려는 음모를 꾸미는 내용을 다룹니다. 이튿날, 즉 준비일 다음 날,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빌라도에게 모였습니다(62).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한다는 정보에 따라 속임수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회의를 열었습니다(63).

유대 지도자들은 로마 총독에게는 ‘주’라는 칭호를 사용하면서 진정한 주이신 예수님께는 거짓말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셋째 날까지 무덤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도록 명령해달라고 부탁합니다(64). 그래야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치고는 예수가 살아난 것으로 사람들에게 거짓말하지 않을 수 있다는 논리를 세웁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여전히 백성 가운데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그의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합니다. 또한, 그들은 만일 백성이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말을 전해 듣게 된다면, 순교자가 부활한 것으로 생각해서 메시아 운동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염려했을 것입니다. 순교자가 부활했다는 소문이 도는 것은 순교자가 죽기 이전보다 더 위험한 일이므로 이들은 예수님의 시체를 지킬 병력을 빌라도에게 요청합니다.

 

(2) 종교지도자들의 요구를 수용한 빌라도(65-66)

 

총독 빌라도는 그렇게 하라고 허락합니다(65). 그는 아리마대 요셉에게 예수님을 장사하도록 허락했고 반대쪽의 입장도 들어줍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만인의 요청을 들어주는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경비병은 로마 군인들이며(참조, 28:14)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사용하도록 허락합니다. 또는 ‘너희가 갖고 있다’를 명령형으로 이해하면 빌라도의 경비병을 사용하라는 뜻이 더 명확해집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큰 돌로 무덤을 막았으나 경비병들도 시체를 지킬 목적으로 이 돌을 전혀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하게 막아버립니다(66). 경비병들은 돌과 무덤 사이를 봉인 함으로써 무덤을 안전하게 지켰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을 따른 여인들은 이 무덤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이 무덤을 열 이유는 없으므로, 봉인한 것은 부활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어난 사건임을 입증하는 증거가 됩니다.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자들이 이방인들과 함께 하나님의 계획을 가로막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하나님의 계획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서 인간의 안전장치인 돌을 제거하시고, 하나님의 계획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가로막는 돌은 일시적으로는 성공으로 보일 수 있을지라도 반드시 제거됩니다.


 

세상이 버린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회복하기 위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죽음은 생명이요 부활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묶어둘 수 없었습니다. 부활 신앙은 인생길이 어떠하며, 세상의 진리가 무엇인지 몸소 보여 주신 예수님에 대한 확증이자 그 생명으로의 대담한 초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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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7-04)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장사 되신 예수님

마태복음 27장 45-56절


복음은 최상의 정치이자 세상을 변화시키는 공적인 힘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목표는 개인적 영혼 구원을 포함하지만, 그것을 넘어 인간이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재창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메시아의 죽음은 하나님께서는 의도하신 세상을 회복하기 위한 버려짐이었습니다.

 

  •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장면(45-53)과 백부장과 여인들이 십자가의 증인들로 등장합니다. 마태는 당시의 저술 문화에 따라서 십자가 형벌 자체를 자세히 설명하기보다 그 의미를 구약의 성취와 구원 역사의 관점에서 서술합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45-53)

 

십자가의 비밀은 죽음에 넘겨져 타인을 살리고 만물을 재창조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불의에 의한 부당한 죽음이자 아담의 문제에 대한 종결 선언입니다. 죽음으로 죽음을 무력화하는 하나님의 모략입니다. 죽어가는 예수님을 보며 인류의 총체적 무능과 부패의 실마리를 봅니다.

 

45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46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47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48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49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50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51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45-53)

 

예수님께서는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고통받으신 것은 6시간 정도입니다. 그중에 정오( 제6시)에 시작된 어둠은 제9시까지 3시간 동안 온 땅에 임했습니다(46). 대낮인 해가 떠 있는데, 어두움이 임했다는 것은 초자연적으로 일어난 사건이고(아모스 8:9-10; 신명기 28:29; 예레미야 15:9),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큰 소리로 부르짖어 말씀하십니다. 큰 소리로 부르짖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시편 22편을 인용하여 기도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시편 22:2) ‘엘리’는 ‘나의 하나님’을 뜻하는 히브리어입니다. ‘레마 사막다니’는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하는 아람어입니다.

버림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철저한 외면 속에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46절이 의인의 고통을 담고 있는 시편 22편을 인용한 데서 증명됩니다(27:35,39,43). 아들의 고통은 세상의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경험한 적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는 고통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슬픔으로 기도하면서 호소하신 고통입니다(26:36-46). 예수님께서는 죄인 된 우리를 대신해 버림받으셨습니다.

십자가 아래서 이 소리를 듣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엘리야에게 도움을 호소하는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47). 하나님께 호소했지만 응답이 없자 차선책으로 엘리야에게 희망을 걸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셔서 막대기에 꿰어 예수님으로 하여금 마시게 했습니다(48). 신 포도주는 당시 농부들이 마셨던 값싸고 낮은 질의 포도주로서 하층민들이 사용한 포도주 종류입니다.

49절과 연결해 보면, 사람들은 동정심이나 연민 때문이 아니라 생명을 좀 더 연장해서 정말로 엘리야가 오는지 알아보려고, 호기심과 조롱으로 신 포도주를 제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34절에서는 쓸개 탄 포도주를 마시지 않으셨지만, 목마를 때 식초를 마시게 했다는 내용인 시편 69:21b인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를 성취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받으셨습니다(누가복음 23:34).

 

예수님께서는 다시 큰 소리로 부르짖으셨고 숨을 거두셨습니다(50). 그때 성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둘로 찢어졌고 땅이 흔들렸고 바위들이 갈라졌습니다(51). 그때 무덤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들이 일으켜졌습니다(53).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 후에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성으로 들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났습니다. 마태는 부활 이후에 일어나는 이 사건들을 부활의 이야기가 아니라 수난의 이야기 속에 배치해서 십자가의 죽임이 부활과 직결된다는 점을 부각합니다.

 

성전의 휘장이 찢어진 사건은 여러 의미를 전달합니다. 첫째, 마태는 성전 휘장이 찌어진 것(27:51a)과 묵시 사건(51b-53)을 연결하여 예수님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성취되었음을 강조합니다. 마태는 구약 본문을 사용하여 묵시적 사건들이 지닌 의미를 암시해주고 있습니다(에스겔 37:12-13; 스가랴 14:4-5; 다니엘 12:2). 마태가 사용한 구약 본문들을 보면, 무덤이 열려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나며(에스겔 37:12-13), 하나님께서 임하셔서 성도들과 함께 계시며(스가랴 14:5), 땅의 티끌 가운데 자던 자들이 부활한 것입니다(다니엘 12:2).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성도들의 몸이 살아나는 것은 자기 백성을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된 사실을 가리킵니다.

본문의 성도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난을 감수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성도들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예수님의 죽음은 그런 부활의 길을 열었으며, 마태는 선지자적 시간으로 부활이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강조합니다.

둘째, 성전의 휘장이 찌어진 사건은 하늘에 감추어져 있던 비밀이 게시되었음을 알립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성전의 휘장을 하늘의 궁창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하늘이 열려 보이지 않는 하늘의 뜻이 이 땅에 계시 됩니다. 성전은 우주의 축소판으로 보이지 않는 하늘, 보이는 하늘, 땅과 바다를 상징적으로 담아내는 구조물입니다. 성전은 수직의 우주를 수평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성전의 휘장이 찌어진 것은 하늘의 문이 열린 것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반응으로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자기 백성을 회복하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이 하늘의 진리를 깨닫게 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내려오셔서 자기 백성을 회복하실 일, 즉 임마누엘의 기적이 실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들의 희생에 대한 성부의 반응으로, 즉 전적인 은혜로,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 가운데 임하시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은혜는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죽으심이 복음입니다.

 

예수님 증인들(54-56)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한 첫 사람은 놀랍게도 제자들이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이방’ 백부장과 병사들이었습니다(8:11-12; 21:43).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한 증인들 역시 죽기까지 따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제자들이 아니라,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온 ‘여인들’이었습니다.

 

54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55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56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54-56)

 

사형을 집행한 로마 백부장과 군인들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진신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진시로’는 신앙고백적인 성격을 나타냅니다(예레미야 14:33). 로마 군인들이 고백하는 장면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이방인들에게 하늘의 비밀이 계시되고 구원의 길이 열린 것을 보여 줍니다.

하늘에 감추어진 진리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들이요 하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고난의 길을 선택한 자라는 것입니다. 마태는 하늘이 열려서 하늘의 계시가 알려진 사실을 예수님의 세례(3:13-17)와 변화산 사건(17:1-7)에서 이미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전의 장면들과 달리 이번에는 하나님의 계시(‘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가 하늘이 아니라 사형을 집행한 로마 백부장과 군인들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하늘의 진리가 이방인들에게 전해집니다. 그가 예수님의 신분을 알게 된 것은 아들의 죽음에 대한 하늘의 반응으로 이뤄진 결과입니다! 이로써 마태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이방인들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성취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마태복음 12:18,21; 28:19-20). 로마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은 카이사르를 가리킵니다. 백부장과 군인들은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은 죄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군인들은 이제까지 하나님의 아들인 황제에게 순종했으나 이제 순종의 대상이 바뀝니다.

 

십자가 현장에는 예수님을 위해 많은 여자들이 함께했습니다(55). 여자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따랐고 십자가 현장까지 와서 그의 처형을 지켜보았습니다. 마태는 여자들이 ‘멀리서’ 보았다고 설명합니다. 여자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 위험했기 때문입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실패한 베드로가 멀리서 예수님의 신문하는 것을 본 것처럼 여자들도 실패한 것입니까? 마태가 ‘그곳’ 또는 ‘거기에’를 넣은 것은 여자들이 십자가의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많은 여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간 ‘모든 제자들’과 대조됩니다(26:56). 베드로가 ‘멀리서’ 예수님을 지켜보면서 심문의 결과를 알기 원했으나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에 없었던 것(26:58)과 대조적으로 여자들은 그의 마지막 순간에 참여합니다. 따르고 섬기는 것은 제자도의 언어이므로 여자들이 십자가의 모본 입니다. 특히 갈릴리에서부터 십자가의 현장에까지 따르고 섬겼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변함없이 예수님의 길에 동참하는 제자도의 모본입니다. 결국, 여자들은 무덤까지 예수님을 따르고 부활의 첫 번째 증인들이 됩니다.

마태는 십자가 현장에 있었던 많은 여자들 중에서 세 명을 언급합니다(56). 이들은 그리스도의 마지막 순간에 일어난 사건을 보증할 수 있는 십자가 현장의 생생한 목격자들입니다. 증인으로서의 신뢰도가 훨씬 높았던 남성들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여성들의 이름은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님과 함께했던 유다와 베드로가 예수님을 팔고 부인한 모습과 대조됩니다.


고난받는 메시아는 고통 가운데 있는 개인과 사회를 공감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비극과 고통을 헤아려본 사람만이 우는 이들과 함께 울 수 있습니다. 경청과 공감이 결핍된 사회에서 새로운 길, 생명을 주는 여정을 동행할 하나님의 사람들이 출현하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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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7-03)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무덤에 장사지내신 예수님

마태복음 27장 27-43절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못 박혀 돌아가신 그 마지막 순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성육신하셔서 오신 순간부터 그분의 모든 공생애 삶과 십자가의 삶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최고봉은 바로 십자가로 점점 다가가신 이 고난의 길입니다.

 

  • 본문은 예수님께서 사형판결을 받은 예수님께서 골고다로 끌려가서(27-31), 십자가에 처형당하고(27-31) 십자가에 처형당하고(32-38) 세 부류의 동족에게 수치를 겪는(39-44) 모습을 묘사합니다. 고통과 수치의 상징인 십자가의 형벌과 십자가 아래 인간들의 조롱 속에서도 아들은 끝까지 아버지를 신뢰하기에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십니다.

 

빌라도 관저에서 골고다로(27-31)

고난은 순종을 훈련하게 합니다. 십자가의 길은 사용하지 않기로 한 결정 때문에 무력에 의해 수모를 겪는 길입니다. 제자의 길은 스승보다 배제의 정도가 적을 수 있어도 피할 수 없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삶 전체로 증언한 복음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대가를 지불하는 신앙을 회피해서는 안 된비다. 예수님께서는 고난 중에 인내하심으로 온전한 순종의 본이 되어 주셨습니다.

 

27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30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31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27-31)

 

총독 빌라도의 군인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의 관저로 데려갔고 온 부대가 예수님 주변에 집결했습니다(27). 로마인들은 할 수 있는 한 공개적으로 형벌을 가하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군인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자기들의 자주색 웃을 입혔습니다(28). 왕을 상징하는 표시는 옷, 왕관, 홀입니다. 자주색 옷이 왕을 상징하는 것이었지만, 로마 군인들은 자신들이 입고 있던 주홍색 망토를 입힙니다. 군인들은 황금빛이 나는 왕관 대신 가시덤불을 잘라 머리에 씌웁니다(29). 왕이 잡는 홑을 오른손에 둡니다. 군인들은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만세, 유대인의 왕이여!’라고 조롱합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황제는 자주색 옷을 입고(31) 홀을 들고 앉은 채 만세 ‘왕이여!’라는 백성의 환호를 받았습니다. ‘조롱하다’는 31, 41절에서 반복됩니다. 조롱과 수치는 예수께서 세 번째 수난 예고에서 이미 예상하신 것입니다(20:19). 군인들은 예수께 침을 뱉었고 홀을 빼앗아 가시를 쓴 그의 머리를 때립니다(30). 유대 법정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이방인들의 손에 조롱당하십니다. 군인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고 나서 그들이 입힌 옷을 벗기고 예수님의 옷을 입힙니다(31). 그리고 십자가 처형 장소로 끌고 갑니다. 당시에 십자가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곳을 통과해서 처형 장소로 향했는데, 이는 대중을 공포감으로 몰아넣음으로써 그런 범죄를 행하지 않도록 경고하는 시범 효과를 내기 위함이었습니다.

본문은 유대인의 왕이 이방 군인들에게 조롱당하고 매를 맞는 모습에 초점을 맞춥니다. 성육신하신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이는 경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수치를 당하십니다. 유대인들과 로마 군대에 의해 버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메시아의 길을 가십니다. 자신의 구원을 위해 힘을 쓰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수치를 감내하며 한 걸음씩 십자가의 길을 가십니다(이사야 50:6). 이러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53장에 묘사된 고난의 종입니다.

 

군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함(32-38)

신체적인 핍박은 정신을 파괴하고 비정상으로 만듭니다. 왜 정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가 복이 있고, 하나님의 나라가 고통을 받은 자에게 주어지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복음은 자유와 해방의 복음입니다. 학대받는 자를 외면한 채 복음을 말할 수 없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십자가에 세워진 장면을 소개합니다.

 

32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33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34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35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36거기 앉아 지키더라 37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38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32-38)

 

본문에서 ‘그들이 나갔을 때’는 예루살렘 도성을 나간 장면을 뜻합니다(32). 십자가 처형은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시행됐기 때문에 군인들은 예수님을 끌고 관저를 벗어나 십자가 처형장으로 향합니다. 사형수는 십자가의 가로대를 직접 운반해야 했습니다. 수직 부분은 이미 처형장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연이은 심문, 대중 앞에 노출된 재판, 조롱과 매질 등으로 처형장으로 이동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군병들은 예수님을 그대로 두면 가는 도중에 사망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레네 출신 시몬에게 강제로 지고 가도록 시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골고다에 이르렀습니다(33). 당시에 군인들은 십자가에 달린 죄수에게 먹을 것을 주도록 허락했습니다(34). ‘콜레’는 간, 쓸개, 쓴 쑥과 같이 쓴맛을 내는 물질을 가리킬 때 사용된 용어입니다. 몰약의 맛과 쓸개 맛은 같은 것으로, 마태는 군인들이 쓴맛을 내는 풀을 포도주에 넣은 것을 설명합니다. 군인들이 마취 효과를 위해 쓸개를 탄 포도주를 준 것이 아닙니다. 시편 69:21-22에서 시편 기자는 원수들이 자신을 모욕하려고 쓸개를 음식물로 주는 것으로 고통을 겪습니다. 마태는 쓴 물질을 시편 69편의 ‘쓸개’로 명명해서 예수님을 시편에 나온 고통당하는 의인으로 묘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주신 쓴 잔(26:39-42)을 선택하시고 인간이 준 쓴 약을 마시지 않으십니다. 이제 군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매달았습니다(35).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누었으므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입니다. 수치스럽게 만들려고 죄수를 십자가에서 벌거벗긴 것은 로마의 십자가 처형 방식이었습니다. 시편 22:18이 배경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도 사람들이 속옷을 제비 뽑는 것은 나체 상태의 처형을 의미합니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시편 22:18) 군인들은 처형당하게 된 이유를 제시할 목적으로 예수님의 머리 위쪽에 명패를 붙였습니다. 그리고 강도와 같이 십자가 처형을 받은 장면은 예수님께서 강도와 같은 수준으로 취급받았음을 암시합니다(이사야 53:12).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왕은 예루살렘 밖에서 벌거벗겨진 채 수치와 모욕 가운데 처형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자를 치듯이 아들에게 형벌을 가하는 장면은 글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잔인합니다. 본문이 묘사하는 십자가 형벌의 과정은 대중적인 수치를 주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군인들이 십자가에 힘없이 달려 찢어지고 늘어진 몸의 예수님 위에 유대인들의 왕이라는 명패를 붙인 것은 그를 대중에게 경고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함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체 상태로 십자가에 매달아 두는 것으로 공개적인 수치를 준다. 하나님의 아들이 벌거벗겨져 저주를 상징하는 십자가에 달리셨다! 이는 죄인들의 수치를 가려주고 회복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의 수치가 이 땅의 죄인들에게는 한량없는 은혜입니다.

 

예수님을 조롱하는 세 부류(39-44)

사람들의 죄악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누가 누가 더 많이 흉악하게 범죄할 수 있는지 경연대회를 한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인간의 악한 죄성은 꺾이지 않습니다. 인간의 죄성은 무죄한 예수님의 보혈 능력을 알면, 해결할 수 없습니다.

 

39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39-44)

 

앞 단락에서는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조롱했다면 본문에서는 동족을 대표하는 군중, 유대 지도자들, 심지어 십자가의 강도들에게서 조롱당하십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모욕하면서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비웃습니다(40).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놀립니다(41-42). 하나님을 신뢰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이 구원하실 것이라고 조롱합니다(43). 특히 백성들은 예수께서 구원하는 역할을 할 줄로 기대하고 호산나를 외쳤으나(21:9,15) 구원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보고 자신마저 구원할 수 없는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본문은 예수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강조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남을 구원하지만, 자신을 구원하지 않으십니다. 유대인들이 놀리면서 예수님에게 던진 말의 내용 자체는 옳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구원하지 않고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성육신하셨다(1:21; 8:25; 9:27, 14:30). 고난의 종으로서 아픈 자들을 치유하셨습니다(8:17; 이사야 53:4).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대속물로 지불하러 오셨습니다(20:28), 주의 만찬을 통해 서도 많은 사람을 위해 피와 살을 주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버림받고 조롱당해 죽는 순간에도 아버지의 뜻과 사랑을 신뢰하십니다. 우리는 세 부류가 조롱하면서 예수님의 신뢰 심을 자극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온 세상으로부터 조롱당하는데도 어떤 도움도 얻지 못한 채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님을 보면서 그에게는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는다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특히 신뢰심을 자극하는 소리는 사탄의 광야 시험을 떠올립니다. 사탄은 광야 시험 기사에서 예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돌을 떡으로 만들고(43)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했습니다(46). 하나님 부재의 상징처럼 보이는 십자가의 수치에서도 아들은 끝까지 아버지를 신뢰합니다. 아들에게 아버지의 함께하심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었기에 죽기까지 순종해서 하나님의 계획, 곧 구원사의 목표를 성취하실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하나님의 부재가 아니라 역사에 강력히 개입하시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애쓰는 인생에 닥치는 시련이나 당혹스런 일들마저도 하나님의 임재와 간섭을 의미합니다. 성자의 특징이 성부에 대한 신뢰였듯이 신자의 특징도 하늘 아버지에 대한 신뢰여야 합니다. 사탄은 언제나 택하신 자들의 신뢰심을 건드립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가 어느 순간까지 신뢰해야 하는지 보여 주는 살아 있는 교훈입니다.


참담한 고난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실한 묵언으로 아버지의 뜻을 행하심으로 그분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고난 없는 영광의 면류관은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사이비입니다. 번영복음과 성공신학은 자아부인 없는 십자가로 진리를 왜곡하는 괴설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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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7-02)

 


본디오 빌라도의 법정에 서신 예수님

마태복음 27장 11-26절


 

공평과 정의에 대한 예언자적 외침은 교회가 갖고 있어야 할 영적 자산입니다. 예언자적 영성은 해로운 상상력을 갖고 현실 안주와 타협을 거부합니다. 당시의 정치 권력은 사형 선고를 할 만한 협의를 예수님께서 발견하지 못했으나, 제국의 안정을 택했습니다.

 

  • 빌라도의 손에 넘겨진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십니다. 빌라도의 첫 질문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입니다. 고소자들의 고발 내용이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침묵하십니다. 바라바와 예수님께서 유월절 특별 사면 대상의 후보에 오릅니다.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선동된 무리가 바라바를 선택했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 강력히 외칩니다. 무리의 거센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던 빌라도는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줍니다.

 

빌라도와 예수님(11-19)

비폭력 침묵이야말로 세상이 어두운 밤으로 덮였을 때 진실 규명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진실한 침묵은 빌라도를 당황스럽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권력, 섬기는 리더십으로 제국의 이야기에 도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함과 모살로 가는 길에서 구차하게 자신을 변호하지 않으셨습니다.

 

11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12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13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14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15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16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17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18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19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11-19)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빛이 세상에 왔지만, 세상이 그 빛을 거부하는 모습을 잘 보여 줍니다(요 1:9-11). 비록 초라하게 법정에 서 계시지만, 예수님께서 왕으로 오신 메시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종교 지도자들의 고발 내용에 침묵으로 일관하십니다.

 

(1) 빌라도에게 심문받는 예수님(11-14)

 

예수님께서 총독 빌라도 앞에 서 있습니다(11). ‘∼ 앞에 서다.’는 구약과 유대교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피고의 위치와 모습을 그려주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세상의 재판장으로 와서 재판하는 자리에 앉을 자가 재판을 받을 자 앞에 서 있습니다.

총독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말이 옳다’고 유대인의 왕인 것을 인정하십니다. 마태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고발한 내용을 추가합니다(12).

산헤드린 공회, 곧 유 법정은 심문의 결과를 들고 로마 법정에 예수님을 고발합니다. 이는 빌라도를 압박하는 의도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로마와 유대의 질서를 위협하는 인물로 재빨리 처리해야 할 것을 강조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고소를 듣고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참조 26:62). 묵묵히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과 같은 고난의 종을 연상하게 합니다(사 53:7). 로마법에서는 고소한 부분에 대해 침묵하는 자는 죄를 인정하는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빌라도는 변호할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13-14). 예수님께서는 이미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음의 잔을 마실 것을 다짐했으므로 자신의 생명을 위해 투쟁하거나 변호하지 않고 그저 자신이 가야 할 운명의 길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2) 예수님 대신 바라바를 풀어준 빌라도(15-19)

 

총독 빌라도는 식민지 백성의 문화를 존중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정치적 행위로 죄수를 풀어주려 합니다(15). 빌라도는 예수님 옆에 바라바라는 이름의 유명한 죄수를 데리고 옵니다. 바라바는 폭력으로 로마에 대항해서 싸운 혁명가로 보입니다(막 15:7; 눅 23:19). 바라바의 이름은 ‘예수 바라바’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태는 두 예수, 진짜 메시아와 가짜 메시아를 평행으로 배치합니다.

빌라도는 군중을 향해 직접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합니다. 그런데 빌라도의 질문은 편향적입니다. 그는 백성을 위해 혁명을 시도한 사람을 예수 바라바, 곧 ‘예수, 바라바’로 부르지만.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를 불리는 예수’로 칭합니다. 왜 빌라도는 이런 판단을 한 것입니까?

이는 빌라도가 유대 지도자들이 시기심 때문에, 즉 예수님을 정치적 이슈로 자신에게 넘긴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18). ‘시기’는 타인의 성공에 대한 분개를 의미합니다. 빌라도는 유대 지역을 통치하는 권세를 가졌고 특히 명절에는 예루살렘 성전 옆에 있는 안토니오 성채에 거주하면서 유대 명절의 동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예수님에 대한 군중의 기대가 하늘을 찌를 정도였음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인기 때문에 빼앗길 수 있는 통치 권위와 존경 받는 자리를 침해받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빌라도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의 충돌은 반드시 피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이며, 그를 제거하면 빌라도는 정치적 안정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빌라도의 관심은 진리가 아니라 오직 자신의 정치적 안정입니다. 로마의 정의는 식민지의 백성 한 명에게, 그것도 큰 절기에 엄청나게 많은 무리 가운데 있는 한 사람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유대인의 왕으로 기소된 자를 그냥 석방해 주는 것 역시 빌라도에게는 정치적 부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빌라도에게는 처음부터 진리를 따르려는 의지가 없었습니다. 빌라도가 판결하려던 순간에 빌라도의 아내는 꿈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께서 의인이라고 말합니다(19).

 

본 단락은 정치적 안정만 생각하며 진리의 판결을 외면하는 총독과 중간 중간에 군중을 설득하는 유대 지도자들과, 설득 당해 바라바의 석방과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요구하는 군중 사이에 고독하게 서 있는 메시아를 주목하도록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변호하지 않지만, 빌라도의 말과 빌라도 부인의 꿈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고난 받는 의인인 사실이 드러납니다.

무지와 탐욕의 소리로 시끄러운 중에 예수님께서는 묵묵히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고난의 길을 가십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으며, 재판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빌라도의 정치적 실리주의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진리는 고난을 수반하고 정치는 타협과 실리를 추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길을 신원하시고 실리를 추구한 자들에게 책임을 물으십니다. 고난의 종의 침묵(이사야 53:7)은 실리주의를 추구하는 신자들의 길을 경고합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예수님(20-26)

모든 결정에는 자신의 책임이 따릅니다. 그러므로 부정적인 결정인 죄에 대해서도 대가를 반드시 받습니다. 영적으로 무지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데 앞장선 유대인들은 몰랐기 때문에 용서가 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은 역사 속에서 예수님의 피에 대한 대가를 철저히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결정에도 말없이 순종하심으로 하나님 뜻을 온전히 이루십니다.

 

20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21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 22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23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24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26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20-26)

 

빌라도가 아내의 말을 듣고 고민하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틈을 주지 않고, 바라바를 요구하도록 군중을 자극합니다(20). 총독은 두 사람 중에서 누구를 석방하기 원하는지 묻습니다. 군중의 선택은 바라바입니다.

빌라도는 다시 ‘그리스도라 불리는 예수’(17)라고 하면서 그를 어떻게 해야 할지 묻습니다(22). 군중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칩니다. 거짓 메시아로 판명된 자들의 운명은 십자가에 달리는 것이었기에 구원자를 기다렸던 군중은 구원자를 죽이라고 요구합니다.

빌라도가 군중에게 예수님께서 무슨 악을 행했는지 묻습니다(23). 왜냐하면, 십자가 처형이 얼마나 무서운 형벌인지 빌라도는 잘 알고 있고, 예수님께서 그런 처형을 받을 만한 죄를 지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서 유대 군중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게 만든 주도적 역할을 하며, 빌라도는 재판의 주권을 갖고 있는 총독이면서도 수동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처음부터 진리대로 실천하려는 의지가 약했기에, 설득당한 군중의 외침(23)과 폭동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에(24) 겁을 먹고 진리를 외면하고 맙니다. 이제 군중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빨리 판결하지 않는 것 때문에 폭동을 일으키려고 합니다. 빌라도는 손을 씻음으로써(24) 자신은 재판 결과에 책임이 없다는 표시를 보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당하라고 말합니다. 빌라도는 ‘너희가 알아서 하라’고 말하는데, 이는 대제사장들이 유다에게 ‘네가 알아서 해라.’라고 말한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27:4). 빌라도의 말은 같은 말을 들은 유다가 나가서 자살한 것처럼 예수님의 피를 흘리게 한 유대인들의 운명,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사건을 암시합니다.

20절의 ‘군중’은 25절에서 ‘모든 백성’으로 바뀝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성’ 중에서 병들고 약한 자들을 치유하셨으나(4:23) 이 백성은 예수님을 죽이라고 요구합니다. 모든 백성은 빌라도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으면 자신들과 자녀들이 지겠다는 의미로 ‘그의 피를 우리와 우리의 자녀에게’ 돌리라고 외칩니다.

결국, 빌라도는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처형하도록 명령합니다(26). 세상을 심판할 재판장이 지금은 죄인들의 채찍에 맞고 사형장으로 보내집니다. 채찍질은 십자가 처형 전에 실행한 형벌이었습니다. 채찍은 여러 가닥의 가죽 끈으로 되어 있고, 끈에는 못이나 유리 조각이나 돌과 같이 날카로운 물질이 붙어 있어서 채찍질로도 뼈가 드러나고 죽기도 했습니다(요세푸스, 유대 전쟁사 6.304).

 

예수님의 무죄가 드러날수록 그를 둘러싼 인간의 죄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안녕을 위해 거짓으로 백성을 선동합니다. 백성은 사랑과 회복의 나라를 가지고 온 예수님을 버립니다. 의인의 피를 흘린 것에서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눈 먼 유대 지도자들의 길을 선택한 백성의 운명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반란을 로마가 제압하는 것으로 끝날 것입니다. 눈앞에 있는 구원자를 외면하고 심판의 길을 택한 예루살렘의 군중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든 존재합니다. 군중의 다수결이 진리는 아닙니다. 광장에 모인 군중의 욕망이 강할수록 그들은 쉽게 선동 당합니다. 선동당하는 자들은 선동하는 자들의 운명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은 성경 말씀이 지시하는 방향에 익숙해져야 선동당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진실의 편에 서야 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무죄라는 것을 알고 놓아주려 했으나 끝까지 예수님의 편에 저지 못합니다. 그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종교지도자와 군중의 손을 들어줍니다. 우리는 진실과 거짓 정의와 불의 중에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회피한다고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도 사람들이 아닌 날 위해 죽으신 예수님 편에 서서 진실되게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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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7-01)

 


예수님을 판 은 삼십을 돌려주고 자살한 가룟 유다

마태복음 27장 1-10절


종교인이라면 죽을 만한 사람도 살리는 일을 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영혼의 의사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잘 가르쳐 주어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인 용서와 긍휼도 잘 알게 해주어야 하는 직분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대제사장과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을 돌아볼 만큼 겸손하지도 않았고, 교만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들이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면, 무모한 짓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 예수님의 심문이 끝나고 확정되자 새벽 미명인데도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예수님을 결박한 되 총독 과저로 이송해 넘겨줍니다. 예수님께서 넘겨진 후 사형 선고를 받자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을 찾습니다. 자신으 ㅣ잘못을 뉘우치며, 받은 은 삼십을 돌려줍니다. 그들이 받지 않자 성전을 향해 던지고 나가 비참한 최후를 맞습니다. 제사장들은 그 돈으로 밭을 구입해 나그네의 묘지로 삼으며, 예레미야(스가랴)의 예언이 성취됩니다.

 

부패한 권력(1~2)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롬 13:1).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신 권세를 악한 일에 사용하는 지도자에게는 심판이 따릅니다(눅 1:52 참조). 부패하고 탐욕에 물든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의 권력으로 하나님 아들을 심판하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그들은 악을 행하는 데 빠르게 움직입니다.

 

1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2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1-2)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을 밤새도록 심문했고, 날이 밝자 모든 구성원이 참여하게 됩니다. 소집 목적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이미 짜놓은 각본에 따라 밤새도록 심문해서, 불과 하룻밤 사이에 예수님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결정하고는, 로마 법정에 기소할 죄목을 찾아 예수님을 총독 빌라도에게 넘겼습니다(2). 그들이 예수님을 사형에 처할 수 없었던 것은 로마 제국이 유대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해 유대인들에게 사형할 수 있는 권한을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요 18:31).

권력은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권력과 힘은 약자를 보호하고 정의를 세우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도자는 자기 위에 있는 권세자를 항상 기억하며, 모두를 선하고 의롭게 이끌어야 합니다.

 

가룟 유다의 죽음(3-10)

회개는 신앙의 첫 걸음이자 의인으로 칭함을 받는 최선책입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인생은 회복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회개와 후회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회개는 하나님께 시선을 두는 것이고, 후회는 자신을 향해 눈을 돌리는 것입니다. 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가룟 유다는 잘못된 결단으로 그릇된 행동을 볼 수 있습니다.

 

3그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3-5)

 

본문의 핵심 용어는 유다가 종교지도자들에게서 받았다가 들려준 ‘은 삼십’(27:3,6,9), 곧 ‘핏값’입니다. ‘무죄한 피’ → ‘피의 값’ → ‘피의 밭’의 순서는 죄 없는 예수님의 목숨은 하찮은 값에 매겨졌지만, 비극적인 운명을 상징하는 피가 하나님의 섭리라는 관점에서 볼 때 어떤 미래적 가치를 지니는지를 보여 줍니다.

무죄한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의 책임 부분에 줍니다. 무죄한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의 책임 부분에서는 인간의 악에 의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섭리 차원에서는 구원 역사를 담은 성경의 성취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 예수님을 판 은 삼십을 돌려줌(3)

 

예수님께서 유죄 판결을 받고 빌라도에게 넘겨지자, 가룟 유다는 이러한 과정을 보면서 후회합니다.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돌려주었습니다(3). 은 삽십은 직접 대제사장들을 찾아가서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조건으로 거래를 해서 받은 액수입니다(26:14-16). 은 삼십과 관련 표현은 본 단락에 다섯 번 등장하는 어휘로서(3,5,6,7[이것으로],9; 스가랴 11:12-13),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상징합니다. 여기서 마태가 사용하는 단순 과거형인 ‘돌려주었다’는 원래 돈이 나온 출처로 되돌려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돈은 원래의 출처로 돌아가게 되었으므로, 대제사장들이 일하던 당시의 성전은 무고한 자를 죽이는 데 필요한 돈을 저장한 곳이 됩니다. 성전은 이스라엘의 죄를 위해 속죄 제사를 드리는 공간이 돼야 하지만, 대제사장들은 성소의 보고에서 무죄한 피의 값을 위해 은 삼십을 지불했고 그 돈이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돈을 지급한 대제사장들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린 직접적인 책임을 져야 하며, 무죄한 피의 값으로 얼룩진 성소에 심판의 그림자가 드리워집니다(23:35). 또한,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이미 책망하신 대로 성전은 더러운 이득을 챙기려고 모의하는 자들이 득실거리는 강도의 소굴이 되었음을 보여 줍니다(21:13).

 

(2) 가룟 유다의 자살(4-5)

 

가룟 유다는 무죄한 자의 피를 넘김으로써 죄를 지었다고 말합니다(4).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네가 알아서 할 일이다’라고 말합니다. 즉, 유다의 책임이니 자신들이 더 이상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합니다. 유다는 돈을 던지고 나가서 목을 매달아 자살했습니다(행 1:16-20). 사도행전의 묘사와 조화를 시킨다면 유다는 목을 매었다가 땅에 떨어져 창자가 터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는 유다의 죽음을 최후 심판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택한 길이나 명예로운 방식으로 표현하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합니다. 유다의 행위(‘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는 앞에 나온 베드로의 행위(‘…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26:75)와 대조됩니다. 부활 이후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난 장면과도 대조됩니다. 이 장면 앞에 베드로의 배신 사건(26:69-75)이 나오는데, 베드로도 후회했으나, 예수님을 향해 달려가 부활의 목격자와 증인이 됩니다.

 

뉘우침 혹은 후회는 회개를 위한 첫 단계입니다. 뉘우침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돌이키는 것을 뜻하는 회개는 죄를 짓기 이전의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무죄한 피의 값(6-10)

죄의 대가든 생명의 값이든 궁극적으로 무언가를 남기게 됩니다. 당신은 무엇을 남기는 인생이 될 것입니까?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의 실수에 괴로워하는 가룟 유다에게 조금도 동정하지 않고 철저하게 외면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예언을 성취하고 있었습니다.

 

6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 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7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8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9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10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6-10)

 

대제사장들은 가룟 유다가 던진 은 삼십을 받고는 ‘피의 값’이라고 부릅니다. 은 삼십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린 대가였습니다. 유다가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판 것은 스가랴 11:13의 암시로 26:15에서 이미 언급되었고, 9절에 다시 나옵니다.

대제사장들은 이 돈을 성전의 보고에 두는 것은 율법의 규정에 맞지 않다고 보았습니다(12.2:14:4; 참조. 신명기 23:18: 역대상 22:8-9). 그런데 스가랴 11:13에는 ‘토기장이’이지만, 마태는 ‘보고’를 사용합니다. 토기장이는 토기를 만드는 사람 또는 성전에서 귀금속 헌물을 처리한 기술자를 뜻했기 때문에, 마태는 스가랴서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진 것을 성전의 보고에 던진 것과 같은 의미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대제사장들이 나그네들을 위해 산 땅은 ‘피의 밭’으로 불립니다(행 1:19). 이곳은 마태복음이 기록되기 전, 가룟 유다가 자살하기 이전에 이미 피의 밭으로 불렸습니다. 9-10절에서 마태는 대제사장들이 무죄한 피의 값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구입한(27:6-8) 사건을 구원 역사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9절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열 개의 성취 공식 중 마지막입니다(1:22; 2:15,17,23; 4:14; 8:17; 12:17; 13:35; 21:4).

마태는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의 값과 이 피의 값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스가랴 11:13을 예레미야 18, 32장과 함께 사용합니다. 유다의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산 것은 스가랴 11:13과 가깝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삯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 개를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슥 11:13). 그런데 마태는 스가랴 11:13을 인용하지만, 구원 역사의 의미를 예레미야서의 관점에서 해석하기 때문에 ‘예레미야를 통하여’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는 선물의 상자는 스가랴서인데 그 내용은 예레미야서인 것과 같습니다.

스가랴 11:13과 연결되는 예레미야 본문은 18-19, 32장입니다. 토기장이의 옹기와 밭을 구입하는 이야기는 각각 예레미야 18장과 32장에 나옵니다. 18장을 보면, 예레미야는 토기장이의 집을 방문하는데, 토기장이는 진흙으로 만든 토기를 깨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듭니다(렘 18:4). 이는 하나님께서 한때 보살폈으나 악에서 돌이키지 않는 백성과 도성을 파멸시킬 자유를 갖고 계심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이어서 예레미야는 토기장이의 옹기를 사서 그것을 깨뜨립니다(렘 19:1,10). 이는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예고하기 위함입니다. 이 예언을 전하도록 예레미야가 보냄을 받은 장소는 힌놈의 골짜기입니다(렘 19:2). 한편, 32:6-15은 밭을 사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32:6-15에서 선지자가 밭을 구입한 시기는 바벨론 군대에게 예루살렘이 포위된 때였습니다. 바벨론의 땅이 되고 백성은 포로로 끌려갈 것인데도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근처의 밭을 산 행위(예레미야 32:8-14)는 언젠가 하나님의 백성이 회복될 희망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게헨나)에서 아들들과 딸들을 우상 몰렉에게 제물로 바칠 정도로(예레미야 32:35) 가증하게 행동해서 심판을 받았으나,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회복해서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전합니다(렘 32:37-44).

예수님께서는 스가랴 선지자가 말한 이스라엘의 목자-왕으로 오셨지만, 백성은 은 삼십이라는 하찮은 가치로 예수님의 값을 매겼습니다. 값싸게 치러진 예수님의 값은 토기장이의 밭을 사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무죄한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의 악에 의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섭리 차원에서는 구원 역사를 담은 성경의 성취를 뜻합니다. 마태복음 27:9-10에서 예레미야 32장을 사용한 것은 무죄한 자의 피로 구입한 피의 밭은 역설적으로 사람들이 회복될 것이라는 미래의 희망을 암시합니다(참조, 23:39, 27:52-53). 이 밭은 나그네들을 위한 용도였으므로 예수님의 죽음은 모든 민족을 위한 것임을 암시합니다(28:19-20). 핏값으로 무덤을 산 사건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직후에 성전의 휘장이 열리고 무덤이 열려 잠자던 성도들의 몸이 일어나는 기적과도 관련됩니다. 인자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 즉 몸값으로 지불하기 위해 오셨기 때문에(20:28) 죄인들이 그 대가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핏값을 값싸고 하찮게 매깁니다. 그러나 그의 피는 어떤 사람이라도 회복시키는 값어치를 지녔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핏값을 싸게 여기거나 그것에 관심을 두지 않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세상을 회복하는 길을 열었습니다. 세상의 소망, 가정의 소망, 나의 소망은 예수님의 보혈뿐입니다.


 

참된 회개는 후회를 포함하지만, 후회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베드로도 예수님을 부인했고 가룟 유다도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예수님께 큰 잘못을 했지만, 그들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베드로는 심히 통곡하며 회개함으로써 초대교회의 지도자로 회복되었지만, 유다는 죄책감에 스스로 목매어 죽음으로써 영원한 저주의 이름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후회할 만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지만 일단 돌이킬 수 없다면, 그로 인해 더 이상 후회할 만한 일들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를 가장 괴롭게 수치스럽게 만든 일은 무엇입니까? 더 큰 후회를 만들지 말고 큰 회복을 기대하며 하나님께 돌아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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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6-04)


하나님 아들임을 시인한 예수님과 부인한 베드로

마태복음 26장 57-75절


어떤 상황에도 당신은 주님을 인정할 준비가 되었습니까? 당신과 주님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떨어져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서 정체성을 어떤 상황에서도 인정할 때, 주님도 당신을 인정해주실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닭이 울 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통곡하였습니다. 자신의 무지를 알기 시작한 것입니다.

 

  • 제자들은 모두 도망치고 홀로 붙잡힌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의 공관으로 끌려옵니다. 베드로가 멀찍이서 뒤를 쭟으며 진행 과정을 목격합니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의 각본에 따라 재판이 진행됩니다. 일차적으로 사형이 언도되자 예수님에게 폭력과 수치가 가해집니다. 그 시각 공관 뜰에 있던 베드로 역시 비공식적 심문받게 됩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강력하게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합니다.

 

유대 법정에 선 예수님(57-68)

탐욕과 불의에 물든 권력은 거짓과 가짜 뉴스를 생산합니다. 권력이 남용된 곳에서 실체적 진실을 밝히려면 생명의 대가를 지불 해야 합니다. 신성모독죄는 배제와 쉬운 제거가 가능한 안성맞춤의 카드입니다. 데제사장들의 기득권의 날조와 교살 의지를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다.

 

57예수를 잡은 자들이 그를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58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 59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60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61이르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62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63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64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65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그가 신성 모독 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신성 모독 하는 말을 들었도다 66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대답하여 이르되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67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68이르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57-68)

 

본 단락은 가야바와 예수님의 대립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과 가야바를 대립시켜서 누구의 권위가 더 높은지를 보여 주려고 시도합니다. 심문 장면을 통해서 예수님과 가야바의 충돌에 나타난 예수님의 정체가 무엇인지, 예수님의 (종말의 하늘) 법정과 가야바의 (땅의) 법정의 대조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체포한 자들은 그를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끌고 갔습니다(57). 산헤드린 공회는 대제사장의 집과 같이 별도의 장소에서 열릴 수 있었습니다. 무리에게 체포되셔서 가야바의 집에 새벽까지 심문을 받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께서 아침과 저녁에 두 번 심문을 받았다고 언급합니다.

잠시 장면이 바뀝니다(58).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 대제사장의 집까지 왔습니다. 그는 여전히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과 거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마태는 초점을 다시 예수님의 심문 장면으로 돌립니다(59). 유대 법정은 ‘거짓 증인들’에게서 ‘거짓 증언’을 찾고자 합니다. 유대 법정은 예수님을 죽일 권한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밝혀내서 로마(또는 빌라도)의 법정을 압박할 사유를 찾고자 합니다. 거짓 증언을 할 사람들은 많이 왔지만 산헤드린은 거짓 증언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60-61). 두 증인의 증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침묵하고 계셨기 때문에 대제사장은 예수님의 대답을 재촉합니다(62), 예수님께서는 침묵하십니다(63), 예수님의 침묵은 고난 받는 종의 침묵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사 53:7). 자신의 고난이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임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진실을 변호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침묵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사 53:7). 자신의 고난이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임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진실을 변호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침묵이 길어지자 대제사장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걸고 맹세하면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인지 말할 것을 요구합니다(63).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아들인지 묻자 예수님께서는 ‘네가 말하였느니라’라고 대답합니다(64). 당시에 누군가 자신이 그리스도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자신이 신이라고 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야바의 정죄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64)는 예수님의 선언 뒤에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신성모독을 이해하는 열쇠가 됩니다. 64절은 시편 110:1과 다니엘 7:13-14을 인용한 내용으로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신적인 위치에 있다고 밝힙니다. 64절의 배경이 되는 다니엘서 7:13-14은 하늘 의회(보좌/법정)의 전형적인 본문입니다. 구약과 유대 묵시 문헌에서 하늘 의회의 주요 기능은 재판입니다. 유대 법정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신의 위치에 놓으며 유대 지역의 안정을 위해 세움 받은 자들을 능멸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주장은 신적인 권위를 부여받아 이스라엘의 안정을 책임지고 있다고 믿었던 유대 지도자들에게는 큰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옷을 찢으면서 신성모독의 죄로 예수님을 정죄합니다(65). 예수님께서는 하늘 법정의 그림으로 자신이 천상 세계에 속한 신적인 존재요 하늘 법정에서 산헤드린을 재판할 것을 암시하여, 신적인 권위를 부여받은 지도자들, 그것도 대제사장을 공격했기에, 가야바는 예수님을 향하여 ‘신성모독’이라고 외칩니다. 어느 법정, 누구의 권세가 더 강한가? 정답은 예수님과 하늘 법정입니다. 가야바는 지성소에 들어가는 특권을 지녔기에 하나님의 권위를 부여받았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인자인 예수님께서는 지성소의 본체인 하늘 또는 하늘 보좌에 앉을 것이며 하늘의 구름을 타고 하늘 법정을 주재할 것입니다. 땅의 현실은 예수님께서 대제사장과 유대 법정이라는 최고의 권세 앞에 죄수로 서서 치욕을 당하는 모습이지만, 하늘의 진리는 이 죄수가 하늘과 종말의 심판자로 와서 그들을 앞에 세워 재판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예, 25:31-32). 미래에 일어날 대역전의 암시는 하늘의 뜻을 따르는 자들이 사람들 앞에서 그들의 주를 부인하지 않도록 격려합니다(참조 10:32-33).

 

베드로의 부인과 통곡(69-75)

수련 없는 신앙은 갑 속에 든 칼과 같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껍데기 신앙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진리에 기초한 담대한 신앙이 대조됩니다. 형식적인 신앙은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에 그 진상을 낱낱이 드러냅니다. 제자도는 평생 배움의 공동체 안에서 예수님을 닮기를 연마하는 것입니다.

 

69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70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71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72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73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74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75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69-75)

 

유대 법정에서의 재판 중에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바깥뜰에 앉아 있었습니다(69). 한 여종이 베드로 앞으로 와서 그의 얼굴을 보고는 예수님의 일행인 것을 알아챕니다(70). 예수님께서 심문을 받는 중이고 그 강도가 세지면서 베드로의 마음에 두려움이 심해졌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과 어떤 관련도 없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70). 베드로는 앞문으로 갑니다(71). 이는 자리를 떠나 도망하려는 의도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여종이 베드로를 가리켜 나사렛 예수님과 함께 있던 자라고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맹세를 하면서 예수님을 부정합니다(71). 예수님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잠시 뒤에 옆에 서 있던 사람들이 베드로의 갈릴리 지방 억양을 듣고는 예수님과 함께 있던 자가 틀림없다고 말합니다(73).

베드로는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맹세합니다(74). 그때 닭이 울자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예언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베드로는 비통하게 울었습니다. 마음이 찢겼습니다.

 

베드로의 몰락은 그가 연약한 인간임을 드러냅니다. 베드로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계시에 가장 근접했고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던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성경의 기록에서 전에도 없고 후에도 없는 기적, 곧 물 위를 걷는 수준의 믿음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위협 앞에서 얼마 전에 자기 입으로 내뱉었던 고백을 잊어버리고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마태는 다른 복음서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베드로를 최고의 제자로 묘사하지만 동시에 연약한 인간임을 가감 없이 드러냅니다. 베드로의 모습은 인간의 연약함을 볼 수 있도록 만듭니다. 아무리 최고 수준의 훈련을 받은 신앙인이라 하더라도 연약한 인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닭이 세 번 울고 나서 통곡한 모습은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사실적이고 진솔한 상태입니다. 오만은 타락의 지름길입니다. 예수님의 뜻대로 사는 것에서 오는 장벽을 무서워하면서도, 끊임없이 실제 모습을 감추며 강한 척하는 사람은 일시적인 존경과 관심을 얻을 수는 있겠으나 무너질 때는 한순간입니다. 신앙의 영웅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배신과 부인과 통곡을 통해서 지도자를 영웅시하는 일을 조심해야 합니다. 향유 부은 여자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에 따르면 복음은 주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의 헌신과 함께 전해지고 그 삶이 기억되는 것이지 그 사람의 이름이 우상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뿐만 아니라 구약에 등장하는 위대한 인물들은 연약한 인간들이었습니다(모세, 노아, 다윗, 솔로몬 등).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일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와 같은 위치에 있는 지도자를 영웅시하지 않을 때 교회도 건강하고 그 지도자도 몰락의 길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많이 모았거나 능력 있는 은사를 행하거나 화려한 설교로 청중을 끌고 다닌다 할지라도 한 방에 무너질 수 있는 연약한 인간임을 본인도 알고 보는 이들도 알아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긍휼 외에는 베드로의 회복을 설명할 방법은 없습니다. 베드로도 하나님의 긍휼이 없었다면 다시 복음 사역을 위해 쓰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몰락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0:32-33에서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시인하면 하늘에서도 그 사람을 부인하거나 시인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비추면 베드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이 보여 주는 그림을 보면, 하나님의 긍휼로 그는 다시 세움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인간임을 솔직히 인정하고 통곡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을 구원 역사에 쓰십니다.


 

깨어 기도하지 못할 때, 순식간에 넘어지게 됩니다. 사람들이 베드로의 말씨를 문제 삼으며 그가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라 다그치자 그는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예수님을 세 번째 부인합니다.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했던 큰 소리가 죽어도 주님을 모른다는 큰소리로 바뀐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깨어 기도하지 못하고 세 번이나 잠들었기에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게 된 것입니다. 신앙은 자기 힘을 빼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시험과 위기 앞에서 제자들에게 깨어 기도라고 하신 것입니다. 또한 주를 의지하는 기도 없이 장담과 과시는 금물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엎드리는 기도 없는 신앙은 여종의 죽음 앞에서도 무너지는 나약한 믿음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연약함을 주님께 고백하고 우리의 힘이 아닌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주의 길을 따라 순종하는 주의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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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6-03)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26장 36-56절


자기 힘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최대 사명인 십자가에 죽으심을 감당하기 위해서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완수하셨습니다. 자신의 능력과 주도권조차 내려놓고 하나님의 최종적인 결정에 전적으로 맡기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가르쳐줍니다.

 

  • 유월절 식사 후 겟세마네 동산으로 자리를 옮기십니다. 세 제자들을 따로 구별해 기도의 자리로 함께 나가십니다. 고난의 잔을 앞두고 심히 괴로워하시는 예수님 곁에서 제자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전혀 준비하지 못한 그때, ‘인자의 넘겨질 때’가 와버린 것입니다. 배신자 유다가 큰 무리를 이끌고 예수님의 공동체의 가장 깊숙한 공간까지 침투해 결국 예수님을 체포하기에 이릅니다. 제자들은 스승을 버려두고 모두 도망칩니다.

 

겟세마네의 기도(36-46)

믿음은 말로 장담하는 신앙이 아니라 기도의 무릎으로 순종하는 신앙만이 십자가를 지나 영광에 이를 수 있습니다. 자기부정과 절대 의존의 기도 없이는 십자가의 순종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사역 앞에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고 있습니다.

 

36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37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8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9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40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1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2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43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4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45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6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36-46)

 

겟세마네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부활 이전까지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마지막 장면입니다. 마태복음(혹은 공관복음서)에서 겟세마네의 기도와 11:25-27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내용을 길게 공개하고 있습니다. 11:25-27의 기도가 아버지와 아들의 친밀한 관계와 대화를 반영한 것이었던 것처럼, 겟세마네의 기도 역시 고통 가운데 있는 아들의 절규를 통해서 아버지와 아들의 친밀함을 역설적으로 증언합니다.

 

(1) 겟세마네에 제자들과 함께 가신 예수님(36-38)

 

기도의 장면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따로 기도하러 가셨고, 슬퍼하고 고통하기 시작하셨습니다(37). 너무 슬퍼서 죽게 됐으니,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제자들에게 요청하십니다(38).

 

(2) 3번씩 기도하신 예수님(39-45)

 

본문에는 세 번의 기도와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세 번의 반응이 나옵니다(36-41, 42-43, 44-46).

 

① 첫 번째 기도(36-41) : A 그는 갔다/기도했다(39) → B 당신이 원하는 대로(39) → C 그는 왔다/자는 것을 보았다(40) → 기도하라(41)

② 두 번째 기도(42-43) : A′ 그는 갔다/기도했다(42) → B' 당신의 뜻이 이뤄지게 하소서(42) → C' 그는 왔다/자는 것을 보았다(43)

③ 세 번째 기도(44-46) : A″ 그는 갔다/기도했다(44) → C″ 그는 왔다/그들은 자고 있었다(45) → D″ 아직도 자느냐?(45)

 

겟세마네 기도에서 보인 예수님의 모습, 곧 극도의 긴장감, 깊은 슬픔, 두려움은 독자들에게는 너무나 낯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습 자체를 통해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게 됩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받아들인 고통의 잔은 곧 진노의 잔으로서 구속사적 목적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만 유일하게 주신 진노의 잔을 어느 사람에게도 주지 않으십니다. 그 어떤 인간도 이해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슬픔과 고통을 통해서 성도들은 구원처럼 큰 희생을 치르고 오는 것임을 배울 수 있습니다.

둘째, 겟세마네의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모본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시편의 애가와 주의 기도처럼 이미 공식화된 말씀으로 기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거역할 수 있는 자유를 갖고 있지만 순종을 택하십니다. 마태는 특히 아들의 순종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의 기도(‘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를 가르치셨고 공식이 된 그 기도를 겟세마네에서 직접 실천하는 순종의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가르친 그대로 실천하셨고 실천하신 그대로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만큼 주의 기도로 주어진 가르침, 곧 아버지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는 삶이 힘들다는 것을 몸소 보이셨습니다. 고통의 예수님과 ‘함께 깨어 기도하라’(40)는 말씀은 제자의 길이 깨어서 기도하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겪은 슬픔과 고통을 견디지 못해 시험에 빠질 수밖에 없음을 예고합니다.

셋째, 예수님께서 표출하신 감정은 제자도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슬픔과 고통은 의인들에게 없어야 하는 요소가 아니라 경건한 인생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구약에 나타난 고난 받는 의인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고통당한 의인들처럼 겟세마네의 예수님께서는 탄식과 신뢰, 개인적 탄원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을 보여 주는데, 이런 조합은 의인들의 살아 있는 신앙을 입증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데서 오는 탄식과 고통을 쏟아내지 않고 기계처럼 순종하는 인간을 만든 창조주가 아닙니다. 살아 있는 자들, 특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탄식과 애가를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탄식과 신뢰, 간청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은 분리되지 않으며 의롭게 살아가는 여정에서 언제나 발견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슬픔, 고통, 두려움은 그가 죄의 종이기 때문이 아니라 죄가 없지만 참 인간이기에 당연히 느끼는 감정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진노를 유일하게 받아야 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런 죽음이 가져다 주는 고통을 겪어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길에 참여하는 신자들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겪어야 하는 슬픔, 고통, 두려움을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고난 받는 의인의 감정으로 받아들이고 끝까지 순종의 길을 가야 합니다.

넷째, 그리스도께서 느낀 감정은 신자들을 위한 위로가 됩니다. 주께서 감정을 그대로 토로하셨기에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 역시 하나님 아버지께 나갈 때 감정을 그대로 드러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하시는 인생일지라도 수없이 다가오는 난관을 만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이 생길 때가 수없이 많습니다. 겟세마네의 예수님께서는 우리도 예수님처럼 통곡하고 감정을 토해내도록 용기를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통곡하셨으니 나도 통곡하면서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겟세마네의 기도 장면에서 하나님의 침묵이 곧 하나님의 고통을 대변합니다. 주의 기도에서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대상을 아버지라고 가르치셨고 하늘 아버지의 돌보심을 반복해서 강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부르짖는 이 순간에 아버지는 어디에 있습니까? 아버지의 반응은 왜 없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무반응을 어떻게 이해하셨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침묵이 그의 부재를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겟세마네의 아들과 함께하시는 아버지는 단지 침묵하실 뿐입니다. 침묵은 하나님의 고통을 더욱 강렬히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을 예수님께서는 무응답으로 여기지 않고 아버지의 뜻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침묵이 곧 응답이며, 침묵 속에 아버지의 고통이 담겨 그대로 전달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하나님의 고통 없이 하나님의 종이 고난 받는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고통과 슬픔 가운데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 역시 고통과 고뇌 속에서 하나님께서 헛되이 위로의 아버지로 불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체포된 예수님과 도망하는 제자들(47-56)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다 알고서도 손해와 희생이 기다리는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이기려면 하면 더 많은 것을 잃을 수 있습니다. 지고, 버려지고, 낮아지는 것이 세상의 모략을 이기는 길일 때가 있습니다. 비폭력과 무저항은 나약함의 증거가 아니라 올바름의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체포되는 장면에서 아무 저항 없이 무폭력을 볼 수 있습니다.

 

47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8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49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50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51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55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56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47-56)

 

가룟 유다는 누가 예수님인지 알리려고 입을 맞추고 군인들에게 예수님을 넘깁니다(47-50). 위기가 닥치자 제자 중 한 명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귀를 잘라버립니다(51). 예수님께서는 칼을 잡은 모든 사람은 칼로 망할 것이기 때문에 칼을 집어넣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제자들은 칼로 혁명운동을 하는 메시아를 따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땅의 소금과 세상의 빛입니다(5:13-16). 칼이 아니라 사랑으로 이뤄지는 나라를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5:43-48).

예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때문에, 칼로 고난의 길을 거부하는 시도를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청원해서 열두 군단도 더 되는 천사들을 보내주시도록 할 수 있는 권세를 가졌으나 그런 힘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53). 예수님께서는 역사의 마지막에는 실제로 천사들을 데리고 오실 것입니다(13:41; 24:29-31). 그러나 메시아로서 구원 역사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런 권한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권능과 특권을 행사하지 않고 죽음의 길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을 담고 있는 구약 전체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입니다(54). 위급한 순간에 제자들은 극도의 두려움 속에서 본능적으로 도망합니다. 마가는 한 청년이 옷을 벗고 달아난 내용을 넣어서 당시의 공포감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막 14:51-52). 제자들이 도망하는 것은 26:31에 예고된 내용이 성취되는 것이며, 예수님께서는 흩어진 양 떼를 회복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의 배반과 군인들의 무력에 체포되신 것이 아닙니다. 본문은 아버지의 계획에 아들이 얼마나 철저히 순종하는지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뜻 때문에 자신의 권위와 권한을 사용하지 않고 도리어 수치를 당할 수 있는 사람이 예수님의 삶에 가까울 뿐 아니라 진정으로 강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칼을 사용하지 않는 방식은 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사용할 수 있다는 논리를 무너뜨립니다. 하나님의 뜻이 선하듯이 그 뜻을 행하는 방식도 하나님의 뜻에 부합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을 결코 부인하지 않고 함께 죽을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결국 주님을 부인하고 뿔뿔이 흩어져 도망하고 맙니다. 그들은 깨어 기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혹시 우리도 피곤의 핑계로 기도에 게으르지는 않습니까? 정신을 차라고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도 제자들처럼 똑같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지 않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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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5-03)


최후 심판을 가르치신 예수님

마태복음 25장 31-46절


인간에게 계시된 하나님 정체의 절정은 성육신하신 예수님입니다. 그분의 존재 방식과 삶의 방식은 하나님의 정체를 드러내며, 그의 형상대로 창조되고 또한 새롭게 창조될 인간의 정체를 반영합니다. 소자가 되신 인자 안에 모든 것이 들어있고, 그것을 통해 심판이 진행될 것입니다.

 

  • 세 가지 비유가 끝나자 이야기는 인자의 도래 이후에 있을 심판에 초점을 맞춥니다. 인자가 영광 천사와 함께 와서 영광의 보좌에 앉습니다. 모든 민족이 인자의 오른편과 왼편으로 구분되자 준엄한 심판이 시작됩니다. 오른편에 있는 의인들에게는 칭찬과 상급이 베풀어지지만, 왼편에 있는 악인들에게는 책망과 영원한 형벌이 주어집니다. 그 기준은 이 땅에서 종말을 어떻게 준비했느냐에 근거합니다.

 

최후 심판의 장면(31-32a)

예수님의 왕권은 최후의 심판 때, 그 절정에 이를 것입니다. 양의 염소를 나누듯, 의인과 악인을 나누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자와 영원한 불에 들어갈 자를 나누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들의 판단대로 시행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변화될 모습을 가르치십니다.

 

31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a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31-32a)

 

인자는 천사들과 함께 와서 영광의 보좌에 앉으십니다. 천사들의 역할이 본 단락에서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지만, 그들은 사람들을 재판장 앞에 불러 모으고 염소로 지목받는 악인들에게 형벌을 집행하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31-32절을 하늘 법정의 장면으로 이해한다면, 모든 민족이 그의 영광의 보좌 앞에 모이는 것은 이 심판이 최종적일 뿐만 아니라 보편적 우주적 심판임을 의미합니다(참조, 16:17; 19:28).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인자를 믿든지 믿지 않든지 재판장 앞에 서게 됩니다. 본 주해에서 반복해서 언급한 대로 ‘보좌 앞’의 ‘앞’은 하늘 회의(‘하늘 궁정’, ‘하나님의 회의’ 등으로 불림) 또는 하늘 법정(하늘 궁정의 기능 중에서 법적 기능을 강조하는 용어)을 묘사하는 전치사입니다. 천상의 존재들은 하나님 앞이나 옆에, 재판받을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단 7:10,14; 마 10:32,33; 11:26; 18:14; 참조 5:16; 6:1; 26:70; 27:11).

 

본문은 인자가 재림할 때 일어날 마지막 재판 장면으로 24:29-31의 확장판입니다. 재판을 주재하는 존재는 목자와 왕으로 표현되는데, 그는 인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오실 때(성육신) 회복의 나라인 하늘나라(복음)를 가지고 왔으며, 두 번째 오실 때는(파루시아) 역사를 마감하고 최종 평결을 선언할 것입니다. 지상에서 머리 둘 곳 없이 고난을 겪으며, 결국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재림의 모습은 지상의 모습과 전혀 다릅니다. 인생의 운명은 인자에 대한 태도로 결정되며, 인생의 운명을 판결하는 분도 인자입니다. 모든 민족이, 곧 모든 사람이 최후 심판을 받기 위해 인자 앞에 서게 됩니다. 의인들과 악인들 모두 심판대 앞에 섭니다. 이런 점에서 재판은 보편적입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32b-46)

예수님께서는 악을 행한 자만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자’에게도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지 않으십니다. 마땅히 사랑할 자만 사랑하는 이방인이나 이웃의 범주를 자의대로 정하여 사랑하고 싶은 사람만 사랑하는 거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아야 자기 백성으로 인정해주실 것입니다.

 

32b…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42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5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32b-46)

 

인자의 최후 심판은 분리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1차적으로는 의인들과 악인들을 분리하고, 2차적으로는 각각 복과 벌을 받게 됩니다. 인자가 목자와 왕의 역할을 맡습니다. 인자는 양들을 오른쪽에 세우고 염소들을 왼쪽에 세웁니다.

일반적으로 오른쪽이 선호되는 방향이었기에(예. 20:21) 양들은 오른쪽에 세워집니다. 예를 들어, 유대 묵시 문헌인 아브라함의 유언 12:12에서 보좌의 오른쪽에 있는 천사는 좋은 행위를, 왼쪽에 있는 천사는 죄를 기록합니다. 왼쪽은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곳입니다. 인자가 왕으로서 앉아서 재판하는 장면은 다니엘 7장과 시편 110:1의 결합입니다(34). 지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은 최후 심판 이후에 영원한 나라,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35-36절은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이 영원한 나라를 상속받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복을 받는 이유를 한 단어로 표현하면 그것은 긍휼입니다(5:7).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특권을 받고 다가오는 아버지의 나라를 상속받을 사람은 자신이 받은 은혜를 긍휼의 행위로 입증해야 합니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은 긍휼의 삶으로 자신들의 신분을 확인받았습니다. 그런데 의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왕이 도움이 필요한 상태에 있었던 것과 그런 왕을 도왔던 일을 기억하지 못합니다(37-39). 왕은 의인들에게 그들이 ‘내 형제들의 작은 자들(소자들) 중 한 명’에게 행한 것이 곧 자신에게 행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1차적으로는 ‘내 형제들’(12:48-49; 28:10), ‘작은 자들’(10:42; 18:6,10,14), ‘소자’(25:40)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라는 용어를 제자들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십니다(12:48-50; 28:10: 참조 요 20:17; 롬 8:29; 히 2:11-12).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의 형제들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들이므로 본문의 형제들은 제자들을 가리키며(12:49-50), 부활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형제들로 부르십니다(28:10; 참조 고린도전서 6:2). 따라서 소자들은 일반적인, 사회적 의미 궁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인 메신저들로서 재림이 오기까지 온 세상에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곤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1세기나 초기 교회의 상황에서는 더욱 명확한 현실이었습니다. 땅에서 이들은 어려운 처지에 놓이지만, 하늘 법정에서는 높아질 것이며, 하늘나라를 상속하는 보상을 받습니다. 소자를 섬긴 것은 결국 종말의 왕을 섬긴 것입니다.

 

41-45절은 34-40절과 반대의 상황입니다. 복을 받는 의인들이 긍휼과 동정의 삶을 살았다면 악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영예를 위한 길은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지키는 것이며, 그의 명령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악인들은 의인들이 한 말과 반대로 자신들은 주를 섬겼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지식과 신앙을 삶으로 입증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왼쪽에 있는 자들이 형벌의 장소로 쫓겨나는 것은 충격적입니다. 왕은 악인들이 소자 한 사람에게 행하지 않은 것이 자신에게 행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작은 자는 사회에서 낮은 사람이므로 누구나 무시하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10:40)라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첫째가 되려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18:5)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낮고 작은 자를 존중하고 환대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보고 있는 것이 됩니다.

 

본문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전달합니다. 첫째, 최후 심판에서 변론의 기회는 없습니다. 재판장 앞에서 변론해서 무죄를 선언 받거나 죄를 감면받을 수 있는 기회는 다시 없을 것입니다. 재판장 앞에 서는 순간에 그 운명은 이미 결정된 상태입니다. 지상에서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지로 운명은 결정됩니다. 지상의 생애를 마친 후에 그 운명이 바뀔 가망은 없습니다.

둘째, 우리는 여기서 임마누엘의 주제를 볼 수 있습니다. 임마누엘의 개념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에 제한되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나와 함께하실 뿐 아니라 형제들과도 함께하십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인생이라고 인정하기 힘들 만큼 곤란한 사람에게도 임마누엘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그들과 함께하시는 그리스도를 함부로 대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셋째, 마태는 네 개의 강화를 모두 심판 장면으로 마치며(7:21-27; 13:37-43, 47-50; 18:23-35), 마지막 강화도 심판 장면으로 끝이 납니다. 왜 심판 장면으로 모든 강화가 끝나는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인자가 재판장이고 복을 준다는 점에서 본문은 교회에 격려가 될 수 있습니다. 독자들은 오른쪽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서 크게 충격받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왼쪽에 서 있는 사람들이 내뱉는 말이 독자들에게 낯설지 않다는 사실은 교회에 긴장감을 일으킵니다. 왼쪽에 서 있는 사람들은 기독교적 용어를 사용하며(‘주’, ‘섬기다’) 자신들의 입으로 주를 섬겼다고 말합니다. 교회는 이들처럼 말과 행위가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과 긍휼의 삶을 실천하는 사람들로 구성됩니다. 최후 심판의 때에 큰 분리가 일어날 것입니다. 게다가 강화는 왼쪽 사람들의 말과 운명으로 끝남으로써 긴장감이 해소되지 않습니다. 모호한 상태로 끝났습니다.


주님께서는 작은 자들을 돌본 것으로 사람들을 심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작은 자들을 돌본 자들을 위해 창세부터 나라를 준비하였고, 마귀와 그 사람들을 위해서 영원한 부를 준비하셨습니다. 따라서 심판의 날은 작은 자들을 돌본 자들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날이 될 것이지만, 심판의 날은 작은 자들을 돌보지 않는 자들에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날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믿는다면 그날에 있을 영생과 영벌의 심판도 믿어야 됩니다. 우리는 그 심판의 날에 어느 쪽에 있습니까? 믿음의 삶에 작고 연약한 지체를 돌봄으로 구원받은 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주의 백성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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