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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9-02)

 


천국에 합당한 사람

마태복음 19장 13-30절


에리히 프롬은 ‘소유나 존재냐’란 책에서 소유의 양식의 삶을 벗고 존재의 양식의 삶을 취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변화되어가는 사회에서 재산, 지식, 사회적 지위, 권력 등을 얻는 데 집중하기보다, 자기 능력을 능동적으로 발휘하며 삶의 희열을 경험할 것을 촉구합니다. 하나님 백성의 모습은 어떠해야 합니까?

 

  •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와 부자 청년을 대하는 두 가지 태도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제자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보여줍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역에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하는 어린아이들보다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부자가 오는 것이 더 반가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달랐습니다.

 

어린아이 같은 자들의 천국(13-15)

천국은 권력이나 물질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한 자들의 것이 아닙니다. 순전하게 하나님만 의지하고 자신을 맡기는 자들의 것입니다. 세상은 어린아이들을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지 않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축복하시며 천국의 문을 활짝 열어주십니다. 아무도 존경하지 않고 사랑받을 만한 조건을 아무거도 갖춘 것이 없지만, 주님을 두 손 벌려 반기십니다.

 

13그 때에 사람들이 예수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고 15그들에게 안수하시고 거기를 떠나시니라(13-15)

 

예수님께서 결혼, 이혼, 독신에 대해 가르치실 때 사람들은 어린이들에게 안수하여 축복을 빌어주시기를 바라면서 부모들이 아이를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반응은 전혀 달랐습니다. 제자들은 그들을 꾸짖습니다. 제자들이 어린아이를 꾸짖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역이 어린이들로 방해받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또한, 제자들은 당시 사회에서 가장 낮은 지위에 있던 어린이들에게까지 예수님께서 관심을 두기 어렵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아이들이 오는 것을 막지 못하게 하십니다(14).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얹은 후에 거기를 떠나셨다(15).

 

13-15절은 결혼에 대한 예수의 교훈과 직접 연결되는 것으로 다음과 같은 교훈을 전하고 있습니다. 가정의 중요한 구성원인 어린이를 실제로(또는 문자적으로) 예수께서 하신 것처럼 환영하고 축복해야 합니다. 과거에 비하면 우리 사회는 어린아이들에게 관심을 많이 기울이는 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아이들이 폭력과 빈곤 등으로 눈물 흘리고 있습니다. 어린이는 상대적으로 힘이 없고, 중요하지 않게 여겨지기 쉽고, 약하고 작은 존재입니다. 돌봄 없이는 어린이들이 행복하게 자랄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특히 의존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어린 아이들을 볼보는 일은 예수의 마음을 나타내야 할 교회의 중요한 사명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어린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뒤로 밀리지 말아야 합니다. 어린이들의 움직임이나 소리가 어른들 중심의 예배를 방해할 수 있을지 몰라도, 어린이들의 어린이다운 모습은 예수님께서 환영하시는 것입니다. 어른들의 규격화된 선입견이 아니라, 예수의 눈으로 어린이들을 실제로 환영하고 안수하는 모습이 오늘 교회에도 요구됩니다. 이런 점에서 어린이는 존재 자체로 살아 있는 교훈입니다. 어린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의존적인 마음을 갖는 것이 하늘나라에서 복된 상태입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 부자 청년(16-22)

하나님보다 소유를 더 사랑한 사람의 계명 준수는 ‘온 마음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한 외식일 뿐입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재물을 나눠주지를 거절하는 사람의 계명 준수는 ‘네 형제를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저버린 껍데기 순종일 뿐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을 살펴보겠습니다.

 

16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8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19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20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16-22)

 

앞에서 사회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위치에 있는 아이들이 등장했다면, 여기서는 사회적으로 가장 탁월한 위치에 있는 청년이 등장합니다. ‘부자 청년’(20, 22)은 ‘무슨 선한 것’을 행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예수님께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선하지 않다는 것처럼 말씀하시지만, 사실은 ‘선한 것’에 대한 청년의 이해를 바로 잡으려는 것입니다. 선한 것을 묻고 선한 것에 대한 답을 얻는다고 해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만이 영생을 주실 수 있습니다(참조, 역대상 16:34; 역대하 5:13; 시편 25:8; 34:8; 106:1; 118:1,29, 136:1; 나훔 1:7). 예수님께서는 ‘선한 분은 한 분이시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본 단락의 이야기를 전체적으로 읽으면 예수를 따르는 것(21절)이 ‘영생을 얻는’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구원을 받는 길입니다. 영생의 길은 무슨 선한 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하늘나라에 들어가지만, 하늘나라의 백성이 되려는 사람은 계명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행동을 하지 않고도 하늘나라에 들어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생의 삶과 영생에 합당한 행위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계명들을 지키라는 말을 들은 부자 청년은 어떤 계명인지 묻습니다. 18-19절의 계명들에는 십계명의 두번째 묶음에 들어 있는 다섯 계명들이 주로 포함됩니다. 첫째부터 넷째 계명과 열째 계명(‘탐내지 말라’)이 빠졌습니다. 청년은 예수님께 자신은 이 모든 것을 지켰는데 아직 무엇이 부족한지 묻습니다(20).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위해 재물을 처분할 것을 명령하십니다(21). 하늘나라는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사야 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이지만(13:44), 청년은 가진 부의 가치를 더 소중히 여겼으므로 예수를 따르기보다 떠나고 맙니다. 많은 소유가 그를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버린 것입니다. 영생의 길을 가르쳐 주었지만 그는 돈을 선택하고 영생의 길을 외면했습니다.

부자 청년은 재물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지 못했으므로,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십계명의 첫 계명을 사실상 어긴 것입니다. 이처럼 부를 추구하는 사람은 부를 다스리는 주인이 아니라 종으로 전락합니다. 예수님은 6:24에서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하면서, 돈이라는 우상을 숭배하지 말고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21절에서 수는 재물과 하나님이 아니라 재물과 자신을 대조하십니다. 청년이 영생을 얻지 못한 것은 신적 존재인 예수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의 위험(23-26)

천국은 지상에서 부자인 사람들이 그 상태로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도 가지고 온 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요, 잠시 맡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재물은 주인의 뜻대로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3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5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26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23-26)

 

제자들은 부자가 떠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부자 청년이야말로 하늘나라에 가장 합당한 사람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부는 하나님의 복을 증명하는 표시였습니다. 제자들의 반응에는 부자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예. 신명기 28:1-14; 잠언 10:22). 제자들은 이런 부자가 제외된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26절에서 구원은 인간이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언급하십니다. 부는 구원을 받는 조건도 아니며 구원을 입증하는 열매도 아닙니다. 부에 의존하는 것은 안전을 보장하는 대상을 하나님에서 부로 바꾸는 것으로서 전형적인 우상숭배에 해당합니다. 돈은 하나님께 맞설 수 있는 매력을 지녔고, 예수를 따르지 못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뿐 아니라 교회 역시 돈에 삼켜질 수 있다는 사실을 심각한 경고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제자들을 위한 약속(27-30)

천국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서 먼저 된 자는 아무 자랑할 것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자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헌신이나 희생 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얻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헌신된 사람들에게 비할 수 없는 영광과 보상을 약속하십니다.

 

27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28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29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30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27-30)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위한 보상을 약속하십니다. 제자들은 인자가 오실 때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입니다(28; 다니엘 7:13-14,26-27). 여기서 심판하는 것은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내 이름을 위해’ 잃은 자들에게 주어질 상을 말쯤하십니다(29). 이름은 그 사람의 정체성이나 충성심을 의미하는데, 29절의 이름은 후자를 가리키며, 예수 이름으로 버리는 것은 예수님을 향한 충성심 때문에 받는 고난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제자에게는 하나님이 주실 미래의 유업이 기다립니다. ‘여러 배’를 받는다는 표현은 제자가 버린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복을 받게 될 것을 강조하는 용어입니다(13:8,23). 이런 보상은 제자들이 하늘에서 얻는 것인 동시에 역사의 끝, 즉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의인들이 상속받게 될 것도 포함합니다. 특히 예수는 영생을 언급하심으로써 제자들은 땅에서 가장 낮고 가난하지만, 부자가 얻지 못한 영생을 확실히 받게 될 것을 확언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미래의 보상을 약속하신 것은 우선 현재의 모습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도록 돕습니다. 베드로의 질문처럼 사람들은 ‘번영=복’이라는 방정식에 익숙합니다. 하나님이 자녀에게 복을 주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녀는 그것을 믿기에 다른 대상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께 청원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영=하나님의 복’이 반드시 하나님의 자녀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은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미래에 완성될 하늘나라의 관점에서 이들의 현재 어려움은 불행이 아니며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증거도 아닙니다. 도리어 예수는 젓반대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면서 꼴찌가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좌절하거나 회의를 느끼지 말아야 합니다. 새로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수고에 대해 보상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말의 역전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몸이 너무 비대하여 천국 문에 들어갈 수 없다면 참으로 비극입니다. 소유에 집착하다 정작 생명을 놓쳐버린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비극적인 일이 도처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천국은 소유지향적인 자가 잃고 존재지향적인 자가 얻는, 역설의 나라인비다. 어린 아이처럼 천국을 겸허하게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무엇보다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간절히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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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9-01)

 


천국 백성의 결혼에 대한 자세

마태복음 19장 1-12절


 

‘결혼’이라는 제도는 사람이 만든 제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제도입니다. 반대로 이혼이라는 제도는 하나님께서는 만드신 제도가 아니라 사람들이 만든 제도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혼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음행과 부정이 팽배하고, 결혼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무작정 이혼을 정죄할 수 없으나, 주님께서는 이혼이 올바른 최선의 선택인지 묻고 계십니다.

 

  • 마태복음 19:1-20:16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행하는 길에서 일어난 사건과 이를 설명하는 비유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제자로서 가야 할 길을 가르칩니다. 결혼, 이혼 독신, 자녀, 돈이라는 일상생활과 관련된 주제를 다룹니다. 본문은 3-12절에서 결혼과 이혼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신 길(1-2)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예수님을 바로 믿을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매주 건강한 몸으로 스스로 예배에 참여하고, 건장한 정신으로 예배 시간 내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한 번 드리는 예배를 소중하게 여기고 모든 모임을 감사하게 여기면서 생활해야 합니다. 기회는 그렇게 많지 ㅇ낳기 때문입니다.

 

1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 2큰 무리가 따르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그들의 병을 고치시더라(1-2)

 

본문은 예수님 일행은 갈릴리를 떠나서 유대 지역으로 들어가신 장면을 묘사합니다. 이번에는 사마리아 지역을 직통하지 않고 유대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요단강 서쪽 길을 따라서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이 길을 따라 내려오면 예루살렘에 도착한 길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까울수록 반대하는 사람과 갈등이 더 심해질 것입니다. 사역의 출발점인 갈릴리는 부활하시기 전까지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걸고 있는 길은 이생에서 마지막 걸음입니다.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을 직접보고 믿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것입니다. 북쪽 갈릴리 사역처럼 남쪽 유대 지역에서도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2; 참조 4:25; 8:1,18; 12:15; 13:2).

 

예수님께서는 골고다 십자가의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중에도 자기 백성들이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외면하지 않고 변함없이 긍휼의 마음으로 치유하십니다.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20:29 이후에도 예수님께서는 등장한 무리 중에서 두 소경을 치유하실 것입니다(30-34). 그곳에서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을 치유했지만, 예수님께 또 다른 음모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치유 사건은 나중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정체를 알고 난 후, 제자들은 예수님을 ‘구주’와 ‘왕’으로 전할 때,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영접하게 만드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입니다.

 

창조의 원리 속에 결혼(3-9)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고 하지만 어설프게 알면,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우리에게 순종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데 성경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이단들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가지고 설명하지만, 그 말씀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정당화하는지 모릅니다.

 

3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4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5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6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하시니 7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8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9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3-9)

 

예수님께서 나와서 겸손히 치유 받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시험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기 위한 시험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짜임을 들어내고 하는 시험이었습니다.

 

(1) 바리새인들의 함정(3)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곤경에 빠지도록 아주 애매한 질문을 준비했습니다. 예수님께 이혼에 대해 묻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아내를 버리는 것이 정당한 것인지 물었습니다.

하필이면, 그들이 이혼 문제를 가지고 질문했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은 이미 산상 설교에서 이혼에 대한 견해를 밝힌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과 같은 운명에 처하도록 질문을 던졌을 가능성이 짙습니다. 헤롯왕의 아들인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 지역의 통치자였는데, 아내와 이혼하고 형제 빌립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재혼했습니다. 요한이 형제의 아내를 취한 문제를 지적한 것을 계기로 잡히고 참수형을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의 질문은 예수님께 시험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신명기 24:1를 염두해 두고 질문합니다.

 

(2) 예수님의 대답(4-6)

 

먼저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읽지 못했느냐?’라는 하십니다. 하나님과 성경에 대해 전문가라고 자신하는 사람들에게, 즉 바리새인들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것을 지적하시는 표현입니다(12:3,5; 21:16,42; 22:31).

 

바리새인들은 신명기 24:1인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라는 말씀에 대해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창세기를 인용하면서 결혼에 대한 첫 명령을 소개합니다. 먼저 창세기 1:1과 1:27을 사용하여 창조주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것을 말씀을 통해 성경적인 결혼의 의미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연관해서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세기 1:27)라고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가정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창세기 2:24) 말씀을 들어서 이혼을 반대하셨습니다.

나중에 신명기에 소개된 이혼은 인간의 ‘완악함 마음’에 불가피하게 이혼 규정을 만드신 것이지, 더 중요한 것은 본래 하나님의 창조(결혼)이 반영된 시기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강조점은 ‘남자’가 아니라 ‘남자와 여자’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그리고 여자’를 강조하고 의도함으로써 남자뿐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인 여자의 존재를 부각시킨 것입니다. 결혼은 세상의 시작부터 한 남자와 여자의 연합으로 출발한 것입니다. 그 사랑의 연합이 하나님의 형상의 한 부분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창세기를 인용하신 것은 창세기가 신명기보다 더 권위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모세를 통해 주신 신명기 24:1은 인간이 죄인인 상태이기에, 신명기의 가르침을 하나도 손대지 않고 인정하면서, 하나님께서 원래 결혼에 대해 의도하신 것을 창세기로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분이 아니므로 신명기의 가르침도 다 인정하십니다. 그러나 본래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혼은 하나님의 창조 계획의 핵심입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둘이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 연합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연합을 닮은 하나님의 형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부부는 나눌 수 없습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한 육체를 이룬다는 표현에는 ‘부부’의 연합이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보다 더 우선적인 점을 암시합니다. 물론, 부모에 대한 효도는 제5계명이 엄격히 명령하므로 한 육체가 된 부부가 부모를 떠난다는 의미를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떠나는 목적은 부부의 연합을 위해서 다 이 연합을 우선적으로 생각하지 않은 채 부모(아내 입장에서는 시부모)의 통제를 받게 되면, 이것은 왜곡된 질서가 되고 결혼의 목적에서 벗어납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의 제자들은 부모를 공경하면서도(마태복음 15:36) 부부가 한 육체를 이룬다는 사실에 순종해야 합니다. 창세기 2:24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서 둘이 한 육체가 되는 것이 결혼입니다.

한 육체가 되었다는 표현은 성적인 결합이 핵심 요소인 것을 나타냅니다(참조. 고린도전서 6:16). 둘을 한 육체로 묶은 분이 하나님이시므로, 성적인 하나 됨을 도외시하면서 정신적이거나 은유적 의미라고 해석하는 것은 이 명령에 대한 오해입니다. 결혼은 거룩한 것이며 인간이 주도적으로 분리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나 뜻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불륜은 연합을 깨는 행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 육체가 된 이상 분리되는 것은 육체를 죽이는 행위입니다. 둘이 한 육체가 될 것이라는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결혼의 하나 됨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이혼과 재혼은 일어납니다. 따라서 둘이 하나 된 육체가 나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의미보다는 나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는 마음이 완악한 시대의 사람이 아니라 이미 시작된 하늘나라의 백성이며 땅의 소금과 빛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말씀을 결혼과 이혼을 이해하는 출발점으로 삼아야 하며, 한 육체로 묶어주신 주권에 복종하여 남편과 아내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3) 바리새인들의 반론(7)

 

예수님께서 창세기에 근거해서 결혼을 만드신 하나님의 의도를 가르치시자 바리새인들은 다시 신명기 본문으로 질문합니다(신 24:14), 예수의 해석에 반대한 바리새인들은 한 육체를 강조한 예수의 의도를 파악하고, 이혼이 불가하다면 왜 모세가 이혼 증서를 써서 아내를 보내라고 명령했는지 묻습니다(신명기 24:1).

 

(4) 예수님의 반론(8-9)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신명기 24:1을 이혼할 수 있는 근거로 삼았고, 이 본문에 기초해서 이혼 증서를 써주고 있었습니다(마태복음 5:31). 이들은 모세를 문장 앞부분에 둠으로 예수와 모세를 대조하여 모세가 하라고 명령한 것을 자신들이 행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모세가 이혼을 '명령'했다고 표현했으나, 예수님께서는 ‘허락’한 것이라고 설명하십니다(8).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것은 ‘너희의 완악함’ 때문이지 하나님의 원래 의도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4절에 이어서 ‘처음부터’를 반복하면서 인간의 마음이 완악해지기 전에는 이혼이 허락되지 않았음을 강조하십니다. 이혼은 명령이 아니라 인간을 배려한 하나님의 허락일뿐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늘나라의 새 시대가 왔고 새 시대의 제자들은 소금과 빛으로서 마음이 완악한 자들에 포함되지 않으므로(에스겔 36:26) 창조 때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의도하신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음행 외의 이유로 아내와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것은 간음행위입니다(9; 5:31-32). 만일 아내가 음행하지 않았는데도 남편이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재혼하는 것도 간음에 해당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결혼을 통해 두 사람이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하나님이 만드신 신성한 제도입니다. 결혼과 이혼에 대해 어떤 생각과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까? 소설이나 드라마가 아닌 성경에서 결혼을 배우시길 바랍니다.

 

독신을 허용하는 경우(10-12)

결혼은 하나님의 축복이지만, 비혼이나 독신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으면 거룩한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없듯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소명을 주셨을 때 건강한 독신 생활도 가능합니다. 그러니 사회적인 관습에 기대어 비혼이나 독신을 편협한 시선으로 보기를 그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독신을 선택한 이들을 공동체가 격려하고 대안 가죽이 되어주야 합니다.

 

10제자들이 가로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찐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11예수께서 가라사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찌니라 12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만한 자는 받을찌어다(10-12)

 

이혼에 대한 예수의 엄격한 잣대는 제자들의 오해로 이어집니다. 제자들은 이혼이 그 정도로 어렵다면, 즉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그와 같다면, 결혼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고 말합니다(10). 예수님께서는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사는 것은 주어진 사람들에게 해당한다고 말씀하십니다(11). 결혼은 규범이고 독신은 받을 만한 사람에게 주어진 예외적인 은사입니다. 이런 사람은 결혼보다 더 큰 가치인 하늘나라를 위해 결혼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12절의 고자가 결혼하지 않는 독신을 가리 키는지, 배우자의 죽음 이후 재혼을 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키는지 학자들의 입장이 갈립니다. 전자는 하늘나라의 높은 가치를 위해 결혼을 하지 않는 경우로, 세례 요한과 예수님처럼 하늘나라를 위해 결혼하지 않은 상태로 활동한 경우도 포함합니다(참조, 고린도전서 7:32-34). 후자는 배우자의 사망 이후에 재혼하지 않는 것은 모두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본문은 둘 다를 의미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한, 하늘나라를 위한 고자는 은유적으로 제자의 삶을 암시할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를 위한 고자의 삶은 여러 가지 점에서 제약을 받고 어려운 길이므로 제자도와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결혼한 사람이나 결혼하지 않는 사람이나 모두에게 최고의 가치는 결혼이 아니라 하늘나라입니다. 하늘나라의 가치를 위해 결혼이라는 중요한 것을 희생할 사람이 있을 것이지만, 이 은사가 모든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개인이나 단체가 결혼이든 독신이든 강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결혼이 하나님의 축복이듯이 독신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거룩한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없듯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소명을 주셨을 때 건강한 독신 생활도 가능합니다. 그러니 사회적인 관습에 기대에 독신을 편협한 시선으로 보기를 그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독신을 선택한 이들을 공동체가 격려하고 대안 가족이 되어 줍니다.


결혼이든 독신이든, 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욕심을 위해 결혼이나 이혼, 혹은 독신을 선택한다면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형태든 자기 백성이 소명에 따른 충만한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결론적으로 죄가 그 연합을 깨뜨렸지만, 이제 예수님의 구속을 통해 그 연합을 다시 회복하시는 시대가 왔으니 제자에게 이혼은 더욱더 허용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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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8-03)


하나님의 사랑을 바르게 나타낼 용서

마태복음 18장 21-35절


 

용서를 한 사람을 생각하면 마음이 힘들어지기도 합니다. 용서는 했지만, 생각하면서 피해받은 것을 생각이 나서 힘들어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며 나갑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신 은혜가 가득할 때,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용서는 자신을 살리는 하나님의 복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삶의 원리입니다. 오늘도 크나큰 은혜로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나가길 원합니다.

 

  • 본문은 1-20절에 연결됩니다. 길을 잃은 양과 같은 작은 자를 회복하는 교회가 될 것을 가르치신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이름으로 권면해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을 하늘의 응답과 임마누엘을 확신하는 가운데 치리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는 그런 사람들에게까지도 마음으로는 용서하며 대하라고 권면하십니다.

 

제한이 없는 용서(21-22)

바르게 용서할 수 있으려면 자신이 받은 용서를 똑똑히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자신이 용서받은 극악한 죄를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없는 건 없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도, 계산할 수도 없는 이 용서의 은혜 때문에 우리에게도 관습과 상식을 초월한 용서를 요구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갈망하면서 부활의 소망을 품고 살 수 있게 하신 용서의 은혜를 기억합니다.

 

21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21-22)

 

본문은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서 형제를 향한 용서의 횟수에 대한 질문(21)과 예수님의 대답(22)입니다. 18:1-14과 21-35절은 각각 제자들과 베드로의 질문으로 시작하고,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2-4절과 22절에 나오며, 이어지는 비유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21절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22절을 답으로 제시하셨고, 23-35절은 동일한 의미의 답을 비유의 언어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대변인 역할을 하는 베드로는 죄지은 사람을 몇 번 용서해야 하는지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묻습니다(21). 베드로는 15절에 나온 죄지은 형제와 관련해서 질문했을 수 있습니다. ‘일곱 번’은 인간에게는 완전을 의미하는 숫자이며(참조, 잠언 24:16), ‘일곱 번 용서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의 관대함을 보여줍니다. 어떤 점에서는 인간에게 있어서 일곱 번의 용서마저도 무제한적인 용서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일흔 일곱의 일곱 번 용서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이 표현은 77회 혹은 490회(70×7)를 의미합니다. 사실상 무한대의 용서를 베풀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랍비들은 세 번까지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좀 더 관대하게 일곱 번까지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한계조차 정하지 말고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를 용서하되 한없이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누군가를 비판하거나 평가할 때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는 마음을 해야 합니다. 부주의한 말로 비방하거나 세상처럼 경쟁하거나 유혹함으로써, 혹은 용서를 거절하거나 차별하거나 헌신을 강요함으로써 지체를 넘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용서하지 않는 종의 비유(23-35)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경험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이웃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게 됩니다. 용서는 단번에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지속적인 과정을 통해 완전히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죄인을 있는 그대는 수용하는 일뿐 아니라 자신의 상처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도록 그분의 주권에 맡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23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23-35)

 

예수님께서는 22절의 대답을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23절의 ‘그러므로’는 ‘용서가 무제한적이기 때문에’와 같은 의미입니다. 따라서 비유는 무제한적으로 용서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만 달란트 빚진 자가 결산하기 위해 왕 앞에 왔습니다. 만 달란트는 약 20만 년의 입금에 해당하므로 종은 현실적으로 갚을 수 없는 빚을 졌습니다. 종은 재정 관리를 잘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갚을 수 없었기에 주인은 아내와 자녀와 모든 소유를 함께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했습니다(25).

주인의 말에 종은 엎드려 절하며 참아 주시면, 즉 시간을 더 주면 갚겠다고 다짐합니다(26). 그 정도 규모의 손실을 끼친 것도 그렇고, 갚을 시간을 달라고 허세를 부리는 것도 그렇고, 그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독자들 중에 아무도 이 사람의 말을 믿을 사람은 없습니다. 본문의 주인도 당연히 갚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왕은 종의 빚을 탕감해 줍니다(27). 이유는 ‘긍휼’입니다. 긍휼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사람의 필요를 보면서 느끼는 예수의 성품을 뜻합니다(9:36; 14:14; 15:32; 20:34). 흥미롭게도 빚을 ‘탕감하다’의 표현으로 ‘용서하다’라는 동사가 사용됩니다. ‘빚’과 ‘죄’는 여러 면에서 비슷합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갑자기 반전됩니다. 종이 탕감을 받고 나서 주인의 집을 나갔을 때, 동료 종들 중의 한 명을 찾았습니다. ‘동료 종’은 둘 다 동일한 신분임을 뜻합니다. ‘찾았다’의 의미는 탕감 받은 종이 의도적으로 빚진 동료를 찾아 나선 것을 의미합니다. 백 데나리온 빚진 종은 갚겠으니 기다려달라고 간청합니다(30). 그러나 탕감 받은 종은 동료 종을 끌고 가서 빚진 것을 갚을 때까지 옥에 던져 넣었습니다. 빚 때문에 투옥시키는 일은 구약과 랍비 문헌에서 금지된 행위였습니다. 종의 마음은 ‘그러나 그가 원치 않았다’는 표현에서 그대로 드러납니다(30). 23절과 30절에 의도를 반영하는 ‘원하다’라는 동사가 동일하게 사용된 것은 주인이 종의 천문학적 규모에 달하는 빚을 탕감하기를 원했던 모습과 대조하기 위함입니다. 빚을 탕감할 수 있는 의지는 긍휼에서 나오는 것인데, 종에게는 그런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 사건을 본 동료 종들은 큰 충격을 받아 주인에게 모든 일을 보고합니다(31). 주인은 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종이 행한 이야기를 듣고는 종을 불러서 ‘사악한 종’(참조. 25:26)이라고 정죄합니다(32). 긍휼히 여기지 못하는 사람은 사악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지만, 그렇게 행하지 않는 사람은 긍휼 없는 심판을 받습니다(5:7). 주인은 자신이 종을 불쌍히 여긴 것처럼 그 종도 동료를 불쌍히 여겨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강조합니다(33). 주인은 분노하며 모든 빚을 갚을 때까지 고통을 주는 자들에게 종을 넘겨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34). 만 달란트의 빚을 모두 갚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것도 옥에 갇힌 상태에서 돈을 벌 기회는 없습니다. 따라서 본문은 영원한 형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그들에게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비유를 해설하십니다(35). 비유에서 왕은 하늘 아버지를, 동료 종들은 형제들을 가리킵니다. ‘마음’은 그 사람의 본질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는 용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나와야 하고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는 것은 진심으로 용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참조 12:34; 15:18,19). ‘마음으로부터’는 쉐마를 떠올리는 표현이기도 합니다(신명기 6:5; 마태복음 22:37).

 

비유는 몇 가지 의미를 전달합니다. 특히 공동체 강화(18장)는 일차적으로 교회의 구성원들에게 주어진 것이므로, 이 비유 역시 교회 공동체를 점검하고 실천해야 함 규범으로 주어졌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인들은 갚을 수 없을 정도의 죄를 예수님의 긍휼로 용서 받은 존재들입니다 이 비유는 용서하는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의 용서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임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는 1:21에서부터 죄를 용서받는 구원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주신 은혜라고 전제한 바 있습니다. 하늘나라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온 것처럼, 이 나라의 특징인 용서도 하나님에 의해 먼저 주어집니다. 용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예수님의 긍휼로 주어졌다. 긍휼은 예수께서 가져오신 하늘나라의 특징입니다. 비유는 하나님의 용서를 참으로 경험한 여부가 용서하는 행위로 입증된다는 관점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를 경험한 참 제자라면, 형제의 작은 허물에 대해 비유의 종과 같이 행동할 수 없다. 따라서 형벌에 처해진 종은 하나님의 용서를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자신에게 채무가 있는 자에게 용서하지 못하는 행동을 함으로 드러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두를 용서하셨으나 그 용서를 믿고 감사한지 여부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태도로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죄를 탕감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용서는 인간이 용서할 것을 전제로 주어집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도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행동으로 은혜를 베풀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분노하십니다. 돌아서자마자 작은 긍휼히 필요한 자에게 큰 심판을 내리는 사람에 대해 분노하십니다. 용서하라고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한없는 긍휼을 경험한 사람은 작은 긍휼함이라도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용서받은 교회는 용서하는 것으로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야 합니다. 교회의 본질은 긍휼의 마음으로 형제와 자매를 용서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는 긍휼을 받은 자들로 구성된 나라며, 긍휼이 확대되는 나라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용서입니다. 교회에서는 이것이 가능해야 하고 교인을 통해서는 이것이 가능해야 합니다. 교회는 언제나 용서할 준비를 하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용서가 인간의 이성으로는 어렵기에, 예수님께서는 순종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용서는 아버지의 완전하심처럼 완전을 지향하라는 명령입니다(5:21-48).

따라서 긍휼이 없고 긍휼이 용서로 입증되지 않는 교회는 예수의 제자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못지않게 교회에서 명예 훼손과 관련한 소송이 많고, 일곱 번이 아니라 한 번의 관용도 베풀지 못해 사람들을 정죄하고 쫓아내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바른 교리는 생명과 같지만, 세상은 교회의 교리가 아니라 삶을 통해서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지 봅니다.


 

주님의 나라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세상 논법으로 담을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정의의 나라이지만 정의를 넘어선 용서와 희생과 사랑의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그 용서와 사랑을 시작하셨고, 아들께서도 그 길을 가셨습니다. 제자 공동체도 마땅히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한 영혼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저희 온 공동체가 배워서 한 뜻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주위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사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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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8-02)


잃어버릴 수 있는 한 영혼에 대한 관심

마태복음 18장 11-20절


오늘날은 영혼을 귀히 여기지 않는 시대입니다. 파라오의 나라처럼, 생산성에 기여하지 않는 이를 배제하고 무관심하게 대합니다. 교회도 작은 자를 무시하고 큰 자 중심으로 운영합니다. 그러나 소외된 이들을 향한 주님의 관심은 무한하십니다. 재자 된 교회는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합니까?

  

  • 본문에서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12-13), 하늘의 장면(14), 공동체를 위한 훈육(15-20)으로 구성됩니다. 길을 헤매는 양과 같은 사람을 회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므로, 교회는 회복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그러나 양이 고회의 말을 듣지 않을 경우에는 15-20절의 지침을 따라야 합니다.

  

헤매는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12-13)

하나님께서는 작은 자들이 넘어지거나 길을 잃지 않고 모두 천국에 이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 사랑하시는 작은 자들을 다양한 이유로 실족하게 하는 죄는 실로 클 수밖에 없습니다. 비방이든 외면이든 우리의 사랑에서 누군가를 제외시킬 권리가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12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12-13)

 

12-13절의 비유는 하늘의 장면을 묘사하는 10, 14절 안에 들어 있습니다. 독자는 하늘의 장면과 연결해서 비유를 해석해야 합니다. 12절의 ‘플라나오(πλαναω)’는 ‘잃다’보다는 ‘헤매다’에 가깝습니다. 양이 완전히 길을 잃은 상태는 아닙니다. 이어지는 15-20절과 18장 전체의 흐름을 볼 때 길을 헤매는 양은 어떤 문제를 일으켰습니다(12). 길을 헤매는 한 마리의 양은 남아 있는 아흔아홉 마리에 비하면 가치가 낮습니다. 더군다나 우리 안에 얌전히 있는 양 무리에 비하면 이탈한 한 마리의 가치는 더욱 떨어집니다. 그런데도 목자는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섰습니다. 양에 대한 묘사와 양처럼 길을 헤매는 것에 대한 표현도 구약에 많이 등장합니다(예, 시편 23편; 시편 119:176; 이사야 53:6; 예레미야 50:6).

비유에서 목자는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입니까? 여러 가지 이유로 목자는 이사야 53장의 고난의 종을 떠올리게 합니다. 목자가 양을 찾아 나선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양을 찾는 목자의 모습은 고난의 종의 모습과 같습니다(이사야 53:3,6). 14절은 목자가 한 마리 양을 찾는 이유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으로 밝힙니다. 하늘에 있는 뜻을 실현하기 위해 목자는 땅에 내려와 무가치해 보이는 한 마리 양을 찾습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14)

공동체는 용서와 권면을 통해 잘못된 형제들에 단 한 명라도 돌아오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 일에는 신중하면서도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형제의 잘못에 눈감아서는 안 되며 또한 무책임하게 폭로해서도 안 됩니다. 잘못된 사람도 존중 받아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권고하고, 두세 증인과 함께 강력히 설득하고 그마저도 안 되면 공동체 전체의 권위를 빌어 설득하는 절차를 제시해야만 합니다.

 

14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14)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점에서 목자는 제자들의 모본입니다. 18:1-10의 설명에서 살펴본 격과 같이, 누가 하늘나라에서 큰지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은 4절이고, 10-14절은 간접적인 대답입니다. 누가 하늘나라에서 큰 자입니까? 하늘나라에는 제자들이 기대하는 그런 큰 바는 없지만, 분명히 큰 자는 있습니다. 양을 찾는 목자가 바로 하늘나라에서 큰 자입니다. 하늘나라에서 큰 자인 목자는 양을 찾기 위해 헌신하며, 그 좌정에서 고난의 종처럼 낮아집니다. 예수님은 이런 목자의 모습으로 제자들을 회복하셨고, 제자들이 예수님처럼 고난 받는 목자의 길을 따름으로써 하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목자의 모습은 어린아이처럼 낮추는 자가 하늘나라에서 큰 자라는 4절의 의미와 동일합니다. 예수님을 따라는 사람들은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자발적으로 낮은 위치로 내려가기도 하며, 하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면서 닥쳐오는 수치를 겪기도 합니다. 작은 자 한 명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수치를 겪을지라도 목자-종의 낮아지는 과정이 양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타인의 회복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큰 자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낮아지는 삶이 있기에 교회와 세상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공동체의 훈육(15-20)

하나님께서는 용사와 징계의 권위를 ‘교회’에게 주셨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죄지은 한 형제를 대하려면 같은 관심과 기도가 필요합니다. 정죄할 자격이 없는 존재임을 기억하는 것이 잘못한 지체를 대하는 공동체의 전제 조건입니다.

 

15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17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9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15-20)

 

1-14절은 자연스럽게 15절로 이어집니다. 길을 헤매는 양과 같은 사람이 자신의 회복을 시도하는 사람의 노력을 무시할 때,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만일 형제에게서 피해를 입으면 맨 먼저 그 사람과 일대일로 만나 책망해야 합니다(15). ‘책망하다’로 번역되는 ‘엘렝코(ελεγχω)’는 매우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데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용어는 지혜 문헌의 영향을 반영하는데, 아버지나 하나님께서 개선의 목적으로 교정하거나 훈육하는 것을 의미합니다(참조 잠언 9:7이하;3:11; 히브리서 12:5; 요한계시록 3:19; 디모데전서 5:20; 디모데후서 4:2; 디도서 2;15; 유다서 1:15). 이 단어는 그 사람이 행한 것이 잘못된 행위, 곧 죄라는 사실을 확인시키고 회개하도록 설득하거나 가르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런 행위는 사적으로 일어날 수 있고(마태복음 18:15; 에베소서 5:11), 목회서신의 경우처럼 공동체적으로 행해질 수도 있습니다(디모데전서 5:20; 디모데후서 4:2; 디도서 1:9;13; 2:15). 그러므로 책망하는 것은 죄를 노출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잡는 것에 목표를 돈 행위입니다(참조, 레위기 19:17; 잠언 3:12;욥기 5:17). 이 용어의 용례는 길을 헤매는 양을 회복시키는 목자의 그럼을 담은 18:10-14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죄를 범한 형제를 개별적으로 찾아가는 것은 상대방을 보호하는 차원의 행동입니다. 만일 상대방이 책망을 들으면 형제와의 화해가 이뤄집니다. 화해를 먼저 시도하려면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때로는 수치를 감당해야 하는 정도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겸손과 수치를 감수하면서도 형제를 회복시키려고 나서는 도를 하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에 해당합니다.

 

사적인 대화에서 실패하면 증인들이 필요합니다. 만일 두세 사람의 말도 듣지 않으면 교회가 나서야 하고, 교회의 훈계마저 무시하면 그 사람을 이방인과 세리처럼 취급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지역 교회를 가리킵니다. 누군가를 이방인과 세리로 대우하라는 것은 그 사람과 더 이상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사회에서 생활하면서 만나지 않을 수 없겠지만, 교회는 회개하지 않는 사람을 형제로 생각하지 말고 교회에서 출교시켜야 합니다. 이런 명령은 교회의 합의에 따라서 결정한 것이므로 교회의 공식 입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가 땅에서 매고 풀 때마다 하늘에서 매이고 물리는 것을 약속하십니다(18). 매고 푸는 의미에 대해서는 16:18-19에서 이미 언급한 것과 같이 법적이고 행정적인 개념을 내포하며, 이 행위를 하는 사람의 권위가 강조됩니다. 15-17절의 내용과 연결해 보면, 세 단계에 걸쳐 주어진 훈계와 회복의 절차를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을 교회가 정계했을 때, 교회는 이 결정이 하늘에서 인정받을 것으로 믿어야 합니다. 교회의 권위는 하늘과 연결돼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땅의 총회이고 하늘에는 하늘의 총회가 있는데, 두 총회는 서로 연결됩니다. 교회는 비록 약하고 형제의 문제 때문에 휘청거릴 수 있지만, 교회의 뿌리가 하늘에 있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교회의 결정에 하늘이 응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지은 형제의 문제와 관련된 내용에서 출발해서 교회의 정체성과 특권으로 확장하여 교육하십니다(19). 두 사람이 땅에서 기도한 것을 합의하면 하늘에 계씬 아버지께서 응답하실 것입니다. 교회의 결정은 반드시 기도와 결합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징계를 결정하든 영접을 결정하든, 모든 행위는 기도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즉, 교회의 결정은 하나님께 의존해야 합니다. ‘두 사람’은 무엇을 합의하거나 합의하지 않을 때 참여하는 최소한의 단위입니다. 공고의 목적을 무시한 채 진행하는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기도는 응답받지 못합니다. 둘이나 셋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그곳에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20). 하나님께서는 두세 사람이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을 위해서 모이기 때문에 공동체가 합의하고 기도한 내용에 응답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마태복음의 핵심 주제인 ‘임마누엘’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형제를 징계하는 매우 어려운 순간에서도 임마누엘을 의심하지 말아야 하고, 오히려 어려운 결정을 내리는 순간에 임마누엘에 대한 확신을 굳게 해야 합니다.

 

교회는 긍휼의 공동체이면서 거룩함을 유지해야 하는 공동체이므로 죄의 문제를 엄격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최종적인 결정을 내렸을 때 교회가 후유증을 겪을 수도 있지만, 교회는 예수님께서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공동체입니다. 교회의 결정은 하늘에서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권징을 한 후에 담대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두세 사람을 언급하심으로써 교회의 공동체성을 강조하십니다. 이 교훈은 교회 구성원의 합의를 강조하고 특정인의 독단적인 주장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공동체성은 임마누엘의 주제와 연결됩니다, 교회는 개인으로 모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 모였음을 늘 인식해야 하며, 공동체로 모여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갈 때 교회의 본질에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많다 보면 사람을 귀히 여기는 마음을 잃기 쉽습니다. 돈에 집착하면 물질의 시각으로 사람을 바라보게 되고, 도덕에 매이면 정죄하고 판단하게 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공동체는 한 영혼을 귀하게 보는 공동체입니다. 작고 가난하고 모났을지라도 그 영혼을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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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8-01)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큰 자

마태복음 18장 1-10절


인간의 비교의식은 타락한 본성에 따른 불가피한 것입니다. 이 문제는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 안에서도 존재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높은 자리를 원한 제자들은 천국에서 누가 큰 자인지 묻습니다. 인간적 동기에서 비롯된 불순한 질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에 대해 어떻게 대답하고 계십니까?

 

 

  • 본문에서 제자들은 하늘나라에서 어떤 사람이 큰 지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의 존재(2-5)와 하늘의 장면(10)으로 대답하십니다. 작은 자를 실족시키는 죄의 심각성을 강조하기 위해 지옥의 실상을 사용하기도 하십니다(6-9).

  

하늘나라에서 큰 자(1-4)

천국을 소유한 자들은 영이 가난하고 온유하며 의를 갈망하고 핍박을 받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어린아이들과 같이 사람들입니다. 주의 도우심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런 예수님의 인격으로 변하는 것이 삶의 목표가 아니라면, 아직까지 우리는 참 복음을 듣지 못한 것입니다.

 

1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1-4)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누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큽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제자들이 생각하는 하늘나라는 왕적인 메시아인 예수님께서 다스리실 지상 왕국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의 주권이 회복된 나라, 이방의 제국이 물러가고 세리와 죄인들이 심판을 받아 청결하게 된 나라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권위의 체계를 당연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제자들은 새로운 나라의 권력 순위에서 누가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인지 궁금해 합니다. 특히 그들의 질문은 바로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내용와 관련이 있습니다(17:24-27). 예수님께서는 성전 세금을 내지 않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해, 땅의 왕들이 세금을 면제받듯이 하늘나라 왕의 ‘아들들’은 세금을 낼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25-26). 그러므로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입성한 이후 예수님께서 통치하실 나라에서 차지하게 될 구체적인 서열을 알고 싶어한 것입니다(20:26-2; 23:11-1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질문을 듣고 그들이 배워야 할 모습으로 제시하려고 어린 아이 한 명을 그 제자들 가운데 세우십니다(2). ‘돌이켜서 …처럼 되라’(3)는 말씀은 제자가 의도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태도를 선택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서 누가 큰지에 대한 답을 주지 않고, 누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에서 누가 큰 자인지에 대한 대답은 4절에서 나옵니다. 3절과 4절은 개념상 연결됩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원리(3)는 하늘나라에서 ‘큰 자’의 개념(4)과 분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존재 혹은 구원과 관현이 있다면, 하늘나라에서 ‘살아가는’ 것은 실존 혹은 생활의 관련이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구원의 원리는 하늘나라에서의 생활 원리에도 적용됩니다. 어린 아이처럼 돼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뿐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큽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할 때 얻는 것이기에, 어린아이처럼 의존해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으며, 하나님께 의존하여 사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크다는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상은 ‘너희’인 제자들이며, 제자들은 이미 하늘나라에 들어가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주신 약속(16:1)이나 17장에서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26)고 말씀하신 내용은 제자들의 신분이 하늘나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임을 증명합니다. 또한 1장 이후 19:28에서 제자들은 종말론적인 하늘나라에서 ‘열두 보좌에’ 앉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습니다.

따라서 넓은 문맥을 고려하면, 본문에서는 제자들의 신분이나 구원을 빼앗길 수 있다는 입장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해서 하늘나라에 들어간 제자는 이후에도 그런 자세로 살아야 하며,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기를 낮추는 태도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갔다(‘소금’)고 해서 어린아이의 태도(‘소금의 맛’)를 버리는 삶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하늘 아버지께만 의존하여 하늘나라에 들어가 있으며, 종말론적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어린아이처럼 낮은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이 원칙은 또한 타인을 위해 또는 길을 헤매는 사람을 회복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는 삶으로(18:12-13) 나타나야 합니다. 어린아이처럼 되는 삶은 수직적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절대 의존하는 상태와 절대 낮아지는 상태가 되는 것이며, 수평적으로는 공동체나 사회에서 수치를 경험하는 삶으로까지 낮아지는 것입니다.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 노해하면서도 타인에 대해 자신을 낮추지 못하는 사람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은혜로운 사람은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며, 은혜로운 교회는 서로를 겸손히 섬기는 공동체입니다.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태도와 운명(5-9)

성도들은 세상의 권세에 대한 누림을 갈망하지 말고, 예수님처럼 또 어린아이처럼 이 세상에서 보잘것없고 힘없는 듯이 보이는 삶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적극적인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다.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갖고, 디 힘이 있을수록 자발적으로 이런 삶을 추구하지 않으면 저절로 영이 가난해 질 수 있습니다.

 

5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7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8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9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5-9)

 

어린아이의 존재는 5-9절에서도 제자도의 교훈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과 영접하지 않는 것에 따라 하나님께서 반드시 반응하실 것을 알려주십니다. 5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가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할뿐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이 된 사람을 영접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5절은 작은 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사람을 선지자, 의인, 제자로 영접하라는 명령이 담긴 10:40-42의 내용과 병행을 이룹니다(특히 10:40). 가장 낮은 위치에 처한 제자는 가장 높으신 예수님을 대표하므로, 낮은 자를 영접하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6절의 실족시키는 것은 5절의 영접하는 것과 대조됩니다. 실족하게 하는 것은 죄를 짓게 만들어버리는 행동이며, 심지어 복음을 믿지 못하게 만들어버리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시키는 죄에 대한 형벌은 나귀가 돌리는 무거운 맷돌을 목에 달고 깊은 바다 속으로 끝없이 끌려 내려가는 것보다 더 무겁습니다.

왜냐하면 작은 자를 실족시키는 것은 지옥에 던져지는 죄이기 때문입니다(8). 6-7절이 타인을, 특히 작은 자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가해자의 입장에 있는 자들에게 경고했다면, 8-9절은 세상에서 오는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는 타인을 공격하는 것과 달리 스스로 무너지는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눈과 손이라는 신체 기관이 실족시키는 도구가 되면 그런 기관 없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발과 손과 눈은 세상과 접촉하는 신체 기관을 대표합니다. 사람은 세상과 접촉하는 신체 기관을 통해서 끊임없이 유혹을 받게 됩니다. 8-9절은 죄에 대해 사람들이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자신의 관점에서는 매우 작은 일, 아무것도 아닌 문제로 보일지라도, 죄의 결과는 가해자가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피해야 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그런데 6-7절의 메시지를 듣는 대상은 3인칭 반면에 8-9의 메시지를 듣는 대상은 2인칭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유혹에 이끌릴 위험에 처한 사람은 제자 또는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작게 여기기 쉬운 죄의 심각성을 강조하기 위해 지옥을 사용하십니다. 말하자면, 마태복음에서 지옥의 경고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믿는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는 무시당하기 쉬운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을 엄중히 경고하십니다.

 

땅의 작은 자들, 하늘에서 있는 천사들(10)

가장 작은 자, 낮은 자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나라가 천국입니다. 무시해도 좋을 조건을 가진 자를 세상처럼 똑같이 대하면서 실족하게 하는 자는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들과 자신을 동일히하시기 때문입니다. 가장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10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10)

 

1절의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은 4절이고 간접적인 대답은 10-14절이므로, 우리는 10-14절의 핵신은 하늘의 장면이며, 헤매는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12-13)가 하늘 장면 사이에 들어가 있습니다. 목자는 하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온 사람과 하늘의 뜻은 무엇입니까? 하늘 장면(10)에서 작은 자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하늘에서 항상 뵙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하늘에 있는 천사들을 수호천사들로 해석합니다. 수호천사는 유대교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개념이며, ‘그들의 천사들’이기 때문에 작은 자들을 지키는 천사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10절은 땅에 있는 천사들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천사들’로서 수호천사의 개념 이상입니다. 이들은 하늘궁정(또는 하늘회의, 하늘법정)의 구성원들입니다. 천사들은 하나님 앞에 서서 땅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고하고 하나님의 평결을 받기 위해 기다립니다. 특짛 작은 자를 실족시킨 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늘에서 전하고 하나님의 판결을 기다립니다.

작은 자를 무시하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운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작은 자들 편에 서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땅의 장면을 정확히 보고받으시고, 적절한 때에 무섭게 반응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라면 작은 자를 무시할 것이 아니라, 12-13절의 비유에서 설명하는 내용처럼 작은 자의 회복을 위해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인간의 갈등은, 높아지고 지배하는 자리를 탐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욕심은 타인을 업신여기거나 하찮게 여기는 시선을 갖게 되고, 교만해져 함부로 행동하게 됩니다. 천국은 겸손히 자신을 낮추며 섬김으로 행하는 자의 나라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은 어떠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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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7-02)

 


겨자씨만 한 믿음을 원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17장 14-27절


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꽃을 화분이나 화단에 심어서 계속 감상합니다. 그리고 시간에 따라 적당하게 물과 거름을 줍니다. 만약 시시때때로 물주는 일을 게을리하면 꽃은 시들 거리다가 죽어버립니다. 영적인 성장도 이와 같습니다. 성도들은 꽃에 물을 주는 것처럼 항상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공급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말씀과 은혜를 공급해 주셔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낮에 직장에서 수고해서 피곤해도 기도의 시간에 빠지지 않고 철야기도회나 새벽기도회에 계속적으로 출석하는 것을 봅니다.

 

  • 본문은 예수님께 속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가르쳐 줍니다. 변화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께서 귀신 들려 간질로 고생하는 아이를 고치려 했지만,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제자들을 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를 고쳐주시고 제자들의 믿음이 없는 것을 보시고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겨자씨 한 알만큼의 믿음이 있어도 이 산을 저기로 옮길 것이며 못할 것이 없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책망 받았던 잘못된 믿음은 무엇입니까? 바른 믿음으로 당신을 초대하겠습니다.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심(14-21)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놀라운 모습을 목격했던 제자들은, 변화산에서 내려오자마자 척박하고 강퍅한 세상을 만나고 이곳에서 사는 방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제자들과 함께 변화산에 내려오실 때, 산 아래에서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4저희가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가로되 15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16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다 19이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0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21(없음)(14-21)

 

예수님의 제자들이 실패했던 것은 믿음을 기술로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받은 능력으로 지금도 행하는 것처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치유는 기술로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일어나는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진행되는 것입니다.

 

(1) 귀신 들려 간질 걸린 아들을 둔 사람(14-16)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 산 아래는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이 귀신에 의해 간질에 걸린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세 제자가 산에서 내려오셔서 다른 제자들과 합류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 도움을 얻지 못한 어떤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을 보자마자 무릎 꿇어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그의 아들은 간질로 비참하게 고통을 겪고 자주 불과 물에 들어갔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제자들이 고치지 못한 점을 언급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미 귀신 쫓아내는 권능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산 아래 남아 있던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허락해준 권위를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의 실패는 작은 믿음과 영적인 부담 때문이었습니다.

 

(2) 무능한 제자들과 예수님의 치유(17-18)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실패를 보시고,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를 탄식하십니다. ‘세대’는 소수의 사람들이 아니라 그 시대는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고 삐뚤어진 세대와 구별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제자들의 실패, 곧 믿음의 실패 때문에 분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 속에 있는 귀신을 꾸짖어 내쫓으십니다. 그때 아이는 나았습니다. 본문에서 ‘꾸짖었다’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는 아이의 현상이 육신의 질병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이 표현을 통해서 아이를 사로잡고 있던 것이 귀신의 세력이었고, 예수님께서 마귀의 영향력을 제거하신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간질병에 걸린 아이가 그 때부터 나은 것은 즉시 능력이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3) 겨자씨만 한 믿음(19-21)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 병을 치유하고 나서,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왜 귀신을 쫓아낼 수 없는지를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작은 믿음 때문에 쫓아낼 수 없다고 하십니다. 즉 제자들의 문제는 작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이 시대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은 재적으로 발생하지 않고 예수님께 의존하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믿음’이란 공급해주고 보호해 주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신뢰란 간구하는 것입니다.

17절에서는 믿음이 없는 상태를 꾸짖었으나 20절에서는 믿음이 작은 문제를 지적하십니다. 근본적으로 제자들은 믿음이 작은 자들이지 믿음이 없는 자들은 아닙니다. 비록 작은 믿음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의 신뢰를 기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십니다. 겨자씨만 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습니다. 산을 옮기는 능력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 때문에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하나님께서 일하시면 산을 옮길 수 있습니다. 작은 믿음이라도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세대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산’ 자체에 어떤 신학적 의지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산을 옮기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다는 표현과 연결됩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는 공동체이며 이런 능력은 교회의 믿음을 통해 가능해집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불가능이 없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해야 합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변화산 위에 올라가셨을 때 상황처럼, 교회는 예수님께서 눈에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신뢰함으로써 이 세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 수난을 예고하신 예수님(22-23)

오늘날 당신과 당신이 섬기고 있는 교회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비록 이해하기 힘들고 순종하기 힘들더라도 제자들처럼 염려하지 마시고 순종의 길을 선택하시길 바랍니다. 그곳에 산을 옮길만한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22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23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22-23)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갈릴리에 모으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준비하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의기소침한 제자들에게 재자의 참 의미를 다시 고취해줄 필요를 느끼셨을 것입니다. 본격적인 예루살렘 여정을 앞두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가버나움)에서 모임을 갖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의 메시아의 길을 다시 한번 강조하십니다. 자신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과 죽임을 당한 후 제 3일에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정체와 제자들의 정체를 연이어 배치한 마태복음은 22-23절에 인자의 수난을 두 번째 언급하고 곧이어 제자들의 신분을 설명합니다. 인자의 운명과 제자공동체의 운명은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겠다고 말씀하지만, 제자들은 아직까지도 매우 근심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따라 살려는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전 세금 납부에 관한 교훈(24-27)

오늘날 성도들은 악을 조장하는 질서에는 단호하게 대응하지만, 공공질서를 위해서라면 자유와 권리를 양보하는 선택이 필요합니다. 정당한 권리라도 분쟁의 원인이 된다면 차라리 권리를 포기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더 성숙한 신앙입니다.

 

24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가로되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25가로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가라사대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26베드로가 가로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27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24-27)

 

본문은 성전 세금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제 장면이 가버나움으로 바뀝니다. 첫 번째 수난 예고 후에 제자들의 정체성에 대한 본문이 나온 것처럼, 두 번째 수난 예고는 제자들의 신분 혹은 정체성에 대한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1) 성전세 문제로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24-26)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을 때 성전세를 받는 사람이 베드로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들이 베드로에게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24)고 질문함으로 시작합니다.

첫째 본문은 성전 세금의 이슈로 제자들의 신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성전세나 속전을 지불하는 거 없이 예수님을 통해 하늘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특권은 없습니다. 하나님과 자녀의 관계에서 성전세와 속죄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성전세가 중지될 것을 예고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사건에서 성전세금을 위한 세겔을 바꿔주는 사람들의 탁자를 엎으심으로써 환전 자체를 반대하실 것입니다. 이는 속전 역할을 했던 성전 세금을 내는 일이 없어지는 것, 즉 성전 세금 제도가 사라질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현재 가버나움에서는 성전세금인 반 세겔을 내는 동의하지만, 이제 예루살렘에서 죽음을 앞둔 예수님께서는 세금을 거두는 행위 자체를 반대하실 것입니다.

대속에 의미와 연결해보면 출애굽기 30장 16절에서 성전세금은 생명을 대속할 목적으로 지불 하는 속전이었으므로 예수님의 목숨이 속전의 기능을 대체하게 되면 성전세금은 필요 없게 됩니다. 마태복음 12장의 가르침과 같이 성전은 예배자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하는 공간입니다. 성전은 세금을 모으는 자들의 소유나 이득의 수단이 아닙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자녀를 위한 하나님의 집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전이 없이도 하늘 아버지와의 교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성전에서 기대됐던 긍휼은 성전 없이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 혹은 하나님 자녀의 정체성은 성전에 충성하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신뢰하는 데 있습니다.

 

(2) 기적을 통한 성전세 납부(27)

 

둘째 예수님께서 물고기 입에서 얻은 돈으로 성전 세금을 내게 하시는 장면은 하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알립니다. 베드로는 하늘의 아버지께서 물고기라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필요를 채워주시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당시 문화에서 물고기는 통치자가 죽어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물고기의 이미지는 하나님의 주권과 공급을 강조합니다. 마태복음의 새 본문 7장 10절, 14장 13-21절, 그리고 15장 32-39절은 물고기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것과 하나님의 긍휼을 표현하는 장면에서 나왔습니다. 아버지와 물고기의 관계는 마태복음 7장 9-10절에서 등장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것을 구하는 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십니다.

오병이어 사건에서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들고 하늘을 향해 감사하신 장면은 5천명이 넘는 무리에게 물고기를 제공하신 분은 하나님이신 사실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물고기로 4천명에게 음식을 제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감사하신 후 생선과 빵을 나눠 주셨기 때문에 물고기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로서 자녀의 필요를 알고 계시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기적으로 돌봐주십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께서는 이 소유를 자녀를 위해서 사용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아들들을 세금을 내지 않았다고 하신 내용과 연결해보면, 물고기 입에서 세금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자녀의 것을 착취하는 분이 아니라 자녀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버지는 자녀에게서 세금을 받지 않고 자녀를 돌보는 존재이므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왕과 백성의 관계보다 우선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나라 자녀들에게 땅의 임금들이 하는 것처럼 무거운 재정의 짐을 지우는 분이 아니라 자녀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하는 가장 강력한 능력입니다. 믿음은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내적 신념이나 의지가 아니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입니다. 아주 작은 믿음이라도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믿음은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아무리 큰 믿음이라도 하나님을 향하지 않는 잘못된 믿음은 어떤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순종을 통해 삶 속에서 힘있게 작동합니다. 날마다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여 큰 능력이 나타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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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7-01)


영광스럽게 변화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17장 1-13절


영화관에서 영화를 시작하기 전에 다음에 상영할 영화를 미리 맛보기로 보여주는 것을 ‘예고편’이라고 합니다. 잘 만들어지고 바르게 전달한 예고편은 관객들에게 다음 영화를 볼 수 있도록 이끌어줍니다. 하지만 예고편은 그럴싸한데 본 영화가 형편없다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욕을 먹을 것입니다. 본문은 장차 천국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하실 참모습인 예수님에 대한 예고편입니다.

 

  •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것이라는 예언에 의기소침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본 모습인 하나님의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도래했고, 세례 요한이 바로 오리라던 엘리야라고 밝혀 주셨습니다.

 

변화산에서 변모하신 예수님(1-9)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와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은 예수님의 정체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변모하신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십자가를 앞둔 예수님에게 제자들을 격려하기 위함이요, 제자들에게도 십자가 뒤에 부활의 영광이 있음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1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4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5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6제자들이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니 7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 8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9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1-9)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정체를 고난받으실 메시아로 드러내셨습니다. 첫 번째로 십자가에서 수난 예고를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가긴 했지만, 온전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급기야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죽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다가, 예수님께 책망까지 받았습니다. 그로 인해 낙심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찾아오셨습니다.

 

(1) 천상의 모습(1-2)

 

예수님께서 첫 번째 수난 예고를 하신 후 엿새 되는 날, 제자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새롭게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만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변모되었습니다. 변형된 예수님의 모습은 해같이 빛나고 그 옷은 빛처럼 천사처럼 천상의 존재가 된듯합니다(단 12:3). 최후 심판 이후의 존재로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라고 했는데,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또한,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실지를 미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 직전에 첫 번째로 수난을 예고하셨는데(16::21-23), 천상의 존재로 변형될 예수님의 모습은 재림의 영광(16:27)을 미리 보여주는(16:28) 역할을 합니다.

 

(2) 천상의 증인들(3)

 

예수님의 변형된 모습에 이어서 천상의 존재인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므로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의 운명처럼 영광스러운 하늘의 존재로 빛나는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므로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의 운명처럼 영광스러운 하늘의 존재로 빛나는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3) 천상을 위한 준비(4-9)

 

하늘 방문객의 모습을 본 베드로는 예수님께 세 개의 천막을 짓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합니다. 베드로는 그들의 현재 위치가 산이므로 일반 가옥을 짓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라고 생각하고 이런 제안을 했을 것입니다.

‘천막’의 의미에 대해 몇 가지 견해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70인역에서 ‘천막’는 성막을 가리키므로 처소는 광야의 성막을 가리킵니다(대하 24:6; 29:6; 시 42:4, 토빗 13:10: 지혜서 9:8; 히8:2,5; 9:11; 계 15:5; 21:3), 회복될 것이라고 약속된 다윗의 집을 의미합니다(암 9:11; 사 16:5). 또한 초막절에 이스라엘 백성이 지은 초막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장면은 출애굽 사건과 연결됩니다(참조. 호 12:9; 슥 14:16-20).

 

베드로의 제안에는 반응이 없고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 소리가 하늘에서 들립니다. 변모된 예수님께서는 천상의 존재이며, 하늘에서 들린 음성에 따르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음성은 제자들에게 그의 말을 들으라고 명령합니다. 제자들이 들어야 할 예수님의 음성은 수난과 부활에 대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하늘의 음성을 듣고 엎드려 두려워합니다. 제자들에게 들린 하늘의 음성은 신적 메시지이므로 그들은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하고 두려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손을 대십니다. 제자들이 봤던 영광스런 모습의 예수님께서는 지금 그들과 함께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위를 쳐다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보이지 않았고 구름도 사라졌습니다.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과 구름 속에서 들린 음성이 제자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가르친 핵심이었기에, 두 이미지는 각자의 기능을 끝내고 사라졌습니다. 여기서 마태는 예수님 홀로 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늘의 영광스런 모습을 얻기 위해 현재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 예수님의 운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변형된 모습이 아니라 고난의 길을 가는 인간으로서 제자들과 함께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산에서 본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도록 명령하십니다. 만일 제자들이 영광스런 광경에 도취 돼서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게 되면, 군중은 왜곡된 메시아 기대 사상으로, 산 아래 남아있는 제자들도 예수님을 오해해서 예수님의 길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변모 사건은 예수님의 정체와 운명을 계시함으로써, 제자들(또는 교회)이 아들의 말에 순종해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 영광스럽게 변모한 예수님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예견합니다. 예를 들어, 영광스럽게 변형되신 예수님께서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군중 앞에서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영광스러운 예수님처럼 자신들의 운명도 그렇게 될 것을 믿어야 하며, 동시에 아들에게 주어진 고난의 길이 자신들의 삶이라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들의 길이 교회의 길입니다. 고난의 삶은 누구나 회피하고 싶은 길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은 순종한 아들의 말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본 영광스러운 광경은 예수님께서 고난과 죽음 이후에 받게 될 영광을 미리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변화산에서 내려오시면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말해도 못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은 본인이 체험해봐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은 그 은총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본 사람은 순종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을 엘리야로 소개함(10-13)

모세와 엘리야는 떠나고 예수님을 감싸던 영광도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나의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니 아들의 말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죽음의 길을 가는 예수님을 가로막지 말라는 뜻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십니다.

 

10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12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13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10-13)

 

예수님의 명령을 들은 제자들은 의도적으로 주제를 엘리야로 바꿉니다. 서기관들은 율법 해석의 전문가들이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가르친 사실을 언급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며 그의 사역은 모든 일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회복시키는 엘리야의 역할은 말라기 4:5-6에서 제시됐습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말라기 4:6(70인역)에서는 엘리야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회복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반면, 예수님께서는 회복의 대상을 가족에서 ‘모든 것’으로 확장하십니다. 실제로는 헤롯에 의해 체포당해 죽음을 맞이한 요한이 ‘모든 것’을 회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모든 것을 회복할 예수님의 하늘나라의 회복을 시작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요한이 메시지를 선포한 시점부터 모든 것의 회복은 시작됐습니다. 모든 것의 회복은 재림 때의 회복이 아니라 회개와 갱신, 곧 회복을 위한 준비 사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12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는 표현으로 자신의 말을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대조하십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습니다. 11:14에서 예수님께서는 감옥에 있는 요한을 가리켜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서기관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가르쳤으나 이미 엘리야가 온 사실은 모릅니다.

본문은 엘리야가 온 것을 알지 못하는 ‘그들’이 누군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습니다. 요한을 체포해서 죽인 자들, 이론을 알고 있으나 요한과 엘리야를 연결하지 못한 서기관들, 나아가 돌아온 엘리야인 요한이 오실 분으로 소개한 예수님의 정체를 알지 못하고 배척한 자들을 포함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과 자신의 연대성을 근거로 인자의 운명이 요한의 운명처럼 될 것을 암시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엘리야인 요한이 겪은 운명을 따를 것이므로 고난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후 인자의 수난을 예고하셨고(16:21) 변모 사건에서도 인자의 죽음(17:6)을 언급하셨으며, 이번에도 인자가 고난받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엘리야가 온 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메시아의 운명이 고난받는 인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 제자들은 세례 요한이 바로 엘리야의 모습 그대로 행동한 인물인 것을 깨닫습니다(13). 제자들과 그들의 차이는 세례 요한의 정체를 파악하는 여부에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정체를 파악하는 자는 예수님의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본 단락의 핵심은 고난 받아야 하는 메시아의 운명을 엘리야인 세례 요한의 운명을 근거로 주장하는 데 있습니다. 요한은 성경에서 예고한 대로 엘리야가 행했던 모습과 사역을 실행하다가 자기 백성으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요한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들은 요한이 증언한 예수님의 정체를 알 수 없으므로, 요한을 대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음으로 내몰 것입니다. 특히, 민족의 회복을 고대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시각 때문에 성경의 예고를 오해해서 예수님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운명처럼 백성의 무지로 배척당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에 근거한 신학적 판단을 내리는 자들에게 의해 배척당하고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성경의 내용을 알고 있다고 해서 예수님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에 맞게 구해야 합니다. 변화산의 놀라운 체험에 베드로는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초막 셋을 짓겠다고 제안합니다. 베드로의 제안은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기념하려는 좋은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예수님의 신분과 사명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성급한 제안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영광에 이르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가 구하고 원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예수님께서도 무조건 원하실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진 않습니까? 예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예수님의 뜻을 구하는 주의 백성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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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6-02)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자세

마태복음 16장 21-28절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전부를 믿는 것입니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 전체가 옳다고 믿는 것이며, 그분이 만들어가는 세계에 참여하겠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당신이 치러야 할 대가가 무엇이든지 간에 치르겠다는 뜻입니다. 당시 베드로는 어떤 마음이었습니까?

 

  • 베드로의 고백이 끝나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의 길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과 제자들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내포합니다. 그래서 본 단락은 메시아의 길을 설명하고 메시아의 길이 곧 제자들의 길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고난의 메시아(21-23)

 

제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스승인 예수님을 시인해야 합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칭찬을 받다가 주님의 길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가 사탄(4:10)의 하수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21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21-23)

 

예수님께서는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또한 제자들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물으십니다. ‘가이사랴’는 황제 사이사랴에 나온 명칭입니다. ‘빌립보’는 분봉왕 빌립에서 나온 명칭입니다. 당시에 로마 황제 ‘가이사’는 ‘주’로, ‘빌립’은 신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세상 나라의 주와 그에 대리 통치자인 신의 아들이 통치하는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물으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베드로의 ‘주는 그리스도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세상의 주인은 가이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며, 그의 대리 통치자는 ‘빌립’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그 고백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고백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점점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메시아이지만, 그 메시아를 통해 하실 일이 무엇인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잡고 항변하기 시작했습니다. ‘항변하다’는 상대방의 의견을 강하게 거부하는 모습을 표현하는 동사인데(공관복음서에 27회[마 6회, 막 44회, 눅 12회], 딤후 4:2; 유 1:9), 문맥에 따라 ‘책망하다’, ‘경고하다’, ‘심각하게 말하다’, ‘벌하다’ 등으로 번역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꾸짖어 쫓을 때도 이 단어가 사용됩니다(막 1:25=눅 4:35; 마 17:18=막 9:25 9:42).

22절은 ‘주여, 하나님이 이것을 금하셨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이어서 그는 ‘이것은 결코 당신께 일어나지 말아야 합니다’라며 예수님께서 생각을 고쳐야 함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들려 세우고 꾸짖으십니다(23).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내 뒤로 떠나라, 사탄아!’라고 하십니다. 광야 시험에서 사탄에게 ‘떠나라, 사탄!’이라고 하셨습니다(4:10),

베드로에게 있는 사탄이 쫓겨나야 하고,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제자도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마태는 마가복음에는 없는 ‘너는 나를 걸려 넘어지게 할 것이다’를 사용합니다(참조 5:29; 18:6). ‘스킨달론’은 ‘함정’,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 ‘죄를 짓게 하는 유혹’ 등의 뜻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유혹해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뜻을 어기고 넘어지게 하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과 16:18에서 베드로에게 적용된 ‘바위’를 연결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바위가 됐으나(16:18). 자신의 뜻을 추구하자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단계는 신앙의 목표가 아닙니다. 그 다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메시아로 오셨기에 그를 따르는 자들은 고난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교회의 목표는 사람들이 성경에 묘사된 예수님을 정확하게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목적을 정확히 이해했는지 여부는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으로 입증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목숨을 회복하기 위해 나의 아까운 시간과 소중한 보화를 희생하지 못한다면 자신의 목숨을 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제자도는 구원받은 감격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무한한 감사를 무한한 헌신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메시아를 따른 제자의 길(24-28)

십자가가 끝이 아닙니다. 인간 예수님께서는 다시 살아나서 하나님 나라의 왕권을 부여받으실 것입니다. 그날을 구원과 심판이 판가름 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고 예수님을 버렸는지, 아니면 예수님을 얻기 위해 자기 목숨을 버렸는지에 따라 그 운명이 갈릴 것입니다.

 

24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5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27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2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24-28)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추구해야 하는 것은 십자가 없는 영광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으면 살겠지만, 예수님을 죽이고 자기만 살겠다고 하면 다 잃게 될 것입니다.

 

(1) 자기 부인과 십자가(24)

 

예수님의 운명은 제자들의 운명을 뜻하므로 제자의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제자도의 핵심은 순종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순종해야 합니다. 바른 신앙고백은 반드시 예수님을 닮은 삶으로 표현돼야 한다는 것은 마태복음에서 반복되는 주제입니다(7:21-23; 10장; 11:28-30; 13장 등).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은 구체적으로 자기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으로 증명되며, 세 가지 삶(‘자기를 부정하라,’/‘자기 십자가를 지라.’/‘나를 따르라’)의 표현은 사실상 같은 의미의 반복입니다.

먼저 예수님께 나오기를 원하는 자는 자기를 부정해야 합니다. 자기 부정은 자신의 욕망이나 계획이 아니라 앞서가시는 예수님만 보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삶을 규정하는 핵심이므로, 제자는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2) 목숨을 잃음과 얻음(25-26)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에 순종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이 십자가는 자신이 아니라 남을(또는 많은 사람을) 위한 희생을 의미했습니다.

제자의 길은 예수님의 길을 모방하는 것이므로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25). 목숨을 구하고 잃는다는 이미지는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서 목숨의 위협을 경험하는 상황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잃더라도 미래에는 (부활을 통해서) 확실히 얻게 됩니다. 물론 여기서 목숨을 잃고 얻는 것을 반드시 문자적 의미로만 볼 필요는 없으며 죽을 것 같았던 현실이 바뀌어 죽지 않고 사는 역설적인 경험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대신하는 몸값으로 자신의 목숨을 주기 위해 오셨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누구든지 그의 희생을 통해 주어지는 혜택으로 목숨을 얻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비록 고난이 필수적으로 따르지만 목숨을 얻는 길입니다.

 

(3) 인자가 올 때(27-28)

 

이제 예수님께서는 종말의 재판장으로서 미래에 등장할 신분과 역할(27-28)을 묘사합니다.

2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미래의 목숨, 최후에 심판대에서 주어질 목숨을 26절에서 암시한 다음에 27절에서는 그 일을 결정하는 인자의 오심을 언급하십니다(예. 25:31-32). 다른 본문과 비슷한 표현을 고려할 때 27-28절의 인자가 자신의 천사들과 함께 와서 행한 대로 심판하는 장면은 최후 심판을 가리키며 그는 종말론적 심판을 집행하는 재판장으로서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의 천사들’이나(13:41,49; 24:31, 25:31) 행한 대로 갚는 모습을 통해 인자의 신적인 권위를 강조합니다. 원래 보상은 하늘 아버지의 행위인데(6:4,6,18) 인자가 이것을 행할 것입니다.

16:27과 19:28의 유사점을 연결하면, 인자는 천사들과 함께 와서 영광의 보좌에 앉아 심판을 집행할 것입니다. 24:30-31도 인자 그의 천사 종말의 심판이 나옵니다. 16:27과 25:21-32의 유사점은 각자 행한 대로 심판하는 인자의 역할을 강조합니다(참조 25:33-46). 인자는 신적인 존재로서 하늘 법정을 주재하는 존재입니다.

 

인자가 종말의 심판을 집행한다면 심판의 시기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가 아니라 역사의 끝, 즉 재림입니다(28). 그런데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서 죽기 전에’(28)는 재림이 아니라 제자들 중 일부가 인자가 그의 나라를 가지고 오는 것을 목격하게 될 특정 시간을 가리킵니다. 죽기 전에 제자들이 인자를 보게 될 사건과 시기에 대해 학자들은 변화산 사건, 십자가와 부활, 예루살렘의 멸망, 예수님의 재림 등을 제안해왔습니다. 이 중에서 예수의 재림은 ‘죽기 전’이라는 고려할 때 제외될 수밖에 없습니다.

27절과 28절 사이에는 시간 간격이 있으며 이는 재림과 인자가 영광을 간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27절이 ‘재림’에 대한 내용이기 때문에 28절을 재림과 연결해 보면, 제자들은 살아 있을 동안 재림을 부분적으로 경험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28절은 변모 사건(17:1-8)을 가리킬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자들 중 일부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형되는 광경을 목격합니다. 예수님께서 변형되신 모습은 인자가 영광의 보좌에 앉아서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행사하는 것의 맛보기라고 할 수 있으며, 17:1의 ‘엿새 후’는 16:28과 변화산 사건을 연결하는 암시로 볼 수 있습니다. 부활도 예수님께서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미리 맛볼 수 있는 장면에서 배제되는 것은 아닙니다(28:18).

제자의 길과 인생은 인자의 길과 인생을 모방합니다. 인자의 인생은 십자가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제자들도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라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신앙고백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아닙니다. 제자의 일생은 예수님의 일생, 특히 그의 고난을 반영해야 하고, 이런 여정을 통해서 예수님과 일치되는, 예수님을 닮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고백한 사람은 예수님처럼 행동하고, 예수님처럼 행동한 사람은 심판의 때에 그 행함으로 신앙을 검증받습니다. 그래서 인자이신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와서 행한 대로 갚으신다는 약속은 한편으로는 격려를 한편으로는 긴장감을 갖도록 경고하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죽으신다는 말씀에 예수님을 위하여 인간적 마음으로 반대했지만,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고 거부하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동기는 달랐지만, 결과적으로 베드로의 항변은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할 때 한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바르게 믿고 따르려면 무엇보다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마음과 뜻을 정확하게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혹시 하나님의 뜻과 방식이 아닌 자신의 뜻과 방식으로 일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과 방식이 무엇인지 말씀을 잘 기울리고 깨달라아 주의 뜻을 온전히 쫓는 주의 백성들이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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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6-01)

 


믿음 위에 교회를 세우시는 예수님

마태복음 16장 1-20절


관계에 있어 가장 귀중한 기본은 소통입니다. 진실한 소통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상대에 대한 바른 인식과 이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 대해 바르게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이 그분과의 바른 친교를 낳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바른 삶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과 제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했습니까?

 

  • 본문에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시험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요나의 표적밖에 보여 줄 것이 없다고 대답하시고,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대 지도자이나 무리는 예수님의 정체를 단편적으로 이해하거나 오해했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하나님의 아들로 이해합니다.

 

하늘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1-4)

영적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표적이 아니라 진실하고 정직한 마음입니다. 숱한 기적을 보았으면서도 다시 표적을 요구하는 종교지도자들의 불신앙은 누룩같이 위험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참 의미를 알기 전까지 그들을 일깨울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1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2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3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4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1-4)

 

본문은 칠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직후에 일입니다. 당대의 종교지도자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구합니다.

방금 전에도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셨는데도 또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직접 떡의 기적을 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 모세에게 하늘의 양식을 비같이 내려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자연현상을 언급하면서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지 못하는 그들을 꾸짖으십니다(2-3). 이런 것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는 것이라고 평가하십니다(4).

‘음란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12:38; 겔 16:38; 23:45; 호 3:1).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실하지 못하면 비상한 표시를 구하게 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권위와 능력을 여러 표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께서 누구인지, 예수님과 하늘나라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표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를 받아들이기보다 배척하기 위해 하늘에서 오는 표적을 보이라는 말로 시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표적을 구하는 종교지도자들에게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하십니다. 특히 당시에 하늘에서 오는 표적은 하늘의 군대와 관련이 있어서, 예수님께서는 승리주의의, 군사적 시위를 보여주는 메시아가 아니므로, 그들이 원하는 표적을 보여주지 않으셨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이 세대는 자신들이 기대하는 ‘강한’ 표적에 몰입했기 때문에 약한 종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우리 시대의 표적도 세속적인 승리가 아니라 고난의 십자가입니다! 교회는 물질적인 풍요와 세속적인 성공을 약속하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 자체를 끊임없이 소개해야 합니다.

 

제자들의 이해력(5-12)

제자들은 오천 명을 먹인 사건과 사천 명을 먹인 사건을 경험하고도 예수님께서 누룩에 대해 언급하시자 이것을 미처 떡을 준비하지 못한 자신들을 책망하는 말로 알아듣습니다. 어찌 떡이 예수님의 관심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몰이해가 불신앙을 낳은 것입니다.

 

5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6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7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이르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8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 9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10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11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2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5-12)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요구에 먹을 떡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가르침이 문제임을 지적하십니다.

 

(1) 누룩을 주의하라(5-6)

 

예수님의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가면서 있을 때, 빵 가져가는 것을 잊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누룩은 가르침을 뜻하는 은유입니다(12). 누룩은 초기에는 중요하게 보이지 않지만, 어느새 전체 반죽에 퍼집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가르침이 끼치는 영향은 시간이 흐르고 나서 백성 전체의 불신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2)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7-10)

 

제자들은 예수님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빵을 가져오지 않은 사실을 생각합니다. 제자들은 오천 명과 사천 명을 먹이신 사건을 잊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신다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제자들의 염려하는 문제를 지적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의 문제는 위선이나 장로의 유전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3)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훈(11-12)

 

사두개인들의 문제는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공통적인 가르침은 고난의 길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앞 단락에서 자신의 고난, 즉 약함을 의미하는 요나의 표적을 언급하셨고, 뒤에서는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후 처음으로 고난을 예고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룩을 피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닫는 것은 고난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교회에 급속히 퍼질 누룩(가르침)은 고난을 외면하고 번영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메시아가 보여준 고난의 삶을 참된 가르침으로 삼아야 합니다. 

 

어느 시대든지 교회는 악하고 음란한 시대의 영향을 받아 십자가의 길을 외면하기 쉽습니다. 이것이 교회를 망치는 누룩이며 눈에 보이지 않게 온 교회를 병들게 합니다. 욕망을 약속하는 거짓 교사들의 확신에 찬 소리에 수 많은 사람들이 멸망의 길로 갑니다. 먹고 사는 문제는 예수님께서도 관심을 가지신 중요한 주제이지만 하나님께서 보살펴주실 것을 믿지 못하면 어느 새 십자가를 부끄러워하고 피하는 길로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시대의 말보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 권위 있게 여기고 탐구해야 합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13-20)

마태복음 안에서 처음으로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한 올바른 고백이 제자 베드로의 입에서 흘러나옵니다.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고백한 것입니다. 물 위를 걷는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더니(14:33), 이번에는 ‘메시아’로 고백한 것입니다. 왕이요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대리 통치라는 뜻이고,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다는 고백입니다. 당신에게 예수님께서는 어떤 분입니까?

 

13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20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13-20)

 

본문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하나님 나라의 열쇠를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대리통치자가 되는 가장 중요한 자격은 바로 예수님을 이해하고 믿는 것입니다.

 

(1)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13-14)

 

비록 베드로가 당시의 유대교 메시아 기대 사상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을지라도,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길이 고난과 십자가로 향하는 것임을 알지 못했을지라도,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단계에 이릅니다.

 

(2) 베드로의 고백과 예수님의 반응(15-17)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왕이나 이스라엘로 이해했습니다. ‘왕’의 신분이라는 측면에서 다윗의 아들과 하나님의 아들은 동의어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고백하는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 왕의 의미를 넘어서는 ‘신적인’ 존재를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성부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계시로 예수님의 정체를 알게 됐습니다(17).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예수님의 사건을 목격하고 그의 가르침을 배웠기에 예수님의 정체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합니다. 특히 11장 25-27절에서 예수님께서 성부께 기도하는 내용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신적인 아들로 이해하는 데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또한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에서 구원을 받고 나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었습니다(14:33). 이렇게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인식은 점점 깊어지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교회의 토대가 되는 바위의 역할을 하는 특권을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베드로를 시작으로 사도들을 교회의 토대로 두시고 이후 동일한 신앙을 고백하는 성도들을 교회로 세워가십니다.

 

(3) 놀라운 말씀과 경계(18-20)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하십니다. ‘음부의 문들’(18)은 지하세계(음부)로 가는 출입구이고, 성의 문이 무너지면 도시가 무너집니다(예, 시 24:7). 그래서 문을 얻었다는 것은 도성을 정복했다는 뜻입니다.

음부는 하늘과 정반대의 공간으로서 불경건한 자들이 거하는 영역이며, 이곳의 힘이 교회를 이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늘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지상 교회의 연결은 19절의 ‘열쇠’와 ‘매고 푸는’ 표현으로 설명됩니다. 여기서 교회가 음부의 문을 공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문이라는 용어 자체가 저항하는 태도를 의미하므로, 베드로와 교회(18:18)가 음부의 문에 갇힌 자들을 구출해서 하늘나라의 문을 열쇠로 연입니다. 하늘의 문을 열 수 있는 권세는 하늘의 열쇠를 가진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베드로가 하늘나라의 열쇠를 사용할 때, 땅에서 베드로가 취한 행위에 대한 반응으로 하늘이 열립니다.

1세기 유대 토양에서 ‘매고 푼다’는 것은 정치적이고 사법적인 권위와 같은 결정권을 뜻합니다. 베드로는 법을 해석함으로써 발휘하게 되는 결정권과 법적인 권위를 부여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는 권위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아니라 베드로에게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잘못 해석하고 잘못된 교리를 가르침으로써 하늘나라의 문에 들어갈 수 없게 막는 역할을 했지만(23:13), 베드로는 사람들을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할 수 있는 권위를 갖습니다.

이런 권위는 베드로 개인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18장 1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이 교회를 지지한다고 밝힙니다. 마태복음의 첫 독자들에게 교회는 마치 음부의 세력에 잡아먹힐 것처럼 작고 약해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로 대표되는 교회는 음부의 권세를 이기며 위쪽인 하늘에 연결되어 있기에, 하늘은 열쇠로 매고 풀 때 하늘(의회)은 교회의 결정을 지지합니다. 교회는 하늘에 속했고 하늘나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권세를 부여받았습니다. 또 음부의 문들을 공격해서 속박된 백성을 구출해서 하늘나라로 인도하는 권세와 책임을 부여받았습니다.

이와같이, 교회는 바른 성경 해석을 통해서 사람들을 하늘나라로 초대하고 이들을 삼키려는 음부의 문을 박살 내서 그곳으로 가는 사람들을 구출하는 역할을 부여받았습니다. 이런 권세를 얻은 교회는 하늘에 속해 있습니다. 베드로로 대표되는 교회는 하늘에 연결되어 있으므로 하늘은 교회의 결정을 지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곧 구세주이십니다. 이렇게 베드로처럼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고백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생의 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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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5-02)

 


이방인에게도 역사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15장 21-39절


요리 프로그램이 부쩍 늘었습니다. 우리나라에 먹는 문제 자체가 해결되니 이제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맛있게 먹을지를 궁금하게 여기는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먹는 음식이 그 사람을 결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먹는 문제로 이방인들을 상대하십니다. 그렇게 하신 뜻은 무엇이었습니까?

 

  • 예수님께서는 종교지도자들과 논쟁 후 급히 이방 지역으로 옮겨 가십니다. 거기서 한 이방 여인을 만납니다. 예수님 사역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특별히 여인의 반응과 태도는 이방인들의 구원 사역 위치를 명확히 해줍니다. 그러나 그녀의 남다른 믿음은 예수님 안에서 이방인들이 누릴 구원을 투사합니다. 이어지는 치유 사역과 칠병이어 기적은 예수님 안에서 충만한 구원을 경험하는 이방인들을 그립니다

 

가나안 여인의 간구(21-28)

정말 우리에게 믿음이 있는지를 알아보시려고 주께서 우리를 수치의 자리로 낮추실 때가 있습니다. 이방인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낮아져야만 합니다. 흉악한 귀신 들린 딸을 살려 달라는 가나안 여인의 거듭된 요청을 거절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간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1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3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5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21-28)

 

하나님의 축복에 참여하는 길은 헛된 자부심이나 말씀 소유 여부가 아니라 은혜를 갈구하는 겸손입니다. 이방 여자가 자격 없음을 인정하며 부스러기 은혜라도 구하는 믿음은 이스라엘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1) 이방 여자와 만남(21-22)

 

예수님께서는 대표적인 이방 도시들인 두로와 시돈에 가십니다(21). 그 지역에서 가나안 여자 한 명이 소리를 지르며 귀신 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합니다. 딸은 귀신의 공격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중입니다. 귀신 들림은 사탄의 나라에서 일어나는 특징이며(4:24; 8:16,28,33; 9:32, 12:22; 17:14-20), 하나님 나라를 가지고 오신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하수인들인 귀신을 쫓아내심으로써 사탄의 나라를 무너뜨리십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이방 지역으로 확장됩니다.

이방 여자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다윗의 아들이여!’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마태는 여자가 계속해서 부르짖는 모습을 강조합니다.

 

(2) 예수님의 낯선 반응(23-24)

 

예수님께서는 이제까지 치유를 부탁할 때 즉각 응답하셨지만(8:2-4,6-7,14-15,16,28-34) 이번에는 침묵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와서 여자가 뒤에서 소리를 지르니 보내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냄 받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24). ‘보냄 받았다’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을 돌봐야 하는 목자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목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쉴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렘 50:6; 겔 34장).

예수님께서는 목자가 필요한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회복하기 위해 보냄 받은 목자입니다(마 9:36; 10:6). 얼핏 보기에 예수님께서는 목자가 필요한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회복하기 위해 보냄 받은 목자입니다(마 9:36; 10:6). 얼핏 보기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입장을 지지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말을 가나안 여자가 듣도록 의도하셨습니다. 구원 역사의 순서에서 이스라엘을 돌보는 목자의 사명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돌봄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하늘나라 사역은 ‘이방의 갈릴리’(4:15)에서 출발했고, 데가볼리(4:25)와 같은 곳에서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본 이야기를 전체로 읽으면 예수님의 대답은 여자의 간청에 대한 거절을 의도한 것이 아닙니다.

 

(3) 여인의 믿음과 예수님의 응답(25-28)

 

이방 여자는 예수님의 냉찬 반응에도 관여치 않고, 예수님께 엎드려 ‘주여, 저를 도와주소서!’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24절에 이어서 두 번째로 여자의 간청을 거절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녀의 빵을 개들에게 던져주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본문의 개는 집에서 기르는 애완용으로서 집주인은 자녀가 먹는 같은 음식을 집어서 개에게 주지 않습니다. 개는 자녀와 대조됩니다. 개는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비유어이며,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이미지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개는 이방인을, 자녀는 이스라엘의 자녀(출 4:22; 신 14:1; 참조 마 5:9,45)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거절에 대해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하면서 세 번째로 요청합니다. 집안의 개들은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개가 밥상에서 떨어지는 음식을 받아 먹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여자는 물러서지 않고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의 태도를 칭찬하십니다(28). 어떻게 지속적으로 예수님께 매달릴 수 있습니까? 여자가 예수님의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예수님을 병자를 불쌍히 여기고 치유하는 다윗의 아들로 이해했으며, 구원 역사의 흐름에서 다윗의 아들이 이방인들을 치유할 것을 믿었습니다. 여자는 구원 역사를 이해했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간청할 수 있었습니다. 여자의 세 번째 요청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여자의 큰 믿음을 칭찬하면서 ‘원하는 대로 되라’고 명령하십니다(28). 예수님의 명령이 떨어지는 바로 그 순간 여자의 딸이 낫습니다.

 

본문에 묘사된 여자는 큰 믿음의 소유자입니다. 예수님의 치유하는 권위를 믿고 끈질기게 기도하는 여자의 믿음에 예수님께서는 반응하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믿음이라는 주제만 강조하지 않고 여자가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해하고 있음을 알립니다. 말하자면, 여자의 믿음은 구원 역사에 대한 이해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여자는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이방인들을 불쌍히 여기신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아들로서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구원 역사의 관점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구원이 주어지고, 그 다음에는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빵 부스러기가 선물로 주어집니다. 예수님의 정체를 구원사의 전망에서 파악할 때, 기도는 더욱 확신에 차게 되고 더욱 간절해집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다시 무릎을 꿇습니다. 예수님을 긍휼을 베푸는 메시아로 믿기 때문입니다.

 

환자들의 치유(29-31)

지금 우리가 살고 자녀들을 살릴 수 있는 길은 금력, 학력보다 주의 권능을 의지하는 이 믿음뿐입니다. 자녀의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만으로도 딸에게서 귀신이 물러날 것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큰 능력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29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30큰 무리가 다리 저는 사람과 장애인과 맹인과 말 못하는 사람과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앉히매 고쳐 주시니 31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29-31)

 

본문은 다른 사건으로 넘어가면서 예수님의 치유 사역을 요약하는 내용입니다. 치유(14:13-14)에 이어서 오천 명이 먹은 사건이 나온 방식과 같이 사천 명이 먹는 사건 앞에 치유 장면이 나옵니다. 치유와 먹는 것은 희년(사 61:1-2)의 실현인 메시아의 사역이므로 결합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본 단락의 치유와 먹는 사건은 단순히 앞의 사건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 지역에서의 메시아 사역을 다룹니다. 두로와 시돈을 통과해서 갈릴리 동편으로 예수님 일행이 갈릴리 바다를 건넜다는 서술은 없습니다.

 

본문은 가나안 여자의 팔이 치유 받는 사건과 자연스럽게 연결하면서 이방인들이 예수님의 치유를 경험하는 내용을 압축합니다(11:5).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종말의 회복이 이방 지역에서도 성취되고 있음을 묘사함으로써 예수님을 메시아로 드러냅니다. 긍휼의 메시아는 제의적으로 정결한 사람들, 현대의 개념으로 보면 종교적 전통에 충실한 사람들을 찾아서 치유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비록 당시의 종교적 관점에서 소외된 자들일지라도 메시아의 권위를 믿고 초대를 받은 자들을 예수님께서는 목자의 마음으로 치유하십니다. 어떤 조건과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해도 긍휼의 메시아에게 초대를 받은 사람은 치유 받습니다. 이사야의 약속이 성취된 본문의 치유는 하나의 모형이 되어 어느 시대든지 상처 받고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자유하게 만듭니다.

 

사천 명의 식사(32-39)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의 메시아도 되십니다. 참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누구나 공평하게 사랑하십니다.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데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따로 없었습니다. 광야에서 사흘 동안이나 자신의 말씀을 듣기 위해 떠나지 않는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32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33제자들이 이르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가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34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 하거늘 35예수께서 무리에게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36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37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38먹은 자는 여자와 어린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 39예수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배에 오르사 마가단 지경으로 가시니라(32-39)

 

사람들은 외형적인 자격이나 조건에 따라 차별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일에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지 않으셨습니다.

 

(1) 칠병이어(32-34)

 

32절에 나오는 무리는 29-31절에 등장한 사람들입니다. 이방인 무리는 치유하는 예수님 곁에서 3일을 머물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무리를 불쌍히 여긴다고 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무리를 먹이는 동기입니다. 무리는 3일 동안 예수님과 함께 있었으므로 가져온 음식이 다 떨어졌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굶겨 보내지 못하겠다고 강조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몇 개의 빵이 있는지 묻자 제자들은 빵 일곱 개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다고 대답합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여러 가지 상징적인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본문의 숫자는 이방인과 관련이 있습니다(70개의 나라 등).

 

(2) 예수님의 축사(35-36)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 때처럼 무리를 앉히신 다음 빵과 생선을 취해서 감사를 표한 다음에 무리에게 주십니다(14:19).

본문은 오천 명이 먹은 사건(14:15-21)과 여러 점에서 비슷합니다. 두 장면의 차이는 없습니까? 인원의 차이 외에도 두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각각 갈릴리와 이방 지역의 갈릴리 바다 근처의 산입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산에서 먹었으나(렘 31:10-14; 34:14, 26-27), 유대인들에 의해 부정하다고 무시당하는 이방인인 가나안 여자(21-28절)와 많은 환자들(29-31)은 이방 지역에서 메시아의 현존을 경험했습니다.

가나안 여자가 개들이 자녀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는다고 말한 내용은 이방인들이 치유의 혜택을 누리는 사건에 이어서 4천 명이 빵을 먹는 장면으로 연결됩니다. 예수님의 긍휼을 받는 대상에서 제외되는 계층은 없습니다.

 

(3) 배불리 먹고 남는 기적(37-39)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외에, 이번에는 사천 명가량은 다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리고 일곱 광주리가 남는 기적을 맛봅니다. 광야에서 사흘 동안이나 말씀을 듣기 위해 떠나지 않은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필요에 깊은 관심을 보이십니다. 이들도 이방인들로 보입니다.


 

큰 믿음은 바른 확신에서 비롯됩니다. 가나안 여자는 예수님께서 어떤 분인지 바르게 알고 있었기에 무시와 거절 심지어 모욕에 가까운 말에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께 매달렸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바른 앎, 절대적 신뢰 그리고 딸을 향한 극진한 사랑이 결합해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고백하며 어떤 자세로 기도하고 있습니까? 또 예수님께 무엇을 간청하길 원하십니까? 이 여인처럼 겸손하게 주님의 신뢰하는 마음으로 나아가 간구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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