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17-02)
겨자씨만 한 믿음을 원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17장 14-27절
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꽃을 화분이나 화단에 심어서 계속 감상합니다. 그리고 시간에 따라 적당하게 물과 거름을 줍니다. 만약 시시때때로 물주는 일을 게을리하면 꽃은 시들 거리다가 죽어버립니다. 영적인 성장도 이와 같습니다. 성도들은 꽃에 물을 주는 것처럼 항상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공급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말씀과 은혜를 공급해 주셔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낮에 직장에서 수고해서 피곤해도 기도의 시간에 빠지지 않고 철야기도회나 새벽기도회에 계속적으로 출석하는 것을 봅니다.
- 본문은 예수님께 속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가르쳐 줍니다. 변화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께서 귀신 들려 간질로 고생하는 아이를 고치려 했지만,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제자들을 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를 고쳐주시고 제자들의 믿음이 없는 것을 보시고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겨자씨 한 알만큼의 믿음이 있어도 이 산을 저기로 옮길 것이며 못할 것이 없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책망 받았던 잘못된 믿음은 무엇입니까? 바른 믿음으로 당신을 초대하겠습니다.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심(14-21)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놀라운 모습을 목격했던 제자들은, 변화산에서 내려오자마자 척박하고 강퍅한 세상을 만나고 이곳에서 사는 방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제자들과 함께 변화산에 내려오실 때, 산 아래에서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4저희가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가로되 15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16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다 19이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0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21(없음)(14-21)
예수님의 제자들이 실패했던 것은 믿음을 기술로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받은 능력으로 지금도 행하는 것처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치유는 기술로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일어나는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진행되는 것입니다.
(1) 귀신 들려 간질 걸린 아들을 둔 사람(14-16)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 산 아래는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이 귀신에 의해 간질에 걸린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세 제자가 산에서 내려오셔서 다른 제자들과 합류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 도움을 얻지 못한 어떤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을 보자마자 무릎 꿇어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그의 아들은 간질로 비참하게 고통을 겪고 자주 불과 물에 들어갔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제자들이 고치지 못한 점을 언급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미 귀신 쫓아내는 권능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산 아래 남아 있던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허락해준 권위를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의 실패는 작은 믿음과 영적인 부담 때문이었습니다.
(2) 무능한 제자들과 예수님의 치유(17-18)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실패를 보시고,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를 탄식하십니다. ‘세대’는 소수의 사람들이 아니라 그 시대는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고 삐뚤어진 세대와 구별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제자들의 실패, 곧 믿음의 실패 때문에 분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 속에 있는 귀신을 꾸짖어 내쫓으십니다. 그때 아이는 나았습니다. 본문에서 ‘꾸짖었다’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는 아이의 현상이 육신의 질병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이 표현을 통해서 아이를 사로잡고 있던 것이 귀신의 세력이었고, 예수님께서 마귀의 영향력을 제거하신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간질병에 걸린 아이가 그 때부터 나은 것은 즉시 능력이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3) 겨자씨만 한 믿음(19-21)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 병을 치유하고 나서,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왜 귀신을 쫓아낼 수 없는지를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작은 믿음 때문에 쫓아낼 수 없다고 하십니다. 즉 제자들의 문제는 작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이 시대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은 재적으로 발생하지 않고 예수님께 의존하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믿음’이란 공급해주고 보호해 주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신뢰란 간구하는 것입니다.
17절에서는 믿음이 없는 상태를 꾸짖었으나 20절에서는 믿음이 작은 문제를 지적하십니다. 근본적으로 제자들은 믿음이 작은 자들이지 믿음이 없는 자들은 아닙니다. 비록 작은 믿음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의 신뢰를 기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십니다. 겨자씨만 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습니다. 산을 옮기는 능력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 때문에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하나님께서 일하시면 산을 옮길 수 있습니다. 작은 믿음이라도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세대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산’ 자체에 어떤 신학적 의지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산을 옮기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다는 표현과 연결됩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는 공동체이며 이런 능력은 교회의 믿음을 통해 가능해집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불가능이 없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해야 합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변화산 위에 올라가셨을 때 상황처럼, 교회는 예수님께서 눈에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신뢰함으로써 이 세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 수난을 예고하신 예수님(22-23)
오늘날 당신과 당신이 섬기고 있는 교회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비록 이해하기 힘들고 순종하기 힘들더라도 제자들처럼 염려하지 마시고 순종의 길을 선택하시길 바랍니다. 그곳에 산을 옮길만한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22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23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22-23)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갈릴리에 모으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준비하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의기소침한 제자들에게 재자의 참 의미를 다시 고취해줄 필요를 느끼셨을 것입니다. 본격적인 예루살렘 여정을 앞두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가버나움)에서 모임을 갖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의 메시아의 길을 다시 한번 강조하십니다. 자신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과 죽임을 당한 후 제 3일에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정체와 제자들의 정체를 연이어 배치한 마태복음은 22-23절에 인자의 수난을 두 번째 언급하고 곧이어 제자들의 신분을 설명합니다. 인자의 운명과 제자공동체의 운명은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겠다고 말씀하지만, 제자들은 아직까지도 매우 근심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따라 살려는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전 세금 납부에 관한 교훈(24-27)
오늘날 성도들은 악을 조장하는 질서에는 단호하게 대응하지만, 공공질서를 위해서라면 자유와 권리를 양보하는 선택이 필요합니다. 정당한 권리라도 분쟁의 원인이 된다면 차라리 권리를 포기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더 성숙한 신앙입니다.
24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가로되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25가로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가라사대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26베드로가 가로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27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24-27)
본문은 성전 세금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제 장면이 가버나움으로 바뀝니다. 첫 번째 수난 예고 후에 제자들의 정체성에 대한 본문이 나온 것처럼, 두 번째 수난 예고는 제자들의 신분 혹은 정체성에 대한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1) 성전세 문제로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24-26)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을 때 성전세를 받는 사람이 베드로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들이 베드로에게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24)고 질문함으로 시작합니다.
첫째 본문은 성전 세금의 이슈로 제자들의 신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성전세나 속전을 지불하는 거 없이 예수님을 통해 하늘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특권은 없습니다. 하나님과 자녀의 관계에서 성전세와 속죄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성전세가 중지될 것을 예고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사건에서 성전세금을 위한 세겔을 바꿔주는 사람들의 탁자를 엎으심으로써 환전 자체를 반대하실 것입니다. 이는 속전 역할을 했던 성전 세금을 내는 일이 없어지는 것, 즉 성전 세금 제도가 사라질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현재 가버나움에서는 성전세금인 반 세겔을 내는 동의하지만, 이제 예루살렘에서 죽음을 앞둔 예수님께서는 세금을 거두는 행위 자체를 반대하실 것입니다.
대속에 의미와 연결해보면 출애굽기 30장 16절에서 성전세금은 생명을 대속할 목적으로 지불 하는 속전이었으므로 예수님의 목숨이 속전의 기능을 대체하게 되면 성전세금은 필요 없게 됩니다. 마태복음 12장의 가르침과 같이 성전은 예배자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하는 공간입니다. 성전은 세금을 모으는 자들의 소유나 이득의 수단이 아닙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자녀를 위한 하나님의 집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전이 없이도 하늘 아버지와의 교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성전에서 기대됐던 긍휼은 성전 없이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 혹은 하나님 자녀의 정체성은 성전에 충성하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신뢰하는 데 있습니다.
(2) 기적을 통한 성전세 납부(27)
둘째 예수님께서 물고기 입에서 얻은 돈으로 성전 세금을 내게 하시는 장면은 하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알립니다. 베드로는 하늘의 아버지께서 물고기라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필요를 채워주시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당시 문화에서 물고기는 통치자가 죽어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물고기의 이미지는 하나님의 주권과 공급을 강조합니다. 마태복음의 새 본문 7장 10절, 14장 13-21절, 그리고 15장 32-39절은 물고기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것과 하나님의 긍휼을 표현하는 장면에서 나왔습니다. 아버지와 물고기의 관계는 마태복음 7장 9-10절에서 등장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것을 구하는 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십니다.
오병이어 사건에서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들고 하늘을 향해 감사하신 장면은 5천명이 넘는 무리에게 물고기를 제공하신 분은 하나님이신 사실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물고기로 4천명에게 음식을 제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감사하신 후 생선과 빵을 나눠 주셨기 때문에 물고기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로서 자녀의 필요를 알고 계시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기적으로 돌봐주십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께서는 이 소유를 자녀를 위해서 사용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아들들을 세금을 내지 않았다고 하신 내용과 연결해보면, 물고기 입에서 세금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자녀의 것을 착취하는 분이 아니라 자녀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버지는 자녀에게서 세금을 받지 않고 자녀를 돌보는 존재이므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왕과 백성의 관계보다 우선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나라 자녀들에게 땅의 임금들이 하는 것처럼 무거운 재정의 짐을 지우는 분이 아니라 자녀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하는 가장 강력한 능력입니다. 믿음은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내적 신념이나 의지가 아니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입니다. 아주 작은 믿음이라도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믿음은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아무리 큰 믿음이라도 하나님을 향하지 않는 잘못된 믿음은 어떤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순종을 통해 삶 속에서 힘있게 작동합니다. 날마다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여 큰 능력이 나타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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