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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7-01)


영광스럽게 변화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17장 1-13절


영화관에서 영화를 시작하기 전에 다음에 상영할 영화를 미리 맛보기로 보여주는 것을 ‘예고편’이라고 합니다. 잘 만들어지고 바르게 전달한 예고편은 관객들에게 다음 영화를 볼 수 있도록 이끌어줍니다. 하지만 예고편은 그럴싸한데 본 영화가 형편없다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욕을 먹을 것입니다. 본문은 장차 천국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하실 참모습인 예수님에 대한 예고편입니다.

 

  •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것이라는 예언에 의기소침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본 모습인 하나님의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도래했고, 세례 요한이 바로 오리라던 엘리야라고 밝혀 주셨습니다.

 

변화산에서 변모하신 예수님(1-9)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와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은 예수님의 정체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변모하신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십자가를 앞둔 예수님에게 제자들을 격려하기 위함이요, 제자들에게도 십자가 뒤에 부활의 영광이 있음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1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4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5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6제자들이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니 7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 8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9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1-9)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정체를 고난받으실 메시아로 드러내셨습니다. 첫 번째로 십자가에서 수난 예고를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가긴 했지만, 온전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급기야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죽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다가, 예수님께 책망까지 받았습니다. 그로 인해 낙심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찾아오셨습니다.

 

(1) 천상의 모습(1-2)

 

예수님께서 첫 번째 수난 예고를 하신 후 엿새 되는 날, 제자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새롭게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만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변모되었습니다. 변형된 예수님의 모습은 해같이 빛나고 그 옷은 빛처럼 천사처럼 천상의 존재가 된듯합니다(단 12:3). 최후 심판 이후의 존재로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라고 했는데,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또한,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실지를 미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 직전에 첫 번째로 수난을 예고하셨는데(16::21-23), 천상의 존재로 변형될 예수님의 모습은 재림의 영광(16:27)을 미리 보여주는(16:28) 역할을 합니다.

 

(2) 천상의 증인들(3)

 

예수님의 변형된 모습에 이어서 천상의 존재인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므로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의 운명처럼 영광스러운 하늘의 존재로 빛나는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므로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의 운명처럼 영광스러운 하늘의 존재로 빛나는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3) 천상을 위한 준비(4-9)

 

하늘 방문객의 모습을 본 베드로는 예수님께 세 개의 천막을 짓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합니다. 베드로는 그들의 현재 위치가 산이므로 일반 가옥을 짓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라고 생각하고 이런 제안을 했을 것입니다.

‘천막’의 의미에 대해 몇 가지 견해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70인역에서 ‘천막’는 성막을 가리키므로 처소는 광야의 성막을 가리킵니다(대하 24:6; 29:6; 시 42:4, 토빗 13:10: 지혜서 9:8; 히8:2,5; 9:11; 계 15:5; 21:3), 회복될 것이라고 약속된 다윗의 집을 의미합니다(암 9:11; 사 16:5). 또한 초막절에 이스라엘 백성이 지은 초막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장면은 출애굽 사건과 연결됩니다(참조. 호 12:9; 슥 14:16-20).

 

베드로의 제안에는 반응이 없고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 소리가 하늘에서 들립니다. 변모된 예수님께서는 천상의 존재이며, 하늘에서 들린 음성에 따르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음성은 제자들에게 그의 말을 들으라고 명령합니다. 제자들이 들어야 할 예수님의 음성은 수난과 부활에 대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하늘의 음성을 듣고 엎드려 두려워합니다. 제자들에게 들린 하늘의 음성은 신적 메시지이므로 그들은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하고 두려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손을 대십니다. 제자들이 봤던 영광스런 모습의 예수님께서는 지금 그들과 함께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위를 쳐다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보이지 않았고 구름도 사라졌습니다.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과 구름 속에서 들린 음성이 제자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가르친 핵심이었기에, 두 이미지는 각자의 기능을 끝내고 사라졌습니다. 여기서 마태는 예수님 홀로 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늘의 영광스런 모습을 얻기 위해 현재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 예수님의 운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변형된 모습이 아니라 고난의 길을 가는 인간으로서 제자들과 함께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산에서 본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도록 명령하십니다. 만일 제자들이 영광스런 광경에 도취 돼서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게 되면, 군중은 왜곡된 메시아 기대 사상으로, 산 아래 남아있는 제자들도 예수님을 오해해서 예수님의 길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변모 사건은 예수님의 정체와 운명을 계시함으로써, 제자들(또는 교회)이 아들의 말에 순종해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 영광스럽게 변모한 예수님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예견합니다. 예를 들어, 영광스럽게 변형되신 예수님께서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군중 앞에서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영광스러운 예수님처럼 자신들의 운명도 그렇게 될 것을 믿어야 하며, 동시에 아들에게 주어진 고난의 길이 자신들의 삶이라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들의 길이 교회의 길입니다. 고난의 삶은 누구나 회피하고 싶은 길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은 순종한 아들의 말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본 영광스러운 광경은 예수님께서 고난과 죽음 이후에 받게 될 영광을 미리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변화산에서 내려오시면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말해도 못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은 본인이 체험해봐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은 그 은총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본 사람은 순종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을 엘리야로 소개함(10-13)

모세와 엘리야는 떠나고 예수님을 감싸던 영광도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나의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니 아들의 말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죽음의 길을 가는 예수님을 가로막지 말라는 뜻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십니다.

 

10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12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13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10-13)

 

예수님의 명령을 들은 제자들은 의도적으로 주제를 엘리야로 바꿉니다. 서기관들은 율법 해석의 전문가들이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가르친 사실을 언급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며 그의 사역은 모든 일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회복시키는 엘리야의 역할은 말라기 4:5-6에서 제시됐습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말라기 4:6(70인역)에서는 엘리야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회복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반면, 예수님께서는 회복의 대상을 가족에서 ‘모든 것’으로 확장하십니다. 실제로는 헤롯에 의해 체포당해 죽음을 맞이한 요한이 ‘모든 것’을 회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모든 것을 회복할 예수님의 하늘나라의 회복을 시작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요한이 메시지를 선포한 시점부터 모든 것의 회복은 시작됐습니다. 모든 것의 회복은 재림 때의 회복이 아니라 회개와 갱신, 곧 회복을 위한 준비 사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12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는 표현으로 자신의 말을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대조하십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습니다. 11:14에서 예수님께서는 감옥에 있는 요한을 가리켜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서기관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가르쳤으나 이미 엘리야가 온 사실은 모릅니다.

본문은 엘리야가 온 것을 알지 못하는 ‘그들’이 누군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습니다. 요한을 체포해서 죽인 자들, 이론을 알고 있으나 요한과 엘리야를 연결하지 못한 서기관들, 나아가 돌아온 엘리야인 요한이 오실 분으로 소개한 예수님의 정체를 알지 못하고 배척한 자들을 포함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과 자신의 연대성을 근거로 인자의 운명이 요한의 운명처럼 될 것을 암시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엘리야인 요한이 겪은 운명을 따를 것이므로 고난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후 인자의 수난을 예고하셨고(16:21) 변모 사건에서도 인자의 죽음(17:6)을 언급하셨으며, 이번에도 인자가 고난받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엘리야가 온 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메시아의 운명이 고난받는 인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 제자들은 세례 요한이 바로 엘리야의 모습 그대로 행동한 인물인 것을 깨닫습니다(13). 제자들과 그들의 차이는 세례 요한의 정체를 파악하는 여부에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정체를 파악하는 자는 예수님의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본 단락의 핵심은 고난 받아야 하는 메시아의 운명을 엘리야인 세례 요한의 운명을 근거로 주장하는 데 있습니다. 요한은 성경에서 예고한 대로 엘리야가 행했던 모습과 사역을 실행하다가 자기 백성으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요한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들은 요한이 증언한 예수님의 정체를 알 수 없으므로, 요한을 대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음으로 내몰 것입니다. 특히, 민족의 회복을 고대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시각 때문에 성경의 예고를 오해해서 예수님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운명처럼 백성의 무지로 배척당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에 근거한 신학적 판단을 내리는 자들에게 의해 배척당하고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성경의 내용을 알고 있다고 해서 예수님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에 맞게 구해야 합니다. 변화산의 놀라운 체험에 베드로는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초막 셋을 짓겠다고 제안합니다. 베드로의 제안은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기념하려는 좋은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예수님의 신분과 사명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성급한 제안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영광에 이르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가 구하고 원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예수님께서도 무조건 원하실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진 않습니까? 예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예수님의 뜻을 구하는 주의 백성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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