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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06-04)


마지막 인사말

에베소서 6장 18-24절


많은 분들이 이름도 빛도 없이 선교사로 수고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들 중에는 열악한 환경에서 사역하면서 많은 것이 필요한 경우를 봅니다. 선교사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선교 현장에서 필요한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깊게 교제하면 할수록, 그들이 진짜 필요한 것은 물질보다 더 중보기도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영적 전쟁인 선교 사역을 위해 누군가 배후에서 중보기도하면, 그 능력으로 항상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를 마감하면서 성도들에게 마지막 권면을 합니다. 항상 기도하기를 힘쓰라고 특히 기도의 제목으로 자기를 위해서는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전할 수 있도록 부탁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모든 사정을 알리고 에베소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해 두기고를 보냅니다.

 

영적전투를 위한 기도(18-20)

 

영적 군사들의 가장 강한 무기는 기도입니다. 항상 악한 영의 공격에 경계 태세를 갖추고 살아가야 합니다. 영적 무기를 모두 갖추었다고 강력한 능력을 발휘된 건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늘 깨어 기도하지 않는다면, 영적 전투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없습니다. 영적인 능력은 기도로부터 시작됩니다.

18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19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20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18-20)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군사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서신을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기도로 무장된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속적으로 깨어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능력 있는 기도로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고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영적 전투에서 무엇보다도 기도가 가장 중요합니다. 영적 군사는 전신갑주로 무장하는 것과 더불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 없이는 강력한 무장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것은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권능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한 만큼 기도의 깊이가 깊어지고, 하나님을 인정한 만큼 하나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마지막으로 에베소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모든 일에 기도할 것을 요청한 것입니다. 이 요청은 둘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권면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권면입니다.

(1) 성도들을 위한 기도(18)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기도할 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 설명합니다. 기도의 대상은 성도들을 위해 모든 일과 사건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는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권고합니다.

군사는 자신만을 위해 싸운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속한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군사도 자신만을 위해 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강력한 능력을 힘입고, 또 하나 됨을 위해 무엇보다도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다른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때, 두 가지 방법으로 하라고 합니다. 첫째는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자신의 능력껏 최선을 다해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다른 종교인들이 기도할 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마다 성령께서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삶의 모든 결정과 판단을 할 때마다 성령께서 주시는 감동을 따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인내하면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때 인내로서 깨어있으라고 권합니다. 자신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여러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깨어 있는 것입니다. 기도의 대상은 “여러 성도”라고 표현했지만 ‘모든 성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좁게는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이지만, 넓은 의미로 전 세계의 모든 교회를 위해 기도하길 원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전선에는 너와 나가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전 세계의 모든 성도들을 위해 항상 깨어 구하길 힘쓰라고 권면합니다.

기도한 만큼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사역을 하십니다. 기도의 깊이만큼 하나님의 능력이 경험되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항상 힘쓰며”은 ‘인내하며’이라는 뜻입니다. 마음속에 성령께서 성도들을 위해 기도가 요구될 때마다 성령 안에서 주의 깊게 기도하길 힘써야 합니다.

오늘날 새로운 선교지를 위해 기도해야겠지만, 더욱 기도해야할 제목은 무너져 가는 기존 교회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 즉 과거에는 복음이 왕성했던 영국과 미국 그리고 한국 교회들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기존 교회들이 깨어 있는 성도들이 되길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다시 큰 부흥이 있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2) 바울을 위한 기도(19-20)

사도 바울은 기도에 대한 마지막 부탁은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는 다른 서신을 기록할 때도 곳곳에서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길 부탁을 한 적이 있습니다(참고 로마서 15; 고린도전서 11:11; 골로새서 4:2-4; 데살로니가후서 3:1-2). 그 중에 골로새서를 살펴보겠습니다.

2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3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4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골로새서 4:2-4)

사도 바울의 기도 부탁은 자신이 더 좋은 환경이길 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삶에 궁극적인 목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히 전파할 수 있고 전달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사도 바울 조차도 성도들의 중보기도가 없이는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부탁한 기도의 목적은 ‘복음의 비밀’ 즉 ‘하나님의 뜻의 비밀’을 담대하게 전할 수 있도록 부탁합니다. 이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통일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 특히 이방인과 유대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역사로, 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전하길 원합니다. 이러한 비밀을 전하는데 기도하길 원했던 이유는 사단의 반대하는 역사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사단은 만물을 통일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인 복음의 진행을 막으려고 유대인들을 통해 강력하게 저항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금된 죄인의 상태였지만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밝힙니다. 자신을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라고 표현합니다. 사람들에게 매이긴 했지만,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구금되었다는 것입니다(20). 그는 만물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신이라는 사실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확신합니다.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 ‘사신’이라고 주장합니다. 자신을 하나님 나라의 사신으로 표현한 것은, 지금까지 감추어진 ‘비밀의 복음’을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풀려졌습니다. 이 사실을 온 세상에 전해야 하기 때문에 어떤 환경에서라도 담대하게 자신의 사역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에게 필요했던 것은 바로 영적인 용기였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담대하게 복음의 비밀을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특히 이제 로마의 재판정에서 높은 직위 사람들과 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때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전할 수 있도록 중보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모든 성도들의 삶은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을 맺어야 합니다. 기도 없이는 어떤 능력도 공급 받을 수 없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입을 열 때마다 복음이 강력하게 나갑니다. 그러므로 매 순간마다 지속적으로 복음의 사역자들을 위해 중보기도가 필요합니다. 특히 영적 최전선에서 수고하는 사역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영적 현장으로 보낼 군사(21-22)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담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한 그 믿음의 사람을 통해 주변 사람들이 믿음에 격려를 받고, 하나님의 교회는 더욱 든든히 세워져 갑니다.

21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리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리리라 22우리 사정을 알리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그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21-22)

사도 바울은 중보기도를 부탁한 후에, 에베소 교회를 위해 두기고Tychicus를 보낸 이유를 설명합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 투옥되었기 때문에 자유롭게 소아시아 지역에 갈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교회만은 보살펴야 했습니다. 갇혀 있는 자신보다 성도들을 먼저 생각합니다.

이제 투옥된 바울을 대신할 합당한 대리자가 필요했습니다. 당시는 대리자는 파송한 사람의 권한을 위임받아 행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대리자(代理者)로 두기고가 합당했습니다. 바울은 대리자의 역할을 소개한데, 첫째는 바울이 처한 형편을 설명하고, 다음으로 서신에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자세하게 설명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바울의 빈자리에 대한 두려움을 두기고를 통해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당시 성도들은 바울이 투옥되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단순히 두려울 정도가 아니라 믿음이 흔들릴 정도였습니다. 어쩌면 초대 교회에 새로운 결정적인 위기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기고를 통해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모든 일이 하나님의 역사이심을 알리도록 보낸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되면 성도들은 위로 받고 든든하게 서게 될 것입니다. 

두기고가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두기고를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군”(21)이라고 소개합니다. 3차 선교여행 후, 가뭄 피해를 입은 예루살렘 지역, 특히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해 소아시아 교회에서 구제헌금을 했습니다. 그 구제헌금을 전달하는 교회에서 파송하는 일곱 대표 중 한 사람으로 두기고가 동참합니다(사도행전 20:4).바울이 아시아로 보내는 서신 곧 에베소, 골로새, 디모데전서를 가지고 갔습니다(에베소서 6:21, 골로새서 4:7, 디모데후서 4:12). 바울은 그를 그레데로 보내고 디도를 동반하여 니고볼리로 오게 하였습니다(디도서 3:12). 특별하게 복음을 위해 헌신한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를 완전히 신뢰하는 의미로 “함께 된 종”(골로새서 4:7)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두기고를 신뢰하기 때문에 그가 바울의 대리자로 소아시아 교회에 가는 것은 바울이 가는 것이나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두기고는 바울을 대신해서 사명을 감당하기에 적절한 인물이었습니다. 분명히 바울이 쓴 ‘에베소서’를 가지고 소아시아 지역으로 파송되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사명 중에는 믿음으로 힘들어하고 있는 에베소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해 파송된 일군입니다. 두기고의 사역을 보면, 디모데처럼 유력한 사역자는 아니지만, 바울이 도움이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두기고처럼 배후에서 돕는 일군들이 많아질 때, 교회는 든든히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마지막 인사(23-24)

어려움을 겪을 때에 이겨 낼 수 있는 힘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을 때 작은 장애물에도 넘어집니다. 사랑이 있을 때는 아무리 큰 어려움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사랑으로 믿음과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이 사랑의 은혜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3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24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23-24)

에베소서의 마지막 부분으로 일반적인 인사가 아니라 축도로 마무리 합니다. 그는 서두에서 나누었던 은혜와 평강(평화)이라는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합니다. 이것은 에베소서 전체 내용임을 다시 확인시켜 줍니다. 이것들은 모두 머리말 기원과 유사하게 그 근원이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기원합니다. 처음 인사말에는 은혜와 평강으로 기원했지만(1:2), 마지막에는 은혜와 평강 그리고 사랑이 더 추가 되었습니다. 더구나 다른 서신과 차이가 있습니다. 이 서신에는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믿음을 겸한 사랑’을 추구합니다.

그 중에 은혜가 충만하길 원합니다. 그 대상은 ‘변함없는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라고 소개합니다. 하나님께 나가는 것은 은혜만이 필요합니다. 에베소서는 은혜로 시작하여 은혜로 끝을 맺습니다. 사랑의 자리로 나가는 것은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나가는 것입니다. 이는 에베소 성도들이 변함없이 사랑을 베풀길 원합니다. 값없이 은혜로 받았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나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받은 사람들로서 하나님과 이웃을 섬김에도 변함없기를 요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서있는 자리로 복음 전도자로 파송하셨습니다. 복음을 위해 끝까지 변하지 않고 사명을 다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방황합니다. 성도들과 교제 속에서 상처를 받고 있습니다. 말씀으로 위로를 나누어야 할 사람은 없습니다. 이 시대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두기고처럼 복음을 들고 달려간 사명자가 필요합니다. 그 사람은 바로 당신입니다.


바울은 모든 성도들이 악한 영들의 실체를 알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여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길 권합니다. 하지만,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주신 어떤 영적 능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기도만이 영적 능력 있는 군사의 지름길입니다. 날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승리함으로 주의 사명을 이루어 들이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당신의 승리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하며 하나님의 교회가 부흥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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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06-03)


영적 전투를 위한 무장

에베소서 6장 10-17절


호남 지역 기독교는 비교적 건전한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 이유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선교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선교사로 광주에서 활동한 타마자(Talmage) 선교사와 같이, 철저한 신앙으로 무장된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타마자 선교사는 매일 아침이면, 직원들과 성경학교 학생들을 모아서 예배로 시작하였습니다. 주일성수에 대해서도 지나칠 정도로 엄격히 고수했습니다. 당시 한국인들과 같이 근검절약하면서 오직 선교에만 힘을 썼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날 호남지역에 강력한 신앙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에베소서를 마무리 하면서 결론적인 의미에서 중요한 부분이며, 또한 바울의 세 번째 권면이기도 합니다. 에베소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악한 영들과 영적 전투에 나서라고 권합니다. 영적 전투를 하기 위해 전신갑주를 상세히 설명한 후 항상 깨어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마지막 당부는 자신을 이해서도 기도해 달라고 당부하며 마치고 있습니다.

 

영적전쟁을 위한 실체(10-11)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세상에 ‘빛의 자녀’이며 ‘영적 군사’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군사로서 계속해서 어두운 권세들과 싸워나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 평화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오직 얼마나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10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10-11)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를 서서히 마감하면서 마지막 세 번째 권면을 합니다. 첫 번째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성장하라’고 권했고, 두 번째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바로 ‘전신 갑주를 입으라’고 권합니다. 이 말은 전쟁터에서 장군이 군사들에게 출정 명령을 내리듯이 말합니다. 악한 영들과의 전쟁인 것과, 그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 줍니다.

에베소는 지역적으로 이방 우상들과 귀신 숭배가 많은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빗대어 ‘하늘의 권세 잡은 자’이란 표현으로 사용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성도들이라면 악한 영들과 영적인 싸움을 해야 합니다.

먼저, 바울은 이미 기도했던 것처럼(3:16-17), 영적 전투를 하기 전에 ‘강건해지라’고 권면합니다. 외적으로 아무리 잘 무장 되어도 내적으로 약하면, 그 무장이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적으로 강건해져야만 합니다. 강건해질 도구는 무엇보다도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지라고 합니다. 이것은 ‘주를 왕으로 삼고’, ‘주를 원천으로’, ‘주와 연합하여’란 뜻입니다. 항상 주님과 연합하여 강건해지면, 사단의 궤계에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강건해진다고 했지만, 이곳에서는 성도 안에 왕으로 내주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강건해집니다. 바울은 명령법으로 ‘너희는 계속해서 강하게 되어라’고 합니다. 성도들이 영적으로 무엇인가 하려면, 사단은 방심하고 연약한 틈을 타서 공격해 들어옵니다. 혼자 힘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로 하여금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승리할 수 있는 구체적인 수단으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권면합니다. ‘전신갑주를 입으라’는 표현은, 장군이 군사들에게 전투태세를 갖추도록 명령할 때 사용한 군사용어입니다. ‘전신갑주’는 중무장한 보병이 갖춘 전투 장비를 의미합니다. 몸의 핵심 급소를 보호해 놓은 장비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들에게 이미 전신갑주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악한 세력에 맞서서 싸워 나갈 영적인 모든 자질들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17 공의를 갑옷으로 삼으시며 구원을 자기의 머리에 써서 투구로 삼으시며 보복을 속옷으로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으로 삼으시고 (이사야 59:17)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에베소서를 기록하면, 자신의 감옥을 지키고 있는 군사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군사들의 옷과 장비를 보면서 하나님의 군사들에 대해 하나하나 묘사하고 있습니다. 전신갑주를 입은 까닭은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입니다. 직역하면, ‘마귀의 궤계에 능히 대항하여 설 수 있도록’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적과 전투하기 위하여 물러지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고수한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전신갑주를 입은 성도들이 서 있는 것은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얻은 승리를 지키고 유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단은 무서운 적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갑옷과 무기를 가지고 싸우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이미 승리한 사람들입니다. 이미 천국에 앉아서 승리를 누리지만, 이 세상에서는 여전히 악의 세력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전신갑주를 주셨습니다. 이것을 입으려는 순종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하심으로 최종적인 심판을 받을 때까지는 그들과 계속해서 영적으로 싸워야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쟁을 살펴보면 오늘날 성도들이 어떻게 승리할 수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해 나가는데, 그들은 군사적인 능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서신 첫 부분에서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성도들이 알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1:19-23). 악한 영의 존재에 대해 얼마나 실감하고 있습니까? 싸워야 할 존재부터 정확하게 파악하고 나갑시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십자가에서 사탄의 머리를 밟고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 어떠한 사탄의 공격도 무용지물입니다. 항상 예수님 안에 거하기 위해 당신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악한 영들과의 전투(12-13)

전쟁에서 ‘지피지기 백전백승’란 말이 있습니다. 세상의 전투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영적 전투에서는 전쟁의 상대가 누구인지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문제를 만날 때, 전쟁의 대상을 혼돈하지 말아야 합니다.

12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13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12-13)

이제 바울은 성도들에게 싸워나가야 할 대상을 가르쳐 줍니다. 장황하게 이야기 하지만, 앞에 거론되었던 ‘하늘의 공중 권세 잡은 자’(2:), ‘불순종의 아들의 영’,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3:10)입니다. 이것은 세상에 있는 권세가 아니라 하늘에 있는 영적인 세력을 의미합니다.

이 전쟁은 무서워할 것이 없습니다. 이미 승리한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들은 같이 승리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승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로새서2:15)

하지만 최종적인 승리가 이를 때까지 여전히 사단은 성도들을 공격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적인 전투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 전쟁은 결코 육신의 전쟁이 아니라 영적인 전쟁입니다. 더러운 영들의 활동으로 성도들은 피할 수 없는 전쟁에 한 가운데 있습니다. 그들의 공격은 매우 날카롭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영적 군사들로서 빈틈이 없도록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권합니다.

‘취하라(take)’는 반대로 생각해보면, ‘취하는 사람’과 ‘취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한 일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영적 전쟁에 맞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취해야 할 것입니다. 위로부터 주시는 자질들을 갖추어야 합니다. 성도들의 자질들을 갖추어야할 의무와 책임입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우면 마귀의 운명이 다합니다. 점점 더욱더 거세게 하나님을 대적하며 성도들을 미혹합니다.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면서 삼킬 자를 찾습니다(베드로전서 5:8). 마지막 때에는 보이지 않는 믿음의 싸움이 치열합니다.

성도들이 해야 할 전투의 대상은 보이지 않습니다. 적이 눈앞에 보인다면, 육신으로 싸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사단은 자신의 정체를 노출시키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어두운 세력들이 단순하게 공상적인 것이 아니라, 엄연히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세력입니다. 그들은 제한적인이지만 나름대로 강력한 능력을 가지고, 현재 악한 시대를 지배합니다. 그 세력은 인간의 정치적인 조직과 권력을 통해 역사하는 정사(政事)와 권세(權勢) 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 어두움에 세상 주관자들과 싸움입니다.

사단은 다양한 방법으로 성도들을 미혹합니다. 어떻게든 어두움 속으로 끌고 들어가 절망에 빠지게 하려고 혈안이 되고 다닙니다. 사단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럴듯한 천사와 같이 달콤한 것으로 유혹하지만, 때로는 날카로운 이빨로 공격합니다. 방심하면 작은 틈이라도 비집고 들어와서 치명상을 입힙니다. 사단의 의도는 명백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분리하고 나누려는 계략인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와 성도들을 이간시키고 분리시키려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관계의 위기를 경험할 때, 사람들 간에 육신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영적 배경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특히 성도들이 하나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가는데 방해합니다. 공동체의 화해나 하나 됨을 방해합니다. 분열을 일으키고 다툼을 조장합니다.

이 전쟁은 육체적인 방법으로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겠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무장하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백전백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강력하게 무장시켜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전신갑주를 입고 철저하게 무장해야 합니다.

 

영적전투를 위한 무장(14-17)

군사들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전쟁에서 필요한 장비들을 완벽하게 무장하고, 능숙하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만약 하나라도 소홀하면 그만큼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전쟁에서도 당연하게 적용됩니다. 준비되지 않는 성도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무장해야할 전신갑주가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14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5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17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14-17)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통해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승리해야 할 수 있는 비결을 설명합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권합니다. 전신갑주를 입고 있으면 적에게 노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전신갑주 외에는 어떤 것도 완벽하게 방어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전신갑주에 대해 구체적으로 소개합니다.

(1) 진리의 허리띠(14)

가장 먼저 “서서 진리로 허리띠를 띠고”라고 소개합니다. 허리띠는 갑옷 전체를 흘러내리지 않도록 붙잡습니다. 승리하는 성도들의 삶을 흐트러지지 않도록 붙잡고 있는 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곳에서 ‘서서’란 군사들이 전투에 출정하기 위해 대열을 준비한 것을 말합니다. 의미는 ‘영적 전쟁에 준비된 상태’로, 진실한 행동과 준비된 마음으로 사단이 공격할 틈을 주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4:25; 5:9). 영적 전쟁에서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자신의 생각과 판단 그리고 경험이 아닙니다. 어느 상황이든지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해서 진리대로 살겠다고 결심해야 합니다.

(2) 의의 호심경(14)

‘호심경(護心鏡)’은 오늘날 방탄복과 같은 도구입니다. 군사의 가장 소중한 심장을 보호해 주는 중요한 장비입니다. ‘의의 호심경’은 성도들이 유월절 어린양의 보혈로 모든 추악한 죄로부터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셨습니다(4:24). 영적 전쟁에서 성도들의 영적 상태와 삶을 유지시켜 주는 의롭고 온전한 행동을 의미합니다. 만약 자신의 의를 붙들고 있다면, 언제든지 심장이 공격을 당합니다.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자신의 의로 고백한다면, 심장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안전하게 보호됩니다. 자신의 의에 기초한 삶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마태복음 7:26).

(3) 평안의 복음의 신(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을 신고”라고 권합니다. ‘복음(福音)’은 ‘평안의 소식’입니다.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심판 가운데 건짐을 받고, 천국에 들어간다는 소식입니다. 그리고 ‘평안’은 성도들 간에 연합과 화합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신’은 군인이 든든한 군화가 작전을 수행과 이동을 쉽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영적 전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성도들을 든든하게 세웁니다. 그 가운데 연합과 화합 가운데 함께 행함으로, 하나님의 평안이 전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4) 믿음의 방패(16)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악한 자들의 불화살을 소멸하라고 권면합니다. ‘방패’는 군인들이 자신을 보호하는 아주 중요한 장비입니다. 방패는 옆 군사들과 조립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믿음은 사단의 공격으로 성도들을 보호하는 강력한 장치입니다. 사단은 성도들을 불화살과 같은 참소(讒訴)합니다. 끝임 없이 성도들을 비난하고 참소하고 그리고 정죄합니다. 이러한 언어적인 공격으로 하나님의 공동체와 인간관계를 파괴하려 합니다. 이런 가운데 온전히 믿음을 붙들지 않으면, 이러한 공격에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습니다. 이 불화살의 공격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믿음 밖에 없습니다.

(5) 구원의 투구(17)

“구원의 투구”입니다. 분명히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에베소서 2:8).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께서 위에서 내려주신 구원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것이 능력입니다. 이것만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사단은 성도들에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기 위해,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의심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도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는 가운데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구원의 확신이 흔들린다면, 군사들이 투구를 빼앗긴 것과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6) 성령의 검(17)

‘검’은 말씀에서 제시한 유일한 공격 무기입니다. ‘성령의 검’은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하게 설명합니다. 영적 전쟁을 해야 할 성도들은 필히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훌륭한 검투사가 칼을 잘 다루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때그때 적절하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40일을 금식한 후에 사단으로부터 시험을 받으셨습니다(마태복음 4장). 그 때마다 그 시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야 말로 살았고 운동력 있는 좌우에 날선 검보다 예리한 능력입니다(히브리서 4:12).

결론적으로 바울을 통해 말씀하신 진리, 의, 평안, 믿음, 구원, 말씀으로 구성된 전신 갑주를 입을 때, 성도들이 성장해 가는 과정 속에서 사단의 시험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는 강한 군사로 서게 됩니다.

바울의 목적은 사실 묘사보다 보이지 않는 영적 싸움을 눈으로 보듯이 인식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싸움의 대상은 칼로 찌를 수 있는 혈과 육이 아니기 때문에, 칼 자체가 하나님의 전신 갑주 가운데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도리어 칼과 같은 기능을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광야에서 마귀가 시험할 때 예수님도 말씀으로 모든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방패 역시 대단히 중요합니다. 사탄은 계속해서 염려, 낙심, 분노 등의 불화살을 날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마음을 태우기 전에 얼른 믿음의 방패를 펼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적 전투를 위해 무기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셔서 의롭게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에 모든 사단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습니다. 유일한 공격용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 성령이 칼입니다. 말씀을 가고 삶 속에서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순종할 때, 사탄을 무찌르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영적 전투에 임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즉 진리의 허리띠, 정의의 흉배, 평화의 복음의 신발,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이러한 것들로 무장하며 항상 깨어 있지 않으면 지금도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는 사탄에게 먹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에 굳게 서서 마귀를 대적하면(벧전 5:9) 사탄은 달라날 것입니다(약 4:7).

완전 무장을 했다고 할지라도 한 부분이 허술하면 사탄은 교묘하게 그 부분으로 공격합니다. 허술하거나 빈틈을 다시 재정비하시길 바랍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권합니다.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디모데후서 2:4)

성도들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군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임 받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이미 영적 전투에 참가한 군사들입니다. 영적 군사로서 완전무장 되어 있고, 그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강력한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항상 성령의 검인 말씀을 소유한 군사로 서야 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주신 영적인 무기들로 완전히 무장하고 있습니까? 당신의 삶에 약점을 무엇으로 보충해야 합니까?


오늘날은 마지막 때입니다. 이 마지막 때에는 영적 전쟁이 치열할 것입니다. 성도들은 영적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완전 무장을 통해서 악한 공격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승리를 위해서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군사로서 전신갑주로 무장해야 합니다. 날마다 전신갑주를 제대로 갖추었는지 점검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을 때 승리는 이미 우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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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06-02)


성령 충만한 인간관계(III)

에베소서 6장 5-9절


전북 김제에는 역사가 오래된 금산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는 1908년에 건축한 한국 초대교회의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어 유명한 교회입니다. 하지만 또 한 가지 유명한 내용이 있습니다. 자신의 집 머슴을 장로로 섬긴 주인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첫 장로 투표 때, 조덕삼과 그 집의 종이던 이자익이 같이 장로 후보가 되었습니다. 머슴이던 이자익이 1대 장로로 선출되자, 주인 조덕삼은 종을 장로로 성심성의껏 섬겼습니다. 종인 이자익 장로가 강단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할 땐, 조덕삼 영수도 함께 정성껏 예배를 드렸습니다. 집에서는 종전대로 다시 주인과 머슴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공과 사가 분명했습니다. 반년 뒤 조덕삼 영수도 2대 장로로 장립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성령 충만 삶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본보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가족을 넘어서 이웃에 대한 관계를 가르쳐 줍니다. 고대 가정은 부부관계와 자녀 관계 그리고 종과 상전 관계까지 포함됩니다. 종은 고대 사회에서 가정에 한 구조였습니다. 그래서 가정에서 관계 회복에 대해 설명하면서 종과 상전과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주인과 종과의 관계 즉 오늘날로 표현하면, 고용주와 피고용인까지도 포함합니다.

 

종들로서 자세(5-8)

종종 ‘교회’를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모이는 교회’는 특정한 시간에 예배와 모임을 가진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반면에 ‘흩어지는 교회’는 세상에 보냄을 받아 성육신적인 삶을 사는 흩어진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대표적인 흩어진 교회는 성도들이 생활하는 가정과 직장입니다. 이곳에도 성령으로 하나 되게 하신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5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6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7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8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5-8)

사도 바울 시대인 로마 시대에는 6,000만명이나 되는 노예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 성도들 중에는 노예 신분의 성도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가정의 범위를 확장 시켜서 그리스도의 머리됨의 원리를 상전과 종의 관계에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에베소서에서 ‘종(從)’은 ‘노예(奴隸)’를 말합니다. 종(從)에 대한 취급은 시대마다 다르지만, 전반적으로 고대에는 노예에게 상해를 입힌 죄가 상대방 물건을 손상시킨 죄와 동급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종을 인간으로서 대했다기보다는 좀 비싼 물건으로 대했다고 보는 것이 적당할 것입니다.

(1)상전을 두려움으로 섬김

먼저, 사도 바울은 종들에게 상전을 대할 때 ‘두려워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종이 주인을 너무 어려워하거나 무서워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경외하면서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종들이 상전(주인)을 사랑하면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고려하고 배려합니다. 자기 위에 있는 상전들에게 대해 불쾌하지 않도록 자극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괜히 자극해서 화와 분노를 자극할 필요가 없습니다. 고려해서 배려하면 그만큼 사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대 시대에 종과 주인이 같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가령 종이 먼저 믿고 주인이 나중에 믿을 수 있습니다. 먼저 믿은 종이 주인보다 믿음에 대해 잘 알 수 있고 종이 먼저 직분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교회 안에서 세상적인 질서가 무너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종이 주인을 무시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종이 어떤 환경에서 주인보다 낫다고 할지라도 주인을 바르게 섬겨야 합니다. 주인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모든 인간관계의 원칙은 ‘주께 하듯’ 하는 것입니다. 종들은 자세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종의 자세는 한마디로 요약하면 순종(順從)입니다.

바울이 살던 시대에도 갑을 관계는 뜨거운 논쟁거리였습니다. 그는 종들을 향해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그리스도께 하듯’ 주인에게 순종하라 했습니다. 단지 눈가림으로 주인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해 섬기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상전의 종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종이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마음으로 상전을 섬길 때 이 모든 수고는 하나님 앞에서 행한 것이 됩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상사에 대한 태도를 권고합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2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3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로마서 13:1-3)

(2)상전을 순종함으로 섬김

두 번째, ‘성실한 마음으로 순종하라.’는 말씀하십니다. 위에 있는 권위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주인을 섬김이 하나님을 섬기듯이 성실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성실하다’는 것은 자신에게 맡겨진 자리를 묵묵히 지켜야 합니다. 자신이 맡은 자리가 가장 적절한 자리라고 생각하고 만족하시고 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충성을 다하시길 바랍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엘리에셀이라는 종이 있었습니다(창세기 24:1f). 나이가 많아서 힘이 없는 아브라함을 위해 충성을 다합니다. 아브라함의 심부름으로 이삭의 아내 리브가를 선택하는 장면 속에서 충성스러운 종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그는 주인 뜻대로 행하며(1), 기도하는 종이며(10-12) 그리고 사명에 충성스러운 종이었습니다(33). 순종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그리스도께 하듯이 하라고 권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직장에서도 자신의 자리에 대해 항상 불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하시면 당신을 다른 자리로 옮겨 주실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그 자리를 지키시길 바랍니다. 다른 자리가 아무리 좋은 자리라 할지라도 충성스럽게 맡은 일을 최선을 다해서 수고하시길 바랍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베드로전서 5:6)고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되면 높여주실 것입니다.

(3)상전에서 눈가림하지 말 것

세 번째, ‘눈가림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눈가림’은 ‘주인에게 마음에 들려고 일한 것처럼 눈속임하는 행동’이며 다른 표현으로 ‘주인을 속이는 행동’입니다. ‘주인을 기쁘게 하기 위해 없는 것을 있는 척 허영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일하는 것은 생존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하는 수준으로 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눈가림으로 일하는 것은 노예 수준에서 일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섬긴다는 마음으로 진실하게 일해야 합니다.

이렇게 주인에게 순종해야 할 것은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8)고 하셨습니다. 자신이 행한 대로 상급을 받기 때문입니다. 진실은 순수하게 지속하지만 거짓과 가짜는 금방 들통 나기 때문입니다. 눈가림으로 하는 행위는 금방 들통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거짓 인격은 금방 들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주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또한 일을 할 때에 형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해 성실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선을 행한 종들에게 보답해주십니다.

요셉처럼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 앞에서 하는 마음으로 성실하게 일을 해나갔습니다. 이러한 요셉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입니다. 창세기에서는 요셉의 삶에 대해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창 39:23b)고 소개합니다.

 

주인들로서 자세(9)

오늘날도 직장에서 상사나 CEO라면 자신의 유리한 점으로 다른 사람들은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법을 앞세워 힘없는 이들에게 희생을 강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상전들도 자신들의 종들에게 어떻게 대하라고 말씀하십니까?

9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9)

한편, 상전 역시 종들을 대할 때 주님을 대하듯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보고 계심을 기억하며, 종들을 말로 위협하거나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의 지위와 상관없이, 우리의 신실한 삶과 행위에 따라 상급 주시는 분임을 기억하십시오.

(1) 종들과 같은 자세

사도 바울은 주인들에게 ‘그와 같이 하라’고 말합니다. 이 뜻은 앞에서 노예들에게 말한 ‘주께 하듯 하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을 섬기듯이 노예를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상전들에게도 종들에게 주셨던 당부를 동일하게 주셨습니다. 종들이 주인에게 ‘두려워’하고 ‘성실’하고 ‘눈가림하지 말라’는 것처럼, 주인들도 종들에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종이 아랫사람이라고 막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전들은 하나 더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2) 종들에게 위협하지 말 것

노예들이 하나님을 섬기듯이 상전을 대한 것처럼, 상전들도 또한 노예들에게 ‘위협을 그치라’고 합니다. 조금 직위가 있다고 아랫사람들을 협박하는 것을 그치라는 것입니다. 노예들을 위협하는 것은 당시에 아래 사람들을 통제하는 보편적인 수단이었습니다.

‘공갈(恐喝)을 그치라’는 것입니다. 종이라고 그들에게 위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인의 아래 있는 사람들을 위협이나 협박하거나, 자신 마음대로 조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인이라고 종들을 무례하게 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종이나 주인이나 모든 이들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종이긴 하지만, 그리스도께 하듯 인격적으로 대하고 자신의 위치나 권력을 남용해서는 안 됩니다.

종들에게 허세를 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힘(능력)을 적절하게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힘이 없는 사람은 자신을 거짓으로 꾸미고 허세를 부립니다. 주인은 능력(실력)과 인격(영성)을 갖추고 있으면 종(아래 사람)들은 당신을 순수하게 순종하고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왜 위협을 그치라고 하겠습니까? 주님은 주인과 노예의 주인이십니다. 주인이신 주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능력에 따라서 차별하지 않고 똑같이 대하십니다.


직장은 단순히 돈을 벌거나 당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다니는 곳이 아닙니다. 직장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의 현장입니다. 당신의 직장에서 하나님의 향기를 발하고 있습니까? 요셉과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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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06-01)


성령 충만한 인간관계(II)

에베소서 6장 1-4절


살아있는 과실나무는 시간이 지나면서 열매를 맺습니다. 관리를 잘하면 좋은 열매들을 맺지만, 관리를 잘못하면 형편없는 열매를 맺기도 합니다. 삶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선하든지 악하든지 열매를 맺습니다. 악한 열매는 죄로 들어납니다. 이 죄의 열매는 모든 관계를 깨뜨립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람과 물질들이 깨어졌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사람들은 삶 속에서 좋은 열매를 맺어 가는데, 깨어진 관계들이 회복되어 집니다.

 

계속해서 성령 충만함은 성도의 삶 속에서 나타납니다. 그들은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갑니다.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은 가정에서 시작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가정에 기초인 부부관계가 정상적이라고 설명했고, 다음으로 자녀들과의 관계인 부자관계에서도 성령 충만함이 잘 나타납니다.

 

자녀로서의 자세(1-3)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에서는 자녀들을 부부의 소유물로 생각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녀를 가정에 주신 가장 귀한 선물로 맡겨주셨습니다. 잠시 맡겨주신 선물인 자녀를 사랑해야 합니다. 하지만 죄가 들어와서 관계를 깨뜨리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정에도 파고들어서 가정을 파괴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려 오셨습니다.

1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3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1-3)

계속해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주변과의 관계가 어떻게 회복되어 가는지 설명합니다. 중요한 관계는 가정이며 그 중에 가장 귀한 관계는 부부관계입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부모와 자녀 관계입니다. 이 관계에도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관계가 회복되어 가야 합니다. 성도로서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부모님들은 자녀들을 사랑하길 원합니다. 자녀들은 부모님을 존경하길 원합니다. 서로가 사랑관계로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어가길 원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잘 되지 않습니다.

자식에게 부모님은 하나님과 같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한다면 부모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부모님에 대한 두 가지 자세를 권면합니다. 동사만 찾아보면, 그 답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는 ‘순종하라’, 둘째는 ‘공경하라’라는 것입니다.

(1) 순종하라

첫째, 부모님께 ‘주안에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부모님에게 순종하는 삶을 자연스럽게 포함되어 있습니다.

먼저 ‘주안에서 순종하라’고 했습니다. ‘주안에서’란 부모에 대한 자녀의 순종이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께 순종하는 방식으로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 6:38)

주안에서 순종하는 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권자로 인정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순종’이란 단어에는 ‘아래서 듣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이 부모님에 대해 들을 준비를 한다.’는 의미입니다. ‘들을 준비’는 말하는 사람에 대해서 배례(拜禮)해야만 상대방의 말이 들립니다. 자녀가 부모님께 대해서도 배례가 있을 때, 부모님의 의중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 의중은 따라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순종은 신뢰(信賴)에서 나옵니다. 때로는 자녀들이 부님의 생각과 다르고, 자신의 생각이 오를지라도 부모님의 의견에 대해 순종할 수 있습니다.

순종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부모님을 공경하고 순종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부모님은 하나님의 대리인입니다. 자녀가 자신을 낳아주신 부모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하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들의 생각과 이치 그리고 경험에 맞지 않지만, 말씀에 순종함으로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것도 최고의 극상품 포도주를 맛보았던 것입니다. 순종에는 최고로 놀라운 기적을 맛볼 것입니다.

(2) 공경하라

두 번째, 부모님께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공경한다’는 ‘중요한 분으로 대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존경하는 마음의 태도뿐 아니라 지속적인 봉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돌봄의 행위를 통해서, 공경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성경에서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소개합니다. 부모님을 공경은 십계명 중에 유일하게 하나님의 축복이 약속된 언약입니다. 그 축복의 약속은 ‘네가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십계명 중 하나로 실천하도록 주신 계명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을 자유롭게 인용합니다(출애굽기 20:12; 신명기 5:16).

12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애굽기 20:12)

유대인들이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였습니다. 십계명 중 1-4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의미를 기록하고, 5-10계명은 이웃에 대한 의무를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부모 공경’은 5계명인데도, 첫 번째 돌판인 하나님에 대한 의를 기록한 돌판에 기록되었습니다. 부모님에 대한 공경은 그 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는 말씀에 십계명에서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여섯 가지의 계명 중에 첫 계명이라는 말씀입니다. 순종하는 것이 소극적이라면 공경하는 것은 더욱 적극적인 자세입니다. 부모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주신 권위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할 수 만 있으면 능력 있는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능력이 없으면 공경하고 싶어도 공경할 수 없습니다. 자녀가 건강이 없이 누어있으면 부모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물질이 없으면 물질로 부모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독립된 자녀가 되어서 힘을 기르고 능력을 기르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도울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길러서 부모님들을 기꺼이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자녀들은 부모님을 도울 수 있도록, 능력과 인격과 지성을 겸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자녀들이 부모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은 부모님들을 세워 주신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님이 하나님의 뜻과 위배되는 것을 하라고 할 때를 제외하고는 모든 부분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때로는 부모님이 요구하시는 것에 동의할 수 없을지라도 공경하는 마음만큼은 잃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3) 열매

이렇게 효도를 다하는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상급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3)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하면 풍요로운 인생을 누릴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풍요로움을 맛보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부모로서의 자세(4)

부모는 자녀에 대한 청지기로 부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녀에 대한 양육 권한을 그 부모에게 위임하셨습니다. 하지만 자녀에 대한 소유권까지는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하지만 자녀들을 잘 양육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모들의 숙제입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4)

부모에게 부모로서 주는 권면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소극적인 측면에서 자녀를 양육할 때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하며, 적극적인 측면에서 자녀들을 주의 교훈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1) 노엽게 말라

사도 바울은 부모들에게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있습니다. 부모들은 자녀를 교육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교육할 때, 소극적인 측면에서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당시는 아버지의 절대 권위를 인정하던 그리스 로마 시대에 매우 이례적입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자녀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자녀와의 관계를 주 안에서 새롭게 정립해야 합니다.

부모들이 자신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을 자녀에게 요구하고 강요함으로 불순종의 자녀를 만들어갑니다. 자녀들이 어렸을 때는 순종하지만, 어느 정도 성장하면 부모님들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리고 불순종한다고 자녀 탓 합니다. 자신이 그렇게 가르쳤다는 것은 까마득하게 생각지도 않습니다.

종종 자녀를 자신의 소유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기 보다는 부모의 뜻을 지나치게 강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뜻에 의해서 자녀들이 인격체가 아니라 수단으로 대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대할 때 자녀들은 분노케 되는 것입니다.

(2) 양육하라

다음으로 부모에게 ‘양육하라’고 권고합니다. ‘양육(養育)’은 가르치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도구를 무엇으로 보여줍니까?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자녀들이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는 것입니다.

부모가 먼저 믿음의 본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모습에서 배우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하는 언행을 그대로 모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녀 앞에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삶을 살면, 자녀들도 부모들의 영향을 받아서 하나님을 공경하며, 부모님께 순종하고 공경하는 자녀로 성장합니다.

당시 자녀들을 소장품 정도로 취급하던 시대입니다. 바울은 자녀의 감정까지도 섬세하게 배려하라고 파격적으로 명령합니다. 자녀는 부모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 소유의 인격체로 대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니깐 부모의 욕망이나 이 세상의 가치를 따라 교육하지 말고, 주님이 기뻐하시도록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또 어느 정도 성장하면 부모로부터 독립하도록 교육하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부모님을 의지하려는 것을 완전하게 떨쳐버리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양육의 법칙입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언 22:6)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부모님들은 자녀들이 말씀대로 바르게 자라도록 가르치고 훈계해야 합니다. 하지만 자녀를 화나게 하는 말과 행동을 피해야 합니다. 부모님은 자녀를 너무 엄격하게 훈련하거나 자기감정에 사로잡혀 마음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부모님들이 원하는 것을 자녀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자녀들을 자신의 생각으로 로버트처럼 조정(control)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자녀들을 아끼고 그들의 생각과 의견에 귀를 기울려 주시길 바랍니다. 그들의 인격을 세우시길 바랍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로서 부모님을 공경하라고 하였습니다. 때로 부모님이 부당하게 느껴지고 무리한 요구를 해도 부모님을 존경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 당신은 부모님들을 어떻게 대합니까? 마지못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해 부모님을 존경하며 따르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구별된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길 원했습니다. 인간관계가 파괴된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도 파괴됩니다. 바르게 선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도 바르게 세워갈 수 있습니다. 당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가정에서 부모님과 자녀관계 그리고 직장에서 상사와 부하와의 관계가 잘 조화를 이루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이것을 통해 방황하고 있는 영혼들을 구원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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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05-03)


성령 충만한 지혜로운 성도들

에베소서 5장 15-21절


대부분의 연예인들은 긴 무명시절이 있습니다. 무명시절은 분명히 힘든 시간들이지만 그렇다고 불행의 시간은 아닙니다. 무명의 시간은 외롭고 힘든 과정이지만, 자신의 달란트를 발견하고 성장시키는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힘들어도 밝게 웃는 얼굴, 성공의 때가 온다는 믿음, 힘든 것을 즐기며 감사하는 마음, 이 세 가지가 무명 시절의 터널을 잘 통과하는 비결입니다. 성도들도 얼마나 준비하느냐에 따라 미래의 신앙생활이 멋있게 달라질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성도로서 준비되어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시간을 선용하고 주의 뜻을 이해함으로써 지혜롭게 살라고 촉구합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둘 다니는 세상에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길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기 위한 것은 성령에 충만해야 합니다. 지혜로운 삶으로 예배와 감사와 상호 복종의 삶을 살라고 합니다.

 

지혜롭게 행하라(15-17)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산다는 것은, 옛사람일 때 추구했던 삶의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세계관을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삶을 빛과 어두움의 삶으로 대조할 수 있습니다. 어두움에 일을 벗고 빛의 열매를 맺으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바울은 빛의 열매를 세 가지로 말합니다.

15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6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15-17)

본문은 에베소서의 후반부 중심에 해당합니다. 이제 나머지 부분에서 변화된 정체성에 어울리는 삶을 구체적으로 다룰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앞서 빛과 어두움의 강렬한 대조를 선보였는데, 여기서 ‘지혜 있는 자’와 ‘지혜 없는 자’를 대조합니다. ‘지혜’는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라 앞서 매우 중요하게 언급된 주제입니다.

에베소 성도들에게 ‘세월을 아끼라’고 권고합니다. 당시 소아시아 주변의 상황은 영적으로 좋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행해지는 것들은 은근히 하나님을 따르지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분별력이 없으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여기저기 방황하면서 시간을 다 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제사장과 서기관과 바리세인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얼마 동안 일한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평생 동안 헌신적으로 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각에 볼 때, 그들은 제대로 일한 것이 아니라 평생 동안 허송세월을 보낸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때,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세월을 아끼는 것이 지혜입니다. 성도들은 시대가 악하기 때문에 지혜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분별력 없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세상적인 방법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본받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깨어서 자세히 살피고 주의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이 지혜 있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세월을 아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놓치지 말고 최대한 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회는 자주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 지나가 버리면, 다시 그러한 기회를 찾을 수 없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란 바른 ‘분별력(分別力)’을 가진 사람이라고 합니다. 분별력을 가진 사람은 어두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일과 시간에 맞추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단은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시간을 빼앗기 위해 노력합니다. 사단의 전략은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헌신하고 온전히 삶을 드리려고 할 때, 그 시간을 찾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엉뚱한 일과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하는 전략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살피라고 권합니다. 지혜롭게 살아가기 위해서 먼저 주님의 뜻을 구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영적 분별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세월을 아끼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은 잘 준비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 열정만 가지고 무조건 밀어붙인다고 성공하지 않습니다. 미리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준비를 해야 실패하지 않고 성공하게 됩니다.

어리석은 사람의 특징은 아무런 준비 없이 순간적인 생각에 의해 결정하고 일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일을 시작할 때는 열정만 가지고 시작하다가 점점 시간이 지나면, 열정이 식어지면서 일에 대한 재미가 없어집니다. 그리곤 사역 자체를 피곤해 하면서 나중에는 사역이나 일을 집어치워 버립니다.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세상에서 승리하려면 틀림없이 영적인 준비를 해야 합니다. 준비 없이 무턱대고 덤벼들면 반드시 실패합니다.

교회의 사역도 무명의 시절에 교회 안에서 무엇이든지 맡겨진 일은 충성하다보면 점점 교회 사역에 대한 다양한 부분을 통달합니다. 이것저것 모든 일들을 해보면 전체적인 안목이 생깁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명의 성도 시절이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름도 모르고, 사역의 직분도 없고, 직장도 없을 때가 자신을 가장 준비시켜 놓기 좋은 기간입니다. 그때는 실패해도 다른 사람들에게 별로 관심 없기 때문입니다. 가장 준비해야할 것은 자신을 여러 가지로 준비시켜 놓은 것입니다. 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편 119:71)

이러한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었을 때, 교회 전체를 화합할 수 있는 훌륭한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훈련되지 않는 일군에게 불화음이 생기지만, 훈련된 일군은 조화를 이루어갑니다. 그래서 좋은 일꾼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수많은 시련을 통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개인적인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만만하지 않아서 기만과 위협으로 가득한 곳입니다. 성도들이 원한다고 바른 행실로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예상치 못한 함정에 빠지기도 합니다. 지혜로운 삶이 필요합니다.

지혜로운 삶의 첫 번째 특징은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16)고 권고합니다. 시간을 돈 주고 산 물건처럼 아껴 쓰라는 표현입니다. 세월 낭비나 허비하지 않는 삶이란,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명을 따라 우선순위를 정하고 급한 일로 끌려 다니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이 세상의 기준을 따라 살아가면 갈팡질팡 방황하고 흔들린 삶을 살아갑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서 자세히 살펴가면서 성취하는데 노력하는 삶이 세월을 아끼는 삶입니다.

성도들이 지혜롭게 사는 것은 “세상을 분별하는 것”(17)입니다. 세상의 풍속은 악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법칙대로 살아갈 순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말씀 속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간절히 찾고 구하는 자에게 임하실 것입니다. 성경을 집중해서 읽을 때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무장된 성도는 악한 세상을 변화시키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지혜를 사모하시길 바랍니다. 세월을 낭비하는 삶은 어리석은 삶입니다. 시대를 분별하지 못하고 이 시대를 따라 사는 것은 어리석은 삶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자신의 뜻이나 정욕을 위해 사는 삶도 어리석은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누구보다 지혜로우신 분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 최고의 길은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며,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노력하며 그 뜻대로 살아가길 노력하십니까? 혹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생각으로 살면서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있습니까?

 

성령의 즐거움을 누리는 성도(18-21)

인생의 가치는 그 삶이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세속으로 가득하면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살아가지만, 하나님으로 가득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헌신합니다. 악한 시대에서 지혜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이제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18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19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20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21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18-21)

당시 에베소 지역은 이방 종교와 제사 의식의 중심지였습니다. 자신의 신과 교통하기 위해서는 술에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취한 상태에서 신의 뜻이 무엇인지 결정하고, 어떻게 하면 그 신을 잘 섬기고 순종할 있는지 결정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습관이 있다 보니깐, 하나님과의 교제와 그의 뜻을 따르기 위해 과거에 에베소 신들을 섬기던 습관에 젖어서, 술 취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자칫 이 세상에 정욕과 쾌락에 취할 수 있습니다. 방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과 물질을 낭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무지하게 사는 것은 술 취한 생활과 다를 바가 없는 삶입니다.

어떤 분은 ‘나는 술 취해 본 적이 없다.’라고 말하실 분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 충만한 가운데 살고 계십니까? 성령 충만을 사모하십니까? 성령 충만을 힘입지 않으면 이 세상에 취해 살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깨어있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도들의 마음에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님은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는 우리들 안에서 끝임 없이 역사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성령 충만’이란 ‘성령으로 가득 채워진다.’는 의미입니다.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 채워져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에게 다른 표현을 사용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골 3:16)라고 권하셨습니다. 이처럼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심령 가운데 역사하실 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게 되어 집니다.

빛의 자녀라고 하면서도 세상 사람들처럼 세상의 기준과 가치로 살아가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살아갑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허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들은 철저히 자신의 생활을 살펴서 하나님의 자녀로 합당하게 살아가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들의 관심은 자신의 꿈이나 비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입니다. 악한 시대에서 빛의 자녀답게 살려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살펴야 합니다.

바울은 성령 충만한 사람의 네 가지 특징을 소개합니다.

첫째, 사도 바울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라고 말씀했습니다. 성도들의 삶에 교제(交際)가 달라집니다. 세상 사람들의 만남과 성령 충만한 사람들의 만남과 교제는 다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신령한 노래와 찬미하면서, 서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을 기뻐하면서 교제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라고 삶의 노래가 달라집니다. 그들은 찬양하길 기뻐합니다. 그들은 찬양이 떠나지 않습니다. 한밤중에도 감옥 속에도 그리고 깜깜한 동굴 속에서도 어디에서나 찬양할 수 있는 힘은 바로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찬송을 통해 주님이 임재하시고 찬송을 통해서 더욱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라고 감사의 생활을 합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이나 어리석은 삶을 사는 사람들은 그 마음에 원망과 불평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할 때, 진정한 감사가 있습니다. 감사할 때, 삶이 풍성해질 수 있습니다. 마지막 특징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육신적인 삶의 특징은 지배하고 정복하고 군림하고 그리고 사람들에게 대접받길 원합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기꺼이 섬기고 기꺼이 복종합니다. 그런 삶 가운데 기쁨을 누리는 것이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나타난 동사들을 정리하면, ‘화답하며’, ‘노래하며’, ‘감사하며’, ‘복종하라’고 표현합니다. 이 단어들은 ‘충만하다’(18)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과거의 방법으론 하나님을 섬길 순 없다는 것을 파악합니다. 이 세상의 방법으로 삶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즐거움들은 결국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들은 오직 성령 안에서 진정한 즐거움을 누립니다.

하나님의 복을 누리길 원하는 성도들이 준비해야할 것은, 바로 성령 충만함입니다. 성령 충만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삶을 통해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교도들처럼 외형적으로 이상한 현상이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성령께서 주시는 즐거움으로 성도들과 함께 교제하며, 하나님을 함께 찬양하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영적 즐거움을 누리는 성도들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을 대하듯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며 존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다음 장으로 설명되어질 가정에서 부부관계나 자녀관계나 직장에서 직원들과의 관계들이 원활하고 바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방법은 성도들의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하지만 성령의 즐거움은 영원하며 우리 영혼을 풍성하게 합니다. 성령 충만해져야 합니다. 성령 충만은 어떤 외형적인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감사와 찬송으로 서로 순종함으로 삶에 나타납니다. 당신은 무엇을 할 때 가장 기쁘고 즐겁습니까? 하나님과 성도와의 교제에서 오는 성령의 즐거움을 맛보며 살고 있습니까? 영적 복을 누리기 위해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실 때, 서로의 유익을 구하게 되고, 서로를 위하여 복종하게 되어 집니다. 성령 충만은 세상적인 방법으로 되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말씀과 기도로 항상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개인적으로는 사람다운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고, 교회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시켜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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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05-02)


빛의 자녀들을 향한 열매

에베소서 5장 8-14절


똑같은 세상이지만 밤낮은 밝기 차이가 납니다. 어두운 밤에는 깜깜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빛이 있어야만 모든 것을 보고 판단할 수 있고, 방향을 잡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많이 어두워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두워진 세상에 기준점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을 보냈습니다. 그들이 바로 ‘성도’들입니다. 성도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성도들은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어 세상을 밝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제 성도들은 하나님께 속한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성도들에게 세상에서 이방인의 부끄러운 방식을 버리라고, 주님 안에서 열매를 맺으며 빛의 자녀답게 살라고 권면합니다. 성도들이 비추어야 할 이유는 그들의 빛을 통하여 어둠 가운데 있던 것이 빛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빛으로 드러난 것은 그 자체가 빛이 되는 것입니다.

 

빛의 자녀처럼 행하라(8-10)

빛이 소중한 것은 아주 깜깜한 장소에 들어가면 더 알 수 있습니다. 밝은 곳에서 있다가 어두운 곳에 들어가면 앞이 안보입니다. 한참 있으면, 조금씩 어둠 속에 있는 물체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어두운 곳을 빛이 비추면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들어나 보입니다.

8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10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8-10)

바울은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는 권면에 이어서, 이제 성도들의 신분을 빛으로 비유하여 소개합니다. 그는 빛이신 하나님과 어두움인 세상을 대조하며, 성도들이 복음의 진리를 듣고 어둠에서 벗어나 ‘빛’과 ‘빛의 자녀’가 되었음을 소개합니다. 이제는 신분이 어둠에서 빛으로 변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빛의 자녀’답게 살라고 권면합니다.

⑴ 이유 : 그리스도인은 변화된 사람(8a)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회심하기 전, 이방에 살 때에 ‘어두움의 자녀’이었지만, 복음을 통해 새로운 ‘빛의 자녀’로 신분이 바뀌어졌다고 전합니다. 이제는 모든 어두운 악한 세력이 물러났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성도들에게 ‘빛 가운데 있다’하지 않고 ‘빛’ 그 자체라고 주장합니다. 요한은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하는 것’으로 설명하지만(요한복음 1:5-7) 바울은 한 발 더 나가서 성도들은 ‘빛’ 자체이며 ‘빛의 자녀’라고 소개합니다.

바울이 말한 ‘빛의 자녀’라는 것은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라’는 것과 관련이 되었습니다. 빛과 어둠의 구별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어둠은 복음의 진리에 대한 무지 가운데 불순종하는 것을 말하는데, 그것은 죽음과 지옥과 심판을 상징합니다(4:17-18). 반면에 빛은 진리의 깨달음을 통한 순종의 삶이며, 새 창조를 통한 새로운 생명을 의미합니다(4:20-24).

성도들은 ‘빛의 자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자신들이 ‘빛의 자녀’임을 인식하며, 그 다음은 ‘빛의 자녀’로서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은 위대한 복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얼마나 복된 삶인지 그 깊이를 알 수 없습니다. 오직 ‘빛의 자녀’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만 체험할 수 있습니다.

⑵ 명령 :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8b-10)

바울은 주안에서 ‘빛’이며 ‘빛의 자녀’된 성도들에게 신분에 걸맞게 살라고 명령합니다. 그 다음에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빛이신 하나님의 자녀들은 마땅히 빛의 열매를 맺으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① 빛의 자녀처럼 행하라(8b)

성도들을 ‘빛의 자녀들’이란 표현은 ‘불순종의 아들’(2:2; 5:6)이나 ‘진노의 자녀들’(2:3)라고 표현과는 강한 대조를 이룹니다. 과거에 에베소 성도들도 하나님을 거역하는 ‘불순종의 아들들’이었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살다가 결국 멸망 받을 ‘진노의 자녀들’이었습니다.

이제는 거듭난 ‘빛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중생하지 못한 ‘진노의 자녀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은 예전에 그들이 살았던(4:18; 요한복음 1:5; 3:19-20) 어두움이 아니라 주 안에서 빛이기 때문입니다(마태복음 5:14-16; 요한복음 3:21; 8:12; 로마서 13:12; 데살로니가전서 5:4-5). 그들은 흑암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골로새서 1:13). 이제 주 안에 있는 것은 ‘빛’이며(요한복음 8:12) 또한 ‘빛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특징은 ‘은밀함’입니다. 은밀하게 시작해서 패가망신(敗家亡身)해야 끝납니다. 누구든지 마약이나 도박은 패인의 지름길이란 것을 알고 있지만, 한 번 길에 들어서면 완전히 망가질 때까지 빠져 나올 수 없습니다. 그들의 배후에는 악한 사단의 세력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단의 인도에 대한 결과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로마서 6:23)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죄 가운데 죽음으로서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빛의 자녀처럼 행하라’고 명령했던 것입니다.

② 빛의 열매(9)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사랑하시여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보여주셨습니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은 에베소 성도들과 우리들은 이방인이었지만,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빛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빛의 자녀들’에게 ‘빛의 열매’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빛의 열매’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빛’이 된 성도들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행실이나 행동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본문에서 ‘모든 착함’과 ‘의로움’ 그리고 ‘진실함’이라고 소개합니다. 이 열매들의 의미를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모든 착함(goodness)’은 ‘선함’(로마서 15:14), ‘양선’(갈라디아서 5:22), ‘선’(데살로니가후서 1:11)으로 번역할 수 있는데, 본문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향한 어질고 관대한 모든 행실을 가리킵니다. 다음은 ‘의로움(righteousness)’인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새 사람의 성품이며(4:24), 또 하나님께서 믿는 성도들에게 부여하신 의의 선물입니다(6:14). 본문에서는 불의를 버리고 하나님의 의로운 뜻을 따르는 행실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진실함(truth)’는 ‘복음의 진리’(1:13; 4:21; 6:14)나 ‘진실한 말’(4:25)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본문에서는 거짓이 없는 진실한 행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빛의 자녀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선하며 의로우며 진실한 존재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 안에서 깨끗하게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며(고린도전서 6:11), 또한 참된 의와 거룩함으로 창조된 새 사람을 입었기 때문입니다(4:24). 그러므로 ‘빛의 자녀’가 된 성도들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모든 선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으로 살아감으로 빛의 열매를 맺음으로써 이 세상에서 실제로 선하고 의로우며 진실한 사람들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제 더 나가서 이사야 선지자가 외쳤던 것처럼 ‘이방의 빛’이 되었습니다(이사야 42:6). 이것은 혈통적으로 이스라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취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당연히 세상 사람들은 똑같은 욕하는 것이 아니라 빛의 자녀인 성도들을 더 욕을 합니다.

③ 주를 기쁘시게 해 드릴 것을 시험하라(10)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10)고 권고합니다. 이 말씀은 ‘여러분은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십시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기준은 주님의 영광이며 주님의 기쁨입니다(로마서 14:8; 고린도전서 6:20; 10:31).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무리 좋아 보인 것일지라도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는 것이라면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시험해 보다’라고 명령합니다. 이 단어는 ‘분별하다’(로마서 12:2)로 사용하며, 무엇이 참인지 결정하기 위해 면밀하게 ‘시험하다’, ‘조사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세상을 주관하는 마귀는 성도들의 영혼을 어둡게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성도들로 하여금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 분별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성도들은 살아가면서 주님의 뜻과 일치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지극히 선한 것은 무엇이며 좋은 것은 무엇인지 성도들 자신이 시험하고 분별해야 합니다(빌립보서 1:10; 데살로니가전서 5:21).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생동하며 자기 유익이나 기쁨을 먼저 고려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들도 매 순간 성령으로 마음이 새로워지지 않으면, 자기중심적인 성향과 욕심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죄가 만연했던 에베소에서 ‘빛의 자녀’로 살아가려고 할 때, 매우 분별력(分別力)이 필요했습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력, 선과 악에 대한 분별력 그리고 성도로서 행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분별력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거듭났다고 하지만, 과거 어두움에 속했던 습관대로 살아가기가 쉬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도 죄악으로 만연한 세상입니다. 성도들은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만한 행동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로마서 12:1)고 권하였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은 ‘빛의 자녀들’은 과거에 어두운 속에서 행하던 모습을 벗어버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바른 분별력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무엇이며, 불순종의 자녀들과 구별된 삶이 무엇인지 살피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악인들의 일에 참여하지 말라(11-13)

살고 있는 주변은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먼지로 가득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기청정기(空氣淸淨器)를 사용합니다. 평상시는 잘 모르겠지만, 어두운 곳에 빛을 비추어 보면, 그렇게 많은 먼지를 마시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죄악의 먼지로 가득합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죄악의 영향을 받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11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12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13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11-13)

‘빛의 자녀들’은 어두움에 참여하지 않는 데 그치지 말고 좀 더 적극적으로 어두움을 폭로하라고 명령합니다. 불신자들은 ‘빛의 열매’와 반대되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을 행합니다. 아무도 모르게 저지르는 죄들은 언젠가는 들어날 것입니다. 그때는 너무나도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얼굴을 들지 못할 것입니다.

⑴ 명령 : 참여하지 말고 드러내라(11)

이제 성도들은 불순종의 아들들과 ‘함께 참여할 자’가 아닙니다(시편 1:1). 어둠과 빛은 본질적으로 함께할 수 없습니다. 빛이 들어오면 어두움이 물러나고, 어둠이 있는 곳에는 빛이 없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빛의 자녀들’으로 강력한 능력을 발하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① 어두움을 참여하지 말라(11a)

바울은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들에 동참하지 말고’고 명령합니다. 이곳에서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들’이란 ‘빛의 열매들’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룹니다. 즉, 믿지 않는 이방인들의 더럽고 부끄러운 행위들을 의미합니다.

한 가지 집고 넘어가야할 것이 있습니다. 에베소 성도들은 분명히 거듭난 ‘빛의 자녀들’이지만, 아직까지 어둠의 행위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과거의 어두움에 있을 때처럼 조용히 행동하면 죄가 들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아직까지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몰랐습니다. 어두움의 아들들이 행하니깐 괜찮은 줄 알았습니다. 그들보다는 죄악의 강도가 깊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괜찮은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죄는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런 이익을 주지 못하고,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바울은 더 이상 ‘빛의 자녀들’이 어둠의 행위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② 어두움을 들어내라(11b)

바울은 어둠의 행위에는 ‘열매 없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열매가 없는 것’이 아무런 열매가 없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쓸데없는 열매를 맺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둠의 행위도 부정적인 측면에서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악하고 더러운 것이기 때문에 쓸데없는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빛의 열매는 아니므로 열매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어둠의 행위에 참여하지 말고 오히려 그 어둠의 행위가 얼마나 더러운 것인지 성도들이 드러내 보이라고 명령합니다. ‘책망하라’는 잘못한 사람을 나무라고 야단치라는 뜻이 아니라 빛을 비추어 어둠의 행위가 잘못된 것임을 드러내 보여주라는 뜻입니다.

‘빛의 자녀들’은 빛을 드러내는 행동으로 인하여 ‘어두움의 행위들’을 드러내야 합니다. 여기서 ‘어두움의 행위들’은 빛 안에서 행하지 않는 믿는 자들의 행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만 불신자의 행위를 드러내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5:12-13). 한편 성도들은 교회 안에 있는 몇몇 성도들 사이에서 악한 행위들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 성도들이 실패한 이유입니다(고린도전서 5장). 세상에 법이 없다면 얼마나 많은 죄악을 범람할 것입니다. 그러나 법보다 더 무서운 건 하나님이십니다. 어두움의 사람들은 죄악을 범하다가도 빛의 자녀들을 보면서 멈추어야 합니다.

한국교회들은 점점 어두움을 바르게 책망하지 못합니다. 어두움을 책망하지 못할 만큼 거룩한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두움을 향해 책망하면, 어두움에 속한 자들은 도리어 ‘너희들이나 잘해!’라고 책망합니다. 빛의 자녀로서 그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어두움을 향해 책망할 수 있는 능력은 회개로부터 시작합니다. 어두운 속한 사람들같이 행했던 죄들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바르게 ‘빛의 자녀들’로 설 때만이 강력한 빛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이제 한국교회가 다시 회복이 되려면, 회개의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⑵ 이유 : 그들의 행위는 부끄러운 것(12)

바울은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이다’고 합니다. ‘은밀히 행하는 것’은 불순종의 자녀들이 행하는 일이 어두움 가운데 감추어져 있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빛의 자녀들’이 그들에게 빛을 비추므로 은밀한 것이 드러나게 합니다.

‘빛의 자녀들’이 열매 없는 ‘어둠의 열매’가 드러나도록 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은밀한 중에 행해지는 매우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부끄러운 행위를 그만두게 하는 방법은 그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행동인지 보여주는 것뿐입니다. ‘말하기에도 부끄러운 것’이라는 표현은 ‘음행과 더러운 것은 입에 담지도 말라’(3)고 했던 것을 다시 생각나게 합니다. 어둠의 행위는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더럽고 부끄러운 것들이었습니다.

‘빛의 자녀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어둠에 빛을 비추어 그것의 더러운 실체를 폭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빛의 본질적인 역할이며 사명입니다. 빛의 자녀들이 빛을 비추지 못한다면 그것은 어둠과 다를 바 없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어둠의 행위에 동참하지 말고, 오히려 빛으로 어둠의 행위를 몰아내는 자가 되라고 강력하게 명령합니다.

⑶ 설명 : 빛은 행위의 진실됨을 보여줌(13)

바울은 성도들에게 어둠에 빛을 비추는 것이 왜 중요한 일인지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빛은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어둠의 행위에 그 빛을 비추게 되면, 그 빛을 받아서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되고 보이게 된 것은 곧 빛 자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빛이 악한 행위들을 드러낼 때, 실제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러면 ‘빛의 자녀들’은 그것들의 악함으로 보고서 자신뿐 아니라 다른 믿는 자들에게도 해가 됨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믿는 자들에게 스스로 깨끗하도록 인도합니다(요한일서 1:5-7).

성도들은 더 적극적으로 은밀히 행하는 부끄러운 일들을 묵인하지 말고 항거하고 빛으로 밝혀야 합니다. 성도들은 세상을 비추는 빛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악한 삶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항상 빛을 등경 위에 두어야 합니다(마태복음 5:15). 그럴수록 칭찬하기 보다는 자신의 즐거움을 망친다고 가혹한 처벌과 보복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등대불이 꺼지면, 항해하는 배들은 가야할 길을 찾지 못합니다. ‘빛의 자녀들’이 빛을 꺼버리면, 수많은 영혼들이 갈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의 자녀들’이 빛을 세상에 밝히 비춤으로 하나님 나라가 속히 임할 것입니다. 성도들 개인적으로는 영혼에 감사와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결론 :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심(14)

성을 지키는 파수꾼은 낮이나 밤이나 항상 깨어있어야 합니다. 언제 적군이 공격해올지 모르기 때문에 근무시간에는 졸아서는 안 됩니다. 영적인 군사들이 깨어있지 않으면 ‘빛의 자녀들’로서 역할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14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14)

에베소 성도들 중에는 구원의 소식을 듣고도 아직까지도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자들을 향하여 ‘잠자는 자’라고 칭합니다. 이제 빛을 보고서라도 잠에서 깨어나라고 권고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빛의 자녀들’로서 걸맞게 세상을 향해 빛을 비추며 살라고 권고합니다.

깜깜한 어두운 속에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다가 불을 켜면 어두움이 사라지고 사방이 밝아집니다. 영적으로 어두운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어나게 한 것입니다. ‘어두움에 속한 자들’이 책망을 받고 깨어나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잠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줌으로 죽음의 자들 사이에서 영혼이 깨어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좋은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어두움에서 ‘좋은 것이 좋다’는 것은 죄악의 열매뿐입니다. 하지만 빛에서 좋은 것은 선한 열매를 맺습니다. 성도들은 상황 이론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흔들림 없이 굳건히 바르게 세워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죽어있는 영혼들 사에서 잠자는 영혼들을 향해 ‘달리다굼!’(마가복음 5:41)하시면서 깨우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자들은 모두 깨어나게 될 것입니다. 혹시 당신의 영혼도 잠자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영혼을 향해 주님의 거룩한 빛을 비추고 계십니다. 죽음의 잠에서 깨어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향해 빛을 비추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빛의 자녀’로서 불러주심을 감사합니다. 세상에 속할 때, 어두움에 방황하던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제는 ‘빛의 자녀’로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일을 분별하고 행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 빛을 어두움을 향해 비추어야 합니다. 선과 의와 진실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성도들 때문에 어두운 세상이 점점 밝아지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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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05-01)


구체적인 두 번째 권면

에베소서 5장 1-7절


러시아 경찰이 늑대 떼들과 함께 생활하던 소년을 발견하고, 모스크바의 병원으로 데려온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루 만에 늑대 소년은 병원을 탈출해서 행방을 감추었습니다. 의사의 말로는 그를 처음 발견했을 때, 너무 지저분했고, 경계를 늦추지 않는데다가, 늑대처럼 할퀴고 깨물고 난폭한 행동을 보여서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런 아이를 변화시키려고 했지만, 적응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어쩌다가 야생에서 늑대들과 지내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아이를 통해 한 번 고정된 습관은 좀처럼 바꿀 수 없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사람은 사람의 사랑과 관심이 있어야 사람답게 자라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거듭난 새사람의 삶에 대한 권면으로 마무리하였습니다(4:25-32). 계속해서 교리적으로 적용해서 성도로서 마땅히 행하면서 살아야 할 삶을 계속 권면합니다. 이 부분은 믿는 자들의 행위를 언급함에 있어서 세 번째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 됨으로서 거룩함으로 그리고 사랑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긍정적인 측면 : 다른 사람들을 사랑함(1-2)

성도들이 아이를 출산해서 심방할 때마다 느낀 점들이 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한결같이 신생아들이지만 자기 부모를 닮았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닮지 않은 아이라면 더 이상할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님을 닮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도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닮아야 당연한 것입니다.

1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2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1-2)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에베소 성도들에게 성도로서 바른 삶을 권고합니다. 그들에게는 성도로서 부족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문제를 극복하는 정도가 아니라 더 긍정적인 측면에서 적극적으로 권고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변화된 성도로서 알맞은 모습으로 살아가길 제시합니다.

⑴ 하나님을 본 받으라(1)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사람을 향해 ‘사랑을 받는 자녀’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로서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들을 향해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라’고 권고합니다.

에베소 성도들이 본 받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들이 받은 ‘하나님의 사랑’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그 중에 가장 큰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 위에 베푸신 사랑입니다.

누구나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그들의 신분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던 불순종의 아들들이었습니다(2:2). 전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도 없었고, 오히려 심판을 받아 마땅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불순종의 아들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서 십자가에 드리셨습니다(25; 요한복음 10:11,15,17-18; 갈라디아서 1:4; 히브리서 9:14). 그 제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향기로운 제물이 되었습니다. 그 향기로운 제물을 받으시고 죄인들의 용서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로운 제물 때문에 이제 불순종의 아들들에서 새롭게 하나님의 자녀들로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의 심령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은바 되었습니다(로마서 5:5). 하나님의 사랑은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을 본받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자녀가 그의 부모를 닮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믿는 자는 하나님을 닮아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마태복음 5:48; 누가복음 6:36).

성도들의 변화되어가야 할 이상적인 모습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본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어떻게 닮아가야 알 수 없지만, 우리 가운데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처럼 닮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변화된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을 본 받은 사람으로서, 그 희생적인 사랑을 자신의 삶에 나타나야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 ‘하나 된 공동체’를 만들어 가기 위해 서로 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본 받으라’고 권고한 것은 하나님께서 ‘너희를 용서하심 같이 너희도 서로 용서하라’는 명령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그 행위를 그대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용서할 것을 강하게 권면합니다. 에베소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덕목은 바로 사랑을 통한 ‘용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주신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면 그들을 깊이 용서하며 사는 것입니다.

⑵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2)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본 받으라’고 권고한 후, 바로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명령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도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3:34; 15:21)라고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로 드리신 사건을 모델로 제시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는 권면과 병행을 이룹니다. 즉 ‘사랑 가운데 행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자신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죄인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려놓고 십자가에서 속죄 제물로 드리셨습니다. ‘제물’은 하나님께 드린 희생제물을 의미합니다. ‘향기로운’이란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제물이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거창한 이론이 아니라, 친히 행동으로 십자가 위에서 실천하신 사랑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핵심은 바로 실천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사랑으로 실천하였듯이, 이제 성도들이 이웃을 향한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처럼 실천해야 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를 통해 에베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희생을 본받아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권고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적인 의무 사항이 아닙니다. 희생하는 태도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와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을 받은 자임을 확인하는 방법이며 사랑받는 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육신적인 부자간에는 모습뿐만 아니라 성품과 행실에서도 닮아가듯, 하나님의 자녀라면 마땅히 사랑의 하나님을 닮아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누군가에 좋은 영향력을 받아서 좋은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성도들은 누구보다도 영향을 받아야 할 대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을 본받아서 그리스도처럼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죄인을 용서하는 사랑이었습니다.

 

부정적인 측면 : 악을 삼가하라(3-7)

누구나 새로운 옷을 좋아합니다. 새 옷을 입기 위해서는, 반드시 더러워진 헌 옷을 벗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고, 더러운 옷 위에 새로운 옷을 덧입는다면 새로운 옷을 입는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닮아가기 위해서는 과거에 버려야할 더러운 것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버려야할 더러운 것들을 지목하고 있습니다.

3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4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5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6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3-7)

사도 바울이 개별적인 삶에 대한 두 번째 권고입니다(3-21). 첫 번째는 실질적인 삶에 대해 권면했지만, 이번에는 종교적인 면에서 어떻게 성도답게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하나님을 본 받아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세워가야 합니다. 이곳에서는 앞부분인 3-7절까지만 먼저 강론하겠습니다.

⑴ 책임 : 악한 행위를 삼가라(3-4)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야 할 것을 설명한 후, 이제 그것과 대립되는 어두움에 속한 행위에 대해 설명합니다. 에베소 성도들에게는 지역적인 종교 특색이 있었습니다. 에베소에서는 음란한 종교들을 접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바울은 주로 성적인 죄를 염두해 두고 그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① 생각지 말아야할 것(3)

당시 바울은 이방 종교의 영향력을 다루고 있습니다. 성적으로 문란한 행위는 에베소 교회뿐만 아니라 우상숭배 하던, 당시 이방인의 전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이방 종교를 믿는 사람들 중에 신을 숭배한다는 명목으로, ‘음행(淫行)’과 ‘더러운 말’과 ‘개인적인 탐욕’을 부추기고 있었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은 더러운 행동들이 종교 활동으로서 당연하게 생각하고, 교회 안에서도 같은 종교 행위로 생각하고 행했을지 모릅니다. 먼저 ‘음행(immorality)’에 대해 언급합니다. ‘음행’은 온갖 종류의 성적인 범죄를 다 포함하는 일반적인 용어이지만, 주로 창기와의 성관계를 염두에 두고 사용할 때가 많습니다. 온갖 ‘더러운 것(any impurity)’은 부도덕한 모든 행위를 가리키는 것인데, 여기서는 특히 음행과 같은 성적인 죄를 가리켜 더러운 것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에베소서 4:19; 5:5). ‘탐욕(greed)’ 역시 이 문맥에서는 성적인 욕망뿐만 아니라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모든 육체적 욕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매우 심각한 것입니다. 십계명에서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고 했듯이, 데살로니가전서 4:5-6에는 이방인의 색욕이 형제의 아내를 탐내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것들을 이름조차 부르지 말라고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이러한 것들이 절대로 합당하지 않습니다. ‘성도(聖徒)’란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께 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음행’, ‘더러운 행동’ 그리고 ‘탐욕’과 같은 단어들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을 행하는 것은 거룩한 성도들에게 더러운 것을 끼 얻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향기로운 제물에 역겨운 것을 끼 얻는다면, 그 더러워진 제물을 절대로 받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거룩하고 흠이 없는 존재가 되도록 부름 받은 성도에게 마땅치 않은 부도덕한 단어들입니다. 사람을 파괴하는 말입니다. 오늘날도 제거해야할 단어들은 음담패설, 어리석은 말, 상스러운 농담(희롱)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이 할 수 없는 생각이나 말 그리고 행동이라면 한 마디도 허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거룩함으로 덧입어야 합니다.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에게도 이와 비슷한 권고를 한 적이 있습니다.

8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9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10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로새서 3:8-10)

바울은 거룩한 성도들에게 걸맞지 않는 부정한 것들에 대해 입에서 이름조차 부르지 못하도록 권고합니다.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서 거듭나지 못한 옛 사람이 아닌 새롭게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서 날마다 하나 된 공동체를 세우면서 살아가도록 권고합니다.

② 생각해야할 것들(4)

바울은 입 밖으로 내지 말아야 할 타락한 성적인 언어가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바로 ‘누추함’으로 음란하고 추접한 외설적인 대화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말’도 성적인 농담을 가리키는 것인데, 그러한 대화를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희롱’의 말은 단순한 대화를 넘어 성적인 농담을 즐기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인에게 대화의 주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더러운 것을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그러한 행동으로 옮겨가게 하는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바울은 입에도 올리지 말아야 할 ‘더러운 말’과 성도들이 반드시 해야 할 ‘감사하는 말’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더러운 말들을 버리고, 반대로 ‘감사하는 말’들을 하라고 권고합니다. 이것은 ‘서로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4:2)는 명령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서로 사랑을 베풀고 감사의 말을 하는 것이 성도들에게 합당한 언어생활입니다.

‘감사하는 말’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게 감사하는 것들이며, 남에게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헤아려보면서 감사해 보면, 모든 것이 감사할 것뿐입니다. 이 세상을 감사하면서 살아가기에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감사의 언어가 풍성할 때 거룩한 성도이며, 그들을 통해 하나 된 공동체를 세워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에베소 도시와 비슷한 모습입니다. 눈만 뜨면 음란함이 만연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함을 유지하기 힘든 시대입니다. 성도들은 자신에게 어떤 종류의 악이나 탐욕도 틈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은 우리에 대한 사랑의 결정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성도들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므로 아끼는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몸을 음탕한 곳에 타락시키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도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욕으로 자신과 다른 사람을 망치지 않습니다.

⑵ 이유 : 우상숭배자들을 본받지 않음(5-7)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계속해서 우상숭배자들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이미 언급한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욕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바로 우상숭배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결과를 주실 것인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① 하나님의 기업을 받지 못할 자들(5)

여기서 3절에서 지적했던 ‘음행하는 자’와 ‘더러운 자’와 ‘탐하는 자’들을 ‘우상숭배하는 자’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적인 범죄를 우상숭배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유대 전통에서 익숙한 것입니다. 헬라인에게도 우상숭배와 음행은 종종 같이 행해지는 풍습이었습니다. 특히 에베소 지역에는 우상숭배자들이 음행과 같은 더러운 행위를 종교 행위로서 동반하고 있었습니다.

악행자들을 멀리해야할 이유는 음행과 우상숭배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기 때문임을 엄하게 경고합니다. 그들이 ‘심판 받을 것’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기업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독자들이 하나님의 기업을 받기로 약속된 자들이란 사실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입니다(에베소서 1:14,18). 비록 독자들이 하나님의 기업을 약속 받았지만 그들이 더러운 생각과 말을 계속한다면 약속된 기업을 받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기업이 없는 자들’은 고린도전서 6:9-11에서 명백하게 드러난 것처럼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한 자들입니다. 성도들도 악행을 본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말을 하는 것은 그들이 빛의 자녀가 아니라 어둠의 자녀임을 드러내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에베소서 5:8).

② 헛된 말에 속지 말라(6)

바울의 관심은 이제 헛된 말로 성도들을 속이는 이방인에게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헬라 철학자들의 이론과 주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당시 헬라 철학이 아무리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훌륭한 수사학으로 말한다고 해도, 그곳에는 진리가 없는 공허한 말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헛된 말에 속지 않도록 권고합니다. 성도들은 ‘헛된 말’에 속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헛된 말로 속이는 자들은 불순종의 아들들로 규정되는데,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③ 불신자들과 함께하지 말라(7)

바울은 ‘헛된 말’에 속지 않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 설명합니다. 그들과 함께하지 말라는 것은 불신자들의 더러운 언어나 행위에 참여하여 같이 어울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불신자들과 전혀 만나지도 말고 상종하지도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음행하는 자들과 사귀지 말라고 했는데, 어떤 성도들은 그것을 오해하여 불신자들과 전혀 상종하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오해를 교정하면서 만약 우리가 불신자들과 전혀 상종도 하지 않으려면,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도들은 불신자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지만, 그들의 더러운 언행에 동참하는 자는 압니다.

에베소 교회에는 이방 종교들뿐이 아니라 거짓 율법 선생들이 들어와서 잘못된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들의 근본은 탐욕스런 삶이었습니다. 때문에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는 거짓된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삶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그들은 죄악을 합리화시키는 헛된 교리를 만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거짓된 교리로 위안을 주는 거짓 선생들에게 속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불의가 아름다운 말로 꾸민다고 정당화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불순종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날에 반드시 심판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혼을 흐리게 하는 유혹한 사람들에게서 벗어나고 그들과 어울려서는 안 됩니다.

시인 윤동주는 ‘서시(序詩)’에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라고 했던 것처럼, 성도는 삶 속에 죄악이 한 점 없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여주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악이 들끓고 있는 이 세상 속에서, 죄악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는 자녀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특권과 사명이 나옵니다. 이미 떠나온 세상, 이미 저버린 구습들, 이미 벗어난 옛 신분, 이것은 더 이상 당신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옛 사람처럼, 옛 사람으로서 더 이상 살지 않습니다. 이제 버려야할 옛 습관이 있다면 그것은 버려야 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을 닮은 사람들입니다. 아직까지 세상에 물들어서 헤매면, 죄로부터 자유하지 못하면서 어두움 속에서 방황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세상의 죄악의 길과 정반대되는 방법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세상에 악하고 더러운 것들로부터 보호해주실 것입니다. 또한 당신의 삶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강력한 능력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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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04-03)


새 사람을 입은 생활 원칙

에베소서 4장 17-24절


어린 시절 설날이 가까우면, 어머니께서는 자녀들을 위해 며칠 전에 설빔을 사오셨습니다. 사 오신 설빔을 입혀 보신 후, 명절 때까지 장롱에 보관하셨습니다. 며칠을 기다려야 했지만, 기다리는 동안 새 옷을 입는다는 기대감에 즐거웠습니다. 새 옷을 입을 때, 과거에 더러워진 옷 위에 끼어 입는 사람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도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옛 사람을 더러운 것을 벗어버리고, 거룩함으로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지음 받은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새롭게 지음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이방인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옛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삶에 합당한 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인 개인적인 생활과 관련해서 일반적인 원칙을 제시합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던 삶(17-19)

옛날 항해하는 선원들은 별을 보면서 방향을 잡았습니다. 많은 별들 중에 오직 북극성과 십자성만으로 기준을 잡았습니다. 북극성은 정북쪽에 십자성은 정남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지구에서 보았을 때는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기준점으로 잡았던 것입니다. 영적인 부분에도 움직이지 않는 기준점이 있어야 합니다.

17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18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17-19)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세 번째로 에베소 성도들에게 거룩한 삶을 살라고 강력하게 권면합니다. 과거에 이방인으로 있을 때는 하나님과 분리되어 하나님 없는 어두운 삶을 살았습니다. 이제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고 세상과 분리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에베소 성도들 중에는 예전 잘못된 방식대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르심을 받은 후, 성도의 기쁨도 누렸습니다. 그것도 잠시 주변에는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유혹을 받았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하나 때문에 그들과 다른 삶의 패턴으로 살아갔습니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에베소 아데미 여신을 섬기며 음란한 생활을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대부분 우상의 소굴인 에베소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힘겨운 일이었습니다. 형제 이웃과 친구들에게 압박과 고난 그리고 핍박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핍박 때문에 익숙한 생활로 돌아가서 편하게 살아가고 싶은 강한 유혹을 느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이유 때문에 거룩한 삶과 반대되는 이방인의 잘못된 삶을 상기시킵니다(참고 2:2-3). 하나님의 새로운 구성원이 된 성도들이 이방인처럼 산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신분과 특권을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앞에서 이방인으로 있던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12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2:12-13)

바울은 그리스도 밖에 삶을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공동된 특징입니다. 그 특징은 세 가지로 ‘영적 무지’(17), ‘영적 죽음’(18) 그리고 ‘영적 타락’(19) 등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는 엄숙히 선언하듯이 주안에서 하나씩 설명해 나갑니다.

⑴ 영적 무지(17)

첫 번째 특징은 ‘영적인 무지’입니다. 이방인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으므로 허망한 것으로 행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생각에는 ‘마음’을 행동에 관련된 도덕적인 판단으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그 마음의 허망’은, 이방인의 불경건한 삶 전체의 특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시를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하지만 타락한 사람은 이 능력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이 없는 마음은 ‘하나님의 계시’를 분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목적에 대한 계념조차 잃어버렸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말씀합니다.

21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4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5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로마서 1:21-25)

소경이 목적지를 볼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 없는 사람은 정확한 목표를 설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보이는 것에만 가치를 두고, 더 이상의 것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세상적인 물질과 성공에 최종적인 가치를 둡니다. 이것을 얻기 위해 목숨을 겁니다. 바른 목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바르게 세워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했습니다(시편 73:28).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삶은 ‘목표가 없는 삶’이므로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살지 말라고 엄중히 권면합니다.

⑵ 영적 죽음(18)

두 번째 특징을 영적인 죽음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18)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근원이신데, 하나님과 떠나 있다는 것은 영적인 죽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총명은 어두워지고 무지함과 마음이 굳어져’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총명’은 ‘인지 능력’입니다. 영적 인지 능력이 없으므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능력 또한 없습니다. 그 결과 ‘무지함’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는 것과 ‘굳어진 마음’은 ‘하나님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꺾어진 나무 가지는 잠시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잠시 후엔 말라 죽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사도 요한을 통해 그 모습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한1서 5:12)

깜깜한 밤에 불빛이 없으면 방향을 잡을 수 없는 것처럼, 아무리 똑똑한 인생도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면 정확한 방향을 잡을 수 없습니다. 부평초처럼 세상의 흐름을 따라 살아갑니다. 스스로 지혜롭고 똑똑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러한 사람들의 모습을 로마서에서 잘 서술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로마서 1:21-23)

⑶ 영적 방탕(19)

세 번째 특징은, 영적으로 무감각해진 사람은 바른 기준이 없기 때문에 ‘방탕’하게 살아갑니다. 이곳에서 ‘방탕(放蕩)’이란 ‘주색잡기 빠진 상태’도 의미하지만, 부평초처럼 ‘마음이 들떠서 갈피를 잡을 수 없음’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멀어진 사람들은 영적으로 강퍅해졌습니다. 그들은 자신에게서 하나님을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마치 불에 대인 딱딱한 피부처럼 옳고 그름에 감각이 없습니다. 당연히 영적으로 양심은 마비되고 무감각합니다. 아무런 수치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들의 삶의 기준은 ‘탐욕’입니다. 그들은 탐욕으로 순간적인 쾌락을 누릴지는 모르겠지만, 점점 허전함이 찾아옵니다. 허전함 때문에 또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방황합니다. 은밀하고 더러운 것을 탐닉합니다. 점점 더 자극적인 쾌락을 찾습니다. 마약, 게임, 스포츠 심지어는 섹스 등과 같은 중독에 빠집니다. 이러한 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하면 극단적인 경우에는 자살을 선택합니다. 결국 방탕한 삶은 영적 죽음의 열매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 없는 이방인들에 대한 세 가지 특징을 살펴보았습니다. 첫째, 영적인 무지한 상태로 살아가고, 다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서 영적 사망에 이르렀고, 마지막으로 사망에 이른 삶은 부평초와 같이 방탕한 삶을 살다가가 결국 멸망당합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였습니다(로마서 6:23).

 

추구할 새 삶의 근원(20-21)

사람들은 자신의 방법으로 유토피아 세상을 만들려 시도하지만, 악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습니다. 어두운 생각에서 아무리 노력하고 연구해도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오늘날과 같은 병든 세상을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새롭게 거듭난 지체들은 다릅니다.

20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0-21)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삶을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지체가 된 성도들은 이방인과는 전혀 다른 존재임을 피력합니다. 자신의 존재를 분명히 알면,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할 근거를 제시합니다.

이제 바울은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이 ‘배우지 않았다’는 인격적으로 ‘체험하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에베소 성도들은 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보혈로 거듭났음을 확신했었습니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알고 있는데로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가치와 방식을 따라야 했고,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 변화는 완전히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것처럼, 어두움에서 빛으로 완전하게 새로운 백성으로 근본(根本)부터 변화를 이룬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음’을 지적하고,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에게서 듣고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동일하게 성도들에게도 진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미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가 있음을 확인시켜줍니다.

에베소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행적을 돌아보면, 은혜가 너무 큽니다. 그래서 과거 어두움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마땅히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에베소 성도들은 첫 사랑을 잊어버렸습니다(요한계시록 2:4). 깨끗하게 씻긴 돼지가 다시 진흙 속으로 들어가듯이, 점점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삶의 방식에서 전혀 이방인들과 구분되지 않고 세상적인 방법대로 살아가려 했던 것입니다.

 

변화된 새로운 사람(22-24)

세상 사람들이 성도들을 향하여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을 믿는 교회가 왜 싸우는가, 그리고 성도들이 거룩하게 구별되었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에 불만을 토로합니다. 그들은 교회를 향해 성도의 삶이 주장하는 이론과 삶이 일치하길 원합니다.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22-24)

성도들이 변화된 삶을 산다는 것은 단순하게 생활이 몇 가지만 바꾸어진 것을 의미한 것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삶이 바뀌는 것이며, 근본적인 변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이 과거에 그리스도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던 내용들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킵니다. 이 내용은 그렇게 살라는 명령이 아니라 배운 내용을 세 가지로 요약한 것입니다.

⑴ 옛 사람을 벗어버린 것(22)

에베소 성도들은 위에서 제시했던 어두움으로부터 빛으로 구원을 받았고, 그래서 새 생명으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옛 사람처럼 살아갈 수 없습니다. 과거의 어두움을 완전히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옛사람’은 타락한 첫 아담과 연합하여 과거의 삶의 방식에 따라 사는 존재입니다. 거짓된 욕심을 따라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부패한 삶을 누립니다. 그들의 특징은 영적인 것은 망각하고 육체적인 것으로만 살아갑니다(에베소서 2:3). 죄와 죽음의 지배 아래서 속임수에 빠져서 자신이 원하는 것만 이루면 만족하고 행복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거짓과 기만에 속은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도 만족과 행복이 없습니다. 욕심으로 자기 만족 때문에 더 채우기 위해 도덕적인 부패까지 가져옵니다.

하지만, 이제는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을 얻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사실을 벗어 버렸습니다. 몇 가지만 변한 것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모든 것이 변한 것입니다. 그 결과로 썩어져 가는 과거의 삶의 방식을 따르던 옛사람을 벗어 버렸습니다.

마치 새 옷을 입기 위해 헌 옷을 벗은 것처럼 설명합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렸던 것’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삶입니다. 앞에서 거론했던 이방인의 생활방식(2:1-3, 4:17-19)에 대해 강력하게 거부하고, 이제는 새 사람으로 새로운 삶을 추구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단은 과거의 방식으로 어둡고 더러운 옛 옷을 다시 입도록 유혹합니다.

믿음이 연약해질 때, 사단은 거짓으로 성도를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속임입니다. 순간마다 옛 옷을 다시 입히고 어두운 삶으로 이끌고 가려고 시도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지배를 받지만, 아직도 어두운 과거의 삶의 방식이 남아서 갈등합니다. 그래서 부패한 음식에 파리가 쉽게 모이듯이, 조금만 틈을 주면 너무 쉽게 어두운 것들이 달라붙습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이렇게 옛사람과 새사람이 계속해서 싸우게 됩니다.

19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로마서 7:19-21)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사도 바울도 동일한 영적 싸움이 있었습니다. 종종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자신 안에 있는 어두운 모습을 보면서 흠칫 놀라운 경우가 있습니다. 결정적인 사단은 순간마다 판단력을 흘리고 어리석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이 싸움에서 패하도록 합니다. 영적 전쟁은 평생 동안 해나가야 합니다.

⑵ 심령이 새롭게 되는 것(23)

바울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심령이 새롭게 되어간다는 점입니다.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그리스도를 믿을 때 단회적인 사건이지만, 새로워지는 것은 성도의 모든 삶에서 반복적이며 지속적으로 일어난다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새롭게 변화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순간으로 마친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이루어져 가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옛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은 성도들은 지속적으로 본성과 삶에서 온전하게 새롭게 되어가야 합니다.

5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로마서 8:5-6)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항상 영의 생각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심령이 새롭게 되었다”는 생각의 틀이 새로워졌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어떤 부분들만 헌신된 것이 아니라 모든 부분을 하나님의 생각이 지배하고 지속적으로 새 사람으로 변화시켜 줍니다.

은혜로 부르셨고, 예수 그리스도로 변화시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므로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밖에 있는 이방인은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합니다. 또한 지각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오직 욕심에 따라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노력합니다.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으로 타락해 가면서, 순간적인 쾌락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만족이 없습니다. 점점 더 많은 물질이나 강력한 것 그리고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며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만 살아갑니다.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성도들은 가치관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인도하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성령께서 지속적으로 새롭게 하여 그 본성과 삶이 온전한 새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한 것입니다. 세상은 사라지고 하나님만으로 가득 채워집니다.

⑶ 새 사람을 입은 것(24)

에베소 성도들이 영적으로 배운 것에 대한 마지막으로 새사람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헌 옷을 벗었으면 깨끗하게 씻고 새로운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새사람을 입었음을 상기시킵니다.

사도 바울은 ‘새사람’의 근원을 “하나님을 따라 참된 의와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은 새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자연스럽게 과거에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옛사람 아담을 창조하신 일을 기억나게 하십니다(창세기 1:27). 처음 창조 때처럼, 두 번째 창조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형상(“의와 거룩함”)을 따라 새롭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된 하나님의 새로운 인류이며(에베소서 2:15), 더 자세히 본문에서 “새사람”은 ‘옛사람을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새사람들을 보시고 보시기에 참 좋았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

모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복음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을 때, 신분이 옛사람에서 새사람으로 재창조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이므로 이제 옛사람(이방인)의 가치와 방식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으로서 진리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새사람을 입었다는 것은 동시에 새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습니다. 새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에베소 지역은 아데미 우상숭배와 음란한 생활이 들끓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승리하는 것은 대단한 결단과 능력이 필요했습니다. 에베소 성도들은 세속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움으로 진리 안에 살아야 합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 살아야 합니다. 그분의 인격이 제자의 인격이 되고 그분의 삶의 목표와 가치가 제자들의 삶의 목표와 가치가 되어야합니다. 항상 진리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제자로 성숙해가지 않는다면 성도가 아니라 단순히 ‘구도자(求道者)’에 머물 뿐입니다.

죄악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성도들이 새사람으로 거룩한 삶을 살기란 쉽지 않습니다. 순교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새사람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야 합니다.


성도는 더 이상 이방인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창조되고,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귀한 존재입니다. 내주하신 성령의 도우심으로 지속적인 성장과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공동체의 연합을 이루어 가야합니다. 새사람으로 살아가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새로운 심령으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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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04-02)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사역

에베소서 4장 7-16절


오래 사역을 하다보면 영적인 부분은 관심이 적어지고, 보이는 부분에만 관심이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결과 점점 단조로운 신앙생활 속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어느 한 순간 성령께서 자신과 공동체에게 은사를 주셨음을 깨닫는 순간부터, 각자 자신에게 주신 영적 은사를 따라 봉사하면, 그 공동체는 건강한 교회로서 성장해 나갑니다. 본문에서는 효과적으로 은사를 사용하는 방법과, 이 능력의 출처에 대해서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은사를 어떻게 사용하실 것인지를 살필 것입니다.

 

바울은 서로 용납하고 잘 연합하여 부르심에 합당한 모습으로 살라고 권면합니다. 이제 연합할 지체들의 다양성을 직시하며, 다양성 속에서 연합과 성장을 이루어 갈 것인가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모든 성도들은 각자 나름대로 섬기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성도를 온전케 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십니다. 성도들은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합니다.

 

은혜로 주신 은사(7-10)

전쟁에 승리한 장군들은 부하들에게 하사품을 내립니다. 승리에 대한 혜택이 병사들에게 골고루 돌아갈 때 전쟁에 참여한 군사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승리에 대한 혜택을 어니 한 사람이 독식하면 불만으로 쌓이게 되고, 결과적으로 지도자의 리더십에 큰 타격을 줍니다.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을 따르는 성도들에게 서로 다른 은혜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7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8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7-10)

사도 바울은 먼저 한 몸, 한 성령, 한 소망, 한 주, 한 믿음, 한 세례, 만유의 아버지이신 한 하나님 등을 통해서 교회의 일치에 대해 여러 측면으로 주장했습니다. 이제 각 성도들에게 주어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사로서 그 몸의 일치를 보존하는 방법들을 열거합니다.

⑴ 은혜를 주심(7)

바울은 교회의 하나 됨을 강조하지만, 교회 구성원의 다양성 또한 무시하지 않습니다. 이제 자연스럽게 하나 됨을 유지하기 위해 구성원의 다양성에 대해, ‘교회 공동체가 연합하면서 어떻게 서로 개성을 인정하며 합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가?’라고 논합니다. 그 답은 그리스도께서 배분해 주신 특별한 은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7)라고 소개합니다. 이는 모든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리스도께서 주신 대로 은혜 혹은 능력을 받았습니다(에베소서 3:2,7-8). 공동체의 목표를 위해 각 성도들의 고유한 역할을 받은 것입니다. 각 은사는 교회의 성장과 관련하여 주어지는 봉사를 위한 ‘은사’를 가리킵니다(로마서 12:6-8).

이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온전히 세워나가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 각 사람은 하나님의 권한에 따라 그리스도의 한 몸 안에서, 자기에게 부여된 선물에 합당하게 그 역할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11절과 로마서 12:4-6, 그리고 고린도전서 12:4-6에 보인 대로 각종 선물이 발휘될 것을 의미합니다. 그 은사는 획일적인 것이 아니라 성도 각자에게 다른 은사가 주어졌음을 강조합니다. 게다가 믿는 자는 각각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오늘날의 구분대로 목사이든지 평신도이든지 간에 그들의 선물들을 활용하는 데 있어서 모두 동일합니다.

성도들은 구원 받은 사실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은혜입니다. 구원 후 더욱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각자에게 은사와 직분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공동체를 위한 서로 섬김과 봉사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 주신 분량대로 은사를 주셔서 그것을 통해 교회를 섬길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각 개인의 은사와 능력은 교회가 하나 됨에서 온전히 성장하도록 하십니다.

⑵ 성경을 통한 증명(8)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각자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셨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증명합니다. 그가 인용하는 성경은 시편 68편 18절의 말씀입니다.

18주(여호와)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들을 취하시고 선물들을 사람들에게서 받으시며 반역자들로부터도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로다(시편 68:18)(에베소서에서는 ‘받으신다’를 ‘주신다’로 바꿈).

이 본문의 기본적인 의미는 전쟁에서 승리한 장수가 그와 함께 전쟁에 참가했던 사람들에게 노획물을 선물을 나누어주는 권한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임하셨고 사단과 싸워서, 그 싸움에서 승리하셨다고 의미를 부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신 것은 실패한 것으로 여겼던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승리했다고 설명한 것입니다.

이제 승리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세력을 사로잡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이제 승리하신 그리스도께서는 각 성도들에게 선물로 은사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 은사를 통해 사단의 모든 세력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왕국인 교회를 세워가는 일꾼으로 삼으셨습니다.

⑶ 승천하신 그리스도(9-10)

사도 바울은 인용한 시편 68:18를 통해 주장을 계속 전개해 나갑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온전하게 하시려고 실제적으로 조치하신 사실들을 풀어 나갑니다. 그는 8절에서 인용한 ‘올라가셨다’를 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하늘의 보좌로 ‘올라가셨다’는 것은 하늘에까지 그의 통치권이 미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내려가셨다’는 것은 이 세상에 성육신으로 내려오신 것을 전제합니다.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고 내려오셔서 승리자가 되어서 다시 오르신(승천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 승리의 징표로 자기 자녀들에게 은사와 직분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직분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승리에 대한 결과로 받은 것입니다. 절대 개인적인 자랑거리가 아니라 섬김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에 나타나도록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승리를 따라서 성도들에게 선물로 주신 은사를 주셨습니다. 구원 받은 성도들은 사역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은사를 따라 하나님의 사역을 해 나가길 원합니다. 은사를 통해 교회와 세상을 헌신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이 온 세상에 나타날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를 성도로 부르신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다양한 은사를 주신 목적(11-13)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건강하고, 이 건강한 교회를 통하여 세상을 건강하며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풍성하길 원하십니다. 이렇게 되려면 모든 성도 한 사람 한사람이 성장하고 성숙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성숙을 위해서 주께서 은사와 직분을 주셨을 때, 제일 먼저 리더를 준비시키십니다.

11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2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3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11-13)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은사를 주신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합니다.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 가는 과정은 세상의 방법과 다릅니다. 세상은 먼저 조직을 만들고 사람을 모이고 그리고 리더가 세워집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공동체인 교회를 위해 먼저 영적 지도자를 준비하십니다.

⑴ 은사의 다양성(11)

바울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셨다고 합니다. 성도들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선물’의 구체적인 항목과 목적을 언급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은사는 다양합니다. 본문 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에서 많은 은사들은 나열해 놓았는데 매우 다양합니다(고린도전서 12:4-11).

많은 직분들이 있지만, 본문에서는 공동체를 이끌어갈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의 직분들이 있습니다. 언급되지 않는 직분들이라고 저급한 직분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는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거나 저급한 은사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는 작은 직분이라도 선합니다.

⑵ 은사를 주신 목적(12)

사실 모든 직분은 원칙적으로 한 목적을 위해 맡았습니다. 비슷하지만 각자에게 다른 직분을 주신 것은 각자의 은사를 따라 그리스도의 몸을 더 잘 세우라고 주신 것입니다. 어떤 직분이든지 권력이나 명예를 얻는 수단으로 전락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행동은 영적인 타락의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갈 전하여 많은 사람들을 불러오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들을 잘 가르치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또한 권면과 경계로 잘 훈련하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직분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온전하게 세우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⑶ 은사를 통한 목적(13)

다양한 은사를 주신 목적을 깨달았다면 그 목적에 부합하게 교회를 섬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사는 무엇보다 ‘성도를 온전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일(1:23)임을 다시 강조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기 위해서는, 먼저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것과 믿는 것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온전한 지식에 근거합니다. 아무리 굳건한 믿음이라도 잘못된 지식에 근거한 것이라면, 하나 됨을 헤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는 것과 믿는 것에 하나가 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하게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계속해서 성장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장해야 할 목표는 그리스도의 온전하심에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예수님의 수제자인 사도 베드로도 초대교회의 성도들을 향해 간절히 권고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성도들이라면 간절하게 원했던 모습입니다.

7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9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 10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베드로전서 4:7-10)

바울은 온전하게 되는 것을 어린아이가 자라서 장성한 성인이 되어가는 것에 비유합니다. 어린아이는 사실분별에 어둡고 속임수와 유혹에 잘 넘어갑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세상의 잘못된 가르침에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어린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또한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파도와 바람에 비유합니다. 독자들이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 성장하지 않으면 여러 속임수와 유혹에 빠지고야 맙니다. 마치 거친 파도와 거센 바람에 휩쓸려 다니듯이, 성도들은 이리저리 취둘리다가 결국에는 평안을 빼앗기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교회 직분에 대한 오해들이 있습니다. 직분을 사람이 부여하거나 돈으로 사고팔 수 있고, 또한 교회의 직분은 그저 필요한 일을 나눠서 하는 것이라고 잘못된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하나님의 교회를 단지 선한 사업을 위한 단체 정도로만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그러한 차원을 넘어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공동체입니다. 그 구원 사업을 위해 선한 은사들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주신 사명을 통해 개인적으로는 잘 성장해 나가고, 공동체로서는 인류를 구원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역자를 보내주신 목적(14-16)

하나님께서는 그때그때 은사를 가진 사람들을 보내십니다. 그들을 통해 교회와 이웃을 위해 섬기도록 하십니다. 하지만 직분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하면, 정확한 방향을 설정할 수 없습니다. 주신 은사를 가지고 아이들 수준으로 단지 직분에 따라 ‘누가 크냐?’에 집착할 수 있습니다.

14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그에게서 온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14-16)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성도들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 은사를 통해 교회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은사와 직분은 바로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존재한 것입니다.

직분마다 그 역할이 조금씩 다르지만, 존재 목적은 모두 동일합니다. 교회의 직분은 성도들을 양육과 훈련을 통해 은사와 직분을 따라서 봉사하게 건강한 교회를 세우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신약에서는 12제자와 12사도를, 구약에서는 모세와 여호수아 그리고 다윗을 준비시키신 것처럼, 언제나 먼저 교회의 지도자를 준비시킵니다.

성도들을 교육시키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하나 됨을 이루라는 그의 권면을 마무리합니다. 성도들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도자들은 성도들을 잘 준비시켜서 봉사의 일을 하도록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야 합니다. 영적 어린 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도록 하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모든 면에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성숙한 성도들이 어디에서나 은사를 따라 사역장에서 주체가 될 때, 건강한 교회를 세울 수 있습니다.

제대로 양육되고 훈련된 성도들은 더 이상 세상 풍조에 요동하거나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성숙한 성도로서 예수님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서로 하나가 되어 예수님을 닮은 사람으로 세워집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룰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교회들이 일치하지 못한 것은 성도들이 어린아이처럼 성숙하지 못하고 미숙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성숙이 있을 때, 연합이 일어나고 일치가 일어난 것입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함으로 모든 일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성도들이 되는 것입니다.

각 사람이 받은 은혜를 따라서 성숙하면 서로 하나 되어 연합되어 갑니다. 서로 하나가 되고, 서로 연결되어 가고 서로 세워가면서 사랑 안에서 건강한 교회가 됩니다. 건강한 교회에 하나님의 생명과 영광이 충만하면 이 세상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도 하나님의 건강한 교회를 원한 것입니다. 건강한 교회는 세상에 유일한 소망이 됩니다.


성도들에게 있는 은사와 직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두움의 권세를 이기신 승전 기념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하게 받고 믿음으로 순종하야 합니다. 이것을 통해 섬기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재능 간에 비교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하나로 만들며 세우고 성장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허락하신 은사와 직분을 소중히 여기고 잘 이행하기 원합니다. 사랑의 수고로써 온 세상의 교회가 온전해지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러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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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04-01)


성령 안에서 하나 됨을 지키라

에베소서 4장 1-6절


미국 줄리아드 음악대학은 음악으로 유명한 대학교입니다. 유학생 중에 지도하기 가장 힘든 학생들은 한국에서 온 학생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개인적인 능력은 뛰어나만, 문제는 협연(協演)하면 제대로 하질 못한다고 합니다. 한국인 유학생들은 자기 소리만 내려고 해서 협연이 안되는 것입니다. 오케스트라는 함께하는 ‘협주(協奏)’입니다. 협주에서 자신의 소리만 내려고 하면, 전체적인 하모니(調和)를 이룰 수 없습니다. 자신의 소리를 줄이고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어야 아름다운 오케스트라 연주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1-3장에서 기독교의 교리를 소개했습니다. 이제부터 마지막까지 대부분 성도로서 그 교리를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지 설명합니다. 복음의 합당한 태도는 공동체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서로 용납하고 하나로 연합하면서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도록 다양하게 세우십니다. 바울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권고하며,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하나인 것처럼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권면합니다.

 

권고하는 바울(1a)

대부분 자기 허물을 감추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허물을 들어내는 사람에게 화를 내고 적대감을 품기도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허물을 지적해 준 사람에게 감사합니다. 지적해 줌으로써 허물을 볼 수 있고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수치와 같은 감옥생활에서도 담대하게 진리를 권고합니다.

1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1a)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과 에베소 성도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신분에 관해 설명을 마치고, 이제부터 서신의 후반부가 시작되는 본 단락에서 실천적인 권면으로 옮겨 갑니다.

먼저 본문에서 ‘그러므로’라고 시작하는데, 이는 사도 바울이 서신의 전반부에서 서술한 내용을 근거로 에베소 성도들에게 이제 실천적인 권면을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신분인 성도들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권면합니다.

또 한 가지, 바울은 사도로서 선지자적 권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당하게 자신을 다시 ‘주 안에서 갇힌 자’라고 소개합니다.

반복해서 자신이 감옥에 갇힌 이유를 소개한 것은, 자신의 어떤 죄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투옥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교회는 외형적으로 볼 때, 사람들이 모여서 세워진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죽으심으로 죽을 수밖에 없던 죄인들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 자녀들을 통해 영화로운 교회로 세워졌습니다. 그만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목숨과 바꾼 만큼 매우 귀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 또한 그 귀한 교회를 지키기 위해 투옥된 것입니다. 투옥된 사실에 대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영광스런 교회가 나누어진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교회를 위해 예수님처럼 자신이 희생한다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투옥된 사실을 당당하게 말합니다.

지상에 세워진 교회들은 아무리 작은 교회라도 수많은 희생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하나하나가 매우 가치가 있습니다. 이 교회를 위해 고난은, 복음으로 인한 고난은 충분히 받을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사도행전 5:41). 바울은 주 안에 갇혀 있으며 부르심의 목적 아래 갇혀 있습니다. 바울이 투옥된 삶을 불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명, 복음과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된, 가장 행복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환경에서도 사역에만 집중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투옥되는 희생에도 굴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세우는 것에만 집중하였습니다. 감옥에서라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은 매우 값진 일입니다.

 

성도로 부르신 목적(1b-3)

성도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아직 미완성품입니다. 점점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화 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성화 되어 가는 과정에 필요한 것은 인내(忍耐)입니다. 자신에게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향해서도 인내가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사람은 어떤 고난에도 소망을 잃지 않고 인내하기 때문입니다.

1…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1-3)

하나님께서는 모든 교회를 향해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을 통해 그 소원을 에베소서 교회에도 간곡하게 권고합니다. 그 소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부르셨습니다. 특히 이방인이던 에베소 성도들은 은혜로 구원받아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⑴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함(1)

첫째 권면은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1)라고 권합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에게 대강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윤리적인 기준으로 선포합니다.

바울이 말한 ‘부르심(καλεο)’은 ‘교회’라는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의 어원입니다. 모든 성도는 하나님에 의해서 세상에서 ‘불러내진 사람’, ‘부름 받은 사람’, ‘호출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도를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시는 분’, ‘호출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셨고,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죄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 거룩하게 만드신 후에 하나님의 자녀로 세우셨습니다. 우리가 먼저 시작해서 하나님을 부른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께서 먼저 부르셨습니다. 바울은 먼저 ‘세상 창조 전에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해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에베소서 1:4)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불러내 새 생명을 주셨고 자신의 자녀로 삼으셨고 거룩한 일군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 은혜를 생각하면서 합당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합당하게 행하기를’ 간청합니다. 이곳에서 ‘합당하게’란 ‘같은 중량’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구원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은혜만큼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람들의 행위는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절대로 예전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어두움의 권세 아래 있는 삶을 버리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의 경륜’을 설명한 후, 곧 바로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⑵ 합당한 방법(2)

성도들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세도 역시 중요합니다. 이제 바울은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교회 공동체가 갖추어야할 다섯 가지 덕목의 디딤돌을 놓습니다. 그는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2)라고 하셨습니다. 이 요소들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평안에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3)이라는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이 요소들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① 겸손(謙遜) : 헬라 문화권에서 겸손은 하나의 악덕으로서 노예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자만과 교만의 반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곧 겸손의 모델이십니다. 빌립보서 2장 3절에서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소개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겸손이란 그리스도를 첫 자리에 모시고, 다른 사람들을 두 번째 자리에 놓고, 자신은 맨 뒷자리로 물러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육신 하셨고, 지상 사역에 정확히 낮은 태도가 수반되었습니다(빌립보서 2:5-8).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마태복음 11:29)하며,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려’ 오셨습니다(마가복음 10:45).

② 온유(溫柔) : 복종된 권력, 현명한 주인의 통제 아래 권력입니다. 어떤 힘이 올바른 일을 위해서 길들여지고 사용될 때 온유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복종함으로 비로소 온유함이라는 인격적인 성도의 자질을 형성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온유한 사람들은 남에게 가혹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고 싸우지 않으며, 매사를 승자독식의 경쟁의식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반대로 그들은 다른 사람의 필요와 감정을 배려합니다. 온유가 있어야 날카로운 성격들이 부드러워져 가까이 오는 사람들이 상처를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한 표현에서 보듯 겸손과 온유는 일심동체입니다. 겸손이 마음의 태도라면 온유는 겸손한 자세가 외모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교회 안에 모든 사람들도 겸손과 온유로 힘의 균형을 이룬다면 사실상 모든 충돌이 사라질 것입니다.

③ 오래참음(忍耐) : 죄인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로마서 2:4,9:22; 베드로전서 3:20; 베드로후서 3:15). 고난 중에서도 끝까지 참기를 포기하지 않는 정신입니다(야고보서 5:10). 어떤 잘못된 것에 앙갚음하지 않는 자제력 입니다. 복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복수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나온 덕목 중에서 인내가 가장 어렵습니다. 그래서 가장 힘든 방식으로 습득되기 때문입니다. ‘인내’란 겸손과 온유를 구사하되 실망과 좌절과 노골적 반감을 주는 사람들 속에서 참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해 일체의 오래 참음의 모범을 보이셨던 것처럼, 우리도 오래 참음의 덕을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인내가 있어야만 모두가 실수하면서 서로 다른 모습을 용납하고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추슬러 끊임없는 영적 성장의 멀고 험한 과정에 임할 수 있습니다.

④ 용납(容納) : 겸손과 온유가 짝을 이루듯이 인내와 용납도 서로 짝을 이룹니다. 인내는 모든 상황을 받아드릴 수 있게 하지만, 용납은 상대방은 자기에게 맞춰 바꾸려는 의도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인내하는 사람은 용서와 이해와 동정을 베풉니다. 모든 사람들을 은혜로 대하며, 그들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되 다른 방식과 다른 속도로 자라가게 이해줍니다. 물론 바울의 의도는 죄, 악, 부도덕 그리고 악행을 용납하라는 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풀라는 것이고, 그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우리의 생각과 다르더라도 그것을 허용하라는 것입니다.

⑤ 사랑 : 연합으로 가는 결정적인 단계는 ‘사랑’입니다. 즉, ‘아가페’,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는 ‘무조건적 사랑’입니다. 앞에 네 가지 덕목은 진정한 사랑의 여러 가지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 가운데서’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합니다.

이처럼 다섯 가지 덕목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함께 하나가 되도록 인도합니다. 성도들은 스스로 하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한 새 사람’으로 창조하신 것을 간직하고 지켜야 합니다(에베소서 2:15-16). 그들은 ‘평안’으로 이루어지는 하나 됨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겸손한 자세로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섬겨야 합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하나를 이루는 방법에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자신의 주장을 할 수 있지만, 너무 강하게 주장하면 조화가 깨진다는 말입니다. 전체의 화합을 위해서 서로 겸손하게 섬겨애 합니다. 반대로 너무 무관심하면 힘을 잃어버립니다.

⑶ 힘써 지켜야할 하나 됨(3)

운동선수가 트랙에서 열심히 달리다보면 목적지가 나오듯이, 지속적으로 다섯 가지 덕목을 실천하게 되면, 최종적인 목적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3)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다섯 가지 덕목으로 부르심의 목적과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면, 성령으로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공동체를 위해 하나가 된 것을 힘써야 합니다. 이곳에서 성 프란체스코의 ‘평화의 기도’라는 시가 생각이 납니다.

평화의 기도

오 주여!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여 주십시요.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십시요.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하나 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에게 하나되게 하신 것을 최선을 다해 하나를 지켜간 것입니다. ‘성도’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이미 하나 되게 하신 만큼 능력도 주셨습니다.

서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이 하나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공동체가 하나 됨을 유지하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도들이 자기의 주장을 하는 것은 모두 다 맞고 서로 틀린 것이 하나도 없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서로의 주장에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겸손과 오래 참음으로 서로 용납’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은 ‘평안’으로 이루어지는 ‘매는 줄을 통해’서 하나 됨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서로 다른 점이 있더라도 서로를 사랑함으로 깊이 참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평안입니다.

 

하나 되어 가야할 이유(4-6)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입니다. 몸은 한 부분이 부족하면 전체에 불편한 영향을 줍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 부족한 한 사람이 있으면 모두가 한 마음으로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부족한 형제라도 자기처럼 사랑해서 세워주어야 합니다. 절대로 분열은 하나님의 영이 아닙니다.

4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주도 한 분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6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4-6)

바울은 ‘교회의 하나 됨’은 성도들의 믿음의 행동에서 가장 근본입니다. 교회의 본질을 설명하면서 하나를 의미하는 ‘한’이란 단어를 일곱 가지 반복해서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성도는 한 소망, 즉 장차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소망을 품고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를 유지해야할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은 한 주를 섬기며 하나의 믿음으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바울은 삼위일체의 조화로운 하나 됨을 세 인격을 중심으로 세 가지 요소로 소개하며 권고합니다.

⑴ 성령의 하나(4)

바울은 먼저 성령 하나님을 통해 하나를 지켜갈 것을 설명입니다. 삼위일체 순서로 하면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한데, 이곳에서는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본문에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4)고 하십니다. ‘한 몸’은 보편적인 교회, 곧 모든 믿는 자들을 가리킵니다(1:23;2:16;3:6). 그리고 ‘한 성령’이란 그 교회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입니다(에베소서 2;22).

무엇보다도 성도들은 성령이 한 분인 것처럼 한 소망 안에서 구원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과 함께할 그들의 미래에 대한 공통된 소망(참고 베드로전서 1:3; 3:15)과, 그들이 구원으로 부름을 받은 그때에 시작된 확신(에베소서 1:4,18; 2:7; 4:1)을 가졌음을 나타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가 되어야 할 이유는 ‘한 몸’(4)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몸을 헤치는 일에 각별히 주의하고 보호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공동체를 위한 믿음으로 살아갈 지침입니다.

⑵ 주(성자)도 하나(5)

다음으로 바울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주도 한 분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라고 소개합니다. ‘한 주’는 그리스도, 즉 교회의 머리를 말합니다(에베소서 1:22-23; 골로새서 1:18). 먼저 다른 주인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한 믿음’은 객관적인 믿음, 즉 그리스도로 인해 믿어지는 믿음의 본체가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주관적인 믿음을 말합니다. 또한 ‘한 세례’는 물세례, 곧 내적 실재의 외적 상징을 가리킬 수도 있고, 믿는 자가 그리스도와 그의 죽음과 동일 시 됨을 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로마서 6:1-11; 갈라디아서 3:27).

모든 성도들이 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었고, 같은 성령을 선물로 받았고, 같은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리로서 교회는 한 몸입니다. 몸은 여러 기관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한 몸인 것입니다. 그래서 몸은 한 부분이 아프면 전체가 아픈 것처럼, 교회 공동체도 그런 모습입니다. 성도들은 교회 안에서 서로 세워주어야 합니다.

⑶ 하나님(성부)도 하나(6)

이제 바울은 성부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라고 가르칩니다. 만유(萬有), 만물의 회복이 하나님의 구속사의 마지막 정점입니다. 특히 ‘만유’를 4중 사용은 평범한 ‘모든 인류’를 의미한 것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모든 믿는 자들과의 관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믿는 자의 아버지이십니다. 믿는 자들은 그분의 자녀들입니다(요한복음 1:12; 갈라디아 3:26).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통치자로 그들 ‘위에’ 계십니다. 특히 이방인에게는 다양한 신들이 많지만, 하나님께서는 오직 한 분이라는 점에서 강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세상 만물 위에 계시면서 만물을 다스려 하나님 안에서 통일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 된 것처럼 모든 성도들도 하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그래서 분열시키는 일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일과 같습니다. 만물을 통일시키려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 역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십자가를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 생명의 근원이시오 본질이신 하나님께서는 세 인격을 가지고 있으시면서도 한 분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타락 전에 인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에덴동산으로부터 추방당했으며 인간과 인간, 인간과 피조물 사이가 분열되었습니다. 구원은 개인으로부터 출발하여 깨어지고 분열된 것들을 다시 연합시키고 회복시키며 막힌 담을(에베소서 2:14) 허무는 하나 됨의 작업으로 발전해 나갑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계속적으로 교회의 몸에 이방인들을 접붙임으로써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같이 누리게 해야 하며, 만유까지 이 생명의 물줄기가 흘러가도록 해야 합니다(이사야 11:6-9)


사도 바울은 이방인이 대부분인 에베소 교회에게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부르심을 입은 이방인들은 유대인처럼 손색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고 성장시키기 위해, 각 성도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은사를 통해 교회가 세워지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당신을 통해 그리스도의 교회가 항상 하나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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